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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4 지방선거 인물 대해부] 서울시장 예비후보 새누리 이혜훈 최고위원

    [6·4 지방선거 인물 대해부] 서울시장 예비후보 새누리 이혜훈 최고위원

    1997년 10월 22일 서울 도봉산 등산로 입구. 등산복을 차려입고 몇몇 직장 동료와 산행에 나선 한 등산객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알고 보니 그는 임신부였고 산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곁에 있던 동료들은 기겁했다. 임신 사실조차 몰랐던 이가 많았던 것이다. 임신부는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와중에야 직장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출산으로 며칠 결근해야 할 것 같다”고 알렸다. 이 임신부가 바로 6·4 지방선거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이다.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시절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울분을 삼켰다. 직장 여성이 임신하면 죄인 취급을 당하던 시절이라 셋째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조차 숨겨야 했다. 점점 불러오는 배는 헐렁한 옷으로 가렸다. 이 최고위원은 “당시 임신 사실을 숨긴 채 등산왔다가 응급실로 실려간 나를 사람들이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런 ‘등산복 출산’을 겪은 이 최고위원은 한국 땅에 사는 직장 여성에게서 ‘여성’이라는 사회적 주홍글씨를 떼어내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그가 ‘원조 친박계’ 의원이 된 것도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도 여성에 대한 벽은 높았다. 의원 배지를 달고 참석한 첫 의원총회에서 발언 신청을 위해 손을 들었더니 옆에 앉은 3선 의원이 귀엣말로 “가만히 있어라.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 이 최고위원은 좌절했지만 ‘실력으로 보여주겠다’며 와신상담했고, ‘경제전문가’를 상표로 자신을 키워 나갔다. 마침내 그는 경제학자들과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달변인 그는 TV토론에 강한 면모도 여러 차례 보여줬다. 이처럼 여성으로서 차별받을 때 이 최고위원은 그 자리에서 치받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실력을 키우며 절치부심하는 스타일인 셈이다. 이 최고위원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은 주변에 대한 ‘쓴소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이 최고위원의 비판은 송곳같이 날카롭다”고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자신감을 자만심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지나치게 아는 체를 많이 해서 원조 친박계이면서도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깐깐함과 고집, 예민한 성격도 약점으로 회자된다. 한 새누리당 당직자는 “이 최고위원의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빨라지면 화가 났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다혈질인 그를 가리켜 “무섭다”고 표현하는 이도 적지 않다. 지난 1월 이 최고위원의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 서울지역 당협위원장들 사이에서는 “후환이 두려워 참석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자신의 발언이 실린 신문 기사에 대해서도 토씨 하나까지 지적하며 정정을 요구한다. 기자들이 “말이 빨라 제대로 받아 적기 어렵다”고 항변했더니, 그는 미리 작성한 자신의 최고위원회의 발언록을 현장에서 기자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이렇게 억척같은 ‘여전사’이지만, 눈물도 많다. 막내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그는 첫 선거를 치르느라 경황이 없었다. 아침에 아들을 데려다 줄 수는 있었지만 입학식 후 학교에서 데리고 올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전날 아들에게 미리 하굣길을 상세히 설명해 줬다. 하지만 입학식날 오전에 귀가했어야 할 아들은 길을 잃고 헤맸고 밤 8시에야 아들을 찾았다. 이 최고위원은 지금도 그 일화를 얘기할 때면 “나는 나쁜 엄마”라고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는 지난달 27일 논산 육군훈련소로 입영하는 둘째 아들을 배웅할 때도 눈물을 보였다. 성격이 강해 보이지만 소통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불교신자인 시어머니는 집에서 염불 테이프를 틀고 기독교신자인 이 최고위원은 남편, 아들과 함께 찬송가를 들으면서도 고부간의 갈등이 없다고 한다. 이지현 선거캠프 대변인은 “이 최고위원은 위계서열에 따른 다단계 상향식 보고를 싫어하고 실무자와 1대1로 만나 직접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 최고위원은 캠프 직원들과 스마트폰 메신저인 카카오톡으로 수다 떠는 것도 즐긴다고 한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6·4 지방선거 인물 대해부] 서울시장 예비후보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

    [6·4 지방선거 인물 대해부] 서울시장 예비후보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

    서울신문은 유권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6·4 지방선거 광역단체장에 도전장을 던진 주요 후보들을 집중 분석하는 ‘지방선거 인물 대해부 시리즈’를 7일부터 기획, 연재합니다. 보도 순서와 분량은 주요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지지율을 기준으로 차등을 두되 현역 단체장이 없는 당의 예비 후보들을 먼저 보도하며 현역 단체장 불출마 시에는 다수당 후보 순으로 보도하기로 했습니다.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지난달 31일 밤 10시쯤 서울 종로구의 어느 길거리. 식당에서 나온 10여명의 중년 무리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수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대로변에서 불러 젖힌 주인공은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었다. 일행은 정 의원의 노래 중간중간 “좋고”라는 추임새로 흥을 돋웠다. 행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수군댔다. 이날 모임은 정 의원이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 후보로서 비전 선포식(정책 발표회)을 한 뒤 가까운 몇몇 서울시 당협위원장과 가진 ‘번개 저녁 식사’였다. 현장에 있었던 한 당협위원장은 “반주 한잔 걸치고 기분이 좋으면 대로에서 한 곡조씩 불러 젖히는 게 요즘 정 의원의 주특기”라며 “노래 실력이 좋거나 가사를 다 외우는 게 아닌데도 꼭 부른다”고 했다. 지난달 2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이후 정 의원이 다른 사람이 됐다는 평이 많다. 서민들과의 ‘스킨십’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전에 없이 강한 ‘권력 의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박호진 경선캠프 대변인은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로 얼룩졌던 2002년 대선, 승자가 이미 결정돼 있었던 2012년 대선 때와는 투지가 확연히 다르다”고 했다. 지난달 중순 유경희 새누리당 도봉갑 당협위원장은 인근 강북구 당원의 전화를 받았다. “정 의원이 동네 목욕탕에 벌거벗고 들어갔다고 하네요.” 두어 시간 전 정 의원이 측근인 정양석 전 의원과 강북구의 한 목욕탕에 들렀다는 것이다. 정 의원이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인사를 건네자 시민들은 “여기까지 뭐하러 왔느냐”며 화들짝 놀라면서도 이내 “시장 선거 잘하라”며 등을 두드려 줬다고 한다. 정 전 의원은 “시민들 입장에서는 ‘재벌이 이런 데도 오는구나’ 하는 반전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 의원은 지난달 9일 도봉산을 등반할 때 ‘셀카’를 같이 찍자는 여고생들의 요청에 자진해서 팔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 모양을 그리기도 했다. 예전의 ‘근엄했던’ 정 의원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최근 중학교 화장실에서 물청소를 하고 당원대회에서 갈비탕 200인분을 직접 나르기도 했다. 한 측근은 정 의원에 대해 “머리 회전이 빨라 핵심 파악 능력이 뛰어나고 추진력도 있다”고 했다. 정 의원은 지난 2월 23일 귀국 직후 가진 첫 참모진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2017년 대선엔 안 나갑니다. 서울시장 연임하겠습니다.” 참모들은 대선 불출마 선언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만류했지만 정 의원은 단호한 표정으로 일축했다고 한다. 한 정치권 인사는 정 의원에 대해 “인지도가 높은 데다 재벌로서 서민적 행보까지 보이니 요즘 지지도가 오르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명문대(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재벌에 키 크고 인물도 훤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정 의원에게도 약점은 있다. 그는 종종 말실수로 구설에 오른다. 그는 2008년 당 대표 경선 TV 토론에서 “시내버스 요금이 70원”이라고 말해 곤욕을 치렀다. 2011년 국정감사 때는 김성환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그게 무슨 궤변이야”라는 식의 반말을 퍼부어 빈축을 샀다. 그는 당 최고중진연석회의 때 가끔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발언을 해 받아 적는 기자들을 곤란하게 한다. 정 의원이 ‘부자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돈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인색하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당협위원장은 “식당에서 물주인 정 의원이 먼저 설렁탕, 짜장면 같은 저렴한 메뉴를 선택하면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메뉴를 따라간다”면서 “뒤에서 ‘짠돌이’라고 수군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정 의원은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21’을 창당했다. 당시 당직자들로부터 식사비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정 의원은 돈 대신 인근 구내식당 식권을 구입해 나눠 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한 전직 민주당 의원은 “당시 정 의원이 10억원만 더 썼어도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국민통합21에 합류했을 것”이라면서 “정 의원이 인색하다는 걸 확인한 의원들이 발길을 돌렸다”고 회고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정 의원의 한 측근은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엄격한 훈육 때문인지 점심 때 먹다 남은 김밥도 오후 늦게 다시 집어 먹는 등 근검절약이 습관이 됐다”며 “그런데 주위에서 많이 쓰면 많이 쓴다고 지적하고 안 쓰면 안 쓴다고 핀잔을 받는다”고 항변했다. 정 의원이 아랫사람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한다는 지적도 회자된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한 한 인사는 “기업 경영인 출신이다 보니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스타일”이라면서 “아랫사람을 보듬는 부분이 아쉬울 때가 있다”고 했다.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 사장 시절 업무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버지 연배 간부의 정강이(조인트)를 걷어찼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나돈다. 정 의원의 가장 큰 단점은 화가 났을 때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 의원은 2002년 대선 투표일 전날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게 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대사를 그르친 것이라고 지적한다. 2008년 총선 유세 중 한 여기자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자 손으로 그 여기자의 뺨을 건드리는 등의 신체 접촉을 한 게 결국 성희롱 논란까지 확대된 적도 있다. 그러나 정 의원의 가족은 그가 자상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남자라고 말한다. 정 의원은 지난달 31일 비전 선포식을 앞두고 머리 염색을 세 차례나 했다고 한다. 정 의원은 동네 이발소에서 한 첫 번째 염색이 마음에 들지 않자 집에서 부인 김영명씨에게 다시 염색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 의원은 두 번째 염색한 머리를 거울로 보며 “불그스름한 머리색이 꼭 원숭이 같다”며 투덜거렸다고 한다. 김 여사가 원숭이띠인 것을 겨냥한 나름의 유머였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커버스토리] 문화야 놀자 도서관에서

