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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용퇴” 송영길 서울시장 출사표, 국민 우롱하나

    [사설] “용퇴” 송영길 서울시장 출사표, 국민 우롱하나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일 소셜미디어에 서울로 주소지를 옮겼다고 밝히고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당원으로서 직책과 직분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겠다”고 했다. 오는 6월 지방선거 서울시장 출마를 사실상 선언한 것이다. 당대표로 있던 지난 1월 대선을 목전에 두고 “586세대로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를 기억하는 유권자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총선이 아니라 지방선거이니 출마한다 해도 자신의 말을 뒤집는 건 아니라는 얘기인가. 자신의 1월 발언은 그저 선거용 빈말이었노라고 고백이라도 한다는 건가. 6월 지방선거는 대통령 취임 후 20일 뒤에 치러지는 선거다. 통계적으로 볼 때 대선 직후에 치른 총선과 지방선거는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압도적으로 이겨 왔다. 그러니 민주당이 0.73% 포인트로 아깝게 진 만큼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과 비등하게 경쟁하겠다고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윤석열 당선인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청와대 용산 이전 논란과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장관 인선 등으로 민주당에 유리한 정치적 지형이 펼쳐진다는 추정은 선거에서 요행을 바라는 탓이다. 송 전 대표는 당의 변화를 강조하며 586 용퇴를 주창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당대표로서 누구보다 먼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런 그가, 1999년 정치에 발을 디딘 뒤 20년 이상 인천을 지역 기반으로 삼은 그가 느닷없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겠다니 대체 무슨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송 전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는 그에게 독배가 되는 것은 물론 민주당의 재기에도 걸림돌이 될 뿐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식의 ‘정신승리’로 변화를 외면한다면 민심은 더 멀어질 것이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면 뜻을 접기 바란다.
  • [사설] “용퇴” 송영길 서울시장 출사표, 국민 우롱하나

    [사설] “용퇴” 송영길 서울시장 출사표, 국민 우롱하나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일 소셜미디어에 서울로 주소지를 옮겼다고 밝히고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당원으로서 직책과 직분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겠다”고 했다. 오는 6월 지방선거 서울시장 출마를 사실상 선언한 것이다. 당대표로 있던 지난 1월 대선을 목전에 두고 “586세대로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를 기억하는 유권자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총선이 아니라 지방선거이니 출마한다 해도 자신의 말을 뒤집는 건 아니라는 얘기인가. 자신의 1월 발언은 그저 선거용 빈말이었노라고 고백이라도 한다는 건가. 6월 지방선거는 대통령 취임 후 20일 뒤에 치러지는 선거다. 통계적으로 볼 때 대선 직후에 치른 총선과 지방선거는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압도적으로 이겨 왔다. 그러니 민주당이 0.73% 포인트로 아깝게 진 만큼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과 비등하게 경쟁하겠다고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윤석열 당선인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청와대 용산 이전 논란과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장관 인선 등으로 민주당에 유리한 정치적 지형이 펼쳐진다는 추정은 선거에서 요행을 바라는 탓이다. 송 전 대표는 당의 변화를 강조하며 586 용퇴를 주창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당대표로서 누구보다 먼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런 그가, 1999년 정치에 발을 디딘 뒤 20년 이상 인천을 지역 기반으로 삼은 그가 느닷없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겠다니 대체 무슨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송 전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는 그에게 독배가 되는 것은 물론 민주당의 재기에도 걸림돌이 될 뿐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식의 ‘정신승리’로 변화를 외면한다면 민심은 더 멀어질 것이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면 뜻을 접기 바란다.
  • “당선 후 다시 오겠다” 약속 지킨 尹… 유족에 두 차례 ‘90도 인사’

    “당선 후 다시 오겠다” 약속 지킨 尹… 유족에 두 차례 ‘90도 인사’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3일 오전 검은색 넥타이를 맨 채 김부겸 국무총리 등과 함께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 도착했다. 다소 굳은 표정으로 들어선 윤 당선인은 행사장 맨 앞줄, 김 총리 옆자리에 앉았다. 윤 당선인은 가슴에 동백꽃 배지를 달았다. 동백꽃은 4·3의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 갔다는 의미를 가져 4·3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행사장 연단 위의 연설대도 동백꽃으로 장식돼 있었다. 4·3평화공원 인근에는 활짝 핀 목련과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벚꽃이 추념식 참가자와 유족을 맞았다. 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가 뜬 윤 당선인은 김 총리 다음 순서로 헌화와 분향을 한 뒤 두 차례의 묵례로 분향을 끝냈다. 장내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하는 동안 윤 당선인도 따라 불러 입 주변 마스크가 들썩이기도 했다. 윤 당선인은 김 총리 이후 두 번째 순서로 추념사를 낭독했다. 추념사 낭독 후 장내 유족을 향해 두 차례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추념식은 ‘4·3의 숨비소리, 역사의 숨결로’를 주제로 열렸다. 4·3 희생자의 마지막 숨소리를 우리 역사에 깊이 간직하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자는 의미를 담았다. 4·3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을 시작으로, 헌화 및 분향, 추념사, 유족 사연 낭송, 추모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헌화·분향 추모곡은 제주 출신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윤희씨가, 추모공연은 가수 양지은씨가 했다. 윤 당선인은 추념식을 마친 뒤 다시 서울로 향했다.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은 이날 오전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윤 당선인이 오늘 국무총리를 지명하는 중요한 기자회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주도에 갔다가, 그 스케줄만 하고 다시 (서울로) 오신다”며 “선거 기간에 4월 3일 제주에 꼭 가겠다고 했던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인 것”이라고 말했다. 윤 당선인은 이날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2호기’를 이용해 서울과 제주를 왕복으로 이동했다. 당선인 신분으로 대통령 전용기를 사용한 것은 윤 당선인이 처음이다. 당선인이 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만큼, 요청이 있을 경우 대통령 전용기를 사용할 수 있다. 지난달 15일에는 대통령 전용 헬기인 ‘공군 2호 헬기’를 타고 경북 울진군 북면 검성리 산불 피해 현장을 찾아 이재민을 위로하기도 했다. 의전에 따른 조치라고는 하나 문재인 대통령과 윤 당선인 간 큰 틀에서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송영길 “서울시민으로 새로운 하루”...오세훈과 빅매치 성사?

    송영길 “서울시민으로 새로운 하루”...오세훈과 빅매치 성사?

