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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급로 ‘중추’ 청주성 탈환 왜군에 치명타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보급로 ‘중추’ 청주성 탈환 왜군에 치명타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격렬한 상소로 조정 괴롭히던 선비임진왜란 일어나자 의병 모집 격문동지·문생 1700명 곳곳서 모여들어 승장 영규와 청주성 수복에 큰 공금산성으로 진격하다 왜적에 포위“구차하게 살 수 없다” 항전 끝 순절조헌은 과격한 상소를 일삼는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였다. 하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청주성을 탈환하는 큰 승리를 주도했다. 청주성은 부산에서 한양, 의주를 잇는 가장 중요한 보급로에 자리잡았으니 왜군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다. 당시 호남의 초입인 금산성으로 진격하다 왜적에 포위된 상황에서는 ‘죽을지언정 국난이 닥쳤는데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며 북채를 잡고 끝까지 군사를 독려하다 순절했다. 그의 금산성 탈환작전을 두고 무모함의 극치라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조헌을 비롯한 ‘무모한 죽음’이 이어지면서 왜군은 곡창 호남을 포기했고, 나라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른 서인이었다. 그는 격렬한 표현을 담은 상소로 조정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율곡조차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재능은 미치지 못하며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아호는 ‘율곡 정신을 잇는다’는 후율(後栗)이다. 충청도 옥천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지어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공부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했다. 그 흔적인 후율당(後栗堂)은 지금도 남아 있다. 조헌은 선조 22년(158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장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를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疎)로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조정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신들의 목을 베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가 뒤따랐다.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과의 외교를 끊으라는 상소도 거듭했다. 한양으로 올라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의 지부상소(持斧上疏)가 이어지자 선조는 결국 조헌을 함경도 길주에 유배한다. 정치적 주도권을 동인이 잡고 있던 시절이다. 유배는 7개월 만에 풀렸지만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대신들을 꾸짖는 소를 올렸다. 선조는 “조신들을 다 탄핵하고 몇 사람만 찬양하면서 직언(直言)이라 하니 웃을 일”이라면서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정을 경멸하여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니, 다시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함경도 변방 유배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중봉은 청주성을 탈환하고 올린 상소에서도 ‘류성룡이 화친을 주장해 도적을 불러들인 것은 진회보다 심하고, 이산해가 현인(賢人)을 죽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는 이임보와 다름없으며, 김공량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과 다름없다’면서 ‘바라건대 세 사람의 머리를 베어 의순문 밖에 매어 달고, 김수와 이광의 머리도 한강 남쪽 언덕에 매어 다소서’라고 했다. 동인정권 대신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임란 발발 당시 이산해는 영의정, 유성룡은 좌의정이었다. 진회는 중국 남송시대 고종의 재상으로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해 금나라와 굴욕적 화친을 맺게 했다는 인물이다. 이임보는 당 현종시대 재상으로 아첨을 일삼으며 유능한 관리를 배척했고, 같은 시대 양국충은 인사를 문란케 하고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수탈해 ‘안사의 난’을 불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감사 김수는 동래성이 함락되자 도망다녔다는 비판을 받았고, 전라감사 이광은 삼도근왕군의 용인참패 책임자다. 의순문은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중국사신 객관 의순관(義順館)의 정문이다.조헌의 고향은 경기 김포다. 김포시 감정동 옛집 터에는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다. 서원의 가장 높은 곳 중봉을 기리는 사당 문열사(文烈祠)의 한쪽 마당에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도 세워졌다. 그럼에도 옥천이 조헌을 상징하는 고장이 된 것은 보은현감을 지내다 물러난 그가 이웃한 이곳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중봉은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명이니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로 시작하는 격문을 써서 삼도(三道)에 보냈다.금산 칠백의총에는 1603년 세운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先生 一軍 殉義碑)가 있다. 일제가 ‘반시국적 고적’으로 지목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것을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복원했다.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지은 비문은 ‘이때 공이 옥천 시골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했다’고 했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럼에도 동지와 문생이 앞다투어 모여들어 7월 4일 공주에 깃발을 세웠으니 17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조헌은 1571년 홍주향교 교수로 재직했다. 1586년에는 공주향교의 제독관으로 부임했다. 제독관(提督官)은 각 도의 행정 중심지에서 지방유생들의 교육에 관한 일을 맡은 벼슬이다. 공주향교 제독관의 지방유생에 대한 영향력은 주변 고을에 두루 미쳤다. 조정에서는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은 중봉이지만 지역의 사족 사이에서는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봉이 공주에서 봉기한 것도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벗어나 이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지지세력의 중심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주공성군은 방어사 이옥의 관군, 조헌의 의병, 영규의 의승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의비는 ‘공이 청주로 진군해 승장 영규와 8월 1일 성 서문 밖을 두드렸다. 공이 친히 화살과 돌팔매를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고 적었다. 중봉의 당시 전투 흔적은 청주성의 옛터인 중앙공원에 있는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記蹟碑)로 남아 있다. 왜군은 청주성에 빼앗은 군량미를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다. ‘재조번방지’에는 조헌이 이옥에게 쌀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는 마을에 나눠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했지만, 이옥은 “이미 순찰사와 의논해 결정했다.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안 된다”며 곡식을 다 태웠다고 했다.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청주성 전투의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윤선각은 이후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관군이 마음대로 의병에 참가하면 처벌할 것이니 원대복귀하라’고 했다. 결국 중봉 막하의 관군은 흩어지고 700명 의사(義士)만이 남았다. 윤선각은 중봉이 거병하는 단계에서도 청양현감 임순을 옥에 가두어 관군의 의병진 참여를 막기도 했다. 현감이 지휘하는 관군이 의병진에 통째로 가담해 의병장의 지휘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정에는 조헌이 요즘식 표현으로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만큼 이런 인물이 많은 병력을 거느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이 윤선각의 우려였다. 선조도 중봉을 가리켜 간귀(奸鬼)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윤선각은 의병을 이끌고 근왕하겠다는 조헌을 오히려 위태롭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윤선각이 중봉에게 “근왕에 앞서 금산으로 나아가 호서와 호남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한 것도 선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조헌이 기병(起兵)한 다음 선조가 내린 교서에는 ‘내가 밝지 못해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충성스런 목소리를 알지 못했다. 나에게 진언하는 자들 중에 국가 존망의 위기가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실로 깨닫지 못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조헌의 상소가 결과적으로 충언(忠言)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일종의 반성문 성격도 담겨 있는 듯하다. 교서는 청주성 탈환 이전에 작성됐다. 하지만 조헌은 교서를 보지 못하고 금산 전투에 나섰다. 금산 전투의 과정을 되풀이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칠백의총은 의병과 의승이 순절한 자리에 조성됐다. 조헌의 제자들은 전투 나흘 뒤 의병의 유해를 한 봉분 아래 모셨다. 1603년(선조 36)과 1647년(인조 25) 각각 순의비와 사당을 세웠고, 현종은 1663년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조헌은 칠백의총에 묻히지 않았다. 동생 조범이 형의 시신을 거두어 오늘날의 옥천 안남면에 장사 지냈고, 인조 14년(1636) 무덤을 멀지 않은 안남면으로 옮겼다. 대청호를 품은 청정고을이다.
  • 대중교통 요지… 두산위브더제니스 센트럴 원주

    대중교통 요지… 두산위브더제니스 센트럴 원주

    두산건설은 강원 원주 원동 일원에서 ‘두산위브더제니스 센트럴 원주’(조감도)를 분양 중이라고 25일 밝혔다. 단지는 지하 2층~지상 최고 24층, 14개 동, 전용 면적 29~84㎡ 총 1167가구 규모로 조성된다. 원주에는 다양한 공기업들이 자리해 있어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 단지는 한국관광공사,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이 있는 원주혁신도시가 가깝고 인근에 원주시청, 원주세브란스 기독병원 등이 있어 직주근접성이 뛰어나다. 두산위브더제니스 센트럴 원주는 근처에 중앙시장, 중앙로 문화의 거리 등이 있고 AK플라자, 롯데마트 등의 대형 쇼핑시설과 메가박스, 원주세브란스 기독병원, 원주시청 등이 가깝다. 도보로 통학 가능한 거리에 명륜초, 원주여중, 원주중·고 등이 있다.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원주시립중앙도서관 등의 시설도 인접해 교육 환경이 우수하다. 편리한 교통 환경도 갖췄다. 단지는 무실로·서원대로 등 주요 도로와 인접해 있어 지역 내 이동이 용이하다. 특히 대중교통 인프라가 잘 형성돼 있어 원주 전체 지역으로 오가기가 편리하다. 여기에 제2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등의 고속도로 진출입도 수월해 수도권 접근성도 높다.
  •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 의병 규합해 청주성 탈환하다 [서동철 논설의원의 임진왜란열전]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 의병 규합해 청주성 탈환하다 [서동철 논설의원의 임진왜란열전]

