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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도·도로 마비… 고양~서울 ‘교통대란’

    철도·도로 마비… 고양~서울 ‘교통대란’

    태풍 ‘에위니아’가 물러간 뒤 장마전선이 북상하면서 12일 서울과 경기북부, 강원 등 수도권 지역에 집중호우가 내려 피해가 속출했다. 특히 경기도 고양지역은 시간당 70㎜의 폭우가 쏟아져 철도와 서울로 연결되는 모든 도로가 침수되면서 도시기능이 거의 마비됐다. ●고양 물폭탄 세례 고양지역은 지난 1993년 전자장비를 이용한 기상관측 이래 최고인 399㎜(오후 11시 현재)의 ‘물폭탄’을 맞아 도로의 80%가 침수되고 백석·성사동 일대 주택 500여가구가 물에 잠기는 등 물난리를 겪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경의선 일부 구간과 지하철 3호선의 백석역·정발산역이 침수돼 단축운행을 하는 등 서울과 고양으로 연결되는 대부분의 철도와 도로가 사실상 두절됐다. 특히 이날 오전 6시부터 1시간에 70㎜ 이상의 장대비를 뿌려 일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수색로 4차로가 2차로만 운행됐으며 백마로와 중앙로가 완전 침수돼 차량통행이 금지됐다. 오전 7시30분쯤에는 경의선 일산역이, 오전 8시45분에는 마두·정발산 등 지하구간의 선로가 잇따라 물에 잠겼으며, 오전 7시20분쯤 경의선 일산∼백마역 사이 선로가 침수돼 운행을 중단했다. 이 때문에 철도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으로 몰렸으나 고양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도로 곳곳이 막히거나 서행운행을 하는 바람에 출근길 교통대란을 겪었다. 경의선은 오후 5시30분 복구를 끝내 개통됐다. ●중랑천 범람 위기 오전 9시쯤엔 의정부시 장안동 중랑천 잠수교,10시엔 호원동 다락원 삼거리 방향 도로,11시엔 장암동 환경사업소앞 도로에서 차량이 통제됐고 동두천 소요동∼하봉암동간 신천 자동차전용도로 1.4㎞도 전면 통제됐다. 의정부시에서는 중랑천 수위가 위험수위 4m에 육박, 한때 범람 위기에 처하자 고수부지에 주차된 차량 327대를 긴급 대피시켰다. 구리시 인창동 구리초등학교 부근에선 배수로가 막혀 물이 역류, 인근 음식점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주민들이 대피했다. 고양시 덕양구 대장동 대곡초등학교는 통학로 주변 도로 곳곳과 주택이 침수되자 이날 휴교를 결정하고, 미리 등교한 학생들은 교사와 학부모가 인솔해 귀가시켰다. 경기도는 1096가구의 건물과 농경지 1362㏊가 침수되고,163가구 428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했다. 연천 한탄강의 수위가 오후 7시 경계수위를 넘는 7.53m를 기록, 범람이 우려되자 한강홍수통제소가 홍수주의보를 발령하고 연천군 직원 등 500여명이 비상대기했다. ●북한강댐 수위 조절 한강수력발전처는 12일 집중호우로 북한강 수계 댐에 유입되는 수량이 늘어남에 따라 이날 오전 11시부터 팔당댐 수문(전체 15개, 폭 5.75m) 7개를 2m가량씩 모두 17.5m 높이로 개방, 수위조절에 나섰다. 한강수력발전처는 오후 1시부터 청평댐 3개 수문을 3m 높이로 열어 초당 672t의 물을 내보냈고, 의암댐도 2개 수문을 2m 높이로 개방했다. 오후 6시20분부터는 팔당댐 수문 10개를 개방했고, 청평댐 수문 18개를 43m 높이로 개방했다. ●긴급 복구로 경춘·경원선 정상운행 경춘선은 오전 10시15분쯤 선로 3곳에 토사가 유입되면서 금곡∼대성리 사이의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 용산∼청량리∼덕소를 운행하는 경원선도 청량리역 구내 6,7번 선로가 침수되면서 청량리역에 정차하지 않았다. 철도공사는 긴급 복구 작업에 나서 경춘선은 오전 11시, 경원선은 낮 12시42분, 경의선은 오후 2시18분쯤 복구했다. 하지만 경의선은 오후 3시부터 금릉천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안전을 고려해 능곡∼금촌 사이의 열차 운행을 중단했다. 서울∼능곡, 능곡∼도라산은 열차가 정상 운행되면서 철도공사는 능곡∼금촌 사이에 전세버스를 긴급 투입하기도 했다. 한편 철도공사는 침수됐던 대화∼구파발 구간의 지하철 3호선 일산선을 13일 오전 5시20분 대화발 첫차부터 정상운행한다고 밝혔다. 전국종합 고양 한만교·수원 김병철기자 mghann@seoul.co.kr
  • “무속연구, 한민족 정체성 찾는 일”

    “무속연구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인데, 그동안 너무 천대받았고 자꾸 부정하려고만 해 안타깝습니다.” 한국 무속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국립민속박물관 양종승(54) 학예연구관은 ‘무당’이다. 정식으로 신내림을 받은 적은 없지만, 무당만이 할 수 있다는 작두를 타기도 했다. 승무와 판소리에 능하며, 무형문화재 강령탈춤은 정식으로 이수했다. 그는 무속인들에게 존경하는 ‘후원자’로 통한다. 이런 그가 평생을 모아온 무속 수집품을 정리, 샤머니즘 박물관을 준비하고 있다.“사립박물관은 문을 열면 곧 적자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그는 개관이 언제냐는 물음에 선뜻 자신있게 답하지 못했다.“수년 내 문을 열 것”이라는 답변에서 박물관을 여는 것이 얼마나 큰 작업인지 느껴졌다. 사재를 털어 틈만 나면 무속 자료를 모아온 그의 노력으로 조만간 한국은 샤머니즘박물관을 하나 갖게 될 것이다. 전남 여수에서 무속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서울로 상경, 대학에 진학했다. 이때부터 판소리·승무 등을 체험하고,‘큰 무당’ 우옥주·박동신 선생의 집에 기거하며 무속을 배웠다. 이후 직접 무당이 되기보다 무속을 이론적으로 연구, 양지로 끌어내야겠다고 마음 먹고 유학길에 올라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무속으로 화제를 돌렸다.“무속은 한국의 역사·문화의 근저에 자리한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천대해 왔어요.”그는 한국인은 ‘영적인(spritual) 민족’이라고 했다. 한민족 특유의 신바람은 무속에서 비롯됐다는 것. 무속학회장을 역임하고 귀신학회를 창립, 회장을 맡아 샤머니즘 페스티벌, 국제 무속인교류 등을 준비 중인 그의 꿈은 한국 무속의 ‘세계화’와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외래 종교가 주를 이루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 전통신앙을 잘 보전해 가꾸는 것이 제 사명이죠.”연합뉴스
  • 입국시간 비공개… 숙소도 극비

    입국시간 비공개… 숙소도 극비

    웬디 커틀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측 수석대표가 언론 등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며 매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커틀러 수석대표는 한·미 FTA 2차 본협상에 맞춰 9일 오후 5시10분쯤 자국 국적기를 이용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깨고 워싱턴발 대한항공 KE094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측은 막판까지 입국시간과 비행기 편명을 비공개에 부쳤다. 커틀러 수석대표는 당초 국내외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일절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바꿔 입국장을 빠져 나오면서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의 질문에 밝은 표정으로 5분가량 답변한 뒤 서울로 향했다. 한국내 반(反)FTA 여론을 의식한 듯 “한·미 FTA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도 이익이 되는 윈-윈게임이 될 것”이라면서 “한국 국민들의 이해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지나치게 언론과의 접촉을 제한하면 오히려 반FTA 정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일부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측은 75명의 협상단이 머물 숙소로 시내 그랜드하얏트와 신라호텔 등을 놓고 막판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등 보안·안전에 신경을 썼다. 커틀러 대표는 10일 낮 회의장인 신라호텔에서 국내외 풀 기자단과 간담회를 갖고 미국측 입장을 설명하며 오후에 환영리셉션에 참석한다. 한편 이날 인천공항에는 경찰과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신경전으로 한때 소란스러웠으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부는 협상단이 도착한 F게이트 부근에 경찰 1000여명을 배치, 범국민운동본부의 협상단 입국 저지 시도를 원천 봉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입국장에서 공항을 빠져 나가는 출구까지 완전히 막아 시민들이 입국장을 돌아서 나가는 불편을 겪었다. 대교협과 한총련 등으로 이뤄진 한·미FTA 학생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한·미FTA 협상을 즉각 중단하고 미 협상단은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김균미 김준석기자 kmkim@seoul.co.kr
  •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현대 생활에서 날씨는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하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보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는 언제 어디에 설치됐을까? 공식적인 최초의 기상대는 1904년 4월 인천시 중구 전동 25,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관측소’다. 제물포고등학교 교정 뒤편 울창한 숲속에 우뚝 솟은 백색의 원통형 건물이었다.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이 해군작전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사연표’에는 1884년 7월 부산 일본전신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고 표기돼 있지만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관측소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일본이 1900년 인천 중구청 뒤 송학동에 있던 옛 수진여관 자리에 기상사무소를 개설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이것이 정식 기상대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산 정상에 2층 목조 건물로 69평 규모로 세워진 인천관측소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기상정보를 수신해 그날 그날의 날씨를 분석하고 예고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초대 인천관측소장에는 일본 중앙기상대 기사였던 와다(和田)씨가 부임해 기틀을 잡았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경성, 대구, 부산, 목포, 강릉, 평양, 용암포, 원산, 성진, 중강진, 웅기 등 13개 지역의 측후소는 물론 중국 만주, 대련, 천진, 청도, 제남 측후소까지 통괄했다. 또 일본 중앙기상대,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받았다. 인천관측소 및 지방 측후소에서는 매일 오전 2시,6시,10시, 정오, 오후 2시,6시,10시 등 모두 7회에 걸쳐 기상을 관측했다. 날씨에 이상이 있을 때에는 매 시간 또는 30분마다 임시 관측을 했다. 관측사항은 기압, 기온, 습도, 풍향, 풍속, 강수량, 증발량, 구름의 투명도 등 중요한 기상요소를 비롯해 그외의 기상현상을 실측했다.1910년 4월에는 인천관측소에서 헬리 혜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관측소의 주요업무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시보와 오후 3시 천기 예보였다. 일기예보는 “서해로 구름이 창궐하고 태풍이 불 조짐이 보이나니….”라는 식의 고풍스러운 멘트였다. 특히 정오 시보는 포를 쏘아 알렸는데 포수가 손을 다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실제로 손가락 8개를 잃은 포수는 얼마 전까지 동구 화평동에서 ‘전당포 조막손 아저씨’로 불리며 생존했다.1924년 5월21일에는 15분이 지나도록 오포가 울리지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당시 인천 사람들은 관측소가 있는 응봉산을 오포 쏘는 곳이라 해서 ‘오포산’으로 불렀다. 인천관측소는 한일합병 후 조선총독부 산하기구가 되었는데,1912년 3월 총독부관측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지금의 중앙기상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관측소는 기상에 관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주변 해역, 동북해, 태평양, 일본 주변 해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역에 대한 해양관측을 실시했다. 인천관측소는 1939년 7월 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복 후 1948년에는 중앙기상대가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되고,6·25전쟁으로 중요한 기상관측 시설이 파괴돼 업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워지자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마저 서울로 이전된다. 그 후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바뀐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만화인생 40년 허영만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만화인생 40년 허영만

