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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데뷔 35년… ‘문인들이 좋아하는 화가’ 이왈종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데뷔 35년… ‘문인들이 좋아하는 화가’ 이왈종 씨

    폴 고갱은 나이 마흔셋에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느껴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훌쩍 떠났다. 여기에서 ‘타히티의 여인들’ 등 불후의 명작을 많이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대도시 생활에 싫증을 느껴 지중해로 떠나 걸작 ‘해바라기’를 남겼다. 아마 예술가의 포부를 위해 자기유배의 길을 스스로 떠나지 않았을까. 이왈종(60)씨.‘생활속에서-중도 시리즈’로 잘 알려진 한국 화단의 중견작가다. 지난 1990년, 그해 어느날 교수직(추계예술대)을 홀연히 버리고 따뜻한 남쪽의 섬 제주를 택했다. 주위에서는 서울로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예술가적인 기(氣)를 충전하고 돌아올 것으로 다들 생각했지만 15년째 눌러 살고 있는 것. 이젠, 자신을 해방시킨 제주를 왜 떠나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또 복잡한 서울을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푹 파묻혀 있다. 이 화백은 올해로 화단 데뷔 35년째를 맞고 있다. 그러니까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이듬해인 스물여섯 나이에 국립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동안 국내외 개인전만 20여차례, 단체전의 경우 매년 1∼2차례 참가했으니 그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주 제주의 밤 바다가 보이는 서귀포의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때마침 서울에서 온 손님(화랑 관계자)과 싱싱한 복어회에다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서울에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후래삼배’를 먼저 권한다. 이 화백이 약간 취기가 있었기에 같이 보조를 맞추자는 뜻에서였다. 창너머 서귀포 앞바다에는 한치잡이 어선에서 켠 불빛이 아름답게 빛나 장관을 이루었다. 문득 한마디 건넨다.“선생님, 아름답죠?” 그러자 “암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돌아왔다. “……?” “자연입니다. 인간에게 맞추면 괴롭고요, 자연에 맞추면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지요. 괴로움도 즐거움도 말입니다. 파리나 참새도 똑같은 생명입니다.” 술잔이 다시 오고갔다. 안주도 권했다. 사전에 질문 거리를 몇 가지 생각했지만 취기가 있어서인지 갑자기 순서가 헷갈린다. 들켰을까. 이 화백도 그걸 아는지 껄껄 웃으며 선문답 형태의 얘기로 분위기를 설렁설렁 몰아간다. 에라 모르겠다,“선생님은 그동안 제주 어디에다 맞춤표를 두셨는지요?”라고 질문을 툭 던졌다. “아닌 곳이 없지요. 제주에 왔을 때 시장바닥을 봐도, 잡초나 동백꽃을 봐도 행복했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치우치느냐가 문제이지요. 꽃을 봐도 괴로울 수가 있습니다. 제주란 아름다움이고 그렇게 맞추었습니다. 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하게 바라보면서 ‘중도관’을 생각했습니다.” 이 화백은 제주 생활을 하면서 ‘중도시리즈’를 표방해 왔다. 또 오랜 금욕적인 생활방식과 돌담처럼 쌓인 열정으로 붓의 힘이 더욱 세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석한 화랑 관계자도 “이 화백은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면서 “(그림이)흥분된 에너지를 능란한 서예의 획으로 쓱쓱 그려진다.”고 거들었다. “중도란 무엇입니까.” “너무 가까이 가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도 괴롭지요. 하나는 전부요, 전부는 하나입니다.” “지난 제주생활의 15년을 관통한다면 어떤 의미로 새겨집니까?” “행복,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몸속에 채워져 있을 때가 괴롭지요. 비운 마음은 작은 것도 크게 보입니다. 사람 만날 일도 없고, 그림 그리고 밥 먹는 게 전부입니다.(제주)올 때 모든 것을 놓았어요.” 처음 5년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실컷 그리다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15년이 됐단다. 어디서나, 아무때나 들을 수 있는 새소리, 파도소리, 장중하고 때론 감미로운 바람소리, 그리고 동백꽃, 매화, 수선화 등 온갖 꽃들 향기에 취해 살아온 몽유의 세월이었다고 했다. 까닭에 화폭에는 꽃, 새, 물고기, 노루, 자동차, 전화기 등이 자주 등장했다. 요즘에는 골프장 풍경을 많이 그린다. 예술성이든, 상업성이든 따지지 않고 즐겁게 그렸고 그것으로 만족한다며 활짝 웃는다. “최근에는 도자기 작업에도 열중하고 있지요. 향로를 만들고 거기에 그림을 집어넣는 향로들이지요.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의 영혼 안식을 빌어주고 또 다사다난한 현실에서 많은 번뇌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심사를 편안케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지요.” 다시 건배를 하고 나서 잠시 창밖을 응시한다. 때를 놓칠세라 제주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곡선입니다. 인간은 수직적이고 상하관계로 연결되고 이해관계로 얽혀져 있습니다. 해안선과 돌담, 다들 아름다운 곡선이지요. 제주의 자연을 보면 마음을 덜어내는 행복을 느낍니다. 또 솟구치는 파도를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새삼 절감하지요.” “선생님, 왜 서울을 버리고 제주를 택했나요? 그리고 다시 서울 갈 생각은 없나요?” “그곳은 와글와글합니다. 먼지 속으로 사람 많은 곳으로 갈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자연과 호흡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평생 제주에 있을 작정입니다. 여기에서 놓고 가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요즘 그는 어린이들과 일주일에 두번씩 동심의 세계에 푹 빠져든다. 지난 10월 초부터 서귀포시 평생학습센터 ‘엄마랑 아이랑 함께하는 미술교실’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것. 매주 월요일 유아반, 화요일 초등반으로 나눠 각각 한시간반씩 그림 지도를 해주고 있다. 친근감을 주는 ‘동시’와 ‘동요’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올해 초부터 틈틈이 어린이들에게 지도를 해오다 아예 고정적인 시간을 마련했다.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학부모들로부터 수강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고 서귀포시 관계자는 전했다. “어린이들한테 많이 배우고 있어요. 어른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어린이들에게 그림은 상상력과 사고력을 확충시켜 주지요.” 이 화백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버린 자식처럼 들꽃과 산꽃을 무작정 만나기도 하고 붓을 들어 그림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두달에 한번 만나는, 서귀포 시내의 향토예술인 모임 ‘문화사업회’에 참석하는 것이 유일한 개인생활이다. 슬쩍 젊었을 적 시절을 물었더니 “국전에서 아홉번 낙선하고 아홉번 당선(입선)했다.”는 말이 금방 나온다. 자료를 뒤졌더니 국전 15회(66년)부터 27회까지 17∼19회를 제외하곤 연이어 심사에 뽑힌 것으로 확인된다.‘9전9기’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냥 멋쩍게 웃기만 한다. 경기도 화성 출신인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어려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몸이 하도 허약해 농사꾼조차 못되는 쓸모없는 아이로 취급받았다. 중학때 미술 선생이 좋아 특활시간에 미술반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돼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소정 변관식(76년 작고) 화백 등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데뷔 초기에는 실경산수를 자주 그렸다. 그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딸은 동양화를 전공, 현재 전시회를 준비 중이고 아들은 영국 켄트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생로병사의 근심을 털고 모두들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행복과 안식이 온 누리에 펼쳐지길 희망합니다.” ■ 그가 걸어온 길 ▲1945 경기도 화성 출생 ▲70년 중앙대 회화과 졸업, 한국미술대상전(국립현대미술관) 전시 ▲88년 건국대 교육대학원 회화과 석사 ▲79∼90년 추계예술대 교수 ▲90년∼현재 제주에서 생활 ▲71년 국립공보관 첫 개인전 ▲76년 2회 개인전 미도파화랑 ▲80년 3회 개인전 미도파화랑 ▲이후 2005년까지 19회 국내외 개인전 ▲단체전은 75년 아시아 현대미술전(도쿄)을 시작으로 50여회 참여 ■ 상훈 국전 제15,16,20,21,22,23,25,26,27회 입선. 한국미술대상전 입선(70년), 한국미술대전 문공부장관상(74년), 미술기자협회 미술기자상(83년), 미술시대 미술작가상(91년), 월전미술문화재단 제5회 월전미술상 수상(2001년) ■ 저서 ‘생활속에서-중도의 세계 이왈종의 회화’ ‘도가와 왈종’‘중국 회화 사상 및 문학성에 대한 연구’‘이왈종 화집’ k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양그룹-창업주 故 이양구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양그룹-창업주 故 이양구회장家

