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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서울 유니폼 입은 기성용… 등번호 8번

    다시 서울 유니폼 입은 기성용… 등번호 8번

    한국 축구의 전 캡틴 기성용이 프로축구 K리그 FC서울로 복귀했다. FC서울은 21일 기성용과 입단 계약을 맺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계약 기간은 3년 6개월이다. 기간 외 자세한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팀 내 최고 수준인 7억원 이상의 연봉을 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등번호는 8번이다. 기성용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느낌”이라며 “FC서울은 축구 인생에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 준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팀”이라고 말했다. 또 “기다려 준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잘 성장해서 돌아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기성용은 22일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다. FC서울 제공
  • 11년 만에 서울 유니폼 입은 기성용

    11년 만에 서울 유니폼 입은 기성용

    한국 축구의 전 캡틴 기성용이 프로축구 K리그 FC서울로 복귀했다. FC서울은 21일 기성용과 입단 계약을 맺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계약기간 3년 6개월이다. 연봉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팀 내 최고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성용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라며 “FC서울은 축구 인생에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 준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팀”이라고 말했다. 또 “기다려 준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잘 성장해서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기성용은 22일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다. FC서울 제공
  • 블록체인 특구라더니 암호화폐 금지… 서울로 유턴하는 스타트업

    블록체인 특구라더니 암호화폐 금지… 서울로 유턴하는 스타트업

    지난해 7월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부산에서 ‘무늬만 자유특구’라는 실망감이 커지고 있다. 당초 특구가 블록체인·암호화폐 신기술의 성지가 될 것이란 기대와 달리 현행법과의 충돌로 사업마다 제동이 걸리고 암호화폐 스타트업은 대부분 불허된 탓이다. 부산시 블록체인특구 법률자문위원인 이지은 법률사무소 리버티 변호사는 20일 “지역특구법의 한계로, 법률상 동등한 효력을 가지는 개인정보보호법이나 전자증권법 등을 위배하거나 바꿀 수 없다”면서 “규제자유지대라고 해도 현행법 체계와 다르게 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산 특구에 들어간 세종텔레콤은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자산거래 플랫폼’으로 부동산 펀드를 판매하고 유통할 계획이었다가 급거 수정했다. 이 서비스가 전자증권법을 위반할 소지가 불거지자 펀드를 블록체인 플랫폼과 한국예탁결제원에 동시 등록하는 편법을 썼다. 익명을 요구한 특구 관계자는 “기존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건데 결과적으로 기존 체계에 결국 블록체인을 끼워 넣기 한 것으로 특구의 취지가 훼손됐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관련 사업으로 암호화폐를 가장 많이 떠올리지만 부산 특구에서는 금지다. 유일하게 부산은행이 발행하는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화폐인 ‘디지털 바우처’ 사업만 내년 8월쯤 진행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본래 전자금융거래법상 중앙 전산시스템을 경유해야 하지만 규제 특례를 적용받았다. 하창동 오픈블록체인협회 사무국장은 “블록체인의 강점을 살리려면 보상 체계인 암호화폐가 필요하다”면서도 “국내 암호화폐 업계가 불안정하고 법 규정이 미비해 정부 입장에선 특구라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규제자유란 단어가 무색하다”며 “스타트업이 많은 블록체인 산업을 결국 자본과 크기가 앞선 기업만 살아남게 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기술, 전문 인력, 운영 자금, 정보 등 블록체인 사업을 하기에 여건이 불충분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권영은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팅 업체 팀위 대표는 “지난 2월까지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왔다”면서 “경제나 스타트업 생태계 규모가 서울 대비 체감상 10분의1 수준”이라고 털어놨다. 박광희 부산시 스마트시티추진과 주무관은 “반쪽짜리 규제자유특구라는 지적이 있지만 정부 정책 기조가 ‘암호화폐 허용이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입장이라 특구에서도 허가가 어려운 것”이라고 밝혔다.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태릉골프장 개발하면 2만 가구 ‘둥지’…육사·선수촌 터 합치면 250만㎡ 달해

    태릉골프장 개발하면 2만 가구 ‘둥지’…육사·선수촌 터 합치면 250만㎡ 달해

    청와대가 20일 국가 소유인 서울 노원구 태릉골프장 부지를 활용해 주택을 공급하는 방안을 언급하면서 이 부지가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전문가들은 태릉골프장 부지를 택지로 개발하면 2만 가구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군 시설인 태릉골프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1966년 11월 9홀 규모로 개장한 뒤 1970년 10월 정규 18홀로 확장했다. 부지 면적은 약 82만㎡에 달하며 육군사관학교와 인근의 태릉선수촌 터까지 합치면 250만㎡까지 늘어난다. 서울의 최근 대규모 개발지인 강서구 마곡지구(366만㎡)의 약 70%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과 봉화산역, 경춘선 갈매역 등이 가까워 접근성도 좋다. 주소지를 서울로 하는 유일한 골프장으로 현재 군인들의 체력 단련 용도로 쓰이고 있다. 태릉골프장 부지를 활용하는 방안은 2년 전에도 검토됐다가 국방부 반대로 무산됐다. 하지만 부동산 안정이 현 정부의 최대 목표가 된 상황에서 다시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앞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15일 당정 협의 뒤 용산구 국방부 청사를 방문해 정경두 장관을 만났는데, 태릉골프장 부지 문제를 논의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한편 국방부는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공주택 공급 물량 확대 필요성과 시급성, 군인 복지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관계부처, 지방자치단체 등과 논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세종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서울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선 넘는 일요일] 짝사랑 때문에 유치장에만 ‘12번’…9년간의 이야기

    [선 넘는 일요일] 짝사랑 때문에 유치장에만 ‘12번’…9년간의 이야기

    ‘선데이서울’ 속, 연예인들의 파격적인 컬러사진 못지않게 화제를 모았던 기상천외한 사건들. 그 중 제27호 (1969년 3월 30일자)에 실린 ‘짝사랑 9년 감방인들 어떠리오’에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당시 기사에 따르면, 1961년 초가을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권 모 씨(35)가 돈벌이를 위해 결혼한 지 4개월 된 부인 손 모 씨(34)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직장도 없이 셋방을 얻어 어려운 생활을 하던 권 씨는 그해 11월 고향 선배의 소개를 받아 창신시장 경비원으로 취직이 됐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 구석구석을 살펴야 했던 권 씨는, 취직 한 달 만인 1961년 12월 초 어느 날 시장 안 M미장원에 새로 온 이 모(당시 20) 양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날부터 권 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장원 앞을 서성거렸고 이 양이 출퇴근할 때면 멀리서 속을 태웠다. 그 뒤 1년 동안 권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장원을 쳐다보는 일을 일과로 삼았고, 참다못해 미장원 안으로 뛰어들어 이 양에게 통사정도 해보았으나 이 양의 반응은 언제나 냉담했다. 권 씨는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과 시비가 잦아졌고, 시장조합에는 마음을 돌리겠다는 각서를 세 번이나 쓰기도 했다. 하지만 권 씨는 이 양에 대한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1962년 크리스마스, 권 씨는 이 양에게 담판을 질 생각으로 M미장원 안으로 뛰어들어 소란을 피웠다.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어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으로 직행했다. 1주일 만에 유치장을 나온 권 씨는 갈 곳이 없었다. 직장에선 해임 통보가 와 있었고 그간 들어가지 못한 집엔 들어갈 체면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양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었다. 하루라도 이 양을 보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 같던 권 씨는, M미장원 근처의 일터를 찾아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4년 동안 권 씨는 인천 모 대학에 다닌다는 이 양의 남동생을 찾아가기도 했고, 이 양의 고향인 온양에 가 이 양의 부모도 만나보았으나 번번이 퇴짜만 맞았다. 그러나 1967년 7월, 그동안 권 씨의 시달림 속에서도 직장을 옮기지 못했던 이 양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권 씨는 이 양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고 수소문 끝에 있을 법한 부산, 온양 등지를 수없이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권 씨는 부인과의 이혼 수속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이 양을 찾는 일을 계속했다. 권 씨의 판단으로는 이 양이 서울의 미장원에서 일하고 있을 것 같아 화장품 외무사원을 하면서 서울의 모든 미장원을 뒤져보기로 했다. 화장품통을 메고 골목 골목의 미장원을 하나도 빼지 않고 찾아다니던 권 씨는 1967년 10월 단성사 옆 N미장원에서 이 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 양은 권 씨를 피해 직장을 자주 옮겼으나 그때마다 권 씨는 이 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권 씨는 동대문서, 성동서, 종로서 등의 유치장에 계속해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곳의 직장을 옮겼으나 피할 길이 없다고 체념했던 이 양은 Y미장원에 와서는 그대로 머물러 버렸다. 권 씨는 계속해서 Y미장원을 찾았고, 그때마다 이 양은 경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1969년 3월 20일, 결국 권 씨는 12번째 유치장 문을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Y미장원 관할서인 종로경찰서 유치장에만 8번째였다. 당시 유치장에 구속되어 있던 권 씨는 “나가면 또 이 양을 찾아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기사에는 ‘짝사랑 9년간의 절절한 순애보’로 그려졌지만, 권 씨의 행동은 엄연한 ‘스토킹’이라고 볼 수 있다. ‘스토킹(Stalking)’이란,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계속 따라다니면서 정신적·신체적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말한다. 직접적인 접촉이 없어도 폭력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범죄’에 해당한다. 권 씨의 9년간의 이야기는 ‘짝사랑’이 아닌 ‘범죄’였던 것이다. 글 장민주 인턴 goodgood@seoul.co.kr영상 임승범 인턴 장민주 인턴 seungbeom@seoul.co.kr
  • ‘부부의 세계’ 한소희 “어머니 빚 대신 변제”

    ‘부부의 세계’ 한소희 “어머니 빚 대신 변제”

