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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학규장군/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광복군 대일후방공작 지휘/조선혁명 이끌고 일군과 2백회 전투/중국거주 동포 3만명 무사귀국도 도와 백파 김학규장군(1900년11월24일∼1967년9월20일)은 평남 평원군 서해면 선산리에서 출생,소년기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독립사상을 몸에 익히게 됐다. 당시 만주에는 이시영·이회영·이상룡등 많은 애국지사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어 항일의식이 넓게 퍼져 있었다.이들은 만주에서 경학사·신흥강습소·부민단 등 교포교육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있었다. 선생은 신흥강습소의 후신으로 설치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조직돼 있던 조선의용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시작,항일무장활동에 투신했다.선생은 그러나 1920년 일제가 만주일대 독립운동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펼친 경신대학살을 피해 봉천으로 탈출,교포가 운영하는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데 힘을 쏟았다.선생은 1929년 학교를 그만두고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예하부대인 조선혁명군에서 총사령 양세봉장군의 참모장으로 일했다. 조선혁명군은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항해 반일투쟁의 기치를 든 당취오등 중국 의용군과 서로 연계,공동전선을 펼쳐 큰 전공을 쌓았다. 한·중 양국연합군은 1932년4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일제와 2백여차례의 전투를 치렀다.그러나 11월들어 당취오가 일본의 공세에 밀려 군벌 장학량에게로 피신하고 다른 의용군지도자들도 잇따라 잠적함에 따라 조선혁명군도 약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혁명군은 이같이 곤궁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남경에서 장개석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김구선생과 의열단장 김원봉등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선생을 대표로 파견했다. 선생은 이에 따라 1934년5월 부인과 함께 농부로 변장하고 남경에 도착,김규식·유동열·김원봉등 독립운동단체의 지도급인사들을 만나 인적·물적 지원문제를 논의했다.이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가진 결과 효율적인 독립운동 수행을 위해서는 이념·노선등에서 제각각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선결과제라는 데 합의,우선 각 단체를 통합키로 결정했다. 선생은 이같은 남경 현지의 분위기를 조선혁명군본부에 전달,1935년 조선혁명당 대표로 임명돼 남경통일대회에 참가했다.남경통일대회에는 선생의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등 5개 단체가 참여했다.그러나 1937년7월 일제가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중국에 대해 전면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 중국군이 일제에 밀리면서 중국정부마저 중경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자 선생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한구·장사등지로 이동하게 됐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1940년에 이르러 마침내 통합신당인 한국독립당을 건설,대한민국임시정부 예하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했다.선생은 광복군에서 총사령 겸 참모장인 이범석장군의 참모장대리로 임명돼 적후방공작을 담당하게 됐다. 광복군은 총사령부 예하에 5개지대를 편성,1지대장에 이준식,2지대장에 선생,3지대장에 공진원등을 임명했다.선생은 1941년 다시 3지대장으로 임명돼 1945년 해방까지 대일선전·초모공작·정보수집등의 일을 수행했다. 선생의 지휘 아래 있던 지하공작원들은 중국군과 미첩보기구 OSS에서 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업무수행과정에서 미 14항공대 소속 버치대위와 밀접한 친분관계를 형성,해방직전인 1945년5월에는 14항공대사령관 센 노트장군을 만나 한·미연합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선생은 또 한국내 미군의 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한국인을 후방침투요원으로 양성,국내진입작전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독립군 20명을 결사대로 선발,미 OSS에서 1개월동안 훈련을 실시하던중 일제의 무조건항복으로 아깝게 참전기회를 잃었다. 선생은 광복이후 중국땅에 살고 있던 3만여명의 동포가 한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운뒤 1948년 느즈막히 귀국,1967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조창호씨 탈북지원 은인 있었다/성신여대 직원 최성규씨

    ◎북서 조선족 통해 보낸 서한 접수후 누나 수소문/6·25때 성신여고 근무한 창숙씨 찾아내 전달 조창호 소위(64)의 극적인 생환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주인공은 조씨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성신여대 총무과 직원 최성규씨(36). 7일 이 대학 한영환 총장(62)·안명수 교무처장(55)등과 함께 조소위가 입원중인 국군수도통합병원을 방문한 최씨는 한동안 말을 잊은 채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조소위는 92년 여름 북한을 방문한 중국의 조선족을 통해 실낱같은 기대속에 수취인을 맏누나로 「대한민국 서울시 성신여자대학 조창숙」앞으로 편지를 보냈고 이를 접수한 최성규씨는 수소문끝에 조창숙씨에게 전해줘 죽은 줄로만 안 동생의 생존사실을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알렸다. 당시 조씨는 16절지 한장에 앞뒤로 빼곡히 가족들과 생이별한 딱한 사연을 적은 뒤 가족을 찾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한국전쟁당시 맏누나 창숙씨가 성신여대와 같은 재단소속인 성신여고 가정과 교사를 지내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조소위는 설혹 누나가 아니더라도 편지를 받은 누군가가 이를 전달해줄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품고 있었다. 북녘땅의 조소위가 가진 그 가느다란 바람이 뜻밖에 교직원 최씨에 의해 기적같이 이뤄졌다. 처음 편지를 받아본 최씨는 중국 소인이 찍힌 편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담고 있을 것 같아」 뜯어본 뒤 절절한 사연과 접하고는 밤새 콧잔등이 시큰했다. 『분단의 비극은 누구에게라도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창숙씨의 소재파악에 나섰습니다』 4∼5일동안 교육부와 가정학회등을 통해 추적한 최씨는 조창숙씨가 건국대 가정대학장을 역임한 뒤 명예퇴직했다는 「반가운」 사실을 알게 됐다. 유난히 무더웠던 그 해 여름 최씨는 동생이 전쟁터에서 산화한 것으로만 여긴 창숙씨에게 일생중 가장 잊을 수 없는 하루를 선사했다. 「사자의 남매」는 그해 10월 중국을 방문,편지를 부친 조선족을 직접 만나 동생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뒤늦게나마 생명의 은인을 만나게 돼 기쁩니다.편지를 전달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생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꿈속에 그리던 남매가 자신의 편지를 받아본 사실을 북한을 방문한 조선족을 통해 전해들은 조소위는 「빠삐용의 탈출」을 감행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 탈북 벌목공 김호 서울 왔다/어제/러 망명뒤 우리정부서 이주 허가

    ◎최호영·박명남씨와 함께 최근 시베리아 벌목장을 탈출한 벌목공 김호·최호영씨와 옛 소련 지역에서 북한식당 요리사로 일하던 박명남씨등 3명이 5일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고 외무부가 밝혔다. 김씨등은 시베리아 벌목장등에서 탈출한뒤 러시아 정부에 망명신청을 내 정식 거주허가증을 받은뒤 모스크바 한국 대사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이주허가를 받아 서울로 왔다. 김호씨는 지난 91년 러시아의 조선 임업대표부 제1연합기업의 튀르마벌목장을 탈출한뒤 3년 동안 북한 정보당국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극동과 모스크바,중앙아시아,중국등지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한 끝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망명을 인정받고 서울로의 송환을 호소한 사실이 지난 4월 서울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정부는 최근 북한 벌목공들의 한국 귀순을 허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들의 귀순을 허용했다.
  • 동토유랑 3년… “자유 만세”/탈북벌목공 김호 서울 오기까지

