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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업유도 청문회] 초점중계

    조폐공사 파업유도의혹 조사특위 청문회 마지막날인 3일 여야 의원들은 막판 진상규명을 위해 당시 진형구(秦炯九)대검공안부장과 강희복(姜熙復)조폐공사사장,구충일(具忠一)노조위원장 등을 상대로 열띤 대질신문을 벌였다.특히 이날 여당 의원들은 강전사장과 진전부장의 ‘공동 정범’ 가능성을 집중제기,눈길을 끌었다. ●여야 의원들은 비유를 섞어가며 나름대로 사건의 정의를 내렸다.자민련 조영재(趙永載)의원은 “이번 사건은 기획예산위 연출,강희복 주연,진형구 조연의 한편의 폭력물”이라고 말했다.국민회의 천정배(千正培)의원은 “진전부장의 ‘독창’이 아니라 ‘진·강’의 이중창”이라고 밝혔다.이에 한나라당 박원홍(朴源弘)의원은 “이중창이 아니라 청와대와 검찰까지 개입한 ‘합창’”이라고 맞받았다. ●대질신문에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언질이 있었다”는 식의 모호한 답변을 반복하던 강전사장이 여야 의원에게 호된 질책을 당했다.한나라당 서훈(徐勳)의원 등은 “강전사장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에 빠진다”며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쓰는데 왜 증인의 말만 유독 헷갈리냐”고 질책했다. ●한나라당 김문수(金文洙)의원은 청문회 시작전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청문회를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은폐하는 조직적인 세력이 있다”며 “지난달 25일 기관보고에 불참하고 자료제출을 거부한 박순용(朴舜用)검찰총장을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의원이 10여분간 고발장 내용을 막무가내로 읽어내려가자 여당 의원들은 “당장 퇴장시키라”며 소리쳤다. ●‘윗선’개입 여부를 밝혀줄 핵심인물인 진·강 두 증인의 답변은 여전히평행선을 달렸다. 강전사장은 “지난해 9월 중순 진전부장을 만났을 때 ‘직장폐쇄 조치를 풀고 구조조정을 하라.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파업은 불법이므로 즉시 제압해 주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진전부장의 압력설(說)을 재확인했다. 이에 진전부장은 “임금협상 관련 파업은 합법이고,구조조정 반대로 인한파업은 불법이라는 법률자문을 해줬을 뿐”이라는 종전 입장을 되풀이했다. 김성수기자 sskim@
  • [파업유도 청문회] 이모저모

    2일 국회 청문회에서도 여야간 신경전이 치열했다.특히 여야는 현 청와대경제수석으로 조폐공사 사태 당시 노동장관을 지낸 이기호(李起浩)증인을 둘러싸고 열띤 공방전을 벌였다. ■야당의원들은 이전장관을 상대로 현 정권의 노동정책을 강도높게 비판했다.한나라당 의원들은 “민노총의 노동관계법개정 반대 총파업이 있었던 97년당시 구속 노동자는 46명이었으나 현 정부 출범 후인 98년 구속 노동자는 219명으로 5배에 가깝다”고 지적했다.이에 이전장관은 “지난해 구속 노동자가운데 현재는 거의 다 석방되고 16명만 남았다”며 “ILO나 OECD 등에서 우리나라 근로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어느때보다 향상됐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나라당 서훈(徐勳)의원은 이전장관을 상대로 “나라망친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사람이 현 정부에서 어떻게 경제수석을 맡을 수 있는가”라며 ‘야유성’질문을 퍼붓기도 했다. ■이날 청문회에서도 여야의원간 고성이 끊이지 않았다.야당의원들이 이전장관의 답변 태도를 문제삼으면서 소동이 일었다.한나라당김문수(金文洙)의원은 “증인이 국회에서 강연하듯이 오만한 태도로 답변하고 있다”며 이전장관의 답변을 저지했다.이에 국민회의 박광태(朴光泰)의원 등은 “파업유도를따지자면 제대로 따져야지 답변도 못하게 하느냐”고 거세게 반발했다. ■이날 이전장관이 “조폐공사 퇴직자 1,000여명 가운데 ‘부당 해고’를 이유로 진정서를 제출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고 답변하자 한나라당 김재천(金在千)의원은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국제기구에 진정서가 제출되지 않았다고 김정일이 인권에 신경을 쓴 것이냐”고 따졌다.이에 국민회의 조성준(趙誠俊)의원은 “정부와 노조를 모독하는 발언”이라며 항의했다. 김성수 이지운기자 sskim@
  • [파업유도 청문회] 초점중계

    2일 국회 ‘조폐공사 파업유도 진상조사’ 청문회에서는 주무부처인 노동부의 소극적이고 안일한 대응이 도마에 올랐다.여야 의원들은 이기호(李起浩)당시 노동장관을 상대로 구체적인 경위를 따졌다. 국민회의 방용석(方鏞錫)의원은 “강희복(姜熙復) 전 조폐공사 사장이 기획예산위의 ‘2001년 통폐합’ 방침을 어기고 무리한 조기통폐합을 강행해 실업자를 양산할 우려가 불을 보듯 뻔했는데 실업대책을 책임진 노동부는 어떤 대책을 세웠냐”고 추궁했다. 자민련 이재선(李在善)의원은 “조폐공사 노사분규 과정에서 노동부가 주도적인 권한을 행사했다면 파업유도 사건은 없었을 것”이라고 가세했다. 한나라당 서훈(徐勳)의원은 “노동장관이 사전에 파업유도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같은 당 김문수(金文洙)의원은 “대검 공안합수부의 노사문제 개입으로 노동부가 무력화하고 이전장관은 제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이전장관은 “당시 현대자동차 사태와 금융기관 구조조정 문제로 조폐공사 문제는 깊이알지 못했다”고 시인한뒤 “노동장관 역할을 완벽하게수행하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유감을 표했다.