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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커’ 돌아오나… 9월부터 중국 직항 18개도시 주178회로 늘 듯

    ‘유커’ 돌아오나… 9월부터 중국 직항 18개도시 주178회로 늘 듯

    여름철 성수기 제주 관광시장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가운데 제주도가 중국 단체관광(유커)이 다시 재개되도록 중국 당국에 협조를 요청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26일 오전 제주 드림타워에서 열린 제주도와 중국 교류도시 간 미래발전과 한중 경제 공동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한·중 미래발전 제주국제교류주간’ 개막식에 참석한 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와의 면담을 갖고 단체관광 재개를 통한 관광산업의 상호발전을 도모하기로 뜻을 모았다. # 오영훈 지사, 중국 단체관광객 재개 중국에 협조 요청… 싱하이밍 “중국정부에 전달할 것” 화답 오 지사는 면담을 통해 “올해 2월 중국대사관을 찾아 단기비자를 통한 제주관광이 이뤄질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한 이후 개별 중국관광객이 지난해 대비 26배 정도 늘어 제주지역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됐다”며 감사를 전한 뒤 “개별 관광과 함께 중국 단체관광객이 제주에 올 수 있도록 중국 당국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요청했다. 이어 “올해 3월부터 제주와 베이징 간 직항 노선이 개설된 만큼 단체관광객 및 기업 인센티브 관광과 크루즈 관광이 활성화되면 코로나19 이전 상황까지 관광산업이 복원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8월에 베이징을 방문해 베이징 시민들에게 제주관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문화예술 관련 고위급 인사도 만나 다양한 의견을 요청할 수 있도록 중국대사관 차원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에 싱하이밍 대사는 “제주도에서 단체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요구해주셔서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중한 우호교류를 위해 제주에서 많은 힘을 쓰는 만큼 제주의 요청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중국정부에 전달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와 함께 “중한 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이기 때문에 교류를 많이 해야 마음이 가까워질 수 있으므로 서로 오고 가는 관광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코로나 때문에 제주와 중국관광이 어쩔 수 없이 중단됐지만, 양국의 관광이 재개될 수 있도록 제주도와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중국 직항노선 도시 9월부터 18개도시 178회로 확대 전망… 침체 기로 제주관광시장 활기 기대 이와 관련 다음달부터 중국 직항노선도 다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날 서울신문이 항공정보포털시스템 등과 자체 취재를 종합해 본 결과 7월 중국 직항노선이 98회 운항에 이어 8월 타이중(주 2회), 다롄(주2회)등이 추가돼 주102회 운항될 예정이며, 9월 이후에는 총 178회로 크게 확대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8월과 9월 운항 스케줄을 보면 주요도시 8개(마카오, 홍콩 포함)에서 18개 도시로 두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광저우(주7회), 난징(주14회), 난퉁(주2회), 다롄(주11회), 시안(주2회), 창사(주2회), 창춘(주3회), 천진(주6회), 청도(주2회), 하얼빈(주2회) 등 10여개 직항노선이 9월 이후 뜰 전망이다. 이럴 경우 중국 직항노선만 주 178회로 확대된다. 일각선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즈음해 중국 단체관광이 풀릴 것으로 내다보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번 ‘한·중 미래발전 제주국제교류주간’ 개막식으로 분주한 롯데관광개발 측은 “해외 직항 노선의 확대로 제주 드림타워 복합리조트의 호텔과 카지노가 수혜를 보고 있다”며 “중국 단체관광까지 재개되면 침체기로에 선 제주관광시장이 다시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한·중 미래발전 제주국제교류주간’ 개막식에는 오 지사,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김경학 도의회 의장, 김광수 교육감, 왕루신 주제주중국총영사, 백범흠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 사무차장을 비롯해 제주-중국 우호 교류도시 및 한중 우호 단체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 70년 전 비무장의 선 그은 ‘세 공간’… 남북 대치 최전선에 서다[정전협정 70주년]

    70년 전 비무장의 선 그은 ‘세 공간’… 남북 대치 최전선에 서다[정전협정 70주년]

    70년 전 정전협정은 6·25전쟁 휴전을 위해 남북 간 군사분계선(MDL)과 함께 비무장지대(DMZ),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설정했다. 정전협정 당시 뚜렷한 해상경계규정이 없었지만 이후 실질적 경계가 된 북방한계선(NLL)은 DMZ,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함께 70년간 남북 간 충돌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이 이어진 가운데 세 공간은 대치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이후 한반도에서 한국군 4268명과 미군 92명 등 총 4360명이 북한과의 충돌에서 희생됐고, 북측도 못지않은 전사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은 결코 평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정전협정의 태생적 한계를 되새기게 한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25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정전협정은 평화적 해결을 위해 3개월 내 정치회의를 소집하기로 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후 바다 경계는 분쟁의 열점이 됐고 DMZ나 한강하구는 본래 기능이 왜곡됐다”며 “임시 방편으로 설정된 세 공간에 누적된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무장지대 DMZ도끼만행·목함지뢰 ‘일촉즉발’서판문점 남북미 대화의 장 역할도北 잇단 도발에 9·19 합의 기로에 DMZ는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MDL을 기준으로 남방·북방한계선 사이 폭 4㎞, 길이 155마일인 긴 띠 형태의 지역이다. 정전협정은 DMZ에서 상호 적대행위를 금지했지만 휴전 직후부터 대치의 공간이 됐다. 1976년 유엔군사령부 소속 미군장교 2명이 북한에 의해 살해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2015년 목함 지뢰로 한국군 2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 등 우발적 충돌은 일촉즉발의 긴장을 불러왔다. DMZ 내 판문점은 2018년 1·2차 남북정상회담, 2019년 6·30 남북미 회동 등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화의 장으로도 기능했다. 특히 2018년 3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물인 9·19군사합의는 정전협정의 비무장 취지를 되살리려는 취지였지만 5년이 지난 지금 효력 정지의 갈림길에 있다. 9·19 합의에서 남북은 지상·해상 완충구역과 공중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고 DMZ 내 감시초소(GP) 200여개 가운데 22개를 철수했다. 그러나 합의 위반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무인기 도발 직후 다시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엔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DMZ 남측 지역은 유엔군사령부가 통제를 맡고 있어 한국 정부의 권한이 일부 제한되는 곳이다. 최근에는 공동경비구역(JSA)을 견학하던 주한미군이 월북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한강하구 중립수역파주~강화 67㎞ 구간 DMZ 연장선 민간 선박 항행 대신 中불법 조업하노이 노딜에 공동이용 추진 멈춰 한강하구 중립수역은 DMZ의 연장선으로 경기 파주시 만우리에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까지 약 67㎞ 구간이다. 정전협정은 유엔사 허가 없는 군용선박의 출입을 금지하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 선박은 유엔사에 등록하도록 했다. 다만 실제 민간선박 항행 사례는 손에 꼽힌다. 오히려 중국 어선이 불법 조업에 나서면서 2016년 군·해경·유엔사가 공동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남북은 9·19 합의에 따라 민간 선박의 자유항행을 위한 한강·임진강 하구 수로조사에 나섰고 정부는 2019년 초 남북 공동이용수역에 대한 해도 제작까지 완료했지만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실제 성과에 이르진 못했다.북방한계선 NLL정전협정서 해상경계 합의 빠져北 지속적 무효 주장하며 선 넘어 천안함·연평도 포격 충돌 불씨로 정전협정은 백령도 등 서해 5도를 남측 영토로 포함시켰지만 해상경계엔 합의하지 않으면서 충돌의 불씨가 됐다. NLL은 마크 클라크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협정 체결 한 달 뒤 우발적 무력충돌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서해와 동해상에 설정한 해상경계선이다. 당시 북한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1973년에는 항행 사전 승인을 요구하는 등 NLL 무효를 주장해 왔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영해 기준으로 3해리(약 5.5㎞)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다 1970년대부터 12해리(약 22㎞)로 바뀐 것도 한 요인이 됐다. 북한은 1999년 1차 연평해전을 일으킨 직후 NLL 남쪽에 설정한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선포했고 3년 뒤엔 NLL 이남에서 북측 공격으로 우리 군인 6명이 전사한 2차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북한은 2004년 서해 해상 경비계선을 새롭게 들고 나왔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도 이어졌다. 정부는 NLL이 실질적인 남북 간 경계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2020년 서해에서 실종된 공무원을 수색하는 우리 쪽에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무단 침범했다”고 경고하고 올해 4월 북한의 경비정 1척이 서해 NLL을 침범하는 등 긴장은 여전하다.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전협정은 각자의 영해를 존중하고 ‘공해자유의 원칙’에 따라 바다를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으나 충돌이 발생하다 보니 선을 긋고 군사적 작전수역이 되어버렸다”며 “정전협정 취지대로 공동의 수역, 비무장 수역으로 만들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이상민 탄핵 전원일치 기각… 수해 현장으로 ‘행안장관’ 복귀

    이상민 탄핵 전원일치 기각… 수해 현장으로 ‘행안장관’ 복귀

    헌법재판소가 25일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논란이 일었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 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국무위원을 대상으로 한 헌정사상 첫 탄핵 심판으로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26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지 167일 만이다. 헌재는 이날 오후 2시 대심판정에서 열린 이 장관 탄핵 심판 선고 재판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탄핵 소추 의결로 직무가 정지됐던 이 장관은 즉시 직무에 복귀하게 됐다. 헌재는 “이 장관은 행정안전부의 장이므로 사회재난과 인명 피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도 “헌법과 법률의 관점에서 재난안전법과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헌법상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참사 경과나 피해 규모 등에 비춰 이 장관이 최선의 조치를 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와 별개로 헌법과 법률적 관점에서 위법하다고 볼 순 없다는 취지다. 특히 헌재는 이태원 참사가 어느 특정인에 의해 발생·확대된 것이 아니라 각 정부 기관이 대규모 재난에 대한 통합 대응 역량을 기르지 못한 점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탓이라고 판단했다. 또 이태원 참사를 전후해 이 장관의 사전 예방조치 의무, 사후 재난 대응, 국회 사후 발언 등 모든 쟁점과 관련해 탄핵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다만 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은 “이 장관의 사후 대응이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한 것은 맞다”고 했다. 아울러 세 재판관과 정정미 재판관 등 4명은 이 장관의 사후 발언 일부가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국가공무원법상 품위유지 의무 위반 행위라고 봤다. 다만 이들 모두 이러한 잘못이 이 장관을 탄핵할 정도는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대통령실은 이 장관에 대한 헌재 결정 직후 “(거야의) 반헌법적 행태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는 거야의 탄핵소추권 남용”이라고 했다.
  • “돌아가신 분의 고통 공감해야” “안락사 논의 부족해 시기상조” [금기된 죽음, 안락사⑥]

    “돌아가신 분의 고통 공감해야” “안락사 논의 부족해 시기상조” [금기된 죽음, 안락사⑥]