    ◎한때 북요원에 잡혀 압송직전에 탈출/올4월 본지서 「빠삐용 행로」 집중보도 탈출 벌목공 김호가 마침내 자유의 품에 안겼다. 지난 91년 8월24일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재쏘 림업대표부 제1련합기업소」의 튀르마 벌목장을 탈출한 뒤 올해초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식 망명허가를 받기까지 김씨는 북한 정보요원들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극동과 시베리아,모스크바,중앙아시아,중국 만주 등지를 떠돌며 필사의 탈출극을 벌여왔다.이 과정에서 김씨는 두차례나 북한 정보요원들에게 붙잡혔으며 북한으로 압송되기 직전,자해를 하고 혈투를 벌이며 극적으로 탈출한 바 있다. 김씨는 이러한 눈물겨운 탈출행로가 러시아 사회에 알려지면서 지난해 모스크바로부터 임시거주 허가를 받았다.김씨는 그즉시 모스크바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으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또 올해 4월 서울신문이 김씨등 탈출벌목공들의 어려운 생활을 집중 보도,벌목공들의 송환문제가 정부의 중요 정책현안이 되었을 때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식으로망명요청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는 최근까지도 본사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서울에 가고 싶은 간절한 희망을 피력해왔다.『서울에 오면 눈이 뒤집힐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씨에게는 중앙아시아 도피생활중 카자흐공화국에서 만나 결혼한 고려인(한국계 러시아인) 마야씨와 아들,딸이 있다.이들도 곧 서울에 데려올 예정이다. 김씨는 북한 공군장교 출신이며 아버지가 교사,형이 연구인,누나가 의사인 비교적 성분이 좋은 집안에서 생활했다. 김씨가 그토록 희망하던 서울에서 와서 어떠한 생활을 펼쳐 나갈지 매우 주목된다.많은 사람들이 주시할 것 같다.
  • 여권인재 풀가동… 국정운용 보강/최병렬씨 서울시장 임명의 배경

    ◎「성수대교 붕괴」 질곡서 조기탈출 겨냥/인사스타일 「의외성」서 「역량 중시」로 변화 김영삼대통령은 여권총동원체제의 카드를 택했다.정권적 위기의식의 확산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이다. 김대통령이 2일 신임 서울시장에 민자당의 중진의원인 최병렬(최병렬) 의원을 임명한 것은 그의 경력을 고려할 때 성수대교 붕괴로 발단된 일련의 국정난맥상을 여권 전체의 인력과 지혜를 모으는 총동원체제로 치유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불과 두달 앞으로 다가온 연말의 당정 대개편에서도 구여권과 신여권의 총력가동 메시지는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임명직 서울시장은 정치적으로 그다지 큰 비중을 갖는 자리는 아니다.그러나 성수대교 붕괴,이원종전시장 해임,우명규시장 임명,11일만의 우시장 전격 사퇴파동을 통해 서울시정은 김영삼정부의 국정관리능력과 인사에서의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때문에 김대통령으로서는 신임 서울시장에 총리에 버금갈 정도로 정권의 신뢰도와 국정운영 능력을 상징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인물을 기용해야 하는 부담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무엇보다 앞서 그같은 인사를 해야만 성수대교 붕괴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이처럼 상징성이 높은 서울시장으로 최의원을 택했다. 그는 전형적인 「5·6공」 인물이다.언론계출신이지만 「5공」때 민정당의 전국구의원으로 들어가 노태우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던 사람이다.그 기여와 기획력 및 조직장악력등으로 「6공화국」 초대 청와대 정무수석과 공보처장관·노동부장관을 맡았다. 대단히 정치적이고 정권전위대 성격이 강한 자리들에만 있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그가 김영삼후보의 캠프에서 대통령 당선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그는 「5·6공」,노태우대통령 사람으로 분류돼 왔다. 김대통령의 최의원 발탁은 김대통령의 인사구도가 개혁성·참신성을 강조하던데서 관리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이는 「5공·6공」등 구여권에 몸담았다는 점이 인사의 제척요인이 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고,동시에 민주계 중심의 인사등용이 더이상 김대통령의 인사기준이아님을 말하는 것이다.소수의 민주계나 개혁적 인물만으로는 나라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판단아래 김대통령은 「세 불리기」에 나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김대통령은 이번 인선에서 인사스타일면에서도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김대통령이 취임후 보여준 인사스타일은 의외성과 철저한 보안,독단적 점지가 특징으로 꼽혀왔다.그러나 이번 인선에서 김대통령은 비서실의 제도적 장치를 존중하고,자신의 생각외에 일반적 여론과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인선의 새로운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공개성을 높이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최시장을 임명하기까지 이틀동안 청와대 비서실은 여러사람을 거론하면서 이를 언론에 흘려서 여론을 떠보는 의외의 행태를 보였다.최의원과 김진현 전과기처 장관,이상희 전내무부장관,이재창 전환경처장관등이 여론의 탐색대상에 들었던 후보들이다.이같은 여론 스크린과정을 거쳐 김대통령에게 2명의 명단이 제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사는 국정운영의 밑그림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다.때문에 김대통령 인사의 변화는국정운영의 변화를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의원의 발탁에 정치적의미가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의원의 발탁은 앞으로의 국정운영에서 당의 역할이 현재보다 훨씬 강조될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당정협의에서 당의 입김은 보다 강화될 것이며 구여권인사와 정책을 포용하는 노력은 보다 가시화될 것으로 여겨진다.개혁도 중요하지만 관리에 보다 비중이 두어질 것임을 뜻한다. 이번 인사는 김대통령의 국정운영이 개혁위주에서 충실한 관리위주로 들어가는 분수령이 될 것 같다. ◎최병렬 신임 서울시장 일문일답/“책임질일 변명않고 책임지겠다”/“공무원 소신껏 일할 여건 조성 노력” 최병렬 신임서울시장은 2일 국회 본회의장에 있다가 임명소식을 듣고 기자들에게 이끌려 회견장으로 가면서 최근의 사회상황과 전임 두 시장의 「불행」을 의식한듯 『지금 웃을 심정이 아니다.웃는 사진은 쓰지 말아달라』는 주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소감은. ▲솔직히 역부족이라고 생각돼 두렵다.모두가 느끼듯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며 해야 될 일이 산적해 있다.하지만 명을 받은 이상 최선을 다하겠다. ­시장 내정사실을 언제 알았나. ▲오늘 하오 늦게 본회의장에 있다가 통보를 받았다.이 상황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도움이 될것 같지 않다고 정중히 고사했으나 명에 의해 맡게 됐다. ­가장 역점을 두어 추진할 시정분야는. ▲생각해보지 않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앞으로 공부를 해가면서 파악하겠다.다만 최근 발생한 큰 불행한 사고로 불안해 하는 시민들의 불안해소가 급선무라고 생각한다.다음은 일을 안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우리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한 충성스런 마음으로 일할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겠다. ­그동안 서울시정에 대해 가져온 느낌은. ▲「정부속의 정부」로 굉장히 복잡하다고 들었다.덩치가 크고 일도 다양하며 복잡한 모양이다. ­발탁배경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여러분들이 해석할 부분이다. ­국회의원을 그만두게 된데 대한 아쉬움은. ▲물론 개인적으로 있다.그러나 사람은 성경에도 있듯 나갈 때와 들어갈 때가 있는것 아닌가. ­관운이 따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흔히들 하는 얘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언론계를 떠나 국회의원을 두번 하고 장관도 두번 하는등 과분하게 공직에 오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자세로 일해나갈 것인가. ▲공직에서 일하는 동안 자리나 인기,돈에 연연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홍구부총리에 이어 과거정권에 몸담았던 민정계인사로서 발탁됐는데 이는 능력있는 과거정권 인사들의 발탁신호탄인가. ▲나에게 그런 판단소재는 없다.인사권자가 판단할 일이다. ­6공정부에서의 일이라 해도 책임질 일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해왔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내가 맡은 일은 리저베이션(Reservation) 즉 유보나 변명 없이 책임을 지겠다. ­김영삼대통령과의 관계는. ▲(시장을 맡는 것과)개인적인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자시절부터 잘 알았다.
  • 강상호 전북한 내무성 부상(인터뷰)

