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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국적 드림팀에 영혼 팔아볼까

    다국적 드림팀에 영혼 팔아볼까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60여년에 걸쳐 완성한 희곡 ‘파우스트’는 많은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모든 학문을 섭렵했지만 부질없음을 느낀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꾐에 빠져 젊음과 영혼을 거래한다는 게 큰 얼개다. 누구나 공감을 가질 법한 이 얘기는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겁벌(劫罰)’,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 부소니의 ‘파우스트박사’ 등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변주됐다. 국립오페라단이 16~20일(17일 제외)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샤를 구노(1818~1893)의 ‘파우스트’를 올린다. 지난해 ‘메피스토펠레’에 이어 ‘파우스트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무엇보다 팬들을 설레게 하는 것은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의 일류 오페라단 못지않은 화려한 캐스팅. 파우스트 역(16·19일)을 맡은 테너 김우경(34)은 이번이 국내 오페라 데뷔 무대다. 2004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1위를 차지했다. 2006~2007 시즌 뉴욕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 주인공 알프레도를 맡아 주연급으로 발돋움했다. 이소영 국립오페라단장이 이미 3년 전에 김우경에게 출연 제안을 했을 만큼 품을 들였다. 김우경은 지난 8일 기자간담회에서 “파우스트는 그저 하나의 인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축약한 캐릭터”라면서 “연륜이 짧은 내가 그런 부분들을 손끝에서 표현하는 게 어렵지만 국내 데뷔인 만큼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메피스토펠레스 역(16, 19, 20일)의 새뮤얼 래미는 설명이 필요 없는 전설적인 베이스<서울신문 3월 8일자 21면>이다. 역시 국내 관객과는 처음 만 난다.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한 오페라에서 메피스토펠레스 역만 300회 이상 맡은 ‘악마 전문’ 배우다. 파우스트 박사가 사랑에 빠지는 마르그리트를 맡은 그리스 출신 알렉시아 불가리두는 라 스칼라 등 유럽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는 소프라노다. 김우경과는 2008년 영국 코벤트가든에서 ‘라보엠’ 중 연인 사이인 미미와 로돌포로 입을 맞췄다.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오타비오 마리노와 연출을 맡은 이소영 단장은 6년 전 성남아트센터에서 ‘파우스트’를 국내 초연할 때도 손발을 맞췄다. ‘정결한 집’ ‘보석의 노래’ ‘금송아지의 노래’ 등 귀에 익은 아리아는 물론, 발레 장면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1만∼15만원. (02)586-5282.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프로배구] 대한항공 달콤한 첫 경험

    “올해엔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했었죠. 그 약속을 지키게 돼서 기분이 좋습니다.” 신영철 감독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항공은 6일 구미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2010~11 NH농협 V-리그에서 LIG손해보험을 3-0(25-19 25-21 25-23)으로 누르고 23승(4패)째를 챙겼다. 이로써 2위 현대캐피탈과의 승차를 3.5경기로 벌리며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정규리그 1위를 확정 지었다. 챔피언결정전 티켓을 거머쥔 대한항공 선수와 구단 관계자는 얼싸안고 발을 구르며 감격의 순간을 함께했다. 집중력 싸움이었다. ‘삭발 투혼’ LIG보다 대한항공의 집념이 더 강했다. 에반 페이텍(22득점)과 신영수(15득점)가 고루 활약했고 최부식과 곽승석이 수비로 든든하게 받쳤다. 서브 리시브와 토스, 공격으로 이어지는 패턴 플레이가 잘 돌아가니 점수가 날 수밖에 없었다. 대한항공의 리그 우승은 1위 이상의 의미다. ‘신선한 반란’이다. 그동안 남자배구는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의 ‘양강 체제’였다. 2005년 프로배구 출범 이후 둘이 정규리그 우승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이 체제가 계속되면서 오히려 흥행에 악재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대한항공이 판을 깼다. 시즌 전 “양강 구도가 해체돼야 한다. 그 변화를 주도하겠다.” 던 출사표를 증명했다. 현대캐피탈을 올 시즌 네번 모두 꺾었다.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은 완승. ‘디펜딩챔피언’ 삼성화재와도 네번 붙어 세번 완파했다. 지난 시즌 중반 사령탑에 올라 만년 3위 대한항공을 정규리그 우승으로까지 이끈 신 감독의 지도력도 인정받았다. 선수들의 정신 상태를 확 바꿔 놓았고, 체력을 끌어올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원동력은 ‘시스템 배구’였다. 대한항공은 “스타 선수에 의존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철저한 팀플레이를 수행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했다. 서울에서는 상무신협이 우리캐피탈을 3-0으로 꺾고 9연패 사슬을 끊었다. 여자부 3위 흥국생명은 꼴찌 GS칼텍스를 3-0으로 완파했다. 구미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제사 지내려면 병풍이라도 있어야 했으니 동양화 쪽은 그래도 먹고살 만했는데 서양화는 참 어려웠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간 이중섭(1956년 작고)은 국제극장 뒤에서 점심으로 만날 호떡을 얻어먹었지. 그땐 호떡이 제법 커서 한끼로 때울 만했거든. 가격은 생각 안 나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어. 그런데 그 호떡 하나 사먹을 돈조차 없어 늘 쩔쩔맸지. 그러니 주인장이 불쌍해서 돈 조금만 받고도 주고, 공짜로도 주고 그랬어. 미안하고 고마웠던 이중섭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림이니, 그림 하나를 정성껏 그려서 줬어. 주인장도 그걸 받기는 했는데 참 난감한 거야. 나중에 보니 그걸 장독 뚜껑으로 쓰고 있더라고. 유화물감이니까 기름기가 있어서 물기를 잘 막아주거든.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이중섭이지만 제 눈으로 그걸 보고도 아무 말 못했지. 그땐 시절이 그랬어.” “아깝네요. 그거 하나 잘 갖고 있었으면 지금 몇억원은 할 텐데.” “예술가의 삶이란 게 그런 거 같애. 내가 프랑스에서 살던 곳이 페뢰야. 빛이 좋아 화가들이 좋아하는 곳이지. 고흐가 살던 오베르하고 가까운 곳이기도 해. 언젠가 오베르에 갔더니 그곳 주민들이 이런 얘기를 해. 고흐가 권총자살하는 데 잘못 쐈대. 즉사한 게 아니라 한 3~4일 앓다가 죽은 거지. 장례가 골치 아팠어. 이름 없는 가난뱅이 화가인 데다, 그런 방식으로 죽었으니 다들 꺼림칙한 거지. 겨우겨우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렀는데 이번엔 삯으로 줄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그림 하나씩 가져가라 그랬대. 그런데 아무도 안 가져갔다는 거야. 그때 아무거나 하나 골라 집었어 봐…. 어휴.”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백영수(89) 화백을 만났다. 이중섭·김환기·장욱진·유영국·이규상 화백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신사실파 화폭을 개척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신사실파는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의 후기인상파적 화풍을 뛰어넘기 위해 이들이 결성한 단체다. 동인 중 유일한 생존 작가가 백 화백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1977년 프랑스로 떠났다가 올 1월 34년 만에 영구귀국했다. 따뜻한 느낌의 ‘모자(母子) 시리즈’로 국내는 물론, 유럽 화단에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다. 롯데호텔에서 백 화백을 만난 것은 영구귀국 뒤 첫 전시가 롯데호텔 1층 롯데갤러리 재개관전이어서다. 롯데호텔 전신은 1956년 세워진 반도호텔이다. 이곳 1층의 반도화랑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갤러리다. 롯데갤러리 재개관을 맞아 백 화백을 비롯, 김종화(93), 권옥연(84), 황용엽(80), 윤명로(75) 등 원로 작가 다섯 명의 작품을 모았다. 백 화백은 ‘모자 시리즈’와 더불어 ‘여백 시리즈’를 내놓았다. 그런데 원로 작가들의 명성에 비해 호텔 로비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갤러리가 어째 좀 옹색해 보인다. 내걸린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백 화백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에이, 이것만 해도 엄청난 거지. 반도화랑은 더했어. 그 시절 화랑이란 게 일종의 기념품 가게였거든. 반도호텔 맞은편에 미국공보원이 있었고 옆에는 국립도서관이 있었지. 거기다 최고의 요지였던 명동이 곁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드나드는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이 반도화랑에서 작품들을 사갔어. 이때 박수근(1965년 작고)이 그린 그림이 조선 풍속화야. 외국인 눈에 맞춘 거지. 덕분에 미군 부대 초상화가에서도 벗어났고….” 반도화랑에서 일을 배운 박명자(67) 회장이 나가서 살림 차린 곳이 바로 현대화랑(지금의 갤러리 현대)이다. 박수근 화백도 반도화랑 전시를 통해 화단에 본격 데뷔했다. “그땐 반도호텔이 9층인가 해서 주변에서 제일 높았어. 그림 그린답시고 몰려다니면서 명동에서 막걸리 한잔 마시고 9층 칵테일 바에서 분위기 내고 그랬지. 반도화랑을 열었던 이대원(2005년 작고)이 오며 가며 이런저런 일거리도 줬고….” 당시 서양화 위상은 볼품없었다는 게 백 화백의 회고다. 심지어 이념 장벽까지 있었다. 장욱진(1990년 작고) 화백은 땅과 황소를 벌겋게 그렸다고 기관원에게 끌려갔단다.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추궁당하던 시절, 이중삼중 생활고에 시달렸다. “나도 무지하게 일했어. 서울신문사 뒤에 코오롱 아케이드 있지? 그게 1969년에 지어졌는데 그 지하 아케이드 디자인을 내가 했어. 그것만 했겠어? 국립극장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무대미술 작업도 내가 했지. 문예잡지나 시집 같은 책에다 삽화며 도안 그려넣는 일도 숱하게 했어. 그런데 그건 비교적 사정이 나은 거였어. 그나마 (작가) 이름값이 있으니 얻을 수 있는 일거리였거든. 이름 없는 작가들? 그냥 마냥 굶는 거지 뭐. 이중섭도 그렇게 굶어 죽은 거지.” 당시 작가들이 ‘괜찮은 일거리’로 꼽았던 것이 백화점 전시였다. 그런데 이것도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백화점 전시라는 게 지금처럼 멋지게 하지 않았어. 맨 꼭대기층에 전시해 두면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보고 상품을 사라고 해둔 거지. 일종의 미끼 상품이야.” 그렇게 자존심에 상처 받아가면서도 뭐가 좋아 그렇게 그림에 매달렸을까. “그냥.” 허무한 답이다. 말이 이어진다.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으면 그냥 좋아. 이번엔 내가 또 뭘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막 설레. 얼마 전에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갔는데 마네 그림이 너무 좋은 거야. 여러 번 본 건 데도 너무 좋더라구. 나도 저렇게 멋진 거 하나 그리고 싶다, 이 생각밖에 안 들어.” 젊었을 때도 그 생각만으로 버텨냈다고 한다. “내 젊었을 때만 해도 샤갈, 미로, 피카소, 달리가 살아 있을 때였어. 수입된 유럽잡지를 통해 그 그림을 보면 너무 부러운거야. 나도 저런 작가가 되고야 말테다, 그 희망 하나로 버틴 거지.” 실은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단다. “좋아하는 일인 데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잖아. 마티스는 아흔 넘어 손에 힘이 떨어지니까 가위로 종이를 오려서 작품을 만들어냈어. 르누아르는 말년에 골다공증이 오니까 몸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어. 그걸 보면서 그림이란 게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구나, 하는 계산도 했지.” 그렇게 지켜온 게 바로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1977년 프랑스로 건너간 것은 파리의 한 화랑이 백 화백의 진가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초대전으로 프랑스에 불러 들이더니 아예 주저앉혔다. 10년 넘는 활동기간 동안 큰 개인전만도 22차례, 이런저런 전시회까지 합치면 100회 넘게 전시를 열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뛰어난 화가’라는 명성이 쌓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1989년 교통사고를 당하더니 1994년 위암 선고까지 받았다. 한동안 붓을 놓을 수밖에. 몸을 추스린 뒤 더 이상 비행기를 타기 싫어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원래 살던 경기 의정부 집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하지만 창작 의욕만큼은 왕성하다. 아직도 주머니에 종이와 연필을 넣고 다니면서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재빨리 스케치한다. “아직 더 그릴 수 있어. 언젠가 프랑스 한인회에서 경로잔치 같은 걸 해 주겠다길래 펄쩍 뛰었지. 아직도 하얀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뛰는데 무슨….” 속으로는 고민도 있다. “미술가란 남이 안 하는 모양이나 색깔을 찾아내야 하니 스케치를 계속 모아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중에 작품으로) 뽑아내야지. 그리는 시간 자체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해.” 오는 10월쯤 신작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백영수 화백이 걸어온 길 ▲1922년 경기 수원 출생 ▲1945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 졸업 ▲1945년 전남 목포고등여학교 미술교사 ▲1947년 서울 화신백화점 개인전 ▲1952년 해군 종군화가 미술전 ▲1953년 신사실파전(국립미술관)▲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60년전 ▲1977년 프랑스행 ▲1978년 소시에테 나쇼날 보졀 그랑파레(파리) ▲1981년 프랑스 주재 한국작가전(파리), 프랑스현대작가전(도쿄도미술관) ▲1983년 살롱 도톤느 그랑파레(파리) ▲1985년 AAM전(파리) ▲1986년 프랑스 작가 초대전(일본, LA), 국제현대미술전(모나코) ▲2007년 신사실파 60주년(서울) ▲2011년 영구 귀국
  • [데스크 시각] 출입처가 없어지니… /임병선 영상콘텐츠부 부장급