    <6> 스위스 동행 이후 생각 바뀐 이들 스위스 조력사망에 동행한 두 사람의 인생은 갈렸다. 한 사람은 안락사 찬성자가, 또 한 사람은 반대자가 됐다. 찬성하는 이는 다니던 교회를 떠났고, 반대하는 사람은 종교에 귀의했다. 케빈(52·가명)씨와 신아연(60) 작가의 이야기다. 케빈씨는 2019년 3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조력사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안락사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2019년 3월 6·7일자). 암 말기 상태로 투병하던 그의 친구는 디그니타스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 취리히 근교 파피콘에서 사망했다. 호주 시민권자인 신 작가는 시드니에 거주하던 한국인 허모(당시 63)씨의 요청으로 동행한 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폐암 말기였던 허씨는 2021년 8월 스위스 바젤에 있는 페가소스의 도움으로 조력사망했다.함께한 ‘마지막 여행’ 이후케빈씨는 조력사망 찬성론자로신 작가는 반대론자로 바뀌게 돼 아직 우리 사회에선 낯선 조력사망을 가까이서 지켜본 두 사람이 지난달 2일 서울신문 대담을 위해 한자리에서 만났다. 스위스에서의 경험은 삶의 가치관을 크게 바꿀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두 사람은 회고했다. 케빈씨는 “돌아가신 분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신 작가는 “삶과 죽음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조력사망이 도입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케빈씨는 조력사망 도입을 위해 시민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 작가는 죽음에 대한 성숙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했다. 케빈씨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지만 고인의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위해 익명을 요청했기에 기사에서는 그의 영어 이름을 사용했다. -한국에서는 어렵고 힘든, 독특한 경험을 하신 몇 안 되는 두 분이 만나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케빈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끝나는 만남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살짝 대화해 보니 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신 작가 “그분(케빈씨 친구)이 참 좋은 분하고 가셨구나, 생각했어요. 마지막 가는 분은 심사숙고해서 동행자를 구하기 때문에 그분으로선 절실했을 거예요. 인상이 좋고 진실하신 모습에 제 마음이 다 놓이더라고요.”-조력사망에 대한 입장은 각각 어떠신가요. 케빈 “우리도 필요한 제도이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건 한국,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다 똑같아요. 아프면 아픔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오죽하면 죽음까지 생각할까요. 불치병으로 삶 자체가 힘든 분들에게는 그분들이 원한다면 삶을 편안하게 마감할 수 있는 선택권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작가 “원론적으로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을 내가 선택하지 않았듯이 마무리도 내가 선택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선 시기상조예요. 자살의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는 죽음에 관한 토론 자체를 너무 싫어하는데 이런 상태에서 이를 합법화하면 정말 혼란스러울 거예요. 사회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다음에 이 얘기가 나왔으면 해요.” 케빈 “조력죽음이라는 것이 새로운 문화라고 생각해요. 부작용이나 문제가 많았다면 (처음 법제화한) 네덜란드에서 다른 나라로 퍼져나갈 수 없었을 거예요. 논쟁은 어느 나라에나 있고,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찬성하기에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이 제도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국가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 작가 “제도가 한번 시행되면 범위는 확대될 거예요. 조력사망 제도가 아예 없다면 더 의지를 갖고 투병할 수 있을 텐데, 그 제도가 있으니까 죽겠다고 할 수도 있어요. 이런 게 전염돼 ‘옆집 아저씨는 조력사했는데 우리 엄마는 왜 살아 있지’ 이렇게 될 수도 있고요.” 케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만으로 이럴 수도 있다고 하는 건 조금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의 예를 보면 오리건주에서 1997년 조력사망 제도가 시작돼 25년 만에 10개 주가 그 제도를 인용해 제도화했어요. 25년 동안 우리가 걱정하는 것처럼 사회적 약자가 원하지 않은 죽음을 강요받았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신 작가 “그 나라와 우리나라는 문화가 다르잖아요.”가치관 완전히 뒤집힌 경험신 작가, 동행 이후 한동안 무기력 “탄생 선택 못해… 죽음도 마찬가지” -우리나라가 시기상조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 작가 “우리는 집단 문화예요. 정말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가 아니에요. 서양 사람들은 99%가 자기가 결정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가족, 특히 자식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본인이 결정하기란 어려울 겁니다.” 케빈 “이 제도가 도입되면 조력사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강요에 의해 죽음에 내몰릴 거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 제도의 특징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안규백 의원이 발의한 조력존엄사법의 요건을 보면 18세 이상 말기 환자이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스위스 동행 후 삶이 달라졌다고 느끼세요. 신 작가 “저로선 그런 드라마틱한 임종은 처음이었어요. 제 눈앞에서 멀쩡하게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었던 분이 ‘나 그만 갈게, 나중에 봐’ 하고 탁 가시는데, 갑자기 살아 있던 사람이 죽은 사람으로 바뀐 거예요.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서 선 하나 넘는 것이구나, 삶이 정말 소중한 거구나, 깨달았어요.” 케빈 “제 삶의 절반 정도가 바뀐 것 같아요. 이전에는 어떻게 하면 잘 살까, 주로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면 스위스에 갔다 와서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특히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적인 죽음일까를 많이 생각해요. 그러면서 교회와도 멀어지게 됐고요.” -종교는 두 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케빈 “전 원래도 안락사를 찬성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스위스에서의 경험이 내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을 끄집어낸 것 같아요. 제가 비록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그것이 신앙과 대립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다닌 교회도 조력사망에 대해 반대하거든요. 전 이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더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서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됐어요.” 신 작가 “전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죠. 그러다 안락사에 관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셨어요. 그러면서 전 조력사를 택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이며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죽음을 선택할 순 없다고 느꼈어요. 진정성 있는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케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제 친구도 이런 얘길 했어요. ‘내가 죽어 하나님 앞에 가면 뭐라고 하실까.’ 저는 하나님이 너를 이해할 거라고 말했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벌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우리나라서 합법이었다면친구와 스위스까지 함께 간 케빈 한국 처벌 두려워 임종은 못 지켜 -우리나라에서 조력사망이 허용됐다면 두 분이 느끼는 감정도 달라졌을까요. 신 작가 “전 원래는 안락사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아니었어요.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스위스까지 갔기 때문에 느낀 감정들은 있어요. 그곳(조력사망 장소)은 정말이지 아담하고 깔끔한 병원도 아니었고 창고 같은 곳이었어요. 그 나라도 국민정서상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외곽에서 하는 게 아닐까 해요. 왜 멀쩡한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죽음을 맞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7~8명이 갔는데 같이 여행하다가 갑자기 한 명이 사고가 나서 죽는 것 같은,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어요. 다 같이 밥을 먹는데, 다음날 한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케빈 “우리나라에서 그 제도가 합법화됐다면 친구와 저의 이별이 더 아름다웠을 것 같아요. 스위스에 가기 전에 친구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안 가도 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이게 친구의 마지막 길이라 생각하니 거절할 수 없었어요.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고요. 그런데 막상 디데이 전날이 되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한국에 돌아와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친구를 다시 서울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제 마음과 걱정을 안 친구가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했고, 제가 비겁하지만 말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저는 호텔 방에 남아 친구의 임종을 못 지켰어요. 만약 그런 법(자살방조죄)이 없었다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훨씬 아름답고 편안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다시 동행 제안이 온다면책 낸 뒤 잇단 제안받은 신 작가“죽음 말리지 못한 것에 자괴감” -다음에 또 동행 제안이 오면 같은 선택을 하실 것 같나요. 케빈 “친한 친구나 가족이면 제가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같이 갈 거예요. 친한 친구나 가족이면 옆에서 보잖아요, 이분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지를. 치료할 방법이 없고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선 조력사망이라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갈 것 같아요.” 신 작가 “전 다시 한번 가게 되면 열렬히 말릴 거예요. 그땐 경험이 없다 보니 다들 얼어 있었고, 그분(고인)이 주도하는 데에 압도됐던 것 같아요. 말리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 자책감이 너무 컸어요. 책을 낸 뒤 세 번 정도 동행 제안을 받았는데 메일이나 카톡을 주고받으며 말리고 있어요. 깊이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조력사망을 허용하자는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사회적 논의가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세요. 신 작가 “자꾸 이런 자리가 만들어져야죠. 사실 고인께서 자기 경험을 글로 써 달라고 한 것도 우리나라에서 안락사가 공론화되길 바라서였어요.” 케빈 “백퍼센트 동의합니다. 작년 6월에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됐는데 지금까지 사회적 논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안규백 의원이 발의했으면 책임감 있게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 작가 “논의가 되려다가 다시 뚜껑이 닫힌 것 같아요. 더 치고 나가 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같은 얘기만 반복되고 있어요.” 케빈 “때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조력사망에 대해 얘기하는데 반대쪽에선 호스피스를 이야기하거든요. 호스피스 제도가 있다고 해서 조력사망 제도가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신 작가 “호스피스가 대안은 될 수 있죠. 연명의료 중단으로 끝낼 수도 있고 호스피스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 아주 다른 얘기는 아니에요.” -조력사망이 허용된다면 범위는 어디까지로 보세요. 케빈 “고통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봐요. 말기 환자만 고통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정신적 질환이 있는 분들도 고통이 있을 수 있고 신경계나 근육병이 있는 분들, 마비 상태로 계신 분들도 고통이 극심할 수 있어요. 참을 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는 고통 속에 있는 분이 조력사망을 원한다면 도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 작가 “제도가 있기 때문에 쓰게 되는 거예요. 말은 좋아 보여도 현대판 고려장처럼 끔찍한 사회가 될 것 같아요. 정말 본인이 원한다고 하는 기준을 갖기도 힘들고요. 본인이 원한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게 있어요.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니듯이 죽음도 나만의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죽고 나면 남은 사람이 굉장히 힘들어져요. (스위스에) 함께 갔던 부인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요.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 내 인생은 뭔가 하는 고통에서 못 벗어납니다.”존엄한 죽음은 어떤 것인가케빈 “존엄은 자율성에서 기인타인이 나의 죽음 정할 수 없어” -존엄한 죽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사회는 그런 죽음을 맞이할 여건이 돼 있다고 보세요. 신 작가 “두 가지 면에서 아닌 것 같아요. 첫째는 의료가 지나치게 개입해요. 집에 있다가도 결국은 다 병원으로 가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죠. 두 번째는 우리 사회가 너무 외로워요.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들은 오늘 죽으면 언제 발견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맞물리니 죽음이 존엄할 수가 없죠. 이런 상태에서는 조력사 이전에 죽음 전반에 관한 얘기를 정말 해야 해요.” 케빈 “저는 존엄이란 인간만이 갖는 속성이며 그 속성은 자율성에 기초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존엄한 것 아닐까. 또 하나는, 죽음은 매우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남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자신만이 자기 죽음에 대해 존엄하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제가 여러분의 존엄한 죽음을 정의해 드릴 순 없지만 나의 존엄한 죽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존엄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고인 스스로 선택한 존엄한 죽음이라면 그것은 존엄한 죽음으로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 작가 “선생님은 조력사망을 선택하실 건가요.” 케빈 “저는 병에 걸리면 스위스에 좀더 일찍 가서 여행도 하면서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다만 집사람한테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게 좋은 경험은 아니고, 죽음을 본다는 게 가족한테도 힘든 시간이 될 것 같아서요.” 신 작가 “안락사에 대한 가치관이 친구분을 따라갔다고 해서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친구분이 어떤 영향을 줬나요? 그게 좋아 보였나요.” 케빈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죽게 되는 것이라면 나로서는 고통의 길을 걷지 않고, 좀더 생생할 때 하고 싶은 걸 하고 죽고 싶어요.” -가족에겐 좋은 경험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건 결국 자기한테는 좋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겐 좋지 않은 경험이라는 의미인가요. 한국에 도입됐을 때 가족은 훨씬 힘들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케빈 “이 제도가 한국에 있다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틸 거예요. 다만 지금은 스위스로 가야 하므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찍 나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족에게 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까 봐서죠. 제가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이에요.” 신 작가 “조력사망을 지켜보는 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경험이었어요. 그분은 편안하게 가셨지만 우리는 편치 않았어요. 옆에서 말리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너무 싫고 무기력했어요. 끝나고 나서 저녁을 먹는데 나 자신이 역겨웠어요. 다들 잊으려고 일부러 더 떠들고 먹고 하다가 갑자기 다 같이 풀이 죽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케빈 “제 추측이긴 합니다만 같이 가셨던 분들이 그분과 같이 생활했던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안락사에 관한 영화 ‘청원’이나 ‘씨인사이드’를 보면서 제가 얻은 메시지가 있는데요. 그중 한 가지는 그 환자를 정말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안락사를 받아들여요. 그 사람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이에요.”동행이 남긴 새로운 숙제신 작가 책 수익, 호스피스 지원케빈 “관련 영화 제작 돕고 싶어” -존엄사와 관련한 활동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신 작가 “우리 사회는 너무 감각적이고 책도 안 읽고 사유를 안 해요. 이 제도가 정말 선진국에서 들어오는 제도라면 우리도 인문적 사유와 통찰을 통해 죽음에 관한 인식을 선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무르익고 일상에서도 죽음이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있도록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제가 쓴 책의 수익금으로는 호스피스를 지원할 생각이에요.” 케빈 “개인적으로 세 가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우선은 친구가 떠난 스위스 블루하우스 앞 정원에 친구를 기억하는 나무를 심으려고 해요. 디그니타스에 그 얘길 했더니 심으라고 하면서 나무 종류까지 정해 주더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안락사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국 영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언제쯤 제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기획취재부 유영규 부장, 신융아·이주원 기자 서울신문의 ‘금기된 죽음, 안락사’ 기획기사는 ‘인터랙티브형 기사’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QR코드를 찍거나 아래 링크를 복사해 인터넷 주소창에 붙이는 방법으로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eoul.co.kr/SpecialEdition/euthanasia
  • “교권 회복” “주홍글씨”… 교원지위법 논쟁 불씨 된 ‘생기부 기재’