    [커버스토리] 문화야 놀자 도서관에서

    전자책과 스마트폰·태블릿 PC가 범람하는 지금,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들이 찾는 도서관 입구에 ‘정숙’이라는 표지판은 없다. 더 이상 도서관은 조용히 책만 읽다 가는 공간이 아니다. 활자와 종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무성한 요즘 활자와 종이의 집합소인 도서관이 복합 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글 사진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소시지를 만들다… 첫 공공예술 전문 안양 ‘공원도서관’ 4일 경기 안양예술공원 내 안양파빌리온 공원도서관. 5~6명이 둘러선 한쪽 식탁에서 고기를 직접 갈아 수제 소시지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컴퓨터로 온라인 도록을 보고, 맞은편에선 건물 설계도를 펼쳐 놓고 토론을 하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서가 앞 라운지에는 아이와 엄마가 골판지로 만든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처음 이곳을 찾은 대학생 임의현(22)씨는 “디자인 수업 자료를 준비하려고 왔는데 공원에 소풍을 나온 것 같다”면서 “신선하면서도 전문자료들이 잘 구비돼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안양파빌리온은 국내 첫 공공예술 전문 도서관이다. 예술가들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다룬 1500여점의 서적과 DVD 등을 소장하고 있다. 공원도서관은 2005년 시작된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APAP)의 핵심 사업이기도 하다.길예경(53·여) 도서관장은 “예술에 대한 일반인의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목표”라며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체험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자료만 읽는 것이 아니라 읽을 거리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읽기꾸러미’ 프로그램을 비정기적으로 진행한다. 읽기꾸러미는 도슨트(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들이 모여 토론하거나 예술가들이 작업을 진행한 자료 등을 모아 시민들과 공유하는 활동이다. ■오페라 대출하다… 클래식 CD 등 8217점 보유 ‘가람도서관’ 경기 파주시 와동동 가람마을에는 지난달 12일 전국 최초로 책과 음악이 공존하는 ‘가람 공공도서관’이 설립됐다. 클래식,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공연 CD와 DVD 8217점과 음악 서적 1100권을 포함한 도서 1만 7658권을 보유 중이다. 지휘자 금난새(67)씨가 2010년 파주시에 “진정한 문화도시로 거듭나려면 음악 도서관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면서 시동이 걸렸다. 도서관의 설립 목적 자체가 헤이리 예술마을, 출판단지 등을 갖춘 파주에 복합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던 셈이다. 가람도서관의 이용객들에게 도서관은 ‘정숙’해야 한다는 건 편견일 뿐이다. 연면적 3862㎡, 300석 규모의 객석을 갖춘 클래식 전용 공연장인 ‘솔가람아트홀’이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3주간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 피아니스트 조재혁, 첼리스트 송영훈 등의 개관기념 무료 독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지난 2일 도서관을 찾은 이초희(33·주부)씨는 “집과 가까운 곳에 음악 도서관이 생겨 앞으로 클래식 음악을 자주 접하게 될 것 같아 좋다”며 “4명의 자녀들을 데려와 클래식 음악을 실컷 들려줄 계획”이라며 웃었다. 도서관이 소장한 CD와 DVD는 1회에 3개씩 1주일간 대출이 가능하다. 도서관에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돼 있어 사전 예약을 하면 세 시간까지 빌릴 수 있다. ■디자인 전시하다… 세계 최대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지난해 2월 문을 연 서울 종로구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디자인 관련 희귀본 3130권, 디자인 전문 장서 8660여권 등 총 1만 3000여권에 달하는 서적을 보유한 세계 최대 디자인 서적 전문 도서관이다. 현대카드 회원만 이용할 수 있는 이 도서관은 디자인 전공자들에겐 사랑방으로 통한다.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희귀 서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인숙(38·여·도서 디자인 편집자)씨는 “다른 곳에선 볼 수 없었던 일본 일러스트레이션 작가들의 작품까지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2층 ‘정기간행물’ 섹션에는 ‘라이프’지와 85년 역사의 건축 전문지 ‘도무스’ 전권을 갖추고 있다. 흰 장갑을 착용하고 열람할 수 있는 ‘희귀본 컬렉션’에는 세계적인 아트북 출판사인 ‘파이돈’과 ‘타센’의 한정판도 있다. 도서관 측은 보유한 잡지들을 바탕으로 매달 기획 전시회를 연다. 다양한 사진 작품들과 넓은 철제 테이블은 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 펴놓고 보는 디자인 전공자들을 배려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있는 유승한(24·경기 부천)씨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이곳에 와 다양한 사진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용자들이 쾌적한 상태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층별 동시 입장 인원을 5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책과 삼림욕하다… 관악산 등산로 초입의 ‘숲속작은도서관’ 관악산 등산로 초입에 자리한 ‘숲속작은도서관’은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가득한 숲에서 삼림욕도 하고 책도 읽을 수 있는 자연 속 복합문화공간이다. 숲, 환경, 생태 관련 도서를 포함한 전체 장서 수는 3077권. 2008년 10월 문을 연 숲속작은도서관은 서울 강북구 영훈국제중 교감을 지낸 문영규(70)씨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2007년 시민단체 생명의숲국민운동이 주관한 ‘숲가꿈이 양성과정’에 참여해 숲, 환경, 봉사 등에 대한 교육을 받던 문씨가 철거 예정된 관리초소 건물에 도서관을 짓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때부터 도서관 운영은 문씨와 같이 ‘숲가꿈이 양성과정’ 수료생들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 매해 4~11월에만 정기운영하는 이 도서관의 연평균 이용객 수는 5277명에 이른다. 가족 단위 이용객이 전체의 60% 정도다. 지난 3일 분주하게 도서관을 정리 중이던 문씨는 “가장 인기가 있는 책은 ‘초등과학학습만화 Why?’ 시리즈로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어린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라고 설명했다. 관악산 입구 제1광장에 위치한 덕분에 등산 도중 숲속작은도서관을 처음 알게 되는 이용객들도 적지 않다. 이날 도서관을 찾은 김화수(30·여·회사원)씨는 “관악산에 올 때마다 도서관이 예뻐서 한 번쯤 와보고 싶어 들렀다”고 말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4시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구연동화나 자연물 만들기 체험 행사도 준비돼 있다. 개관은 오전 10시, 폐관은 오후 5시다.
  • 폴 매카트니, 그가 온다

    폴 매카트니, 그가 온다

    ‘팝의 전설’ 폴 매카트니(71)의 첫 내한 공연이 성사됐다. 오는 5월 28일 서울 송파구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열리는 현대카드의 공연 프로젝트 ‘슈퍼콘서트’를 통해서다. 지난해 브라질을 시작으로 남미와 유럽, 북미, 일본 등 23개 도시에서 열린 ‘아웃 데어’ 투어의 일환이다. 폴 매카트니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비틀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대중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뮤지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와 함께 비틀스를 결성해 1962년 첫 싱글 ‘러브 미 두’를 발표한 이래 ‘예스터데이’, ‘렛 잇 비’, ‘헤이 주드’ 등 숱한 명곡을 쏟아 내며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팀이 해체되는 1970년까지 총 12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하며 16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 그래미상 7회 수상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그는 존 레넌과 함께 비틀스의 곡 대부분을 작곡하며 비틀스 신드롬의 중심에 섰다. 특히 ‘예스터데이’는 그가 꿈속에서 들었던 멜로디로 쓴 곡으로 유명하다. 비틀스 해체 뒤 폴 매카트니는 밴드 ‘윙스’로, 또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을 이어 갔다. 록뿐 아니라 클래식, 일렉트로니카 등 장르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음악을 시도하며 밴드와 솔로 활동을 포함해 자신이 작곡한 곡 총 32곡을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곡가이자 레코딩 아티스트’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으며, 1965년에는 비틀스의 멤버로 대영 제국 훈장 5등급을, 1997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2010년에는 미국 의회도서관이 수여하는 거슈윈상을 수상하는 등 그를 향한 전 세계적인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오르고 지난해 10월 정규 16집 ‘뉴’를 발표하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이번 내한 공연은 ‘뉴’의 수록곡을 포함해 비틀스와 윙스, 솔로 활동 당시의 히트곡까지 그의 50년 음악 일대기를 아우르는 무대가 될 전망이다. 그와 10년 이상 호흡을 맞춰 온 폴 위킨스(키보드), 브라이언 레이(베이스·기타), 러스티 앤더슨(기타), 에이브 라보리엘 주니어(드럼)가 함께한다. 또 대형 스크린과 레이저, 폭죽, 비디오 등 최첨단 무대기술로 화려한 무대를 꾸민다. 5만 5000~30만원.(02)332-3277.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함익병, “예민한 발언 또 하면 집에서 쫓겨날 것” 어떤 발언했길래?

    함익병, “예민한 발언 또 하면 집에서 쫓겨날 것” 어떤 발언했길래?

    피부과 전문의 함익병이 인터뷰 논란 후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1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는 종합편성채널 JTBC 새 예능프로그램 ‘한국인의 뜨거운 네모’(이하 ‘뜨거운 네모’)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날 제작발표회에는 개그맨 이경규, 유세윤, 방송인 최유라, 피부과 전문의 함익병, 걸그룹 달샤벳 수빈, 여운혁 CP 등이 참석했다. 함익병은 “방송 섭외는 몇 달 전부터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상 프로그램을 못 할 뻔 했다. 그런데 시간이 생겨서 방송을 같이 하게 됐다. 편안하게 첫 녹화를 했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50대 남자들이 생각하는 바를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이어 SBS ‘자기야-백년손님’과 EBS ‘하이힐’에서 하차하게 된 것과 관련해 “’자기야’와 ‘하이힐’ 하차는 내가 하차한 건 아니고 그쪽에서 그만두라고 했다”며 “다시 한 번 그런 예민한 발언을 하게 되면 방송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쫓겨날 것 같다”고 덧붙여 웃음을 자아냈다. 앞서 함익병은 최근 월간조선 3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안철수 의원은) 좋게 말하면 과대망상이고,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쟁이” “독재가 왜 잘못된 것인가? 플라톤도 독재를 주장했다” “여자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이 때문에 그가 출연 중이던 SBS ‘자기야-백년손님’에서 함익병의 하차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지난달 20일 하차했다. 한편 ‘뜨거운 네모’는 최신 정보, 유행, 경향 등 대한민국의 가장 핫한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신개념 토크쇼다. 앙케이트 조사를 통해 대중들이 관심 있어 하는 최신 트렌드에 대해 다뤄질 예정이다. 이경규, 유세윤, 최유라, 함익병, 황상민, 수빈 등이 MC로 나서며 오는 2일 밤 11시 첫 방송된다. 사진 = 스포츠서울닷컴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청약시장 훈풍… 수도권 경쟁률 수십 대1

    청약시장 훈풍… 수도권 경쟁률 수십 대1

    아파트 청약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가운데 4월 아파트 분양 물량이 10년 내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또 주택건설업체들의 상품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부동산 정보업체 닥터아파트에 따르면 새달 전국에서 분양되는 아파트 물량은 53개 단지, 3만 5567가구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22개 단지, 8950가구)보다 297% 늘어났다. 청약 물량은 회복세가 뚜렷한 수도권에 몰려 있다. 25개 단지, 1만 5503가구가 쏟아진다. 아파트 분양 물량이 홍수를 이루는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규 아파트 청약시장에 햇살이 비치면서 건설사들이 앞다투어 물량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처럼 살아난 분위기를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5월은 연휴, 6월에는 지방선거로 수요자들의 관심이 분산될 것이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곽창석 ERA코리아 부동산연구소장은 “연휴가 길거나 선거가 있으면 모델하우스 방문객이 현저히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며 “건설사들이 연휴와 6·4 지방선거를 의식해 분양을 앞당기고 있다”고 말했다. 청약 훈풍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불고 있다. 순위 내 마감은 물론 수십 대1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미분양 아파트 판매도 물을 만났다. 지난달 발표된 주택임대시장 선진화 정책 발표 이후 기존 주택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반도건설이 분양한 경기 동탄2신도시 반도유보라 아이비파크는 모든 평형이 1∼3순위에 마감되고 대부분 계약으로 이어졌다. 입지가 빼어난 지방 아파트도 예외는 아니다. 대림산업이 지난달 분양한 경북 경주시 황성동 대림 e편한세상 아파트는 1순위 청약에서 최고 13.44대1을 기록했다. 대광건영의 광주시 신창동 대광로제비앙 아파트, 화성산업의 대구시 침산동 화성드림파크 청약 열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미분양 아파트를 찾는 발길도 늘고 있다. GS건설, SK건설, 현대산업개발이 함께 분양 중인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DMC가재울4구역’ 아파트 84㎡의 미분양이 이번 달에만 100가구 이상 팔렸다. 분양만 했다면 대규모 미분양을 기록, ‘건설사의 무덤’으로 불렸던 김포지역 잔여 아파트도 수요가 몰리고 있다. 김포시 풍무동 푸르지오 센트레빌(2712가구)은 지난해 7월 첫 분양 때 20%를 밑돌던 중소형 아파트 계약률이 최근 80%선까지 올랐다. 청약시장에 훈풍이 부는 데는 전세보증금 인상에 따른 부담에서 벗어나 아예 집을 사려는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이 기회에 내집을 마련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청약시장이 수요자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건설사들의 다양한 청약전략도 청약 열기를 더하고 있다. 건설사들이 내놓는 대표적인 청약전략은 중도금 무이자 대출과 같은 금융지원과 함께 에너지 절감, 평면설계 혁신, 부대시설 확충 등이다. 현대건설은 스마트폰으로 시간·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집안 에너지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다. 대림산업도 쌍방향 에너지관리시스템을 도입, 입주자가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에너지를 소비할 수 있게 했다. 삼성물산은 중수처리시스템, 태양열 급탕시스템 등을 도입했다. 쾌적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설계도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통풍이 잘되고 개방감이 좋은 판상형 설계가 다시 유행하고, 자투리 공간을 쓸모 있는 수납공간으로 꾸미는 ‘알파룸’ 설계도 유행이다. 대우건설은 소형 아파트에도 대형 수납공간인 펜트리 공간을 제공하고, GS건설은 자연채광이 가능한 1층에 커뮤니티 공간을 조성하고, 피트니스센터·도서실 등을 배치해 인기를 끌고 있다. 교육환경 개선에도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두산건설은 아파트 입주자들이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학원·독서실에 다닐 수 있게 단지 안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호평을 받고 있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1983학번이 2013학번에게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1983학번이 2013학번에게