    [데스크 시각] 출입처가 없어지니… /임병선 영상콘텐츠부 부장급

    손톱 밑의 검은 때가 모든 것을 말해줬다. 지난해 12월의 어느 날, 서울 종로의 커피점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노숙인 생활을 그만둔 지 반년쯤 된 그에게 빵 한 조각과 커피를 대접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였다. 그가 아침 일찍 거리에 나와 종종걸음치는 직장인들에게 노숙인 자활 잡지를 사달라고 1시간 30분이나 외친 뒤였다. 기자보다 열살은 많아 보이는 외모. 그런데 조심스레 물어 보니 아홉살 아래란다. 삶의 굴곡이 얼굴에 잔뜩 생채기를 남긴 듯했다. 삿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초리에 언뜻 천진난만함이 깃들던 순간들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달이 바뀔 때면 새로 나온 잡지를 들고 거리에서 목멘 외침을 늘어놓을 그를 그리워하게 됐다. 기자는 서울신문 편집국 소속이지만 방송 일을 하고 있다.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금요일 오후 7시 30분 방영되는 ‘TV 쏙 서울신문’이란 보도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21년 전 입사했을 때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첫 방송을 시작한 지 9개월이 됐고 4일 저녁 40회분이 방영된다. 여전히 촬영 현장에 나가면 “서울신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웬 동영상 카메라?”라면서 당황하는 취재원들을 본다. 조금만 설명하면 취재원들도 금세 고개를 끄덕인다. 신문 동네가 영 신통치 않으니 곁방살이에 힘겹겠구나 하는 동정도 읽힌다. 기자 또래보다 방송과 영상 전달 방식에 훨씬 친숙할 후배들마저 지면 일과 방송 제작을 병행하느라 벅차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 기자들을 괴롭혀 가며 프로그램을 꾸리고 있다. 주 1회, 한 주가 끝날 무렵에 방송을 내보내다 보니 피할 것도 많고 조심스러운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정된 인력과 자원으로 꾸리다 보니 지상파나 기존 보도전문 채널에서 제공하는 뉴스보다 여러 모로 손방이다. 그런 속에서 조그만 위안과 보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장삼이사(張三李四)와의 만남이다. 출입처에 매인 처지였다면 결코 만나기 쉽지 않았을 이들에게서 진한 사람 냄새를 맡고 있다.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의 쪽방촌에도 들어갔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정말 1980년대 달동네로 시간이동한 것 같았다. 두 손자를 건사하며 힘든 나날을 잇고 있는 할머니를 인터뷰했고, 그 동네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평화의 집’을 찾았다. 25년째 그곳에서 자원봉사하는 안정자씨는 병을 얻어 “이대로는 죽겠다싶어” 구로구 개봉동으로 이사했다고 했다. 말이 이사지 실은 피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내 어르신들이 전화로 찾아대는 통에 왕복 3시간의 버스 출퇴근을 3년째 이어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던 행복감을 쉬 잊지 못한다. 이 시설을 세우고도 그 흔한 사진 한장 걸어놓지 않고 한달에 한번 신용카드를 건네며 “어르신들께 맛난 것 만들어드리게 마음껏 장을 봐라.”고 당부한다는 임춘식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잊기 어렵다. 임 교수는 이따금 이곳을 찾을 뿐 언론에 좀처럼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겸손함으로도 커다란 존경을 얻고 있다. 노숙인들의 ‘큰형님’ 이명식 중랑구청 주무관이 동상 자국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 노숙인 발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또 어떤가. 후배 PD가 촬영한 영상으로 본 것이지만 출입처 칸막이 안이라면 과연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그렇게 평범한 이웃의 고단한 일상을 함께하다 보니 과거 출입처에서 만났던 취재원들이 참 재미없었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펜이나 컴퓨터 자판 대신 마이크를 잡다 보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됐다. 일전에 편집국 제작회의에서 많이 부족한 우리 프로그램 이름을 들먹이며 “많은 시청 바랍니다.”라고 말해 실소를 산 일도 있다. 감히 독자 여러분께 같은 말씀을 여쭌다. bsnim@seoul.co.kr
  • 포항 구룡포의 명물 ‘대게’ 납시오

    포항 구룡포의 명물 ‘대게’ 납시오

    “(출어해서 귀항까지) 4박 5일 정도 걸렸습니다. 게가 요즘 많이 야물고 판매도 잘 돼서 많이 잡아 왔습니다.” 지난달 26일 새벽 대게를 잡고 경북 포항 구룡포항에 들어온 신석준 대현호 선장 얼굴에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4일 오후 7시 30분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의 ‘TV 쏙 서울신문’을 통해 영덕 강구항이나 울진의 명성에 가렸다가 최근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구룡포항을 소개한다. 구룡포항은 전국에서 대게잡이 배가 가장 많이 나가는 곳으로 경북 지역 대게 어획량의 57%를 차지한다. 지난해 대게 위판 규모는 개인 판매를 합쳐 1279톤. 돈으로 환산하면 246억원에 이른다. 일본 오키 군도(群島) 주변 400~300m 심해에서 잡는 구룡포 대게는 속이 꽉 차고 살이 쫄깃한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 구룡포 대게의 맛이 뛰어나다는 입소문을 타서인지 이날 대게 어판장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크고 좋은 품질의 대게를 먼저 차지하려는 상인들이 옷섶에 손가락을 감춘 채 경매가를 제시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경매사들의 손동작은 꿈틀거리는 대게의 몸짓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엄성인 경매사는 “수입 대게의 양이 줄어 영덕이나 강구 상인들이 많이 몰려온다. 지난해보다 시세가 20% 정도 올랐는데, 하루 경매량은 2만~3만 마리다. 오늘 같은 날은 4만 마리 정도 판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모처럼 찾아온 구룡포항의 명성을 잇기 위해 자망통발선주협회는 싼값에 맛 좋은 대게를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선주들이 직접 정찰 가격으로 판매하게 만든 것이다. 겨우내 깔깔했던 입맛을 시원하게 되찾아줄 구룡포 대게 잡이는 봄까지 계속된다. ‘TV 쏙 서울신문’에서는 또 ‘연세대 호킹’으로 불리는 신형진(28·공대 컴퓨터과학과 졸업)씨에게 입학 9년 만에 학사모를 씌운 위대한 모정을 다룬다. 척추성 근위축증이란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신씨의 어머니 이원옥(65)씨는 미국 여행 도중 급성 폐렴에 걸린 아들이 투병하느라 휴학한 2년을 제외하고 7년 동안 매일같이 서울 개포동 집에서 신촌 연세대까지 등하교시켰다. 학교 측은 지난달 28일 학위수여식에서 이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이씨 덕분에 학교의 장애인 편의시설도 많이 개선됐다고 한다. 만성적이고 격렬한 통증에 시달리던 그가 어머니와 함께 일군 오늘의 영광을 함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 밖에도 ‘북녘 꽃제비 동영상’, ‘졸음과 싸우는 여의도’, ‘사법연수생 첫 양심적 병역거부자 백종건씨’, ‘진경호 국제부장의 시사 콕’, ‘법정 스님 입적 1년’ 등이 방송된다. 글 사진 박홍규피디 gophk@seoul.co.kr
  •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영화화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영화화

    지난해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올라 감동을 줬던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의 이야기가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윤진호(41) 감독은 2일 재단법인 마리아수녀회와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말아톤’(2005) ‘마이 파더’(2007)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의 시나리오에 참여한 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각본은 물론, 첫 연출도 맡았다. 윤 감독은 “2000년 KBS의 ‘현장르포 제3지대-수녀님과 오케스트라’ 편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됐다.”면서 “지난해부터 한 제작사와 영화화를 논의 중이며 4월에 시나리오를 완성해 가을쯤 촬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8년 전 처음 만난 (부산 소년의 집) 중학생들이 지금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됐다.”면서 “그들이 어렵게 들려준 이야기들, 직접 지켜본 성장 과정을 바탕으로 음악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성장드라마를 만들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소년의 집 아이들이 창단 25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는 1년 동안의 과정을 그릴 영화에는 40억~5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될 전망이다. 소년의 집은 미국인 알로이시오 슈워츠 신부가 1969년 부산 암남동에 설립한 아동 청소년 보육 시설이다. 오케스트라는 1979년 창설됐다. 처음에는 미사 반주를 위한 소규모 현악합주단으로 시작했지만 1996년 관악 파트를 보강해 교향악단의 틀을 갖췄다. 1999년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와 협연하고, 이후 마에스트로 정명훈(서울시향 지휘자)과 인연을 맺으며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 2월에는 세계 최고 음악가들만이 설 수 있다는 카네기홀 무대에 올랐다. 김두임 소피아 수녀는 “(카네기 공연 이후) 여러 곳에서 영화 제의가 들어왔지만 고사했다.”면서 “윤 감독은 2003년부터 꾸준히 아이들과 인연을 이어 왔고, 그의 작품들을 볼 때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어 영화화를 허락했다.”고 설명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Who&What]인간보다 똑똑한 컴퓨터, 왓슨을 만나다

