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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쑤! 좋다!” 원진주 명창과 떠나는 가을밤 남도판소리여행

    “얼쑤! 좋다!” 원진주 명창과 떠나는 가을밤 남도판소리여행

    선이 굵고 씩씩하며 담백한 소리를 뿜어내는 원진주 명창이 깊어가는 가을밤 동편제 판소리의 진수를 선보인다. 10일 원진주 명창에 따르면 오는 26일 오후 7시 30분 서울 강남구 선정릉역 무형문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관에서 ‘원진주의 남도소리 한마당’ 행사를 개최한다. 원 명창은 현재 경기 김포시에 거주 중으로, 아트빌리지 한옥마을에서 판소리반을 운영하며 불모지인 김포일대 판소리 보급 저변화에 힘쓰고 있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이며 제21회 임방울국악제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한 명품소리꾼이다. 함께 공연에 나서는 노해현·서정민 명창도 임방울국악제 명창부 대통령상에 빛나는 중견소리꾼들이다. 김선미 명창은 전라북도지정 무형문화재로 제20회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주역이다. 또 현재 대학에서 판소리를 전공 중인 신예주·강은비·박솔양도 이날 공연에 참여해 빛을 더한다. 먼저 첫 무대는 원 명창이 나서 판소리 흥부가의 주요 대목을 연창한다. 제35회 전국고수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한 한수산 명인의 북장단에, 놀보 심술타령을 시작으로 흥보 집터 잡는 대목과 제비노정기·박타령을 연창한다. 2부에서는 남도잡가로 대표되는 육자배기와 흥타령·새타령을 부르며, 신민요 동백타령과 신뱃놀이가 이어진다. 새타령은 9분가량 소요될 정도로 가사가 길고 창법도 어려워 잡가 중 가장 수준높게 발달한 곡으로 평가된다. 온갖 산속의 새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마지막 마당에서는 출연자 전원이 가장 대중적인 국민민요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남도소리 한마당 무대를 마무리한다. 특히 이날 공연에서는 중견명창 ‘소리담’의 남도민요 1집 음반 발매를 앞두고 김선미·서정민·노해현 명창과 함께 남도민요를 부를 예정이다. 중견명창 ‘소리담’의 남도민요 1집 음반은 90년대를 풍미했던 옛 명창들의 남도민요 음반 이후 보기 드문 귀한 음반이다. 모두 대통령상을 수상한 중견명창들의 소리를 담아냈다. 40대 전후의 이들 명창은 이력·경력으로 보아 앞으로 한국 판소리를 짊어지고 갈 명창들이다. 전성기에 들어서는 이 명창들로부터 남도민요의 깊은 울림과 흥을 느껴볼 수 있다. 원진주 명창은 모시는 글에서 “전통적인 것이나 새로운 것을 고루 알아야 변화무쌍한 세상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우리 전통소리를 전하고 남도소리만이 갖고 있는 다양성과 우수성을 시대에 맞게 창조적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오늘 무대를 마련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공연은 한국문화재재단과 국립무형유산원, (사)임방울국악진흥회, 젤라인이 후원한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서울광장] J 카사노바 귀하/송한수 부국장·사회2부장

    [서울광장] J 카사노바 귀하/송한수 부국장·사회2부장

    줄리에, 살짝이 묻습니다. 마이애미 땅끝이던가요. 요새 그곳 날씨는 어떠한지.여기 서울은 이제 퍽 쌀쌀합니다. 가을 첫 자락을 붙들고 있습니다. 새파랗게 하늘이 높아집니다. 코스모스가 하늘대고. 매미 울음은 슬며시 잦아들고. 어디 오롯이 날씨에만 그칠까. 대한민국(ROK) 분위기 또한 좀 싸늘합니다. 워낙 역동적인 나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 떨어진 숙제 탓이 큽니다. 나라를 통째 뒤흔든, 아직껏 뜨거운 국정농단 사건 여파와 현재진행형인 전직 대통령 판결 등등입니다. 그렇다고 눈을 치뜰 일은 아닙니다. 제대로 일을 꾀하려는 마음들이 여러 잘못과 종종 부딪치는 법이지요. 대부분 통과의례로 칩니다. 당신이 지내는 미국이란 나라가 그러하듯이. 남북으로 갈라진 땅덩이를 보듬는 몸부림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끊긴 핏줄을 다시 잇자는, 참으로 어기찬 몸짓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큰 일에 자리는 그리 너르지 않은 듯합니다. 생각을 아주 달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입니다. “도통 계산법이 다르다.” 요렇게 이를 터입니다. 차라리 “통밥을 굴린다”는 게 맞춤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자타칭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늘 미안해야 합니다. 미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네끼리도 소통하지 않아서입니다. 마지못해 “인제 대화하자”며 불러 놓고도 서로 꾸짖습니다. 마구잡이로 삿대질을 해댑니다. 참 징그러운 ‘네 탓’ 공방입니다. 아무튼, 예컨대 이런 형국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문 방북과 관련해서입니다. “평양은 역시 멀지 않았다.” “평양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비명을 듣곤 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또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 아니던가요. 때마침 노동당 창건 73돌(10·10)을 맞아 새삼 눈길을 끌겠습니다. 어쨌든 저 건너 218.9㎞ 떨어진 평양에도 찢어지는 가난뱅이가 숱하고, 이곳 1000만 대도시 한복판에도 노숙자가 적잖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을 돕자는 정책을 싸고도 ‘좌파 세상’, ‘우파 득세’ 외치며 드잡이를 벌입니다. 그러나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국민과 정부,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 해결하리라 믿습니다. 당신을 받치는 미국이라고 과연 다를는지. 줄리에 당신도 언젠가 한때 나라 걱정에, 골머리를 앓았을 법도 하겠습니다. “누굴 우리 대통령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개입을 막아야 하나.” 이렇게 말을 건네는 건 ‘남·북·미 3자’ 얘기를 떠올려서입니다. 평화를 향한 발걸음은 여기 한반도엔 지극한 중대사입니다. 당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얼마나 지지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미국과 우리의 한국 사이에 숙제는 쌓였습니다. 우리는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좇는) 모든 전쟁에 반대합니다. 이미 6·25라는 엄청난 참화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큰 생채기를 품었기에 더합니다. “총칼을 들어 평화를 지키자”는 그럴싸한 구호에도 반대합니다. 예부터 ‘주검위리’(鑄劍爲犁)라 했습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야 옳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더군다나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 ‘기술적 균형’을 앞세운다면 누군가에겐 불공평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3자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길 빕니다. 새 역사를 빚길 소망합니다. 벌써 “이젠 미국에 달렸다”는 소리가 짜합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날 트럼프 대통령 몫이랍니다. 테이블이 벼랑 끝으로 몰려 어그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갑질’은 없어야겠습니다. 애먼 사람들 잡을 억측도 마찬가지로 손꼽힙니다. 일방적인 ‘선물’을 바라지도 않아야겠습니다. 대화와 협상의 예술을 한껏 뽐냈으면 반갑겠습니다. 의심하는 눈초리도 거두는 게 좋겠지요. ‘주고 받기’(give and take)로 기쁨이 한결 늘어날 수 있기를. 그 열매로 마침내 ‘봉쇄’를 풀었으면 합니다. 어쨌든 75억 세계인 누구에게나 아까운 시간,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프간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만큼이나 한반도 문제 해결이 지구촌 평화에 다리를 놓을 터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속도’도 중요합니다. 얼떨결에 맞이한 분단으로 어언 70여년을 흘려보냈기 때문입니다. (결코 안 된다는 통념을 깨서) 나쁘면서도, (마지막 분단국에 화목을 다질) 좋은 날을 기다립니다. 유쾌한 반란을 기대합니다. 기회를 놓칠 순 없습니다. 한국 격언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 onekor@seoul.co.kr
  • 전원 재계약 불발 1년… 끝나지 않은 ‘소녀시대’

    전원 재계약 불발 1년… 끝나지 않은 ‘소녀시대’

    SM에 남은 태연 등 5명 ‘소녀시대-오지지’ 유닛 활동 티파니 솔로로, 수영·서현 배우로…“언젠가 함께 무대”소녀시대 멤버 전원과 SM엔터테인먼트의 재계약 불발 소식이 전해진 지 꼭 1년이다. 사실상 해체 수순 아니냐는 전망도 많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소녀시대라는 이름은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SM은 소녀시대 멤버 태연, 윤아, 효연, 유리, 써니가 재계약을 체결했고 수영, 티파니, 서현은 재계약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내외 수많은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멤버 대부분과 재계약을 마쳤다는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나왔던 상황이라 팬들의 기대가 컸다. 이미 한 차례 전원 재계약을 통해 ‘7년 징크스’를 깨기도 했고, 불과 두 달 전 데뷔 10주년을 맞아 정규 6집을 발표하고 건재를 과시한 소녀시대였다. 다만 SM은 “해체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소녀시대 멤버들도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체는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허울뿐인 말로 비쳐질 수 있던 약속들은 최근 멤버들이 여전히 소녀시대의 일원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내면서 언젠가 완전체 활동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바뀌고 있다.SM에 남은 5명은 지난달 ‘소녀시대-오지지’(Oh!GG)라는 이름으로 신곡 ‘몰랐니’를 발표했다. 소녀시대-태티서 이후 6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유닛이다. 방송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뮤직비디오를 통해 에너지 넘치는 군무 등을 보여 주며 전성기 때 못지않은 매력을 뽐냈다. 5명의 멤버가 소녀시대라는 이름 대신 새 유닛 결성을 택한 것은 소녀시대는 8명이 모일 때라야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티파니는 미국의 패러다임 탤런트 에이전시와 손잡고 솔로 활동에 나서면서 활동명을 ‘티파니 영’으로 바꿨다. 본명 황미영에서 한 글자를 따와 새 출발의 의미를 담는 동시에 소녀시대의 티파니를 이어 가겠다는 뜻이다. 최근 발표한 새 싱글 ‘티치 유’ 뮤직비디오에는 수영과 효연이 출연했다. 소속사가 다른 세 명이 뭉쳐 소녀시대의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 것이다. SM을 떠난 뒤 에코글로벌그룹에 둥지를 튼 수영은 첫 영화 주연작인 ‘막다른 골목의 추억’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내년 2월 일본 개봉도 확정 지었다. 현재 1인 기획사 체제로 활동을 하고 있는 막내 서현은 드라마 ‘시간’(MBC)에서 여주인공 설지현을 맡아 이미지 변신을 하며 배우로서 한층 성장했다.유리는 지난 4일 첫 솔로앨범 ‘더 퍼스트 신’을 발표했다. 타이틀곡 ‘빠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솔로 유리의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태연은 오는 20~2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세 번째 단독콘서트를 열고 팬들을 만난다. 윤아, 써니, 효연도 영화, 예능, 음악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티파니, 유리, 서현 등 소녀시대 멤버들은 최근 각자의 인터뷰에서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시대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멤버들끼리 채팅방에서 매일같이 만난다는 이들은 언젠가 다시 무대에 함께 오를 날을 꿈꾸고 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국민 썸남’ 5급 사무관… ‘9급 올킬’ 프로게이머