    ◎“북 세습체제 무너뜨려야 통일 가능”/매스컴통해 국제적인 반북여론 형상 긴요/식량 등 경제원조땐 군비확장 악용 소지 『김정일 북한체제의 실상을 소상히 파헤쳐 한민족이 단결해야 통일도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북한정권 수립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해 러시아로 망명했던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강상호씨(85)는 28일 열린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94서울대회」에 앞서 김정일체제 붕괴를 위해 모든 국민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서 열리는 이번 대회의 성격은. ▲서울대회는 북한체제에 반대해 탈출한 망명인사들로 구성된 「구국전선」의 미국·일본·러시아 등의 지부회원 3백여명이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대회」를 가진데 이어 2번째 대회이다.서울에서 대회를 갖는 것은 김일성사후 변화하는 북한 정세에 맞춰 북한에 민주화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해외 인사들 뿐만 아니라 한국내 여러 사회단체들의 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의 김정일 위치는. ▲그는 머리가 둔하고 영도력이 없다.김정일에 반대하는 삐라가 김일성 장례식이후 평양중앙거리에 뿌려졌다는 점은 인민들이 김정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한 단면이다. ­남북통일의 방향은. ▲김일성이 유언으로 남긴 적화통일을 김정일도 그대로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만큼 김정일 체제의 실상을 폭로,세습왕조체제를 무너뜨리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제도를 세운뒤라야 통일이 될 수 있다.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출판·방송등을 이용,국제적인 반왕조세습체제 및 개인숭배 반대여론을 형성하는게 중요하다. ­북한에도 반체제 활동이 있는가. ▲정확한 수와 규모는 파악되지 않지만 반체제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있다.또 이들 단체는 해외의 반북단체들과 극비리에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일성사후 북한의 변화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등지에서 일하는 북한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북한은 김일성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김정일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그를 영도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정일정권은 어느 정도로 안정적인가.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처 김성애와 아들 김평일을 지지하는 세력과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으나 이들은 아직 김정일세력에 대항할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당분간은 김정일 체제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개발 정도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으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는 이미 갖고 있다는 추측과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추측이 2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북한이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남북통일을 위한 한국정부의 역할은. ▲북한에 식량 등 경제원조를 할 경우 북한이 이를 군비확장에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을 지원하거나 자극하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강씨는 자신이 상임공동의장으로 있는 「조선민주통일 구국전선」과 「북한민주화추진협의회」(회장 이연길)가 공동주최하는 이날 대회에서 북한사회의 개방과 주민들의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대회사를 하기 위해 지난 26일 입국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강씨는 45년 구 소련군에 입대,북한에 진입한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북한에 남아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공산당 생활을 시작,54년 북한 내무성 부상겸 정치국장에 올랐다. 강씨는 그러나 「개인숭배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공통점이 없다」는 내용의 논문을 내무성 신문인 「내무원」에 게재,혹독한 사상검토를 당한뒤 59년 11월 소련으로 다시 돌아가 김일성부자체제 타도 활동에 앞장서왔다.
  • 「조창호소위」 재회앞둔 경기상고 23회 동창들

    ◎“고생 많이한 창호 우리가 돕자”/“언제 만나자” 사무실전화 빗발/총동문회선 환영식 준비 분주 이순을 훨씬 넘긴 경기상고 23회 동기동창생들은 요즘 설날을 앞둔 동심마냥 설렘으로 가득차 있다. 6·25사변때 포로가 되어 43년동안 북한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 탈출,꿈에 그리던 자유의 땅에 안긴 동기생 「조창호소위」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TV와 신문을 통해 조씨가 동문임을 확인한 동기생들은 너나 할 것없이 「조창호동문돕기를 위한 모임」행사에 발벗고 나섰다. 『옛날 모습 그대로든데』,『아니야,고생을 너무 많이 한 것같아』,『학교다닐때 본 것같긴 한데 잘 모르겠어』,『우리가 열심히 도와줘야 해』 50년 당시 취업반(A반)과 진학반(B반)으로 나뉘어 졸업한 1백54명가운데 지금까지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는 동문은 70여명으로 「조창호탈출」뉴스가 보도된 뒤에는 동창회사무실로 동문들의 문의전화가 빗발쳐 정신이 없을 정도다. 어느덧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꿈많던 10대 소년들이 머리카락이 하얀 6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옛기억을 회상하면서 마냥 즐거운 모습이다. 경기상고 23회 졸업생들은 삼수회·등반회·서울대상록회·청송회(연세대동문모임)등 각기 다양한 모임을 통해 나름대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특히 삼수회는 셋째주 수요일에 만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을 통하면 알고 싶은 동문들의 안부를 언제나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삼수회등 23회동문회의 작은 친목그룹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연락을 하며 조창호동창돕기운동에 나선 것이다. 동기생가운데 가장 친하게 지냈던 서순화씨가 처음으로 조씨와 25일 상봉했다. 조씨가 입원해 있던 서울 중앙병원을 방문,반갑게 해후한 서씨는 『「창호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에게 「나,순화야」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내손을 붙잡고 놓을 생각을 않았다』며 감격의 순간을 되뇌었다. 『그냥 손을 꽉잡고 울기만 했어요.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도대체 이북억양때문에 알아 들을 수가 없었어요』 서씨는 혼자만 만나고 왔다고 동기생들로부터 야단을 들었다며 끈끈한 동기애를 자랑스러워 했다. 『동문회명부에는 그동안 행방불명으로 돼 있었어요.빨리 동기회명부도 고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여건도 만들어 줘야죠』 동기회 총무를 맡고 있는 정연덕씨(64·천보흥업 부사장)는 동기생들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는 만큼 빠른 시일내에 모두 함께 만나 서울시내 구경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총동창회 신우균사무국장(경기상고 22회)도 『총동창회차원에서 조창호동문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동문들끼리의정을 더욱 두텁게 하는 기회로 삼겠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충주호 동승 장재훈씨 살신 뒤늦게 밝혀져

