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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값 여파 「탈도시」 급증/90년 인구이동조사

    ◎작년 9만명 서울떠나… 부산·대구도 감소/323만명이 다른 시도로 터전 옮겨 지난해 서울로 들어온 인구보다 서울을 떠난 인구가 9만1천명이나 많았다. 서울로부터의 전출이 전입보다 많았던것은 지난 86년 5천8백명의 전출초과를 기록한 이래 두번째이다. 부산과 대구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나타냈으며 도시인구의 농촌전입도 두드러지게 늘어났다. 이같은 현상은 서울·부산·대구등 3대도시가 심각한 인구포화상태로 집값이 비싸고 교통난이 심해짐에 따라 이를피해 「탈도시」현상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계청이 17일 주민등록을 기초로해 조사한 「90년 인구이동 집계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은 75만4천명이 이사해 들어왔고,84만5천명이 전출해 전체적으로 9만1천명이 서울을 빠져 나갔다. 서울은 80년대초반 5년간 연평균 11만7천명씩 전입초과를 보였고 지난 88년에는 18만9천명,89년에는 11만명의 전입초과를 기록했었다. 부산과 대구도 작년 전입인구보다 전출인구가 각각 3만6천명과 1천5백명이 더 많았다. 이는 출산에 의한 인구의 자연증가를 제외할 경우 3대도시 거주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읍·면·동의 경계를 넘어 이사한 사람은 총 9백45만9천2백9명으로 전체 인구의 22%를 차지했다. 지난해 인천과 경기도는 각각 11만7천명과 25만1천명의 전입초과를 보였다. 통계청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오는 인구가 서울주변의 인천·경기지역으로 몰리고 있으며,서울의 거주자중 일부도 점차 출퇴근이 가능한 인접 수도권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밝혔다.
  • 「90년 인구이동」분석/통계청 발표

    ◎인구이동률 22%… 일본의 4배/인천·경기·경남전입자 10∼20% 급증/이농인구,집값비싸 대도시 주변지역에 몰려/수도권전입자 호남출신이 33% 차지 지난 한햇동안 국민 1백명당 22명 꼴로 읍·면·동의 경계를 넘어 이사해 세계적으로 높은 인구이동률을 보였다. 통계청이 17일 발표한 「90년 인구이동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난해 인구이동률은 22%로 이는 이웃 대만(8.1%)이나 일본(5.3%)은 물론 노르웨이(4.1%)등 서구선진국의 인구이동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인구이동 개황◁ 지난해 읍·면·동의 경계를 넘어 이사한 총이동인구는 9백45만9천명으로 89년의 9백31만6천명보다 14만3천명이 늘었다. 이가운데 인구 1백명당 7.5명꼴인 3백23만1천명이 시도의 경계를 넘어 이동했고 인구 1백명당 14.5명꼴인 6백22만8천명은 같은 시도 안에서 이사했다. 이사한 사람들의 성비는 여자 1백명에 남자 1백3.3명 꼴로 남자가 더 많았다. ▷지역별 인구이동◁ 서울·부산·대구 등 3대도시의 전입인구는 서울 2백72만6천명,부산 76만2천명,대구 52만5천명으로,89년보다 각각 10.6%,3.7%,2.4%가 줄었다.반면 3대도시 인근지역인 인천·경기·경남지역은 전입인구가 89년보다 각각 20.2%,11.2%,10.4%나 늘었다. 이 가운데 같은 도시내의 동간 이동인구를 제외한 여타 시도로부터의 전입인구는 서울 75만4천명,부산 18만4천명,대구 13만9천명이다.이는 89년에 비해 서울 12.5%,부산,5.7%,대구 8.6%씩이 줄어든 것이다. 다른 시도지역에서 인천·경기·경남지역으로 이사들어온 인구는 89년에 비해 각각 23.1%,8.9%,9.4%로 전국 평균치 1.3%를 크게 앞질렀다.이같은 현상은 서울 등 대도시지역내의 집값이 비싸고 교통난이 심해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입이 점차 줄어드는 대신 대도시로의 출퇴근이 가능한 대도시 주변지역에 몰리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15개 시도 가운데 전입인구증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인천(23.1%)이고,전출인구증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서울(12.3%)이었다.특히 서울은 지난해 전입인구가 대폭 줄고 전출인구는 대폭 늘어나 출산에 의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서울 인구는 9만1천명이 줄어들었다. ▷시·도간 이동률◁ 전체인구중 다른 시·도로 이사해가거나 들어온 인구의 비율인 이동률(전입률+전출률)은 경기가 22 1%로 가장 높고 인천도 21.5%로 두번째로 높게 나타났다.서울은 15%로 경기·인천보다 훨씬 낮게 나타났다.이는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 지역의 인구이동이 극심한 반면 서울은 상대적으로 인구이동이 줄어드는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지역별 인구증감◁ 서울은 이사해들어온 인구보다 이사나간 인구가 9만1천명이 더 많은 전출초과 현상을 보였다.이는 지난 30여년동안 86년에 이어 두번째이다.이와는 대조적으로 인천과 경기는 각각 11만7천명과 25만1천명씩 전입초과 현상을 보였다.이도 역시 이농인구를 흡수하는 지역이 서울에서 수도권 외곽으로 바뀌고 있으며,서울로 이사온 인구의 상당수가 다시 서울을 벗어나 수도권 외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부산과 대구도 각각 3만6천명과 1천5백명의 전출초과 현상을 나타냈다. 전남은 전입인구보다 전출인구가 10만명이 더 많아 지난 수년간 최대의 전출초과지역의 자리를 지켰고 강원·충남북·전북·경북도 전출초과 현상을 보였다.그러나 수도권과 대도시를 제외한 농촌지역중 경남과 제주는 전입인구가 전출인구보다 많아 지난해 처음으로 전입초과 지역으로 바뀌었다. ▷수도권 인구이동◁ 수도권(서울·인천·경기)으로 이사들어오는 인구는 80년대초 81만명에서 점차 줄어들어 88년 79만5천명,89년 77만8천명,90년 74만8천명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 전입자의 전거주지는 전남이 전체의 15.9%로 가장 높고,충남(13.6%) 전북(12.8%) 강원(11.5%) 경북(8.9%) 충북(8.1%)의 순이었다.특히 전남북과 광주를 합친 호남권으로부터의 전입자는 전체의 33.2%를 차지했다. 또 서울전입자의 전거주지는 전남(17%) 전북(13.8%) 충남(11.9%) 강원(9.7%) 경북(8.9%) 부산(8.2%)의 순이며 호남지역으로부터의 전입 비중이 36%에 달했다. 서울과 수도권 여타지역간의 인구이동도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지난해 57만7천명이 서울에서 인천·경기지역으로,32만6천명이 인천·경기에서 서울로 각각 이사했다.이는 서울에서 인천·경기지역으로연간 25만1천명씩 방출되고 있는 셈이다.
  • 강군 아버지 출두/서울로 압송조사