    배우 한소희가 최근 불거진 어머니 사기 의혹에 관련해 련피해자에게 사과하며 굴곡진 가정사를 털어놨다. 한소희는 19일 자신의 블로그에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으로 글을 쓰셨을 피해자분들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다”며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염치 불구하고 글을 적어본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5세에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고 밝히며 “어머니와의 왕래가 잦지 않았던 터라 20살 이후 어머니의 채무 소식을 알게 되었고, 나를 길러주신 할머니의 딸이자 천륜이기에 자식 된 도리로 데뷔 전부터 힘닿는 곳까지 어머니의 빚을 변제해 드렸다”고 설명했다. 한소희는 데뷔 후 채무자들의 연락으로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과 활동을 내세워 돈을 빌린 후 변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어머니가 빌린 돈의 채무 서류에 나도 모르게 적힌 차용증과 제 명의로 받은 빚의 금액은 감당할 수 없이 커져 있었다”며 “빚을 대신 변제해 주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던 내 불찰로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긴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번 일은 피해자 중 한 명이 전날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부부의 세계 연예인 엄마 사기’라는 글을 올려 한소희의 어머니에게 곗돈 970만원을 사기당했다고 밝히면서 시작됐다. 한소희는 2017년 SBS TV 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로 데뷔했으며 JTBC ‘부부의 세계’로 스타덤에 올랐다. 다음은 한소희 입장 전문 안녕하세요 이소희(한소희 본명)입니다. 우선 제가 감히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벼랑 끝에 서있는 심정으로 글을 쓰셨을 피해자분들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실 상황 속에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번 일을 통해 마음 불편하셨을 혹은 다치셨을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염치 불구하고 글을 적어봅니다. 5살 즈음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되어 할머니께서 길러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어머니가 계신 울산으로 전학을 가게된 이후에도 줄곧 할머니와 같이 살았고,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하여 이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의 왕래가 잦지 않았던 터라 20살 이후 어머니의 채무 소식을 알게 되었고, 저를 길러주신 할머니의 딸이자 천륜이기에 자식 된 도리로 데뷔 전부터 힘닿는 곳까지 어머니의 빚을 변제해 드렸습니다. 데뷔 후 채무자분들의 연락을 통해 어머니가 저의 이름과 활동을 방패 삼아 돈을 빌린 후 변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가 빌린 돈의 채무 서류 속에는 저도 모르게 적혀있는 차용증과 제 명의로 받은 빚의 금액은 감당할 수 없이 커져있었습니다. 그저 저의 어리고, 미숙한 판단으로 빚을 대신 변제해 주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던 제 불찰로 인해 더 많은 피해자분들이 생긴 것 같아 그저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피해자분들과 이번 일을 통해 상처받았을 모든 분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정의연, 검찰 ‘인권침해’ 신고…“참고인 조사 불응하자 입건”

    정의연, 검찰 ‘인권침해’ 신고…“참고인 조사 불응하자 입건”

    참고인 소환 통보를 받은 전직 활동가가 조사에 즉시 응하지 않자 검찰이 죄명을 고지하지 않고 피의자로 입건했다며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인권침해 중단을 촉구했다. 17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회계부정 의혹으로 수사를 받는 정의연의 변호인은 지난 15일 서울서부지검 인권감독관실에 검찰이 강압적 방법으로 참고인 출석을 강요하고 있다며 이러한 내용의 신고서를 제출했다. 신고서에 따르면 정의연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활동했던 A씨는 13일 서울서부지검으로부터 ‘201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치료사업 관련해 문의 사항이 있으니 연락해달라’는 문자를 받았다. A씨는 검찰에 전화를 걸어 “6년 전 일했던 내용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고, 2015년 2월 퇴사했다”며 “지금은 제주도에 살아 출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서울서부지검 형사1부(이병석 부장검사) 검사실 소속 수사관은 “2014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치료사업 담당자로 이름이 보이길래 전화했다. 나중에 문의 사항이 생기면 전화할 테니 연락을 받아달라”고 답했다. 다음날 해당 검사실 소속 수사관은 재차 연락해 “배려해서 제주지검으로 내려갈 테니 16일 오전 10시까지 오라”고 했고 A씨는 “오래 전이라 기억나는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어 가고 싶지 않다”고 거부했다. 수사관은 A씨의 말에 “그럼 번거롭게 소환장과 체포영장이 발부돼 여러 사람이 가게 될 것이고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 말하기 싫으면 제주지검에 와서 ‘기억이 안 나 진술을 거부한다’고만 말하고 가라”고 했다. A씨 측은 신고서에서 “격앙된 큰 목소리로 말해 무섭고 겁이 났다”며 “예전에 정대협에서 같이 일했던 언니나 변호사에게 좀 여쭤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밝혔다. A씨는 다시 검찰에 연락해 “왜 소환장과 체포영장을 말해 협박하는 것이냐. 아는 변호사님께 알아봤더니 피의자가 될 가능성도 없다고 한다”고 항의했다. 수사관은 “피의자가 될지 말지는 우리가 판단한다”고 답했다. 이런 대화가 있던 당일 오후 늦게 휴대전화를 확인한 A씨는 검찰에서 ‘피의자로 입건됐다. 16일 오전 10시까지 제주지검으로 출석해 달라’는 문자가 온 것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과 통화한 지 4시간여만이었다. 검찰은 이후 A씨에게 보낸 문자에서 ‘제주지검을 포함한 검찰청에 일절 출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후 검찰청의 문자 및 전화에 일절 답하지 않고 있는바, 소환 요청에 답변조차 하지 않을 경우 출석 불응에 따른 법적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고 안내했다. A씨는 “너무 겁이 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밤에 잠도 자기 어려웠다”고 신고서에서 밝혔다. 정의연 측 변호인은 “검찰은 참고인 신분인 A씨를 피의사실은 물론이고 죄명조차도 고지하지 않은 채 피의자로 입건했고, 일방적으로 일정과 장소를 정해 출석하라고 했다. 참고인으로 당장 조사받기 어렵다고 하자 출석 조사를 받도록 할 목적으로 겁박해 입건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검찰의 행위가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인권보호 수사 준칙에서 규정한 ‘참고인에 대한 강압적인 언사 등에 의한 출석 강요 금지’ 규정을 위배한 것”이라며 “내사 또는 진정 사건으로 수리해 신속·공평하게 처리해 달라”고 인권감독관실에 요청했다. 변호인 측은 신고서를 제출하면서 검찰수사심의위위원회를 열어 A씨에 대한 수사 진행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변호인 신청으로 17일 열린 부의심의위원회에서는 해당 사건을 검찰수사심의위에 부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서울서부지검은 “사건 관계인의 출석조사 요구와 관련해 위법하거나 부당한 사항이 없었다”며 “조사 대상자가 변호사와 상의 후 갑자기 출석하지 않겠다면서 검사실의 전화 등 연락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증거관계 등을 고려해 적법 절차에 따라 대상자를 입건하고 재차 출석 요구 연락을 했으나 대상자 측에서 이에 대해서도 응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열 받은 원희룡, 서울 격리대상자 제주 방문에 “서울서 방역 누락”

    열 받은 원희룡, 서울 격리대상자 제주 방문에 “서울서 방역 누락”

    서울 광진구 코로나19 확진자가 제주를 방문하기 전부터 자가 격리 대상자였으나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17일 코로나 19 브리핑에서 “제주에서 2차 감염을 불러온 광진구 20번 확진자는 서울에 거주하는 동안 강남구 마사지샵에서 강남구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된 것으로 보이나 접촉자 관리 체계에서 누락돼 제주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광진구 20번 확진자 A씨는 제주 방문 전에 가족이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미용업소를 찾았다가 감염된 것으로 광진구는 추정했다.A씨는 지난 9일부터 14일까지 5박 6일간 제주를 방문했다. A씨는 보건당국 조사에서 “제주 체류 당시인 11일부터 오한과 기침증상이 나타났고,13일 가족이 사다준 해열제를 복용했다”고 말했다.A씨는 11일부터 증상이 있었고 제주 방문 후 서울로 돌아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원 지사는 “자가 격리를 해야 할 접촉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로 번질 수 있다”면서 “A씨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원 지사는 “서울시와 각 구청에서 밀접 접촉자들을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A씨의 제주 방문으로 제주에서 A씨의 가족 등 현재 4명의 2차 감염자가 발생했고 100여명이 자가격리 조치됐다. 도는 증상이 있음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 등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제주 여행을 강행하다 확진되면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강조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NYT, 홍콩 인력 일부 서울로…美언론 ‘홍콩 탈출’ 검토

    NYT, 홍콩 인력 일부 서울로…美언론 ‘홍콩 탈출’ 검토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NYT)가 홍콩 사무소 일부를 서울로 이전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월스트리트저널(WSJ) 등도 홍콩 취재 인력을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이 이달부터 시행한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으로 홍콩 내 취재 활동에 제약이 생긴 것과 동시에 기자들의 안위에도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5일(현지시간) 홍콩지사 인력의 3분의 1을 서울로 옮기기로 한 NYT 외에 “다른 글로벌 언론사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다. WSJ·CNN도 ‘비상시 홍콩지국 축소’ 검토 전날 NYT는 홍콩을 기반으로 삼아 활동하던 디지털 뉴스 인력을 내년 중 한국으로 이동시킬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익명의 관계자들은 비자가 만료돼 더는 홍콩에서 취재할 수 없는 선임기자들도 이동 대상에 포함된다고 전했다. WSJ은 이 사안을 잘 아는 소식통들을 인용해 “일부 매체는 필요할 경우 역내 다른 곳으로 옮길 컨틴전시플랜(비상대응계획)을 짜고 있다”고 전했다. 전에는 관행적으로 발급하던 외국 언론인들에 대한 비자가 최근 몇달 동안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홍콩 주재 외신들의 업무를 어렵게 하는 상황이다. WSJ와 WP 역시 필요할 경우 다른 지국으로 홍콩 인력을 옮길 가능성을 검토 중이라고 소식통들은 전했다.WP 대변인은 홍콩보안법의 영향을 평가 중이라면서도 아직 홍콩의 현장 운영을 축소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당초 홍콩보안법이 시행되기 전 WP는 현재 2명에 불과한 홍콩 인력을 확대해 아시아 취재 거점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CNN방송의 한 대변인은 당장 직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은 없다면서도 “만약 홍콩에서의 활동이 위협받는다면 우리는 (이전을) 당연히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신 기자들이 홍콩보안법에서 특히 우려하는 것은 홍콩 당국에 ‘외국 뉴스 매체의 관리와 점검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할’ 권한을 부여한다는 54조 조항이다. 조디 슈나이더 홍콩외신기자클럽 회장은 “비자가 홍콩보안법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홍콩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수십년 동안 주요 서방 매체들의 아시아 뉴스 허브 지위를 누려왔다. 리서치회사 텔럼미디어에 따르면 홍콩에 주재하는 기자들의 수는 8000여명으로 다수는 무역과 금융 관련 매체에서 일한다. NYT “홍콩보안법이 저널리즘 불확실성 조성” 디지털 뉴스 인력을 옮기더라도 NYT는 홍콩 사무소에 취재 인력을 유지할 계획이며, ‘NYT 인터내셔널’ 인쇄팀과 광고·마케팅팀도 잔류한다. NYT 편집진과 임원진은 사내에 공유한 글에서 “중국의 포괄적인 홍콩보안법이 사무소 운영과 저널리즘에 어떤 의미가 될지 불확실성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대책을 만들고, 세계 각지에 편집인력을 다양화하기 시작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NYT는 홍콩사무소를 “중국의 창구”로 활용하는 한편 앞으로 홍콩이 겪을 변혁을 취재하기 위해 앞으로 취재 인력을 충원할 계획도 있다고 덧붙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큰 기대 한순간에 무너져 황망하고 서운’, 고 박원순 시장 고향 분위기