    송영길vs오세훈 구도로 갈지 관심송영길 “전략공천 머릿속에 없어”SNS 통해 서울과의 인연 강조서울시장 선거 출마 의지를 밝힌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인천에서 서울로 주소지를 옮긴 후의 소회를 전했다. 국민의힘이 오세훈 현 서울시장을 단수 추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빅매치가 성사될지 관심을 모은다. 송 전 대표는 이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한성백제의 숨결이 깃든 송파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서울시민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송 전 대표는 “1985년 여름 학생운동으로 구속되었다가 서대문 구치소에서 석방된 후 서울 명륜동 형 집에서 살다가 석유난로와 밥상 냄비 밥솥을 싣고 노동자로 살겠다고 인천 부평으로 이사갈 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시 계양구의 지역위원회 당원들과의 작별 인사도 언급하면서 “모두들 쉽지 않은 서울시장 선거, 꼭 독배를 들어야 하는지 걱정도 많이 해주었다”고 전했다. 송 전 대표는 아울러 ‘인천 비류백제’와 ‘송파 한성백제’를 언급하며 자신과 인천, 서울 간의 연결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머물렀던 서울 자취집과 신혼집,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을 줄줄이 언급했다.송 전 대표는 추대와 전략공천이 아닌 경선으로 경쟁하겠다는 입장이다. 전날 송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이제 누가 서울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당과 당원과 지지자들께서 판단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오직 지방선거의 승리를 위해 당원으로서 직책과 직분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송 전 대표는 “우리 당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 저도 그분들과 함께 당의 결정에 충실히 따를 것”이라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대나 전략공천은 제 머릿 속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 인물난을 겪고는 있지만, 다른 예비후보들과도 경선을 치르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송 전 대표는 조만간 공식 출마 선언도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민의힘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재선을 위해 경선 없이 단수 추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역시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기보다는 지난해 재·보궐선거로 당선된 서울·부산시장의 재도전에 긍정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 어제의 눈물로 피어난 오색빛깔 골목길

    어제의 눈물로 피어난 오색빛깔 골목길

    어느 도시에나 원도심은 있기 마련이다. 부산도 그렇다. 중구를 중심으로 멀리는 일제강점기, 가까이로는 6·25전쟁 당시 피란 수도의 흔적이 여태 남아 있다. 이런 문화유산들을 찬찬히 돌아보는 재미가 아주 각별하다. 반면 부산의 동쪽은 요즘 변화가 극심하다. 새로운 것들이 밀물처럼 들어차고 있다. 해운대 너머 기장 일대의 새로운 놀거리들을 찾아봤다.원도심 투어의 들머리는 중구의 유라리광장이다. 유럽(유)과 아시아(라)가 모여 떠드는 소리(리)의 뜻을 가진 합성어다. 부산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임시수도였다. 1129일의 전쟁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1023일(1026일이란 견해도 있다)이나 대한민국의 중심지였다. 유라리광장 위를 지나는 영도다리는 당시의 대표적인 흔적 중 하나다.●피란민 재회의 장소 ‘영도다리’ 영도다리는 피란민들이 재회의 장소로 약속한 곳이다. 생면부지의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던 영도다리는 전쟁 통에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훗날 만남을 기약하는 장소로 제격이었다. 원래 도개(선박 출입을 위해 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는 것)로 유명한 곳인데, 코로나19 탓에 도개 행사는 잠정 중단됐다. 매달 둘째, 넷째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점검차 도개 작업이 진행될 때만 잠깐 볼 수 있다. 유라리광장 한켠엔 웃음등대가 세워져 있다. 웃고 있는 피에로 형태의 등대다. 부산은 자타가 인정하는 K코미디의 도시다. 웃음등대는 해마다 열리는 부산코미디페스티벌의 마스코트 ‘퍼니’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밤에는 미디어 파사드 등의 이벤트가 진행된다. 유라리광장에서 자갈치 시장 쪽으로 가면 ‘판도라의 숲’이 나온다.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조형물로 다시 제작해 전시했다.여기서 길을 건너면 용두산공원이다. 부산 원도심의 랜드마크라 할 ‘부산타워’가 오벨리스크처럼 솟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타워다. 120m 높이의 부산타워에 오르면 앞으로 갈 원도심 일대는 물론 부산의 명소 대부분이 한눈에 들어온다.●독립운동 전초기지 ‘백산상회’ 용두산공원 옆은 ‘한성1918 부산생활문화센터’다. 1918년 한성은행 부산지점으로 세워졌으니 무려 104년이나 건재한 건물이다. 현재는 부산 원도심 투어의 여행자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옆은 백산기념관이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1885~1943)를 기리는 공간이다. 기념관이 세워진 자리는 1914년 백산이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의 전신)를 창업한 곳이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개인 사업체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핵심 전초기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운영자금 60% 정도가 백산이 지원한 자금이었을 정도로 백산상회는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할 때 망개떡 상자에 넣어 숨겼다고 한다. 백산의 고향이 경남 의령이고, 이 고장 주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 중 하나가 망개떡이었던 것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그저 주전부리인 줄만 알았던 망개떡이 요깃거리 이상의 역할을 했다는 게 놀랍다.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오프닝 장면으로 유명한 ‘40계단’도 인근에 있다. 장성민(안성기)이 마약상(송영창)을 살해하는 장면이 촬영됐다. 록밴드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잔잔하게 흐르던 순간 펼쳐진 그 첫 장면은 당시 꽤 큰 반향을 불렀다. 요즘이야 계단 하면 영화 ‘조커’를 떠올리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청춘들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한 장면을 연기하며 내려오곤 했다. ‘40계단’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됐다. 6·25전쟁 때는 산복도로에 정착한 수많은 피란민들이 물동이를 이고 지고 오르내렸던 고난의 계단이었다. 부산의 옛 모습과 마주할 수 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이 문을 닫은 건 다소 아쉽다. 내부 수리를 마치고 오는 6월쯤 재개장 예정이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이 나온다. 좁디좁은 골목에 없는 듯 숨어 있는 문화유산(등록문화재)이다. 캐나다 선교사의 사망보험금으로 매입한 땅에 1924년 지어 올렸다. 서울의 성공회 성당보다 2년 먼저 세워졌다고 한다. 성당 외벽은 붉은 벽돌이다. 세월이 쌓인 탓인지, 여느 벽돌보다 한결 붉다. 건물 오른쪽 회랑 부분을 제외하고 성당은 현재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돔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성당 인근의 부산지방기상청 건물도 1934년에 건립된 문화재(시 지정 기념물)다. 선박의 기관실 형태로 지어진 모습이 독특하다.●부산의 산토리니 ‘감천문화마을’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나 동아대 부민캠퍼스 쪽으로 가면 임시수도기념거리가 나온다. 이 일대에도 문화유산이 많다. 동아대 캠퍼스 내 석당박물관(등록문화재)은 임시수도의 정부청사로 쓰였던 곳이다. 1925년 세워진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석조 건물의 자태가 자못 당당하다. 캠퍼스 초입에 서 있던 부산전차(등록문화재)는 교내로 옮겨져 수리 중이다. 1968년까지 시내를 달렸던 부산의 마지막 전차 중 한 대다.동아대 교정 바로 위는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다. 1926년에 건축된 목조 건물이다. 원래 경남도지사 관사였다가 1951년 1·4후퇴 때 부산에 내려온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3년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관저로 사용했다. 당시 대통령 집무실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원도심 투어의 종착지는 감천문화마을이다. 산허리를 따라 형형색색의 집들이 계단식으로 늘어섰다. 그리스 산토리니를 닮아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불린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생긴 낙후된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환골탈태했다. 감천동 반대편은 아미동이다. ‘비석문화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오래전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곳인데 피란민들이 무덤 위에 집을 짓고 비석, 상석 등을 건축자재로 쓰면서 비석마을로 불리게 됐다. 부산시에서 자체 선정한 1호 등록문화재다. 요즘 부산은 벚꽃이 일품이다. 원도심 주변에 가볼 만한 벚꽃 명소들이 있다. 부산 야경 감상의 ‘고전’으로 꼽히는 황령산은 벚꽃 드라이브로 제격이다. 연분홍 벚꽃과 도심의 불빛이 근사하게 어우러진다. 빵집이 많아 ‘빵천동’이라 불리는 남천동 일대도 벚꽃 명소다. 얼추 40년을 헤아리는 늙은 벚나무들이 빼곡하다. 바람 부는 날엔 오륙도로 가야 한다. 용호동 해안 절벽에 세워진 ‘오륙도 스카이워크’ 아래로 울부짖는 바다의 모습이 장관이다. 스카이워크 뒤의 해맞이공원에선 유채꽃, 수선화 등 봄꽃들이 쪽빛 바다와 기막히게 어우러진다. ■여행수첩 -원도심 전체를 걸어서 돌아보려면 품이 꽤 많이 든다. 용두산공원이나 감천문화마을 등 핵심 포인트에 차를 주차하고 돌아보길 권한다. 원도심 곳곳에 공영, 민영 주차장이 잘 갖춰져 있다. -외지에서 원도심으로 들어가려면 복잡한 시내도로를 타야 한다. 다소 돌더라도 광안대교, 부산항대교(북항대교) 등 외곽도로를 이용하길 권한다. 바다 위로 뜬 다리를 지나며 부산의 외모를 훑어볼 수 있다. -중구청 바로 앞의 유명분식은 ‘쫄우동’으로 이름난 집이다. 쫄우동은 걸쭉한 우동 국물에 쫄면이 들어간 일종의 퓨전음식이다. 요즘 제철 음식은 갈미조개다. 광안리 해변 쪽에 갈미조개와 삼겹살을 함께 구워 먹는 ‘갈삼구이’ 집이 많다.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이래서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라했던가

