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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곰보 색시 보조개는 많기도 하지

    곰보 색시 보조개는 많기도 하지

    「한 여자에 두 남자」인 3각관계쯤 세상엔 흔한 일. 그런데 그 두남자가 형제사이이고 여자가 양귀비같은 미인이 아닌 곰보아가씨라면 얘기가 좀 재미있어진다. 사랑에 미치면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아뭏든 동생의 아이를 가졌던 아가씨가 형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는데-. 소꿉친구 자라서 「남(男)과 여(女)」 곰보면 어때, 동생이 먼저 유원지로 이름난 경춘(京春)가도를 달리다 마석에서 오른쪽으로 10리쯤 들어간 경기(京畿)도 양주(楊州)군의 한마을. 여기가 바로 「아더메치」한 형제지간 3각관계 치정극이 벌어진 곳. 20여호 남짓한 작은 마을에 문제의 세 남녀 집이 약 1백m 거리를 두고 마치 3각관계라도 상징하듯 3각형으로 떨어져 있다. 풍수지리로 보아도 숙명적으로 3각관계를 맺을 운명인가? 말썽난 신부 유덕자양(兪德子·26·가명)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기 때문에 얼굴 전면에 지독한 마마자국이 있는 속칭 곰보 아가씨. 말짱한 정신으로 본다면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아가씨다. 이 아가씨를 사이에 놓고 고종 사촌 간인 이(李)원서씨(25·가명)와 박(朴)종운씨(24·가명)가 치사찬란한 역사를 엮은 것. 먼저 관계를 맺은 것은 유양과 박씨. 그러니까 먼저 동생과 역사가 엮어진 셈인데 지금으로부터 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마을에 살고 있으니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 더구나 박씨의 어머니와 유양의 어머니는 자매를 맺은 사이. 박씨는 유양의 집을 제집처럼 자주 드나들었고 유양과는 소꿉친구이기 때문에 다정하게 지냈다. 그런데 나이가 20세쯤 되고 보면 남녀 사이란 결코 소꿉친구만일 수는 없는 모양. 이게 일이 벌어진 근원이다. 박씨와 유양은 어느덧 서로를 그리는 「남과여」가 되었고 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밀회(密會)를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사랑의 씨앗·눈물의 씨앗 약혼준비중 이번엔 형이 2살연상의 여인이고 게다가 지독히 얽은 얼굴이지만 한번 정이 들고 보니 물불을 분간못하게 사랑에 빠졌다. 유양 방에서, 또는 박씨의 방에서, 마을 뒷산에서 사랑을 나누고 살을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의 씨앗」이 잉태됐을 것은 당연한 순서. 유양의 배가 점점 불러갈 즈음에는 벌써 마을에 소문이 파다해졌다. 처녀의 몸으로 배가 불렀으니 창피하고 부끄러운 집안 망신이지만 딸의 못난 얼굴 때문에 항상 시집보낼 걱정을 해온 유양의 어머니는 차라리 잘된 일이려니 생각하고 두사람을 결혼시키기로 작정, 혼인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유양의 어머니에게는 그때 수양아들을 삼은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박씨의 고종사촌형인 이원서씨. 하나 있는 아들은 서울에 살림나서 살고 있고, 유양 위로 딸 둘은 출가, 오로지 유양 하나만 데리고 단촐하게 사는 처지가 외롭고 쓸쓸해서 이씨를 수양아들로 삼고 가까이 지낸 것. 이씨는 유양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잔심부름도 해주고 아들처럼 다정히 지내며 한살위인 유양을 「누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게 또 말썽일줄이야…. 수양아들을 삼아서 맺어진 누나 동생 관계라지만 처녀 총각이 만났으니 미묘한 움직임이 싹틀 수 있고 소문도 올바르게 날리가 만무하다. 이러쿵 짝짜쿵 소문이 나고보니 박씨의 마음이 고와질 턱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곰보 며느리를 얻는다는 것을 탐탁찮게 생각하던 박씨의 부모들에게는 더욱 못마땅한 일이었다. 그것도 남이 아닌 바로 친고종 사촌 사이에 벌어진 일이니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기가 찰 밖에. 판정승 형이 동생 각서받고 화촉 켜는데… 하지만 유양은 임신 6개월의 몸. 이제 와선 이도저도 못할 딱한 처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두 집안 어른들은 구수회의를 열고 이씨와 소문은 덮어두기로 결정, 그대로 박씨와 유양을 짝지어 주기로 했다. 그래 우선 약혼날을 받아 놓고 사주를 쓰고 혼인절차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신부 유양이 행방불명이 된 것. 하도 말도 많고 창피한 생각에서 유양의 어머니가 『왜 어미 속을 썩히느냐』면서 한대 쥐어박았더니 그길로 어디론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약혼날까지 받아놓았는데 신부가 증발을 해버렸으니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박씨는 유양과 고종형 이씨와의 관계를 더욱 의심했다. 『오냐! 너희 둘이 붙었구나』고 확신을 한 그는 유양과의 약혼을 취소하기로 결심했다. 사랑이 가셔버린 마음엔 증오심만 끓어 올랐다. 혼인이 취소되자 유양은 서울에서 낙태수술을 해버렸다. 여기서 일이 끝났다면 청춘남녀가 한때 철모르고 저지른 「잊고 싶은 사연」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로부터 3년남짓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가을 이씨와 유양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말썽은 또 꼬리를 문 것이다. 과거야 어떻든 간에 그동안 유양과 이씨가 누이-동생 사이를 넘어 연인이 된 것. 어차피 얼굴도 그런데다가 과거까지 가진 딸을 둔 유양의 어머니는 아예 이번에는 짝을 지어주기로 다짐하고 이씨의 부모와 만났다. 그때 이씨에게는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오고 한군데 혼담은 꽤 구체적인 데까지 진전되고 있었는데, 본인들이 좋아한다니 모든 청혼을 물리치기로하고 둘을 맺어주는데 동의했다. 단 과거 박씨와의 석연치 않은 문제를 완전히 씻어버리기 위해 박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래서 유양의 집에서는 박씨의 집을 찾아가 딸과 이씨와의 결혼을 양해해달라고 사정, 동의를 얻는데 성공했다. 형제간이라지만 박씨와 이씨는 성(姓)이 다르고 또 박씨는 유양을 깨끗이 잊었으니 두사람의 결혼에 이의가 없음을 밝히고 각서까지 써주었다. 곰곰 생각하니 울화터져 동생은 잔치집 쳐들어가 약혼을 하고 택일을 했다. 결혼날이 닥치자 신랑 신부 집에서는 잔치 준비를 하고 친척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잊어버린 사람이라지만 조금쯤 미련이 남는 것이 사랑의 피인가. 결혼식을 이틀 앞 둔 날 박씨가 유양을 찾아갔다. 막상 만나고 보니 오가는 말이 고울수만은 없었다. 『XX같은 놈』『XX새끼』욕설이 오갔다. 여기서 박씨의 울화통이 터졌다. 신랑 신부가 식을 올리기 위해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기로 돼있었는데 새벽같이 박씨는 유양의 집을 습격, 잔치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손님들이 흩어져 도망가고 잔치는 엉망. 그러나 신랑과 신부는 무사히 박씨의 감시를 뚫고 서울에 가서 다음날 식을 올리고 유양은 머리를 얹을 수가 있었다. 3일 동안의 「허니문」을 즐긴 신혼부부가 마을로 돌아왔다. 신부는 이제까지 시댁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 살면서 시댁엘 왔다갔다 한다. 점장이의 점괘에 『돼지해가 되기전에(음력으로) 시집에 들어가면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나왔기 때문에 기다렸던 것. 날짜를 잡아서 지난 가을에 하다 만 잔치를 하고 들어갈 것이란다. <영(英)> [선데이서울 71년 2월 21일호 제4권 7호 통권 제 124호]
  • 오토바이 날치기 알고보니 검사님 아들

