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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수경양 징역 10년 선고/서울지법

    ◎「군사상 이익 공여」등 공소사실 모두 인정/함께 방북했던 문 신부엔 8년형 서울 형사지법 합의21부(재판장 황상현부장판사)는 5일 「평양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몰래 다녀온 임수경피고인(22ㆍ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불어과 4년)에게 국가보안법의 특수탈출 및 잠입 등 모두6개죄목을 적용,징역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임피고인과 함께 구속기소된 「정의구현사제단」소속신부 문규현피고인(42)에게는 징역8년에 자격정지8년이 선고됐다. 임피고인은 징역15년,문피고인은 징역10년을 구형 받았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두피고인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피고인들의 밀입북은 우리나라의 법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한편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해 국가의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했으므로 엄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평양축전」에 참가해 북한이 대남적화통일전략을 정당한 것처럼 대외적으로 선전하는데 이용됐을 뿐아니라 남한의 통일논의를 혼란에 빠뜨렸다』고비난했다. 재판부는 또 『임피고인이 북한당국자에게 「전대헙」의 구성과 조직,운동권의 활동 상황 등을 보고한 것은 현대전이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 등에 걸친 총력ㆍ정보전이란 점에 비추어볼때 군사상의 이익을 북한에 제공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지적,군사상이익공여죄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말하는 「순수한 통일의지」는 대한민국의 기본질서를 전복해 북한의 통일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같은 시각은 어떤 명목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두 피고인은 이날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법정에 들어서 가족 등 70여명의 방청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고를 받았다. 한편 피고인 가족들과 변호인단은 이날 공판이 끝난뒤 『재판부가 특수탈출ㆍ잠입과 지령수수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북한에 동조했다고 판시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곧바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사제단,비난성명 이날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임수경양과 문규현신부의 1심공판은 자유변론의 권리를 침해하고 공개재판의 원칙과 법의 형평을 잃은 부당한 재판』이라는 성명을 냈다.
  • 임종석군 기소

    서울지검 공안2부 이종왕검사는 3일 임수경양을 「평양축전」에 보낸 일 등으로 구속된 「전대협」의장 임종석군(23ㆍ한양대 무기재료과4년)을 국가보안법의 특수탈출잠입죄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화염병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 등 8개 죄목으로 서울형사지법에 기소했다.
  • “김일성왕조 멸망은 시간문제”/영 카터교수,파이낸셜타임스 기고

    ◎루마니아사태는 평양정권에 대한 경종/붕괴는 필연적… 「언제 어떻게」가 주목거리 영국 리즈대학의 국제정치학교수인 아이단 포스터 카터씨는 29일 동독과 루마니아에서의 혁명적 변화가 북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북한 공산정권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김일성에 대한 동구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같이 내다보았다. 포스터 카터교수는 리즈대학에서 한국문제 주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중국내에서도 국제정치와 한국관계에 정통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포스터 카터 교수의 기고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동구에서의 공산주의 붕괴는 여타 지역에서도 이것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김일성이 45년간이나 통치해 온 북한만큼 공산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지난해에 일어난 여러가지 결정적인 사건중에서도 특히 동독과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북한에도 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베를린장벽이 철거됨에따라 양독간의 통일은 소원의 차원에서 정치의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상황과 독일을 비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남북의 분할이 1945년 연합군에 의해 잠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독일이 패전국이었던 반면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얻은 입장이었다. 