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서울의 아침 해
    2025-12-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97
  • 한완상 상지대총장 백두산 등정기

    *白頭 햇볕으로 ‘냉전 외투’ 벗을 날이…. 이번 제1차 남북교차관광단의 자문위원장 자격으로 6박7일의 짧고도긴 백두산관광을 마치고 이 글을 쓴다.하기야 중국을 거쳐 백두산을이미 세 번이나 보았다. 특히 1989년 5월말 눈덮인 백두산 정상을 세시간이나 걸어 올라가 기진하였을 때 다음번 우리의 영산을 찾는다면 반드시 우리땅 백두고원과 개마고원을 당당히 밟고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이번에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조국 땅에서 바라보는 백두와 천지의 모습은 중국 쪽에서 보는 것과아주 달랐다.한마디로 우리 민족과 우리 역사의 보물이라는 자긍심을느꼈다. 백두산의 웅장함은 말할것도 없고,그 웅장함 속에 금강산의섬세한 아름다움이 담겨있었다.작은 고무보트로 비로봉과 만물상 곁을 가보았더니 또 하나의 금강이 그곳에 있었다. 중국쪽에서는 볼 수 없는 절경이었다.코발트 빛 천지물에 투영된 백두·금강의 아름다움.바로 이것이 우리민족 전체의 영원한 자산임을확인하였다.백두산 정상에서의 느낌과 천지 물가에서의 느낌이 다르듯,그것을 멀리 보는 맛 또한 각별했다.백두고원에 펼쳐진 침엽수의넓은 바다를 지나면서 한반도 남쪽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광활함에 새삼 놀랐다.한때 북방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기백이 바로 이고원지대에서 잉태되었으리라.울창한 이깔나무 숲속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삼지연에서 백두산을 바라 보노라면,그것은 후지산처럼 홀로 우뚝하지 않았다.겸손하고 너그럽게 펼쳐진 백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그런가 하면 개마고원에서 바라보는 백두의 모습 또한 새롭다. 가림천이 압록강과 만나는 곤장덕 언덕에 서면 아래로 압록강이 굽이치고 눈앞에는 중국땅너머 은은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백두가 눈에 들어온다.백두산은 멀리 볼수록 그 봄(觀)의 빛(光)이 밝아지는듯하다.한마디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백두산의 자태는 많은 자식들을 품어주고 다독거려 주는 어버이 같은 따스함을 지닌다. 그곳을 떠나는 날,삼지연 비행장에서 보니 백두의 모습은 맑디맑은아침 공기 속에서 더욱 정답게 다가온다.비행기 머리와 우람한 산의흰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정말 백두산 주변의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서울의 하늘에서는 이미사라져 버린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하기야 이번 여행 자체가 타임캡슐을 타고 지난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깨끗한 밤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으니,어린 시절 꿈의 세계로 저절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우리를 영접해준 사람들 중에 북한 여성들이 퍽 인상적이었다.코스모스꽃 같은 청초한 모습.나는 얼어붙은 듯 빛바랜 사진속에 서 계신우리 어머님의 처녀시절 모습을 보았다.우리가 묵은 소백수 초대소뜰에 길게 늘어서서 환영해준 그들은 영락없는 우리 어머니,할머니의젊은 시절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초대소 다방에선 마침 봉선화 노래 가락이 은은히 흘러나오는데,다방의 장식꽃옆에 처연하게 서있는 의뢰원 아가씨 모습이 바로 봉선화처럼 여겨졌다. 노래가락과 젊은 여성의 모습이 이토록 어울릴수가 없었다. 여하튼 백두산과 그 주변을 관광하는 동안 하늘은 맑고,바람은 잔잔했으며,햇빛은 밝았다.햇볕정책의 따스한 햇볕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았다.남북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햇볕정책을 자주 오해한다.북한체제의 옷을 벗기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따스한 햇살이 벗길 옷은 북한 나름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도 아니요,남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그 햇살은 남북간의 냉전적 불신과 대결이라는 낡은 옷을 벗기는 힘이다.남북 한쪽의 낡고 두터운 옷을 벗기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공원같은 평양의 아름다움과 활기찬 그곳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너무나 오랫동안 냉전의 옷을 두텁게 껴입고 있었음을 새삼 확인했다.6·15로 ‘햇살’이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나,봄을 시샘하고 따뜻한 햇볕을 질시하는 냉전 강풍은 아직도 때늦은 반격을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듯 하여 불편하였다.허나 누가 이 새 역사의흐름과 새 햇살의 밝고 맑은 힘을 거역하겠는가.나는 이번 여행에서바로 이 빛(光)을 보고(觀) 왔다고 믿기에 참다운 관광을 했음을 고백하고 싶다. 한완상 상지대총장
  • 노숙자 이대로 둘순 없다­노숙자 쉼터 르포

    ◎전국 3천여명… 월동대책 비상/지원 하루 1,000명… 100명 입소 허가/숙식 제공… 예산없어 일터 알선 못해/“3D업종 택할바엔 노숙” 자세도 문제 서울 강서구 방화6사회복지관. 이곳 ‘희망의 집’에는 14명의 노숙자들이 모여 20여평 크기의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IMF 한파로 실직한 사람들이라 자활에 대한 의지가 높다. 아침 7시면 공공근로를 위해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일당 2만5,000원은 꼬박꼬박 저금을 한다. 朴모씨(37)는 “노숙생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면서 “직장을 잡으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깨끗한 방,침대,TV 등이 비치돼 노숙자들 사이에선 천국으로 통한다. 하지만 오랜 노숙 생활 탓인지 규칙적인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다고 한다. 이미 2명이 공동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복지관 李權一 부장(37)은 “자체적으로 기상·취침시간 등 규칙을 정해 생활하고 있다”면서 “처음엔 힘들어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노숙자는 서울 2,400명,부산 300명,대구 120명,인천 100명,경기 100명 등 모두 3,02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쉼터’ 32곳(수용인원 2,035명)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급하게 문을 열다보니 숙식만 제공할 뿐 자활프로그램이나 취업알선 등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해당 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식사비와 생필품비도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시는 한끼 식사값으로 880원을 책정했지만 실제로 드는 돈은 1,500∼2,000원선이다. 한사람 앞으로 5,000원씩 지급되는 생필품비로는 내의,세면도구 등을 사기에 부족하다는 게 운영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대부분의 복지관이 자선행사나 후원금 모금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운영자측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주민들의 반발이다. D사회복지관 관계자는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노숙자 수용 사실을 숨기고 있다”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실직노숙자와 부랑자를 혼동하고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수용시설도 부족하다. ‘희망의 집’ 입소자를 선별하는 서울역의 ‘노숙자 다시 서기 지원센터’에는 하루 500∼1,000명의 노숙자들이 몰리지만 평균 100여명 가량만 입소 허가를 받고 있다. 무료급식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사회단체와 종교단체들이 운영하는 무료급식소는 서울의 21곳을 비롯,전국적으로 36곳이 있다. 서울 용산역의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사람은 하루 600여명. 음식재료비만 70만원에 이른다. 운영자 兪蓮玉씨(31·여)는 그러나 “노숙자들에게 중요한 건 한끼의 식사가 아니라 다가올 겨울에 지낼 수 있는 숙소”라고 말했다. 문제는 노숙자의 수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데 있다. 사회·종교단체가 나서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임시방편적인 수단보다는 당국의 보다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대학 만능」의 신화를 벗자/최운실(일요일 아침에)

    해마다 우리 곁을 마치 유행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입시 열풍의 회오리를 우리는 올해도 예외 없이 겪어야만 했다.수십만의 입시생과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숨죽임 속에 벌어지는 96년 대학입시 희비의 엇갈림을 우리는 또 한번 지켜봐야만 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대학이라는 신화에 푹 빠져 있었다.대학이 마치 인생의 전부 인양 신봉하며,대학을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보이지 않는 사회적 벽 또한 너무도 높았다.대학에 낙방한 입시생과 그들의 부모가 함께 겪어야 했던 좌절과 고초가 그야말로 처절할이만큼 컸다. 대학이라 해서 모두 같은 대학이던가? 일류대학 만능 의식은 또 어떠했던가.대학간의 서열화가 우리 사회만큼 큰 곳도 이 지구상에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일류 대학과 이류,삼류 대학 그리고 서울의 대학과 지방 대학간의 공공연한 차별적 관행이 우리 사회 전체를 꽁꽁 얽어매 왔다. 대입에 낙방했는가? 당신과 당신의 자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소위 일류대학의 배지를 얻지 못해 처절하게 지쳐 있는가? 지금 당장은 커다란 좌절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그러나 우리에겐 그걸 이겨 낼 충분한 항력과 면역력 그리고 엄청난 역전의 가능성이 있음을 결코 잊지 말자. 눈을 조금만 돌려 저편을 바라보자.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그리고 무한대적 가능성이 우리 앞에 환하게 펼쳐져 있음을 잊지 말자.또 다른 시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우리 모두 새로이 눈을 뜨자 우리 앞을 어둡게 가리웠던 맹목적적인 대학 우상화의 늪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실력주의 사회가 오고 있다.기업들도 앞다투어 새로운 인재를 찾아 나서고 있다.지금까지와 같은 『학력 일변도』의 인간 평가 잣대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어느 대학을 나오셨습니까?…』라는 물음으로 학력이 우리를 얽어매던 시대는 지나갔다. 던져지는 물음 또한 달라지고 있다.『어떤 일을,얼마만큼 잘하실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을 해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컴퓨터를 잘 다루실 수 있습니까? 영어는 어떻습니까? 일본어는요? 당신은 어느 정도 창의적이십니까? 당신은 매사에 얼마나 의욕적이십니까? 당신은 이 일에 얼마만큼 당신 인생의 승부수를 걸고 계십니까? 당신은 이 일을 다른 그 누구보다도 잘해 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계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강점과 약점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부단한 변화와 성장을 위한 자기개발 의욕과 구체적인 경력개발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당신은 이 일로 부터 행복을 얻어내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인생의 새로운 출발 기점에 서 있는 많은 젊은이여.그대들이 만일 이러한 질문을 받는 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젠 더 이상 입시 등락에 휘몰려 나락에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다.또 하나의 시작을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다.내가 원하는 귀한 인생의 가치를 구하고 성취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 뛰어야 할 때다.우리 모두는 누구나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다만 우리의 눈이 가리워 미처 보지 못하고,아직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개발과 성취를 위해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 이 시점에서 내게 의미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한번 뿐인 인생이 우리가 잠시 낙담하고 있는 사이에 솔솔 새어나가 버린다면 너무도 커다란 손실이 아닌가? 우리 인생의 어찌보면 점 하나에 불과한,대입이라는 첫번째 시도의 작은 좌절 때문에 벌써 송두리째 지쳐 있다면 앞으로 어찌 긴 인생의 커다란 일을 해 낼 수 있겠는가? 나의 자아실현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결코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내 인생을 내 스스로가 열어가야 하듯이,원대한 꿈을 갖고 눈을 크게 떠서,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확인하며 새로운 진로를 설정하는 일,남보다 부지런히 잘 일구어 내고자 노력하며 철저히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일도 결국은 나의 몫인 것이다.뜁시다.그리고 구합시다.지금 이 순간부터 새로운 마음을 활짝 열어.
  • 하룻새 주치의 3번 불러 건강체크/노씨 귀가이후 연희동 표정