     흔하디 흔한 퀴즈영웅의 얘기가 아니다.  2011년은 인류가 ‘로봇’ 또는 ‘컴퓨터’의 존재를 상상하기 시작한 이후 가장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올해 창사 100년을 맞은 IBM. 컴퓨터 산업의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시장을 독점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빅 블루’(IBM의 애칭)가 다시 한번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IBM 연구진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은 지난달 16일 미국 전역에 중계된 abc방송의 인기 퀴즈쇼 ‘제퍼디’에서 자신을 창조한 인간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퀴즈 영웅 두 명을 제압했다. 이틀간 벌어진 대결에서 왓슨은 7만 7147달러(약 8600만원)의 상금을 거둬들였다. 왓슨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것으로 추정되는) 비용에 비하면 그야말로 ‘껌값’ 수준. 그러나 전 세계 과학계는 흥분의 도가니다.  슈퍼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밤낮을 연구에 매달렸던 공학도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인간보다 더 똑똑한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실현됐다는 깊은 상실감 때문이다.  서울신문이 새롭게 연재하는 가상 인터뷰 시리즈 ‘Who & What’(후 앤 왓)의 첫 회 주인공은 바로 왓슨이다. 컴퓨터가 퀴즈에서 인간을 이겼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 등 이 대단한 컴퓨터에 관한 다양한 궁금증을 깊이 있게 짚어 봤다. 왓슨이 진정 ‘인간보다 똑똑한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제가 남아 있는지도 물어 봤다. 인터뷰는 국내 최고의 슈퍼컴퓨터 전문가 4명의 의견을 모아 구성했다.    ●겨우 4살인데 지나친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러울 것 같다. 원래 집안 자체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있다.  집안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색안경을 낄까봐 조심스럽기는 한데, 사실 IBM의 뉴욕 연구소 출신이다. 내 이름도 100년 전 IBM을 세운 토머스 J 왓슨에서 따왔다. 인간을 뛰어넘는 컴퓨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서부에 있는 사과공장(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워낙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컴퓨터 분야에서 지난 100년간 이뤄진 성과는 대부분 우리 집안에서 만들어졌다. 또 전국방송을 탔다는 이유로 마치 내가 ‘인간을 넘어선 최초의 컴퓨터’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찬사는 우리 아버지한테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대단한 분이셨나보다.  아버지 함자가 ‘딥블루’다. 혹시 세기의 체스 대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1997년 5월 11일, 아버지는 러시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와의 체스대결에서 이기셨다. 인공지능의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참고로 카스파로프는 그 이전 15년 동안 인간들 사이에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난 아버지보다 훨씬 발전했다. 1초에 80조회를 계산할 수 있고, 책 100만권을 읽었을 뿐 아니라 토씨 하나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를 시작한 핵심이 벌써 나왔다. 컴퓨터 입장에서 볼 때 체스대결과 퀴즈쇼가 다른 점이 있는거냐. 컴퓨터와 인간이 같은 문제를 놓고 풀면 당연히 엄청난 정보와 계산속도를 갖고 있는 컴퓨터가 이기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이번에는 딥블루 사건 때 시큰둥했던 학자들까지 난리가 났는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간단히 설명하면, 체스나 바둑은 ‘경우의 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다음 수를 어떻게 두면 그 다음에 상대의 반응에 따라 또 다른 수를 예측하는 식이다. 빠른 계산만 할 수 있고 어느 경우에 이기는지만 입력돼 있으면 충분히 인간을 이길 수 있다. 결국 체스판 안에서 정해진 규칙대로 두는 거 아니냐. 내가 출연한 ‘제퍼디’가 책에서 출제된다는 이유로 체스나 다를 것이 없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컴퓨터들이 쓰는 1과 0의 디지털 코드를 보고 이해할 수 있나?    ●당연히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입장을 바꿔보자는 얘기다. 인간이 컴퓨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컴퓨터 역시 인간의 말을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딱 정해진 문제만 그대로 출제하면 쉽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근데 그게 퀴즈냐. 제퍼디쇼가 수십년 동안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출제되는 문제에 대한 지식을 담은 책이 있지만 단순히 암기력을 측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자 알렉스 테레벡은 자기 맘대로 문제를 꼬아서 내고, 책에는 없는 독특한 표현까지 동원한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혹시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창에 퀴즈 문제를 그대로 입력하고 답이 나오나 찾아 봐라.    ●어라. 정말 답이 안 나오고 수많은 검색 결과만 나온다.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컴퓨터는 애초부터 정답을 찾아주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 컴퓨터들은 문장으로 된 퀴즈 문제를 입력하면 ‘답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수백만개의 문서만 보여줄 수 있다.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고. ‘비슷한 것’ 수백만개를 찾아서 나열만 할 뿐 자기가 뭘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원래 컴퓨터가 만들어진 방식이다.    ●그럼 당신은 인간의 의도를 이해한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함께 출연했던 켄 제닝스(74연승을 기록한 제퍼디 챔피언)나 브래드 루터(역대 최다 상금 획득자)를 이길 수 있었겠는가. 그 친구들은 거의 귀신 아닌가. 들으면 바로 버저를 누르고 정답을 말하는 수준이다. 솔직히 대결이 쉽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문제를 들으면 알거나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알 경우에는 떠오르는 답 2~3개 중에 헷갈리는 정도고. 반면 난 기본적으로 문제를 들으면 알고 모르고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다. 비슷한 답 수백만개를 떠올린 후에 그 중 한 개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없애야 답을 할 수 있다. 확률 문제이니 틀릴 수도 있지만 인간 챔피언들과 붙어서 이겼으니 정확도는 논란의 여지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난 이미 프로그램상으로는 출제한 인간의 의도까지도 파악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듣다 보니 당신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결은 뭐냐.  퀴즈에 특화된 부분도 있다. 기본적으로 내가 찾아낸 답이 신뢰도 기준에 못 미치면 버저를 누르지 않고, 답하지도 않는다. 지고 있을 땐 신뢰도가 좀 떨어져도 버저를 누르고, 많이 이기고 있을 때는 신뢰도가 아주 높아야 답변을 하는 요령도 갖추고 있다. 기술적인 부분은 IBM하고 얘기해야 된다. 알아도 영업비밀이라 말할 수 없고. 나 조차 내 머릿 속이 정확히 어떻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지는 잘 모른다.    ●근데 컴퓨터가 퀴즈를 잘 푼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게 있겠냐.  내가 이런 질 낮은 인터뷰를 계속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인터뷰이니 답은 해야겠지. 만약에 컴퓨터가 사람의 말을 이해해서 원하는 답을 정확히 찾아줄 수 있다면 고객센터 자동응답전화(ARS)에서 상담원 연결 버튼이 제일 먼저 사라질거다. 당신네 한국사람들이 자랑하는 삼성전자나 LG전자, 현대자동차에서 상담원 콜센터를 운영하는 데만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나. 나 하나가 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의학상담이나 교육도 마찬가지 아니냐. 선생님은 문제를 푸는 방법을 틀릴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난 절대 틀리지 않는다. 병원에서도 의사는 실수할 수 있지만 나는 자료만 충분하다면 정확한 진단을 내리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경험을 더 쌓으면 말이다. 내 아들이나 손자는 완벽한 선생님이자 의사, 상담원이 될 거다.    ●켄 제닝스가 당신한테 지고 나서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진짜 그런 세상이 온 건가.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제닝스가 오버한거다. 솔직히 좀 부끄러운 얘기기는 하지만, 이번 제퍼디 방송에서 미국에 있는 도시를 묻는 질문에 ‘토론토’라고 답변해서 방청객들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해명을 좀 하자면 미국에도 토론토라는 도시가 많다. 퀴즈가 원하는 바가 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지. ‘지식’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다. 만약 틀려도 곧 바로잡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난 업그레이드 없이는 그 상황에서 같은 질문을 할 경우 계속 잘못된 답밖에 말하지 못한다. 아직까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번 대결에서는 텍스트 형태로 문제가 출제됐는데, 진짜 사회자가 출제되는 말로만 대결을 펼친다면 인간을 못 이긴다. 난 아직 난청상태라고 할까. 음성인식은 정말 어려운 과제다. <도움말 주신 분> ●이식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터 응용지원실장 ●권대석 클루닉스(슈퍼컴퓨터 제조회사) 사장 ●유범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인지로봇센터장 ●신문봉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지식정보팀장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데뷔 45년 전국투어 나서는 ‘젊은오빠’ 남진