    동양은 국내 재벌가(家)에서 최초로 사위가 승계한 그룹이다. 동양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이 1945년 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데다 이관희(76)여사 사이에 딸만 둘을 둔 것과 무관치 않다. 이 창업주의 차녀인 화경(49)씨가 일찍이 경영에 참여해 현재 오리온 사장직을 맡고 있지만 동양의 ‘경영 대권’은 맏사위인 현재현(56) 동양 회장과 둘째 사위인 담철곤(50) 오리온 회장에게 돌아갔다. 가족 구성원이 단출한 만큼 이 창업주가(家)의 혼맥도는 정·관·재계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린 국내 여느 재벌가와 달리 단순하다. 또 이 창업주가 딸들의 통혼을 통해 사돈가(家)의 후광을 기대하기보다 자신의 유업을 이어갈 사위들의 ‘사람 됨됨이’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도 혼맥의 단순함을 더했다. 특히 오리온 담 회장의 집안이 화교 출신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설탕왕·시멘트왕’ 이양구 창업주 동양 창업주인 서남(瑞南) 이양구 회장은 1916년 함경남도 함주군의 작은 농가에서 부친 이교흠(작고)씨와 모친 김성자(작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면서 서남의 어린 시절은 힘겨운 생활로 점철됐다.15세의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 졸업장을 받은 서남은 상급학교 진학 대신 ‘함흥물산’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에 취직했다. 서남은 훗날 이곳에서 ‘정직과 신용’이라는 상도를 배웠다고 밝혔다. 8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은 서남은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시작으로 6·25전까지 수차례의 회사를 세우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때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고향에 수십만평의 토지와 1억원에 가까운 거금도 삼팔선과 전쟁으로 잃었다. 그러나 그는 부산에서 설탕도매업을 기반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전시의 특수 경기와 생필품 부족이 거꾸로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서남은 부산과 마산, 대구 등에서 이른바 ‘설탕왕’으로 불렸다. 서남은 당시 국내 유일하게 설탕을 생산했던 고 이병철 삼성 회장, 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와 가까운 사이였다. 서남은 1955년 삼성 이 창업주와 풍국제과의 배동환씨 3인의 공동 출자로 동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풍국제과의 경영에도 참여해 오늘날 오리온(옛 동양제과)의 기틀을 다졌다. 또 동양제당이 국내 최고의 역사를 지닌 삼척시멘트를 인수하면서 서남은 자연스럽게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서남은 1957년 삼척시멘트를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한 뒤, 노후시설 교체와 증산을 통해 한때 시멘트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 경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규 업체의 대거 진입으로 시멘트가 남아돌았고, 정부의 금융 긴축정책으로 동양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서남이 훗날 ‘운명의 날’이라고 밝혔던 1971년 9월10일 법원에 회사보전신청을 제출해 세인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에도 불구하고 동양은 살아났다. 정부의 사채동결조치가 사실상 동양의 구명줄이었으며, 평상시 쌓아온 정직과 신용도 큰 도움이 됐다. ●운명적인 만남 서남과 이관희 여사의 인연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6·25가 이들을 만나게 하고, 또 헤어지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거제도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했다. 6·25 발발로 3년 5개월만에 공군 소속으로 귀향한 서남은 모친의 부탁에 이관희씨와 약혼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관희씨는 당시 함흥의 명문인 영생고녀(永生高女)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전쟁 개입으로 두 사람은 결혼식도 못올리고 생이별을 하게 됐다. 부산으로 내려온 서남은 가족 소식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뒤늦게 피란선을 타고 월남해 거제도에 머물던 관희씨와 극적으로 만났다. 이 여사는 현재 서남재단 이사장으로 남편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 서남과 이 여사는 슬하에 장녀 혜경(53)씨와 차녀 화경씨 등 2녀를 뒀다. 이화여대 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혜경씨는 평소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던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중매로 1976년 현재현 회장과 결혼했다. 현 회장은 당시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중이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대학 3학년 때 1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혜경씨는 현재 전공을 살려 동양매직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 회장의 집안은 전형적인 선비 가문이다.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내고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알려진 고 현상윤 총장이 그의 조부이며,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고 현인섭씨가 그의 부친이다. 그는 고 현 교수의 3남2녀 가운데 셋째다. 첫째는 고려대 대학원장인 현재천(61)씨이며, 둘째는 현재민(59) KAIST 교수, 장녀는 현재희(51) 세종대 교수, 차녀는 현재란(49) 의사로 현재 이화의원 원장이다. 현 회장과 이 고문은 ‘정담(28·여)-승담(25·남)-경담(23)-행담(18)’ 등 1남3녀를 두고 있다.2세 모두 미국 스탠퍼드대를 다녀 현 회장과 동문이다. 첫째인 정담씨는 스탠퍼드대에서 심리학과 경제학을 복수로 전공한 뒤 지금은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장남 승담씨는 컴퓨터 사이언스와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차녀 경담씨는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있다. 막내딸 행담씨는 스탠퍼드대 교양학부 1학년에 재학중이다. 서남의 둘째 딸 화경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1980년 뜨거운 열애끝에 담철곤 회장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담 회장의 선친은 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했으며, 타이완 국적으로는 한의원 경영이 쉽지 않아 일찍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화경씨와 담 회장은 슬하에 경선(20)씨와 서원(16·남) 1남1녀를 뒀다. 경선씨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서원군은 국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서남가(家)의 혼맥은 이처럼 단순하지만 그나마 현 회장 집안을 통해 정·재계에 인연이 이어진다. 현 회장의 조부인 현상윤 전 총장은 6∼8대 국회의원이었던 김봉환 전 국회법사위 위원장과 사돈지간이다. 김 전 법사위원장은 손경식 CJ 회장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잉꼬 부부 이 고문과 현 회장은 중매로 만났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애틋하고 각별하다. 결혼 이후 경영수업을 위해 미국 스탠퍼드대에 홀로 유학한 현 회장은 이 고문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편지 첫 머리에 늘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적었다. 담 회장과 이 사장은 서로가 첫 사랑이다. 대구에서 서울로 유학온 담 회장은 중학교 3학년 때 이 사장을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났다. 이 때부터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10년 이상 연애했다.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싱턴대로 유학간 4년이 유일하게 떨어진 시간이었다. 이 때도 두 사람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비싼 국제전화를 하는 탓에 꾸중도 많이 들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친구에서 연인, 다시 부부로 인연이 이어지기까지 두 사람은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오랜 만남을 지속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막상 결혼때는 집안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담 회장과 이 사장은 국내 재계에서 보기 드문 ‘부부 CEO(최고경영자)’다. 담 회장은 현재 이 사장이 총괄경영을 맡고 있는 오리온의 엔터테인먼트사업 아이디어를 추진한 주역이다. 이 사장은 “나는 다소 감성적인 반면 담 회장은 실용적이어서 상호 보완이 된다.”면서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이제는 이 세상에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시에 더없이 훌륭한 사업 파트너”라고 곧잘 언급한다. ●혹독한 경영 수업 서남은 사위들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더 철저하게, 더 강하게 경영 수업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내 딸, 내 사위라고 해서 특혜는 없다.”는 것이 서남의 ‘후계자론’이다. 현 회장은 75년 부산지검 검사로 입문한 뒤 결혼과 함께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는 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재계의 첫 발을 내디뎠고, 초고속 승진을 통해 동양의 후계자로 대내외에 알려졌다. 그러나 후계자의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 창업주는 타계하는 날까지 두 사위와 작은 딸에게 이론과 실전으로 혹독한 경영자 수업을 시켰다. 현 회장은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한 이후, 이 창업주로부터 직접 경영수업을 받았다. 낮에는 현장을 같이 누비며 실전과도 같은 수업을 받았고, 밤에는 새벽까지 수십년동안 쌓아온 이 창업주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이 창업주의 경영수업은 이틀 정도 잠을 안재우는 일이 허다할 정도로 강도가 높았다. 이화경 사장은 동양제과(현 오리온)에서 인턴사원으로 일을 시작했으며, 담철곤 회장도 유학을 마친 후 동양시멘트 구매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 창업주는 ‘경영자가 되려면 기본부터 충실해야 한다.’며 두 사람 모두 구매부로 발령냈다. 이후 이 사장은 영업부를 제외한 각 부서를 돌며 업무를 익혔다. 특히 마케팅담당 시절엔 획기적이고 신선한 광고로 광고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코파이의 ‘정(情) 시리즈’ 광고다. 그는 입사 26년만에 오리온그룹의 외식과 엔터테인먼트사업을 담당하는 CEO에 올랐다. 이 사장은 최근 경제전문지 포브스코리아가 발표한 한국의 여성부호 50인 가운데 8위(1652억원)에 올랐다. 담 회장도 81년부터 동양제과로 자리를 옮겨 구매부장과 사업, 관리, 영업 상무 등을 거치며 89년 동양제과 CEO에 올랐다. ●동양·오리온의 분가 이 창업주가 1989년 타계한 이후 동양의 경영권은 가족간 협의를 통해 맏사위인 현 회장이 승계했고, 둘째 사위인 담 회장은 동양제과를 맡았다. 현 회장과 담 회장은 13년간 각각 시멘트·금융, 제과·엔터테인먼트 등의 사업영역에서 독자 경영을 해왔다. 이 때문에 사위간에 기업 분할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여기에 동양제과가 영상미디어 분야에 투자와 외자유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30대 기업집단으로 제한을 많이 받아 계열분리가 빨라졌다. 동양제과는 2001년 9월1일 동양에서 분가했다. 동양그룹 32개 계열사 가운데 제과와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16개사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동양과 오리온(옛 동양제과)은 여전히 그룹 CI(기업이미지)를 함께 사용할 정도로 뿌리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이어가고 있다. 현 회장은 “동양과 오리온의 분가는 미래 지향적인 경영을 위해서이며,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그룹이 한국경제의 거목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지를 펼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계열분리 이후 동양은 금융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동양종합금융증권은 증권·종금·투신업을 아우르는 종합금융사로 거듭났으며, 동양생명은 6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다. 동양은 현재 제조업 6개사, 금융 7개사로 총자산은 15조원 수준이다. 지난해 매출액은 4조 300억원을 기록했다. 오리온그룹은 케이블 방송과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집중해 계열사를 26개사로 늘렸다. 지난해 매출액 1조 5300억원을 올렸다. 특히 미디어플렉스의 극장사업체인 메가박스는 전국에 117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최고의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영화투자 배급사인 쇼박스는 ‘말아톤’과 ‘웰컴투 동막골’,‘가문의 위기’ 등을 잇달아 흥행시켜 설립 3년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여기에 베니건스를 중심으로 한 외식사업과 편의점 사업체인 바이더웨이 등도 견고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동양·오리온의 대표 CEO 노영인(59) 동양시멘트 사장은 30여년을 시멘트업계에 종사한 산증인이다.98년 동양시멘트 대표이사로 취임한 그는 외환위기 한파를 수출로 돌파했다. 그동안 시멘트 수출은 채산성이 안 맞고, 선진국의 품질검사가 까다로워 시늉만 내왔다. 그러나 노 사장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밀어붙여 99년에는 창사이래 최대 물량인 171만t을 세계 각국으로 수출했다. 덕분에 579억원의 순익을 기록해 기나긴 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노 사장은 동양의 실질적인 지주회사인 동양메이저의 대표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박중진(54) 동양종합금융증권 부회장은 금융업계에선 신사로 통한다. 친근한 말투가 트레이드 마크. 그는 조지워싱턴대 MBA 출신으로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을 갖고 있다.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동양증권과 동양생명, 동양종금을 거치며 10년이상 실전 금융을 익혔다. 윤여헌(57) 동양생명 사장은 행시 14회 출신으로 건설부와 재무부를 거쳐 95년 동양에 합류했다. 윤 사장은 겉치레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내실형’ 스타일이다. 철저한 손익 위주의 경영을 선호한다. 오리온그룹을 이끄는 전문 경영인으로는 김상우(48) 오리온 대표이사를 꼽을 수 있다. 김 대표는 1987년 오리온(옛 동양제과)에 입사한 이후 줄곧 마케팅 분야를 맡았다. 농심이 장악한 국내 스낵시장에 포카칩과 스윙칩 등을 출시해 오리온의 돌풍을 일으켰다. 오일호(53) 스포츠토토 사장은 1987년 오리온 마케팅부 과장으로 입사해 오리온그룹과 인연을 맺었다. 004년엔 스포츠토토 사령탑을 맡아 차별화된 마케팅으로 초기 난관을 극복했다. 특히 가라앉은 ‘토토´를 최근 ‘토토 붐´으로 확산시킨 것은 그의 공이 컸다는 평이다. golders@seoul.co.kr ■ 창업주 두딸 이혜경·화경씨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자매.’ 이혜경(53) 동양매직 고문은 국내 ‘재벌가(家)의 딸’들이 그러하듯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공(이화여대 미대)을 살려 동양매직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가정에 더 충실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장녀로서 모친인 이관희(서남재단 이사장) 여사를 도와 부친의 뜻을 기리는 서남재단의 이사로서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이다. 반면 이화경(49) 오리온 사장은 1975년 동양제과(현 오리온)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밑바닥을 두루 거친 뒤 26년만에 오리온 사장에 올랐다. 약력에서 알 수 있듯 이 사장은 그동안 ‘경영자의 길’을 걸어왔다. 언니와는 다르게 ‘바깥 일’을 더 중시한다. 이 때문에 자매를 잘 아는 지인들은 보통 언니를 ‘살림꾼’으로, 동생을 ‘여장부’로 부른다. 이 고문은 소박하면서 다정다감하다. 살림을 손수 챙기며,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다. 미술 감각을 살려 실내 장식과 정원 등은 손수 꾸민다. 또 혼자서 곧잘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살림 도구나 가족 옷을 산다. 자녀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는다.1남3녀를 모두 미국의 명문 대학인 스탠퍼드대에 진학시킨 것은 이 고문의 노력과 관심 덕분이다. 이 고문은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때 사회활동을 극도로 자제했으며, 수년간 미국에 머물며 자녀 뒷바라지를 했다. 현 회장도 틈틈이 아이들의 영어와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 막내딸 행담씨가 올해 대학에 들어가면서 이 고문은 건강 관리를 위해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이 사장은 경영인, 아내, 엄마의 ‘1인3역’을 소화하느라 늘 시간에 쫓긴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 소홀한 법이 없다. 자녀(1남1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업무 외의 약속은 잡지 않는다. 경영인으로서 이 사장은 어떨까. 호탕하고 도전정신이 강해 부친을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월간 현대경영이 2003년 8월 100대 기업 비서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신세대 여비서들이 모시고 싶은 CEO’에 뽑히기도 했다. 그만큼 업무상의 유연함과 직원 배려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인턴사원으로 출발해 구매부, 조사부, 마케팅부 등 주요 부서를 거쳐 누구보다 현장 분위기와 실무진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오리온의 외식 및 엔터테인먼트 계열사 직원들은 이 사장을 열정적인 CEO로 평가한다. 이 사장이 전담하는 계열사는 온미디어와 미디어플렉스, 외식 사업부문인 롸이즈온 등 3개사. 일주일을 나눠 각각의 회사에 출근한다. 이 사장은 현장 경영을 중시한다. 직원들과 직접 회의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영화사업을 담당하는 CEO로서 때로는 서울 삼성동의 메가박스에서 하루종일 영화를 보기도 한다. 이 사장은 “내가 재밌고, 감동을 받아야 관객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golders@seoul.co.kr ■ 두 CEO 경영스타일 비교 ‘외유내강 VS 실용주의’ 사위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다 보니 현재현(56) 동양 회장과 담철곤(50) 오리온 회장은 곧잘 비교의 대상이 된다. 재계 안팎에선 현 회장을 선 굵은 외유내강형으로, 담 회장을 철저한 실용주의형으로 분류한다. 기업의 성장세로는 담 회장의 오리온이 빠르다.1989년 매출액 1360억원에 불과했던 동양제과(현 오리온)를 지난해 1조 5300억원으로 10배 이상 키운 것은 신규 사업을 진두지휘한 담 회장의 공이 크다. 현 회장은 오리온이 분가한 이후 그룹 구조조정에 매진했다. 금융계열사를 통합, 매각하면서 부채비율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 이 덕분에 1000%를 웃돌았던 부채비율은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진입했다. 상대적으로 그룹의 외적 성장은 더디었지만 속은 눈에 띄게 알차졌다. 현 회장은 최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을 과시하며, 재계의 ‘스타 CEO’로 떠올랐다.CEO 서밋 의장으로서 각국 CEO(최고경영자)들과 토론 및 기자회견을 깔끔하게 소화해 화제가 됐다. 그는 이처럼 남들이 멍석을 깔아주지 않는 한 자신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외유내강형 CEO로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현 회장은 화를 내지 않는다. 늘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그룹 총수가 화를 내서 임직원들의 기를 꺾으면 차후 일 진행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대신 원칙에 따라 결정된 내용은 남들이 주저해도 과감하게 추진한다. 현 회장이 경영자로서 평가받은 첫 사업은 1984년 일국증권(현 동양종합금융증권) 인수다. 당시만 해도 증권사는 대형사고와 부실경영의 대명사로 인식됐던 터라 임직원들의 증권사 인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현 회장은 자본금 20억원에 지점이 덜렁 하나뿐인 일국증권을 불과 5년만에 10대 증권사로 키워냈다. 이를 계기로 동양은 30년간 지속된 시멘트와 제과 사업에서 탈피해 금융업 중심으로 업종 다변화를 일궈냈다. 현 회장의 취미는 바둑. 중학교 시절 바둑을 배워 고등학교 때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고, 대학 때는 교내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을 했다. 장수영 9단에 2점으로 버티는 아마 고수다. 현 회장의 고교·대학 동기들은 그를 ‘티없는 친구’로 기억한다.“품성이 맑고 깨끗하며 원만할 뿐 아니라 일처리까지 깔끔하다.”는 것이다. 담철곤 회장은 실용주의자이자 ‘일벌레’라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도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골프를 치지 않는다. 대신 스키 등 다이내믹한 스포츠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냉혹한 스타일도 아니다. 직원들은 잔정이 많은 CEO라고 얘기한다. 한 임원의 설명이다.“부장 시절에 기획안을 제출했다가 담 회장으로부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회장으로부터 휴대전화가 왔습니다.‘다시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다’는 내용이었죠. 직원의 기를 꺾지 않으려는 회장의 배려였지요.” 담 회장은 인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90년대 초반에는 20대 중심의 신규 사업팀을 구성한 뒤 수십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여러 분야의 사업에 진출해 쓴맛을 많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훗날 오리온의 케이블 TV사업과 극장·외식사업 등으로 진출해 현재의 그룹 규모를 갖추는데 일조했다. 담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잘 엮는다. 국내 제과사들이 90년대 안방시장에 안주하며 저성장의 어려움을 겪을 당시,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오리온의 고성장을 주도했다.2003년엔 남들이 모두 망했다고 평한 체육복표 사업체 스포츠토토를 인수해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바꿔 놓고 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새달1일까지 전국 동시다발 시위”

    쌀 비준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23일 정치권을 규탄하는 성난 농민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있었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전국농민회총연맹측은 “앞으로 시·군·도별로 동시다발로 촛불집회를 열고 다음달 1일 서울에서 대규모 농민대회를 개최해 비준안 무효화를 이끌어 내겠다.”고 밝혀 쌀 비준안 통과 이후에도 당국과 농민간 마찰이 계속될 전망이다. 전농과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등 농민단체 회원 3500여명은 전국 77개 지역에서 농기계로 고속도로를 막고 지역구의원 사무실을 점거하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특히 오후 3시10분쯤 비준안 통과소식이 전해지자 전농측은 “국민을 버린 정치권이 제2의 갑오농민혁명을 불렀다.”면서 “농민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만큼 정권퇴진운동에 본격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서울로 향하던 전농 소속 2100여명의 농민들은 농기계와 트럭 등을 경부와 남해, 서해안 고속도로 입구 등 46개 나들목에 세운 뒤 경찰과 거센 몸싸움을 벌였다. 광주와 전남지역 9개 지역에서는 농민 500여명이 트랙터 등 농기계 222대와 화물차 156대를 동원, 고속도로 진입을 시도하며 경찰과 대치했다.경북 안동지역 농민 60명도 이날 오전 화물트럭 41대를 동원해 서안동IC를 통해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하며 경찰과 충돌했다. 고속도로를 점거한 일부 농민들로 인한 정체도 있었다. 낮 12시45분쯤 경남 함안군 남해고속도로 112㎞ 지점에서 전농 경남도연맹 소속 농민 트럭 등 차량 30여대가 도로를 점거, 부산과 진주 양 방향 통행이 1시간여간 전면 중단됐다.밤 11시 20분쯤에는 경남도청 앞 삼거리에서 집회를 벌이던 진모(48)씨가 갑자기 불길로 뛰어들어 전신에 화상을 입고 인근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퇴계집안 보러오세요

