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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이후 인구변화(대한민국 50년:19)

    ◎49년 첫조사 20,188,641명… 96년엔 갑절로/55년 간이조사 전에는 추계… 정확성 의문/6·25전쟁기간 150만명 희생… 사망률 4%/60년대부터 공업·도시화 영향 대규모 이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49년 5월1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회 인구조사’였다.이 때 인구는 2천18만8천641명으로 파악됐다. 한국전쟁 중인 50년과 51년에는 보건사회부의 발표가 남아있다.50년 2천35만6천명,51년 2천44만1천명이었다.그런데 이 인구조사 발표는 실제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49년의 조사를 토대로 각도 도지사의 보고에 의한 추계였다. 52년과 53년에는 내무부의 추계가 남아있다.52년 2천52만6천명과 53년 2천1백54만6천248명이었다.53년의 인구가 전년도보다 1백만명 이상 급증한 것은 배급을 늘리기 위한 유령인구 때문으로 추측된다.54년 보건사회부의 인구통계는 2천1백91만3천명이었지만 이도 실제조사가 아니라 전년도에 기준한 추계이다.결국 정부가 발표한 50년부터 54년 사이의 인구 수는 정확하지 못하다. 55년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상주인구가 2천20만2천256명이었다.이는 현역 군인과 형무소 수형자 등을 뺀 숫자이다.한국전쟁 시기의 인구 증가율은 1.1%였다.그러나 한국전쟁후 베이비 붐이 일어 55년 이후 66년까지 인구 증가율은 2.8%를 기록했다.그러다가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된 66년부터 85년까지는 1.7%로 떨어졌다. ○증가율 2.8% ‘베이비 붐’ 정부 수립후 인구의 변동은 경제문제와 가장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1인당 국민소득은 44.5달러에 불과했다.따라서 국민총생산의 5분의 1에 달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액 1억7천9백59만3천달러는 기아를 막기 위한 것으로도 부족했다.한국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인구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생산시설은 ‘저고용­저소득­저고용’의 악순환 고리를 이어갔다.폭발적인 인구문제의 해결은 60년대 경제개발을 통한 지속적 성장 밖에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인적 피해로 인한 가장 직접적이고 충격적 결과는 무엇보다도 특이한 인구구조를 형성시켰다는 점이다.우선 한국전쟁은 일시적 사망률의 상승과 출생률의 저하를 초래했다.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 손실 중 사망자는 약 1백만∼1백50만명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한 인구의 사망률은 1천명당 36∼47명,즉 4% 안팎으로서 평소 한국인의 사망률인 평균 2%의 2배나 됐다.이같은 현상은 60년과 66년의 인구 센서스에서 각각 30∼49세 및 35∼49세의 연령층에서 과부가 많은 것으로 조사된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반면 전쟁기간 동안의 0∼9세의 영아 및 아동의 사망자 가운데는 남아보다 여아가 더 많았다.이것은 새로 태어난 신생아들과 아이들의 경우 전통적 남아 선호사상으로 인해 남아를 되도록 보살핀 때문으로 사회학자들은 보고 있다. ○45만∼72만명 월남 추정 전쟁기간 중의 출생률은 극도로 저하돼 같은 기간의 높은 사망률과 더불어 인구의 절대 감소현상을 초래했다.이때의 출생률은 평상시보다 1%나 낮아졌으나 인구 증가율이 당시에는 1년에 1천명당 23명으로 늘어났었던 데 비해 전쟁기간 중이었던 49∼55년 사이에는 연평균 1천명당 11명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인구변동의 또다른 충격은 인구의 대규모 이동현상이다.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월남인구의 추정치는 45만∼72만명에 이르고 있다.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강제로 납치되거나 그 밖의 이유로 넘어간 이들의 수도 대략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인구이동이 시작된 것은 60년대부터인데 60년대 이후의 인구이동은 물론 공업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화의 결과였다. 61년 이후 인구 분포에 있어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지역은 수도 서울이었다.서울은 정부수립 직후인 49년에는 전인구의 7.1%를 차지했고 11개 시·도 중 인구 수로 따져 9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75년에는 이미 전인구의 20%에 해당하는 6백90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또 오늘날에는 전인구의 22%가 넘는 1천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 ○86년 도시인구가 65% 그러나 서울과 부산,그리고 경기도를 제외한 모든 도는 전국 인구에 대한 구성비에 있어 감소 추세를 보였다.인구이동을 도시와 농촌으로 구분하면 도시인구의 비율은 55년 25%에 불과했던 것이 80년에는 57%,86년에는 65%에 달해 도시인구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70년 이후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어느 정도 둔화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농촌인구가 서울 이외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특히 마산 울산 포항 등의 새로운 공업도시와 수도권의 성남 안양 수원 등에는 우리나라 전도시의 평균 인구증가율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정부수립후 49년 첫 인구조사에서 남한의 인구는 2천18만8천여명이었으나 96년 조사된 인구는 4천6백43만4천여명으로 50년동안 두배로 불어났다. ◎日 전쟁 동원 인구 해방후 엄천난 逆유입/日帝와 美 군정 시기의 인구/도시주변 戰災民으로 반공체제 정착 큰 역할/46년 1,936만명 조사/이듬해 국민등록 실시 한국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특히 37년 이후의 전시 총동원체제 아래서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경험했다.가혹한 수탈로 인해 농촌을 떠나 일본과 만주 등으로 이주했다.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 기간동안 이른바 노무 동원 또는 강제 징용 등에 의해 북한의 광공업지역과 일본으로 동원됐다.39년에서 해방 전까지의 기간에 국내외에 걸쳐 전시체제와 관련한 유동인구는 약 7백만명으로 45년 현재 국내 총인구 수의 약 30%에 달한다는 사실은 인구이동 규모의 방대함을 말해 준다. 일제 말기의 인구이동 현상은 해방직후에는 역으로 대규모의 인구유입 즉 귀환을 초래했다.여기에다 남북 분단의 체제대립적 성격을 반영하는 이른바 월남민들이 발생했다.해방 직후 남한사회는 단기간 안에 엄청난 인구유입을 경험했다. 이는 해방정국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첫째는 유입인구가 자신의 성장지역인 농촌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도시지역의 경제활동 인구로 흡수되지도 못하면서 상당수가 도시 주변에 전재민(戰災民)으로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이는 해방정국의 사회적 불안정성과 긴장을 높이는 주요한 변수가 됐다. 둘째는 유입인구가 계급적 성격과 사회적 경험 등에 따라 비교적 뚜렷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정치적 격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해방 직후 월남민들이 우익세력의 선봉대였으며 남한사회가 반공체제로 귀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역사가들이 입증하고 있다. 해방 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미군정청에 의해 46년 8월25일 실시되었다.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은 제외됐다.이 통계는 44년 조선총독부의 국세(國勢)조사 인구에 미군측이 파악한 식량배급 인원과 외부로부터의 유입인구를 고려해 작성됐다.이 때 조사된 남한 인구는 총 1천9백36만9천270명이었다.따라서 이 통계는 실제 인구수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미군정청은 이어 47년 국민등록을 실시했다.등록 인구는 총 1천9백88만6천234명.다음해 다시 실시한 국민등록에서는 2천2만7천393명의 인구가 등록됐다.미군정청이 실시한 국민등록은 의식주 및 생활 필수품의 확보와 배급계획의 수행,앞으로의 선거 등을 대비한 것이었다.
  • “50년전 선거는 애국심·열정의 축제”/제헌의원 증언

    ◎의원 좌석도 무작위 추첨… 지역성 배제/6·4 선거 금품·흑색선전의 장 되지말길 209명의 제헌 국회의원 가운데 생존자는 金仁湜 제헌동지회장(86)과 元長吉 부회장(87),閔庚植(79)·李錫柱(95)·鄭濬(84) 전 의원 등 5명이다.제헌의원들은 청와대 부근 효자동의 한옥집을 개조한 ‘제헌회관’을 사랑방 삼아 모임을 갖고 있다. 金회장과 元부회장 등 제헌의원들은 올해 5·10 선거 50주년을 맞아 국민들이 한번쯤 건국과 선거의 의미를 돌이켜보기를 간절히 희원했다. 金회장은 “50년 전의 제헌의원 선거는 애국심과 열정으로 가득찬 축제”였다고 회고했다.해주고보 재학 당시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됐던그를 경기도 옹진에 사는 청년 2명이 찾은 것이 48년 3월.옹진과 특별한 인연도 없는 그에게 두 청년은 출마를 권유했다.동경 유학 경험과 해방후의 반공 활동을 주목한 것이다.金회장은 “당시 가진 것이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면서 “명동에서 금은방을 하는 친구에게 5만원을 빌려 옹진으로 내려갔다”고 말했다.5만원 가운데 3만원으로선거 벽보를 만들고 청년들의 도움으로 군내 8개 면을 돌며 유세전을 벌였다.그는 “황무지 위에 민족의 집을지어보겠다”는 호소만으로 군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누가 더 애국심을 갖고 있느냐가 당시 유권자들의 선택 기준이었던 것이다.이후 선거양상이 회수를 거듭할수록 금품과 흑색선전으로 점철되자 金회장은 한없는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元부회장은 고향인 강원도 강릉갑에서 출마했다.강릉 지역은 강릉 崔씨와 강릉 金씨의 집안이 번성한 지역이었다.그러나 당시 선거전은 씨족의 관념을 훨씬 초월했다고 元부회장은 회고했다.오로지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공감대였다고 한다.평양의전을 졸업하고 강릉도립병원에서 6개월간 근무하다 “일제의 녹을 먹기 싫다”며 공장을 운영하던 그가 당선되자 주민들이 8만원을 모아 서울로 보냈다. 元부회장은 서울에 올라온뒤 여관방에서 지내며 의정활동을 했다.元부회장처럼 어렵게 여관 생활을 하는 의원이 많다는 사실을 안 李承晩 대통령이“적산 가옥을 하나씩 나눠주라”고 했으나,제헌의원들은 “그걸 받으면 일제와 다를 바 없다”며 거부했다. 元부회장은 “당시 제헌의원들은 지역색을 없애기 위해 좌석도 무작위 추첨으로 섞는 등 국민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고 돌이켰다.元부회장은 “현재 정치하는 후배 의원들은 무엇보다 먼저 지역갈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래야 통일도 할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金회장과 元부회장은 외환위기에 따른 경제난이 가속화되고,6·4 지방선거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선거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고 제안했다. 李哲承씨의 삼촌인 李錫柱 전 의원은 95세의 고령인데도 이따금씩 제헌회관을 찾고 있으며,閔庚植 전 의원은 카나다에 이민간 아들 집에 주로 머무르고 있다.鄭濬 전 의원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김포 자택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 오늘 노동절/종묘·대학로 대규모 집회