    ‘국민 썸남’ 5급 사무관… ‘9급 올킬’ 프로게이머

    누구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길 원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다.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자리에 있다가 ‘무색무취’한 공직사회를 모두 경험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들이 있다. 재경직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얻고도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규빈(25·지난해 5급 공채 합격)씨와 프로게이머라는 화려한 삶을 뒤로한 채 교육 공무원으로 살아 가는 박영민(34·군산남초) 주무관이 대표적이다. 9일 이들로부터 화려했던 전 직장, 힘들었던 수험 생활, 공직에 대한 기대감 등을 들어봤다.●하트시그널 ‘직진 연하남’… 합격 향해 ‘직진’ “어릴 때부터 무척 활동적이었어요. 수험 기간 동안 많이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합격한 마당에 (방송 출연을)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단 생각이 들었죠. 다른 직업군은 TV에 많이 나오는데 공무원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 싶었어요.” 지난 6월 종영한 예능 방송에 출연해 ‘직진 연하남’으로 큰 인기를 끈 이씨에게 방송 출연 계기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지난해 국가직 5급 공채(재경직)에 합격했다. 올해 연수를 받고 내년에 신입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이씨가 5급 공채를 준비한 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교 시절 의사를 꿈꿨던 것도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서였단다. 그는 “대학 입학 뒤 사람들의 삶에 와닿는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단 생각을 했고 그게 공무원이란 생각이 들었다”면서 “활달한 제 성격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염려했지만 일단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뒤부터는 앞만 보고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민족사관고 졸업 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 진학한 이력이 알려지자 ‘엄친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머리가 좋으니 공채에도 손쉽게 붙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씨는 “진짜 빨리 합격하는 사람들은 1년 만에 붙기도 하지만 저는 두 번 낙방했고, 세 번째 응시할 때는 ‘이번에 떨어지면 그만두자’고 마음먹기도 했다”면서 “수험생활을 보내면서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려울 게 없던 이전과는 달리 (수험 기간에는) 심리적으로 위축돼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렵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집과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한 이씨는 1학기 땐 수험 공부에만 매진하고 2학기 땐 학교를 다니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수험생들처럼 수험 기간 내내 휴학 상태에서 공부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살다간 감정이 격해져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그간 쌓아둔 외로움 등을 2학기 때 사진을 찍으며 해소하는 등 나름의 ‘완급 조절’을 했다”고 덧붙였다. 시험에 임박하면 컨디션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지만 이씨는 달랐다. 첫 시험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해 최악의 컨디션으로 시험을 치른 경험이 있어서다. 그는 “큰 시험을 앞두고 긴장을 많이 하다 보니 잠을 3~4시간밖에 못 잘 게 뻔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런 패턴을 몸에 익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면서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피곤한 상태에서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하려고 일부러 늦게 잤다.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합격 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걸 다 해봐야겠단 생각에 방송 출연에 나섰지만 이씨 역시 공직사회의 경직된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입직한 순간부터는 지금처럼 방송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시간이 지나면 저 또한 주어진 부처 업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씨는 “시간이 갈수록 ‘국민과의 소통’이나 ‘정책 홍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 지금의 흐름이 지속된다면 공직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며 “그때가 되면 지금의 경험이 국가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교육 공무원이 된 프로게이머 “프로게이머였던 20대에는 또래 친구들보다 많은 돈을 벌었고 번 만큼 많이 쓰기도 했어요. 하지만 군에서 전역하고 나니 어느새 서른이 눈앞이었어요. 막다른 골목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00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출신 박영민 주무관에게 공무원에 된 이유를 묻자 담담하게 자신의 20대를 이렇게 밝혔다. 박 주무관은 대학생이던 2004년 KBC 파워게임쇼 신인왕전으로 데뷔했다. e스포츠 최초의 신인 드래프트였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신인 드래프트’(2005년)를 통해 프로게임단에 입단했다. 2009년에는 공군 프로게임단에서 복무했다. 2011년 전역 뒤 은퇴를 선언해 영원히 사라진 듯했던 박 주무관의 소식이 다시 들려온 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였다. 인터넷상에 ‘박영민 노량진 목격담’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프로게이머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기간은 매우 짧았고 은퇴 뒤 코치나 지도자로 남아 있는 사례도 매우 드물었다”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프로게이머보다는) 좀더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다고 결심해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고 회상했다. 박 주무관은 수험 생활을 시작하면서 휴대전화를 구식 2세대(G)폰으로 바꾸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최대한 줄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기보다는 합격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프로게이머 시절 연습을 위해 하루 10~12시간씩 앉아 있던 저력이 수험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합격의 문턱은 높았고 응시 첫해 고배를 마셨다.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할 때는 고향인 전북 군산으로 돌아왔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과목은 영어였다. 박 주무관은 “점수가 잘 안 나와 부담이 컸고 공부할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본능에 맡겨두면 나도 모르게 영어 학습량을 줄일 게 뻔해서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어머니로부터 ‘제발 영어공부 좀 그만하라’는 소리가 나올 때쯤부터 점수가 올라갔다”고 말했다. 결국 박 주무관은 국가직과 서울시, 지방직 교육행정(9급)을 ‘올킬’(싹쓸이)했다. 이 가운데 지방직을 택한 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단다. 초창기에는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들과 게임을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관중들 사이에서 승부를 겨뤘던 프로게이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삶의 방식에서 차이가 크지만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생활에 보람을 느낀다”고 미소를 지었다. 10, 20대가 꿈꾸는 두 직업을 모두 섭렵해 부럽다는 시선을 받는 것이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박 주무관은 “계획된 일들이었다기보다는 그 순간 제가 하고 싶은 일과 이루고 싶은 일에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밝혔다. 미래의 아이가 프로게이머와 공무원 가운데 무엇을 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머리로는 ‘공무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하라’고 외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행시 합격 노하우 공유한 ‘직진 연하남’ 이규빈…교육공무원된 전 프로게이머 박영민

    행시 합격 노하우 공유한 ‘직진 연하남’ 이규빈…교육공무원된 전 프로게이머 박영민

    행시 합격 후 ‘하트시그널’·‘문제적 남자’ 출연“공무원이라고 TV 출연 못하란 법 없다 느껴”공군 ACE 전역 후 ‘노량진’에 급 출몰한 박영민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 인생 2막 시작 누구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길 원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다.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자리에 있다가 ‘무색무취’한 공직사회를 모두 경험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들이 있다. 재경직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얻고도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규빈(25·2017 5급 공채 합격)씨와 프로게이머라는 화려한 삶을 뒤로한 채 교육 공무원으로 살아 가는 박영민(34·군산남초) 주무관이 대표적이다. 9일 이들로부터 화려했던 전 직장, 힘들었던 수험 생활, 공직에 대한 기대감 등을 들어봤다.●일편단심 ‘직진 연하남’…3년간 합격 향해 ‘직진’? “어릴 때부터 무척 활동적이었어요. 수험 기간 동안 많이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합격한 마당에 (방송 출연을)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단 생각이 들었죠. 다른 직업군은 TV에 많이 나오는데 공무원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 싶었어요.” 지난 6월 종영한 한 예능 방송에 출연해 ‘직진 연하남’으로 큰 인기를 끈 이씨에게 방송 출연 계기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지난해 국가직 5급 공채(재경직)에 합격했다. 올해 연수를 받고 내년에 신입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이씨가 5급 공채를 준비한 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교 시절 의사를 꿈꿨던 것도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서였단다. 그는 “대학 입학 뒤 사람들의 삶에 와닿는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단 생각을 했고 그게 공무원이란 생각이 들었다”면서 “활달한 제 성격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염려했지만 일단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뒤부터는 앞만 보고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민족사관고 졸업 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 진학한 이력이 알려지자 ‘엄친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머리가 좋으니 공채에도 손쉽게 붙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씨는 “진짜 빨리 합격하는 사람들은 1년 만에 붙기도 하지만 저는 두 번 낙방했고, 세 번째 응시할 때는 ‘이번에 떨어지면 그만두자’고 마음먹기도 했다”면서 “수험생활을 보내면서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려울 게 없던 이전과는 달리 (수험 기간에는) 심리적으로 위축돼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렵기도 했다”고 털어놨다.집과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한 이씨는 1학기 땐 수험 공부에만 매진하고 2학기 땐 학교를 다니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수험생들처럼 수험 기간 내내 휴학 상태에서 공부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살다간 감정이 격해져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그간 쌓아둔 외로움 등을 2학기 때 사진을 찍으며 해소하는 등 나름의 ‘완급 조절’을 했다”고 덧붙였다. 시험에 임박하면 컨디션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지만 이씨는 달랐다. 첫 시험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해 최악의 컨디션으로 시험을 치른 경험이 있어서다. 그는 “큰 시험을 앞두고 긴장을 많이 하다 보니 잠을 3~4시간밖에 못 잘 게 뻔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런 패턴을 몸에 익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면서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피곤한 상태에서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하려고 일부러 늦게 잤다.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합격 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걸 다 해봐야겠단 생각에 방송 출연에 나섰지만 이씨 역시 공직사회의 경직된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입직한 순간부터는 지금처럼 방송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시간이 지나면 저 또한 주어진 부처 업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씨는 “시간이 갈수록 ‘국민과의 소통’이나 ‘정책 홍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 지금의 흐름이 지속된다면 공직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며 “그때가 되면 지금의 경험이 국가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 공무원이 된 프로게이머…“조용한 삶에 만족” “프로게이머였던 20대에는 또래 친구들보다 많은 돈을 벌었고 번 만큼 많이 쓰기도 했어요. 하지만 군에서 전역하고 나니 어느새 서른이 눈앞이었어요. 막다른 골목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00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출신 박영민 주무관에게 공무원에 된 이유를 묻자 담담하게 자신의 20대를 이렇게 밝혔다. 박 주무관은 대학생이던 2004년 KBC 파워게임쇼 신인왕전으로 데뷔했다. e스포츠 최초의 신인 드래프트였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신인 드래프트’(2005년)를 통해 프로게임단에 입단했다. 2009년에는 공군 프로게임단에서 복무했다. 2011년 전역 뒤 은퇴를 선언해 영원히 사라진 듯했던 박 주무관의 소식이 다시 들려온 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였다. 인터넷상에 ‘박영민 노량진 목격담’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프로게이머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기간은 매우 짧았고 은퇴 뒤 코치나 지도자로 남아 있는 사례도 매우 드물었다”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프로게이머보다는) 좀더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다고 결심해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고 회상했다.박 주무관은 수험 생활을 시작하면서 휴대전화를 구식 2세대(G)폰으로 바꾸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최대한 줄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기보다는 합격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프로게이머 시절 연습을 위해 하루 10~12시간씩 앉아 있던 저력이 수험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합격의 문턱은 높았고 응시 첫해 고배를 마셨다.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할 때는 고향인 전북 군산으로 돌아왔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과목은 영어였다. 박 주무관은 “점수가 잘 안 나와 부담이 컸고 공부할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본능에 맡겨두면 나도 모르게 영어 학습량을 줄일 게 뻔해서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어머니로부터 ‘제발 영어공부 좀 그만하라’는 소리가 나올 때쯤부터 점수가 올라갔다”고 말했다. 결국 박 주무관은 국가직과 서울시, 지방직 교육행정(9급)을 ‘올킬’(싹쓸이)했다. 이 가운데 지방직을 택한 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단다. 초창기에는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들과 게임을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관중들 사이에서 승부를 겨뤘던 프로게이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삶의 방식에서 차이가 크지만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생활에 보람을 느낀다”고 미소를 지었다. 10, 20대가 꿈꾸는 두 직업을 모두 섭렵해 부럽다는 시선을 받는 것이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박 주무관은 “계획된 일들이었다기보다는 그 순간 제가 하고 싶은 일과 이루고 싶은 일에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밝혔다. 미래의 아이가 프로게이머와 공무원 가운데 무엇을 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머리로는 ‘공무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하라’고 외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전원 재계약 불발 1년… 끝나지 않은 ‘소녀시대’

    전원 재계약 불발 1년… 끝나지 않은 ‘소녀시대’