    ◎한때 와병설… 건강에 큰 이상 없는듯/금진호씨 등 6공 측근들 위문 줄이어 ○…2일 새벽까지 16시간 동안이나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연희동 집으로 돌아간 노태우 전대통령은 주치의를 하루 세번이나 불러 진찰을 받기도 해 한때 과로에 따른 와병설이 나돌기도 했다. 노전대통령은 그러나 장시간 조사에 따른 피로가 겹쳐 2일 아침과 점심식사를 하지 못한채 링거 주사를 맞고 있을 뿐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씨의 주치의인 서울의대 최규완(내과)교수는 이날 상오 3시와 10시,낮 12시20분쯤 세번이나 노씨집을 찾아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돌아갔으나 그뒤에는 다시 방문하지 않아 노씨의 건강이 크게 나쁜 상태는 아님을 암시했다. 측근들은 『노전대통령의 건강에 큰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면서 『피로가 심해 혈압이 떨어지는 증상이 나타나 주치의를 불렀으며 절대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소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노전대통령이 귀가한 이날 노전대통령의 친인척과 6공 측근들의 위로 방문이 줄을 이었다. 상오 9시25분쯤에는 노씨의 동서 금진호 민자당의원 부부가 비자금 파문 이후 처음으로 노씨집을 방문했다. 검은색 포텐샤 승용차를 타고 도착한 금의원 부부는 취재진들의 질문에는 일체 답변을 회피한 채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가 1시간쯤 머물다 돌아갔다. 측근들은 『금의원이 최근 퇴원한 뒤 위로차 방문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오에는 부인과 함께 상오 11시45분쯤 어디론가 나갔던 아들 재헌씨가 혼자 돌아왔으며 노씨의 육사 동기인 안교덕 전민정수석,서동권 전안기부장,정구영 전검찰총장,한영석 전민정수석 등 노씨의 측근들과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 등 위로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노씨가 검찰의 「혹독한」 조사를 받고 돌아와 과로로 몸져 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희동의 일부 주민들은 연민의 정을 표시하는가 하면 대다수는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 서울시장 출마 「빅3」 3작가 밀착취재

    ◎민자 정원식/「컴퓨터 황소」… 경륜·안정감 돋보여/“서울 면모일신” 공약은 듣기만해도 흐뭇 열전 16일의 본격적인 지자제선거전 그 첫날의 막이 올랐다.정원식 후보의 정당연설회장이라는 마포구 홍익대근처의 철도부지 공터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유세장에 가는 길은 예외없이 교통체증으로 짜증이 난다.유세 때문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시달리는 서울의 교통지옥 때문이다.수돗물은 위험해서 마시지 못한다고 성분도,청결도도 알 수 없는 생수 한사발을 먹고 나선 배가 더부룩하고 초여름의 더위에 달구어진 매연바람이 숨을 막는다. 『정말 서울은 사람 살 곳이 못돼』길을 나서면 한두번은 내뱉는 말이다.민선시장이 들어서면 마음놓고 수돗물도 마시고 확 뚫린 길을 시원하게 달리고 맑은 공기 마시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서울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그 속시원한 해결책은 가지고 있을까.그 기대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권자가 유세장으로 몰려가는 것일 게다. 첫날이어서 그럴까.아침 10시가 넘었는데도 청중은 2백∼3백명이 그것도 노인·부녀자만 연단 밑에 모여 있다.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전문운동원이 마이크를 잡고 정원식후보가 왜 서울시장에 당선되어야 하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열시반부터 열겠다면 광역후보·기초단체후보는 적어도 30분 전에는 와 있어야 하고 자원봉사를 맡았다는 인기연예인도 30분 전쯤에는 도착하여 춤추고 노래는 못할망정 유세장분위기를 띄워야 하는데 그들마저 30분,1시간 지각이다. 길이 막혀 지각을 했으면 바로 그 교통난을 이렇게 해소하겠다고 말문을 열었으면 좋겠는데 누구 하나 사과 한마디 없다.시간이 흐르면서 청중의 숫자도 불어나 2천여명이 되었다.비로소 유세장다운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땡볕에 앉아 있는 청중은 깔판을 빼내어 고깔모자를 만들어 쓰고 맨바닥에 앉아 연사들의 유세를 경청하는 열의를 보였다. 『정원식 정원식』연호소리와 함께 정 후보가 황소 같은 육중한 몸을 연단 위에 나타냈다.노익장의 전총리는 그의 별명인 컴퓨터 황소답게 특유의 미소를 띠며 청중의 환호에 두팔을 높이 들었다. 교육자이며 인격자인 동시에 누구보다 노련한 정치력과 행정력·운영능력을 갖춘 새서울 건설의 구원자는 정원식뿐이니 합심하여 밀어주자는 전원일기 김회장,최영한(최불암)의원의 열변이 터져나오자 다시한번 정원식 연호소리가 메아리졌다. 이어서 마포구청장후보의 연설이 계속되며 한표를 부탁했고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 나서서 기초단체장후보들의 인사소개가 이어졌다.역시 하이라이트는 정원식후보의 연설이었다.돈은 막고 입은 연다는 이번 선거의 특색답게 말의 성찬이 이루어졌다. 교통난 해소,맑은 물 먹기,쾌적한 환경조성,서울시 빚청산,통일조국의 수도 서울로 면목을 일신하겠다는 정 후보의 공약은 시장만 되면 틀림없이 실현될 것만같이 호소력 있게 들려온다.말만 들어도 흐뭇하고 기분좋다.강물이 흐르지도 않는데 다리를 놔주겠다고 공약을 하는 사람이 정치가라 하지만 누가 되든 이번만은 부디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유세장을 뒤로 했다.아무튼 유세가 끝나도 교통비다,점심값이다 하며 돈봉투 안돌아다니는 것만 보아도 이번 선거는 유사이래 깨끗한 선거가 되는구나 싶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민주 조순/사려깊고 겸손… 신선한 연설 인상적/난마처럼 얽힌 서울시문제 해결사 될듯 가끔 내가 일하는 치과에서 『전에는 얼음도 깨물어 먹고 병마개도 이빨로 따곤 했는데 요즘은 이가 시리고 흔들린다』고 하는 환자를 만난다.그런 환자에게 내가 말한다.『이로는 얼음을 깨물어 먹거나 병을 따서는 안됩니다』 나는 오늘하루 조순 후보와 동행했다.그러면서 우리는 혹시 병마개를 이빨로 따고 얼음을 깨물어 먹는 시장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오늘 조순 후보는 현대미술관에서 박수근 회고전을 보았다.그리고 경인미술관에서 유홍준 교수,김초혜 시인,소설가 윤정모씨,화가 김정헌씨등과 함께 문화예술인 모임을 가졌다.그리고 명동유세와 신림동유세에 참석했다.조순 후보의 첫나들이가 미술관과 인사동에서 시작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특히 신림동에서 그의 연설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던 조순후보의 변화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는 이번 지방자치선거에서 승리해야겠습니다』『서울시장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무능하고 오만하며 비전 없이 표류하는 집권층에게 단호한 각성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집권당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온 그의 신중한 태도에 비추어볼 때 그의 말은 참으로 신선했다. 나는 솔직히 지금 서울이 안고 있는 심각한 위기에 대해 후보들이 얼마만큼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다.누가 이 위기의 도시에서 시민을 구할 것인가. 나는 시민이 조순 후보는 사람은 좋은데 추진력이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강력한 시장이라….우리 속담에 「싸우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지난 시절 군사문화의 잔재로서 소위 「빨리빨리」「후다닥 밀어붙이기」논리에 너나 할 것 없이 빠져 있지는 않은가.무언가 화끈하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불도저식 시장을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로 이런 우리의 요구위에서 성수대교는 만들어졌으며 가스관이 폭발했다.나는 그런 전지전능한 시장은 있을 수도 없고 바라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우리 국민이송수관이 몇개이며 그 예산이 어림잡아 얼마이고 하는 퀴즈문제에 집착하거나 서울의 문제를 단번에 고칠 수 있다는 쾌도난마식 공약에 현혹된다면 우리는 계속 위기의 서울을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다. 그는 말했다.우리 사회가 잘못된 추진력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그는 또 말했다.야당을 택하지 않고 야당후보를 밀어주지 않고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서울시장만으로 서울시를 훌륭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라고.그는 미술관에서 「치원여민」이라는 휘호를 써주었다.「시민과 더불어 멀리 도달한다」는 말이라 했다.옳은 말이다.시장은 시민의 자발성을 끌어내 그들과 함께 문제해결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우리가 급하다고 해 이빨로 병마개를 따는 식의 강력한 시장을 원한다면 우리는 성수대교식 서울을 갖게 되리라. 조순,그는 사려깊고 결단력을 갖춘 사람이다.그는 소신있지만 독단적이지 않은 사람이다.그의 이런 민주적인 사고와 태도야말로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서울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풀어가리라.그는 능력있지만겸손하며,그는 냉철하지만 온유하다. 오늘 내가 그를 보고 느낀 점이다.무엇보다도 그는 시민에게 배우고 시민을 두려워하는 서울시장이 될 것이다. ◎무소속 박찬종/소탈·친근미 넘쳐… 시민후보 실감/악수 유세 인기… 시민들 자원봉사 자청 D­15.6·27선거를 15일 앞둔 12일 아침7시50분.서울시민후보를 자처하는 무소속 박찬종후보는 제1한강교 중지도에서 이틀째의 공식선거운동을 시작했다.이번 서울시장선거 이슈의 하나로 떠오른 교통체증에 그의 이동차량 갤로퍼(서울2 서7582)가 발목이 잡혀 예정된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은 시각이었다.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마주한 자리에 멀티 큐브차량을 배경으로 선 박찬종 서울시민후보는 노량진쪽에서 강북으로 입성하는 출근차량을 향한 손인사를 시작했다. 8시50분,박찬종 서울시민후보는 선거유세 사상 유례가 없던 첫 손인사유세를 끝내고,1㎞ 서쪽에 자리잡은 노량진수산시장으로 이동,9시5분부터 흔듦에서 만남으로 변형된 악수유세를 시작하였다.상인들의 요구로 의자에 올라서 핸드폰을 이용한 10분 정도의 즉석연설이 끝나자,비린내가 발린 손을 앞치마에 급히 문지른 한 아낙이 안겨들듯이 손을 잡으며 귀밑으로 다가들어 뭔가 나즉하게 속삭였다.박후보의 손짓에 참모 하나가 다가가는 동안 조기를 파는 김상기씨(36)가 외상장부를 내밀어 사인을 받았다.「김상기씨 감사합니다.박찬종 1995년 6월12일」 9시40분,악수유세를 마친 박 후보가 아침식사를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곳은 수산시장 지하실 수산회관.1인분에 4천원인 우럭매운탕을 시키고 수행기자들과 노면담화식의 기자회견이 벌어졌다. 누군가 아낙이 귀에 속삭인 내용을 물었다.지원금을 보내고 싶으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것.박 후보측에 답지한 현재의 지원금은 약 1억원 안팎.법정선거자금 14억2천여만원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신문 5단통광고 2회 광고비에 해당하는 1억원으로 임대한 멀티큐브차량으로 박찬종 서울시민후보로서의 이미지선거,정책차별화선거로 지역할거주의를 앞세운 3김의 선거전략을 극복할 의지를 확실히 했다. 식사가 끝난 시각은 10시45분.자리에서 일어나는 박후보의허리띠가 없었다.서둘러 새벽에 나오다 저지른 실수였다.제1한강대교를 지나면서 그가 허리띠를 매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 유권자는 몇이나 될까. 10여만원의 식사비용은 그를 지지하는 30대의 시민이 지불했다. 한시간을 민자당사 앞에 자리잡은 대변인실에서 휴식을 취한 박후보는 12시20분 여의도백화점 앞 용달트럭에 마련한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서울이 통일한국의 수도,모스크바와 북경·도쿄를 잇는 동북아의 축 서울,세계의 중심도시 서울로 만들겠다.태어난 곳은 동서남북 다 다른 곳이지만 여러분이 서울이 고향이라고 대답하는 서울로 만들겠다』점심식사를 위하여 나온 직장인들이 삽시에 몰려들었고,주위 건물난간에 무수이 많은 직장인이 나와 손을 흔들어 지지를 표명했다. 점심은 여의도백화점 지하실에 있는 설렁탕집이었다.유세를 취재나온 뉴욕 타임스의 앤드류기자와 즉석인터뷰가 이루어졌다. 박 후보는 4시쯤에 영등포시장앞 연흥극장 근처 육교 위에서 양쪽을 지나는 행인을 상대로,4시40분부터 영등포시장을 돌며 상인을 상대로 유세했다.이어 7시부터 노량진역 소광장에서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르는 유세 최대의 장비 멀티큐브차량을 배경으로 천여명의 퇴근시민을 상대로 연설했다.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으로 6월27일을 지역할거주의와 패권주의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시민명예혁명의 날로 만듭시다!』 박찬종 후보가 서울시민후보인지,6월27일이 위대한 시민명예혁명의 날이 될지는 서울시민이 결정할 것이다.
  • “미­북 핵합의는 북자멸 부르는 독약”/NYT지 칼럼니스트 주장