    1일 제108주년 세계노동절을 맞아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 민주노총은 집회를 서울로 집중시킨다는 계획아래 소속 조합원 1만5천여명이 1일 하오 2시쯤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1시간여동안 ‘제108주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및 ‘고용안정 쟁취와 민중생존권 사수대회’를 가진 뒤 종로3가에서 부터 광교­을지1가­명동성당 앞까지 인도를 따라 행진할 예정이다. 전국금속노련 조합원 3천여명과 전국건설노련 조합원 1천여명도 이날 낮서울 종로구 대학로와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앞에서 각각 결의대회를 갖고 민주노총 집회가 열리는 종묘공원으로 집결할 계획이다. 서울경찰청은 30일 “집회 참가자들이 한꺼번에 도심으로 몰려 교통혼잡이 예상된다”며 승용차의 도심 통행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경찰은 행진 코스로 예정된 서울 도심 교차로 40군데에 교통경찰을 배치하고 우회로 14군데에 안내표지판을 설치,우회로 이용을 유도하기로 했다.
  • 훈할머니 영구 귀국길에/어제 프놈펜 떠나

    【프놈펜 AFP 연합 특약】 일본군 위안부로 캄보디아에서 53년간을 보내다 지난해 혈육을 되찾은 훈할머니(한국명 李南伊·73)가 영구 귀국을 위해 30일 프놈펜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훈할머니는 이날 캄보디아의 가족 등 70여명의 프놈펜소재 한국 교민들의 전송을 받은후 서울로 향했다.훈할머니는 지난해10월 한국국적을 회복했으며 이달초 캄보디아정부의 국적 말소조치에 이어 한국대사관의 비자 발급 등의 귀국 수속을 밟아왔다. 경남 마산이 고향인 훈할머니는 지난 43년 일제에 의해 위안부로 캄보디아에 끌려온 뒤 캄보디아에 잔류해 왔다.
  • 8순 교포 10억땅 장학기금으로

    ◎LA거주 李周永 할머니 서울 구세군에 헌납/LA거리 깡통모아 한인학생에 장학금도 “머리는 좋지만 돈이 없어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는 학생들을 돕는 것이 평생의 바람이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80대 할머니가 10억원대의 땅을 청소년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22일 하오 3시 서울 광화문 구세군 대한본영 사령관실에서는 ‘만영장학기금’ 기증식이 열렸다.이 자리에서 李周永 할머니(87·미국 LA거주)는 고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재산인 충남 아산시 배방면 공수리와 북수리의 임야 과수원 등 2천8백여평을 구세군에 헌납했다. 李 할머니와 남편 鄭씨는 1남5녀를 키우면서도 평생 장학사업을 해왔다.鄭씨는 일제 때 충남 천안시에서 이발업을 하면서 “민족정기를 잃어서는 안된다”며 청소년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다 적발돼 3년여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한국전쟁이 끝난뒤에는 서울로 올라와 중앙대와 고려대 구내에 이발소를 차려 생활하면서 틈틈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다. 李할머니 부부는 지난 80년 장녀 부부가 사는 미국 LA로 건너간 뒤에도 길거리에 버려진 깡통을 주워 모은 돈으로 매년 한인학생 2명에게 1천달러씩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LA 교민들은 10평 남짓한 노인아파트에 세들어 살면서도 깡통을 줍고 매달 나오는 정부보조금 610달러를 아껴 장학금에 보태는 李 할머니를 ‘깡통 할머니’로 부른다.
  • 자금부담 적고 믿을수 있고…/주공아파트 뜬다

    IMF 여파로 부동산시장도 예외없이 한파를 겪고 있지만 향후기대되는 정부의 부동산시장 부양책 등을 감안하면 지금이 바로 주택에 투자할 적기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즉 올해 주택공급량이 상당히 줄어 2∼3년 후에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것으로 보이는 데다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시장 부양책으로서 대폭 완화된 주택공급규칙이 5월부터 시행될 예정이고 취득세 등록세 등 부동산 거래세의 격감,임대주택사업 등록요건을 현행 5가구에서 2가구로 줄이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어 부동산경기가 현재보다는 살아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자금 부담이 작고,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은 데다 무엇보다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주공아파트가 최적의 주거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요즘 뜨고 있는 미분양지구와 신규공급 예정지구의 주공아파트를 소개한다. ◇양주 덕정=전체 건설호수인 9천522가구중 지난해 12월에 1천732가구를 공급했으며 현재 500가구에 대해 선착순 분양중이다.경원선 덕정역에 인접해 청량리에서 양주를 경유,동두천까지 전철화되는 2001년에는 서울의 동북부 지역 및 도심으로의 접근이 용이하게 될 전망이다.단지 외곽으로는 의정부에서 동두천을 잇는 6차선 우회도로가 개통될 예정이다.평당분양가는 2백80만∼2백90만원선.3416­3561∼3. ◇시흥 시화=총 3만여가구가 들어서는 대규모 단지로 99년에는 서울∼안산간 전철이 단지 근접 군자역을 거쳐 정왕역까지 연장 운행될 예정이어서 서울로의 출퇴근이 한결 수월해질 전망이다.인근에 오이도 대부도 등이 서해안관광단지로 개발되고 특히 주변에 반월공단이 있어 임대수요가 만만치 않다.대금 납부조건이 대폭 완화돼 적은 부담으로 임대주택사업을 하기에 좋은 투자대상지이다.(0345)410­0380. ◇춘천 퇴계=서울 잠실지구와 맞먹는 크기인 34만평 규모로 총 1만3천여가구가 들어서 있다.20평형은 민간아파트의 옵션품목인 거실장 식기건조기 비디오폰과 식탁 등이 기본으로 채택돼 마감재 수준이 높고 가격 또한 평당 2백70만원 선이어서 젊은 층과 임대사업자에게 인기가 높다.장기저리의 국민주택기금이 융자되고 대금납부조건도 완화돼 자금부담이 한결 가벼워졌다.(0361)262­8075∼6. ◇부산 당감=전용면적 15평 18평 25평 등 총 1천967가구를 지난 11월에 분양한데 이어 잔여가구를 분양중이다.단지내에 동양초·중학교가 신설될 예정이고 인근에 국제중·고교가 들어선다.또 신라대 경남전문대 등을 비롯해 부산시립도서관이 가까이 있어 일급 교육지대로 손색이 없다.백양산 터널,동서고가도로,김해공항,구포역 등 주요 교통시설과 연계가 편리한 교통여건을 구비하고 있다.(051)891­6767∼8. ◇청주 분평=청주 남부권의 핵심 개발지역으로 26만평 규모에 총 8천3백가구가 들어서 있다.인근 미평동에 시청이 들어서는 등 행정타운이 조성될 전망이고 지구 내에 상업용지 42필지,단독주택용지 117필지 등이 잘 정비돼 지구내 상권형성이 활성화될 전망이다.중도금이 2회로 줄고 계약금 비율도 대폭 낮췄다.(0341)295­4388. ◇전주 송천=단일 단지로는 전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총 2천여가구가 건설된다.송천대로 및 동부순환도로 등 주요 간선도로로 익산과 군산,호남고속도로와 연계성이 뛰어나며 전주 23공단과는 승용차로 7분거리이다.단지내 초등학교가 개설되는 등 각종 부대복리시설이 들어서고 용적률이 170%로 충분한 녹지공간이 확보돼 편의성과 쾌적성이 높은 전원형 주택단지이다.(0652)227­9889. ◇화원 명곡=대구시 화원읍 명곡리 일대 10만4천여평에 1,2차로 총 4천200가구가 건설된다.단지주위가 그린벨트 지역으로 비슬산이 감싸고 있으며 명곡천과 천내천이 흐르는 쾌적한 주거단지이다.서남쪽 6㎞지점에 1백만평 규모의 첨단전자 산업단지인 무공해 위천공단이 조성될 예정이고 서부종합터미널의 이전이 계획돼 있어 무한한 발전 가능성를 갖춘 지구로 꼽힌다.(053)581­0404.
  • 현대무용가 安信姬(이세기의 인물탐구:166)