    오토바이 날치기 알고보니 검사님 아들

    「스피드」시대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신종 치기배-「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길가는 여인들의 「핸드백」만을 전문적으로 날치기 해오던 도깨비파 일당 4명 가운데 3명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서울서부경찰서는 지난 10일 김종호(金鍾浩·22·서울 영등포구 신림동 120의32) 김영룡(金泳龍·22·주거부정)을 상습특수절도혐의로 구속하고 육군모부대 김용일(金龍日)이병(22)을 군 수사기관에 넘겼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이 그동안 날치기한 「핸드백」은 줄잡아 1백여개. 훔친 「오토바이」 만도 10여대. 「오토바이」타기에 뛰어난 솜씨를 갖고있는 김용일, 한때 8군에서 「트럼피트」를 불던 악사출신의 김영룡, Y대학 토목과 3학년을 중퇴한 김종호, 모 지방고검차장검사의 둘째아들인 장(張)모(24·수배)등 중류이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들이 「퍽」사업(「오토바이」날치기를 일컫는 그들의 은어)에 손을댄 것은 지난해 8월. 현재 군에 복무중인 김용일의 입대를 위로해 주려고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알게된 장과 친해지면서부터. 그 당시까지 혼자「오토바이」날치기를하고있던 장은 이들을 꾀어 함께 사업을 하자고 유혹했다. 그길로 해수욕장에서 곧장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장이 타고다니던 일제 「혼다」(3백cc)를 이용, 용일이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종호가 뒷좌석에 앉아 필동에서 퇴계로 쪽으로 걸어나오는 여인의 「핸드백」을 가로챘다. 연습삼아 처음 시작한 성과는 퍽 컸다. 첫 「백」속에서 현금 5만원이 나왔다. 재미를 본 이들을 그뒷날 후암동에서 병무청쪽으로 빠지는 길가에서 누군가가 세워둔 「오토바이」를 손톱깎이로 「키」를 대신해 훔쳤다. 이때부터 앞뒤 2명씩 타고 2조로 편성, 1대는 앞에서 길을 트고, 뒤 따르던 다른 1대는 「핸드백」을 날치기, 쏜살 같이 달아나는 수법을 썼다. 예상외로 수입도 좋았고 잡힐 염려가 없다고 안심한 이들은 하루에도 3,4회씩 번화가와 주택가를 무대로 닥치는 대로 날치기 했다. 더구나 용일의 「오토바이」모는 솜씨는 누구도 따를 수없을 만큼 뛰어났다. 「오사까」EXPO에서 「사이카」묘기를 떨쳤던 서울시경 「사이카」반의 안(安)모 경사도 용일의 기술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에피소드」 가 있을정도. 이 두사람은 경인고속도로 개통기념으로 지난해 인천~서울간 「레이스」를 벌였는데 용일이가 안모경사에게 이겼다는 것이다. 이들이 노리는 여인은 고급주택가의 골목길에서 걸어 나오는 악어「핸드백」을 든 중년부인. 이들 부인의 십중팔구는 기만원내지 10여만원을 「백」 에 넣고 다니기 일쑤였다는 것. 이와는 반대로 젊은 여자들이 들고 가는 「핸드백」은 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열어보아야 「검」화장품부스러기 몇장의 나체사진에다 피임약 따위가 들어 있는 것이 고작. 여자들이 왜 여자의 나체사진을 넣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 「퍽」을 당하지 않으려면 길안쪽으로 「핸드백」을 들고다녀야 절대 안전하다고 일러주는 이들은 그 숱한 날치기 행각 가운데 다음 세가지 「케이스」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귀띔. 지난해 9월중순쯤 종로 통의동 앞길에서 날치기한「핸드백」은 알고보니 모국을 처음 방문한 재일교포 여학생의 것. 든 돈은 빼고 그날로 여권에 적힌 주소대로 일본으로 우송했는데 그 뒷날 아침 「라디오」를 통해 「귀국이 어렵게 됐다」는 방송을 듣고 마음속이 찔금했다고. 날치기 생활중 김이 팍 샌날은 지난해 12월 24일 낮 2시. 돈암동 「로터리」에서 청수장으로 빠지는 아리랑 고개에서 낚아챈 30세 가량된 귀부인의 「핸드백」을 열었을때. 「오토바이」를 슬금슬금 몰고 가까이 다가들어 악어 「핸드백」을 낚아 채자 『도둑이야!』소리치며 1백m나 뒤따라왔다. 달아나면서도 「봉이로구나」생각하고, 후미진 곳에서 「핸드백」을 열어보았더니 그속에는 10원짜리 동전 3개와 지저분한 것이 묻은 손수건 1장이 얼굴을 내보이며 「놀랐지」-. 지난 1월 30일, 하오 7시쯤. 낙원동 「할리우드」극장 부근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빠지는 길에서 왼손에 「비닐」바구니를, 오른손에 가죽 「핸드백」을 든 여인을 발견, 두개 다 낚아채 펴보니 낡은 가죽 「백」에는 1만원짜리 보증수표 3장이, 「비닐」바구니 속에서는 5백원짜리 다발 세뭉치가 나와 한꺼번에 18만원을 벌기도. 벌이가 워낙 좋아 지난 12월에는 전용승용차(「퍼블리카」서울자2-1399호)까지 구입한 이들은 여자들을 구슬러 애인을 만드는데도 명수. 20대 미혼인 이들은 각각 3,4명의 애인이 있을 정도. 전직 장관 N모씨의 딸 N양(22·모여대 3년)은 김영룡의 애인. 그가 「오토바이」날치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경찰에서 눈물을 흘렸다. 훔친 돈은 5몫으로 나눠 「오토바이」를 직접 운전한 자가 2몫을 차지, 그나머지는 3명이 1몫씩 나눠 가지기로 굳게 약속한 이들은 날치기한 「핸드백」은 버리는 것을 원칙, 그러나 가끔 값나가는 악어 「백」 이 손에 들어오면 여자꾀는 미끼로 이용하기도. 이처럼 신출귀몰하며 여인들의 마음을 뒤헝클어 놓은 「오토바이」날치기 일당을 잡은 것은 서울 서부경찰서 형사과 안영일(安榮一)형사(35)의 3개월동안의 노력의 결실. 안형사가 이들 일당이 「퍼블리카」를 타고다니며 「오토바이」와 「핸드백」을 날치기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지난 1월말께. 퇴계로 모 「오토바이」 상가를 거점으로 1개월동안 탐문수사끝에 「도깨비」라는 별명을 가진 검사의 아들이 이짓을 하고다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끈덕진 추격끝에 「도깨비」는 지난해 12월 28일 육군에 입대한 장(張)이라는 사실을 캐내는데 성공했다. 공범 용일·영룡도 밝혀냈고 용일의 애인 박모양이 구로구 관수동 모요정 접대부로 일하는 사실과 밤 12시에 차를 몰고 찾아와 박양을 데려간다는 것등을 확인, 잠복 사흘만에 범인을 잡는데 성공했다. <안태석(安泰錫)기자> [선데이서울 71년 2월 21일호 제4권 7호 통권 제 124호]
  • “中情, 야쿠자 동원 DJ암살 계획”

