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서울역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엑스포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선발진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승무원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예고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990
  • 野 집회 폭력 11명 구속·11명 입건/경찰

    ◎집회 불만 우발 사건… 배후조종 혐의 없어 한나라당 서울역광장 집회 폭력사태를 수사중인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7일까지 李義成씨(28) 등 노숙자 11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등 혐의로 구속하고 林모씨(77) 등 11명을 같은 혐의로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배후조종 여부와 관련,이들이 모두 ‘아는 바 없다’고 부인하는 데다 혐의를 둘 만한 물증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李씨 등은 지난달 29일 서울역광장에서 집회중인 한나라당원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을 하는 등 집회를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李씨가 한나라당원들에게 ‘너희들 때문에 이 나라를 망쳤는데 무슨 집회를 하느냐’고 욕설을 하며 ‘으ㅆㅑ 으ㅆㅑ’ 소리를 지르자 다른 노숙자 등이 동조,집회장을 돌며 집회를 방해하고 당원들을 폭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은 한나라당 집회 장소에서 선물이나 음식을 받을 생각으로 집회장에 나왔던 일부 노숙자 등이 경제실정의 책임자로 인식된 한나라당의 집회 행태에 불만을 터뜨리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 ‘칙칙폭폭’정겨운 소리…차창밖엔 황금들녘… 함께 가을로 달려가요

    ◎단풍·등산·문화관광 등 다양한 열차 여행상품 손짓/알뜰주부위한 ‘젓갈열차’도 차창 밖으로 스치는 황금들녘을 지켜보면서 가을정서에 흠뻑 젖어보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설레는 일이다.철도청은 기차여행의 계절을 맞아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다양한 코스의 관광열차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02)717­1002 △등산열차=‘주왕산’과 ‘내장산’코스 2가지.주왕산 등산열차는 24일 오후 11시50분 청량리역에서 출발,대전사에서 내려 등산을 즐긴뒤 다음날 밤 10시59분 청량리에 돌아온다.요금은 어른 3만8,000원.내장산 등산열차는 31일 오후 11시40분 서울역을 떠나 정읍에서 내려 등산한뒤 오후 6시5분 서울역에 도착한다.요금은 4만1,000원. △문화열차=‘전주지구’‘백제문화 탐방’‘남원지구’등 3종류.전주지구 관광열차는 매주 일요일 아침 7시10분 서울역을 출발,전주 종이박물관을 들러 풍남문과 경기전을 거쳐 마이산을 돌아본다.요금은 3만5,000원.백제문화 탐방열차는 매주 일요일 아침 6시40분 서울역을 출발해 부소산성과 무량사와 석탄박물관을 살펴본다.요금은 어른 3만3,300원.남원지구 관광열차는 일요일 아침 7시10분 서울역을 떠나 지리산 뱀사골∼정령치∼국악당∼광한루를 돌아온다.요금은 4만1,200원. △단풍열차=‘설악산’‘내장산’ 2코스이다.설악산 열차(1박3일)는 청량리역에서 20일 밤 9시50분 새마을호로 출발한다.강릉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설악산으로 간다.설악산 한화콘도에서 1박한 다음 낙산사, 주문진항을 거쳐 22일 밤 8시57분 청량리역으로 돌아온다.요금은 2인1실이 8만5,000원.내장산 열차는 27일 아침 7시40분 서울역을 출발,당일 낮 내장산 백양사 단풍을 즐긴 뒤 밤9시40분 돌아온다.요금은 어른 3만3,000원. △바다열차=‘정동진·환선굴 관광열차’와 ‘영덕·강구항 관광열차’가 가을바다로 떠난다.정동진·환선굴 열차는 매주 토요일 오후 10시50분 청량리역에서 출발한다.정동진역∼동해∼환선굴∼묵호항∼동해역을 거쳐 돌아온다.요금은 어른 5만1,000원.영덕·강구항 관광열차는 매주 토요일 오후 11시40분 청량리역에서 떠나 장사해수욕장∼산사해상공원∼주왕산을 거쳐 돌아온다.요금은 어른 3만8,000원. △젓갈열차=김장철을 앞두고 무박 2일 일정으로 ‘강경 젓갈열차’와 ‘광천 새우젓열차’가 마련된다.강경젓갈열차는 17일,광천 새우젓 축제에 맞춘 새우젓 열차는 23일 출발한다.
  • 한가위 3,000만 대이동/IMF 불구 귀성객 작년보다 약간늘듯