    소녀시대 멤버 전원과 SM엔터테인먼트의 재계약 불발 소식이 전해진 지 꼭 1년이다. 사실상 해체 수순 아니냐는 전망도 많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소녀시대라는 이름은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SM은 소녀시대 멤버 태연, 윤아, 효연, 유리, 써니가 재계약을 체결했고 수영, 티파니, 서현은 재계약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내외 수많은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멤버 대부분과 재계약을 마쳤다는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나왔던 상황이라 팬들의 기대가 컸다. 이미 한 차례 전원 재계약을 통해 ‘7년 징크스’를 깨기도 했고, 불과 두 달 전 데뷔 10주년을 맞아 정규 6집을 발표하고 건재를 과시한 소녀시대였다. 다만 SM은 “해체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소녀시대 멤버들도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체는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허울뿐인 말로 비쳐질 수 있던 약속들은 최근 멤버들이 여전히 소녀시대의 일원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내면서 언젠가 완전체 활동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바뀌고 있다. SM에 남은 5명은 지난달 ‘소녀시대-오지지’(Oh!GG)라는 이름으로 신곡 ‘몰랐니’를 발표했다. 소녀시대-태티서 이후 6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유닛이다. 방송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뮤직비디오를 통해 에너지 넘치는 군무 등을 보여 주며 전성기 때 못지않은 매력을 뽐냈다. 5명의 멤버가 소녀시대라는 이름 대신 새 유닛 결성을 택한 것은 소녀시대는 8명이 모일 때라야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티파니는 미국의 패러다임 탤런트 에이전시와 손잡고 솔로 활동에 나서면서 활동명을 ‘티파니 영’으로 바꿨다. 본명 황미영에서 한 글자를 따와 새 출발의 의미를 담는 동시에 소녀시대의 티파니를 이어 가겠다는 뜻이다. 최근 발표한 새 싱글 ‘티치 유’ 뮤직비디오에는 수영과 효연이 출연했다. 소속사가 다른 세 명이 뭉쳐 소녀시대의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 것이다. SM을 떠난 뒤 에코글로벌그룹에 둥지를 튼 수영은 첫 영화 주연작인 ‘막다른 골목의 추억’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내년 2월 일본 개봉도 확정 지었다. 현재 1인 기획사 체제로 활동을 하고 있는 막내 서현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시간’(MBC)에서 여주인공 설지현을 맡아 이미지 변신을 하며 배우로서 한층 성장했다. 유리는 지난 4일 첫 솔로앨범 ‘더 퍼스트 신’을 발표했다. 타이틀곡 ‘빠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소녀시대 때 못다 보여 줬던 솔로 유리의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태연은 오는 20~2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세 번째 단독콘서트를 열고 팬들을 만난다. 윤아, 써니, 효연도 영화, 예능, 음악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티파니, 유리, 서현 등 소녀시대 멤버들은 최근 각자의 인터뷰에서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시대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멤버들끼리 채팅방에서 매일같이 만난다는 이들은 언젠가 다시 무대에 함께 오를 날을 꿈꾸고 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나이를 잊자…무대가 찼다

    나이를 잊자…무대가 찼다

    어린이 동반 가족 ‘티켓 파워’ 높아져 오페라 ‘헨젤과…’ 잠재고객 아동 타깃 2030 여성이 주 관객층인 뮤지컬도 ‘마틸다’ ‘라이온킹’으로 다변화 실험우리나라 공연 관객층은 미국·유럽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다. 클래식 분야의 경우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노부부들이 객석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럽 시장에 익숙한 해외 연주자들은 한국의 젊은 관객들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젊은 관객이 주도하는 시장이 기대만큼 전 연령층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는 고민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공연예술 각 분야에서는 가족 관객 등으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가족 관객을 확보하면 어릴 적 공연 관람 경험을 통해 미래의 관객을 만들 수 있고, 제작사 입장에서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관람해 티켓 3~4장이 한번에 판매돼 높은 수익구조를 만들 수 있다. ●미래의 오페라 관객을 만들자 팝업북을 펼친 듯한 무대, 알록달록한 마카롱 과자집…. 소규모 극장이나 문화센터에서나 볼 법한 아동극 같은 무대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위에 펼쳐진다. 국립오페라단이 9~13일 선보이는 ‘헨젤과 그레텔’은 무대 디자인부터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관객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림형제의 동명 동화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바그너의 제자이기도 한 독일 작곡가 훔퍼딩크의 대표작이다. 소프라노와 테너가 사랑을 나누고 바리톤이 방해하는 설정이나, 소프라노가 비극적 죽음에 이르는 결말 등 일반적인 오페라 줄거리에 익숙한 성인 관객에게는 사실 그렇게 관심을 끄는 작품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국립오페라단의 초점은 ‘미래 관객’인 아이들에게 있다. 윤호근 예술감독이 올해 초 부임한 뒤 첫 기획작으로 유명 오페라가 아닌 가족 오페라를 선택한 이유도 먼 훗날의 관객을 만들겠다는 의미가 크다. 이번 작품은 국립오페라단이 2011년 바그너의 어린이 오페라 ‘지그프리트의 검’을 무대 올린 뒤 7년 만에 내놓은 가족오페라다. ‘지그프리트의 검’이 바그너의 ‘반지 사이클’을 각색한 어린이 오페라라면 이번 ‘헨젤과 그레텔’은 ‘마녀의 동기’, ‘과자집의 동기’ 등 바그너식 유도동기(주요 인물이나 감정을 암시하는 악구)가 활용되는 등 성인 관객이 보기에도 수준이 높다. 작품의 연출은 정치사회적으로 오페라를 해석하는 것으로 유명한 독일 출신 크리스티안 파데가, 지휘는 성악예술 지휘의 최고봉인 안토니오 파파노의 수제자로 알려진 영국 출신 피네건 다우니 디어가 맡았다. ●관객층 넓힐 뮤지컬 작품 연이어 무대로 젊은 여성 관객이 시장을 이끌어 왔던 국내 뮤지컬계에선 최근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아동문학가 로알드 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틸다’에 이어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는 ‘라이온킹’ 오리지널 공연이 다음달 한국에서 첫선을 보인다. ‘마틸다’는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 등 해외에서 가족 단위 관객의 관람이 높은 매출구조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이끄는 작품이다. 이번 한국 라이선스 초연이 해외에서처럼 관객층의 다변화를 이룰지는 여전히 실험 중이다. ‘마틸다’에 이어 대작 뮤지컬의 바통을 이어받는 ‘라이온킹’은 1997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전 세계 100개 이상 도시에서 공연된 브로드웨이의 대표 뮤지컬이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 불패를 자랑하지만, 국내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번 공연은 2006년 일본 극단 시키(四季)의 라이선스 공연 실패 이후 명예회복 여부에 특히 관심이 쏠린다. 당시 공연은 뮤지컬 주 관객층인 20~30대 여성들에게 어린이용 작품으로 인식됐고, 가족 관람 문화도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36억원의 적자를 봤다. 국내 뮤지컬 관객의 높아진 눈높이를 충족할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내한 공연을 기획한 클립서비스 관계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라이온킹’의 주 관객층은 30~55세 여성으로, 2030세대 여성이 주 관객층을 이루는 국내시장과는 여건이 많이 다르다”면서 “궁극적으로 뮤지컬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까지 웰메이드 뮤지컬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은 ‘라이온킹’ 초연 20주년을 기념하는 해외 투어의 일환으로 마련되며 오는 11월 대구를 시작으로 내년 1월 서울, 4월 부산에서 각각 진행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서울 아파트값 힘겨루기… “연말 가격조정 시작될 것”

    서울 아파트값 힘겨루기… “연말 가격조정 시작될 것”

    강력한 집값 안정 대책으로 서울 아파트값은 힘겨루기 장세에 들어갔다. 투기 심리가 냉각돼 거래량은 줄었지만, 집값 하락은 아직 눈에 띄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세제 개편안 국회통과, 공급확대 정책을 담은 수도권 택지지구 지정 확정, 금리 인상 확정, 공시가격 현실화 등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두 달이 고비일 것으로 보고 있다. 당분간 눈치 보기가 치열하겠지만, 연말부터는 가격 조정이 시작될 것으로 전망했다. 투기수요 급감, 호가 하락·급매물 증가, 금리 인상 등이 예정됐기 때문이다.●투기수요 감소… 가격 폭등 진정 국면 지난 주말 서울 아파트 시장은 조용했다. 시장을 흔들고 가격을 올리는 투기 수요가 숨을 죽였기 때문이다. 부동산중개업소에는 아파트 구매 전화 문의조차 끊겨 개점휴업 상태다. 추격 매수는 그만두고 실수요자마저 집값이 내려갈 것을 예상, 주택 구매에 나서지 않고 눈치만 보는 시장이 이어지고 있다. 송파구 잠실동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투자자들이 바짝 엎드렸고, 실수요자도 가격 조정을 기대하고 구매에 나서지 않아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고 말했다. 주택시장은 가수요자들이 움직이면 금세 불이 붙는다. 투자 수요가 활발하면 거래량이 급증하고 가격도 큰 폭으로 오른다. 가수요가 많으면 실수요자에게도 심리적 불안을 안겨 주고 추격 매수를 부추겨 시장 전체가 과열로 이어진다. 단순 수급원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상품보다 시장 안정대책과 심리적 요인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현재는 강력한 투기억제 대책으로 투기심리가 숨을 죽인 상태지만 대책이 본격 시행되고, 공급계획이 보조를 맞추게 되면 투기심리는 고개를 들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주택자에 대한 대출억제는 이미 시행 중이고, 무거운 세금의 부과가 현실화되면 가수요는 한층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공시가격 현실화 방침이 확정되면 주택 보유세를 얼마나 더 내야 하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시가격 현실화는 다주택자뿐만 아니라 실수요 주택 보유자까지 보유세 인상으로 이어진다. 종부세 부과 대상자도 올해보다 훨씬 많이 늘어난다. ●호가 하락 속 일부 지역 급매물 등장 호가 하락은 집값이 조정되는 첫 움직임이다. 현재는 호가 상승이 멈춰 거품이 조금씩 빠지는 분위기지만 거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호가는 내려도 쉽게 거래가 증가하는 현상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주택 보유 자체를 투기로 몰아붙이는 정책으로 구매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다. 가격이 내려가도 거래량은 급증하지 않는 침체기에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금 시장이 딱 그렇다. 서울 강남권에서는 ‘9·13대책’ 이후 중형 크기 아파트 호가가 1억~2억원 떨어졌다. 호가보다 낮은 급매물도 일부 나오고 있지만 역시 거래는 이뤄지지 않는다. 고가주택이 많은 지역에서 급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가격은 본격적으로 조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값은 4주 연속 상승세가 둔화하고 있다. 박원갑 국민은행 수석전문위원은 “9·13대책은 투기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고강도 대책이라서 다주택 보유 심리를 차단하고 추격 매수세를 잡기에 충분하다”며 “거래량이 줄어들고 급매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가격이 하락 조정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위원은 당장 집값이 급락하지는 않겠지만, 가격 조정 시기를 연말쯤으로 예상했다. 집값 조정 시기는 급매물이 쏟아지는 시기가 얼마나 앞당겨지느냐에 달렸다. 정부는 9·13대책을 발표하면서 다주택자의 주택 처분과 동시에 애초 내놓았던 종합부동산세제 개정안보다 고가주택의 종합부동산세율을 대폭 올리고 조정지역에서의 2주택자에게도 종부세를 징벌적으로 물리겠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내년부터 다주택자는 물론, 한 채라도 고가주택 보유자는 재산세와 종부세를 올해보다 훨씬 많이 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다주택자에 대해서는 양도소득세를 무겁게 물리고 있어 쉽게 매물로 내놓지 않아서다. 보유세 강화로 재산세나 종부세를 내더라도 무거운 양도세를 내는 것보다는 가볍기 때문이다. 또 상당수의 다주택자가 이미 주택임대사업자로 등록해 매물이 많지 않은 데다, 양도세 감면 혜택을 보던 장기보유주택까지 혜택이 사라지면서 물건을 내놓지 않는 상황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보유세를 강화와 공시가격 현실화가 가시화되면 다주택자 보유 주택이 매물로 나오고, 서울과 수도권 신도시 공급계획이 확정되면 서울을 비롯한 조정지역에서도 집값이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대출억제·금리 인상으로 추격 매수 차단 금리 인상도 주택시장을 흔들 만한 요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달 26일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인상했다. 한국과 미국 간 정책금리는 0.75% 포인트까지 벌어졌다. 한국은행도 기준금리(현재 1.50%)를 조만간 인상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시장 상황만 보면 경제침체기라서 금리를 인상할 여력이 없지만, 미국이 연말쯤 추가 인상을 예고하고 있어 한·미 간 금리 역전이 더 커질 가능성에 대비해 인상 카드를 회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주택시장 안정 차원에서도 금리 인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금리 인상은 단순히 주택시장 과열을 진정시키는 카드가 아니지만, 시장 분위기는 인상 쪽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데다, 시중에 풀린 풍부한 유동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투기 수요가 급증하지 않는 한 주택시장에서 금리 인상은 주택 구매 심리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충분하다. 현재 시장에서는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연 5%에 가깝게 올랐다. 조정지역에서 주택담보대출 억제는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다. 대출 억제는 단기적으로는 주택 가수요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다. 이미 주택을 보유한 사람은 거주 목적의 실수요자라도 대출을 받기 까다로울 정도다. 주택 보유자의 대출금지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주택 보유자의 추가 주택담보 대출길은 완전히 차단됐음을 실감하고 있다. 결국, 추가 대출길이 막히고 금리까지 오르면 가수요가 줄어들고 집값 상승 압력도 본격적으로 줄어들면서 가격 조정도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이영표 해명, 아내 무통주사 논란에 “창세기 읽고 생각 나눠”[전문]