     조헌은 과격한 상소를 일삼는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였다. 하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청주성을 탈환하는 큰 승리를 주도했다. 청주성은 부산에서 한양, 의주를 잇는 가장 중요한 보급로에 자리잡았으니 왜군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다. 당시 호남의 초입인 금산성으로 진격하다 왜적에 포위된 상황에서는 ‘죽을지언정 국난이 닥쳤는데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며 북채를 잡고 끝까지 군사를 독려하다 순절했다. 그의 금산성 탈환작전을 두고 무모함의 극치라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조헌을 비롯한 ‘무모한 죽음’이 이어지면서 왜군은 곡창 호남을 포기했고,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른 서인이었다. 그는 격렬한 표현을 담은 상소로 조정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율곡조차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재능은 미치지 못하며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아호는 ‘율곡 정신을 잇는다’는 후율(後栗)이다. 충청도 옥천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지어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공부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했다. 그 흔적인 후율당(後栗堂)은 지금도 남아있다.  조헌은 선조 22년(158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장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를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疎)로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조정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신들의 목을 베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가 뒤따랐다.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과 외교를 끊으라는 상소도 거듭했다. 한양으로 올라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의 지부상소(持斧上疏)가 이어지자 선조는 결국 조헌을 함경도 길주에 유배한다.  정치적 주도권을 동인이 잡고 있던 시절이다. 유배는 7개월 만에 풀렸지만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대신들을 꾸짖는 소를 올렸다. 선조는 “조신들을 다 탄핵하고 몇 사람만 찬양하면서 직언(直言)이라 하니 웃을 일”이라면서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정을 경멸하여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니, 다시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함경도 변방 유배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중봉은 청주성을 탈환하고 올린 상소에서도 ‘류성룡이 화친을 주장해 도적을 불러들인 것은 진회보다 심하고, 이산해가 현인(賢人)을 죽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는 이임보와 다름없으며, 김공량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과 다름없다’면서 ‘바라건대 세 사람의 머리를 베어 의순문 밖에 매어달고, 김수와 이광의 머리도 한강 남쪽 언덕에 매어다소서’라 했다. 동인정권 대신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임란 발발 당시 이산해는 영의정, 유성룡은 좌의정이었다.  진회는 중국 남송시대 고종의 재상으로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해 금 나라와 굴욕적 화친을 맺게 했다는 인물이다. 이임보는 당 현종시대 재상으로 아첨을 일삼으며 유능한 관리를 배척했고, 같은 시대 양국충은 인사를 문란케 하고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수탈해 ‘안사의 난’을 불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감사 김수는 동래성이 함락되자 도망다녔다는 비판을 받았고, 전라감사 이광은 삼도근왕군의 용인참패 책임자다. 의순문은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중국사신 객관 의순관(義順館)의 정문이다. 조헌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다. 김포시 감정동 옛집 터에는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다. 서원의 가장 높은 곳 중봉을 기리는 사당 문열사(文烈祠)의 한쪽 마당에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도 세워졌다. 그럼에도 옥천이 조헌을 상징하는 고장이 된 것은 보은현감을 지내다 물러난 그가 이웃한 이곳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중봉은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명이니 만물이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로 시작하는 격문을 써서 삼도(三道)에 보냈다.  금산 칠백의총에는 1603년 세운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先生 一軍 殉義碑)가 있다. 일제가 ‘반시국적 고적’으로 지목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것을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복원했다.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지은 비문은 ‘이때 공이 옥천 시골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했다’고 했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럼에도 동지와 문생이 앞다투어 모여들어 7월 4일 공주에 깃발을 세웠으니 17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조헌은 1571년 홍주향교 교수로 재직했다. 1586년에는 공주향교의 제독관으로 부임했다. 제독관(提督官)은 각 도의 행정 중심지에서 지방유생들의 교육에 관한 일을 맡은 벼슬이다. 공주향교 제독관의 지방유생에 대한 영향력은 주변 고을에 두루 미쳤다. 조정에서는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은 중봉이지만 지역의 사족 사이에서는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봉이 공주에서 봉기한 것도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벗어나 이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지지세력의 중심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주공성군은 방어사 이옥의 관군, 조헌의 의병, 영규의 의승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의비는 ‘공이 청주로 진군해 승장 영규와 8월 1일 성 서문 밖을 두드렸다. 공이 친히 화살과 돌팔매를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고 적었다. 중봉의 당시 전투 흔적은 청주성의 옛터인 중앙공원에 있는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記蹟碑)로 남아있다.  왜군은 청주성에 빼앗은 군량미를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다. ‘재조번방지’에는 조헌이 이옥에게 쌀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는 마을에 나눠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했지만, 이옥은 “이미 순찰사와 의논해 결정했다.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안된다”며 곡식을 다 태웠다고 했다.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청주성 전투의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윤선각은 이후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관군이 마음대로 의병에 참가하면 처벌할 것이니 원대복귀하라’고 했다. 결국 중봉 막하의 관군은 흩어지고 700명 의사(義士)만이 남았다. 윤선각은 중봉이 거병하는 단계에서도 청양현감 임순을 옥에 가두어 관군의 의병진 참여를 막기도 했다. 현감이 지휘하는 관군이 의병진에 통째로 가담해 의병장의 지휘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정에는 조헌이 요즘식 표현으로 시한폭탄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만큼 이런 인물이 많은 병력을 거느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모른다는 것이 윤선각의 우려였다. 선조도 중봉을 가리켜 간귀(奸鬼)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윤선각은 의병을 이끌고 근왕하겠다는 조헌을 오히려 위태롭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윤선각이 중봉에게 “근왕에 앞서 금산으로 나아가 호서와 호남을 지켜야한다”고 설득한 것도 선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조헌이 기병(起兵)한 다음 선조가 내린 교서에는 ‘내가 밝지 못해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충성스런 목소리를 알지못했다, 나에게 진언하는 자들 중에 국가 존망이 위기가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실로 깨닫지 못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조헌의 상소가 결과적으로 충언(忠言)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일종의 반성문 성격도 담겨있는 듯하다. 교서는 청주성 탈환 이전에 작성됐다. 하지만 조헌은 교서를 보지 못하고 금산 전투에 나섰다.  금산 전투의 과정을 되풀이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칠백의총은 의병과 의승이 순절한 자리에 조성됐다. 조헌의 제자들은 전투 나흘 뒤 의병의 유해를 한 봉분 아래 모셨다. 1603년(선조 36)과 1647년(인조 25) 각각 순의비와 사당을 세웠고, 현종은 1663년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조헌은 칠백의총에 묻히지 않았다. 동생 조범이 형의 시신을 거두어 오늘날의 옥천 안남면에 장사 지냈고, 인조 14년(1636) 무덤을 멀지 않은 안남면으로 옮겼다. 대청호를 품은 청정고을이다.
  • 미디어아트로 만나는 경남 문화유산...양산 통도사, 함양 남계서원