    ◎고속도 오늘 22만·내일 19만대 탈서울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연휴를 앞두고 민족대이동이 시작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처음 맞는 이번 추석은 대규모 구조조정과 임금삭감 등으로 명절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가라앉았지만 귀성객 수는 그리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국은 이동 인원이 지난해보다 2% 늘어난 2,990만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어렵더라도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겠다는 게 귀성객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추석연휴를 하루앞둔 2일 전국 주요 철도역과 고속버스터미널은 오후에 접어들면서 선물꾸러미를 들고 고향을 찾는 귀성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오전에 대체로 원활한 교통흐름을 보였던 고속도로와 국도도 오후 들어 귀성 차량이 몰리면서 일부 구간에서 지체와 서행이 계속됐다.서울에서 부산, 서울에서 광주까지 평소보다 3시간 이상이 많은 9시간 가까이 걸렸고 대전까지도 5시간 정도 소요됐다. 한국도로공사측은 2일 하루동안 21만9,000여대의 차량이 서울을 빠져 나갔다고 밝혔다.3일과 4일에도 각각 22만4,000여대,19만7,000여대의 차량이 서울을 빠져 나갈 것으로 전망했다. 서울역에서도 이날 모두 11만3,000여명이 떠났다.기차표는 대부분 매진됐으나 운행회수는 지난해에 비해 10% 정도 줄었다.철도청은 2∼5일 나흘동안 40여만명의 귀성객이 열차를 이용해 고향을 찾을 것으로 보고 연휴기간동안 하루 40∼50편의 열차를 증편했다. 예비차량 680여대를 준비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은 예매율이 80%를 밑돌아 이날 120여대만 투입했다.부산이 고향인 朴美英씨(28·회사원)는 “부모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고향을 찾는 것으로 효도를 대신하려 한다”고 말했다. 김포공항에서는 4일까지 모두 12만명이 비행기로 고향을 찾을 것으로 예측됐다.대한항공은 이날 평소보다 10편을 늘린 117편을 운항했고 아시아나항공도 7편을 늘렸다.
  • 한나라 서울역집회 방해/노숙자 등 5명 추가 영장

    한나라당 서울역광장 집회 폭력사태를 수사중인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일 李永植씨(42·특수절도 등 전과7범) 등 노숙자 3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朴東植씨(28·사기 등 전과2범) 등 5명에 대해 같은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또 孫應龍씨(36) 등 용의자 10명을 추가로 연행해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배후조종자가 있었다는 정황 및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연행된 12명은 집회를 구경했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집회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토대로 용의자 검거를 위해 탐문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 국민안보의식 해이 우려/丁海龜 세종硏 연구위원·정치학(기고)

    ◎권력장악 노린 ‘적과의 내통’ 충격 보도된 바에 따르면 지난 15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비선 조직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인사를 만나 판문점에서 총격전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좀더 구체적인 사실이 보다 분명하게 밝혀져야겠지만,현재 보도 내용대로라면 충격적인 일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특정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까지 개입된 ‘북풍(北風)사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가 더 있으리라는 의구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도 설마했던 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므로 선거승리를 위해 ‘적과 내통’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판문점에서 총격전까지 요구했다는 것은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 뿐이다. 한편 이번 일이 여야 정쟁이 가장 극심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개되었다는 점도 미심쩍은 일이다. 물론 사건의 수사과정상 정치와는 무관하게 공개된 것이라고 검찰은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여야가 ‘서울역 집회 방해사건’ 등을 놓고 대치중인 상황이 아닌가. 아무튼 적에게 총격전을 요구하는 일이나 여야의 끊임없는 정쟁 등 속된 말로 ‘막가파’식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들이 있다. 언젠가부터 권력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다할 수 있다는,이를테면 ‘적과의 내통’뿐만 아니라 적에게 총격전까지 요구할 수 있는 ‘권력물신주의’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누구를 지적하기 이전에,지난 몇번의 선거를 통해 권력을 향한 줄서기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우리는 익히 안다. 하나의 단적인 예지만 이러한 사태들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얼마나 재촉했는가. 특히 정치권에서 남북관계를 이런 식으로 일상적으로 이용할 때 궁극적으로 국민 안보의식의 해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적극적 도발을 ‘정치권 사주’로 치부해버리는 분위기가 생길까 걱정된다. 또 하나 지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이 사건에 거론된 인물들이 비교적 젊은 사람들로 이른바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자기 책임을 넘어선 국제통화기금(IMF)고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분담에 땀흘리고 있다. 그러나 권력 주변에 맴도는 똑똑한 친구들의 ‘한탕주의’가 언젠가부터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외면적으로 탈독재 민주화가 이뤄졌음에도 민주적 절차와 규칙을 만들고 이를 지키기보다는 독재시대보다 더못한 정치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 정치문화도 그 공동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권력 장악을 위해 적과의 내통까지 마다하지 않은 정치문화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이전투구의 정쟁만을 이어가는 현재의 정치문화와도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사건의 내용이 공개된 이상,정부와 검찰은 분명한 진상을 밝히고 그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며,동시에 그 과정에 정략적 동기가 개재되어 있다면 그에 대해서도 마땅히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한나라 집회 폭력은 우발적”/경찰 수사

    ◎음주 난동 노숙자 3명 영장/배후조종 혐의 못찾아 지난달 29일 한나라당 서울역광장 집회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는 술에 취한 노숙자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빚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1일 李永植씨(42·특수절도 등 전과7범) 등 노숙자 3명에 대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한 데 이어 趙珍相씨(33) 등 용의자 4명을 추가로 검거했다. 경찰은 이들을 상대로 난동을 부린 경위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으나 배후조종 여부 등에 대해서는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한나라당측이 제기한 여당의 탑골공원 노인 동원설과 관련,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형사 2개반을 투입,탐문수사를 펴고 있다.
  • 한나라 서울역 집회 폭력 휘두른 3인

