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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예고
    202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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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무회/봄맞이 정기공연/내일·모레 서울 문예회관서

    ◎무용가 2인 창작극 선보여/무용예술상 시상식도 함계 창무회가 정기공연겸 제1회 무용예술상 시상식을 오는 15·16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개최한다. 이번 정기공연에선 지난 86년부터 창무회에서 기량을 닦아온 중견단원 2명의 작품을 선보이고 올해 처음 제정 실시되는 무용예술상 시상식에선 작품·안무·무용가상등 3개 부문에 걸쳐 시상이 있을 예정이다. 15일부터 이틀간(15일 하오7시,16일 하오4시·7시) 정기공연무대에 오를 작품은 김은희의 「설」과 이미영의 「족두리」. 「하얀애인」(90년 창무큰춤판)「정령의 오후」(91년 제1회 신인안무가발표회)「달팽이」(92년 바탕 여름기획공연)「길」(92년 젊은안무가시리즈)등의 안무경력이 있는 김은희의 「설」은 차갑고 따스함,가볍고 무거움,형체의 유무등 다양한 대비적인 이미지를 가진 눈(설)을 소재로 택해 눈처럼 깨끗한 삶의 모습을 3개의 장으로 나눠 표현한 작품이다. 눈내리는 날의 풍경과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을 통해 눈의 정화된 모습과 그같은 삶을 추구하는 고귀한 노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함께 선보이는 이미영(90년 창무큰춤판 「안개나라」,91년 제1회 신인안무가발표회 「회색으로 온 봄」,93년 창무레퍼토리페스티벌 「안개나라」등 안무)의 「족두리」는 전통혼례에 쓰이는 족두리를 여자의 삶에대한 상징물로 간주,혼례의식을 치르는 각시가 미리 짚어보는 통과의례로 여성의 삶을 표현한 작품.「혼례마당」「터고름」「살고지고」등으로 나눠 혼인 출산 기다림 죽음등 여성의 운명을 전통적인 놀이와 제의성을 담아 풀어내는 흐름이다. 한편 창무회가 지난 92년 개관한 창무예술원이 발행하는 춤전문지 「무용예술」의 발행 출판사인 무용예술사가 제정,15일 하오7시 처음으로 시상하는 무용예술상에는 ▲올해의 작품상에 「군자무」(서울예고 무용과장 최현안무) ▲올해의 안무가상에 정귀인(부산예술대 부교수) ▲올해의 무용가상에 김희진씨(덕원예고 강사)가 각각 수상자(작)로 선정돼 상을 받게 됐다.
  • 고교 주입식·암기교육에 쐐기/94전기대입 결산

    ◎입시 자율화… 학습방법 전환 계기로/복수지원 따른 문제점 보완해야 □새대입 5대 특징 과다지원·미달사태 양극화 중하위권대 무더기 미등록 과학고·외국어고 부상뚜렷 재수생 합격율 현저히 감소 본고사 논술시험 당락 좌우 서울대와 성균관대가 22일 합격자를 발표함으로써 1백12개 전기대학의 94학년도 입시일정이 모두 마무리됐다. 처음 시행된 대학수학능력시험과 14년만에 부활된 본고사·복수지원 등 새로운 입시제도아래서 처음 실시된 이번 입시에서는 ▲학교·학과에 따른 과다지원과 과소 지원의 양극화 현상 ▲중하위권대학의 합격자 미등록사태 ▲과학고와 외국어고 등의 특수학교 돌풍 ▲재수생의 합격률 감소 ▲본고사 논술 충격등의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우선 올해 입시에서는 복수지원의 결과로 경쟁률이 최고 1백50대1에 이르는 학과가 있는가 하면 이화여대의 25개 학과가 미달되는 등 지원편차가 극심했다. 또한 복수지원·이중합격에 따라 합격자 등록률이 홍익대 37%,동덕여대 65%에 그치는 등 중하위권대학에서 미등록사태가 속출,대학마다 결원보충에 애로를 겪고 있다. 이밖에 명문대에서는 특수학교 돌풍이 워낙 강하게 일어 서울대의 경우 대원외국어고 1백88명,서울과학고 1백32명,서울예고 97명이 합격한 것을 비롯,연세대·고려대·포항공대에서도 이들 고교 졸업생들이 대거 합격해 관심을 끌었다. 이번 입시에서는 몇해째 계속돼온 재수생 감소 추세가 더욱 두드러져 재수생 합격자비율이 서울대는 지난해 35.3%에서 올해 31.6%로,연세대는 38%에서 27%로,고려대는 31%에서 24%로 각각 줄어들었다. 아울러 주요대학 본고사에서 입시당락의 「복병」으로 등장한 논술시험은 일선고교와 학생들이 학습방법을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85년부터 6년의 준비과정과 3년의 확정예고기간 등 9년의 오랜 기간을 거쳐 처음 시행된 새 대입제도는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의 새로운 출제 패턴으로 주입식·암기교육에 종지부를 찍고 일선고교가 수업방식을 새롭게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새 대입제도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어앞으로 상당한 보완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새 대입제도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는 ▲고교수업방향을 종합적 사고능력을 높이는 데로 이끌었고 ▲입시완전자율화의 예비단계로서 각 대학이 특성있는 입시관리를 할 기회를 주었으며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가 상호보완관계를 이루어 수학능력 적격자를 선발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반면에 비판적 견해로는 ▲제도의 복잡성으로 인해 수험생과 일선고교의 괴로움이 많았고 ▲복수지원방식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혼란상으로 이어졌으며 ▲과다지원과 과소지원의 양극화 현상이 빚어진데다 ▲일부대학의 미등록 사태를 불러일으켰고 ▲정원미달학과에서 수학능력 부적격자로 분류돼 탈락한 수험생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
  • 서울대/서울과학고 132명 전원합격/대원외국어고 188명 최다