    “교권 회복” “주홍글씨”… 교원지위법 논쟁 불씨 된 ‘생기부 기재’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으로 불거진 교권침해 논란과 학생인권조례의 인과관계를 두고 진영 간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교권 회복을 위한 법 개정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교권침해 행위를 생활기록부에 남기는 데 대해 부정적이어서 난항이 예상된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5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교권침해 행위를 한 학생에 대해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남기고, 교사의 정당한 지도에 대해 면책을 보장하는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며 “야당과 협의해 해당 법안 통과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학생 반항 조장 조례’이자 ‘학부모 갑질·민원 조례’로 변질됐다”며 개정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만 체벌 부활에 대한 질문에는 “국민 정서나 기준이 많이 바뀌었다”며 일축했다. 윤 원내대표가 언급한 법안은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교원지위법)과 초중등교육법이다. 쟁점은 교원지위법에 포함된 ‘교육활동 침해 생활기록부 기재’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교원지위법 발의안 11건 중 5건이 교권 관련 내용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여당 간사 이태규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교육활동 침해 행위를 한 학생에 대한 조치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남기도록 했다. 같은 당 서정숙 의원안은 교육활동 침해를 한 학생에 대해 출석정지 등 긴급 조치를 할 수 있는 내용이다.반면 강득구 민주당 의원은 학교별 교권보호위원회를 교육청 관할로 이관해 피해를 본 교원에 대해 충분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아동학대 범죄로 신고돼 조사받는 경우 학교장이 의견을 제출하는 내용을 발의했다. 민주당은 교권 회복과 학생인권조례 개정을 연동하려는 정부·여당 움직임을 ‘정치적 프레임’이라고 본다. 특히 생기부 기재에 유보적이다. 강 의원은 “생활기록부는 50년 동안 가는 것이고 아이들 인생에 주홍글씨가 남는 것”이라며 “그에 비해 교권이 나아질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민석 정책위의장도 간담회에서 “생기부에 기록을 남기느냐를 두고 소송이 증가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밝혔다. 여야 모두 정당한 학생생활지도에 대해서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아동학대 범죄로 보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에는 이견이 없다. 이태규 의원은 서울신문 통화에서 “교육위 전체회의를 오는 28일에 열어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상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26일 당정협의회를 열고 법안 개정 등 교권 보호 대책을 논의한다.
  • 70년 전 비무장의 선 그은 ‘세 공간’...남북 대치 최전선에 서다

    70년 전 비무장의 선 그은 ‘세 공간’...남북 대치 최전선에 서다

    70년 전 정전협정은 6·25전쟁 휴전을 위해 남북 간 군사분계선(MDL)과 함께 비무장지대(DMZ),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설정했다. 정전협정 당시 뚜렷한 해상경계규정이 없었지만 이후 실질적 경계가 된 북방한계선(NLL)은 DMZ,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함께 70년간 남북 간 충돌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이 이어진 가운데 세 공간은 대치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이후 한반도에서 한국군 4268명과 미군 92명 등 총 4360명이 북한과의 충돌에서 희생됐고, 북측도 못지않은 전사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은 결코 평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정전협정의 태생적 한계를 되새기게 한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25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정전협정은 평화적 해결을 위해 3개월 내 정치회의를 소집하기로 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후 바다 경계는 분쟁의 열점이 됐고 DMZ나 한강하구는 본래 기능이 왜곡됐다”며 “임시 방편으로 설정된 세 공간에 누적된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DMZ는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MDL을 기준으로 남방·북방한계선 사이 폭 4㎞, 길이 155마일인 긴 띠 형태의 지역이다. 정전협정은 DMZ에서 상호 적대행위를 금지했지만 휴전 직후부터 대치의 공간이 됐다. 1976년 유엔군사령부 소속 미군장교 2명이 북한에 의해 살해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2015년 목함 지뢰로 한국군 2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 등 우발적 충돌은 일촉즉발의 긴장을 불러왔다. DMZ 내 판문점은 2018년 1·2차 남북정상회담, 2019년 6·30 남북미 회동 등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화의 장으로도 기능했다. 특히 2018년 3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물인 9·19군사합의는 정전협정의 비무장 취지를 되살리려는 취지였지만 5년이 지난 지금 효력 정지의 갈림길에 있다. 9·19 합의에서 남북은 지상·해상 완충구역과 공중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고 DMZ 내 감시초소(GP) 200여개 가운데 22개를 철수했다. 그러나 합의 위반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무인기 도발 직후 다시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엔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DMZ 남측 지역은 정전협정상 유엔군사령부가 통제를 맡고 있어 한국 정부의 권한이 일부 제한되는 곳이다. 최근에는 공동경비구역(JSA)을 견학하던 주한미군 트래비스 킹이 월북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한강하구 중립수역은 DMZ의 연장선으로 경기 파주시 만우리에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까지 약 67㎞ 구간이다. 정전협정은 유엔사 허가 없는 군용선박의 출입을 금지하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 선박은 유엔사에 등록하도록 했다. 다만 실제 민간선박 항행 사례는 손에 꼽힌다. 오히려 중국 어선이 불법 조업에 나서면서 2016년 군·해경·유엔사가 공동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남북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민간 선박의 자유항행을 위한 한강·임진강 하구 수로조사에 나섰고 정부는 2019년 초 남북 공동이용수역에 대한 해도 제작까지 완료했지만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실제 성과에 이르진 못했다. 정전협정은 백령도 등 서해 5도를 남측 영토로 포함시켰지만 해상경계엔 합의하지 않으면서 충돌의 불씨가 됐다. NLL은 마크 클라크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협정 체결 한 달 뒤 우발적 무력충돌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서해와 동해상에 설정한 해상경계선이다. 당시 북한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1973년에는 항행 사전 승인을 요구하는 등 NLL 무효를 주장해 왔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영해 기준으로 3해리(약 5.5㎞)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다 1970년대부터 12해리(약 22㎞)로 바뀐 것도 한 요인이 됐다.북한은 1999년 1차 연평해전을 일으킨 직후 NLL 남쪽에 설정한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선포했고 3년 뒤엔 NLL 이남에서 북측 공격으로 우리 군인 6명이 전사한 2차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북한은 2004년 서해 해상 경비계선을 새롭게 들고 나왔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도 이어졌다. 정부는 NLL이 실질적인 남북 간 경계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2020년 서해에서 실종된 공무원을 수색하는 우리 쪽에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무단 침범했다”고 경고하고 올해 4월 북한의 경비정 1척이 서해 NLL을 침범하는 등 긴장은 여전하다.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전협정은 각자의 영해를 존중하고 ‘공해자유의 원칙’에 따라 바다를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으나 충돌이 발생하다 보니 선을 긋고 군사적 작전수역이 되어버렸다”며 “정전협정 취지대로 공동의 수역, 비무장 수역으로 만들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與 교원지위법 개정하겠다지만…野 ‘교권 침해 생기부 기재’ 부정적

    與 교원지위법 개정하겠다지만…野 ‘교권 침해 생기부 기재’ 부정적

    야 “아이들 인생에 주홍글씨” 반대윤재옥, 체벌 부활 가능성은 일축“학생인권조례, 학부모 갑질민원 조례”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으로 불거진 교권 침해 논란과 학생인권조례의 인과관계를 두고 진영간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교권 회복을 위한 법 개정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교권 침해 행위를 생활기록부에 남기는데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부정적이어서 난항이 예상된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5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교권 침해 행위를 한 학생에 대해 생활기록부에 남기고, 교사의 정당한 지도에 대해 면책을 보장하는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며 “야당과 협의해 해당 법안 통과에 속도 내겠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학생 반항 조장 조례’이자 ‘학부모 갑질·민원 조례’로 변질됐다”며 개정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만 체벌 부활에 대한 질문에는 “국민 정서나 기준이 많이 바뀌었다”며 일축했다. 윤 원내대표가 언급한 법안은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교원지위법)과 초중등교육법이다. 쟁점은 교원지위법에 포함된 ‘교육활동 침해 생활기록부 기재’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교원지위법 발의안 11건 중 5건이 교권 관련 내용이다. 국회 교육위 여당 간사 이태규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교원 활동 침해 행위를 한 학생에 대한 조치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작성하도록 했다. 같은 당 서정숙 의원안은 교육활동 침해를 한 학생에 대해 출석정지 등 긴급 조치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반면 강득구 민주당 의원은 학교별 교권보호위원회를 교육청 관할로 이관해 피해를 본 교원에게 충분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아동학대범죄로 신고돼 조사받는 경우 학교장이 의견을 제출하는 내용을 발의했다. 민주당은 교권 회복과 학생인권조례 개정을 연동하려는 정부여당 움직임을 ‘정치적 프레임’이라고 본다. 특히 생기부 기재에 유보적이다. 강 의원은 “생활기록부는 50년 동안 가는 것이고 아이들 인생에 주홍글씨가 남는 것”이라며 “그에 비해 교권이 나아질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김민석 정책위의장도 간담회에서 “생기부에 기록을 남기느냐를 두고 소송이 증가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했다. 여야 모두 정당한 학생생활지도에 대해서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아동학대범죄로 보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태규 의원은 서울신문 통화에서 “교육위 전체회의를 28일에 열어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상정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26일 당정협의회를 열고 법안 개정 등 교권 보호 대책을 논의한다.
  • 헌재, 헌정사상 첫 국무위원 ‘이상민 탄핵 심판’ 전원일치 기각

    헌재, 헌정사상 첫 국무위원 ‘이상민 탄핵 심판’ 전원일치 기각

    헌법재판소가 25일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논란이 일었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 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국무위원을 대상으로 한 헌정사상 첫 탄핵 심판으로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26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지 167일 만이다. 헌재는 이날 오후 2시 대심판정에서 열린 이 장관 탄핵 심판 선고 재판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탄핵 소추 의결로 직무가 정지됐던 이 장관은 즉시 직무에 복귀하게 됐다. 헌재는 “이 장관은 행정안전부의 장이므로 사회재난과 인명 피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도 “헌법과 법률의 관점에서 재난안전법과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헌법상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참사 경과나 피해 규모 등에 비춰 이 장관이 최선의 조치를 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와 별개로 헌법과 법률적 관점에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특히 헌재는 이태원 참사가 어느 특정인에 의해 발생·확대된 것이 아니라 각 정부 기관이 대규모 재난에 대한 통합 대응 역량을 기르지 못한 점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탓으로 판단했다. 또 이태원 참사를 전후해 이 장관의 사전 예방조치 의무, 사후 재난 대응, 국회에서의 사후 발언 등 모든 쟁점과 관련해 탄핵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다만 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은 “이 장관의 사후 대응이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한 것은 맞다”고 했다. 아울러 세 재판관과 정정미 재판관 등 4명은 이 장관의 사후 발언 일부가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국가공무원법상 품위유지 의무 위반 행위라고 봤다. 다만 이들 모두 이러한 잘못이 이 장관을 탄핵할 정도는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대통령실은 이 장관에 대한 헌재 결정 직후 “(거야의) 반헌법적 행태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탄핵소추 제도는 자유 민주주의 헌법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는 거야의 탄핵소추권 남용”이라고 했다.
  • 한국예총, 서울시연합회 사무처 개소식 열어