    |도쿄 박홍기특파원|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중정)가 1973년 일본 야쿠자 조직을 동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교도통신이 13일 보도했다. 통신은 한국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 중정이 이 계획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납치 쪽으로 돌아섰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옛 중정의 직원이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이같이 증언했다.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이 20여명에게 납치를 지시했다는 증언도 확보됐다. 김 전 대통령은 73년 8월8일 도쿄의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피랍, 선박을 통해 서울로 압송돼 5일 만에 풀려났다. 한편 이 위원회는 이달 하순 김 전 대통령 납치사건과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의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14일 알려졌다. 이들 사건의 조사결과 발표를 끝으로 2004년 11월 출범한 위원회는 7대 사건의 조사를 마무리하고 임무를 종결하게 된다. hkpark@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 보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심한 분들이 많다.‘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에 200여명의 초상화가 실렸는데,17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의 얼굴이 특히 많이 얽었다. 예를 들어 16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분들 가운데 정수기, 박필건, 오명항, 이덕수, 어유룡, 윤봉근, 정현복 등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한데, 이들은 숙종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 시기 인물들의 절반 정도는 마마를 심하게 앓았던 후유증을 평생 지니고 살았던 셈이다. ●왕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마마 마마를 전문으로 치료한 의원이 두의(痘醫)인데,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임금들이 두의를 특히 고맙게 여긴 이유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왕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만나야 하는데, 성형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얼굴이 심하게 얽은 임금을 만나야 하는 신하도 마음이 괴롭고, 임금도 편치 못했다. 왕과 세자의 마마를 모두 치료해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유상(柳 )은 대표적인 두의이다. 왕실에서 마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현종 즉위년(1659) 9월5일 기사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 보자. 인조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뒤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 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즉위하자 청나라에 복수할 준비를 했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책(北伐策)을 추진했는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659년 3월11일 희정당에서 송시열을 만나 북벌에 관해 의논했다. 몸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걱정한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청나라 칠 준비를 하자고 했다.10년이 지나면 효종 자신이 나이 쉰이 되어 기력이 약해지고 송시열도 늙을 테니, 북벌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했다. 효종은 그러면서 아들의 마마 이야기를 했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세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데다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임금이 될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자라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다. 아직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효종은 세자의 마마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두 달 뒤에 종기를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쉰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겨우 마흔이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마마를 걱정했다. 현종 8년(1667) 2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책례(冊禮)를 치르기로 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된 원자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한달쯤 전에 마마가 유행하자 현종은 행사보다 아들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몸이 약해 자주 온천에 다니던 현종은 1월18일에도 침을 맞다가,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명했다. “세자가 책례를 마친 뒤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치성하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염려스럽다.” 그러나 정태화가 ‘내정에서 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니, 동궁 소속 관원들만 외정에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치르자.’고 아뢰어 그대로 하였다. 그만큼 마마는 왕에게도 무서운 병이었다. 이듬해 5월17일에 궁인이 마마를 앓자, 현종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마는 환자와의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되었다. 그래서 지엄하신 임금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12년(1671) 2월29일 실록에는 “팔도에 기아, 여역,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마를 앓지 않고 왕위에 오른 숙종과 마마 전문의원 유상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 완쾌되자 유상의 품계를 두 계급 이상 올려 명성대비는 숙종이 마마를 겪지 않은 것을 늘 걱정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1683년 10월에 몸에 두창(痘瘡)이 나자 깜짝 놀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했는데,11월에 마마가 깨끗이 나았다. 허준이 ‘두창집요(痘瘡集要)’를 편찬한 뒤부터 두창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일생에 한번은 걸린다고 해서 백세창이라고도 불렸다. 그랬기에 숙종은 늘 마마를 걱정했으며, 내의원에 두의를 두었다. 한의학에서는 두창이 걸리는 이유를 태독설과 운기설로 설명했는데, 태(胎)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의 나쁜 기운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두창에 걸린다는 것이 태독설이다. 그랬기에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월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같이 십며칠 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월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17일에 종묘 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월4일에 유상을 종4품 서산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감꼭지를 달여 마마를 치료했다는 전설까지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춰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醫書)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이 아이는 곪긴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었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湯)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신의라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병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두창은 귀신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 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 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원혼(魂)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배송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어라, 광화문이 사라졌네!’‘그럼, 언제 다시 나타나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세종로에 왔다가 광화문이 없어진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날 때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깜쪽같이 사라진 광화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터이다. 지난 9월28일자 서울신문에는 훈훈한 기사가 단독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할 도편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전통 건축분야의 양대 산맥의 한판 승부에 대한 내용이다. 형님뻘인 전흥수(70) 대목장이 신응수(66) 대목장에게 도편수 자리를 아름답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전 대목장은 추석 연휴 직전에 신 대목장과 만나 “우리끼리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면서 물러서겠다는 뜻을 알렸다. 신 대목장은 전 대목장의 어려운 결정에 고마움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전 대목장은 “그 사람(신 대목장)이라면 광화문 복원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목수 우두머리) 자리는 신 대목장이 맡게 됐다. ●18년간 경복궁 복원사업 이끌어 신 대목장은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됐으며 지금까지 18년동안 경복궁 복원사업을 대부분 진두지휘해 왔다. 또한 앞으로 2년동안 광화문 복원까지 맡게 됐으니 천년궁궐 재현의 대역사는 사실상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경복궁 함화당 복원공사 현장에서 신 대목장을 만났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돌아온 명함이 특이하다. 근정전 사진 위에 ‘성재(誠齋) 申鷹秀’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매응(鷹)? 의아해 하자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오르는 어머님 태몽 때문에 매응자로 했고 성재는 경복궁 복원사업 초창기때 한 서예가 선생이 집을 정성스레 잘 지으라며 지어준 호”라고 설명했다. 먼저 전 대목장과 만남에 대한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 분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다.(전 대목장은)기능인들이 화합이 잘 안되는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광화문 복원공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국유림과 사유림 등에서 적합한 목재를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마 동해안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적송)가 선택될 것 같으며 천년궁궐을 짓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대들보인 경우 소나무 수령이 300∼400년정도 돼야 한다는 그는 “일제때 좋은 나무들이 마구 남벌돼 나무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높이 18m, 직경 70㎝이상의 적송을 찾기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 “올 겨울부터 목수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궁궐 복원 공사에는 뭐니뭐니해도 철저한 고증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광화문 복원공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 30여명이 투입된다고 밝혔다. 현재 경복궁 복원공사 사업은 모두 5단계 중 4단계를 마친 상태. 이 가운데 광화문 복원사업이 최종단계로 경복궁 재현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그가 맡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함화당을 비롯해 ‘침전지역’‘동궁지역’‘태원전 권역’‘건청궁’‘근정전’ 등이다. 광화문의 경우 본문 외에 군사방, 수문장청, 영군직소 등이 포함된다.2009년까지 목재만 450만재, 기와 150만장, 비용 1789억원이 투입되며 전각 등 총 93동이 복원되는 대단위 공사다. 신 대목장 개인적으로는 꼬박 20년을 경복궁에서 출퇴근하게 되는데 그 대미를 광화문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는 “문무백관의 조회와 국가의식을 거행했던 근정전은 우리 고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하면서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140년전의 건축기법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고 또한 광화문도 이와 비슷한 건축기법이라고 귀띔했다. 근정전 복원은 2000년부터 3년 10개월 걸렸다. “광화문 복원공사는 예정된 2009년 말 이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목조는 잘 관리만 하면 천년수명이기 때문에 광화문 또한 이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중졸학력으로 당대 최고의 목수자리까지 올랐다. 올해로 꼭 50년째 목수인생을 맞고 있는 그는 194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병천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신강수 한테 망치질을 배우며 일찍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한가지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그러다보니 목수들의 양말 세탁 등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들보용은 소나무 수령 300~400년 돼야 그러던 1960년 명인 이광규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때 봉원사 요사 및 종각 공사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스승 조원재를 만나 남대문 중수 공사에 동참했다. 1965년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대목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5년 수원성 장안문 복원공사 때에는 도편수로 독립하면서 1983년까지 밀양군 무안면 홍제사 법당, 서울 삼청동 총리공간,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1∼3건물, 단양 구인사 사천왕문, 부여 삼충사 영당 및 내외삼문, 울산 동축사 대웅전 및 산신각,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졸 학력으로 50년째 목수… 당대 최고 도편수 자리에 1982년 청와대 영빈관인 상춘재를 신축할 때 도편수를 맡았다. 한겨울에 30여명의 목수들과 함께 새벽 여섯시에 청와대로 출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춘재는 4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와 관련 “아마 가장 빨리 지은 한옥이 아니겠느냐.”고 술회했다. 이 같은 인연이 있어서인지 1989년 청와대 대통령관저의 신축공사까지 맡게 된다. 그는 평소 “좋은 적송을 구하는 사람이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늘 주장해왔다.1980년대 초반 강원도의 적송 많은 산 50만 평이 매물로 나오자 주저 없이 사들여 좋은 재료를 현장에 공급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바탕이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인 경복궁 보수공사의 도편수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복궁 복원공사가 다 마무리되면 평소의 꿈인 우리나라 전통건축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큰아들이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신 대목장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대가인 조원재, 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 계보를 잇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충남 병천중학교 졸업 ▲58∼60년 신강수, 박광석 문하에서 한옥 주택 신축 공사 ▲75∼78년 수원성곽 장안물, 창용문 복원 공사(도편수 신응수) ▲79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신축 공사 ▲82∼83년 청와대 상춘재 신축 공사 ▲88년 경복궁 만춘전 복원 공사 ▲89∼90년 청와대 대통령관저 신축 공사 ▲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보유자 ▲91∼95년 경복궁 침전지역 복원 공사(강녕전, 교태전, 경성전, 연생전, 웅지당, 연길당, 함원전, 흠경각, 동서행각, 건순각, 양의문, 함흥각 등) ▲96∼98년 경복궁 동궁지역 자선당, 비현각, 회랑 복원 공사 ▲97∼99년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돈화문 보수 공사,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97∼2001년 경복궁 흥례문 권역 복원 공사(흥례문, 유화문 및 화랑) ▲2000∼04년 창덕궁 규장각 옥당, 약방, 영의사, 검서청, 양지당, 봉모당 복원 공사,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 ▲04∼현재 경복궁 건청궁(장안당, 곤녕합, 복수당 外 13동) 복원공사 # 수상 만해예술상 수상(99년), 옥관문화훈장(2002년) 등 # 주요 저서 ‘천년 궁궐을 짓는다’‘목수’‘경복궁 근정전’ 등
  • [2007 남북정상회담] 남북정상 ‘벽’ 있었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3일 남북정상회담 일정을 하루 연장할 것을 전격 요청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참모들과의 검토 끝에 일단 예정대로 4일 회담을 종료하고 귀경하기로 했다. 정상간 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정 변경이 논의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 위원장의 회담 연장 제의 배경과 이를 거부한 우리 정부의 판단, 이에 따른 향후 남북 관계의 향배가 주목된다. 김 위원장은 3일 오후 백화원 영빈관에서 속개된 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2차 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평양 체류 일정을 5일까지로 하루 연장할 것을 전격 제의했다. 김 위원장은 2차 회의가 속개되자 모두발언을 통해 “내일(4일) 오찬을 평양에서 여유 있게 하시고 오늘 일정들을 내일로 늦추는 것으로 해 모레 서울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큰 일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한다. 경호·의전 쪽과 상의를 해 보겠다.”며 즉답을 유보한 뒤 이후 수행 참모들과의 협의 끝에 예정대로 4일 회담을 마치겠다는 뜻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이에 김 위원장도 회담 말미에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본래대로 하자.”고 연장 제의를 거둬들였다. 이에 대해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김 위원장의 일정 연장 제의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회담의 성과를 높이자는 취지의 호의였으나, 회담이 좋은 분위기에서 효율적으로 진행돼 예상보다 짧은 시간에 합의에 이르게 되자 (우리 정부가 가부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제안을 거둬들인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평화에 대한 (김 위원장의)확고한 의지를 확인했다.”면서도 “솔직히 벽을 느끼기도 했다.”고 소회를 밝힌 대목이 주목받고 있다.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오전 1차 회담 직후 김 위원장이 회담 연장을 요청하고,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회담 연장 해프닝은 4일 발표할 합의문의 수준을 넘어 향후 남북관계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 등 남북간 현안에서 보다 구체적인 진전을 이루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과, 대북지원 등에서 노 대통령의 보다 큰 양보를 얻어내려 한 것이라는 해석 등이 엇갈린다. 반면 이날 평양에 큰 비가 내리면서 아리랑공연 관람 등 방북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되자 예정 일정을 충분히 소화토록 하기 위해 김 위원장이 선의의 배려를 하는 차원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특히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북지원 등과 관련, 남북 당국간 ‘물밑 거래’ 가능성에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 4일 발표될 합의 내용에 따라 국내 대선 정국에도 일정 부분 파장이 일 것으로 점쳐진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北 담판 속셈…南 실익없다 판단?