    조선시대 종가는 어떻게 살았을까? 아파트가 밀집된 서울에서 전통 있는 종가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역사박물관이 마련한 ‘진성이씨 기증유물특별전-옛 종가를 찾아서’는 600년 전통의 사대부 종가의 생활모습을 고스란히 서울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15세기 초 경북 안동에 정착한 뒤 퇴계 이황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진성이씨(眞城李氏) 대종가. 대지 760평에 본채와 사당, 정자,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이뤄진 넓은 종가에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와 전적류, 유품 등 2500여점을 대종손 이세준(59)씨가 최근까지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동안 유물을 정리하고 도록을 펴낸 역사박물관은 기증유물 중 전시 가치가 높은 110점을 추려 첫 특별전을 마련한 것. 전시품으로는 퇴계의 증조인 이정(李禎)이 세종에게 하사받은 ‘선산부사임명장’을 비롯, 조선 초기의 교지(告身),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이정의 종손인 이정회가 1577년부터 1612년까지 30년이 넘게 쓴 일기인 송간일기(松澗日記·4책) 등이 눈에 띈다.1590년경에 작성된 조선조 관직자 명부인 관안(官案)도 볼 수 있으며, 퇴계가 1567년 당시 종손 이정회에게 사당의 건립에 대한 의견을 써서 보낸 간찰도 있다. 특히 1600년에 간행된 이 가문 족보인 ‘진성이씨족보’도 서울 나들이를 했다. 현존하는 족보 중 세번째로 오래된 것으로, 목판본 3책으로 찍어내 그 양식과 내용이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후기 이후 족보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와 함께 사랑방에서 종손이 애용하던 먹감서류함·담뱃갑 등과 안채에서 종부가 사용한 사주단자·족두리·성주단지 등 생활·민속신앙 유물, 제사와 의례에 사용된 신주독·만장 등 유물도 전시된다. 사대부가의 혼인 및 시집살이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이정에 대한 불천위제사의 절차를 담은 25분짜리 영상물도 흥미롭다. 전시는 내년 2월12일까지.(02)724-0114.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엄마, 걱정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장사하면 되잖아!”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자기도 잘 먹던 뽑기장사해서 먹고 살면 되니 엄마보고 걱정 말란 것이다. 너무나 대견하고 안쓰러워 큰아들을 끌어안고 그때 처음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울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식들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아버지의 유업을 잘 지키고 있다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리라.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켜 애경을 내가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기로 다짐했다. 국내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인 장영신(69) 회장이 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남편이 죽고 회사를 떠맡게 된 이야기를 이렇듯 생생하게 되짚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강한 모성, 남편의 유업을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경영참여 이유라고 덧붙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을 심장마비로 잃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3남1녀의 어머니로 살림만 하며 지내던 12년차 주부가 국내 대표 생활용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애경 창립 17년 만의 일이다. 장 회장은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웠고 이듬해인 1972년 8월1일부터 출근했다.1954년 6월 남편 고 채몽인씨가 5000만환으로 세운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가 현재 LG그룹의 모태인 비누제조사 락희화학과 경쟁을 벌이며 사업확대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장 회장이 경영참여를 선언하자 시댁과 친정 가족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부터 “그만두겠다.”고 협박하는 임원들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애경이 얼마 가지 않아 망하겠다.”는 말도 했다. 남편이 죽은 뒤 사장 자리를 맡고 있던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장 회장이 취임하자 회사를 나가버리기도 했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장 회장은 “잠자리에 들면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매일 일감을 집으로 가져와 밤늦도록 공부했고, 관청에선 담당공무원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다는 이유로 동행했던 회사 임원으로부터 책상 밑으로 구둣발에 차이기도 했다. 경제인 모임에서는 홀로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기둥 뒤에 숨어 몇시간이나 서 있다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잘해보겠다는 일념으로 겁없이 뛰어들었지만 기업환경도 나쁜 것뿐이었다. 경영에 참여한 1972년 말부터 오일쇼크에 따른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그러나 장 회장은 더욱 힘을 냈다. ‘불황에 투자하라.’를 모토로 공장을 지방으로 확대 이전하는 한편 남편이 계획만 했던 석유화학 원료제조 분야를 애경의 미래 지표로 삼아 애경유화·애경화학·애경PNC(전 애경공업)·애경정밀화학·코스파 등 관련 회사를 속속 설립했다. 비누 산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본격적인 화학공업은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지금까지도 애경에서 매출 비중 5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사업군이다. 남편이 설립한 비누회사도 소홀하지 않았다. 제품을 고도화시키는 데 집중했던 만큼 히트 상품도 꾸준히 내놓았다.1975년에는 분말 합성세제인 ‘크린업’을, 이듬해에는 액체세제 ‘써니’를,1980년 들어서는 세제 ‘스파크’를,90년 들어서는 클렌징 화장품인 ‘포인트’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트리오도 이름은 같지만 세척력을 높이고 공해도를 낮춰 지금까지도 1등 주방 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줍은 소녀…‘터프우먼 마담 장(張)’으로 장 회장은 어머니 고 문금조씨와 아버지 고 장회근씨의 4남4녀중 막내딸이다.1936년 7월22일 서울에서 태어나 종로구 명륜동 1가 등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 어머니 문 여사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다. 장 회장은 혜화동성당 유치원을 나온 뒤 혜화국민학교를 다녔다. 노래를 잘해 전국 콩쿠르에서 상도 자주 받았다. 건강하고 공부도 잘해 반장을 도맡기도 했다. 부모님의 학구열이 강한 덕에 형제들 모두 공부를 잘했다. 큰오빠 고 장윤옥씨는 일본대 전문부 상과를 졸업한 뒤 감사원에 들어가 5국장(부이사관)까지 지냈고, 미국으로 이민간 큰언니 장영옥(81)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애경유지 사장을 지낸 바 있고, 서울대 정외과 출신의 셋째 오빠 고 장위돈씨는 서울대 정외과 교수,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를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애경유지 이사를 지낸 넷째 오빠 장기돈(75)씨는 성균관대 상대 출신이다. 장 회장의 집안은 일제시대 유학을 갔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광복 후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6·25가 터지자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경기여중을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재학중이던 그는 돈 안들이고 대학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어 재능을 인정받아 교장선생님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시켰다.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1955년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 힐 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에도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당시 교내에서 오페라 하우스와 협연한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를 맡기도 했다. 애경이 쉘, 유니레버 등 다국적기업과의 합작을 무리없이 진행했던 배경에는 유학 생활로 다져진 영어실력과 당시 익혔던 외국 풍습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피란시절 여고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사과장사를 한 적도 있다. 좌판을 벌여놓고 사과를 예쁘게 쌓아놓았지만 막상 손님이 와서 얼마냐고 물어보면 먼산 바라보기 일쑤였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탓에 장사꾼이 아닌 척한 것이다. 그러나 애경을 경영하면서 그에게는 ‘호랑이’‘터프우먼’‘마담장’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돌파구로 외국계와 합작에 집중했을 당시 그쪽에서 공동대표를 요구하면 그는 “여기는 한국 회사다. 너희가 한국에 대해 뭘 아느냐. 한국 문화를 이해할 때까지 너희들은 뒤에서 지켜봐라.”고 충고했다. 합작 기념식에서 태극기를 달지 말라고 요구받으면 애국가 봉창,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순서대로 진행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이런 장 회장을 놓고 ‘마담장 터프우먼’이라고 외쳤다. 사내에서는 ‘호랑이’로 통했다.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는 성격과 한번 결정하면 매몰차게 추진해 나가는 돌파력 때문이란 설명이다. 물론 풀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래서 ‘너그러우면서도 불같다.’는 평을 받는다. ●남편과는 어릴적 이웃사촌 장 회장과 남편 채몽인씨는 이웃사촌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고 채씨는 장 회장이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애정 공세를 퍼붓다 미국까지 따라가 무려 3년11개월 동안 구애 공세를 펼쳤다. 공개청혼으로 남편의 존재는 대학내에도 다 알려져 수녀 교수들로부터 “왜 저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느냐, 이해를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는 졸업후 약속대로 서울로 돌아와 23세이던 1959년 6월 신당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식들(3남1녀)의 혼사는 장 회장보다 더 빠르다. 대부분이 대학시절에 결혼을 모두 끝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연애 결혼이다. 큰아들인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45)은 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4학년 재학 당시 학교에서 만난 홍미경(43)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교제 1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부인은 1학년에 재학중인 생활미술학과 새내기. 채 부회장은 1983년 졸업후 미국 보스턴대에 MBA를 받은 뒤 1985년 애경산업 생산부 마케팅부 등을 섭렵했다. 부인 홍씨도 함께 유학을 떠나 보스턴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홍씨는 전공을 살려 현재 종로에서 갤러리 ‘사간’을 운영 중이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미모가 인상적이다. 장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평소 “우리 큰애(큰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정말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한다. 인천교대 음대 교수를 지낸 장인 고 홍종수옹은 서울시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 등에서도 활약한 음악가다. 장 회장의 맞손녀이자 큰아들인 채 부회장의 딸 문선(19)양은 할머니의 성악 실력과 외할아버지의 음악 재능을 모두 물려받아 현재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다. 유통부문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채동석(41) 애경백화점 사장은 성균관대 철학과 3학년 때 미팅으로 만난 동갑내기 이정은(41)씨와 결혼해 졸업하기 전 1년 동안 학생 부부로 지내기도 했다. 채 사장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국제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1991년 애경에 합류했다. 현재 애경백화점,AK면세점, 수원애경역사, 평택역사 등 애경의 유통부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씨는 현재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프랜치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의 아버지 이병문(75)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예편한 4성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아세아시멘트 회장을 지냈다. 큰딸 채은정(42)씨는 외숙모가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안용찬(46) 애경 사장을 소개해줘 결혼한 경우다. 안 사장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과정 재학 당시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채씨 외숙모의 권유로 은정씨를 만났다. 은정씨도 대학 3학년때 결혼했다. 은정씨는 이화여대 조소학과를 나와 미국 애크리하트대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뒤 1998년 애경산업에 들어왔다. 애경 마케팅지원부문 상무를 맡고 있다. 채 부회장과 연세대 경영학과 77학번 출신인 안 사장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채 부회장은 “안 사장이 나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친구 사이여서 이미 대학시절부터 안 사장을 알고 지냈다.”면서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고 유학을 끝낸 뒤 애경으로 꼭 와줄 것을 내가 청했다.”고 말했다. 안 사장은 1987년 애경산업 마케팅부에 입사하기 이전 유학을 마치고 미국 폰즈사에서도 마케팅 담당 업무를 맡았다. 통역 장교 1기 출신인 안 사장의 아버지 안상호(76)씨는 육군 참모총장 수석 보좌관,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 플로 코리아의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막내 아들 채승석(35) 애경개발 부사장은 50만평 18홀 규모의 경기도 광주시 중부 컨트리클럽을 운영하는 애경개발을 맡고 있다. 애경개발은 1987년 출발 당시부터 애경의 계열사중 유일하게 주력인 세제·화학과 동떨어진 업종이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한때 SBS아나운서로도 활동했던 한성주(31)씨와 99년 6월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단국대 사학과 89학번인 채 부사장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아 노래를 잘한다. 당초 친정에서 장 회장의 경영참여를 반대했지만 앙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카들도 여럿 애경에 몸담고 있다. 둘째 오빠인 고 장성돈 전 애경유지 사장의 큰아들인 장인규(53)씨는 과거 애경PNT(전 경신산업) 사장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갔고, 둘째 아들 장인원(49)씨는 계열사인 코스파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 회장의 셋째 오빠인 고 장위돈씨가 낳은 3형제 중 큰아들인 우영(37)씨는 애경 화장품사업부장으로 있다. ●애경백화점에 남다른 애착 장 회장은 회사를 맡은 이후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큰아들 채 부회장이 1993년 9월10일 애경백화점 개점식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한 순간 ‘마음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됐다.’고 회고했다. 애경백화점 본점인 서울 구로구점은 창업자인 남편 고 채몽인씨가 타계하는 순간까지 비누를 만들었던 창업 터전이다.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 비누인 ‘미향’을 만든 곳으로 70년대까지 ‘트리오’ 등 세제를 만들다 공장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창고로 써왔다.“아버지가 물려준 땅이니 잘 연구해서 활용해보라.”고 맡긴 지 3년 만에 1만평 부지가 백화점으로 거듭났다. 장 회장은 애경백화점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지금도 두 아들이 사이좋게 이 백화점 5층에서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다. 장 회장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백화점을 다녀갈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다. 장 회장은 즐기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 채 부회장은 장 회장에 대해 “희생하는 삶만 사신 분”이라면서 “항상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아왔다.”고 말했다. 장 회장은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고 남들이 취미를 물으면 ‘빨래’라고 대답할 정도로 아직도 집안 일을 혼자 한다. 말년에 잠시 정치에 참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크게 어긋나는 길은 아니란 평이다.1997년 고사해 오던 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여성들이 기업하기 불편한 환경을 고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다.1999년 민주당 신당창당 준비위원 공동대표로 영입된 뒤 백화점이 있는 구로를 텃밭삼아 16대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왜 정치를 하느냐. 이미지 버린다.”는 우려가 많았지만 여성경제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선배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더이상 정치에 참여할 뜻은 없다. ●가족간 우애는 애경의 힘 장 회장은 경영에서 손을 뗐다. 애경 창사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4년 구로동 본사 회장실을 비웠고 결재도 큰아들에게 모두 맡기고 보고도 받지 않는다. 애경복지재단 일에 관여하며 무역협회 부회장직만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취미삼아 중국어를 배우고 있고, 순환기계통이 안 좋은 탓에 홍콩에 침을 맞으러 다니고 있다.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로는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간 볼썽사나운 재산 분쟁이 많은 재계에서 애경가문 형제들은 함께 회사를 키워가며 우애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채 부회장과 동생 채동석 사장은 10년 넘게 한 사무실을 쓰고 있다. 채 부회장은 “인맥이랄 만한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고 술을 먹거나 함께 어울리는 대상이 모두 형제들이다.”면서 “네 남자가 모여 술을 자주 먹는다.”고 말했다. 며느리들도 친하다. 큰동서와 작은 동서도 단짝 친구 같다. 형제들이 화목할 수 있는 주요 원인이란 지적이다. 채 부회장은 1985년 입사한 뒤 점차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열며 유통업계에 뛰어든 뒤 AK면세점(2001년) 애경 2호점인 수원애경역사(2003년)로 확대했고 3호점 평택역사는 2009년 완공된다. 제주도와 함께 설립한 ㈜제주항공을 통해 2006년 6월부터 민간항공 사업도 벌인다. 채 부회장은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동생 채동석 사장은 유통부문을, 처남인 안용찬 사장이 생활용품 부문을 키우고 있다.2세대에 와서 생활용품과 기초화학의 양축을 키워가는 한편 유통과 항공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채 부회장은 고혈압이 있어 거의 매주 등산을 즐기고 있다. 유아세례를 받고 결혼식도 명동성당에서 올린 천주교 신자이지만 산을 자주 찾는 탓에 항상 절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산사를 찾을 때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항상 감사드린다는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서 “애경의 힘은 형제간의 우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jhj@seoul.co.kr ■ 장회장 ‘유별난 시간개념’ 애경가(家)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유별나다. 장영신 회장은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10분 먼저 도착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사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면 꼭 10분 전에 나가 상대방을 기다린다. 약속 시간보다 단 5분이라도 늦는 사람은 첫 대면부터 뭔가 부족한 사람이란 평가를 하게 된다. 나는 부하 직원들을 평가할 때도 시간관념을 하나의 척도로 삼는다. 시간 하나 제대로 못지키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시간은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첫 관문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작은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을 대변한다.”(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그가 경영일선에 있을 때는 ‘나인 투 파이브’ 원칙을 지켰다.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늦어도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면 기상하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조간 신문을 읽고 그날의 주요 업무를 점검하고 계획했다. 새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도 아침 시간을 이용한다. 회의도 결재도 오전에 처리한다. 관청과 은행이 문을 여는 아침 9시 이전에는 하루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일을 놓은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은 그대로다. 그래서 애경에는 오전 8시만 되면 결재를 받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오전 9시면 그날 결재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철저한 시간관념은 애경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배어 있다.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 모두 새벽형 인간이다. 채형석 부회장은 한술 더 떠 새벽 4시면 일어나 아침밥을 꼭 챙겨먹고 출근한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구들끼리 밥을 먹기로 하거나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모일 때는 아예 30분 먼저 나갈 정도다. 채 부회장은 “식사 시간을 통해 가족 모임이 주로 이뤄지는데 식당 문을 여는 시간이 바로 우리 가족이 만나는 시간”이라면서 “예컨대 6시에 모이기로 해도 식당이 문을 여는 오후 5시 30분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다.”고 전했다. 급한 성격 탓에 식사를 시작하면 1시간내에 모두 끝내고 일어선다. 한 번은 막내인 채승석 부사장이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약속한 정시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미 식구들이 모두 제사를 지낸 뒤 산에서 내려오고 있더라는 일화도 있다. jhj@seoul.co.kr ■ 장영신 회장과 제주와의 인연 장영신 회장의 ‘제주 사랑’은 남다르다. 그의 제주 인연은 1970년 창업주인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이 타계하면서 더 각별해졌다. 장 회장은 남편의 조의금 전액을 제주도 재경장학회에 기증했다. 장학회는 이 돈으로 지금까지 매년 30명, 모두 1300여명의 제주 출신 대학생을 후원했다. 제주도는 고 채 사장의 고향이다. 큰아들 채형석 부회장도 최소한 1년에 세차례 이상 제주도에 간다. 선산이 모두 중문 색달동에 있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가끔 간다. 채 부회장은 “제주는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저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 제주도에 요양을 가셨을 때 동행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낸 기억이 있어 친근하다.”면서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는데 증조 할아버지까지만 기록이 있어 뿌리를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 회장도 제주에서 지낸 시절이 있다. 경기여고 재학시절 6·25때 제주로 피란가 1년간 지냈다. 장 회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주도 여성들을 보면서 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애경은 제주도와 손잡고 내년 6월부터 도민의 숙원인 저가항공 시대 대열에 동참한다. 애경은 제주도와 합작해 저가항공사인 ㈜제주항공을 만들었다.㈜제주항공의 왕복 비용은 기존 항공비용의 70% 수준인 11만원선.㈜제주항공의 애경 지분은 75%다. 채 부회장은 “이윤이 크게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경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영역이라고 보고 사업을 결심했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는 “장 회장의 제주 사랑과 무관치 않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통계로본 서울] ③ 인구(하)