    미디어아트로 만나는 경남 문화유산...양산 통도사, 함양 남계서원

    경남지역 주요 문화유산이 잇따라 미디어 아트를 통한 새로운 방식으로 관광객들을 만난다.경남도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양산 통도사’와 ‘함양 남계서원’에서 새로운 문화유산 활용콘텐츠인 미디어아트를 통해 관광객들에게 세계유산을 감상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24일 밝혔다. 세계유산 미디어아트 사업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가치와 역사·문화·예술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한 문화재청 공모사업으로 최신 미디어 디지털 기술을 세계유산에 접목하는 새로운 문화유산 활용 콘텐츠다. 올해 공모사업에 경남은 ‘양산 통도사의 화엄세계로의 초대’와 ‘함양 남계서원의 빛의 노래, 서원을 밝히다’가 선정됐다. 양산 통도사 미디어아트는 다음달 3일까지 통도사 성보박물관과, 통도사 입구에서 경내로 가는 숲길인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 등에서 열린다. 성보박물관 벽면을 화면으로 이용해 매일 오후 7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2~3차례 삼성반월교, 구룡지, 금강계단 등 통도사의 대표적인 문화재를 창건설화와 엮어 만든 미디어아트를 상영한다. 또 무풍한송로 곳곳에서 디지털 센서를 활용해 사람이 움직이는 데 따라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 3차원 영상 등 다양한 빛 조형물로 화염의 세계를 보여준다. 24일 오후 7시 40분 성보박물관 앞에서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 특별공연이 열린다.함양 남계서원 미디어아트는 오는 30일부터 10월 30일까지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 풍영루와 서원광장에서 펼쳐진다. 서원과 선비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빛의 노래, 서원을 밝히다’라는 제목으로 웅장하고 몰입감 높은 미디어아트를 통해 보여준다. 남계서원 미디어아트는 중심이야기 뿐만 아니라 서원내부를 활용한 미디어 연출, 서원 교육 가치 전달을 위한 실감형 컨텐츠 등 다양한 서브콘덴츠도 보여준다. 한복입고 서원나들이, 청사초롱 달빛야행 등 여러가지 연계프로그램도 마련된다. 박성재 경남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양산 통도사와 함양 남계서원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문화유산 활용 콘텐츠인 미디어아트쇼가 세계문화유산의 보편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문화재청은 그동안 세계유산으로 한정했던 문화유산 미디어아트 공모사업 대상을 2023년 공모사업에서는 전체 문화유산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경남에서는 세계유산등재가 추진중인 ‘함안 말이산고분군(사적)’이 대상사업으로 선정돼 내년 9~10월에 미디어아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 호반건설, 동반성장위와 ESG 우수 중소기업 현판식 개최

    호반건설, 동반성장위와 ESG 우수 중소기업 현판식 개최

    호반건설은 동반성장위원회와 함께 ‘ESG 우수 중소기업’ 현판식을 개최했다고 23일 밝혔다. 호반건설은 지난해 업계 최초로 동반위와 협력사 ESG 지원사업 협약을 체결하고, 협력사 ESG 대응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상생협력기금 1억원을 출연했다. 동반위는 중소기업 ESG 표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현장실사를 통해 ESG 지표 준수율이 우수한 중소기업을 선정했다. 이번에 선정된 호반건설의 우수 중소기업은 경우전기, 에스에프훼미리, 제이앤에스건설, 승일실업, 디지털에어시스템, 대원산업개발, 서원상협 등 7개사다. 선정된 우수기업에는 금융지원, 수출지원, 환경에너지 기술지원 등을 제공한다. 김세준 호반그룹 동반성장팀장은 “앞으로도 호반건설 등 호반그룹은 협력사와의 상생협력과 동반성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신당역 스토커 ‘수오지심’ 몰라… 선현 말씀에 귀 기울여야”

    “신당역 스토커 ‘수오지심’ 몰라… 선현 말씀에 귀 기울여야”

    “신당역 스토킹 살해범도 수오지심을 알았어야 합니다.” 맹자는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수오지심을 이야기했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흉흉한 현대사회를 생각하면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김병일(77) 도산서원 원장은 19일 서울시청에서 연 ‘뜻이 길을 열다: 김병일의 참선비론’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고전에 나타난 인류 스승 선현들의 깨우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21세기에 필요한 선비정신을 이야기했다. 김 원장은 34년간 경제관료로 일하고 퇴직한 후 퇴계 이황에게 매료돼 그의 선비정신을 계승, 확산하는 데 전념해 왔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는 서울신문에 ‘김병일 사람과 향기’란 칼럼을 연재하며 선비정신을 알리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선비정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김 원장은 “요즘은 풍요롭고 편리해졌지만 개인은 불행하고 사회는 반목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면서 “이기심과 물질 만능 풍조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퇴계식 삶을 제안한 이유는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체 가치를 존중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요즘 시대에 선비정신은 어떻게 접목될 수 있을까. 김 원장은 박학(폭넓게 배움), 심문(반드시 묻고 답을 구함), 신사(신중히 생각), 명변(명확하게 판단), 독행(정성껏 실천)의 5단계로 이뤄진 선비의 공부 방법을 통해 창의력과 융합 능력을 키우고, 오륜의 실천을 통해 바른 인성과 공감 능력을 갖춘 인재가 될 것을 당부했다. 아버지가 일찍 별세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통해 대학자가 되고, 남을 배려하는 바른 인성까지 갖춘 퇴계는 선비정신의 모범 사례다. 특히 김 원장은 퇴계가 유교질서가 엄격한 사회에서도 나이가 어린 사람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다가서는 모습을 반복해 강조했다. 사단칠정을 놓고 퇴계와 고봉 기대승이 주고받은 편지는 26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은 두 대학자의 선비정신이 빛난 사례로 꼽힌다. 김 원장은 “반목과 갈등의 근본 원인은 자기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확신하는 데 있다”며 퇴계와 고봉처럼 서로 포용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당부했다. 김 원장은 “많은 사람이 착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은 사람이 바뀌었으면 해서 쓰게 됐다. 선비정신을 일상에서 반드시 실천한다면 선비정신이 우리 문화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옛 문화로서 죽어 있는 선비정신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선비정신이 되기를 기원했다.
  • 10년 넘게 발코니에서 ‘이상행동’…여성 주민만 노렸다

    10년 넘게 발코니에서 ‘이상행동’…여성 주민만 노렸다

    “딸아이가 중학생인데 초등학생 때부터 이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직접 따라와서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 무섭다.” A씨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처음 언뜻 봤을 때는 맞은편 아파트 주민이 그저 바깥 구경을 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남성은 느닷없이 A씨를 향해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고는 속옷을 내리고 자위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아예 알몸으로 발코니에 나와 어김없이 양팔로 하트를 만들고 자기 집으로 오라며 손짓을 하기도 했다. 참다못해 경찰에 신고도 해봤지만 경찰은 집 안에서 벌어진 행위라 개입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16일 앞집 남자가 매일 같이 발코니에 서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탓에 창문을 열지도 못하고 다 가리고 지내야 하는 주민들의 사연을 전했다.증거 영상 보여줘도 ‘모른척’ 이 남성으로 인해 피해를 본 주민은 한둘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여성 주민들만 노렸다. 남성 주민이 보이면 문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제작진은 60대 남성 B씨를 찾아갔다. 20년 가까이 혼자 살고 있다는 B씨는 증거 영상을 보여주자 “이상하네. 이게 뭐지?”라며 시침을 뗐다. 그러면서 자신이 발코니에서 샤워 할 때 누군가가 촬영한 것 같다며 “나를 찍은 거 다 고발할 거다”라고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여성 주민들은 B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피해자 조사는 진행했고 피의자에게는 엄중 경고 조치를 했다”고 밝혔다. 김태경 서원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라며 “이 남성은 상대방이 수치스럽고 불쾌해하는 것을 명백히 알고 성적 수치감을 주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다음은 접촉성 성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결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 이번 추석엔 서울의 산 어때요?

    이번 추석엔 서울의 산 어때요?