    이영표 해명, 아내 무통주사 논란에 “창세기 읽고 생각 나눠”[전문]

    이영표 KBS 축구해설위원이 최근 불거진 이른바 ‘무통주사’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이영표 위원은 지난 6월 출간한 에세이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중 출산 관련 내용이 뒤늦게 알려지며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가 된 내용은 그가 셋째 출산 당시 아내에게 “주님이 주신 고통이라면 피하지 말자”며 무통주사를 맞지 말 것을 설득한 부분이었다. 이와 관련해 “성경 구절을 통해 무통주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무통주사를 맞은 산모는 선하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인가” 등 다방면의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이영표 위원은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긴 해명 글을 남겼다. 그는 “2005년 네델란드에서 유럽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할 때 아내는 축구에만 집중하라며 출산 몇 주를 앞두고 혼자 한국에 귀국해서 저 없이 첫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 몇 시간 전 전화통화에서 무통주사를 맞고 출산하자는 제 의견에 아내는 무통주사를 맞게 되면 아이가 힘들다며 끝내 주사 없이 첫 아이를 출산했다”고 밝혔다. 이어 “(둘째 출산 당시에도) 아내는 무통주사를 맞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는데 주사를 맞으면 출산 시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또 이영표 위원은 “셋째를 출산할 때쯤 저는 창세기를 읽고 있었고, 출산을 코앞에 둔 터라 유독 출산의 고통을 언급한 부분에 눈길이 갔다. 종종 신앙적인 생각을 서로 나누는 우리 부부에게 첫째와 둘째에 이어 셋째를 출산할 때 주사를 맞지 않는 일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길게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는 “누구나 삶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실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겉으로 듣고 본 것만으로 남을 판단하는 친구나 동료 혹은 주변 사람들을 볼 때 우리 모두는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사람들을 원망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고 판단함으로써 의도하지 않는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라며 “귀에 들리고 눈에 보여지는 대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황 이면과 주변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닐 때 우리의 삶이 서로 상처 주는 삶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는 삶, 서로를 불행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하 이영표 해설위원의 해명 글 전문> 네티즌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영표 입니다. ^^~ 항상 뉴스의 스포츠면에서만 여러분들과 함께 울고 웃다가 처음으로 최근 몇일 사회면에서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뉴스의 사회면은, 스포츠면에서만 놀던 제가 아는 네티즌 분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깜짝 놀랄정도로 정교하고 거칠더군요. 스포츠면에서 종종 보였던 저에 대한 쉴드나 스포츠인들 만의 약간의 정은 사회면에서는 얄짤 없었습니다. -.-; 역시 강력범죄와 수많은 불법을 다루어온 분들이라 그런지 댓글이 상당히 세련되고 날카로웠습니다. ^^~ 2005년 제가 네달란드에서 유럽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할때 아내는 축구에만 집중하라며 출산 몇주를 앞두고 혼자 한국에 귀국해서 저 없이 첫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출산 몇시간 전 전화통화에서 무통주사를 맞고 출산 하자는 제 의견에 아내는 무통주사를 맞게되면 아이가 힘들다며 끝내 주사없이 첫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둘째는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베컴이 태어났다는 바로 그 병원이었습니다. ^^~ 다행이 이번에는 토트넘 구단의 배려로 경기에 결장하고 출산을 함께 했습니다. 처음이라 제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옆에서 계속 힘내라는 말과 함께 응원을 했습니다. 한 30분쯤 지났을때 영국 의사가 짜증섞인 말투로 제게 말했습니다. “좀 조용히 해주실래요.?” 곧이어 아내가 말했습니다. “오빠 목소리 자체가 듣기싫어..!“ -.-; 진통 할때는 응원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아내는 이번에도 무통주사를 맞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는데 주사를 맞으면 출산 시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였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마음을 가진 아내 자체가 축복입니다. @.@~) 이제 문제의 셋째가 등장합니다. 이제 만 3살.. 이틀전 광진구 상상나라에 갔는데 키큰 유치원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최고인기있는 게임을 한동안이나 혼자 점령하며 다가오는 두세살 많은 언니 오빠들에게 “비켜..!” 라는 반말을 했다더군요. -.-; 말은 조금씩하는데 아직 귀가 안열렸나 봅니다. 셋째는 밴쿠버에서 임신을 했습니다. 마지막 8개월째 출산을 위해 서울로 돌아와 아이를 낳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과 달리 캐나다 출생자는 캐나다시민권이 있는데 왜 굳이 서울에서 출산을 하냐고 물었지만 우리부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부모와 아이들의 국적이 다른게 싫었습니다. 셋째를 출산할때쯤 저는 창세기를 읽고 있었고 출산을 코 앞에 둔터라 유독 출산의 고통을 언급한 부분에 눈길이 갔습니다. 종종 신앙적인 생각을 서로 나누는 우리부부에게 첫째와 둘째에 이어 셋째를 출산할때 주사를 맞지 않는 일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길게 고민할 일도 아니였습니다. 출산한지 얼마후 유럽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후배가 저와 같은병원에서 첫 출산을 하는데 무통주사는 꼭 맞아야 하는거냐고 물어왔습니다. 제가 선택사항이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자 옆에있는 아내가 한마디 했습니다. “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해.” -.-; 여러분들이 아시는대로 저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 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것 처럼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답게 올바로 살지도 못할뿐 아니라 어디가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짜 믿음좋고 바른 기독교인이 되고 싶습니다. 불가능 할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일로 느낀 한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삶을 살다보면 한번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실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체 그저 겉으로 듣고 본것 만으로 남을 판단하는 친구나 동료 혹은 주변 사람들을 볼때 우리 모두는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지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고 판단함으로써 의도하지 않는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귀에 들리고 눈에 보여지는 대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황 이면과 주변을 동시에 살필수있는 통찰력을 지닐때.. 우리의 삶이 서로 상처주는 삶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는 삶.. 서로를 불행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고단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이 짧은 시간들.. 매일같이 수백개씩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 마다 여지 없이 묻어져 있는 분노의 찌꺼기들을 보며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짧습니다. 혹 누가 설령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사람을 품을수있는 작은 마음의 공간이 없는 걸까요..? [용서란.. 짓밟힌 제비꽃이 짓밟핌을 당한 직후에 뿜어내는 향기와 같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이 들에 핀 제비꽃 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영표 드림.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하토야마 전 일본총리, 합천 원폭 피해자에 무릎 꿇고…첫 위령각 참배

    하토야마 전 일본총리, 합천 원폭 피해자에 무릎 꿇고…첫 위령각 참배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지한파로 꼽히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3일 경남 합천을 찾아 원폭 피해자들을 만나 위로·사과를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원폭피해자 입주시설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있는 위령각을 참배한 뒤 복지회관 2층에 있는 피해자 30여명을 직접 만났다. 합천에는 국내에 있는 원폭 피해 생존자 2000여명 가운데 가장 많은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현직은 아니지만 총리를 지낸 일본 고위 인사가 국내 원폭 피해자 위령각을 참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하토야마 전 총리는 원폭피해자들에게 “안녕하세요. 하토야마 유키오라고 합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 뒤 일본어로 “식민지와 미국 원폭 투하에 따른 이중 피해자인 여러분들께 사과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일본 정부가 제대로 배상이나 지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 부분에 대해 상당히 죄송하다”고 밝혔다. 이어 “2·3세 분들도 피해를 많이 봤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여러분들 고민을 들으며 여러분이 더 행복해질 수 있게 지원책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하토야마 전 총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고령인 피해자들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은 채 일일이 위로를 전했다. 그는 복지회관 방명록에 ‘우애의 마음으로 원폭 피해자들에게 다가가겠다’는방문 기록을 남겼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합천 원폭 자료관을 방문한 뒤 원폭 피해 2세 환우 쉼터인 합천 평화의집도 찾았다. 그는 합천 평화의집에서 “일본에서 피폭자 후손 문제에 대해 질의했지만 법 정비가 안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현직에 있지 않아 제약이 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그는 취재진 인터뷰에서 “총리 재임 시절 한국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구상이 있었지만 재임 기간이 짧아 실현되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퇴임 이후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를 인정·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앞서 하토야마 전 총리는 2일 부산에서 유엔평화공원에 이어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 묘역을 참배했다. 합천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마약범도 소년범도 가족처럼 사랑으로…시험 과목 까다로워 선택·집중 전략으로