    ◎섬광 폭죽인듯 폭발하는 춤사위/대한민국무용제서 대상·개인연기상 등 휩쓸어/‘지열’로 일 국제페스티벌 딛고 아시아 스타 浮上 스포트라이트속에 정지된 安信姬의 포즈는 ‘그 자체가 춤의 시(詩)’라고 할 수 있다.신체의 사선(斜線)을 축(軸)으로 삼아 아이키도 돌기며 바운징으로 그가 돌아가야할 ‘길’에서 배회하고 ‘섬과 섬사이’를 떠돌면서 고뇌하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불꽃같은 감성으로 춤추어 낸다.‘춤은 춤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는 그는 공연때마다 ‘무진장의 에너지를 폭죽처럼 터뜨리고’‘내쏘듯 날카로운 섬광’을 무대중앙에 흩뿌리기도 한다.안신희란 존재는 이미 ‘춤과 사색,행위의 철학’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무용가이다.어느때는 ‘조롱에 갇힌 새’,어느때는 ‘이 세상의 모든 자유를 지닌 해방감’에서 단순한 극과 극이 아닌,중용의 조화를 얻기 위한 내심의 춤을 구축하기 때문이다.‘춤’은 그의 ‘숙명’이자 잠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천부의 인연으로 그는 언제부턴가 ‘춤의 심연’에 깊이 빠져버렸다. ○“춤은춤으로 보여준다” 그가 만든 춤중에서 특히 관객의 시선을 끈 것은 지난 83년 일본 현대무용협회와 코파나스회가 공동주최한 제1회 국제 현대무용페스티벌에서 춤춘 ‘지열(地熱)’을 들 수 있다.‘지열’은 서구적인 차별성과 한국적인 특성을강조한 작품으로 춤추고 났을 때의 무용수는 한바탕 굿판을 끝낸 신들린 무녀(巫女)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긴 박수소리와 함께 그가 도취에서 깨어나자 일본 매스컴들은 그를 일약 ‘아시아의 신데렐라’로 부상시켰고 아사히신문과 주간‘아사히 저널’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신비로운 무대’제하로 ‘이번 축제에서 오늘의 춤을 보여준 것은 객석에 시종 싸늘한 긴장을던진 안신희의 지열이 단연 압권’이라는 평을 보냈다. ‘지열’을 전환점으로 그는 다시 대한민국 무용제에 ‘섬’으로 도전했고 시인 정현종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구절과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테마로써 ‘섬은 다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섬의 이상향을 역동적으로 풀어나갔다.그리고 그는 더이상 여러그룹속의 안신희가 아닌 대한민국 무용가로 떠올랐다.무용인 최대의 영예인 대상·개인연기상·미술상을 한꺼번에 수상하는 과정에서 평론가 박용구 조동화 김영태씨는 ‘뛰어난 리듬감각과 문학적 작품성은 올해 무용계가 얻은 최대의 수확’임을 전제,‘스타성이 있는 현대무용가’로서 ‘박력과 자기춤에 몰입하는집중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며 ‘자기 욕심을 포기할줄 모르는 안무가’로평했다. ○활화산­불생의 무용 안신희는 전남 구례에서 양조장과 정미소,과수원을 경영하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어릴때는 부친 安基浩씨를 따라 풍광이 수려한 지리산에 오르거나 섬진강 지류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춤의 흐름을 몸속에 싹 틔울수 있었다.초등학교 5학년때 집안이 서울로 이사,그때까지는 ‘장래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으나 배화여중때부터 춤추기 시작하여 ‘악바리’‘연습벌레’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춤에 대한 강한 집념을 불태웠다.그때도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포즈에 한치의 흔들림을 용납하지 않아 이완과 수축,스피드와지속이라는 범위속에서 반드시 명확성과 평정성 민감성을 끌어냈고 ‘완벽’이라는 해답을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첫무대는 74년 스승인 육완순교수가 안무한 ‘슈퍼스타’다.‘늘씬한 키에 쭉뻗은 몸매,아름다운 외모가 풍기는 이지적인 분위기’로 그는 다음해엔 1개월간 미국공연,83년까지 유럽순회공연에 합류했다.그는 크거나 작은 어떤무대도 겁내지 않는 무대체질이 천성이기도 하다.한때는 알렉산더 고두노프의 예술성과 테크닉,극적인 춤의 특성에 매료되었고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적 카리스마,마곳 폰테인의 지고지순한 삶을 선망하면서 직관적인 선택과 엄격한 훈련으로 불균형과 비대칭,현대생활에서의 불확실성과 다양성을 은유적으로 부합시키는 무용구조를 성립해 나갔다. 그의 무용의 길은 한동안 탄탄대로 였으나 대학 3학년때 부친의 사업실패로 대학원진학을 앞두고 고향인 구례에 칩거한 적이 있다.그러나 ‘무용의 길은 너무 멀다’는 것과 ‘예술가는 어려움을 이길줄 알아야만 거듭난다’는뼈아픈 경험끝에 무용없이는 ‘공기없이 사는 것처럼’ 무의미하다는 결론아래 한때는 밤낮없이 기도에 매달려야 했다.끝내 ‘하나님이 대로(大路)를 열어주실 것같은 강한 암시’를 받았고 그 시절에는 적선동에 방한칸을 얻어 신촌까지 걸어다니면서도 다시 ‘춤출수 있다’는 기쁨과 샘솟는 창작의지로 창작무용들을 얼마든지 만들어냈다.‘교감’‘13월의 여행’‘청동무늬’‘전설’등은 그때의 산물이다. ○미­유럽순회 공연도 원로 평론가 박용구씨는 ‘안신희는 마치 불을 보면 뛰어드는 나비처럼 그의 춤은 자신의 몸을 사르는 활화산의 무용이자 불새의 무용이며 그의 춤에접하면 고압선에 감전된듯 강한 전율을 느낀다’고 평한다.최근의 그의 춤은 무르익은 성숙을 보이면서 아무런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상 최대의 자유를 춤으로 구조화하는 시기다.객석의 애증의 그림자마저 읽게된 그는 자연과 문화와의 경계선을 추구하면서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처럼 더높이 더멀리 날기 위한 모든 과정을 뛰어넘고 있다.실제로 그의 무용언어는 연극적 대사가 느껴지는 절규와 경악과 유기적인 삶의 풍경을 흐르는 강물처럼 표현해 낸다.가족은 그의 무용적 삶을 이해하는 부군 韓基天씨와 아들 누리(12살)가 있다.오늘의 한국무용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안신희가 이룬 성좌는 누구보다 밝고 극명하다.한때는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슬픈’ 희비애락에 침몰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몸속으로부터 솟구치는 득의의 춤을 추게 되었고 쏘는듯 날카로운 춤의 빛줄기는 관객의 가슴에 언제라도 진한 감동을 던져준다.그는 자기 세대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는 춤꾼으로서 지금부터가 ‘안신희 무용’을 위한 비상(飛翔)직전의 출발선상에서 고고하게 서있다. ◇연보 ▲1957년 전남 구례출생 ▲1974년 육완순무용단 ‘슈퍼스타’출연 및 미국지역순회 공연 ▲1983년 안신희 무용발표회,육완순무용단 ‘슈퍼스타’유럽순회 공연 ▲1984년 이대 교육대학원졸업,프랑스 소르본대학 무용과수업 ▲1992년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과 레닌그라드국립발레단 합동공연 ‘만가’출연(소련 모스크바·레닌그라드) ▲1993년 대전 EXPO개막축제안무 ▲1996년 서머아트페스티벌 및 빛고을창작무용제 ‘꾼들’안무·출연 ▲1998년 5월 국제현대무용페스티벌 ‘존재’’고향에 대한 보고서’ 안무·출연 한국현대무용협회 및 한국현대무용진흥회이사,21C선교무용위원 현대무용분과위원장,한국예술종합학교강사 대한민국무용제 신인상(81년) 대한민국무용제·대상 및 개인연기상(83년) 코파나스상(84년) ‘2천년대를 달리는 한국의 예술가’(92년)선정,‘부상하는 한국의 아티스트’ 선정
  • 행락인파 전국 ‘북적’/수도권 고속도 극심한 정체/휴일

    【전국 종합】 3월의 마지막 휴일인 29일 전국 곳곳이 초여름 날씨를 보인 가운데 벚꽃길과 유명산 등 유흥지에는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이에 따라 명승지로 이어지는 주요도로와 수도권 주변 도로들은 차량들로 심한 정체현상을 빚기도 했다. 군항제가 열리고 있는 경남 진해에는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관광객 5만 여명이 몰려 벚꽃축제와 창녕 화왕산 산신대제 등에도 2만여명이 찾아왔다. 용인 에버랜드에는 5만8천여명이 몰려 튤립축제와 포크댄스 등 다채로운 행사를 즐겼으며 민속촌에도 지난주보다 두배 가까이 늘어난 7천여며의 시민이 찾았다. 강원도 국립공원 설악산과 오대산 치악산에도 1만5천여명 등산객이 찾아와 봄을 맞았다. 한편 이날 하오부터 나들이 길차량들이 서울로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오산∼신갈구간,중부고속도로 상행선 광주∼중부 1터널구간,영동고속도로 상행선 마성∼신갈구간 등이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 울창한 숲 오솔길엔 옛 선비 발자취/새들도 쉬어 가는 문경새재