    등산하기 좋은 계절이다. 여전히 기승인 코로나를 피해 등산으로 가족 나들이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추석에 가볼 만한 서울의 등산 명소 5곳을 소개한다.▲서울의 대표 명산 북한산 국립공원 서울 북한산 국립공원은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소문 난 서울의 대표 명산이다. 북한산 초입에 지난 1일 서울 도심 등산광센터가 들어섰다. 등산화, 등산복 등 간단한 등산 장비를 대여해 주는 곳이다. 반납된 장비들은 모두 살균과 세탁 작업을 거친다. 아직은 무료로 대여해 주지만 조만간 소정의 이용료를 받을 계획이다. 물품보관함, 샤워실, 탈의실 등은 내국인도 이용할 수 있다. 대여서비스도 조만간 내국인에게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산부터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세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등산관광센터와 연계한 코스는 백운대 코스다. 탐방지원센터에서 백운대까지 약 1.9㎞, 쉬엄쉬엄 걸어도 2시간 정도면 닿는다. 정상의 백운대 바위 위에 서면 도봉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이 이어진다. 쌍문동 백운시장은 북한산 등산 뒤 들르기 좋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촬영지로 유명하다. 주인공인 성기훈(이정재)이 사는 동네, 상우(박해수)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팔도건어물’, ‘오징어게임 체험관’ 등이 있다. 우이신설선 솔밭공원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다.▲산봉우리가 아름다운 도봉산 도봉산은 뾰족 솟은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산이다. 상급자 코스부터 가족 산책 코스까지 난이도별 다양한 코스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대표 코스는 도봉산역에서 출발해 신선대 정상을 다녀오는 코스다. 길이는 약 3.3㎞,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가벼운 트레킹을 원한다면 도봉서원 터에서 천축사까지만 다녀오는 것을 추천한다. 천축사까지는 30~40분 정도 걸린다. 천축사 경내에선 도봉산 3대 암봉 중 하나인 선인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학동 도깨비시장은 도봉구의 대표 재래시장이다. 환경개선 사업을 통해 깔끔하게 재정비돼 주민들이 자주 찾는다. 시장 주변에 식당도 많다.▲청와대와 묶어 다녀오기 좋은 북악산 청와대가 전면 개방되면서 청와대 뒷길로 이어진 북악산의 비공개 지역도 공개됐다. 백악정과 청와대 전망대 등 북악산의 새로운 조망 명소도 만들었다. 청와대 전망대에 서면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 일대까지 한눈에 담긴다. 춘추관 뒷길에서 시작해 곧바로 백악정과 청와대 전망대로 오르는 코스는 시민들이 가벼운 산책을 겸해 자주 찾는 코스다. 칠궁 뒷길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소 힘이 든다. 청와대 뒤 북악산은 수도 서울의 역동적인 건축미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다. 다만 북악산을 오르는 한양도성길은 경사가 다양해 난이도가 꽤 높다. 통인시장은 북악산과 함께 방문하기 좋은 시장이다. 조선시대처럼 엽전을 이용해 시장 곳곳을 돌며 기름떡볶이, 닭꼬치 등을 사 먹을 수 있어 2030세대에게도 인기다.▲아이, 어르신과 함께 가도 좋은 관악산 무장애숲길 관악산은 지난 5월에 신림선 관악산역이 개통되면서 지하철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등산 코스가 됐다. 정상인 연주대를 오르는 코스가 대표적이지만, 무장애숲길을 따라 부담없이 걸을 수도 있다. 관악산 제2광장에서 연주대 코스와 무장애숲길이 갈라진다. 무장애숲길은 데크로 길을 놓아 휠체어나 유모차로도 갈 수 있다. 신림동 신원시장은 도림천 변 상인들이 중심이 돼 형성된 시장이다. 맛집이 많고 경전철 신림선으로 접근하기 좋아 관악산 나들이를 마치고 가족들과 방문하기 좋다. 20년 역사의 탕수육 가게, 육회 전문점 등 120여 개의 상점이 운영 중이다.▲2030세대에게 소문난 사진 명소, 아차산 아차산은 여러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출 및 일몰, 야경 명소로 소문 나면서 2030 세대들이 많이 찾는 산이 됐다. 등산로가 완만해 걷기도 쉬운 편이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휴게소를 지나면 왼쪽 암반 지대를 타고 고구려정으로 바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가파른 바위 능선을 약 10분 정도 오르면 롯데타워가 솟아 있는 한강 일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는 고구려정에 닿는다. 고구려정 뒤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다시 10분만 가면 아차산 최고의 조망 포인트인 아차산 해맞이공원으로 연결된다. 해맞이공원은 고구려정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주변 시야가 탁 트인다. 오후에 등산을 시작해 정상을 찍고 다시 해맞이공원으로 돌아와 전망데크에서 노을과 야경을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아차산 근처 원조 할아버지 손두부는 가성비가 높은 맛집이다. 단돈 4000원에 맛있는 순두부를 맛볼 수 있다. 다소 거리가 있지만 자양동 자양전통시장도 아차산 등산 뒤 찾을 만하다. 옛날 다방 콘셉트의 자양다방, 와인 애호가들의 성지라 불리는 새마을구판장 등이 핫 플레이스다.
  • 조선 3대 누각, 가을밤 한 컷에 빠졌다[이우석의 미시여행]

    조선 3대 누각, 가을밤 한 컷에 빠졌다[이우석의 미시여행]