    ◎서방자본 유입땐 김정일 체제 파멸 불보듯/한국협조 없인 워싱턴 대북정책 성공못해 미행정부의 대북한 핵합의는 북한의 자멸을 돕는 처방이며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미뉴욕 타임스의 외교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만이 22일 주장했다.다음은 지난 14∼18일에 방한,김영삼대통령과 회견한 바 있는 프리드만이 이날자 타임스에 쓴 「독약(Poison Pill)」이란 제목의 칼럼 전문. 만일 클린턴행정부의 대북한정책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면 그 제목을 안락사로 유명한 「케보르키안박사가 이번엔 외교를 하다」로 하면 좋을 것이다.클린턴행정부가 김일성부자를 상대로 성사시킨 북·미핵합의로부터 끌어내려는 것은 다름아닌 북한의 자살을 돕는 일인 것같기 때문이다. 클린턴행정부는 북한이 핵계획을 동결하는 대가로 북한의 혈관에 서방의 투자와 크레디트 카드,외교적 접촉을 주사하면 북한의 철통같은 전체주의 정권도 서서히 무너져 언젠가는 남한의 무릎에 조용히 쓰러질 것으로 믿고 있다.그러나 클린턴정부가 자살방조처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북한측은 (그리고 핵합의에 반대하고 있는 공화당 의원들도) 미국정부가 오히려 구명처방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북한과 공화당의 생각이 옳다면 핵합의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왜냐하면 북한이 핵약속을 어길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북한을 도와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반대로 클린턴행정부의 생각이 옳다면 북한이 그동안 핵계획을 동결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필자는 클린턴행정부의 생각이 옳다고 보고 있다.단 여기에는 두가지 단서가 붙는다.클린턴행정부의 생각이 옳다고 보는 까닭은 북한의 경직된 전체주의체제가 변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데다 설사 변화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 주민과 공장들이 다같이 굶주려 있는 극심한 경제난에 처해 있다.그러나 고립된 북한지도자들은 나진·선봉지역이라는 단한군데에 외과적으로 서방투자를 주입할 수 있으며 이 지역을 북한의 여타지역으로부터 봉쇄함으로써 경제적 개방이 정치적 개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고 있다.그들은 이같은 생각에서 실제로 자신들의 고립된 자유시장 빈민굴(나진·선봉)을 차단하기 위해 철조망 수천t을 수입했다.그러나 이러한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실험은 숙명적으로 파멸하게 돼 있다(백과사전을 펼쳐 에리히 호네커,미하일 고르바초프,니콜라에 차우세스크 부분을 보라). 한국 유수의 기업인인 구평회씨는 『우리 아시아인들은 아침식사때 날계란을 먹기를 좋아한다.북한인들은 노란자위만 먹고 흰자위는 남겨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이 그런 기술을 발견하게 되길 바라지만 결국은 계란 전체를 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비유는 필자의 첫번째 단서로 이어진다.미국이 성공하기 위해선 한국의 협조가 있어야만 한다는 단서다.그러나 한국 고위관리들과 대화를 해보면 현재 워싱턴에 대한 서울의 불신이 DMZ만큼이나 골이 깊고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서울은 클린턴정부가 대북자세가 확고한 한국을 제쳐두고 (북한이 원하는 바대로) 북한과만 지나치게 상대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그런만큼 미국은한국의 참여가 없을 경우엔 북한과 어떤 거래도 없을 것임을 천명하는 데 있어 좀더 분명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측에 약속한 경수로지원경비를 조달하려면 한국이 필요하다.또 미국이 한국근로자들과 함께 경수로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서울이 필요하다.한국 근로자들은 북한에 서방의 생활방식을 전파할 것이다.미국은 또한 북한에 가서 자본주의의 씨앗을 뿌릴 한국 투자가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이러한 지극히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하는 데 한국만큼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미국인은 흔히 남북한을 동서독과 비교하곤 한다.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동서독은 서로 전쟁을 한 적이 없다. 남북한은 4백만의 사망자를 낸 전쟁을 치렀다.좀더 적절한 비교는 미국의 남북전쟁일 것이다.남북한 동족이 그들만의 힘으로는 합쳐지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그들은 미국의 지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다음은 두번째 단서다.역사의 모든 교훈은 북한의 사멸을 예고하고 있으나 케보르키안박사와 죽어가는 광적인 북한정권이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한국의 팔에 안겨 순순히 붕괴하지 않고 지하의 폭탄을 꺼내 남쪽도 함께 죽게 할 가능성이 상존한다.한국속담에 『나 죽고 너 죽고 모두 죽자』라는 말이 있다.필자가 한국인 교수에게 이말을 했더니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너 죽고가 먼저』라고 고쳐주었다.
  • 다방:상/30년대들어 급증…예술가가 주고객(서울 6백년만상:27)