그는 “진형구(秦炯九) 전 대검공안부장의 개인적 발언 파문으로 모처럼 형성된 노사안정이 다시 어려워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피력했다. 이날 야당 의원들은 “당시 노동부 실무진이 조폐공사 노조 관계자에게 ‘(조기 통폐합은)윗선의 지시 사항이다.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며외압 의혹을 거듭 제기했다. 이에 이전장관은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나 시기와 방법은 개별 기업 경영진이 결정했다”며 “(외압 운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이전장관은 “지난해 9월10일 강전사장을 만났을때 노사간원만한 타협을 위해 사쪽에 직장폐쇄 철회를 요청했을 뿐 조기통폐합 관련논의는 전혀 없었다”며 사전 시나리오설을 부인했다. 박찬구기자 ckpark@
  • 조폐공사 파업유도 청문회 이모저모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김태정 전 검찰총장은 다른 증인과는 달리 의원 질문에 공격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다.김 전 총장은 “이렇게 말한다고 뻔뻔스럽게 보지 말라” “화내지 말라” “건방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등으로 운을 뗀 뒤 일사천리식으로 주장을 펴나갔다.의원들의 추궁성 신문에간간이 “일방적으로 질문만하지 말고 답변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기도했다. 일부 야당 의원이 지난달 24일 옷로비청문회에 출석한 부인 연정희(延貞姬)씨 얘기를 거론하며 전방위 공세를 펼치자 간혹 일그러진 표정으로 시선을천장에 고정시키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형배(李炯培)의원 등이 지난 대선 전 ‘DJ비자금수사’와 ‘북풍·옷로비사건’ 등 청문회 의제와 무관한 문제로 김 전 총장을 몰아세우자 여야가 고성을 주고받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야당 의원들의 주장에 국민회의 박광태(朴光泰)의원 등이 “정치발언을 중단하라”며 소리치는 등 설전이 벌어져 증인신문이 20여분간 중단됐다. 김 전 총장은 이날 논란이 됐던 공안대책협의회를 적극 두둔했다.김 전 총장은 “공대협은 검찰이 독자적 결정을 내리지 않기 위해 내가 희망해 만들었다”며 “꼭 필요는 없지만 법령에 근거를 얻었고 예산도 따냈으며 이를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동안 세풍과 야당 의원 사정(司正) 등의 과정에서 김 전 총장에게 쌓인 감정을 풀려는 듯 한풀이성 질문을 퍼부었다.서훈(徐勳)의원은 “YS때는 고향이 부산이라고 했다가 이 정권 들어 고향이 장흥이라고 했다는데 출세를 위해서는 고향도 바꾸냐”고 몰아세웠다. 김성수 이지운기자 sskim@
  • 조폐공사 파업유도 청문회-초점 중계

    31일 국회의 조폐공사 파업유도청문회에서는 김태정(金泰政) 당시 검찰총장의 개입 의혹과 책임론이 도마에 올랐다.여야 의원들은 ‘숨은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김 전 총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나 김 전 총장은 사전 보고설이나 개입 의혹 등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그러면서 “재판결과가 진실을 밝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총장의 증언으로 당시 진형구(秦炯九)대검공안부장,강희복(姜熙復)조폐공사사장에 이어 ‘핵심 3인방’의 증인신문이 일단락됐지만 청문회는 당초 검찰 수사결과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날 신문은 지난해 10월13일 김 전 총장이 진 전 부장에게서 조폐공사건(件)으로 ‘특별한’ 보고를 받았느냐에서부터 논란이 일었다.파업유도사건이 김 전 총장 등 검찰의 조직적 개입으로 일어났다는 가설과 직결된 대목이다. 국민회의 조성준(趙誠俊)·천정배(千正培)의원 등은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진 전 부장이 조폐공사 파업유도 관련 보고를 했을 때 김 전 총장이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잘 알아 듣지 못했다’고 돼 있다”며 김 전총장이 사전보고를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김 전 총장은 “검찰총장이 아무리 엉터리라도 범죄모의를 보고받고가만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김 전 총장은 특히 “공기업구조조정의 첫 단추로서 조폐공사사태를 ‘합법 보장,불법 필벌(必罰)’이라는 파업대처원칙에 따라 잘 풀어나가야 한다는 소신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라며 파업유도연루설에 쐐기를 박았다. 김 전 총장의 책임론도 제기됐다.한나라당 안상수(安商守)의원은 “참모(진 전 부장)만 알고 지휘관(김 전 총장)이 모르는 사건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다.같은당 서훈(徐勳)의원은 “김 전 총장은 진 전 부장의 업무방해죄,직권남용죄,제3자개입금지 위반의 공동정범”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김 전 총장은 “진 전 부장이 죄를 지었다고 상급자인 총장이 당연히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연좌제 발상”이라는 논리로 공세를 피했다.김 전 총장은 당시 공안대책협의회의 월권 의혹에도 “정책집행 과정에서 관련 부처간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라며 “의견 조율과 협의 기능에 그쳤다”고 해명했다. 박찬구기자 ckpark@