    ◎30여명 구한뒤 숨진이 있었다/불길 아수라장속 사력다해 선창 깨/노약자 탈출 도와준뒤 탈진해서 익사 화마가 삼켜버린 충주호 유람선에 타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동승한 승객 30여명을 구한뒤 실종됐던 장재훈씨(60·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120의8)가 26일 상오 끝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돼 가족들은 물론 그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오열케 했다. 같은 동네 「3천년친목회」회원 60여명과 함께 유람선에 오른 장씨는 사고직전 친구 3명과 함께 갑판에 나와 짙은 가을속 단양팔경의 절경에 연신 감탄사를 뱉어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선미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본 장씨일행은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서둘러 객실로 들어갔다. 평소 입담이 좋기로 소문난 장씨는 객실에 대피한채 불안에 떠는 아주머니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몇년전에 등산중에 만났던 일 등 우스갯소리를 하며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와 불길이 죽음의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객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더이상지체할 수 없었다. 장씨는 함께 있던 승객들에게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죽는다』고 소리치며 등산용 가방으로 유리창을 수십차례 내리쳤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공포와 절망감에 젖은 승객들의 아우성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장씨는 애지중지하던 비디오카메라로 다시 유리창을 내리쳤고 순간 그토록 견고하던 유리창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10여m쯤 떨어진 곳에서 눈에 익은 다른 유람선과 어선등이 구조를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빨리 빠져나갑시다』 장씨는 서둘러 대피할 생각은 않고 객실에 갇혀 있던 승객중 수영에 익숙지 못한 노약자들을 도와 구조대가 있는 쪽의 물속에 한사람씩 내려주었다. 그러기를 수십차례,어느새 불길은 장씨의 발끝까지 다가왔고 장씨는 본능적으로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을 먼저 내보내는 과정에서 탈진한 상태였다. 충남 아산만 출신으로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던 장씨는 10여m를 헤엄쳐가다 물속으로 그만 가라앉아 버렸다. 그의 도움으로 살아난 승객들은 저마다 장씨의 용감한 살신성인의 모습을 칭송했으며 끝내 시체로 발견되자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일행 임병수씨(61)는 『당시 장씨가 유리창을 깨고 우왕좌왕하던 승객들의 탈출을 돕지 않았다면 객실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길속에 죽어갔을 것』이라며 눈물지었다. 그는 또 『장씨가 1개월전 척추수술을 받은 부인 김정자씨(59)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아내를 위해 붉게 물든 단풍잎과 기념품을 준비했는데…』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 조창호씨/현역군인가 귀순동포인가/43년만의 생환… 군적 어찌되나

    ◎「포로」인정땐 원계급 회복,「최장수 소위」/단순 탈출… 「민간인」 간주땐 제대자 처리 6·25당시 포병소위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땅에서 살아온 조창호씨(64)가 43년만에 북한을 탈출,생환해옴에 따라 조씨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조치를 취했던 정부의 관련부처들이 조씨에 대한 대우등을 놓고 부심하고 있다. 국방부와 육군은 조씨를 「전사자」로 처리,중위로 1계급을 추서했으며 국립묘지측은 조씨의 위패를 봉안해놓고 있는 상태다.또 국가보훈처는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처리,가족들에게 일정액의 연금을 지급했었다. 조씨에 대한 처리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부분은 조씨의 군적문제이다.즉,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을 포로생활로 인정하고 지난 43년동안 군적을 유지한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제대한 것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이다.이 문제는 조씨가 앞으로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와 관련돼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씨는 포로상태가 인정되면 사망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지만 단순한 탈출로 간주되면 앞으로 실제 사망때에는 국립묘지안장이 불가능해진다. 현행 국립묘지령등에 따르면 현역군인등으로 20년이상 근무한 군인연금 수급권자등을 국립묘지안장대상으로 선정하고 있어 조씨는 자칫 생존시에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안됐다가도 실제 사망했을 때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는 것이다.군인연금수혜여부는 조씨가 정상적으로 근무하지 않아 매달 연금갹출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연금수혜는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와 육군은 따라서 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이 포로생활이었는지를 앞으로 조사할 방침이다.이 조사에서 포로로 인정되면 당연히 지난 43년을 현역으로 근무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이 경우 조씨는 전사를 조건으로 1계급특진,중위가 된 만큼 다시 원계급을 회복,「최장 소위근무자」가 된다.그러나 조씨가 북한에서 결혼을 하는등 포로생활에서 벗어난 민간인이며 북한을 탈출한 동포로 단순하게 보면 조씨는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된다.이때 조씨는 전사처리된 51년 9월 자동제대한 것으로 간주된다. 육군에 따르면 조씨는 51년 4월14일 임관,5월 실종돼 4개월후인 9월10일부로 전사처리됐다.병역법과 군인사법등 관련법규에서는 「전투중 행방불명자에 대해서는 2년 경과시 전사처리하고 생환시 전사처리일부로 제대처리한다」고 규정돼있어 조씨는 이 조항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것이다.육군의 한 관계자는 『조씨의 사례가 처음있는 일이라 관련규정이 정비돼 있지 않다』면서 『조씨의 처리결과가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관련법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적문제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조씨의 가족들이 그동안 받았던 국가유공자연금의 환수여부다.국가보훈처는 조씨가 전사처리된데 따라 61년 8월 국가유공자등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등록,조씨의 부모인 조연국씨(사망)와 이곤옥씨(사망)에게 61년 당시에는 한달에 5백원씩을,연금수혜자인 부모가 모두 사망한 82년 8월에는 마지막으로 1만9천9백원을 연금으로 지급했었다.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국가유공자예우등에 관한 법률에서 본인이 거짓말을 하는등 본인의 귀책사유가 없으면 군기록이 변경되더라도 관계없다는 조항이 있어 조씨가 받았던 연금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조씨가 앞으로 정착금등을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도 관심거리다.보사부와 안기부등 관계당국은 조씨에 대해 귀순동포인지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현행 「귀순월남동포보호법」은 북한에서 출생해 귀순한 사람을 대상으로 최저임금의 15∼20배를 정착금으로 지급하도록 돼있어 조씨의 경우는 해석이 다소 다르다는 입장이다. 관계당국은 이에따라 국방부가 조씨를 현역군인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지켜본뒤 조씨에 대한 처우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포병소위 무사귀환 신고합니다”/생환 조창호씨,방문한 이국방에 거수경례 북한을 43년만에 탈출,극적으로 조국의 품에 안긴 조창호씨(64)는 25일 하오3시쯤 이병태 국방장관이 위문을 위해 병실을 방문하자 불편한 오른팔과 다리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크게 군번등을 외치며거수경례,군인정신을 보여줬다. 조씨는 당초 자신이 입원해 있던 서울중앙병원에서 이날 하오2시47분쯤 국군통합병원 5층 VIP실로 이송된 뒤 이장관이 자신을 방문하자 병상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로 『포병소위,군번 212966,국방장관님께 무사히 귀환했음을 신고드립니다』라며 신고한 것. 이어 이장관은 『선배님이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돌아오시게 된 데 대해 우리국민과 국군이 환영하며 대통령께서 저를 대신 보내셨다』면서 김영삼 대통령명의의 꽃다발을 전했다. 한편 이장관의 조씨 방문에 동행한 군 관계자들은 『조씨가 귀환신고를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콧등이 시큰했다』며 『신고를 하는 조씨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조씨가 그토록 고생했어도 군인정신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 6·25포로 국군장교/43년만에 북한 탈출/당시 포병소위 조창호씨