    ◎“노숙자 아품 나몰라라 집회 일삼는 정치 혐오”/“술 너무 취해 정치 집회인지도 몰랐다”/“싸움 말리려다 맞아 홧김에 때렸다”/사업 실패·실직자… 조직적 방해 증거 없어 한나라당 서울역 광장집회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를 수사중인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집회당일인 지난달 29일 술에 취한 노숙자들이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감에서 우발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보고 있다.야권이 제기하는 ‘배후조종설’은 근거가 없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1일 구속영장이 신청된 노숙자 권영복(57·사기 등 전과 2범)는 “집회 당일 만취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權씨는 “당시 서울역광장 집회가 정치집회인지조차 몰랐다”면서 “광장 부근에서 혼자 소주 2병을 마셨으나 소주병을 깨고 난동을 부린 기억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5월 돼지농장사업이 망하면서 서울역 노숙 대열에 합류했고 평소 정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고 토로했다. 權씨와 함께 영장이 신청된 金同坤씨(48·폭력 등 전과10범)도 노숙자들과 한나라당 당원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말리려다 당원들이 폭행을 가해 홧김에 받아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충북 옥천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성묘 갔다가 서울역에 돌아와 보니 집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면서 “싸움을 말리려고 했는데,정말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金씨는 지난해 초 정화조사업에 실패한 뒤 1년여 동안 서울역 부근에서 노숙생활을 해왔다고 밝혔다. 집회 당일 단상에 올라가려다 저지하는 한나라당 당원들을 폭행한 李永植씨(42)도 “일자리도 없어 고생하는 데 정치인들이 집회만 하는 데 화가 치밀어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李씨는 전남 목포시 봉명동 고기박스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직장을 잃고 지난 5월부터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용의자들이 이처럼 배후조종설을 부인하고 있는 데다 별도의 물증도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집회 도중 청중 사이에서 조직적인 방해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은 데다 몸싸움과 야유 등 사소한 마찰만 군데군데 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조직적방해공작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있다. 한나라당측은 이 사건을 여당의 야당파괴공작으로 규정,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두 가지 의혹을 제기했었다.하나는 ‘탑골공원 노인 동원설’이고 다른 하나는 집회 당일 ‘노숙자들에 대한 우산 제공설’이다.
  • “집회 방해 野 주장은 억지”/여권의 對野 시각

    ◎청중동원 실패하자 ‘폭력사주’ 거론/“민심의 냉정한 심판”… 겸허히 자성을 여권은 30일 한나라당이 서울역 집회가 조직적으로 방해받았다고 주장하는데 대해 집회가 실패한 데 따른 책임전가라며 역공을 폈다. 특히 청와대는 야당의 주장을 과거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억지주장’으로 치부했다. ○…청와대는 ‘상황론’으로 야당의 주장에 대응했다. 즉,과거 정부의 잘못으로 생긴 노숙자들이 모인 곳에서 경제파탄에 따른 책임을 반성하는 대회를 열지 않은 데 대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朴智元 대변인은 “서울역은 3,000∼4,000명의 노숙자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며 “경제를 살리려는 정부 규탄대회를 하니까 노숙자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약 정부 여당이 노숙자들을 사주했다고 한들 그 사람들이 들어줄 사람들이냐”고 반문했다. 朴대변인은 이어 폭력배 동원 주장에 “그것은 과거 여당의 상투적인 수법”이라며 “현 집권여당에는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다”고 일축했다. 다시말해 과거의발상을 버리라는 주문으로,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위로는 못해줄망정 그런 혐의까지 덮어씌우면 어떻게 하느냐”며 “참으로 한심한 행태”라고 직격탄을 쐈다. ○…국민회의는 이날 간부회의를 열어 한나라당의 서울역 집회는 조직적으로 당원을 동원했지만 시민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한 실패작이라고 규정했다. 즉,장외집회의 리트머스 시험지에서 민심의 냉정한 심판을 받은 결과라는 설명이다. 그런 만큼 한나라당은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공세를 폈다. 특히 한나라당의 정치테러 주장은 장외집회 실패를 덮기 위한 무고행위로서 덮어씌우기라는 입장이다. 鄭東泳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여권 사주설은 한나라당이 자신들의 과거 공작정치에 비춰 무조건 여권에 책임을 전가하는 무고행위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鄭대변인은 이어 “지난 8일 용산역에서 발생한 李會昌 총재의 배식 망신사건은 서울역 집회의 전조였으며 실업자와 노숙자들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되었다”고 강조했다.
  • “해방후 최대 정치테러”/한나라당 시각

    ◎시간대별 피해보고서 발표… 강경대응/“야당파괴 계속땐 국민적 저항” 경고 한나라당이 30일 ‘9·29 서울집회 사태’를 “해방 이후 최대의 정치테러 사건”이라고 규정,강경대응 방침을 밝혔다. 명칭도 ‘서울역 유혈 정치테러 사건’으로 못박았다. 李會昌 총재가 이날 경제기자회견을 전격 취소한 데서도 기류를 읽을 수 있다. 대신 辛卿植 사무총장이 ‘서울역 집회 폭력사례 폭로회견’을 가졌다. 당 3역 등은 오후 金鍾泌 총리를 항의 방문했다. A4용지 7장 분량으로 ‘서울집회 시간대별 상황과 피해사례’도 내놨다. “韓모 전문의원이 머리가 깨지는 등 당원 수십명이 몸에 문신을 새긴 폭력배에게 돌,유리병,각목 등으로 맞아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당초 李총재는 회견에서 경제난국 극복을 명분으로 국회 드원의 수순밟기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서울역 집회 이후 여의도 등지에서 전국 규모의 집회를 추진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李총재는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정부 여당이 평화적·합법적 집회를 수백명의 폭력배를 동원,조직적으로 방해한 폭거는 민주주의와 현정질서를 파괴한 중대사태로 과거 자유당 정권이나 군사정권 시절에도 경험하지 못한 반(反)민주적 폭거”라고 밝혔다. 李총재는 “폭력적 방법으로 노도와 같은 민심을 누르고 야당을 파괴한다면 엄청난 국민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金大中 대통령의 사과와 金正吉 행정자치부장관,金世鈺 경찰청장해임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민도 없지 않다. 퇴로 없이 투쟁으로만 치닫기가 버겁다. 자금은 바닥이 났고 투쟁방식을 둘러싼 당내 이견도 부담이다. 추석 연휴이후 여권의 태도변화를 기대하는 눈치다.
  • 檢·警 野 서울역집회 방해 진상규명 안팎