    ◎소공동 미모사다방에 마담 첫 등장 『봄은 돌아와 믿은 피어도 …그대 가버린 쓸쓸한 방안에…』­다미아의 노래 「어두운 일요일」이 서울명동의 다방에서 흘러나온 것은 1938년경의 일이었다. 진종일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날 흐느껴 우는 듯한 이 가사는 일제하에서 상처받은 이땅의 젊은이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서울에서 커피를 파는 다방이 처음 생긴것은 조선 말기 고종때이다.그 무렵 러시아공관의 손탁(Sontag)이라는 독일계 여인은 고종을 극진히 위했다.손탁은 고종의 도움으로 1902년 중구 정동 지금의 창덕여중 정문앞에 지은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3·1운동이 지나고 일본인이 명동에 「멕시코」라는 다방을 열었다.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장한몽」을 연출한 최초의 영화감독 이경손이 1927년 처음으로 관훈동에 「카카투」라는 다방을 차려 커피를 팔았다.「카카투」는 삼베로 내벽을 장식,갖가지 탈을 걸어두고 촛불을 켜는등 특색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사교의 광장으로 자리를 잡았다.이감독은 서울의 다방문화에 남을만한큰일을 했지만 경영이 익숙치 못해 수개월만에 문을 닫고 상해를 거쳐 태국으로 가버렸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천재시인 이상이 다방을 열었다.1933년 7월14일 종로1가에 「제비」를,그 이듬해 역시 종로1가에 「식스 나인」(69)이라는 이상야릇한 이름의 다방을 잇따라 문을 열어 화제가 됐다.얼마안가서 영업이 부진해 모두 문을 닫았지만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이 무렵 연극영화인·화가·음악가·문인들이 여기저기에 다방을 차렸다.대개 명동·충무로·종로,또는 소공동에 문을 열어 서울에 이른바 「다방문화」가 꽃을 피웠다. 초창기의 우리 다방들은 영리보다는 멋이요,그 멋을 알아주는 손님을 고객이라기 보다는 동지로 알고 동고동락하는 장소로 제공했던 멋이 깃들여 있었다.요즘처럼 손님이 와서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엽차인지 무슨 색소를 탄 물인지 알 수 없는 물한컵 갖자놓고 주문부터 재촉하는 지금의 세대와는 전혀 달랐다. 1940년대를 전후해 다소 다방의 규모도 커지기는 했지만 일제의 태평양전쟁 말기로 다방의 수난기였다.이때 소공동에 유명한 「미모사」다방이 등장했다.미모사는 이름 그대로 지금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굉장한 미인이 마담으로 손님을 끌었다.이 미모사의 마담이 「다방 마담」의 효시라는 설도 있다. 해방되던 해에 명동엔 고전음악전문의 봉선화다방이 등장했다.물론 『울밑에 선 봉선화야…』의 이미지로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그때의 다방이란 벽에는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가 걸려있고 음악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리스트의 「헝가리 무곡」,그리고 「봉선화」노래가 전부였다. 당시 다방은 「차마시는 장소」이기 보다 「만나는 장소」의 구실이 더 컸다.사람들의 사회활동이 넓어진 것이 그 첫째 원인이다.고급 룸펜이 많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아침에 출근하다시피 나와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방 구석에 꼼짝 않고 앉아있는 사람을 가리켜 「벽화」라고 불렀다.여하튼 다방은 6·25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예술인들이 주고객이던 별난 곳이었다.
  • 갑술년 아침에/대모신의 심장이여 천룡으로 비상하라

    겨레의 영원한 어머니인 영원한 대모신인 국토, 그 가슴의 심장을 우리는 서울이라 불러 왔다. 북한,도봉의 소슬한 봉우리들 그대 어깨죽지도 솟고 한가람의 푸른 물길 그대 숨결로 맥동하였으니, 해와 달 그리고 뭇 성좌와 6백년의 성상이 그대를 에워 돌고 도는 사이 겨레의 역사,그 비장한 운행 또한 그대를 더불었으니 아! 서울이여, 이제 새로운 6백년,그리고 6백의 세기,그 무량의 억겁을 새 천시를 얻은 천룡으로 비상하라. 나라의 개벽은 곧 서울의 개벽이었다. 그것은 고조선,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조에 다다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나라가 세워지면 서울을 새로이 닦았으니,재(성)를 쌓고 담을 두르고 궁궐을 짓고 하여 일러서 「서울」이라고 하니,이가 곧 나라의 기틀이었다. 고조선에서나 고구려에서나 「정도」는 하늘의 뜻이었다.사람이 함부로 할 일은 아니었다.하늘이 점지한 터에 하늘나라의 본을 따서 하늘의 의지며 솜씨대로 서울은 이룩되었다.고구려 건국신화가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이 사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골령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걸리고 그 속에서 몇날 몇일 두고 나무 베는 소리,다듬는 소리를 위시해서 온갖 집짓는 소리 들리니,백성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기자 동명왕은 그것은 곧 하늘이 자신을 도와 성을 쌓는 소리라고 풀이했다』 이 신화의 문맥은 한 나라의 도읍의 창건은 곧 하늘의 작업이요 공사임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다.그런 점에서는 고조선의 서울이었을 「신시」또한 다를 수 없다.오죽하면 그 터전을 일러서 「신들의 고을」이라고 일렀을라고…. 이 정신은 조선조에도 이어졌다.서울에 바친 찬가인 「화산별곡」은 「화산남한수북,조선승지백옥경」이라고 서울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백옥경은 하늘의 서울,달속의 궁궐이 아니던가.백옥경은 단순한 미사려구가 아니다. 고조선 이래의 전통을 받들어서 하늘 뜻대로 조선왕조가 오늘의 서울에 정도한 뒤 이미 6백의 성상이 흘렀다.위로 천명을 우러러 아래로 광명정대하여 홍익인간하는 것,그 이념에 서울이 헌신한지 6백년의 세월이 흘렀다.앞으로도 이 이념이 달라질리는 없다. 그 사이 서울은 민족의 역사가 스스로 겪는 아픔의 크기만큼 자라간다는 것을,몸소 고뇌와 비창과 맞선 열정의 부피만큼 발전해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이 점은 서울이 6백년의 대단원을 눈앞에 두고 나라를 빼앗긴 오욕,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을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서울은 그로써 6백년을 마무리할 기틀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것은 6백년 서울의 역사의 「도미의 장식」이었다.아세아의 한 중핵이자 세계속의 서울로 비약할 도약대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별곡은 서울을 「용이 하늘을 날면서 지은 형세」라고 하였지만 이제 한반도안에 웅크리고 있던 용은 동북아를 품에 안고 세계를 향해서 비상해야한다.이제 서울은 세계를 향한 천시를 누리고 천명을 받들어야 한다.그리하여 지구촌의 광명정대가 되어 범지구적인 홍익인간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울은 지난 6백년을 잠룡으로서 은인자중해 온 것이다.그러나 드디어 때가 왔다.아세아의 잠룡은 마침내 「세계의 천룡」이 되어야 한다.그리고 세계의 빛 세계의 의로움이 되어야 한다.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에서 서울이 누려 마땅한 천명이다. 화산별곡은 「의로움을 잇고 또 이어서 또 펴고 또 펴서 천지가 편안함을 누리고 사방세계가 하나같이 통합될 태평」을 서울에 부쳐서 축수하고 있거니와 그 창업의 정신이 간직했던 웅지가 이제 바야흐로 실천되어야 한다.한반도의 옛 화산은 이제 세계의 새 화산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또다른 천명을 서울은 감당할수 있어야 한다.그것은 겨레를 위한 천명,민족사를 위한 천명이다.통일 한국의 수도 서울이 될 그 지엄한,지상의 거룩한 천명이다. 새로운 세기의 서울이여,세계의 천룡으로 비상하라.남북의 용으로 날아라 .그리하여 「후천」개벽하라. 이제 그 천시가 왔음을 우리들은 다짐하노니 서울이여,우리의 천룡이여,우리의 소원을 가납하라.
  • 문 연 약국찾아 환자들 우왕좌왕/약국 대부분 휴업… 시민들 표정

    ◎약 못산 주민들,병·의원에 몰려 북새통/일부선 개점불구 약사없어 조제 못해 전국의 약국들이 약사법개정안에 반대,문을 닫거나 개점휴업해 시민들이 휴일인 12일에 이어 13일에도 이틀째 큰 불편을 겪었다. 특히 지방의 경우 약사들이 서울집회를 이유로 상경,아예 아침부터 문을 닫는 바람에 일부 문을 연 서울의 경우보다 더 큰 불편을 겪었다. ○…대형 도매약국 1백여개가 몰려있는 전국 최대의 약국거리인 서울 종로5·6가 일대는 약국들이 거의다 문을 열어놓기도. 이들 대형약국들은 거의가 3∼4명이상의 약사나 종업원들을 두고있어 약국마다 1명씩만 집회에 참석하도록 했다고. ○…당초 13일 하오부터 전면 휴업에 들어가기로 했던 약사들이 여론악화를 의식한듯 서울의 경우 당초 방침을 바꿔 일부 약국문을 열어놓은 모습. 그러나 약사들이 이날 하오2시부터 여의도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차 약국을 비워 특히 조제약을 구하러온 주민들이 큰 불편. 감기약을 사기 위해 하오3시쯤 영등포구 당산동 D약국을 찾은 구인숙씨(43·여)는 『감기기운이 심해 조제약을 사려고 약국에 왔는데 약사는 없고 할머니가 약국을 지키고 있어 그냥 돌아간다』면서 『약국 문만 열어놓은채 약사들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만은 피해보자는 심리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아니냐』고 항의. ○…청주시내 2백72개 약국중 80%가 넘는 2백20개 약국의 약사들이 여의도 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문을 닫자 설사 등의 질환으로 약국을 찾은 시민들이 인근 병·의원으로 발길을 돌려 병·의원마다 북새통. 이날 약국이 휴업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약국을 찾았던 시민들은 이같은 약국의 휴업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라며 약사들의 처사를 비난. 청주시내 내과·소아과 등 병·의원들은 아침부터 약국에서 약을 구하지 못해 찾아오는 환자들로 평소보다 매우 붐볐으며 14일부터 시보건소에서 상비약을 지원받아 비치할 예정인 31개 동사무소에는 주민들의 문의전화가 잇따르기도. ○…약국간의 거리가 먼 평촌,일산 등 수도권 신도시 지역 주민들은 이날 문을 연 약국을 찾느라 큰 불편을 겪었다. 평촌 신도시 주민 이철희씨(35)는 『아파트 단지앞 약국 2곳이 모두 문을 닫는 바람에 5백여m 떨어진 길 건너 약국까지 가 약을 살 수밖에 없었다』고 불평.
  • 강추위 급습… 서울 영하 10도/올겨울 들어 최저