    지난주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에서 강연을 했다. 올해 봄 학기, 학부의 교양과목 ‘대한민국 트렌드’에 서울신문 기자들이 강사로 나서고 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양한 학과의 학생 500명이 수강하는 대규모 강의다. 내가 선택한 강연의 주제는 ‘기후변화와 그린 비즈니스’. 강연 자료도 신경 써서 만들었지만, 학생들의 질문에 대비해 별도의 메모도 준비했다. “내가 다시 대학에 입학한다면 이렇게 하겠다”는, 30년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강연에 몰두하다 보니 메모는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칼럼으로 그 내용을 전한다. 첫째, 대학 시절에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성취는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인생은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물론 너무 일찍 성공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10대에 감당하기 어려운 인기와 부를 얻은 가수나 배우, 스포츠 스타들이 20대를 넘기기 전에 몰락하는 경우도 많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데 가장 적합한 시기는 대학시절이다. 전공을 고려하면서 목표를 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준비도 할 수 있다. 정치에 뜻이 있다면 정당이나 국회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졸업한 뒤에 기초의원부터 출마하는 것도 방법이다. 글로벌 기업을 일으키고 싶다면 대학시절부터 사업의 시행착오를 겪어보는 게 좋다. 설사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더라도 너무 낙망할 필요는 없다. 대다수가 그런 거니까. 다만, 나이 마흔 살이 넘어서도 내일만 기약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둘째, 언론계 후배들에게 하는 얘기가 있는데, 책을 쓰라는 것이다.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으면, 취재도 더욱 꼼꼼해지고, 문장 한 줄도 더 정성스럽게 다듬게 된다. 똑같은 얘기를 대학생 후배들에게도 하고 싶다. 요즘은 누구나 책을 쓰는 시대다.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해서 혼자 혹은 친구들과 함께 책을 만들어보라. 책을 내는 과정은 그 자체가 큰 공부다. 열에 아홉, 그 책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자기가 펴낸 책을 처음 손에 안는 순간의 성취감과 아쉬움은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다. 셋째, 연애는 꼭 해야 한다. 사랑은 젊음의 특권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에 그걸 왜 포기하나.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면서 첫사랑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은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연애를 해봐야 자기에게 어울리는 남자나 여자를 알 수 있고, 나중에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런 남자’나 ‘그런 여자’ 같은 노래는 무시해 버려도 좋다. 세상에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들이 많다. 넷째, 미국, 유럽 대신 아프리카, 남미로 가라. 많은 대학생들이 교환학생, 봉사활동, 배낭여행 등을 위해 해외로 떠난다. 기왕이면 힘이 넘칠 때 험지로 가라고 조언하고 싶다. 고생하는 만큼 배우는 것도 많다. 선진국은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많은 곳을 여행했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한겨울의 시베리아 벌판이다. 여기만큼 ‘기회’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은 없다. 다섯째,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 것이 낫다. 특히 문과 학생들에게 해당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영대학원들은 대체로 2년 이상의 직장경력을 입학조건으로 요구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사회에서 경험하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한 번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른 여섯에, 꼭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생겨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도서관에서 공부에 몰두하다 고개를 들어보면 그 넓은 열람실에 나 혼자였던 적이 많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군대에 가라고 말하고 싶다. 돈 있고 힘 있는 집 자식들은 잘만 빠지는데, 2년 동안 군대에서 ‘썩는다’는 생각에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가라. 그리고 군 복무를 하지 않으면 적어도 공직에는 참여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바란다. 편집국 부국장
  • 행정관료 평균치 ‘들었다 놨다’ 전혜경 효과

    행정관료 평균치 ‘들었다 놨다’ 전혜경 효과

    “재산공개를 할 때마다 늘 나오는 얘기인데 대부분 남편 재산이에요.” 329억 1906만원의 재산을 신고해 28일 고위 공직자 최고 갑부로 발표된 전혜경(56·1급)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장은 남편을 자수성가형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남편은 외환딜러 출신으로 현재 개인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원장의 재산 총액은 지난해보다 5억 6192만원 증가했다. 대부분 유가증권 수익이다. 전 원장은 특히 본인과 남편 명의로 회사채와 지방채에 나눠 모두 243억 2245만원 유가증권을 보유했고, 골프장·헬스·콘도미니엄 등 3개의 회원권을 가진 것으로 신고했다. 유가증권의 대부분은 재력가인 남편 명의로 신고됐다. 특히 지방채는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 채권을 소유하고 있다. 전 원장의 가족은 경기 파주시와 충북 제천시 일대에 15억 8000여만원어치의 땅이 있고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 아파트 등 4채의 집을 갖고 있다. 전 원장은 국립식량과학원장으로 일하던 2012년 말 재산공개에서 300억원대로 공직자 중 최고 자산가에 올랐다가 지난해 퇴임하면서 재산공개 명단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고위직 평균 재산 하락효과를 불러왔는데, 일명 ‘전혜경 효과’로 불린다. 전 원장은 지난 4월 18일 임명됐다. 이번에도 전 원장을 빼면 공직자 평균재산이 1100만원 줄어든다. 전 원장은 여성 최초로 농진청 주요 보직인 연구정책국장을 지냈고 2009년 여성 첫 국립식량과학원장(1급)에 기용됐었다. 아버지도 농촌진흥청 농촌영양개선연수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쌉쌀한 두 여자 랄라스윗

    쌉쌀한 두 여자 랄라스윗

    한때 ‘홍대 여신’이라는 호칭이 유행처럼 번졌다. 달달한 목소리와 감성적인 음악, 예쁜 외모까지 갖춘 홍대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을 이르는 이 말은 이들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임과 동시에 음악을 이미지에 가둬 버리는 한계로 작용했다. 어쿠스틱 듀엣 랄라스윗은 ‘여신’이 아닌 자신들만의 색깔을 부단히 만들어 왔다. 이들의 음악은 대중이 여성 싱어송라이터에게 기대하는 ‘분홍색’ 대신 청연한 ‘하늘색’, 때로는 먹먹한 ‘회색’을 뿜어낸다. 기타와 건반을 치는 2인조로 시작했지만 대담한 밴드 음악을 시도하는 등 음악적 지평을 넓혀 가고 있다. 27일 공개한 정규 2집 앨범 ‘너의 세계’를 통해 싱어송라이터로서 또 한번 발전을 일궜다. 어쿠스틱 음악과 밴드 음악 위에 현악기와 플루트 등 클래식 악기의 선율을 얹어 풍성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음악에 접근했다”고 말했다. “지난 앨범보다 악기 편성이 다양해지고 편곡에서도 프로그래밍을 도입하는 등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박별·건반 담당) 노래의 주제도 사랑을 넘어 자아에 대한 성찰로 외연을 넓혔다. 타이틀곡 ‘오월’은 실제 5월에 태어난 김현아(기타, 보컬 담당)의 자전적 이야기다. “날씨 좋은 날에 태어났다고 주변에서 축복해 줬을 텐데, 저는 그 기대와 축복만큼 잘 살아왔을까 돌아보게 됐어요.”(김현아) 소소한 행복부터 그리움과 체념, 후회까지 다크 초콜릿처럼 쌉싸름하다. “20대를 마무리하고 30대를 준비하는 시기에 지난날을 돌아보는 과정이 가사에 담겼습니다.”(박별) 각각 15, 16세 때 악기를 배우겠다며 청소년 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를 찾았다가 만난 별난 소녀들은 여느 10대가 그렇듯 대학 입시를 거쳐 무미건조한 대학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러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칠 때쯤 다시 만나 악기를 잡았다. 밴드들의 틈바구니에서 “일단 둘이서 해 보자”며 합주와 작곡 연습을 시작했고, 첫 번째 작품인 ‘나의 낡은 오렌지나무’로 2008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거머쥐었다. 이들은 실용음악학원이나 대학에서 음악을 배우지 않았다. 동영상을 보면서 독학하고 연주자들의 어깨 너머로 배운 게 전부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제약도 없다”고 말한다. “저희가 곡을 쓰면 ‘과감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어요. ‘이런 코드를 여기서 쓰네?’ 하는 이야기들이죠.”(김현아) 이것이 랄라스윗을 여성 그룹, 어쿠스틱 등 어떤 전형에 안주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29세(박별)와 28세(김현아)인 이들의 음악은 또래 젊은이들의 어깨를 애써 토닥이지 않는다. 대신 ‘너도 나와 같구나’ 하는 반가움을 준다. “세상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고 싶어요.”(박별) “시험을 망쳤을 때 옆 친구도 같이 망친 것 같은 느낌 말이죠. 하하.”(김현아)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20년간 백두산 찍은 산악 사진가 안승일