    ◎1∼3관문 산세 뛰어나고 곳곳 쉼터에 의자·약수/조령산 휴양림·안동 하회마을·수안보 지척에 【수안보=任泰淳 기자】 문경새재 3관문의 아침은 요란하다.숲속에서 하루밤을 쉰 새들이 나무가지를 옮겨 다니며 아침인사를 하기에 바쁘다. 새소리는 휘바람으로 변하고 때로는 피리소리가 된다.이름모를 새들의 읊조림은 인간이 만들어낸 빈약한 언어로는 흉내내기 조차 어렵다.새들의 지저귐은 바로 자연의 음악이다.새와 함께 하는 아침은 언제나 상쾌하고 신비롭다.하루의 행복이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다. 3관문 너머 문경쪽을 바라보면 붉은 태양에서 솟아 나오는 강열한 빛이 수목을 휘감는다.싱그럽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세가지였다.추풍령을 넘거나 죽령 또는 문경새재를 지나는 것.그러나 과거길에 나선 영남선비들은 주로 문경새재를 넘었다.추풍령은 추풍낙엽이,죽령은 미끄러진다는 것이 연상돼 웅지를 품은 예비선비들에겐 기분나쁘게 들렸기 때문이다.그래서 문경새재는 선비들이 주로 이용,과거길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새재라는 이름이 붙게 된 내력에 대해서는 네가지 얘기가 전해진다.새도 넘기 힘들 정도로 험해서 새재로 불리게 됐으며 주흘산 뒤 ‘하늘재’에 대해 새로난 길이어서 새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억새가 많아 경상도 방언으로 억새를 뜻하는 ‘새’를 따 새재라고 했다고도 하며 서울∼부산을 잇는 지름길(사이길)이라고 해서 새재로 불리게 됐다는 말도 있다. 어느 것이 맞는 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문경새재에 새가 많다는 사실.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지난 83년부터 차량통행이 금지돼 인적이 끊어지면서 숲과 계곡이 비교적 문명의 때를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신양명하려는 선비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이 길은 요즘에는 트레킹코스 또는 극기훈련코스로 각광받고 있다.문경쪽 1관문에서 2관문을 거쳐 괴산군쪽 3관문까지는 6·5㎞의 오르막길.이 길은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한데다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수림이 줄곧 이어져 도보로 행군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1관문에서 3관문까지는 2시간30분에서 3시간가량 걸린다.곳곳에 옛 선비들이 다니던‘옛오솔길’이 보존돼 있어 도보의 즐거움을 더해준다.숲속에는 의자와 약수터 등 쉼터가 마련돼 있어 휴식을 취할수 있다. 3관문 너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있다.문경새재와 같은 권역인데도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하는 것이 불만이지만 한번 둘러볼만하다.하산길에는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金玉吉 전 이화여대총장이 노년에 기거하던 금란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수안보로 나오면 이른바 우리나라의 중심이라는 중원(中原)문화권이다.월악산과 송계계곡,미륵사지,탄금대·충렬사 등 충주관광이 모두 가까이에 있다. 괴산군 연풍과 청천면으로 빠지면 쌍곡계곡과 화양계곡이 반긴다.수안보에서 이화령을 넘으면 안동 하회마을도 반나절권안에 있다.하회마을에서는 매주 일요일 한차례 탈춤공연이 열리고 있다. ◎문경새재 ‘산그림호텔’/소백산자락 그림같은 ‘가족호텔’/숙박비 저렴하고 객실 22개 분위기 아늑/소백산맥 신선봉 마주봐 별장에 온 느낌 가족들과 여행을 할때 가장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잠자리.호텔에 묵자니 부담이 솔치않고 여관이나 장급에 들어가기는 왠지 내키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수안보에서 빠져나와 문경새재 3관문쪽으로 오르다 보면 산그림호텔이 나타난다.관광업에 20년 남짓 종사해오던 李鍾完씨(57)가 지난 96년 12월 가족호텔을 지향하며 문을 연 호텔이다. 객실은 한실 6실,양실 16실 등 모두 합해서 22개다.그래서 투숙객들은 종업원들로부터 VIP(귀빈)대접을 받을 수 있다.1박에 4∼6인기준 주말 6만6천원,주중 5만원을 받고 있어 부담도 크지 않다.아침으로는 올갱이해장국(6천원)이 제공된다. 이 호텔은 이름 그대로 소백산맥의 마지막 봉우리 신선봉을 바라보며 그림같이 서 있어 마치 별장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특히 소백산 등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좋은 방에서 설경 또는 비내리는 날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일품이다.지붕도 인근 계곡과 어울리게 곡선으로 처리했다.양식당,한식당 등 부대시설에는 그림,조각 등 수준급의 예술품과 소품들이 배치돼있어 격조와 품위를 더해준다. 李사장은 “金東吉 전 연세대 교수가 유럽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고극찬을 하며 친구들을 이끌고 벌써 8번이나 다녀갔다”고 귀띰한다.(0445­33­8814∼7)
  • 서예가 楊鎭尼(이세기의 인물탐구:165)