    서울지법 서부지원 법정소란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서부지청 형사2부는 10일 광주지검에 자진출두한 고 강경대군의 아버지 강민조씨(49)를 서울로압송,강씨의 법정소란행위에 대해 철야조사했다.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강씨는 이날 하오 8시쯤 광주지검에 자진출두했으며 서울에서 내려간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구속영장이 집행돼 하오 8시35분쯤 서울로 압송됐다.
  • 자수한 김도현·이세윤씨 일문일답

    ◎“「오대양」조직 노출 우려 아내도 암장/고인들에 죄송… 박씨에 속은 것 억울할뿐 오대양 사건과 관련,신도들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뒤 이같은 사실을 숨겨오다 10일 자수한 당시 오대양 관리부 차장 김도현씨(38·무직·서울시 은평구 증산동)와 이세윤씨(45·운전사·동대문구 답십리동)는 『모든 것은 교주 박씨가 시키는 대로 했으나 출옥후 속았다는 것을 알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자수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또 『1명씩 자수 할 경우 자수 의사가 없는 다른 동료들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자수가 늦어졌다』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도현씨 일문일답◁ ­자수 동기는. ▲사건이 일어난 해인 지난 87년 8월 신도이자 채무자인 이상배씨(당시 54)부부를 폭행하고 채권포기각서를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가 집단 자살 사건이후인 같은해 12월24일 출소해 신문등을 보고 박씨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자수할 것을 결심했다.난 떳떳이 살고 싶었다. ­왜 이제와서 자수를 했는가. ▲당시 사건 관계자들이 개인적으로 자수할 경우 자수 의사가 없는 동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 우려돼 동료들끼리 만나 공동으로 자수하는 방안등을 상의하느라 늦었다. ­출소후 행적은. ▲그해 12월 출소한뒤 동료들 대부분이 서울로 생활근거지를 옮겼으며 나는 택시운전을 하며 다른 동료들과 만나 많은 것을 논의했다. ­당시 숨진채 발견된 사람들은 왜 죽은 것으로 생각하나. ▲우리가 사건 발생 이전에 3명을 살해해 암매장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드러날경우 오대양 조직이 공개되고 형사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공동 책임을 지기 위해 집단 자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현재의 심정은. ▲고인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며 박씨에게 속은 것이 억울할 뿐이고 후회스럽다. ▷이세윤씨 일문일답◁ ­자수 동기는. ▲암으로 숨진 아내를 사망신고 없이 암매장했다.이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으며 다른 동료들을 살해한 것도 역시 양심에 가책이 됐다.무엇보다 암매장한 아내를 양지 바른 곳으로 이장해 주고 싶었다. ­암으로 죽은 아내를 왜 암매장 했는가. ▲경찰에 사망신고를 하면 언론에 오대양 조직이 드러나는등 여러가지 문제가 우려돼 그랬다. ­현재 심정은. ▲고인들께 미안할 뿐이다.그동안 지은 죄과에 대해서는 달게 처벌받겠다.
  • 남북공동 「통일대행진」 추진/1천명씩 참석,국토종단·학술토론