차이는 있지만 독일에서의 변화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 2천명 가운데 일부는 지난번 브란덴부르크문 근처에서 「한국은 하나」라고 쓴 깃발을 치켜 올렸으며 북한 학생 2명은 서울로 탈출하기 위해 동베를린에서 서쪽으로 넘어오기도 했었다. 남한이 북한에 대해 동독처럼 개방할 것을 요구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완전한 자유왕래와 교류 제의로 응수하여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가지 조건을 붙였다. 하나는 남측이 먼저 휴전선에 있는 콘크리트 장벽을 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남측은 그런 것은 없다고 부인했다. 또 하나는 남한의 정치단체들과 이런 문제들을 토의하자고 고집하고 있는데 이는 암암리에 남한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하나 한국과 독일과의 큰 차이점은 바로 이러한 수사들이다. 베를린 공수작전과 베를린장벽 등 분단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은 일종의 공존공생 방식을 누려왔다. 양독 정부는 대화의 채널을 유지해 왔으며 일반 시민들은 편지ㆍ전화ㆍ상호방문을 통하여 또는 단순히 서로의 TV를 시청함으로써 접촉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상황은 악화될대로 악화되었다. 동서냉전이 열전으로 돌변한 곳은 베를린이 아니라 바로 한국이었다. 지금에 와서 역사학자들은 한국 전쟁을 김일성의 도박이라고 보고있지만 당시에는 국제공산주의의 진군으로 여겨졌다. 수백만의 한국인이 죽었고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었으며 적대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아직 평화조약은 없고 서로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하거나 찾아갈 수도 없다. 한국인들은 한세대가 넘도록 상대편에 있는 친족이나 친척과의 접촉마저 거부당하고 있다. 남한은 월등한 경제력과외교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벌수 있는 여유가 있으나 문제투성이인 북한은 그렇치가 못하다. 북의 경제는 아주 오랫동안 활력을 잃어버렸으며 20여년간이나 침체 상태를 계속해 왔기 때문에 언필칭 「위대한 영도자」도 시인하고 있는 소비재의 부족을 비롯하여 통제 경제가 빚어내기 마련인 여러가지 문제들을 안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제 그가 딛고 서 있던 외교적 기반도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었다. 헝가리 폴란드 유고 등 동구 3개국이 현재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체코도 그 뒤를 따를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소련까지도 남한과의 경제적 유대를 확대해 가고 있다. 여기에 대해 북한의 대응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 문제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면서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구에서의 새 정권 탄생을 보도하고 축하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서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할 때마다 사회주의 배신자라는 등 갖은 비난과 험구를 퍼붓고 있다(특히 체코의 하벨대통령은 김일성의 축하편지를 받고 분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이 과연 루마니아가 간 길을 갈 것인가.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구조적으로도 두 나라는 비슷하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차우셰스쿠나 김일성이나 모두 무자비한 공업화로 밀어붙였다. 그들은 또 경제통계를 조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두사람 모두 공산당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살아가기 위해서 당원증을 갖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 결과로 최상층에서는 족벌주의가 횡행하고 사회 모든 계층이 부패했다. 북한도 루마니아와 똑같은 비밀경찰제도를 갖고 있다. 즉 김일성에게는 무한히 충성하는 대신 다른것은 증오하도록 길러진 전쟁 고아들로서 특별부대를 만든것이다. 루마니아사태는 김일성에게 경종을 울렸음이 분명하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유혈 참극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의 구정권은 결국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따라서 지금은 북한 정권이 멸망할 것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망하느냐가 문제라고 하겠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서서히 사라지는 공화국」이라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망하는 김일성정권」이라고나 할까.〈런던 연합〉