    [통계로본 서울] ③ 인구(하)

    최근 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속도가 유래없이 빨랐던 탓에 고령화로 인한 사회변화도 급격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인구이동이 뚜렷한 ‘이촌향도’의 경향을 보인 탓에 농촌지역이 먼저 고령화 문제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제 서울 등 대도시 지역에서도 노인 인구층이 급격하게 늘어 도시 역시 고령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서울에서 고령화가 진행되는 현상은 인구의 성별·연령별 구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인구피라미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인구피라미드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출생률은 높지만 사망률이 낮아지는 사회에서는 피라미드형을 띠다가 출생률·사망률이 모두 낮아지면 종형으로 바뀐다. 이 상태에서 출생률이 더욱 떨어지면 인구가 감소하는 항아리형으로 변하게 된다. 지난 85년 서울의 인구피라미드를 보면 피라미드형에서 종형으로 변해가는 과도기 상태임을 알 수 있다.95년에는 14세 이하 유소년 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전체적으로 항아리형으로 변하고 있다. 지난 2003년의 인구피라미드는 전형적인 항아리형으로 나타났다. 출생률이 사망률에 비해 더 큰폭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또 85년과 95년 인구피라미드에서는 20∼30대의 인구가 서울로 유입돼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컸지만 2003년 인구피라미드에서는 이같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규모 생산시설들이 서울을 떠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지난해를 기준으로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서울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6.6%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전체 인구 중 노인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를 넘으면 고령화 사회로 정의된다. 이같은 속도라면 올해말 또는 내년초쯤 서울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25개 자치구 가운데 종로·용산구 등 10개구는 이미 노인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를 넘어서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 다음 주는 ‘서울사람들의 학력 수준’에 대해 알아봅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막걸리통 싣고 찌리링 15만리

    막걸리통 싣고 찌리링 15만리

    1969년 3월 30일. 서울·중부 지방은『최저 영상 3도, 최고 영상 12도, 북서풍, 차차 맑음』의 화사한 봄날을 맞아 상춘객들은 창경원으로 우이동으로 떼를 지어 몰려나갔다. 이 춘3월 좋은 날씨에 서울 비원(秘苑) 돈화문(敦化門) 앞에선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진기한 경기가 벌어졌으니 서울 탁주(濁酒) 도매업자 연합회가 주최한 제1회 실용자전거 경기대회가 바로 그것. 알기 쉽게 말하자면 막걸리통 배달꾼들의『누가누가 잘 달리나』대회다. 이 진기한 대회에서 우승의 영예를 차지한 사람이 바로 올해 25세의 김창옥(金昌玉)씨. 앓다가 참가한 경기인데 출발할 때부터 선두 달려 정각 하오 1시 5분 전 돈화문 앞을 출발, 반환점인 의정부까지 갔다가 되돌아와「골인」한 것이 정각 2시 16분. 그러니까 꼭 1시간 21분 만에 달린 셈이다. 출발 때부터 선두를 달리기 시작한 선수가 바로「백·넘버」2번의 김창옥씨. 김씨는 시종 물에 축인 수건을 입에 물고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페이스」로「페달」을 밟았다. 『대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출전신청을 한다고 달려갔죠. 그런데 가보니까 먼저 와있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래 2번이 되었죠』하는 김씨는 경남 함양군 지북면 개평리 태생. 찢어지게 가난한 농군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씨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났다. 가난한 속에서도 가까스로 국민학교를 졸업. 『공부를 특별히 잘 하진 못했어도 운동회 날만 되면 내 세상이었죠. 달리기, 씨름 등에서 꼭 1, 2등이었으니까요』 서울에 올라온 건 8년 전인 17살 때. 위로 두 형님이 있지만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형편. 김씨가 서울로 올라올 생각을 하게 된 건 당시 서울에서 술도가를 차리고 있던 사촌형의 권유에 따른 것. 『말은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안했습니꺼?』 8년 다린 거리 치면 부산~백두산 73번 서울 올라와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막걸리 한 말들이 통을 뒤에 싣고 동서남북으로 온 장안을 누비며 술을 배달했다. 배달 시작은 아침 7시부터 낮 12시께까지. 배달을 끝내고 나면 좀 한가해진다. 저녁을 먹고 나서 밤 9시 반쯤이면 다시 자전거를 타고 거래처를 한 바퀴 돌며 수금, 밤 11시가 지나야 하루 일과가 완전히 끝난다. 이런 일과를 꼬박 8년 동안 계속해왔다. 그러니까 하루 평균 20km를 달렸다 치고 8년 동안 김씨가 자전거를 타고 다닌 거리는 총연장 58,400km(14만 6천리). 부산서 백두산까지의 거리를 73번 달린 셈이다. 그러니까 한 해에 부산서 백두산까지 9번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건각(健脚)의 소유자. 김씨는 막걸리통을 나르는 틈틈이 성동체육관에 나가며 유도를 익혔다. 2년 만에 초단을 땄다니 어지간히 운동신경이 발달된 모양. 이번 대회에 출전신청을 해놓은 뒤 김씨는 시간이 나면 대회「코스」인 돈화문 앞~의정부 간을 현지답사했다. 술통 나르던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니 별로 힘은 안드는데 제일 난관은 미아리고개인 것을 알았다고. 『그래 힘을 아껴두었다가 미아리고개에서「라스트·피치」를 뽑아야겠다고 계산해 뒀죠』 그러나 김씨는 대회 나흘 앞두고 독감에 걸렸다. 목이 부어 오르고 열이 올랐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 대회가 열리는 30일 아침에야 겨우 열이 내리고 움직일만 했으나 이미 우승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대회에 나간다고 새 자전거 사준 주인아저씨 성의를 생각하니 해볼 때까지는 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밥 한끼 굶은 채 나갔죠. 한창 달리다 보니 옆에서「코로나」차가 한 대 따라오는데 우리 집사람과 사촌형, 주인아저씨들이 목이 터져라고 응원을 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 힘을 내서 달렸죠. 응원 덕택에 1등 한 거죠, 뭐』 반환점을 돌아 수유리 검문소 앞을 지날 때 선두로 달리던 김씨의 뒤를 쫓던 선수는 약 4백m 가량 처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회 진행차량이 김씨의 바로 앞에서 기계고장으로 급정거. 미처「핸들」을 돌리지 못한 김씨는 그대로「지프」를 들이받았다. 앞바퀴가 박살이 났다. 아내를 재산 1호라 하면 상탄 텔레비는 재산 2호 다행히도 김씨는 다친 데가 없이 그 자리에서 딴 자전거로 갈아타고 다시 경기에 나섰으나 그 동안 뒤를 쫓던 선수가 선두로 나서 김씨는 약 2백m 가량 처져 있었다. 『미아리고개만 믿었죠. 그래서 거리를 약 1백m 가량으로 좁혀놓고는 미아리고개서 떨구어버릴 생각이었죠』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아 미아리고개를 넘을 때 여전히 50m 정도 김씨는 뒤떨어져 있었다. 김씨가 선두로 다시 나선 건 창경원 앞을 지날 때. 결승점을 선두로 들어서자 지친 김씨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것은 김씨의 아내인 이영옥(李英玉)씨. 이씨는 수많은 구경꾼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김씨의 품 안에 뛰어들었다. 곧이어 준비해 두었던 물통을 갖다 세수를 시켜주기도. 『우리 마누라, 그래 봬도 아주 착실한 살림꾼입니다』 하는 김씨가 이영옥씨를 만난 건 약 5개월 전 일. 김씨가 일하고 있는 묘동상회 앞 골목에서 밥장사를 하고 있던 이씨와「눈이 맞은」건 매일 점심을 이씨에게서 사먹었기 때문. 그러다 한 달 만에「냉수와 막걸리 떠놓고」결혼식을 올렸다. 일수로 갚기로 하고 가게 하나를 얻어 밤에는 거기서 자고 낮에는 아내 이씨가 계속 밥장사. 김씨는 자전거를 끌고 막걸리통을 나르고 있다. 이 맞벌이 부부의 한 달 수입은 1만 5천원 안팎. 살림 살고 일수 갚고 나면 겨우 계 하나 들 돈이 남는단다. 이런 빠듯한 생활 속에서 이번 대회 우승으로 싯가 6만원의 9「인치」짜리「텔레비」가 한 대 생겼다. 돈이 아쉬울텐데 팔아버리지 않겠느냐니까『이거 내 힘으로 얻은 건데 마누라한테 못해 준 결혼선물 대신 주어야죠. 어떻게 팝니까』란다. 마누라를 재산목록 1호로 친다면 재산목록 제2호로 단간방에 두고두고 보겠다는 것. 165cm의 키에 체중 68kg. 술은 많이 먹어야 막걸리 한 되. [ 선데이서울 69년 4/6 제2권 14호 통권 제28호 ]
  • [길섶에서] 강북 학생/이목희 논설위원