    ‘사이(間)예술’이라고 한다. 익살과 재치로 그 사이를 춤추듯 넘나든다. 마른 나무에 꽃을 피우게 하는 시(詩)적 감동도 담겨 있다. 특유의 과장과 생략으로 경묘(輕妙)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렇다.‘만화’라 한다. 눕거나 엎드리거나, 혹은 떼굴떼굴 구르며 보면 더욱 재미있어진다. 학창시절 한번쯤 안 빠져본 사람이 있을까. 수업시간에 ‘지리부도’로 앞을 가로막고 몰래 보다가 들켜 혼났던 일, 끼니를 건너뛰며 동네 만화가게 들락거리다가 어머니한테 야단맞았던 일, 이에 대한 몰입의 추억은 어른이 돼도 늘 화젯거리의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비트´등 15편 히트작 영화나 드라마로 만화가 허영만(60)씨. 이 시대의 최고 만화가로 인기몰이를 한다. 그 비결이 뭘까. 나이 예순이면 게으름으로, 혹은 쌓은 명성으로 어느 정도 느슨해질 법도 한데 결코 아니다. 젊은이 못지않은 창작열정으로 고삐를 죈다. 또한 굽힐 줄 모르는 치열한 자기관리의 고집과 도전 정신으로 변화무쌍한 대중문화계를 파고들고 있다. 요즘 들어서도 음식만화 ‘식객’은 드라마로 준비 중이고 도박만화 ‘타짜’는 한창 영화촬영 중일 만큼 대중문화의 장르를 여전히 뛰어넘는 주인공이다. 허씨는 올해로 만화계에 입문한 지 꼭 40년을 맞는다. 그동안 ‘비트’‘퇴역전선’‘아스팔트 사나이’ 등 무려 15편의 히트작이 영화 또는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사오정 시리즈를 유행시킨 ‘날아라 슈퍼보드’는 애니메이션으로는 방송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오!한강’은 서울대 학생회 필독서로 선정됐고 ‘태양을 향해 달려라’는 70년대 스포츠만화를 이끌기도 했다. 허씨는 그렇게 시대가 흘러도 대중문화의 한 중심에서 살아왔다. 지난주 서울 강남구 수서역 근처의 작업실에서 허씨를 만났다. 오피스텔 초인종을 눌렀더니 뜻밖에도 큰 개 한마리가 꼬리를 치며 가장 먼저 반긴다. 맹인 안내견같이 생긴 순둥이였다. 개 이름을 물었더니 영국산이어서 ‘처칠’이라고 했다. 허씨는 연재만화의 스케치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옆자리에는 보조팀 4명이 색깔을 칠하는 등 작업을 돕고 있었다. 사방 벽 책장에는 자료집이 빼곡히 꽂혀 있어 평소의 준비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작업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허씨와 마주 앉았다.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여서 그런지 나이가 50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하자 그냥 멋쩍게 웃으며 “그런 얘기 종종 들어요.”라고 했다. 먼저 40년 만화인생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방송 프로그램에 ‘가요 반세기’라는 말이 있잖아요. 벌써 (자신의) 만화 반세기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피력했다. 이어 “한 가지 일만 해왔다는 게 고맙고…, 종이와 연필 들고 다닌 세월이었지요.”라고 했다.(90년이 넘는 우리나라 만화역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셈이다.) 그동안 수십 편의 만화를 그렸는데 가장 아끼는 작품이 어떤 것이냐고 했다.“전부 다 소중하지만 그중 ‘망치’‘오!한강’‘각시탈’‘사랑해’‘식객’ 등을 꼽을 수 있겠네요.”라고 대답했다. 문득 만화란 무엇이냐는 우문을 던졌다. 그러자 지체없이 “청량음료지요. 매번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라고 전제한 뒤,“답답할 때 떠나는 것처럼 (갈증을)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재미와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또한 적절한 생략과 과장이 필요하지요.”라고 설명했다. ●치열한 도전정신으로 대중문화계 우뚝 진도 안 나갈 때는 어떻게 할까.“밤새 낑낑댑니다. 어떨 때는 새벽 두세시에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 돌아다니기도 하지요.”라고 했다. 또한 “줄거리 쓸 때가 가장 어려워요.‘식객’인 경우 식욕을 느끼게 해줘야 하거든요. 사진도 많이 찍지요. 도축장의 경우 400장 정도 찍었어요. 연재를 하려면 최소 스토리 60개를 준비한 뒤 시작합니다.”고 했다. 아울러 연재 중에도 강원도나 전라도로 계속 돌아다니며 현장취재를 해야 독자들의 입맛에 맞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철저한 준비와 취재, 각고의 노력이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그의 이름을 지탱해 주는 요인임을 알 수 있었다. 폭력물이니, 무협물이니 하는 대중의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혼자만이, 즉 ‘허영만식’의 독특한 장르를 추구해와 많은 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유혹이 많은 바깥 대중문화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중을 이끌고 가는 방식이다. 그는 평소 1등에 연연하지 않는다.‘5위권 안에만 들면 된다. 난 나의 길을 가자.’고 다짐하며 나름대로의 마음 단련을 한다. 그럴 것이 70년대엔 이상무씨,80년대에 이현세씨가 최고였을 때도 자신만의 길을 가면 된다며 묵묵히 자기관리에 열중했다. 요즘 만화계의 현실에 대해 “사회적인 제약도 없어졌는데 오히려 과거보다 분위기가 더 가라앉아 있어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영화나 연극처럼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고 인터넷과의 관계 설정도 필요할 때입니다.”라는 설명이다. 만화가들 또한 발로 뛰면서 취재를 하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8남매 중 셋째인 그는 어릴 적부터 늘 만화와 가까이 있었다.‘코주부삼국지’ 등 누나와 형이 보던 만화를 즐겨 봤다. 또 사무라이 소설을 자주 읽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남다른 그림솜씨로 공부가 끝나면 학교에 남아 혼자 환경정리를 도맡아 했다. 중학교 때에는 명작 위인전을 많이 접했다. ●‘허영만 사단´ 현재 문하생 10여명 원래 미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부친의 멸치사업 실패로 인해 포기하고 고향인 여수를 떠나 서울로 상경, 만화에 입문한다. 이때가 66년 1월. 이후 박평일·이향원 등의 문하를 거쳐 74년 ‘소년한국일보’ 신인공모에 ‘집을 찾아서’가 당선되면서 정식 만화가로 홀로서기를 한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신동우 화백은 “우리 시대는 이제 갔다.”고 할 정도로 허영만의 천부적인 감각과 소질에 찬사를 보냈다. ●“아이디어 얻으려 새벽까지 광화문 배회” 예견은 빗나가지 않았다.‘각시탈’(74년),‘태양을 향해 달려라’(77년),‘망치’‘벽’(88년) 등 거의 매년 베스트셀러를 내놓으며 만화계를 주도했다.88년에는 문하생이 무려 23명까지 달했다. 하지만 작품성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새삼 마음을 고쳐먹고 문하생을 6명으로 줄이는 등 돈보다 작품의 생명력 강화에 정성을 쏟았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른바 ‘허영만 사단’이라고 하는 문하생은 10명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윤태호나 김준범 등이 현재 만화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요.” 만화 외에는 어떤 일에 관심을 둘까. 그는 ‘산사나이’라고 할 만큼 산을 좋아한다. 등반가 박영석씨와 함께 해외 원정도 4차례나 했다. 에베레스트는 해발 6400m까지 올랐다가 고산병으로 도중 하차했다.2년 전에는 백두대간을 종주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산행멤버는 15명 정도. 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도봉산에서 야영하고 아침에 작업실로 곧장 출근하는 경우도 있다. 산은 그에게 정신적 휴식의 공간이자 작품구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산행할 때마다 스케치북을 놓지 않는다. 이밖에 요즘에는 약간 멀리하고 있지만 골프 20년 경력(베스트 스코어는 1언더파)에다 바다낚시도 가끔 즐기기곤 했다. ●교육만화 준비중… 에베레스트도전 ‘산사나이´ 허씨는 요즘 교육만화를 준비 중이다. 어린이들이 나중에 커서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담은 만화다. 이를 위한 자료수집을 거의 끝냈고 연말쯤이면 선보일 수 있다고 했다. 판타지 만화에 대해서는 “당분간 현실적 만화를 계속 그릴 작정입니다. 나중에 손자·손녀를 보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라고 대답했다. 슬하에는 아직 미혼인 아들과 딸 둘을 두었다. 직장에 다니는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그림을 잘 그린다.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가 그린 만화에 대한 모니터와 평론역할을 하고 있다. 딸은 현재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 중이다. 기회를 봐서 부녀 공동전시회를 생각 중이라고 귀띔했다.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7년 여수 출생 ▲66년 여수고등학교 졸업 ▲66년 서울에서 만화계 입문 ▲74년 소년한국일보 신인공모에 ‘집을 찾아서’로 입선 ▲99년 스포츠조선에 ‘타짜’ 연재 ▲2002년 동아일보 ‘식객’ 연재 ●주요 작품집 태양을 향해 달려라(77년), 변칙복서(83년), 무당거미(84년), 퇴역전선·고독한 기타맨·오!한강(86년), 망치·벽(88년), 날아라 슈퍼보드(90년), 아스팔트 사나이(92년), 비트·세일즈맨·미스터Q(94년), 오늘은 마요일(95년), 안개꽃 카페(96년), 사랑해(98년), 타짜(2000년) ●상훈 대한민국 만화·애니메이션대상 만화대상(04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04년)
  • [서울 자치구 새얼굴] 정동일 중구청장 당선자