    이래서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라했던가

    상위 1% 근로소득자 넷 중 셋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소득 양질의 일자리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뜻이다. 상위 1%의 평균 연봉은 2억 7040만원, 월급은 2253만원꼴이다. 21일 국세청이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광역자치단체별 상위 1% 근로소득자 현황’에 따르면 2020년 귀속 근로소득 연말정산 결과 전국 상위 1% 근로소득자는 19만 4953명으로 집계됐다.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14만 5322명으로 전체의 74.5%를 차지했다. 개별 지역으로는 서울이 8만 6716명(44.5%)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기 5만 2651명(27.0%), 부산 8447명(4.3%), 경남 6340명(3.3%) 순이었다. 계획도시인 세종(516명)을 제외하면 상위 1% 근로소득자 수가 가장 적은 곳은 제주(1163명)였다. 강원(1912명), 전북(2333명)도 다른 지역보다 적었다. 인구수를 고려한 10만명당 상위 1% 근로소득자 수 역시 수도권이 높았다. 서울이 897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 392명, 울산 287명, 부산 249명, 대전 223명 순이었다. 강원(124명), 전북(129명), 세종(145명), 전남(151명), 제주(172명) 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김 의원은 “고소득자 상당수가 수도권에 있는 직장을 다닌다는 건 지역 불균형이 심각해 지방이 소멸 위기를 맞았다는 의미”라며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대대적인 정책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경규, 미모의 여동생 순애씨 최초 공개…조카 결혼식 참석

    이경규, 미모의 여동생 순애씨 최초 공개…조카 결혼식 참석

    방송인 이경규가 여동생 순애씨를 최초 공개한다. 22일 방송되는 MBC 예능프로그램 ‘호적메이트’ 10회에서는 이경규가 여동생과 함께 출연해 남매애를 보여준다. 이날 방송에서 이경규는 여동생의 큰딸 결혼식에 딸 예림씨와 함께 참석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결혼식에 앞서 이경규는 여동생이 사는 곳을 정확히는 모른다며 “우리는 신비주의”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이날 이경규는 “여동생이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내 뒷바라지를 하다가 결혼했다”면서 “그런 여동생이 이제 사위를 얻는다니 짠하다”며 다정한 오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막상 결혼식장에 도착한 이경규는 애틋함을 드러냈던 인터뷰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뭉클해한 예림씨와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경규가 여동생을 최초 공개하는 ‘호적메이트’ 10회는 이날 오후 9시에 방송된다.
  • 수도권 1호선 전철-천안 시내버스 환승… 市, 19일부터 교통요금 1250원 할인 적용

    수도권 광역전철과 버스를 이용해 서울과 천안을 오가는 대중교통 이용자는 오는 19일부터 환승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서울시는 수도권 광역전철 1호선 평택역부터 신창역까지 12개 역에서 천안 시내버스로 갈아타면 전철 기본요금 1250원을 할인받을 수 있는 ‘천안형 환승 할인’을 시행한다고 17일 밝혔다. 시는 앞서 지난해 12월 인천·경기·천안·한국철도공사와 이 같은 환승 할인제에 합의했다. 수도권 광역전철 1호선은 평택역 이후 충청도까지 연결돼 있으나 충청 지역 버스와 광역전철 간 별도의 요금 할인이 없다 보니 충청 지역 버스와 광역전철을 연속으로 이용하면 요금을 각각 내야 했다. 예를 들어 천안 시내버스 이용객이 수도권 광역전철로 갈아타 천안역에서 서울 시청역까지 이동하는 경우 기존에는 4550원(천안 버스 1500원, 수도권 광역전철 3050원)을 내야 했다. 앞으로는 전철로 갈아탈 때 냈던 기본요금 1250원을 할인받아 3300원만 내고 이용할 수 있다. 환승 할인을 받으려면 천안에서 서울로 이동할 때에는 천안 시내버스에서 내려 30분 내로 수도권 전철로 갈아타거나, 서울에서 천안으로 이동 시에는 수도권 광역전철에서 내려 45분 내로 천안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서울시는 이번 천안형 환승 할인 시행으로 하루 약 1만 5000여명이 교통비를 절감할 것으로 추정했다.
  • 서울시, 19일부터 수도권 전철~천안 시내버스 환승 할인 시행