    태풍 오는 것만 헤아리다 보니 어느덧 가을인 것도 잊었다. 이제 한가위니 가을이 한복판에 온 셈이다. 이름도 중추절(仲秋節) 아닌가. 민족 최대의 명절에 가을의 진한 정취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볕 좋고 산수 좋은 고을, 아리랑의 고장 경남 밀양이다. 마침 민속 명절이고 3년 만에 아리랑대축제도 열린다니 뭔가 궁합이 딱 들어맞는다. 먼저 아리랑부터 알아보자. 아리랑은 한 곡의 민요가 아니라 ‘아리’, ‘아라리’, ‘아라성’, ‘아리랑’ 등의 후렴을 공통점으로 하는 민요군을 뜻한다. 서울, 강원 정선, 경남 밀양, 전남 진도 등 전국적으로 수많은 아리랑이 전해지고 있다. 아리랑은 명실상부한 한민족의 노래이며 음율이다. 거의 ‘애국가급’이다. 세계적으로도 한국 하면 아리랑이다. 아리랑을 한국이나 한국인을 뜻하는 말로 대체해 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건건이 부정하고 있는 북한에서도 아리랑만큼은 함께 부른다.미국 재즈 뮤지션 냇 킹 콜도 1964년 내한공연 중 우리 말로 아리랑을 불렀으며 음원이 존재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의 공식 사단가도 아리랑이다. 1945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한국에 상륙한 7사단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W 캘러웨이(골프채가 아니다) 사단장 시절부터 아리랑 연주곡을 사단가로 썼다. 1971년 한국을 떠나 미국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기지에 정착한 이후에도 이를 유지하고 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듣기만 해도 어깨가 들썩여지는 이 익숙한 노래가 밀양아리랑이다. 현재 국내외 수백곡의 아리랑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가장 흥겨운 리듬을 가진 아리랑이다. 리듬은 세마치 장단이다. 3명의 대장장이가 돌아가며 망치를 치듯 두드려대는 듯 빠르고 흥겹다. 가사도 수줍지 않고 당당하다. 한겨울 귀한 꽃을 보듯 날 좀 봐 달라고 한다. 가사는 흥겹지만 이에 깃든 설화는 슬프고 무섭다. 밀양부사의 아리따운 딸 아랑 윤정옥의 비극(내용은 장화홍련전과 비슷하다)을 밀양아리랑의 탄생과 연관 지은 까닭이다. 밀양아리랑아트센터에 아리랑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밀양은 충절과 저항의 고장이다. 일찌감치 점필재 김종직이 있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단종을 애도한 조의제문을 썼다가 사후 부관참시를 당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라는 영화 대사(‘암살’, 2015)로 유명한 약산 김원봉도 이곳에서 났다. 해방 후 고초를 겪다 월북했던 약산은 끝내 대한민국에서 서훈을 받지 못했지만 명성만큼은 잘 알려져 있다. 약산의 처로 여성독립운동가였던 박차정 역시 밀양시 부북면에 잠들었다. 이뿐 아니다. 의열의 고장답게 수많은 독립투사가가 밀양 출신이다. 공식적으로 애족장 이상 서훈을 받은 이만 38명이다. 김원봉 생가터가 있는 시내 해천 변에서는 무려 26명의 독립투사가 나고 자랐다. 그래서 의열기념관도 이곳에 세워졌다. 아리랑아트센터 바로 옆에 밀양시립박물관과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붙어 있다. 기념관 앞에는 김원봉을 포함, 밀양 출신 독립투사 36인의 흉상이 여지껏 나라를 지키고 있다. 분지로 이뤄진 밀양 땅은 ‘신공항’ 이야기가 나올 만큼 너른 평지와 동쪽으로 기세 좋은 영남알프스 산봉우리를 품었다. 매우 오목한 분지이다 보니 여름철에 무덥기로 소문났다. 요즘 같은 가을이야말로 밀양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때다. 낙동강 곡창지대란 별칭답게 곳곳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예전에도 풍족하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평양감사, 나주목사와 견줄 정도로 인기 높은 지방관직이 밀양부사였다고 하니 당시의 풍요를 짐작할 수 있다.태곳적부터 밀양강이 실어 나른 기름진 흙과 모래는 삼문도와 암새들 등 2개의 하중도(河中島)를 만들어 냈다. 일찌감치 다리가 놓인 삼문도는 여의도처럼 아예 시내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요즘 관광지로 뜨고 있는 암새들(용평동)은 때 묻지 않은 하중도의 생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소를 놓아 길렀다는 암새들은 도심과 가깝지만 분위기와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정원을 갖춘 대형 식당과 오토캠핑장, 메타세쿼이아 숲 등 이곳저곳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 특히 산과 물, 너른 들이 펼쳐진 자연 속에서 일상탈출을 할 수 있는 펜션 암새들171은 밀양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도심에는 조선 3대 누각 중 하나인 밀양 영남루(보물)가 늠름히 버티고 서서 주야경을 모두 책임진다. 밀양도호부 객사로 쓰인 밀양관의 부속 건물로 연회를 열던 곳인데 밀양강 절벽 위에 떡하니 들어앉았다. 널찍한 건물에 높은 기둥이 버티고 서서 웅장하다. 천장이나 기둥 곳곳에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이 숨어 있어 당시 밀양 객사의 위용을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건물은 1844년에 중건한 것이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고 강 건너 둔치에서 영남루를 보는 것도 호사다. 특히 야간에 불을 밝히면 여느 유럽 옛 도시 고성의 야경 못지않다.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와 호젓한 분위기가 일품인 위양못, 너덜겅의 신비로움 가득한 만어산 만어사, 조선 정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월연정,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 분위기의 백송터널과 삼랑진 트윈터널, 한천박물관(한천테마파크) 등 밀양이 가진 관광자원은 알게 모르게 꽤 많다.곧 단풍이 물들면 여름휴양지가 아닌 가을 트레킹을 하기에도 딱이다. 얼음골케이블카가 있어 억새밭을 감상하기에 아주 좋다. 재약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는 작은 규모의 곤돌라 캐빈이 아니다. 50여명이 한번에 타고 오를 수 있는 커다란 삭도 전용차다. 20분마다 운행하는 케이블카는 운행 거리도 꽤 길고 도착하면 전망대까지 도보로 얼마 걸리지 않는 까닭에 강원 속초의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처럼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특히 억새가 절경을 펼치는 늦가을에는 전국적으로 산행객들이 모여드는 코스다. 재약산 사자평과 더불어 연계코스로 인기가 높다. 북향인 천황산 전망대에선 동쪽 울주 쪽으로 1000m가 넘는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 고산연봉이 바라보이며 서쪽으로도 멀리 파도치는 운문산 산봉우리까지 270도 파노라마를 눈에 담을 수 있다. 바로 앞에는 백운산 능선 백호바위가 보인다. 뭔가를 닮았다는 바위를 수도 없이 봤지만 백호 바위는 정말이지 달리는 하얀 호랑이를 빼닮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와 앙증맞게 숨은 비경 호박소를 들러도 좋고, 시간이 된다면 가지산 쇠점골 계곡 트레킹을 즐겨도 좋다. 밀양에서 울주 언양을 가는 옛길 트레일인데 굴곡이 없는 편도 4㎞(호박소주차장~석남터널 앞 도로변 포장마차 휴게소) 정도라 왕복 2시간 30분이면 설렁설렁 다녀올 수 있다.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인데 특히 늦가을에 홍단풍으로 잘 알려져 있다.문화재를 좀더 보고 싶다면 산 반대편 표충사로 직행해도 된다. 재약산 표충사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사당이자, 천년고찰이다. 희한하게도 유불이 함께 사당과 도량을 각각 이루고 있다. 표충사(表忠祠)는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유교사당이며, 통도사의 말사 표충사(表忠寺)는 신라 654년(태종 무열왕 1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재약산 여러 봉우리가 얼싸안은 자리에 얌전히 들어앉은 표충사는 수많은 보물을 품고 있다. 애초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삼층석탑(보물)을 비롯, 청동함은향완(국보), 대광전, 팔상전, 명부전, 만일루, 표충서원 등이 있다. 남쪽 삼랑진 만어사는 표충사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만어산 중턱에 들어앉은 만어사 아래에는 너덜지대가 있다. 수많은 유선형 돌덩어리가 한가득 깔려 있는데 이를 경석, 종석, 또는 만어석이라 한다. 두드리면 쇳덩어리처럼 ‘깡깡’ 맑은 소리가 난다. 더울수록 더욱 얼어붙는다는 얼음골, 땀 흘리는 표충비와 함께 밀양의 3대 신비로 꼽힌다. 부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산에 오른 용왕의 아들을 따라 수많은 물고기 떼가 함께 오르다 그대로 돌이 됐다는 전설이 전한다. 밀양은 부산과 대구, 울산, 경북 등을 연결하는 교통 거점도시다. 철도와 도로가 사통발달 어느 곳이나 연결하니 한가위 귀성 귀경길에 들러 보기 좋다. 아리랑 가락 즐기는 가을 축제를 찾는 것도 꽤 좋은 선택일 듯하다. 놀고먹기연구소장 [여행수첩] 3년 만에 돌아온 밀양아리랑대축제 22~25일 열린다 ●1957년 밀양문화제로 시작한 밀양아리랑대축제가 올해 3년 만에 다시 열린다. ‘아리랑의 선율, 희망의 울림’을 내걸고 열리는 축제에는 밀양아리랑 경연대회와 아리랑 체험, 각종 전통문화체험 등을 진행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 ‘밀양강 오딧세이’는 수천년을 이어 온 밀양의 역사와 밀양 아리랑을 결합해 창작한 판타지 공연으로 밀양의 높은 문화수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오는 22일부터 25일까지 삼문야외강변 공원을 중심으로 열린다.●밀양은 돼지고기로 유명하다. 전국 곳곳에 있는 ‘밀양돼지국밥’ 상호들이 이를 말해 준다. 터미널 옆 밀양돼지국밥은 가마솥에 끓여 토렴식으로 내는 집이다.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국물로 ‘밀양식’의 이름값을 한다. 돼지숯불갈비는 암새골이 잘한다. 고기는 선명한 지방층이 아로새긴 갈비 부위를 쓰며 양념은 그리 달지 않다. 전국구 3대 통닭으로 불리는 장성통닭도 치킨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리는 집이다. 염지를 하지 않은 대신 바로 튀겨 내 바삭한 통닭을 소금에 찍어 먹는 그야말로 ‘옛날식’이다. 표충사 인근 약산가든은 밀양시 향토지정음식점으로 흑염소 불고기, 더덕구이 등을 갖은 산채와 함께 차려 내는 집이다. 된장과 장아찌 등을 직접 만든다고 한다. 밀양은 내륙이지만 한천으로도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야옹 김성율이 밀양에 국내 최초 한천 공장을 세웠다. 박물관과 식당 등을 겸한 한천테마파크가 있다.
  • 두산家 며느리 조수애, 불화설 종식시킨 사진