    마약범도 소년범도 가족처럼 사랑으로…시험 과목 까다로워 선택·집중 전략으로

    집행유예 선고 뒤 ‘보호관찰’(몇 가지 의무를 수행하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허용) 처분을 받은 성인 마약사범부터 학교폭력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이행 중인 미성년자까지 법원에서 징역형이 아닌 판결을 받은 대상자들을 별도로 지도·감독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보호직 공무원이다. 이들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성실히 지도·감독에 응하던 대상자가 하룻밤 사이에 마음을 바꿔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여서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도 이들이 보호직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려고 하는 것은 법원에서 ‘사회내처분’(교도소 밖에서 이뤄지는 처벌)을 받은 대상자들이 언젠가는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서울신문이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서울준법지원센터에서 2016, 2017년 입직한 보호직 공무원의 이야기를 2일 들었다.●출근부터 퇴근까지 상담과 출장의 연속 오전 8시 30분. 강력범죄과에 근무하는 윤나래(26·여) 책임관은 벌써 마음이 초조하다. 서울준법지원센터의 정규 출근시간은 오전 9시이지만 책상 위의 전화가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려서다. 숨도 돌릴 새 없이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으니 담당하고 있는 보호관찰 대상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 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일정 좀 조정할 수 없을까요?” 윤 책임관은 대상자를 어르고 달래 정해진 날짜에 나오도록 설득했다. 전화통에 불이 꺼질 때쯤 면담자가 사무실로 찾아오기 시작한다. 보호직 공무원 한 명이 평균적으로 담당하는 관리 대상자는 200명 정도다. 보호직 공무원 1명당 하루에 6~7명을 면담하는데, 돌발 상황이 많아 정해진 수치는 아니다. 윤 책임관은 오늘도 돌발 상황에 마주했다. 관리 대상자가 갑작스레 오열하면서 신세를 자조해 사정을 들어 주느라 상담 시간이 길어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여서 무작정 돌려보낼 수 없는 노릇이다. 면담이 끝나면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다. 주 3회 출장을 떠나 관리·감독하는 대상자들의 주거지를 확인한다. 오늘 윤 책임관이 들러야 할 곳은 필로폰을 투약한 마약중독자의 집이다.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낡은 집에 도착하니 주사기 등 마약 투약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마약 복용 간이 검사도 음성으로 나왔다. 이때 윤 책임관의 눈에 띈 건 텅 빈 냉장고다. 그는 대상자에게 끼니를 거르지 말고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 타이르고 집을 나섰다. 대상자들이 마약 복용을 다시 하지 않는지, 가정폭력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건강 이상 없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들의 책임이다.●소년원부터 보호관찰소까지… 근무처 다양 보호직 공무원으로 합격하면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 소속이 돼 전국 소년원과 보호관찰소에서 근무한다. 이들은 보호관찰과 사회봉사, 수강명령집행, 보호관찰심사, 보호처분변경, 집행유예 취소 등 관련 업무를 모두 맡는다. 보호직 공무원을 뽑는 시험은 크게 7급과 9급으로 나뉜다. 올해 공채에선 7급 보호직 공무원 5명을 선발하는데 95명이 지원해 19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9급 보호직 공무원은 남녀를 구분해 선발하는데, 올해 남자 공채는 22.5대1, 여자는 128.8대1을 기록했다. 9급 여자 공채에서는 21명을 선발해 지난해와 선발 인원은 같았지만 여성 지원자가 지난해에 비해 크게 늘어 경쟁률이 높아졌다. 합격자 대부분은 인력 수요가 많은 보호관찰소에 배치된다. 합격 뒤 진행되는 연수교육(4주) 과정에서 1~3지망까지 희망 근무 지역을 지원받는다. 합격자의 거주지와 성적 등을 고려해 첫 번째 근무처를 결정하는데, 합격생들은 근무지 배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필기시험 성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심리학은 독학… 100점보다 합격선 노려야 9급 보호직 공무원 공채는 해마다 선발하지만, 7급 공채는 2년에 한 번씩 지원자를 받는다. 7, 9급 모두 원서 접수와 필기시험, 면접 등 세 단계를 거쳐 최종 합격자가 발표된다. 하지만 필기시험 과목 수에는 차이가 있다. 7급은 국어(한자)와 영어, 한국사, 헌법, 형사소송법, 심리학, 형사정책 등 7개 과목을 치르고, 9급은 국어(한자)와 영어, 한국사를 필수로 하고 형사소송법과 사회복지학개론, 사회, 과학, 수학, 행정학개론 등 다섯 개 선택과목 가운데 2개를 고른다. 인터뷰에 응한 4명은 가장 까다로운 시험 과목으로 심리학과 형사정책, 행정학개론을 꼽았다. 공무원 학원가에 보호직 공무원 전문 강의가 없다 보니 형사소송법은 교정직 강의를 들어야 하고, 심리학 강의는 아예 있지도 않아 독학을 해야 한다. 2016년 7급 보호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지난해 서울준법지원센터에 배치된 윤 책임관은 수험 전략을 잘 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윤 책임관은 “보호직 공무원 스터디 모임이나 인터넷 강의도 많지 않은데 시험 과목은 의외로 많아 준비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어차피 100점이 아닌 합격선(80~90점)을 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욕심을 내 공부량을 늘리기보다는 진짜 핵심만 추려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어느 직렬보다 투철한 직업정신 필요 사회내처분 대상자는 마약사범부터 소년범까지 다양하다. 전자발찌를 끊고 잠적해 온 직원들이 비상에 걸리기도 하고, 필로폰을 복용했다가 집행유예를 받아 성실히 지도에 응하던 대상자가 난데없이 대마초를 피워 다시 입건되기도 한다. 이럴 때면 보호직 공무원들은 맥이 탁 풀린다. 사회봉사과에서 근무하는 이기련(27) 주무관은 “전자발찌를 끊고 도망가면 요즘 말로 ‘노답’(답이 없어 보이는 것)인 것 같아 한숨밖에 안 나온다”면서 “그래도 전자발찌를 채우면 재범률이 8분의1로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이들을 잘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보호직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어둡고 희망이 없어 보이던 대상자가 관리·감독 기간을 거친 뒤 ‘새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보호관찰 정보화센터에서 일하는 조현우(25) 주무관은 “대상자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고 전화를 해 말리러 갔던 적이 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겨우 구했는데, 며칠 뒤 센터에 찾아와 죄송하다며 사죄하고 그 뒤로는 열심히 봉사활동을 해 감회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특정범죄자관리과에서 근무하는 가희범 주무관(36·남)은 “보호직 공무원은 어느 직종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호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보면 지도 감독에 불만을 품고 강하게 반항하는 대상자를 만나는데, 이때 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금세 이해심과 인내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가 주무관은 “보호직 공무원은 범죄자를 상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면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다”면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온정과 법 집행을 위한 냉철한 판단력을 함께 가진 합격생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5회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移葬)한 기록문으로 송용식 참전기를 대신한다. 6·25 전사 인천학생 묘가 인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중에는 비석도 없고 봉분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이제는 고향 인천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잊혀져가지만, 후대에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해 달라고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활동 1996년 7월 15일 창립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가 인천지역 6년제 중학교 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은 208명이고, 전사 스승은 심선택 해병 소위 1명이다. 23년 동안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가 제보를 받거나 혹은 기록을 찾아서 이름과 출신 중학교 등을 확인한 전사 인천학생은 105명뿐이다. 나머지 103명의 전사 인천학생은 이름조차도 알 수가 없다. 전사 학생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여러 차례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묘지를 찾아 전사자 위패와 묘 그리고 고향 인천 여기저기 묻혀있는 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관련 지방자치단체에 기록되어있는 호적 제적등본을 일일이 다 떼어서, 최종적으로 전사를 확인한 결과 그 전사자는 105명이다. 6·25 전사 인천학생 명단에서 오빠의 이름을 찾아보고 통곡하던 할머니 자매 2001년 6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인천 중구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주최로 제3회 인천학생 625 참전 기록사진 전시회를 개최 중일 때 있었던 일이었다. 첫날 두 분의 할머니께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에게 다가와 울면서 “저기 우리 오라버니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따라가 보니까 전사 학생 명단이 있는 참전 전시판에 할머니들이 가리키는 이름은 송용식이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이 “송용식 전사자의 묘가 따로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지금 오라버니는 서구 검암동 간재울 고향 땅에 묻혀 있으며 우리들은 동생 송옥림·옥란 자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6·25 참전 사진 전시회가 끝나고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를 확인하기 위해 두 자매의 안내로 서구 검암동으로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가 있는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 438-18번지를 찾아갔으나 묘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묘지가 보이지 않는가?”라고 물어보았더니 “우리들이 어릴 때 군에 입대한 오빠가 전사하여 유골로 돌아와 아버지께서 이 근방 양지바른 곳에 묻고 봉분을 잘 만들어 해마다 제사를 드렸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아무도 돌보지 않아 봉분이 깎여 이리됐다”하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 묘를 국립묘지로 우리가 옮겨 주겠으니 이장하겠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두 자매는 그리하겠다는 뜻을 밝혀 이때부터 묘지 확인 작업을 위해 현장에 직접 검암동 동직원과 같이 유골이 묻혀 있는 지번(인천 서구 검암동 438-18)을 확인하였다.6·25 전사 학생 송용식 이장(移葬)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육군본부에서 이장 허가서를 발급받았다. 2003년 5월 27일 아침 일찍부터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건하게 6·25 참전 전사 학생 고(故) 송용식의 유골(遺骨)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어렵게 유골을 찾아 수습한 후 유골함에 담아 제(祭)를 올렸다.전사한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게나! 2003년 5월 27일 오후에 대전 현충원 봉안관 임시안치소에 모셨다가 2003년 6월 26일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이제는 편안히 잠들 유택(대전 현충원 2묘역 16129)에 안장되었다. 2003년 6월 26일 유골 이장에 참석하신 아버지(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께서 송용식 전사자 묘에서 “중학교 3학년 때 나와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참전하여 전사한 친구여, 자 이제는 편히 쉬게나!”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이경종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는 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6·25 전사 인천학생들 유골 6·25 사변 발발 후 한창 전쟁 중일 때 전사한 전사자들은 그 당시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묘지를 정하지 못하고, 화장을 한 뒤에 유골을 직접 유가족에게 전하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유골을 받은 부모님들께서는 가슴이 베이는 심정으로 대성통곡하시고는 집 근처 아들이 놀던 양지바른 동산에 곱게 묻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참전기 15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6년제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송용식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6년제 인천공업중학교(현재 인천기계공고)의 넓은 운동장은 아직도 송용식을 기억합니다. 송용식과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입대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송용식이 공부했던 인천기계공고 운동장 한편에 송용식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이 참전기에 그 이름 송용식을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 때 자원입대 ▲육군 통신병으로 참전·전사송용식 전사자는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태어나, 인천공업중 3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자원입대 후 육군통신병(군번 0243043)으로 참전하여 1951년 5월 30일 강원도 양구에서 전사함.
  • 이영애, 훌쩍 큰 쌍둥이 근황 “독보적 청순 미모” 판박이

    이영애, 훌쩍 큰 쌍둥이 근황 “독보적 청순 미모” 판박이

    추석 연휴 강호동과 이영애, 양세형의 ‘가로채▶널’이 시청자의 시선을 가로채는데 성공했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25일 방송한 SBS ‘내 모든 것으로 가로채▶널’ 시청률은 5.3%, 최고 6.2%(이하 수도권 가구시청률 2부 기준)로, MBC ‘추석에도 나혼자 산다’ 7.3%에 이어 동시간대 2위를 차지했다. 우선 스튜디오에 출연한 강호동과 이영애, 양세형은 자신이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등 자신의 모든 것으로 콘텐츠를 제작, 직접 1인 크리에이터에 도전해 자신만의 채널을 오픈하는 모습으로 시선을 끌었다. 무엇보다 배우 이영애가 쌍둥이 승빈, 승권이의 엄마로서 아이들과 함께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비디오+블로그)를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이영애는 딸 승빈이가 평소에도 셀프 촬영하는 것을 좋아해서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어보고자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영애 딸 승빈은 셀프 카메라를 통해 “예쁘게 봐주세요”라며 수줍게 인사했다. 이영애는 ‘예.우.새(예쁜 우리 새끼)’라는 주제로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양평 문호리의 집을 가는 과정과 그곳에서 아이들과 산책하고 직접 송편을 만들어 먹는 모습을 영상에 담아 따뜻하고 잔잔한 공감을 안겨줬다. 특히 창작 송편의 흔적으로 온통 어지러진 부엌을 승권이가 혼자 치우는 모습은 6.2% 최고의 1분을 끌어냈다. 송편 가루가 바닥에 흩어져있자 승권이는 장난감 RC카에 테이프를 부착해 굴리면서 청소를 하는 로봇카를 뚝딱 만들어내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어 예쁘게 한복을 입고 절을 하는 쌍둥이를 바라보는 이영애의 모습에는 커가는 아이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 보는 이들마저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짓게 했다.한편 강호동은 ‘강.하.대(강호동의 하찮은 대결)’의 첫 승부사 대결 상대로 빅뱅의 승리를 찾아갔다. 승리 집을 찾아가 이름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삼행Q를 선보이는가 하면, 승리에게 주짓수도 배우고 ‘발가락 잡고 멀리 뛰기’ 대결도 펼쳐 관심을 모았다. 승리는 이날 옷을 3벌이나 갈아입으면서 열의를 보였으나 마지막에 하찮은 대결 패배로 얼굴에 먹칠을 해서 탁본을 뜨는 벌칙을 수행해 큰 웃음을 안겼다. 양세형은 평양냉면 ‘맛집 도장깨기’에 도전했다. 그는 평양냉면 초심자 가수 제시와 함께 서울에서 유명한 평양냉면집 세 군데를 선정해 직접 맛을 보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평냉 초심자 제시는 평양냉면을 먹고 ‘생선맛’이 난다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이에 양세형은 동치미국수를 육수에 부어주고, 냉면 국수에 식초를 먹는 꿀팁을 알려주는 등 냉면전문가 못지 않은 정보와 지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돈있는 집 자녀는 초봉부터 다르다”…세습되는 직업 지위