    정동일 중구청장 당선자는 ‘자수성가’한 중견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 출신이다. 중학교를 중퇴한 뒤 상경해 자동차 정비사·운전기사와 과일행상 등을 하며 학업을 마쳤고, 지금은 전세계에 체인점을 둔 굴지의 중견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성공한 CEO가 일선 구청장으로 변신한 것은 ‘배 고팠을 때 보리밥 한 그릇 준 사람의 은혜를 절대 잊지 말라.’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다. 그의 성공 발판이 된 ‘제 2의 고향’인 중구 발전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유년시절의 고생이 인생의 전환점 그는 5살 때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시면서 궁핍하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 집안형편 때문에 국가재건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재건중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가 문을 닫아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15살 때 상경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날’(현재 어버이날)이 되면 아이들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았는데, 어머니가 있는 아이들은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은 하얀 카네이션을 달았죠. 친구들이 ‘너 엄마가 없구나.’라는 말을 할 때마다 너무 서러워 아직도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안이 넉넉했다면 아마 지금의 내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았겠지요.” 이런 어려움들이 자신을 강하게 만든 것은 물론,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게 했다. 그는 당선 직후 맨 먼저 양로원과 고아원 등 관내 사회복지시설과 재래시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내는 내 인생의 등대 서울로 올라온 그는 월급도 없는 자동차정비소에서 일을 하며 기술을 배웠다. 당시 운전면허자가 귀했던 탓에 군입대해 장성의 운전병으로 발탁됐고, 제대후 모 기업 이사의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여기서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아내 용옥화씨를 만났다. 당시 돈 한푼 없었던 자신을 택한 아내는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하며 하루 연탄 한 장으로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도 자신을 믿고 따라줬다. 그는 과일행상과 안주 배달 등을 하며 돈을 모았고,1990년 명동에 ‘둘둘치킨’이라는 조그만 치킨점을 냈다. 이 가게는 전국에 300여개가 넘는 체인점과 미국과 일본 등 전세계 7개국에 진출한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아내는 제 인생의 ‘등대’입니다. 지난 27년 동안 내가 힘들어 좌절할 때면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할 때도 제 뜻을 믿고 따라줬습니다.” ●세계적인 중심구로 만드는 게 목표 그는 1998년 중구의회 제 3대 구의원에 당선되면서 지역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2002년에는 서울시의회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지역사회 봉사에 앞장섰다. “구 발전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경영 노하우를 풀어놓을 생각입니다. 낙후된 중구를 대한민국, 더 나가 세계적인 중심구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구민들이 저에게 기회를 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먼저 도심 재개발 사업을 통해 도심에 미국 맨해튼의 록펠러센터처럼 중구를 상징할 초고층 빌딩 건설을 추진할 생각이다.70∼8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을 만들어 강북의 ‘랜드마크’를 만든다는 복안이다. 또 특목고 유치, 사회보장 시스템 확대, 남산에 테마공원, 청계천에 자전거 도로 설치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구민들과 더 많은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 구청장실을 1층으로 옮길 생각이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프로필 ▲출생 1954년 전북 무주 ▲학력 동국대 경영학과, 북한학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석사 3학기(지방자치 전공),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3학기(정치행정 리더십 전공) ▲경력 일동인터내셔널(프랜차이즈 둘둘치킨 회장), 동국대 총동창회 부회장, 중구경제포럼 이사장, 중국 옌볜대 객좌교수, 중국 지린대 겸직교수, 제 3대 중구의원,5·6대 서울시의원, 한나라당 서울시당 부위원장 ▲저서 희망을 튀겨내는 치킨 아저씨 ▲가족관계 용옥화씨와 1남2녀 ▲취미 등산, 독서 ▲존경하는 인물 이병철, 김구
  • [서울 자치구 새얼굴] 이노근 노원구청장 당선자

    이노근 노원구청장 당선자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줬다.‘고집이 세고, 깐깐하다.’‘갑작스레 노원구 공천을 받아 노원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소문은 노원구청까지 나돌아 공무원들을 불안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의 첫 만남은 ‘왜 그런 평가가 나왔을까.’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처럼 얘기를 풀어 나갔다. 간간이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가면서 편안하게 이어가는 그의 얘기는 마치 그가 쓴 ‘경복궁 기행열전’의 화자(話者)를 연상케 했다. “그런 얘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허허), 악선전이에요. 고집이 세다는 것은 맞아요. 일에 대한 고집이지요. 젊었을 때에는 장애물이 생기면 반드시 돌파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줄도 압니다.”나이를 먹으면서 그 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다. 그는 공직생활 30년째다. 종로·금천·중랑부구청장과 종로구청장 권한대행을 거쳤다. 문화과장, 주택기획과장 등 모든 행정부서를 섭렵했다. 그는 직원들을 일로 평가하지 지연·학연 등은 따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좋아 지금도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려울 때 힘과 용기가 된단다. 연고 얘기가 나오자 그의 목소리가 커진다.“히딩크와 아드보카트가 연고가 있어서 한국 축구 감독을 했습니까. 행정은 구로나 노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향피제(지방수령 임명 때 고향을 피하는 제도)는 왜 했겠어요.” 사실 그는 종로구를 강력히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초빙 형태로 노원구에 출마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선거에서 12만 1683표로 강북지역에서 최다득표를 했다. 그는 공고출신 구청장이다. 청주공업고등학교를 나와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졸업은 경제학과에서 했다. 행정고시도 19회로 빠른 편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이장이었단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난 공고출신으로 서울로 유학을 온 것은 오로지 어머니의 교육열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부인 신인수(47)씨와는 행정고시 합격 이후 제천군청에서 수습을 받을 때 총각 사무관과 하숙집 딸로 만났다. 소백산 희방사에서 프러포즈를 했단다. 그는 글 솜씨가 좋다. 책도 많이 냈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이고, 한국문인협회 회원이지만 글솜씨보다는 문화를 더 내세운다. 종로구와 올림픽문화예술축전준비단에서도 오래 근무하면서 문화와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원구를 변방에서 동북권 중심지로 변모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창동차량기지와 도봉면허시험장의 이전, 노원문화거리 조성 등이 그것이다. 노원문화거리에는 그의 문화아이디어를 담아낼 생각이다. 또 노원소각장을 활용하는 대신 이로 인해 피해받는 주민을 위해 시에서 지원을 이끌어내 당현천을 복원, 보답할 계획이다. 그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전문가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 그린벨트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노원구를 둘러싼 그린벨트에 대한 입장도 확고하다.“그린벨트가 아니고 블랙벨트, 데드벨트입니다. 그린벨트의 70% 이상이 관리되지 않고, 쓰레기에 덮여 있어요. 풀 것은 풀어야지요.”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프로필 ▲출생 54년 청주 청원군 ▲학력 청주공고, 중앙대 경제학과, 경기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경력 행정고시 19회, 서울시 문화·주택기획과장·시정개혁단장,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종로·금천·중랑 부구청장, 종로구청장 권한대행, 서울산업진흥재단 사무국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서울문화사학회 부회장 ▲수상 근정포장, 녹조근정훈장, 홍조근정훈장 ▲가족관계 신인수씨와 1남1녀 ▲취미 등산, 음악감상 ▲기호음식 설렁탕, 칼국수 ▲존경하는 인물 박정희 전 대통령 ▲좌우명 정심성의(마음은 바르게 뜻은 참되게)
  • “인생에 정년퇴직은 없다”

    “인생에 정년퇴직은 없다”

    “늙어서 일 못하는 게 아니야. 늙었다는 핑계로 할 수 있는 일도 그냥 못 본 척하는 거지. 인생에 정년퇴직이 어디 있어.” 70,80 나이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젊은 그대’들이 있다. 대한은퇴자협회가 주는 ‘제3회 히어로(영웅) 대상’ 수상자들을 만나봤다. 시상식은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 ‘우수노령 히어로’ 72세 이혜숙씨 우수노령 히어로상을 받는 이혜숙(72·여)씨는 전문비서로 일선을 누비고 있다. 1957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취업했으니 올해로 직장생활을 한 지 꼭 50년째. 이화보전을 졸업한 어머니와 보성전문을 졸업한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조국에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며 이씨를 대학까지 보냈다. 이씨는 “재학 중에 지금의 비서학과와 마찬가지인 영문과 부설 ‘영어속기반’이 생겨 2년 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땄다. 속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50여명이 시작해 16명 밖에 수료를 못했다.”고 되돌아봤다. 그동안 이씨가 거친 외국계 회사와 단체는 모두 6곳으로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통역, 번역까지 도맡아 했다. 이씨의 첫 직장은 ‘월드비전’(세계 기독교 선명회)이었다. 전쟁고아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미국의 양부모를 중간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편지를 써오면 양부모가 좋아할 만한 아이들다운 문장으로 영문번역을 해 미국에 보냈다. 지금까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하지만 맞벌이 1세대인 그는 두 딸이 수험생일 때 제대로 뒷바라지해 주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큰딸은 음악을 전공해 프랑스로 유학가서 결혼까지 했고, 작은딸은 저와 마찬가지로 비서의 길을 걷고 있어요. 잘 커줘 고맙지요. 요즘에는 작은딸이 저한테 비서로서 쓴소리도 많이 해준답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수출업체 ㈜BSK인터내셔널에서도 비서를 맡고 있지만, 전 직장에서부터 2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상사와는 눈빛만 마주쳐도 속을 읽을 수 있다. 한국 업체들의 이메일을 번역해 외국 바이어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칠순이 넘어 연봉 3500만원의 비서직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런 능력과 자신감이다. 그는 “나이 들었다고 좌절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과 맞서라.”고 인생 후배들에게 주문했다. ■ ‘최고노령 히어로’ 85세 이응덕씨 최고노령 히어로상을 수상한 이응덕(85)씨는 서울시립 관악노인복지관 공동작업장 ‘두레’의 반장이자 분위기 메이커이다. 여든이 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동적인 그는 “일하지 않으면 병이 난다.”면서 8년째 하루도 출근을 거르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하는 일은 플러그를 조립하거나 종이봉투를 붙이는 것으로 10여명의 반원 모두 80대 전후 고령자들이다. “중앙대 부속중·고에서 수위로 일하다 나이가 많아서 그만뒀어. 그래도 쉴 수가 없어 혹시나 하고 복지관을 찾아 왔는데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도 일을 하게 해주니 고마울 뿐이야.” 이씨가 처음 일을 손에 쥔 것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이었다. 개성에 있는 일본 군수품 회사에서 공급업무를 맡았다. 해방 후 자리를 잡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6·25전쟁이 터져 보급대로 부산에 끌려갔다. 몇 차례 죽을 고비 끝에 전쟁이 끝났고 형이 근무하는 미군부대에서 군수품 취급 업무를 하다가 57년 광탄에 있는 보급중대에 정식 입대를 했다. 제대 뒤 가평에서 장사를 시작했지만 하늘은 이씨를 돕지 않았다. 큰 물난리가 터져 터전을 다 잃게 된 이씨는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수재민 지원금 1000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와 관악구 봉천동에 자리를 잡았다. 연탄 1장을 사려 해도 상도동까지 걸어가야 하던 시절이었다. 전쟁과 재난 등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이씨는 돈 욕심이 별로 없다.“이거면 족하다.”는 게 항상 하는 말. 욕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 도와 주길 좋아해서 그동안 돌보고 시신까지 거둔 무의탁노인이 40여명에 이른다. 이씨는 “취업을 하려고 왔다.”면서 편한 일만 찾는 50∼60대를 보면 안타깝다.“저 나이면 청춘인데…. 거저 주는 것만 바라지 말고 일을 찾아 먼저 움직여야지. 난 하늘나라 가는 그날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을 거야. 그게 장수 비결이라니까.”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서울 자치구 새얼굴] 맹정주 강남구청장 당선자