    ◎서울예고도 97명 입학 영광/재수생·여학생 감소… 서울출신이 44%/평균합격선 1천점 만점에 인문 8백40·자연 7백90점 94학년도 서울대입시에서 학과별 합격선이 1천점만점을 기준으로 인문계는 1백점,자연계는 2백점선까지 큰 편차가 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자연계열합격자 예상평균점은 7백90점으로 인문계의 8백40점에 비해 50점정도 낮은 것으로 드러나 본고사(4백점만점)과목중 배점이 높은 수학2(1백50점)가 상대적으로 어렵게 출제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번 입시에서는 수학능력시험보다는 본고사점수가 당락을 좌우했으며 특수고출신과 재학생들의 강세 속에 재수생과 여학생들이 퇴조를 보인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합격생들의 평균점수는 1천점 만점에 인문계는 8백40점,자연계는 7백90점이었다. 22일 서울대가 발표한 94학년도 신입생합격자사정결과 8백점이상을 받은 인원은 전체합격자 4천9백2명의 69%인 3천3백95명에 이르렀다. 계열별로 보면 인문계는 합격자 1천4백35명 가운데 93.9%인 1천3백48명,자연계는 합격자 2천7백5명가운데 52.2%인 1천4백13명이 8백점을 넘어선 것으로 밝혀졌다. 8백점이상을 받고도 떨어진 수험생은 인문계 6백94명,자연계 17명 등 모두 8백78명이었다. 주요학과의 합격선은 내신1등급에 수능성적 1백75점을 기준으로 인문계 법학과 8백45점,정치·경제·외교·영문학과 8백40점,경영·국제경제·사회학과 8백30점대다.또 자연계는 전기전자제어공학군·의예과 8백30점,기계공·산업공·치의예·미생물학과 8백20점,물리·컴퓨터공학과 8백15점대인 것으로 분석됐다. 재학생과 재수생의 합격자분포는 재학생이 67.9%인 3천3백29명이었고 재수생은 31.6%인 1천5백48명,검정고시출신은 0.51%인 25명으로 나타나 재수생합격자는 90학년도 45.8%에 이어 92학년도 41.7%,지난해 35.3% 등 5년연속 감소추세를 보였다. 성별로는 남학생이 78.3%(3천8백37명),여학생이 21.7%(1천65명)로 나타나 여학생비율은 지난해의 23.2%에 비해 1·5%포인트가 줄어들었다. 출신지역별로는 서울시내 고교출신이 지난해보다 다소 늘어난 2천1백89명으로 44.7%를 차지했고 광주 3백68명,경남 3백44명,부산 3백28명,경기 2백42명,전북 2백28명,대구 2백21명 순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분포를 보였다. 1명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고교는 모두 5백49개교이고 이 가운데 50명이상 합격자를 낸 학교는 대원외국어고가 특례입학자 2명을 포함해 1백88명,서울과학고 1백32명,서울예고 97명 등 8개교로 92학년도 3개교,지난해 6개교에 이어 해가 지날수록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서울과학고는 이번 입시에서 1백%의 합격률을 기록했고 대원외국어고도 2백50명지원에 1백88명이 합격하는등 대부분이 높은 합격률을 보였다. 이번 입시에서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 지원,수석합격한 뒤 서울대 법학과를 지원한 최지석군(19·서울 잠실고졸)이 총점1천점만점에 9백31.8점을 얻어 인문계 수석합격했고 자연계는 공대 전기·전자·제어공학군을 지원한 최지환군(19·서울 과학고3)이 9백36.9점으로 수석을 차지했다. 최고령합격자는 미술대학 서양학과를 지원한 안광준씨(35·춘천고졸)이며 5쌍의 쌍둥이합격자가 나왔고 포항공대에 이미 합격한 53명의 학생이 이번 서울대입시에도 합격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대는 이번 입시에서 음대의 실기시험 성적미달자 3명을 탈락시켜 최종합격자는 당초 모집정원보다 3명 줄어든 4천9백2명으로 결정되었다.
  • 한국발레 축제 오늘 “팡파르”

    ◎국립중앙극장 「레이몬다」 「가팍」 등 손봬 한국발레협회가 주최하는 제13회 한국발레페스티벌이 4일 하오 국립중앙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하오4시와 7시에 1,2부로 나뉘어 진행되는 이번 발레축제행사에는 김민희(한양대),조숙자(부산대),김화례(경희대),조승미(한양대),이득효(계원예고),김정수(단국대),손정자(우석대),안윤희(서울예고),서미숙(숙명여대),손윤숙(전북대),김경희(성균관대),서정자교수(중앙대)등 모두 12명의 중견 무용인이 안무·재구성한 작품이 소속학교 학생들에 의해 선보인다. 참가작품은 1898년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된 3막물의 발레 「레이몬다」(김민희)를 비롯,「잠자는 숲속의 미녀」중 「요정 여섯명의 춤」(조숙자),러시아전통민속춤과 발레의 테크닉을 겸한 「가팍」(조승미),삽화적인 이야기를 록뮤직을 통해 표현한 재즈발레「에피소드」(김정수)등이다. 이밖에도 교향악적 군무로 유명한 「라 바야데르」(안윤희),낭만주의 발레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4인무 「파드 카트르」(김화례)등 주옥같은작품이 공연된다.
  • 성기선/장윤성/지휘자 데뷔 첫 국내무대

    ◎독·미 등서 체계적 지휘자 수업/“탄탄한 실력다져 성공 자신감” 두사람의 겁없는 신예지휘자가 국내음악계에 선을 보인다. 9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신진지휘자데뷔음악회에 나설 장윤성씨(30)와 성기선씨(25)가 그들. 두 젊은이는 『성공하기 위해 무대에 선다.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도 두렵지 않다』고 외치는 자신만만함까지 보인다. 이들의 이런 자신감은 물론 국제무대에서 다져진 탄탄한 실력에서 오는 것.서울예고와 서울대를 다닌 이들은 박은성씨에게 배우며 아르스챔버오케스트라를 통해 일찍이 대지휘자로의 꿈을 키웠다.이어 장윤성씨는 빈국립음대로,성기선씨는 줄리어드로 각각 건너갔다. 성기선씨는 91년12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데 브랑코지휘자콩쿠르에 최연소로 참가해 3등을 차지,포르투갈의 교향악단을 3차례 지휘하게 됐다.장윤성씨는 지난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1회 프로코피에프지휘자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해 레닌그라드필하모닉을 지휘했고 키로프오페라에도 진출한다. 이들은 『국내 지휘계의 앞날은 매우 희망적』이라고 입을 모았다.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체계적인 지휘공부를 하는 한국젊은이가 줄잡아 40명은 된다는 것이다.오히려 이들이 국내무대에 서는 때가 되면 지휘자 과잉이 우려될 지경이라고 했다. 장윤성씨는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고 했다.그것은 음악계가 지휘자 문제를 걱정하기에 앞서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기선씨도 『지휘는 혼자서 배울수 없는 분야라는 것을 국내 음악계가 좀 더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성공적인 연주회는 고사하고라도 실패하려고 해도 실패할 기회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서 열리는 이번 연주회에서 장윤성씨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1번」,성기선씨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지휘할 예정.이들은 『연주회 소개는 적어도 좋으니 잘했든 못했든 연주 자체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실어달라』고 당당히 주문했다.연주문의는 738­3082.