    [김문이 만난사람] 20년간 백두산 찍은 산악 사진가 안승일

    4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라도령은 꽃향기에 잔뜩 취했다. 저절로 백두의 문이 열렸다. 금잔 한 잔에 시름 한 술 놓았다. 흰 구름과 함께 백두낭자가 나타났다. 낭자는 팔을 벌려 한라도령을 감싸 안았다. 고운 자태와 온화한 숨결로 그를 따뜻하게 포옹했다. 도령은 낭자의 아름다운 치마폭에 푹 빠졌다.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었다.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낭자는 어느새 백두의 여신으로 변했다. 도령은 얼마 후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설레는 20년을 백두산에서 살았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한 마디를 백두산에 묻었다. 백두산은 나의 스승이요 사랑이다. 20년 전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자연을 복제해내는 단순한 인간 복사기로, 사람질 제대로 못해 보고 머저리 사진장이의 삶을 살고 말았을 것이다.’ 산악사진가 안승일(68)씨는 ‘괴짜’로 통한다. 20년 동안 사시사철 백두산에 살다시피 하며 백두산 속살만 수십만 컷을 찍었다. 단순히 카메라 셔터만 누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나만큼 진하게 백두산의 영혼과 동고동락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할 정도로 백두산에 미쳐 지냈다. 천지를 보는 순간 백두의 신을 만나 넙죽 큰절을 올리면서 단박에 시작된 백두산 인생이었기에 ‘괴짜, 백두산의 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로지 사진 한 장을 담기 위해 백운봉에서 장군봉으로 솟는 해를 기다리며 영하 50도를 견뎌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예 천막집을 두 채나 짓고 살았다. 계속되는 눈보라에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천막집 안에서 김치전과 만두를 빚고 눈 녹인 물로 북어 대가리와 멸치 육수를 만들어 칼국수만 먹다 보니 복부비만에 고지혈증 환자가 됐다. 제대로 된 일출 하나 건지려고 서백두 청석봉에서는 눈구덩이를 파고 지낸 일이 수백 번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추워도 한 컷 한 컷에 대한 기대감으로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즐겁게 지냈다. 백두산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이도백하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하나 사서 작업실을 꾸렸다. 백두산을 마주 보는 식탁에서 밥을 먹고 뒹굴뒹굴 책이나 보다가 미풍을 타고 살살 들어오는 구름이 산과 어울리는 낌새가 보이면 후다닥 집 근처 오름으로 달려갔다. 운 좋은 날이면 창밖으로 펼쳐진 웅장한 장백산맥의 새벽을 담았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또 찍으며 살았다. 최근 안씨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불멸 또는 황홀’이라는 제목으로 백두산의 20년 사진전을 열어 ‘역시 괴짜 안승일’이라는 낙관을 또 한번 찍었다. 백두산에서 지낸 세월이 궁금해 지난 18일 서울 충무로의 한 인쇄소 사무실에서 안씨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아직도 갈 수 없는 산’과 ‘우리 동네 꽃 동네’라는 두 권의 사진집을 최근에 찍어냈다. 백두산 20년의 흔적이 담긴 것들이다. 사진집을 들추던 그에게 어떻게 해서 백두산과 인연을 맺었는지 먼저 물었다. “1994년 4월이었지요.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산악인 글쟁이 박인식씨가 백두산에 가자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통일이 된 후에나 백두산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4, 5년 뒤면 통일이 될 줄 알았지요. 인천항에서 박씨를 만났는데 다른 일행 열댓 명과 같이 왔습니다. 이들은 중국 여러 곳의 여행코스 중 백두산에 들르는 일정을 잡고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백두산 코스에서 숙명처럼 혼자 남게 되면서 20년 동안 그곳에 파묻히게 됐습니다. 필름 현상을 위해 한국에 와야 할 때 말고는 줄곧 백두산에서 지냈지요.”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산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쉽지가 않았다. 기상이변이 워낙 심해 ‘진경의 순간’을 놓치기 일쑤였다. 눈 덮인 산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찾는 것처럼 마땅한 터를 잡고 앉아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가끔 중국 병사와 맞닥뜨려 ‘수상한 자’로 내몰리기도 했다. “하루는 중무장한 중국 군인 셋이 제 방에 들어와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자 그렇다면 얼른 찍고 갈 것이지 왜 오랫동안 살고 있느냐, 국경 부근에 어슬렁거리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냐, 카메라와 렌즈들은 무슨 용도에 쓰이는 것이냐고 다그쳤습니다. 결국 저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나중에는 친한 사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백두산에서 1년을 지낸 뒤 ‘백두산’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장기체류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찍은 생생한 장면들이 모였다. 백두산이라는 하나의 피사체에 4m에서 16m에 이르기까지 마치 백두산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일으킬 만한 사진들이었다. 이어 안씨는 북한 쪽에서 백두산을 찍은 일본 사진작가 이와하시의 사진 ‘장백산’과 자신의 사진 ‘백두산’을 합해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때 ‘백두산’ 사진집 표지 안쪽 날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눈길을 끌었었다. ‘정일이 형님, 백두산 금강산 사진이 필요하시면 일본 사람 부르지 마시고 내가 좀 찍게 해주시오. 나는 평생 산 사진을 찍어온 사람이오. 사진은 재주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민족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내 조국 산하를 왜 일인들에게 빼앗겨야 합니까.’ 2001년 6월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남북공동사진전이 열릴 때에도 난생처음 넥타이를 매고 ‘정일이 형님’을 향해 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백두산 사진작업을 통일을 위한 민족화합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했다. 그래서 백두산 사진은 대부분 ‘남과 북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혹자는 감상적 통일론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백두산에 있다 보니 참으로 이상한 산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면서 “애국자도 아닌 사람에게 나라를 걱정하게 하고 국가관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에게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다. 1998년 부산에서 열린 북한의 사진가 김용남의 사진과 함께 2인전을 통해서도 이 같은 ‘백두산의 혼’을 알리기도 했다. 산과의 인연은 어떻게 해서 맺게 됐을까. 어릴 적부터 시끄러운 세상살이가 싫어 자꾸 산으로 갔다. 중학교 때였다. 그해 처음 뜨는 해를 본다고 삼각산으로 갔다.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텐트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심취했다. 나중에 한적한 시골에서 살 생각에 건국대 원예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시간만 나면 산으로 가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2학년 때 대학을 중퇴한 그는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서라벌예술대 사진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나이 많은 자신한테 반말로 하대하는 후배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꼴사나웠다. 다시 등산 장비를 챙기고 산으로 올라갔다. 간첩으로 오인받아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이럴 무렵 서라벌예대 산악회 선배들한테 결혼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68년 당시에는 신랑 신부가 결혼 예복을 입고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붐이 일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에 따라 결혼하는 선배들이 그를 불렀던 것이다. 나중에는 결혼하는 친구들도 그를 찾았다. 이래저래 돈이 모였다. 1979년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내고 광고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달동네에서 어렵게 사는 아버지한테 500만원을 건네면서 집을 늘려 구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아들에게 사진집을 만들 것을 권유하면서 사진가로 대성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첫 사진집 ‘산’을 시작으로 ‘삼각산’ ‘한라산’ 등이 연이어 나왔다. 도봉산 인근에 작업실을 위한 땅을 장만할 만큼 돈을 모았다. 충무로 생활 10년쯤 지날 무렵 그는 백두산에 ‘필’이 꽂히면서 모든 것을 접고 백두산으로 훌쩍 떠나게 된다. 벌어놓은 돈까지 몽땅 백두산 사진에 투입했다. “경제적으로는 다시 어려워졌지만 제게는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과 같은 백두산이 곁에 남아 있습니다. 항상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또한 지금 와서 효자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백두산 사진을 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사진을)크게 인화해주곤 합니다. 살림에 보탬이 되고 있거든요(웃음).” 백두산 사진은 몇 장 정도 가지고 있을까. 웃으면서 “그런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8을 옆으로 누이면 무한대를 나타내는 수학기호가 된다. 그만큼 정말 지독하게 찍었다”면서 “하지만 고르고 골라 엄선해서 내놓을 만한 사진은 100여장이다. 찍은 사진 컷 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과연 몇 장의 사진을 건지느냐가 중요하다. 그나마 20년 동안 운 좋게도 100장 정도 건졌다고 생각한다”며 웃는다. 다시 물었다. 백두산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할까. “저는 2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석을 백두산에서 보냈습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이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가야 할 산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산입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작업이 민족화합의 그날을 한시라도 앞당길 수 있다면, 저의 사진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통일이라도 한 발 앞당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제 16세 때 맨 처음 카메라 매고 올랐던 삼각산부터 다시 오를 예정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산악사진 인생 2막을 뚜벅뚜벅 걸어가기로 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안승일은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카메라를 매고 산에 올랐다. 서라벌예술대 사진과를 중퇴했다. 1979년 서울 충무로에 그린스튜디오를 설립해 광고사진을 찍었다. 1994년부터 20년 동안 백두산 사진에만 몰두했다. 주요 사진전으로는 ‘한국의 산’(1970·1975년), ‘백두산-일본 사진가 이와하시와 2인전’(1996년), ‘백두산-북한 사진가 김용남과 2인전’(1998년), ‘남북공동사진전-평양’(2001·2004년), ‘산의 영과 기-서예가 권창륜과 2인전’(2011년), ‘백두산 사진전-불멸 또는 황홀’(2014년) 등이 있다. 또한 사진집으로는 ‘산’(1982년), ‘삼각산’(1990년), ‘한라산’(1993년), ‘백두산’(1995년), ‘굴피집’(1997년), ‘아리랑’(1999년), ‘고산화원’(2007년), ‘천상지천하화’(2010년), ‘백산백화’(2013년), ‘아직도 갈 수 없는 산’(2014년), ‘우리 동네 꽃 동네’(2014년) 등 10여권을 발간했다.
  • [내러티브 리포트] ‘염전노예’ 사건 그 이후… 지적장애 박씨는 왜 제 발로 염전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나

    [내러티브 리포트] ‘염전노예’ 사건 그 이후… 지적장애 박씨는 왜 제 발로 염전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나