    ‘큰 기대 한순간에 무너져 황망하고 서운’, 고 박원순 시장 고향 분위기

    고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인 경남 창녕군 장마면 장가1구 마을은 박 시장의 갑작스런 사망을 애도하며 박 시장 장지 예정지인 선영에서 13일 진행될 유해 안치를 돕기 위한 준비를 차분히 진행하고 있다. 박 시장이 유언에서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고 한 부모 산소는 고향 마을 뒷산에 위치해 있다. 마을에서 걸어서 20여분 거리다. 장가1구 마을에는 박 시장이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기와집이 마을 회관 옆에 위치해 있다. 밀양 박씨 집성촌인 장가1구 마을에는 50여 가구에 주민 80여명이 살고 있으며 70~90대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많다. 장가1구 마을 이장 이주태(61)씨는 “마을 주민들은 박원순 시장에 대해 ‘큰 일을 할 인물’이라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한 순간에 기대가 무너지는 황망한 일이 벌어져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회관 옆에 임시로 설치한 천막에 삼삼오오 모여 박 시장의 갑작스런 변고 소식에 애도를 나타내며 마을차원에서 필요한 지원을 수시로 논의하고 진행하고 있다. 이장 이씨는 “13일 박 시장 장지에서 진행될 유해 안치 절차 등에 대비해 주민들이 토요일에는 박 시장 장지로 가는 길을 정리한데 이어 오늘 아침에는 새벽일찍 고 박 시장 집을 비롯해 마을 전체 청소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장지에서 유해 안치가 진행되는 12일에는 마을 주민들이 교통정리를 하며 장지를 찾는 조문객에게 마스크도 나눠주고 40~50대 마을주민 10여명은 장지 일을 도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마을 주민들은 “박 시장이 일년에 1~2번은 고향을 방문해 부모 산소에 들러 인사를 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집과 마을을 둘러보고 갔다”고 회고 했다. 박 시장은 올들어 지난 3~4월에 고향 마을을 방문해 부모 묘소와 고향 집을 둘러볼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가 확산돼 장기화 되는 바람에 결국 방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고 박 시장은 지난해 창녕을 방문했을때 고향 마을 집에 보관돼 있던 초·중학교 시절 공부할 때 사용한 앉아서 공부하는 낡은 책상을 서울로 가지고 간 것으로 전해졌다. 박 시장 고향마을 옆집에 살며 의형제로 지냈다는 최윤열(63)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이다”고 슬퍼했다. 고 박 시장 고향 창녕지역 ‘창녕박원순 팬클럽’은 지역 주민들이 조문을 할 수 있도록 창녕읍에 있는 팬글럽 사무실에 지난 11일 오전 분향소를 설치했다. 고인의 영정과 국화꽃, 박 시장이 2017년 쓴 ‘비화가야의 꿈. 내 고향 창녕을 응원합니다. 서울특별시장 박원순’이라는 메시지 등이 놓여 있던 분향소는 이날 자정까지 운영됐다. 김정선 창녕 팬클럽 사무국장은 “회원들이 ‘박 시장을 아끼는 지역 분들이 조문을 할 수 있게 분향소라도 마련하자’고 해서 준비하게 됐다”며 회원들이 박 시장의 비보에 애통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녕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박원순 서울시장…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3선 시장에서 극단적 선택까지

    박원순 서울시장…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3선 시장에서 극단적 선택까지

    지난 9일 삶을 마감한 박원순(64) 서울시장은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를 거쳐 서울시 최초로 3선 시장이 된 인물이다. 인권변호사와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인 박 시장이 서울의 수장이 되면서 효율성과 도시개발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서울시 행정도 시민참여와 소통 등 새로운 가치를 입게 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날 자신의 전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민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박 시장은 1975년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유신 반대 시위에 참여한 이유로 제적된 뒤 단국대에 입학했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가 6개월 만에 변호사로 개업해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1988년에는 진보 성향 법조인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인권변호사 시절 권인숙 성고문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 성범죄 관련 사건도 변호하며 명성을 쌓았다. 특히 우 조교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의 개념을 재정의한 사건으로 관련 판례를 바꿨다. 또 미국문화원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 민주화 운동 관련 변론도 많이 맡았다. 인권변호사로서뿐만 아니라 시민운동 활동가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박 시장은 1994년 참여연대를 설립하고 대기업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을 진행했다. 또 부적격 정치인 낙선 운동과 결식 제로 운동 등을 추진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96년에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하고 사회적기업인 아름다운가게도 함께 설립한 뒤 상임이사를 맡아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는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선이 예정되자 출마를 선언했다. 9월 21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박 시장은 지지율 5%로 시작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로 단일화를 이뤄 내 야권 단일후보를 거머쥐었다. 무소속으로 야권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해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53.4% 대 46.2%로 누르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어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도 당시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을 56.1% 대 43.1%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는 52.8%를 득표해 상대방인 자유한국당 김문수(23.3%) 후보, 바른미래당 안철수(19.6%) 후보를 가뿐하게 누르고 3선에 성공했다. 박 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행정, 인사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2011년 10월 취임한 박 시장은 오 전 시장이 반대하던 초등생 무상급식 지원 예산 200억원에 대한 집행을 시작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저 경호용으로 경찰이 무상으로 사용하던 시유지를 회수했다. 또 반값등록금 운동에 적극 호응해 2012년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을 전년의 50% 수준으로 낮추고 서울시 주요 보직을 개방형으로 바꿔 시민단체를 비롯한 민간인들이 서울시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는 평가다. 도시계획과 개발에서는 기존 개발 지상주의를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은 2012년 2월 개포지구 재건축 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주택의 50%를 소형 평형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추진했던 뉴타운 사업의 경우에도 주민들의 반대가 있을 경우 지구 지정을 해제하며 ‘도시재생사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게 했다. 또 한강변 아파트의 경우 최대 35층 이상으로 짓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기존 한강르네상스 개발과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은 줄이고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해 ‘서울로 7017’을 만드는 등 기존 건축물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서울의 주택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2018년 정부가 서울시에 그린벨트를 풀 것을 요구하자 미래세대를 위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은 그의 도시에 대한 철학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그린벨트 지킴이를 자처했던 박 시장이 생을 마감하면서, 앞으로 그린벨트가 계속해서 지켜질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편 지난해에는 여의도와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계획 청사진을 발표하는 등 이전과 다른 도시개발에 대한 모습을 보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시개발에 대한 입장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 서울시장으로 살아 온 박 시장은 2020년 7월 9일 생을 마감했다. 사망 전날 박 시장은 전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 당했다. 경찰은 현재 사망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인권 변호사·시민운동가… “직업이 서울시장”이라 했던 원순씨

    인권 변호사·시민운동가… “직업이 서울시장”이라 했던 원순씨

    사상 첫 3선의 최장수(3180일) 서울시장이었던 ‘원순씨’. 진보 경제학자인 우석훈은 박원순(64) 시장을 가리켜 “참여연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한국 시민단체의 상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고 했다. 삶의 궤적을 관통했던 인권변호사와 시민사회운동가, 그리고 2011년 10·26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그는 자신의 꿈을 좇는 일 중독 시장이었다. 박 시장은 지난 6일 자청했던 세 번째 임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마이크를 잡자 마자 “임기가 9년이 되다보니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서울시장이 박원순이어서 ‘저 분이 직업이 서울시장인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보냈던 ‘시장의 시간’을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많은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키는 시간이었다”며 답했다. 누구도 그의 임기가 극단적 비극으로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그는 1994년 참여연대의 산파역을 했고,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사무처장으로 일하며 시민사회 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95년 사법개혁운동, 1998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낙천·낙선운동 등 민주주의의 양분이 됐던 시민운동마다 그가 함께 했다.박 시장은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 고(故) 조영래(1947∼1990) 인권변호사와 활동하며 뒤를 이었다. 1988년 진보 성향 법조인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 회원이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사건에 이어 1990년대 중반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의 개념을 재정의하며 판례를 바꾸기도 했다. 1988년 진보 성향 법조인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 회원이었다. 1996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수상, 2002년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기업인 아름다운가게를 함께 설립한 뒤 상임이사를 맡아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는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선이 예정되자 출마를 선언했다. 9월 21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지지율 5%로 시작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로 단일화를 이뤄 내 야권 단일후보를 거머쥐었다. 무소속으로 야권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이후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53.4% 대 46.2%로 눌렀다. 2011년 10월 27일, 당시 만 55세의 시민운동가 출신의 원순씨는 ‘서울특별시장’으로 2014년 6·4 지방선거, 2018년 6·13 지방선거까지 집권했다.박 시장 취임 후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행정, 인사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박 시장은 1기 첫 해 오 전 시장이 반대하던 초등생 무상급식 지원 예산 200억원에 대한 집행을 시작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저 경호용으로 경찰이 무상으로 사용하던 시유지를 회수했다. 또 반값등록금 운동에 적극 호응해 2012년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을 전년의 50% 수준으로 낮췄다. 도시계획과 개발에서는 기존 개발 지상주의를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은 2012년 2월 개포지구 재건축 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주택의 50%를 소형 평형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한강변 아파트의 경우 최대 35층 이상으로 짓지 못하도록 규제했다.기존 한강르네상스 개발과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은 줄이고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해 ‘서울로 7017’을 만드는 등 기존 건축물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서울의 주택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2018년 정부가 서울시에 그린벨트를 풀 것을 요구하자 미래세대를 위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은 그의 도시에 대한 철학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임자인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오세훈 시장의 광화문광장 등과 같은 ‘한 방’이 없다는 지적에 박 시장은 항상 “그게 정치적으로 맞는지는 몰라도 나는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내 삶을 바꾸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고 맞서 왔다. 박 시장이 마지막으로 직접 발표한 정책은 지난 8일 ‘서울판 그린뉴딜’이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샴페인 마실 시간이 어딨어? 요트 뒤집힐까 전전긍긍