    서울시, 19일부터 수도권 전철~천안 시내버스 환승 할인 시행

    수도권 광역전철과 버스를 이용해 서울과 천안을 오가는 대중교통 이용자들은 19일부터 환승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서울시는 수도권 광역전철 1호선 평택역부터 신창역까지 12개 전철역에서 천안 시내버스로 갈아타면 전철 기본요금 1250원을 할인받을 수 있는 ‘천안형 환승 할인’을 시행한다고 17일 밝혔다. 수도권 광역전철 1호선은 평택역 이후 충청도까지 연결돼 있으나 충청 지역 버스와 광역전철 간에 별도의 요금 할인이 없다 보니 충청 지역 버스와 광역전철을 연속으로 이용하면 요금을 각각 내야 했다. 예를 들어 천안 시내버스 이용객이 수도권 광역전철로 환승해 천안역에서 서울 시청역까지 이동하는 경우 기존에는 4550원(천안 버스 1500원, 수도권 광역전철 3050원)을 내야 했다. 앞으로는 전철로 환승할 때 냈던 기본요금 1250원을 할인받아 3300원만 내고 이용할 수 있다. 이후 서울 시청역에서 내려 서울버스로 추가 환승할 경우에도 수도권 대중교통 통합환승할인을 적용받아 서울 내 이용거리에 대한 할증 요금(5㎞당 100원)만 내면 된다. 환승 할인을 받으려면 천안에서 서울로 이동할 때 천안 시내버스에서 내려 30분 내로 수도권 광역전철로 갈아타거나, 서울에서 천안으로 이동 시 수도권 광역전철에서 내려 45분 내로 천안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서울시는 이번 ‘천안형 환승 할인’ 시행으로 하루 약 1만 5000여 명이 교통 비용을 절감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서울시는 이번 환승 할인으로 충청 지역을 방문하거나 여행하는 시민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호 서울시 도시교통실장은 “19일부터 시행되는 천안형 환승할인으로 더 많은 시민이 교통 복지를 누리고, 충청권까지 넓어진 지역 생활권을 더욱 편리하게 이동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대중교통 연계를 통한 두 도시의 동반 성장도 전망되는 만큼 수도권과 지역 간 상생 모델로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다자녀 아빠 위장 이혼 후 청약… 판 분양권 또 팔아

    다자녀 아빠 위장 이혼 후 청약… 판 분양권 또 팔아

    경남 김해에 사는 다둥이 아빠 A씨는 아내 B씨와 이혼했다. 그런데 헤어진 두 사람은 여전히 한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함께 살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다자녀 특별공급(특공)을 받기 위해 위장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A씨는 과거 아내의 명의로 다자녀 특공에 당첨돼 집을 분양받았다. A씨는 이혼서류를 내 아내와 법적으로 남남이 된 뒤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다자녀 특공 청약을 넣어 당첨됐다. 하지만 정부의 합동점검에서 덜미를 잡혔다. A씨처럼 부정청약으로 주택 공급 질서를 어지럽힌 이들이 무더기 적발됐다. 이들은 계약취소는 물론 형사처벌받을 가능성도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상반기 분양단지를 대상으로 한국부동산원과 주택청약·전매 실태 합동점검을 벌여 모두 125건의 공급 질서 교란행위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이들이 주택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적발된 주요 유형을 보면 위장전입을 통한 부정청약이 100건으로 가장 많다. 그 지역에 실제 거주해야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청약에 넣기 위해 주소지만 옮긴 것이다. 시청 공무원 C씨는 1~8개월 간격으로 대전, 서울, 대전, 대구, 서울로 전입신고를 하면서 주택청약을 신청했다. 서울에서 생애최초 특별공급에 당첨된 후 다시 본거지로 전입신고를 했다. 통장을 불법적으로 사고팔다가 적발된 사례도 14건 있었다. 청약브로커가 당첨 가능성이 높은 청약자의 금융인증서 등을 넘겨받아 대리청약하거나 당첨 후 대리계약을 체결하는 등 청약통장이나 자격을 매매하는 방식이다. A씨처럼 특별공급을 받거나 청약 점수를 높이기 위해 허위로 이혼했다가 적발된 사례도 9건 있었다. 이혼하면 한부모가정이 돼 특별공급 청약 때 가점을 받을 수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공공주택의 신혼부부 특공 때 결혼 5∼7년차 부부는 가점 1점만 받지만, 한부모가정에 2세 이하 자녀가 있다면 가점 3점을 받을 수 있어 위장 이혼하는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불법전매 사기 사례도 있었다. 분양권을 보유한 D씨는 전매 제한 기간 중 E씨에게 1억 2000만원의 웃돈(프리미엄)을 받고 분양권을 판 뒤 이 사실을 모르는 F씨에게 다시 3억 5000만원의 프리미엄을 받고 같은 아파트의 분양권을 팔았다. 이후 G씨는 잠적했다. 불법전매 매수행위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사례다. 국토부는 이들을 수사의뢰하는 한편 계약취소(주택환수) 및 향후 10년간 주택청약 자격 제한 등 엄중 조치를 할 계획이다.
  • 김영록 전남지사와 정현복 광양시장이 포스코에 뿔난 사연은?

    김영록 전남지사와 정현복 광양시장이 포스코에 뿔난 사연은?