  • 문목사,항소심서도 무기/서울고검 구형

    서울고검 김규섭검사는 29일 북한에 몰래 다녀온 문익환피고인(72)와 유원호피고인(60)에게 1심 때와 같이 국가보안법의 잠입탈출죄 등을 적용,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날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안문태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사건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남한을 비방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에 동조하는 등 국가를 혼란케한 사실이 모두 인정된다』면서 이같이 구형했다. 다음 공판은 다음달 10일. 한편 재판부는 문피고인의 구속집행정지 문제에 대해 『신체감정서가 서울대병원으로부터 송달되어야만 정확한 판단을 내릴수 있겠지만 피고인이 교도소안에서 치료를 받지 못할만큼 중병을 앓고 있지는 않은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구속의 집행을 정지시킬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문피고인도 이날 재판에서 『검진결과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면서 『다시 발병하더라도 재검진을 요청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 전철기 열차통과중 착오조작/장항선 두객차 이탈,정차 유조열차 받아

    ◎승객 2명 사망ㆍ50여명 부상/어제 하오 노량진∼대방역 중간지점서/6백여명 탈출소동… 철로 복구에 6시간 설날연휴 마지막날인 28일 하오2시42분쯤 서울 노량진역을 지나 대방역으로쪽으로 가던 서울발 장항행 제423통일호 열차(기관사 정규철ㆍ46)의 뒤쪽 객차 2량이 탈선,대전발 서울행 제3556호 화물유조)열차(기관사 한상찬ㆍ35)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아버지 송기수씨(26ㆍ서울 동대문구 휘경2동 294의163)와 어머니 이희자씨(28)를 따라 외가인 충남 천양으로 가던 희석군(5) 및 박문순씨(91ㆍ여ㆍ서울 성동구 행당동 113의27) 등 2명이 숨지고 송씨부부 등 승객 50여명이 다쳤다. 이날 사고는 통일호열차가 서울역을 하오2시35분에 발차,노량진역을 하오2시42분통과 운행도중 노량진 하선 51호B 전철기가 신호장애를 일으켜 보수중 조작착오로 뒷부분 객차 2량이 다른 철로에 진입,탈선되면서 상행선에 멈춰섰던 화물열차에 부딪혀 일어났다. 이 화물열차는 이날 문제의 포인트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한 노량진역의 정지신호에 따라 포이틀르 고칠때까지상행선에 멈춰 기다리고 있었다. 통일호열차도 자동신호기의 고장으로 노량진역에서 약 1분동안 기다리다가 노량진역소속 운전기장의 수기신호에 따라 역을 출발,전철기 설치지점을 통과하다 사고를 일으켰다. 사고가 나자 철도청직원 등 긴급복구작업반 50여명이 출동,부상자를 구조하고 선로를 정비하는 등 구조작업을 벌였으나 새마을호 열차를 제외한 대부분의 상행선 열차가 영등포역을 종점으로 승객을 모두 내리고 하행선열차들도 4시간남짓동안 서울∼인천,서울∼수원철로가 불통 또는 연발ㆍ착소동을 빚은 끝에 7시간이 지난 하오9시40분쯤 복구됐다. 탈선한 뒤쪽 두번째 2호객차에 타고 있던 김오경씨(52ㆍ충남 홍성군 은암면 하복리 292)는 『객차가 마치 비포장 도로위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흔들리다가 오른쪽으로 기운다는 느낌을 갖는 순간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총돌하면서 함께 앉아 있던 아들 지정이(13)가 창밖으로 튕겨나갔고 다른 승객들도 밖으로 튕겨나가거나 의자밑에 깔리는 등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사고가 나자 통일호 열차에 타고있던 승객 6백여명가운데 절반이상이 객차 밖으로 뛰어나가느라 큰 소동을 빚었다. 이 사고로 다친 승객들은 이웃 흑석성모병원 중대부속 용산병원 성애병원 등 7곳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화물열차와 충돌한 통일호 열차의 2호 객차는 오른쪽 부분이 심하게 부서져 다음칸인 1호객차와 함께 철로위에 넘어졌으며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대부분 이들 두 객차에 탄 승객들이었다. 한편 사고를 낸 통일호 기관사 정씨는 사고직후 부상자를 뺀 나머지 승객들을 앞쪽 4개객차에 태워 영등포역까지 간뒤 영등포역에서 다시 임시열차에 이들을 갈아 태우고 장항으로 갔다. 경찰은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기관사 정씨와 부기관사 임정호씨(30)를 연행하려 했으나 철도청측이 『특별수송기간인 탓으로 대체시킬 기관사가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신병인계를 거절,이날 현재 사고원인 조사를 못하고 있다.