    샴페인 마실 시간이 어딨어? 요트 뒤집힐까 전전긍긍

    베를린에 살기 시작한 지 7개월이 됐다. 아직 1년도 안 된 새내기 베를리너이지만 베를린의 여름만큼은 어느 정도 익숙하다. 12년 전 베를린에 처음 왔다가 매료돼 열심히 드나든 덕분이다. (지금은 절판된) 내 인생 첫 책의 제목도 ‘다시 베를린’이었다. 책 이름처럼 1~2년에 한 번씩, 어느 해엔 연달아 베를린에 왔다. 잡지 취재로도 오고, 출장으로도 오고, 휴가로도 왔다. 그리고 그 계절은 항상 여름이었다. 내게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자 언제나 돌아오고 싶은 때였다. 올 때마다 베를린의 여름을 탐험하는 강도도 높아졌다. 처음엔 힙한 동네 ‘미테’와 ‘크로이츠베르크’를 어슬렁리며 갤러리와 바, 맛집 등을 탐험했다. 부지런히 동네를 익히고 힙한 곳을 찾아다니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랐다. 도시에 익숙해지자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줄었다. 크로이츠베르크의 ‘크’자도 모르던 20년지기 친구가 베를린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후로는 더 느긋한 마음이 생겼다. 그녀는 내 집처럼 자기 집 한켠을 내주며, 여름이 다가오면 물었다. “언제 올 거야?” 그래서 나는 많은 여름을 베를린에서 있었다. 거창한 계획도 없이, 친구 집 거실을 별장 삼아. 더울 땐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들어가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슈프레 강가에 누워 맥주를 마셨다. 베를린에 사는 친구들과 공원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5유로짜리 와인을 하루 종일 마시기도 했다. 게으른 베를리너들의 흔한 여름 피서법이었다. 하지만 공원의 그늘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날이 있다. 기온이 30도 이상 올라가는 때다.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에어컨이 없어서 서울 집처럼 시원한 냉기가 없다. 에어컨 없는 카페, 에어컨 없는 지하철. 도시에는 에어컨 없는 것들투성이다. 그래서 여름이 짙어지면 베를리너들은 호수로 간다. ●내륙 도시 베를린… “바다 대신에 호수로” 베를린에는 시내를 관통하는 슈프레강과 서쪽의 하펠강, 그리고 80여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다.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슈프레 강가에서 일광욕을 하거나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호수로 가서 물놀이를 즐긴다. 바다가 없는 베를린에서는 해수욕이 아닌 ‘호수욕’을 즐기는 것이다. 그동안 물놀이라 해 봐야 티어가르텐 안에 있는 카페 암 노이엔 제에서 배를 타거나 슈프레 강변에서 맥주를 마시는 게 전부였는데, 여름마다 오다 보니 점점 새로운 물가를 탐험하게 됐다. 베를린의 여러 호수를 가 봤고, 이제는 시간 날 때마다 세일링도 한다. 가까운 호수 중엔 쿠담비치를 제일 먼저 가봤다. 서쪽의 부자 동네, 쿠담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작은 호수, 하렌제(Halensee) -제(see)는 독일어로 호수를 뜻한다- 앞에 갔다. 호숫가에는 긴 풀장과 선탠할 수 있는 나무 데크, 고운 모래사장과 흰색의 비치의자들이 단정하게 비치돼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운치가 있는데, 쿠담비치는 아마도 베를린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해변 중 하나일 것이다. 맥주보다는 샴페인을 마셔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넘친다. 호수 위에는 카푸치노 그랜드 카페가 자리해 있다. 이곳 역시 지중해풍의 하얀색 의자와 테이블, 흰 소파들이 휴양지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많지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풍경을 즐기기엔 아깝지 않다. 비싼 데 돈을 잘 안 쓰는 베를리너들에겐 조금 사치스러운 분위기이긴 해도, 리조트 같은 여유와 분위기를 바란다면 한번쯤 즐길 만하다.●베를린에서 가장 큰 뮈겔제 호수 쿠담비치 이후엔 베를린 인근의 호수로 반경을 넓혔다.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 정도 가야 하지만 거리가 좀 멀어서 그렇지, 가는 길이 어렵진 않다. 그중 가장 멋졌던 호수는 뮈겔제다. 베를린에서 가장 큰 호수로 동쪽 끝에 있다. 호수의 길이는 4.5㎞, 너비는 2.5㎞에 달한다. 수심이 깊은 곳은 8m에 이른다. 지하철 타고 트램 타고 걸어 걸어 찾아간 뮈겔제에서 우리가 간 곳은 ‘작은 뮈겔제’(Kleiner Mggelsee)였다. 근처에 누드비치(독일 말로는 에프카카(FKK)라고 한다)도 있다는데, 그곳에서 놀 배짱까진 없었다. ‘작은 뮈겔제’는 숲처럼 나무가 가득한 언덕 위에서 호수까지 고운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다. 사방은 나무로 막혀 있고 자연적으로 생긴 해변처럼 은밀하고 아름다웠다. 아는 사람이 아니고선 쉽게 못 찾아올 것 같은데, 호수 초보자에게나 그렇지 그곳엔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친구들, 연인,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 단위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돗자리를 깔고 오후 반나절을 작은 뮈겔제에서 보냈다. 호숫가에 맥주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도 있어 부지런히 맥주도 사다 마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줄이 길어 많이 사 마시진 못했다. 오후 6시가 돼도 해가 쨍쨍했다. 짙은 에메랄드빛의 호수는 차가울 것 같았는데, 아직도 한낮의 온기가 남아 따뜻했다. 해가 나무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그래서 사방이 그늘에 잠길 때까지 우리는 이 작은 뮈겔제에 오래오래 누워 있었다.●유난히 물 맑은 크루메랑케 작년 여름에는 나름 고르고 골라 현지인들이 많이 간다는 크루메랑케(Krumme Lanke)로 갔다. 지난여름에 유난히 많이 들은 호수 이름이었다. 물이 제일 깨끗하다, 젊은 현지 애들이 많이 간다는 평이었다. 베를린 동쪽에서는 뮈겔제, 베를린 서남쪽에서는 반제 호수와 크루메랑케가 유명하다. 그래서 30도가 넘어간 어느 금요일 낮, 크루메랑케 피크닉 팀을 급 결성했다. 멤버는 셋. 중간 역에서 만나 장도 봤다. 화이트 와인을 세 병 사고(각 일 병씩 마실 것이므로) 과일, 샐러드, 살라미, 치즈 등을 주렁주렁 사 들고 갔다. 가는 길에 제대로 된 FKK(누드비치)도 봤다. 잘 정돈된 호숫가 비치베드에 사람들이 몽땅 옷을 벗고 누워 있었다. 그들을 가로질러 갈 뻔한 걸 일부러 돌아돌아 먼 길로 갔다. 호숫가엔 한여름 해수욕장처럼 사람이 많았다. 그나마 오후 1시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지 3시가 넘어가니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돗자리 두 개를 붙이고 얼음까지 챙겨 칠링된 화이트 와인과 음식을 오후 내내 먹었다. 하지만 크루메랑케에서 먹은 최고의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크나가 준비해 온 비빔밥이었다. 아침 내내 나물을 볶았다는 그녀는 북한산 비박하는 것 같은 큰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그 안에는 각종 나물과 밥, 달걀프라이는 물론 한꺼번에 넣고 비빌 수 있는 큰 ‘스뎅’ 그릇도 두 개나 들어 있었다. 다들 물놀이하러 왔는데 우린 먹으러 온 사람들처럼 둘러앉아 밥을 비볐다. 경치 좋은 크루메랑케 호숫가에서 참기름 두르고 고추장 두르고 쓱쓱 비벼 먹은 크루메랑케의 비빔밥은 정말이지 내 인생 최고의 비빔밥이었다. 부른 배로 내내 누워 있다가 해가 쨍쨍한 모래사장으로 가서 선탠도 하다가, 타 죽을 것 같으면 호수로 뛰어들었다. 물도 엄청 시원했다. 짙은 물빛은 그 속을 알 수 없게 깊었다. 베를린 호숫가에서 유일한 단점이라면 근처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입장료를 받는 슈트란트바드(Strandbad)가 아닌 이상 화장실이 거의 없다. 그래서 호수 주변 숲속은 온통 휴지 천지다. 오줌 누고 싶은 곳이 다 비슷한 건지, 숲속에 유난히 휴지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처음엔 누가 볼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급하게 볼일을 보지만 이것도 하다 보면 요령이라고 이제는 숲에서도 싸고, 물에 들어가서도 싼다. 사이 좋게 숲으로 들어가 갈라지며 후배가 말했다. “선배, 베를린에서 살다 보면 방광이 튼튼해져요. 아무 데나 화장실이 있는 게 아니고 공중 화장실이 있어도 50센트(750원)씩 돈을 내야 하니까 확실히 화장실을 덜 가게 돼. 나도 모르게 튼튼한 방광을 갖게 된다니까요.”●와인 마시며 요트 탈 줄 알았는데… 작년 여름 베를린에 왔을 땐 뭔가 삶의 또 한 챕터를 끝낸 기분이었다. 다니던 F&B회사의 홍보 일을 그만뒀고, 글은 거의 쓰지 않는 날들이었다. 나는 조금씩 시들어서 벽에 고정된 ‘드라이 플라워’ 같은 마음이 있었다. 베를린으로 여행을 오면서 생각했었다. 서울로 돌아갈 땐 내가 사랑하는 여름의 태양처럼 다시 뜨거워진 마음으로 가고 싶다고.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두 달. 특별한 누군가를 원했지만 기대하지 않았고(늘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를 진짜로 만나게 될지도 몰랐던 여름을 보내게 됐다. 큰 기대 없이 시작했던 일이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 됐고, 나는 막연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베를린에서 곧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됐다. 올해의 여름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자주, 테겔 호수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테겔 호수는 뮈겔제에 이어 베를린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다. 한 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U6 알트 테겔 역에서 내리면 된다. 여기만 와도 분위기는 완전 다르게 느껴진다. 한적한 독일의 교외 동네로 놀러 온 느낌이랄까. 나이 든 노인들이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해를 쬐고 있다. 6페니라는 이름의 젝사브루케 다리를 건너고 작은 오솔길을 15분 정도 걸어가면 남자친구의 요트가 있는 선착장이 나온다. 요트는 자그마하다. 네 명이 타면 적당한 크기다. 세일링을 좋아하는 그를 따라 작년에도 올해도 여러 번 이곳에 왔다. 처음에 세일링은 폼 나는 건 줄 알았다. 배에서 샴페인도 마시고 점심도 먹고 노닥노닥하다 오는 건 줄 알았다. 해외 출장 때, 큰 요트에서 몇 번 그렇게 한 적도 있어서 다 비슷한 줄 알았다. 하지만 모터를 끄고 바람으로만 가는 세일링은 전혀 다르다. 항상 바람의 속도와 방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돛의 위치도 바로바로 바꿔야 하는데, 이를 놓치면 배가 갑자기 한쪽으로 크게 기울 수도 있고 뒤집어질 수도 있다. ●바람의 변덕을 다스리는 세일링 “테겔 호수는 바람이 꽤 변덕스러운 편이야. 그래서 뮈리츠 호수보다 세일링하기가 더 까다로워.” 나는 바람이 소리도 없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남자친구의 지시에 따라 갑자기 키도 잡고, 운전도 하고, 줄도 당기고 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갑자기 좌우로 돌아가는 돛의 아랫대에 머리를 맞는 것. 갑자기 획 돌아가는 대에 머리를 맞으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물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게 제일 위험하다. 싸 가지고 간 샌드위치는 입에도 못 댔다. 물만 벌컥벌컥 마실 뿐. 상황이 이런데 샴페인은 무슨! 한번은 배가 거의 물에 닿을 정도로 한쪽으로 기울어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이러다 물에 빠지는 거 아냐? 나 빠지면 구하러 올 거지?” 양손으로 배 난간을 잡고 다리를 십일 자로 쫙 뻗어서 배가 기우는 쪽으로 안 가게 중심을 잡으며 내가 물었다. “음, 아니. 난 배에서 내릴 수가 없어. 나까지 배에서 내리면 배가 뒤집어져.” “뭐라고??? 그럼 난 어떻게 살아나와?” “네가 빠진 데로 내가 바로 배를 댈 거니까 넌 배를 잡고 올라오면 돼. 그때까진 물에 떠 있어야지. 수영할 수 있다며. 수영 못 하면 항상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야 하고.” 그때 깨달았다. 요트는 절대 둘만 타면 안 되겠다는 걸, 꼭 수영 잘하는 한 명을 더 데리고 타야겠다고 말이다. 나는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예전에 발이 안 닿는 3m 깊이의 방콕 수영장에서 한번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발이 안 닿는 데에선 수영을 오래 못 한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구명조끼를 꺼내 입었다. 열 살 때부터 세일링을 배운 남자친구는 꼼꼼하고 섬세한 스타일이라 요트를 잘 몰았다. 오늘따라 변덕스러운 바람이 분다고 했지만, 나도 이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테겔 호수가 하펠강과 만나는 지점까지 주욱 내려갔다가 다시 선착장이 있는 북쪽으로 유유히 올라왔다. 갈 때는 엄청 멀게 느껴졌지만, 바람을 잘 타고 달리면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람이 뒤에서 부드럽게 불어와 양 돛을 버터플라이 형태로 펼치고 나아갈 때는 세일링의 맛을 좀 알 것 같았다. 사방엔 세일링 요트가 점점이 떠 있고 호수 주변을 둘러싼 작은 집과 섬, 나무들이 정겹게 지나갔다. 호수 위는 30도 더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시원하고 조용하다. 원한다면 닻을 내려서 배를 고정시키고 수영을 하고 놀 수도 있다. 파란 하늘 밑에 더 새파란 호수가 있고, 배 위에서는 가만히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도시 안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자연의 풍광이 테겔 호수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여행작가 dongmi01@gmail.com
  • 해수욕 뺨치는 ‘호수욕’… 인근 누드비치는 언감생심