    김영록 전남지사와 김한종 전남도의장, 정현복 광양시장 등 전남도와 광양지역 정치인들이 포스코에 잔뜩 화가 났다. 15일 오전 11시 전남도청 브리핑룸. 김 지사 등은 “포스코가 전남도와 광양시에 대한 홀대를 수십년동안 계속하고 있다”며 “지역사회의 상생발전 요구를 즉각 수용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포스코에 대한 지역상생협력를 촉구하기 위해 참석한 사람은 김 지사와 김 의장, 김경호 광양시 부시장, 진수화 광양시의장, 이용재·김태균·김길용 전남도의원, 이백구 광양상공회의소 회장 등이다. 앞서 지난 7일 김 지사와 진 시의장 등은 “최근 포스코 홀딩스가 포항으로 이전하면서 모든 의사결정이 포항 중심으로 진행돼 지역민의 상대적 박탈감이 고조되고 있다”며 “㈜포스코와 ㈜포스코케미칼 본사를 광양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요구했었다. 이들은 “지역민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지역 사회단체와 광양·여수·순천·하동·남해 등 5개 시군의 광양만권협의체 구성을 통해 공동 대응해나갈것이다”고 강조한바 있다. 김 지사 등이 지역 상생을 촉구한 지 8일만에 다시 포스코의 형태를 지적하고 나온 이유는 그만큼 포스코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지역민들이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는 등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어서다. 김 지사는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시설규모나 조강생산량 측면에서 포항에 앞서고 있다”며 “그럼에도 지금까지 포스코의 주요한 의사결정이나 대규모 지역협력 사업들은 포항 위주로만 진행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진 시의장은 “포스코가 균형잡힌 시각과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며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이라는 포스코 경영이념에 걸맞게 지역사회와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회장은 “포스코는 광양제철소 내 ‘구매팀’을 신설하고, ‘지역업체 구매물량 목표제’를 실시해야된다”며 “포스코는 ‘광양지역상생협력 협의회’에 ㈜포스코홀딩스와 ㈜포스코가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약속하라”고 주장했다. 포스코는 지난 1월 주주총회를 거쳐 포스코 그룹 전체의 전반적 경영전략과 신규투자 등을 주도할 지주사 ㈜포스코홀딩스의 본사를 서울로 결정했다. 하지만 포항시가 강력하게 요구하자 포스코는 지난달 기존 결정을 뒤집고, ㈜포스코홀딩스와 미래기술연구원의 본사 소재지를 포항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에서 포항시를 비롯한 정치권의 포스코에 대한 경영간섭으로 전남지역 투자계획 등이 언제든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전남 및 광양지역과 상생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 광양시와 전남도, 포스코에 상생협력 촉구

    광양시와 전남도, 포스코에 상생협력 촉구

    전라남도와 광양지역 기관단체들이 포스코에 상생발전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전남도와 광양시, 광양상공회의소 등은 15일 오전 도청 브리핑룸에서 포스코 지주사의 포항 이전과 관련, 성명서를 통해 “포스코 지주사 전환 결정 과정에서 광양을 비롯한 전남지역사회가 철저히 소외되고 무시됐다”며 “지역과의 상생발전을 요구했다. 특히 “광양제철소가 시설 규모나 조강생산량 측면에서 포항에 앞서는데도 포스코의 주요 의사결정이나 지역협력 사업은 포항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며 “포스코 경영이념에 걸맞게 지역사회와 동반성장 하도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포스코에 (주)포스코와 ㈜포스코케미칼 본사를 광양으로 이전하고 차후 신규법인 설립 시 본사의 광양 설치와 포스코 미래기술연구원 내 ‘수소?저탄소에너지 연구소’와 ‘이차전지 소재 연구소’ 광양 이전, 기존 전남지역에 대한 5조 원 규모 투자계획 이행과 이차전지 등 신사업 분야 투자 확대를 촉구했다. 또 광양제철소 내 ‘구매팀’ 신설과 ‘지역업체 구매물량 목표제’ 실시와 ‘광양지역상생협력 협의회’에 ㈜포스코홀딩스와 ㈜포스코의 의무 참여 및 지역협력사업 적극 추진 등 모두 5개 사항을 요구했다. 이와함께 “포스코는 지역사회의 상생발전 요구를 즉각 수용해야 한다”며 “관철되지 않을 경우 지역사회와 함께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포스코는 지난 1월 주주총회를 거쳐 지주사 체제 전환을 선언하고 포스코 그룹 전체의 전반적 경영전략과 신규 투자 등을 주도할 지주사 ㈜포스코홀딩스의 본사를 서울로 결정했으나 포항시의 강력한 요구로 지난 2월 기존 결정을 뒤집고 ㈜포스코홀딩스와 미래기술연구원의 본사 소재지를 포항으로 변경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이유로 포항시를 비롯한 정치권의 포스코 경영간섭으로 전남지역 투자계획 등이 언제든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퍼지면서 광양 등 전남지역에서 상생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지난 2일 출범식을 갖고 오는 18일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를 선임할 계획이다.
  • ‘돌싱’ 다둥이 아빠, 이혼한 아내와 같이 사는 이유는?

    ‘돌싱’ 다둥이 아빠, 이혼한 아내와 같이 사는 이유는?

    특공 청약 때 ‘다자녀 가점’ 등 노려 이혼국토부, 불정청약 사례 125건 단속위장전입·통장매매·불법전매·위장이혼 등분양 주택 환수·10년간 청약자격 제한다둥이 아빠인 A씨는 아내 B씨와 협의이혼했다. 그런데 헤어진 A씨와 B씨는 여전히 한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함께 살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다자녀 특별공급(특공)을 받기 위해 위장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A씨는 과거 아내의 명의로 다자녀 특공에 당첨돼 집을 분양받았는데 한 채 더 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특공은 세대별로 한 번만 받을 수 있다.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가짜 이혼이었다. 법적으로 아내와 남남이 된 A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다자녀 특공 청약을 해 당첨됐다. 하지만 정부 합동점검팀에 덜미를 잡혔다. A씨처럼 부정청약으로 주택 공급 질서를 어지럽힌 이들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이들은 계약취소는 물론 형사처벌까지 받을 가능성이 있다. 국토교통부는 2021년 상반기 분양단지를 대상으로 한국부동산원과 주택청약·전매 실태 합동점검을 지난 하반기 벌여 모두 125건의 공급질서 교란행위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이들이 주택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적발된 주요 유형을 보면 위장전입을 통한 부정청약이 100건으로 가장 많다. 그 지역에 실제 거주해야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청약에 넣기 위해 주소지만 옮겨놓은 것이다. 한 지자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C씨는 1~8개월 간격으로 대전-서울-대전-대구-서울로 전입신고를 하면서 주택청약을 신청했으며 서울에서 생애최초 특별공급에 당첨된 후 다시 본거지로 전입신고를 했다.통장을 불법적으로 사고 팔다 적발된 사례도 14건 적발됐다. 청약브로커가 당첨 가능성이 높은 청약자의 금융인증서 등을 넘겨 받아 대리청약하거나 당첨 후 대리계약을 체결하는 등 청약통장 또는 청약자격을 매매하는 방식이다. A씨처럼 특별공급을 받거나 청약 점수를 높이기 위해 허위로 이혼하다 적발된 사례도 9건 있었다. 이혼하면 한부모가정이 돼 특별공급 때 청약 때 가점을 받을 수 있다. 국토부는 이들을 수사의뢰하는 한편 계약취소(주택환수) 및 향후 10년간 주택청약 자격 제한 등 엄중 조치를 할 계획이다.
  • [취중생] 인간이 떠난 산불 현장…우리에 갇힌 동물들 피할 곳 없나요