    한국예총, 서울시연합회 사무처 개소식 열어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한국예총, 회장 이범헌) 서울시연합회가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에 사무처 사무실을 열고 서울예술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한국예총 서울시연합회(회장 이범헌)는 지난 24일 200여명의 예술문화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혜화동 한예극장 1층 공연장에서 사무처 개소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이날 개소식에는 이성림 한국예총 명예회장(23~25대 한국예총 회장), 도올 김용옥 선생, 이철구 한국음악협회 이사장(한국예총 수석부회장), 이창기 서울문화재단 대표, 박근용 더불어민주당 직능국장, 류영득 한국예총 대외협력위원장(우상호 의원 특보), 이창희 서울문화재단 이사, 송형종 서울시장 문화수석비서관, 가수 박일남 씨 등 외부인사와 한국예총 서울시연합회 소속 17개 자치구의 지회 회장 및 소속 예술인 등 총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개소식은 사무처 외부 현판 제막식 및 테이프커팅도 함께 열려 그 의의를 더했다. 이범헌 한국예총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서울 문화예술을 선도하고, 한국 문화예술의 발전을 이끌어주신 서울시연합회 회장단 여러분이 오늘의 주인공이고 오늘 개소식을 시작으로 향후 이곳이 서울예술의 도약과 발전에 중심이 되어 서울예술의 새로운 동숭동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며 “오늘 참석하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한국예술과 서울예술의 발전을 위해 더욱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은 축하메시지를 통해 “예술인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재능과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한국예총 서울시연합회에서 큰 역할을 해주길 바라며, 서울시도 예술문화가 바탕이 되는 매력적인 서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림 명예회장은 “오늘 개소식은 세계인들이 환호하고 열광하는 K-아트가 더욱 뻗어가며 대한민국이 문화예술 대국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희망찬 선포식”이라며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최재형 국회의원(국민의 힘. 종로구)은 영상축사를 통해 “K컬처의 뿌리는 바로 한국예총 61년의 역사이며, 한국예총과 서울시연합회가 대한민국과 세계의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내고 우리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음 하는데 크게 역할해 주시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 이철구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이창기 서울문화재단 대표, 류영득 한국예총 대외협력위원장, 송형종 서울시장 문화수석비서관, 가수 박일남 씨의 축사가 이어지며 축하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우상호 의원은 축하기로, 홍익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 신동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곽태헌 서울신문사 사장, 이창기 서울문화재단 대표는 축하화환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한국예총 서울시연합회는 이날 허성훈 한국예총 사무총장을 서울시연합회 상임이사로, 박화일 한국예총 정책행정본부 실장을 사무처장으로 선임하여 서울예술의 새로운 동숭동 시대를 열어갈 것을 다짐했다. 한국예총 서울시연합회는 서울특별시 25개 자치구 중 현재 17개 구에 지회가 구성되어 활동 중이며 한국예총 정관상 한국예총 회장이 서울시연합회 회장을 겸하게 된다고 밝혔다.
  • [정전70주년] 남북과 50년 인연 몽골인 석학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의 길

    [정전70주년] 남북과 50년 인연 몽골인 석학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의 길

    “한국이 명확한 전략과 기민한 전술로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주도하길 바랍니다.” 몽골 외교관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20년 근무하는 등 한반도와 5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바산자브 락바(76) 전 몽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연구원 고문은 25일 서울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당장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세는 변하기 마련”이라며 한국의 적극적인 전략 수립과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락바 전 고문은 1974년부터 1982년까진 주북몽골대사관에서, 1997~2004년과 2006~2009년에는 주한몽골대사관에서 근무했다. 2015년에 ‘한반도평화통일연대 몽골 포럼’을 창설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무엇이었나. “몽골국립대 어문학과를 1970년에 졸업한 뒤 외국학생들에게 몽골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 1972년에 문화교류 프로그램으로 평양에 가게 됐다. 외국에 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호기심으로 지원했다. 사실 몽골과 북한은 같은 사회주의 진영이라곤 하지만 몽골은 소련에 좀 더 가깝고 북한은 주체사상을 강조하다보니 교류가 그렇게 활발하진 않았다. 유학생도 몇년에 한번씩 몇명씩만 교류하는 정도였다. 원래대로라면 김일성대에서 4년을 공부해야 했겠지만 당시 몽골 정부에서 ‘언어만 배우면 된다, 주체사상 배울 것 없다’고 해서 2년 과정이 됐다.” -평양에서 근무할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적도 있다고 들었다. “두 번 만나봤다. 조선노동당 당대회에 몽골대표단으로 갔을 때, 몽골대사가 신임장을 받을 때 배석했다. 당대회에선 미리 준비한 연설문도 없이 연설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신임장 받는 자리에선 몽골 대사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1950년대 몽골에 간 적이 있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고 했다. 당시 몽골 국회의장과 친하다며 안부 전해달라고도 했다.” -평양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일성대 시절엔 말 그대로 공부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외국인 기숙사에서 유학생들끼리만 어울려야 했고 학교밖 외출도 쉽지 않았다. 기숙사에는 ‘동숙생’이라고 북한 학생이 있었는데 맥주를 몇 병씩 사다준다거나 해서 소소하게 챙겨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대사관 근무할 때도 평양 바깥으로 가려면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동반 행사는 많았다. 금강산 묘향산은 지금도 기억난다.” -직접 겪어본 남북을 비교한다면. “남북 일반인들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남북 모두 부지런한 것도 그렇고, 같은 민족이라는 건 숨길 수가 없다. 다만 사회체제가 다르니까 격차가 커지는 게 안타깝다. 1970년대만 해도 이북이 더 잘 살았는데 지금은 남북 경제력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가 됐다. 북한이 문을 닫아걸고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가는 게 안타깝다.”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1976년에 판문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직전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있어서 분위기가 살벌했다. 1990년대 주한몽골대사관에서 일하면서 판문점 남측 구역도 가봤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평화의 시금석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진다. 북한은 사실상 통일정책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해는 간다. 남북한 경쟁 자체가 안되니까 통일을 하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한국 역시 통일 자체에 무관심한 것 같다. 남북 긴장 악화가 신냉전 구도와 맞물리면서 안보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조언을 해준다면. “정세는 언젠가 달라지게 돼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갈 순 없다. 국익을 중심으로 전략을 명확히 세우고 그걸 바탕으로 정세 변화에 맞춰 전술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언젠가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북은 냉전 종식 당시 결정적인 기회를 한 번 놓쳤다. 만약 확실한 국가 미래전략을 갖고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지정학 관점에서 볼 때 한국과 몽골은 꽤 유사하다.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 작은 나라의 외교정책은 기민하고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단체를 이끌고 있다. “정부 간 관계가 경색됐을 때는 민간차원의 교류가 더 중요하다. 남북한 뿐 아니라 몽골을 포함해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런 토대를 꾸준히 만들어가야만 국제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 -몽골에서도 중국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계속 커지고 있다. 2016년 11월 달라이 라마가 몽골을 방문하자 중국이 몽골에 경제제재를 했는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이후 한국이 당한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몽골은 인구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 신자다. 달라이 라마는 사회주의 시절인 1979년 몽골을 처음 찾았고, 2016년은 아홉번째 방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무역은 물론 인적교류까지 끊어버리는 국경봉쇄로 몽골을 압박했다. 결국 2017년 2월 외교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다시는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지 않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몽골의 국가전략은. “사회주의 시절엔 사실 소련 따라하기밖에 없었다. 당초 중국공산당이 몽골을 중국 일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소련의 지원이 절실했다. 몽골 남부엔 소련군이 주둔했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국가외교전략을 새롭게 정립했다. 미국, 유럽, 한국, 일본 등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한몽 관계 역시 2021년에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 [단독]조력사망 그 후, 동행자 두 사람이 만났다[금기된 죽음, 안락사]

    [단독]조력사망 그 후, 동행자 두 사람이 만났다[금기된 죽음, 안락사]