  • 「조폐공사 파업유도 청문회」 이모저모

    ‘파업유도’청문회 이틀째인 27일 국회 국정조사특위는 진형구(秦炯九)전대검공안부장을 집중추궁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답답해진 의원들은 ‘용기있는 사람’ ‘왕따’ 운운으로 감정을 자극하며 새로운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진전부장은 시종일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진전부장은 의원들의 질문에 준비한 메모노트를 참고하거나 변호인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답변에 신중을 기했다.진전부장의 답변속도가 늦자 일부 의원들은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며 답변을 재촉하기도 했다. 의원들은 진전부장이 시종일관 파업유도 협의사실을 부인하자 ‘당근’을사용했다.자민련 조영재(趙永載)의원은 “진부장이 조직을 위해 몸과 마음을 희생한 것은 훌륭한 용기”라고 추켜세웠다.또 “직무상 비밀엄수 의무를지키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형사처벌이 아닌 징계사유에 해당된다”며 진부장을 두둔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박원홍(朴源弘)의원이 파문의 발단이 된 ‘폭탄주’ 제조법을 상세히 설명하자 진전부장은 “양주가 독하니까 맥주에 섞어 마신다”고 답하기도 했다.주량을 묻자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술을 많이 먹어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며 문제 발언당시 술이 많이 취해 있지않았다고 항변했다.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여야 의원들간 설전이 벌어졌다.한나라당서훈(徐勳)의원이 “관련자 39명 가운데 15명이 특정지역출신이고 비호남출신인 진전부장이 ‘왕따’를 당해 구속됐다”며 의혹을 제기하자 여당 의원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며 강력 항의했다. 박준석 주현진기자 pjs@
  • 조폐공사 파업유도 청문회-초점 중계/파업유도 누가했나

    26일 국회 조폐공사 파업유도 청문회에서는 파업유도 과정에서 ‘윗선’의개입이 있었는지를 놓고 여야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여야 의원들은 첫 증인으로 출석한 강희복(姜熙復)전조폐공사 사장을 상대로 조폐공사 파업 유도가 진형구(秦炯九)전대검공안부장의 ‘1인극’이었는지,상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여당측은 조폐창 조기통폐합은 진전부장과 강전사장의 커넥션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이며 상부기관의 개입은 없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했다.조폐공사의 구조조정은 정부가 93년부터 추진해 오던 계획이라는 점도 강조했다.국민회의 천정배(千正培)의원은 “당시 강사장은 인건비 50% 절감 방안에 대해노사합의가 이뤄지지 못하면 조폐창 조기통폐합을 실현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 아니냐”며 조기통폐합이 강전사장의 ‘결단’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질문을 풀어나갔다. 같은 당 박광태(朴光泰)의원도 “98년 9월 강사장이 노조 파업에 대응해 직장폐쇄 결정을 내렸을 때 진부장은 직장폐쇄를 풀고 임금협상 대신 구조조정을 추진하라고 강사장에게 지시했다”면서 “진부장은 임금협상 관련 파업과 달리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파업은 불법인 만큼 노조가 이를 이유로 파업에들어가면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혀 조기통폐합이 ‘진­강’선에서 이루어졌음을 역설했다. 반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조폐공사의 조기통폐합이 ‘진­강’ 2인의 합작품이 아니라 당시 기획예산위·검찰·청와대 등 ‘윗선’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의혹이 있다고 반박했다.김재천(金在千)의원은 “지난해 조폐공사 노사협력부 직원이 노사동향 관련 팩스를 수차례 국정원에 보냈고 대전지검과 대검등에도 직장폐쇄 관련 정보를 팩스로 보냈다”며 상부기관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서훈(徐勳)의원도 “조폐공사 통폐합은 강사장의 단독결심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의해 조정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강전사장은 “보도자료 배포에 앞서 관련 기관에 팩스를 보냈을 뿐이며 통폐합 과정에 외부기관이 개입했다는 설은 사실무근”이라고 답변했다. 김성수기자 sskim@