    [2007 남북정상회담] 北 담판 속셈…南 실익없다 판단?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하자고 제안한 것은 ‘고도의 전략’이라는 지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전격 제안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4일 귀환하기로 한 것도 북한 측의 의도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회담 연장은 여러 의도 담겨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회담 연장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은 다목적 노림수를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남북공동선언문과 같은 합의를 위한 김 위원장의 전향적인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남북간에 보다 구체적인 합의 도출을 위한 시도에서 비롯됐다는 의견이다. 동국대 고유환 교수는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진전된 합의를 끌어내고, 차기 정부에 상관없이 남북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확실히 제도화하겠다는 의도가 가장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는 “회담 자체가 삐걱거린다기보다는 북측이 뭔가를 더 얻어내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분석했다. 남측이 예기치 못한 획기적인 제안을 함에 따라 내부 논의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은 “서해상 긴장완화 방안과 관련, 남측이 ‘로드맵’을 제안, 군부·당과의 조율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했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또 협상 결과 도출을 지연시켜 상대방의 조바심을 유발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협상전략으로 보기도 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임기말 노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빅딜’담판을 하려고 하는 것”이라면서 “일정을 연장시켜 풍성한 그림을 보여주는 제스처”라고 밝혔다. 하지만 북측이 장관급회담이나 군사회담에서 자주 선보이는 협상전략의 일환이긴 하지만 정상회담의 성격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일각에서는 평양에 비가 오면서 당초 이날 예정된 아리랑 관람이 연기된 것이 직접적 이유로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내일 오찬을 평양에서 여유있게 하시고 오늘 일정을 내일로 늦추는 것으로 해 모레 서울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냐.”는 김 위원장 2차 정상회담 모두 발언으로 미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리랑 관람이 일정을 하루 늘려야 할 만큼 절박한지는 의문이다. ●득보다 실이 많아 예정대로 노 대통령이 회담 일정을 연기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체류 연장으로 인한 이득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경호 문제를 비롯해 대규모 방북단의 일정 자체가 하루 늦춰지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부담이 더 크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하루 연장하면서까지 정상회담을 진행했는데 변변치 않은 ‘성과’를 갖고 귀환해야 한다면 차라리 ‘낮은 수준’의 합의선에서 끝내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특히 김 위원장이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을 했을 경우 더더욱 그렇다. 최광숙 이세영기자 bori@seoul.co.kr
  • [열린세상] 유럽여왕들이 安東 찾는 까닭은/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열린세상] 유럽여왕들이 安東 찾는 까닭은/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오는 6∼12일 한국을 방문하는 마그레테 2세 덴마크 여왕이 경북 안동시를 찾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이 무렵은, 중세 그 유명한 스페인 화가의 화풍인 ‘벨라스케스 스카이’보다 더 파란 하늘이 마냥 높고 햇살이 아직은 따사로운 한국의 호시절 가을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에 오는 유럽 여왕의 이번 가을 행차에서도 안동이 다시 뜰 모양이다. 유럽 여왕들이 서울로 날아와, 굳이 눈길을 보내는 안동은 전통이 넘치는 고장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네 한국인에게도 진솔한 매무새로 다가오는 원형(原形)의 고향같은 땅이 안동이다. 소백산맥 산자락을 등에 업고, 낙동강 물줄기 한 가닥을 끌어안아 배산임수의 명당이 분명한 마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큰마당을 노니는 서너 마리의 닭과 삽사리 하나가 보이는 한 폭의 한국화를 상상해도 좋다. 이렇듯 정한(靜閑)한 안동의 전통마을은 고유문화와 자연경관이 한데 어울린 삶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내면세계가 아름답다. 더구나 유학에 무게를 두었다는 뜻에서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컬었거니와, 실제 걸출한 학자를 숱하게 배출한 인재의 곳간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안동은 유학 중심의 한국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문주의의 고장이다. 이를 모두 관인(官人)과 사대부들이 일구었다고는 하지만, 그들만이 독차지한 공간은 아니었다. 엘리트 그룹의 틈새를 산 서민들에게도 익숙한 생활문화가 전통으로 자리매김한 흔적이 도처에서 드러난다. 이는 한국인의 기층적 정서를 깔고 태어난 안동의 민속과 맞물린 대목이다. 그림씨를 기묘하게 가미한 고유명사 ‘물돌이동(河回洞)’과 여기 고대광실이 즐비한 마을 한복판에서 오랜 세월을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가 그 사례일 것이다. 1999년 안동을 들른 엘리자베스 2세는 이 별신굿탈놀이 한 마당을 구경했고,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등 많은 문화유산을 경내에 둔 봉정사를 찾아 몸소 범종을 울려 청아한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 안동에 오는 마그레테 2세도 거의 같은 코스를 도는 일정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유럽 여왕들이 하늘길도 제대로 닿지 않는 내륙 안동으로 달려가는 까닭은 어디 있겠는가. 이는 바로 한국의 전통문화 때문인 것이다. 이른바 서양문명을 일상으로 누린 유럽인들에게 안동은 동양의 정신세계를 축약한 신비로운 곡두로 다가올 수 있다. 유구한 역사 속에 이루어진 온갖 경험을 내재한 정신능력 내지 그 총량을 전통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전통은 가꾸고 지킬 때 자생력을 유지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고도의 문화정책이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위한 문화정책의 하나로 2000년 정부가 설립한 한국전통문화학교가 충남 부여에서 문을 열었다. 그동안 203명의 졸업생이 나오기는 했지만, 고등교육법상 각종학교로 분류되어 여러가지 불이익이 뒤따른다고 한다. 대학 명칭을 쓰지 못하는 터라, 재학생들이 배움의 열정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온다. 더구나 대학원 설립의 길이 막혀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간 전문 연구인력을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현대와 미래사회의 정신적인 풍요를 전통문화에서 찾는 추세다. 그래서 전통문화 콘텐츠 개발과 더불어 전통문화 재창조에 역점을 두어야 할 시기에 도달했다. 이같은 환경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 교육을 선택이 아닌 필수의 정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난해 발의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법안’이 여태 국회에 계류 중이고 보면, 답답하다. 안동에서 본 것처럼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바로 한국적인 데서 출발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 [2007 남북정상회담] 金 불쑥 제안…우리측 당혹