    [취중생] 인간이 떠난 산불 현장…우리에 갇힌 동물들 피할 곳 없나요

    [편집자주]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는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취중생’(취재 중 생긴 일)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사건팀 기자들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담아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지난주 산불이 크게 번진 경북 울진. 여든이 넘은 한 노부부는 새벽에 잠에서 깨 급하게 대피하느라 오랜 시간 함께 해온 개 ‘울진’이의 목줄을 풀어주지 못 하고 나왔습니다. 화재를 진압하면서 줄이 끊어진 울진이가 다 타버린 집구석에 홀로 있는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노부부의 자녀는 ‘동물권행동 카라’에게 울진이의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노부부의 집을 찾아간 카라의 활동가들은 모두 타버린 집 옆 대문 구석에서 이미 죽어 있는 울진이를 발견했습니다. 울진이는 하얀 털을 가진 백구였지만 울진이의 마지막 모습은 전신의 털이 다 눌어 누렇고 마른 몸이 전부였습니다. 목줄 아래 불길이 미치지 못한 곳에 남아 있는 때탄 하얀 털만이 생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가까스로 목줄이 끊어진 울진이는 왜 도망가지 않고 노부부의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을까요. 카라는 “무서워 숨은 건지, 노부부를 찾고 싶었던 건지 울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 알 길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고 사연을 전했습니다. 산불 현장 동물 30마리 구조…개농장은 물·전기 끊겨 경북 울진, 강원 삼척·동해·강릉 등 대형 산불이 동해안을 덮친 지 9일째입니다. 대형 산불이 발생할 때마다 산불 현장에 남겨진 동물들의 문제가 불거집니다. 주인이 목줄을 풀어주지 않아 그대로 불에 타 죽거나, 화재를 피해 도망쳤더라도 가족처럼 소중한 반려동물과 주인이 생이별을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유기동물 보호소나 불법 개농장같은 경우 수많은 동물들이 한꺼번에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동물보호단체들은 산불 현장에 남겨진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 앞다투어 동해안으로 달려갔습니다. 카라는 12일 현재까지 울진 산불 현장에서 구조한 동물이 총 30마리라고 밝혔습니다. 힘을 다해 구조했지만 사망한 동물도 있습니다. 카라에 따르면 다섯 살된 소 ‘소원’이는 산불을 피하기 위해 축사에서 탈출하려다 뒷다리가 부러졌고 화상도 입었습니다. 카라는 소원이를 구조했지만 이틀만에 사망했습니다. 동물권단체 케어는 울진의 개농장으로 향했습니다. 산불이 번지고, 물과 전기가 모두 끊긴 가운데 철창에 갇혀 나올 수 없는 개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케어는 개농장에서 화상으로 고통 받고 있던 개들, 굶주림에 울부짖는 개들, 이미 새까맣게 타서 죽어 있는 개들을 발견했다고 전했습니다. 케어는 이들을 구조해 화상이 심각한 8마리를 서울로 이송해 치료 중입니다. 동물보호단체 위액트도 울진에서 동물 총 30마리를 구조했다고 지난 10일 밝혔습니다. 동물자유연대는 산불 화재로 피해를 입은 동물들에 대해 최대 200만원 한도 내에서 긴급 치료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반려동물 늘어나지만 재난 대응책은 미비 2017년 포항 지진, 2019년 고성 산불, 올해 동해안 산불까지 대규모 재해·재난이 반복되고 있지만 반려동물에 대한 대응책은 부족합니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가 1000만명에 달하는 것을 고려하면 하루빨리 적절한 매뉴얼을 수립해야 합니다. 동물권 단체들은 반려동물 대피시설을 비롯해 기본적인 행동 지침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행정안전부가 공개한 ‘애완동물 재난대처법’에는 ‘반려동물은 대피소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역 외부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구에게 반려동물이 머물 수 있는지 부탁하기’, ‘수의사나 조련사가 대피소를 제공하는지 알아보기’ 등 동물이 대피할 수 있는 장소를 자체적으로 확보하라는 수준의 지침만 제공할 뿐입니다. 재난 상황에서 동물을 보호할 수 있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최민경 카라 정책행동팀장은 “해외에는 재난 상황 발생시 참고할 수 있는 매뉴얼과 방안이 잘 마련돼 있어서 동물과 같이 들어갈 수 있는 대피소와 그렇지 않은 대피소가 분리돼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점이 부족하다”고 짚었습니다.
  • 22일 대장정 마무리하며…李·尹 마지막까지 ‘지지 호소’

    22일 대장정 마무리하며…李·尹 마지막까지 ‘지지 호소’

    유세 마친 여야 양강 후보대장정으로 쌓인 피로 풀며 휴식문자·SNS 통해 막판 지지 호소도제20대 대통령 선거 투표 당일인 9일 최대 승부처 서울에서 선거운동 대단원 막을 내린 여야 양당 대선 후보들은 승부의 최종 승자가 누가 될지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이 종료 시점인 이날 자정까지 서울 홍대 거리에서 유권자들과 만나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후 성남 자택에서 머물며 지난달 15일부터 이어온 22일간의 대장정의 노고를 풀며 문자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이 후보는 오전 자신의 SNS에 “대한민국의 5년을 책임질 대통령을 뽑는 날, 오늘 단 하루”라며 “꼭 투표장에 나서 달라. 투표하면 이긴다”고 호소했다. 이어 “격리자 투표가 마감되는 7시30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전화해주시고 한 사람이라도 더 설득해달라”며 “절박한 심정으로 오늘을 함께해 달라. 위대한 국민의 현명한 선택을 믿는다”고 했다. 특히 이 후보는 자신의 SNS에 글을 남긴 지지자에게 답글로 “선거가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며 “‘수고하셨습니다’는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로 바꿔달라”고 강조했다. 그는 같은 내용을 ‘선거운동 중’이라면서 문자메시지로도 전송하며 선거 막판까지 지지 호소에 나서고 있다. 이 후보는 이날 지상파 3사와 JTBC의 출구조사가 발표되는 오후 7시30분에는 성남 자택에 머물다가 개표 상황이 윤곽이 드러날 때쯤 여의도 국회 민주당 개표 상황실로 이동할 예정이다. 정확한 이동 시각은 미정이지만 밤 12시쯤이 될 것으로 정치권은 예측하고 있다. 전날 제주-부산-대구-대전-서울로 이어지는 강행군을 펼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며 선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윤 후보는 이날 오후 자신의 SNS에 “현재 투표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투표율이 높지 않으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투표율 때문에 민의가 왜곡돼선 절대 안 된다. 지금 이 순간 국민 여러분의 한 표, 한 표가 너무나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온 국민의 정권교체 열망을 투표를 통해 실현해달라”며 “한 분이라도 투표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 분들에게 적극적인 투표 독려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윤 후보는 이날 밤 개표 상황의 윤곽이 드러날 때쯤 여의도 국회 국민의힘 개표 상황실로 이동해 선거 결과에 대한 소감을 밝힐 예정이다. 정치권에 따르면 윤 후보는 이후 국민의힘 당사로 이동해 지지자들과 만나 인사할 계획이다.
  • 너른 엄마 품 같은 한 자 한 자… 무자비한 세상에 헤진 마음 기대다 [작가의 땅]