    ◎대북교류 구체안 마련 지시/노 대통령 노태우대통령은 8일상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전향적이면서도 현실성있고 구체적인 대북조치들을 계속 강구해 나가도록 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정원식국무총리등 전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국무회의를 주재,미국과 캐나다방문결과를 설명하면서 이같이 지시하고 『동북아 질서 개편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의 과정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담당해 나가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발상의 전환은 물론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가야할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올가을 유엔가입을 계기로 우리외교도 이제는 통일후 한국의 모습까지도 염두에 두고 중장기적인 대응책을 강구해 나가야 할것이라고 말하고 『우리 모두는 통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인식아래 비록 분단은 주변국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제 통일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5일북에 제의 정부는 오는 8월15일부터 31일까지 남북한의 각계 각층 인사 각 1천여명씩이 참가,국토종단행군 통일기원제 학술토론대회 민족예술한마당축제 민속음식전시회 등의 행사를 벌이는 「통일대행진」을 남북공동으로 개최키로 방침을 세우고 이를 오는 15일 최호중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의 명의로 북한측에 정식 제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8일 『정부는 이를위해 이달 중순께 당국및 각계에 구성돼있는 남북교류추진협의회등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민관행사 준비위원회를 설치,행사참가단체및 인원을 조정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전민련·전대협등 재야단체의 소속원들 또한 개별적으로 참가를 신청할 경우 참가가 허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마련중인 「통일대행진」행사 계획에 따르면 남북의 행사참가자들은 먼저 8월15일 광복절에 판문점에서 남북공동경축행사를 연뒤 도보와 차량편으로 평량에 들어가 제1차 학술토론회를 갖은 다음 백두산까지 국토종단행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어 백두산정상에서 남북공동 제1차 「통일기원제」를 지낸후 행사참가자 전원은 다시 판문점을 거쳐 서울로 내려와 제2차 학술토론대회를 갖고 남한지역을 종단,제주도 한라산까지 등정해 제2차 「통일기원제」를 갖게된다. 남북의 행사참가자들은 끝으로 8월말 다시 판문점으로 가 민족예술한마당축제 민속음식전시회등 문화예술행사를 벌인후 31일 해산제를 갖는다.
  • 박종철군 아버지 구속 수감/「강군치사」 재판소란 관련