    3일 역사적인 2007 남북정상회담에 들어간 정상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돌연한 ‘회담 하루 연장’ 제안을 놓고 반전을 거듭하는 파격을 연출했다. 김 위원장의 파격 제안은 오후 2시45분 백화원 영빈관에서 속개된 두번째 회담에서 나왔다. 김 위원장은 회담 시작과 함께 “모레 서울에 돌아가시는 게 어떠냐.”고 불쑥 제안했다. 이런 제안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노 대통령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옆에 앉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 등 우리측 배석자들도 서로 얼굴을 쳐다 보는 등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김 위원장의 말이 끝나자 노 대통령은 “큰 일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와 관련,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김 위원장의 제안은 회담을 보다 충실히 하고, 오늘 오후 취소됐던 일정 등을 가능한 한 모두 소화하자는 취지로 받아들인다.”면서 “대통령께서 참모들과 논의해 평양 체류 일정을 연장할지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울에서도 정부는 한덕수 총리 주재로 남북정상회담 추진위 회의를 열어 김 위원장의 제안에 대한 수용 여부를 논의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윤승용 홍보수석은 “지금 평양에서도 회의하고 있고, 서울에서도 회의한다.”라고 긴박한 분위기를 전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회담의 성공을 위해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란 관측이 다소 우세한 편이었다. 일부 정부 당국자들은 “큰 방향은 김 위원장의 제안에 대해 우리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안이 나온 지 1시간40여분 뒤 우리 정부는 김 위원장이 회담 말미에 제안을 철회했다면서 4일 예정대로 서울로 귀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측이 제안을 거절한 게 아니라 두 정상이 자연스럽게 공감했다는 설명이었다. 김 위원장이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연장을)안 해도 되겠다. 남측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본래대로 합시다.”고 말했다고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말했다. 결국 서울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김 위원장의 제안은 100분 만에 없었던 일이 됐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해명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남측이 제안을 거부해서 김 위원장이 철회한 것인지, 김 위원장 스스로 제안을 취소한 것인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한편에선 정상회담의 성격상 공개석상에서 상대 정상이 부담스러워 할 제안을 김 위원장이 불쑥 던진 것 자체가 외교적으로 결례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날 김 위원장의 제안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를 얼핏 연상시킨다. 당시 북측은 애초에 6월13일로 합의했던 회담 날짜를 하루 늦춘다고 하루 전날 일방적으로 통보한 적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예정보다 하루 늦은 6월14일 방북길에 올라야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노대통령 방북 이틀째 화보

    [2007 남북정상회담] 노대통령 방북 이틀째 화보

    남북정상회담 일정 이틀째인 3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불참 속에 아리랑공연을 관람하고 만찬을 가졌으며,4일 김 위원장과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두 정상간 긴박했던 회담 분위기를 소개한다. 평양 청와대사진기자단
  • [2007 남북정상회담] 남북정상회담 美·中·日 반응

    |워싱턴 이도운·도쿄 박홍기·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과 일본 언론들은 이번 정상회담을 상세하고 신속하게 보도했다. 중국언론에 뉴스를 독점 공급하는 국영 신화사의 톱 뉴스는 남북 정상회담이 차지했다. 시시각각 전달되는 사실 관계와 현장 스케치 등을 실시간 속보로 전달했다. 평양 체류 일정을 하루 연장,5일 아침 서울로 돌아갈 것을 요청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안과 거부 소식 등도 빠르게 전해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반면 미국 언론들은 비중이나 신속성에서 중국과 일본 언론들보다 뒤처졌다. 美정부와 언론은 평양에서 진행중인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간의 정상회담의 추이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며 다양한 평가를 내놓았다. 미 정부의 한반도정책 실무책임자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한국인들이 지닌 분단의 비극과 남북 대화의 열망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6자회담과 남북대화는 병행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와 관련, 한국 정부와의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날 8면 한 면을 거의 할애해 심층 보도했다. 또 노 대통령 일행이 탄 차량 행렬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는 사진을 ‘기념비적인 월경(越境)’이라는 제목아래 실었다. 또 정상회담에서 북한경제 재건지원책이 나올 것이며 한반도 평화구축 방안도 논의될 것으로 전망했다. 日북핵과 함께 납치문제를 현안으로 갖고 있는 탓에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신문들은 1∼2개면을 할애, 회담의 세세한 부분까지 보도하고 있다. 지난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 때와도 다르다. 당시에는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납치문제들이 등장하지 않았던 데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 정상회담을 할 만큼 북·일 관계가 해빙기였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핵포기’의 언질을 받기를 바란다.”면서 납치문제의 해결도 설득해주길 주문하는 등 일본 주장을 분명히 했다. 고무라 마사히코 외무상은 3일 마이니치 신문과 인터뷰에서 대북 정책과 관련,“제재를 해제할 만큼 북한쪽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납치문제 수위에 따라 대북 정책도 조정해 나갈 것으로 알려졌다. 中전역을 커버하는 중앙방송(CCTV) 뉴스채널은 김정일 위원장이 주재한 환영식 등 주요 장면을 거의 실시간으로 방영했다.CCTV 시사프로도 회담 내용을 폭넓게 다뤘다. 다만 특별한 해설이나 분석은 내놓지 않았다. 신화사도 이날 노무현 대통령이 대장금 DVD를 김 위원장에 전달했다는 스케치성 기사도 소개했다. 시나(新浪), 서우후(搜弧)등 포털 사이트는 정상회담과 관련, 일정·주제·의제·회담별로 기사를 다양하게 분류해 소개했다. 이에 비해 홍콩 언론들은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허풍쟁이의 블록버스터’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북한에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설은 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할리우드적’ 분위기가 가미된 이후 김 위원장의 직접 영접으로 ‘블록버스터’로 바뀌었다고 전하면서 노련한 북한 의도를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jj@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1차회담 때와 다른점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1차때와 비교해 추진단계에서 부터 방북 경로와 규모, 회담성사 주역, 국제환경 등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평양 가는 길부터 ‘땅길’과 ‘하늘길’로 뚜렷이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수 방탄처리된 의전차량인 벤츠 S600차를 타고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방북했다. 군사분계선은 차량에서 내려 걸어서 넘었다. 반면 7년 전에는 아시아나항공 보잉 737특별기를 타고 한국전쟁 이후 첫 서해 직항로로 날아가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다. 대표단 규모도 커졌다.1차 회담 당시 방북인원은 182명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3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평양길에 올랐다. 노 대통령을 수행하는 각료들 가운데는 7년 전과 달리 농림, 과기, 국방, 복지부 장관 등이 새로 포함됐다. 특별수행원 인원도 24명에서 49명으로 늘어났다. 별도의 행사진행단 요원도 98명이나 추가됐다. 특별수행원은 정치, 문화예술 등 7개 분과별로 북측과 간담회를 갖는다.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動線)’도 확대됐다.7년전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 시내에 머무르며 정상회담과 오찬·만찬 등 공식일정 위주로 소화했다. 참관지도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평양 교예극장 등에 그쳤다. 반면 노 대통령은 남포 평화자동차공장과 서해갑문 등 현지 산업시설을 시찰한다. 논란을 빚은 ‘아리랑 공연’도 참관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개성공단을 방문해 근로자들을 격려한다. 무엇보다 회담 자체를 바라보는 ‘논높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2000년에는 ‘만남 자체’에 의미를 뒀다. 의제도 통일방안, 이산가족 문제 등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번엔 한반도 경제협력, 비핵화 등 구체적인 ‘실적’을 올릴 수 있느냐가 관심사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구 의정 초점] 도봉구 동부간선 진입로 폐쇄반대