  • 조폐公 國調 이모저모

    19일 대전 한국조폐공사에서 진행된 국회 ‘조폐공사 파업유도 국정조사특위’(위원장 金台植)의 조폐공사 본사 및 조폐창 현장조사는 조폐창 통폐합의 합법성을 집중적으로 캐물으며 진지하게 진행됐다. 이날 오전 사측에 대한 질의가 시작되자 국조특위 위원들은 여야 가릴 것없이 조폐창 통폐합의 부적합성을 지적하고 부당해고직원의 원직복직,옥천조폐창의 원상복구 등을 한 목소리로 촉구했다. 위원들은 옥천조폐창 이전을 강행한 과정,파업돌입 한 시간만에 직장폐쇄조치 등을 결정한 경위,조폐창 통합 보고서 작성경위 등을 집중 추궁했다. 특히 일부 야당의원들은 “이번 사건이 진형구(秦炯九) 전 대검공안부장 1인의 단독 범행이 아닌 정부의 조직적인 개입에 의한 것” 이라고 주장 했다. 한나라당 서훈(徐勳) 의원은 “경산창에 가보니 지면이 물에 잠기는 등 작업환경이 엉망인데다 원래 직원을 해고하고 임시직을 고용,산업재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통폐합의 부적절성을 지적했다. 같은 당 김영선(金暎宣) 의원은 “경산창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우수한옥천창을 왜 이전시켜야 했느냐” 며 조폐창 통폐합 이후 경산창의 시설보완비를 서류로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국민회의 방용석(方鏞錫) 의원은 “원자재 공급지로부터 옥천·경산·부여까지의 물류수송 거리와 비용을 제출해달라”며 “조폐창 통합 뒤 양승조 이사의 이름을 딴 승조물류센터는 어떻게 조성된 것이냐”며 통폐합이 고의적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회의 조성준(趙誠俊) 의원은 조폐창 통폐합 보고서를 낸 책임자를 불러보고서 작성경위 등을 따졌다. 위원들은 질의때마다 “유인학(柳寅鶴) 사장은 신임이라 잘 모른다”며 유사장을 ‘배려’하기도 했다. 주현진기자 jhj@
  • 前대한매일신보 직원에 서훈

    이번 광복절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는 서훈자 174명 가운데는 구한 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서 근무한 애국지사 1명이 포함돼 있다.구한 말 애국 언론활동과 각종 항일단체에서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받는 이교담(李交담)선생이 그 주인공. 1880년 서울태생인 이선생은 1903년 미국 하와이에서 신민회를 조직,활동하였으며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공립협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또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신문이자 공립협회 기관지인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주필을 맡아 애국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8년경 귀국한 이선생은 당시 국내의 대표적 항일지인 ‘대한매일신보’에 입사,업무직 사원으로 활동하면서 양기탁(梁起鐸)총무 등을 도와 ‘신보’ 발행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특히 이선생은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사의 이완용(李完用) 처단사건의 연루자로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겪기도 했다.당시 연루자 13명 가운데는 이선생과 같이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했던 임치정(林蚩正)선생도포함돼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불기소로 풀려났다.오랜 신병으로 고생하던 이선생은 1936년 4월 서울 삼청동에서 56세로 타계했다.유족으로는 손자 이정원(李貞園·50·인천 거주)씨가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친일파 연구 어디까지 왔나

    해방후 친일파 척결문제는 새국가 건설과 함께 시대적 당위로 당시 우리민족앞에 주어진 양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 문제는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저항과 이들을 비호한 이승만정권의 방해공작으로무산되고 말았다.따라서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이 문제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며 결국 21세기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광복회 주최,본사 후원으로 세종문화회관대회의장에서 열리는 ‘친일파 청산과 민족정기 선양’ 학술대회는 20세기에 발생한 문제를 세기의 끝에서 되짚어 본다는데 의의가 있다. 해방후 반민특위의 활동이 좌절된 이래 한동안 이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공식 거론할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재야사학자 고 임종국씨(89년 작고)만이 평생 이 문제를 천착해왔을 뿐 학계에서조차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방치돼 왔다. 친일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논의는 90년대 이후 우리사회의 민주화 열기와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점차 관련학계·재야연구자들의연구테마로 부각됐다.