    “돈있는 집 자녀는 초봉부터 다르다”…세습되는 직업 지위

    “부자 부모를 둔 자녀가 더 좋은 일자리를 얻고, 돈도 잘 벌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은 보통 주변 ‘엄친아·엄친딸’(엄마 친구의 아들·딸을 줄인 말로 집안은 물론 성격, 머리, 외모 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남녀를 일컫는 말) 사례를 근거로 둔다. 최근에는 이런 추측을 데이터로 입증한 자료가 여럿 나오고 있다. 부자 부모들은 고액 사교육과 입시 정보 등을 통해 자녀들의 유명대 진학을 돕고, 이를 발판삼아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도록 하는 게 일반적 패턴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전략만 동원하진 아니다. ‘돈있는 집 자녀는 초봉부터 다르다’는 통념이 얼마나 맞는 얘기인지, 또 부유층은 자녀에게 직업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살펴봤다. ●고소득 부모 둔 자녀 첫월급 226만원…저소득 자녀는 169만원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낸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대학경험과 노동 시장 지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의 소득에 따른 자녀의 초봉 차이는 뚜렷하다. 연구진이 고용정보원의 ‘대졸자 직업이동 경로 조사’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부모의 월 소득이 1000만원 이상(2014년 기준)인 대학 졸업생의 첫 일자리 임금은 월평균 226만 1200원이었다. 부모 월 소득이 500만~700만원 사이인 대졸자는 첫 월급이 191만 5800원, 300만~400만원인 대졸자는 첫 월급이 182만 3000원이었다. 부모 월 소득이 100만~200만원 사이인 대졸자의 첫 월급은 평균 169만 8600만원이었다. ‘부자 부모 밑에 고연봉 자녀 있다’는 공식은 보통 ‘학벌’이라는 징검다리를 밟고 만들어진다. 같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부모 소득이 낮은 집단(200만원 이하)의 자녀 중 서울 4년제 대학 진학 비율은 7~8% 정도인 반면 부모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500만원 이상)의 자녀 중 서울 4년제 대학에 간 비율은 25~30%였다. ‘대학 졸업장도 만성 취업난 앞에 쓸모없게 됐다’는 푸념이 나오지만, 여전히 조금은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부모들이 쓰는 전략은? 사교육·귀천의식 자극 논문 ‘청년층 노동시장 이행의 계층화에 관한 연구’(중앙대 김종성 박사)를 보면 부자·엘리트 부모들의 자신의 직업 지위를 자녀에 물려주는 일상화된 전략이 잘 분석돼있다. 김 박사는 전략 분석을 위해 계층을 대표하는 20~30대 청년 취업자 33명을 심층 면담했다. 면담 대상자 다수가 공통적으로 말한 전략은 부모가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방식이다.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실제 이런 방식으로 자녀의 목표의식을 자극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공공기관 직원 A(27·여)씨는 어린 시절 부모가 했던 말이 지금껏 기억난다. 판사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는 TV에 여의사, 여성 변호사 등이 나오면 딸을 불렀다. “봐봐, 너도 저런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자도 좋은 직업 가져야 대접받는 세상이야.” 딸의 진로계획서 희망직업란에 어머니가 직접 ‘변호사’라고 쓰기도 했다. 변리사인 B(32·여)씨도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직업에도 다 귀천이 있는 거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딸과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 선생님 참 멋있지? 가운도 좋고. 너도 나중에 꼭 의사돼야 해”라고 강조했다. 이씨는 “소득이 높은 변리사를 직업으로 택한 건 부모님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교육도 직업 지위 대물림에 빠질 수 없는 전략이다. 대입 전형이 복잡해지면서 정보력이 중요해졌는데 ‘정보 전쟁’은 보통 엄마들이 도맡는 경우가 많다. 이때 고액 컨설팅 업체 등 사교육의 도움을 받는 일도 흔해졌다. 대형 학원이 부족한 지방에서는 서울의 스타 강사를 고액에 데려와 그룹과외를 하기도 한다. 영어 교육을 위해 엄마·아빠를 따라 외국에 3~4년 머물다 들어오는 일도 흔해졌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그 자녀들의 초봉 차이도 크지만, 이후 급여 차가 더 벌어지는게 문제다. 부모의 지원이 든든하다면 자녀들은 취업 뒤에도 경력 계발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경영학 석사(MBA) 유학 등 재력을 기반으로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는 덕에 발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직업지위가 낮은 부모의 자녀들은 대기업 등 원하는 기업에 입사하면 거기서 목표가 사라져 정체되는 경우가 많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푸른 눈의 예수들…빛고을엔 ‘희생의 꽃’이 핀다, 형형색색 고물들…양림동 펭귄마을엔 보물이 산다

    푸른 눈의 예수들…빛고을엔 ‘희생의 꽃’이 핀다, 형형색색 고물들…양림동 펭귄마을엔 보물이 산다

    20세기 초, 광주 양림동에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발을 디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만 해도 낯선 이국땅을 밟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겠지요. 태어나 자란 고향을 뒤로하고 남의 나라에 오는 것, 말도 안 통하는 땅에서 배곯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는 것, 머나먼 타지에서 눈을 감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매 순간순간이 크나큰 결심이고 용기이자 헌신이 아니었을까요. 미국과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양림동 언덕배기 땅을 사들여 집을 짓고 교회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3·1운동을 하는 신자들을 돕고, 한센병 환자의 손을 잡았으며, 남루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오늘날 그들이 지은 건물은 번듯한 근대 문화재가 되고, 이방인 선교사들의 행적은 아름다운 역사가 됐습니다.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의 조붓한 골목길에는 100여 년 전 양림동에 살았던 이들의 삶이 고여 있습니다.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에 있는 유진 벨 선교사 사택에서 성탄절을 기념하는 예배가 열렸다. 전라남도 지역에 울려 퍼진 첫 기도문, 첫 찬송가였다. 1900년대 초 양림동에 온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유진 벨과 클레멘트 C 오웬은 성탄절 예배를 시작으로 작은 동네에 터를 잡고 기독교를 전파한다. 생소한 종교를 믿는 이방인들이 읍성 내에 자리잡기는 어려웠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은 곳이 양림동, 병들어 죽은 이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는 풍장터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가진 게 없던 시절, 마을에는 병들고 배곯는 이들이 지천이었다. 이국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가르치기에 앞서 복음을 실천한다. 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고 본국의 후원금을 그러모아 양림산 자락 땅을 사들인 뒤 학교와 병원, 교회를 지은 것이다.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을 둘러보는 4.5㎞의 골목길은 양림동에 머무른 작은 예수들의 행적을 뒤따르는 길이다.●좁은 골목 사이로 오웬기념각과 광주 최초의 양림교회 양림동역사문화마을에 깃든 기독교 역사를 음미하려면 양림오거리 아래 오웬기념각을 출발점으로 삼는 게 좋다. 바로 옆에 광주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가 있으며, 수피아여학교, 우일선선교사사택, 호남신학대 선교사 묘원 순으로 동선이 잘 연결된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바지런히 누벼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걷다 보면 만나는 서양식 건축물은 선교사 이름이 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네덜란드 식으로 회벽돌을 쌓았다’, ‘원형 창과 첨두아치 형상의 창문을 조화롭게 배치했다’는 안내문 설명을 읽기에 앞서 이곳에 얽힌 선교사들의 삶을 아는 것이 먼저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양림동은 그저 오래된 동네요, 사택은 고색창연한 서양식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양림동에 거주한 선교사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한국인만큼 한국을 사랑했던 이들은 한국 이름으로 살았다. 유진 벨은 ‘배유지’, 로버트 M 윌슨은 ‘우일선’, 클레멘트 C 오웬은 ‘오원’ 또는 ‘오기원’, 엘리자베스 셰핑은 ‘서서평’으로 불렸다. 1895년 한국에 온 배유지 선교사는 수피아여학교를 세웠다. 여자여서 배움이 어렵던 시절, 여학생들은 근대식 학교에서 교육의 권리를 보장받았고, 민족의 앞날을 고민해 행동으로 옮겼다. 광주 지역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해 1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었고, 교복을 찢어 태극기를 만들었고,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우일선 선교사는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 선교에 앞장섰다. 워싱턴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촉망받는 의료인은 광주한센병원, 여수 애양원을 여는 등 한센병 환자를 향한 사랑이 극진했다.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죽으며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는 데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나같이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몸소 실천하는 삶이었다. ●배유지 선교사 만든 수피아여학교, 아치형 창문·회벽의 조화 의료 봉사를 하던 오원 선교사는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뜬다. 한국에 온 지 5년 만이었다. 오원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기념해 세운 건물이 오웬기념각이다. 요즘 용어를 빌리자면 복합문화공간이랄까. 예배는 물론, 수많은 강연, 음악회, 무용과 연극 공연이 열린 공간이다. 수피아여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예배당은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커티스 메모리얼 홀, 선교사들이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던 곳이다. 학교를 세운 배유지 선교사를 기리는 뜻에서 ‘배유지 기념 예배당’이라고도 한다. 아치형 창문과 회벽이 어우러져 고아한 아름다움이 풍긴다. 건축물 기행의 하이라이트는 호랑가시나무를 지나면 나타나는 2층 건물, 윌슨 선교사 사택이다. 우일선 선교사가 살던 집이자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소개되는 곳이다. 미국 영화에서 볼 법한 ‘잘생긴’ 주택은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아 올리고 내부는 회반죽을 칠했다. 외관만큼 집에 서린 사연도 아름답다. 이곳은 우일선 선교사의 사택이자 광주 최초로 고아원 사역을 시작한 장소다. 마당 한편에는 은단풍 나무가 있다. 우일선 선교사가 고향에서 종자를 가져와 심은 것이란다. 은단풍은 자신과 고향을 이어주는 끈이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벗이었으리라. 누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열거하지 않더라도 어떤 죽음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윌슨 선교사 사택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호남신학대 언덕에 아담한 묘원이 있다. 배유지와 오원 선교사를 포함해 양림동과 호남을 기점으로 활동한 22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원이다. 본명과 한국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비석 앞에는 방금이라도 누가 다녀간 듯 싱그러운 꽃다발이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건넨 안부 인사다. 선교사들은 눈을 감은 후에도 고국이 아닌 양림동에 묻혔다.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은 까만 눈의 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한껏 안아줄 수 있는 양림동 언덕배기에.출발점이었던 오웬기념각 근처에 마을의 또 다른 명소, 펭귄마을이 있다. 양림 커뮤니티센터 뒤편의 골목길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옛날 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은 색색의 폐품으로 가득하다. 목록 한번 다양하다. 멈춰버린 시계, 고물 자전거, 이 빠진 그릇, 녹슨 실로폰, 줄 나간 바이올린….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것들, 효용이 중요한 세상에서 제 기능을 다한 것들이 여기서는 귀한 취급을 받는다. 사람들 카메라에 쉴 새 없이 담기는 예술 작품, 정크아트가 된 것이다. 펭귄마을의 시작은 화재가 나 방치돼 있던 빈집에서 가져온 고물이었다. 김동균 촌장을 주축으로 마을 주민들은 맥주 병뚜껑으로 물고기 몸통을, 깨진 장독대 뚜껑으로 펭귄 팔을 만들어가며 길거리 미술관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고물은 쓸모없다 여긴 것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유행 따라 살지 말고 형편 따라 살자’처럼 노년의 지혜가 담긴 글귀, 라면땅부터 뽀빠이까지 불량식품 가게에서의 소소한 군것질도 놓치기 아까운 즐거움이다. 버드나무가 울창해 ‘버들 양’(楊)에 ‘수풀 림’(林), ‘양림’(楊林)이란 이름이 붙은 양림동은 젊은이들에겐 놀 거리 많은 핫플레이스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골목에 세련된 레스토랑과 한옥 카페가 들어섰다. 양림동은 변화에 유연한 동네다. 풍장터에서 기독교 문화를 꽃피운 마을은 어르신의 손때 묻은 작품과 젊은이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양림동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다.●예향의 도시 축소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향의 고장, 아시아문화 중심도시, 광주. 이 도시의 예술적인 면면이 궁금하다면 양림동역사문화마을 맞은편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으로 향하면 된다. 2015년에 문을 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문화예술 전반을 아카이빙하고 전시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전지인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서 역사적 의미도 깊다. 부지는 민주평화교류원, 어린이문화원,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총 5개 시설로 나뉜다. 재밌는 점은 건축의 특이성이다. 구 전남도청 본관, 별관, 경찰청 본관을 활용한 민주평화교류원을 제외하면 모두 지하에 들어서 있어 거대한 지하세계 같다. 그렇다고 어두침침하거나 습한 기운은 없다. 건물 지붕에 설치된 70여 개 채광정 덕이다. 채광정은 낮에는 햇볕을 지하 깊숙이까지 받아들이고 밤에는 은은한 불빛을 뿜어낸다. 총면적 16만 1000㎡. 우리나라 문화 공간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보니 여행자는 입구에 들어선 순간 어디를 둘러봐야 할지 당황하기 십상이다. 시간이 여의치 않은 여행자에게 넓은 부지는 때로 부담이므로. 광주에 흐르는 예술의 향기를 맡고 싶되 1시간 남짓밖에 시간이 없다면 문화정보원 라이브러리파크로 향하자. 전시 규모가 아담해 가벼운 마음으로 휘이 둘러볼 수 있다. 도서관, 박물관, 갤러리, 극장을 하나로 묶은 라이브러리파크는 무료 전시를 자주 연다. 문화창조원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이자 기획 전시가 열리는 공간이다. 6개 복합관에는 아시아를 주제로 국내외 이름난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올라간다. 문화생활을 한 뒤 가을볕에 몸을 바짝 말리고 싶다면 문화창조원 뒤편 하늘마당이 제격이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은 전시만큼 인상적이다.●무등산 품에 안고 달리는 모노레일 무등산은 광주 시민들에게 집 앞 공원 같은 산,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은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리는 이름이다. 지산유원지 앞마당으로 소풍을 갔다, 리프트를 타고 무등산을 올랐다, 엄마 손 꼭 붙잡고 모노레일을 탔다….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에 얽힌 추억은 1980~90년대 이곳을 찾은 어린이의 수만큼 각양각색일 것이다. 1980년부터 2005년까지 선로를 달리던 모노레일은 운영업체 부도 등으로 운행이 중단됐다가 11년 만인 2016년부터 운행을 재개했다. 모노레일을 타러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무등산 등산로를 따라 산길을 오르는 방법과 745m 길이의 리프트를 타는 방법. 빨갛고 노란 철제 리프트는 1990년대 광주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이다. 타임머신은 시속 5㎞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리프트가 두 발을 대신하고 시간은 넉넉하니 가족, 연인, 친구는 번다한 일상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모노레일은 탑승역인 빛고을역과 종착점인 팔각정 아래를 25분 동안 왕복한다. 끼이익, 모노레일에서 이따금 섬뜩한 소리가 난다. 선로가 하나라 약간의 덜컹거림도 피할 수 없다. “아빠, 여기서 떨어져도 죽진 않겠죠?” “이거 누가 타자 그랬어! 무섭잖아!”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스릴은 없지만 옛날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짜릿함에 여기저기서 즐거움 섞인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모노레일 밑으로 나무들의 초록색 정수리가 빼곡하다. 종착점인 팔각정은 무등산 향로봉 기슭에 자리해 광주 도심이 한눈에 담긴다. 드넓은 광주가 아담해지는 순간, 빛고을의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는 순간, 마음이 쉰다. 글 이수린(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62)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 오산IC를 타고 논산천안고속도로 천안분기점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서광주IC에서 서광주 쪽으로 들어선 뒤 중외공원 입구에서 ‘무등산, 시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양동시장에서 ‘남광주교차로, 양동시장’ 방면으로 들어서 천변좌로를 따라 2㎞가량 이동하면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이다. →맛집 충장로에 있는 1960백선청원모밀(268-1960)은 6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메밀 집이다. 역사만큼 음식 맛이 깊어 2011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 편에 이름을 올렸다. 가다랑어포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는 여타 메밀 집과 다르게 멸칫국물로 육수를 내 시원하다. 영미오리탕(527-0248)은 ‘백종원의 3대천왕’에 나온 뒤 사람들로 더욱 북적인다. 들깻물에 미나리와 오리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들깨오리탕이 유명하다. 푸짐한 남도 밥상이 당긴다면 금다연(374-1000)이 어떨까. 친환경 식재료를 써서 호박죽, 전, 회까지 한 상 가득 거하게 차려낸다. →잘 곳 양림동역사문화마을 주변에 게스트하우스가 여럿 있다. 호남신학대 부근의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682-0976)는 옛 선교사의 사택을 리모델링했다. 고즈넉한 적벽돌 집의 2층 테라스에서는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 있다. 지산유원지 내에 자리한 호텔무등파크(226-0011)는 골프연습장, 온천사우나, 볼링장 등 부대시설이 다양하다.
  • ‘동상이몽2’ 류승수♥윤혜원, 주말부부 생활 공개 ‘궁금증 UP’