    [구 의정 초점] 도봉구 동부간선 진입로 폐쇄반대

    도봉구의회가 동부간선도로 북부지역의 도로 확장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하며 ‘외로운 항변’을 하고 있다. 동부간선도로 확장을 환영하지만 노원교와 상계교의 진입로가 폐쇄되면 교통혼잡이 뻔하다며 지역 주민들을 위한 개선안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사업 시행자인 정부와 서울시는 몇 개월째 이를 모른 척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진입로 2곳 폐쇄로 교통체증 2일 도봉구의회에 따르면 서울시는 상습 정체구간인 도봉간선도로의 월계1교에서 의정부 시계까지 7.6㎞를 2010년까지 왕복 4차로에서 왕복 6차로로 확장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예산 2477억원을 편성했다. 동부간선도로를 이용해 의정부 지역에서 서울로 올 때 도로가 상계대교 근처에서 둘로 갈라져 노원지역 도로는 상행선(3차로)으로, 도봉지역은 하행선(3차로)으로 사용된다. 도로가 갈라지면서 중랑천으로 건너는 구간은 지하터널을 뚫어 연결된다. 이렇게 되면 의정부나 서울 시내로 진입할 때 교통소통이 원활해지는 효과가 기대된다. 문제는 도봉지역 자동차들이 노원교를 건너 동부간선도로로 진입할 때 이용하는 진입로가 폐쇄되는 점(지도(1))이다. 국토관리청과 서울시 건설안전본부는 진입로를 계속 사용하려면 중랑천에 교각을 하나 더 세워야 하는데, 그러면 교각의 중량만큼 하천의 수위가 높아져 장마 때 범람할 우려가 있다면서 진입로 폐쇄를 결정했다. 또 상계대교 이후 남쪽의 동부간선도로는 의정부로 향하는 상행선 전용이 되는 만큼 다리를 건너 중랑천으로 진입하는 램프도 폐쇄(지도(2))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다리의 동부간선도로 진입로가 모두 없어지면 창동교 근처의 진입로에 자동차가 몰려 극심한 교통 체증(지도(3))이 불가피하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정부, 서울시, 구청 모두 외면 도봉구의회의 3선 의원인 김용석 의원은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열린 146·152·165회 정기·임시회에서 이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김 의원은 “동부간선도로의 확장은 환영할 일이지만 필연적으로 닥칠 교통지옥은 피해야 한다.”면서 구정 질문을 통해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특히 그는 2010년 완공을 목표로 노원교 근처에 연면적 3만 8476㎡의 지상 12층 북부지방법원 청사, 연면적 3만 5879㎡의 지상 13층 북부지방검찰청 청사가 들어서면 교통수요는 자연히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확장 공사에 착수한 단계에서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도봉구는 동부간선도로 확장에 따른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주민 대상 사업 설명회와 자문회의를 잇따라 열었다. 이를 통해 진입로 폐쇄 문제를 포함한 7개 항목의 의견서를 만들어 서울시와 건설교통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후 감감 무소식이다. 도봉구는 건의안을 제출하고도 주민들에게 공식적인 자료공개를 거부하는 등 서울시의 눈치만 보고 있는 꼴이다. 도봉구 관계자는 “도봉구는 지역의 동·서를 국철이 가르고, 지하차도가 10여개에 이르러 지역발전과 교통흐름에 방해를 받는데, 또 피해를 감수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8)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38)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조선 사신이 ‘재조지은을 배신할 수 없다.’며 침략을 힐문했을 때 아민은 즉각 반박했다. 반박의 핵심은 ‘조선이 명의 은혜만 기억할 뿐 자신들이 베푼 은혜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과거 울라(烏拉)의 부잔타이(布占泰)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자신들이 부잔타이를 설득해 침략을 중지시켰던 것, 심하 전역 때 포로로 잡은 조선 병사들을 송환해 준 것 등 ‘은혜’를 열거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모문룡을 편들고 군량을 제공했던 것,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조문(弔問)하지 않은 것 등을 침략의 원인으로 제시했다. ●형제관계를 받아들이다 아민은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면서, 조선 사신들에게 계속 싸울 것인지 화약(和約)을 맺을 것인지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은 조선의 토지와 백성에 아무런 욕심이 없으며 조선이 화의를 바란다면 국왕이 신임하는 사람을 속히 보내라고 닦달했다. 아민은 사신인 강숙 일행이 돌아가는 편에 자신의 사자 아본(阿本)과 동나미(董納密) 등을 동행시켰다. 그들이 떠난 뒤 전진을 멈추고 중화에서 1주일을 더 머물렀다. 휴식을 취하면서 조선의 답변을 기다리자는 심산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화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월28일 아민이 보낸 사신 일행이 강화도 건너편의 풍덕(豊德) 부근에 당도했다. 조선 조정은 ‘오랑캐 사신(胡差)’을 어느 길로 들이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인조는, 조선인들이 평소 이용하지 않는 샛길로 호차를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호차가 전하는 국서를 직접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화약을 맺어 후금군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급하기는 했지만 ‘오랑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2월2일, 호차가 갑곶(甲串)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다시 확인되었다. 인조는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 준다면 화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들이 들고 일어났다.2월3일, 태학생 윤명은(尹命殷) 등이 상소를 올렸다.‘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예빈직장(禮賓直長) 강유(姜瑜)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주축인 비변사는 뜨끔했다. 비변사는 ‘오랑캐와 화친하려는 것은 전쟁을 완화시켜 종사(宗社)를 보전하려는 부득이한 계책’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외방에서는 ‘조정이 대의를 망각하고 더러운 오랑캐와 우호를 맺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다고 우려했다. 인조는 여론을 의식하여 다시 교서를 반포했다.‘종사의 위기를 늦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랑캐와 화친하지만 명과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만은 절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오랑캐와 화친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들어선 인조정권은 광해군대의 ‘화친’을 반복하는 데에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강홍립과 유해의 화의 주선 2월5일 조정은 회답사 강인(姜絪)을 임시로 형조판서에 임명하여 적진으로 보냈다. 그가 가져간 국서에서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또 의연히 천계(天啓) 연호를 사용했다. 후금 측은 반발했다. 그들은 ‘천계’의 ‘계(啓)’ 자 대신 ‘총(聰)’ 자를 쓰라고 종용했다.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는 요구였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울까지 진격하여 1년 동안 머물며 철수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후금군 지휘부는 계속 전진할지의 여부를 놓고 의견이 서로 달랐다. 총사령관 아민은 다른 장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서울로 전진할 것을 고집했다. 귀순한 한인(漢人) 출신 장수 이영방(李永芳)이 반대하자 아민은 이영방에게 “내 어찌 너 같은 오랑캐 놈을 죽이지 못할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졸지에 ‘오랑캐’로 전락한 이영방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민의 동생 지르갈랑(濟爾哈朗)과 다른 장수들이 모두 나서서 설득한 뒤에야 아민은 전진하겠다는 고집을 꺾었다. 2월9일, 후금 측이 보낸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 호차 유해(劉海)가 강화도로 들어왔다. 후금군 지휘부는, 천계 연호를 포기하지 않는 조선 측의 태도가 불만스러웠지만 화친을 깨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2월10일, 인조는 강홍립과 박난영을 접견했다. 두 사람 모두 심하 전역에서 투항했던 이후 9년 만의 귀환이었다. 상당수 신료들은 강홍립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인조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강홍립은 인조에게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9년 만에 전하를 뵈니 드릴 말씀이 없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후금 측의 내부 사정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강화를 맺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유해는 본래 한인(漢人)으로 후금으로 귀순한 인물이었다. 후금 측이 그를 사신으로 보낸 것은, 조선이 한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상황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 실제로 유해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과거 명의 칙사들처럼 대접받고 싶어했다. 그는 ‘조선이 오로지 명분에만 집착하여 종사가 망하고 백성들이 죽어 가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며 화친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조정은 원창부령(原昌副令) 구(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그를 왕제(王弟)라고 칭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보내기로 했다. 일종의 볼모였다.2월15일에는 목면 1만 5000 필, 면주(綿紬) 200 필, 백저포(白苧布) 250 필 등을 후금군 진영에 보냈다. 일종의 세폐(歲幣)였다. 원창군을 파견하고 세폐를 보냄으로써 화친을 위한 기본 토대는 마련되었다. ●인조, 맹세 의식에 태연 조선과 후금의 화의 과정에서 마지막 걸림돌은 화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맹세(盟誓)하는 문제였다. 후금 측은 국왕과 후금 사신이 동참한 가운데 흰말(白馬)과 검은 소(黑牛)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자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그것을 비루하게 여겨 거부하려 했다. 언관(言官)을 비롯한 상당수 신료들은 ‘존엄한 천승지국(千乘之國)의 임금이 개돼지와 더불어 맹세하는 것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후금 측은 완강했다. 아민은, 맹세를 기피하는 것은 겉으로만 화친하려는 것으로 끝내 거부한다면 다시 싸워 승부를 가리자고 협박했다.‘청실록’이나 ‘만문노당(滿文老)’을 보면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킬 때마다 희생을 잡아 회맹(會盟)하는 장면이 나오거니와 만주족의 입장에서 맹세는 서로의 신의(信義)를 담보하는 의식이었다.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맹세 의식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맹세는 대의와는 무관하다. 두 마리 가축을 아끼려다가 위망(危亡)을 초래할 수는 없다.”며 맹세와 관련된 책임은 자신이 모두 지겠다고 나섰다. 3월8일, 인조는 대청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거행했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이 각각 동쪽과 서쪽 계단에 도열하여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인조가 예를 마치고 행궁으로 돌아가자 만주인들이 흰말과 검은 소를 잡아 피와 골을 그릇에 담았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은 새로 만든 서단(誓壇)에 서서 맹세문을 낭독했다.‘조선이 향후 후금을 적대시하여 나쁜 마음을 품으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되고, 후금이 나쁜 마음을 품으면 역시 피와 골이 나와 하늘 아래서 죽게 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묘호란이 화친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을 비롯한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잠시 서진(西進)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위원장 개성공단 방문 동행 안해