    두산家 며느리 조수애, 불화설 종식시킨 사진

    JTBC 아나운서 출신 조수애가 재벌가 남편과의 달달한 데이트 사진을 공개했다. 6일 조수애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너무 부끄럽지만 오빠와 커플샷”이라는 글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 속 조수애는 남편 박서원과 카페 데이트를 즐기며 셀카를 남기고 있다. 오랜만에 함께 사진을 남긴 두 부부는 달콤한 분위기로 부부애를 과시하고 있다. 특히 조수애는 여배우 같은 아름답고 청순한 미모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JTBC 아나운서 출신인 조수애는 2018년 두산그룹 장남이자 두산매거진 대표이사인 박서원과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을 품에 안았다. 2020년 8월 인스타그램 게시글 삭제 등의 이유로 불화설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이후 행복한 가족 일상을 공개하며 불화설을 불식시켰다.
  • [서울광장] ‘나쁜 대통령’은 그만 보고 싶다/김성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나쁜 대통령’은 그만 보고 싶다/김성수 논설위원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을 하겠다고 하자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대표적 개헌론자였다. 정치적인 노림수는 있었겠지만, 개헌 제안에 이렇게까지 강도 높게 비난을 퍼부은 건 의외라는 말도 나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인 2016년 10월 이번엔 박 전 대통령이 임기 내 개헌을 들고나왔다. 최순실(최서원), 정유라 사태로 빚어진 파국을 모면하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박 전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공격했다. “참 나쁜 대통령. 국민이 불행하다.” 2022년 9월 난데없이 ‘나쁜 대통령’이 다시 등장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의 입에서다. “윤석열 대통령 참 나쁜 대통령 같다.” 검찰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소환을 통보하자 나온 비난이다. ‘나쁜 대통령’이란 건 정치적 레토릭이다. 어떤 행동을 해야 나쁜 대통령인지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오롯이 주관적인 평가일 뿐이다. ‘나쁜 대통령’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윤 대통령이 ‘인기 없는’ 대통령인 건 팩트다. 데이터가 이를 잘 보여 준다.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6주 연속 20%대의 지지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임기 4개월여가 지난 대통령으로선 보기 드문 일이다. ‘편가르기’에 신물이 나서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윤석열 후보를 선택했던 많은 사람들이 대거 등을 돌린 탓이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데…”라고 실망하며 지지를 접은 사람이 적지 않다. 정책이면 정책, 인사면 인사, 손대는 곳마다 미숙함과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선거에 임박하여 신선함을 무기로 혜성처럼 등장하는 후보를 ‘충동구매’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자 후회하는 식의 행태가 되풀이되어서는 곤란하다.” ‘킹 메이커’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11년 전 저서 ‘대통령의 자격’에서 언급했던 말이 지금 상황을 예견한 듯하다. 실체가 다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진면목을 보여 줄 기회조차 잡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윤 대통령은 집권 4개월 만에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다. 여당의 한심한 ‘집안싸움’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당의 젊은 전 대표는 이젠 대놓고 윤석열 정부를 향해 ‘내부총질’을 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인내심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아무리 정치 문외한이고 팬덤(패거리)이 없는 대통령이라지만 정치적 리더십이 너무 떨어진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는 야당이 대통령을 검찰에 고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각에서는 “정말 대통령을 하고 싶었던 것은 맞냐”는 말까지 나온다. 이제 더이상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윤 대통령은 달라져야 한다. 인사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을 발탁한다고 했지만 ‘사적 채용’ 등 매번 뒷말만 낳았다. ‘아는 사람’과 ‘내 편’만 찾아선 안 된다. 인재풀을 더 넓혀 다양한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 대통령 부인 문제도 서둘러 정리해야 한다. 선거 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말을 믿었던 상당수 국민들은 지금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민주당은 이재명ㆍ김건희 ‘쌍특검’까지 주장한다. “세간에서 (김 여사와의) 공동정부라는 말까지 나온다”는 선까지 갔다. 무조건 사실관계를 부인한다고 넘어갈 상황은 이미 지났다. 윤 대통령은 특별감찰관을 조속히 임명해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시시비비를 명명백백히 가려야 한다. 국민에게 윤 대통령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쳐지는 것도 중요하다. ‘윤핵관’ 등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정치를 이제부터라도 보여 줘야 한다. 대통령실 인적 쇄신은 그 출발점이 돼야 한다. 사상 초유의 복합위기라고 한다. 무능한 대통령도 나쁜 대통령이다.
  • 차은우, 원작 웹툰 로맨스 ‘오늘도 사랑스럽개’ 합류