    ◎정부 도덕성 걸고 의혹 규명/“정치음모” 野 공세에 정면대응/배후·경찰방조 여부 집중수사 지난 29일 발생한 한나라당 서울역 집회 방해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과거처럼 진상을 덮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을 빌미삼아 국회를 공전시키는 구태(舊態)도 버려야 한다. 金鍾泌 국무총리는 30일 한나라당 항의단을 맞아 철저한 진실 규명을 다짐했다. 金총리는 불상사가 발생한 데 대해 유감의 뜻도 표시했다. 여야의 주장,어느 것이 옳은 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조사를 지시했다. 金正吉 행자부장관도 경찰에 한점의 의혹도 없는 수사를 지시했다. 수사전담반도 편성했다. 대검도 비슷하다. 폭력 가담자 엄벌을 다짐하고 있다. 당국은 이미 용의자 몇몇을 소환해 조사하고 있다. 정부 조사의 초점은 크게 두가지다. 야당 주장대로 ‘불순한 배후’가 있는지가 첫번째다. 두번째는 괴청년들의 난동을 경찰병력이 방관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핵심은 배후 여부다. 정부는 철저한 조사를 벌일 태세다. 과거 정권에서도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철저히 조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50년대 자유당시절 정치깡패,70년대말 유신시절 야당전당대회의 각목사태,80년대 중반 용팔이사건 등 과거 우리 정치사는 여권의 정치음모적 사건으로 얼룩져 왔다.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그 원인과 주모자를 가려내지 못했다. 정부가 사건의 진상규명에 발빠르게 나선데는 이유가 있다. 이번 사건을 잘못 처리하면 ‘국민의 정부’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정부가 철저한 조사를 당당히 선언하고 나선 것은 현재의 집권세력 내에는 무모한 정치폭력을 획책할 만한 구시대적인 인물이 없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여권으로서는 이번 사건이 여야간 공방으로 그치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공방수준에 그치면 한편의 의혹은 남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정치공작에 희생당했던 金大中 대통령의 명예도 걸린 일이다. 또 여권이 조기 결판을 내려는것은 이번 사건이 장기화 될 경우 소모적인 정국이 경색이 계속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 결과,조직적으로 집회를 방해한 세력이 있었다면 관련여부와는 별개로 여권이 곤혹스럽겠지만,노숙자들의 돌발적 행동으로 나타나면 한나라당은 반성해야 한다. 그 양단간 어느 쪽이든 엄정하게 결론이 나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바람이다.
  • 野 집회 방해 철저 규명/정부 “폭력 가담자 엄벌”

    ◎서울역 노숙자 3명 검거 金鍾泌 국무총리는 30일 한나라당 서울역 광장 집회에서 발생한 폭력사태와 관련,“진상을 철저히 조사한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金총리는 이날 한나라당 權翊鉉 고문과 辛卿植 사무총장 등의 항의방문을 받고 유감을 표시한 뒤 이같이 말했다. 金총리는 金正吉 행정자치장관과 金世鈺 경찰청장 문책 요구에 대해서는 “사실로 밝혀지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金正吉 행정자치부 장관은 이날 金世鈺 경찰청장과 金光植 서울경찰청장을 불러 “한나라당이 폭력사태 당시 경찰이 방관했다고 주장하는 부분과 경찰의 조치에 대해 자체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대검찰청 공안부(秦炯九 검사장)는 이날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폭력 가담자들을 엄벌에 처하라고 서울지검 공안1부에 지시했다. 검찰은 이번 사태를 평화적인 집회·시위문화를 저해한 행위로 규정,현장채증자료를 정밀 분석해 가담자 전원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를 적용,사법처리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서울 경찰청은 이날 남대문경찰서 형사 30여명으로 수사전담반을 편성하는 한편 집회도중 연단에 올라가 행패를 부린 李영식씨(42·특수절도 등 전과7범) 등 노숙자 3명을 붙잡아 자세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 박영효의 귀거래(秘錄 南柯夢:25)