그러나 이미 당사자 상당수가 사멸한데다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체계적인 연구나 자료수집은 미비한 실정이다.반면 90년대 이후친일파문제가 우리사회 전반에서 공식 논쟁거리로 부각됨에 따라 관련 친일파들의 동상철거·서훈박탈·연구서 출간 등 사회운동 차원에서 큰 성과를거둔 바 있다. 한편 이번 대회는 90년대 이후 고조된 우리사회의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과반성의 연장선상에서,20세기 정리차원에서 시도된 면도 없지 않다.따라서 이번 행사를 통해 친일파 문제를 매듭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인 연구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광복회는 서울대회에 이어 11일부터 23일까지 산하 11개 시·도지부에서 주제발표자들을 중심으로 연사를 초빙,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연구실적 없는 교수 내년부터 승진 못해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은 일부 교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내년부터 교수업적평가제를 도입키로 했다.이에 따라 교육부가 ‘두뇌한국(BK)21’사업을공모하면서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가 철회한 이 제도는 조만간 상당수 대학에서 시행될 전망이다. 25일 교육부에 따르면 서울대는 교수들의 연구업적뿐 아니라 교육 및 봉사활동도 평가하는 총괄평가제를 실시하기로 했다.평가항목은 ▲교육(강의,대학원생 지도) ▲연구·창작활동(단행본 출간,학술지 논문 게재,학술회의 발표,초청강연,전시 및 연주,특허 획득,연구과제 수탁) ▲봉사활동(교내 보직및 위원회 활동,기금 및 시설 유치,정부기관 등 자문) ▲기타(수상,서훈) 등이다. 고려대는 교수를 신규 채용할 때 연봉제를 도입하고,승진 심사때 조교수는2편,부교수는 4편,정교수는 6편 이상의 논문이 과학논문인용색인(SCI)에 게재된 사람만을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정교수는 2년마다 실시하는 호봉승진때도 논문 2편 이상씩을 요구하기로 했다.연구업적이 뛰어난 교수에게는 책임 강의시간을 1주당 3시간으로줄이고 연구인력 추가 지원,특별연구비지급,연구공간 확대 등의 혜택도 주기로 했다. 연세대도 부교수는 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수를 현행 2편 이상에서 10편 이상,정교수는 3편 이상에서 20편 이상으로 각각 높이기로 했다.또 부교수는 3건,정교수는 6건 이상의 산·학 협력을 유치하도록 의무화하기로 했다. 포항공대는 오는 9월 정년보장 교수를 시작으로 내년까지 성과급형 연봉제를 도입하고,2001년부터 학생 강의평가 결과를 승진 등에 반영할 방침이다. 올해부터 연봉제를 실시중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연구업적의 양(정량평가)뿐 아니라 질(정성평가)도 따지기로 했다. 문호영기자 alibaba@
  • ‘2與+α’ 한나라당 반응

    한나라당이 정계개편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여권일각에서 제기되고있는 2여(與)+α의 여권통합론을 ‘야당붕괴’시도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사정정국도 인위적인 정치판 흔들기를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회창(李會昌)총재는 19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여권은 사정(司正)을 통해 공동여당+α로 정계개편을 하려면 다시 큰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이어 “야당을 파괴하려는 의도는 용납할 수 없다”며 “무슨일이 있어도 당을 지키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한나라당은 특히 일부의원들의 탈당에 대비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2여+α 작전이 한나라당 중부권 세력과 TK(대구경북)세력을 겨냥한다고 보기 때문.안택수(安澤秀)대변인은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는 여권에 동조할의원은 한사람도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날 의원총회에서는 여권의 내각제 유보 합의에 대한 대여 공세의 포문이쏟아져 나왔다.김철(金哲)의원은 “공동정권이 원인 무효가 된 만큼 공동정권은 해체하라”고 촉구했다.서훈(徐勳)이사철(李思哲)의원등 일부 강경파초재선의원들은 당내 내각제론자인 일부 중진들을 겨냥,“지금 내각제를 찬성하는 것은 여당의 정략적 술수에 말리는 것으로 내각제 미련을 버리라”며‘집안단속’에 앞장섰다. 최광숙기자 bori@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與野, 총무접촉등 이모저모