    [김문이 만난사람] 데뷔 45년 전국투어 나서는 ‘젊은오빠’ 남진

    그때 20살의 한 청년은 ‘서울 플레이보이’란 노래로 세상 무대를 처음 노크했다. ‘나는 못생겼지만/머릴랑 깎지 않고 수염마저 길렀지만/멋쟁이 서울 플레이보이’라고 했다.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울려고 내가 왔나/낯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라고 다시 한번 호소했다. 여전히 냉담했다. 오기가 생겼다. 이듬해 청년은 ‘가슴 아프게’라는 카드를 꺼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흐느끼듯 가슴속을 후벼 파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비로소 통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그는 당시 톱스타 문희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는 사고(?)까지 쳤다. 하지만 청년은 불붙은 인기를 뒤로하고 훌쩍 떠나 버렸다. 어디로?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것. 청룡부대의 노래처럼 ‘월남의 하늘 아래~’에서 군 복무를 마친 청년은 귀국 직후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 무대를 열었다. 소문을 듣고 많은 여성 관객들이 찾았다. 공연이 끝날 무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빠, 오빠’를 외쳤다. 이날부터 청년에겐 ‘오빠부대 원조’, ‘콘서트의 원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절정은 30살 때 ‘님과 함께’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고 요동을 치며 읊었다. 젊은 남녀들에게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상징하듯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 가요 45년사를 관통하면서 빅스타의 길을 흔들림없이 걸었다. 블루스와 트로트를 비롯해 왈츠, 차차차, 트위스트 등 장르를 뛰어넘는 천부적인 가창력과 카리스마 넘치는 특유의 무대 동작으로 변함 없는 국민 가수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이번에 또 한번 대형 사고를 친다. 가수 남진(66)씨. 다음 달 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에 나선다. 그것도 신곡 세 곡을 들고 확 달라진 새로운 모습으로 팬들과 만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노래 인생 2막의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다. 더 ‘젊어진 오빠’의 모습으로, 정열의 무대를 꾸미는 것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 교대역 인근에 있는 ‘차태일 뮤직 스튜디오’. 남씨는 공연을 앞두고 열심히 녹음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흔들고 손동작과 미소를 지으며 역동적으로 노래를 불러댄다. 라이브 공연에 맞춰서인지 국민 애창곡 ‘님과 함께’는 더 빠른 템포로 편곡됐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이 덩실덩실 움직이게 했다. 신곡 ‘잘가라 청춘아’도 불렀다. 노랫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속절없는 청춘아/가거든 혼자 가지/아무도 모르는 샛길로 찾아와 나까지 데려가나/그래도 괜찮다 고맙다 청춘아~’ 4분의4박자 빠른 리듬풍의 노래다. ‘둥지’ 등으로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차태일씨가 얼마 전 작곡했다. 그렇게 30여분. 녹음을 마친 남씨와 마주 앉았다. 6년 전 서울 여의도에서 만날 때보다 훨씬 젊어졌다고 했더니 “그때는 살이 많이 쪘었다. 지금은 12㎏이나 빠져 (몸 상태가) 아주 좋아진 것 같다.”며 웃었다. 거듭된 질문. 젊어지는 비결이 무엇일까. “언젠가 노래를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살이 빠지더군요.(웃음) 노래를 알면 알수록 더 노력하게 됐습니다. 무대에 서면 힘찬 박수를 받게 되거든요. 그런 노래의 힘, 팬들의 힘이 저를 젊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젊어지도록 열심히 해야겠지요.” 이번 무대도 그런 노래의 힘을 바탕으로 꾸몄다. 하여 의미 또한 남다를 터.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저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1965년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시민회관에서 데뷔 곡을 불렀습니다. 또 1971년 첫 단독 공연을 가진 곳이 시민회관입니다. 또 그해 첫 가수왕상을 받은 장소도 시민회관이고요. 이번 무대가 40년 만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갖는 셈입니다. 물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으로 명칭이 바뀐 다음에는 처음이지요. 2시간여 동안 신·편곡을 포함해 모두 30곡 정도 부를 예정입니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곡은 가사에 느낌이 확 꽂혀 선택했습니다. 기대해도 괜찮습니다.” 그는 특히 이번 공연을 위해 ‘사랑하며 살 테야’라는 타이틀 곡으로 45주년 기념 음반을 제작했다. 지금까지 성원을 보내준 팬들과 함께 사랑하며 살겠다는 뜻을 옹골차게 담았다. 또한 노래 인생 1막의 완결편 음반이자 전국 투어를 계획한 것도 이런 마음에서였다. 옛날 극장무대 시절에 대한 추억이 있어 전국의 광역시는 모두 다닐 예정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의 팬들로부터 신청 곡이 벌써부터 쇄도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 주제가 ‘사랑’이나 데뷔 곡 ‘서울 플레이보이’ 등 당시 노래는 좋았지만 히트치지 못했던 곡들도 오랜만에 불러 보기로 했다. 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이번처럼 두 시간 동안 라이브로 30여곡을 부를 때, 아무리 자신의 노래라고 하지만 사람인 이상 가사를 잊어 버리지는 않을까. “무대 앞쪽에 설치된 모니터에 가사가 뜨긴 하지만 그걸 볼 수는 없습니다. 보면 몰입이 안 되거든요. 예를 들어 ‘둥지’만 하더라고 수천번 불렀는데 가사를 잠시 놓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비슷하게 얼버무리면서 얼른 넘어갑니다. 또 감기나 몸살 기운으로 정신이 약간 멍할 때도 가사를 놓치는 경우가 있지요. 또 20~30대에는 안 그랬는데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런 일이 간혹 있습니다.(웃음)”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역시 주저 없이 대답한다. “가수 데뷔 전에 닐 세다카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자주 들었지요. 공교롭게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몇 가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엘비스도 21살 때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부르며 인기를 끌었지만 곧 군 입대를 했습니다. 제대한 뒤에는 저와 비슷하게 영화 수십편에 출연했지요.” 남씨 역시 21살 때 ‘가슴 아프게’로 스타가 됐지만 곧 군 입대를 했다. 이후 자신의 노래를 영화화한 ‘가슴 아프게’, ‘울려고 내가 왔나’, ‘별아 내 가슴에’ 등에 출연했다. 그럴 때마다 헤어 스타일이나 몸동작 그리고 하얀 가죽옷에 금속 장식이 있는 프레슬리 의상 차림으로 나와 팬들을 열광시켰다. 지금까지 그가 부른 노래는 1000여곡이나 된다. 대부분 애창되고 있지만 ‘남진’ 하면 얼른 떠오르는 대표 곡은 역시 ‘가슴 아프게’와 ‘님과 함께’가 아닐까 싶다. 일화 한 토막. 1966년 남씨는 작곡가 박춘석씨를 만난다. 이때 박씨는 작사가 정두수씨에게 가사 하나를 부탁했다. 고민하던 정씨는 서울 마포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라디오 연속극에서 뱃고동 소리를 들었다. 고향이 경남 하동인 정씨는 갑자기 바다가 그리워져 인천 연안부두로 달려갔다. 하지만 안개가 자욱해서 바다도 보이지 않고 연안 여객선들도 출항하지 못했다. 그러자 승객들 사이에서 ‘가슴이 아프다’라는 탄식이 나왔다. 귀가 번쩍한 정씨는 바다로 인해 생기는 이별을 모티브로 가사를 썼다. 처음 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이었다. 그러나 너무 올드패션의 느낌이 들어 고민 끝에 ‘가슴 아프게’로 바꾸게 됐다. ‘님과 함께’는 작곡가 남국인씨의 부인이 작사한 곡. 처음에는 동요처럼 느껴졌지만 때마침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삽시간에 남녀노소가 즐겨 부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가 ‘남진’이 된 사연도 있다. 본명은 김남진(金湳鎭)이다. 데뷔 직전 문여송 감독이 ‘남쪽의 보배’라는 뜻을 담긴 ‘남진’(南珍)으로 예명을 지어 주었다. 이름대로 지난 45년 동안 수많은 히트 곡을 내며 가요계의 보배로 살아 왔다고 얘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올해 66살. 영원한 청년인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팬들의 힘이 있었기에 제 인생에서 45년 동안 가수라는 직업으로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어느 날 세월 깊이 왔다는 것을 알았지요. 데뷔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앞으로 정말 좋은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가수로서 성심을 다해 잘 마무리하는 것이 제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다시 녹음실로 간 그는 신곡 ‘너 말이야’ 중에서 ‘널린 게 행복이잖아~’를 힘차게 불렀다. ‘그렇구나’라는 찐한 느낌표를 뒤로하면서 헤어졌다. 편집위원 km@seoul.co.kr ●가수 남진 배우 꿈꿔 영화과 진학… 윤정희·남정임·문희 ‘트로이카 여배우’들과 작품 1945년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6년 목포 북초등학교를 나온 후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경복중학교를 다녔다. 다시 고향으로 가서 1962년 목포고를 나온 뒤 평소의 꿈인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한양대 영화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1965년에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 가수로 데뷔했다. 가수 활동을 하면서 끼를 살려 60여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당시 윤정희, 남정임, 문희 등 트로이카 여배우들과 자주 출연했다. 남씨의 부인은 부산 출신이다. 슬하에 3녀 1남을 연년생으로 두었다. 지난해 11월 큰딸이 결혼했다. 막내인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했다. 자녀 중에는 셋째 딸이 노래에 소질이 있어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라고 남씨는 말했다. 건강 관리를 위해 자택인 경기 성남시 분당의 헬스클럽을 가끔 찾는다. 골프 핸디캡은 10 정도이며, 이탈리아 칸초네와 프랑스 샹송을 듣는 취미도 있다. 추억의 팝송도 자주 듣는다. 그는 1965년 데뷔 당시 ‘서울 플레이보이’, ‘울려고 내가 왔나’ 등을 발표했으며 이듬해 공전의 히트 곡 ‘가슴 아프게’를 발표했다. 1969~71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 직후인 1971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첫 리사이틀 공연을 벌였고 한국무대예술상 그랑프리를 2회 받았다. 1969∼73년 TBC 남자 가수상 대상을 3회 수상했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1991)과 한국연예협회 이사장(2000) 등을 지냈다. 대표 곡으로 ‘가슴 아프게’, ‘별아 내 가슴에’, ‘미워도 다시 한번’, ‘님과 함께’, ‘그대여 변치 마오’, ‘빈잔’, ‘둥지’ 등이 있다.
  • [주말 영화]

    ●떠날 때는 말 없이(EBS 일요일 밤 11시) 1955년 서울. 빈민촌에서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주던 미영(엄앵란·왼쪽)은 작은 사고로 가난한 청년 명수(신성일)와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그 후 우연히 다시 미영과 마주치게 된 명수는 그녀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 딸이었음을 알고 사표를 제출한다. 그러나 며칠 후, 가면무도회에서의 재회를 계기로 다시 회사에 출근하게 된 명수는 미영과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고, 옥신각신하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한편 미영의 부모는 그녀를 은행장의 아들 준호(윤일봉)와 결혼시킬 계획이지만 현재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미영은 집을 뛰쳐나와 명수를 찾아간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곧 행복한 둘만의 생활을 꾸려나간다. 경제적인 궁핍에서 비롯된 갈등의 시간들이 지나간 뒤, 미영은 집안에서 재봉일을 하고, 명수는 직장에 다니며 고등고시를 준비하는 등 평온한 생활을 이어가다 첫딸 영옥을 얻는다. ●명화극장 굿 바이(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도쿄의 한 오케스트라에서 프로 첼리스트로 일하던 고바야시 다이고. 어느날, 갑자기 악단이 해체되어 꿈을 포기한 채 아내인 미카와 함께 고향인 야마가타현의 시골 마을로 이사간다. 취직자리를 찾고 있던 다이고는 신문에서 ‘여행 준비 도우미’라는 구인 광고를 보게 된다. 여행사인줄 알고 찾아간 사무실에서 뜻밖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채용된다. 하지만 NK 에이전트라는 이 회사는 알고 보니 납관 전문 사무실. 난처해진 다이고는 일을 그만두려 했지만 사장인 사사키의 권유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다이고는 시간이 갈수록 납관사 일에 충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새 직업에 대한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아내인 미카는 더러운 일이라며 그만 두라고 말하는데…. ●일요시네마 향수(OBS 일요일 밤 11시 20분) 18세기 프랑스, 악취나는 생선 시장에서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천재적인 후각의 소유자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벤 위쇼). 난생 처음 파리를 방문한 그곳에서 그르누이는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여인’의 매혹적인 향기에 끌린다. 그 향기를 소유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한물간 향수제조사 주세페 발디니(더스틴 호프만)를 만나 향수 제조 방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인의 ‘향기’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간절해진 그르누이는 마침내 파리를 떠나 ‘향수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그라스(프랑스 남동부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향수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한편 그라스에서는 의문의 살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 [뛰는 부동산 나는 물가] 71세에 첫 내 집… ‘보금자리’ 없었더라면…