    ◎물 흐르듯 힘찬 ‘友竹 서체’ 창출/10살때 쓴 ‘송매루’ 현판·경복궁 ‘경성전’ 편액 유명/‘서예교육 정상화안’ 제기,대학에 학과 신설 주도 友竹 楊鎭尼의 서예는 글자를 생성할 때의 의상(意象)이나 미적 요소를 이미 함축하는 것이 특징이다. 글씨의 점이나 획, 글자의 짜임과 장법에서 ‘생체리듬, 음악의 리듬’같은 율동성으로 한순간에 대작을 이루어내고야 만다.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명필 종요가 연못에다 붓을 찍어 글씨연습을 했듯이 우죽은 그가 어렸을때 종이가 귀해서 청마루에 물을 떠놓고 먹물 대신 물을 찍어 마룻바닥에서 대필(大筆)을 훈련했다. ○남성적 호흡­맥박 특징 이른바 그의 행필은 한획을 긋는데 붓의 모든 털이 사용된다는 남성적인 만호제착(萬毫齊着)과 호흡과 맥박이 뛰는 옥루흔(屋漏痕)으로 필획의 원활함이나 생동감을 표현해낸다. 어릴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고향인 창녕에 가면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오여정(吾與亭)이라는 정사(精舍)에 그가 10살때 쓴 ‘송매루(松梅樓)’ 현판, 7살때 쓴 이의재(二義齋)가 남아있고 최근에는 경복궁 복원에 따라 TV드라마 ‘용의 눈물’의 배경으로 비치는 ‘경성전(慶成殿)’이 그의 글씨다. ‘차고 오묘한 서체는 전통서체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조형예술로 승화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우죽이라고 하면 먼저 지난 74년 글씨 한두개의 해석차이로 국전을 벌집쑤신듯 뒤흔들어놨던 ‘대통령상수상’소동을 빼놓을수 없다. 대통령상수상이있기 전까지 그는 14차례의 연입선과 두차례의 연특선으로 이제는 국전 추천작가가 되기 위한 한번의 ‘특선’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날 아침 조간신문은 ‘대통령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고 일생에 한번 올까말까한 대행운에 놀라 그는 하루 동안 플래시 세례와 축하전보 전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기쁨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다음날 신문은 ‘국전대통령상에 오자(誤字)가 있었다’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서릿발을 퍼부었다. ‘대통령상 수상’과 ‘대통령상수상 취소’라는 극단적인 좌절과 허탈감에 시달려 그는 졸지에 벼랑끝으로 내몰릴 수밖에없었다. ‘노래를 부를때 리듬이 틀리고 가사만 맞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반박과 ‘내용이 틀린데 글씨만 잘쓰면 대수냐’는 비난, 심지어는 서예계의 원로요, 당시 국전운영위원장이었던 소전 손재형을 빗대놓고 ‘심사위원들이 글을 해득하지 못하고 글씨만 뽑았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대통령상 수상 시비 그가 써낸 작품은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의 시 2수중 한수를 ‘초서칠언절(草書七言絶)’이란 제목을 붙여 출품한 것이었으나 원문과 비교해본 결과 둘째행의 ‘酒債尋常(隨)處有’의 ‘수’가 ‘행(行)’자이고 넷째행의 ‘傳(與)風光共流轉’의 ‘여’는 ‘어(語)’자가 돼야한다는 지적이었다. 서단이 발칵 뒤집혔으나 당시 현대미술관장 尹致五씨는 서예에 능통한 月灘 朴鍾和, 한학자 安朋彦씨며 대만대사관의 한문학자들의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수렴한 결과 臺北판도 무방하며 우리나라의 목판대로도 얼마든지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서적은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따를 수’와 ‘다닐 행’은 같은 뜻으로 가능하고 ‘더불 여’와 ‘말씀 어’도 해석이 같다는 해명이었다. 황망중에 소전이 몸져 눕게되자 月田 장우성이 우죽이 보고 쓴 臺北판 ‘천가시(千家詩)’를 문공부에 제출하도록 권유해주었고 ‘칠언율(七言律)’이나 ‘칠언절(七言絶)’등 우리 서단의 해석이 단적이었음을 입증할수 있었다. 이 대통령상에 대한 시시비비는 결국 ‘오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국전을 가운데 둔 국전비리에 얽힌 것이며 ‘서예계의 풍토쇄신’을 위한 호된 비판이었다고 할수있다. ‘대통령상 수상’시비는 싱겁게 수면밑으로 가라앉아버렸고 그의 작품은 현재 역대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품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충격을 받고 몸져 누웠던 소전은 6년여만인 81년에 타계했다. ○안진경 등 각체 두루 섭렵 그와 소전과의 관계는 학맥이나 지맥, 인맥과도 관계가 없는 순수한 사제간이다. 부산 동아대학이 주최하는 전국 민전서화전람회에 소전이 심사위원으로 내려왔다가 우죽의 ‘흐르는듯 힘찬 웅필’을 보고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으로 격려하여 제자를 삼았고 그는 스승을 따라 중앙서단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어떻게 부산사람이 소전 선생의 제자가 되어 총애를 받을수 있느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그는 본래 창녕에서 한학자인 楊孝周씨의 딸만 넷이던 집안의 만득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공자를 만난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孔子의 자인 중니(仲尼)의 ‘니’를 이름에 넣게 되었고 부친은 사십을 넘겨 늦게둔 아들을 귀하게 여긴 나머지 6살이 되기전에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0대 후반부터 부산의 명필이던 오제봉 김광업을 사사,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혹독한 수업을 자처하고 안진경(顔眞卿)체와 서체의 유사성이 많은 하소기(何紹基)에 의존하여 각체를 두루 섭렵하고 있다. 59년부터 국전에 출품하는 동안에는 소전의 체본을 가지고 초서체를 공부하긴 했지만 스승의 ‘만족한 얼굴을 보지못해’ ‘눈물을 흘린일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자신만의 글씨체를 갖기 위해 ‘밤을 낮삼아’ 팔뚝이 붓도록 글씨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그가 서예계에 끼친 공로는 문공부에 ‘서예교육의 정상화안’을 제기하여 대학에 서예과를 신설한 일이다. 부인 金玉姬씨도 같은 서예가로 93년 미국 시애틀에서 부부전을 연 바 있다. 그는 79년부터 종로구 인사동의 우죽서실에 머무르면서 한·중·일교류전 등 주요 단체전에 출품하고 하오에는 후학을 가르친다. 연약해보이나 날카로운 안광은 지금도 칠순이라고 보기엔 지칠줄 모르는 정열이 가슴속에 살아있다. 아프고 잡다한 인생사를 거친 그의 글씨는 이제 법의 한계를 떨쳐버리고 짜임과 운(韻)과 품(品)을 갖추면서 자연스러운 획으로 우죽체인 청려경(淸麗境)을 곡강이 흐르는듯 써내려가는 시기다. □연보 ▲1928년 경남 창녕출생 ▲1946년 초등교원검정시험 합격 ▲1948년부터 부산경남상업중 및 부산한성여대·교육대,서울한성여대강사 ▲1959­73년 연12회 국전입선및 연2회(65·68년)국전특선 ▲1965년 전국교육자 휘호대회특선 ▲1968년 서예개인전(부산) ▲1971년부터 소전 孫在馨 사사 ▲1974년 국전 대통령상수상 ▲1981년 국전 초대작가 ▲1982­88년 국립현대미술관초청전 ▲1983년 국전및 전국대학미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심사위원장 ▲1988년 국전 심사위원장, 88국제서예올림픽전(예술의 전당)·한국서예100년전 출품, 부산개인전 ▲1990­96년 대한서예대전 운영위원장, 한국서예국전 30년전 ▲1994년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1997년 한·중문화교류전 ▲1998년 예술의전당 초대 초서전 ◇수상 예총회장상(65년) ◇작품 충렬사 ‘昭萃堂’휘호 및 효창공원 ‘彰烈門’‘道義門’ 경복궁‘慶成殿’ 대편액 등 현판비문 다수
  • 대학가 헌혈운동/崔弘運 논설위원(외언내언)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헌혈(虧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피를 팔아 생계를 이으려는 실업자나 막노동꾼의 매혈(賣血)이 대부분이었다.당시 380㎖의 피를 팔면 1천3백원을 받을 수 있었고 피를 뽑은 뒤 주는 빵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나이(16세 이상,65세 미만)와 체중(남 50㎏,여 45㎏ 이상)을 제한했기 때문에 주머니에 몰래 돌을 넣거나 나이를 속이고 피를 판 사람들의 눈물겨운 사연도 많았다.특히 명절을 앞두고 고향 갈 여비를 마련하려는 사람들로 혈액원마다 장사진(長蛇陣)을 이뤄 특이한 풍속도가 되기도 했다.생명을 구하는 피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게 저조하던 헌혈인구가 대한적십자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지난 80년 처음으로 전체 국민의 1%를 간신히 넘긴 뒤 지난 95년에는 2백만7천명으로 4.5%에 이르렀다.헌혈 선진국인 스위스(9.7%)나 프랑스(6.9%),일본(6.6%)에는 못 미치지만 미국(5.4%)과 영국(5.2%)은 곧 앞지를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그렇게 되기까지는 철도역이나 도심 광장,버스터미널 등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헌혈의 중요성을 일깨운 헌혈권장요원들의 공이 크다.이들은 박봉에도 ‘드라큘라’ ‘흡혈귀’ ‘인간거머리’라는 불쾌한 소리를 들으면서 행인들을 끌었다. 헌혈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전쟁터마다 신음하는 부상병들에게 전우(戰友)들은 기꺼이 팔을 걷어붙여 많은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이를 체계적인 사업으로 승화시킨 것이 1948년 8월 제20차 세계적십자사 국제회의다.이 회의에서 각국 적십자사가 혈액사업을 적극 전개하도록 권장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1958년 2월 대한적십자사에서 국립혈액원을 인수,공식 혈액사업이 시작됐으나 실적은 저조했다.최초의 본격적인 헌혈운동은 1960년 4·19학생혁명 때 실시돼 큰 성과를 거뒀다. 새 봄 대학가에 경제살리기 헌혈운동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고 한다.전남지역 대학가에서 시작된 것이 서울로 북상(北上)해 25일부터 동국대,숭실대,연세대에서 잇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혈장 수입에 지출되는 외화를 절약해 경제살리기에 기여하자는 젊은 학생들의 뜻이 갸륵하다.
  • 태권도 IMF 격파 나섰다/‘종주국 한국 순례’ 관광상품 개발

    ◎유럽·미주지역 400여명 예약 마쳐/해외 사범들은 외화송금운동 동참 태권도가 경제를 살린다.‘IMF(국제통화기금)시대’를 맞아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태권도 사범들이 태권도 관광상품의 세일즈에 나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관광객 송출에 앞장, 외화벌이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특히 이들 해외 지도사범들은 국내의 어려운 외환사정을 감안,국내로 외화송금운동을 벌여 따뜻한 조국애를 발휘하고 있는것. 한국관광공사는 최근 프랑크푸르트 지사와 다린여행사와 공동으로 ‘태권도의 발상지를 찾아서’라는 관광상품을 개발했다.12박13일 일정의 이 상품은 세계 태권도의 총본산인 ‘국기원’을 방문,태권도 품세 및 대련 등을 익히고 용인 한국민속촌,경주 등 관광지를 견학하는 것으로 1천998마르크(한화 1백80여만원)에 판매되고 있다.현재까지의 모객 상황에 따르면 다음달 2일 베를린 장두환 사범이 20명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비롯 모두 9개팀 200여명이 오는 9월까지 태권도 종주국 순례에 나선다. 관광공사 상품개발처 申相龍 과장은 “태권도 방한상품이 태권도 견학과 한국 전통관광이 연계돼 현지인들의 관심이 높다”며 “특히 원화가 절하된데다 여행경비를 저렴하게 하기 위해 현지 태권도 사범이 직접 상품홍보 및 모객에 나선 탓인지 구미인들도 극동관광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申과장은 “앞으로 뉴욕,시카고,LA,토론토 등 미주지사를 통해서도 판촉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라며 “올 여름 미주지역에서는 200여명의 태권도 성지순례단이 한국을 찾을 것”으로 내다봤다. 관광공사는 다음달 독일 태권도장을 순회,한국관광설명회를 실시하고 관광공사 사장배 독일 태권도 대회(8월중),영국 여행사 대상 태권도 상품 개발설명회(5월)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판촉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한편 25일 세계태권도연맹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세계태권도가족 외화송금운동을 실시한 이후 현재까지 ‘세계 태권도 가족’예금계좌에는 36만여달러가 입금됐다.
  • 배우 전옥의 삶·예술 부활/‘눈물의 여왕’ 27일부터 공연