    ◎「계획적 난동」여부 집중조사/서울 자택서 붙잡혀 강경대군 치사사건 공판에서의 법정난동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서부지청 형사1부(유명건부장검사)는 7일 고 박종철군의 아버지이며 「민주화실천유가족운동협의회」(유가협)부회장인 박정기씨(62)를 붙잡아 특수법정소동혐의로 구속,영등포구치소에 수감했다. 박씨는 강군사건 공판이 끝난뒤 지난5일 광주에서 열렸던 고 이한렬군추모식에 참석하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와 7일 상오1시30분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3동912호 자신의 집에 들어가다 잠복하고 있던 검찰수사관들에게 붙잡혔다. 박씨는 지난4일 서울지법서부지원 113호법정에서 열렸던 강군 치사사건 첫공판에서 「민가협」과 「유가협」회원 20여명과 함께 『법정이 좁으니 대법정으로 장소를 옮겨라』고 고함을 쳐 소란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이어 휴정뒤 법관대기실로 밀치고 들어가려다 제지하는 교도관의 코를 부채로 내리치고 『재판부는 각성하라』는등 고함을 질렀으며 법대를 향해 부채를 던지는등 소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검찰은 박씨등이 그동안 시국재판을 찾아다니며 소란을 일삼아온 사실로 미뤄 4일의 난동도 우발적이 아닌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박씨와 함께 긴급구속영장을 발부한 강군의 아버지 강민조씨(49)등 4명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수사관들을 이들의 집과 연고지에 보내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검찰은 이들이 박씨와 함께 다니지는 않았으나 강군의 유가족과 「유가협」회원들이 이한렬군 추모식과 지난6일 분신자살한 박승희양의 49제에 참석했다는 정보를 입수,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중심으로 검문 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검찰은 8일까지도 이들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금명간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서기로 했다.
  • 윤화로 얼룩진 소서… 47명 사상/나들이길 일가 5명 참변도

    7일 하루 빗길교통사고로 일가족 5명등 모두 10명이 숨지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춘천】 이날 하오2시40분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남북2리앞 44번국도에서 강원5라3215호 그레이스승합차(운전자 이강준·51)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전주를 들이받아 함께 타고있던 최성순씨(56·양구군 양구읍 죽곡리4반)가 그자리에서 숨지고 운전사 이씨등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하오1시20분 춘천시 우두동 아시아농기계앞 국도에서 소양댐에서 시내쪽으로 가던 춘천택시소속 강원1바4502호 택시(운전사 한금오·29)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가로수와 시멘트옹벽을 들이받아 승객 이승범씨(44·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12)가 숨지고 운전사 한씨등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서산=최용규기자】 7일 하오3시30분쯤 충남 서산군 운산면독곡리앞 국도에서 서울3토1209호 엑셀승용차(운전사이정화·33·서울 동작구 흑석동)가 앞서 가던 타이탄트럭과 충돌,승용차에 타고 있던 안강웅씨(49·서울 서초구 반포동)등 일가족 5명이 그자리에서 숨졌다.이들 일가족은 이날 서해안화도리해수욕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하남=김동준기자】 이날 상오9시40분쯤 경기도 하남시 중부고속도로(서울기점 11.4㎞) 상행선에서 전남 광주를 떠나 서울로 가던 광우관광소속 광주5바8009호 관광버스(운전사 박종균·40)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5m 언덕아래로 굴러 승객 최계순씨(71·여)등 2명이 숨지고 운전사 박씨등 2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 노 대통령 귀로에 오늘 밴쿠버 기착

    【밴쿠버=이경형특파원】 노태우대통령내외는 5일상오 2박3일간의 캐나다 국빈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로에 올라 이날 낮(한국시간 6일새벽) 밴쿠버에 기착했다. 노대통령은 이날하오 숙소인 팬 퍼시픽호텔에서 이지역 교민대표들과 오찬을 나누며 격려했다. 노대통령은 이어 이날저녁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램총독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하고 6일하오(한국시간 7일상오) 서울로 떠난다.
  • “선행 37년”… 「오장동 냉면할머니」 별세

    ◎50년12월 월남… 실향민의 지주로 한몫/어렵게 모은 재산 장학사업등에 “선뜻” ○…「오장동 냉면 할머니」 한혜선씨(76)가 고혈압·당뇨등 숙환으로 2일 상오 별세했다. 한씨는 1·4후퇴 직전인 지난 50년 12월 고향인 함경남도 흥남에서 남편 문존덕씨(73년 작고)와 함께 월남,경남 거제에서 피란생활을 한뒤 54년 서울로 올라와 냉면장사를 시작해 함흥냉면의 독특한 맛을 선보였다. 한씨는 이듬해인 55년 중구 오장동 지금의 자리로 옮긴뒤 37년간 이북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주었고 이남 사람들에게는 별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씨는 돈과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틈만나면 양로원·고아원과 군부대를 방문하고 불우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주는등 선행을 베풀었지만 주위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조차 눈치채지 못할만큼 남모르게 해왔다. 한씨는 20년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문성준씨(44)등 2남2녀와 함께 냉면가게를 꾸려오면서 흥남시 장학회이사를 맡는등 실향민들의 정신적 지주로서도 한몫 해왔다. 한편 한씨는 박준병민자당의원이 육군 제3하사관학교장으로 재직할때 학교를 방문,후보생에게 냉면을 한그릇씩 돌리는등 인연을 맺기도해 박의원이 중구 신당2동 상가에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다. 발인은 4일 상오 장지는 경기도 모과면 서경리 가족묘지이다.
  • 죄의식 없는 “살인 경관”/백철우 사회부기자(오늘의 눈)