  •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씨(이세기의 인물탐구:31)

    ◎독자적 음악어법·「긴장의 선율」 일품/화려한 경험·탁월한 직관으로 곡핵심 용해/“정상의 기량·풍부한 감성” 연주로 청중 매료/13년간 「바로크 합주단」 이끌어… “노력이 최고덕목” 삶 일관 칼라일의 말처럼 「음악은 천사의 스피치」,만일 자기자신 안에 아무런 음악적 감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마도 영원히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나기같은 박수를 받으며 김민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활을 움직이기 이전의 숨막힐 듯한 정적까지도 그것은 이미 「절묘한 무음의 음악」이다.피치카토 스타카토 트레몰로로 번뜩이는 자유분방한 테크닉과 모든 음악적 패시지는 청중을 무리없이 곡의 핵심속에 침투시킨다.특히 스마트한 론도의 테마를 제시하면서 코다의 영광으로 소연되는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협주곡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청중은 가슴죄는 초조감마저 느껴야 한다.바로 이 싱싱한 긴장감이 김민연주의 특징이며 음악적 능력이다. ○난해한 음악에 집착 그의 직관력은 음악적 형태를 순식간에 포착하여 작곡의 모티브에 유연하게 밀착하는 곡해석으로 유명하다.난해하다고 지적되는 부분을 쉽게 소화하면서 작곡자가 의도하는 비밀을 보석처럼 캐내고 다듬어낸다.그러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테크닉은 그것이 아무리 「하이페츠 테크닉」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외면한 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랜 연주경험을 통해 「자기 음악을 위한 마음의 환경을 잘 가꾸고 있는 연주가」이며 또는 「음악의 모든 프레이즈(구)들이 음악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호흡속에서 상호의존적으로,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계획에 의해 짜여진 노래이자 노골적인 계획에 의해서 불려지는 노래가 아닌 불가사의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이만한 연주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하고 자랑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한 음악전문지가 기획한 「한국의 명연주가 집중연구」에 음악평론가 이강숙씨가 김민을 추천하면서 쓴 글이다.한상우씨도 「진지하고 확연한 음악적 틀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과 음악어법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특히 김민이 집착하는 브리튼이나프로코피예프,슈니트케와 츠빌리히등 현대음악이 갖는 난해성을 「활력있는 테크닉의 조화를 통해 긴장감과 함께 리듬을 확대시켜 강한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과연 그에게서 긴장감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그에게서 음악이 사라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확실한 가능성이 돋보이는 유망주」로 성장한 케이스다.본격적으로 바이올린수업을 받던 서울예고시절부터 첼로 정명화와 함께 예고실내악단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아직 고교2학년때 서울대음대가 주최하는 전국고교생 음악경연대회에서 선배·동료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1등,대학에 들어가자 바로 국립교향악단(현KBS교향악단)에 입단,65년 첼리스트 전봉초씨가 창단한 바로크합주단 부악장등 문자그대로 음악의 탄탄대로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시련의 독유학 시절 그러나 그가 유학한 독일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파란과 시련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다.예술가로서의 첫 갈등과 회의속에서 그는 「이제 나는 모든 것이 끝났는가」라는 좌절감에 허우적거렸다.이제까지 알고 있던 자신의 모습은 엄청난 허상이었으며 그런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소스라칠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국립음악원에서 만난 빌프리트 한케교수는 바흐 바이올린곡을 첫과제로 내주었다.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심오한 환상과 고고한 기품,음악의 모든 정교한 기법을 담아야 하는 이 절후의 명작은 고국연주때 「풍부한 음악적 감성」으로 호평받았고 그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품의 하나였다. 그러나 한케교수는 1악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연습해올 것을 명령했다.1주일후 다시 교수 앞에 섰으나 이번엔 『이곡을 연주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교수의 이말은 그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았다.여기에 일본인 학생과 비교되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파른 위기의식을 느꼈다.여기서 도망친다면 영영 그만이다.자존심을 천재로 알던 그로서는 이때의 모욕의 충격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서울예고시절 오케스트라연습에 늦었다는 이유로 당시지도교수이던 이재헌씨가 「주의」했을 뿐인데도 그 길로 연습실을 빠져나가 연주회에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었다.관현악 대신 쳄버오케스트라로 편성하여 바이올린의 비중이 어느 때보다 컸으나 교수는 김민을 나무라지 못했다.건드리면 옥죄는 식물처럼 선병질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끝내 「크리스탈 유리잔 다루듯」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그때 내가 크게 꾸짖었다면 오늘의 김민의 대성은 없었을 것이다.자존심만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할일을 투철하게 해내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런 김민이 독일에서 당한 모욕은 일생일대 대사건일 수밖에 없었다.6개월 만에 바흐 통과후에도 불가사의한 인내심으로 그는 2년간 한케교수 밑에 머물렀다.그리고 한케교수의 손꼽히는 제자로 인정받게 되자 미련없이 그로부터 떠나버렸다. ○세계30국 순회 연주 이번엔 베를린국립음악원 교수이자 혈기왕성한 토마스 브란디스교수를만났다.브란디스 사사를 원하자 한케교수는 크게 실망하며 「너의 재능과 개성을 키워줄 사람은 나」라고 설득하려 들었다.그러나 그는 여러 스승을 섭력한다는 의지로 브란디스문하에 들어갔고 여기서의 시련은 한케 이상의 고통이었다. 곡마다의 프레이스를 수백번씩 되풀이하면서 이를 다시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문자그대로 피나는 훈련이었다. 한케교수가 완벽주의라면 브란디스교수는 이미 인정된 가능성 위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탐색해나가는 노력파였다. 그는 지금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존심을 다쳐 결정적인 상처를 주기보다 끈질긴 집념에의한 노력에의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섬세한 예술가의 심성이란 작은 상처에도 영원한 좌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끈질긴 노력끝에 눈부신 성취감을 가르쳤다. 음악성을 인정받아 재학중에 함부르크 클라이네 뮤직홀에서 첫독주로 서독음악계에 데뷔,입단이 까다로운 북독일라디오방송교향악단,로린마젤이 지휘자로 있는 베를린방송오케스트라와 함께 전세계 30개국 순회공연했고 그때 만난 줄리어드음대 출신인 피아니스트 윤미경(한양대교수)과 74년에 결혼,지금까지 음악의 협력자·조언자로서의 이상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다.