    [뛰는 부동산 나는 물가] 71세에 첫 내 집… ‘보금자리’ 없었더라면…

    20여년 농사를 지었지만 다섯 식구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어 전남 신안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공사장 경비원에서부터 보따리 장사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이 다해 봤지만 그래도 사는 것은 항상 고달팠다. 손에 쥔 돈이 없으니 25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집을 장만해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살 수 있으리란 꿈은 놓지 않았다. 지하방에서 7년여 만에 방 두개짜리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날,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벗어났다며 좋아하던 애들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그때는 내 집이 바로 손에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경비원의 월급으로 애들 키우면서 집 장만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장사에 실패하면서 금세 손에 쥘 것 같았던 내 집 마련의 꿈은 남의 얘기가 돼 버렸다. 김이곤(71·서울 중랑구 중화동)씨는 서울 강남 세곡지구(강남지구) 보금자리주택 생애최초 특별분양에서 전용면적 84㎡ 아파트에 당첨됐다. 당첨자 중에서는 최고령자다. 18일 서울 사당3동 대림플라자 경비실에서 만난 그는 아직도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아침 출근 전 집에서 당첨 사실을 알았다. “내 나이 일흔한 살에 서울에 내 집이 생겼다니 믿어지지 않았지요. 집사람과 몸이 불편한 딸아이가 제일 좋아했지. 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고….” 깊게 팬 주름과 거친 손에는 힘들었던 그의 삶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나만 어려웠나. 그 시대에는 모두가 어려웠지.”라고 손사래를 쳤다. “71년이 꼬박 걸렸네. 내 이름으로 된 집문서를 갖는 데 말이야. 이젠 여한이 없어.”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서 태어난 김씨는 23살 때 결혼을 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생활고 끝에 1983년 아들 형제, 태어나면서 몸이 불편한 딸 등 다섯 식구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첫 둥지는 서울 공릉동 250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에 틀었다. “고향 선배가 경비원 자리가 있다고 해서 자식들하고 무작정 상경을 했지.”라며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한 3년 동안은 밤에 아무리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어. 자는 애들을 밟지 않고는 나갈 수 없었거든. 그때 꼭 내 집을 마련하겠다고 결심했지.” 김씨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후 기억도 다하지 못할 만큼 수십 차례 전셋집을 옮겨 다니면서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1988년 청약저축에 가입했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불입액을 못 넣을 때도 많았고, 기껏해야 2만원만 넣을 때도 있었다. 23년여 동안 모았지만 총액 1100만원에 불과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93년에는 장사도 시작했다. 시장 도매상에서 신발, 가방, 옷 등 물건을 사다가 길거리에서 파는 보따리장수를 했다. “한 3년 동안 장사하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까먹었지. 빌린 장사 밑천 갚느라고 아주 힘들었어….” 김씨의 실패담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공사현장을 찾았고 착실하게 저축을 했다고 한다. 환갑인 2005년부터는 다시 경비원으로 일하며 꿈을 키웠다. 그는 결혼한 큰아들 빼고 네 식구가 중화동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 전세금은 4000만원. “입주금은 마련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라면서 “예·적금과 대출을 받으면 분양대금 3억 2000만원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서 ‘대장장이 45년’ 류상준·상남 형제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서 ‘대장장이 45년’ 류상준·상남 형제

    단조(鍛造)의 예술이다. 아무리 딱딱한 쇳덩이라도 필요한 생활 도구로 척척 만들어 내니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천년의 기술도 뚝딱 재현해 낸다. 인기 TV드라마 ‘서동요’ ‘대장금’ ‘주몽’ ‘태왕사신기’ 등에서 봤던 소품 도구도 그러한 단조의 예술로 빚어냈다. 하여 어떤 시인은 신화창조의 영웅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류상준(58)·상남(55)형제. 요즘 같은 ‘현대문명’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45년째 대장장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형제끼리 아름다운 동행의 길을 걷고 있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대장장이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집도 사고, 자식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행복하게 산다. 이쯤 되면 실업난이라는 이유로, ‘눈높이’라는 핑계로 탱자탱자 노는 이들에겐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수색역 바로 옆 ‘형제 대장간’. 10평밖에 안 되는 공간이다. 두 형제는 뜨거운 화덕 앞에서 쉴 새 없이 메질을 하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두들기고 다지고, 벌겋게 달궈진 고철덩이들은 형제의 손기술에 의해 새로운 모양으로 태어났다. 낯선 손님이 왔음에도 “잠깐만 기다리쇼.”라는 말만 던지고는 바삐 일만 한다. 그렇게 20여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인터뷰에 응했다.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장간 안에는 낫, 도끼, 지렛대, 이북호미, 경기호미, 낙지호미, 굴 까는 조새 등 생활 주변에서 사용되는 각종 도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앉을 의자 하나 놓을 공간도 없어 서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인기척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형제에게 뭣부터 물어볼까 찬찬히 생각하다가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인사했다. 형 상준씨가 “천직인데요, 뭘.”이라면서 피식 웃는다. 천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들린다. 말 그대로 타고난 직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람을 느끼고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겠다. 다음 궁금증이 ‘얼마나 벌까’였다. 이번에는 동생 상남씨가 “신문에 쓸 건 아니겠지요.”라면서 “(한달) 천만원 정도 벌어요.”라고 답한다. 이어 “나는 월급을 받고 형은 사장님이다.”라면서 웃는다. 또 생긴 궁금증, 과연 자녀분들은? 형 상준씨는 “우리는 딸만 둘인데 지금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생 상남씨는 “우리집 아들은 대학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고 얼마 전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화 하나. 상남씨의 아들이 취직면접 때였다. 면접관이 아버지 직업을 묻자 아들은 “수색에서 형님과 함께 대장장이로 일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사는 집안이구나’라고 느꼈던지 다음 질문을 안 하고 그냥 통과시키더라는 것. 형 상준씨도 한마디 거든다. “우리집 딸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가 대장장이라고 자랑을 해 학교 어린이들이 단체로 대장간 체험을 하러 오기도 했지요.” 잠시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 미안해진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 훌륭하게 살아온 대장장이의 내력을 얘기해 달라고 했다. 형 상준씨가 말한다. 서울 모래내(남가좌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 대장간을 보면서 신기함에 빠졌다. 쓸모없는 쇳덩어리들이 생활 도구, 농기구 등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졌다. “저는 원래 공부에 취미가 영 없었어요. 공부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한테 ‘중학교 진학을 안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어떤 부모도 그런 자식을 좋아할 리 없지요.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렇다면 기술을 배우라. 밥은 안 굶을 것이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동네 대장간으로 달려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때 대장장이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박용신(4년전 작고) 스승님이었지요. 풀무질부터 차근차근 배웠습니다.” 1966년 당시 대장간에서 받은 첫 봉급은 1000원이었다. 그때 호미 한 자루 가격이 50원. 일당으로 따지면 비록 호미 한 자루 값만도 못했지만 그는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쇠망치를 잡는 단순한 일이었으나 천직으로 여기고 열심히 대장장이의 길을 닦았다. 또한 당시 아버지는 편자 박는 일을 했는데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아버지한테 그 일을 배우기도 했다. 성격이 워낙 꼼꼼해 물건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런 점이 스승한테 인정을 받으면서 10년동안 모래내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익힌 뒤 1976년 서울 암사동으로 가서 대장간을 차렸다. 그의 정성스러운 솜씨로 젊은 나이에 단골손님들도 많이 생겼다. 6년 뒤인 1982년, 상준씨는 다시 모래내에서 대장간을 차렸고 1997년 수색으로 옮기면서 동생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 이르자 동생 상남씨가 얘기한다. “형님은 일찍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고 저는 원래 장사를 했어요. 떡집, 야채장사, 치킨집,옷장사 등 안 해 본 게 거의 없어요. 그러다가 거덜나서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가 됐지요. 친구집에서 전전하기도 했고…. 그런 저를 보고 형님이 대장장이 일을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흔쾌히 받아들였지요. 같이 한 지 15년 됐는데 그 사이에 빚도 갚고 집고 사고 자식들 대학 보내고 다 했습니다.” 그는 또 “형님도 월세 살다가 6년전에 집을 장만했고 외환위기(IMF) 당시 은행에서 빌린 3000만원도 열심히 일해서 다 갚았다.”면서 “대장일을 하다 보니 땀 흘린 만큼 돈도 벌고 보람도 느낀다.”고 말했다. “원래 1년만 해야지 하고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오게 됐다. 이제는 천직으로 여긴다.”고 털어놓았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형제는 주로 농기구를 제작했다. 지금은 공사장이나 건축을 위한 도구를 만든다. 얼마 전에는 북한의 개성공단 건설에 필요한 도구를 2000여개나 주문받아 납품했다. 최근에는 방송국에서 자주 찾아온다. 역사드라마에 사용할 소품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 쇄도한다. 역사속의 병장기는 물론이고 드라마 ‘식객’에서 사용된 ‘서울식 전통 칼’도 제작해 화제가 됐다. 이래저래 형 상준씨는 TV에도 여러번 출연했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쇳덩이로 예쁜 장미꽃을 만들었고 EBS 특집 ‘극한직업’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했다. 최근에는 금나라 병장기를 재현하고 있다. 칼과 창, 방패 등 금나라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대학교수의 부탁을 받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전국에서 주문 오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외국인 교수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영국에서 매년 대장장이 국제대회를 여는데 한번 참가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인간문화재급에 해당하는 명장 신청을 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형 상준씨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와 글도 잘 모르니 싫다.”면서 뿌리쳤다. 가끔 칼을 잘 만드는 명장도 찾아와 한수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형 상준씨한테 지나온 대장장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스승이 만든 물건을 가지고 와서 수리해 달라고 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희 스승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홀로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애들도 다 잘 커 주고 그러니 걱정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도 직업을 잘 택한 것 같아요.” 그는 똑같는 김장 김치라도 써는 칼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르듯 정성을 쏟는 만큼 물건의 질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다. “전통 대장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울에만 해도 현재 10개 미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제품도 많이 들어오고…. 특히 대장장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요. 몇년 후면 아마 서울에서 대장간이 사라지고 말걸요.” 형제의 꿈은 무엇일까. 동생 상남씨가 말한다. “그동안 만든 작품들이 많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병장기라든가, 삼국시대의 농기구 등 역사 속의 우리 것을 재현하는 전시관을 만들 생각입니다. 또한 대장간 체험장을 만들어 아이들이 견학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60대 후반에는 꼭 성사시킬 것입니다.” 형제는 뜨거운 화덕 앞에서 다시 망치를 들고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를 두들긴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45년 세월만큼이나 단단해진 그들의 인생이 아름다워 보인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류상준·상남 형제는 “국내 첫 鍛造 예술전시관 만들겁니다” 형 상준씨는 1954년 서울 모래내(남가좌동)에서 8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66년 수색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모래내 대장간에서 스승 박용신(4년전 작고)씨한테 대장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년동안 모래내에서 기술을 익힌 뒤 1977년 서울 암사동으로 옮겨 대장간을 열었다. 지금의 수색역 근처에서 대장간을 차린 것은 1997년. 이때부터 동생과 함께 ‘형제 대장간’을 시작했다. 그의 딸 둘은 중앙대와 추계예술대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있다. 동생 상남씨는 1957년 모래내에서 태어나 수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장사꾼으로 나섰다. 떡집, 치킨집, 옷장사, 야채장사를 하다가 망해 15년 전부터 형과 함께 대장장이 일에 동참했다. 상남씨의 아들은 대학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고 현재 KCC그룹에 다니고 있다. 형제의 꿈은 국내 최초 단조예술 전시관을 만드는 것이다.
  • 바둑 이창호 22년만에 무관