    ‘동상이몽2’ 류승수♥윤혜원, 주말부부 생활 공개 ‘궁금증 UP’

    ‘동상이몽2’ 류승수, 윤혜원의 결혼 생활이 최초로 공개된다. 17일 방송되는 SBS 예능프로그램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이하 ‘동상이몽2’)에는 새롭게 합류한 배우 류승수, 아내 윤혜원의 주말 부부 결혼 생활기가 최초 공개된다. 연기 경력 21년 차 배우 류승수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너는 내 운명’에서 처음 공개한다. 류승수는 첫 VCR에서부터 4년 차 주말부부답게 서울에서 혼자 사는 남자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줘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혼자 사는 남자에서 탈피해 대구로 떠난 류승수는 막상 아내를 마주하자마자 아내의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내 아내에게 참아왔던 투정과 어리광을 부리자 MC 김숙은 “아기가 되었네, 아기가” 라며 류승수의 반전 매력을 이야기 했다. 한편, 대구 집에 도착한 류승수는 방송 최초 3살 난 딸아이를 최초 공개했는데, 딸 나율이를 보자마자 스튜디오가 초토화 됐다는 후문.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모습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딸 나율이와 이에 서운한 아빠의 새로운 ‘동상이몽’까지 함께 펼쳐질 예정이다. 이날 스페셜 MC로는 류승수의 절친인 배우 김광규가 스튜디오에 찾아와 거침없는 폭로전을 펼쳤다. 류승수는 늘 김광규에게 “결혼은 지옥이다”라며 말해왔었다고. 이 날 VCR을 지켜보던 김광규는 급기야 스튜디오를 이탈하려는 모습까지 선보여 모두를 폭소케 만들었다. 한편, SBS ‘동상이몽2’는 17일 오후 11시 10분에 방송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7회 성북(북정마을 가는 길) 편이 지난 8일 성황리에 진행됐다. 매주 월요일 0시에 시작되는 치열한 예약전쟁을 뚫은 예약자 30명과 대기자 10명 등 모두 40명이 이날 10시 정각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 모였다. ‘노쇼’에 대비, 대기자를 뒀지만 무단결석자가 사라지면서 예약자와 대기자 구분 없이 정원이 40명으로 늘어난 지 오래다. 걷기 좋은 날씨, 더할 나위 없는 코스에 대한 기대감이 참석자들을 들뜨게 했다.베테랑 해설자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안내한 이날 코스는 한양도성 혜화동전시안내센터를 출발, 성북동 국시집~최순우 옛집~마전터 표지석~북정마을~성북동 비둘기 소공원~만해의 심우장~이종석 별장~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 및 복자사랑 피정의집~이태준의 수연산방~쌍다리식당~간송미술관의 순서로 이어졌다.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와 사연의 손때가 묻은 곳이다. 성북동의 명소이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과 성당이 이날 처음으로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에 공개됐다. 한국인이 창설한 최초의 수도원인 두 곳 모두 서울미래유산이다. 일행을 안내한 신부님의 입에서 “최초 공개”, “첫 방문”이란 말이 반복됐다. 또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일반인의 방문을 허용하는 간송미술관도 답사단이 보화각과 간송 흉상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설문에 응한 23명의 참가자는 “평소 가고 싶었던 곳, 가려운 등을 콕 집어 긁어주는 코스”, “2시간 30분도 짧은 듯”, “새록새록 앎이 즐겁다”, “신부님의 해설 감동, 해설자의 해설 만족”이라는 호평을 소감으로 남겼다.조선시대 혜화문 성곽 안과 밖은 딴 세상이었다. 성곽 안 동촌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동인들이 살던 양반마을이었지만 성곽 밖은 찢어지게 가난한 자내(字內) 산골이었다. 자내마을은 성곽을 지을 때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에서 조상할 조(弔)까지 97개의 글자 구간으로 나눠 축조한 구간을 말한다. 자내마을은 지명이 없이 구간의 이름이 주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이 구간 성곽의 안은 종로구, 바깥은 성북구 성북동과 동소문동으로 행정구역이 갈린다.해방 이후 서울의 행정구역은 종로구와 중구 등 옛 도심에 접한 지역은 사대문을 중심으로 남대문구, 서대문구, 동대문구라고 이름을 붙였고, 나머지 성저십리(성 밖 십리)마을은 도성의 동쪽과 북쪽이라는 뜻에서 성동구와 성북구로 정했다. 성북구는 말 그대로 성 밖 북쪽 마을이다. 한양도성은 성안과 성 밖 주민의 신분을 구분 짓는 엄격한 경계였다. 성곽이 해체되고, 삶의 공간이 확대되면서 성은 분리와 경계의 대상에서 삶의 질과 경관의 대상으로 변했다. 근현대 변혁의 물결 속에서 옛것이 사라져버린 성 안보다 오히려 성 밖이 각광받는 세상이 됐다. 성 안은 아파트와 빌딩이 점령했지만, 성 밖은 숲과 한옥과 골목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시인 김지하는 ‘오적’에서 성북동을 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장성, 고급공무원이 사는 도둑촌으로 지목했지만 덕분에 성북동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지 못하는 품격 있는 동네로 남았다. 성북동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조선시대 선잠단이 성북동의 정체성이다. 선잠단은 양잠(養蠶)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신성한 공간이다. 농업과 잠업은 중세 사회의 두 축이었다. ‘남경여직’(男耕女織)이라고 해 남자는 논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는 게 본분이라고 여겼다. 권농은 왕이, 권잠은 왕비가 직접 주관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혜화문 밖 마을의 최초 이주자는 숙정문과 혜화문을 지키는 군인가족들이었다. 농사 대신에 시전에서 판매하는 포목을 잿물에 빨아서 삶아 말리는 일(마전)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먹고살았다. 겨울철에는 메주를 담가서(훈조) 시전에 납품했다. 둘 다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영조의 생계조치이자 특혜였다. 지금의 성북초등학교는 빨랫감을 말리는 장소였고 북정마을은 메주를 쑤는 동네였다. 빨래골, 북적골이라는 지명이 전해졌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성곽마을 북정마을이 북적골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는 식민지의 수도 경성이 꼴 보기 싫어서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의 본거지였다.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이 깃들고, 이태준과 박태원에 이어 청록파(조지훈·박두진·박목월) 시인의 청록집이 만들어진 문화예술인촌이었다. 한국전쟁 후 피란민과 월남민들이 도성을 따라 판잣집, 토막집을 지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고급주택이 들어섰다. 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댄 채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이, 구준봉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부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성북동의 새 정체성을 만든 사람은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이다. 간송은 만석꾼 문화재 수장가요, 혜곡은 국립박물관 학예사 출신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고스란히 넘어갈 위기에 처한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을 지킨 혜곡에게 간송이 큰절을 올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인과 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충렬이 쓴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라는 두 권의 책을 종합해 보면 간신히 의문이 풀린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두 달여 전인 1950년 4월 16일 수장가와 학예사로 처음 인사를 나눴다. 흔히 ‘천학매병’이라고 알려진 ‘청자상감운학매병’을 간송이 국보특별전시회에 출품하자 같은 해 4월 30일자 서울신문에 혜곡이 ‘역사에 빛나는 도자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게 계기였다. 간송이 만남을 청했으나 이때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얼마 후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은 보화각(간송미술관)의 문화재를 평양으로 옮길 사람으로 혜곡과 소전 손재형을 지목했다, 혜곡과 소전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힐 때까지 목숨을 걸고 포장을 늦춰 문화재의 북송을 막았다. 이후 간송은 혜곡을 아우이자 애제자로 대했고 혜곡은 간송을 큰형님이자 스승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최순우는 간송이 감사의 마음으로 혜곡에게 선물한 필명이다. 혜곡의 집안 항렬자인 순박할 순(淳)에 간송 집안 아들항렬 돌림자인 비 우(雨)자를 합해 순우(淳雨)라는 필명을 만들어 준 것이다. 처음에는 최희순이라는 본명과 병행해서 사용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는 최순우란 이름을 본명처럼 썼다. 간송은 스승 위창 오세창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재 감식안과 필생의 안목을 혜곡에게 낱낱이 전수했다. 위창과 간송이 고졸 출신의 혜곡을 한국미의 순례자에 오르게 했다. 스물네 살 때 조선의 거부 40인에 들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뒤 위창으로부터 받은 ‘문화보국’의 기치를 마음에 심은 간송이 왜 하필 성북동에 최초의 사설박물관을 지었을까. 간송 또한 만해처럼 식민지의 수도 경성을 등지고, 일제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고자 했다. 1938년 4년여의 공사 끝에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박물관이 완공되자 위창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미술관 건물을 보화각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박물관의 본래 이름은 북단장(北壇莊)이었다. 1934년 수장고로 사용할 건물이 먼저 완성되자 위창은 북단장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일제가 사직단과 합친다며 선잠단을 해체하자 사람들이 박물관 터를 ‘북쪽에 있는 선잠단’이라는 뜻에서 북단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북동을 이루는 근대의 간송미술관은 결국 중세 선잠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송파(백제의 꿈) ●일시 : 9월 15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 :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성난 집값, 성난 민심… 文 지지율 첫 40%대로