    ◎철원 영하 13도… 한파 주말까지/일요일 하오부터 풀릴듯 첫눈과 함께 닥친 한파가 계속돼 12일 서울지방의 기온이 올겨울들어 가장 추운 영하10도를 기록했다. 기상청은 11일 『찬 대륙성고기압의 영향으로 12일 서울·춘천·청주등 중부지방의 아침기온이 당초예상보다 1도가량 더 떨어진 영하10도의 추위를 보이겠으며 철원 영하13도 인천 영하9도등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이 영하의 날씨를 보이겠다』고 예보했다. 기상청은 『올겨울 들어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이번 추위는 주말인 14일까지 이어지다가 휴일인 15일쯤부터 전국에 눈 또는 비가 내리면서 서서히 풀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자 서울의 도심지와 유흥가에는 초저녁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뜸했으며 10시쯤부터 문을 닫거나 철시를 해 한산했다. 12일 상오1시 현재 서울기온은 영하8.4도였다.특히 술집등 유흥가가 몰려 있는 강남지역에서도 하오11시이후에는 일찍 서둘러 귀가한 사람들이 많은 탓에 손님들이 거의 없었으며 망년회등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일찍 귀가,썰렁한 모습이었다.
  • “서울의 새 고심” 중국동포 한약행상/「보따리장사」 실태와 문제점

    ◎“한밑천 잡는다” 소문에 계속 몰려/덕수궁ㆍ시청 지하도 등 떼지어 “점령”/“나쁜 인상 줄라” 정부선 단속 못해/89년부터 급증… 올 1만5천명 입국 요즘 서울 한복판 덕수궁 앞길과 시청 앞 지하도,파고다공원 등이 한약시장처럼 돼버렸다. 길 가득히 늘어선 중국교포들이 우황청심환 등 각종 한약들을 길바닥에 늘어놓고 손님들을 부르고 있다. 처음 덕수궁 앞길에 몇 사람씩 모이기 시작하던 이들은 점차 숫자가 늘어 길이 좁아지자 시청 앞 지하철역으로 진출하고 이곳도 모자라 파고다공원 앞까지 점령한 것이다. ▷실태◁ 이들이 덕수궁 앞길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경. 고국 방문길에 장사가 된다는 한약을 사들고 온 교포들 사이에 판로와 가격 등의 정보를 알려면 덕수궁 앞에 나가면 된다는 소문이 나 20∼30명씩 모이던 것이 얼마 뒤부터는 아예 약 보따리를 길가에 풀어놓기 시작하게 됐다. 중국과 교류가 막혀 있던 때 홍콩 등을 통해 드물게 들어오던 중국산 편자환 우황청심환 등이 희소가치에다 효험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모국을 찾는 교포들이 조금씩 들어온 것이 몇 곱절의 값으로 팔렸고 때마침 중국에서 개발됐다는 대머리치료제 등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자 중국산 한약은 들여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중국산 한약이 이처럼 밀어닥치자 국민보건을 담당하고 있는 보사부가 그냥 둘 수만은 없어 이들 한약에 대한 성분검사를 실시하게 됐고 그 결과 지난달 18일 중국산 우황청심환 3종과 녹태고 및 정력제로 인기가 있던 「남보」 등에서 수은과 납 등 중금속이 검출되고 함량도 부족하다고 발표하면서 한약에 대한 인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선물용이나 여비 정도나 뽑기 위해 조금씩 들여오던 한약이 장사가 되면서 너도나도 빚까지 얻어 갖고와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갑자기 팔리지가 않으니 야단이 난 것이다. 팔리지 않은 약을 들고 시내 중심가로 한두 사람 나오기 시작하다 순식간에 중심가를 거의 모두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오갈 데도 없이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묵고 체류기간을 넘겨 불법체류를 하거나 생활비나 돌아갈 여비가 없어 막노동을 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됐다. 사태가 이처럼 심각해지자 서울시가 단속에 나섰으나 모처럼 교류가 시작돼 고국을 찾은 교포들을 함부로 단속했다가 중국교포사회에 고국에 대한 인상만 나쁘게 만들고 자칫 반한감정까지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어 주춤하는 사이 교포노점상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됐다. 하는 수 없이 내무 법무 재무 보사부와 서울시 등 관계부처가 합동대책회의까지 열었으나 세관에서 더이상 한약을 들여오는 것을 막는다는 대책만을 세웠을 뿐 현재까지 들어와 서울도심을 차지하고 있는 교포 노점상들에 대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 돼버렸다. 지금까지는 서울시가 대우와 협의하여 노점을 펴고 있는 교포들의 한약을 모두 사들인다는 것이 대책의 모두인 실정이다. ▷통관현황◁ 88년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에만 해도 한 달 입국자 수가 두자리 수에 불과했던 중국교포는 이듬해인 89년 김포공항에만 8천9백7명이 들어와 88년의 4.3배에 달하고 있다. 관세청이 중국교포들이가지고 들어오는 한약재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과세통관을 하기 시작한 올 들어 10월말까지만 해도 지난해에 비해 갑절에 가까운 1만5천2백16명이 들어왔다. 중국교포들이 우리나라에 갖고 들어오는 한약은 대체로 30여 가지. 가장 흔하게 가져오는 우황청심환은 한 사람당 2백∼3백알까지 가져오며 녹용도 2㎏ 정도는 거의 모두 가져온다. 이외에도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는 편자환이며 반입량으로 볼 때 활락환 녹태고 삼편환 호골환 101발모제 강압환 등의 순이다. 올 들어 10월31일 현재까지 중국교포들이 세금을 물고 통관한 약재는 녹용 1천9백77㎏,청심환 81만4천1백10개,편자환 3만1천6백83개 등이며 감정가격은 29억여 원에 이르며 과세액만 해도 11억7천5백여 만원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한 사람당 세금없이 반입할 수 있는 면세통관량(우황청심환 1백50알,편자환 30개,녹용 1㎏)을 합치면 올해 들어서만 2백여 억원어치의 각종 약재를 들여온 셈이다. 이 금액은 교포 한 사람이 1백만원어치 이상의 한약재를 가지고 온다는 수치다. 최근에는 이같은한약재 반입 외에도 아편과 마약성분이 짙은 고가품의 약재,그림,삼베 등 반입하는 품목도 다양화되고 있어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중국교포들이 가져오고도 통관이 금지돼 현재 세관 보세창고에 쌓여 있는 한약만도 수십여 억원어치다. 김포공항의 한 당국자는 『정식으로 친지초청으로 온 교포는 총입국자의 5% 내외로 추산된다』고 말하고 『나머지는 모두 「위장친지」들을 동원,약장사를 하러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을 찾은 교포 한약상의 변 ○「중금속 보도」 이후 팔리지 않아 곤혹/오청자(54ㆍ심양시 거주) 서울에 사시던 시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장남(34)과 함께 지난 8월27일 심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급히 왔다. 도착해 보니 시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셔서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안타깝다. 83년 한국에 있는 친척과 연락이 되어 그동안 서신왕래만 해오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왕복 비행기삯과 체류비라도 마련하기 위해 이웃사람들의 권유로 한약과 수공예품을 사왔다. 한약은 약공장에서,수공예품은 시장에서 사왔다. 9월부터 지난 15일까지 이 동네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한약을 팔았는데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고 신문과 TV에서 「중국산 한약재에 수은 등 중금속이 들어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는 한약을 사갔던 사람들까지 물건을 갖고와 환불해달라고 요구해 곤혹을 치렀다. 친척들은 내가 한약을 팔려고 밖으로 나가려 하면 창피하다고 못 나가게 막고 있다. 그래서 친척이 아침밥을 먹고 직장과 학교 등에 나가고 난 뒤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한약을 팔러 나왔다가 친척들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돌아간다. 덕수궁으로 나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친척이 아직은 행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지만 신문에 이름과 사진이 보도되어 알게 될까 걱정이다. ○친척에 선물도 하고 여비도 보태려/심양 거주 교민(59) 한국에는 지난 9월에 홍콩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 50년 만의 귀국이었다. 일제 때 전주에서 살다가 일본인들에게 집을 빼앗겨 만주 봉천으로 가는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너무 오랜만에와서인지 고국산천도 많이 변해 있었다. 친척집에 선물도 하고 일부는 팔아서 여비에 보태 쓰려고 한약을 가져왔다. 녹용·우황청심환 등 한약재 5만원(한화 8백만원)어치를 사왔는데 김포공항에서 비싼 세금 때문에 친척들에게 선물은 못했다. 과세를 물면 물건을 가져올 수 있지만 워낙 비싸 엄두도 못내고 팔아서 여비가 될 만큼만 갖고 들어왔다. 게다가 TV와 신문에서 중국교포들이 가져오는 한약은 모두 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려 팔리지도 않는다. 다행히 며칠 전 한국정부에서 우리의 한약재를 사주겠다니 무엇보다 반갑다. 덕수궁 앞길을 지나다니는 시민들에게 이따금 불평을 듣기도 한다. 우리 때문에 길거리가 지저분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특히 나이들어서 뭣 때문에 고국까지 와 이같은 고생을 하느냐며 따질 때는 섭섭한 생각까지 든다. 집사람(60)과 같이 와 현재 여관에서 묵고 있다. 하루 여관비와 식비는 1만원이면 된다. 다음 달이면 돌아가야 하는데 정부에서 빨리 우리 물건을 사주었으면 좋겠다. ○유학경비 마련하려… 밤엔 악보 그려/변은숙(25ㆍ심양대학 음대 졸업) 일본에 유학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약을 갖고 왔다. 여기에 온 교포들 가운데 대부분이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벌려고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나는 중국에서도 발레단의 피아노 연주를 맡고 있기 때문에 음악공부를 더 깊이 하고 싶었다. 마침 경북 봉화가 고향인 부모가 이웃집에서 3만원(한화 5백만원)을 빌려 한약을 사주면서 한국에 가 팔아 일본유학경비로 쓰라고 해 갖고 왔다. 그러나 인천항에 도착하자마자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약에 대한 관세가 너무 비쌌다. 할수없이 절반 정도는 세관에 맡기고 절반만 찾아갖고 왔다. 서울에 먼저 와 있던 남동생(23ㆍ악사)이 용산구 이태원동에 계약금 2백만원에 월 20만원을 주기로 하고 얻은 조그만 방에 있다. 중국에서 부모가 하는 한국말을 알아듣긴 했으나 말하기는 서툴다. 한 달 동안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한국말을 익혀 지금은 어느 정도 통한다. 저녁 때는 동생의 주선으로 드럼연주단에 악보를 그려주고 1만∼3만원씩 벌고 있다. 첫날은 2만원,둘째날은 4만원어치를 팔았다. 한약이 잘 팔리지 않아 서툰 한글이지만 약명과 효용 등을 자세히 써서 내걸었다. 어떤 짓궂은 남자 손님들은 「남성정력에 좋음」이라고 써붙인 「남성 609」를 들고 효용을 실험해봤느냐고 자꾸 물어와 얼굴이 뜨겁기도 했다.
  • 남북언론의 「깊은 골」/황석현 북한 부장(데스크메모)