둘사이엔 아들 하나(태원·고2). 독일체류 10년만인 79년에 돌아와서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악장취임,서울대음대교수·바로크합주단 재창단등 다양한 역할을 빈틈없이 맡아 「자신이 지닌 것과 음악이 원하는 사이를 훌륭하게 중재한다」는 주위의 평을 듣고 있다. 오케스트라보다 규모가 작은 실내악앙상블은 그 음악적 질이 한층 치열하고 치밀한 것이 특색이다.또 섬세하고 투명하여 독주자로서의 세련된 기량을 지니면서 여러 소리를 한데 묶어주는 음악적 조직측면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13년간 그는 악장과 지휘를 겸하는 리더로서 이무지치에 비견되는 위치로 바로크합주단을 올려놨고 최근에는 세계정상급 매니지먼트인 콜럼비아 아티스트와 계약,내년부터 세계투어에 들어간다. ○예술가 집안서 성장 그는 원로서예가이며 플루트를 연주하던 심당 김제인씨(82)와 이전 피아노과 출신인 이재순여사(82)의 3남매중 장남.여동생 장희씨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화가,남동생 춘씨는 그래픽 디자이너등 예술가집안에서 어릴때부터 그가 하고 싶은 일들을 주저없이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림솜씨가 뛰어나 예고진학 때는 미술과 음악을 놓고 망설이기도 했으나 스승인 임원식씨와 이재헌씨의 강력한 조언으로 바이올린의 길을 택했다. 검은 안경과 검은 티셔츠,북유럽풍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즐기는 만년소년같은 모습은 어느 한 구석에도 세월의 흔적이나 인생의 혹독한 시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또 「모든 것은 내가 열심히 한 탓이 아니라 내 위에서 나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고」그 누군가를 위해 연주한다는 그의 자세는 음악외엔 도무지 딴관심이나 욕심이 없는 듯 검은 연주복,눈부시게 흰 소매끝에서조차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흘러나올 뿐이다. □연혁 ▲1942년 서울출생 ▲1960년 서울예고졸업(안용구·이재헌 사사)서울대 음대입학(국립교향락단입단·서울대실내악단·한국학생실내악단 활동) ▲1962년 동아음락콩쿠르 입상 〃 국향과 비에니아프스키협연 데뷔 ▲1964년 서울대 음대졸업 ▲1965년 바로크합주단(단장 전봉초)창단멤버 부악장 ▲1968년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서독유학독주회 ▲1969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악원(빌프리트 한케,토마스 브란디스 사사) ▲1972년 재학시 함부르크 클라이네 뮤직홀 첫독주 ▲1972∼74년 쾰른실내악단 부악장,솔리스트,악장 ▲1974년 일시귀국 국립극장 개관기념 독주회 〃 쾰른 실내악단과 캐나다·미국·중남미등 30개국 순회연주 ▲ 〃 북독일라디오방송(NDR)단원및 독주자 ▲1976∼79년 베를린방송 교향악단 단원및 독주자 ▲1977년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선발이후(해외다연주참가) ▲1979년 귀국,국립교향락단 악장취임(이후 정기연주·협연참가) 〃 독일문화원주최「바흐,베토벤,프로코피예프를 위한 소나타의 밤」연주 ▲1980년 바로크합주단 재창단 악장겸 리더,해마다 정기연주 4회및 초청연주외 1백50여회연주와 미국등 해외연주 ▲1981년 KBSTV콘서트 텔레만 탄생 300주년 기념 연주 ▲1982년 제4회 독주회 겸 부인인 피아니스트 윤미경과 열번째 부부연주 ▲1984년 KBS교향락단과 일본및 동남아 순회연주 ▲1985년 호암아트홀 초청독주회 ▲1986년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월드필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초청연주 ▲1987년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과 듀오이벤트(멜버른) ▲1990년 바로크 합주단 창단 25주년 기념연주 ▲1991년 바로크합주단 동남아 순회연주 ▲1993년3월 서울대 교수 실내악단 창단 첫 연주,한미 우호협회 한국주재 미군과 미국관계자 초청 6월축제 78 한국펜클럽선정 「이달의 음악가상」,87 한국음악가협회제정 「올해의 음악가」,87 바이로이트 바그너페스티벌 10년참가감사패,89 음악동아「올해의 음악가상」,바로크합주단 CD출반
  • 메조 소프라노 백남옥씨(이세기의 인물탐구:24)

    ◎타고난 미성·미모 겸비 “한국의 뮤즈”/독특한 음색·풍부한 성량 조화로 “청중매료”/완벽주의 추구… 온몸으로 최상의 무대 연출/서울대 시절 “음악계 샛별” 찬사 받아… 쪽진머리·한복 즐기고 눈부신 조명을 받고 무대에 선 백남옥의 모습을 보고 음악평론가 김원구씨는 「한국의 뮤즈 탄생」이라고 찬사를 보낸적이 있다. 한상우씨는 「진한 색감,표현의 다양함은 듣는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야만다」고 했고 한때 유한철씨는 백남옥의 메조소프라노에 현혹되어 「수십년만에 만나볼수 있는 목소리」로 요란하게 신문의 음악평을 장식하기도 했다. 넓은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거침없는 목소리는 과연 청중을 사로잡는데 추호의 빈틈도 없어보인다.더구나 목소리에 버금가는 출중한 미모는 어떤 무대에 세워도 결코 손색이 없는 조건을 이미 갖춘 예술가다. 그러나 성악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해도 그 소리가 미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 이겠는가.그래서 타고난 미성과 미모를 겸비했기 때문에 백남옥은 그때마다 화제의 초점이 되는지도 모른다.아름다운 용모에 아름다운 목소리,그렇다면 백남옥은 어떤 사람인가. ○별난 성격의 소유자 그는 마음씨가 곱고 착하고 여리고 겸손하며 자신을 죽일줄 아는 전형적 동양여성의 특징은 지니고 있지 않는것 같다.그렇다고해서 거세고 드세게 만사에 나서기를 즐기는 적극적 성격이라고도 할수 없다.또는 이 모든것이 해당될수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다시 말하면 일반의 상식선에선 쉽게 설명되어 지지않는 별나고도 별난축에 속한다. 우선 싫은것도 많고 꺼리는 것도 많다.이른바 원만하고 부드럽고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구석은 찾아볼수 없다.따라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편은 못된다.오히려 좀더 가까워지지 않는 묘한 긴장과 거리감을 준다.물론 그 자신도 자신의 그런 면을 십분 알고 있다.다만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다.그로서는 남을 불편하게 한적도 심적 폐를 끼치려는 의도도 없다.자신은 짐짓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믿는다.남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라곤 없다.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도심 한복판을 갑자기 가로지르는 상쾌한 바람처럼 정신이 번쩍드는 기분이다. 또 꼼꼼하고 완벽하다.종이한장도 똑바로 놓여야만 안심하는 주의다.그래서 쉴새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정돈하고 챙긴다. 그의 집에 가보면 알수 있다.커튼에서 카펫,식탁보 하나에 이르기까지 봄이면 봄답게 엷은 핑크에 화사한 꽃문양,커튼이 꽃문양이면 바닥은 단색,식탁위에 놓이는 찻잔과 스푼하나에도 섬세하게 배려하는 취미다. 무대의상도 마찬가지다. 오페라나 교향악단 협연에서는 역할에 맞는 의상을 골라 입지만 그는 대부분 한복차림으로 무대에 오른다.똑바로 가르마 탄 쪽진 머리에 비녀를 지르고 손가락엔 칠보쌍가락지,자신의 음반이 국제 레코드시장에 진열됐을때 자켓의 한복차림은 「한국의 백남옥」을 한눈에 알수있게 하리라고 말한다. 곧 지루해하고 곧 새로운 것을 원해서 아침에 입었던 옷을 하오 외출에선 반드시 바꿔 입는다.하나의 물건에 오래 집착하지 못한다.다만 한번 사귄 사람과는 평생을 간다. 연주를 앞둔 연습때도 소위 끈질긴 인내심을 읽을 수 있다.테이프에 녹음해서 조목조목 결점을 찾아 그 대목을 보충하고 스스로 완벽하다고 인정되지않으면 며칠 밤이고 파고든다.