    [서울 자치구 새얼굴] 맹정주 강남구청장 당선자

    ‘기획2과장, 사회개발기획과장, 자금기획과장, 종합기획과장….’ 맹정주(59) 서울 강남구청장 당선자는 경제기획통이다. 기획의 달인(?)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맹 당선자는 경제기획원에서 기획 관련 과장은 모두 거쳤다. 국장까지 포함하면 ‘기획’자 붙은 부서는 5∼6번쯤 맡았다. ●지연·학연 따지지 않는 스타일 특히 종합기획과장은 1960∼80년대 한국경제를 견인했던 경제기획원 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자리다. “20대에 3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참여했어요. 국민소득 2만달러를 바라보는 시대가 됐는데 나도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였다고 자부합니다.” 맹 당선자는 어느 면에서는 실패(?)한 경제관료이다. 물론 조달청 차장(98년)과 국무총리실 경제행정조정관(99년) 등을 지냈다. 하지만 경제기획원 종합기획과장을 거친 전임자들이 대부분 장·차관의 길을 걸었던 것에 비하면 그는 좀 다른 궤적을 그렸다. 관료사회에 존재하는 줄서기와 지연·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물먹었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소신이 강하다. 옳다고 생각하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방식을 고수한다. 강점이자 단점이다. 지방선거 출마는 이 스타일과 무관치 않다. 처음에는 출마는 생각지도 않았다. 순탄한 길을 걸었고, 순탄한 길이 보장된 삶이었다. 그를 선거판에 끌어낸 것은 세상이었다.“어렵게 이만큼이나마 일궈 놓았는데 언제부턴가 세상이 기대와 다르게 돌아가고 있어요. 그냥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출마를 결심했어요.” 고향에 출마할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경제기획원과 국무총리실 등에서 쌓은 경험을 살리려면 서울에서도 강남이어야 했다. ●존경받는 강남 만들 터 그는 강남의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확충에 주력할 계획이다. 전일보육 제도 도입, 감세정책, 중기 활성화 전략, 문화공간 확충 등의 시책들이 대기중이다. 하지만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강남의 왜곡된 이미지를 바꾸는 것. “강남을 한국의 존경받는 대표도시로 만들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꾸는데 국회의원이 낫지 않느냐.’고 묻자 “국회의원은 너무 정치적이어서 구청장을 택했는데 선거는 역시 정치였다.”고 털어놨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선거를 치렀다. 공천에서부터 선거운동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점심·저녁 자리를 5∼6곳씩 찾아다녔는데 정작 저녁 때 보니 점심을 굶었더란다. 고된 선거운동에 힘이 되어준 사람은 부인 서창옥(연세대 의대 치료방사선과) 교수다. 처음에는 “무슨 출마냐.”고 반대하더니 막상 출마를 하자 적극 도와줬단다. 연애(중매+연애)시절 “매일 생사를 넘나드는 암환자들을 대하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속상해하지 않는다.”는 말에 ‘이 여자와 결혼하면 마음고생은 안 하겠구나.’싶어 결혼했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눌변에 표정도 굳은 편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부드럽고 섬세하다. 천안 광덕면에서 태어난 ‘촌놈’ 때문인지도 모른다. 은행원인 아버지 덕에 온양온천·영동·합덕·덕수초등학교 등 초등학교 4곳을 다녔다. 담임도 12명이나 된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4·5·6학년을 다녔던 영동초등학교 동창들은 지금도 자주 만난다. 주량은 소주 한병. 지금도 경제기획원 공보관 시절(92년) 만났던 기자들과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곤 한다. ■ 프로필 ▲출생 47년 천안 ▲학력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학석사) ▲경력 행시10회, 경제기획원 공보관·예산총괄심의관·정책조정국장, 재정경제원 국고국장·국민생활국장, 조달청 차장, 국무총리실 경제행정조정관, 한국증권금융 사장 ▲수상 녹조근정 포장 ▲가족관계 서창옥씨와 1녀 ▲취미 서예, 바둑 ▲기호음식 청국장 ▲존경하는 인물 김재익 전 청와대경제수석 ▲좌우명 진인사대천명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儒林(633)-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6)

    儒林(633)-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6)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6) 자신의 숙소를 찾아온 유지를 적극적으로 받아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매정하게 뿌리치지도 못한 채 ‘문을 닫을 것인가, 인정 없는 일. 동침할 것인가, 의리 없는 일(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이라고 노래하면서 병풍을 걷고 자리를 달리한 채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을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율곡. 그런 일이 있은 지 4개월 뒤인 1584년 1월 16일 마침내 율곡은 한양의 대사동(大寺洞)에서 숨을 거뒀으니 이처럼 유지는 율곡에게 있어 마지막 불꽃이었던 것이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해도에 있던 유지는 율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람처럼 서울로 달려와 애통해하였고, 이후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두향이가 보내온 분매역시 퇴계가 죽기 2년 전의 일로서 그런 의미에서 분매는 퇴계와 두향이가 마지막으로 나눠 마신 ‘구슬미음(瓊漿)’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매화꽃을 바라보던 퇴계는 문득 생각난 듯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피봉을 뜯자 안에서 접힌 주지가 나왔다. 퇴계는 종이를 펼쳐서 편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하였다. “나으리.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나으리를 못 뵈온 지 벌써 십수 년이 흘렀사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으리.” 낯익은 필체였다. 필체를 본 순간 퇴계는 틀림없이 두향으로부터 보내온 편지임을 확신할 수 있음이었다. “소첩은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적성산 기슭에 작은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사옵니다. 바람이 전해오는 풍문을 통하여 나으리께서 그동안 어떻게 지내시온가는 대충 전해 듣고 있사오나 며칠 전에 꾼 꿈은 너무나 흉몽하여 나으리의 옥체에 무슨 나쁜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두렵고 송구하여 나으리께서 잘 알고 계시던 이방을 통하여 문안인사를 드리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옥체 만강하시나이까, 아니면 소첩이 꾼 꿈처럼 고황(膏)에라도 병이 드셨나이까. 흉몽에서 깨어나 너무나 참람하여 통곡을 하며 울었사옵는데, 다음날이라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으리께서 계신 곳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사오나 차마 소첩의 몸으로 그럴 수는 없이 이처럼 인편으로 안부를 여쭙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퇴계는 읽던 편지를 멈추었다. 두향의 편지는 사실이었다. 그 무렵 퇴계는 심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퇴계 자신은 자신의 병을 ‘극병(劇病)’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종이 승하하고 인산하는 것을 보기도 전에 고향으로 도망치듯 내려와서 여론이 분분하였을 때 기대승이 편지를 보내어 퇴계에게 벼슬에 나오기를 간곡히 청하자 퇴계가 자신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기에 맞지 않는 점으로 ‘크게 어리석음(大愚)’,‘심한 병(劇病)’,‘헛된 명성(虛名)’,‘잘못 입은 은명(誤恩)’의 네 가지로 열거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서울 자치구 새얼굴] 신영섭 마포구청장 당선자

    신영섭 마포구청장 당선자를 처음 봤을 때 영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180㎝의 키에 농구와 조깅, 수영으로 다져진 외모도 그렇지만, 말도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경제 전문가, 언론인으로 쌓은 다양한 경험이 외모와 언행에서 배어 나왔다. ●사회문제에 눈을 뜨다 신 당선자는 전북 옥구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 서울로 이사를 왔다. 고향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터라 마포구 서교동 고급 주택가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주변 판자촌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모녀를 만났다.“어머니가 딸의 머리를 감겨주는데 거의 ‘물고문’수준이었습니다.” “고급 주택가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면 판자촌이 나왔는데 시골에서는 보이지 않던 빈부의 차를 목격한 뒤 차별, 빈곤 등 사회문제에 눈을 떴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이러한 고민은 더 깊어졌다. 그때 윤재수 사회 선생님을 만났다. “토요일이면 선생님의 지도로 학교 주변을 청소하고, 선배님이나 다른 선생님을 모셔놓고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선생님의 애국심과 향학열, 그리고 봉사 정신에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신 당선자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다.6식구가 13평짜리 주공아파트에서 살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지만 서울대 경제학과를 들어갔다.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공장에서 일을 하다 실명 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박사 논문은 윤 선생님에게 헌정했다. 선생님은 그가 대학 재학때 이미 돌아가셨다. 그는 산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 2004년 정치계에 입문했다. ●짠돌이 구청장? 신 당선자는 ‘짠돌이’라는 평을 듣는다.‘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는 경제 논리를 실천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지하철을 애용한다. 승용차는 대학 강의가 많은 아내 몫이다. 그는 “지난 총선에서 낙선한 뒤 지역구만 챙기며 백수로 살았는데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거사무실을 철거를 앞두고 있는 가정집을 골랐다. 다른 곳과 비교해 월세가 4분의1 수준이었다. 사무실 가구는 모두 중고품이다. 신 당선자가 쓰는 책상에 유리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대학 때부터 식사는 구내식당에서 주로 해결한다. 저렴한데다 길거리에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어 즐겨 찾는다. 수돗물이 조금이라도 새거나, 사람 없는 방에 전등이 켜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신 당선자는 “구청 살림을 할 때도 예산을 방만하게 운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꼼꼼히 따져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할 것이라고 했다. ●까다롭고 철저한 사람 그는 스스로 ‘까다롭고 철저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자신을 다그치고 자신에게 엄격한 편이다. 구청장에 당선된 후 구청 공무원들이 업무보고차 사무실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자주 찾아오지 마십시오. 저랑 가까워지면 오히려 손해입니다. 제가 주위 사람을 다그치고, 많이 요구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멀리 떨어져 그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게 훨씬 나으실 겁니다.” ‘원칙대로’는 신 당선자가 가진 최대의 덕목이며 행정 노하우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프로필 ▲출신 전북 옥구(50) ▲학력 서울대 경제학과 졸,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경력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고려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재정경제부 금융산업발전 심의위원, 산업연구원(KIET)책임연구원 ▲가족관계 김윤경(겸임교수)씨와 1남 1녀 ▲종교 천주교 ▲애창곡 해바라기 ‘행복을 주는 사람’, 이문세 ‘난 널 사랑해’ ▲취미 독서 ▲기호음식 찰밥, 찰떡 ▲존경하는 인물 고 윤재수 선생님 ▲유언장에 넣을 한마디 ‘삶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깨닫고자 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 [서울 자치구 새얼굴] 이훈구 양천구청장 당선자