    한 경찰관의 총기난동사건으로 의정부 사고 현장은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았다. 서울북부경찰서 도봉파출소 소속 김준영 순경의 단 10분간에 걸친 광기가 4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면서 이처럼 피비린내나는 아수라장을 만든 것이다.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과 이웃주민들이 밤새 공포에 떨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27일 상오 1시쯤 인천 연안부두에서 검거돼 서울로 압송된 범인 김 순경은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들이 2년 동안이나 나와 우리 가족에게 준 고통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며 그는 자신의 행동이 당연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경찰관의 책무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로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불사할 수 있다는 말투였다. 전경과 순경으로 근무하면서 적어도 수십 차례 이같은 경찰관의 복무자세를 훈시받고 되뇌었을 법도 한데 그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물론 경찰관의 수가 14만명에 이르다보니 한두명 「중뿔나기」가 나올 수는 있다. 때문에 경찰수뇌부는 이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죄송스럽다』는 대국민 사과문과 함께 재발방지책을 마련,다시는 이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경찰관의 이같은 범행은 끊이질 않았음을 보아왔다. 이종국 치안본부장은 이날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타난 제반 문제점을 철저히 조사 분석해 모든 경찰관에 대한 근무기강을 대폭쇄신하고 총기관리 등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이같은 불행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임자들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제는 경찰수뇌부도 국민들이 믿지 않는 말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정말로 대책다운 대책을 세워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가야겠다. 아울러 해마다 8천명의 경찰관을 충원하면서 인성검사 등 자격심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경찰수뇌부에 묻고 싶다. 국민들은 어쩌면 이런 저런 이유로 경찰로부터 보호받기보다는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는지도 모른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마약추방협력 해마다 논의… 40개국 가입/유엔 마약류위원회란

    우리나라가 최근 정식회원으로 가입한 유엔 마약류위원회는 인류의 적인 마약류를 추방하기 위한 가장 권위있는 국제조직이라 할 수 있다. 이 위원회에는 미국 네덜란드 멕시코 등 40여 개 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마다 1차례씩 회의를 열어 마약류 퇴치를 위한 국제적 협력방안과 활동계획을 논의하고 결의안을 채택해 실천하고 있다. 올해 제34차 회의는 지난 4월29일부터 5월9일까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려 지난 71년 제정된 향정신성물질협약의 규제물질의 변경과 이 위원회의 최고결정기구로서의 기능강화방안을 논의했으며 국가별 마약류 조정기구의 창설 및 원료물질의 남용 규제강화 등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었다. 우리는 이 회의에 한명철 주오스트리아 공사를 단장으로 한 4명의 대표단을 옵서버 자격으로 파견했으며 회원국으로 가입하기 위해 외교활동을 벌인 끝에 이번에 정식 가입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정식회원국으로서 마약류의 규제와 예방을 위한 의안을 발의하는 권리를 갖게 되는 등 마약류 퇴치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문제에서 큰 발언권을 얻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정부는 이 위원회의 가입을 계기로 아시아·태평양지역 마약법·집행기관장회의와 마약류 감정전문가 워크숍을 서울로 유치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 과속버스 추락…47명 사상/경춘국도서/북한강변 아래로 30m 굴러

    【춘천=정호성 기자】 16일 하오 6시40분쯤 강원도 춘성군 서면 안보 2리 경춘국도상에서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삼용운수 소속 경기5차1007호 버스(운전사 황두식·50)가 간선도로에서 나오던 포니택시를 피하려다 30m 아래의 북한강 상류변 논바닥으로 굴러떨어져 박상돈씨(29·서울 중랑구 면목동 98의27) 등 5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이민종씨(27·서울 송파구 잠실동) 등 42명이 중경상을 입고 춘천시 인성병원 등 춘천지역 병원에 입원,가료중이다. 사고 차량은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하다 사고현장에서 택시를 피해 과속으로 앞지르기를 하다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사고를 냈다.
  • 모스크바∼서울 항로/상해대신 북경 기착/소,우리정부에 요청