    ◎한국 무대공연사의 전설 ‘눈물의 여왕’ 전옥­.1911년 함흥 출생.코흘리개때도 군것질값보다는 극장비를 달라고 떼를 썼을 만큼 무대를 동경했던 소녀.팔푼이한테 시집가는게 싫어 열다섯에 도망하다시피 서울로 올라와 배우가 됐고 나중 백조가극단을 만들어 이땅에 가극바람을 일으키며 한시절 무대를 주름잡았던 해방 전후사의 대표적인 광대. 일단 무대에만 서면 하늘도,땅도 울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눈물의 여왕’.북한 최고의 인민배우 강홍식의 아내였다가 남한 공연예술의 기수 최일의 아내가 돼야 했고 전쟁 뒤에는 영화의 그늘에 가려 마음으로만 무대를 꿈꾸다 74년 58살의 젊은 나이로 쓸쓸히 삶을 마감한 시대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이제는 한국 무대공연사에서 전설이 돼버린 전옥이 그의 시대와 삶,예술과 함께 다시 부활한다.부활의 무대는 삼성영상사업단이 27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눈물의 여왕’.한동안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한국화에 주력해온 삼성영상사업단이 그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방향을 틀어 해외 수출용으로 제작하는 첫 창작품이다.아울러 대본과 연출을 맡은 이윤택이 ‘대중주의를 통한 연극의 부흥’을 목표로 대중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 개척에 도전하는 시험무대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은 이땅에서 이데올로기가 가장 치열하게 충돌했던 6·25전쟁.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전옥과 그가 이끌던 백조가극단이 겪게 되는 시련과 애환,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숙명적 사랑과 비극이 중심줄거리를 이루어 대사와 독백,노래와 음악으로 펼쳐지는 대중가극이다. 주인공 전옥과 토벌대장 차일혁총경,빨치산의 거두 이현상을 비롯해 배삼룡·허장강·고복수·황금심 등 유명 실존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며 배역 역시 이혜영(전옥)·조민기(차일혁)·전도연(신정하)·이현상(신구) 등 호화 캐스팅이다.특히 전옥의 실제 수양딸 원희옥이 직접 출연,어린 시절의 자신을 연기하는 임선애와 신·구 노래대결을 벌인다.4월12일까지.278­4490.
  • 명성황후 피란 일화(비록 남가몽:4)

    ◎뱃사공에 금반지 빼주고 한강 건너 피신/경기도 광주땅 지나는데 아낙네들 험담/“중전때문에 이 고생… 군졸에 밟혀 죽었다”/두달후 환궁 “아낙네마을 없애 버려라” 1882년 6월의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실각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 대원군으로서는 실각한지 8년만의 일이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창덕궁까지 가는데 여덟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팔인교)를 탔고 앞뒤에는 파초선을 든 하인들이 그를 인도했다.대원군의 공복 등에는 거북 등(구배)이 붙어 있어 사람들은 그가 곱추처럼 보여 아니꼽기만 했다.더욱 가관인 것은 그동안 운현궁 사랑방을 출입하던 문객,즉 가신들을 중앙과 지방의 요직인 각 도 감사(도지사)와 유수(시장) 그리고 군수직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난을 피해 한강을 건너가던 민비는 전혀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그러니 그야말로 절치부심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중전이 나루터에 서서 급히 사공을 불러 배위에 올라타니 수레바퀴같은 붉은 해는 비웃듯이 솟아 오르고삼각산의 뜬 구름도 즐겁기나 한 듯 뫼 위에서 피어나고 있었다.삼국지에 보면 옛날 한나라 환관 십상시의 난에 개똥벌레가 한소제를 북망산천으로 인도하였고 채모 장군이 추격함에 유비가 말을 타고 단계천을 뛰어 건넜다고 하는데,그 쓸쓸한 모습이 옛날이나 지금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드디어 뭍에서 내려 길을 가다가 얼마후 깨끗한 여관에 들어가니 아침밥을 지어 바치는데 한나라 광무황제가 호타하에서 먹던 보리밥처럼 꿀맛과도 같았다.그러나 비록 이같이 배고프고 목마른 가운데서도 단맛을 느끼지 못하였다.도로를 왕래하는 사람이 시끄럽게 자주 서울의 군란소식을 전하여 주었는데 들어보니 곤궁(민비) 전하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겠고 혹은 서거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었다.그 밖에 흉흉한 설은 이루 다말하기 어려웠다. 듣기를 마치고 드디어 수레를 타고 수행원의 보호를 받으며 바로 충주 옛고을로 향하여 편안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잠시 화를 피하였다. 며칠이 지나 잠깐 조보에 발표된 내용을 보니 ‘민중전이 군란의 와중에서 서거하여 백성은 부모를 잃은 것 같이 슬퍼하고 모두 흰옷을 입었고 온 나라는 악기를 일체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생국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명성황후가 여주로 피난할 때 남긴 일화가 많다.한강을 건널때 사공이 민비를 건네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고 한다.한강을 차단하라는 긴급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사공의 주장이었다.이에 민비는 즉각 금가락지를 빼어 사공에게 던져 주었고 사공은 뇌물을 받고서야 순순히 배를 저었다는 것이다. ○대원군,시신없이 국상 채비 한강을 건너 충주로 가는 도중에도 괘씸한 일이 일어나 민비의 가슴을 쥐어짰다.경기도 광주땅을 지나가다가 교자꾼들이 가마를 길에 놓고 잠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길가던 아낙네들이 “이렇게 어여쁘신 아가씨가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민비는 재치있게 “서울에서 충주로 피난가는 길이요”라고 대답했다.그러자 아낙네들이 “중전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까지고 생하는 구려” 하면서 “중전은 군졸들에게 짓밟혀죽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괘씸한 생각이 들었겠는가.민비는 이들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두달 후 서울로 환궁하자 곧 아낙네들이 사는 마을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했다.또 수행원들이 “한강의 뱃사공은 어떻게 하오리까” 하고 묻자 민비는 “그대로 두라”고 했다 한다.그도 그럴것이 사공이 뇌물을 거절하고 한강을 건네주지 않았던들 민비는 잡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울에서는 대원군이 민비의 국상을 서둘렀다.시신이 없어 국상을 치를 수 없다는 반대가 강했다.그러나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대원군은 민비의 옷을 시신으로 삼아 염을 한뒤 관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그리고는 장례식부터 치러 민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려 했다.생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장례식부터 치르려 한 대원군의 심사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할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대원군은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청국군에게 납치되어 머나먼 중국땅으로 끌려가고 말았고 민비는 살아 돌아왔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몇 개월이 지났다.고종과 세자는 아득하게 소식을 알지 못하여 마음이 슬프고 애통할 뿐이었다. 이 때에 군란의 소요가 가라앉자 곤궁 전하는 고종에게 소를 올려 ‘신은 죽지 않고 지금 충주 장호원 등지의 민가에서 피란하고 있으며 처분이 어떠하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고종 부자분은 소를 자세하게 살펴본 뒤에 심신이 황홀하여 꿈결도 같고 술에 취한 것도 같았다.즉시 궁궐로 돌아오라는 뜻을 담은 교를 내려 조처를 취하니 하늘의 해가다시 밝았고 땅의 바람이 일어나 솟아오르는 듯하였다.안으로 3천명의 관료와 밖으로는 800명의 관료가 축하하여 일시에 만세를 부르니 남산과 북악의 초목과 곤충들도 모두 정채가 감돌았다. 우선 급무는 공로가 있는 자에게 시상하는 건이었다.무슨 벼슬로 상을 줄것인가.양주목사 자리이다.양주목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이번에 충주까지 수레를 태워주고 수행하여 보호하는 일을 맡은 홍태윤(홍계훈의 잘못)이었다.” ○한때 ‘육백팔흑’ 유행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자취를 감춘 것이 6월이요,돌아온 것이 8월이었으니 불과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당시 사람들은 6월에 흰 옷을 입고 울었다가 8월에 검은 갓을 쓰고 살아돌아온 국모를 환영했다 하여 육백팔흑이란 말이 유행했다 한다. 명성황후를 업고 나온 공으로 양주 군수로 발탁된 홍계훈 이외에도 서울에서 충주로 가는데 필요한 여비 500궤미(말을 판 돈이었다)를 댄 조충희는 전남 영광군수로 임명되었다.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북청 물장수 출신의 이용익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과 충주를 왕래하면서 중앙의 정세 변동을 민비에게 보고하였으니 그 뜨거운 충성심과 추종을 불허하는 건각은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홍계훈은 뒷날 동학란 토벌대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을 맡아 이른바 광무개혁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임오군란은 개항 6년만에 국고가 바닥이 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대사건으로 조선왕조가 망해가는 첫걸음이었다.그러므로 민비와 대원군 사이의 사전쟁 이상의 것이었다.이 군란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서울이 분탕질을 당하고 일본군이 인천항에 상륙하여 열강에 의한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 북한영공 첫 비행 KAL기 남방원 기장