    ◎목선타고 서해 건너와/연대재학중 자원입대… 중공군에 잡혀/52년탈출실패… 아오지등서 강제노역/중국대련거쳐 조국에… 서울형제 상봉 한국전쟁중 포로가 되어 전사자로 처리된 국군소위가 43년만에 북한에서 탈출,중국을 거쳐 23일 새벽 조국의 품에 안겼다. 국가안전기획부는 24일 6·25전쟁당시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에 끌려간 당시 국군포병대소속 소위 조창호씨(64)가 북한을 탈출,서울에 도착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조씨가 중국 대련에서 작은 밀항선을 타고 해상으로 탈출,23일 새벽 1시쯤 군산항 서남쪽 80마일 해상에서 표류하던중 조업지도중이던 수산청 소속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다고 밝혔다. 구출당시 조씨는 미리 준비한 횃불을 이용해 긴급 피난신호를 보냈으며 구조하러간 수산청직원들에게 『나는 43년만에 북한을 탈출한 전 국군소위』라고 신분을 밝혔다. 조씨는 북한억류중 27년동안 강제노역과 탄광노동으로 인해 심한 진폐증(2기)을 앓고 있는데다 북한탈출후 오랜 항해와 긴장 등으로 탈진상태에 빠져 현재 서울 풍납동 현대중앙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치료을 받고 있다. 병원측은 조씨가 응급을 요하는 위급한 상태는 아니지만 규폐증과 언어장애,하체 신경마비등 뇌졸중 증세를 보이고 있어 당분간의 안정가료와 정밀검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기부조사결과 조씨는 연희대 문과 1학년 재학중이던 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육군본부 직속 101포병대대 관측소위로 참전했으며 이듬해 5월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혀 북한에 억류돼온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는 억류생활을 하면서도 남쪽으로의 탈출을 노리다 52년 2월 월남을 기도하다 북한공안당국에 적발돼 13년간 교화노동형을 선고받고 강제노역을 했으며 77년7월까지 다시 14년동안 지하 막장에서 광부로 일했다. 조씨는 남쪽으로 탈출하기 위해 2년전부터는 중국땅이 마주보이는 압록강변에서 숨어 지냈다.탈북 D데이인 지난 4일 새벽 2시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선족 동포 이모씨(45)의 도움으로 고기잡이배를 타고 북한초병들의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후 중국 국경에 위치한 달라츠광산(4일)과 청구시(5일),심양시(6일)를 거쳐 7일 상오 대련항까지 달아 나는데 성공했다. 압록강을 넘어온지 17일 만인 20일 새벽 중국 어선을 타고 1차 밀항을 시도했다.그러나 악천후로 실패,대련항으로 되돌아 갔으며 22일 새벽 5시 2차 밀항을 시도,23일 새벽 서해상에서 우리측에 발견돼 귀환에 성공했다. 국내에는 건국대학교 가정대학장을 역임한 조씨의 누나 조창숙씨 등 형제4명과 이종사촌 형인 전리비아 대사 최필립씨 등 가까운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둘째누나와 남동생등 2명은 미국에 살고 있다. 조씨는 귀순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조창숙씨 등 가족들과 극적으로 상봉,『가족을 만나게 돼 꿈만 같다.죽어서라도 조국땅에 묻히게 돼 여한이 없다.조국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나는 한일이 없어 면목없다』고 감격해 했다. 안기부는 조씨의 건강이 회복되는대로 구체적인 탈북경위 및 북한생활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 승객 선실로 몰려 피해 커/유람선 화재

    ◎기관실서 불길 치솟아 순식간에 전소 【단양=한만교·김동진기자】 성수대교 붕괴 참사에 이어 24일 발생한 충주호 사고는 유람선이 하오 4시 신단양을 떠나 15분가량 항해하던중 갑자기 배뒤편의 기관실에서 불이나 10여분만에 선실로 옮겨붙으면서 일어났다. 사고가 난 뒤 경찰에 출두한 선장 문세권씨는 『얼마전에도 충주호 유람선에서 전기누전으로 불이 났다』고 말해 기관실의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을 내비췄다. 사고 순간 시커먼 연기가 기관실쪽에서 선실쪽으로 흘러들면서 승객들이 연기를 피해 선실 앞쪽으로 피했으나 출입구가 없어 일부 승객들은 유리창을 깨고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불길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화재발생 당시 경보기가 울려 이를 의심한 승객들이 밖으로 뛰어나와 원인을 알아보려 했으나 유람선에는 방송시설이 없는데다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선실쪽으로 유도하는 바람에 출입구를 찾지 못해 사망자수가 더욱 늘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더구나 유람선에는 승객들이 승선한 뒤 구명조끼나구명정의 이용방법을 알려주던 안내여직원이 최근 해고된 탓으로 승객들이 더욱 당황해 미처 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경찰은 불길이 맨처음 기관실 근처에서 솟았다는 목격자들의 말에 따라 기관 과열로 불이 난 것이 아닌가 보고 화인을 조사하고 있으며 승무원 가운데 4명이 승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관계자를 불러 추궁하고 있다. 지난 86년 건조돼 9년째 충주호에서 운행돼온 이 배는 54t급으로 정원은 승객 1백24명과 승무원 3명등 1백27명이며 지난 8월 30일 서울 한국선급협회로부터 정기검사에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충주호 제5호 유람선은 동양화재 유도선사업자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고 있으며 선박보험은 해동화재에 들어있다.따라서 피해를 당한 승객들은 한사람당 최고 5천만원까지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으나 한 사고당 보상한도가 3억원이내여서 피해자들이 많을 경우 보상금은 크게 줄어든다.
  • 「한국판 빠삐용」 조창호씨 탈출기/“그리운 조국으로” 파도와 사투