    여야는 10일 총무회담을 갖고 국정조사 대상을 놓고 협의했으나 전날에 이어 평행선만 달렸다.공전중이던 204회 임시국회의 정상화를 위해 1차 본회의를 여야 합의로 연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拉箕ト릿? 국민회의 손세일(孫世一)·자민련 강창희(姜昌熙)·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는 오전 11시 25분 국회의장실에서 총무회담을 했으나 30분만에 결렬됐다. 여당은 검찰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의혹사건만 국정조사대상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반면 야당은 △옷로비사건 △‘3·30 재·보선’ 50억원 사용설 △유종근(柳鍾根)전북지사 거액도난사건을 포함한 소위 ‘4대 의혹사건’을 대상으로 하자고 맞섰다.전날의 두 차례에 걸친 총무회담에서 나온 입장을 되풀이한 셈이다.한나라당은 한발 더 나아가 특검제를 도입할 것을 추가로 요구했다.손총무가 새로 당선된 의원과 신임 국무위원들의 인사를 위해 본회의를 열자고 제의한 것을 이총무가 받아들여 본회의가 열렸다. ?擥뽁맛? 여야는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국정조사 대상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총무회담의 연장선이나 마찬가지다.한나라당 서훈(徐勳)의원은 “김대중(金大中)정권 1년 6개월동안 도덕성에 문제가 많았다”며 “내각은 책임지고 총사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 한영애(韓英愛)의원은 “고급옷 사건은 이미 검찰수사가 끝났고 재·보선 50억원 사용설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며 반박했다.자민련 어준선(魚浚善)의원은 “우리들 앞에는 산적한 문제가 많다”고 말해 국정조사 대상을 확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톤으로 말했다. 의사진행 발언에 앞서 ‘6·3 재선거’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안상수(安相洙)의원과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한 국민회의 김태랑(金太郞)의원은 선서를 했다.이회창총재는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일해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한나라당 강경노선 민투委 매파가 주도

    한나라당 강경노선을 주도하는 매파(派)는 누구인가. 당내 민주수호투쟁위원회(민투위) 소속이 주축이다.위원장은 박관용(朴寬用)부총재다.이부영(李富榮)총무를 비롯,김문수(金文洙) 서훈(徐勳) 이재오(李在五) 정형근(鄭亨根)의원 등이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여당의 변칙적 법안통과 이후 당내 매파가 상당히 힘을 얻은 모습이다.이번 초강경 장외투쟁 결정에도 매파의 입김이 깊숙이 작용했다.옥내집회를 계획했던 이회창(李會昌)총재도 매파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장외투쟁으로 선회했다는 후문이다.또 당초 국정보고대회 형식으로 치러질 계획이었지만 매파의주장에 밀려 결국에는 ‘김대중정권 국정파탄 규탄대회’로 수위가 올라갔다. 박부총재는 지난 4일 열린 민투위회의에서 “야당은 장외로 뛰쳐나가야 여당에서 반응이 있다”며 대여 강경투쟁을 주도했다.한 참석자는 “대부분 위원들이 여당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초강경 대응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매파의 목소리는 지난 6일 이총재의 기자회견에서도 드러났다.매파 의원들이 주로 포진하고 있는 민투위에서 이번 회견문 원안을 만들었다고 한다.당관계자는 “당내 한 조직에서 결정된 원안이었고 또 민투위원들의 입장이 워낙 강경해 이총재도 원안을 대부분 수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내 매파의 목소리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박준석기자 pjs@
  • 한국 근-현대사 정리 앞장 선 방선주-양기백박사 서훈 추진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료·문헌발굴과 정리에 평생을 바쳐온 재미 사학자방선주(方善柱·65)박사와 미 의회도서관 동양부 부장을 지낸 양기백(梁基伯·78)박사에게 정부의 서훈을 추진하는 운동이 관련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일고 있다. 건국대 신복룡(정치학과)교수는 “방박사는 한동안 금기사항으로 있던 현대사분야의 자료발굴로 현대사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분이며,양박사는 미국내에서 한국관련 자료수집의 최대공로자”라며 “근.현대사 전공자를 중심으로 두 분이 한국관련 사료발굴·정리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정부의서훈을 건의키로 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움직임은 4월초 국가기록연구원(원장 김학준·인천대 총장) 발족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이 단체는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제정을 계기로 공공기록물의 효율적인 수집·관리·보존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현재 연구원측은 신교수 등과 공동으로 방·양 두 박사에 대한 공적 조서등 구비서류 준비를 마치는 대로 과당국에 서훈 신청을 할 계획이다. 49년 미국 정부의 주선으로 도미한 양박사는 6·25전쟁으로 귀국치 못하고이듬해 8월 미국 의회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방박사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등 미국 내 한국관련 자료발굴의 ‘1등공로자’로 꼽힌다.그동안 방박사는 한국근·현대사 자료 100만 점 이상을발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미국군정·한국전쟁 관련 자료는 이 분야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방박사가 발굴한 자료중일부는 방박사가 객원교수로 있는 한림대 등에서 자료집으로 출간됐다.최근임정80주년기념 학술대회 참가차 귀국했던 방박사는 백범암살 관련 미공개자료를 입수,본사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제공한 바 있다.두 사람은 현재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프로축구 전력 담금질