    스위스 조력사망에 동행한 두 사람의 인생은 갈렸다. 한 사람은 안락사 찬성자가, 또 한 사람은 반대자가 됐다. 찬성하는 이는 다니던 교회를 떠났고, 반대하는 사람은 종교에 귀의했다. 케빈(가명·52)씨와 신아연(60) 작가의 이야기다. 케빈씨는 2019년 3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조력사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안락사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2019년 3월 6·7일자). 암 말기 상태로 투병하던 그의 친구는 디그니타스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 취리히 근교 파피콘에서 사망했다. 호주 시민권자인 신 작가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던 한국인 허모(당시 63)씨의 요청으로 동행한 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폐암 말기였던 허씨는 2021년 8월 스위스 바젤에 있는 페가소스의 도움으로 조력사망했다.아직 우리 사회에선 낯선 조력사망을 가까이서 지켜본 두 사람이 지난달 2일 서울신문 대담을 위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스위스에서의 경험은 삶의 가치관을 크게 바꿀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두 사람은 회고했다. 케빈씨는 “돌아가신 분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신 작가는 “삶과 죽음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조력사망이 도입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케빈씨는 조력사망 도입을 위해 시민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 작가는 죽음에 대한 성숙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했다. 케빈씨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지만 고인의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위해 익명을 요청했기에 기사에서는 그의 영어 이름을 사용했다. -한국에서는 어렵고 힘든, 독특한 경험을 하신 몇 안 되는 두 분이 만나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케빈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끝나는 만남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살짝 대화해보니 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신 작가 “그분(케빈씨 친구)이 참 좋은 분하고 가셨구나, 생각했어요. 마지막 가는 분은 심사숙고해서 동행자를 구하기 때문에 그분으로선 절실했을 거예요. 인상이 좋고 진실하신 모습에 제 마음이 다 놓이더라고요.” “오죽하면 죽음 생각할까…고통 이해해야”“한 번 시행되면 범위 확대될 것…시기상조” -조력사망에 대한 입장은 각각 어떠신가요. 케빈 “우리도 필요한 제도이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건 한국,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다 똑같아요. 아프면 아픔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오죽하면 죽음까지 생각할까요. 불치병으로 삶 자체가 힘드신 분들에게는 그분들이 원하신다면 삶을 편안하게 마감할 수 있는 선택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작가 “원론적으로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을 내가 선택하지 않았듯이 마무리도 내가 선택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선 시기상조예요. 자살의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는 죽음에 관한 토론 자체를 너무 싫어하면서 이를 합법화하면 정말 혼란스러울 거예요. 사회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다음에 이 얘기가 나왔으면 해요.” 케빈 “조력죽음이라는 것이 새로운 문화라고 생각해요. 부작용이나 문제가 많았다면 (안락사를 처음 법제화한) 네덜란드에서 다른 나라로 퍼져나갈 수 없었을 거예요. 논쟁은 어느 나라에나 있고,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찬성하기에 합의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단지 이 제도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국가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 작가 “제도가 한 번 시행되면 범위는 확대될 거예요. 조력사망 제도가 아예 없었다면 더 의지를 갖고 투병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제도가 있으니까 죽겠다고 할 수도 있어요. 이런 게 전염돼 ‘옆집 아저씨는 조력사했는데 우리 엄마는 왜 살아있지’ 이렇게 될 수도 있고요.” 케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만으로 이럴 수도 있다고 하는 건 조금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의 예를 보면 오리건주에서 1997년 조력사망 제도가 시작돼 25년 만에 10개 주가 그 제도를 인용해 제도화했어요. 25년 동안 우리가 걱정하는 것처럼 사회적 약자가 원하지 않은 죽음을 강요받았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신 작가 “그 나라와 우리나라는 문화가 다르잖아요.” -우리나라가 시기상조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 작가 “우리는 집단 문화예요. 정말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가 아니에요. 서양 사람들은 99%가 자기가 결정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가족, 특히 자식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온전히 스스로 본인의 죽음을 결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케빈 “이 제도가 도입된다고 조력사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강요받아 죽음에 내몰릴 거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 제도의 특징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안규백 의원이 발의한 조력존엄사법 요건을 보면, 18세 이상 말기 환자이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스위스 동행 후 삶이 달라졌다고 느끼세요. 신 작가 “저로선 그런 드라마틱한 임종은 처음이었어요. 제 눈앞에서 멀쩡하게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었던 분이 ‘나 그만 갈게, 나중에 봐’ 하고 탁 가시는데, 갑자기 살아있던 사람이 죽은 사람으로 바뀐 거예요.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서 선 하나 넘는 것이구나, 삶이 정말 소중한 거구나, 깨달았어요.” 케빈 “제 삶의 절반 정도가 바뀐 것 같아요. 이전에는 어떻게 하면 잘 살까, 주로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면 스위스에 갔다 와서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특히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적인 죽음일까를 많이 생각해요. 그러면서 교회와도 멀어지게 됐고요.” -종교는 두 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케빈 “전 원래도 안락사를 찬성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스위스에서의 경험이 내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을 끄집어낸 것 같아요. 제가 비록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그것이 신앙과 대립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다닌 교회도 조력사망에 대해 반대하거든요. 전 이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서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됐어요.” 신 작가 “전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죠. 그러다 안락사에 관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전 조력사를 택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이며,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죽음을 선택할 순 없다고 느꼈어요. 진정성 있는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케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크리스찬인 제 친구도 이런 얘길 했어요. ‘내가 죽어 하나님 앞에 가면 뭐라고 하실까.’ 저는 하나님이 너를 이해할 거라고 말했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벌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국내 허용됐다면 편안한 이별 가능했을 것”“죽음 지켜보는 것, 너무 무기력하고 충격적” -우리나라에서 조력사망이 허용됐다면 두 분이 느끼는 감정도 달라졌을까요. 신 작가 “전 원래는 안락사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아니었어요.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스위스까지 갔기 때문에 느낀 감정들은 있어요. 그곳(조력사망 장소)은 정말이지 아담하고 깔끔한 병원도 아니었고 창고 같은 곳이었어요. 그 나라도 국민정서상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외곽에서 하는 것 아닐까 해요. 왜 멀쩡한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죽음을 맞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7~8명이 갔는데, 같이 여행하다가 갑자기 한 명이 사고가 나서 죽는 것 같은,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어요. 다 같이 밥을 먹는데, 다음날 한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케빈 “우리나라에 그 제도가 합법화됐다면 친구와 저의 이별이 더 아름다웠을 것 같아요. 스위스에 가기 전에 친구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안 가도 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이게 친구의 마지막 길이라 생각하니 거절할 수 없었어요.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고요. 그런데 막상 디데이 전날이 되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한국에 돌아와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친구를 다시 서울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제 마음과 걱정을 안 친구가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했고, 제가 비겁하지만 말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요. 저는 호텔 방에 남아 친구의 임종을 못 지켰어요. 만약 그런 법(자살방조죄)이 없었다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훨씬 아름답고 편안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다음에 또 동행 제안이 오면 같은 선택을 하실 것 같나요. 케빈 “친한 친구, 가족이면 제가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같이 갈 거예요. 친한 친구나 가족이면 옆에서 보잖아요, 이분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지를…. 치료할 방법이 없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선 조력사망이라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갈 것 같아요.” 신 작가 “전 다시 한번 가게 되면 열렬히 말릴 거예요. 그땐 경험이 없다 보니 다들 얼어 있었고, 그분(고인)이 주도하는 데에 압도됐던 것 같아요. 말리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 자책감이 너무 컸어요. 책을 낸 뒤 세 번 정도 동행 제안을 받았는데, 메일이나 카톡을 주고받으며 말리고 있어요. 깊이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우리나라에도 처음으로 조력사망을 허용하자는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사회적 논의가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세요. 신 작가 “자꾸 이런 자리가 만들어져야죠. 사실 고인께서 자기 경험을 글로 써 달라고 한 것도 우리나라에 안락사 공론화를 위해서였어요.” 케빈 “백퍼센트 동의합니다. 작년 6월에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됐는데 지금까지 사회적 논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안규백 의원이 발의했으면 책임감 있게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 작가 “논의가 되려다가 다시 뚜껑이 닫힌 것 같아요. 더 치고 나가 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같은 얘기만 반복되고 있어요.” 케빈 “때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조력사망에 대해 얘기하는데 반대쪽에선 호스피스를 이야기하거든요. 호스피스 제도가 있다고 해서 조력사망 제도가 필요 없는 게 아니예요.” 신 작가 “호스피스가 대안은 될 수 있죠. 연명의료 중단으로 끝낼 수도 있고, 호스피스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 아주 다른 얘기는 아니예요.” -조력사망이 허용된다면 범위는 어디까지로 보세요. 케빈 “고통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봐요. 말기 환자만 고통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정신적 질환이 있는 분들도 고통이 있을 수 있고, 신경계나 근육병이 있는 분들, 마비 상태로 계신 분들도 고통이 극심할 수 있어요. 참을 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는 고통 속에 있는 분이 조력사망을 원한다면 도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 작가 “제도가 있기 때문에 쓰게 되는 거예요. 말은 좋아 보여도 현대판 고려장처럼 끔찍한 사회가 될 것 같아요. 정말 본인이 원한다고 하는 기준을 갖기도 힘들고요. 본인이 원한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게 있어요.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니듯이 죽음도 나만의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죽고 나면 남은 사람이 굉장히 힘들어져요. (스위스에) 함께 갔던 부인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요.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 내 인생은 뭔가, 하는 고통에서 못 벗어납니다.”“존엄한 죽음, 자신만이 정의내릴 수 있어”“의료 지나치게 개입…사회적 공론화 필요” -존엄한 죽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사회는 그런 죽음을 맞이할 여건이 돼 있다고 보세요. 신 작가 “두 가지 면에서 아닌 것 같아요. 첫째는 의료가 지나치게 개입해요. 집에 있다가도 결국은 다 병원으로 가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죠. 두 번째는 우리 사회가 너무 외로워요.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들은 오늘 죽으면 언제 발견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맞물리니 죽음이 존엄할 수가 없죠. 이런 상태에서는 조력사 이전에 죽음 전반에 관한 얘기를 정말 해야 해요.” 케빈 “저는 존엄이란 인간만이 갖는 속성이며, 그 속성은 자율성에 기초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존엄한 것 아닐까. 또 하나는, 죽음은 매우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남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자신만이 자기 죽음에 대해 존엄하다,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제가 여러분의 존엄한 죽음을 정의해 드릴 순 없지만, 나의 존엄한 죽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존엄하지 않게 보일지라도 고인 스스로 선택한 존엄한 죽음이라면 그것은 존엄한 죽음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 작가 “선생님은 조력사망을 선택하실 건가요.” 케빈 “저는 병에 걸리면 스위스에 좀 더 일찍 가서 여행도 하면서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다만 집사람한테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게 좋은 경험은 아니고, 죽음을 본다는 게 가족한테도 힘든 시간이 될 것 같아서요.” 신 작가 “안락사에 대한 가치관이 친구분을 따라갔다고 해서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친구분이 어떤 영향을 줬나요? 그게 좋아 보였나요.” 케빈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죽게 되는 것이라면 나로서는 고통의 길을 걷지 않고, 좀 더 생생할 때 하고 싶은 걸 하고 죽고 싶어요.” -가족에겐 좋은 경험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건, 결국 자기한테는 좋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겐 좋지 않은 경험이라는 의미인가요. 한국에 도입됐을 때 가족은 훨씬 힘들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케빈 “이 제도가 한국에 있다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틸 거예요. 다만 지금은 스위스로 가야 하므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찍 나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족에게 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까 봐서죠. 제가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점 때문이에요.” 신 작가 “조력사망을 지켜보는 경험은 엄청난 충격을 줬어요. 그분은 편안하게 가셨지만, 우리는 편치 않았어요. 옆에서 말리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너무 싫고 무기력했어요. 끝나고 나서 저녁을 먹는데 나 자신이 역겨웠어요. 다들 잊으려고 일부러 더 떠들고 먹고 하다가 갑자기 다 같이 풀이 죽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케빈 “제 추측이긴 합니다만, 같이 가셨던 분들이 그분과 같이 생활했던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분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안락사에 관한 영화 ‘청원’이나 ‘씨인사이드’를 보면서 제가 얻은 메시지가 있는데요, 그중 한 가지는 그 환자를 정말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안락사를 받아들여요. 그 사람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케빈 “조력사망 도입 위한 시민운동 나설 것”신 작가 “책 수익금으로 호스피스 지원 계획” -존엄사와 관련한 활동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신 작가 “우리 사회는 너무 감각적이고, 책도 안 읽고 사유를 안 해요. 이 제도가 정말 선진국에서 들어오는 제도라면 우리도 인문적 사유와 통찰로 죽음에 관한 인식도 선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무르익고, 일상에서도 죽음이 대화 주제가 될 수 있도록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제가 쓴 책의 수익금으로는 호스피스를 지원할 생각이에요.” 케빈 “개인적으로 세 가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우선은 친구가 떠난 스위스 블루하우스 앞 정원에 친구를 기억하는 나무를 심으려고 해요. 디그니타스에 그 얘길 했더니 심으라고 하면서 나무 종류까지 정해 주더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안락사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국 영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언제쯤 제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서울신문의 ‘금기된 죽음, 안락사’ 기획기사는 ‘인터랙티브형 기사’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찍거나 아래 링크를 복사한 후 인터넷 주소창에 붙이는 방법으로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eoul.co.kr/SpecialEdition/euthanasia/■ 기획취재부 유영규 부장, 신융아·이주원 기자
  • “주민 소통이 최우선”… ‘중꺾마’ 광진 행정으로 숙원사업 착착 [민선 8기 1년-서울 단체장에게 듣는다]

    “주민 소통이 최우선”… ‘중꺾마’ 광진 행정으로 숙원사업 착착 [민선 8기 1년-서울 단체장에게 듣는다]