    ◎고종 “日本있는 박영효 불러들여라”/갑오경장으로 쫓겨났다가 하루 아침에 ‘구국재상’ 귀국/장안 환영물결 가시기도전에 며칠만에 日로 줄행랑/3년뒤엔 친일파되어…/‘헤이그’에 허찔린 이토 분통속에 잠 못이루다 이완용 내각 음모세우고/대책 고심하던 황제는 “꿩대신 닭격… 그래도 매국노보다 역적이 낫겠다” 헤이그 특사사건이 터지자 서울 남산아래 있던 통감부에서 야단이 났다.을사오조약을 늑약(勒約)하고 스스로 통감자리에 앉아 청주잔을 기울이던 이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여간첩 배정자(裵貞子)와 양아버지라 하면서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하던 이토는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 대책을 구상하는데 급급하였다. 고종황제에게 또다시 급소를 찔린 것이니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고종은 본시 을사오조약을 무효로 봤기 때문에 외교권은 아직 황제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을사오조약을 강제체결한 이토로서는 헤이그사건 하나로 자신의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가는 판이었다.명치유신의 원로로서 후배에게 무안할 뿐 아니라 일왕 명치에게는 더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역습의 호기로 이용하기로 했다.이토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민 것이다.일단계 조치가 박제순(朴齊純) 내각을 해산하고 말 잘듣는,이완용(李完用)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하는 일이었다.박제순보다 이완용이 훨씬 더 적극적인 매국노였기 때문에 그를 시켜 고종의 양위를 강박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음모였다. 그러나 고종 황제 역시 호락호락 넘어갈 분이 아니었다.이토의 음모를 예상하고 이것을 미연에 막을 인물이 누구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금능위 박영효의 이름이 떠올랐다.박영효(朴泳孝)는 철종의 부마(사위)였으나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심취,1884년 갑신정변,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했던 친일 개화당의 거두였다. 그는 갑신정변후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한 뒤 12년동안 돌아오지 못한 유랑객이었다.그러나 1907년 5월 어느날 박영효의 부하 신철희(申哲熙)가 정환덕에게 접근,복권운동을 벌였다.요즈음 같으면 각종 정치범이 미국으로 도주하지만 그때는일본으로 도주하여 기회를 노렸다.그런 인물이 일본에는 우굴우굴했다.박영효 역시 그런 기회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신철희는 문경사람이다.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때 아문주사(衙門主事)로 있다가 박영효의 덕분에 문경군수로 임명받았던 사람이다.그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이제 우리 한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으나 각부 대신들은 작록만 탐내고 자리를 지키는데만 연연합니다.이럴 때 일본에 망명해있는 금능위(錦陵尉)박영효와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바라건대 대감께서 황상께 아뢰 그를 소환해 귀국토록 하시고 내각을 다시 조직해 국가증흥을 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고 했다.이에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황상께 아뢰니 “금능위에게 빨리 전보를 쳐 귀국토록 하라”는 분부가 계셨다 오죽했으면 고종황제가 박영효같은 인물에게 매달리게 되었을까.재위 44년만에 아무도 믿을 놈이 없게 됐기 때문이다.충신은 죽고 측근에 친일 매국노만 득실거리니 박영효는 꿩 대신 닭격이었다. 황상께서 직접 전화를 거시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듯이 났는데 박영효에게서 온 전화였다.부르심을 받은 박영효는 급히 행장을 정돈한 뒤 윤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부두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그를 환영했는데 이튿날 아침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서울역 대합실에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안부를 물은 뒤 박영효를 앞뒤에서 가려주듯 동행하여 회퇴루(回退樓)에 들어갔다.이때가 밤12시였다.날이 밝기를 기다려 조반을 든 뒤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승후방(承候房)에서 대령하였다 박영효는 과거에 두차례나 역모를 꾸민 인물이다.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해 갑신오역(甲申五逆)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망명하였고 10년 뒤 돌아와서 다시 갑오경장(1894년)에 가담,역모에 몰려 두번째로 일본에 망명했다.그후 12년만인 1907년에 귀국하였으니 감개무량하였을 것이다.부산에 도착하자 그는 땅에 엎드려 고종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고종으로서는 비록 박영효가 과거에 역적이라 하더라도 이완용같은 매국노와 다르다는 사실을 믿고 그를 궁내부 대신으로 맞아들였으니 황실을 보호하는데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따라서 고종황제와 박영효는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상감부자분께서 아침 수라진지를 드시고 난 뒤 박영효를 부르니 오전 11시경이었다.문안인사가 끝난 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해를 해외에서 풍상을 겪었으니 고생이 많았을 터인데 어떻게 감내 하였소”라고 물으셨다.이에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은총이 융성하시어 이와같이 다시 해를 우러러보게 되오니 참으로 황송하여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릅니다”고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근년이래로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데 우선 경이 내각을 조직해 정치가 잘되고 백성이 화평하게 되면 나라의 위세가 만회될 것이니 이것이 일본의 ‘유신정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하시었다.박영효가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황상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음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는 특별히 비취옥술잔(翡翠玉圈) 남색전포(藍色戰袍) 도홍띠(桃紅帶) 오사모(烏紗帽) 분홍조복(粉紅朝服)등을 각각 한벌씩 하사해 입게 하시므로 그 경황이 찬란하였다 역적 박영효가 하루아침에 구국의 재상으로 돌변한 것도 그렇거니와 장안 사람들이 그가 대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지화자를 부른 것도 괴이한 일이었다. 박영효가 마침내 황제에게 사은숙배하고 물러 나와 장안 대로상을 걸어가는데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갈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모두들 말하기를 “오늘에서야 한관(漢官=옛 관료)의 위의(威儀)가 되살아났다”고 격찬하였다.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산두박첨지(山頭朴僉知)’라는 희극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늦어도 한참 늦었다.그런데도 1907년 6월30일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박영효 환영대회가 열렸다.장소는 북서(北署) 농상소(農桑所)였는데 왕년의 개화당 동지들이 부부동반하여 모여들었다.환영회장 유성준,위원 정운복이 축사를 낭독하고 연회에 들어가려 할때 돌연 총성이 울렸다. 알고 보니 정재홍(鄭在洪)이라는 분이 권총자살을 시도한 것인데,원래 이토가 모임에 나타나면 그 권총으로 사살하려 했던 것이다.박영효가 이날 환영회에 병을 핑계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토도 나타날 리가 없었다.정재홍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때 혼미한 가운데 유언하기를 “나는 평생 품었던 우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그러나 대감(박영효)은 더욱 분발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국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그는 또 유서를 남기고 노래를 지었다.“살아서 욕되니 죽어서 영화를 보자”(生辱死榮)는 제목의 노래였다.그러나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를 막지 못하고 궁내부 대신이 된지 며칠만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고 3년 뒤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한국근대사에는 이렇게 지조없는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지금도 그 후배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며칠을 지나지 않아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하면서 박영효는 제주도 유람길에 올랐으나 실은 일본으로 망명하는 것이었다.그러니 개각(改閣) 따위의 얘기는 풀이 우거진 울타리가에 버려두고 도망을 갈 것이다.옛말에 “운이 가면 영웅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運去英雄不自由)는 말이 있으니 개탄한들 무얼 하겠는가.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한나라당 서울집회 강행/與 “경제파국 초래”비난… 정국경색 지속