바로 이 완벽주의가 일상생활에서도 그를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노래의 가사도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시속에 담긴 시심을 꿰뚫어 시가 지닌 정감에 감동하고 도취돼야만 비로소 멜로디에 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시가 말하려는 테마는 물론 한구절 한구절에 녹아들 만큼 집착하여 쓴사람의 심중을 깊이 헤아려야만 직성이 풀린다.77년 KBS에서 「노산 이은상 가곡의 밤」때 이은상작시 홍난파 작곡의 「사랑」에서 그때까지 막연히 이해했던 단어들을 노산에게 또박또박 점검한 적이 있다. ○성용도아 휘호받아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 마소」의 「부대마소」나 「애제 타지 말으시오」 「생□으로 있으시오」등 방언이나 고어를 사용했을 때의 효과는 어떤가고. 하도 정교하게 물으니 노산이 기특히 여겨 이 미인에게 「성용도아(모든것이 우아하고 단정하다)」라는 휘호를 남긴 에피소드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백남옥은 까다롭고 별날거라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그는 청중들에게 한아름의 꽃다발을 정성스럽게 안겨주는 자세로 노래부른다.황폐하고 무미건조한 현대의 메커니즘 속에서 첨예해진 사람들의 감정을 맑고 청량하게 다스리는듯 폭풍우 후의 찬란한 햇살같은 감동을 누구에게나 고루 베풀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한사람의 예술가로서 좀더 진수의 경지를 지향하기 위해선 그가 걷고있는 모든 과정을 몇번이고 찬찬히 헤아리기를 잊지않는다.『결과는 두고 볼뿐』진정한 예술정신의 도정은 그 과정에 담긴 성실함의 무게일거라고 말하면서. 백남옥은 부친 백인엽장군과 정숙일여사의 2남2녀중 장녀.서울사대부국과 이화여중 3학년이 될때까지는 세단을 타고 경무대에 세배가고 무비카메라로 일상생활을 찍히는 소공녀로 성장했다.그러나 5·16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부모가 헤어지자 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난생처음 가난과 비극적 환경을 체험했다. 대학4학년 때인 68년 어머니의 헌신적 뒷받침으로 학생신분으로선 감히 생각지도 못할 본격적독창회를 개최,명동 시공관무대에 데뷔했을때 맑고 따뜻한 그의 메조소프라노는 오페라와 예술가곡을 부를수 있는 재능이 두드러져 음악계는 이 신성에게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었다.그때 취재하러왔던 당시 대한일보기자 정준극씨가 그의 부군이다. ○독일 국립음대 유학 단돈 6만원으로 시작한 신혼생활,사글세방으로 10여차례나 전전하는 어려운 중에도 부군은 독일유학을 서둘러 주었다.여전히 각박한 유학생활이었으나 베를린 국립음대에서의 지도교수인 바리톤 H·브라우어 박사는 고음위주의 레퍼토리로 그의 음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다른 동양권 학생들은 테크닉이 앞선다.당신은 테크닉도 뛰어나지만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다음해 베를린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며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리히트 오디션에 참가,「리케르트 시에 의한 말러의 마지막 7개 가곡을 불러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발탁되는 영광을 안았다.그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고 그도 왠지 세계무대 장악이라는 별빛같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때 어머니 타계소식이날아들었다.그에겐 청천벽력과도같은 충격이었다.가장 섬세한 사춘기에 어머니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했던 그로선 눈앞에 둔 성공이 허망하기만 했다.그때 귀국후 더이상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싶지않아 베를린 국립음대 오페라단 입단을 포기해버렸다. 오페라 출연등 연주제의를 받을때마다 그는 나에게 꼭맞는 무대인가를 여러모로 고려해본다.예를 들어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좋아하는 오페라이긴 하지만 기모노를 입을때 마다 강한 거부감이 생겨 서서히 그 역할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또 83년 한 방송국이 주관한 8·15경축 음악회에서 「민족의 해방을 경축하는 자리」에 가슴이 파진 드레스를 입는 것이 송구스럽게 느껴져 그때부터 한복을 고집하게 되었다. 80년초 큰 병을 앓고난후 그는 예술과 인생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어떤 부분에서도 별로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그가 한 일은 늘 옳았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를 수 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는 사랑하는 남편과 다 자란 딸(은진 서울대미대),하루종일 화초를 가꾸고 여전히 집안의 구석구석을 깔끔하고 예쁘게 꾸미면서 그런 생활이 음악 못지않게 소중한 것임을 알고있다.그의 생활은 결국 그의 예술을 지켜주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를 필요로하고 그를 보고자하는 사람들에겐 그가 지닌것만큼 주저없이 나누고 싶어한다.군민을 위로하는 군민음악회나 구민음악회,장애자를 위한 예술학교 기금모금 자선음악회등 크고 작은 음악회에 기꺼이 참여한다.다만 왼손이 한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여 화려한 그의 이면에 이런 면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작은 음악회라도 「이무대는 나의 첫무대」 「언제나 새로운 최상의 무대」여야 한다는 각오로 혼신을 다한다.풍부한 성량과 날이 갈수록 윤기를 더하는 투명한 목소리,온몸이 악기가 되어 자유자재로운 기교로 노래부르지만 그에게서의 예술은 단순한 재능과시나 화려한 영광을 위한 기교는 더이상 아니다. 「예술은 인간 가슴의 심연에 빛을 보내는 일」,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완벽추구와 긴장을 잃지않는 백남옥의 노래는 바로 그 청중의 가슴에 던지는 한줄기 빛처럼 따사롭게 흘러들고 있다. □연보 ▲서울 출생 ▲1965년 서울예고 졸업 ▲1969년 서울대 음대 졸업 ▲1973∼76년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가곡과 오페라 전공) ▲1976∼78년 중앙대·서울예고 출강 ▲1979∼현재 경희대 음대 교수(이화녀중때 김학근,예고때 오현명,서울대 음대때 이정희,베를린국립음대 때 브라우어 교수 사사) ▲1964년 서울대 음대 주최 제15회 전국남녀학생음악경연대회 특상 입상 ▲1966년 제16회 동아음악콩쿠르 성악부 1위 입상 ▲1968년 제1회 독창회(명동 시공관) ▲1969년 오페라 「순교자」(국립오페라단) ▲70,71,72년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국립오페라단 김자경오페라단)〃 모차르트 오페라 「마적」(국립오페라단),비제 오페라 「카르멘」(김자경오페라) ▲1974년 베를린 국립오페라단 오디션1차합격,베를린 국립오페라단 퐁키엘리 4막오페라 「라조콘다」 ▲1975년 독일유학시 베를린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말러가곡 솔리스트(리케르트시에 의한 말러 마지막 7개의 가곡으로 프랑스의 파리 툴르즈 바이안느 지방 순회연주) ▲1976년 동아일보·동아방송주최 귀국독창회(류관순기념관),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국립오페라단) ▲1977년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김자경오페라단) ▲1985년 음악의 소극장 운동을 위한 제1회음악회(현대극장 소극장) ▲1986년 독창회(호암아트홀) ▲1986년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호암아트홀) ▲1987년 오펜바흐 가곡 「호프만의 이야기」(김자경오페라단) ▲1989년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투테(여자는 다 그런것)」(김자경오페라단) ▲1990년 캐나다 토론토,미 워싱턴등지 독창회 ▲1991년 8·15경축음악회 미애틀랜타 휴스턴 시애틀 워싱턴등지 순회독창회 KBS교향악단,시향10여회협연,지방연주 20여회,KBS·MBC­TV 「봄맞이 가곡의 밤」「8·15경축음악축전」독일문화원 주최 「독일가곡의 밤」해마다 참가. 「백남옥 우리가곡 모음」(78년)「애창곡집」(79년)「우리가곡집」(86년)「매혹의 목소리 백남옥 우리가곡」CD출반(92년)이상 성음,「백남옥 우리가곡」LD출반(93년 삼성)외.