    김경호 서울 광진구청장은 지난 1년간 구민들로부터 “반응이 빨라져서 좋다. 구가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동안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던 해묵은 숙원사업들이 민선 8기 출범 이후 속속 추진됐기 때문이다. 김 구청장이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주민과의 소통이 동력이 됐다. 김 구청장은 2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행정이 미처 닿지 못하는 부분을 주민과 함께 소통하며 채워 나간 귀한 시간이었다”고 돌이켰다. 다음은 김 구청장과의 일문일답.-구민들이 뽑은 민선 8기 광진구 10대 뉴스 결과를 발표했다. “군자역 사거리 유턴차로 설치 및 군자역 일대 상업지역 1.5배 확대가 1위로 선정됐다. 군자역 유턴차로 설치는 13년간 주민들이 요구한 사안이다. 능동 주민들 입장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균형을 잡은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의지로 해결 방안을 찾아 노력한 결과 지난해 10월 27일 공사를 완료했다.” -군자역 일대 상업지역이 확대되면 어떻게 변화하는가. “광진구는 1960~70년대 급속히 늘어나는 도시인구의 주거지 확보를 위해 고급주거지로 개발된 지역이라 주거 비율이 매우 높고 상업지역이 현저히 낮은 특징을 갖고 있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은 변화된 생활상, 노후된 시설 등으로 주거환경이 열악해졌다. 이런 구민들의 염원을 담아 도시개발과 발전의 밑거름을 만들고자 노력한 결과 군자역 일대 상업지역 상향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중곡동 157-1 일대 약 16만㎡ 대상지의 상업지역이 4만 7016㎡에서 7만 1736㎡로 2만 4720㎡ 증가했다. 이로써 지하철 5·7호선 더블역세권인 이곳에 주거복합 고밀복합개발의 여건이 마련된다. 군자역 일대를 문화와 업무·주거가 어우러진 비즈니스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한 도시 발전 계획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최근 강변역 일대 불법 노점상을 갈등 없이 정비해 눈길을 끌었다. “군자역 유턴차로 설치를 전광석화처럼 추진했다면 노점상 정비의 기조는 ‘느리지만 천천히’였다. 행정의 힘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인근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했고, 구는 상인들과 꾸준히 대화를 이어 갔다. 보행에 불편을 주는 기간이 길었고 안전 이슈까지 더해졌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소통하며 느리더라도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취임 1주년 출근길에 직원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는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일을 할 때는 재미있어야 한다. 직원이 행복해야 조직도 행복하고 구민들에게도 친절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불합리한 관행이나 불편한 사항 등에 대해 직원들이 편하게 제안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조직문화와 쾌적한 근무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변화와 민선 8기에 대한 구민과 직원들의 긍정적인 기대가 ‘공공기관 청렴도 2등급 달성’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공정, 소통, 친절을 기반으로 올바르고 투명한 구정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다.” -도시계획 밑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다. “광진구청은 구의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 책임이 있는 기관이다. 행정이란 0.5발짝 앞서가거나 뒤에서 주민들과 같이 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시계획은 그동안 3~4발짝 뒤에 있었다. 주민들은 빨리 오라고 하는데 반응하지 못했다.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한다. 꼭 해야 할 것은 역세권 고밀개발이다. 9개 역세권에 상업지역을 고르게 배분해야 한다. 중곡동 지역에 번듯한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시범으로 해야 중곡동 개발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구체적인 지역개발 추진 상황은. “지난해 12월 자양4동 57-90 일대가 서울시 신속통합기획 주택재개발사업 후보지 공모에 선정됐다. 지난 4월부터 정비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이 진행 중이며 내년 상반기까지 정비구역 지정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자양1재정비촉진구역은 구 동부지방법원, KT 부지인 자양동 680-63 일대로 총면적 7만 8147㎡에 달한다. 여기에 전국 최초로 광진구청 신청사(18층), 첨단업무단지(31층), 호텔·오피스텔(34층), 1363가구의 공동주택 7개 동(26~48층) 등 대규모 복합단지가 조성된다. 현재 공정률은 약 31%로 2024년 말 완공이 목표다.” -강변역 일대 동서울터미널 개발에 대한 관심도 높다. “아직 협상이 진행 중이라 확정적이지 않지만, 동서울터미널 개발을 통해 강변역 주변의 교통환경이 대대적으로 개선되는 건 분명하다. 강변역 주변 도로의 경유 없이 동서울터미널과 강변북로를 직접 연결하는 대형버스 진출입 시설 설치, 강변역과 한강 및 동서울터미널을 연결하는 보행 데크 조성 등 교통체계를 개선하고, 보행 연계성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동서울터미널 개발이 지역 발전을 견인하는 랜드마크로 조성될 수 있도록 사전 협상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 초 인터뷰에서 정치인과 행정가 중에서 후자에 가깝다고 했다. 변함이 없는가. “없다. 나는 일하기 위해서 온 일꾼이다. 행복한 광진구를 위해 뛸 것이다.”
  • “동장은 작은 구청장”… ‘동지역책임제’로 밀착 소통 강화

    “동장은 작은 구청장”… ‘동지역책임제’로 밀착 소통 강화

    민선 8기 서울 광진구는 소통에 방점이 찍혔다. 김경호 광진구청장은 민선 8기 취임 이후 틈만 나면 학교, 시장, 골목길, 취약계층 가정 등을 찾으며 ‘소통 행보’를 펼쳤다. 김 구청장은 2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간단한 문제는 즉시 해결하고 제도 개선이나 예산이 필요한 사업은 관련 부서에 지시해 해결 방안을 찾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는 “‘소통이 부족하다’는 구민의 소통에 대한 열망을 느끼고, 민선 8기 1호 결재로 제일 먼저 추진한 게 ‘광진발전소통위원회’ 운영”이라고 말했다. 소통위원회는 주민대표, 전문가 등이 참여해 주요 정책을 제안하고, 전문적 자문을 구정에 반영하는 기구다. 김 구청장은 “여러 소통 창구를 통해 끊임없는 소통을 하니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기는 등 소통에 따른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구는 2021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던 용암사 주변 하수 악취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악취저감장치를 설치했다. 또 중곡동 용마사거리, 구의3동주민센터 앞 마을버스 정류소를 신설해 주민들의 교통 편의를 높였다. 한국전력공사가 보유한 중곡동 유휴지(총 7290㎡)를 활용해 공공 주차 공간을 조성한 것 역시 소통의 결과로 꼽힌다. 구는 지난 3월부터 동지역책임제를 실시하고 있다. 민원 처리 체계를 기존 부서 중심에서 동주민센터로 개편한 것이다. 최일선 현장인 동주민센터의 역할과 책임을 강화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김 구청장은 “구에는 15개 동이 있는데 동장은 15분의1의 구청장”이라며 “구와 동의 민원 공유 체계를 구축해 현장 행정을 강화하고 주민이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밝혔다. 김 구청장은 “이런 소통의 실효성 증진을 위해 59개 사업, 88억원의 소통 예산을 구축했다”며 “앞으로 더 많은 소통을 통해 소통 예산을 지속적으로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세종로의 아침] ‘비수급 빈곤 리포트’를 마치며/백민경 사회부 차장

    [세종로의 아침] ‘비수급 빈곤 리포트’를 마치며/백민경 사회부 차장

    사회에서 고립된 채 병마와 생활고로 고통받던 ‘수원 세 모녀’가 세상을 등진 지 1년이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세 모녀의 불행을 잊었을 것이다. 세 모녀의 주검이 발견된 옆집 주민조차 이사 온 지 1년이 안 돼 이웃의 비극을 알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119주년 창간기념으로 13명의 사회부, 전국부 기자로 구성된 특별기획취재팀을 꾸렸다. 팀장을 맡아 지난 3개월간 수원 세 모녀처럼 기본적 사회안전망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조차 받지 못하는 저소득 가구인 ‘비(非)수급 빈곤층’을 팀원들과 일일이 발로 뛰어 찾았다. 제도권 밖 위기가구의 목소리를 통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실태와 허점, 개선 방안을 종합적으로 짚어 또 다른 세 모녀의 비극을 막자는 취지였다. 친구, 지인, 가족은 물론 117개 기관의 협조와 도움으로 찾아낸 비수급 빈곤층의 실태는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채민국(67·가명)씨 부자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일용직 근로자였다. 오랜 막노동으로 처음엔 아버지가 몸져누웠고, 나중엔 아들이 허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졌다. 아들은 대인기피증이 생겨 5년째 방문을 걸어 잠갔다. 아내와는 20년 전 사별했다. 이런 채씨 부자의 한 달 생계비는 15만원. 채씨가 매달 받는 기초노령연금 30만원에서 아파트 월세 15만원을 제한 금액이다. 라면으로 끼니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굶어야 하느 날도 부지기수였다. 채씨는 160㎝ 중반의 키에 몸무게가 45㎏ 정도였다. 채씨가 2021년 초부터 부산시 관할 행정복지센터를 찾았지만 기초수급 대상에서 번번이 배제됐다.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 같은 증빙 서류들을 마련할 수 없는 탓이었다. 채씨 부자는 7년 전 지인의 소개로 33㎡(10평) 집에 임대차 계약서 없이 들어갔다. 여름에는 곰팡이, 벌레와 사투를 벌이고 한겨울에는 가스가 끊겨 찬물로 세수해야 하는 집이었지만 보증금 없는 월세 15만원에 감지덕지하며 이사했다. 월세가 몇 달 치 밀려 있던 채씨는 집주인에게 계약서를 써 달라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런 채씨 부자를 위해 나선 사람이 김상현 부산 남구종합사회복지관 팀장이다. 그는 2021년 5월 집주인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임대차 계약서를 받았다. 행정 절차상 문제가 해결되며 채씨는 그해 7월 기초수급 대상자로 선정됐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기까지 2~3개월 동안 김 팀장은 복지관을 통해 식료품과 생필품, 의료비도 지원했다. 지난해 2월엔 소극적이고 말주변 없던 채씨가 김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김 팀장은 “채씨가 먼저 전화한 적이 없었는데 뜻밖의 이야기에 울컥했다”고 말했다. 채씨가 수급자로 선정되며 본지 기사에는 담지 않았던 이야기다. 이웃의 관심이, 복지업무 관련 종사자들의 헌신이 빈곤층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 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복지 담당 공무원과 공무직 직원들은 적은 인력에도, 박봉에도 위기가구 지원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국회가 비수급 빈곤층을 품기 위한 입법으로 제도의 틈새를 메워야 할 때다. 빈곤은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사회구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기준 완화,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한부모 가정 특례 등은 모두 법 개정 사안이다. 이제 국회가 일할 때다.
  • 새만금 ‘영토 전쟁’… 정부·정치권은 뒷짐

    “시군 설득이 먼저” 9월 재상정김제·군산 의원들 “우리쪽 편입”대형로펌 선임해 법정대응 예고행안부 분쟁조정위도 결론 못내 지자체는 물론 지역 정치권 내 갈등으로 확산하는 김제·군산 간 새만금 관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특히 새만금 동서남북 십(+)자 도로가 완공되고 수변도시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차지하기 위한 땅따먹기 경쟁이 불을 뿜고 있지만 중앙 정치권과 관련 부처는 이를 적극 중재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24일 서울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전북도가 추진한 ‘새만금특별지방자치단체 설치 및 운영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안이 도의회에서 보류 처분됐다. 이날 열린 7월 임시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해당 조례안이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새만금특별지방자치단체는 물리적 통폐합이 아닌 원활한 새만금 개발을 위해 특정한 공동의 사무를 처리하는 개념이다.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 입법예고도 거쳤다. 도의회 관계자는 “양측 간 갈등이 악화되는 것 같아 조례안 제정은 좀 더 심사숙고하고 시군과 시군 의회 설득이 먼저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며 보류 이유를 설명했다. 시·군 의견 수렴 절차를 충분히 거친 뒤 9월에 상정한다는 계획인데 두 달 남짓 동안 이견이 좁혀질지는 미지수다. 중앙 정치권은 중재는커녕 영토 전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자체에서 지방의회로 옮겨붙은 갈등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중앙 정치권으로 번지는 분위기다. 국회의원들은 “중앙분쟁조정위원회 결정을 지켜보겠다”며 말을 아끼면서도 에둘러 지역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원택(김제·부안) 의원은 “2021년 1월 14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을 중앙 정부를 비롯한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법원은 “새만금 1호·2호 방조제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연접한 부안, 김제에 귀속시키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했다. 새만금 신항과 동서도로는 2호 방조제와 연결된 만큼 김제시 편입을 응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같은당 신영대(군산) 의원은 군산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신 의원은 지난 5월에 열린 ‘새만금 신항 사수를 위한 2023 군산새만금신항 걷기대회’에 참석해 시민들과 함께 걸으며 응원했다. 현재 군산은 ‘새만금 신항’을 ‘군산 새만금 신항’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관할권 대응을 위해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을 선임했다. 새만금 영토 전쟁이 극에 달하면서 정부 부처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새만금 동서도로 등 행정구역 문제가 행안부 중앙분쟁조정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시군 간 이견이 큰 사안으로 당장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울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행안부 관계자는 “분쟁조정위원들이 새만금 동서도로와 7공구 방수제 그리고 새만금 신항만 방조제 등 안건별 논의가 아닌 종합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면서 “중분위가 열릴 때마다 지속적으로 논의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 [단독] 문맹 노인 계좌서 야금야금… 1억여원 등친 나쁜 가사도우미