    ‘돌부처’ 이창호가 21년 6개월 만에 무관(無冠)으로 떨어졌다. 국수타이틀 보유자인 이창호 9단은 14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열린 제54기 국수전 도전 5번기 제4국에서 도전자 최철한 9단에게 흑으로 98수 만에 불계패했다. 지난달 12일 1국에서 이겼지만 2, 3국에서 연달아 패한 이창호는 배수의 진을 치고 최근 유행하는 중국식 포석을 들고 나왔다. 전투가 강한 상대를 의식해 처음부터 차분하게 실리를 벌어들이며 집에서 우위를 지켜나가는 작전을 펼쳤다. 최철한도 좌상귀를 중심으로 상변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해 나갔고 바둑은 전체적으로 두꺼운 백의 흐름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역전되자 이창호는 하변에서 흘러나온 대마사냥에 승부를 걸었다. ‘기다림의 바둑’이라는 이창호가 최철한식 ‘올인 작전’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직선의 공격은 실패했고 우변이 파괴되는 큰 손해를 입은 이창호는 결국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창호는 종합전적 1-3으로 국수타이틀을 최철한에게 넘겼다. 입단 3년을 갓 넘긴 14세인 1989년 8월 8일 제8기 바둑왕전에서 첫 우승하며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운 뒤 35세까지 한번도 왕관을 벗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한국 바둑의 상징이었던 이창호에게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
  • 불법 체류자서 美 빙상 영웅으로 ‘인생역전’ ‘아메리칸 드림’ 이뤘다

    불법 체류자서 美 빙상 영웅으로 ‘인생역전’ ‘아메리칸 드림’ 이뤘다

    소년은 즐기는 마음으로 링크에 선 적이 한번도 없다. 스케이트는 가족들의 희망이자 유일한 ‘빛’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빙판을 갈랐던 한국계 쇼트트랙 선수 사이먼 조(한국명 조성문)가 마침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13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막을 내린 ISU 쇼트트랙월드컵 5차 대회 남자 500m에서 42초 157로 1위를 차지했다. 월드컵 첫 금메달이자 조씨 가문의 ‘아메리칸 드림’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오노 도움으로 대표탈락 시련 이겨내 사이먼 조의 ‘깨알 같은’ 과거사는 20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굴곡져 있다. 뽀얀 피부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녔지만 가슴에는 독이 가득하다.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난 사이먼 조는 아무것도 모르던 5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캐나다 밴쿠버에 밀입국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간 아버지 재이 조가 가족의 ‘합체’를 결심한 직후였다. 영주권을 받으려면 7년을 기다려야 했던 아빠가 참다 못해 가족들을 불법 입국시킨 것. 가족은 단란했지만 5년 넘게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다. 마침내 2001년 영주권을 획득했고 3년 뒤에는 미국 시민이 됐다. 사이먼 조는 스케이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가족은 장남에게 ‘올인’했다. 주니어 시절부터 미국 내에 적수가 없었던 사이먼 조는 2007~08 시즌 역대 최연소(15살)로 미국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환희는 찰나였다. 2008~09 시즌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슬럼프. 대표 자격을 잃자 당장 미국올림픽위원회(USOC)의 지원금이 끊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경제 불황까지 겹쳐 아버지의 사업마저 기울었다. 연간 4만 달러에 이르는 훈련 비용을 대기 위해 부모는 운영하던 초밥 식당을 처분했다. 집도 월세로 옮겼다. 수도와 전기가 끊길 정도로 어려운 생활에 시달렸고, 사이먼 조는 결국 ‘돈이 없어’ 스케이트를 벗었다. 그래도 인복은 타고났다. 대표팀에서 사이먼 조를 ‘차세대 에이스’로 인정하고 보듬던 미국의 쇼트트랙 스타 아폴로 안톤 오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노는 “숙식을 책임지겠다. 스케이트를 탈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보자.”고 나섰다. 당시 미국 대표팀의 장권옥 코치와 한국 대표팀 출신으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쇼트트랙클럽을 운영하는 여준형 코치가 큰 도움을 줬다. 여 코치는 포기 직전의 사이먼 조를 데려다 4개월간 일대일 교습을 해줬다. 잊히던 유망주는 2009년 미국 대표 선발전에서 500m 1위로 2년 만에 다시 성조기를 달았다. 지난해 밴쿠버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올 시즌 기량은 더욱 물이 올랐다. 월드컵 1차 대회 500m·1500m 은메달로 ‘강자’ 이미지를 구축했다. 은·동메달만 5개를 따낸 끝에 결국 5차 대회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골드’를 목에 걸었다. 올 시즌 미국 남자 대표팀이 따낸 두 번째 금메달이다. 사이먼 조는 오노 이후를 고민하던 미국 쇼트트랙에 ‘새 간판’으로 확실히 입지를 다졌다. 2014년 소치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내건 사이먼 조와 태극전사들의 치열한 경쟁이 흥미를 더해간다. ●韓, 노진규·김병준·양신 영 수확 한편 한국은 금메달 4개로 무난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지난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에 올랐던 노진규(경기고)가 1500m와 1000m 2차 레이스를 휩쓸며 또 금메달 2개를 캐냈다. 남녀 1000m 1차 레이스에서는 김병준(경희대)과 양신영(한국체대)이 나란히 ‘골드’를 수확했다. 다만, 남녀 모두 결승에 오르지 못한 계주와 500m에서는 과제를 남겼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장진표 웃음 100배 강해졌다”

    “장진표 웃음 100배 강해졌다”

    9일 경기 안산에 위치한 서울예술대학 예장홀에서 영화감독 장진이 아닌, 연극 감독 장진(40)을 만났다. 2002년 연극 ‘웰컴 투 동막골’ 이후 9년 만에 창작극 ‘로미오지구착륙기’를 들고 친정인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그가 몸 담았던 서울예대 연극 동아리 ‘만남의 시도’ 30주년 기념 공연이기도 하다. 이 동아리는 장 감독을 비롯해 배우 황정민·정재영·신하균, 개그맨 이휘재·김현철·표인봉 등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로미오지구착륙기’는 오는 16일부터 5일간 서울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른다. →직접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는 ‘웰컴 투 동막골’ 이후 9년 만이다. 최근 작 ‘퀴즈쇼’ 등 영화감독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다가 연극판으로 다시 돌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 -새로운 희곡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건 늘 부담이자 스트레스였다. 희곡은 내게 숙제와도 같다. 학창 시절 학과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게 동아리 활동이다. 89학번, 이른바 민주화 끝세대다. 케케묵은 수업보다 황정민, 정재영 등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선후배들과 창작극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선후배들이 나를 믿고 30주년 기념작을 맡겨 줘 기쁘다. →연극 제목이 독특하다. -미확인물체(UFO)가 재개발 예정인 한국의 달동네에 떨어지면서 내 집 마련 꿈이 흔들리는 서민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사회 지도층은 세계의 눈이 한국에 집중됐다며 좋아하지만 서민들은 재개발이 취소돼 그저 우울할 뿐이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니 동계올림픽 유치니 사활을 걸지만 정작 서민들은 먹고살기 어려워하는 그런 이면을 풍자하고 싶었다. →극 중 UFO가 한국에 떨어진 것을 두고 대통령이 “그 많은 선진국들을 내버려 두고 우리나라에 UFO가 왔다. 백악관이랑 통화했는데 오 대통령도 UFO를 미국 항공우주국(NASA)으로 옮길 수 있느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부터 조속히 끝내고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장진표 블랙 코미디 코드가 훨씬 강해진 느낌이다. -영화보다는 풍자 코드가 100배 더 날카로워진 게 사실이다. →적나라한 대사에서 관객들은 창작물과 현실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들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작품을 통해 현 정권과 대통령을 비난하고 싸우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대통령은 풍자극에 나오는 작은 오브제일 따름이다. 대중들이 대통령을 소재로 농을 걸면 즐거워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보다 대통령이 우리에게 조금 편해진 시대 아닌가. →UFO가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희망이 없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허무맹랑하게 꿀 수 있는 꿈 자체다. 사람들은 세상에 없는 것을 찾는다. 그것이 곧 희망이자 꿈이다. →연극에서 보기 드물게 공상과학(SF) 요소를 접목시켰다. ‘서민 SF’로도 불리는데. -SF는 어찌 보면 말장난이다.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종의 태그(키워드) 문장으로 보면 된다. SF가 매력적인 까닭은 미래에 관련된 짐작이나 예언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 상황을 돌파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SF가 아니라 SF적인 이야기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와 연극 연출, 어떤 점이 다른가. -영화는 시공간의 자유로움을 준다. 감독의 절대적 매력이 투명되는 이른바 감독 예술이다. 반면 연극은 배우 예술이다. 연극 첫 공연이 올라갈 때면 늘 배우들에게 “나는 이제 작품과 안녕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들의 무대다. 마음껏 해라.”라고 말한다. 연극은 또 며칠밖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연이다. 상업적인 (흥행)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맘이 편하다.(웃음)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숨진채 발견된 최고은 작가 애도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숨진채 발견된 최고은 작가 애도

    2월 둘째 주, 네티즌들의 관심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32세의 나이로 요절한 최고은 작가의 사망 소식에 집중됐다. 최 작가는 설을 앞둔 1월 29일 경기 안양에 위치한 자신의 월세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최 작가의 궁핍한 생활은 그가 세입자 송씨에게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과 김치가 있다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달라.’고 남긴 쪽지를 통해 알려져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지 124일 만에 풀려난 ‘금미 305호’의 석방소식도 인터넷을 달궜다. 금미호는 지난 9일 이례적으로 석방금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공해상으로 풀려나 화제가 됐다. 이날 선장 김대근씨 등 한국인 선원 2명과 중국 선원 2명, 케냐 선원 39명 등 43명이 선박과 함께 풀려났다. 지난 10일 열린 대한민국 축구팀과 터키 대표팀의 친선 경기도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었다. 경기는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검색어 4위는 ‘KTX 탈선’이 차지했다. 지난 11일 오후 1시 5분쯤 부산에서 광명으로 향하던 KTX산천 224호 열차가 경기 광명역 인근 상행선 일직터널에서 선로를 이탈하며 멈춰선 것.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서울 여의도백화점 물품보관 업체에 보관 중인 10억원 현금상자가 5위에 올랐다. 폭발물로 의심되는 상자에서 현금 10억원이 나온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영등포 경찰서는 지난 11일 백화점과 인근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15대를 분석한 결과 돈 상자 주인으로 추정되는 의뢰인의 인상착의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연예인 대표 ‘미녀와 야수’ 커플이었던 가수 길과 박정아의 결별이 6위를 차지했다. 2년여간 교제해온 두 사람은 지난 연말부터 바쁜 스케줄로 인해 사이가 소원해졌고, 결국 좋은 동료로 남기로 했다. 동해안 지역에 100년 만에 1m가 넘는 폭설이 내려 강릉과 동해, 삼척 등 18개 마을 640여 가구 1280여명의 산간 주민들이 고립되는 사태가 발생한 가운데 ‘동해안 폭설’이 7위에 올랐다. 8위는 걸 그룹 카라의 리더 박규리 왕따설이 차지했다. 박규리는 지난 10일 이른바 ‘카라 사태’ 이후 첫 공식 무대였던 애니메이션 영화 ‘알파 앤 오메가’ 언론시사회에서 왕따설을 부인했다. 9위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트라이커 웨인 루니의 환상적인 오버헤드킥이 차지했다. 루니는 12일 맨체스터 시티와의 정규리그 27라운드 홈 경기에서 1대1 동점 상황에서 오버헤드킥으로 결승골을 넣었다. 가수 겸 배우 이승기의 ‘1박2일’, ‘강심장’ 하차설이 10위에 올랐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여자들이 더 좋아하는 그녀들이 온다