  • 임수경양 15년 구형/서울지검/문신부엔 10년

    ◎구호 외치자 퇴정시킨뒤 재판/변호인 사퇴… 국선변호인 선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 학생축전」에 몰래 다녀온 「전대협」의 임수경피고인(22ㆍ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불어과 4년)에게 징역15년에 자격정지15년이,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피고인(41)에게는 징역10년에 자격정지10년이 구형됐다. 서울지검 공안부 이종왕ㆍ문성우검사는 22일 서울형사지법 합의21부(재판장 황상현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사건 결심공판에서 이들 두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잠입탈출 지령수수 및 찬양고무 등 )를 적용,이같이 구형했다. 검찰은 이날 논고문을 통해 『임피고인은 북한의 대남공작 및 지령에 따라 입북한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한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주장을 찬양ㆍ고무하는 등 국민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다』고 지적하고 『또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좌경세력들의 상투적인 수법인 법정투쟁을 벌이는 등 개전의 정을 전혀 보이지 않는 점을 감안할 때 피고인들의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 당분간격리해야 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변호인단 70여명이 방청제한 등에 항의,사임계를 제출한데 따라 김정환변호사 등 3명을 국선변호인으로 선임해 결심공판을 진행했다. 변론에 나선 신선길변호사는 『변론준비가 덜 됐다』는 이유로 재판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재판부는 『구속만기일(2월14일)이 얼마 남지않았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에앞서 두 피고인은 이날 상오10시15분쯤 법정에 들어서면서 『반민주적이고 반통일적인 재판을 거부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다 재판부의 명령을 받은 교도관들에게 강제로 끌려나갔으며 이에따라 공판은 피고인없이 진행됐다. 선고공판은 다음달 5일 열릴 예정이다.
  • 전두환씨의 시계/송정숙 논설위원(서울칼럼)

    『신은 사람보다 생각이 깊다』 1989년 12월31일 밤,증언대에 서 있던 전두환씨는 셔츠소매를 들치며 몇번 시계를 보았다. 훤소와 매도,능멸이 빗발치는 한 가운데서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문채 시계를 보는 모습은 흡사 초침을 밀어올려 자정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자정. 그것은 그가 개입되면서 출발된 연대인 80년대의 말미를 뜻한다. 스스로 자기연대를 끝내기위해 초침을 밀어올리며 시각을 지켜보는 그를 보며 신은 역시 사람보다 생각이 깊다고 탄복한 전기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웰링턴에 의해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하고 프랑스의회에 의해 「백일천하」의 황위에서도 퇴위당한 나폴레옹이 해외탈출을 하기 위해 바닷가에 섰을 때,다시한번 찾아온 반역의 기회를 포기하는 국면을 전기작가는 그렇게 서술했던 것이다. 절망의 바다위에서 해적처럼 쇠사슬에 묶여져 웰링턴장군에게 끌려 런던으로 연행되는 악몽에 쫓기던 그였지만 그래도 그는 적국의 기사도를 신뢰하는 쪽을 선택한다. 영국 순양함 베렐로폰호에 올라 섭정관의 선처나 고대하며 선상생활하기 열흘,배는 이윽고 영국 플리머드항에 도착한다. 7월의 맑은 아침,『나폴레온 오다!』의 소식에 우리에 갇힌 사자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을 가득 태운 보트들이 삽시간에 순양함을 에워쌌다. 선실에 틀어박혔던 사슬없는 포로 나폴레옹은 멋도 모르고 멈춘 배가 궁금해서 후갑판으로 머리를 내밀고 나왔다. 나왔다가 그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배위에서,배언저리 보트 위에서,와글와글 소요를 피워대던 영국인들이 일제히 모자를 벗는다. 벗고서 포로나 진배없는 그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었을까. 전기작가의 말처럼 『증오와 경멸에 차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시민도 황제의 존엄과 고뇌에 찬 모습을 보고는 자기자신의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버리고 말았음에 틀림없는 것』이었을까. 