    지난달 한 노모가 장애인 아들이 보낸 편지를 들고 서울 구로경찰서를 찾아와 수사를 의뢰하면서 ‘염전 노예’ 사건이 알려진 지 40여일이 흘렀다. 이후 전남청 도서인권보호특별수사대가 전남 신안군 신의도에 상주하면서 조사한 결과 체불·폭행·강제노동 등을 당한 염부(염전 인부) 가운데 탈출 의사를 밝힌 30여명이 구조됐다. 이 가운데 2006년 염전 인권유린 사건이 터지면서 구출됐던 지적장애 3급 박모(42)씨가 지난달 같은 염전에서 또 발견됐다. 그는 8년 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6개월 만에 제 발로 다시 염전에 돌아갔다고 했다. 자활의지는 충만했지만 어떤 정책적 도움이나 사회적 관심도 받지 못했기에 염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박씨의 지난 15년을 내러티브 리포트 형태로 재구성했다. 2000년 3월, 박씨(당시 28세)는 서울 영등포 역 근처에서 낯선 남자를 만났다. 허기진 박씨에게 따뜻한 국밥을 사주며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16세에 집을 나와 1999년 첫 직장이던 신발공장이 망한 뒤 노숙생활을 전전했던 그가 모처럼 맞닥뜨린 호의였다. “시켜만 주면 일을 잘할 자신이 있었어….”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는 일자리는 흔치 않았기에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돈을 벌어 공장에 다닐 때처럼 주말이면 놀러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었다. 목포여객터미널에서 두 시간 배를 타고 신의도에 도착한 뒤에야 그곳이 염전이란 사실을 알았다. 주인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그래도 박씨는 주인을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담배나 과자값을 꼬박꼬박 챙겨줬고 11월 염전 철이 끝나면 서울이나 목포에 다녀오라고 용돈도 줬다. 애당초 박씨에게는 노동에 따른 정당한 대가인 ‘임금’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셈이다. 염전 철인 4~10월 매일 새벽 4시에 눈을 떠 13~14시간을 일했고 11~3월에는 주인집 농사일과 소금 옮기는 일을 했다. 주인이 쥐어 준 돈은 과자·담배값 정도. 통장이 있기는 했지만 주인이 관리했기 때문에 얼마를 받았고, 얼마를 더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일이 고되고 주말에도 쉴 수 없다는 게 힘들었다. 몇몇 염부들이 몰래 도망갔다는 소식도 들려왔지만, 탈출을 꿈꾸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울에 가더라도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박씨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염부 생활 7년째이던 2006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신의도 염부들의 노예 같은 삶을 다루면서 경찰이 탐문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임금 체불이나 폭행, 강제 노동을 당한 염부들을 구조했다. 염전 주인은 3년간 밀린 임금을 박씨에게 물어줬다. 박씨는 생전 처음 목돈을 쥐었다. 18년 만에 대구에 사는 이복 누나도 찾았다. 부모는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박씨의 사연을 소개한 방송사에서 연락하자 누나는 “데리고 와라. 같이 살겠다”고 했다. 일자리도 구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은 녹록지 않았다. 2006년 6월 누나 집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미장일을 시작했지만 허리를 다쳐 4개월 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데다 몸도 성하지 않으니 불러 주는 곳이 없었다.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나나 당시 그를 발견한 수사팀이 장애 진단을 받을 수 있게 해 줬거나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제공하는 교육훈련을 받도록 했다면 다른 희망을 찾을 수 있었을 터.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지적장애 등급을 신청하라는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2007년 1월, 박씨는 염전을 나온 지 6개월 만에 제 발로 지긋지긋한 섬으로 돌아갔다. “나도 밥은 먹고 살아야지…. 그래서 염전 주인한테 내가 전화했어.” 이복 누나도 말없이 그를 보냈다. 그렇게 8년을 또 염부로 지냈다. 휴대전화도 있었고 염전 철이 끝난 11월에는 용돈 50만원을 가지고 나와 서울, 목포를 돌아다녔지만, 경찰이나 장애인단체에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칫 일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염전 주인의 임금 체불은 여전했지만 서울이나 목포에서 굶거나 노숙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믿었다. 현재 박씨는 신의도에서 나와 목포의 한 노숙인 시설에 머물고 있다. 전남장애인인권센터의 도움으로 최근 병원에 가서 장애 진단도 받았다. 이제 신청만 하면 지적장애 3급을 받는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도 품게 됐다. “대구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다닐 정도로 기본적인 것은 배웠어…. 시켜만 주면 일은 잘할 수 있어”라는 그의 말은 어눌했지만, 확신이 느껴졌다. “26년 전에 다녔던 공장과 비슷한 곳에서 일하고 싶어. 토요일에는 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것도 먹고 야구장에도 갈 거야”라고도 했다. 박씨는 염전 주인이 지난 8년간 체불한 임금 가운데 3년치만 받을 수 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염전 주인이 박씨를 8년이나 노예처럼 부렸더라도 임금 청구 시효가 지나지 않은 3년치만 의무적으로 지급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박씨처럼 장애가 있을 경우에는 농촌 일용직 근로자 평균 급여에서 일률적으로 노동상실률 50%를 뺀 금액만 받을 수 있다. 나머지 5년치의 임금을 받으려면 3년 안에 소송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박씨는 3000만원 정도의 돈이 생기면 당장 서울로 갈 생각이다. 그는 “법원에 가는 것보다 그냥 빨리 일하고 싶어”라며 해맑게 웃었다. 목포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 아파트(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 아파트(중)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만든 ‘아파트 공화국’의 흑역사 풍수학자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가 “이제 모든 국토는 도시다”라고 선언하자 사회학자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사실인즉 우리나라 모든 도시는 아파트이고 따라서 모든 국토가 곧 아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화답했다. 산비탈과 논두렁, 밭두렁 일색이던 우리 땅이 ‘아파트 천지’로 변했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의 눈에 처음 들어오는 경관은 산이나 강이 아니라 아파트가 됐다. 상전벽해(桑田碧海)에서 ‘상전금지’(桑田地)가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좋든 싫든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 출신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 두 대통령의 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다. 작금의 아파트공화국은 박정희·전두환의 의지와 그를 맹신하는 추종자들이 내놓은 합작품이다. 박정희가 기획하고 전두환이 연출했다. 박정희가 ‘아파트지구 지정’을 통해 서울 강남을 아파트 숲으로 변하게 했다면 전두환은 ‘택지개발촉진법’으로 대한민국을 아파트 밀림으로 만들었다. 아파트 발전사와 주거사회학, 아파트 문화사를 두루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주거혁명은 5·16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 오른 1961년 시작돼 5~9대 대통령을 지내고 1979년 10·26사건으로 시해된 18년 동안 진행됐다. 그의 경제이데올로기는 ‘건설입국’(建設入國)이었고 그에 편승해 아파트는 지배적 주거 형태로 등극했다. 보릿고개에서 막 벗어난 신생 대한민국의 목표가 ‘먹는 것’에서 ‘사는 곳’으로 전환된 시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독재자의 선택이었다. 관계 당국의 조건 없는 정책지원과 아파트 건설 업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수직 폭발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의 의식주생활은 너무나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이 많았음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생활혁명이 절실히 요청되는 소이가 있으며 현대적 시설을 완전히 갖춘 마포아파트의 준공은 이러한 생활혁명을 가져오는 데 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인구의 과도한 도시집중화는 주택난과 더불어 택지가격의 앙등을 가져오는 것이 오늘의 필연적인 추세인 만큼 이의 해결을 위해선 앞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이러한 고층아파트 주택의 건립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입니다.” 1962년 국내 최초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치사 중 일부다. 박정희의 ‘생활혁명론’은 앞으로 집권기간 동안 그침 없이 추진될 ‘아파트 입국’의 미래를 웅변한다. 육사 8기생으로 혁명주체세력의 한 명이었으며 대한주택공사(지금의 LH) 총재를 두 번 지낸 장동운이 아파트 전도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장동운은 미국 군사학교 유학시절 잡지에서 본 대단지 아파트 사진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 김종필 등 혁명세력에 알렸다. 아파트에 대한 낮은 인지도와 ‘빈민굴’이라는 인식 탓에 그의 추진력과 혁명세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마포아파트 부지 확보와 건설자금 마련 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동운은 두 번째 주공 총재 임기 중이던 1968년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이라는 우리나라 아파트건설사에 획을 긋는 대표 작품을 남겼다. 일본신문 광고의 80%를 주택광고가 차지하는 것을 보고 중산층 아파트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사상 첫 모델하우스의 등장과 아파트 분양제도의 도입이라는 신기원을 기록했다. 이후 현대건설 등 민간 건설사들이 뛰어들면서 아파트 건설시장은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다. 1994년 폭파된 남산 외인아파트도 장동운의 작품이었다. 1970년 박정희에게 외국인 바이어 거주용 아파트의 필요성을 건의하자 박정희는 지도 위에 한남동 외인주택에서 남산공원까지 줄을 쫙 그으면서 “이 선 안쪽으로 아파트를 세우시오”라고 분부했다는 것이다. 남산 중턱에 16층, 17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2개 동 450가구가 들어섰다. 남산 하얏트호텔(지금의 그랜드하얏트서울)은 어부지리로 생겼다. 1972년 외인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가 건물 옥상에 설치된 대피용 헬기 포트를 시찰하다 눈에 거슬리는 군사시설이 보이자 “철거하고 호텔을 지으라”고 지시한 것이 하얏트호텔의 탄생 비화이다. 개발연대 남산에는 ‘3대 흉물’이 있었다. 외인아파트와 남산맨션, 하얏트호텔이 그것이다. 외인아파트는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으로 사라졌지만, 남산을 병풍처럼 막아선 하얏트와 남산맨션은 건재하다. ●김현옥·양택식·구자춘 3인 ‘아파트 도시’ 밑그림 혁명세력을 등에 업은 주공이 마포아파트와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의 성공으로 서울에 아파트의 싹을 틔웠다면 꽃은 세 명의 서울시장이 피웠다. 주공은 주공아파트, 서울시는 시민·시범·시영아파트로 독재자의 입맛을 돋웠다. 박정희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서울에 건설바람을 일으킨 김현옥(1966~1970), 양택식(~1974), 구자춘(~1978) 등 세 명의 시장이 재임한 12년 동안 ‘아파트 도시’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김현옥의 시민아파트, 양택식의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잠실주공아파트, 구자춘의 반포아파트가 대표적이다. 김현옥은 판잣집을 철거하고 철거민을 근교로 집단이전시킨 뒤 철거 터에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와 1971년 광주대단지 폭동사건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한강변을 아파트 택지로 조성했다. 한강상류에 소양강댐이 건설돼 물난리 걱정이 사라지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으로 강북지역에 대한 안보불안감이 높아진 게 일조했다. 양택식은 김현옥이 벌려 놓은 난제를 꼼꼼히 처리했다. 여의도개발과 시범아파트의 분양 성공은 서울시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타개했을 뿐 아니라 아파트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시켰다. 구자춘의 뚝심이 강남을 아파트로 뒤덮게 했다.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 순시에서 박정희는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을 지시했다. “영동이나 잠실을 막연하게 개발하는 것은 서울시의 인구증가 정책밖에 안 된다. 획기적인 방안을 내놔라”라는 것이었다. 구자춘은 시내에 흩어져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을 반포로 옮기고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할 것을 결심한다. 관료 출신으로 매사 신중했던 양택식과 달리 군 출신인 김현옥, 구자춘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외에 상전이 없는 듯 행동했다. 관계부처 장관과의 협의나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 등 관련 절차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허벌판’ 강남을 아파트지구로 지정하는 일도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권력자의 지시를 받은 지 1년여 후인 1976년 7월 5일 구자춘은 천호대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를 구획정리가 한창인 영동지구로 안내한 자리에서 아파트지구 지정계획을 보고했다. 개인의 건축허가 행위가 금지되고 아파트만 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은 아파트지구 지정계획이 그려진 도면 위에 특유의 사인을 했다. 이른바 윤허였다. 이때 반포·압구정·청담·도곡·이수·잠실·이촌·서빙고·원효·여의도·화곡 등 11개 지구 236만평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개인의 재산권 침해에 대해 누구도 가타부타할 수 없었고 나머지는 통과의례였다. 10여년 후 11개 지구에는 680개동 5만 가구분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강남은 아파트 쑥대밭이 됐다. ●탈아파트 시대 성큼… 아파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박정희의 시대가 지고 전두환의 시대가 왔다. 박정희와 추종자들의 아파트 입국 노력은 1980년대 전두환 시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서슬 퍼런 국보위를 통해 주택 500만호 건설이라는 경천동지할 공약을 내놓았다. 1981년부터 10년간 3조 6000억원을 투입해 아파트 151만호 등 주택 500만호를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존재하던 대한민국 주택의 총량이 500만호였으니 그 배포를 짐작할 만하다. 공약을 시행하는 수단인 택지개발촉진법이 1981년 시행됐다.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관통한 아파트를 위한, 아파트에 의한, 아파트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택지개발촉진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정 공포된 6000여개의 법률 중 가장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법률”이라고 평가했다. 택지개발예정지구라는 이름으로 어떤 땅이나 수용해 택지로 개발할 수 있고, 다른 법과 처분의 적용이 일체 배제되는 법이다. 이후 20년 동안 1억 1380만평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됐다. 이 시기 남아 있던 모든 녹지는 택지로 변했다. 개포·고덕·목동·상계·중계지구가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수도권 신도시가 건설된 것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전두환의 ‘주택 500만호 건설’과 노태우의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에서 ‘주택’이란 아파트의 다른 이름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예의 ‘아파트 해법’으로 주택수요를 충족시켰다. 나아가 부의 축적과 차별적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중산층의 욕망을 채워줬다. 아파트 건설 업체들도 재벌그룹으로 성장하도록 배를 불렸다. 그 결과 우리나라 주택 열 채 중 여섯 채가 아파트로 둔갑했다. 고밀도 초고층 아파트 덕분에 2008년 주택보급률 100%를 넘어섰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집 부족에서 벗어나는 대역사가 이룩된 셈이다. 아파트는 고질적인 주거문제를 해결했지만 저출산·고령화와 나홀로 가구의 증가 등 산적한 문제 앞에 노출돼 있다. 아파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이주열 후보자와 권선주 행장의 공통점/안미현 경제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이주열 후보자와 권선주 행장의 공통점/안미현 경제부 전문기자