    이훈구 양천구청장 당선자는 양천구의 오리지널 ‘토박이’다. 그는 목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책보따리를 메고 안양천을 건너 초등학교를 다니던 코흘리개였다. 130만평에 이르는 허허벌판이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변하는 모습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14대째 양천구에 살았다고 한다. “평생을 이 곳만 보고 살아왔으니 고향(양천구)에 대한 생각이 각별할 수밖에 없지요.” 그의 공약에서 ‘애향심’이 듬뿍 묻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 양천구를 어린시절 고향처럼 정(情)이 넘치는 고장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안양천에서 멱감던 코흘리개 그는 거대한 목동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목동’에서 태어났다.1960년대 초 서울로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로 불렸던 곳이다. “목동에는 옛날 달고리, 엄지미, 새말, 나말, 모새비 등 5개 마을에 250∼300가구가 모여 살았어요. 주변은 모두 논밭뿐이었지요. 그런 곳이 지금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변하다니. 정말 상전벽해가 따로 없어요.” 그가 태어난 마을은 달고리 마을로 ‘달이 가장 먼저 비춘다.’는 뜻에서 월촌(月村)이라고 불렀다. 이웃 마을은 조선시대 파발마를 보내던 말을 키우던 곳이라는 뜻에서 새말, 나말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항상 정감이 넘치는 옛지명을 살려보려고 노력한다. 앞으로 개통될 지하철 9호선 도시가스역 다음 역 이름을 ‘달고리역’으로 붙일 생각도 하고 있다. 그는 어린시절 추억들을 풀어놨다. 무대는 안양천. 친구들과 멱감고, 조개잡이, 고기잡이를 하던 곳이다. “학교를 집에서 가까운 영등포 당산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매일같이 책보따리를 메고 안양천을 건너다녔어요. 친구들이 경기도에 사는 촌놈이라고 깔보다가도 안양천에서 잡은 조개를 나눠주면 무척 좋아했지요. 조개가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았어요.” 그래서 이 구청장의 공약에는 안양천을 꿈이 넘치는 쉼터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정감 넘치는 양천구 만들터 그는 남달리 정이 많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다. 그러나 어린시절 가난해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게 아직도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다. 늦깎이로 지난해 경기대 행정학과에 진학해 만학의 꿈을 이루고 있다. “2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4남매를 어렵게 키우셨어요. 어머니가 오이와 야채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영등포 시장에 가서 팔아서 우리를 키우셨지요.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목동 2단지쯤 되는 곳에 600평 정도 논을 구입했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어머니가 우리 땅에서 난 쌀로 밥을 해 주신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그는 구청장이 되기까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도를 밟았다. 구의원을 3번 지냈고, 서울시의원을 거쳐 지역사정에 누구보다 밝다. 구의원 최다득표 당선과 시의원 선거에서는 전국에서 7번째로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첫 목표는 양천구의 균형발전이다. 아파트촌과 주택가로 나눠진 양천을 고르게 발전시킬 생각이다. 먼저 상대적으로 생활 환경이 열악한 신월동에 ‘영어마을’을 만드는 일을 적극 추진할 생각이다. 또 공약에는 넣지 않았지만 목동 야구장과 축구장 등을 푸른 녹지공간으로 바꿀 생각도 갖고 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출생:1949년 양천구 목동 ▲학력:당산초등학교, 장훈중학교, 대입 검정고시, 현재 경기대학교 행정학과 2학년 ▲경력:양천구의회 의장(1,2,3대 구의원), 서울시의회 환경수자원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서울시당 부위원장 ▲수상:2005년 전국광역의회 의정대상 수상 ▲가족관계:부인 전난순(53)씨와 2남 ▲취미:조깅 등산 ▲애창곡:우중의 연인, 애정이 꽃피는 시절 ▲기호음식:김치찌개 ▲존경하는 인물:이순신 ▲좌우명: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 [통계로본 서울](30) 서울숲

    서울 성동구 성수동 뚝섬일대 35만평에 조성된 서울숲은 ‘뚝섬숲 조성 기본계획’에 따라 지난 2003년 1월 공사에 착공, 지난해 6월18일 완공해 문을 열었다. 당초 골프장과 승마장으로 사용되던 뚝섬 일대를 주거업무 지역으로 개발할 경우 4조원대에 달하는 개발이익이 예상됐으나 서울 동북부 지역에 휴식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자연친화적인 생태숲으로 조성됐다. ●문화예술공원·생태숲 등 인기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6월18일 개장한 뒤 지금까지 방문객수는 17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방문객은 주중에는 하루 평균 2만∼3만명, 주말과 휴일에는 하루평균 5만∼6만명 정도가 다녀갔다. 가장 인기있는 곳은 넓은 잔디밭과 바닥분수, 야외 공연장 등이 있는 ‘문화예술공원’과 ‘생태숲’,‘곤충식물원’으로 방문객의 90%이상이 이곳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면적은 34만 9838평(115만 6498㎡)이다. 이 가운데 문화예술공원(6만 6549평), 자연생태숲(4만 9912평), 자연체험학습원(2만 5712평), 습지생태원(2만 1174평), 한강수변공원(1만 9964평)이다. 주요시설은 야외무대(1209평), 서울숲광장(2087평), 환경놀이터(907평), 자전거도로, 산책로, 이벤트마당, 나비온실 등이 있다. ●공원조성비 2352억원 서울숲 조성에는 2352억 5900만원의 사업비가 들어갔다. 구체적인 조성비는 보상비가 1688억 7200만원으로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어 공사비 613억원, 설계비 16억 9900만원, 기타 33억 8800만원 등의 순이었다. 서울 숲은 친환경적 요소를 강조해 공원 전체에 걸쳐 20m 높이의 나무 104종 42만여 그루를 옮겨 심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어류와 조류, 동·식물, 곤충이 살고 있다. 숲에는 꽃사슴과 고리니, 다람쥐, 다마사슴 등을 풀어놓았으며, 어류는 비단잉어와 붕어, 금붕어, 향어 등 8종, 조류는 논병아리와 새매, 쇠오리, 직박구리 등 31종이 서식한다. 곤충류는 아시아실잠자리, 집게벌레, 남방부전나비 등 31종이 살며, 식물류는 식재식물 215종과 유입식물 120종을 포함해 모두 335종에 이른다. ●고려시대 ‘동교’에서 유래 한강과 청계천이 만나는 뚝섬은 저지대여서 홍수시 범람으로 자주 피해를 입던 곳이다.1913년 일제가 이 일대에 7090m의 제방을 축조해 논을 만들었고, 이후 공장 주택지로 변화했다. 역사적으로는 고려시대에 동교(東郊)라 불렸으며, 이 일대에 호랑이가 나타나 피해를 입혀 강감찬 장군이 이를 퇴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사냥을 하고 무예를 검열하던 곳으로 도성민들이 술·노래·춤을 즐기던 행락의 장소로 사용됐다. 근대로 넘어와 1908년 서울시 최초로 뚝도정수장이 준공됐으며,1949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에서 서울로 편입됐다. 1940년대 유원지로 조성됐고, 이어 1954년 뚝섬 서울경마장,1986년 서울시 체육공원이 개장됐다.1989년에는 수도박물관이 유형문화 제 72호로 지정됐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성남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