    여자들이 더 좋아하는 그녀들이 온다

    미국의 10대 소녀들 혹은 국내 젊은 여가수들은 주저하지 않고 롤모델 1순위로 그들을 꼽는다.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선두주자 격인 테일러 스위프트(왼쪽·22·미국)와 코린 베일리 래(32·영국)가 잇따라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어 국내 팬들이 설레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스위프트는 새달 11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공연을 연다. 3집 ‘스피크 나우’(Speak now)의 수록곡뿐 아니라 ‘러브스토리’(Love story) 등 히트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스위프트는 할리우드의 차세대 스타 제이크 질렌할과의 시끌벅적한 연애로도 유명하다. 컨트리 가수라고 카우보이 모자에 긴 부츠를 신고 기타를 튕기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2008년 2집 ‘피어리스’(Fearless)로 단박에 톱클래스로 뛰어오른 스위프트는 2009년 MTV 비디오뮤직어워드에서 비욘세와 레이디 가가를 제치고 ‘최우수 여자 솔로비디오상’을 받았다. 같은 해 아메리칸 뮤직어워드 5개 부문을, 지난해 그래미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앨범상’ 등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액세스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보통 밴드와 코러스·댄서를 제외한 스태프가 20명 정도인데 이번 공연에는 50명이 오고 무대도 6~7차례 바뀐다.”면서 “이 정도면 비욘세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급인데 월드투어 중 다른 나라에서는 ‘물쇼’를 비롯한 파격적인 무대 매너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3월 10일 서울 광장동 악스코리아에서 ‘아이유의 롤모델’로 유명한 R&B 가수 코린 베일리 래가 단독공연을 펼친다. 아이유·장재인 등 노래 좀 한다는 10대, 20대 초반 여가수들은 TV에서 한번쯤은 그의 노래를 불렀다. 2006년 데뷔 앨범으로 영국 앨범 차트 1위, 미국 빌보드 차트 4위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오른 그는 지난해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에 참가한 뒤 폭발적인 호응에 감동해 내한을 약속했다. ‘라이크 어 스타’(Like a star) ‘풋 유어 레코드 온’(Put your records on) 등 대표곡은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등에 삽입돼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2008년 남편의 죽음 이후 한층 성숙해진 보컬로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란 평가를 받았다. 나인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18일 티켓을 오픈했는데 R석은 다 팔렸고 스탠딩은 안전문제 등을 고려해 조금씩 풀고 있다.”면서 “지산의 영향이 워낙 큰 데다 아이유 등 젊은 여가수들이 입소문을 낸 것도 한몫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3월 새앨범 내는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김문이 만난사람] 3월 새앨범 내는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산 너머 저쪽이다. 어머니는 배추를 팔러 나갔다. 돌아오는 언덕 길이 꼬불꼬불 멀었다. 오늘도 늦으시려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그렇게 기다렸다. 어느 날엔가 막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거나, 어머니가 걱정된다. 그래서 읊었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해는 시든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숙제를 천천히 해도 엄마 안 오시네/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옛날~’ 1989년 요절한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에 나오는 대목이다. ‘엄마 걱정’은 지난 해 10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해 연말 제주 무대에 이르기까지 노래로 불려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장사익 소리판 역(驛)’이란 제목으로 전국 투어에서 선보였던 것. 공연 도중 기형도씨의 어머니를 초청해 아들의 ‘엄마 걱정’을 눈물 나도록 불러 관객들과 함께 감루(感淚)의 바다로 빠지게 했다. 장씨 자신도 참외장사를 했던 어머니의 추억을 토해냈다. 그런 ‘엄마 생각’에서 장사익(62)씨는 오는 3월 새 앨범을 낸다. 원래 노래풍도 그렇고 소재를 선정하는 스타일도 ‘한 많은 우리 것’을 찾고 있지만 이번 새 앨범에는 특유의 ‘토장’(土醬)을 더욱 진득하게 담아낸다. ‘산너머 저쪽’ ‘엄마 걱정’ 등의 신곡에다 ‘삼식이’ ‘아버지’ ‘여행’ ‘섬’ 등 11곡을 맛깔스럽게 버무린다. 2008년 ‘꽃구경’ 이후 3년 만으로 7번째 앨범이다. 타이틀곡은 ‘역’이다. 장씨는 다른 가수와 달리 신곡이 나오면 먼저 무대공연을 통해 선보인 다음 녹음 과정을 거친다. 장씨의 노래는 요즘 들어 더욱 중장년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국내 양대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유료 관객 점유율을 집계한 결과 장씨의 ‘역’ 공연이 전체 좌석 중 유료 관객 점유율 97%로 1위에 올라 인기도를 입증했다. 그는 ‘찔레꽃’으로 많은 팬들의 애간장을 충분히 녹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 제목처럼 여전히 ‘이게 아닌데’라고 하면서 차원을 높인다. 그럴 것이 북악산을 바라보는 집 창가에 찾아오는 새들과 그 산 기슭에 드러누운 부처와도 대화를 나눈다. 또한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묵향’과 함께 튼튼 60대 세월로 ‘독공’(獨功)의 길을 걷고 있다. ●풍경이 모여드는 마당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위치한 장씨의 집. 10여개의 풍경이 앞마당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각자 불어오는 찬바람에 의지해 겨울소리를 내고 있었다. 녹차를 마시면서 한 시간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장씨의 오랜 친구들이 계속 찾아온다. 비둘기와 까마귀, 참새들이 나뭇가지에 와서 교대로 떠들고 재잘거리고 뭐라고 지껄인다. 뒷산 언덕 높이에서는 이를 시샘하듯 매 한 마리가 크게 날갯짓을 한다. 뿐만 아니다. 연못에서 동면하는 개구리 10여 마리도 아직 기척은 없지만 목청을 가다듬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장씨 집에는 계절별로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르는, 그런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겨울에는 새들이 저마다 고운 목소리로 멋을 내고 4, 5월이 되면 개구리가 뒤질세라 울어댄다. 개구리들은 영특하게도 여름에 매미 소리가 나와야 비로소 입을 다문다. 또 그 매미들은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풀벌레한테 인계를 한다. 다시 겨울이 오면 참새들이 울면서 자연의 크리마스 카드를 연출한다. 하여 장씨는 이들에게 노래할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클래식과 국악이 함께 나오는 FM 라디오 음악을 잔잔하게 하루 종일 틀어준다. 새들이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고 잘 듣는지 장씨 스스로 깨닫는다. 때문에 굳이 창문 열고 사람소리를 내지 않는다. 혹 사람의 소리가 나면 그들은 얼른 도망가버린다. 장씨는 새들에게 곰팡이 생긴 쌀을 먹이로 준다. 이런 평화로움에 지나가던 고양이도 잠시 낮잠을 즐기고 간다. 전원 교향악이 따로 없다. 올봄에는 닭 몇 마리를 새 식구로 불러들일 생각이다. “(그들이) 울다가 지치면 딴 놈이 와서 울어줍니다. 아주 자연스러워요. 일년 사계절이 그럴진데 요즘 세상에서는 한꺼번에 뛰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가용 타는 것이 왠지 슬퍼져서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러다가 지하철에서 여러 사람이 휴대전화에 의존하는 모습을 볼 때 소름이 끼친다는 생각도 듭니다. 올해에는 주변을 살피면서 느리게 가 보면 어떨까요. 휠체어를 탄 장애우들은 이것저것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잖아요.” 문득 그의 노래가 대부분 느리면서 호소력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곡 중 하나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가~안다.’ ●개발한 글씨체로 일필휘지 요즘 그는 서예에 푹 빠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지없이 먹을 갈고 한 시간여 동안 붓을 잡아 화선지에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글씨체를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다. ‘동백아가씨’ ‘찔레꽃’ 등의 노래가사는 기본이고 마음에 드는 시구절 등 주로 한글로 쓴다. ‘느림의 미학’과 ‘위안과 희망’이 장사익류의 소리라면 또 다른 ‘장사익류의 서체’를 개발해낸 셈이다. 지인들에게 안부편지를 쓸 때도 꼭 붓글씨를 고집한다. 주위에서는 전시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작품수준의 경지라고 평가한다. 그는 조선후기 3대 명필 중 한 사람이었던 창암 이삼만(李三晩)의 글씨체를 무척 좋아한다. 장씨는 “창암의 서예전이 다음 달 27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다.”면서 글씨의 근본을 오로지 자연에서 구했기에 물처럼 흐르는 멋이 물씬 풍긴다고 말했다. 또한 평론가들도 “먹이 농담하듯 곡선과 직선, 음양의 요소를 조화로움의 극치로 풀어낸다. 자연의 소리가 글씨에 스며들어 붓이 춤추듯 노래하는 것 같다.”고 평한다. “한글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정도입니다. 한자인 경우에는 추사 김정희 서체니 중국의 아무개 서체니 하고 있지만, 한글은 쓰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계속 쓰다 보면 아름다운 글씨가 나오고 그게 곧 자신의 글씨체가 되겠지요. 노래가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서예는 노래를 집중하게 하는 정신력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2004년 작고한 음악인 김대환씨를 예로 든다. 평생 아리랑과 반야심경구절만 쓰다 보니(앞으로 썼다가 뒤로 썼다가 반복하면서) 왕희지 서법보다 더 자유분방해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1990년에 쌀 한톨에 283자의 반야심경을 모두 써 넣어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사익 소리판 역’ 완결무대 이어져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부인 고완선씨가 떡과 과일을 가져왔다. 고씨는 남편에게 “사진촬영도 하는데 기왕이면 옷을 갈아입고 하시지.”라고 했다. 그러자 장씨는 “어때 뭐, 원래 노숙자차림이 내 모양인데 뭐.”라고 웃어넘긴다. 알콩과 달콩으로 미소를 주고받는다. 마루바닥 한쪽에 오래전에 부부가 함께 만든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은 ‘백년가약서’이다. ‘하늘 고완선과 땅 장사익은 금후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約書)를 씁니다. 단, 100년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조건을 변경합니다.’ 올 한해는 얼마나 많은 공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높아가는 인기도만큼 여기저기에서 오라는 데가 더욱 많다. 이달 대구와 부산, 일본 후쿠오카 등에서 협연을 끝낸 데 이어 2월에는 경북 안동(11일), 서울 노원(17일), 경기 군포(19일) 등에서 협연이 예정돼 있다. 3월 1일에는 김대환 추모공연에 참가한다. 또 이달에는 단독공연이 있는데 울산(15일)과 창원(19일)에서 이어지며 4월에는 전주, 과천, 춘천 등에서 단독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지난해 10월에 시작된 ‘장사익 소리판 역’의 완결편을 마무리짓는 무대가 5월까지 10여 차례 이어진다. 전직 카센터 직원, 독서실 운영,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직원, 보험회사 직원…. 장씨는 마치 죽장에 삿갓 쓰고 그러하듯, 일찍부터 방랑과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인생살이의 산전수전을 겪은 다음 40대 중반에 소리꾼으로 데뷔했다. 다른 사람보다 늦었지만 삶의 내공이 쌓여서인지 무대 위에서 넘어지고 깨진 것을 얘기할 수 있어 오히려 음원이 시원했다. 일찍 ‘국민 소리꾼’이 된 것도 여기에 있겠다. “노래는 진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노래는 맑아야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희망도 있고 위안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들과 같아지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노래를 참 잘 택했구나 하고 있습니다.” 장씨는 가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냥 소리꾼일 뿐이라고 한다. 애정을 얻어도 고통이요, 또 애정을 버려도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소리를 얻었을 때도 많은 고통이 있었을 테고, 또 언제가 버려야 하니 더 많은 고통을 생각하고 있을 터. 그래서 요즘도 ‘이게 아닌데’로 스스로 채찍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소문난 장구잡이였다. 소리의 기질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장씨는 초등학교 때 웅변을 잘했다. 어릴 때는 장차 정치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시급해 1965년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전 프로야구 선수 김우열씨와 동기동창. 고 3 때 종로에 있는 생명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이때 인근 낙원동 음악학원에 다니며 노래연습을 틈틈이 했다. 직장생활 3년 후 공병으로 군입대를 했지만 소리솜씨가 좋아 31사단 문선대에서 근무했다. 1972년 제대 후에는 무역회사, 전자회사 영업사원, 노점상, 카센터 등을 전전했다. 그러면서 정악피리와 태평소 등을 스스로 익혔다. 1993년에는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때마침 그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에 뽑혔다. 또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금산농악’으로 장원에 올랐다. 그러던 1994년 11월 주위의 권유로 서울 신촌에서 첫 공연을 했다.100석 규모의 극장에 300여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내친김에 1집앨범 ‘하늘가는 길’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지금까지 ‘기침’(1999) ‘허허바다’(200) ‘사람이 그리워서’(2006)‘ ‘꽃구경’(2008) 등 6집 앨범을 냈다.
  • “시세의 절반… 청약 누가 안해요?”