    최근 소련의 아에로플로트항공사가 모스크바∼해상∼서울노선의 항로를 모스크바∼북경∼서울로 변경해줄 것을 우리 정부에 요청,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18일 교통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모스크바∼상해∼서울노선에 주 1회 취항하고 있는 아에로플로트는 중국 경유지를 상해에서 북경으로 변경해 북경에서 서해를 건너 바로 서울로 올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중국정부를 통해 우리 정부에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현재 중국의 민항총국에서 아에로플로트사의 항로변경 요청에 대해 가급적 허용해줄 것을 우리 정부에 요청하고 있으나 우리 정부는 아직 우리 항공기가 취항하지 않고 있는 새로운 항로를 개설하기는 어려운 입장임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모스크바∼상해∼서울 항공로가 모스크바∼북경∼서울로 변경될 경우 운항시간이 1시간 반 정도 단축된다.
  • 어머니와 아우를 죽이다니…/박대출 사회부기자(현장)

    ◎형의 패륜에 두 동생 망연자실 『형이 어머니와 아우를 죽이다니…』 어머니와 아우를 살해,암매장한 뒤 45일 동안 범행을 숨겨온 패륜아 이형길씨(31)의 두 동생(26·23)은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망연자실,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 동안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어머니와 아우가 어이없게도 집안 뜰에서 사체로 발견된 지 하룻만에 그것도 큰형이 범인으로 밝혀지자 동생들은 한 핏줄이라는 사실조차 부끄러운 듯 물기어린 눈으로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 이씨는 지난 3월29일 집 안방에서 『용돈만 달라고 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꾸짖는 어머니 이순애씨(54)를 목졸라 살해한 뒤 범행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생 영호씨(25)까지 죽인 뒤 집 앞마당에 파묻고는 45일 동안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이씨는 범행 후 집에서 40만원을 훔쳐내고도 모자라 다시 패물까지 들고 장모를 찾아가 『어머니가 주신 것이니 현금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20만원을 더 마련해 도피자금으로 탕진해왔다. 이씨는 이 돈으로 쏘나타 승용차를 빌려 부산에 있는 애인(23)을 불러내 경주·광주·목포·서울 등으로 함께 돌아다녔다. 돈이 떨어지자 서울로 올라온 그는 어머니와 아우를 파묻은 집 안방에서 태연하게 잠을 자며 지낸 날도 10여 일이나 됐다. 그는 국민학교만을 졸업,주유소종업원 운전사 노동일 등으로 떠돌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데다 성격이 난폭한 전과 3범이었다. 이씨가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동생들이 『혹시 형이 사고를 낸 것이 아니냐』고 의심,『실종신고를 내겠다』고 하자 오히려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는 범행에 앞서 어머니가 3년 동안 파출부 생활을 하며 어렵사리 모은 3백만원을 빼앗고 처가에서도 사업자금이란 명목으로 10여 차례 걸쳐 1천여 만 원을 뜯어내기도 했다. 끔찍한 범행을 하기 18일 전인 3월11일 첫아들을 낳아 가족들로부터 『이제는 열심히 살겠지』하는 기대가 컸었으나 이 기대감은 완전히 뭉개져버렸다. 이씨는 마침내 범행을 숨기기 위해 이사를 갔다가 오히려 이 때문에 범행이 들통났다. 이씨를 붙잡은 마포경찰서 형사계 임경규 경장(47)은 『이씨는 지금도 완전범죄로 끝날 수 있었던 자신의 범행이 동생들의 실종신고 때문에 발각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 29년전 버려진 20대 여인/“친부모 찾아주오” 호소(조약돌)

    ○…태어나자마자 포대기에 싸여 대전시의 어느 철둑길에 버려졌던 강성숙씨(29·여·성동구 성수2가동 5의8 착한목자수녀원)가 12일 서울신문사에 찾아와 『부모를 찾아 달라』고 애타게 호소. 62년 「김은선」이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와 함께 버려졌던 강씨는 한 목사에게 발견돼 대전성육원으로 보내져 6살 때까지 지내다 강 모씨 부부의 양녀로 입적한 뒤 양부모의 가정형편 때문에 다시 성육원으로 보내졌다가 천안의 신아원으로 옮겨 청수국민학교와 천안 서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고. 그 뒤 지난 81년 서울로 올라온 강씨는 친부모를 찾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하는 등 노력했으나 아직 부모를 상봉하지 못했다고 한숨.
  • “자기실현이 요즘 학생의 첫째 욕구”