    서울 강북지역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여조카가 며칠전 강남쪽으로 전학가더니 첫 반응이 묘했다.“새로 다닐 학교가 별것 없던데 뭘요…. 건물도 그저 그렇고, 애들 공부하는 내용도 어려워보이지 않던데요.” 강남학교가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다는 얘기를 여러차례 들었을 것이다. 자신감 속에서도 긴장하는 속내가 간간이 드러났다. “강북에서 전학왔다.”고 하면 선생님들이 “그래, 열심히 해.”라고 말하는게 조카는 듣기 싫다고 했다. 으레 하는 얘기였겠지만 “강남에 빨리 적응하라.”는 충고로 들리는 듯했다. 강북 학교에서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조카였다. 아이 엄마는 그 성적이 유지될지 신경 쓰는 눈치였다.“강남 학생들은 선행학습이 많이 돼있어서 학교 수업은 느슨할 수 있다.”면서 딸을 독려했다.“학원선생에게 탐문해봤는데 영어시험이 특히 어렵게 출제된다더라.”면서 이미 토익 850점을 넘어선 아이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35년전으로 돌아갔다. 소도시에서 전교 1,2등 하던 친구가 서울로 전학와 초라한 첫 성적표를 받은 뒤 놀라던 표정이 생생하다. 조카가 좋은 성적을 올려 강남북 격차론을 보기좋게 날려주길 바란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태평양그룹 창업주 고 서성환(1924∼2003) 회장은 화장품업계의 신화가 됐다.‘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인 서 창업주는 어려서부터 개성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기업경영에서 개성상인의 맥이 면면히 흘렀다. 서 창업주는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평양이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재단이 3개이며 후원 단체는 셀 수없이 많다. 신용과 근검절약을 가장 큰 밑천으로 삼는 개성상인의 기질,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는 2세 경영으로 넘어온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업 태평양은 1945년 9월5일 창립됐지만 연원은 좀 더 거슬러올라간다. 태평양의 역사를 알려면 서성환 회장의 가족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서 회장은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 창업주 가족은 소학교 시절인 1930년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개성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인 동현동에 정착했다.‘상인의 도시’ 개성 생활은 소년 서성환에게 이후 기업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 정착한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 윤 여사가 책임졌다. 전 재산을 털어 조그마한 상점을 열고 잡화를 취급하다가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윤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이웃으로부터 ‘여중군자’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사교적이었다.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개성지방은 소득수준이 높아 우수한 품질의 동백기름이 잘 팔린다는 것을 간파한 윤 여사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 기름을 썼지만 상류층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애용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머릿기름을 자르르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태평양 모체는 어머니의 ‘창성상점’ 동백기름에서 자신을 얻은 윤 여사는 차츰 사업영역을 확대했다.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도했다. 또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소년 서성환도 물건을 도매상에 배달해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며 가업에 참여했다. 당시 제조방식은 물론 가내 수공업이었다. 솥을 걸어놓고 그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직접 젓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품질은 우수하다는 평을 얻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을 얻은 윤 여사는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상품에 ‘창성당제품’‘오리지날’ 등을 표기했다. 가업에 참여한 소년 서성환의 경영 수업은 계속됐다. 보통학교시절부터 소년 서성환은 하루 끼니인 도시락 세개를 자전거에 싣고 해뜨기 전에 개성을 출발,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곤 했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 화장품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거래 도매상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직접 팔기도 했다. 자전거로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 유통에도 눈을 떴다.10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글리세린과 향료, 빈 병을 사는 일을 도맡았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백화점에도 들어갔다. 백화점에 작은 코너를 개설, 자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인기가 높던 다른 회사의 제품도 위탁 판매했다. 제조와 판매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도 함께 판다는 서성환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화장품 제조법도 어머니 윤 여사로부터 직접 배웠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열을 가하는 강약 정도,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의 비율 등에 따라 화장품의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화장품 유통에 이어 제조까지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스물한살이던 1944년 강제징용되면서 그의 화장품 수업은 중단됐다. ●‘블루오션’ 태평양으로 광복을 맞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청년 서성환은 화장품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와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도전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광복정국의 혼란속에서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났다. 서울로 이주, 회현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청년 서성환은 당시 누님 한분이 내려오지 못한 이산가족의 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이 즈음 부인 변금주(77)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모조품과 위조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50년대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 값에 팔 수 있다.”며 시종일관 품질을 강조했다.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은 태평양 1호 제품의 영예를 안았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6·25가 터졌다. 그는 피란길에도 화장품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의 집념을 보여줬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1951년 순식물성의 ABC포마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화장품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서성환 회장이 직접 작명한 ABC포마드는 60년대까지 대히트 브랜드로서 태평양의 성장 기틀이 됐다. 청년 서성환은 환도 이후 1954년 후암동시대를 열면서 기술력에 대한 갈증에서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1953년 처음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을 통해 화장문화가 태동한 것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향기나는 밥, 그리고 최초의 연속… 서성환은 후암동 시절 잘 팔리던 화장품을 구해 직원들과 함께 실험을 거듭했다. 생산직 여종업원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가내 수공업에 실험기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지사. 향료가 밴 솥과 물바가지를 이용해서 밥을 하면 향내 나는 밥이 되고, 크림을 만들었던 도구를 쓰면 구리무 향밥이 됐다고 한다. 56년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 성장가도에 들어섰다. 서성환은 57년부터 해마다 기술자들을 독일과 일본에 유학시켰고,58년엔 동양 최초로 고성능 미분기를 도입했다.59년 주식회사 체제로 출범했고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장업사의 새 장을 열었다.60년 장업계 최초의 해외방문,64년 오스카 브랜드로 최초의 화장품 수출, 당시 획기적인 방문판매제와 아모레화장품 개발 등에 힘입어 급신장했다.68년 매출이 14억 2800만원으로 창업 이후 처음 10억원대를 돌파했다. 당시 태평양의 품질은 어느 정도였을까?지난 71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화장품 콘테스트에서 3개의 금상을 수상했다. 화장품 제조 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74년 장업계 최초의 소비자과를 신설, 정부의 소비자 기본법안보다 3년 빨리 소비자 중심을 지향했다. 순항하던 태평양은 90년대 들어 무한경쟁시대를 맞았다. 서 창업주는 창업 50년을 맞은 95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을 다짐했다. ●태평양에 순항중인 2세 경영 서 창업주는 개성상인 특유 기질을 두 아들에게 물려줬다. 서 창업주는 지난 82년 장남 영배(49)씨를,87년 차남 경배(42)씨를 입사시키면서 2세들에게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영배씨는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 지사를 거쳐 태평양증권 부사장 태평양종합산업의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태평양개발 회장으로 기업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영배씨는 태평양개발을 연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 건설업체로 키웠다. 차남인 경배씨는 재경본부를 시작으로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태평양증권·태평양패션·프로야구단 돌핀스·여자농구단 등 계열사를 정리했다.97년 3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태평양에 2세 경영의 배를 띄웠다. 지난해 매출은 1조 1053억원. 후계작업이 부드럽게 진행되던 2003년 1월 장원 서성환 회장은 영면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 태평양은 해마다 50억원 가량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여성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여성에게 되돌려준다.’는 취지에서 주로 여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이윤의 사회환원은 기업윤리 이전에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소신이라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는 “창업주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돈을 버는 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다.‘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후덕함도 있었다. 그러나 창업주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는 개성상인의 ‘짠돌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서 창업주는 지난 63년 중앙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성환 장학금’을 만들었다. 중앙대 최초의 외부장학금이다. 당시의 기업가치고는 사회적 책무를 빨리 깨달은 편이었다. 첫 수혜자는 리대룡(64)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후 75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학업 성적이 좋은 여고생 9700여명에게 17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난 9월부터 태평양학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학술연구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성들에게 유방은 모성의 상징이자 여성답게 해주는 상징적인 기관이다. 여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은 2000년 9월 한국유방건강재단을 만들었다. 태평양이 전액 출자한 재단은 국내 최초의 유방암 전문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지금까지 1만 2000여명의 여성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거나 무료로 검진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 환원은 태평양이 출연한 재단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003년 6월 서 창업주가 타계한 다음 태평양 주식 7만 4000주와 이익배당금 전액 등 5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전달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아들 서경배 사장으로 이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의 고향이 북한인 것을 감안, 북한 어린이와 여성을 돕기 위해 유니세프에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억원을 기부했다. ■ 오늘의 태평양 일군 3인방 오늘날의 태평양을 일군 데는 창업주 서성환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3인방이 있다. 태평양의 사사에 남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인식시키고, 국민 생활양식을 한층 높인 신화 창조의 주역이다. 오원식(69)전 부사장은 40년이 넘게 입에 오르내리는 브랜드 ‘아모레’를 1961년 작명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가곡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상금으로 당시 거금인 1만원(당시 월급 7000원)을 받았다. 오 전 부사장은 1967년부터 한방미용법을 연구, 지난 73년 인삼 사포닌을 이용한 화장품 아모레 진생삼미를 탄생시켰다. 진생삼미는 브랜드 진화를 거듭하다가 가장 한국적인 명품 ‘설화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설화수는 단일 브랜드로 매출이 2000년 1000억원을 달성했으며,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3000억원을 돌파했다. 화장품 사상 유래가 없는 기염을 토했던 브랜드다.82년 대한화장품학회 회장을 지낸 오 부사장은 87년 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기술개발에 힘썼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연구부문을 총괄하면서 태평양 40년 연구와 생산 분야의 산증인으로서 화장품 기술의 과학화에 큰 획을 그었다. 그 어렵던 50년대의 태평양 생존 기틀을 닦은 데는 구용섭(81)초대 연구실장의 공을 빠뜨릴 수가 없다. 좋은 원료 확보를 위해 암거래 시장에서 발품을 팔았다. 서울 환도이후 후암동의 가내 수공업 시절의 ‘향기나는 밥’과 ‘구리무밥’을 먹으면서도 제품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이같은 노력 덕분에 태평양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화장품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발판을 마련했다.68년 한국화장품 화학자회 창립회장에 취임,80년까지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화장품 발전에도 공이 크다. 머리를 감을 때 비누에서 샴푸로 바꾸게 한 사람이 김창규(66) 고문이다. 프랑스 파리 이과대학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중 태평양에 스카우트됐다. 그가 73년 개발한 브랜드 ‘타미나’는 7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이 됐다.78년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화장품학회 국제회의에서 인삼사포닌이 모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 고문은 80년대 태평양의 생활용품 사업을 일궜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리도 푸로틴 샴푸는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비누로 머리를 감던 국민들의 생활양식을 샴푸로 머리를 감게 바꿨다.88년 가정용품을 연구하는 기술연구소장과 92년 태평양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91년부터 대한화장품학회장을 연임하면서 화장품학계 발전을 위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chuli@seoul.co.kr ●정·관·재계로 연결된 화려한 혼맥 창업주 서성환 회장은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4녀, 송숙(58), 혜숙(55), 은숙(52), 영배(49), 미숙(47), 경배(42)를 두고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정·관계를 비롯해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인연이 이어진다. 방우영(77)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비롯해 신춘호(73) 농심그룹 회장, 최두고(84) 전 국회의원 등의 기업인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을유문화사 정진숙(93) 회장, 최주호(작고) 전 우성그룹 회장, 박세정(88)대선제분 회장과는 혼맥을 쌓았다가 끊어졌다. 서 창업주는 또 사돈가의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통해 정재문(69) 대양산업 회장(전 의원), 신춘호 농심 회장을 통해 서봉균(79) 전 재무장관과는 ‘사돈의 사돈’으로 간접 혼맥을 이루고 있다. 김치열(84) 에이오에스 회장(전 법무·내무장관)과는 신춘호 농심 회장을 거쳐 박남규(85)조양상선 회장을 통해 연결된다. 서 창업주는 이같은 순환 혼맥을 통해 김일환(작고) 전 내무장관, 정운갑(작고) 전 농림부 장관, 김영생(작고) 전 의원, 김도창(작고) 전 법제처장 등 정·관계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는 자녀 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유명세’와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관계의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 측근의 설명이다. 관계(官界)의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뒤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고 전한다.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56)씨와 지난 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 출신으로 상공·내무·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회장으로 활동하다 물러났다.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했다가 서울 인사동에서 목인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공부하고 있는 근종(29)씨와 LG전자에 다니는 우종(27)씨를 두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용(53)씨와 지난 77년 결혼했다. 상용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부부에겐 ㈜태평양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환석(27)씨와 미국에서 학업중인 양희(23)씨 등 1남1녀가 있다.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 부사장을 거쳐 태평양개발 회장을 맡고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45)씨와 지난 83년에 결혼했다.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인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서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혜성씨는 태평양학원(성덕여중·성덕여상)의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영배씨 부부는 2남1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학생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지난 90년 11월, 농심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인 윤경(37)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평소 자주 만나 인사를 나누던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87년 태평양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첫발을 내디뎠다.90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을 지내는 등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배씨는 학생인 두딸 민정(14), 호정(10)을 두고 있다. chuli@seoul.co.kr ■ 故서성환 회장의 차사랑 “기다리는 시간의 맛도 있고, 잔의 맛도 있고, 차 맛도 있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을 모신 회의에서 손수 차를 우려드렸던 서경배 사장의 회고담이다. 요즘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전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초스피드 시대에서 여유를 찾아주는 음료이다. 철학이 담긴 고급 문화로 이해된다. 이런 차가 화장품 회사 태평양과 어떻게 이어졌을까? 서 창업주는 60년대 일본 등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차를 대접받았다. 일본 거래처를 찾았을 때 가루차가 늘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고작이었다. 특히 서 창업주는 일본 거래처 사람들이 고려·조선왕조의 다구(茶具)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차에 관심을 기울여 70년대 후반부터 녹차사업을 시작했다. “차밭을 조성하되 반드시 불모지를 개간해야 한다.”80년 녹차밭을 구상하면서 서 창업주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당시 차밭 개간은 무모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차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부족한 전문인력과 제주도 땅의 척박함 등 그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골프장을 짓는다거나 땅투기를 한다는 등의 오해까지 받았다. 축적된 기술과 자료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회사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모두 만류했다. 그러나 서 창업주는 뚝심을 발휘해 밀어붙였다. 대한농구협회 회장 시절인 80년 중국을 방문, 공안(公安)을 설득해 황제차로 유명한 용정차(龍井茶)의 고향 항저우를 둘러봤다. 차가 거대한 산업임을 확인했지만 차 박물관은 그저 형식만 갖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연히 풀렸다.90년대 초 사업을 위해 찾았던 그는 미국 하와이의 파인애플농장 안에 있는 돌(Dole)사의 파인애플하우스, 즉 파인애플박물관에 들렀을 때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겨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할까말까 하던 차사업을 차박물관으로 견인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차박물관은 가슴에 고스란히 묻어두었다. 말년, 몸이 쇠약해진 서 창업주는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머물면서 파인애플하우스를 가보곤했다. 지난 99년 아들 서경배 사장이 부친 문병을 위해 하와이에 들르자 그는 짐을 풀던 아들을 다짜고짜 차에 태우고 돌사의 파인애플농장으로 데려갔다.“바로 이거야, 이렇게 만들어봐라.”와병중이던 아버지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설록차박물관 오’설록이 탄생했다. 지난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에 문을 연 오’설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찻잔 등 다구가 잘 진열되어 있다. 차에 관한 명상의 최적 공간으로 소문나면서 연간 30여만명이 찾는다. 장원 서성환의 정성과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chul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14일 TV 하이라이트]

    ●튀는 지식 팝콘(EBS 오후 8시5분) 6.5 이상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 집이 있다. 바로 우리의 전통 한옥. 최근 웰빙 바람을 타고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건강한 집짓기. 건강뿐 아니라 그 우수성에 또 한번 놀라고 마는 한옥의 비밀과 더불어 황토의 놀라운 효능을 공개하고, 친환경 소재로 바퀴벌레를 퇴치하는 방법도 소개한다.   ●솔로몬의 선택(SBS 오후 8시55분) 한 남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혼인신고도 못한 채 아내와 딸을 두고 외국으로 밀항했다. 남자는 현지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한 뒤 한국의 아내와 딸을 잊었다. 딸은 대학생이 되어 아버지를 찾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가 목숨을 잃는다. 외국으로 귀화한 아버지의 유산을 친딸이 상속받을 수 있는지 알아본다.   ●사이언스+(YTN 오후 1시25분)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로봇들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경기도 하는 제7회 국제 로봇올림피아드를 비롯해 국내·외 기계산업의 최신 제품과 신기술 동향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자본재 통합 전시회 ‘2005 한국 기계 대전’. 그 뜨거운 열기의 현장 속에서 국내 기계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본다.   ●안녕, 프란체스카(MBC 오후 11시5분) 동네에 나타난 바바리맨을 때려잡아 완장에 호루라기까지 얻고, 자율방범대원이 된 프란체스카. 하지만 호루라기를 쉴 새 없이 불어대는 프란체스카 때문에 동네는 점점 삭막해져 가고, 프란체스카의 횡포로 사람들은 지쳐간다. 한편, 이사벨은 수나의 권유로 우울증 치료를 위해 카바레에 가는데….   ●무엇이든 물어보세요(KBS1 오전 10시) 현재 우리나라 성인 인구의 약 25%가 고혈압 환자로 추정되고 있다. 인구의 고령화와 짜고 자극적인 식생활을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 때문에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뚜렷한 증상이 없어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고혈압.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을 알아본다.   ●이 죽일놈의 사랑(KBS2 오후 9시55분) 다정은 얼굴 수술을 하기 위해 10년간 모은 돈을 떼인 다정을 달래러 서울로 올라온 복구와 데이트를 하지만, 다정은 복구에게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준성은 은석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술에 취해 민구의 이름을 부르는 은석에게 오기를 느껴 은석을 자신의 호텔방에 데려가려 한다.
  • [부산 ‘戀街’/남포동] 보이소 자갈치·국제시장·PIFF광장

    [부산 ‘戀街’/남포동] 보이소 자갈치·국제시장·PIFF광장

    “아지매, 깎아주이소∼.” “아이고, 좀 고만하소. 자요!” 서울 아낙의 애교섞인 사투리 한마디에 못 이긴 척 물건을 건네 준다. 훈훈한 ‘부산 아지매’ 인심을 느껴보고 싶다면 남포동으로 가자. 아지매들의 손맛이 살아있는 자갈치 시장,‘없는 게 없는’ 국제 시장에 볼거리 먹을거리, 살거리가 가득하다. 영화인들의 감각이 돋보이는 PIFF광장, 부산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용두산 공원도 있다. 구석구석 다 구경하려면 하루가 부족하다. ●부산 하면 자갈치 시장 부산의 명소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자갈치 시장. 연근해에서 잡은 각종 물고기의 경매가 이루어지는 우리나라 최대의 어시장이다. 지하철 1호선 자갈치 시장역에 내린다. 개찰구에서 나와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비릿한 바다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10번 출구로 나가면 부산시수협∼남포동 건어물시장∼영도대교까지 어시장이 1㎞가량 길게 늘어서있다. 판매대에 놓인 은빛 고기들이 비늘을 반짝이며 팔딱거린다. 어항 속 오징어와 낙지는 연신 물을 헤치며 꿈틀거린다. 싱싱한 생선회와 해산물을 마음껏 골라, 먹고 싶은 만큼 산 다음, 어시장 2층이나 3층에 있는 횟집으로 가져가면 요리를 해서 내준다. 해운대나 광안리 해안가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다면 영도다리쪽 건어물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좋다. 오징어·김·마른 안주 등을 싼 값에 마련할 수 있다. ●PIFF광장에서 ‘리어카 골목’까지 자갈치 시장에서 해안가 반대쪽으로 큰 길을 한번만 건너면 광복동과 남포동이 나온다. 남포동의 첫 관문은 부산국제영화제(PIFF)광장. 남포 CGV·대영 시네마타운 등 5개의 극장이 나란히 몰려 있다. 영화제 기간이 아니라도 곳곳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와 스타들의 손도장을 직접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PIFF광장에서 뻗어있는 골목을 따라 가면 각양각색의 동네가 나온다.‘없는 게 없는’ 시장으로 통하는 국제시장에는 옷, 신발, 책방까지 예측할 수 없는 구경거리가 나온다. 일명 ‘리어카 골목’으로 불리는 먹을거리 골목에서는 군침 도는 노점 음식들이 군침을 돌게 한다. 오징어에 야채를 먹음직스럽게 버무린 오징어무침, 굵직하게 썰어 놓은 순대, 쫀득쫀득한 족발을 1500∼2500원 정도면 맛볼 수 있다.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기에 제격이다. 좀 더 거하게 먹고 싶다면 시장 구석구석에 수십년 동안 자리잡고 있는 맛집으로 가자. 밀면, 고갈비 등 부산의 소문난 ‘맛’을 느낄 수 있다. ●부산의 맛, 이거야 이거 PIFF광장 부산극장 맞은편을 보면 검은색 바탕의 ‘18번 완당집’ 간판이 보인다.‘55년 전통’을 자랑하는 만두집이다. 중국식 만두국, 일본식 국수 등을 전문으로 한다.(051)245-0135. KFC를 지나 동주여자상업고등학교 쪽으로 큰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에 골목 사이로 ‘원산면옥’이 보인다.40여년동안 3대에 걸쳐 냉면만 고집해 온 냉면 전문집이다. 평양식 비빔냉면, 물냉면이 주메뉴로 6000원. 겨울에는 만두, 쇠고기 전골 등도 판다. 오전 11시쯤 문을 열어 오후 9시30분까지 영업한다.(051)245-2310. 원산면옥 바로 왼편 ‘할매 가야밀면’에서는 부산 밀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우리 밀로 만든 면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육수는 냉면보다 덜 자극적이면서도 뒷맛이 개운하다. 값도 저렴한 편. 밀면 3500∼4000원, 비빔면 4000∼4500원. 사리 추가시 1000원이다.(051)246-3314. 한편 연산로타리에서 수영 방향으로 50m 정도 올라가다 왼편에 있는 참나무숯불갈비(051-861-6392)도 부산의 맛집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의 주메뉴는 갈빗살. 웬만한 등심보다 훨씬 낫다. 울산시 울주군 언양에서 매일 가져오는 고기는 적당히 육질이 느껴지면서도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참나무숯을 사용해 고기에 참나무향이 배어나온다. 즉석에서 김을 구워 고기와 함께 싼 뒤 쌈장에 찍어 먹는 맛도 일품이다. 꽃등심 1만 8000원, 갈비살 1만 5000원. 부산에서 빵을 가장 맛있게 만든다는 빵가게 ‘B&C’, 낚지 볶음과 수중전골(6000원)을 파는 ‘개미집’, 깔끔한 인테리어와 쌈밥 정식(5500원)으로 유명한 ‘자반고등어’도 유명하다. ●전망 끝내주는 용두산 공원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면 서울의 남산에 견줄만한 부산의 명산 ‘용두산’에 올라보자. 남포동 시장 바로 옆에 우뚝 솟아 있어 시내가 한눈에 다보인다. 동주여상 뒷골목을 따라 용두산 산책로에 들어서면 울창한 나무 터널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시가 새겨진 바위도 길을 따라 놓여 있다. 한 줄 한 줄 읽으며 산을 오르다 보면 용두산 공원 광장이 나온다. 전망대에 오르면 부산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부산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하다. 낮에 봐도 좋지만 밤에 오르면 야경이 눈부시다. 부산 서재희 고금석기자 s123@seoul.co.kr ■ 밀면이 뭐지? ‘회남의 귤을 회북에 옮겨 심으니 탱자가 됐다.’란 뜻의 고사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처럼 이북 지역의 냉면이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의 음식이 된 것이 바로 밀면이다.50년대 중반 한국전쟁으로 부산지역으로 피란을 내려온 함흥 지역 사람들이 하나둘씩 냉면집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산항이 가까워 미군이 보급하던 밀가루를 쉽게 접했던 부산 사람들 입맛에는 메밀·전분 등으로 만든 질긴 냉면이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자연스레 밀·전분 등으로 면발을 만드는 밀면이 자리잡았다. 서울로 치면 ‘평양식’은 밀면,‘함흥식’은 비빔밀면에 해당한다. 육수에 감초 등 한약재를 써서 입맛에 은은한 한약향이 남는 점과 ‘평양식’인 밀면에 양념장을 넉넉히 풀어 먹는 점도 이북식과는 다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짝사랑 9년 감방인들 어떠리