    「×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상쾌한 가을 아침에 또 글의 첫머리에 지저분한 속담을 인용하는 것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요즈음 북한이 남쪽 언론을 상대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얼핏 머리에 떠오른 것이 이 속담이다. 북한은 평양의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과 서울의 통일축구대회를 취재,보도한 우리 기자들의 태도와 기사내용에 대해 그동안 몇차례 불편한 심기를 노출해 왔다는 데 지난 23일과 24일에는 당 기관지 로동신문과 중앙방송을 통해 격렬한 비난공세를 퍼부었다. ○「겨 묻은 개」 나무라 중앙방송은 23일 「북한 선수단과 기자단이 통일축구를 위해 서울로 오던 날 판문점과 문산 사이에 수많은 탱크가 도열해 있었고 남쪽 요원들이 북한 선수단을 환영하려는 서울시민들을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은 이날 「남조선 당국이 통일축구대회를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KBS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의 사회체제와 당의 혁명역사를 악랄하게 중상ㆍ모독하는영화를 방영하게 했는가 하면 신문들에도 우리의 체제를 헐뜯는 기사를 내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24일에도 「민족적 화해와 통일에 역행하는 모략선전」이라는 논평기사에서 「남조선 언론의 행동은 의심할 바 없이 통일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불안을 조장시키며 북남대결 의식을 고취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평양의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재했던 남쪽 기자들은 『다시는 북쪽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북한의 이같은 신경질적인 반응은 평양회담을 취재하고 돌아온 우리 기자들이 일제히 썼던 「방북기」 혹은 「취재기」 때문인데 북한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그들의 주체사상을 헐뜯고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참을 수 없는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잣대로 남쪽 언론을 잰다면 그럴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시각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의 기능을 오해 지난 며칠간 각 신문에 연재된 방북기 혹은 취재기를 필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는데 대부분이 퍽 조심스런 태도로 가능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려고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북한의 획일적이고 통제된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논조는 눈에 띄었지만 그 체제를 노골적으로 헐뜯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흑백을 전도해가며 시비질을 했다」는 식의 반응은 언론에 대한 북한의 굴절된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입장과 그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당 간부들의 초조감이 이런꼴로 폭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갖게 한다. 방북기에서 북한의 주장대로 왜곡이나 편파보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언론의 다양성에 기초한 시각의 차이거나 실상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결과이지 고의적인 비방이라고 보는 것은 다원화 사회에서 언론이 갖는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북쪽이 요즈음 남쪽의 보도태도를 놓고 삿대질을 하고 있지만 그쪽에서는 남쪽을 있는 그대로 또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도하고 있는가. 남쪽은 북한체제를 비판은 하되 터무니없는 거짓을 늘어 놓거나 악의에 찬 비방은 하지 않는다. 냉전논리에 따른 비난도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다. 6ㆍ25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김일성에게 「주석」이라는 칭호까지 붙여주고 있는 게 오늘의 남쪽 언론이다. 그런데 북한은 어떤가. 신문이나 방송의 논평기사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노태우」라고 쓰고 부르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미제의 앞잡이」 「괴뢰」 「도당」이란 것이 반드시 앞뒤에 붙는다. 평양을 다녀온 기자들이 사실을 바탕으로 쓴 기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북쪽 체제를 헐뜯고 있다」고 비난하는 그들이 남쪽을 매도할 때는 기상천외의 거짓을 만들어 태연하게 써먹고 있다. 한 일간지 기자의 방북기에서도 나왔지만 북한의 중앙통신은 『86년 현재 남조선의 AIDS환자는 60만명이 넘었다. 서울은 AIDS의 소굴이다. 그래서 서민들은 악수도 하지 않는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보자. ○비판할 것은 비판 지난해 서울의 어느 주간지가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전망기사를 특집으로 꾸미면서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사진을 나란히 실은 적이 있었다. 당시 북한의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지금 서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존영이 신문매대에 등장했다. 신문매대 마다에는 위대한 수령을 흠모하는 서울시민들이 구름떼같이 모여 들어 눈물을 흘리면서 존영을 뵈옵고 있다』고 떠들어 댔다. 이 허무맹랑한 거짓을 하루에 한ㆍ두 차례씩 1주일간이나 반복,보도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북한의 보도태도가 본질적으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북한주민들은 신문과 방송을 철저히 믿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언론의 기능은 당과 정부의 도구로서 대중을 계도하고 사회조직을 통제하는 데 있다. 따라서 대중을 계도하고 사회조직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떤 거짓도 「애국적인 사업」으로 인정 받고 있다. 글 첫머리에 「×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을 인용했지만 남쪽 언론에는 아직도 겨가 묻어 있고 이것마저 털어버리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러면 남쪽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북쪽의 언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슴이 답답하지만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그것은 그쪽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로서는 통일이나 북한문제를 보도할 때 냉전적인 사고의 차원이 아니라 진실추구의 바탕에서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최근 사회일각에서는 북쪽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시각은 무조건 「냉전적」이요 「반통일적」이라고 매도하는 논리가 공감대를 얻고 있지만 이러한 논리야말로 「반통일적」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이 통일촉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비판할 것은 따끔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 북한축구팀 서울의 가을 만끽