적어도 20년 동안은 영국인을 괴롭혀온 적장이 비굴하고 하잘 것 없는 필부였다면 그편이 훨씬 영국인을 불행하게 했을 것이다. 선상에 나타난 나폴레옹을 향해서 일제히 보낸 시민의 「경의」는 영국인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전두환씨가 자기시대의 종식을 위해 자기손목위의 시계초침을 밀어올리며 종언의 순간을 지켜보게 한 것이 신의 어떤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거대한 구획을 그으며 물러가는 세월의 경계선 위에 서서 타기와 질책의 물리적 위하를 직접 견디면서도 높낮이가 일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증언」을 읽어가던 「전대통령」에게서 나는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그가 아직도 너무 당당하고 「잘못한게 없다」는 투로 말하는 태도에 사람들은 반성을 모르는 증좌라고 분노했다. 그로 인해 빚어졌던 하고많은 비극과 고달픔때문에 분하고 억울하여 치를 떠는 사람들에게는 그 분노는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1989년 12월31일 자정을 향해 서있던 전두환씨의 모습이 당당하고 꿋꿋하기까지 했던 일은,그렇지 못했던 것보다 다행한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에 그가 비굴하고 용렬하게 구겨져서 머리를 조아리며 잔명을 빌었다면,그편이 훨씬 우리를 불행하게 했을 것이다. 지나간 10년동안,우리의 운명을 쥐고 통치했던 사람이 겨우 그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다면,대체 우리는 무엇이었던가 하는 부끄러움에서 헤어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실패였을 뿐인 세월이었더라도,그것이 통치자가 지녔던 신념과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그쪽이 우리의 자존심을 덜 상처내는 일이다. 80년대의 마지막 시각에 서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의 태도는,모자라는 반성과 불성실의 혐의로 분노를 충천시키게는 했을 지언정 우리를 참담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약사발」이든 「감옥」이든 국민이 내리는 벌이면 기꺼이 받을 것이라는 말을 꾹꾹 눌러가며 다지듯이 말했다. 유배당한 겨울 산사에 아내를 남겨두고,으르렁거리는 정적에 둘러싸여,편들어 보호해줄 아무런 힘도 지원받지 못하는 그가 「감옥」과 「약사발」을 걸고 맹세를하는 것은 결코 수사일수만은 없다. 차라리 죽을망정 욕된 몰골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결의를,그는 눈깊은 산속에서 다지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허세도 뜻이 없고,영광이나 영화의 꿈을 꿀만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비실비실 무너지지 않고,들고나온 문서를 막힘없이 좔좔 읽어나가며,그일을 제지 당할때마다 꾸욱 다문 입에 힘을주며 가끔씩 초침을 밀어올리며 자기 시대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 버티어준 기력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어쩌면 천하의 사람이 무어라 하더라도,혹은 그것이 비록 허황된 환상의 착각이었을지라도 그딴에는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아끼는 일이라고 믿고서 행한 일이었음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겪은 시대가 실패와 불행이 예정된 피치못할 운명이었다면 비열하고 못난 통치자를 마지막 날에 보아야 하는 불행을 격게 되지 않은 일만이라도 다행스런 일이다. 증언을 위해 떠나는 전날밤,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하기를 조언했겠는가. 세상의 쓸데없는 입줄에 오르지 않기 위해 거기 깊은 산중에 떨궈져 있는 아내를 향해 그가 보여주기로 했던 약속된 모습을 아마도 그는 해냈을지도 모른다. 자식을 위해 며느리를 위해 사위를 위해,아직도 어린 막내가 이후에 두고두고 기억해도 부끄럽지 않을 모습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을지도 모를,그것을 그는 지켰을 것이다. 그의 시대는 그것으로 끝났다. 셔츠소매를 걷어 올리고 들여다보던 시계를 통해 그렇게 끝났다. 그가 선택한 막내림의 모습이 이만큼이라도 우리를 불행하지 않게 한 일에 마지막 묵례를 보내도 좋을 것같다.