    여당이 29일 이틀째 국회 일부 상임위를 단독으로 열고 한나라당의 국회참여를 압박하고 있는데 맞서 한나라당은 서울대회를 강행,대치정국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서울역 앞에서 李會昌 총재와 단식중인 李基澤 전 총재권한대행 등 당지도부,소속의원 대부분이 참석한 가운데 ‘金大中정권의 국 정파탄 및 야당파괴 규탄대회’를 열었다. 李총재는 격려사를 통해 공정한 사정을 촉구한뒤 “언제든지 金大中 대통령과 만나 문제를 풀 용의가 있다”고 영수회담을 거듭 촉구했다. 한편 국민회의 鄭東泳 대변인은 “추석을 앞두고 경기침체 속에서 고생하는 국민들을 정치권이 위로하고 용기를 줘야 함에도 불구,야당이 장외집회를 여는 것은 분별없는 행위”라며 “시민들로부터 사회불안과 경제파국을 초래한 세력으로 매도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노숙자 이대로 둘순 없다­노숙자 쉼터 르포

    ◎전국 3천여명… 월동대책 비상/지원 하루 1,000명… 100명 입소 허가/숙식 제공… 예산없어 일터 알선 못해/“3D업종 택할바엔 노숙” 자세도 문제 서울 강서구 방화6사회복지관. 이곳 ‘희망의 집’에는 14명의 노숙자들이 모여 20여평 크기의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IMF 한파로 실직한 사람들이라 자활에 대한 의지가 높다. 아침 7시면 공공근로를 위해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일당 2만5,000원은 꼬박꼬박 저금을 한다. 朴모씨(37)는 “노숙생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면서 “직장을 잡으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깨끗한 방,침대,TV 등이 비치돼 노숙자들 사이에선 천국으로 통한다. 하지만 오랜 노숙 생활 탓인지 규칙적인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다고 한다. 이미 2명이 공동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복지관 李權一 부장(37)은 “자체적으로 기상·취침시간 등 규칙을 정해 생활하고 있다”면서 “처음엔 힘들어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노숙자는 서울 2,400명,부산 300명,대구 120명,인천 100명,경기 100명 등 모두 3,02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쉼터’ 32곳(수용인원 2,035명)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급하게 문을 열다보니 숙식만 제공할 뿐 자활프로그램이나 취업알선 등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해당 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식사비와 생필품비도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시는 한끼 식사값으로 880원을 책정했지만 실제로 드는 돈은 1,500∼2,000원선이다. 한사람 앞으로 5,000원씩 지급되는 생필품비로는 내의,세면도구 등을 사기에 부족하다는 게 운영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대부분의 복지관이 자선행사나 후원금 모금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운영자측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주민들의 반발이다. D사회복지관 관계자는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노숙자 수용 사실을 숨기고 있다”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실직노숙자와 부랑자를 혼동하고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수용시설도 부족하다. ‘희망의 집’ 입소자를 선별하는 서울역의 ‘노숙자 다시 서기 지원센터’에는 하루 500∼1,000명의 노숙자들이 몰리지만 평균 100여명 가량만 입소 허가를 받고 있다. 무료급식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사회단체와 종교단체들이 운영하는 무료급식소는 서울의 21곳을 비롯,전국적으로 36곳이 있다. 서울 용산역의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사람은 하루 600여명. 음식재료비만 70만원에 이른다. 운영자 兪蓮玉씨(31·여)는 그러나 “노숙자들에게 중요한 건 한끼의 식사가 아니라 다가올 겨울에 지낼 수 있는 숙소”라고 말했다. 문제는 노숙자의 수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데 있다. 사회·종교단체가 나서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임시방편적인 수단보다는 당국의 보다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 野 등원거부 정당한가(대치정국 이대로는 안된다:1)