    ◎“여기는 평양”… 첫마디에 긴장/관제기술·영어능력 서방에 뒤지지 않아 우리나라 민간항공기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영공을 통과,3일 상오 10시23분 김포공항에 안착했다. 대한항공 보잉747 화물기는 이날 상오 2시20분 앵커리지를 출발,도쿄 및 블라디보스토크 비행정보구역(FIR)을 거쳐 상오 8시57분 평양 FIR에 진입해 9시21분까지 24분간 동해상의 북한 영공 300㎞를 비행한 뒤 강릉 상공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기존항로에 비해 비행시간은 34분 단축됐다. 이번 북한영공 통과는 지난 해 10월 남·북한 당국이 태국 방콕에서 열린 양측간 항공회의에서 대구와 평양FIR을 통과하는 국제항로개설에 합의한 데따른 것으로 오는 4월23일 본격적인 항로개설을 대비한 시험비행이다. 다음은 남방원 선임기장(46)과의 일문일답. ­북한영공에 진입할 때의 소감은. ▲진입 순간에는 다소 긴장했는데 영어로 통상적인 교신을 마친 뒤 우리말로 날씨 얘기 등을 나누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앞으로 비행에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북한의 관제능력은. ▲각종 장비나 관제기술 등이 서방에 비해 매우 뒤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영어소통 능력 등 관제수준이 우수했다. ­교신내용은. ▲북한 비행정보구역에 진입하기 전 위치와 고도,시간 등을 얘기했다.이어 의사소통이 어려우면 한국말로 하자고 제의하자 북측에서 먼저 “여러분들이 우리의 관제구역을 통과하게 된 것을 대단히 환영한다”고 했다.평양 날씨를 묻자 “여러분을 환영하는 듯 매우 맑고 좋다”면서 “기온은 민수(영하) 1도다”라고 말했다.영어실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더니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 노선의 특징은. ▲일본 상공의 우회노선보다 편서풍의 영향을 덜 받아 비행하기에 적합하며 앵커리지와 서울간 비행시간이 평소보다 34분 단축됐다.상층풍과 온도 등에 따라 34∼40분까지 단축될 것으로 보인다. ­교신상태는 어떠했는가. ▲평양에서 600㎞ 떨어진 거리인데도 VHF 무선통신이 우수했으며 이에 대해 북한측은 위성중계소를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소설가 이문구씨 중·단편집 ‘만고강산’

    ◎소외된 인간 군상 해학적 필치로 그려 이문구의 문학에는 군말 같은 곁이야기 속에도 깊은 정한이 녹아 있고 무심한 듯 담담한 서술 속에도 정이 깃들여 그늘을 짙게 드리운다.4·19세대 문학의 전반적인 이념화·서구화 경향 속에서도 의연히 전통문학의 맥을 움켜쥐어 오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문구(57)다.소설가 이문구씨가 지난 72년을 전후로 해 발표한 대표적인 중단편들을 한데 묶은 소설집 ‘만고강산’이 ‘이문구 전집’ 제4권으로 나왔다.솔출판사. 이번에 실린 작품은 ‘추야장’‘해벽’‘이풍헌’‘금모랫빛’‘다가오는 소리’‘임자수록’‘낙양산책’‘만고강산’‘그가 말했듯’‘그럴 수 없음’ 등 10편.대부분 피폐한 농촌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도시 빈민노동자로 전락한 이들의 생활상을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그 대표적인 경우가 ‘만고강산’.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자들이 도시의 무기력한 하급생활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이른바 ‘상경형’소설이다.또 이번 소설집 가운데 가장 강렬한 사회비판의식을 담고 있는작품으로 주목할만한 것은 중편 ‘해벽’이다.조용한 어촌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몰락해 가는 마을의 모습을 한 어업조합장의 독백을 통해 그린다.작가는 이미 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묶어 ‘관촌수필’과 ‘우리 동네’라는 연작 소설집을 냈다.‘관촌수필’이 1960년대 농촌의 절대적 궁핍을 그리고 있다면,‘우리 동네’는 1970년대의 상대적 궁핍을 문제 삼는다.‘만고강산’은 이 두 작품집과는 주제를 달리 하지만 농촌에서 소외당하고 도시의 중심부에서도 밀려난 1970년대의 산물을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 북 외교관 일가 3명 망명

    ◎로마 FAO 대표부 서기관… 오늘 서울 도착 【파리=김병헌 특파원·서정아 기자】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둔 유엔식량농업기구(FAO)북한 대표부의 외교관 김동수 3등서기관(38)이 부인과 자녀1명(8)을 대동,모두 3명이 4일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6일 새벽(한국시간) 로마를 출발해 이날 하오 서울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외교관의 망명은 지난해 8월 장승길 주이집트 북한대사와 장승호 주프랑스 참사관 등 형제외교관의 미국망명이후 6개월여만이다. 정부 관계자는 5일 “로마에 있는 북한 외교관이 4일 북한 대표부 소유 차량을 이용,로마 한국대사관을 찾아왔다”면서 “이 외교관은 경찰의 보호아래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 서울로 향하는 항공기에 탑승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고위급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FAO는 세계식량계획(WFP)과 함께 그동안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계획을 주도해왔으며 지난해 11월에는 올해 북한이 1백만톤에 이르는 식량지원을 필요로 한다고 북한 식량난을 평가한 바 있다. 한편 외신은 이 외교관이 망명하면서 FAO내 북한 식량관련 자료들을 빼돌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 문전옥답 팔아서라도…/홍철 국토개발연구원장(굄돌)

    “아버지,서울 가서 돈벌어서 잘 살아보겠습니다.”사랑하는 아들이 서울로 간다니,늙은 부모는 문전옥답 한 마지기 팔아주면서 부디 건강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처자식 이끌고 무작정 상경해서 달동네 한구석에 무허가 판자집 지어놓고 남편은 공사판,아내는 보세품공장에서 그저 밤낮없이 일하였다.10여년 고생끝에 대기업 노무반장이라는 안정된 직장도 얻고,변두리이긴 하지만 18평짜리 연립주택에 이사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나 보다. ‘크레디트 카드’라고 불리우는 명함만한 플라스틱판이 나오면서 알뜰하던 마누라의 백화점 나들이가 시작되었고,애들은 주말이면 외식하자고 졸라댔다.어디 그뿐인가? 자동차값의 20%만을 내고도 마이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고,주택할부금융 덕분에 신도시 파트까지 외상으로 살 수 있었다.꿈만 그리던 동남아 관광여행까지 하고 보니 “대한민국 만세”가 저절로 나온다. 아!모든 게 일장춘몽이었던가? 어느날 갑자기 닥쳐온 IMF 때문에 직장에서는 쫓겨날까봐 걱정,집에 돌아오면 수북히 쌓인 외상값 갚을길이 막막하다. 우리나라가 지고 있는 외채가 1천백억 달러가 넘고 1년에 이자만 해 1백20억 달러에 달한다.허리띠 졸라매고 아무리 수출해 봐도 이자 갚기도 힘들게 되었다.무슨 비상대책을 세우지 않고는 도저히 이 빚더미에서 나라가 헤어날 방법이 없다.돈벌러 서울 간다고 하니 문전옥답 팔아주시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우리의 문전옥답을 팔아서라도 외국자본을 유치하고,이 땅 위에 새로운 다국적 기업을 많이 세워 빚도 갚고 일자리도 만드는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 연극인 김시라(이세기의 인물탐구:158)