    해수욕 뺨치는 ‘호수욕’… 인근 누드비치는 언감생심

    베를린에 살기 시작한 지 7개월이 됐다. 아직 1년도 안 된 새내기 베를리너이지만 베를린의 여름만큼은 어느 정도 익숙하다. 12년 전 베를린에 처음 왔다가 매료돼 열심히 드나든 덕분이다. (지금은 절판된) 내 인생 첫 책의 제목도 ‘다시 베를린’이었다. 책 이름처럼 1~2년에 한 번씩, 어느 해엔 연달아 베를린에 왔다. 잡지 취재로도 오고, 출장으로도 오고, 휴가로도 왔다. 그리고 그 계절은 항상 여름이었다. 내게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자 언제나 돌아오고 싶은 때였다. 올 때마다 베를린의 여름을 탐험하는 강도도 높아졌다. 처음엔 힙한 동네 ‘미테’와 ‘크로이츠베르크’를 어슬렁리며 갤러리와 바, 맛집 등을 탐험했다. 부지런히 동네를 익히고 힙한 곳을 찾아다니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랐다. 도시에 익숙해지자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줄었다. 크로이츠베르크의 ‘크’자도 모르던 20년지기 친구가 베를린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후로는 더 느긋한 마음이 생겼다. 그녀는 내 집처럼 자기 집 한켠을 내주며, 여름이 다가오면 물었다. “언제 올 거야?” 그래서 나는 많은 여름을 베를린에서 있었다. 거창한 계획도 없이, 친구 집 거실을 별장 삼아. 더울 땐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들어가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슈프레 강가에 누워 맥주를 마셨다. 베를린에 사는 친구들과 공원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5유로짜리 와인을 하루 종일 마시기도 했다. 게으른 베를리너들의 흔한 여름 피서법이었다. 하지만 공원의 그늘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날이 있다. 기온이 30도 이상 올라가는 때다.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에어컨이 없어서 서울 집처럼 시원한 냉기가 없다. 에어컨 없는 카페, 에어컨 없는 지하철. 도시에는 에어컨 없는 것들투성이다. 그래서 여름이 짙어지면 베를리너들은 호수로 간다. ●내륙 도시 베를린… “바다 대신에 호수로” 베를린에는 시내를 관통하는 슈프레강과 서쪽의 하펠강, 그리고 80여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다.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슈프레 강가에서 일광욕을 하거나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호수로 가서 물놀이를 즐긴다. 바다가 없는 베를린에서는 해수욕이 아닌 ‘호수욕’을 즐기는 것이다. 그동안 물놀이라 해 봐야 티어가르텐 안에 있는 카페 암 노이엔 제에서 배를 타거나 슈프레 강변에서 맥주를 마시는 게 전부였는데, 여름마다 오다 보니 점점 새로운 물가를 탐험하게 됐다. 베를린의 여러 호수를 가 봤고, 이제는 시간 날 때마다 세일링도 한다. 가까운 호수 중엔 쿠담비치를 제일 먼저 가봤다. 서쪽의 부자 동네, 쿠담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작은 호수, 하렌제(Halensee) -제(see)는 독일어로 호수를 뜻한다- 앞에 갔다. 호숫가에는 긴 풀장과 선탠할 수 있는 나무 데크, 고운 모래사장과 흰색의 비치의자들이 단정하게 비치돼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운치가 있는데, 쿠담비치는 아마도 베를린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해변 중 하나일 것이다. 맥주보다는 샴페인을 마셔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넘친다. 호수 위에는 카푸치노 그랜드 카페가 자리해 있다. 이곳 역시 지중해풍의 하얀색 의자와 테이블, 흰 소파들이 휴양지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많지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풍경을 즐기기엔 아깝지 않다. 비싼 데 돈을 잘 안 쓰는 베를리너들에겐 조금 사치스러운 분위기이긴 해도, 리조트 같은 여유와 분위기를 바란다면 한번쯤 즐길 만하다.●베를린에서 가장 큰 뮈겔제 호수 쿠담비치 이후엔 베를린 인근의 호수로 반경을 넓혔다.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 정도 가야 하지만 거리가 좀 멀어서 그렇지, 가는 길이 어렵진 않다. 그중 가장 멋졌던 호수는 뮈겔제다. 베를린에서 가장 큰 호수로 동쪽 끝에 있다. 호수의 길이는 4.5㎞, 너비는 2.5㎞에 달한다. 수심이 깊은 곳은 8m에 이른다. 지하철 타고 트램 타고 걸어 걸어 찾아간 뮈겔제에서 우리가 간 곳은 ‘작은 뮈겔제’(Kleiner Mggelsee)였다. 근처에 누드비치(독일 말로는 에프카카(FKK)라고 한다)도 있다는데, 그곳에서 놀 배짱까진 없었다. ‘작은 뮈겔제’는 숲처럼 나무가 가득한 언덕 위에서 호수까지 고운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다. 사방은 나무로 막혀 있고 자연적으로 생긴 해변처럼 은밀하고 아름다웠다. 아는 사람이 아니고선 쉽게 못 찾아올 것 같은데, 호수 초보자에게나 그렇지 그곳엔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친구들, 연인,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 단위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돗자리를 깔고 오후 반나절을 작은 뮈겔제에서 보냈다. 호숫가에 맥주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도 있어 부지런히 맥주도 사다 마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줄이 길어 많이 사 마시진 못했다. 오후 6시가 돼도 해가 쨍쨍했다. 짙은 에메랄드빛의 호수는 차가울 것 같았는데, 아직도 한낮의 온기가 남아 따뜻했다. 해가 나무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그래서 사방이 그늘에 잠길 때까지 우리는 이 작은 뮈겔제에 오래오래 누워 있었다.●유난히 물 맑은 크루메랑케 작년 여름에는 나름 고르고 골라 현지인들이 많이 간다는 크루메랑케(Krumme Lanke)로 갔다. 지난여름에 유난히 많이 들은 호수 이름이었다. 물이 제일 깨끗하다, 젊은 현지 애들이 많이 간다는 평이었다. 베를린 동쪽에서는 뮈겔제, 베를린 서남쪽에서는 반제 호수와 크루메랑케가 유명하다. 그래서 30도가 넘어간 어느 금요일 낮, 크루메랑케 피크닉 팀을 급 결성했다. 멤버는 셋. 중간 역에서 만나 장도 봤다. 화이트 와인을 세 병 사고(각 일 병씩 마실 것이므로) 과일, 샐러드, 살라미, 치즈 등을 주렁주렁 사 들고 갔다. 가는 길에 제대로 된 FKK(누드비치)도 봤다. 잘 정돈된 호숫가 비치베드에 사람들이 몽땅 옷을 벗고 누워 있었다. 그들을 가로질러 갈 뻔한 걸 일부러 돌아돌아 먼 길로 갔다. 호숫가엔 한여름 해수욕장처럼 사람이 많았다. 그나마 오후 1시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지 3시가 넘어가니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돗자리 두 개를 붙이고 얼음까지 챙겨 칠링된 화이트 와인과 음식을 오후 내내 먹었다. 하지만 크루메랑케에서 먹은 최고의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크나가 준비해 온 비빔밥이었다. 아침 내내 나물을 볶았다는 그녀는 북한산 비박하는 것 같은 큰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그 안에는 각종 나물과 밥, 달걀프라이는 물론 한꺼번에 넣고 비빌 수 있는 큰 ‘스뎅’ 그릇도 두 개나 들어 있었다. 다들 물놀이하러 왔는데 우린 먹으러 온 사람들처럼 둘러앉아 밥을 비볐다. 경치 좋은 크루메랑케 호숫가에서 참기름 두르고 고추장 두르고 쓱쓱 비벼 먹은 크루메랑케의 비빔밥은 정말이지 내 인생 최고의 비빔밥이었다. 부른 배로 내내 누워 있다가 해가 쨍쨍한 모래사장으로 가서 선탠도 하다가, 타 죽을 것 같으면 호수로 뛰어들었다. 물도 엄청 시원했다. 짙은 물빛은 그 속을 알 수 없게 깊었다. 베를린 호숫가에서 유일한 단점이라면 근처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입장료를 받는 슈트란트바드(Strandbad)가 아닌 이상 화장실이 거의 없다. 그래서 호수 주변 숲속은 온통 휴지 천지다. 오줌 누고 싶은 곳이 다 비슷한 건지, 숲속에 유난히 휴지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처음엔 누가 볼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급하게 볼일을 보지만 이것도 하다 보면 요령이라고 이제는 숲에서도 싸고, 물에 들어가서도 싼다. 사이 좋게 숲으로 들어가 갈라지며 후배가 말했다. “선배, 베를린에서 살다 보면 방광이 튼튼해져요. 아무 데나 화장실이 있는 게 아니고 공중 화장실이 있어도 50센트(750원)씩 돈을 내야 하니까 확실히 화장실을 덜 가게 돼. 나도 모르게 튼튼한 방광을 갖게 된다니까요.”●와인 마시며 요트 탈 줄 알았는데… 작년 여름 베를린에 왔을 땐 뭔가 삶의 또 한 챕터를 끝낸 기분이었다. 다니던 F&B회사의 홍보 일을 그만뒀고, 글은 거의 쓰지 않는 날들이었다. 나는 조금씩 시들어서 벽에 고정된 ‘드라이 플라워’ 같은 마음이 있었다. 베를린으로 여행을 오면서 생각했었다. 