    차은우, 원작 웹툰 로맨스 ‘오늘도 사랑스럽개’ 합류

    가수 겸 배우 차은우가 드라마 ‘오늘도 사랑스럽개’에 합류한다. 차은우가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오늘도 사랑스럽개’ 주연을 맡아 새달 촬영에 들어간다고 소속사 판타지오가 5일 알렸다. ‘오늘도 사랑스럽개’는 키스를 하면 개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여자와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개를 무서워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차은우는 어릴 적 트라우마로 개를 무서워하는 진서원을 연기한다.  드라마 방영 채널,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국가 존망 위기 어찌 몸 아끼랴”…육순 老시인 구국 순절의 칼[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국가 존망 위기 어찌 몸 아끼랴”…육순 老시인 구국 순절의 칼[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고경명은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바람을 읊고 이슬을 날리며 은하수를 뛰어넘고 안개를 올라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왜란이 일어나고 왜적이 도성을 점령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그에게 의병을 모으기 위한 격문(檄文)을 요청했다. 고경명은 그만큼 대(大)문장가인 동시에 호남을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고경명의 간절하면서 감동적인 격문은 이르는 곳마다 뜻있는 사람들의 궐기를 이끌었다. 60세 노(老)시인은 붓을 쥐던 손에 칼을 잡고 의병장이 됐다. ●간절하고 감동적인 마상격문 ‘임진년 6월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은 삼가 각 도 수령과 백성들과 군인들에게 급히 통고한다.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 국방이 튼튼치 못한 틈을 타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몸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강 한복판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자기 힘이 너무나 보잘것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마상격문(馬上檄文)의 한 대목이다. 고경명은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전라도 21개 지역 61명의 사림 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라좌도 의병장에 추대된다. 6월 1일 한양을 향해 출발한 6000명의 호남의병은 전주에 이르렀을 무렵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판단하고자 훈련을 하며 잠시 머무른다. 고경명이 다시 북상을 시작하면서 6월 24일 지은 것이 마상격문이다. 글자 그대로 ‘말 위에서 지은 격문’이라는 뜻이니 그만큼 급박한 위기상황이었다는 뜻이다. 고경명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하찮은 제 몸만을 아끼려고 하겠느냐’고 마상격문에 적은 그대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왜적을 공격하다 장렬하게 순절한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전라도 광주 제봉산 아래 압보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이다. 이곳에는 고경명과 두 아들 종후와 인후,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을 기리는 포충사(褒忠祠)가 있다. 1601년 세웠고, 1603년 사액됐다. 1865년 대원군의 서원·사우 철폐령에도 장성 필암서원과 함께 살아남았다.포충사는 지금 로제와인색 배롱나무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포충사가 자리잡은 제봉산은 해발고도 165.5m로 높지 않지만 나지막한 곡선이 아름답다. 짐작처럼 제봉이라는 고경명의 아호는 이 고향 마을의 뒷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고경명의 무덤이 있는 전남 장성 영천리의 오동촌 뒷산 역시 제봉산이다. 장성 제봉산은 고경명의 무덤이 옮겨진 뒤 그를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 제봉의 정기가 고경명을 낳고 다시 그의 의기가 장성 제봉에 이식된 셈이다. ●“시 가운데 그림이” 明도 인정한 시인 고경명은 26세이던 1558년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에 이어 홍문관 부교리, 부수찬, 교리에 이르는 5년 동안은 평탄하게 승진했다. 하지만 당대 대표적 외척의 한 사람인 이량이 사림의 탄핵으로 실각하는 과정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량의 전횡을 논죄하는 데 참여한 제봉은 관련 정보를 당사자에게 유출했다는 이유로 울산군수로 좌천되곤 곧 파직됐다. 이 사건으로 고경명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조정에서 쓰임을 받지 못했다. 대신 낙향한 제봉은 호남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산수를 유람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시인으로 크게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역설적으로 향리에서 한가롭게 머물던 시절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봉은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곧바로 종계변무주청사 김계휘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장관(書狀官)이란 외교 문서의 기록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당대 명나라 문신 장응회(莊應會)는 고경명의 시를 두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는 것 같아서 원진(元)·백거이(白居易)·위응물(韋應物)·유우석(劉禹錫)과 비교해 명나라와 조선의 표준을 세울 수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제봉의 시가 명나라에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고경명은 이후 서산군수와 종부시 첨정, 한산군수, 사복시 첨정, 순창군수 등을 역임하고 1591년 동래부사에 임명됐지만 곧 파직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임 동래부사 송상현은 이듬해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에 맞서 영웅적으로 수성전(守城戰)을 벌이다 전사한다.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제봉은 임진년 초 “올해는 장성(將星)이 분명히 보이지 않으니 장수(將帥)가 이롭지 못하겠다”며 국가의 환란을 예고했다. 장성은 북두칠성의 두 번째 별 천선(天璇)을 가리킨다. 고경명이 추성관 추대 직후 지은 격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나는 경전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한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무릇 우리 도내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격문이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감격해 울면서 분연히 궐기했다. 고경명이 개연히 의병장에 올라 늙고 병든 것을 사양치 않으니, 응모하는 자가 날로 모여들었다’고 했다. 고경명은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 보고와 함께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서해 뱃길로 조정에 전달토록 한다. 의병군은 6월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긴 데 이어 27일 은진으로 북상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황간·영동의 왜적이 금산을 점령한 데 이어 장차 곡창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를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휘하 장수들이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을 정벌하자고 다투어 청하자 제봉은 당초 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군사를 돌린다. 의병은 9일 진산을 거쳐 금산성의 초입에서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당시 금산의 왜군은 전주를 공격하려다 이치에서 황진 장군의 조선군에 크게 패하자 물러나 금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금산 전투의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때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튿날 동틀 무렵 고경명은 다시 곽영과 군사를 진격시켜 각각 북문과 서문을 공격했다. 왜적이 군사를 총동원해 약해 보이는 관군진영을 공격하니, 관군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했고 의병도 대오가 무너지며 흩어졌다. 이때 제봉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자 종사관 안영이 자기 말을 타게 하고는 걸어서 따라갔다. 또 다른 종사관 유팽로는 대장이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수정실록은 이들의 최후를 이렇게 적었다. ‘이에 경명이 팽로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했다. 팽로가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하고는 안영과 함께 경명을 에워싸고 있다가 모두 전사했다. 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도 달려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큰아들 고종후는 복수군(復讐軍)을 조직해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해 순절한다. 고경명의 시신은 40일 만에 찾아 금산 산중에 묻었다가 10월 화순 흑토평에 장사지냈고, 1609년 3월 임금이 내린 사패지(賜牌地)인 장성 오동촌 산 아래로 이장했다.
  • 대(大)시인, 붓대신 칼을 들어 국가를 보전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대(大)시인, 붓대신 칼을 들어 국가를 보전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고경명은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이다. 그의 시는 ‘바람을 읊고 이슬을 날리며 은하수를 뛰어넘고 안개를 올라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왜란이 일어나고 왜적이 도성을 점령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그에게 의병을 모으기 위한 격문(檄文)을 요청했다. 고경명은 그만큼 대(大)문장가인 동시에 호남을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고경명의 간절하면서 감동적인 격문은 이르는 곳마다 뜻있는 사람들의 궐기를 이끌었다. 60세 노(老)시인은 붓을 쥐던 손에 칼을 잡고 의병장이 됐다. ‘임진년 6월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은 삼가 각 도 수령과 백성들과 군인들에게 급히 통고한다.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 국방이 튼튼치 못한 틈을 타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몸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강 한복판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자기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마상격문(馬上檄文)의 한 대목이다. 고경명은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전라도 21개 지역 61명의 사림 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라좌도 의병장에 추대된다. 6월 1일 한양을 향해 출발한 6000명의 호남의병은 전주에 이르렀을 무렵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판단하고자 훈련을 하며 잠시 머무른다. 고경명이 다시 북상을 시작하면서 6월 24일 지은 것이 마상격문이다. 글자 그대로 ‘말위에서 지은 격문’이라는 뜻이니 그만큼 급박한 위기상황이었다는 뜻이다. 고경명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하찮은 제 몸만을 아끼려고 하겠느냐’고 마상격문에 적은 그대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왜적을 공격하다 장렬하게 순절한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전라도 광주 제봉산 아래 압보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이다. 이곳에는 고경명과 두 아들 종후와 인후,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을 기리는 포충사(褒忠祠)가 있다. 1601년 세웠고, 1603년 사액됐다. 1865년 대원군의 서원·사우 철폐령에도 장성 필암서원과 함께 살아남았다. 포충사는 지금 로제와인색 배롱나무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포충사가 자리잡은 제봉산은 해발고도 165.5m로 높지 않지만 나지막한 곡선이 아름답다. 짐작처럼 제봉이라는 고경명의 아호는 이 고향마을의 뒷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고경명의 무덤이 있는 전남 장성 영천리의 오동촌 뒷산 역시 제봉산이다. 장성 제봉산은 고경명의 무덤이 옮겨진 뒤 그를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 제봉의 정기가 고경명을 낳고 다시 그의 의기가 장성 제봉에 이식된 셈이다.  고경명은 26세이던 1558년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에 이어 홍문관 부교리, 부수찬, 교리에 이르는 5년동안은 평탄하게 승진했다. 하지만 당대 대표적 외척의 한 사람인 이량이 사림의 탄핵으로 실각하는 과정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량의 전횡을 논죄하는 데 참여한 제봉은 관련 정보를 당사자에게 유출했다는 이유로 울산군수로 좌천되곤 곧 파직됐다. 이 사건으로 고경명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조정에서 쓰임을 받지 못했다. 대신 낙향한 제봉은 호남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산수를 유람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시인으로 크게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역설적으로 향리에서 한가롭게 머물던 시절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봉은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곧바로 종계변무주청사 김계휘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장관(書狀官)이란 외교 문서의 기록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당대 명나라 문신 장응회(莊應會)는 고경명의 시를 두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는 것 같아서 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위응물(韋應物)·유우석(劉禹錫)과 비교해 명나라와 조선의 표준을 세울 수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제봉의 시가 명나라에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고경명은 이후 서산군수와 종부시 첨정, 한산군수, 사복시 첨정, 순창군수 등을 역임하고 1591년 동래부사에 임명됐지만 곧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임 동래부사 송상현은 이듬해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에 맞서 영웅적으로 수성전(守城戰)을 벌이다 전사한다.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제봉은 임진년 초 “올해는 장성(將星)이 분명히 보이지 않으니 장수(將帥)가 이롭지 못하겠다”며 국가의 환란을 예고했다고 한다. 장성은 북두칠성의 두번째 별 천선(天璇)을 가리킨다.고경명이 추성관 추대 직후 지은 격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나는 경전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한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무릇 우리 도내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  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격문이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감격해 울면서 분연히 궐기했다. 고경명이 개연히 의병장에 올라 늙고 병든 것을 사양치 않으니, 응모하는 자가 날로 모여들었다’고 했다. 고경명은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 보고와 함께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서해 뱃길로 조정에 전달토록 한다. 의병군은 6월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긴 데 이어 27일 은진으로 북상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황간·영동의 왜적이 금산을 점령한 데 이어 장차 곡창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를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휘하 장수들이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을 정벌하자고 다투어 청하자 제봉은 당초 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군사를 돌린다. 의병은 9일 진산을 거쳐 금산성의 초입에서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당시 금산의 왜군은 전주를 공격하려다 이치에서 황진 장군의 조선군에 크게 패하자 다시 물러나 금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금산 전투의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때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튿날 동틀 무렵 고경명은 다시 곽영과 군사를 진격시켜 각각 북문과 서문을 공격했다. 왜적이 군사를 총동원해 약해 보이는 관군진영을 공격하니, 관군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했고 의병도 대오가 무너지며 흩어졌다. 이때 제봉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자 종사관 안영이 자기 말을 타게 하고는 걸어서 따라갔다. 또다른 종사관 유팽로는 대장이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수정실록은 이들의 최후를 이렇게 적었다. ‘이에 경명이 팽로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했다. 팽로가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하고는 안영과 함께 경명을 에워싸고 있다가 모두 전사했다. 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도 달려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큰아들 고종후는 복수군(復讐軍)을 조직해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해 순절한다. 고경명의 시신은 40일만에 찾아 금산 산중에 묻었다가 10월 화순 흑토평에 장사지냈고, 1609년 3월 임금이 내린 사패지(賜牌地)인 장성 오동촌 산 아래로 이장했다.
  • 광주시, 민선8기 꿀잼도시 초석 마련

    광주시, 민선8기 꿀잼도시 초석 마련

    내년 문화관광분야 정부예산안 역대 최대…국비 89건 1544억원 광주비엔날레 AI라키비움 구축, 아시아설화·신화 킬러콘텐츠 개발 등 광주시는 2023년 문화예술관광체육분야 정부예산안에 89건 1544억원이 반영되면서 민선8기 핵심사업 추진에 청신호가 켜졌다고 3일 밝혔다. 이는 전년도 정부안과 비교해 40억원을 추가로 확보한 것으로, 정부예산안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문화관광분야 정부예산안에는 광주비엔날레 인공지능(AI) 라키비움 구축, 아시아 예술융복합창작센터 조성, 아시아 설화·신화 킬러콘텐츠 개발 등 신규 사업과 86건의 계속사업비가 포함됐다. 먼저 1995년 출범 후 세계 5대 비엔날레로 도약한 광주비엔날레 작품을 아카이빙하고 상설 전시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반의 온라인 라키비움 데이터베이스 구축비 15억원이 확보됐으며, 지역 문화예술인과 단체들의 소통과 교류, 창작공간으로서 구심점 역할을 수행할 아시아 예술융복합창작센터 조성 설계비 7억원도 확보했다. 또 아시아 설화·신화 킬러콘텐츠 개발비 20억원을 확보해 예술인들의 협력과 교류를 통해 대형 뮤지컬 등 킬러콘텐츠를 제작하고 콘텐츠를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의 문화·관광산업 상품으로 확장 가능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문화산업분야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육성펀드 출자(5호 투자조합) 100억원, 올해 말 개관하는 첨단실감콘텐츠큐브(GCC)의 콘텐츠 인력양성 통합 플랫폼 조성비 40억원, 이스포츠산업 관련 10억원 등이 반영돼 민선 8기 문화산업 투자환경 개선과 기업지원 기반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됐다. 관광분야에서도 월봉서원 문화예술체험복합관 건립사업비 40억원, 서창향토 문화마을 7억5000만원, 예술관광중심도시 육성사업비 18억원, 문화전당 마실길 한바퀴 3억4000만원 등 꿀잼도시 조성을 위한 마중물 예산이 반영됐다. 이 밖에도 2023년 하반기 개관 예정인 한국예술영재교육원 광주캠퍼스 조성사업비 26억원, 유네스코미디어아트 창의벨트 조성사업비 20억원, 사직공원 상설공연장 13억7000만원, 아시아예술정원 조성 17억원, 서구 반다비체육센터 건립비 19 억원, 한국수영진흥센터 건립비 40억원 등 진행 중인 사업들의 마무리 예산도 모두 반영되는 성과를 거뒀다. 김요성 시 문화체육실장은 “9월 이후 시작되는 국회심의 과정에서서 더 많은 사업비를 추가 확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2022 세계유산축전:경북’ 오는 3일 개막…안동·영주 세계유산 6곳서