    다음달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 행보의 윤곽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노 대통령의 방북 스케줄을 미리 그려보면 첫날인 2일 아리랑 공연 관람, 둘째날인 3일 정상회담, 셋째날인 4일 참관 및 개성공단 방문이 주요 골자다. 2일 오전 노 대통령 내외는 전용차를 타고 청와대를 출발, 평양∼개성 고속도로로 평양에 도착한다.1차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맞았지만 이번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평양 입구에서 노 대통령을 영접한다. 오후 만수대 의사당에서 김 상임위원장과 회담을 가진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만나 첫 번째 회담을 가질 전망이다. 이어 목란관에서 북측 주최 만찬에 참석한다. 만찬 뒤 김 위원장과 함께 아리랑 공연을 관람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3일 오전 김 상임위원장과 면담한 뒤 김 위원장과 공식 정상회담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녁엔 인민문화궁전에서 노 대통령이 답례 만찬을 주최한다. 김 위원장의 만찬 참석여부는 북측과 협의 중이다. 4일 김 위원장 주최의 오찬을 끝으로 공식행사는 마무리된다. 노 대통령은 귀환길에 개성공단을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다. 김 위원장은 개성공단 방문에 동행하지 않는다. 방북단은 이 기간 동안 북한으로부터 휴대전화 30대를 대여받아 사용한다. 한편 신임 성경륭 정책실장이 변양균 전 정책실장을 대신해 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선임됐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기로에 선 손학규] 孫, 반전카드 잡았나

    선거인단 동원 등 ‘경선 구태’를 주장하며 자택칩거에 이어 지방으로 잠적했던,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선 경선 후보가 21일 경선에 복귀한다.한때 후보사퇴 등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손 후보는 이틀만의 ‘장고’끝에 경선 복귀를 결심,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추석 연휴 경선판 뒤집을 계기 마련 손 후보는 20일 오전 7시40분쯤 서울 도화동 자택에서 나와 부인 이윤영씨와 이씨의 마티즈 차량을 직접 운전, 합정동 절두산 순교 성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40분정도 머물다 경기 화성 남양성지에서 1시간가량 산책을 한 뒤 취재진을 따돌리고 경기 의왕시 성 나사로 마을로 떠났다가 늦은 밤 서울로 돌아왔다. 손 후보는 이날 밤 자신의 거취에 대해 “오늘 마지막 기도를 하고 내일 아침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캠프 내부에서는 이미 21일 부산에서 예정된 후보자 토론회 준비를 하는 등 복귀 수순을 밟고 있었다. 손 후보가 선택한 칩거와 지방행은 당 지도부를 겨냥한 강도높은 항의 표시의 성격을 띠었다.자신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와 중진의원들이 동원경선 의혹에 대해 미온적 태도로 대응하고 있는 데 대한 고강도의 불만과 항의 차원으로 빼어든 카드였다.여차하면 후보직을 사퇴할 수 있다는 ‘배수진’을 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당 지도부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그러나 손 후보의 이번 초강수는 이미 경선 복귀를 전제로 한 압박 전략이었다. 지난 3월 한나라당 경선을 앞두고 탈당한 그로선 또 한번의 경선 불참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손 후보의 이번 칩거는 추석 연휴를 겨냥한 노림수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연휴 직후인 29일에 열리는 광주·전남 경선에서 대역전극을 꾀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손 후보의 칩거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최대 화제로 떠올랐다. 동원·조직 선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경선판을 일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지지층 결집 여부는 미지수 그러나 손 후보의 이 같은 행동이 지지층의 결집을 이뤄낼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지지자들과 국민에게 “불리하면 언제든 중도 포기할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인식됐다는 점이 그로선 손실이다.당내에서는 손 후보의 칩거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타개해 보려는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당 관계자는 “손 후보가 동원선거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것에 대해 당 지도부가 뒤늦게 나마 심각하게 인식한 것은 나름대로 큰 수확이다.”라면서도 “그의 행보가 표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대선주자 25시] 정동영 통합신당 후보