    제목만 보고 ‘학교’를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와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연세대를 나왔다. ‘내부 승진’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후보자는 직전 명함이 한은 부총재, 권 행장은 기업은행 부행장이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올해 새집으로 이사를 했거나 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 후보자는 오는 6월에 서울 강남구 보금자리주택지구 안의 새 아파트에 입주한다. 권 행장은 지난주에 지금 살고 있는 집 인근인 대치동 아파트로 옮겼다. 새 아파트는 아니지만 보름 정도 수리해 말끔하게 새집처럼 꾸몄다. 이 후보자는 한은 부총재로 정년 퇴임한 직후인 2012년 6월 청약 신청을 넣었다. 4대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됐다. 어제 국회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해 4월 1일 총재로 취임한다. 두 달 뒤에는 2년 동안 열심히 중도금을 부은 새집으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올해가 이 후보자 개인에게는 대운(大運)이 든 해인 듯싶다. 권 행장도 이 후보자 못지않다. 몇 년 전부터 집을 내놓았지만 통 팔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중순 부동산중개업소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그 길로 달려가 오밤중에 ‘헌 집 팔고 새 집 사는’ 매매 계약을 동시에 체결했다. 집이 팔릴 때까지 이사할 집을 사지 않는 것은 권 행장의 오랜 철칙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은행원’의 면모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2월 23일 기업은행장에 내정됐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운에 관한 한 고(故) 김정태 국민·주택 초대 통합은행장을 빼놓을 수 없다. 51살에 최연소 은행장(주택은행장)이 됐던 그는 ‘금피아’(금융감독원) 출신인 당시 김상훈 국민은행장과 합병은행장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누가 봐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에 고인은 살아생전 인터뷰에서 “내가 억세게 운이 좋은 건 맞다. 그러나 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온다”고 답했다.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고 준비돼 있지 않으면 운은 자신의 곁을 그대로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흘러가는 강물 속에 있으면 그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다”는 고인의 지론과도 맥이 닿는 얘기였다. 이 후보자와 권 행장에게도 운이 좋았다는 평이 따라다닌다. 한은 총재 인선에 청문회가 처음 도입된 덕에, 대통령이 여자인 덕에, 총재 후보가 되고 행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후보자가 35년간 통화정책의 한 우물을 파지 않았다면, 권 행장이 해외 지사장으로 발령난 남편을 ‘사표 쓰고’ 편하게 따라나섰다면, 그 운은 두 사람을 비켜 갔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 막 거대 조직의 수장으로 발을 뗐거나 떼려고 한다. 이 후보자는 국가경제와 직결된 중앙은행의 수장이다. 권 행장은 우리나라의 첫 여성 은행장이다. 결코 요행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 날아든 운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지금부터 두 사람에게 달려 있다. hyun@seoul.co.kr
  • [스포츠 라운지] 볼 차면 공부 안해? 우린 달라

    [스포츠 라운지] 볼 차면 공부 안해? 우린 달라

    지난 7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불암산 축구장에서 열린 2014 대교눈높이 전국고등축구리그 서울 남부지역 첫 경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창단 1년밖에 되지 않은 노원 레인보우FC가 60년 전통의 ‘명문’ 중대부고를 4-1로 꺾은 것. 레인보우FC는 창단 첫해인 지난해 참가했던 모든 공식대회에서 17전17패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중대부고가 손쉬운 승리를 예상하고 방심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를 지켜본 고교 축구 관계자는 “3학년이 5명밖에 없는 팀의 3점 차 대승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라고 말했다.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은 레인보우FC가 공부는 뒷전인 학교 운동부가 아니라 이른바 ‘공부하고 축구하는’ 지역 클럽팀이란 사실. 그래서 팀 운영, 회비 등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학교 운동부와 다르다. 레인보우FC는 공부는 소홀히 하고 운동에만 집중하는 학교 운동부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지난해 2월 노원지역 시의원, 중학 축구부 감독 등 뜻있는 이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실험적인 팀이다. 평일에 선수들은 일반 학생과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등하교한다. 학교 운동부처럼 합숙 훈련도 없다. 노원지역 다섯 개 고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각자의 정규수업이 끝난 뒤 개별적으로 버스를 타고 훈련 장소인 공릉중학교 운동장이나 불암산 축구장으로 모여든다. 운동장 구석에서 유니폼을 갈아입은 선수들은 이관호(53) 감독의 지도 아래 1~2시간 정도 훈련을 하고 난 뒤 학원이나 독서실, 집으로 흩어져 공부를 한다. 부족한 훈련은 주말에 집중 보충한다. 공부와 축구를 병행하다 보니 선수들의 학교 성적도 준수하다. 일반 학교 운동부가 내신 8~9등급으로 이른바 ‘베이스(바닥)를 까는’ 데 반해 레인보우FC 선수들의 내신은 3~6등급이다. 클럽 운영 원칙으로 ‘선수로서 운동할 권리’와 ‘학생으로서 학습할 권리’를 동시에 보장하도록 명시하고, 이를 엄격히 지키고 있다. 단장인 문상모 시의원은 “학생 선수가 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실패로 직결되는 잘못된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지난달 고교를 졸업한 레인보우FC 출신 학생 3명 모두가 축구 특기생이 아닌 일반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한 명은 4년 장학생으로 뽑혔다. 클럽 운영과 관련된 내용을 학부모들에게 비교적 소상히 알리는 등 재정도 투명하게 운영된다. 무엇보다 회비가 월 30만원으로 부담스럽지 않다. 일반 학교 운동부의 회비는 적게는 월 50만원에서 1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전지훈련 비용이나 대회 참가비 명목으로 돈을 걷는 일도 없다. 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회비가 면제된다. 선수들이 여러 학교에 흩어져 있다 보니 일반 학교 운동부에 잔존하는 선후배 간 폭력 등의 문제도 없다. 이 감독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느라 힘들 법도 한데 늘 표정이 밝고, 훈련 참석률은 항상 100%”라며 “선배가 후배를 아끼고, 경기장이나 용품 정리에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말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지난 10일 오후 5시쯤 불암산 운동장에 모인 선수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미니게임을 하고 있었다. 공을 차고 뺏다가 어느 한 명이 넘어지기만 하면 경기가 중단됐다. 모두 “괜찮냐”며 넘어진 선수를 걱정했다. 골키퍼 2명을 포함해 전체 선수가 18명밖에 안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진심으로 동료의 부상을 걱정하는 표정들이었다. 훈련 뒤 각자 교복으로 갈아입은 선수들은 가방을 메고 제 갈 길로 향했다. “모레 모의고사를 얼마나 준비했냐”고 웃으며 얘기를 주고받는 아이들의 말간 미소가 산뜻하게만 느껴졌다. 글 사진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강남구 한류스타 거리 만든다

    서울 강남구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류스타 거리가 들어선다. 연간 500만명 이상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강남지역에도 영국 런던의 애비로드와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광장 등 도시를 상징하는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남구는 12일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웨스트명품관 광장에서 이야기가 있는 도심형 올레길 ‘K로드’의 첫 번째인 ‘K스타 로드-한류스타 거리 선포식’을 연다. 강남 관광홍보대사를 맡은 그룹 ‘샤이니’와 ‘EXO’를 비롯해 ‘씨앤블루’ ‘A.O.A’ 등 한류스타들도 테이프 커팅에 동참한다. K로드는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명소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고자 추진하는 도시 브랜딩 프로젝트의 하나다. 한류스타들이 즐겨 찾는 가게, 이들을 배출한 연예기획사 등을 들러볼 수 있는 거리를 주제로 거리를 꾸민다. 갤러리아백화점~SM엔터테인먼트, 큐브엔터테인먼트 1.08㎞ 구간이다. 우선 최신 한류 트렌드를 반영해 핫뉴스에 오른 스타들의 추억이 담긴 명소, 자주 가는 맛집 등 48개 스토리 매장을 선정한다. 이로써 관광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한류스타 거리 심벌마크로 거리 이정표와 방향안내 표시를 한다. 구는 유명 패션숍 거리인 ‘K패션 로드’, 뷰티숍과 병원을 중심으로 한 ‘K 뷰티 로드’, 맛집을 테마로 ‘K 구오메이(Gourmet) 로드’ 등도 조성할 계획이다. 신연희 구청장은 “이번 선포식을 계기로 다소 막연했던 한류스타 거리를 명확하게 알리고 조성 방향과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강남구를 찾는 관광객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상)