    ◎“교수직 50년” 연대 원일한 박사/“40년대엔 사회적 책임의식 강했죠”/설립자의 손자… 개교 1백6돌 감회 깊어 지난 11일 창립 1백6주년을 맞은 사학의 명문 연세대의 학교법인 이사인 원일한 박사(74)에게는 올해가 참으로 뜻깊은 해이다.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원 박사는 1885년 4월5일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연희전문을 설립한 언더우드(원두우) 박사의 손자.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이 학교에 봉직하고 있으며 맏아들 한광씨(48)도 영문과 교수로 있다. 따라서 원 박사 집안 4대의 역사는 연세대학교의 작은 역사이기도 하다. 원 박사의 할아버지 언더우드 박사는 1915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이던 현재의 학교부지 일대의 땅 19만 평을 사들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초대 교장으로 학교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언더우드의 발음을 따 원두우라는 우리 이름을 썼다. 연세대 본관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 「언더우드관」으로 불린다. 원 박사의 아버지 원한경 박사도 이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34년 9월부터 41년까지는 제3대 교장으로 일했다. 원일한 박사는 1917년 10월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외국인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해밀턴대학에서 교육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원 박사는 40년 서울로 돌아와 연희전문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의 학생들은 고등교육을 받는 자부심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했으나 요즘 학생들은 자기실현의 욕구가 가장 큰 것 같다』는 것이 원 박사의 평이다. 그는 42년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으로 돌아가 해군대위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45년 전쟁의 승리는 제2의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또 하나의 기쁨을 주기도 했다. 『해방후 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이 이 학교에 머물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때 대학생들은 해방의 흥분과 조국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꼈으며가르치는 교수들도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원 박사는 41년 결혼,아들 셋을 두었다. 43년 맏아들이 태어나자 당시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한국의 빛을 받고 태어났다」는 의미로 한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으며 뒤에 아버지의 「한」자를 물려받기 위해 한광으로 고쳤다. 그는 한자도 한국의 상징인 한강과 통하기 때문에 한자와 마찬가지로 좋은 이름이라고 했다. 원한광 교수는 영문과에서 영미소설을 강의하고 있다. 둘째 윌리엄과 셋째 피터의 한국이름은 이 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용제 백낙준 박사가 영어이름의 원뜻을 살려 한웅과 한석으로 지었다. 흥분의 시대가 지나고 50년 6·25사변이 일어나자 원 박사는 다시 해군으로 복귀,현역장교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53년 휴전회담이 이루어지자 원 박사는 유엔군측 수석대표 통역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꿔 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원 박사는 이때부터 83년까지 전공인 교육학을강의했다. 75년 부인과 사별한 원 박사는 호주 출신의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화여대 종교음악과 원성희 교수(58)와 77년 재혼했다. 파란눈에 다부진 몸집을 가진 원 박사에게 『한국말을 얼마나 잘하느냐 』고 묻자 『책상 위에 주전자로 물을 부으면 물방울이 「또르륵」 굴러 간다』고 말하며 웃었다.
  • 대구의 5 어린이를 찾아줍시다/경찰,본격수사 착수

    ◎4일 TV방영 뒤 제보 20여건 「대구에서 실종된 다섯 어린이를 찾아줍시다」 실종 41일째인 대구 성서국민학교 김종식(9) 박찬인(10) 김영규(11) 조호연(12) 우철원(13) 등을 찾아주자는 전화가 언론사에 빗발치는가 하면 어린이보호단체 등 각계에서도 이들을 찾기 위해 적극 발벗고 나섰다. 노태우 대통령도 지난 5일 제69회 「어린이날」을 맞아 이들의 신변에 대해 크게 우려하면서 『모든 수사력을 동원해 실종어린이를 찾아내라』고 치안본부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치안본부는 이에 따라 서울시경과 대구시경을 중심으로 특별수사반을 짜 공조수사에 나섰으며 서울시경도 특수강력수사대 시경형사 2백10명과 27개 산하경찰서 형사 1개반씩을 빼내 모두 4백46명으로 수사전담반을 구성,본격수사에 나섰다. 서울시경은 이날 실종된 이들 대구 성서국민학교 어린이들이 지난 4일 TV전화를 통해 『서울에 있다』고 소재를 밝힌데 이어 『인상착의가 비슷한 소년들을 서울시내에서 보았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르고 있는 점을 중시,이들이 불량배들에의해 서울로 납치돼 껌팔이 등의 강요된 생활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어린이들의 행방을 찾고 있다. 이들의 실종사건이 지난 4일 TV로 생방송된 뒤 이 어린이들과 비슷한 소년들을 시내버스·지하철 등에서 보았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4∼5일 이틀동안에만도 20여 건이나 접수됐다. 김금심씨(46·여·서울 관악구 봉천3동)는 『지난 4일 하오 8시10분쯤 14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 용산시외버스터미널 근처를 지날무렵 버스 안에서 신문을 팔던 소년이 TV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대구 실종 어린이들 가운데 조군과 생김새가 비슷해 「집이 어디냐」고 묻자 「대구 당이동」이라고 대답했다』고 제보했다. 경찰은 이밖에도 4일 하오 3시쯤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옆 한 식당에서 초콜렛을 팔던 소년 2명이 실종된 김영규·박찬인군과 인상이 흡사했다는 제보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어린이들이 대구에서 불량배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된 뒤 구걸,껌팔이 등 이른바 「앵벌이」 노릇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 국회회담 준비접촉 합의/IPU대표단/귀경 평양총회 결과 보고