    ◎임금님 거닐던 인정전 길선 양측 대표 서로 “먼저…”/“「평양방문기」 등 체제비판 용납 못해” 북 기자들 항의/김유순 대표,“올림픽 조형물에 내 국적 틀렸다” 지적 ▷호텔◁ ○…서울에서 첫밤을 보낸 통일축구 북측 선수단은 22일 상오 7시 예정대로 기상,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며 서울에서의 이틀째를 시작했다. 전날만 해도 서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등으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던 선수단은 21일 밤을 푹 자고 난 뒤 생기가 되살아난 듯 발랄한 모습들이었다. 특히 처음 서울에 온 어린 남녀 선수들은 서울에 대한 두려움으로 긴장된 모습들이었으나 21일 하루 숙소와 운동장 만찬장 등에서 서울사람들의 진면목을 본 탓인지 천진한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선수단은 7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구내에서 체조와 간단한 조깅으로 몸을 푼 뒤 곧 아침식사에 들어갔고 9시 정각 서울에서의 첫 관광지인 비원을 향해 떠났다. ○드라마 방영에 거센 항의 ○…북한선수단 일행이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21일 하오 1시50분과 9시30분두 차례에 걸쳐 KBS­TV에서 김일성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이 방영돼 북한측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해방 전후사를 다룬 이 드라마는 김일성이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는 권모술수가로 묘사된 데다 여성편력까지 다루었다. 북한측은 『손님을 불러놓고 의도적으로 이런 드라마를 방영한 것이 아니냐』며 『이런 분위기에서는 축구대회도 할 필요가 없으니 철수하겠다』고 항의해와 우리측이 이를 해명하기도. ○남자대표 비원 관광 취소 ○…북한선수단은 22일 상오 9시50분 서울 종로구 비원에 도착,이우용 관리소장(51)의 안내로 1시간10분 동안 비원 경내를 둘러보았다. 남자선수들을 제외한 이들은 비원에 도착한 뒤 비원 약사와 시설을 설명듣고 이형미 씨 등 여자안내원 4명의 안내로 인정전ㆍ희정당ㆍ선정전ㆍ대조전 등 궁궐을 살펴보며 고궁을 산책했다. 국악인 26명이 궁중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이들은 민가로서는 최대규모였던 99간짜리 연경당도 둘러보고 연못 부용지 부근에서 간단한 다과를들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남자선수들은 23일의 경기에 대비,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라며 당초 예정에 있던 비원 관광을 취소하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비원 관람◁ ○…북측 선수단은 이날 상오 9시 숙소인 워커힐호텔을 출발해 9시35분 창덕궁에 도착,이우용 관리소장(51)의 영접을 받았다. 북측 선수단은 이어 창덕궁 안내원인 이형미 양(26)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보았는데 김유순 단장은 시종 무표정한 얼굴을 지어 김형진 부단장이 오완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팔짱을 끼고 웃음띤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들의 문안을 받던 인정전 앞에 이르러 안내원 이형미 양이 『한가운데는 임금이 걷던 길이고 양 옆은 신하들이 도열하던 곳』이라며 『마음내키는 길로 걸어가십시오』라고 말하자 김유순 단장과 장충식 남북체육회담 우리측 수석대표는 서로 가운데 길을 양보하며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궁중음악 은은히 울려 ○…이날 임금의 연회장이었던 부용정 옆 영화당에는 국립국악원 단원 21명이 나와 궁중음악을 연주,전통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북측 선수단은 이 음악에 옛날 궁중에서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주하는 「유초신지곡」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흡족한 표정. ○…북한 여자팀 주장 임순봉(26)은 기자들이 이름을 물을 때마다 『림순봉입니다. 림수경과 같은 「림」이지요. 림수경이를 아세요』라고 되물어 가벼운 웃음을 사기도. 임양은 관람소감에 대해 『북에 있는 유적에 비해 텅빈 것 같다』며 『아무런 시설이 없어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대답. ○…북한 중앙통신 리충국 논설위원(56)은 남측의 한 스포츠전문지에 21일 자신의 발언이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왜곡,보도됐다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 그는 대한축구협회 권오성 총무부장이 『나와 동갑인데 왜 그리 늙어 보이느냐』는 질문에 『사회주의 물을 먹어서 그런 모양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것. 리충국 위원은 아무 뜻없이 농담 삼아 한 말인데 멋대로 해석,보도했다며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기도. ○…북한 여자팀 김금실 선수(19)는 한국을 7­0으로 꺾었던북경대회 남북한축구경기서 더 많은 골을 넣을 수도 있었으나 한국이 골 득실차에서라도 최하위를 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추가 골을 자제했다고 뒤늦게 실토. 김 선수는 『당시 한국의 전력이 출전팀 가운데 제일 약해보여 한 동포로서 도와주고 싶었다』면서 『더이상 추가 골을 넣지 않은 것은 역시 약팀인 홍콩과의 골 득실차에서 이겨 최하위를 면하도록 해주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 ▷오찬◁ ○…북측 선수단과 기자단 일행은 이날 상오 비원 관광을 마친 뒤 낮 12시 올림픽유스호스텔 19층 뷔페식당에서 우리측 선수단과 섞여 앉아 오찬을 들며 담소를 즐겼다. 관광을 생략한 채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북측 남자선수들은 이곳에서 본단과 합류했는데 북측 선수단은 전날 힐튼호텔 만찬장에서처럼 서로 안면이 있는 남측 선수들을 불러 자리를 같이한 뒤 양식과 한식ㆍ일식 등으로 짜여진 음식을 골고루 맛보면서 못다한 얘기꽃을 피웠다. 이들중 북측 단장인 국가체육위(NOC) 김유순 위원장과 김형진 부위원장 등 임원들은 남측의 장충식 대한올림픽위 부위원장,오완건 축구협회 부회장 등과 함께 전망좋은 좌석으로 안내돼 눈앞에 전개된 한강과 공원의 모습을 화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하오 1시께 오찬을 마친 남북 선수단은 다음 일정인 올림픽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공원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산책을 즐겼다. ○파키스탄으로 오해 ▷올림픽공원◁ ○…북측 선수단중 임원진과 보도진 18명은 22일 올림픽유스호스텔에서 점심을 마친 후 하오 1시15분부터 45분 가량 올림픽공원을 둘러보았다. 김유순 IOC위원은 공원을 시찰하다 올림픽기념 조형물중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명단을 유심히 살펴본 후 자신의 국적이 잘못 새겨진 것을 보고 시정해줄 것을 요구. 영어로 「YU SUN KIM」이라고 표기된 옆에 국적란이 파키스탄을 가리키는 「PAK」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 김 위원장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내가 파키스탄 사람인 줄 알겠구만』이라고 뼈있는 농담을 했으며 이 오기를 첫 발견한 김형진 북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은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고 북한을 지칭하는 「PRK」로 고쳐달라고 주문. ○남북 기자,가벼운 실랑이 ○…21일 하오 11시40분 호텔 앞에서 북한 노동신문 이길성 부국장과 MBC 문진호 기자(40)가 5분여 동안 몸싸움을 벌여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 이 부국장은 이날 서울 야경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뉴스제작을 위해 마이크를 들이댄 문 기자에게 『한국기자는 버릇이 없고 무례하다』고 말한 것이 발단. 문 기자가 이에 대해 『북경아시안게임 때 남북체육장관회담 직후 이 부국장이 정동성 체육부 장관에게 이야기를 하며 어깨를 친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이 부국장이 『그 말의 저의가 무엇이냐』며 문 기자를 밀치고 실랑이를 벌이다 마이크와 녹화테이프를 빼앗아 숙소로 들어갔다. 이 부국장은 22일 상오 문 기자에게 마이크를 돌려주며 『미안하다』며 화해를 요청. ○…이날 저녁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북측 기자들은 우리측 기자들을 상대로 『언론이 남북 대결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며 우리측 언론보도를 집중 성토. 북측 기자들은 각 신문사 기자들을차례로 만나 남북통일축구에 대한 보도와 최근 남북고위급회담에 참가하고 돌아온 기자들이 평양방문기를 쓰면서 체제비판을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항의를 하기도. 로동신문의 리길성 기자는 『우리는 유일사상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기 때문에 체제에 대한 비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서울방문 기간중에 보인 남측 언론태도는 꼭 짚고넘어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당초 우리측 기자들이 북측 기자들을 집으로 초청하려던 계획은 무산.
  • “통일길 엽시다”… 남과 북 한목소리/총리회담 첫날 이모저모

    ◎강총리,“자주 만나면 끊겼던 통로 복구”/만찬 대기실 요담 15분… 독대는 불발/연총리,“회담 많이 했지만 이번엔 유망” 북에서 온 「손님」들은 4일 서울 하늘아래서 체류 첫날을 보내며 남과 북은 하나라는 명제를 새삼 확인했다. 연형묵총리등 북한대표단 7명과 수행원 33명,기자단 50명 등 일행 90명은 이날 상오 판문점을 통과,승용차 10대와 버스 3대에 나눠타고 임진각을 떠나 통일로∼구파발∼불광동∼서대문로터리∼마포대교∼강변북로∼반포대교∼올림픽대로∼영동대로를 거쳐 회담장 겸 숙소인 인터콘티넬탈호텔에 도착,여장을 풂으로써 온겨레와 세계의 이목은 서울로 쏠리고 있다. 북한 대표단은 이날 저녁 강영훈국무총리가 힐튼호텔에서 베푼 만찬에 참석,우리측 각계 초청인사들과 만나 한핏줄의 뜨거운 정을 느꼈다. 북한대표들단들은 만찬이 끝난후 숙소 근처 무역전시관에서 문화영화 「한국의 전통문화유산」을 관람하며 문화적 동질감에 젖기도 했다. ▷환영만찬◁ ○…이날 저녁 서울 힐튼호텔에서 강총리가 연총리 등 북측 일행을 위해 베푼 환영만찬은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예정시간을 30여분 넘겨 2시간 가까이 진행. 강총리는 이날 만찬사에서 『잡초를 갈라 길을 내듯,길없는 길을 오시느라 애쓰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전제,『만나고 또 만나노라면 잡초 우거지고 비바람에 끊겼던 통로라도 반드시 복구될 수 있을 것』이라며 대화의 지속을 강조. 이어 연총리는 답사에서 『우리 대표단 일행중에는 이전에 서울에 와본 사람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초행길』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러나 우리 일행에게는 서울로 오는 길이 결코 생소한 감을 주지 않았으며 만나는 동포형제들마다 낯선 감도 없었다』고 말하고 그 이유는 동포의 정때문이라고 언급. 강총리와 연총리는 각각 만찬사와 답사를 끝낸 뒤 포도주(마주앙)로 상대편의 건승과 행운을 비는 건배를 교환. 연총리등 북측 일행은 이날 저녁 7시5분쯤 힐튼호텔에 도착,미리 와 기다리던 강총리의 영접을 받았으며 두 총리는 칵테일장소가 정리되기 전 만찬장소인 그랜드볼룸 옆의 대기실(오크룸)에서 15분여간 요담. 우리측은 이날 만찬전 요담이 두총리의 단독요담으로 이루어져 심도있는 얘기가 오가길 원했으나 림춘길ㆍ최봉춘씨 등 북측 수행원들이 『우리도 들어가야겠다』고 문을 밀고 들어가는 바람에 총리간 단독회동은 무산. 북한 대표단들은 만찬이 끝난 뒤 홍성철통일원장관,정호근합참의장,김종휘 대통령외교안보보좌관 등 우리측 대표와 함께 밤 9시50분부터 한국종합전시장(K0EX) 4층 국제회의실에서 1시간가량 문화영화를 관람. 「우리의 보배」라는 이 영화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의 우리 역사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북측 기자단대표 김천일은 관람이 끝난 뒤 『이북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고 촌평하며 다소 불쾌한 표정. ▷숙소환담◁ ○…연총리 일행을 인터콘티넨탈호텔 현관에서 영접한 강총리는 우리측 대표단과 함께 북측 대표단을 연총리 숙소인 3229호실로 안내한 뒤 연총리 숙소에 마련된 접견실에서 10분동안 환담. 남북총리는 『악수좀 나눠주시지요』라는 사진기자들의 요구가 있자 『또』라는 말을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연발하며자리에서 일어나 접견실안은 한때 웃음. 남북 보도진들에 대한 포즈를 취한 뒤 홍성철통일원장관이 『우리측 대표들은 판문점에서 모두 소개해 드렸으니 북측 대표단을 강총리께 소개해 달라』고 하자 연총리는 이름없이 직책만 호칭하며 북측 대표단을 일일이 소개. 인사가 끝나자 연총리는 『TV에서 여러번 뵌 것 같다』고 강총리에게 말을 건넸고 이에대해 강총리는 『연총리와는 전생에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우리 모두 비슷한 시기(88년말)에 총리가 됐고 총리가 된 직후 북측에서 부총리회담을 요구해 왔을 때 우리측에서 총리회담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하자 이를 수락하지 않았느냐』고 응답. ○“우린 2년간 편지교환” 강총리의 전생 연분론에 연총리는 『동감이다』고 짤막하게 답한 뒤 『그러다 강총리와는 2년여동안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느냐』고 해 양측 대표단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강총리는 『쓸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썼다』고 응수. 연총리는 이어 『이런 큰 회담을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지요』라고 회담준비를 맡은 우리측의노고를 위로했고 강총리는 『피차 마찬가지지요. 승강기내에서 얘기드렸지만 지금까지 비가 내리다 연총리께서 도착하니 날씨가 쾌청해지는 걸로 보아 연총리가 복이 많은 모양』이라며 『날씨도 쾌청하니 회담도 잘 될 것』이라고 화제를 회담쪽으로 유도. 회담얘기가 나오자 연총리는 『내가 복을 갖고 서울에 왔다니 기쁘다』면서 『남북회담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그렇게 잘 되지는 못했다』고 지적한 뒤 『그러나 이번 회담 전망은 유망할 것』이라며 역시 관망적 견해를 피력. ▷호텔도착◁ ○…북측 대표단 일행은 이날 낮 12시2분 숙소 겸 회담장인 인터콘티넬탈호텔에 도착,로비에서 영접차 기다리고 있던 강영훈국무총리와 반갑게 인사. 두 총리는 이번 회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서인지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으며 강총리가 악수를 건네며 『안녕하십니까』하고 말하자 연총리가 『반갑습니다』라며 화답. ○…이날 북측 대표단과 수행원들은 인터콘티넬탈호텔에 도착한 뒤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숙소에 머물러 있었으나 북측 보도진들은 호텔 2층에 마련된 북한 기자실을 둘러본 뒤 우리측 기자실로 몰려와 안병수 북한대표단대변인의 서울 도착성명이 있으니 취재를 하겠다고 준비. ○북기자,회담장 답사 북한 보도진들은 그러나 우리측 기자들이 『소감이 어떠냐』 『취재계획은』 등 갖가지 질문을 쏟아붓자 몇번은 대답하다가 일부 북한보도진들이 『기자가 기자를 취재하느냐』 『나가자』며 모두 밖으로 나가 한때 어색한 분위기. 그러나 이들은 20여분후 다시 우리측 기자실로 들어왔고 장내정리가 어느 정도 된 뒤 안 북한대표단대변인이 도착성명 낭독을 시작. 안대변인은 도착성명에서 『뜻이 같으면 길도 열린다는 것처럼 통일에 뜻을 둔 우리는 평양과 서울의 길을 열었다』며 상당히 우호적 내용의 입장을 밝혔으나 성명말미에 문익환ㆍ임수경씨 등 방북건으로 구속당한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을 방문하고 싶다는 엉뚱한 뜻을 피력해 북측의 저의를 드러내기도. ○프레스센터 ○우리측 차석대표인 홍성철통일원장관은 이날 하오 2시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기자 회견을 갖고 이번회담 우리측대변인으로 첫 브리핑을 실시. 홍장관은 먼저 연정무원총리등 북한대표단의 판문점 영접과 관련,『본인을 비롯한 우리측 대표단 6명(강영훈국무총리를 제외한 전원)이 판문점에 나가 북한측 대표단을 따뜻하게 맞이했다』면서 『우리 대표단은 북한측 대표단과 함께 승용차에 동승,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울에 도착했다』고 아침 상황을 보고. 홍장관은 이어 『북한측 대표단이 회담장 겸 숙소인 인터콘티넨탈호텔로 오는 도로상에서 약간의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했다』고 운을 뗀 뒤 『마포에서 강변대교입구 사이의 지점에서 비행사차량이 대표단차량에 끼여드는 바람에 접촉사고가 일어났다』고 사고경위를 소개하고 『북한측 대표단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피력 홍장관은 특히 이 사고와 관련,『강총리가 우리측을 대표해서 연총리를 직접 방문,사과의 뜻을 전달할 예정이었으나 연총리가 『잘하려고 하다가 그런 사고가 난 만큼 굳이 올라오실 필요가 있느냐』고 사양해 강총리의 직접방문은 취소됐다』면서 『오늘 만찬에서 반드시 이같은 사과의 뜻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소개. ○문의ㆍ격려전화 빗발 ○…북한대표단의 숙소인 인터콘티넨탈호텔에는 4일 오후부터 이산가족의 안부를 묻는 문의전화와 회담에 대한 격려전화가 쇄도. 일반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밤늦게까지도 시민들은 『회담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격려와 문의전화를 계속 걸어 왔는데 이날 야간당직지배인 김광철씨는 『주로 실향민들이 고향의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북측 대표들을 통해 안부를 전할 방법이 없느냐고 묻는 전화가 많았다』고 소개.
  • 요르단서 서울까지… 본사 육철수특파원 교민철수 동승기