    성난 집값, 성난 민심… 文 지지율 첫 40%대로

    설익은 발언 잦아 정책 혼선 초래한 듯 靑, 참여정부 위기 재연될라 전전긍긍 서울 아파트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청와대와 여권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취임 후 처음으로 50% 아래로 내려가는 등 부동산 급등에 민심이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4~6일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 문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도는 전주보다 4% 포인트 떨어진 49%로 집계됐다. 6월 둘째 주 조사 때보다 무려 30% 포인트가 하락했다. 특히 서민층에서 지지율 하락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리얼미터가 성인 1504명으로 대상으로 지난 3~4일 벌인 여론조사에선 국정 수행 지지도 52.9%를 기록했다. 리얼미터는 “정치권에서 경제 악화에 대한 공격이 장기화하고 있고 집값 급등과 부동산 대책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청와대 내에선 지지율이 더 하락하면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는 것은 물론, 집값을 잡지 못해 임기 내내 낮은 지지율로 고군분투한 참여정부 때의 뼈아픈 경험이 재연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최근 정부와 여당 인사가 앞다퉈 부동산 정책 관련 발언을 쏟아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런 가운데 당·정·청 조율을 거치지 않은 설익은 발언도 적지 않아 정책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지난달 30일 고위 당·정·청에서 3주택 이상이거나 초고가 주택 등에 종합부동산세를 강화하는 ‘핀셋 종부세’를 제안하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5일 “급격히 세금을 올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간보기’ 식으로 정책을 흘리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최근 임대 등록의 혜택을 집을 새로 사는 수단으로 역이용하는 경향이 일부 있다”면서 “등록된 임대주택에 주는 세제 혜택이 일부 과한 부분이 있다고 보고 개선책을 관계 기관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내놓은 임대주택사업 활성화 방안을 8개월 만에 뒤집은 것이다. 국토부는 기존 임대주택사업자의 반발이 커지자 세제 혜택 축소는 신규 등록 물건에만 해당한다고 해명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여당과 청와대, 국토부 등에서 조율을 거치지 않은 대책이 나오면서 시장의 혼란이 더 커지는 것 같다”면서 “부동산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보다 보니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마룬5, 그들이 온다… 내년 2월 고척돔 내한공연

    마룬5, 그들이 온다… 내년 2월 고척돔 내한공연

    많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팝밴드 마룬파이브(Maroon5)가 내년 초 내한한다.공연기획사 라이브네이션코리아는 내년 2월 27일 오후 8시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마룬파이브의 공연이 펼쳐진다고 6일 밝혔다. 이번 내한은 지난해 낸 정규 6집 ‘레드 필 블루스’ 발매를 기념해 시작한 월드투어의 일환이다. 마룬파이브는 ‘디스 러브’, ‘쉬 윌 비 러브드’ 등을 담은 2002년 데뷔 앨범으로 큰 인기를 누리기 시작해 우리나라 스마트폰 광고음악으로도 쓰인 2011년 ‘무브스 라이크 재거’, 2012년 ‘원 모어 나이트’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세계적인 밴드로 자리잡았다. 또 보컬 애덤 리바인은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에 출연하는 등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마룬파이브는 2008년 첫 내한 후 꾸준히 한국을 찾았다. 공연 티켓은 오는 21일 정오부터 예스24, 인터파크에서 예매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장애 아들 돌본 40여년, 살아도 산 게 아니었어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장애 아들 돌본 40여년, 살아도 산 게 아니었어

    발달장애 아들 둔 허강원씨의 삶그날 힘없이 무너져 내린 건 아들의 몸뚱이만이 아니었다. 허강원(73·가명)씨의 실낱같은 희망도 함께였다. 발달장애(지적장애 1급·다운증후군)로 불혹의 나이에 키가 150㎝에서 멈춰버린 큰 아들은 질뚝거렸지만 걸어는 다녔다. 아들이 혼자 걷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였다. 대소변을 혼자서 가리고, 밥이 있는 곳까지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돌봄의 한계치이기도 했다. 허씨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 먹자”고 큰아들을 불렀다. 큰아들은 기우뚱하더니 서지 못하고 엎드렸다. 식탁으로 기어 오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 밤잠 못 이루며 끙끙댔던 고민들이 명쾌해졌다. ‘그래 같이 죽자’. 한씨는 2015년 4월 15일 집 안방에서 자던 큰아들(당시 41)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쳤다.“지나고 보니 사는 게 그늘이 많았어. 안 해 본 사람은 몰라. 간병이라는 게 매스컴에 나오는 그런 것과는 많이 달라.” 유난히 태양이 뜨겁던 지난 7월 31일, 허씨를 서울 그의 집 앞에서 마주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흘렀지만, 세상과 등진 그의 삶이 달라진 건 크게 없어 보였다. “이젠 눈에 보이지 않잖아. 노력도 많이 했고…. 지나간 일이니까”라며 애써 태연했다. 긴 설득 끝에 그의 집 앞에서 지난 삶에 대해 들었다. 아내는 강남구의 한 빌딩에 청소일을 하러 갔고, 작은아들은 결혼 후 따로 살고 있어 때마침 그는 혼자였다. 허씨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여지는 남겼다. 노인의 얼굴에 쓴웃음이 내려앉았다. “그래. 그때 예감했어. 차라리 죽었어야 했어.” 큰아들은 아내가 임신한 지 9개월째 되는 날 태어났다. 수술할 돈이 없어 산파에게 부탁했다. 어렵사리 아이는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왔지만,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산파는 도망갔고, 아내가 급한 맘에 아이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려 엉덩이를 때렸다. 기적처럼 큰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렵게 살아났지만 아이는 약했다. 갑자기 숨을 쉬지 않는 등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다섯 살이 됐지만 서지 못했다. 다운증후군, 지적장애 1급이라고 했다. “요즘 눈으로 생각해 보면 장애를 둔 아이를 키우는 게 짜증 날 일도 아니잖아. 근데 사는 재미가 없었어.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지.” 허씨는 강원도 대관령에서 나고 자랐다. 25살 경기 동두천 내 미군부대에서 군생활을 했고, 전역하고 서울에 정착했다. 28살 아내와 혼인해 다음해 큰아들을 가졌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서울 중랑구 근처 면도칼 공장에서 일했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가진 기술이 없으니 막노동이나 다름없었다. 없이 살았지만 큰아들의 장애가 나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집 근처에 장애인 특수학교가 없어 수소문 끝에 인천 부평에 있는 학교에 보냈다. 그때만 해도 먹고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부모들이 발달장애 아동의 교육을 포기하던 때다. 10개월쯤 지나서였을까. 특수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에게 밥을 대접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야속했다. “나아지는 것 없다”는 말에 작은 희망조차 사라졌다. 없는 살림에 매달 쌀 한 가마니 값을 치러 가며 학교를 보냈지만, 그럴 이유도 사라졌다. ‘발달장애는 질병과 달리 낫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부모는 없다. 머리는 알지만, 가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첫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첫째가 잘하는 건 집에서 텔레비전 보기였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텔레비전을 틀어 주면 온종일 봤다. 말은 대충 알아들었고, 간신히 걸어 똥오줌은 가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이가 흘린 김칫국물을 닦고, 국물이 묻은 옷을 벗기고, 발버둥 치는 몸을 씻기는 일은 40여년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큰아들을 돌보느라 나들이 한 번 제대로 가 본 적 없었다. 아이를 돌봐야 하니 일을 마치고 퇴근해도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큰아들이 어렸을 땐 집에 놀러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선 이웃도, 친구도 모두 사라졌다. “또래들이 태권도복 입고 태권도장 가는 모습을 보잖아요. 우리 아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찔찔찔 하는데, 사람 눈 뒤집히지. 행복할 수가 있나.” 우울증이 찾아왔다. 술만 마시면 눈물을 흘리며 비관했다. 남들한테 추한 꼴을 보이기 싫어 술도 담배도 끊었다. 이게 벌써 수십년 전이다. 언제나 단정하게 보이려고 했지만, 남들은 늘 추하게만 보는 것 같았다. 사실 큰아들 밥 차려 주고 거두는 건 힘들지 않았다. 그냥 큰아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공원에 가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얘기의 끝은 늘 아들, 딸, 며느리 얘기였다. 그럴 때마다 할 얘기가 없어서 소심해졌다. 5살 터울인 작은아들에게도 형은 굴레였다. 장애를 둔 형 때문에 파혼을 당하기도 했다. 부모가 죽고 없으면 형을 돌볼 수 있는 가족은 동생뿐이지 않냐며 상대편 부모가 반대했다. 부모의 마음은 미어졌다. “부모들 모임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거야.” 그는 인터뷰 도중 자주 엄지와 검지를 말아 쥐었다. 돈을 뜻하는 손짓이었다. 결국 돌보는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아이를 센터에 보내는 것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허씨 내외는 경제적으로 늘 허덕였다. 맞벌이를 해 봐야 시원치 않았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빌딩 청소일을 해 왔고, 허씨는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가 60세에 환경미화원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후 빌딩 경비 일도 했지만, 2교대 근무 탓에 큰아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어 금방 그만뒀다. “밥 먹다가 숟가락을 딱 떨어뜨렸어.” 그 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 허씨는 뇌출혈 선고를 받았다. 식사를 하다가 손에 힘이 없어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더니 뇌경색이 발견됐다. 이미 고혈압과 협심증, 류머티즘 관절염, 척추 디스크, 수면장애 등을 앓고 있었지만 뇌출혈은 느낌이 달랐다. 곧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큰아들은 누가 돌봐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잘못된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과 함께 죽는 게 모두를 위해 최선이 아닐까 하는 믿음도 생겼다. 고민이 깊어질 무렵, 걷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봤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팽팽하던 긴장의 사슬은 톡 끊어졌다. “아들을 망치로 내리쳤소. 규남이는 내가 데리고 갑니다. 정선희 당신을 만나 한평생 잘 지냈소. 규남이에겐 입이 열개여도 할 말이 없소이다.”(유서 전문) 2015년 4월 15일 새벽 6시쯤, 아내가 일을 나간 것을 확인하고 망치로 아들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회한이 몰아치기 전에 유서를 썼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수면제 수십알을 들이켰다. 정신을 잃기 전에 아파트 복도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중간쯤 갔을까. 허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렇게 질긴 목숨은 끝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남편을 발견했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 허씨는 3일간 혼수상태를 오갔지만, 끝내 깨어났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 다만 5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법원은 허씨가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을 수십년간 정성 들여 보살펴 온 점을 인정했다. 고령이고 지병이 있고, 남은 가족을 생각해 맏아들을 살해했다는 점 등도 참작했다. 그는 돈 때문에 큰아들을 마음껏 못 가르친 게 한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많지 않지만 월 1만~2만원씩 발달장애 아동 단체에 기부금을 낸다. “내가 어려움을 겪어 봤으니까. 그런 애들 불쌍하잖아…. 집사람이 일을 그만두면 이나마 못 하겠죠.”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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