    ◎채문식 의원,친척 6명 상봉 평양에서 열린 제85차 국제의회연맹(IPU)총회에 참석하고 5일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돌아온 국회대표단은 6일 박준규 국회의장을 방문,평양총회의 결과 등을 보고했다. 이에 앞서 국회대표단은 5일 낮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최호중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과 송한호 통일원 차관 등 우리측 관계자들의 영접을 받았다. 박정수 국회대표단 단장은 평화의 집에서 발표한 귀환성명을 통해 『우리 대표단은 평양에 체류하면서 IPU총회에 참석,회의 의제에 대한 토의는 물론 각국 대표들과 세계평화 및 협력을 위한 문제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북한측 IPU대표단,국회회담관계 북측 대의원들과 두 차례 만찬을 갖고 남북한간의 여러 가지 현안과 대화 재개문제 등을 폭넓게 협의하면서 우리측 입장을 밝혔다』고 말하고 『특히 4월29일 김일성 주석이 주최한 금수산의사당 만찬에서 김 주석과 인사를 나누며 남북 정상이 조속히 정상회담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국회대표단 고문이자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 수석대표인 채문식 의원(민자)은 『4일 밤 11시 북측 대표단장인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이 숙소로 찾아와 예정에 없던 단독면담을 갖고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의 재개문제를 비롯,남북관계 전반에 걸쳐 1시간여 동안 폭넓은 논의를 가졌다』고 밝히고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의 구체적인 재개일자는 정하지 못했으나 빠른 시일 안에 회담을 재개한다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채 의원은 평양체류 기간중인 지난 1일 고인이 된 6촌동생 채우식씨의 딸 경애씨(평양예술단 무용지도원)을 비롯,채훈식(63·함흥경공업 원장),채범식씨(60·황해도 안악군 협동조합과장) 등 10촌형제 3명,범식씨의 아들 희룡씨(대학연구원) 현식씨의 딸 희옥씨(유치원 선생) 등 친척 6명이 함께 주암산초대소로 찾아와 상봉했으며 우리 대표단이 서울로 귀환하기 전날인 5일에도 숙소로 찾아와 환송인사를 했다고 밝혔다.
  • 북한 「핵」협정 촉구/IPU,결의안 채택/평양총회 폐막

    【평양=국회 공동취재단】 국제의회연맹(IPU) 제85차 평양총회는 4일 이사회와 총회 본회의를 잇따라 열어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을 맺지 않은 국가들에게 조속한 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 등을 채택하고 폐막됐다. 북한의 핵안전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것을 골자로 한 「모든 국가의 안전보장과 군축과정에서의 신뢰구축조치 강화를 위한 핵무기 및 기타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의 필요성」에 대한 결의문은 『모든 국가들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을 체결해야 하며 가능한 한 빨리 무조건적으로 이 협정을 체결토록 촉구한다』고 밝혔다. 북한측은 이 결의안이 문안기초소위와 정치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 회부될 때까지 결의문에 들어 있는 「무조건적」이라는 표현에 이의를 계속 제기했으나 정재문 의원(민자)을 비롯한 우리측 대표단과 다른 회원국들의 반대로 이 표현이 결의문 안에 그대로 포함됐다. 이날 총회는 제86차 총회 개최지를 칠레의 발파라이소로 결정했다. 국회대표단은 이날 금강산 관광을 마치고 평양으로 되돌아오는일부 대표단 일행과 합류,5일 낮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귀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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