    [단독] 문맹 노인 계좌서 야금야금… 1억여원 등친 나쁜 가사도우미

    40대 가사도우미 A씨는 홀로 사는 80대 문맹 노인 B씨에겐 사실상 ‘가족’이었다. B씨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집 안 구석구석 쓸고 닦고 말벗도 돼줬다. 하지만 뒤로는 B씨의 계좌 비밀번호를 알아내 조금씩 돈을 빼돌렸다. 그렇게 2년간 훔친 돈이 총 1억 4000만원이나 된다. 24일 서울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대구지검 서부지청 형사2부(부장 강호준)는 지난 18일 절도, 컴퓨터 등 사용사기 혐의를 받는 A씨를 구속기소했다. 이 사건은 앞서 경찰에서 지난 6월 불송치됐는데 이를 넘겨받은 최은민(변호사 시험 10회) 초임 검사가 현장 검증과 계좌 추적 등의 보완 수사를 통해 ‘나쁜 도우미’의 실체를 밝혀냈다. A씨는 2018년 3월~2020년 2월 B씨의 집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B씨 소유 예금통장을 이용해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84회에 걸쳐 총 8200여만원을 인출한 혐의를 받는다. 또 14회에 걸쳐 총 5100여만원을 자신의 계좌 등으로 이체한 혐의도 있다. 이렇게 빼돌린 돈은 A씨 가족 명의 계좌로 전달되거나 A씨 개인 채무 변제 및 생활비로 쓴 것으로 조사됐다. 당초 A씨는 경찰 수사에서 “B씨가 직접 돈을 빼서 맡겨달라고 준 것인데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B씨도 일관성 있게 진술하지 못하면서 경찰 수사가 제대로 진전되지 않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최 검사는 B씨의 통장 거래내역에 의문점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B씨가 문맹이라 ATM에 표기된 글자를 읽을 수 없고 터치스크린 방식도 이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B씨를 데려가 거래 은행에서 현장 검증을 했고 A씨와 B씨의 대질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검찰은 A씨 계좌추적을 통해 100건이 넘는 통장 거래내역을 파악한 뒤 A씨 계좌에서 가족 계좌로 돈이 입금된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A씨는 범죄 사실을 자백했고 지난 10일 구속됐다. 검찰 관계자는 “거액의 예금을 가로채고도 불송치된 사건의 범행 전모를 끈질긴 보완 수사를 통해 규명했다”고 밝혔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검찰 내 메신저를 통해 “(수사팀이) 열심히 수사했고 고생했다”며 “피해자에게 큰 위로가 됐을 것”이라는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 [단독] “행복추구권 침해” “축복 속 죽음을”… 조력사망 합법화 투쟁 나선 사람들 [금기된 죽음, 안락사⑤]

    [단독] “행복추구권 침해” “축복 속 죽음을”… 조력사망 합법화 투쟁 나선 사람들 [금기된 죽음, 안락사⑤]

    <5> 가족 그리고 죽음을 돕는 사람들 희소 질환인 척추협착증을 앓던 캐나다 국적의 캐서린 카터(당시 89세)는 2010년 스위스로 건너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이듬해 그의 딸 리 카터는 국가를 상대로 조력사망을 허용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어머니가 집에서 편하게 죽을 권리를 빼앗겼다는 이유였다. 긴 소송 끝에 2015년 캐나다 대법원은 자살 조력을 위법으로 규정한 현행법이 자유를 보장한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캐나다 조력사망 합법화의 시발점이 된 ‘카터 판결’이다. 캐나다는 물론 스페인, 뉴질랜드 등 여러 국가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조력사망을 합법화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력사망이 꼭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법적 투쟁에 나서고 있다. 24시간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하반신 마비 환자 이명식(62)씨는 국가가 조력사망을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다.●“당사자들이 나서 법 바꿔 나가야” “언제까지 제가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제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공무원이었던 이씨는 2019년 5월 은퇴 후 노년을 보내기 위해 제주도에 터를 잡았다. 집을 얻고 청소를 하던 중 허벅지에 알레르기가 생겼다. 인근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더니 금세 증상이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 뒤 다시 가려운 증상이 나타나 병원을 찾아 주사를 맞았다. 그게 불행의 시작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사를 맞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는데, 정신을 차린 건 40일이 지난 뒤였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두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병원에서는 원인 미상의 바이러스 감염으로 척수염이 생겼고 바이러스가 뇌와 척수로 번져 하반신에 마비가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마치 덤프트럭이 두 다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통증이 계속된다”고 표현했다. “대부분의 하반신 마비는 다리가 물렁물렁한데 제 다리는 뻣뻣하게 굳어 있어요. 그 상태에서 마치 다리를 꽈배기처럼 비트는 고통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 대소변을 해결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숨 쉬는 것과 밥 먹는 것조차 점차 고통스러운 일이 됐다. 마약성 패치를 몸에 붙여도 통증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그가 호소하는 통증의 정도는 ‘10 가운데 9’. 이씨는 “세상에 그 어떤 고통도 내 고통과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처음에는 회복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이겨 냈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통증과 함께한 지 3년. 이씨는 지난해 스위스에 있는 조력사망 단체인 디그니타스와 페가소스, 라이프서클 등 4개 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씨가 ‘그린라이트’(조력사망 승인)를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국내 법상 그가 뜻하는 대로 스위스에서 조력사망하기는 쉽지 않다. 거동이 불편한 탓에 스위스로 가려면 누군가 함께해야 하지만, 동행자가 자칫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헌법소원을 내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이씨는 자신의 고통을 국가가 낫게 해 주지도 못하면서 평화로운 죽음조차 가로막는 현행법이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력사망을 허용한 나라들의 경우 존엄사의 한 방법으로 이뤄진 조력자살에 대해 동행자나 조력자를 처벌하는 조항을 폐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이씨는 “내가 필요해서 스위스로 가려는 것일 뿐”이라면서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가족과 지인에게 자살방조죄를 씌우는 건 선택권마저 빼앗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우리나라에서 조력사망이 법제화되려면 이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자신처럼 끝없는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고 나섰다고 설명했다. “국민 80%가 찬성한다는데 정작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조력사망을 원하지만 주변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아요. 숨어서 요구하면 무슨 소용 있나요. 저 같은 당사자들이 모여 법을 바꿔야지요.” 법조인들이 모인 한국존엄사협회가 이씨를 지원할 계획이다. 최다혜(법학 박사) 회장은 “우리의 임종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전반적인 사회·의료 시스템을 다시 생각해 볼 시기가 됐다”며 “죽을 권리와 선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존엄사도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아버지의 비극, 남은 사람들은 안 돼” “우리나라에도 안락사가 있었다면 아버지를 좀더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직장인 이상혁(49)씨는 2017년부터 세 차례 헌법소원을 냈다. 불치병으로 죽을 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사람에겐 안락사를 받을 권리가 있다며 이를 막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취지였다. 이씨가 홀로 법적 투쟁에 나선 건 16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다. 아버지는 2007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모든 걸 제쳐두고 치료에 전념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항암 치료도 소용없었다. 암세포가 몸집을 키우면서 아버지는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밭은 숨을 몰아쉬며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뼛속 깊은 곳까지 전이된 암세포들은 고문하듯 환자를 괴롭혔다.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골통(骨痛)이 시작되면 이씨의 아버지는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다”는 말을 되뇌었다. 뼈가 약해지면서 체위를 바꾸는 일조차 쉽지 않아지자 욕창이 찾아왔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버지는 침대를 세우고 일주일을 꼬박 앉아서 지냈다. 눕는 순간 숨이 멈춘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편안할 정도의 고통으로 느껴졌어요. 폐암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라는 말을 절감하게 만들었죠.”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힘에 부친 듯 “이제 침대를 내려 달라”고 말했다. 그러곤 밤새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다가 심장이 멈췄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극도의 고통에 시달렸던 아버지를 보내며 그는 “남은 가족은 그렇게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아버지를 보낸 뒤 우연히 TV에서 조력사망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TV에 등장한 암환자는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죽음을 맞았다. 고통과 비극, 슬픔뿐이었던 아버지의 죽음과 완벽히 대비됐다. 이씨는 법을 바꿔 보기로 결심했다. 조력사망이 도입된 나라들은 국가가 법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5년 직접 안락사 법안 초안을 작성해 광화문광장에 가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또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로 뛰어가 입법을 호소하기도 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세 차례 헌법소원에 나섰다. 누구나 존엄한 죽음을 맞을 권리가 있지만 국가가 제도를 만들지 않아 헌법 제10조인 행복추구권이 침해된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이를 각하했다. 국회가 안락사 절차를 마련할 입법 의무가 없고 안락사 문제는 법학에서부터 종교적, 윤리적, 철학적 문제까지 연결돼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세 번의 도전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는 당시 헌재 결정문들을 보여 주며 ‘졸작’이라고 평가했다. 나라가 죽음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은 것이 결정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씨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조력사망을 합법화해 달라는 국민동의청원에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5만명이 청원에 동의하면 관련 국회 상임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 부칠 수 있다. 본회의에서 채택된 청원은 국회 또는 정부에서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80%가 넘는 높은 찬성 여론에도 사람을 모으는 게 쉽지는 않다. 과거 세 번의 국민동의청원 모두 1000명을 넘기지 못했다. 조직 없이 혼자 법을 바꾼다는 것에 한계를 느끼지만 여전희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 비해 안락사 찬성률이 10% 포인트 이상 낮았던 덴마크(70%)도 올 들어 안락사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순식간에 국민동의청원이 목표치를 넘어섰더군요. 꾸준히 알리다 보면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서울신문의 ‘금기된 죽음, 안락사’ 기획기사는 ‘인터랙티브형 기사’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찍거나 아래 링크를 복사한 후 인터넷 주소창에 붙이는 방법으로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eoul.co.kr/SpecialEdition/euthanasia/
  • [단독] “환자의 선택을 지지하는… 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 [금기된 죽음, 안락사⑤]

    [단독] “환자의 선택을 지지하는… 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 [금기된 죽음, 안락사⑤]