    서울은 넓고 그리고 깊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장기연재한 ‘서울택리지’가 서울의 윤곽을 더듬는 도시학적 탐사였다면 이번에 후속으로 선보이는 ‘서울택리지-테마기행’은 서울의 속살을 찬찬히 살펴보는 풍물적 탐사의 성격을 띨 것입니다. 먼저 세계 최고,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서울의 아파트와 아파트 문화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어 서울의 극장, 백화점, 호텔, 공원, 시장의 명멸사(明滅史)를 추적할 작정입니다. 서울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지하상가와 지하도, 고가도로와 육교의 부침이나 한강 다리와 나루의 변천도 들여다보기의 대상입니다. 물난리와 하천복개, 전차, 판자촌과 달동네, 다방·댄스홀 같은 유흥업소에 얽힌 흘러간 추억도 되새김해 볼만할 겁니다.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이내믹이 지배하고 있는 서울의 변화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어쩌다 아파트가 서울의 압도적 주거문화가 됐을까 아파트는 서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한국사회를 읽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서울사람 열 명 중 여섯 명이 아파트에 살고 있고, 서울 도시경관을 아파트가 주도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여성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교수가 2007년에 출간한 ‘아파트 공화국’은 파리의 아파트가 아니라 서울의 아파트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줄레조는 1990년 서울 방문길에서 공룡처럼 군림하고 있는 아파트와 아파트단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주저 없이 ‘서울의 아파트’를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주제로 선택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서울의 아파트 건설 이유와 한국인들의 아파트에 대한 열망을 분석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0년 넘게 걸린 긴 조사과정을 통해 그녀는 왜 아파트가 서울의 지배적인 주거형태가 됐으며, 한국의 중산층은 왜 아파트에 집착하느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다. 이방인의 눈에는 희귀한 이상현상이었지만 한국사람들은 덤덤했다. “그런 것도 연구대상인가”라는 조롱 섞인 핀잔을 극복하고 줄레조는 200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아파트문화 분야연구의 독보적인 학자로 인정받는다. 유수 기관들이 그녀를 초빙해 강연을 듣는다. 줄레조의 의문에 한국사람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서울은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아파트라는 거주형태의 선택이 불가피했다고. 우리가 알고 생각하는 대로다. 그러나 줄레조의 연구결과는 달랐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압축된 현대성’(compressed modernity)의 반영이었다. 아파트는 돈이나 주식과 비슷한 환금성을 가진 재화인 동시에 현대화의 매개체 또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1970~80년대 산업화를 담당한 권위주의 정권과 재벌, 중산층이 맺은 ‘3각 동맹’이 아파트를 상위 계급화했다고 주장한다. 아파트는 서울사람, 나아가 한국인 욕망의 상징이며 3각 동맹이 건재하는 한 아파트에 대한 환상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아파트와 아파트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비평한다. 영화평론가 이형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집의 역사’와 다름없다”라면서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갖는 것을 중산층 평균적 삶의 실현으로 봤다. 주거지역과 평형, 아파트 건설회사의 브랜드가 신분을 드러내고, 재개발이나 뉴타운 공약이 선거 판세를 좌지우지하고, 아파트 정책이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2004년에 출현한 초고층 최첨단 주상복합 아파트는 또 다른 성공과 신분을 상징하는 ‘욕망의 바벨탑’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경제 칼럼리스트 우석훈도 줄레조의 분석에 동의하면서 중산층의 욕망과 개발독재의 획일성이 결합된 부동산정책과 아파트공화국의 파국을 예고했다. ‘아파트 한국사회’를 펴낸 건축가 박인석(명지대) 교수는 “문제의 핵심은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라고 비판의 대상을 좁혔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담장을 둘러친 ‘단지’가 문제라는 인식이다. 그는 아파트를 열악한 도시환경이라는 사막 속에 자리 잡은 ‘사설(私設) 오아시스’라고 명명하면서 오아시스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임대아파트 단지, 분양아파트 단지, 주상복합아파트 단지처럼 아파트 단지가 재산가치에 따라 계급화하면서 계층적으로 폐쇄성을 띤다고 보았다. ‘단지 해체’가 왜곡된 아파트문화를 바로잡는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충정아파트부터 와우아파트까지… 아파트의 부침 아파트가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였다. 일제는 회현동에 3층짜리 공동주택(미쿠니아파트)을 지은 데 이어 1932년 충정로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충정아파트(도요타아파트)를 지었다. 혜화동과 적선동 등에도 아파트가 선보였다. 주로 일본인 임대·거주용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짜리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이었으니 충정아파트는 당장 도시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아파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미래주택 개념에 따른 획기적 건축물이었다. 이 아파트는 한때 호텔(트레머호텔, 코리아관광호텔)로 개조됐다가 다시 아파트(유림아파트)로 되돌아갔다. 1979년 충정로 8차선 확장으로 건물 절반이 뜯겨나가는 곡절을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서울시는 지난해 충정아파트를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로 공인, ‘100년 후의 보물, 서울 속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정부 수립 이후 지어진 최초의 민간아파트는 1958년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에 세운 종암아파트였다. 17평짜리 4층 건물에 152가구가 살았다. 정식명칭은 ‘종암 아파트먼트 하우스’였지만 ‘종암아파트’로 줄여 부르면서 ‘아파트’라는 용어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잘나가는 기업인, 정치인, 예술가들이 입주했으며 최초의 옥내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이 장안의 화제였다. 특히 양변기로 대변되는 화장실 문화의 대혁명을 알린 옥내 좌식화장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은 변기에 앉아 일을 보는 해괴망측한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온돌이 깔린 침실이 현관이나 주방, 거실보다 한 단이 높은 특이한 구조였다. 1995년 종암선경아파트로 재건축됐다. 1962년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형무소 자리에 대한주택공사가 최고급 마포아파트(도화동 삼성아파트)를 건립하자 서울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사이에 아파트는 일약 선망의 대상이 됐다. 입주 초기 연탄보일러 중독사고가 연발하고 부유층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아파트주변에 담장을 쌓아 외부와 격리시키는 ‘자폐적 공간’을 조성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세계 유일의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모델등장이었다.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유입은 주택난을 부채질했다. 도심과 가까운 지역의 산비탈과 국공유지변 하천부지를 꽉 메운 토막집과 판잣집을 밀어내고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당시 지은 낙산 시민아파트 등 대부분 시민아파트는 경관훼손 사례로 낙인 찍혀 1990년대 철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김현옥 시장(1966~70년 재임)이 주도한 시민아파트는 본래 철거민 수용용이었다. 시민아파트 1호는 천연동 금화아파트였다. 한 서울시 공무원이 해발 203m의 산꼭대기에 아파트를 짓는 이유를 묻자 김 시장은 “이 바보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볼 것 아니냐”라고 답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전해진다. 1968~69년에 지은 시민아파트는 어김없이 산허리 또는 산등성이에 지어졌다.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다. 그래서인지 경관 하나는 끝내주는 금화아파트는 아직도 살아남아 개발연대기의 암담함을 나타내는 영화촬영장으로 쓰인다.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 뚫린 물길은 막을 수 없었다 도심재개발 차원에서 이뤄진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청량리 대왕코너(롯데백화점 청량리점)는 요즘 주상복합아파트의 원조격이다. 특히 세운상가 아파트는 1960년 후반부터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이 들어서는 1970년대 초까지 상한가를 쳤다. 18~25평의 작은 평수였지만 대규모 상가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이 아파트에 사회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입주했다. 사대문 안에 밀집된 직장에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상류층 집결지였다. 세운상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집창촌으로 알려졌던 ‘종삼’과 무허가 판자촌 철거로 얻어진 1만 3000평의 공지 위에 종로~청계천~을지로~퇴계로까지 무려 1km를 8개의 건물이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심의 괴물이었다. 아파트의 고급화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에서 처음 시도됐다.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에 지은 한강맨션은 중앙집중식 난방을 채택한 첫 호화 아파트였다. 시민아파트의 싸구려 이미지를 벗으려고 ‘아파트’ 대신 ‘맨션’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계약 1호는 27평형을 구입한 탤런트 강부자였다. 고은아, 문정숙, 패티 김 등 연예인들이 줄지어 입주했다. 분양이 대박 나자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이 장동운 주공 총재에게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현대를 비롯한 대형 건설업체들이 아파트사업에 뛰어드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1970년 4월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위기를 맞았지만 뚫린 물길을 막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의 문턱을 막 넘어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체코 여대생 한달여만에 귀국…안타까운 아버지 상황 “일거리 찾으러 가야…”

    체코 여대생 한달여만에 귀국…안타까운 아버지 상황 “일거리 찾으러 가야…”

    체코 여대생 한달여만에 귀국…안타까운 아버지 상황 “일거리 찾으러 가야…” 체코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로 현지 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효정(20·서울과학기술대 1학년)양이 각계의 도움으로 한 달여 만에 귀국했다. 김양은 6일 낮 12시 30분 대한항공 항공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 곧바로 서울 아산병원 응급중환자실로 이송됐다. 교회 신도들과 함께 여행을 갔던 김양은 지난달 3일(현지시간) 체코의 한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김양의 아버지는 현지 치료비와 이송비 등 약 1억원에 달하는 비용 때문에 딸을 국내로 데려오지 못하고 애를 태워야 했다. 김양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자 도움의 손길이 잇따랐다. 현대오일뱅크 1%나눔재단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각각 1000만원을 지원했다. 외교부는 긴급구난비 명목으로 200여만원을 전했고 김양이 졸업한 고교 동문들도 모금을 하는 등 힘을 보탰다. 대한항공은 항공권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항공기 좌석 6개를 들어낸 자리에 침대를 설치하고 현지 의료진 2명이 함께 타 김양을 돌봤다. 전날 경북 영양에서 달려온 가족들은 아침 일찍부터 병원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김양을 기다렸다. 체코까지 달려가 딸의 얼굴만 확인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김양의 아버지 김송학(52)씨는 “체코 병원의 의료시스템이 한국보다 못해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었다”며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정말 많은 분이 도와주셨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머니 조미자(50)씨는 딸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효정아 엄마 왔어. 눈 한 번만 떠봐. 너 지금까지 엄마 울린 적 없었는데 왜 이렇게 울려…. 일어나 집에 가야지….” 지난 2월 3일 스마트폰 카카오톡으로 딸과 여행 이야기를 나눈 이후 첫 대화였다. 등을 돌려 말없이 눈물을 훔치던 아버지 김씨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김양의 상태를 살핀 응급의학과 오범진 교수는 뇌 손상 정도가 심각하다며 당장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전망했다. 오 교수는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회복해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며 “기적이라는 것은 있다. 희망적인 것은 환자가 젊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김씨 부부는 “한국에 돌아오기만 바랐는데 이제는 눈도 뜨고 말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조씨가 곁에 남아 딸을 간호하기로 했다. 다만 이제부터 또다시 쌓일 병원비가 걱정이다. 집을 담보로 받은 대출로 체코 병원비를 마련했던 김씨는 “어서 내려가 일거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곧바로 영양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가장 고통스런 삶이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지더라

    가장 고통스런 삶이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지더라

    무당을 높이 이르는 말인 ‘만신’, 그중에서도 ‘나라 만신’이라 불리는 김금화 만신은 무당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 왔다. 한국전쟁 때는 첩보활동을 한다는 누명을 쓰고 군인들의 총부리를 마주한 게 수차례였다. 하지만 그런 군인도 생사의 경계에서 영혼이 피폐해질 때는 김금화 만신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댔던 군인을 위해 말없이 무복을 입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무당인 김금화 만신의 굴곡진 삶이 스크린에서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만난다. 새달 6일 개봉하는 영화 ‘만신’은 김금화 만신의 자서전 ‘비단꽃 넘세’의 생생한 텍스트에 다큐멘터리와 판타지 드라마가 결합됐다. 박찬욱 감독의 동생이자 미술과 사진,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박찬경(49)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영화 속 김금화 만신의 삶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과 복잡한 연결 고리로 엮여 있다. 지난 26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그 첫 번째 연결 고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설명했다. 신비한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괴롭힘을 당한 열네 살 ‘넘세’(아명·극중 김새론 분)와 한국전쟁 때 모진 고초를 겪은 열일곱 살 금화(류현경 분),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기 미신타파를 이유로 숨어 사는 신세가 된 중년의 금화(문소리 분)의 삶이 드라마로 펼쳐진다. 노년의 김금화 만신은 이 드라마에 나타나 지난날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현재는 과거에 의존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평생 고통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지금 큰무당이 될 수 있었던 거죠.” 김금화 만신이 거쳐 온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굴곡이었다. 두 번째 연결 고리인 ‘개인사와 역사의 충돌’이다. “자서전에서도 이 세 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때로 그려집니다.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무당은 그 이상의 치욕감을 느꼈죠.” 1980년대에 이르러 김금화 만신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켜야 할 전통문화로 TV에 등장하고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됐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천안함 침몰 등 비극의 현장에 달려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상처를 달랬다. 모든 것이 열네 살 ‘넘세’에게서 시작됐다는 게 박 감독의 설명이다. “신내림을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따돌림을 당하고 굶주리던 시절 꽃핀 넘세의 상상력이 더 아름다운 세계로 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것, 그것이 영화 ‘만신’이 정의하는 무당의 의미다. 박 감독은 “흔히 ‘민중적 시선’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무당은 민중에도 끼지 못한 존재”라면서 “가장 천대받은 사람의 눈으로 현대사를 바라보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박 감독은 대학에서 서양화와 사진을 전공하고 사진과 설치미술, 비디오 등으로 예술 세계를 펼쳐 왔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단편부터 시작해 영화 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비행’(2008), ‘신도안’(2009),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1) 등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한 ‘파란만장’(2010)은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단편부문 최고상인 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왔지만 극영화와 드라마를 뒤섞으면서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스스로 벗겨 냈다. ‘만신’은 신령의 세계를 표현한 판타지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굿의 춤사위와 무가, 전통 음악이 버무려진 한 편의 종합예술이다. “영화와 미술의 차이는 극장에서 보느냐, 미술관에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다채로움과 신선한 충격이 감지된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씨티카, 이제 집 앞에서 바로 타세요…반포 미도아파트에 씨티존 첫 개설