    성남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

    분당은 ‘인라인 천국’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긴다. 인라인 전용스케이트장과 전용도로까지 조성돼 있다. 3만여명이 인라인스케이트 동호회나 협회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40여개의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 동호회에서 연중 무료 강습회를 열어 인라인 인구 저변확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사진은 탄천변 인라인스케이트장에서 어린이들이 인라인을 즐기고 있는 모습. 글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성남시 분당신시가지는 자전거 천국으로 불린다. 또 이에 못지않게 ‘인라인 천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곳곳에 인라인 전용스케이트장이 마련돼 있고 탄천변을 따라 전용도로까지 조성돼 있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최근에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기며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 족도 생겨나고 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분당에서만 무려 3만여명이 인라인스케이트 동호회나 협회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이들은 평일 오후나 주말을 이용해 레이싱을 즐긴다. 그 숫자도 자전거 동호회를 크게 앞지르고 있으며, 매달 회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동호회가 주축 분당에는 인라인스케이트연합회를 구심점으로 40여개의 동호회가 활동 중이다. 연합회와 동호회 간부들은 인라인스케이트의 저변확대를 위해 연중 무료강습회를 열고 있다. 또한 초보자를 위한 인라인스쿨도 개설돼 4살 어린이에서부터 50세를 넘긴 어르신들까지 참가 열기도 뜨겁다. 분당에 인라인마니아들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은 많은 연합회와 동호회들이 대부분 무료강습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 게다가 짧은 기간에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아파트 현관에서 탄천까지 자전거도로를 이용해 접근할 수 있다. 전문적인 체력을 요구하지도 않고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는데다 재미까지 있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회원에 가입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인기 ‘짱’이니 선거에 대비해 이들에게 뭔가 보여야 하는 자치단체장들도 4∼5년 전부터 인라인스케이트장 조성에 예산 투입을 아끼지 않고 있다. 동호회가 부지기수로 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분당신시가지에는 2002년 시가 예산을 투입해 분당구 청사 옆 공터에 전용 인라인스케이트장을 개설했고, 이어 남한산성 유원지와 종합운동장, 탄천변 등 3∼4곳에 추가로 스케이트장을 마련했다. 탄천 자전거도로 인근에는 중앙선까지 있는 인라인 전용도로가 별도로 조성됐고, 시는 연차적으로 이 도로를 탄천변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인라인학교 얼음 위에서 즐기는 스케이트처럼 인라인의 경우도 스케이트를 신고 일어설 수만 있으면 탈 수 있다. 그러나 부상을 방지하고 제대로 즐기려면 배우는 것이 상책이다. 인라인학교는 동호회가 주축이 돼 매달 실시하는 강습과 자치단체가 예산을 지원하는 강습 등 두 가지가 있지만 모두 무료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주민들로서는 별도로 주머니를 털 필요가 없다. 대부분 3개월 코스다. 그러나 배우기 전에 장비는 구입해야 한다. 인라인스케이트는 평균 10만원대. 싼 것은 3만∼4만원짜리도 있지만 불량품은 발목부상을 입을 수 있다고 강사들은 전한다. 전문가용은 150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이밖에 헬멧은 필수다. 여기다 손목과 팔꿈치·무릎 보호대 등을 갖추어야 한다. 선수들이 입는 전용 스포츠웨어까지는 갖출 필요가 없지만 무릎이 움직이는 데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편한 옷을 입는 게 좋다. 고글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도로상황과 이용가능한 도로환경 등을 익히게 되지만 대부분 실기위주로 교육이 진행된다. 어린이들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기초부터 다지지만 어른들은 3개월을 꽉 채우지 않고도 즐기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즐기기 50세를 넘긴 나이에 인라인스케이트를 시작한 정기진(54·분당구 분당동)씨는 인라인스케이트 마니아로 동호회 회원이다. “처음에는 대학에 들어간 아들이 타는 것을 구경하다.‘나도 한번 해보자.’며 배우다 재미에 폭 빠졌다.”면서 “이제는 주말이면 아들과 함께 탄천변을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안전모와 고글을 쓰고 거리를 달릴 때면 10년은 젊어지는 기분”이라며 “처음에는 허리와 발목통증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체력적인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두달 정도 배운 뒤 동호회 회원들과 즐기기 시작했지만 자세와 속도면에서 전문가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이고 있다. 허리와 배부분의 군살도 거의 사라졌다. 일반스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허리를 굽히는 기마자세를 습득하게 되고 이어 한 발씩 걷는 걸음마를 시작한다. 다음에는 한 발로 주행하는 연습을 하게 되는데 나머지 발로는 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숙달되면 하레이싱과 회전 등을 배우게 된다. 인라인스케이트는 하키와 슬라롬, 피트니스, 레이싱 등 다양한 종목이 있다. 하키는 바퀴가 달린 날이 짧은 것으로, 실제 하키경기를 하는 마니아들이 사용한다. 슬라럼(slalom)은 장애물을 이용해 묘기를 하는 것으로 초보코스에서는 배울 수 없다. 별도로 3개월 정도 강습을 받아야 한다. 피트니스(fitness)는 초보자에게 어울린다. 허리를 펴고 즐긴다. 레이싱 역시 초보자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지만 속도를 많이 내려면 경력이 필요하다. 레이싱 전문가들은 최고 시속 120㎞까지 낼 수 있다. 그러나 초보자들이 이같은 속도를 냈다간 다치기 쉽상이다. ●살 빼는 데 그만 전신이 긴장하는 운동이다. 전신운동으로 대표격인 수영보다 칼로리 소모가 많다고 한다. 특성상 하체가 강화되고 허리근육이 발달된다. 강사들이 남자들에게 꼭 필요한 운동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릎 등 관절에도 그만이라고 한다. 쉬지 않고 관절을 움직여야 하는 인라인의 특성상 당연한 결과다. 어깨와 목의 통증에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오십견 등 어깨결림에도 특효. 팔과 어깨를 흔들어야 추진력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운동이 많아 변비에도 좋다. 주부 김수연(30)씨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시작한지 4개월만에 10㎏ 이상 빠졌다고 자랑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인라인 구입·사고예방 요령 분당 인라인연합회 사무장 육관수(32)씨는 인라인스케이트를 구입하려면 제일 먼저 스케이트 종류를 정해야 하지만 초보자라면 일반 오락용 스케이트를 구입한 뒤 기술을 습득하고, 그 스케이트가 내몸처럼 느껴지면 전문용으로 구입할 것을 권한다. “제대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레이싱이나 하키 등의 전문가용 인라인을 구입하면 배울 때 어려움을 겪게 되고, 기술 습득 후에는 스케이트가 손상돼 다시 구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씨는 할인점이나 백화점 등은 가능한 한 피하라고 조언한다. 가격은 저렴할지 몰라도 한가지 브랜드만 있을 수 있고, 주인이나 종업원이 스케이터가 아니어서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부품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고 한다. 겉모양만 보고 구입하는 것도 금물이다. 스케이트화가 잘 맞고 발이 편한 것이 최고다. 단순히 발을 집어넣고 몇걸음 걸어보지만 말고 채움쇠와 조임끈을 채운 다음, 매장안을 이리저리 다녀보아야 한다. 또한 여름이 되기 전에 구입하는 것이 좋다. 구입하는 사람이 적을 때 싸게 살 수 있고 설명도 충분히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 비교해보는 것이 순서다. 혼자서 고를 자신이 없을 때는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끈을 사용하는 것과 채움쇠가 있는 것 중에 택일할 때는 장단점과 자신의 취향을 감안해야 한다. 끈을 사용하는 것은 착용감이 좋고 부드러운 대신 스케이트화 속에서 발이 움직이기 때문에 부상의 위험이 있다. 채움쇠의 경우는 발을 단단히 조여주기는 하지만 발을 편안하게 움직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초보 때는 브레이크가 달린 것이 좋다. 정지동작을 완전히 익힌 후에는 제동기를 떼어내면 된다. 섣불리 떼어내면 사고의 위험이 있다. 초보딱지를 떼고 즐길 때가 되면 언제나 주위 상황변화에 민감해져야 한다. 크고 작은 접촉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위해서다. 또 어린아이가 눈앞에 보이면 무조건 감속하는 것이 예의다. 무리한 추월과 속도도 자제해야 한다. 사고는 자만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박성서의 가요X파일] 한국 유일의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 김준(1)

    [박성서의 가요X파일] 한국 유일의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 김준(1)

    ‘시작은 그 끝과의 약속이다.’라는 어귀가 먼저 눈에 띄는 평창동의 ‘김준 재즈클럽’. 이 곳에는 ‘재즈계의 신사’라 불리는 김준씨가 늘 삽화처럼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재즈는 여백이 많은 음악입니다. 불협화음을 화음화하는데 묘미가 있지요. 악보에 없는 음을 표현하는 즉흥적인 호흡이 생명입니다.” 재즈는 연습을 게을리하면 그걸로 끝장이라고 말하는 김준(66)씨. 때문에 그는 활발한 공연과 더불어 매년 한두 장 이상의 음반을 꾸준히 발표해오고 있다. ‘하루 연습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안 하면 남이 알고, 사흘 안 하면 무대에서 떠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즈에 몰두하는 김준씨 클럽에는 필자가 시간 날 때마다 드나들었지만 불과 두세 번 정도를 빼면 손님이 단 한명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스스로 강조하듯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온 지 30여년째다. 솔로 활동 이전 ‘빨간마후라’로 잘 알려진 남성 4중창단 자니브라더스의 멤버였던 그는 또한 69년도부터 동료 박상규, 장우, 차도균씨와 함께 프로젝트 그룹 ‘포 다이나믹스’를 결성해 현재까지 근 36년간 함께 활동하며 우정과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가수 겸 작곡가 김준씨의 본명은 김산현. 그의 삶은 귀족풍의 얼굴과는 달리 파란만장했다. 1940년 임야만도 18만여 평이 넘었던 신의주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몰수당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가족은 46년, 진남포 해안에서 어선을 이용하여 탈북, 서울로 와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강원도의 원주와 영월, 문경, 목포 등을 거쳐 제주 최남단 모슬포에 정착, 대정고를 졸업했다. 타고난 음악적 자질로 각종 콩쿠르에서 제주를 석권했던 그였지만 가난으로 인해 대학 진학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그는 대학입학자격이 주어지는 경희대 주최 ‘전국 남녀 고교 음악경시대회’에 참가한다. 이미 졸업생이었지만 학교장의 배려로 고3재학생으로 서류를 위조해 응시한 것. 결국 그는 200여 명의 참가자 중 3위로 입상하며 경희대 음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60년, 대학생활이 시작되자마자 4.19를 맞아 잦은 휴강과 함께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종로2가 ‘뉴월드’ 음악감상실 DJ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함과 동시에 당시 50인조로 구성된 교회 성가대 ‘시온성가단(단장 이동일)’의 일원이 된다. 아울러 이 무렵 당시 4인조 쿼텟 ‘멜로톤’의 멤버 한 명이 입대해 결원이 생기자, 대타로 참여해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61년 5월16일, 라디오에서 새벽을 가르는 군가연주와 ‘혁명공약’을 낭독하는 아나운서의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학교는 4.19에 이어 다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교 정문 앞에는 엄청난 포신을 자랑하듯 탱크가 버티고 있었고 이른바 ‘혁명군’들이 10m 간격으로 서서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2학기 수강신청을 끝내고 정상수업이 시작되던 어느 날, 그는 한 방문객과 마주친다. 그리고 이내 지프차에 실려 미아리고개에 있는 군부대 막사로 이송된다. 그 곳엔 이미 예닐곱 명이 먼저 와서 초조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중 한명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예술 중흥을 위해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쳐 새로 창단하는 ’예그린가무단‘의 합창단원으로 입회시키겠다’고 했다. 사실상 일방적인 통고에 가까웠던 이 예그린의 단장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혁명 주체 세력’ 김종필씨였다. ‘단복은 계절에 따라 무상 제공’ ‘출연료 파격 대우’ ‘향후 무대활동 보장’ 등이 그들이 내건 조건이었다. 이 예그린합창단의 월급은 당시 돈으로 무려 ‘오천원’ 정도였기 때문에 기성가수나 교직에 몸담은 실력자들까지 앞 다투어 응시, 경쟁이 치열했던 터라 그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예그린, 그는 창작 뮤지컬 ‘한 여름 밤의 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으나 1년 후 예그린은 해산되고 만다. 때문에 합창단 중 막내이자 가장 ‘끼’가 많았던 동갑내기들, 즉 김준, 양영일, 장호성, 진성만은 4중창단을 결성,62년 ‘자니브라더스’를 결성한다. 예그린은 당시 악보 보는 것을 시작으로 연기, 춤까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를 요구했던 만큼 이들 네 명의 실력은 이미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음악적 실력은 대표곡인 ‘빨간 마후라’ 취입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63년 초여름. 이 영화 제작사인 신필름 측은 작곡가 황문평씨에게 주제가 작곡을 의뢰해온다. 아울러 이 영화주제가는 파일럿들이 첫 출격할 때 불러야하는데 하필 오늘 OO기지 비행장을 빌려 촬영하는 날짜라 오늘 중으로 만들어 달라고 독촉을 해왔다. 가사를 받아 쥔 황문평씨는 노래 구상은 물론 동시에 노래를 불러줄 가수부터 찾아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급한 대로 당시 동아방송 강수향 음악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 마침 방송국에 자니브라더스가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황씨는 곧바로 악상의 뼈대를 잡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멜로디를 다듬었다. 주제가를 의뢰받은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작곡을 했고 두서너 번의 연습 끝에 ‘빨간 마후라’는 자니브라더스에 의해 취입된 것이다. 자니브라더스의 넷 모두는 악보만으로도 곧 바로 노래가 가능한 실력자들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빨간 마후라’는 어느덧 대표적인 공군가로 자리했다. 또한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수출되면서 특히 대만에서도 이 노래가 대만 공군가로 불려지고 있는데 심지어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대만국민들은 이 노래가 자국의 군가로 알고 있을 정도다.(계속) sachilo@empal.com
  • ‘문화예술계 거목’ 하늘로…