  • 한국무용가 최현씨(이세기의 인물탐구:14)

    ◎절제된 몸짓… “여백의 미” 표현 일품/고고한 기품 넘치는 타고난 재능의 예인/김해랑문하서 승무·태평무 등 두루 이수/완벽주의적 성격… 대선배와의 불화 “천추의 한”으로 갓쓰고 도포입고 부채들고 최현이 무대에 나타나면 이도령이 광한루에 나선듯 화사하고 눈부시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헌칠하고 단정한 매무새,운신의 폭이 조용하면서도 민첩하다.삭풍이 이는 한겨울에도 그의 분위기에는 오월 단오같은 싱그러운 신록이 묻어있다. 부채끝으로 오작교(오작교)를 가리키고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면 그때마다 한양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이 동시에 엇갈린다. 무용계에서 「푸르름을 몰고다니는 예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는 20대 미장부의 멋과 미를 변치않는다.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젊고 기개에 넘쳐있다.언제 어디서나 누구앞에서나 당당하다. 우선 그의 춤솜씨부터가 그렇다.타고난 재능과 기량으로 그는 빠르고 느린 어떤 곡조에도 절묘한 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중동이 절제된 그의 「승무」나 「살풀이」등 그의 춤의 매력은 그 움직임마다에 여백의 미를 살리는데 있다.뿌리치고 내뻗는 손짓하나에도 선과 배경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듯 하다.힘이 들어가지 않은,몸속으로부터의 흥취가 절로 살아나 어느땐 멈추고 어느땐 다시 흐른다.그리고 조각처럼 푸르고 흰 얼굴에는 한과 슬픔을 자제한 인고가 담겨있다. 그는 춤뿐아니라 춤과 관련된 영화와 연극,창극과 뮤지컬을 두루 섭력한 예술가다. ○춤관련 영화·연극 출연 완벽주의자인만큼 한가지를 알아도 끝까지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쌓고있다.대강대강 그럭저럭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사람을 사귀어도 한번 사귄 사람은 절대로 놓지않는다. 이렇게 흑백이 분명하기때문에 무용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자칫 외롭기 십상일수가 있다.그러나 서로서로 인맥·학맥,제자 스승으로 얽히고 설킨 속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타고난 재능,탁월한 춤솜씨 하나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춤추는 사람이 춤잘추는데야 누가 뭐라하겠는가.위로는 막강한 선배들이 기라성처럼 좌정하고 이리저리 끈이 닿는 무용풍토에서 최현자신은 그런 자부심과 오기 하나만으로 고고하게 버티어왔다 할수 있다. 그가 춤으로 무용계에 어필하기 시작한 것은 65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초라니」에서다.조택원이후 송범 김진걸 이매방으로 이어지는 남자무용수중 수려한 춤과 미모마저 갖춘 그의 출현은 무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51년이후 한때 영화에 심취하여 조미령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과 영화 「춘향전」「시집가는날」등에서 주연,이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춘향전」「마의태자」「황진이」등은 노련미 넘치는 춤기교와 함께 영화에서 닦은 연기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비상」은 그 자신이 끊임없이 추어왔고 지금도 무용인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다. 소매가 긴 백삼에 상투관 차림,부채 하나만으로 무대를 누비는 이 「비상」은 희로애락의 일상사를 살고있으나 저 하늘을 향한 끝없는 의지,꿈을 잃지않으려는 인간의 끈질긴 열망이 춤속에 담겨져 「마음을 비운 춤」「생의 환희와 승리를 득도의 경지로 이끈 춤」「아무도 비상을 최현만큼 출수 없다는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을수 있다」고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가 쓴적이 있다. 영화·연극 못지않게 그의 음악취미또한 광적이다. 76년 호암 이병철회장의 도움으로 독립문쪽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최현무용단을 창단했을때 그의 연구소는 무용연구소라기보다는 마치 음악연구소처럼 사방벽이 온통 오리지널 디스크로 둘러싸여 있었다.그의 오디오 취미는 「마니아」급으로 오디오전문지들은 걸핏하면 드보르자크에서 수재천에 이르는 그의 음악취미·오디오기기들을 탐방취재하고 있다.이 방면에서는 특히 김영태와 의기투합하여 두사람은 충무로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곧잘 기웃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취미도 “광적” 최현은 마산에서 성장했지만 본래 부산사람이다.본명은 최윤찬,후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최현이란 예명을 가졌다. 16세때 전국가요경연대회에서 특상한 것을 계기로 「천재소년가수」가 되어 지평선 가극단을 쫓아 마산에 정착,마산의부호이자 한량으로 소문난 김해낭문하에 입문하여 그곳에서 궁중무에서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를 고루 이수했다. 그러나 스승이 초기엔 장작이나 패게하고 집안청소를 하게 할뿐 도무지 춤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때도 당돌했던 그는 『왜 춤을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항의하곤 했다.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네가 보고 느끼고 깨달아라』그는 머리속에 꽉 찼던 안개가 걷힌 듯 스승의 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춤이 몸속에서 피돌기처럼 돌고 흥이 기운처럼 솟구치기를 기다렸다.스승은 그제서야 그에게 춤 한자락씩을 지도해나갔다. 예술의 겸손을 엄숙하게 익히고도 인격수양이 덜 됐거나 춤을 잘 춘다는 주변의 칭찬에 우쭐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을 큰 「잘못」을 하나 저지른 적이 있다. 58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스승 김해랑 안무로 「독무」를 출때였다. 당시 명고수인 지영희씨가 장단,그의 부인인 성금련씨가 가야금을 연주,진양조에서 중머리 중중머리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영희씨가 그만 잦은몰이 장단을 잘못친 것이다. 박자와 호흡,시간조절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감을 수도 펼수도 있는 그로서는 리듬이 맞지않아 크게 당황했고 무대는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지영희씨에게 덤벼들었다. 『무대는 생명입니다.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돼요.관객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나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지영희씨는 『최선생 내가 정말 잘못했네.큰 실수였다』고 백배사죄했으나 그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망발.당대의 명인이자 대선배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방만함을 후회했다고 탄식한다. 이제 그는 참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다.