    씨티카, 이제 집 앞에서 바로 타세요…반포 미도아파트에 씨티존 첫 개설

    LG CNS의 자회사로 서울시와 전기차 공동이용(카쉐어링) 서비스 사업을 함께 하고 있는 씨티카(대표이사 송기호)는 서초구 반포동 미도아파트 공영 주차장에 씨티존을 개설하고 아파트 단지 공략에 나선다고 26일 밝혔다. 반포동 미도아파트 단지는 1695세대의 대단위 아파트로 인근 아파트 단지까지 2800여 세대 규모다. 씨티카는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중에는 처음으로 반포동 미도아파트 공영주차장에 씨티존을 개설했으며 소비자의 이용과 반납의 편리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앞으로 아파트 단지에 씨티존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송기호 대표이사는 “씨티카 서비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고객이 내 집 앞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함”이라면서 “반포 미도아파트 단지를 시작으로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에 씨티존을 개설하겠다”고 밝혔다. 유류비가 추가로 들어가야 하는 일반 카쉐어링 서비스와 달리 유류비가 추가로 들지 않아 더욱 경제적이고 매연과 소음도 발생하지 않는 친환경 도시형 전기차 공동이용(카쉐어링) 서비스인 ‘씨티카’는 운전면허를 소지한 만 21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www.citycar.co.kr)에서 회원으로 가입한 후 스마트폰으로 씨티카 앱을 다운 받으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현재 상암동 더팬, 여의도 IFC몰, 강남역 등 서울시내 50여개 씨티존에서 최소 1시간 이상 예약 시 시간당 6300원(에코 회원 기준)에 이용할 수 있다. 운행 중 30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女연예인 출신 프로 카레이서 1호 이화선씨

    [김문이 만난사람] 女연예인 출신 프로 카레이서 1호 이화선씨

    인간의 본능 중 가장 역동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마 ‘질주본능’일 것이다. 두 발로 달리든, 아니면 두 바퀴 자전거나 오토바이, 그리고 네 바퀴 자동차를 이용해 달리든, 그 내면의 본능을 표출하는 것은 무궁무진하지 않을까. 특히 오늘날 스포츠에서 ‘스피드’는 승패를 가름하며 그 결과에 따라 웃고 울게 하는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다. 이러한 질주본능은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이화선(34)씨는 10년 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레이싱계에 입문했다. 2000년 슈퍼모델 대회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TV 예능프로그램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길을 걸었다. 그러던 2004년 갑자기 레이싱 대회의 헬멧을 쓰고 떡 하니 나타나 주목을 끌었다. 여성으로서는 험난한 길이기에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았고 연습 도중 몇 차례나 자동차가 뒤집어지는 대형 사고가 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포기하지 않고 강한 승부근성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2009년에는 여자 연예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연봉을 받는 프로 레이서가 돼 또 한번 화제가 됐다. 그 해 ‘CJ 오 슈퍼레이스챔피언십 1600클래스 5전’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각종 시합에서 상위권에 입상하면서 ‘레이싱계의 꽃’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다. 2011년에는 여자 연예인 최초로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땄고 매년 문인화를 그려 전시회에 참가하는 등 화가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연예와 스포츠, 그리고 예술 방면에서 끼를 맘껏 발산하는 이씨를 지난 20일 소속(CJ레이싱팀) 캠프가 있는 경기도 용인에서 만났다. 먼저 카레이서 생활 10년의 소감을 말한다. “벌써 10년이 됐네요. 물론 즐거운 날들이었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생각해 보니 풋풋한 여자 나이 24살에 많은 남자들 틈에 들어가 20대를 거침없이 질주했네요. 제가 입문할 때에는 여자 레이서가 없었어요. 지금은 여러 명 되는데 제가 가장 언니랍니다. 후배 지원자들은 저를 멘토처럼 생각하며 (레이싱계에)들어오는 것 같아요. 여자 레이서로서 길을 닦았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뿌듯하지요.” 10년 동안 레이서 생활을 하면서 지루하게 여긴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레이싱의 매력에 빠져든다고 했다. 프로가 된 후에는 승부근성이 더 강해졌고 시합 때면 공격적인 질주본능이 저절로 생겨난다며 웃는다. 2011년에 당했던 아찔한 사고를 잠시 회고한다. 태백 레이싱파크에서 열린 대회였다. 당시 상대 선수 자동차와 추돌한 뒤 둘 다 공중으로 뜨면서 차가 완전히 뒤집혔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이씨는 침착하게 벨트를 풀고 빠져나왔다. 상대 선수는 기절했다가 이씨가 괜찮으냐고 하자 그때야 깨어났다. “처음에는 무서울 것 같았지만 사고를 경험을 하고 나서는 오히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차는 엉망이 됐지만 말이죠. 서킷에서 코너를 돌 때 상대 차가 제 차를 벽으로 몰아붙여 사고 위험도 많았지요. 그럴수록 스포츠맨십을 발휘해서 성질 죽이고 침착하게 핸들을 잡곤 합니다.” 어떻게 해서 카레이서가 됐을까. 2004년 10월이다. 이씨는 스피드웨이가 있는 용인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탤런트 겸 카레이서로 활동하는 이세창씨가 이씨에게 자동차 경주시합이 있으니 구경을 오라고 했다. 평소 둘은 오빠 동생하며 친하게 지냈고 이세창씨는 카레이서 연예인팀(류시원, 김진표, 안재모 등)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이씨는 자동차 경주시합을 보고 단박에 흥미를 느꼈다. 며칠 뒤였다. 정식 시합이 아닌 이벤트 경주가 용인에서 열렸는데 규칙 중 하나가 팀당 여자 연예인 드라이버를 한 명씩 가담시키는 것이었다. 이세창씨의 권유를 받은 이씨는 주저할 것 없이 1998년에 취득한 면허증(장롱면허)을 꺼내 들고 출전하게 됐다. 그는 이때 시합 이틀 전 첫 연습 트랙에서 사고를 쳤다. 코너를 막 도는 순간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 페달을 밟아 1.5m높이의 펜스에 부딪히면서 밖으로 나가떨어졌던 것. 차는 다 망가졌고 팀에서 부랴부랴 차를 고친 다음 겨우 시합에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이씨는 데뷔할 때부터 요란을 떨었다. 이후 2005년부터 매년 9회 정도 출전하면서 카레이서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지금까지 공인 경기 출전만 32회(비공인 포함 40회)로 국내 여성 드라이버 중 최다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정말 후회를 한번도 안 했을까. “아마추어 시절에는 경기 때마다 엄마가 구경 오셨어요. 2006년 한 시합 때 전복사고가 났습니다. 119구급차가 급히 오고 그랬는데 저는 멀쩡했거든요. 이때 엄마가 위험하다며 레이싱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그 해에 일반 도로에서 신호를 위반한 차 때문에 접촉사고가 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고수’가 있는가 싶어 2007년 한 해는 출전을 안 했습니다. 그때도 카레이서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어요.” 1년 동안 쉬면서도 시합장에 꾸준히 나가 구경을 했고 또한 틈틈이 연습을 하면서 스피드 감각을 유지했다. 이듬해 열린 ‘2008 RV챔피언십’에 출전해 새로운 자신감을 얻었고 내친김에 2009년 프로로 전향을 하게 됐다. 그는 레이싱계에서 겁없는 질주본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담력 또한 선천적으로 강한 편이다. 일반 도로를 주행할 때 사고 직전의 위기에 부닥치면 대부분의 여성 드라이버들은 깜짝 놀라 무척 당황하지만 그는 ‘어, 사고 날 뻔 했구나’ 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가 처음 레이서가 되려고 했을 때 집에서 반대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남자 같은 담력이 더 거칠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일반 도로에서 속도를 얼마까지 내봤느냐고 슬쩍 물어보자 약간 망설이더니 “아무도 없을 때 잠깐 시속 260㎞까지 밟아봤다”고 대답했다. 이어 “주변에 제 차를 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되도록 잘 안 태워주려고 한다”면서 “가끔 카레이서의 차를 탔다며 속도감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수록 어린이가 탄 것처럼 천천히 운전한다. 카레이서로서 책임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는 어릴 때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좋아했다. 그래서 예술고나 미술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초등학생 때에는 부모와 함께 거의 매주 관악산에 오를 만큼 산을 좋아했고 그럴수록 도전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그만큼 꿈도 많았다. 한참 동안은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집안 친척들 가운데 공무원이 많아 의사의 꿈을 접고 국정원에 들어가려고 했다. 은밀하지만 활동적인 공무원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대학 진학할 때에는 중앙부처 경제직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숙명여대 경제학과를 택했다. 한참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대학 3학년 때 아는 언니가 “우리 모델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라는 말에 솔깃했다. 얼마 후 모델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 등에 출연하다가 이세창씨의 권유로 카레이서로 변신을 하면서 인생의 진로가 확 바뀌게 됐던 것이다. 아울러 2011년 경비행기 자격증을 취득해 5시간 동안 단독비행을 경험했으며 안산국제항공전에서 MC를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연예인 하정우, 구혜선 등과 같이 매년 그룹전을 통해 그림솜씨를 과시하고 있다. 내년에는 개인전을 열 계획이며 이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지인들한테 직접 그리고 쓴 서화 연하장을 보낼 정도로 애정과 열정을 쏟고 있다. 멈출 줄 모르는 그의 끼는 올해에도 계속된다. 요트 자격증을 딸 예정이며 레이서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를 계속 써나갈 계획이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세상 모든 형태는 인연으로 생긴다는 ‘색즉시공’을 잠시 언급하다가 “나이 30대는 20대보다 훨씬 좋다. 나이가 주는 여유가 점점 생겨난다. 인생은 길며 차근차근 해나가겠다”고 대답한다. “인간 이화선의 0순위는 사람 냄새 나게 살고 후회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호가 하나 생겼어요. 여목(如木)입니다. 뿌리는 한 곳에 두고 가지는 햇빛을 향해 뻗는다는 뜻이지요.” 그는 아직 미혼이다. 어떤 상대를 원할까. 생각의 폭이 넓고 고집이 센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남자면 좋겠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언제까지 카레이서 생활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학교 다닐 때 달리기 선수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다리로 달리는 것도 좋고 온종일 차를 타고 달려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차에서 먹고 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질주는 타고난 본능인 것 같아요. 오는 4월 19일 인제 경기장에서 시합 있으니 보러오세요(웃음).” 경찰공무원이었던 부친이 몇해 전 세상을 떠나자 이씨가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 셋이서 함께 살고 있으며 휴일 TV 요리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머니가 막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면 이씨는 곧바로 어머니 손을 잡고 춘천으로 훌쩍 떠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화선 프로 카레이서는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문여고 재학 때 가수 이효리와 같은 반에서 생활했으며 숙명여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한국슈퍼모델대회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진출했다. TV 드라마 ‘골뱅이’(SBS, 2000년), ‘쌍둥이네’(SBS, 2001년), ‘조선에서 왔소이다’(MBC, 2004년), ‘포도밭 그 사나이’(KBS, 2006년), ‘세 남자’(tvN, 2009년) 등에 출연했다. 영화 ‘색즉시공 시즌 2’(2007년) 등에도 출연했다. 2004년 카레이서에 입문했으며 2009년 프로로 전향했다. 국내 여성 드라이버 중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 (공인경기 32회)하고 있다. 2004년 클릭 스피드 페스티벌 5전(5라운드라는 뜻) 1위, 2007년 클릭 스피드 페스티벌 챌린지 영클래스 1전 우승, 2009년 CJ 오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1600클래스 5전 2위, 2012년 헬로모바일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벤투스클래스 1전 5위 등을 차지했다. 2008년 제16회 춘사대상영화제 신인여우상, 2011년 한국모터스포츠어워드 헤드그렌 인기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CJ레이싱팀에 소속돼 있으면서 사단법인 한국모델협회 지도위원과 슈퍼모델 수상자들 모임인 ‘아름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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