  • 전 전대통령 특위제출 서면 답변내용

    ◎“「광주」발포 당시엔 보고 못받았다”/미 정부도 「5ㆍ17」 불가피성 이해했다/사북사태ㆍ학원소요가 계엄확대 원인 ▷다음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서면으로 특위에 제출한 답변내용이다.◁ 본인이 당시 도청 앞 상황과 관련한 발포 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국회의 청문회에서 증언한 바 있는 이희성계엄사령관,윤흥정 전교사령관 등이 「발포 사실조차도 상황이 진행될 때에는 보고받지 못했다」라는 증언내용에 비추어볼 때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았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건의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청 앞에서의 이러한 발포사태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 통상적인 정보보고를 통해 본인에게 보고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당시 본인은 즉각 이를 최규하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이미 계엄사령부를 통해 보고되었다고 하기에 중단한 바 있습니다. ▷미 정부역할◁ 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주한 미대사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관리들은 한국의 제반상황에 대하여 우리측과는 어느 정도의 인식차이가 있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북한의 도발가능성에 대해 제3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미국무성이 보내온 광주사태에 대한 석명서를 보면 당시의 한국 안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 미 정부가 광주사태를 계기로 취한 일련의 군사 외교적 조치들과는 모순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해 5월22일 미 국무성은 「불안한 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과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고 북한의 도발책동을 우려하며 「한국사태를 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북한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같은날 국무장관 주재로 한국사태에 대한 고위정책조정회의를 열어 항공모함을 위시한 기동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한국에 파견키로 하는 등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취했으며 당시 미 정부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제3의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5월26일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여야 정치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글라이스틴대사는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미국은 5ㆍ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본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미 정부의 입장과 이번의 미 국무성의 석명서에 나타나 있는 입장은 상황 및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본 입장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내의 일각에서는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라도 정권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웠다면 광주사태와 같은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통령재임기간중에는 『상처는 아물기 전에 건드리면 다시 커져 치유가 어려워진다』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 문제가 남긴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결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 79년 10ㆍ26사태의 충격이란 절대권력의 돌연한 붕괴가 가져온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에서 깨어나는 80년의 봄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권력과 권위의 공동현상이 확실히 드러났고 거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혼란과 무질서였습니다. 빈발하는 학원소요와 노사분규는 그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4월의 사북사태는 며칠 동안이나마 그 지역에 관한 한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도달했고 5월 중순에 학원가두소요는 전국 곳곳에 넘쳐 지역계엄령하인데도 치안 마비상태에 도달하였습니다. 5월13일에서 15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던 서울소요에서는 3일째 되는 15일 서울역에서 시청광장에 이르는 도심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의 군중이집결되었고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예가 드물게 경찰차가 방화 당하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백13명이 부상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혼란을 틈타 각종 범죄가 난무한 것은 물론,외국바이어들이 다투어 철수하고 조업에 지장을 일으키는 등 경제생활 전반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되자 국민들의 불안심리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편 10ㆍ26 이후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전쟁물자 점검,전투태세 강화 등 심상치 않은 동향이 첩보사항으로 파악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국가 존망지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이 일일이 매스컴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일반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그 당사자가 누구이든,국가는 국가 스스로의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국가의 자위조치의 당연한 귀결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역비상계엄에서는 국방장관이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하고 전국 비상계엄하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지휘감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국비상계엄확대의 문제는 특정지역에 소요나 문제가 있다 없다의 기준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5월15일 신현확총리는 시위사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제를 촉구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그때에 진행중이던 제2차 석유파동속에서 원유 확보를 위하여 중동을 방문중이던 최규하대통령도 국내 사태의 급보를 받고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16일 귀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 대통령 귀국 직후 국무총리 내무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그리고 본인 등이 참석한 시국대책회의에서 총리는 국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하였고 주영복국방장관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임한 군의 대책마련을 위해 다음날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ㆍ26 이후 우리 사회의 각부면의 권력과 권위가 퇴화,공동화되는 속에서 군만은 국가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사회와 국민의 막연하고도 암묵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17일 개최된 전문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획기적 대책의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으로의 