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진지하게 나를 점검하여 「몸짓」하나 「소리」하나에도 자연의 질서가 깃든 지혜와 노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그리고 내 춤속에 관객을 끌어들여 나의 한과 정취와 풍류의 빛,내가 살아온 춤의 굽이굽이를 함께 향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최현의 많은 이야기중에서 그가 54세때 27세 연하의 신부를 맞아들인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중 하나다. ○54세때 27세 신부 맞아 84년 12월,일밖에 모르던 까다로운 성품의 최현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더구나 신부는 서울예고를 졸업,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국립무용단 단원이라고 해서 주변의 놀라움은 한층 컸다. 신부인 원필녀씨는 나이보다 깊고 의젓한 성품으로 춤추는 스승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혼자서 그를 사모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두사람의 결혼은 올해로 만 9년.제자로서 스승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결혼초기때의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변함없이 나누고 있다. 최현씨는 그동안 부인을 한성대와 이대대학원에 다니게 했고 지금은 한성대에 출강.『내가 아프면 밤새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지켜준다』고 자랑한다. 지난해 6월엔 제1회 원필녀개인무용발표회를 주선해 주었다.그리고 그가 사랑해마지않던 그의 춤 「비상」을 부인에게 추게 했다. 그는 88올림픽 폐막식때는 10만군중과 수천명의 출연자들에게 청사초롱 「안녕!」을 추게 하여 방대한 스케일로 각계의 시선을 모았었다.지난해엔 청소년예술제에 「파란풍선」에 이은 「비단안개」를 안무,서울예고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 도쿄 무장야시민문화회관에서 「시집가는날」을 공연,올해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기금을 받아 그의 개인발표회를 준비중이다.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 차범석극본·최종원음악의 이 작품은 그의 춤 60평생을 정리한 집대성의 일환으로 그의 특기인 「춤에서의 여백의 미」를 유장하게 전승시킨다는 집념을 담고 있다. 그는 아무리 춤을 잘추어도 훈련된 춤,숙련된 춤은 단호하게 부정한다.긴 세월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에서 몸속에서 자연스러운 율동으로 우러나오는 극미(극미)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를 축적시키면서 이를 어느 한순간 우주의 무한한 공간속에 힘차게 내뿜는다.장삼자락을 낙화로 흩날리며 탄식의 숨결을 하공에 흩뜨려놓듯,그래서 그의 춤의 한끝은 결국 끝없는 비상임을 그는 알고 있다. □연보 ▲1929년12월 부산 영도 출생.최재용씨와 이말념씨의 2남5녀중 장남 ▲1946년 마산으로 이사 ▲1953년 마산상고졸업 ▲1959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 졸업 ▲1988∼199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예술학과 수학 ▲1946∼1953년 마산 김해랑 무용연구소 입문 전통무용 유형과 기법사사 ▲1953년∼ 오광대일인자 장재봉,민속춤의 김숙자씨등에게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 등 이수 ▲1955년 최윤찬무용연구소 개설 ▲1961∼1962년 서울대 음대 무용강사 ▲1965∼1985년 서울예고 강사 ▲1967∼1974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강사 ▲1976년 최현 무용단 창단 ▲1980∼1981년 중앙대 예대 무용과 강사 ▲1981∼1985년 서울예전 무용과 주임교수 ▲1982년 최현 무용연구실 개설,한국무용협회이사,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예총)이사,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국립무용단지도위원,한국무용협 부이사장,대한민국 무용제 심사위원 문예진흥원 지원기금 심사위원역임 (영화)「삼천리의 꽃다발」 「시집가는날」 「춘향전」 「불멸의 성좌」 (무용·안무출연)무용극 「초라니」 「춘향전」 「시집가는날」 「마의태자」 「황진이」국립창극 「심청가」 「강릉매화전」 「광대가」 「변강쇠타령」 「시집가는날」 「대춘향전」 「허생전」 「심청」 「서동가」 「이춘풍전」 「놀부전」 「소태산」 「아리랑」 ▲1970년 일본 EXPO70 한국의날 안무·출연 ▲1971년 국립무용단 유럽지역 10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5년 국립무용단 일본 10개도시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 「녹」 「비상」안무·출연 ▲1980년 국립무용단 동남아 9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82년 시립무용단 「한국 명무전」에 「비상」출연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초청공연 「헌화가」안무·출연 ▲1987년 88서울예술단 창단공연 「새불」구성·안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안무총괄 「안녕」 ▲1990년 국제문화협 주최 일본 지역 공연 창극 「심청전」안무 ▲〃 동아일보창간70주년기념 모스크바지역등 5개국 순회공연 창극 「아리랑」안무·출연 ▲1991년 국립극장주최 청소년예술제 「파란풍선」안무 ▲1992년 국립극장주최 「비단 안개」안무 ▲〃 서울시립무용단 무용극 「춘향전」객원안무 ▲현재 문화부 문화재 보호협회 「한국의집」예술총감독,서울예고 무용과장 서울올림픽 안무총괄 공로 대통령 표창
  • 서울시향상임 에르데이 내정/헝가리출신… 내년한해 지휘

    헝가리출신의 지휘자 미클로스 에르데이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새 상임지휘자로 내정됐다. 서울시향은 지난 2일 「상임지휘자 선임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열어 에르데이를 적임자로 결정하고 서울시장의 재가를 7일 요청했다. 자문위원회가 밝힌 에르데이의 계약조건은 계약기간이 93년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1년간으로 6개월동안 국내에 체류하며 연봉7만2천달러에 연주회당 3천5백달러의 수당지급,아파트와 차량제공등이다.이에따라 서울시가 에르데이를 상임지휘자로 기용하는데 드는 비용은 1년에 2억원정도가 된다. 지난해와 올해 서울시향의 수석객원지휘자로 활동한 에르데이는 1928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리스트음악원졸업과 함께 헝가리 라디오합창단 음악감독으로 발탁된뒤 곧바로 부다페스트오페라하우스 수석지휘자로 임명돼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온 헝가리의 정상급지휘자이다. 그는 베를린심포니와 베를린필,런던필,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등 미국및 유럽의 유수한 교향악단을 지휘했으며 오페라지휘자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네덜란드라디오심포니의 종신객원지휘자와 핀란드 국립오페라단,일본 요미우리 니폰 심포니의 수석객원지휘자의 직함을 갖고있다. 서울시향은 지난 90년말 20여년동안 상임지휘자를 맡은 정재동씨가 물러남에 따라 지난해와 올해 객원지휘를 한 13명의 지휘자에게 단원들이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상임지휘자 인선작업을 벌여왔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말도체카토와 불가리아의 에밀타바코프,에르데이 순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국내체류가능기간등 시향의 음악적 성장에 도움이 될 여러 조건에서 에르데이가 적임자로 결정된 것이다.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 선임을 위한 자문위원회」는 서울예고 한상우 음악과장과 음악평론가 이상만씨,전KBS 교향악단 음악감독 김만복씨,연세대 이재헌교수,서울시향지휘자 박은성씨,서울시향 하영수 운영위원회대표등으로 구성되었다.