    ‘2022 세계유산축전:경북’ 오는 3일 개막…안동·영주 세계유산 6곳서

    경북도는 오는 3일부터 25일까지 23일간 안동과 영주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6곳에서 ‘2020 세계유산축전:경북’을 연다고 1일 밝혔다. 세계유산 6곳은 하회마을, 도산서원, 병산서원, 봉정사, 소수서원,부석사다. 세계유산축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세계유산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향유하기 위해 2020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올해 행사는 ‘이동하는 세계유산(World Heritage in Transit)’이라는 주제로 9월 경북, 10월 수원 화성과 제주 순으로 진행된다. 경북 행사는 문화재청, 경북도, 안동시, 영주시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 세계유교 문화재단이 주관한다. 오는 3일 영주 소수서원에서 세계유산 국제콘퍼런스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다. 이 행사는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세계유산, 전통과 현대의 교차’를 주제로 한 기조 강연에 이어,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세션이 마련된다. 같은 날 오후 안동 하회마을에선 플라잉쇼 ‘나는 유교다:더 레알 유교’ 개막공연이 펼쳐진다. 행사 기간 세계유산을 주제로 18개의 전시·공연·체험 프로그램이 선보인다. 하회마을에서는 건축가 승효상 씨가 설계한 ‘세계유산축전 주제관’에서 국내 유수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유산 테마 상설전시가 마련된다. 병산서원에서는 서원에서 머무르며 그 가치를 알아가는 병산서원에서의 3일,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잇는 구곡길을 생방송 라디오와 함께 걷는 도보여행 프로그램 등을 준비한다. 부석사에선 세계적인 안무가 안은미가 ‘부석사 명무전 - 기특기특’을 통해 불교적인 해석을 선보이는 로밍형 공연 및 이태수 작가의 부석(浮石) 조형물을 관람할 수 있다. 도산서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야간 개장한다. 행사 기간 증강현실(AR)을 활용해 모바일로 참여할 수 있는 ‘AR 유산 탐정’, 주말마다 ‘나의 세계유산 답사기’도 운영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안동과 영주 지역의 세계유산 가치와 우수성을 알리는 좋은 기회로 삼아 관광객 유치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북은 우리나라 세계유산 15건 가운데 석굴암과 불국사, 경주역사유적지구, 하회·양동마을, 한국의 산지승원(부석사·봉정사), 한국의 서원(소수·옥산·도산·병산서원) 등 5건 11곳을 보유하고 있다.
  • ‘한국의 서원’ 미디어 전시회…27일부터 안동 병산서원에서

    ‘한국의 서원’ 미디어 전시회…27일부터 안동 병산서원에서

    문화재청과 경북 안동시는 미디어로 만나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특별전시회를 오는 27일부터 30일까지 안동 병산서원에서 개최한다고 26일 밝혔다. ‘서원으로 향하다’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회는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에서 1년간 촬영한 다큐멘터리와 기록 영상을 활용한 미디어 전시, 서원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담은 사진 전시회로 구성된다. 세계유산 VR(가상현실)360 체험과 퍼즐, 컬러링북 등 다양한 체험존도 마련될 예정이다. 병산서원에 이어 다음 달 1일부터 4일까지는 도산서원, 6일부터 12일까지는 대구국제공항에서 전시회가 이어진다. 안동시 관계자는 “세대와 국적을 넘어 누구나 공감하는 세계유산의 문화적 가치를 조명하는 뜻깊은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9년 7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비롯해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9곳이다.
  • 용인 심곡서원서 연못 터·도수로 유적 발굴

    용인 심곡서원서 연못 터·도수로 유적 발굴

    경기 용인시는 문화재청과 공동으로 추진한 수지구 상현동 심곡서원 6차 발굴조사에서 연못 터와 도수로(물을 끌어들이는 길) 등 조선 시대 서원 내 유생들의 휴식공간 유적을 발견했다고 24일 밝혔다. 605년 건립된 심곡서원(사적 제530호)은 조선시대 사림의 상징적 인물인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신위를 봉안한 곳이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시는 지난 5월부터 이달 4일까지 6차 발굴조사를 진행,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정사각형 형태의 연못 터를 발견했다. 조사 결과 이곳에선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연못(방지원도) 형태의 터가 확인됐다. 연못의 외곽은 돌로 쌓여있는데 동편과 서편의 길이가 12.7m로 동일하다. 또 물을 끌어오는 3기의 도수로와 1기의 출수구도 발견됐다. 도수로는 외곽에서 안쪽으로 3차례 이상 개축이 이뤄진 것으로 추측된다. 평기와와 도기류, 자기류 조각 등 유물도 발굴됐다. 기와엔 복합집선문, 창해파문 등 문양이 새겨져있고 자기는 대부분 문양이 없는 백자편이 나왔다. 이번 조사에선 연못터와 별개로 외삼문 남쪽으로 담장렬도 발견됐다. 현재 담장지 서쪽 30cm 떨어진 곳에 지난 1930년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근대 담장지가 확인됐고 약 1m 떨어진 곳에선 폭 40cm의 조선시대 담장지도 확인됐다. 시 관계자는 “고증 자료도 없이 연못의 원위치와 도·출수구 등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며 “이번 조사는 조선 시대 서원 내 유생 휴식 공간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아침 7시에 회사 대표 생일파티…“음식 옮기려 크레인까지 동원”

    아침 7시에 회사 대표 생일파티…“음식 옮기려 크레인까지 동원”

    매각을 앞둔 전남 해남의 중견 조선업체 대한조선에서 대표의 생일파티를 위해 직원들을 대거 투입시키고, 조선소 크레인까지 동원한 사실이 알려졌다. 대한조선은 대우조선해양 산하 기업인 중견 조선업체다. 23일 대한조선 노조, KBS 등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전 7시 대한조선에서는 정 모 대표의 생일파티가 열렸다. 생일파티는 독(dock) 위 건조 중인 선박 선실 식당에서 열렸고, 생산직 등 간부 직원 등이 참석했다. 직원들은 대표의 생일파티를 위해 수일간 배 안을 청소하고, 파티 전날에는 담당이 아닌 부서원들까지 투입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파티 당일엔 20인분의 음식과 물품을 행사장으로 옮기기 위해 조선소 크레인도 동원됐다. 배 바닥에서 선실 식당까지는 약 28m로 건물 10층 높이다. 노조 한 관계자는 “생일 파티를 위해 전날 오후 의장부 관리자들까지 투입돼 땡볕에 달궈진 선내를 치우고 냉방 시설을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새벽부터 생일 파티 음식을 준비한 영양사들은 현장에서 편지까지 읽으며 대표의 생일을 축하했다”면서 “회사 매각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대표 생일 파티는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일자 당사자인 정 대표는 “잘못된 일이었다. 제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 이런 행동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다음부터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사과했다. 한편 대한조선은 2009년 경영 부실로 재무구조 개선(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이후 13년 만에 새 주인을 찾는 매각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 ‘불화설?’ 두산家 며느리 조수애, SNS에 올린 사진

    ‘불화설?’ 두산家 며느리 조수애, SNS에 올린 사진

    아나운서 출신 조수애가 하와이 가족여행 근황을 전했다. 조수애는 17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별다른 코멘트 없이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놀러간 조수애와 아들의 다정한 한때가 담겼다. 앞서 조수애는 자신의 부모님과 아들이 하와이 해변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JTBC 아나운서 출신인 조수애는 2018년 두산그룹 장남이자 두산매거진 대표이사인 박서원과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을 품에 안았다. 2020년 8월 인스타그램 게시글 삭제 등의 이유로 불화설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이후 행복한 가족 일상을 공개하며 불화설을 불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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