서울로 돌아갈 땐 내가 사랑하는 여름의 태양처럼 다시 뜨거워진 마음으로 가고 싶다고.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두 달. 특별한 누군가를 원했지만 기대하지 않았고(늘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를 진짜로 만나게 될지도 몰랐던 여름을 보내게 됐다. 큰 기대 없이 시작했던 일이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 됐고, 나는 막연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베를린에서 곧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됐다. 올해의 여름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자주, 테겔 호수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테겔 호수는 뮈겔제에 이어 베를린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다. 한 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U6 알트 테겔 역에서 내리면 된다. 여기만 와도 분위기는 완전 다르게 느껴진다. 한적한 독일의 교외 동네로 놀러 온 느낌이랄까. 나이 든 노인들이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해를 쬐고 있다. 6페니라는 이름의 젝사브루케 다리를 건너고 작은 오솔길을 15분 정도 걸어가면 남자친구의 요트가 있는 선착장이 나온다. 요트는 자그마하다. 네 명이 타면 적당한 크기다. 세일링을 좋아하는 그를 따라 작년에도 올해도 여러 번 이곳에 왔다. 처음에 세일링은 폼 나는 건 줄 알았다. 배에서 샴페인도 마시고 점심도 먹고 노닥노닥하다 오는 건 줄 알았다. 해외 출장 때, 큰 요트에서 몇 번 그렇게 한 적도 있어서 다 비슷한 줄 알았다. 하지만 모터를 끄고 바람으로만 가는 세일링은 전혀 다르다. 항상 바람의 속도와 방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돛의 위치도 바로바로 바꿔야 하는데, 이를 놓치면 배가 갑자기 한쪽으로 크게 기울 수도 있고 뒤집어질 수도 있다. ●바람의 변덕을 다스리는 세일링 “테겔 호수는 바람이 꽤 변덕스러운 편이야. 그래서 뮈리츠 호수보다 세일링하기가 더 까다로워.” 나는 바람이 소리도 없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남자친구의 지시에 따라 갑자기 키도 잡고, 운전도 하고, 줄도 당기고 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갑자기 좌우로 돌아가는 돛의 아랫대에 머리를 맞는 것. 갑자기 획 돌아가는 대에 머리를 맞으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물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게 제일 위험하다. 싸 가지고 간 샌드위치는 입에도 못 댔다. 물만 벌컥벌컥 마실 뿐. 상황이 이런데 샴페인은 무슨! 한번은 배가 거의 물에 닿을 정도로 한쪽으로 기울어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이러다 물에 빠지는 거 아냐? 나 빠지면 구하러 올 거지?” 양손으로 배 난간을 잡고 다리를 십일 자로 쫙 뻗어서 배가 기우는 쪽으로 안 가게 중심을 잡으며 내가 물었다. “음, 아니. 난 배에서 내릴 수가 없어. 나까지 배에서 내리면 배가 뒤집어져.” “뭐라고??? 그럼 난 어떻게 살아나와?” “네가 빠진 데로 내가 바로 배를 댈 거니까 넌 배를 잡고 올라오면 돼. 그때까진 물에 떠 있어야지. 수영할 수 있다며. 수영 못 하면 항상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야 하고.” 그때 깨달았다. 요트는 절대 둘만 타면 안 되겠다는 걸, 꼭 수영 잘하는 한 명을 더 데리고 타야겠다고 말이다. 나는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예전에 발이 안 닿는 3m 깊이의 방콕 수영장에서 한번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발이 안 닿는 데에선 수영을 오래 못 한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구명조끼를 꺼내 입었다. 열 살 때부터 세일링을 배운 남자친구는 꼼꼼하고 섬세한 스타일이라 요트를 잘 몰았다. 오늘따라 변덕스러운 바람이 분다고 했지만, 나도 이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테겔 호수가 하펠강과 만나는 지점까지 주욱 내려갔다가 다시 선착장이 있는 북쪽으로 유유히 올라왔다. 갈 때는 엄청 멀게 느껴졌지만, 바람을 잘 타고 달리면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람이 뒤에서 부드럽게 불어와 양 돛을 버터플라이 형태로 펼치고 나아갈 때는 세일링의 맛을 좀 알 것 같았다. 사방엔 세일링 요트가 점점이 떠 있고 호수 주변을 둘러싼 작은 집과 섬, 나무들이 정겹게 지나갔다. 호수 위는 30도 더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시원하고 조용하다. 원한다면 닻을 내려서 배를 고정시키고 수영을 하고 놀 수도 있다. 파란 하늘 밑에 더 새파란 호수가 있고, 배 위에서는 가만히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도시 안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자연의 풍광이 테겔 호수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여행작가 dongmi01@gmail.com
  • [최만진의 도시탐구] 부동산 정책의 해결사 ‘플러그인 시티’

    [최만진의 도시탐구] 부동산 정책의 해결사 ‘플러그인 시티’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한 ‘6·17’ 대책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집값을 상승시켰다. 이처럼 다르게 반응하는 시장에 대해 국민은 혼란을 느끼며 정치권도 당황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안과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의 매물 수요가 급증해 집값이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다급해진 여당의 대표는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고 정부는 제3기 신도시 사전 청약 제도 등을 통해 불안 해소에 나섰지만 쉽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신도시가 언제 완성될지도 모르는 데다 불편한 교통을 무릅쓰고 매일 수시간씩 서울로 출퇴근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효성을 가지지 못한 데에는 소비자와 시장의 실질 수요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그래서 규제보다는 양질의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도심 내에 마땅한 땅이 없고, 건설 비용도 만만치 않아 합리적인 대안은 아닌 듯하다. 근래 들어 유사한 문제로 몸살을 앓는 나라가 독일이다. 베를린이나 뮌헨 등의 대도시들이 교육, 창업, 이미지 개선 등을 위한 매력적인 곳으로 변모하면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자체는 재정 압박 등의 문제로 공공임대주택을 늘리기는커녕 그나마 있던 사회주택마저 처분해 주택난이 갑자기 심각하게 됐다. 이 결과 최근 독일 주요 도시의 주택가격과 임대료가 급상승해 중산층마저 위협받게 됐다. 이로써 자기 집 없이도 걱정하지 않았던 ‘주거천국’ 독일의 이미지는 급격히 퇴색되고 말았다. 공공임대주택 공급, 젠트리피케이션, 임대료 상승 억제 등의 난제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부추겼고 독일 사회는 심각한 양분화의 길을 가고 있다. 저렴하고 편리한 주택 공급에 대한 획기적인 방안은 ‘피터 쿡’이라는 영국 건축가가 이미 1960년대에 제안했다. ‘플러그인 시티’라는 것인데 문자 그대로 전기 코드처럼 간편하게 꽂고 제거한다는 뜻이다. 이 도시의 핵심 구조는 수직, 수평, 대각선 방향으로 그물처럼 얽혀 있는 철제구조물과 그 상부에 있는 기중기 그리고 공중에 박처럼 매달려 있는 컨테이너 건물이다. 이 주택은 거대한 기중기로 필요시에 손쉽게 새로 달거나 교체 또는 철거할 수 있다. 여기에는 건설을 위한 부지와 긴 인허가와 시공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주로 원통 막대기 형태를 가진 철제구조물은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의 이동 수단과 상하수도, 가스와 전기 등의 도시시설이 있는 코어이다.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자유롭게 다른 지역이나 이웃과 왕래할 수 있다. 이 도시 구조물의 최고 장점은 필요시에는 밀집된 도시공간은 물론이고 바다와 산악지대 등 어디에나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근대화 이후에 수십년을 아파트와 전쟁을 치르고 살아 왔다.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플러그인 시티’ 같은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구상해 봐야 할 것 같다.
  • 불도저에 추억마저 밀릴쏘냐…현대사 굴곡 닮은 만리동 고개여