    ◎“중국 거치면 쉽다” 얘기 듣고 결행/비·바람 몰아 치던 밤 압록강 건너/목선 구해 남으로 남으로… 탈진 끝 구조 받아 그는 한국판 「빠삐용」이었다.22세때 「죽음의 땅」 북한에서 탈출을 시도,백발이 성성한 60대 중반의 나이에 탈출에 성공한 그의 삶은 자유가 목숨보다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51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된뒤 이듬해부터 43년동안 끝없이 탈출만을 꿈꾸다 마침내 가족들이 기다리는 조국의 품속에 안긴 조창호씨(조창호·64). 24일 서울 중앙병원 병실에서 푸르른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살아 돌아와 가족을 만나게 되다니 혹시 꿈이 아닌가요.이제 죽어서라도 조국땅에 묻히게 됐으니 여한이 없시요』.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듯 맞잡은 큰누이 조창숙씨(전건국대 가정대학장)의 손을 자꾸 어루만지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52년 2월 첫 탈출의 실패는 그에게 너무나 혹독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북한 당국은 그에게 13년간의 「교화노동형」을 내려 덕천·서흥·함흥 등지의 수용소에 보냈다가 휴전부터 58년까지는 아오지,58년부터 64년 5월까지는 강계교화소에 수감했다. 만 12년 6개월동안 교도소에서 보낸 것이다. 조씨는 그후 자강도 화풍광산을 시작으로 14년동안 지하막장에서 채탄작업을 하다 75년 중강진 구리광산으로 다시 배치됐고 진폐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더이상 노동을 할수 없게 되자 77년 현업에서 풀려나 떠돌이 생활을 했다. 27년간의 강제노역은 그의 육신을 「걸레」처럼 황폐화시켰다.그러나 「절해고도에 갇힌 빠삐용」같은 그를 지탱시킨 것은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집념이었다. 그러기를 꼭 15년 뒤인 92년 초 잘하면 중국을 통해 탈출할 수 있다는 얘기를 우연히 중국땅에 살고 있는 조선족 교포인 이선생(45)으로부터 들었다. 『가자.어떻게든 일단 중국으로 가자』 하루에도 수십번씩 다짐을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린 것은 쌍둥이 아들(28)이었다.탈출계획을 털어놓으면 반대할 것이 뻔한데다 탈출후 이들에게 닥칠 신변위험도 막기위해 자살을 가장하려고 『죽고 싶다』는 말만 계속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지난 4일 새벽 억수같은 비와 세찬 바람이 삼엄한 감시망을 뚫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다.그는 이날 밤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넜고 그토록 그리던 중국땅을 밟았다. 중국에서 기회를 노리던 조씨는 19일 밤 9시 중국어부를 통해 80t급 어선을 얻어타는 행운을 얻었다.어선은 다음날 새벽 5시 서해바다로 나섰다.『살아 대한민국에 닿을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첫번째 탈출은 실패했다.가도 가도 바다이고 사방은 그저 어둠 뿐이었다.파도가 4∼5m씩 일어나 배가 가랑잎 처럼 흔들렸다.결국 17시간만에 배는 제자리로 회항했다. 22일 새벽 5시 두번째의 탈출을 시도했다.파도는 여전히 거세 조씨는 거의 탈진해 있었다.얼마를 항해했을까.희미한 의식 속에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조씨가 탄 배에 이름모를 선박이 접근했다.조씨는 『아픈 사람이 있어요』라며 「남쪽말」을 쓰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 조씨 국립묘지에 위패 봉안중/「전사자규정」에 따라 77년 사망처리

    ◎생존자로 밝혀져 「위패삭제」 첫 기록 6·25 참전중 포로로 잡혀 납북됐다 43년만에 탈출한 전 육군소위 조창호씨(64)는 지난 77년이후 전사자로 처리돼 동작동 국립묘지 위패실에 봉안돼 있는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이에따라 조씨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안된 사람 중 생존자로 밝혀져 위패를 삭제하게된 최초의 인물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국립묘지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6·25 참전 군인이나 경찰·군무원중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전사자 처리규정」에 따라 실종된지 25년이 지나면 전사자로 처리돼 위패를 봉안하게 되는데 위패가 봉안된 사람중 살아돌아온 경우는 조씨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조씨의 위패는 국립묘지 현충탑 지하에 설치된 위패실 좌측 대리석에 「육군 중위 조창호」라는 명단으로 새겨져있다. 조씨의 위패 카드번호는 47­8­052로 이 카드에는 성명과 함께 육군 중위로 추서된 계급,소속 사단,군번,사망일자,유가족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있다. 조씨의 위패카드에는 육군 9사단 소속 육군 중위,군번 211366,사망일자 51년9월10일이라고 적혀 있다. 또 유가족난에는 부친 조영국씨의 성명과 서울 종로구 효자동 165라는 조씨의 당시 주소가 기록돼 있다.
  • “43년간 탈출생각 뿐이었다”/조창호씨 일문일답

    ◎2년전 압록강변 이주… 기회 노려/두아들 등 가족5명 북에 두고와 ­중공군 포로로 붙잡혔을때의 상황은. ▲51년 5월 중부전선 인제전투에 육본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소위로 참전했다.아군측은 육군 9사단과 미군 7사단이 북한의 6사단·12사단및 중공군과 격전을 벌이다 후퇴,나도 모르게 주력부대에서 이탈됐다.부상을 입은 통신병과 함께 부상치료를 위해 찾아간 막사가 중공군 막사였다.이때 포로가 됐다. ­탈출동기와 탈출을 계획한 시점은. ▲내집에 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남한이 바로 내집이다.가다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일찍 용기를 못낸 것이 아쉽다.52년 월남을 기도했다 실패해 교화노동형을 선고받아 13년간 교도소에서 생활했다.64년 교도소에서 나와 지하 2백m에서 노동을 했다. 이후 내가 묻힐 땅은 이북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생각으로 2년전부터 압록강 주변에 살면서 탈출을 결심했다.비가 내리는 10월 3일 하오2시쯤 쪽배를 이용,압록강을 혼자 건넜다.다 말할 수 없으나 중국땅에서 운좋게 돕겠다는 사람을 만나 어선을 타고 탈출하게 됐다.상세한 탈출경로는 나말고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어 밝히기 곤란하다. ­김일성사후의 북한생활은. ▲대를 이어 김정일을 모시자는 분위기다.김일성이 죽은후 별다른 동요없이 평온하다. ­북에 두고온 가족들이 있는가. ▲형제등 5명이 있다. ­전향을 종용받은 적은 없는가. ▲받은 적 없다. ­수용소생활은 어떠했는가. ▲하루에 규정된 노동시간은 8시간이나 주어진 과제를 마치지 않으면 밥을 주지않기 때문에 사실상 16시간 이상씩 해야 한다.신분은 크게 정치범과 일반잡범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김정일을 믿고 따르는 분위기인가. ▲유일독재를 반대하면 목을 자른다. ­귀국한 소감은. ▲마음이 안정되고 서울이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최루탄이 오가는등 정치적 혼란만 있다고 북에서 선전했는데 와서 보니 「천지개벽됐다」는 느낌이다.조국 발전에 아무런 일도 하지않은 나는 면목이 없다.마지막 소원을 푼 감격을 뭐라 말할 수 없다. ­가족들을 만났을때 알아볼 수 있었는가. ▲다 알아 볼 수있었다.말이 안나올 정도로 기뻤다. ◎북 탈출 조창호씨 주변/“죽은줄 알았는데”… 가족들 오열/13년 광원생활로 진폐증… 중풍에 걸려 ○…24일 하오 병상에 누워 비교적 깨끗한 얼굴로 보도진들과 첫대면한 조창호씨(64)는 발톱이 모두 심하게 깨져있어 북한 수용소에서의 강제노동및 비참했던 생활상을 반증. 조씨는 18층 특실병상에 스포츠형 머리에 마르고 초췌한 모습으로 반듯이 누워 보도진들의 질문을 받았으며 기력쇠진과 중풍의 영향으로 말을 제대로 못하는 상태이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하느라 애쓰는 모습에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이날 하오3시20분쯤 조씨 남동생 창원씨(62)부부와 여동생 창윤씨(54)등 가족들이 뒤늦게 면회. 하루전인 23일 동생이 살아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면회를 하려했으나 당국에서 허락하지 않아 늦었다는 이들은 병실에 들어서자 마자 조씨를 알아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 창윤씨는 『살아있다니 다행이에요 오빠.얼마나 그리웠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창원씨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는다』며 『이렇게 기쁜 날이 또 있겠느냐』고 감격. 창원씨 부인 이애자씨(53)도 『생전 처음보는 아주버니의 기력이 너무 쇠약한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이에 조씨는 『잊어버리지 않고 나를 기억해주니 고맙다』는 말만 계속했다. 이들 남매는 1·4후퇴 당시 창호씨가 부산 동래 포병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먼저 서울을 떠나고 자신들은 뒤늦게 열차편으로 부산에 가 잠시 광복동에서 만났던 일들을 얘기하며 회상에 젖는 모습. 창원씨는 『중공군에 납치된뒤 형이 죽었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어머니만은 절대로 죽었을 리 없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형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말해 분위기를 숙연케 하기도. ○…한편 조씨를 치료하고 있는 서울중앙병원 김철주씨(26·가정의학과 레지던트 1년)는 『조씨가 지난 7월쯤 중풍에 걸려 오른쪽팔과 다리가 불편한 상태이고 오랜 광산노동으로 규폐증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며 『고령으로 인한 노쇠현상과 탈출과정의 피로가 쌓여 탈진상태를 보이고 있으나 식사는 정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 담당간호사는 『조씨가 병원에 처음 들어온 24일 하오 한손에 쥔 지팡이에 의지하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며 직접 엘리베이터에서 병실까지 걸어들어갔다』고 전언.
  • 물속 추락 승용차 창 깨고 탈출/구사일생 여교사의 악몽 순간