    너른 엄마 품 같은 한 자 한 자… 무자비한 세상에 헤진 마음 기대다 [작가의 땅]

    마흔 살에 등단해 맹렬한 글쓰기연이어 가족 잃은 슬픔에도 집필암 투병 중에도 후배 작가 챙기고부의금 받지 말라던 시대의 어른 사후 문학관·문학마을 건립 반대도서관에 세워진 자료실이 유일소설·수필·동화 등 치열한 흔적둘러보기만 해도 마음 놓이는 곳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산했던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있다. 선생께서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와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앞서 ‘엄마’가 놓이는 것은 그의 너른 품과 손맛 그리고 그가 쓴 문장의 힘에 모두들 기대어 산 덕분이 아닐까. 선생에게 천둥벌거숭이 같은 이들과 무자비한 세상을 향해서 날카로운 문장으로 단도리를 해 주던 큰엄마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누군가의 슬하에 놓아두어야 한다면 최소한 한국 문학의 자리에서 그 주인은 ‘박완서’다. 나는 입때껏 그리 믿고 읽고 써 왔다. 이 또한 나만의 일일까.소설가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박적골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했다. 세 살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조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선생은 훗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손녀와 집안 사람들의 창씨개명을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에 ‘박완서’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딸을 사대문 안의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했던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했다.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의 소개령으로 인하여 개성으로 이사한 후에 호수돈고등여학교로 전학을 갔다. 개성에서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50년 6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한다. 스무 살의 박완서는 전쟁 중에 숙부와 오빠, 올케를 잃는다. 어린 조카와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기에 학업에 복귀하는 대신 미8군의 PX 초상화 부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던 박수근 화백을 만나게 되고 이는 훗날 등단작 ‘나목’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선생은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졸지에 가장이 된 처지였던 터라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후에 서울의 동화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가 그곳에서 만난 측량기사와 결혼을 한다. 1남 4녀의 자식을 둔 채로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던 중에 1968년에 열린 박수근 유작전을 보고 그와 함께 일을 했던 때의 이야기를 쓴 수필을 소설로 개작해 ‘신동아’ 장편소설에 응모를 한다. 첫 소설 집필작으로 당선이 된 선생은 그때의 소감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중략)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20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내가 막 보태는 거야. 그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나이 마흔의 늦깎이 등단이었다. 그 이후의 엄청난 창작열은 데뷔하던 해 작가의 나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셈이다. 선생은 끝까지 현역 작가로 살다 가겠다는 뜻을 품었고, 마침내 이루어 내었다. 그의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서영채는 이렇게 말했다. “늦깎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보여요. 일단 냉정하고 현실적이에요. 문인이기 때문에 삐딱함이나 낭만이 없을 수 없지만, 세상과 삶을 보는 방식에는 낭만기가 없어요. 냉정하죠. 냉소적이기도 하고요. 젊지 않은 나이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양상은 다르지만, 늦깎이가 지니는 맹렬함 같은 것도 보여요.”(서영채, ‘왜 읽는가’에서) 그야말로 맹렬하게 써 내려갔다. 왕성하다는 말로도 부족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어쩌면 서영채의 말대로 ‘냉정하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간을 엄마의 시간에서 떼어 내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등단 이후에도 작가와 엄마의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해 나갔던 터라 집안은 평화로웠고 작가로서의 치열함은 매해 출간되는 작품집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1988년 5월에 암투병을 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일이 벌어진다. 연이어 가족을 잃은 선생은 심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산의 분도 수녀원에 요양을 하러 내려가기도 했다.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아픔 속에서도 선생은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그 당시의 심정을 수필집 ‘한 말씀만 하소서’에 토로했다. “걔는 또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젊은 의사였습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시다니요. 하느님 당신도 실수를 하는군요. 그럼 하느님도 아니지요. (중략) 행복했을 때는 아침이 좋았는데 요샌 정반대다. 내 앞에 펼쳐진 긴긴 하루를 살아낼 생각이 지겹도록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시때때로 탈진하도록 실컷 울면 그동안이라도 시간을 주름잡을 수가 있는데 그것도 용납 안 되는 하루 동안이란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가.”(‘한 말씀만 하소서’에서)부산 수녀원을 나와서 미국에 살던 딸네 집으로 갔던 선생은 머지않아 서울로 돌아와서 중단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전과 다름없이 꾸준히 작품을 생산해 내었고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별세 후에는 보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우스갯소리로 ‘박완서 선생이 타지 못한 문학상은 젊은작가상밖에 없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만큼 현존하는 문학상을 거의 다 수상했다. 수상하지 못한 젊은작가상은 ‘심사’를 하다가 돌아가셨으니 어느 정도 연관은 있게 된 셈은 아닌가. 선생은 암 투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젊은 후배들의 작품을 읽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도 즐겼고 간간이 후배들을 만나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이었다고. 등 뒤에 서 있는 이들에 대한 촉을 놓지 않으려는 어른의 배려를 받은 작가들은 그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그립다고들 한다. 해마다 쏟아낸 작품의 종수와 그의 빼어남은 육신의 나이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선생께서 세상을 뜨셨을 적에 오죽하면 ‘우리는 원로 작가 한 분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 하나를 잃었다’(문학평론가 신형철)고 했을까. 게다가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치고 박완서 선생의 글을 곁에 두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다작이면서도 빼어난 작품들을 스스럼없이 써내는 선생을 귀감으로 삼는 후배 작가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 사람으로서도, 소설가로서도 모든 것을 알고 읽고 있는 듯하던 선생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돌아보았다.“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다른 이도 아닌 ‘박완서’의 말이었기에 더 수긍이 가고 또 그의 수백 편의 소설들 덕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병석에서 후배들의 병문안을 극구 사양하고, 별세하기 전에는 가난한 후배 문인들에게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말을 남겼던 시대의 어른. 미처 다 읽지 못한 ‘젊은작가상 심사 원고’가 선생의 곁에 놓여 있었다는 병실의 풍경은 너무도 많이 되뇐 탓인지 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본 것 같다.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 (중략) 선생님만큼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배 작가들이 저 말고도 참 많습니다.”(소설가 정이현의 편지 중에서) 너른 품으로 감싸 안아 줬던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른 아니 엄마의 자리에 있던 선생의 부음을 들었을 문단과 독자들의 상실감은 아직도 너무 크다. 선생이 기거하던 경기 구리시 아치울 마을의 노란 집에는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다. 자신의 사후에 집이 문학관이나 문학마을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박완서의 이름이나 유물의 전시가 아닌 오로지 작품으로만 후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작가의 유지였지만 작가 박완서를 기리는 후대의 갈망은 더 컸던 모양이다. 구리시에서 문학관 건립을 승인했고 착수 절차에 돌입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됐다. 그리하여 2009년 인창도서관에서 문을 연 박완서 자료실이 현존하는 유일한 박완서의 기념관인 셈이다. 박완서 자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은 서울대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선생의 모습이었다. 전쟁통에 그만둔 학교에서 훗날 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열기까지 선생의 삶의 면면들이 한눈에 펼쳐진 공간이기도 했다. 소설, 수필, 동화에 이르기까지 선생이 엄혹할 정도로 치열하게 썼던 흔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자료실 곳곳에 놓인 선생의 사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마음이 놓이는 장소였다. 다시 한번 선생의 소설을 펼쳐 보고 싶어지는 공간이었달까. 한 작가의 자료를 모아 둔 곳이 꼭 그가 살던 터는 아니어도 될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마음 한자리에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새겨 놓은 공간을 마련해 둔 것이니. 게다가 그 작가가 박완서라면 살아가는 내내 마음이 무너지고 다리가 꺾일 때마다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든든한 의자 하나 마련한 것과도 같을 터이다.우리에게는 박완서가 있었다. 손맛 좋아 밥을 두 공기씩 먹게 만들고 이야기를 잘 들려주어 밤마다 채근하듯이 그의 곁으로 모이게끔 하는.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박완서의 소설이 남았다. 종종 선생께서 돌아가셨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가 쓴 소설의 힘이 아닌가. 소설이라는 집의 가장 첫 번째 주인 같은 박완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가 만든 소설 속에서 상처받고 헤진 마음을 놓아두어도 되는 가장 큰 이유다. 엄마의 품에서는 그래도 된다. 소설가 이은선
  • “남색 코트? 그런 의미 아냐” 박근혜 사전투표에 쏠린 눈(종합)