    짝사랑 9년 감방인들 어떠리

    짝사랑 9년 - . 그 짝사랑 때문에 가정도 직장도 잃고 유치장만 12번을 드나든 사나이. 그러고도 조금도 굽힐 줄 모르는 집념이 있다. 이 한 많은 짝사랑의 주인공 권기성(35)씨가 3월 20일 하오 서울 종로경찰서 보호실에 들어서자 낯익은 담당순경은 한번 씩 웃고 나서 물어볼 필요도 없이 권씨의 조서에「추수(追隨), 불안감을 조성한 혐의」란 죄명을 달았고 권씨도 자주 있었던 절차라 이의를 붙이지 않았다. 죽도록 좋아하는 여자를 따라다니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를 괴롭힌 권씨는 이런 간단한 절차를 밟아 또 10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은 것. 권씨의 이 끈질긴 짝사랑 9년의 내력을 살펴보자. 권씨의 고향은 충남 당진군 신평면 신송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권씨가 돈벌이를 하러 결혼한 지 4개월 된 부인 손(孫)모(34)여인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이 지난 612년 초가을이다. 직장도 없이 셋방을 얻어 어려운 생활을 하던 권씨는 그 해 11월 다행히「국졸」이란 학력 덕으로 고향 선배의 소개를 받아 창신시장 경비원으로 취직이 됐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 구석구석을 살펴야 했던 권씨는 취직 한 달만인 그 해 12월 초 어느 날 시장 안 M미장원 앞을 지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M미장원에 새로 온 미용사 이(李)모(28·당시 20)양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그날부터 권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장원 앞을 서성거렸고 이양이 출·퇴근할 때면 멀리서 속을 태웠다. 그 뒤 1년 동안 권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장원을 쳐다보는 일로 일과를 삼았다. 그러다 참다 못하면 미장원 안으로 뛰어들어 하소연도 해보고 퇴근길엔 따라가 통사정도 해보았으나 이양의 반응은 언제나 냉담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처녀, 첫눈에 반해 참을 수 없이 이러다 보니 좁은 시장 안은 매일같이 권씨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권씨가 이를 알게 된 부인과 시비가 잦았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시장조합에는 마음을 물리겠다는 각서를 세 번이나 써야 했다. 권씨가 맨 처음 유치장 신세를 진 것은 62년「크리스마스」. 권씨는 이날 담판을 질 셈으로 M미장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권씨의 이 대담한 공격에 놀란 것은 이양뿐 아니라 꽉 찬 손님들과 미장원「마담」. 권씨는 잠시 뒤 달려온 백차에 실려 동대문서 유치장으로 직행했다. 그 뒤 1주일 만에 유치장을 나온 권씨는 갈 곳이 없었다. 직장에선 해임통보가 와 있었고 그간 들어가지 않던 집엔 들어갈 체면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양의 태도가 변할 리는 만무였다. 그러나 권씨의 일편단심(?)은 조금도 흔들릴 수 없었다. 이양은 그의 모든 것이었으며 먼 발치로나마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씨는 M미장원에서 가까운 일터를 찾아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런 생활이 4년을 계속되는 동안 권씨는 인천에서 모 대학에 다닌다는 이양의 남동생을 찾아가기도 했고 이양의 고향인 온양에 가 이양의 부모를 만나도 보았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67년 7월 이양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알고 보니 미장원 N마담과의 친분 때문에 권씨의 시달림 속에서도 자리를 옮기지 못했던 이양이 견디다 못해 훌쩍 떠나 버렸던 것이다. 권씨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시름 속에 며칠을 보낸 권씨는 이양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 수소문 끝에 있을 법한 부산, 온양 등지를 수없이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 68년 3월 그간 항상 마음에 걸리던 부인과의 이혼수속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이양을 찾는 작업을 계속했다. 권씨의 판단으로는 이양이 서울에 있을 것 같았고 있을 곳은 미장원일 터이니 화장품 외무사원을 하며 서울의 모든 미장원을 뒤져보기로 했다. 권씨의 판단은 적중했다. 화장품 등을 메고 골목골목의 미장원을 하나도 빼지 않고 찾아 다니던 권씨는 이양이 M미장원을 떠난 지 7개월, 외무사원 2개월 만인 그 해 10일 단성사 옆 N미장원에서 이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권씨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아가씨가 “미친놈” 욕해도 유치장 나가면 또 찾겠다 권씨는 그 길로 회사로 달려가 사표를 내고 이양을 달랬다. 그러나 이양의 태도는 예나 그때나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래 권씨는 실의에 빠져 자살할 생각까지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양은 권씨를 피해 직장을 자주 옮겼으나 권씨의 집념은 끈질긴 것이어서 그때마다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권씨가 구경한 유치장도 여러 곳이 됐다. 동대문서, 성동서, 종로서… 이렇게 다채로웠다. 이양은 여러 곳을 옮겨 보았으나 피할 길이 없다고 체념했던지 지금 있는 종로구 청진동 Y미장원에 와서는 그대로 머물러 버렸다. 권씨는 여전히 Y미장원을 찾아 다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미장원 잎에 서있다가 이양이 나타나면 따라 나섰다. 이양은 꼼짝할 수가 없었고 때로는 미장원 안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우니 그런 때는 경찰의 힘을 빌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3월 20일에도 권씨는 아침부터 Y미장원 앞을 서성거렸다. 참다 못한 권씨는 이날 하오 3시쯤 미장원으로 뛰어올라가 담판을 내자고 소란을 피웠다. 이럴 때마다 놀란 것은 손님들. 주인「마담」은 112의「다이얼」을 돌려야 했다. 이렇게 해서 권씨가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것은 이양을 알고 이번까지 12번. Y미장원 관할서인 종로서엔 이번까지 8번이 된다. 이렇게 돼서 관할 청진동 파출소는 말할 것도 없고 본서 보안과 경찰관들과 권씨는 낯익은 구면이 되어 버렸다. 이 끈질긴 사나이 권씨는 경찰서 유치장 문을 12번째 들어서면서도『저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디 이럴 수가 있느냐』는 이양의 말에는 아랑곳없이『나가면 또 찾아가겠다』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임춘웅(林春雄) 기자> [ 선데이서울 69년 3/30 제2권 13호 통권 제27호 ]
  • [열린세상] ‘한국전쟁’의 한반도화/황병선 청주대 초빙교수 언론인

    1980년대 초만 해도 국내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예컨대 한국전쟁 전황이나 전시의 사회상을 담은 공식 동영상이나 컬러 사진은 전혀 없고 초라한 흑백 사진첩 몇 점 있을 뿐이었다. 마침 80년대 들어 한국 신문들은 너도나도 컬러 윤전기를 들여오며 컬러화보 경쟁에 불을 붙였다. 당시 특파원으로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취재하던 필자는 6월 특집기획을 한국전 컬러 사진화보로 잡고 국방부를 두드렸다.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공보관실 통신담당 상사의 친절을 만나게 되어 펜타곤에 보관된 한국전 관련 사진과 동영상 필름들을 훑어보는 행운을 얻었었다. 한국관련 자료만도 수십평 사무실에 가득했다. 미군은 1차 세계대전 때부터 통신부대 소속 사진병을 전투 일선에 배속시켜 전투 상황, 후방 민간인들의 참상 등을 흑백과 컬러 사진으로 생생하게 기록해 놓고 있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장면처럼 미군 폭격기의 북한지역 폭격 모습도 동영상으로 담겨 있었다. 큰 건물 대부분이 허물어진 폐허 서울의 모습, 젖먹이 동생을 등에 업고 무너진 집터에 망연자실 서있는 8∼9세 소녀의 가슴 아픈 정경 등 컬러 사진 수십장을 복사해 지면에 보도했었다. 그 후 한국의 방송사 연구소 등이 동영상과 사진자료들을 복사해 서울로 가져갔지만 그때의 느낌은 우리 땅에서 빚어진 전쟁이지만 그것은 미국의 전쟁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문서나 자료는 1차,2차 세계대전에 이어 한국전 순서로 당연히 ‘그들의 전쟁’인 양 정리되어 있었다.81년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한국전쟁의 기원들’을 출간, 수정주의 바람을 일으켰고 한국전쟁은 한·미 양국에서 화두로 떠올랐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한 교수의 권유로 워싱턴 국립문서고 메릴랜드 분소에서 한국전쟁 중 미군이 북한에서 가져온 ‘압수해온 북한문서’들을 만나게 됐다. 한글로 제목만 정리해 놓은 마이크로 필름과 씨름을 하다 전시 북한 외무성의 미국담당과 업무일지를 발견, 특종기사를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일지를 샅샅이 뒤져보았다. 하지만 1950년 6월25일 전쟁 발발 불과 며칠 전까지 직원들은 미국의 행정·금융조직 등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그 진척도를 업무실적으로 적어 놓고 있었다. 흥분만큼의 큰 실망감과 함께 “한글로 된 이 북한 문서들이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군 병사들이 여기저기 북의 관공서에서 쓸어 담아온 잡지등 별 가치 없는 책자들이 많았지만 전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80년대 초 마침 30년 기한이 만료되어 공개된 미 국무부, 국방부의 비밀문서들은 역시 미국 주도의 상세한 한국전 상황을 담고 있다. 한국군은 미군에 예속된 소부대의 모습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 시각이 바람을 탈 소지를 주었다. 하지만 불과 10년후 90년대 들어 반대편인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북한이 소련, 중국의 합의를 얻어 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시민전쟁, 혁명전쟁, 미국의 도발 유도 등 수정주의 시각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제 한국전쟁의 ‘평가’를 놓고 다시 대립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남북 어느 편에 서는 일이 되기 쉽다. 이념적 주장일 뿐 학문적 논쟁이 될 수 없다. 그보다 미국 러시아 중국과 남북한의 수집 가능한 전쟁 양측의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학문적으로 면밀히 재검토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아직도 찾아낼 진실들이 자료 곳곳에, 또 이면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갈등 대신 좌우를 떠나 한반도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학문적 연구로 한국전쟁을 한반도화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황병선 청주대 초빙교수 언론인
  • [기고] 농촌사랑은 후세 위한 사회보험/이상영 농협유통 대표이사

    인간 생활의 필수요건으로 ‘의식주’를 꼽는다. 순서로는 입는 것을 제일 먼저 꼽지만, 중요도로 따지자면 음식이 제일 먼저 와야 맞다. 처음부터 먹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동양적인 예의상 안 맞기 때문일 게다.‘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먹는 것은 생존 자체를 의미한다. 기원전 유럽을 제패하고 천년의 찬란한 로마시대를 연 로마인의 두개골을 분석한 어느 학자의 연구결과가 흥미를 끈다. 로마시대 사람은 수돗물을 생활화했다. 이 수돗물은 납으로 만든 파이프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평생을 두고 물에 스며든 납을 음용할 수밖에 없었다. 납은 우리 몸에 축적되면 신경세포를 마비시켜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하는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로마의 마지막 황제 네로가 로마시를 불바다로 만든 원인도 이 납성분과 연관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다. 그런데 요즘 중국산 김치·장어와 같은 농수산물에서 납 성분이 검출되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산모가 출산을 하자마자 찬물에 샤워를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출산한 산모에게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다스리며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게 하고 절대로 차가운 물을 만지지 못하게 한다. 만약 우리 나라 산모가 찬물에 목욕을 한다면 평생 뼈마디가 쑤셔서 운신하기가 힘이 들 게다. 이것은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와 뼈의 구조가 조상 대대로 우리 기후와 풍토, 우리 음식에 친화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우리 몸에는 역시 우리 농산물이 제격’이라는 이 말의 뜻은 우리의 올바른 식생활과 건강한 삶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요즘 농촌은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끊어지고 빈집이 늘고 장가 못 가는 노총각이 많다. 농협중앙회가 주관하고 있는 도시 농협이 농촌 농협을 돕는 무이자 자금지원 행사장에서 농촌지역 조합장의 답사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돈다. 강원도 원주 신림농협의 경우 관내 인구가 4000여명인데 지난해 신림면에서 출생신고는 단 3건이었다고 한다. 한 명은 조합장 자신의 손자이고, 또 한 명은 이웃집 손녀인데 금년 들어 자기집 손자와 이웃집 손녀는 원주시내와 서울로 이사를 가 버려서 앞으로 7년 뒤에 원주시 신림면의 신림초등학교는 폐교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전망된단다. 도시민이 쉴 곳이며 우리 농산물 공급의 진원지가 공허한 폐허가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이를 방치하고 싶지 않다면 정부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막대한 자금과 예산을 투자해서 관리해야 할 것이다. 농민이 살면서 우리 먹을거리를 지키고 환경을 유지하는 비용과 농민이 살지 않고 국가가 예산을 투입해서 관리하는 비용, 이 둘 중 어느 것이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들 것인가. 오늘의 농촌돕기운동은 후세를 위한 사회보험적 성격에서 바라봐야 할 과제다. 농산물 시장 개방과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 안전한 우리 먹을거리 생산지인 농촌을 지키기 위한 국민 모두의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이상영 농협유통 대표이사
  • [행정혁신 우리가 이끈다] (5) 남양주시