    프로축구가 새로운 증흥을 꿈꾸며 새해 벽두부터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시즌 출범 16년만에 처음으로 유료 관중 200만명 돌파 등 호황을 맞았던 프로 10개 구단들은 2일 소집된 포항 스틸러스를 시작으로 이번 주말까지 연이어 동계훈련에 돌입,본격적으로 시즌 개막에 대비한다.각 구단들은 올동계훈련 역시 대부분 해외로 나가 실전을 겸한 전력 담금질에 나선다.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가장 먼저 훈련에 들어간 팀은 지난해 정규리그 3위팀 포항.포항은 13일까지 포항에 머물며 컨디션을 점검한 뒤 14일부터 호주전훈에 나설 예정이다.신세대 스타로 떠오른 이동국과 노장 고정운의 콤비플레이를 다듬는 게 전훈의 지상과제다. 90년대 초부터 한국의 전훈지로 각광받고 있는 호주에는 특히 포항 외에도부산 대우,대전 시티즌,전남 드래곤즈,울산 현대 등도 이달 중순쯤 연이어전훈을 떠날 계획이라 한국 팀끼리의 윈터리그도 벌어질 전망이다. 8일부터 훈련에 들어갈 부산은 곧바로 호주로 떠나 다음달 7일까지 머문 뒤 중국으로 향해 아시아클럽컵 극동지역4강전을 치르고 2월 14일쯤 귀국할예정이다.신세대 스트라이커 안정환의 파괴력을 높이는데 중점을 둘 계획. 지난 시즌 김은중의 등장으로 괄목한 성적 향상을 보였던 대전은 오는 10일 소집돼 1월말까지 경남 함안에서 합숙훈련을 한 뒤 2월초 호주나 남미로 해외 전훈을 계획하고있다. 신임 이회택감독이 첫 동계훈련을 지휘하게 될 전남 역시 5일쯤 광양에서훈련을 시작,16일 호주로 출국하며 지난시즌 정규리그 2위에 머문 울산은 6∼9일 사이 금강산,11∼16일 한라산 등반으로 체력을 다진뒤 1월말쯤 2주 일정으로 호주로 떠난다. 지난해 창단 3년만에 정규리규 우승컵을 거머쥔 수원 삼성은 가장 늦은 11일쯤 소집,거제도 등지에서 2월 중순까지 훈련한다는 계획을 잡아놓고 있다.이후 시즌 개막 직전까지는 역시 해외전훈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고 전훈지를 물색할 방침이다. 이밖에 안양 LG는 진주,전북은 2월초 쯤 일본이나 남미 등에서 전력를 점검할 계획이다.송한수 onekor@daehanmail.com
  • 행자부,퇴직자 포상제도 개선싸고 고심

    ◎훈·포상자 99%가 장기근속자 행정자치부가 퇴직공무원에게 훈·포장을 주는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金正吉 행자부장관으로부터 퇴직공무원 등 4,863명에 대한 포상계획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공무원 훈·포장제도를 개선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4,863명 가운데 장기근속을 이유로 훈·포장 등을 받은 퇴직공무원은 4,807명.전체의 98.8%다. 정년단축과 정년 연장폐지로 퇴직자가 급증한 올해에는 훈장 수혜자만 하더라도 지난해의 2,298명보다 1,827명이 증가한 4,215명이었다.게다가 훈·포장과 포창비율을 2:8로 한다는 정부 포상업무지침과 달리 올해 퇴직한 1만8,103명의 경우,58%인 1만400명이 훈·포장을,나머지 42%가 포창을 받는 문제점도 나왔다.특히 내년에는 교원정년 단축에 따라 훈장수여 등 퇴직자 포상이 더 늘 것으로 보인다. 행자부측은 이에 따라 퇴직자 포상제도 개선문제를 검토하기로 했으나 공무원 사회에서는 정년퇴직 기준이 1년 단축된 만큼 훈장 수여기준도 1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반발이 일고 있어 개선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떤가/영예·권위 지키려 심사 엄격/최소 20년 이상 근무자 대상/품행·명망 갖춰야 수훈 가능 프랑스와 일본 등 선진국들은 훈장의 영예와 권위를 유지하기위해 매우 엄격하게 심사 수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국가훈장 레종 도뇌르는 훈장 수여가 개인 뿐아니라 가문의 영예로 여겨질 정도로 명예의 대명사이다. 훈장은 최소한 20년 이상 공직에 근무한 사람 가운데 수여되며 품행과 명망은 또 다른 필수조건이다. 훈장을 받은 사람이 한단계 높은 훈장을 받으려면 5년 이상 지나야 한다.적어도 자동적으로 훈장을 받는 사람은 없다. 훈장 수여사실이 호적에 실리고 사교클럽이나 국가적인 행사에 훈장을 달고 나가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도 이런 엄격함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1년에 봄 가을로 두번만 수여되며 생존자는 70세가 넘어야 받을 수 있다.수여식은 최고의 의전을 거쳐 장중하게 치러진다.비정기적으로 퇴직 관료들에게 수여하는 일은 없다.오직사건이 잇달아 터진 후생성은 97년 서훈을 추천하지 않고 자숙,훈장의 영예를 더럽히지 않기도 했다. 