  • 연주회 가진 플루티스트 강영희씨(인터뷰)

    ◎“부담없는 홈콘서트 좀더 많아져야죠” 『연주자는 연주를 하면서 즐기고 청중들은 들으면서 즐기는 그런 음악회를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14일 밤 동숭동 대학로에 있는 학전소극장에서 하피스트 박라나씨와 「천상의 하모니」라고 이름붙인 연주회를 가진 플루티스트 강영희씨는 『영화관에 가는 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즐거운 음악회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강씨는 이번 공연은 지난해 12월17일과 18일 플루트와 기타연주회에 이은 학전에서의 두번째 연주회로 포레의 「자장가」,구노의 「아베마리아」,마리의 「금혼식」,비제의 「카르멘변주곡」등 클래식에 익숙치않은 사람들도 한번씩은 들어보았음직한 11곡을 연주했다. 『서울에서만 하루에도 몇군데서 음악회가 열리지만 많은 수가 연주자의 자기만족을 위한 음악회일 뿐입니다.물론 그런 학구적인 음악회도 중요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순수클래식을 생활화시키려면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는 홈콘서트가 좀더 많아져야 합니다』 강씨가 학전소극장을 연주장으로 택한 것은 남편인 김자호씨(간·삼설계건축연구사무소 대표)가 바로 그 극장의 설계를 맡은 인연이 있는데다 평소 교분이 있는 학전대표 김민기씨와 「즐거운 음악회」에 대해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소품을 연주하기가 더 어렵습니다.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곡은 실수가 더 커보이기 때문이지요.게다가 학전소극장은 기껏 2백명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극장이어서 청중과 연주자와의 거리가 거의 없다시피해 더욱 섬세한 연주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어려웠습니다』 강씨는 자신의 음악회가 장기적으로는 30대에서 50대중반의 한창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여유를 줄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다른 연주회와는 달리 연주가 끝난 뒤 강씨가 준비한 포도주를 두 연주자와 청중들이 나눠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강씨는 올해 45세로 서울예고와 일본 구니다치음악대학,스위스 취리히국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주로 일본과 국내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이는 중견플루티스트로 15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프로그램으로 한번 더 공연을 갖는다.
  • 예술종합학교 자문위원장 이성재씨

    ◎“국제수준의 실기전문학교 설립에 최선” 『음악원의 이상은 대단히 높아야 합니다.그러나 지금은 당장 학교문을 열고 학생을 모집해 효율적인 교육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인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8일 열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설립자문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위원장에 선출된 이성재씨(67·전 서울대교수·아시아작곡가연맹회장)는 『자문위원이 됐다거나 위원장으로 뽑혔다는 것 자체가 축하받을 일이 아니다』면서 『진정한 축하는 음악원의 성공이라는 성과가 나타났을 때 해달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에도 예술교육의 특수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동안에는 교육법이라는 제도에 얽매여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예술학교 설립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기존 대학교육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위원장은 지난 53년 서울예고 설립에 참여해 56년까지 교무주임을 맡은 뒤 서울음대로 자리를 옮겨서도 오랫동안 교무과장과 학생과장을 역임하는 등 음악인으로는 드물게 교무행정에밝아 자문위원에 위촉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부 안에 있는 추진단에서 이미 예술학교의 윤곽을 정해놓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자문위원이 왜 있겠느냐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나갈 것입니다.국제수준의 실기전문학교 설립이라는 음악계의 숙원을 풀려면 맡겨진 일에 피동적으로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이에따라 이위원장은 위원장으로서가 아닌 자문위원자격으로 올해 음악원과 함께 유아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교육받을 수 있는 예비학교의 동시개교를 주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70년대 후반 정부에서 펴낸 「80년대의 문화정책」에서 이미 예술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당시 저는 정부가 모델로 삼은 파리고등음악원의 몽블랑학장을 초청하는데 관여했어요.10년이상 늦은 셈이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위원장은 음악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15개에 이르는 전국의 예술계 중고교가 예술학교의 교육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위원장은 작곡가로서는 평생 30여작품을 남겼으며 「피아노를 위한주제적 12음과 4개의 소품」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 음악계 “교수확보·국가지원에 성패”/예술학교설립 반응

    ◎“우수학생 유치 위한 여건조성 미흡” 음악계 인사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93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결정된 이상 이제는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응시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9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요청으로 「한국형 콘서버토리」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로 했던 코리안심포니 음악감독 홍연택씨(한양대음대 교수)는 『밀실에서 완성된 마스터플랜은 아무리 훌륭해도 학생들이 모이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라면서 문화부의 독단이 아닌 폭넓은 예술계 인사의 참여와 홍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씨는 『예술학교 기획단계에 참여했던 나 자신도 현재 학교설립이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다른 교수나 예술계 고교생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실제로 서울예고와 선화예고의 입시지도 교사들은 『예술학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예술학교를 목표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도 없고 예술학교를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도 없다』고 말하고있다. 이에따라 예술계 고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예술학교의 체제의 정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학교 입시가 일반 대학에 앞선 특차전형인지 일반대학과 같이 실시되는지가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음악인들은 예술학교의 성패가 교수확보와 학교설립이후의 국가적인 지원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음악평론가 박용구씨는 『문화부가 외화를 쓴다는 비난을 의식해 몸을 사리지 말고 과감히 해외의 우수교수를 초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동구권의 우수교수를 초빙하는 경우 그리 많은 돈도 필요하지 않다』면서 『우수교수만 확보되면 외국의 학생들이 오히려 한국에 유학오는 현상도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이상만씨는 『학교본부는 공연장 밀집지역인 서울에 세워져야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줄여 교육에 효율을 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서울대 음대교수 38명/“중·고생 레슨중지” 결의

    ◎예술계학교 출강도 않기로 서울대음대교수들이 고교생이하 학생들에 대한 개인레슨을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교수들은 또 서울예고·선화예고·예원중학교등 예술계 중고교에서 하던 출강레슨을 중단하고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의 레슨도 그만두기로 했다. 서울대 음대는 11일 이같은 결의내용이 담긴 학장명의의 공문을 전체 교수들에게 발송했다. 서울대 음대교수 41명 가운데 35명은 이에앞서 10일 상오 김종운서울대신임총장과 간담회를 가진뒤 음대입시부정사건과 교수개인레슨에 따른 부작용방지책등을 6시간동안 논의한 끝에 『음대입시부정이나 가짜 악기판매사건등 음악계의 각종 부조리가 교수들의 중고교생 레슨에서 발생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이같은 내용을 결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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