    불도저에 추억마저 밀릴쏘냐…현대사 굴곡 닮은 만리동 고개여

    불도저는 낡은 집과 좁은 골목만이 아니라 애틋한 정과 추억을 함께 밀어 버린다. 아파트에 집착하는 대가로 상실하는 감성의 가치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진화하는 아파트의 편리함에 매혹당한 탓이다. 성형수술로 얼굴을 다 뜯어고치듯 서울은 옛 모습을 잃고 있다. 서울역 서쪽의 만리재 언덕도 지난 10여년 동안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지도에서 서울역과 충정로역, 애오개역을 이어 줄을 그으면 거의 정삼각형이 되는 지역이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정면으로 맞선 사대주의 학자 최만리가 나고 자란 곳이다. 만리재라는 이름도 최만리에서 나온 것이다. 재개발 바람은 서민의 애환이 구석구석 녹아 진한 여운을 풍기던 동네 분위기를 바꿔 버렸다. 언제 적 만리재를 말하느냐는 듯 시가 10억원이 넘는 번듯한 아파트들이 군데군데 치솟아 있다. “만리동 고갯마루에 소의초등학교가 있었다. 교문 옆에 아이스케키 통을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두 개 시-버-언!’ 하고 소리를 질렀다. … 아이스케키 통을 둘러메고는 만리동 고개를 내려와 서울역광장을 돌아 남대문을 거쳐 명동까지 갔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만리동 고개로 되돌아오곤 했다.”빈민 활동 선구자인 김진홍 목사는 ‘황무지가 장미꽃같이’에서 이렇게 썼다.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도심과 가장 가까운 주거지인 이곳에 몸을 겨우 눕힐 수 있는 땅뙈기를 구해 타향살이를 시작했었다. 지게꾼과 구두닦이, 행상이라는 일자리가 있었던 서울역이 지척이었다. 걸어서 20분이면 닿는 남대문시장에서 난전을 펴고 장사를 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만리재는 조선시대 때부터 마포와 서소문밖을 이어 주던 소통로(疏通路)였다. 걸어 오르려면 숨이 차는 큰 고개 만리재를 넘어 내려가면 작은 고개 애오개(아현)가 나온다. 애오개에는 일제강점기에 경성감옥이 있어 자식 옥바라지를 하려고 가파른 길을 넘어 걸어가던 눈물의 모정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성감옥 자리에는 서울서부지방법원과 서부지방검찰청이 들어서 법토(法土)의 맥을 잇고 있다. 양쪽 사람들은 정월 보름이면 서로 위험한 돌팔매질 놀이를 했다는데 무슨 원한 관계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세시풍속일 뿐이다. 애오개 쪽이 이기면 경기도의 농사가 잘되고 만리재 쪽이 이기면 평안도나 경상도 등 외도(外道)의 농사가 잘된다는 속설이 있었다는데, 그렇다면 만리재 쪽은 왜 피 터지게 싸우며 이기려고 했을까. 개발이 어려운 언덕바지라는 점이 땀과 눈물의 ‘트라이앵글’을 이만큼이나마 지켜 냈다. 삼각형 지역 속의 손기정기념관, 환일고등학교 십자관, 성니콜라스성당 등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몇몇은 파괴의 위기를 딛고 살아남았다. 굴곡진 현대사를 품은 건축물들은 방문객들을 잠시 감성에 젖게 한다.충정로역 근처에는 오래된 작은 아파트들이 유난히 많다. 사람 나이로 미수(米壽·88세)가 된 국내 최고령 아파트 충정아파트에 비하면 1969년생 미동아파트는 이제 51세로 젊은 축에 속한다. 충정로역 4번 출구에서 안쪽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성요셉아파트가 나타난다. 1971년 완공이니 미동아파트보다 두 해 아래다. 비탈길에 절묘하게 자리잡았는데 맨 아래쪽은 6층이고 맨 위쪽은 2층이다. 방앗간, 김밥집, 미용실, 세탁소 등의 작은 1층 상가들은 변두리 동네 어귀의 가게들처럼 정겹다. 인접한 약현성당의 성도들을 위해 지었다는 이 아파트에는 지금도 수도자들이 거주한다고 한다. 중림동 일대가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으로 선정됨에 따라 이 아파트는 보존하기로 결정돼 안팎의 환경을 조금씩 개선하는 중이다. 동네를 칙칙하게 만든 주범이었던 아파트 바로 앞 무허가 창고를 ‘앵커시설’로 재개발, 지난 5월 16일 문을 열었다. 2층짜리 건물에는 ‘심야살롱’, ‘도시서점’이 입주해 도시재생사업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한다. 하지만 보존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은 탐방객들에게마저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성요셉아파트와 붙어 있는 남쪽 언덕에 약현성당이 있다. 약현(藥峴)은 조선시대에 약을 재배하는 밭이 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영향이었을까. 이 지역에는 약을 만드는 기업들이 있었거나 지금도 있다. 잊혀져 가는 종기 치료제 ‘이명래고약’ 본점도 원래 중림동에 있었다. 이명래고약의 개발자는 이명래가 아니라 충남 아산에서 활동한 에밀 피에르 드비즈라는 프랑스 신부라고 하니 뜻밖이다. 서울에 살던 천주교도인 이명래가 박해를 피해 아산으로 내려갔다가 드비즈 신부를 만나 제조법을 전수받고 민간요법을 더해 발전시킨 게 이명래고약이다. 이명래고약은 현대 의약에 밀려 2011년에 생산이 중단됐다. 충정로역 바로 옆에는 제약회사 종근당이 있다. 철공소 견습공, 쌀 배달원으로 일하다 21살 때부터 약품 외판원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약을 팔았던 고 이종근은 1941년 이곳에 궁본약방을 세웠고 1956년 종근당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자 고딕 양식 건물인 약현성당이 1998년 취객의 방화로 전소됐을 때 숭례문 화재만큼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당시 모습은 잃었지만 15억원을 들여 원형에 더 가깝게 복원됐다. 잘 꾸며진 정원을 갖춘 약현성당은 결혼식장으로도 사랑을 받고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애용되는 명소가 됐다. 서학(西學)을 믿었다는 혐의로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당시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 98위의 순교자를 모신 성당 내 서소문순교자기념관은 방문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만리재는 마라토너 손기정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곳이기도 하다. 소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5000m 경기에서 어른들을 제치고 우승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압록강 건너 중국 회사에 20리 길을 매일 뛰어서 다녔던 소년은 마라톤 특기생으로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딴 선수는 활짝 웃고 있었지만 금메달 손기정과 동메달 남승룡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일본 대표로 출전한 설움이 앞섰던 까닭이다. 시상식 사진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의 일장기를 나무 화분으로 가리고 있다. 시상식장에선 애국가가 아닌 일본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손기정은 인터뷰나 축하 인사 때마다 ‘손긔정’이라는 한글 사인을 해주고 간단한 한국 지도나 ‘KOREAN’을 그리거나 써줘 한국인임을 알렸다.목동으로 옮긴 양정고등학교 교정은 공원화됐다가 마라톤의 성지, 손기정체육공원으로 재단장해 지난달 문을 부분적으로 열었다. 공원 내 손기정기념관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입구에는 ‘남승룡 러닝센터’를 지어 업적을 함께 기리고 있다. 손기정이 갖고 온 나무 화분(월계수는 독일 기후에서는 자라지 않아서 월계수가 아니라 미국 대왕참나무 화분이다)은 교정에 심어 84년 세월 동안 거목으로 자랐다. 손기정기념관의 바로 위에는 1895년에 문을 연 봉래초등학교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 교동초등학교보다 1년 뒤지는 유서 깊은 학교다. 만리재 고개 정상의 짙푸른 녹음은 과거에 이곳이 제법 깊은 산속이었음을 알려 준다. 잘 조성한 산책로는 여름의 열기를 이겨 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힘들여 멀리 갈 것도 없이 주민들은 시원한 자연 바람을 만끽하고 있다. 산책로들이 휘감은 고개 정상이 식수를 공급하는 저장고라는 사실은 주민들도 다 모를 것 같다. 1956년에 조성해 출입금지 지역으로 관리하던 곳을 철조망을 걷어 내고 ‘만리배수지공원’이라는 휴식과 운동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으니 행정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배수지공원 언덕 아래에 환일고등학교가 있다. 기독교 감리교 계통의 학교로 1947년 균명중학교로 개교했다가 1957년 화재로 전소됐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 학교 십자관은 화재 후 철근콘크리트와 석조를 섞어 지은 건물로 63년이 흐른 지금에도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찍어 낸 벽돌을 쌓아 올린 게 아니라 제각기 모양이 다른 돌을 마치 정교한 축대를 쌓듯이 짜맞춰 건축했다. 이런 방식으로 지은 건축물은 흔하지 않다. 1974년에는 학교 이름을 환일중고등학교로 바꿨다. 우리에게는 야구해설가로 유명한 고 하일성씨가 체육교사로 재직한 학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소의초등학교에서 애오개역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한국정교회 서울 성니콜라스대성당이라는 숨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정교회는 동유럽에서 발전한 기독교의 한 교파다. 우리나라 신도는 3000여명쯤 되고 전국에 6개의 성당이 있다. 교세가 약한 것은 민족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 1900년 최초 전래된 정교회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신부와 신도들이 떠났고, 몇 안 되는 국내 신자들은 고아처럼 남겨졌다. 1906년 러시아 선교사가 다시 도착했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정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게 됐다. 이후 고립무원의 상태로 일제강점기를 넘긴 정교회는 유엔군 참전국의 일원인 그리스군 종군 사제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교회를 재건했다. 아현동에 부지를 마련해 대성당을 완공한 것은 1968년이었다. 반구형 돔을 얹은 비잔틴풍 건축물은 조창한 전 경희대 교수가 설계한 것으로 국내에 두 개밖에 없다. 독특한 돔 지붕을 보고 산동네 아이들은 ‘대머리교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현4구역 재개발구역 안에 있는 성당은 옮겨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 만리재의 추억은 개발의 압력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덕분에 사람들은 편안하고 깨끗한 주거 환경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과 맞바꾼 것은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삭막함이므로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군데군데 박힌 지난 시간의 흔적은 아련하기만 하다. 박제해 둘 수도 없었던 그때는 멀리서 무심히 흐르는 한강만이 기억할 것이다. 글 손성진 서울신문 논설고문 sonsj@seoul.co.kr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제7회는 11일 오전 10시 남산산책 편입니다.
  • 21번의 대책, 정작 집값 하락기는 단 ‘두번’ 뿐이었다