    ◎풍자극 ‘품바’ 탄생시킨 ‘각설이 마술사’/3,700회 최장기 공연… 한국기네스북에 등재/거리 시낭송­벽시운동도 펼치는 중견시인 생전의 함석헌 옹은 김시라의 ‘품바’를 보고‘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극’이라고 했다. 그리고‘거지’를 극의 주인공으로 삼았을뿐 ‘품바가 무슨 연극이냐’고 했을때 ‘품바는 연극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라고 두둔했다.‘아무 소리말고 몇년만 기다려보라’던 함옹의 예언대로 ‘품바’는 88년 뉴욕을 비롯한 전미순회에서 우리 연극의 해외공연사상 ‘전무후무’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국대 황필호 교수는 ‘품바를 보지않고는 한국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고 94년 3천700회 최장기 공연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연극”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왔네’로 연극이 시작되면 누더기 차림에 찌그러진 깡통, 벙거지를 눌러쓴 걸인의 걸판진 놀이판에 객석은 온통 흥청거림으로 넘쳐난다. ‘일자나 한장 들고나 보니/일각이 여삼춘디 오십분단이 웬말이냐/두이 이자를 들고나 보니 이화도화는 만발한디 이산민족이 슬피운다’는 분단의 슬픔에 대한 울부짖음이며 ‘남인들은 북인치고 서인들은 동인치고 소론들은 노론치고’는 통렬한 정치풍자가 아닐수 없다. ‘품바’는 널리 알려진대로 ‘소외계층의 민주화운동’을 소재로한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매스컴들은 일찍이 ‘민족의 통곡’으로 특필한바 있다. 한때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일본초청공연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거지에게조차 저러한 여유와 풍자의 힘이 있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중론이 지금까지도 관객의 호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된다. 이 연극의 대본을 쓰고 연출한 김시라는 누구인가. 그는 실제로는 민족문학과 우리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중견시인이다. 그의 대표시인 ‘오­! 자네왔능가/이 무정한 사람아/청풍에 날려왔나/현학을 타고왔나/자넨 /묵이나 갈게/난 자우차 끓임세’는 그의 집안의 가훈이자 작가가 자라난 환경과 사람됨됨이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전남 무안군 일로읍에서 10남매중 6째로 태어났다. 현재 직계만도 42명, 한학자인 부친 김두성옹(84)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상하여 찾아오는 이웃을 마다하지 않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속에서도 어머니 채애임 여사(85)는 낯을 찡그리는법 없이 항상 손님접대하기를 즐겼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적이 없고 납부금을 내지못해 학교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런중에도 집안에는 웃음과 노래가 그치지않아 부친은 논어와 한시를 가르치고 ‘재물과 명예’에 사로잡히지 말고 ‘청빈을 자랑하라’고 타일러왔다. 고교1학년때부터 목포로 통학을 하면서도 밤에는 동네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고교졸업후에는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쌀가마를 등에 지거나 우마차에 실어 나르는 중노동으로 집안의 생계를 도왔다. 그런중에도 그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떠나지 않았다. 고향을 학문과 예술의 고장으로 만든다는 의지로 ‘인의 예술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5·18의거가 일어나자 ‘사건이 사건인 만큼 그대로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 죄없이 죽어간원혼’을 달래기 위해‘품바’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사회적 물리적 폭력에 대한 각설이 패들의 응어리진 한과 비애가 어떻게 태동했는가를 비범하면서도 강건한 시선으로 조명해 나갔다. 겉으로는 흥겨운 각설이 타령이지만 섬뜩하게 다가오는 사설과 날카로운 비판은 한순간도 현실의 모순을 놓치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지난 86년 ‘한민족 방언연극제’를 제안하고 사분오열된 지역갈등을 내용으로 한 ‘남바’를 발표하려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인의 예술회’ 등 조직 81년 고향의 마을공회당에서 ‘품바’ 초연후 목포 광주를 거쳐 83년 서울로 진출했고 한달만 머물려던 계획이 86년까지 장기공연되면서 ‘민초의 시대사’란 찬사와 함께 그는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연극의 무대공연실황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가 1백만장이상이나 팔리는가하면 전용소극장인 ‘왕과 시’ ‘강강술래’를 갖게 되었고 나이 사십이 넘어 결혼한 부인 박정재씨와의 사이엔 2남1녀. 그가 살고있는 대학로 동숭동에는 아들을 등에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늦게둔 자식사랑’이 소문나 있다. 그는 여전히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지난해 미국 카네기홀공연 약속을 올해 중반에 실천해야하고 ‘품바’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와 뮤지컬대본도 끝내야 한다. 연극을 하는 한편으로는 끈질기게 시운동을 펼친대로 한달에 한번씩 보리수 시낭송회, 거리 시낭송과 벽에다 시를 쓰는 ‘벽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모든 일에서 순풍에 돛단 듯한 유유자적은 없겠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남루에도 진솔한 심성을 변치않는 ‘순금같은 존재’다. 더구나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가 쓰고자 하는 시와 대사가 꿈속에서 물흐르듯이 계시되는 예감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시나리오 손질 시인 송수권이 ‘김시라의 삶은 신재효만큼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예술가’라는 말은 그의 예술정신과 끈질긴 탐구성을 두고 적절하다. 그리고 ‘나를 바르게 길러주신 부모님, 어려울때마다 돌파구를 열어주신 함석헌 스승님’과 친구를 좋아하며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감싼다. 그래서 소설가 최일남은 ‘그러한 푸근한 인간성으로 인해 구수한 입담과 배꼽을 쥐는 관객의 모습은 삶의 역리가 맞닿아있고 웃음속의 눈물이 번뜩인다’고 평한다. 그는 과연 ‘품바’의 이론과 현장정립에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연극속에는 속되고 악한 세태, 인정에 따라 변하는 얄팍한 인심을 꾸짖는 꾸지람이 범람하지만 욕설을 듣고도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은 이 연극만의 ‘양심과 고뇌의 복음’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모든 인류의 양심일 수도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그는 지금 세계무대로 나가려는 야심찬 계절에 감연히 서있다. □연보 ▲1945년 전남 무안출생 ▲1965년 목포고­한영신학대학­건국대 행정대학원­고려대 노동대학원수학 ▲1966년 시 ‘오 자네왔능가’발표 1976년 인의예술회 창립 회장 ▲1981년 연극 ‘품바’ 첫 공연 (전남 무안군 일로면 공회당) ▲1983년 ‘민족과 문학’지 시추천, ‘품바’ 서울 첫 공연 ▲1985년 극단 ‘가가’창단 ▲1986년 사회성극 ‘꽃관(막달라 마리아)’ 첫 공연 ▲1990년 MBC­TV ‘우리시대의 명인’및 ‘오! 자네왔능가’시낭송회 1988년 전용극장 품바예술극장개관 1988·91·92·96년 미국순회(30회공연) 및 일본 괌 호주공연 ▲1991년 ‘품바’공연 2천회 돌파 ▲1992년 전용극장 ‘왕과 시’·‘강강술래’ 개관 ▲1993년 ‘한민족방언시학회’창립 ▲1994년 국민시 생활운동 ‘벽시’동인회 및 상황문학회 창립회장 ▲1996년 ‘품바’ 한국연극사상최장기공연(3천700회) 한국기네스북수록, ‘한민족 방언연극제’ 조직위원회발족 ▲1997년 호주 시드니 일본 순회공연 ▲1998년 2월 ‘품바’ 4천회기념공연예정 소설 ‘품바시대’(상하권) 희곡집 ‘품바’ 방언시집 ‘오! 자네왔능가’ 상황시집 ‘어머니 대통령’ 시민시집 ‘형이중학’ ‘한민족 방언시학회’ ‘품바타령집’ 등 한국백상예술대상(88년) 한국기독교문화대상(97년)
  • IMF 사태 원인은 교육제도/김순귀 재미교포·회계사(기고)

    미국 테네시주 클린치 벨리 대학 강사인 재미동포 김순귀씨(52)는 최근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은 사실과 관련,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원인은 잘못된 교육제도이므로 교육개혁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글을 서울신문에 보내왔다.김씨는 서울·도쿄·테네시 도미니언 은행과 월 스트리트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동부 테네시 주립대학 회계학 석사출신으로 현재는 이스트만 화학회사의 공인회계사다. ○개성이 무시되는 풍토 고국을 떠난지 어느새 27년이다.육이오의 잿더미에서부터 시작하여 45년만에 세계 11위의 부강국가로 자란 한국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다니….허무하고,창피하고,분통터질 일이다.무엇이 잘못 되었는가.지금이야말로 국민 모두가 지도자들과 경제인들에게만 손가락질 하지말고 서로 도와서 어려움을 헤쳐가야 할 때이다.오늘의 사태는 누구 한 사람의 잘못도 아닌 국민 전체의 책임이다. 아마도 ‘나’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의 책임일 것이다.우리들의 자녀 교육을 생각해보자.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말을 제주도로,사람은 서울로…”.우리는 이 그릇된 원칙을 거의 모든면에 적용하고 있다.왜 끼리끼리 놀아야 하고,모두가 한곳으로만 집중하는가?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고,‘남이 시장에 가면 나도 거름이라도 지고 시장간다’는 식으로 살아오지나 않았는지.과당 경쟁의 대표적인 예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우리의 대학입시 준비다. 우리들의 아이들은 인간이 되기 전에 대학문부터 넘어야 하는 경쟁 체제에서 살고 있다.미국 교육의 근본은 개인의 인격형성이다.개개인의 인격을 살리고 그 인격의 바탕위에 지식을 부여하고,그 지식을 사회에서 적절히 쓸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곳이 교육기관이다.초·중·고 교육은 마음껏 놀고 남는 시간에 공부해도 될 만큼 자기 개발의 여유를 주고,대학은 개개인의 지식과 연구가 토론방식으로 서로 배움을 주고 받는 곳이다. 절대로 철칙이란 것은 통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왜’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아무리 어려도 이 ‘왜’에 대한 해답이 이해되지 못할 때는 부모나 교사의 지시가 먹혀들지 않는다.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근본이다.이치에 맞으면 손발 맞추어 모두의 힘을 모으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큰 자산이다. ○자본주의 성장 좀먹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강조하고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호 연결돼 있다.개개인의 특성과 기호·능력이 허락되는 사회에서만이 자본주의는 가능하다.우리는 모두가 너무나 갇혀있다.집에서는 부모님 말씀에,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지도에,직장에서는 상사 지시에 모두가 꽁꽁 묶여서 기를 펼 수 없다.한국 경제위기를 맞아 얼마나 많은 정치가들이,경제인들이,교사들이,부모님들이 이 ‘왜’에 대한 대답없이 독선을 고집하고 지시를 남용했는지 돌이켜 봐야 할 일이다.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기업주들이 남의 돈으로 문어 다리처럼 사업을 팽창시킬때 그 휘하의 유수한 대학출신의 두뇌들은 언젠가는 파산으로 갈것이라는 것을 왜 상상도 못했을까.또 그 기업들을 진단해야 하는 공인회계사들은 무엇을 바탕으로 회계 감사를 했는지….그 정도의 근본체제도 갖추지 못하고 세계 11위라고 허풍을 떨었나.정부지도자들의 “문제가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라는 발뺌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교육개혁에서 출발점을 그 아래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어쩌면 우리 모두는 “왜”라는 말을 쓸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암기하둣,이 모든 부조리를 받아들이기만 했던가.위로 아첨하고 아래로는 짓누르는 계층사이의 악습을 버려야 한다.모든 일을 계획하고 순리대로 처리하는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모든 상처나 질병은 그 근본부터 치료해야 하듯,이 부조리를 고칠 작업은 각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부모들이 한시라도 빨리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해줄 줄 아는 마음가짐으로 바뀌어야 한다.이 인격존중은 그들의 학교에서,사회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그들이 참된 정치가가 될 수 있고,참된 교사가 될 수 있고,참된 경제인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가정에서 인격을 존중받은 자녀들이 사회에서 남의 인격을 존중해 줄 수 있게 된다. 이를 뒷받침해줘야 되는 것은 교육제도 개혁이다.Y대의 어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새 정권이 한국의 교육제도만 바르게구축해놓으면 영원한 업적으로 빛날 것이다”. 상호 연결돼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회생·발전은 교육개혁에서 출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대통령 임기 5년은 결코 길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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