확대건의를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일각에는 학생소요를 옹호하며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군중궐기집회를 준비중인 세력도 있었고 5월16일에는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5월22일을 시한으로 계엄의 즉각 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면 투쟁태세를 굳히는 등 사태는 더욱 악화될 형세였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전국 비상계엄확대 건의안은 결의되었고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은 이를 신현확총리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고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받았으며 이날 저녁으로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와서 당시 한국의 안보상황에 대해 미국의 인식이 어떻다고 말이 있습니다만 물론 한국의 안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완전한 인식일치가 있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해도 당시 한국의 현존하는 안보위협에 대한 미국측의 인식과 대응의지를 과시하는 일환으로 5월13일과 14일 양일간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 바 있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계엄확대를 전후한 5월14일부터 18일에 걸쳐 전국 주요시설과 방송국들에 경계경비를 위해 인근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가 개회중인데도 의원들의 동원이 저지된 것으로 압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5ㆍ17비상계엄확대조치가 12ㆍ12를 주도한 이른바 신 군부세력의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쿠데타가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를 치는 거사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상이 5ㆍ17시점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합니다. 다만,오늘의 시점에서 5ㆍ17을 본다면 신 군부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들이 명확하고도 주관적인 의지는 결한 채로 시대적 상황과 국가의 요청에 밀려 덧없는 정치의 수렁으로 말려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회가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경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감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계엄당국과 행정부간에 긴밀한 업무협조를 가능케 하여 조속하게 사회 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한시적인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80년 4,5월의 상황이 얼마나 위기상황이 되고 있었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한편으로는 혼란과 비례하여 소위 말하는 「정부의 영이 서지 않는」상황이 되어가고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무렵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비상한 상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뜻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고,당시 「정부의 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국민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벼랑으로까지 몰고 간 위기상황은 전국비상계엄을 불러왔고 전국비상계엄은 무엇보다도 먼저 위기관리와 난국타개를 위해 정부기능을 보완적으로 강화할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가 국보위설치로써 나타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행정부의 기능을 계엄적으로 강화하는 매개 역할,이것이 국보위 기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일 군으로 구성된 계엄당국에게만 당시의 문제해결이 맡겨졌다면 국가가 그렇게 단기간에 위기탈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보위에는 계엄당국과의 매개역을 위해 군의 전문요원들도 차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행정부 요원ㆍ학자 및 각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나름대로의 비상대책안이 은연중에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거론되고 있었고 이같은 안들은 합수본부였던 보안사의 정보수렴과정에서 취합되고 있었으며 전국계엄으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본인은 그동안의 정보보고를 상기하여 대책안의 구체적인 검토를 보안사 참모진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리해서 국보위는 설치되었고 그 책임상 본인이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던 것입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용어가 누구의 착상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비상기구의 연구검토초기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을 전제하여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인 근거를 가져야 제대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는 정부조직법 제5조와 계엄법 제9조 및 제11조 등에 근거를 두고 조직되었으며 그 설치안은 5월27일 최규하대통령께 보고되었습니다. 같은 날 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에 제안되어 의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월31일 발족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발족됨으로써 군은 관련분야인 국방임무와 치안유지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군이 당연히 맡도록 되어 있는 행정ㆍ사법 사무에 대한 기획조정업무는 국보위가 맡게되어 대통령이 전국계엄을 효과적으로 지도감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설치의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광주사태가 조작되고 유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는 모양입니다만,이같은 역사인식이야말로 날조되고 왜곡된,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인식이요 본말전도도 유만부동입니다. 어떤 유능한 신이 있어서 광주사태의 전말을 연출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계엄확대에 의한 업무추진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국보위는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과외금지조치나 공직사회정화 등 일련의 충격적인 조치는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고,그 때의 국가사회가 위기상황을 탈출하고 혼란과 무질서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국보위가 비상한 상황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때로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여 물의를 빚은 점은 아쉽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980년 8월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게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만 본인으로서는 최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면서 발표하신 성명의 내용에 비추어 헤아려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저의 주관대로 추측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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