    21번의 대책, 정작 집값 하락기는 단 ‘두번’ 뿐이었다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가 지난 3년간 부동산 대책을 21차례 발표했지만, 정작 서울 아파트 값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하락기’는 단 두 번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은 6개월(2018년 12~5월), 두 번째는 1개월(2020년 4월)로 규제 발표 후 ‘약발 지속효과’도 더 짧아졌다. 경기동향, 계절적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규제 일변도’의 정책만으로는 집값을 잡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들은 해결책은 결국 ‘서울 공급’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집값을 진정시킬 대안으로는 다주택자들이 물건을 던질 수 있도록 보유세는 강화하되 양도소득세 등 거래세를 완화하는 방안 등이 꼽힌다. 서울신문이 6일 부동산114를 통해 현 정권 출범 후 ‘서울 아파트 월간 매매변동률 추이’를 따져봤더니 2017년 1월엔 전달보다 0.02% 오른 것으로 시작해 5월엔 전달 대비 0.71%, 6월엔 1.58% 올랐다. 2017년 6월 19일 정부가 경기 광명 등을 조정대상지역으로 묶은 6·19대책과 서울·과천 등을 투기과열지구로 지정한 8·2대책을 잇따라 발표했지만 잠시 상승폭이 둔화되는데 그쳤을 뿐 2017년 12월엔 전달보다 1.36%로 오르며 다시 회복했다. 이어 2018년 고가주택 주택담보대출 금지 등 고강도 9·13대책이 나왔을 때 2018년 12월 서울아파트 매매변동률은 처음으로 ‘-0.05%’를 기록했다. 하지만 6개월 만인 2019년 6월 0.14%를 기록하며 상승세로 돌아섰다. 2019년 세금, 대출을 망라한 ‘역대급 종합규제’라는 12·16대책을 만난 시장은 올 4월에 -0.17%를 기록한 것을 빼곤 5월부터 상승세로 접어들었다.  시장에선 이처럼 ‘누르기식 수요 규제’가 풍선효과를 낳고 있는데다, 특히 정책 내성이 생겨 22번째 추가 규제가 나와도 집값을 잡기엔 역부족일 것으로 관측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대안으로 “공급 외엔 답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내년 ‘3기 신도시’ 하반기 사전청약을 앞두고 있지만 전체 20만 가구의 물량 중 1만 가구 정도가 사전청약 대상이라 서울 도심의 공급이 줄어드는 와중에 수요자들의 ‘타는 목’을 충분히 적시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거기다 당첨도 쉽지 않고 거리도 멀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많다. ‘서울 공급론’에 대해선 전문가 의견이 엇갈린다. 유선종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가장 즉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은 지난달 기준 150만채를 들고 있는 임대사업자들의 현행법상 8년의 의무 임대기간을 완화해 시장에 팔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영진 직방 데이터랩장은 “정비사업의 과도한 규제를 줄이고 용적률을 상향하되 상향한 용적률의 절반을 임대아파트로 기부채납하거나 의무 공급하도록 하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다.  윤지해 부동산114 수석연구원은 “서울 도심은 재개발·재건축 정비사업 외에는 대안이 없다”면서 “두 번째 방안은 서울 도심 수요를 분산시킬 만큼 가까운 서울 인근 신도시 개발”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과천, 광명은 경기권이라기보단 서울로 인식되기에 유력한 4기 신도시 후보이지만 얼마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신도시 카드’에 회의적인 목소리도 적잖다. 3기 신도시만 해도 실제 입주엔 4, 5년이 걸리는 데다 2, 3기 신도시 주민들의 반발을 부를 수 있고 직장과 가까운 도심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전문가들이 집값 급등 해결책으로 꼽는 대안 중 이견이 없는 부분은 ‘거래세 완화’다. 다주택자 보유세(재산세, 종합부동산세)를 강화해 들고 있는 물건을 내놓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를 사고 파는 데 매기는 거래세(양도소득세, 취득세)만은 가볍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갖고 있지 못하게 해 놓고 팔기도 어렵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온 공통 대안은 ‘실수요자의 과감한 대출규제 완화’다. 예컨대 무주택자, 신혼부부, 생애최초, 다자녀의 경우엔 상황에 따라 규제지역 내에 있어도 대출 규제를 예외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9억원 이하 주택에 대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 비규제 지역에선 70%이지만 투기과열지구에선 40%만 받을 수 있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소득 기준에만 맞춰져 있는 청약시스템도 자산 기준으로 맞춰야 ‘금수저’ 자녀 논란을 줄일 수 있다”면서 “다만 주택청약당첨 이후 자산 증여에 대한 대비책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포토] ‘모친상’ 일시 석방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

    [포토] ‘모친상’ 일시 석방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형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돼 모친 빈소가 마련된 서울로 향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안 전 지사는 모친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일시 석방돼 5일 오후 11시 47분께 교도소 정문을 나섰다. 짧은 머리카락에 다소 야윈 안 전 지사는 흰색 마스크를 착용한 반소매 차림이었다. 안 전 지사의 형집행정지 기간은 9일 오후 5시까지다. 연합뉴스
  • [금요칼럼] 휘항을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휘항을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연전에 본 영화 ‘사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비운의 사도세자를 아버지 영조가 불렀다. 세자는 부왕의 질책이 두려워, 그때가 한여름이었건마는 세손(정조)의 휘항(揮項)을 찾아서 머리에 얹었다. 사랑하는 세손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부왕이 차마 심한 꾸지람은 하지 않으리란 바람이었다. 하지만 세자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결국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휘항은 머리에 쓰는 방한 용구이다. 겉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안에는 털가죽을 붙였다. 18세기의 문인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제3권)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고려 때부터 한겨울에는 남녀가 모두 이엄(耳掩ㆍ귀마개)을 썼는데, 나중에는 휘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휘항은 17세기 후반 출현했다. 처음에는 서울의 부유한 역관 두어 명이 착용했다. 장안의 갑부요 장희빈의 당숙인 장현도 그중 하나였다. 문신 유척기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족제비 털가죽으로 휘항을 만들었다. 워낙 귀중품이라 권문세가의 자제와 장수들의 사위나 소유할 수 있었다. 그다음 세기가 되면 지방관도 휘항을 애용했다. 숙종 32년(1706)경 전라도 임피 현령 이만직이 멋들어진 휘항을 쓰고 서울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부러워했단다. 영조 때가 되면 훨씬 더 사치스러운 휘항이 등장했다. 담비 가죽으로 만든 거였는데 최상품은 가격이 100냥을 넘었다. 그 돈이면 논 2000평을 살 수 있었다. 또 휘항을 개량한 만선이란 모자도 등장했다. 가장자리에 초피를 두른 것이 그것인데, 투구 속에 쓰기가 좋았다. 애초에는 대궐을 지키는 군인이 주로 착용했다. 뒤에는 민간에도 널리 퍼져 18세기 말이 되면 신분이 낮은 종들도 가질 만큼 일상적인 상품이 됐다. 담비와 족제비 털가죽의 수요가 폭발하자 상인들은 중국에서 대량으로 밀수입했다. 국부 유출을 우려한 정조는 수입금지령을 내렸다. 왕은 휘항의 크기도 줄여서 지출을 줄이려 했다. 또 담비 꼬리는 아예 사용을 못 하게 했다. 대신 사용하는 족제비 털가죽도 국내산으로 한정했다. 그때 북부 지방에서는 다수의 족제비가 포획됐다. 쉽게 말해 정조는 고가의 수입품 털가죽을 국내산으로 대체하고, 백방으로 사치 풍조를 억압한 셈이었다. 성대중과 같은 지식인들은 정조의 무역 규제를 환영하며 “국가와 백성을 위해 무척 다행스럽다”고 호평했다. 세계 역사를 보면 17~18세기는 ‘모피의 시대’였다. 기후변화로 겨울철 수은주가 떨어진 탓도 있었겠으나 무역과 상공업으로 성장한 신흥부자들의 과시 욕구도 한몫했다. 담비와 비버 털가죽으로 만든 최상품 모자가 유럽 중산층의 인기를 끌었다. 검은 여우 모피로 만든 외투와 목도리는 상류층 여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모피 열풍으로 북미대륙의 개발이 촉진돼 상업 도시 뉴욕이 부상했다. 그때 러시아는 시베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모피를 좇다 보니 그들은 알래스카까지 차지하는 결과를 얻었다. 그때 조선에도 휘항과 만선이라는 신상품이 나타나 시장경제의 발달을 자극했다. 수요가 폭발하자 담비와 족제비 털가죽이 외국에서 밀수입되는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깜짝 놀란 정조가 수입 중단을 엄명했으나 과연 왕의 뜻대로 됐을지는 의문이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명군 정조나 일급지식인 성대중도 경제활동의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역거래를 막고 사치풍조를 뿌리뽑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들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끊임없이 늘어났다. 소수 특권층과 부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 규모가 팽창했다. 정녕 이 나라가 잘되려면 역사의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 여성 역할은 엄마뿐?…이낙연 “엄마되는 경험 못 해서 철 안 들어”

    여성 역할은 엄마뿐?…이낙연 “엄마되는 경험 못 해서 철 안 들어”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의원이 1일 “인생에서 가장 크고 감동적인 변화는, 이것도 이낙연의 학설입니다. 소녀가 엄마로 변하는 그 순간이며 남자들은 그런 걸 경험 못하기 때문에 나이 먹어도 철이 안 든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 지구촌보건복지포럼 주최 ‘코로나19 사태 이후 대한민국 재도약의 길’ 강연에서 새로운 한류가 ‘산후조리’라는 것을 설명하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가장 감동적인 변화의 순간에 뭔가 대접받으며 배려받으며 변화를 겪고 싶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욕구라 생각한다”며 “심지어 중국의 부자 산모는 아예 서울로 와서 아이를 낳고 2~3주 산후조리 받고 간다”고 설명했다. 이 의원의 이날 발언은 우리나라가 산후조리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는 차원에서 나왔지만 부적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혼, 난임 여성, 딩크족 등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미래통합당에서 ‘저출산’이 아니라 ‘저출생’이라고 앞서 표현을 바꾸는 등 시대 변화에 앞서 나가는 상황에서 이 의원의 발언은 성인지 감수성에 뒤떨어진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 의원은 또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 직원 정규직 전환 사태에 대해 “환노위나 국토위를 열어서 또는 합동회의를 열어서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어떤 해법이 있을 수 있나 접근해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지 않고 개개인 의원이 해법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이미지 마케팅 발언을 쏟아내는 것이 해결에 도움이 될까”라며 “그게 국회다운 일일까 하는 아쉬움 있다”며 최근 페이스북 등으로 인국공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의원들을 비판했다. 한편 이 의원은 오는 7일 차기 당대표 선출을 위한 8월 전당대회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로 했다. 이 의원은 강연 후 기자들과 만나 “국가적 위기에 책임 있게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왔다. 또한 초유의 거대 여당을 책임 있게 운영하는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그 두 가지가 기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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