한편 한국의 경우 국내 서훈도 헤플 뿐 아니라 재외동포들에게도 너무 자주,너무 상급의 훈장을 수여해 훈장의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순국선열 기념일(金三雄 칼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웅변가 소대(蘇代)의 글에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木偶人)와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土偶人)의 대화가 전한다. 어느날 목우인이 토우인에게 “너는 어찌 얼굴이 두루뭉수리로 생겼나. 더구나 비가 오면 상판이 모두 풀어져 눈도 코도 분간 못하게 될 것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토우인 껄껄 웃으며 말하되 “나는 네 말대로 비가 많이 오면 얼굴과 몸뚱이가 젖어 모습마저 풀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흙으로 뭉쳤다가 흙으로 풀어져서 이 땅에 있는 것이라 언제고 다시 뭉치면 새 모습으로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웃으면서 반문했다. 토우인 다시 “그래 네 생각에는 네가 제법 눈 코가 똑똑하게 생긴 줄로만 알겠지! 그렇지만 너야말로 큰 물이 지면 물결에 둥둥 떠서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북방으로 갈지 남방으로 갈지, 그래 어디가서 네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냐”하자 목우인은 부끄러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다.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궐기한 의병 독립군 항일지사의 대부분은 토우인같은한국사람들이었다. 목우인처럼 잘나고 영악한 자들은 외세에 영합하거나 앞잡이가 되었다. ○임정의 기념일 제정 뜻 오늘(17일)은 순국선열기념일이다. 이날이 기념일이 된 데는 까닭이 있다. 그러니까 1905년(을사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사실상 송두리째 빼앗고자 이른바 ‘을사조약’을 날조한 날이다. 이날을 기해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시작되고 일제의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어 순국선열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정하면서 ‘결정문’ 을 채택했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자못 번거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을 유루없이 다 알수 없으므로 1년중 1일을 정하야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하는 바이요, 이제 11월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을 전후하야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야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야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것으로 말하면 경술년 8월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을 고하였을 뿐이요, 그 실은 을사년 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인고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측결되던 11월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한 것임”(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의회 의사록) 1895년부텨 1945까지의 50년동안 항일전선에서 순국한 선열은 30만명이 훨씬 넘는다. 의병투쟁 의열투쟁 3·1항쟁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학생운동 지하투쟁과정에서 무명선열 무후선열 및 유후선열과 애국지사를 합친 숫자이다. 이들 중 극소수는 국립묘지의 임정묘역이나 효창동, 수유리 또는 가족묘지 등에 안장되었지만 대부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순국선열 유업 제대로 토우인처럼 조국강산과 이역에서 흙이 되고 넋이 되었다. 정부의 서훈 여부와 관계없이 국권회복전선에서 희생된 모든 순국선열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지난해부터 부활된 이날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19년부터 이날에는 정화수 떠놓고 앞서간 선열을 추념했고 이날만은 찬밥을 먹으면서 국권회복을 다짐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독립한 우리가 각종 기념행사때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정도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순국선열의 유훈이 잊혀지고 유족들이 기한에 떨고 의병기념관, 임정주석기념관 하나 짓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처지가 이날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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