    [행정혁신 우리가 이끈다] (5) 남양주시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의 한 빌라에서 전세를 살다 토요일인 지난달 29일 서울로 이사간 L씨는 자신이 살던 집에 이사오는 K씨에게 3만 3570원의 상하수도 요금을 “부자되시라.”는 덕담과 함께 건넸다. L씨는 2년전 이사올 때 전 세입자가 대충 정산해 자신에게 건넨 상하수도 요금이 나중에 날아온 시청의 고지서 액수보다 조금 적어 씁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L씨가 상하수도 요금정산을 10원 단위까지 자신있게 한 것은 남양주시청의 인터넷 홈페이지 덕분. 홈페이지의 초기화면 ‘이사 정산금액 조회하기’에 들어가 전에 받아둔 영수증에 찍힌 고객번호와 상하수도 계량기 지침숫자, 이사날짜를 적고 클릭한 것이 전부다. 이른바 남양주시의 ‘원 클릭! 365일 수도요금 마법사’ 덕분이다. 이 시스템은 초임발령을 받은 지 1년여에 불과한 새내기 전산직 9급 김현길(32·익산대 전자계산학과 졸업)씨와 동기인 이상현(32·서울산업대 전자정보공학과 졸업)씨가 예산 지원 한푼없이 개발해내 더욱 값지다. 상하수사업소 요금팀 김씨는 지난해 이사철이면 4명의 직원이 고지서 발급과 민원처리 등 다른 업무를 볼 틈이 없을 만큼 밀려드는 요금확인 방문객과 전화에 매달려 쩔쩔매다 ‘수도요금 마법사’를 구상했다. 김씨와 이씨는 3개월여의 프로그램 설계와 개발을 거쳐 ‘마법사’를 완성, 지난 3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자 이사를 오가는 이들끼리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하거나, 요금팀 직원이 계산기를 두드려 가며 수작업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누진요율까지 따지던 일이 사라졌다. 별도로 관리되던 체납요금 합산을 빠뜨리지 않고 부정확하던 요금정산도 신속 정확해졌다. 이사가 주로 이뤄지는 휴일에도 요금확인이 가능하고, 전·출입자간에 발생하는 분쟁이 원천적으로 해소되게 됐다.‘수도요금 마법사’는 상하수도의 계량기 지침을 넣으면 날짜까지 일할계산으로 따져주는 사용량, 요금, 물이용부담금, 누진율과 체납요금까지 일목요연하게 출력도 가능해 영수증 구실을 한다. 남양주시 관내 부동산 중개업소들도 대부분 마법사 프로그램을 고객 서비스에 활용하고 있다. 김씨는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 컴맹들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전화 ARS 시스템을 내년 1월까지 만들고, 모바일 서비스도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남양주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신세대 주부들 반응 좋아 흐믓” “새내기 직원들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경기도 남양주시 이광길(64) 시장은 “‘수도요금 마법사’는 공직자가 현장에서 느낀 애로사항을 외부 도움이나 예산 지원없이 스스로의 창의와 능력만으로 해결한 쾌거”라고 말했다. “시민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곧 공직자가 일선에서 겪는 애로사항도 함께 해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이시장은 “평균 10분이 넘게 걸리던 요금확인에 짜증을 내는 시민을 달래고 다시 전화를 걸어 정산액을 확인해주던 불편이 해소됐다.”며 “꼼꼼히 따지는 신세대 주부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고 자랑했다. 취임 초부터 ‘행정혁신’과 ‘주민편익’을 강조해 온 이 시장은 직원들의 창의력을 북돋워 때론 기발하기까지 한 혁신시책과 사업을 실행해 왔다. 평내동 H산업의 폐기물 반입과 소각으로 인한 S아파트 주민의 5년여에 걸친 민원을 주민편에 서서 당차게 해결했다. 또 시민들에게 하수처리수 수질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해 화도 하수처리장 방류수를 이용해 인공폭포를 설치했다. 이 폭포는 하수처리수를 이용한 세계 최초이자 최고 높이를 자랑하고 있어 기네스 기록 등재를 추진중이다. “해당 민원담당자가 인사나 교육, 휴직이나 휴가중이어도 이를 대리하는 직원도 완벽하게 민원을 처리할 수 있는 민원처리 매뉴얼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민원 자동발급기도 대폭 확대해 보급할 예정입니다.”이 시장은 “주민편의를 위한 행정혁신은 멈출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남양주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씨줄날줄] 한강뱃길/이상일 논설위원

    한강 주변지역 지명끝에 붙는 도(渡)진(津)포(浦)진(鎭)등은 과거 나루터였던 곳의 흔적이다. 일제때 철로와 도로가 정비되기 전까지 한강은 가장 중요한 운송 통로였다. 주변 나루터는 각종 생산물의 유통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정부가 세금으로 거둔 곡물과 옷감뿐 아니라 서울에 사는 지주들이 지방에서 수확한 곡물 등이 서해안∼한강 또는 남한강의 내륙 수로를 통해 서울로 운반됐다. 뗏목과 목재도 이 루트로 공급됐다. 한강 뱃길이 막힌 것은 6·25전쟁 후부터였다. 김포 앞 한강 하류 15㎞가 비무장지대에 걸려 수로 통과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현대자동차가 한동안 울산 공장에서 만든 자동차를 배에 싣고 서해안을 거쳐 와서는 인천에 하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년전 자동차의 수로 운송은 전면 중단됐다. 인천에서 다시 육로나 기차로 서울로 오는 게 번거로운 데다 소규모 물량 공급에는 육로가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한강 하류 비무장지대를 거쳐 인천항으로 이어지는 한강 뱃길이 9일 52년만에 재개된다고 한다. 이촌 나루터에 있는 거북선을 경남 통영으로 옮겨 전시하기 위해 뱃길을 이용키로 한 것이다. 이와 관련, 유엔군 사령부의 승인을 받고 북한과의 협의를 거쳤다. 유엔사는 남북 협의가 있으면 민간 선박의 통과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래서 한강 뱃길의 본격적인 활용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지난달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이명박 서울시장이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약 500㎞의 경부 내륙운하 개발계획을 밝혔다. 독일의 ‘라인 마인 도나우’처럼 한강에도 각종 화물을 실은 바지선뿐 아니라 대형 호화 유람선이 오가는 풍경을 연상해볼 수 있다. 바지선이 한강으로 들어온다면 인천이나 평택항에서 화물을 부린 다음 육로나 기차로 옮기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한강 다리 근처에 짐을 부리면 운송비도 싸게 먹힐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강 근처에 아파트 등 온갖 시설이 다 들어서 있는 상황에서 큰 부두를 만들 수 있을까. 북한이 비무장지대의 상시 통과를 동의해줄까?이런 앞지른 우려와 경제적 고려는 접어두자. 한강 뱃길이 뚫린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시원해 좋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seoul.co.kr
  • 시대자화상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자화상 국립중앙박물관

    자화상 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빈센트 반 고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자신의 그림을 그린 거장은 렘브란트로 알고 있습니다. 생전에 10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렘브란트는 17세기 르네상스시대에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에게 인간적인 패기가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문예부흥의 시대가 저물어가던 말년에 그린 ‘쾰른 자화상’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세상과의 오랜 불화를 견뎌낸 여유가 느껴집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둘러보다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17세기 말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입니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 사실주의 화풍의 대가입니다. 남인이었던 그는 출세길이 막혀 막막했던 심경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자화상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허울이 아닌 사실을, 시대를 녹여버릴 듯한 강렬한 눈빛을 내뿜고 있습니다. 그의 수염은 떨리는 듯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 시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애석하게도 웃는 얼굴이 아닙니다. 여섯 차례의 이사 끝에 겨우 마련한 집. 그러나 유명한 작품들의 상당수는 일본 등 외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보는 남산은 주한미군의 골프연습장에 가려 잘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헬기 소리로 요란합니다. 일제침탈과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로 이어지는 역사의 굴곡은 이곳에선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다시 희망을 힘겹게 떠올려 봅니다. 먼 훗날에도 이 땅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고백’으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겠지요. 당당하면서도 너그럽고, 가난하지 않아도 겸손한 우리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글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1층 고고관·역사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은 그 곳에 있었다. 후손들에게 기록을 남긴 역사(歷史)시대의 모습도, 지혜가 미치지 못해 문자를 남길 수 없어 유물로만 자취를 남긴 선사(先史) 시대의 모습도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박물관 건물로 들어서면 사람들의 발걸음은 동관으로 줄지어 이어진다.1층에 들어서면 상설전시관인 고고관과 역사관이 관람객을 맞는다. ●구석기 시대에서 남북국 시대까지 한눈에 동관 1층 101∼110 전시실이 바로 고고관이다. 첫 걸음을 떼는 순간 세계전도와 함께 일본·중국·대한민국·세계고고학의 연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학창시절 교과서나 사회과부도·역사부도 등의 첫 페이지에서 볼 수 있었던 ‘빗살무늬토기’(신석기시대·서울 암사동 출토)는 관람객들이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유물. 이어 ‘요령식 동검’(청동기시대·황경남도 신천 〃),‘산수무늬 벽돌’(백제·충남 부여 〃) 등이 눈길을 멈추게 한다. 마치 검은 돌처럼 바싹 말라버린 선사시대 ‘도토리’(신석기시대·경남 창녕 비봉리 〃)는 ‘갈판·갈돌’(〃·서울 암사동〃)과 함께 진열돼 있었다.500년 쯤 지나면 미니홈피 배경 음악이나 배경 화면을 사고 파는 전자화폐 ‘도토리’가 나란히 소개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선을 따라 청동기·초기 철기 유물들이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듯 스치며 지나간다.4∼6세기 고구려 고분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는 벽화는 ‘사신도’가 대표하고 있었다. 비록 모사품이지만 청룡·주작·백호·현무의 모습은 그 시절 고구려인의 호방한 기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백제실을 대표하는 ‘백제금동대향로’(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 앞에서는 좀처럼 관람객들이 눈을 떼지 못한다. 신선들이 산다는 박산(博山) 굽이굽이마다 상상의 동물들과 사람들의 모습으로 장식된 향로는 백제인들의 이상향을 엿보는 듯하다. 가야실에서 볼 수 있는 ‘투구’와 ‘말머리가리개’(부산 복천동 〃)는 외국 영화의 전투장비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관’과 ‘허리띠’ 앞에서도 관람객들은 오래 머문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아니었지만 발해실의 ‘용머리 장식’이나 ‘도깨비 기와’(중국 헤이룽장성〃)는 세상의 모든 나쁜 귀신을 쫓아낼 듯하다. 반면 두명의 부처가 함께 조각된 ‘발해불상’(발해 팔련성 〃)은 이민족도 너그러이 융합했던 민족의 포용력을 상징하는 듯하다. ●딸을 시집보낸 왕도 범부와 다르지 않았음을… 고고관을 다돌고 나면 맞은 편 111∼120 전시실인 역사관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대표적 기록문화유산인 한글, 금속활자를 비롯해 금석문, 문서, 지도 등 당대의 생활상을 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역사관 첫 전시실인 한글실에는 한글의 과학성보다는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랜 어버이의 모습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새 집에 가서 밤에 잠이나 잘 잤느냐. 어제는 그리 덧없이 내어 보내 섭섭무료하기 가이 없어 하노라.’며 조선 현종 임금이 궐 밖으로 시집간 셋째 딸 명양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지도실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밑거름이 됐던 ‘동국대전도’가 2.3배 확대돼 바닥 타일로 꾸며져 있다. 허리를 굽혀 살펴보면서 걸어보면 마치 소인국의 ‘걸리버’가 된양 한반도 전체를 걷는 느낌이다.‘수선전도(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도성도’ 등 서울의 옛 모습을 담은 옛 지도도 직접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등기제도, 노비의 경제적 가치, 조선시대의 의술 등 선조들의 생활상을 이해하기 쉽게 배울 수 있다. 다리가 아플 때쯤이면 소파나 영상물 상영관 등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시설이 전시관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정해진 동선대로 이동하지 않으면 시대 흐름을 놓칠 수 있으니 질서를 지키며 정해진 동선을 따르는 것이 좋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2층 미술관Ⅰ·기증관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올라서면 서예·회화·불교회화 등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인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Ⅰ’과 국내·외 각계각층 213명이 아무런 대가없이 박물관에 기증한 작품들이 있는 ‘기증관’이 있다. 특히 미술관Ⅰ에는 교과서에 실려 눈에 익은 작품들도 많아 직접 실물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교과서에 실린 그림이네? 미술관Ⅰ에서 관람객들의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보물 527호)’. 춤추는 아이, 행상, 벼타작, 담배잎썰기, 씨름도 등이 눈길을 모은다. 꽉 짜인 원형 구도에 간략한 필선으로 조선시대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담았다. 작품 크기는 30㎝ 안팎으로 아담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씨름도’의 씨름꾼 옆에는 이들의 신발로 보이는 신발들이 내팽겨쳐져 있다. 그런데 하나는 짚신, 하나는 고급신발로 보이는 고무신이다. 신분의 차이가 나는데도 공평한 승부 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구경꾼들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경기를 보고 있다.‘허허, 저런’‘빨리 넘겨 버려.’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구경꾼들의 긴박한 표정과는 달리 엿판을 매고 떠꺼머리 총각은 아랑곳없이 천연덕스럽게 가위를 치면서 열중하는 것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얼핏보면 빛 바랜 누런 종이에 검은 잉크가 뭉개져 있는 듯하다. 한참 들여다보면 왼쪽 하단 현실세계를 보여주는 야산에서 오른편 상단 도원의 세계가 보인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풍경을 안견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한 것이다. 전체적인 경관은 짙은 안개로 분리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잘 어우러져있다. 꿈과 현실을 한폭의 화폭에 담은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철학적인 질문도 떠오를 법하다. 두루말이 형태로 폭이 20m에 이르는 이 작품은 당대 지적 권력이 집약된 작품이다. 작품 양쪽에 자신이 안평대군이 직접 지은 제발(題跋)뿐만 아니라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서거정, 성삼문 등 당대 20여명의 문사들의 찬시가 곁들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진품은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려한 불교회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표현한 그림들이 모여있는 불교회화관에 들어서면 좀 더 화려해진다.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 등 선과 악을 상징하는 오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대웅전 석가모니 불상 뒤에 놓였던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은 석가가 인도 마가다국의 영취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한 사실을 화려한 색깔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원근법을 쓰지 않아 평면적으로 보이는 것이 어찌보면 불화의 세계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세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사 김정희가 쓴 자신의 별호에 대한 글인 ‘묵소거사 자찬(默笑居士 自讚)’은 날카로움 속에서 정중함과 정성을 담아 쓴 흔적이 엿보였다.‘침묵할 때 침묵하는 것은 때에 맞는 것이요, 웃어야 할 때 웃는 것은 중용에 가까운 것이다.’라는 글귀가 담겨 있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에서는 내면의 세계까지 드러나는 듯하다. ●문화재 사랑으로 만들어진 기증관 기증관은 11개실로 구성됐으며 이홍근 박병래 등 문화재를 기증한 이들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1946년 이희섭 선생이 금동불상 세 점을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모두 213명이 청동기 금속공예 회화를 비롯한 국보 6점과 보물 32점 등 모두 2만 2091점을 기증했다. 특히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 운영자인 가네코 가즈시게 선생 등 일본인 3명도 기증자 대열에 포함돼 있어 눈에 띈다. 기증관에서는 손기정 선생이 기증한 그리스 청동 투구(국보 904호)를 볼 만하다. 투구는 1500년쯤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경기에서 승리를 기원하고 신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제작됐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 선생에게 부상으로 주어졌다. 투구는 베를린 박물관이 보관하다가 1986년 뒤늦게 손 선생에게 돌아왔다. 그는 이 투구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라 생각해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3층 아시아관·미술관Ⅱ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곳이나 비슷한 상황이겠지만 특히 3층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인기 유물’과 그렇지 못한 ‘비인기 유물’ 사이의 차이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교과서를 통해 숱하게 봐 왔던 익숙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인도네시아·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물도 ‘아시아관’에 전시돼 있다. ●중국·일본·중앙아시아 유물도 전시 3층에는 306∼311호까지 인도네시아·중앙아시아·중국·일본의 유물이 전시된 ‘아시아관’이 있으며,301∼305호까지 ‘미술관Ⅱ’에는 불상·청자·백자 등 우리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보통 301호부터 관람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3층에 올라오면 바로 왼쪽으로 ‘아시아관’입구인 306호가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관람객들은 306호 ‘아시아관’을 먼저 관람하게 된다. 306호를 먼저 들어왔다고 해서 다시 나가 301호로 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시아관’을 얼른 둘러본 뒤 ‘미술관Ⅱ’에서 우리 유물의 아름다움을 느긋하게 즐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아시아관’에서 관람객들의 발걸음은 다른 전시관에 비해 조금 빨라지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12개의 팔을 가진 부처 조각상이나, 인자해 보이지 않는 부처의 미소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다른 전시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유물에 대해 박사 수준의 설명을 해 주던 엄마들도 이곳의 잘 모르는 유물들 앞에서는 슬쩍 조용해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아시아관’에서 잠시 풀 죽은 엄마들은 3층 북쪽에 자리잡은 ‘미술관Ⅱ’에서 활기를 되찾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볼것 많고 배울것 많은 고려청자 전시실 자비롭고 은은한 미소로 가득찬 301호 불교조각 전시실을 지나면, 전시된 모든 유물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친숙한 금속공예(302호)·청자 전시실(303호)을 지나게 된다.304호에는 수수한 느낌의 분청사기 전시실이 있고 305호에는 백자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유물에 대해 ‘일자무식’이라도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국보 78호 미륵반가사유상도 이곳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따로 마련된 방에 모셔진 이 불상은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전시실 자체에서 풍기는 위엄만으로도 관람객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미륵반가사유상 외에도 고려청자 전시실은 관람객들의 ‘정체현상’이 가장 심한 곳이다. 사방이 온통 비취색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옮길 생각을 잠시 잊게 된다. 또 국보와 보물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에 메모하는 학생들의 손놀림도 빨라진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진열된 어느 것 하나 국보·보물 아닌 것이 없을 듯한데, 그 가운데서도 국보가 있고 보물이 있는 것을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1층부터 차례로 관람하면서 올라왔다면 3층이 마지막 장소다. 특히 조선백자들이 전시된 305호를 마지막으로 관람하게 된다면, 어수선하게 관람했던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차분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손목없는 부처님…왜? “엄마, 왜 부처님 손이 없어요?” 3층을 관람하면서 엄마들이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301호에 마련된 불교조각 전시실에는 많은 불상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가운데 3개 철조불좌상의 양 손목이 없다. 공교롭게도 ‘손목 없는 불상’3개 모두 철로 만들어졌으며 앉아 있는 자세도 비슷하다. 첫번째 ‘손목 없는 불상’은 301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볼 수 있다. 약 2m크기이며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충남 서산군 운산면에서 출토된 철조불좌상이다. 두번째는 충남 서산군 보원사 터에서 출토 된 것으로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며, 세번째는 10세기에 만들어져 경기 포천군에서 출토된 철조불좌상이다. ‘손목 없는 불상’에 대해 불상 전문가인 홍익대 김리나 교수는 “불상의 손목은 다른 곳에 비해 가늘고 몸체에서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유실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누군가 고의로 잘랐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불상의 손 모양새(손갖춤)는 부처나 보살이 깨달은 중생 구제의 소원을 밖으로 표시하기 위해 짓는 것으로 부처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수목공원·공연장…가족나들이 ‘딱’이네 “박물관도 즐기고 공원 나들이도 하세요.” 박물관은 자칫 아이들에게는 딱딱하게만 느껴질 수 있다. 유물에 서려 있는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를 공감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은 그런 염려를 덜어도 될 것 같다.‘거울못’과 10만그루의 수목 등 다양한 자연 환경이 박물관 주위로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과 공연장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을 싫어하는 아이도, 박물관을 구경하고 싶은 어른도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연못·폭포·정원·식물원 등 눈길 박물관 바로 앞에는 도심 공원이 펼쳐져 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울못’이다. 거울못은 지름만 150m에 달하는 인공연못이다. 박물관을 설계한 정림건축 박승홍 건축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맨 처음 만나게 된다. 거울못은 성벽 모양을 한 박물관을 비추는 거울이다. 모든 물들이 한데로 모이는 저수지이자 통일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연못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연못과 박물관 정문 사이에는 언덕이 하나 있다. 박물관 정문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박물관은 겨울에는 거울못이 얼면 야외 스케이트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열린마당’은 박물관 중심에 시원하게 배치된 수목 공원이다. 한옥의 대청마루에 해당한다.10만 그루의 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보물 2호 보신각종, 보물 365호 흥법사 진공대사탑 및 석관 등이 숨어 있다. 박물관이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닌 사람들이 공부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설계가의 바람이 담겼다. 박물관 왼편으로 석조물정원, 어울마당, 미르폭포 등 다양한 녹지 공간이 펼쳐져 있다. 박물관 뒤편에도 크지는 않지만 녹음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전통염료식물원에서는 개암나무, 씀바귀 등이 재배된다. 그 옆으로는 의자와 잔디밭 등이 펼쳐져 있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도시락을 먹기에 그만이다. ●뮤지컬 즐기고 도서관서 책도 보고 박물관에는 공연장과 도서관 등 다양한 문화 시설도 갖추고 있다. 전문 공연장 ‘용’은 805석짜리 중극장이다. 서관에 있다. 박물관 안 공연장으로는 국내 최초다. 클래식,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무대에 올릴 수 있다. 공연도 연말까지 계속 이어진다. 지난달에는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과 금난새·정명화의 공연이 열렸다.4일부터 페리아 뮤지카의 ‘나비의 현기증’, 연극 ‘이’, 뮤지컬 ‘러브 다이어리’ 등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장점은 1층에 8석의 장애인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휠체어로 들어와서 옮겨 앉지 않고 그대로 관람할 수 있다. 다만 회전무대 등 무대시설이 부족하고 완벽한 음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흠이다. 지적인 관람객들이라면 서관 4층에 있는 도서관이 제격이다. 고고학·미술사학·역사학 전문 도서관이다.9만여권의 장서와 600여점의 디지털 자료를 갖추고 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환갑을 맞았다. 그러나 한 번도 ‘제 집’을 갖지 못했다. 무려 6차례나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60년 동안 타의에 의해 ‘역마살’에 시달렸다. 전쟁과 문화 홀대의 역사를 아프게 말해주는 대목이다. 국립박물관은 광복이 된 1945년 12월 경복궁 내 건물에서 정식 개관했다. 그러나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요 유물 2만여점은 부산대학교 박물관 등으로 전전해야 했다. ‘전세방 처지’는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53년 피란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 남산 분관에 자리잡았다가 55년 덕수궁 석조전에 이어 72년에는 경복궁 현 국립민속박물관 건물로 이전했다. 86년 박물관은 옛 중앙청 건물로 네번째 이사를 갔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다는 게 문제가 됐다. 결국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96년 경복궁 사회교육원 건물로 옮겨가 지난해까지 임시 거처로 사용했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은 환갑이 돼서야 제대로 된 보금자리를 마련한 셈이다.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교통편 ●지하철 용산∼회기 국철과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정문까지 걸어서 100m도 안 된다. 박물관 입구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0분 거리다. ●버스 버스도 비교적 편리하다. 초록버스 0211번(보광동∼옥수동)이나 빨강버스 9502번(의왕 고천∼신세계백화점)을 타면 된다. 용산가족공원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서울시티투어버스(도심순환코스)를 타도 바로 도착할 수 있다. ●승용차 서문으로 입장하면 된다. 주차료는 2시간에 소형차 2000원, 대형차 4000원이다.30분당 각각 500원,1000원의 추가 요금이 부과된다. 단 종일 주차는 각각 1만원,2만원이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개관 초기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훨씬 편리하다. ◆관람료 올해 말까지 무료다. 그러나 매표소에서 무료관람권을 발급받아야만 입장할 수 있다. 관람질서 유지와 이용객 안전 등을 위해서다. 내년부터는 성인(19∼64세) 2000원, 청소년(7∼18세) 1000원의 요금이 부과된다.20인 이상 단체는 성인 1500원, 청소년 500원이다.1주일 전에 인터넷으로 신청해야 한다. 어린이박물관도 7∼64세까지 500원을 받는다. 6세 이하와 65세 이상은 돈을 안 내도 된다. 그리고 매달 넷째 토요일과 관람 시간 종료 1시간 전부터도 무료 입장할 수 있다. 국빈이나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장애인 등도 무료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립중앙박물관과 연계된 문화 기관 17곳 가운데 5곳을 이용하면 무료관람이 가능하다. ◆관람시간·입장제한 평일은 오전 9시∼오후 6시,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 9시∼오후 7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매표는 관람시간 종료 1시간 전까지 한다. 휴관일은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이다. 최대 3000명이 동시 입장할 수 있다. 하루 최대 허용인원은 1만 8000명이다. 어린이박물관은 더 경쟁이 치열하다. 오전 9시부터 1시간30분 단위로 150명만 들어갈 수 있다. 평일에도 오전 일찍 가지 않으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관람 유의사항·편의시설 이용법 박물관 안은 당연히 금연지역이다. 음식물이나 애완동물과 함께 들어와도 안 된다. 다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은 출입할 수 있다.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에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돌려 놓는 것은 상식이다. 전화 통화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 싫다면 차라리 전화 전원을 꺼 놓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유물과 작품의 사진을 찍을 수는 있다. 그러나 플래시를 터뜨리거나 삼각대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 몰지각한 행동은 삼가야 한다. 상업적 용도의 촬영도 금지돼 있다. 박물관 입장료는 유물을 관람하는 값이다.1000원짜리 두 장 냈다고 제것처럼 만지면 안 된다. 혹시 아이들이 제집처럼 뛰어다니거나 유물을 손대면 따끔하게 혼을 내자. 편의시설도 꽤 갖춰져 있다. 유아나 노약자, 장애인은 유모차와 휠체어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물품보관함도 있어 가방 등을 넣어둘 수 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PDA·MP3플레이어 이용하세요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최첨단 IT(정보기술) 박물관을 자랑한다. 설비시설은 물론 박물관 관리에 최신 IT 기술을 접목시켰다. 무엇보다 PDA와 MP3 플레이어 등 개인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더욱 편리하고 상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박물관은 모바일 안내 시스템을 도입했다.PDA와 MP3를 갖고 전시품 앞에 서면 단말기가 전시품 위 적외선 발생장치와 정보를 주고받는다. 이후 관람객들에게 화상과 음성으로 전시물에 대해 안내를 해 준다. 지난해 리움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사용법도 비교적 간단하다.PDA를 켜면 한국어,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언어 선택 화면이 뜬다. 이후 각각의 박물관 전시실과 관람 코스가 안내된다. 전시실이나 코스를 따라 돌기만 하면 된다. 또 세계 최초로 박물관 네비게이터 기능도 갖췄다. 관람객의 현재 위치를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MP3 플레이어도 유물 소개는 PDA와 마찬가지다. 다만 네비게이션만 안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현재 PDA 300대,MP3 400대를 갖추고 있다. 현장에서는 각각 100대 이하만 선착순 대여하고 나머지는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터라 오전 10시만 되면 바로 동이난다. 대여료는 종일 PDA 3000원,MP3 플레이어 1000원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훔쳐간 처녀 물어내라는데

