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2002/鄭‘반란’진실 說… 說… 說…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MJ) 대표는 왜 갑자기 ‘노무현 지지’를 거두었을까.대선 투표일을 불과 몇시간 남겨 놓은 18일 밤,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긴박한 대선 현장의 한편에서 벌어진 이 ‘정몽준 파란’이 16대 대선의 최대 최후의 미스터리로 떠올랐다.
정 대표의 노 후보 지지 철회는 민주당뿐 아니라 통합21에도 메가톤급 충격이었다.당직자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이들 중 상당수는 19일까지도 극도의허탈감을 내보였다.이철(李哲) 특보 등 지구당위원장 20명이 반발하며 탈당했고,상당수 당직자들도 정치를 중단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서울 여의도 통합21 당사에는 정 대표를 비난하는 전화가 빗발쳤다.정 대표는 후유증을 몰랐을까.지지 철회가 대선에,노 후보에게,통합21에,그리고 자신에게 어떤결과로 이어질 것인지,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파란이 일기 직전인 18일 저녁 정 대표는 서울 명동과 종로에서 노 후보와 함께 유세를 벌였다.여기서 노 후보가 대북정책과 관련해 정 대표와 합의한 정책내용을 벗어난 주장을 했고,‘차차기대통령’ 관련 발언으로 정 대표의 심기를 건드렸다.주변에선 ‘모멸감’ 등의 용어로 정 대표 심경을 표현했다.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정가 안팎에선 온갖 설들이 나돈다.우선 현대 일가와 재계의 압력설이다.노 후보가 집권했을 때의 불이익을 우려한 재계 유력인사들이 각종 경로로 끊임없이 정 대표에게 노 후보와의 절연을 요구했고,결국 정 대표가 노 후보의 ‘푸대접’을 빌미삼았다는 것이다.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 여권 실세가 개입돼 있고,정 대표가 이런 ‘음모’를 뒤늦게 알고는 등을 돌렸다는 소문도 나돈다.18일 일부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노 후보를 제쳤다는 보고를 정 대표가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심지어 미국 압력설까지 제기된다.노 후보 당선을 원치 않는 미 행정부가 정 대표에게 모종의 압력을 행사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그러나 측근들 얘기는 이와 동떨어져 있다.이달희(李達熙) 비서실장은 여론조사와 관련,“사흘 전부터 정 대표에게 여론조사 동향을 보고했는데,역전됐다는 조사결과는 나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일축했다.여론조사 전문가인김행(金杏) 대변인도 “그런 조사가 있었느냐.”고 반문했다.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 온 재계 압력설은 18일 밤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가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대표에게 정 대표의 지지 철회를 사전에 알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그러나 측근은 “뭘 어떻게 압력을 넣었을지는 모르나 MJ가 이에 굴복했다는 얘기는 너무도 MJ를 모르는 것”이라고 일축했다.다른 배경설에 대해서도 측근들은 “MJ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로 부인했다.
측근들의 말을 종합하면 MJ의 행동은 최근 노 후보와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한 측근은 “노 후보측으로부터 2∼3일전부터 ‘이상신호’가 나타났다.”고 했다.그는 “노 후보가 최근 한 인터넷신문 회견에서 ‘공동정부 구성에 약속한 적 없다.’‘처음엔 선거공조에 생각이 없었다.’는 등 신뢰를 저버리는 듯한 발언을 했고,이에 MJ가 크게 상심했다.”고 말했다.
이상징후는 최근의 공동유세에서도 잇따랐다.측근들은 이구동성으로 노 후보의 태도 변화를 꼽았다.한 측근은 “지난 16일 유세에서부터 노 후보가 대북정책과 관련해 우리와 합의한 틀을 벗어난 발언들을 계속하기에 여러 경로를 통해 자제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측근은 “노 후보가 청중들에게 재벌개혁의 뜻을 밝히면서 곁에 선 정 대표에게 ‘도와줄거냐.’는 식으로 묻는 등 일방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MJ 주변에선 이밖에 사소한 의전문제를 비롯해 노 후보에 대한 크고 작은 불만들을 열거하기도 한다.18일 저녁 종로 유세에서 노 후보가 ‘차차기 대통령’을 언급하면서 추미애 정동영 의원 등을 거명한 것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한 측근은 “MJ는 이런저런 이상징후에도 불구하고 18일 명동 유세 직전 노 후보에게 ‘부부동반으로 자정까지 동대문,남대문 유세에 나서자.’고 제의했을 정도로 노 후보 당선에 의욕을 보였다.”며 “종로 유세에서의 노 후보 행동이 이런 노력들을 일거에 무위에 그치게 했다.”고 말했다.그는 “그동안 여론조사에서 노후보가 앞섰던 것이 화근인 것 같다.”고 했다.당선을 확신한 노 후보가 대선이 임박하자 정 대표를 가볍게 대하기 시작했고,결정적으로 대선 후 국정협력에 대한 묵시적 합의를 털어내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 정 대표의 지지 철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측근은 “정 대표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신의”라며 “최근 노 후보의 달라진 태도를 보고는 ‘합의를 지킬 뜻이 없는 것 같다.’고 판단했고,그런 바탕에서 결별을 결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정 대표는 18일 밤 종로의 음식점에서 당직자들의 의견을 들은 뒤 15분간 별실에서 혼자 고심하다 지지 철회를 결정했다고 한다.이후 음식점과 집에서 잇따라 폭음한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들 말은 결국 노 후보에 대한 불신감으로 귀결된다.한 당직자는 “하루만 참고 기다려 보자며 만류하는 목소리가 많았다.”며 “노 후보 당선이 유력한 마당에 정치적 이득만 생각했다면 국민적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결별을 결심했겠느냐.”고 반문했다.다른 측근은 “아침 자택을 방문했을 때 MJ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더라.”면서 “현란한 정치꾼이 아니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득실을 떠나 신뢰를 문제삼은 선택이라 해도 국민들과의 약속을 저버린 데 대한 비난은 정 대표가 감수해야 할 듯하다.나아가 정치적 입지와 이미지가 크게 타격을 입은 만큼 대선 이후 정국을 헤쳐가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당장 통합21 와해 전망까지 나돈다.
정 대표는 19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 칩거한 채 TV로 노 후보의 당선을 지켜봤다.투표에는 불참했다.김행 대변인은 “국민의 뜻으로 단일후보에 선출된노 후보가 당선돼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지지의사 철회에도 불구하고 정 대표도 같은 마음”이라고 밝혔다.노무현 당선자는 이날 밤 당선소감에서 정 대표와의 공조여부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진경호기자 j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