    ◎‘司正꼬투리’ 거리정치 명분없다/비리소환­처벌 회피의도 농후/과거 야당은 개헌저지 등 큰 뜻/장외투쟁보다 원내해결 힘써야 대치정국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일단 국회에 들어가 따질 것은 따지라’는 것이다. 시리즈를 통해 정국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살펴본다. ‘정기국회 파행’ 19일째인 29일,한나라당은 서울역에서 장외집회를 다시 강행했다. 대치정국의 끝은 어디인가. 재계는 정국불안이 경제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IMF시련 기에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28일 시작된 여당 단독국회운영은 야당의 등원거부에서 비롯됐다. 한나라당은 ‘사정(司正)=야당파괴’라며 등원을 거부하고 있다. 이같은 논리는 명분도,정당성도 갖기 힘들다는 것이 원로정치인이나 학자들의 지적이다. 이른바 ‘세도(稅盜)사건’은 우리 정치사에 남을 치욕적인 일이라는게 일반인들의 공통인식이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담당할 당시 국세청을 동원,기업체마다 세금을 줄여주는 대신 정치자금을 얻어쓴 ‘엄청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비리사건 연루자의 검찰소환을 야당탄압으로 규정,당차원에서 장외투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은 정기국회 전 임시국회를 여러번 소집했다. 대부분 李信行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다. 야당의 장외투쟁은 과거의 것과 비교해서도 명분이 약하다. 90년 정기국회가 70일동안 공전됐을 때다. 야당 등원거부 명분은 3당통합의 인위적인 정계개편,여당의 법안날치기·지자제의 연기등 굵직한 사안이었다. 야당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를 던진 뒤 의원회관에서 철수했으며 세비수령도 거부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상당수의 국민이 그들의 주장에 공감했다. 정국의 실마리를 푼 쪽도 야당이었다. 단식중이던 金大中 평민당총재는 ‘국회내에서의 투쟁’을 내세워 정국돌파구를 열었다. 국정운영을 책임진 여당의 책임도 크다. 여권이 야당의 장외투쟁에 일말의 명분을 주었다는 책임론도 나온다. “사정대상에 누가누가 거론된다”는 여권 수뇌부의 발언들은 야당에 ‘기획사정’ 비난 근거를 제공했다.‘타협과 설득 기술의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80년대 이후 정기국회 공전사례 ▲12대(85년 129회 정기국회) ­정기국회는 정상적으로 개회. 직선제 개헌 요구와 관련,야당측이 고대앞 시위 강경대응을 이유로 20일동안 등원거부 ­10월28일에는 국회부의장 후보경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지명한 조연하 국회부의장 후보가 낙선하고,김영록 의원이 당선된 이른바 김역록 부의장 파동으로 7일간 공전 ▲13대(90년 151회 정기국회) ­3당 통합에 반발하고,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며 야당 정기국회등원 거부,의원직사퇴 및 세비수령거부 등 강력반발,11월18일까지 70일동안 여당 단독국회. 9차까지 본회의 진행 ▲14대(93년 165회 정기국회) ­국정조사 기간 연장과 국정조사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증인 출석문제를 놓고 5일동안 공전 ▲14대(94년 170회 정기국회) ­성수대교 붕괴에 따른 야당인 민주당의 내각 총사퇴와 대국민사과 요구. 10월24일부터 3일간 공전 ­11월5일부터는 20일동안 검찰의 12·12사건 관련자 공소권 없음 결정에 야당 반발. 또 다시 표류 ▲15대(98년 198회 정기국회) ­검찰의 국세청을 동원한 한나라당 불법 대선선거자금 모금과 비리정치인 수사,야당의원의 여당행에 반발. 한나라당 등원거부,의원직사퇴,장외투쟁. 자민련 2여 단독국회, 2차 본회의 진행. 9월10일 개회식부터 20일동안 공전중
  • 노숙자 이대로 둘순 없다­직업훈련 현장

    ◎“이제 방황 끝” 재기 구슬땀/춘천기능대학 55명 용접기술 등 습득 열올려/새출발 다짐속 수당·취업준비금 부족 호소도 “다시는 거리에서 방황하는 노숙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29일 상오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 춘천기능대학의 ‘노숙자 직업훈련장’. 1평 남짓한 10여개의 용접부스에서는 전기용접을 배우는 10여명의 훈련생들이 용접의 불꽃을 튀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남루한 차림새에 노숙자 생활의 자취가 남아 있지만 교육에 임하는 눈빛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강렬했다. 현재 이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는 훈련생은 모두 55명. 지난 7월초 서울역 등 노숙자 상담소를 통해 이곳에 들어온 뒤 용접·전기·기계 등 3개 직종의 직업훈련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는 교육비와 기숙사 비용,식사,월 8만원의 교육훈련수당 등이 국가에서 지원된다. 6개월동안 800시간의 이론 및 실기교육을 마치고 오는 12월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면 직장을 알선받는다. 훈련생 崔모씨(45·서울 송파구)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부도가 난 뒤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하다가 용접 자격증과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다.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崔씨는 “노숙자로 전락하면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으나 이곳에 들어온 뒤 희망을 가지게 됐다”면서 “꼭 새 출발을 해 군에 간 아들과 고교 졸업을 앞둔 딸에게 떳떳한 가장으로 다시 서겠다”고 다짐했다. 훈련생들은 최저생계비의 25%에도 못미치는 훈련수당에 대한 불만과 재취업 걱정을 털어놨다. 지난 4월 목포에 있는 H중공업에서 정리해고된 뒤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하다 이곳에 온 權모씨(36)는 “모두 빈 손으로 들어왔는데 수당이 적어 속옷조차 제대로 사기 어렵다”면서 “취업준비금이라도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한나라 서울대회 이모저모/“稅盜들이 무슨 염치로”100여명 항의