    ◎생사 갈림길속 가족들 떠올리며 헤엄쳐 죽음의 수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서울 안암국민학교 김민자교사(38)는 21일 성동구 자양동 혜민병원 707호실 병상에 누워 끔직한 사고순간을 되새겼다. 김교사는 이날 상오7시30분쯤 강남구 삼성동일대에 사는 동료교사인 박정애(45·여)·윤현자씨(60·여)·최정환씨(55)와 함께 최교사의 엑셀승용차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국민학교교사인 남편 이수동씨(40)보다 학교가 멀어 언제나 먼저 집을 나섰다.국민학교 5,6학년인 남매의 아침준비로 늦어진데다 가을비마저 추적추적 내려 자칫 지각을 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이번 비로 날씨가 추워질 텐데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겨울옷을 사러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뒷좌석에 앉아가던 김교사는 차에 탄 지 20여분 뒤 성수대교를 반쯤 건넜을 때 갑자기 좌우로 차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쿠르릉」하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에도 흔들림이 많아 불안하다고 생각해오던 다리였지만 이번 요동은 다른 때와는 다르다는생각을 하는 순간 앞서가던 16번버스가 다리밑으로 떨어졌고 경찰승합차도 시야에서 사라졌다.이어 자신이 탄 차도 밑으로 곤두박질,「쾅」하고 붕괴된 상갑판에 충돌하면서 의식을 잃었다. 잠시후 깨어나보니 승용차는 강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차가 물에 빠지면 유리창을 깨어 물을 안으로 들여보내야 문이 열린다는 말이 떠올라 『창문을 깨라』고 소리지른 뒤 함께 유리를 주먹과 발길로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더듬어보니 추락하면서 생긴 충격으로 유리창에 금이 가 있었다.핸드백으로 미친듯이 유리창을 두드려 깨고 4명이 가까스로 차안에서 빠져나왔다. 물살이 빨랐다.모두 필사적으로 헤엄을 쳤다.김교사는 와중에서도 윤교사가 수영을 못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손을 뻗어 팔을 붙잡았으나 윤교사는 물결에 휩쓸려 가버렸다. 이를 악물고 수면위로 올라온 김교사는 다행히 널빤지 한장을 붙잡고 『살려주세요』라고 소리쳤고 곧 달려온 경찰구명정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김교사는 동승한 박정애교사 역시 가까스로 구조됐다는 말은 들었으나 최교사등 나머지 2명은 영영 학생들 곁을 떠났다는 비보에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 「도시탈출」을 꿈꾼 아이들/곽영완 사회부기자(현장)

    ◎부모 무관심속 학교마저 “잦은 일인데…” 19일 하오 서울 강서구 가양동 K국민학교 6학년의 한 교실.여느때와 다름없었고 어느 누구도 같은반 김모양(13)의 자리가 텅 비어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곳은 원래 이런 일이 많아요.올해들어 가출신고된 학생수만 중고등학생을 포함해 1백여명이 넘는 걸요』밤사이 가출한 김양을 찾아 어머니 김모씨에게 돌려보낸 파출소 직원들의 말에서 이곳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김양등 5∼6학년 여학생 3명과 손모군(13)등 남학생 2명의 가출신고가 경찰에 접수된 것은 18일 하오5시였다. 이들 어린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도시영세민들 자녀들로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해 살고 있다는 점이다.편모슬하인 김양도 7평짜기 가양동 아파트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이번 가출은 점심시간 도중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자』는 친구인 손군의 제의로 모두 수업을 빼먹기로 하면서 시작됐다.그러나 서로 길이 엇갈리자 김양은 『시골인 강원도 철원에 친구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자』며 친구와 함께버스를 타고 이들에겐 「상당히 먼」철원까지 가게 된 것이다. 「탈출」을 꿈꾼 소녀 3명은 결국 하오11시쯤 강원도 철원읍 화지4리 현모씨(29·여)의 빈집에서 놀다가 현씨의 신고로 경찰에 인도됐다. 그러나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달려온 이들의 보호자들은 한결같이 아이들을 찾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또 한번 집을 나가면 가만 안두겠다』며 나무라는데 더 신경을 쓰는듯한 눈치였다. 심지어 양모군(13)의 편부(43·노동)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도 『왜 찾아왔어요.원래 그런 아이인데…』라며 오히려 귀찮아 하는 표정이었다. 학교에서조차 너무 잦은 아이들의 가출에 일일이 신경 쓸 수 없다는 듯 그저 여학생들만이라도 아무일 없이 되돌아온 것에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가정과 학교의 무과심에다 유명상표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다니는 잘사는 집 애들이 한없이 부러운 이들 어린이의 가출. 『아무 것도 부러운것이 없는,그리고 어른들의 나무람이 없는 시골로 가고 싶었어요』라고 울먹이는 김양의 모습에서 「도시탈출」을 꿈꾸는 아이들이 많을 것같아 안타까웠다.
  • 계속되는 생활고에 불안심리 팽배/점·손금보기 등 미신 유행