    ‘문화예술계 거목’ 하늘로…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한달에 10여편의 연극을 챙겨보고, 또 한달에 29일은 꼬박 술을 마셨다. 하루에 두시간 이상은 책상에 앉아 희곡을 썼다.2003년 팔순을 맞았을 때 시끌벅적한 잔치 대신 신작 ‘옥단어’를 써서 소박하게 무대에 올렸던 그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머릿속은 온통 연극뿐이었다고 한다.“‘산불’의 일본어 공연을 앞두고 희곡을 번역하는 일에 끝까지 매달렸다.”고 지인은 전했다. 차범석. 그는 한국 연극의 산 증인이자 ‘영원한 현역’연극인이었다.1924년 목포 호남 갑부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열세살때 최승희의 무용발표회를 보고 무대예술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됐다.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스물둘에 뒤늦게 연희전문대 영문과에 입학한 뒤 문학서클 ‘새마을회’에서 김기림, 염상섭, 유치진 등으로부터 문학과 연극을 배웠다. 1955년 ‘밀주’와 1956년 ‘귀향’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희곡작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직업극단인 ‘제작극회’를 창단해 흥행주의, 상업주의를 배척하는 소극장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때 발표한 ‘공상도시’‘불모지’‘껍질이 깨지는 아픔없이는’등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1961년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MBC 연예과장에 발탁돼 10년간 방송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1980년 드라마 ‘전원일기’를 1년간 집필하기도 했다.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산불’은 1962년 12월24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됐다. 첫날부터 관객이 몰려들어 정문 유리창이 깨지고 기마경찰까지 출동하는 대이변을 일으키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산불’을 비롯해 ‘학살의 숲’‘표류’‘안개소리’등 전후의 현대사와 사회상에 바탕을 둔 정통극을 추구하는 그를 연극계는 ‘리얼리즘의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오페라 ‘산불’‘녹두장군’, 무용극 ‘도미부인’‘은하수’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팔순의 고령에도 꼿꼿한 걸음걸이, 형형한 눈빛을 잃지 않은 그는 평생 원칙주의자와 도덕주의자로 살아왔다. 연극 입문 초기부터 고인을 사사한 극단 미추의 손진책 대표는 “실수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매섭게 야단치는 엄한 스승이셨다.”고 회고했다. 돈에 관한 결벽증도 유난했다. 부자 부모를 뒀지만 서울로 올라온 후 한뼘의 땅도 물려받지 않고 자수성가했다. 이런 품성때문일까. 그는 일찍부터 단체의 수장 역할을 도맡아했다.1969년 마흔넷의 나이에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에 선출됐고, 이후 국제극예술협회 부위원장, 극작가협회 회장, 문예진흥원 원장, 예술원 회장,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등을 지냈다. 청주대 예술대 학장, 서울예대 대우교수 등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도 힘썼다.8권의 희곡집외에 ‘한국 소극장 연극사’같은 연구서와 수필집, 평론집, 자서전 등도 여러 권 남겼다. 한치 흔들림없는 길을 걸어온 덕에 연극 인생에 대한 고인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생전에 “연극 인생 50년에 관객에게 아첨하거나 하물며 그 아첨의 대가로 수입과 인기를 올리려는 몰염치는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고, 또 “내 자신을 구속하면서 살지 않았고, 또 누구를 속박하지도 않았고 연극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도 입버릇처럼 말했다. 언제나 안주하지 않고 쉼없는 창작열을 불태웠던 그였지만 초기작 ‘산불’에 대한 애착은 유별했다. 지난해 고인의 50년지기 동료인 극단 산울림 임영웅 대표의 연출로 국립극장 무대에 ‘산불’이 다시 올려졌을 때 무척 즐거워했다. 최근엔 ‘산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댄싱 위드 섀도우’의 작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신시뮤지컬컴퍼니 박명성 대표는 “문병갈 때마다 매번 ‘뮤지컬은 잘 돼가느냐.’고 물어보는 게 낙이셨다.”면서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식에 뮤지컬 제작발표회를 서둘러 7월3일로 잡아놨는데 그것도 못보고 돌아가시다니….”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故 차범석 연보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1945년 광주사범학교 강습과 졸업 ▲1946년 연희전문대(연세대)영문과 입학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 제작극회 창단동인 ▲1961년 문화방송 연예과장 ▲1963년 극단 산하 대표 ▲1968년 연극협회 이사장 ▲1975년 극작가협회장 ▲1981년 예술원 회원 ▲1995년 예술원 부회장 ▲1998년 문예진흥원장, 예술의전당 이사 ▲1999년 광주비엔날레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2003년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3·1문화상 학술상, 대한민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연예부문), 이해랑연극상, 동랑연극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 [정부 대전청사에 8년째 터잡은 공무원들] 서울서 자녀교육 두집살림 또 증가

    [정부 대전청사에 8년째 터잡은 공무원들] 서울서 자녀교육 두집살림 또 증가

    정부대전청사가 입주 8년째를 맞으면서 자녀교육 문제가 공무원들의 고민거리로 다시 떠올랐다. 입주 당시 자녀가 대학 진학을 앞두었던 고참급이라면 처음부터 ‘두집살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자녀가 초등학교 중·저학년 시절 솔가(率家)하여 대전에 정착했다면 어느덧 대학 진학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가 됐기 때문이다. 정부대전청사가 입주 8년째를 맞으면서 자녀교육 문제가 공무원들의 고민거리로 다시 떠올랐다. 입주 당시 자녀가 대학 진학을 앞두었던 고참급이라면 처음부터 ‘두집살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자녀가 초등학교 중·저학년 시절 솔가(率家)하여 대전에 정착했다면 어느덧 대학 진학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내와 아이를 서울로 ‘U턴’시키고 남편만 대전에 남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특허청 A(50)과장은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니 실력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몸에 밴 것 같다.”면서 “다른 건 아끼더라도 아이들 교육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딸과 대전에 함께 사는 고3 아들에 들이는 비용은 한달 평균 200만원. 큰 아이의 하숙비 50만원과 50만∼70만원의 용돈에 아들의 사교육비 등이 그것이다. 대학 등록금은 융자를 받는다. 부부가 쓸 수 있는 여력은 거의 없다. 다만 대전에 정착하며 둔산지구에 구입한 아파트 값이 두 배 이상 오른 것은 다행스럽다. 고교 3학년과 1학년 형제를 둔 B(49)사무관은 “아이가 고2가 되면 가족을 서울로 올려보내겠다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다.”면서 “이주 당시에는 ‘기러기 아빠’에 대한 애처로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 상황에 몰린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대전 지역의 교육 수준에는 평가가 엇갈린다. 서울 강남과 비교하는 사람은 불만을 표시하지만, 서울 강북보다는 그래도 여건이 좋지않으냐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A(51)국장은 “처음 대전 정착을 결정할 때는 교육수준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둔산지역은 강북보다 뒤처지지 않는 것 같다.”면서 “대전을 강남 8학군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만 “실력이 뛰어난 자녀를 두었다면 다소 대전지역의 교육수준에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다.”고 공감했다. ‘서울행’을 결정하는 공무원들은 공교육보다 사교육 수준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B사무관은 “학원에 다니기보다 그룹 과외를 선호한다.”면서 “전체적으로 이 지역 학원의 수준을 믿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간부 C씨는 황당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어렵사리 지역에 있는 명문대생에게 과외를 시켰는데 학교 시험을 핑계로 진도도 끝내지 않은채 그만두더라는 것이다. 그는 “대전의 사교육비는 서울의 30∼40% 수준이지만, 수준도 40∼50%에 불과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초·중학교 때는 잘 모르나 대학에 진할할 시점에서 서울과 대전의 차이가 확연해진다고 덧붙였다. 요즘 대전청사 공무원 사이에서는 “자녀 둘이 서울지역 대학에 진학하면 가족 100%가, 딸 하나가 서울지역 대학에 진학하면 엄마의 90%가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이 유행한다.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해 홀로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P(50)씨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생 큰아들에 이어 둘째아들이 서울에서 재수를 결심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둔산의 아파트를 팔아 서울 강북과 대전 외곽에 각각 아파트를 전세를 얻었다.P씨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만하니까 또다시 빚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손실이 크고, 서글프기도 하다.”고 우울해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딸이 서울의 명문대학에 합격했지만 지역 국립대에 진학시킨 공무원들도 있다. 한참 예민하고 고민이 많은 시기에 자녀를 홀로 둘 수 없다는 것이다. 대전청사의 한 공무원은 “행정도시나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의 계획을 수립할 때 교육상황에 대한 대책도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면서 “교육환경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는 한 지역 균형발전이나 인구분산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은 대전청사의 경험이 잘 설명해주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교육열 강남 능가” 정부대전청사가 있는 둔산지역에는 대전의 ‘신흥 명문고’가 몰려있다. 중산층 밀집지역으로 주민들의 교육열이 기본적으로 뜨거운데다, 석·박사가 주류를 이루는 대덕연구단지 연구원의 자녀들도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옛 도심에서 둔산으로 이전한 서대전고와 충남고의 치열한 입학 경쟁률은 이 지역의 교육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올해 이 지역 고교의 입학 경쟁률은 4대1 정도로 대전지역 평균인 1.8대1을 크게 웃돌았다. 둔산지역 고교의 한 교사는 “신입생 때부터 둔산과 구도심 학교의 학력차는 크다.”면서 “부모들의 관심도와 사교육 수준이 격차를 더욱 크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둔산지역의 높은 교육열에는 당연히 대전청사 공무원들도 일조하고 있다. 치열하게 경쟁해 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공직생활에서 절감하고 있는데다, 교육에 대한 기대치는 서울 강남 수준을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서대전고 A교사는 “중앙부처 공무원의 자녀들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서도 “하지만 중산층이 몰리고 사교육이 활발해지면서 크게 차별화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보습학원 영어강사 이범은(38)씨는 “둔산지역 학생들의 실력이 전체적으로 구도심보다 좋다.”면서 “연구단지와 공무원 자녀는 상당수가 부모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한 고교에서는 학부모들이 스터디그룹을 조직해 학생들의 영어회화를 지도하고 있다. 둔산지역의 교육열이 높아지고, 학생들의 성적이 좋아지자 최근에는 내신성적을 고려해 옛 도심에 있는 고교를 지원하는 ‘실속파’도 나오고 있다. 서대전고 박기완 교감은 “도시 개발이 둔산과 유성지역을 비롯한 서북쪽에 집중되면서 격차는 더욱 심해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역설적으로 둔산의 교육여건이 옛 도심지역에 비하여 그만큼 좋다는 뜻이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5·31 광역단체장 후보 지상탐구] (3) 제주지사