    한나라당은 29일 오후 서울역 앞에서 ‘국정파탄 및 야당파괴 규탄대회’를 열었으나 노숙자 등으로 보이는 일부 청년들이 대회를 방해하고 비까지 내려 대여(對與)공세 수위를 최고조로 높이지 못했다. 당초 예상인원 2만여명에 훨씬 못미치는 1만여명만 대회를 지켜봤다. ○…연사들은 여권의 편파 사정(司正)과 야당 파괴,실업사태 등 경제 실정(失政),안보 난맥상을 집중 성토했다. 李會昌 총재는 “난국을 풀기 위해 金大中 대통령이 먼저 야당의원 빼가기와 편파사정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金德龍 전 부총재는 “우리의 몸부림은 피땀과 눈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항쟁”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11일째 단식농성중인 李基澤 전 총재대행은 측근의 부축을 받아 단상에 올랐다. 李전대행은 權五乙 의원이 대독한 연설에서 “金대통령부터 대선자금과 정치자금에 대해 양심선언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회 등원파인 李漢東 전 부총재도 집회에 처음 모습을 보였다. 李총재의 부인 韓仁玉 여사와 소속 의원 부인들도 대거 참석했다. ○…오후 3시 대회 시작 1시간 전부터 남루한 차림의 청년 100여명이 연단으로 몰려와 집회를 방해했다. 이들은 “세금도둑들이 무슨 염치로 이곳까지 왔느냐”“일자리를 내놓으라”고 고함치다 이를 저지하는 한나라당 청년당원들과 심한 몸싸움을 했다. ○…張光根 부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내고 “金대통령은 이러한 괴세력들의 준동을 방치한 데 대해 즉시 사과하고 행자부장관과 경찰청장을 즉각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 ‘여야 시국 TV토론’ 국민적 공감대 확산

    ◎‘정치정상화 묘수’ 큰 설득력/與 적극적… 성사 野에 달려 “TV토론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직접 심판을 받자” 여야 정치공방이 평행선을 그리며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정국을 풀기 위해 서울신문이 처음으로 제기한(본보 25일자 1면 時論 참조) ‘방송토론회’ 개최 방안이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지난 대선때 확인했듯이 TV토론은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경비를 절약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장외투쟁이라는 옛 정치틀을 벗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차원에서도 그렇다.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국민회의는 서울신문의 이같은 제안에 따라 26일 한나라당에 시국토론회 개최를 공식 제의했다. 27일에는 MBC에서 여야 3당에 시국토론회 참석 여부를 물어옴으로써 토론회 개최가 가시화됐다. 국민회의는 방송토론회 참석에 조건을 달지 않았다. 단지 빠른 시일내에,가능하면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가 직접 토론자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제도 ‘세도(稅盜)사건’,지역감정 조장을 포함해 시국전반이다. 한나라당도 일단 긍정적이다. ‘표적사정,야당파괴공작’ 등이 토론 주제에 포함되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이다. 토론회 참석여부는 29일 서울역 집회이후 논의할 사안이라며 확답을 피했다. 그러나 李총재의 토론회 참석은 李총재와 국민회의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의 격이 맞지 않는다며 거부의사를 피력했다. 방송토론회 성사여부는 이제 야당측의 보다 유연한 대응에 달려 있는 셈이다. 시민단체에서는 추석전 시국토론회 개최를 촉구하고 있다.
  • 노숙자 이대로 둘순 없다­노숙자 상담 조사

    ◎40대·중졸·서울 출신 가장 많아/30대 30%·60대 9%… 전문대졸 이상은 6%뿐/“안정된 직장 구할때까지 노숙 계속” 66% 노숙자의 70%가 중졸 이상의 학력자다. 또 3명 가운데 2명은 안정된 직장을 구할 때까지 노숙자 생활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6월15일부터 보름동안 서울역 영등포역 청량리역 용산역 종묘공원 을지로지하도 서소문공원 등 7곳에서 노숙자 2,553명을 상담,실태를 분석한 결과다. 조사결과 노숙자의 98%가 남자며 여자는 2%에 불과했다.연령은 평균 41세로 ▲40대 33% ▲30대 30% ▲60대 이상 9% 등의 순이었다. 학력은 고졸 42%,중졸 28%,국졸 19%,전문대졸 이상 6%였다. 대부분이 IMF 이후 실직한 일용직 근로자이고 상습 부랑인은 6%에 그쳤다. 51%가 미혼이었고 기혼은 25%,이혼 및 별거·사별 등 가족이 해체된 경우가 24%였다.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노숙자는 80%,분실 16%,말소 4%였다. 출신지역은 서울 53%,경기 17%로 수도권지역이 전체 노숙자의 70%를 차지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67%가 노숙기간이 3개월 미만이었고,이들을 포함해 IMF 이후 노숙자가 전체의 94%였다. 실직 전 직업은 일용직 근로자가 70%,사무직·자영업 등 화이트 칼라가 16%였다. 실직 전 월평균 임금은 136만원이었다. 67%가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으나,27%는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정신질환자는 5%였다. 쉼터나 합숙소를 이용하겠다는 노숙자는 50.6%인 반면 49.4%는 노숙을 택하겠다고 응답했다. 쉼터나 합숙소 대신 노숙을 선호하는 이유는 ‘자유롭지 못해서’(37%),‘어떤 곳인지 몰라서’(14%),‘일자리와 멀어서’(13%),‘한달 이상 있을 수 없어서’(13%) 등의 순이었다. 아울러 노숙자 가운데 34%가 ‘갈 곳이 없어서’,33%가 ‘식구들 보기가 미안해서’ 귀향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