    “시세의 절반… 청약 누가 안해요?”

    “강남 요지에 전세금만 조금 보태면 되는데 누가 청약을 하지 않겠어요.” 전세대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보금자리 로또’로 불리는 서울 강남(세곡)과 서초(우면)지구 보금자리주택 일반분양에 인파가 몰려 분양 첫날 마감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27일 강남과 서초지구 보금자리주택 227가구에 대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첫 청약을 받은 결과, 4113명이 몰려 17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강남 세곡지구는 94가구 모집에 2023명이 신청해 21.5대1, 서초 우면지구는 147가구 모집에 2090명이 몰려 14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에 따라 28일 예정됐던 1순위 전체 접수는 실시하지 않는다. 이날 청약은 납입금 1000만원 이상, 무주택 가구주 기간 5년 이상자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청약저축 가입자가 대거 몰린 것은 3.3㎡당 분양가가 강남지구는 920만~985만원, 서초지구는 964만~1056만원으로 주변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해 당첨될 경우 내집 마련은 물론 2억~3억원의 시세차익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별개로 현장 청약을 받은 서울 자곡동 LH 더그린 보금자리주택 전시관에서 만난 김모(54·중랑구 면목동)씨는 “집 근처에도 보금자리주택이 들어오지만 입지와 분양가, 투자가치를 비교해 서초지구 59㎡에 청약했다.”면서 “내집 마련을 위해 10년을 넘게 기다렸는데 안정권이 아니라 불안하다.”고 말했다. 박모(48·동작구 사당동)씨는 “누구나 자식들을 강남의 좋은 학군에서 교육받게 하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이렇게 싼값에 강남으로 입성할 기회가 앞으로는 없을 것 같아 청약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경쟁률을 감안하면 최소한 청약저축 불입액이 2000만원은 넘어야 당첨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날 분양된 보금자리주택은 강남지구(A2블록) 89가구(59㎡ 15가구, 74㎡ 20가구, 84㎡ 54가구)와 서초지구(A2블록) 138가구(59㎡ 29가구, 74㎡ 36가구, 84㎡ 73가구)이다. 당첨자는 2월 18일 발표한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도예작가 이헌정, 건축을 말하다

    도예작가 이헌정, 건축을 말하다

    그릇은 뜻이 넓다. 밥을 담아도 그릇이지만, 큰 물건을 담아 두는 가구도 그릇이다. 사람을 담으면 집이 된다. 그릇 작업의 폭을 넓히기 위해 고심해 온 도예작가 이헌정(44)의 개인전 ‘건축의 모델’이 오는 3월 4일까지 서울 서소문동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이헌정은 성공적인 도예가에서 가구 제작으로, 다시 건축으로 차츰 보폭을 넓히고 있는 작가. 지난해 건축학 박사과정도 마쳤다. 이번이 건축을 주제로 한 첫 전시다. “예전부터 순수예술의 추상적인 것보다 뭔가 실제 생활에 연결되는 작업을 해 보고 싶었어요. 그 때문에 가구와 건축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고 있어지요.”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간결하다. 주어진 공간, 그 공간의 중심점, 중심점을 두고 그 공간을 에워쌈, 소통을 위해 내는 입구처럼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공간 높이가 4m나 되지만 의자, 입구, 빛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전시물에서 잘 드러난다. 작품 제목도 없다. 언뜻 초기 기독교 시대, 건물 지하의 비밀 기도 공간(카타콤)을 떠올리게 한다. 이헌정은 “도심의 바쁜 생활 와중에 공간 그 자체를 느껴보라는 뜻으로 만들었다.”면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작가의 그릇’ 정도”라고 말했다.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피트는 2009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디자인 마이애미바젤’ 아트페어에서 이헌정의 작품 ‘아트 벤치’를 구입해 화제를 낳았다. “도움은 됐어요. 가구와 건축을 해 보고 싶었는데 엄두가 잘 안 났죠. 그때 미국 작가 웬들 캐슬이 우연히 경기 양평 작업장에 들렀다가 제가 만든 가구를 보고 한번 해 보라고 북돋워준 게 출발이었습니다. 그래도 이게 될까, 그런 걱정이 있을 때였는데 브래드 피트가 (작품을) 구입해 주면서 많은 도움이 됐죠. 그런데 그렇게 유명해져 공허하게 붕 뜨기보다 이젠 작품 자체로 평가를 받아아죠.” (02)753-6502.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사랑잇는 전화·봉사로 고독사 없는 노인사회 만들 것”

    “사랑잇는 전화·봉사로 고독사 없는 노인사회 만들 것”

    “고독사(孤獨死) 없는 노인사회를 만드는 원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집무실에서 만난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사를 민·관이 힘을 모아 막겠다고 다짐했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진 장관은 기업과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독거노인 사랑잇기 운동’을 제시했다. 사랑잇는 전화와 마음잇는 봉사가 이 운동의 요체다. 전화 한 통화가 외로운 노인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진 장관은 “그렇다.”고 명료하게 답했다. 진 장관은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달래고 삶의 질을 높이는 관건은 공동체 문화의 회복”이라고 밝혔다. 지자체로 이 운동이 확산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취임 후 첫 외부행사가 대한노인회 방문이었습니다. 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사회는 이른바 ‘고령화 쇼크’를 얘기하며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보입니다. 고령화와 베이비부머 은퇴자 문제 등 고령사회에서 등장하는 여러 악재를 타개할 장관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지금은 노인복지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 노인복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복지부는 급속한 고령화 속도와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 왔던 노인복지 기본 인프라와 성과를 기반으로 현 세대 취약노인에 대해 빈틈없이 지원하도록 정책을 추진할 것입니다. 특히 지난 24일 발표한 ‘101가지 서민희망찾기’ 과제는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어르신들은 일과 함께하는 활기찬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확대하는 방안을 담고 있습니다.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 노인은 안전하게 보호해 드리고 전문직 은퇴자들은 자원봉사와 사회참여를 대폭 활성화해 나가겠습니다. →독거노인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노인 관련 각종 정책과 사업을 경쟁이라도 하듯이 쏟아 내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기존 사업의 문제점도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노인돌봄 기본서비스 등 국고지원 사업 외에 각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다양한 독거노인 보호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서울시나 경기도의 사업 중에서는 중앙정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복지정책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지자체나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추진해 왔던 독거노인 안부서비스 사업은 대상 노인이 지역에 한정돼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연락두절이나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사후관리 체계가 미흡했다는 점입니다. 부족한 사후관리 체계로 인해 지속적인 사업추진 또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취임과 함께 몇 개의 테스크포스(TF)팀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독거노인 문제를 위해 별도의 TF팀을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확히 3개월 전인 지난해 10월 28일 복지부 내에 ‘서민희망본부’를 발족하고, ‘나눔정책 TF’를 포함해 4개의 TF를 신설했습니다. 정부의 친서민 정책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만들었습니다. 이 가운데 혼자 외롭게 사망하는 ‘고독사’하는 노인 문제는 통계로도 정확히 잡히지 않고 집중화된 정책도 부족했다는 판단 아래 ‘독거노인 사랑잇기 TF’를 구성했습니다. TF팀을 통해 민·관 자원을 결집하고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해 정책 대안 마련에 역량을 집중하자는 취지입니다. 독거노인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늦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TF팀이 중심이 된 사업이 기존의 독거노인 지원 사업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정부 주도의 지원이 아니라 민간기업과 단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의 안전을 지원하고 책임지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부의 재정지원 방식만으로는 전체 독거노인을 보호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간기업과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정부는 이들이 연계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번에 개소한 독거노인 종합지원센터는 이들을 연계하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쪽방촌 등 현장방문을 통해 독거노인을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 노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독거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론 물질적인 지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이웃의 관심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의 핵가족화 현상, 부양의식 및 가치관 변화 등으로 독거노인이 증가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시급한 과제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문화’의 회복입니다. →이 사업이 어떻게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이 사업은 장관이 바뀌면 없어지는 성격의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앞으로 궤도에 오르면 복지부 고유의 일상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입니다. 대상 범위와 질 문제도 함께 신경을 써 사업의 품질이 관리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습니다. 서울시 등 지자체도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좋은 사업입니다. 서로 격식을 따지지 않고 지방정부가 함께한다면 중앙정부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일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올해는 고독사 노인이 단 한명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현장방문에서 독거노인을 직접 만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취임하자마자 경기도 안양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댁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르신은 어릴 적 학대받은 경험과 사기로 피해를 입어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고 장관인 저조차도 믿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좁은 집에는 채무자에게서 돈 대신 받은 쓸모없는 물건들로 가득 쌓여서 제가 앉을 자리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지자체가 나서서 저렴한 공공 임대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는 보고를 받고 안심은 했지만 진작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 노인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대담 심재억 부장급 정리 안석기자 c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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