    ◎“사지 벗어났다”… KAL기 이륙하자 환호/암만공항 대합실 출국자로 북새통/“총소리에 뜬 눈 밤샘”전쟁악몽 회상/일부 교민,“피땀 흘려 모은 재산 잃었다”한숨 쿠웨이트와 이라크 교민 3백21명을 태운 대한항공 특별기 보잉747 점보기가 21일 상오 4시23분(한국시간) 암만국제공항활주로를 이륙하자 한국교민들은 마침내 사지에서 벗어난다는 안도로 환호를 지르며 옆사람의 손을 잡고 서울의 가족ㆍ친지들을 만날 기쁨에 들떴다. 1천8백여㎞의 사막길을 횡단,전쟁터를 빠져나온 교민들은 대부분 암만국제공항부근 호텔과 공항대합실등에서 3∼4일간 초조하게 특별기도착을 기다리며 불안에 떨었으나 무사히 출국수속을 마치고 태극마크가 선명한 대한항공 특별기에 탑승하자 「한국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은 듯 안도감에 젖었다. 교민들은 『전쟁중인 사막에서 손가락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고국에 살아 돌아가니 기쁘기 한량없다』고 입을 모으고 『쿠웨이트 등에 버리고 온 재산이야 다시 벌면 되지 않느냐』고 서로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요르단 대피교민 귀국을 위한 대한항공 특별전세기 제1편이 20일 상오 7시24분 김포공항을 이륙,바레인을 거쳐 암만의 퀸 알리아공항에 도착한 것은 14시간만인 하오 9시28분(현지시간 하오 3시28분)이었다. 공항대합실에는 한국교민을 비롯,쿠웨이트와 이라크에서 빠져나온 아시아ㆍ아랍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부모를 따라 이곳에 온 어린이들은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공항대합실을 이리뛰고 저리뛰며 마냥 즐거워했다. 대림산업 쿠웨이트 지점장 김진서씨(33)는 『전쟁이 일어나던 날 새벽내내 대포와 총소리에 놀라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에 공관에서 「전쟁이 났으니 지하실로 대피하라」는 전화연락을 받고서야 일이 터진 줄 알았다』면서 당시의 급박하고 불안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김씨가 살고 있던 안달로스의 옆동네 리카이에는 쿠웨이트 육군본부가 있었다. 2,3일이 지나자 상가는 모두 문을 닫고 국제전화가 불통됐다. 식량부족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라크 당국에서 주는 배급은 가족당 하루 쌀 1∼2㎏,담배 1갑정도였고 식수는 아예 없었다. 시내에는 온통 이라크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일반인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라크군인들은 필리핀이나 인도계 여성들에는 폭행을 하기도 했으나 한국인에 대해서는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김씨 가족은 17일 이웃교민의 도움으로 「시보레」자동차를 타고 피난행렬에 낄 수 있었다. 쿠웨이트시에서 이라크국경쪽으로 통하는 포스링로드와 식스링로드는 유럽ㆍ아시아 아랍인 등 피난민의 차량행렬로 가득 메워졌다. 국경부근 검문소에 이르렀을 때 한국교민들은 다행히 철저한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이라크 군인들은 한국인을 보면 『꼬레』를 연발하며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까지 흔들어 줄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식량과 식수는 다행히 떠날 때 충분히 준비해 어려움이 없었으나 열이 나고 설사를 해 애를 먹었다. 교민들은 한국인들이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근로자들이 성실하게 일해와 그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준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라크에서 온 김정원씨(35ㆍ여)는 전쟁당일 바그다드시는 매우 조용했다고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언론통제가 심해 외국에서 보도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의 6백여 교민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이라크에 대한 응징조치가 임박했다는 소문에 귀국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의 한국교민들은 건설회사를 통해 식량을 공급받아 사정이 괜찮았으나 현지인들은 생필품수준이 쿠웨이트 보다 오히려 못하다는 것.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이처럼 한국교민들의 생명에는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이역만리 타국까지와 애써 가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특히 쿠웨이트에서 개인사업을 했던 20여 교민들은 참담한 모습이었다. 좌석에 앉아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창쪽을 바라보는 이홍식씨(60). 그는 11년전부터 쿠웨이트에서 개인주택공사를 만들어 사업을 벌이면서 모은 5억원 재산을 몽땅 잃었다고 했다.
  • 오늘 아침 영하 14도/26일까지 강추위 계속될듯

    후기대 입학시험날인 22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지역에서는 전날 내린 눈과 기온의 급강하로 대부분의 길이 빙판을 이뤄 극심한 교통혼잡상을 보이며 고사장으로 가는 수험생들과 출근길의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특히 서울 등 수도권 전철은 빙판길을 피해 한꺼번에 몰린 승객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는 아비규환을 이룬데다 경인선 상행선이 단전으로 40여분동안 운행이 중단되고 배차간격이 늦어지는 등의 사고까지 겹쳐 곳곳에서 지각사태를 빚었다. 또 한꺼번에 내린 폭설로 제설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해 길마다 차량들이 거북이 걸음을 해 서울의 경우 시속 10∼20㎞,경인지역은 20∼30㎞,서울∼천안 및 동서울∼서청주간 고속도로는 40∼50㎞의 느린 속도로 운행됐다. 이날 교통사고도 전국에서 5백20건이나 발생,27명이 숨지고 6백7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날씨◁ 21일 상오부터 전국적으로 눈이 내린뒤 기온이 크게 떨어져 22일새벽 서울지방이 영하12.0도를 기록하는 등 올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보였다. 중앙기상대는 『기온은 23일에 더욱 떨어져서울이 영하14.0도,중부 내륙산간지방은 영하18도까지 내려가는 등 제주를 제외한 전국이 영하권을 맴돌겠다』고 예보했다. 기상대는 또 이번 추위가 24일을 고비로 차차 풀리겠지만 26일까지는 영하10도를 맴도는 추위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