    “남색 코트? 그런 의미 아냐” 박근혜 사전투표에 쏠린 눈(종합)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전투표 완료남색 외투 입고 나타나 ‘주목’“구치소 갈 때 입은 코트” 해명 박근혜 전 대통령이 5일 20대 대선 사전투표를 완료하면서 정치권의 관심이 쏠렸다. 특히 투표소에 남색 외투를 입고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자, 일각에선 더불어민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을 연상케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현재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인근 투표소에서 사전투표를 했다. 투표관리원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평소와 같은 올림머리가 아닌 묶음 머리에 남색 코트를 입은 단정한 차림이었다고 한다. 또 휠체어를 타지 않고 혼자 걸어서 투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여권 일각에서는 “남색은 영어로 딥블루”라는 주장이 나왔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페이스북에 “국민의힘이 어떤 논평을 낼지 기대가 크다”고 쓰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 측은 “그런 의도가 있던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박 전 대통령 측 유영하 변호사는 “예전 검찰 출석 때와 영장심사 출석 때 입은 코트와 동일한 것”이라며 “이 코트를 입고 구치소로 갔고, 따라서 옷 등 물품이 영치돼 있었다”고 설명했다.앞서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말 특별사면·복권으로 선거권이 회복돼 이번 대선에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최근 대구 달성군에 사저를 매입해 전입신고를 마친 상태이나, 선거인 명부 상으로는 투표지역이 서울로 분류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거주지와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는 사전투표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박 전 대통령은 퇴원일에 대국민 메시지를 내겠다고 예고했지만, 사전투표를 비공개로 진행하고 별도의 메시지도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선일 이후 퇴원하지 않겠냐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아직 박 전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 공식적으로 밝힌 바 없다.
  • 이재명 광화문, 윤석열은 부산서 사전투표

    이재명 광화문, 윤석열은 부산서 사전투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4일 각각 서울 광화문과 부산 남구에서 사전투표를 한다. 3일 민주당에 따르면 이 후보는 사전투표 첫날인 4일 오전 9시 광화문 인근 서울 중구 소공동 주민센터에서 사전투표를 한다. 이 후보는 당초 강원 속초를 찾아 사전투표를 할 계획이었지만 일정을 변경했다. 이날 발표된 야권 단일화로 선거 막판 표심이 크게 요동칠 수 있는 만큼 최대 승부처인 서울로 투표지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는 사전투표를 마친 뒤 강원 홍천·춘천, 경기 남양주, 서울 광진·강동을 잇달아 방문해 유세를 펼칠 예정이다. 윤 후보는 4일 오전 9시 예정대로 부산 남구 대연4동행정복지센터에서 사전투표를 한다. 이후 인근의 유엔기념공원에서 참배한 뒤 사하구·사상구·북구, 경북 경주와 경산 등을 잇달아 찾아 유세를 펼친다. 각종 논란을 의식해 공개 행보에 나서지 않고 있는 이·윤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김건희씨는 후보들의 사전투표에 동행하지 않고 따로 투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서울 종로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배우자와 함께 투표한다.
  • 돈 없으면 파주 살아?…미우새 탁재훈, 지역 비하 발언 논란

    돈 없으면 파주 살아?…미우새 탁재훈, 지역 비하 발언 논란

    방송인 탁재훈이 지역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있다. 지난 27일 방송된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는 이상민이 서울을 떠나 파주로 이사를 한 내용을 담았다. 문제는 이날 초대받은 탁재훈과 이상민의 대화 과정에서 나왔다. 탁재훈은 “이렇게 멀리 이사를 왔냐”라고 묻자 이상민은 "이 집이 전에 살던 집 월세의 반값”이라면서 “다시 서울로 상경할 때는 멋지게 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탁재훈은 “나도 고민이다. 언제까지 엄마 집에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털어놨고 이상민은 "여기로 와라. 내가 1층 쓸게. 형이 2층 써라”라고 제안했다. 문제의 발언은 이어진 대화에서 나왔다.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묻자 탁재훈은 "솔직히 말해 어쩔 수 없이 온 거지, 돈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결국 이상민은 “그러면 형은 서울에 집을 왜 못 얻냐”라고 묻자 탁재훈은 “이런 식으로 대화하면 결국 서로 상처밖에 더 주냐. 애초부터 서울하고 안 어울렸다"며 대화를 끝냈다. 해당 방송 이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탁재훈의 발언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곧 파주가 돈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비쳐진 것. 네티즌들은 "정말 불쾌한 발언으로 서울 이외 사람들은 다 가난하다는 이야기인가", "해당 지역 사람들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 특히 파주 토박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우리 고향을 비하한 탁재훈에게 사과받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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