    <5> 가족 그리고 죽음을 돕는 사람들 캐나다 2016년 조력사망 합법화죽음 허락된 순간 감사·안도 느껴마지막 소원 함께… 의미 있는 일남은 삶 어찌 살고 싶은지 얘기해韓 의사, 조력사망 거부 가능해야자격 안 될땐 위로하는 것도 역할 “아픈 사람들은 저에게 도와 달라고 호소합니다. 단지 의사라는 이유에서입니다. 환자의 옹호자가 되는 것, 그게 제가 죽음을 돕는 이유입니다.” 캐나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스테퍼니 그린(55) 박사는 이른바 ‘죽음을 돕는 의사’다. 현지에서 조력사망이 합법화된 후 죽음을 도운 1호 의사다. 지금까지 조력사망을 원하는 400명의 환자를 상담했고 그중 300여명의 죽음을 도왔다. 그는 지금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환자들이 조력사망을 신청하면 자격을 심사해 임종을 돕는 일을 한다. 서울신문은 그린 박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조력사망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2016년 그린 박사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그해 그는 20년간 산부인과 의사일을 접고 죽음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사실 30년 전 내린 결심이었다. 의대생 당시 터진 ‘수 로드리게즈 사건’(1993년)을 계기로 ‘의사라면 끝까지 환자의 편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루게릭병을 앓던 로드리게즈는 대법원에 조력자살을 금지하는 조항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하지만 대법원은 “법은 문제가 없다”고 선언했고 이듬해 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조력사망을 선택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상황과 가치관을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은 본인입니다. 환자가 스스로 어떤 결론을 내렸다면 의료진은 그 선택을 지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후 20여년간의 긴 토론과 논쟁 속에서 캐나다는 2016년 조력사망을 합법화했다. 이후 그린 박사는 죽음을 돕는 의사가 되기 위해 무작정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세계죽을권리협회가 주최한 학회 등에서 안락사에 필요한 의료기술을 배우고 윤리적 문제를 토론했다. 그럴수록 선택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들은 산부인과 의사와 죽음을 돕는 의사는 전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탄생은 기쁨과 축복만, 죽음은 어둠과 우울함만 있다고 여긴다. “제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조력사망 업무가 왠지 어둡거나 꼭 병적인 일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환자들이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에요. 두 분야 모두 환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고 지지를 보내는 일입니다. ” 그가 조력사망 환자들을 도와주며 가장 많이 마주하는 감정은 ‘감사’와 ‘안도감’이다. “고통을 겪는 환자는 죽음이 법적으로 허락됐다는 걸 듣는 순간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낍니다. 남은 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국 조력사망은 어떻게 죽겠다가 아닌 남은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도의 고통으로 인해 진심으로 죽고 싶은 이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했다. 첫 환자인 ‘페기’가 그랬다. 94세의 고령이었던 페기는 관절염으로 극심한 다리 통증을 호소했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사망할 합리적 예측이 가능한 경우’란 법이 정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린 박사가 할 수 있는 건 깊은 실망을 추스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뿐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무력하고 고통스러울 때 찾아온 환자들입니다.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죠. 때문에 ‘자격이 없다’가 아닌 ‘아직 자격이 충분하지 않다’는 말로 그들을 위로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돕는 일에 지지를 보내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가 심리적 압박을 버틸 수 있는 이유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 과정에서 겪었던 안 좋은 경험을 들려줍니다.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이…. 그리고 어려운 일을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넵니다.” 그는 조력사망 논의에서 의사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 의사들도 양심에 따라 조력사망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캐나다도 그런 권리를 법으로 철저히 존중하고 있구요. 다만 대부분의 의사는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열망으로 의학에 입문합니다. 조력사망도 그 본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환자를 위로하는 것도 의사의 역할이지 않을까요.” 서울신문의 ‘금기된 죽음, 안락사’ 기획기사는 ‘인터랙티브형 기사’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찍거나 아래 링크를 복사한 후 인터넷 주소창에 붙이는 방법으로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eoul.co.kr/SpecialEdition/euthanasia/
  • [단독] “아들아, 나는 자살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잠자듯 떠났다 [금기된 죽음, 안락사⑤]

    [단독] “아들아, 나는 자살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잠자듯 떠났다 [금기된 죽음, 안락사⑤]

    <5> 가족 그리고 죽음을 돕는 사람들 조력사망으로 가족이 떠나면 남은 가족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갈까. 후회일까, 위안일까. 서울신문은 조력사망 이후 남은 가족의 심경을 듣고자 지난 8개월간 한국인 조력사망자의 가족들을 찾아 나섰다.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복수의 가족 중 한 분의 허락을 받아 인터뷰할 수 있었다. 한국 언론에서 조력사망자의 가족 인터뷰가 이뤄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21년 8월 26일 호주 국적의 한국인 허모(당시 63)씨가 스위스 바젤에서 조력사망했다. 허씨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폐암 말기 환자였다. 두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재발했고, 주치의가 말한 기대 여명도 이미 수개월을 넘긴 상태였다. 마지막 순간, 14년 만에 해후한 아들 한울(27·가명)씨가 곁을 지켰다.●씨도둑질은 못하는 법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속담이 떠오른 건 한울씨가 보여 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이목구비부터 미소까지 부자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아버지는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의연하셨어요.” 지난 5월 강원도의 한 소도시에서 만난 한울씨도 그랬다. 2년 전 여름 스위스에 다녀온 일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아버지를 만나고, 떠나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박 4일의 여정을 차분하게 설명하는 한울씨의 모습에서 사진 속 그의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한울씨에게 ‘아버지가 곧 죽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 2021년 8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아버지는 기억 속 흐릿한 존재였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아버지와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2007년 아버지를 만나러 호주로 가 한 달간 함께 살았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늘 그리운 건 아니었지만 마음 한편으론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14년 만에 폐암 말기 아버지와의 만남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을 찾았다. 폐암 말기 환자가 된 아버지는 조력사망을 결정했고, 얼마 뒤 스위스에 ‘죽으러 간다’고 했다. “잘 자라 줘서 고맙다. 이제야 찾게 돼 미안하다. 용서를 빈다. 다만 나는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메시지에 한울씨는 “전혀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라고 답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이야기였다. 한울씨는 학교 수업시간에 ‘안락사’나 ‘존엄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을 접하면서 ‘이런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 막연히 생각했다고 한다. 그 선택을 아버지가 했다. 무려 1년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호주에 살고 있는 아버지와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도 스위스에 함께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차마 “같이 갈 수 있느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동행을 제안한 건 어머니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볼 수 없는데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한울씨는 그날로 여권 발급을 신청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비즈니스석 항공권을 끊어 주었다. 조력사망 시행을 하루 앞두고 부자는 스위스 바젤에서 만났다. 한울씨는 네덜란드를 경유해 10시간 넘는 비행 끝에 아버지가 머물고 있던 호텔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직접 방문을 열고 아들을 맞이하며 “반갑다”고 말했다. 한울씨는 “스위스에서의 모든 일이 특별했지만 아버지와 처음 만난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서 “기억보다 훨씬 나이 들고 살도 많이 빠지고 수척해진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암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 싶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 “나는 자살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동행한 가족과 친구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아버지는 그 말을 꺼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선택을 되돌리길 바랐다. 한울씨와 함께 비행기를 탔던 아버지의 지인은 “아들도 만나게 됐으니 포기하고 돌아가자는 식으로 말려 볼 생각”이라고 했다. 가톨릭 신자인 한울씨가 스위스로 가기 전 가까운 형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털어놓자, 그도 “신앙인으로서 조력사망은 찬성할 수 없다. 네가 아버지를 설득하라”고 했다. 한울씨는 복잡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말리고 싶은 마음보단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존중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암의 고통이 너무 컸다고 하셨거든요. 남은 치료는 암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연명하는 일뿐인데 그걸 더 받는 게 맞나 싶으셨대요. 건강한 저는 그 고통을 모르잖아요. 이미 마음을 굳힌 아버지한테 ‘더 참고 치료를 받으세요’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자는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병든 아버지는 못 보는 사이 청년이 돼 버린 아들에게 묻고 살았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았다. 이혼하게 된 이유부터 떨어져 지내는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지갑에서 작은 사진 하나를 꺼냈다. 사진 속에는 서너 살쯤 되는 어린 한울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20년 넘은 오래된 사진이지만 구겨짐 없이 잘 관리된 듯했다. 아버지는 사진을 건네며 “한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힘겹게 병마와 싸워 온 이야기와 왜 스위스로 와야만 했는지를 차분히 설명했다. “한울아, 나는 자살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이 말을 또 했다. 당신은 끝이 정해진 시한부의 삶이라며 너무 걱정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 아버지에게선 죽음을 눈앞에 둔 자의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넌 아직 젊고 하고 싶은 것도 많겠지만 나는 더는 삶에 기대가 없단다. 살 만큼 살았어.” 밤은 이야기로 채워졌다.●그는 마지막 농담을 던졌다 마침내 26일 아침이 밝았다. 아버지는 전날 밤부터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한울씨는 “아버지도 긴장을 많이 하신 것 같았다. 전날 밤 잠을 한숨도 못 잤는데도 잠이 안 오더라고 하셨다. 지난날을 돌아보느라 그럴 수도 있고, 이제 계속 잘 건데 왜 자느냐 싶었을 수도 있고, 여러 생각을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바젤 외곽에 있는 조력사 장소로 가기 전 아버지의 호텔방에 사람들이 모였다. 아버지는 “연예인이 된 것 같다”는 농을 던졌지만 분위기는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 사람씩 시계를 선물했다. 한울씨는 ‘남은 인생의 시간을 소중하게 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조력사 단체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도착한 시설은 언뜻 보면 차고같기도 하고 목공소같기도 한 외관이었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침대를 빙 둘러선 사람들 사이에서 흐느낌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울씨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아버지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감정의 동요를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력사를 돕는 직원이 약물이 담긴 링거액을 걸고 “준비가 되면 밸브를 돌리라”고 안내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밸브를 돌렸다.●동행들에게 시계를 선물한 아버지 그 순간 한울씨는 몇 주 전 군에서 받은 공수훈련을 떠올렸다고 한다. 헬기를 타고 1800피트(548.64m) 상공에 올라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훈련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며 먼저 뛴 동료들이 무사히 착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낙하산은 펴질 것이고,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죽을까 봐 두려웠다. ‘내가 아버지였다면 저 밸브를 돌릴 수 있을까.’ 울음 소리가 커졌지만 한울씨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더 추억을 남겼다면 좋았겠다는 마음도 있었죠. 하지만 그 시점에선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아버지가 스스로 선택한 대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가신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냥 잠자듯 떠나셔서 그게 참 다행이에요.” 임종을 함께 지켰던 아버지의 지인들은 그 순간에 대해 “이미 절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모습이었다”,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다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한울씨는 “어쩌면 더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신 걸 수도 있다. 본인마저 두려워하면 같이 온 사람들은 더 힘들 테니까”라고 말했다. 그 후 2년이 흘렀다. 한울씨는 그날 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는 중이다. 장교로 임관해 군 생활을 하고 있다. “치료의 가능성이 있었다면 저도 (조력사망을) 반대했을 수 있겠지만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남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는 것보다 스스로 마무리하겠다는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해요. 그리고 제가 아는 누군가가 아버지와 같은 상황에서 동행을 요청한다면 저는 같이 갈 거예요. 마치 멀리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는 마음으로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조력사망 희망자들이 얘기하는 가족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아직 존엄을 지킬 수 있을 때 먼 이국 땅으로 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결정을 지지하는 가족도, 반대하는 가족도, 차마 반대는 못 해도 함께 가지는 않겠다는 가족도 있었다. 한울씨는 시간을 되돌려도 스위스에 가겠다고 했다. “남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는 것보다 당신이 할 수 있을 때 마무리하겠다는 선택을 존중해요.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는 자살한 게 아닙니다.” 서울신문의 ‘금기된 죽음, 안락사’ 기획기사는 ‘인터랙티브형 기사’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찍거나 아래 링크를 복사한 후 인터넷 주소창에 붙이는 방법으로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eoul.co.kr/SpecialEdition/euthanasia/■ 기획취재부 유영규 부장, 신융아·이주원 기자
  • 혁신위 힘 실은 이재명 “체포동의안 기명투표 필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4일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방식을 무기명에서 기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혁신위원회 제안에 대해 “입법 사안인데 조기에 기명투표를 선언하는 게 필요하다”고 호응했다. 이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를 마친 뒤 당 혁신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검토 중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책임정치라는 측면에서 투표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은경 혁신위’에 힘을 싣는 동시에 최근에 다시 점화되고 있는 본인의 사법리스크와 관련해 자신감을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의 수사 속도가 빨라지는 가운데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이 대표에게 사전 보고를 했다는 진술을 번복, 재번복하는 상황에서 이 대표에 대한 소환 조사 및 구속영장 청구가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이 대표가 ‘책임정치’라는 단어를 통해 해당 사건에 대한 결백을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편 김은경 혁신위는 지난 21일 당 소속 공직자와 당직자의 상시 감찰, 체포동의안 기명 표결 등의 내용이 담긴 1차 혁신안을 당에 제시했다. 혁신위는 “국민의힘도 불체포특권 포기 의사를 천명했고, 관련 법안도 제출돼 있다”며 “민주당이 주도해 21대 임기 내에 법 개정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혁신위는 이 대표의 긍정적인 반응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김남희 혁신위 대변인은 서울신문 통화에서 “저희(혁신위)가 원하는 것은 어쨌든 당이 잘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혁신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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