    훔쳐간 처녀 물어내라는데

    현대판 동정녀「마리아」가 아기를 낳았다. 남편의 얼굴은 물론 모른다. 아기를 본 일도 없다. 그리고는 아기와 함께 죽었다. 연탄「가스」로 죽은 지 4년 뒤에는 부활까지 했다. 이 어처구니 없고 알쏭달쏭한 사건의 주인공인 처녀는 내 인생을 보상하라고 아름다운 얼굴에 노기를 띠고 있었다. 결혼하고 딸 낳고 죽이고, 멋대로 아가씨를 주물러 1969년 3월 14일 서울지검 수사과 3호 수사관실 - . 현대판「마리아」의 호통과 울부짖음에 쇠고랑을 찬「요셉」(?)은 고개를 숙였다.「마리아」는 푸념처럼 대사를 이어갔다. 『당신이 나의 남편이오? 그래서 나는 당신과 5년 전 결혼했고 2년 전에는 연탄「가스」로 아기와 함께 죽었으며 당신은 명동성당에서 새장가를 들었단 말이지 - 』노기에 찬 여자의 울부짖음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이름을 도둑맞고는 호적상으로 기구한 운명에 이끌려 다닌 주인공 김영자(28·가명)양이었다. 역시 낯 모르는 처녀의 이름을 훔쳐 그녀를 욕되게 했고 신세를 망쳐놓은 엉뚱한 사나이 임성운(31·서대문구 홍은동)이었다. 이들의 얽힌 사연은 이러했다. 9세 때 황해도 송화군 봉계리에서 어머니를 따라 피난민 틈에 끼여 월남하던 김양은 도중에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과 함께 천애의 고아가 됐었다. 전남 군산 등지의 고아원을 전전하던 김양 자매는 김양이 18세 되던 해 서울로 와 살길을 찾았다. 합심한 자매의 노력은 그 나름대로 재미난 살림을 누릴 수 있었다. 무호적으로 지내던 두 자매는 지난 63년 서울 서대문구청에 호적도 올렸다. 그리고는 시민증도 받았다. 월남한 지 13년 만에 한 가계를 이뤘던 것. 65년의 어느 날 시민증을 잃어버리고 시민증 재교부를 받으러 구청을 찾았던 김양은 청천벽력을 맞아 정신이 없었다. 『당신은 결혼한 여자니 남편 호적이 있는 동대문구청으로 가보라』는 무심한 구청직원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라고 항의를 했지만 서류상으로 어엿한 남의 아내가 돼있는 사실에는 어쩔 수가 없었고 구청직원은 비웃는 듯 콧방귀만 뀌더라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에서 정신을 차린 김양은 남편(?)을 찾아 헤매야 했다. 처녀가 시민증 찾으러 가니 “결혼한 몸” 남편의 주소라는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292 일대를 꼬박 1년을 찾아 헤맸지만 허탕. 그 번지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 때로는 점심을 굶으며 어느 때는 차비마저 떨어져 서대문 집까지 20리 길을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지쳐서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던 김양이었다. 호적을 고칠 수도 없었다. 호적상 남의 아내인 처녀를 데려갈 사람은 없었다. 언니가 결혼을 포기하자 동생(25)마저 조바심을 냈다. 그러기를 3년, 지난 2월 초 주민등록증을 내러 서대문구 영천동 동사무소를 찾았던 김양은 또 한 번 기절초풍을 해야 했다. 남편(?)의 본적지인 동대문구청에 조회해 본 결과 이번엔 난데없는 딸과 함께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너무도 잔인한 희롱에 김양은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실로 어이가 없었다. 김양은 부리나케 동대문구청으로 달려갔다. 구청직원이 펴주는 호적원보에는 김양 자신이 65년 2월 12일 임성운과 결혼, 66년 1월 17일 경기도 고양군 진관내리에서 딸 혜덕(2)양과 함께 연탄「가스」로 사망한 기록이 있지 않은가. 너무나도 선명한 사망자의 붉은 글씨에 김양은 기절을 했다. 3일 동안 몸 져 누웠던 김양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기범 임성운을 몇 년이 걸리더라도 자기 손으로 잡고야 말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마침 김양의 눈에는 임씨 일가가 구청 호적과에 주민등록은 해놓고 주민등록증을 아직 찾아가지 않은 것이 발견되었다. 매일같이 구청으로 출근을 하기 한 달, 지난 3월 10일 드디어「남편」이라는 임씨가 나타났다. 대뜸 멱살을 휘어잡은 김양은 임씨를 서울지검 수사과로 끌고 왔다. 5년 동안 그렇게도 찾던「남편」의 손에 쇠고랑을 채웠다. 그리고는 따진 것이다. 임씨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건 경위는 김양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지난 65년 3월 17일 서독 광부로 출국을 해야만 했던 임씨는 가족수당을 더 받기 위해 총각신세를 면해야만 했다. 서독 광부 갈 때 수당 탐나, 대서소 통해 꾸며댄 결혼 임씨의 얘기를 들은 집 앞 대서방 김종주(45·사건 뒤 도망쳐 수배 중)씨는 좋은 수가 있다고 무릎을 탁 치더라는 것이다. 2년 전 김양의 호적수속을 해준 대서방 김씨는 김양의 도장을 위조, 혼인신고를 끝냈다. 딸 혜덕양까지 낳은 뒤 초현대적 결혼식을 한 양 꾸며댄 혼인신고를 했다. 68년 4월, 3년간의 기간을 끝내고 귀국한 임씨는 진짜 장가를 들기 위해 이젠 혼인신고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연탄「가스」사망.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에서 모녀가 함께「가스」를 마시고 죽은 것으로 사망진단서도 없이 통장을 보증세웠다는 허위 신고서까지 만들었던 것. 호적을 정리한 임씨는 지난 1월 어떤 성당에서 지금의 아내와 재혼 아닌 재혼을 했던 것. 변호사 강봉제씨는 김양이 도둑맞은 처녀를 다시 찾으려면 우선 가정법원에 호적말소 청구소송을 제기, 남자에게 올려있는 호적을 말소시키고 원호적을 복귀시켜야 된다고 했다. 김양이 그동안 입은 정신적 피해는 남자가 형법상 처벌받은 것과 관계없이 위자료 청구소송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낼 수 있다. <심정일 기자> [ 선데이서울 69년 3/23 제2권 12호 통권 제2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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