    ◎지관·무당 등장… 월급 80원에 복채 20∼40원/적발되면 강제 수용소 보내도 계속 확산 최근 북한에서 점을 치거나 손금과 관상을 보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북한을 탈출해 지난 4월 서울에 온 여만철씨 일가와 김대오씨(북한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 연합기업소 근무)등 최근의 귀순자들은 북한 사회에 점술과 손금·관상보기등 갖가지 유형의 미신이 점차 만연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씨의 부인 이옥금씨의 경우 북한을 탈출하기 보름전인 지난 3월3일 함흥시내 용하다고 소문난 할머니 점집을 찾았다고 한다.이씨는 내심 국경을 넘어 중국에로의 탈출을 염두에 두고 『세대주(남편)가 직장을 옮기려고 하는 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물론 그녀는 『집주인이 하려는 일을 따르는 게 좋다.3월에 북쪽으로 가면 운이 트이고,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점괘를 받고 탈북 결단을 내릴 수 있었고 이에따른 불안감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이씨는 궁핍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복채로 무려 20원(한화 약 6천원)을 냈다.북한의 보통 노동자들의 한달치 봉급이 70∼80원 정도이므로 이는 상당히 큰 액수다. 그러나 함흥시내 몇군데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점집에서는 보통 30∼40원씩의 북채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점술에 따른 복채는 현금이외에도 옥쌀(강냉이쌀),술,기타 생필품까지 받고 있다고 귀순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같이 북한 각지에선 점쟁이는 물론 관상쟁이,지관까지 등장하고 있고 단속을 피해 몰래 굿판까지 벌이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에서도 점보는 일은 비과학적으로 치부되어 단속의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묵인돼오다 최근 경제난으로 생활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점을 보려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민들 사이에는 김정일도 평양시 외곽의 용악산에 유명한 점쟁이를 숨겨놓고 『누가 흑심을 품고 있는가』라고 물어 자신의 정적이 누구인지를 점쳤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북한에서 미신행위가 번지고 있는 것은 북한당국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고 혹독한 종교말살 정책을 펴와 주민들이 신앙생활을 거의 할 수 없는데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생활고로 인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북한당국은 주민들 사이에 미신행위가 성행하자 조직단위별로 「미신행위 근절을 위한 비판토론회」까지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특히 상습적으로 점을 보는 주민들을 「사회주의 기강 저해자」로 분류,중노역장으로 강제 수용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점보기풍조가 근절되기는 커녕 당고위간부 부인들사이에도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북한당국은 『미신행위는 문화적으로 미각성된 사람들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초자연적 힘을 믿는 것』이라고 규정해 미신을 공식적으로는 금지하면서도 다른 한편 김부자에 대한 충성심 유도에 교묘히 활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얼마전 북한의 TV가 김일성우상화 프로그램에서 「김일성 손금」이라는 것을 클로즈업 시켜 놓고 『손금이 손바닥 끝부분에서 검지까지 일자로 그어져 있어 장군·수령을 할 사람으로 태어났으며,생명선이 손가락마디까지 뚜렷하게 이어져 있어 영생불멸할 운명을 타고 났다”고 선전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 목사가 고아된 소녀 데려와 양녀 삼은뒤 13년간 성폭행(조약돌)

    ○…서울형사지법 합의21부(재판장 이홍훈부장판사)는 8일 고아인 여신도를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0년이 구형된 인천시 E교회 목사 우완용 피고인(42·인천시 서구 가좌동)에게 강간죄를 적용,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사실상의 양녀로 보호관계에 있는 미성년인 피해자를 장기간 성폭행한 점,피고인으로부터 탈출해 새 삶을 살려던 피해자를 찾아가 마구 때린뒤 성폭행하고 법정에서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점을 감안해 중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우목사는 81년 9월쯤 자신의 교회에 다니던 H모양(당시 13세)이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고아가 되자 H양을 양녀로 삼아 목사사택에 살도록 하면서 『밭에서 첫 곡식이 나면 목사님에게 먼저 드리듯 순결의 열매도 목사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라는 설교를 하며 성폭행한뒤 H양이 지난 1월 목사사택을 탈출할때까지 13년동안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됐었다.
  • 범청학련대표 밀입북수사/검찰/한총련과 연계 가능성

    서울지검 공안2부(정진규부장검사)는 3일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공동사무국장 최정남씨(25·서울대 원예학과 4년 휴학)의 밀입북사건과 관련,「범청학련 남측본부」와의 연계여부 및 독일 베를린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의 팩스통신 교류내용을 정밀조사하는 등 구체적인 밀입북 경위조사에 나섰다. 검찰은 최씨의 밀입북에 「범청학련 남측본부」나 한총련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사전영장이 발부된 한총련의장 김현준씨(25)등 관련자들의 검거에 주력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최씨를 국가보안법위반(잠입탈출미수등)혐의로 입건,조사해 왔으며 최씨가 귀국하는대로 사법처리할 방침이다.지난해 7월 영국으로 출국한 최씨는 범청학련 공동사무국 남측대표로 활동해 오면서 93·94년 범민족대회와 김일성사망조문등과 관련,여러차례 밀입북을 시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 오늘 국군의 날/서울도심 시가행진/성남 서울비행장등서 화려한 행사

    건군 46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1일 3부요인을 비롯한 정부와 군 고위관계자·참전용사·시민·장병등 1만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도 성남 서울비행장과 서울 도심일원에서 거행된다. 정부는 이번 국군의 날에 문민시대들어 새롭게 탄생한 우리 군의 위용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민·군화합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방침아래 기념식 행사장을 지난해의 계룡대에서 서울비행장으로 옮기고 90년이후 중단됐던 서울도심 시가행진도 실시하는등 화려하게 치른다. 주행사장인 서울비행장에서는 취타대및 고적대연주·의장대시범등의 식전행사에 이어 상오 10시부터 45분간 본행사가 거행된뒤 2시간에 걸쳐 민군총화축하행사·분열·식후행사등이 진행된다. 민군총화 축하행사에서는 공중에서 특전사 요원들의 집단강하·공중탈출이 펼쳐지는 가운데 지상에서 사물놀이와 서울시립무용단 공연이 동시에 진행된다. 또 현역장병 중심으로 진행됐던 분열행사는 민과 군의 화합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6·25참전 16개국 기수단·광복회원·참전상이용사·역대 여군및 간호장교등 군 관련인사는 물론 고적대와 시민·학생등도 참여하게 된다. 서울도심 시가행진의 경우 보병부대가 서울역∼남대문∼광화문,기계화부대가 서울역∼남대문∼광화문∼동대문 구간을 각각 행진하며 사물놀이패·민속농악대·장병가족·시민등도 행진에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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