    [5·31 광역단체장 후보 지상탐구] (3) 제주지사

    ■ 무소속 김태환 “제주도 전역 면세화” 무소속 김태환 후보는 ‘누가 제주를 안다고 하는가.’라는 선거 슬로건을 내세웠다. 다분히 일찍 고향을 떠났던 한나라당 현명관 후보를 겨냥한 말이다. 그는 열린우리당 입당 번복으로 위기에 몰리자 도지사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나왔다. 특유의 친화력과 경·조사 챙기기로 다진 지지세가 만만찮다는 사실은 다른 후보들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경조사만 챙긴다는 시비에 김 후보는 “제주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다.”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리더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9급 말단에서 도지사까지 승승장구했지만 ‘철새’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1998년 제주시장 선거 때는 국민회의,2002년 재선 때는 무소속,2004년 제주지사 재선거는 한나라당, 이번 선거를 앞두고는 열린우리당 입당을 선언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했다. 그는 ‘모든 게 정치적 미숙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철새 시비는 도민들의 심판을 받겠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특별자치도의 완성을 위해 항공자유화, 도 전역 면세화, 법인세율 인하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또 특별법 추진과정에서 시민단체의 반발 등으로 무산된 교육 및 의료시장 개방 등도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김 후보는 “지난 2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특별자치도를 탄생시켰다.”면서 “앞으로 중앙부처 설득논리를 개발하고 도민의 공감대 형성을 이끌어내 특별자치도를 완성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따른 제주 생명산업인 감귤산업의 위기와 관련해 1조원의 유통안전기금을 조성, 농가 자금지원 확대와 이자 부담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제주항공 노선 확충과 제주관광공사 설립, 내국인 면세점 확대 등을 통해 2010년까지 제주관광 800만명시대, 관광수입 3조원을 달성하겠다는 공약도 내놓았다. 김 후보는 해군기지 건설은 ‘도민이 찬성해야만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가시적인 경제효과가 나타나고 평화의 섬 이미지를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추진하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제주 4·3사건의 완전 해결을 위해 국가추모일 지정, 후유 장애인 지원이 포함된 4·3특별법 개정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소속 단체장의 한계론에 대해서는 “야당 도지사로 있으면서 정부 여당의 협조를 받아내 특별자치도를 탄생시켰다.”면서 “이제 중앙정치권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박근혜 대표 피습사건은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중앙당 지원유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거정서로 볼 때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한나라 현명관 “항공료 50% 내릴것” 한나라당 현명관 후보는 “나는 정치는 잘 모른다.”면서 “오직 먹을거리 걱정하지 않고 아이들 학비 걱정하지 않게 돈버는 정책을 연구하고 만들어내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항공료 50% 인하, 인터넷 카지노 유치, 제주펀드 조성 등 굵직한 공약을 내놓았지만 아직은 2%가 부족한 상황이다. ‘잘나갈 땐 뭐하다가 이제 와서….’라는 식의 일부 바닥정서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는 중학교 졸업후 서울로 유학, 행정고시를 거쳐 공무원으로 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삼성그룹에서 일해 왔다. 줄곧 객지 생활을 했다. 현 후보는 “객지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제주인’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항공료 인하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지적에 그는 “육지의 철도나 고속도로는 정부에서 건설하고 운행적자도 보전해 주지만, 제주의 철도나 고속도로와 마찬가지인 하늘길은 정부가 투자한 일이 없다.”면서 “제주노선으로 국내선 적자를 메우는 것은 도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행위”라고 말했다. 또 “기름값이 올랐다고 요금을 인상한 후 기름값이 내리면 항공사들이 한번이라도 요금을 내린 적이 있느냐.”면서 “안 된다 하지 말고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외국관광객 전용 인터넷 카지노 유치 공약을 내걸었지만 ‘미국에서조차 불법인 인터넷 카지노가 한국에서 가능한가.’라는 지적도 쏟아졌다. 제주 특별자치도의 앞날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특별할 게 없는 특별자치도가 된다.”면서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과 경쟁하려면 법인세를 내려야 하고 국세의 지방세 이전 등 재정자립도 제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귀포시를 교육규제자유특구로 지정해 외국어학교와 외국의 명문대 분교 등을 유치, 동남아지역 학생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교육공약도 제시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따른 제주농업의 위기에 대해서는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어 나가는 게 최선의 방안”이라며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 근교에 무공해 제주 고급브랜드 농수축산물을 보관·판매하는 유통거점센터를 만들면 대한민국 최고로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삼성도 전부가 아닌 2∼3가지로 세계를 제패했다.”면서 “좁게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경쟁력 있는 1가지 명품만 만들어도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수사와 관련, 현 후보는 “문제가 있다면 출마하지도 않았다.”고 일축했지만 다른 후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현 후보는 “박근혜 대표의 피습사건을 두고 선거에 유·불리를 논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면서 “박 대표의 제주방문이 차질을 빚게 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우리당 진철훈 “서귀포에 웰빙테마타운 조성” 열린우리당 진철훈 후보는 본선 경쟁력을 의심한 중앙당의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 영입 시도에 ‘단식농성’이라는 배수진 끝에 뒤늦게 후보로 확정됐다. 공천 과정에서 자존심을 구겼지만 진 후보는 “단식으로 구태정치 청산을 바라는 도민들의 자존심은 지켜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에게는 늘 ‘사람이 진실해 보인다.’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기술고시를 거쳐 20여년간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동료들이 ‘가장 일 잘하는 공무원’으로 선정할 만큼 일하는 능력은 검증받았다. 그는 “유선전화 방식의 여론조사 결과는 그다지 믿지 않는다.”면서 “20∼30대 젊은층이 대거 투표에 참가하면 결과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열세를 의식한 듯 TV토론에서는 “도민을 팔아가며 자신의 권력만을 위해 이당 저당 기웃거리는 정치인은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면서 연일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가 내국인 관광객 카지노 육성이라는 공약을 내놓자 ‘도박의 섬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말들이 많았다. 진 후보는 “기존의 외국인 카지노 시설을 활용하고 도민들을 제외한 입도 관광객들에 한해 면세점을 이용하듯 항공권과 신분증을 제시하고 이용토록 하면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전남의 J프로젝트와 경남이 내국인 카지노 개설을 추진중”이라며 ““투명하게 운영하면 관광객도 늘어나고 재원도 튼튼해진다.”고 덧붙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따른 감귤산업 위기에 대해서는 “협상에 제주출신 전문가가 참여하면 예상치 못한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서 “장기적으로 개방이 불가피할 경우 오렌지 생과나 농축액에 대한 관세수입 1000억원을 제주로 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년 특별자치도비로 유학생 100명을 세계에 보내겠다는 야심찬 공약도 내놓았다. 진 후보는 “유학비 지원은 복권기금과 내국인 관광객 카지노 수익금 일부를 활용하면 가능하다.”면서 ”글로벌 인재양성에 집중 투자해야만 국제자유도시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단기체류 제주관광을 장기 체류형으로 바꾸기 위해 휴양형 주거단지 조성사업 등을 추진하겠다는 관광정책도 내놓았다. 그는 “서귀포시에 30만평 규모의 웰빙 테마타운을 조성하고 첨단의료복합단지를 유치, 돈이 되는 제주관광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러닝메이트인 서귀포 행정시장 후보에 정치권 인사가 아닌 주민자치위원장 경력의 일반시민을 내세워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진 후보는 “혈연, 지연, 학연에서 벗어나 제주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한류통신] 아줌마 중심의 붐 넘어 일본속에 스며든 한류

    독자 여러분은 도쿄에 와보신 적이 있으신지. 도쿄에는 신오쿠보나 우에노 등에 코리아타운이 있고, 한류가 일본에 상륙해서도 여전히 한·일교류의 상징적인 장소는 역시 이들 지역이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코리아타운과는 무관한 시부야(澁谷)라는 거리에 한류 관련상품이나 카페 등의 한류 상점이 속속 문을 열었다. 시부야는 서울로 치면 명동 같은 젊은이들의 거리이다.그러나 아시다시피 일본에서의 한류 붐의 중심에 있는 것은 중장년의 아줌마들이다. 젊은이 거리에 아줌마 중심의 한류 상점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성방송의 한국전문 채널 ‘KNTV’의 공식점인 ‘KNJ’, 권상우의 공인점인 ‘KSJ’, 그리고 배용준의 일본 소속사로 급성장을 이룬 IMX의 ‘cafe-B’. ‘KNJ’,‘KSJ’는 같은 회사가 운영한다.‘KSJ’는 지난해 8월,‘KNJ’는 지난 3월18일에 오픈했다.‘KNJ’에 따르면 손님층은 신오쿠보와 달리 폭넓어서 20대 초반의 젊은층이나 여고생도 있는데다, 쇼핑 온 김에 들르는 등 호평을 받고 있다.‘KNJ’에서는 KNTV가 주최한 이벤트 DVD 등 이 곳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상품이 특징이다.“신오쿠보에서 팔고 있는 한국배우 관련상품은 90% 이상이 불법”이라는 이 곳 관계자의 말처럼 ‘한류의 거리 신오쿠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한류의 거리를 벗어나 상점을 낸다는 게 불안하지 않았을까.‘KNJ’의 책임자는 “이제는 한류=신오쿠보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붐과는 달라서 (한국배우라서 좋아하게 됐다기 보다)어쩌다 좋아하게 된 배우가 마침 한국인이었다는 점이 틀리다. 이들에게 패션과 믹스된 형태로 가볍게 들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IMX의 ‘cafe-B’에서는 가까운 호텔에 숙박할 수 있는 상품(1박 1인당 2만 9800엔)도 있고, 배용준의 공식 키홀더와 포스터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부야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롯폰기에는 류시원이 ‘KPR빌딩’까지 세워 공인상품 판매 등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국 정서가 풍기는 거리에 날아들어 상품을 사는 게 정석이었던 일본의 한류였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상품을 산다거나 한국 엔터테인먼트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다. 붐을 넘어선 한류는 유연하게 모습을 바꾸고 일본 사람들의 생활에 숨쉬기 시작했다.
  • 6월엔 활쏘기·모내기 해보자

    6월엔 활쏘기·모내기 해보자

    서울시는 신록이 깊어지는 6월을 맞아 시민들이 가까운 공원에서 주말에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접수를 하고 있다.6월엔 프로그램이 지난달보다 대폭 늘었다. 서울숲에선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서울숲 탐방’과 ‘더불어 사는 자연’,‘서울숲 물길여행’ 등은 다음달에도 이어진다. 단 풀피리 문화교실은 자연물 공작과 자연놀이, 생태그림 등이 기존보다 보충돼 충실해졌다. 남산공원에선 지난달까지 해 오던 식물교실과 숲속여행 등 생태관찰 관련 행사는 이어진다. 여기에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추가돼 흥미를 더했다. 다음달에 서울성곽과 봉수대 등 남산과 공원 주변의 역사문화시설을 탐방하는 역사문화탐방과 실제로 활을 쏘는 활쏘기교실이 새로 생긴다. 보라매공원은 새 프로그램을 대폭 늘렸다. 가족이 함께 원예를 가꾸는 가족원예체험과 1318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농구대회를 펼치는 길거리 농구대회 등이 새로 마련됐다. 명절 때 시골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오는 것이 요즘 추세다. 그래서인지 청소년들은 농촌 체험 경험이 거의 없다. 이런 청소년들을 위해 길동생태공원은 농사체험교실을 새로 마련했다. 사진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본 모내기와 밭매기를 직접 시도해 보자. 서울대공원은 ‘동물원 옆 장미원 축제’를 다음달 매일 한다. 장미콘테스트와 장미공예만들기, 장미피자만들기 등 장미로 요술을 부려 보자. 또 1일부터 7월9일까지 동물원 광장에서 승리기원 환상의 월드컵 쇼가 진행된다. 태극전사 사진전과 스트라이커 체험존, 응원전 등 다채롭다. 어린이 공원에선 다음달에도 낙타타기와 미니 말타기 등이 이어진다. 동물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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