    [대선주자 25시] 정동영 통합신당 후보

    1위를 차지한 후보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고개를 떨구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충북 경선 1위 정동영!” 사회자가 외치는 순간 지지자들의 함성이 터졌다.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의 초반 4연전 승리 확정이다. 그러나 정작 정 후보는 웃질 않는다. 웃을 수가 없다.5년 전 구 민주당 시절 경선 당시가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다.16전 15패. 참담했다. 전국 16개 권역을 돌며 벌어진 대선후보 경선에서 꼴찌를 밥먹듯했다. 충남 경선에선 39표, 강원 경선에선 78표를 받았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 수준의 득표다.“충남 경선에서 39표를 받은 뒤 겉으로는 웃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죠.”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린다. 아프고 또 민망하다. 자존심이 상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그러나 끝까지 버텼다.“제 개인 등수보다는 국민경선을 완성하겠다는 의무감이었습니다. 고통이 극심했지만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거죠.”정 후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5년 전 경험을 담금질 삼았다. 절치부심, 오히려 약이 됐다. “권투선수로 치면 16라운드 뛰면서 15라운드 KO패를 당한 셈이죠. 그 한숨과 헌신이 이제 보상과 격려로 돌아오는 듯합니다.”정 후보가 살짝 웃음을 보인다. 현재 분위기는 뚜렷한 상승세다.15일 제주·울산,16일 충북 경선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19일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손학규 후보를 제치고 범여권 1위로 나섰다. 손 후보가 범여권에 합류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때 정 후보와 손 후보의 지지율 차는 배 이상이었다. 소위 ‘손학규 대세론’이 뒤집어졌다. 캠프 분위기는 한껏 고무됐다. 여기저기서 싱글벙글이다. 캠프의 한 관계자는 “손 후보가 여론조사를 경선에 포함시키려 애를 썼지만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현재 추세로만 보면 가능한 얘기다. 실제 19일 손 후보 캠프에는 비상이 걸렸다.“불퇴전의 각오로 국민 없는 국민동원경선에 투쟁하겠다.”고 배수진까지 쳤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오히려 정 후보 본인은 덤덤하다. 표정 변화가 없다.“꾸준히 의리와 신의로 제 자리를 지켜 온 걸 국민이 알아준 결과겠죠.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5년간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을 위해 꾸준히 주어진 일을 다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했고 마지막 대통합을 위해서도 몸을 던졌습니다.”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둘러싼 ‘배신론’에 대한 해명이다. 그는 대통합민주신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속앓이를 많이 했었다.“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지지율이 낮아도 정면돌파를 해왔습니다. 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정 후보는 1년 가까이 3%대 이하의 지지부진한 지지율을 기록했다.2선 후퇴 압박도 있었다. 그러나 미련스레 범여권 적통성을 강조해 왔다. 그 전략이 지금 먹혀들기 시작했다. 이미 정 후보 캠프는 경선 이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의 일대 결전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다. 정기남 공보실장은 “여론조사 결과는 손 후보에게 이긴 것보다 이명박 후보와의 본격적 싸움이 시작된 것에 더 큰 의미를 둬야 한다.”고 분석했다. 정 후보 본인도 본선대결에 자신감을 보였다.“정동영이 만들려는 세상이 경쟁력입니다. 이 후보와 전혀 다릅니다. 정동영의 성장은 차별없는 성장이지만 이명박의 성장은 눈물도 없는 성장, 불도저 성장입니다.” 이명박 후보에 대한 공격이 거침 없다.“돈 봉투 주고 공사 따내는 건 시장경제가 아닙니다. 이명박 후보는 태아가 불구면 낙태해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경악할 만한 얘기 아닙니까.”눈이 번쩍인다. 정 후보가 흥분했다.“노조는 막노동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요?매년 45만명이 임신중절만 안하면 저출산 문제 해결된다고요?이게 한나라당 이 후보의 수준입니다.” 캠프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허상이라고 단언했다.“경제를 잘할 것 같다는 착각에 기초한 겁니다. 미래경제·평화경제 시대에 땅과 운하파기만 머릿속에 든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또 덧붙인다.“요즘 택시기사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직 찍을 후보가 없어서 이명박을 지지하지만 문제가 많은 사람인 건 다들 동의한다더라고요.”뭔가 감을 잡았다는 표정이다.“이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19일 정 후보는 오전 광주, 오후 전주 그리고 또 서울을 오갔다. 눈은 충혈되고 피부는 까칠해졌다. 그러나 생기가 펄펄 넘친다. 주위 참모들은 건강이 걱정이라고 했다.“그런데 후보가 당최 말을 안 듣습니다. 스케줄을 줄여보려고 최선을 다하는데 자신이 뛰고 또 뜁니다. 대단합니다.”대통합민주신당 경선 레이스는 앞으로 한달정도 남았다. 그러나 대선은 아직 90일 남짓이다.12월19일을 바라보고 던진 말이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경기 하남시 검단산

    [산이 좋아 산으로] 경기 하남시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팔당대교를 지나 양수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강 건너편으로 우람하게 따라오는 산, 백제의 승려 검단선사가 은거하며 도를 깨우쳤다는 검단산(黔丹山·657m)이다. 검단산은 서쪽으로 하남 시가지와 서울, 북쪽으로 한강과 예봉산, 동쪽으로 팔당호와 용문산, 남쪽으로 용마산으로 연결된다.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 검단산에선 특히 동쪽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극적으로 해후하는 장면과 그 너머 용문산 능선이 장관을 이룬다. 서쪽으로는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을 따라 서울의 모습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그 너머 북한산과 도봉산의 흐름이 장쾌하다. ●가장 많이 찾는 코스 4시간 소요 산행 들머리는 크게 세 군데로 나뉜다. 하남시가지 창우동과 여기서 버스로 세 정거장 떨어진 하산곡동 산곡초교 앞에서 산길이 시작되고, 한강을 끼고 있는 아래배알미동에도 산길이 나 있다. 창우동 들머리는 다시 두 군데로 나뉘는데, 애니메이션고교 남동쪽 등산 장비점이 들어선 골목으로 들어가 호국사를 경유하는 코스와 애니메이션고교 동쪽 베트남 참전 기념탑을 들머리로 정상에 오르는 코스가 있다. 참전 기념탑에서 출발해 유길준 묘소∼전망대∼정상∼호국사를 들러 장비점 거리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는 가장 많은 하남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에서 호국사 대신 벽곰약수를 경유해 산곡초등학교로 내려오는 코스도 걸리는 시간이 비슷하다. 검단산 정상에서 아래배알미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2.13㎞,1시간 정도 걸린다. 최근 등산객이 점점 늘고 있는 종주코스는 검단산에 오른 후, 능선을 타고 고추봉을 넘어 전망 좋은 용마산을 거쳐 광주시 삼성리 각화사로 내려가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창우동∼검단산∼용마산∼각화사 코스는 약 11㎞로 6∼7시간 정도 소요된다. 창우동 애니메이션고교를 왼쪽으로 끼고 골목으로 200m 정도 들어가면 베트남 참전 기념탑과 등산로 안내판이 나온다. 검단산이 올려다보이는 널찍한 등산로 입구에서 10분 지나면 밤나무가 많이 보이고, 이어 잣나무 터널을 지나게 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20분쯤 오르면 구한말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구당 유길준(1856∼1914년) 묘소를 만난다. 묘소에서 15분 오르면 능선 사거리 안부에 도착한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약 2㎞ 거리, 중간에 전망바위를 지나게 된다. 전망바위까지 50분 정도 걸리는데, 경사가 몹시 가파르다. 전망바위는 검단산을 통틀어 가장 전망 좋은 자리다. 우선 북쪽으로 강 건너 솟아난 예봉산이 손에 잡힐 듯하고, 북서쪽으로 미사리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한강의 유장한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드넓은 평야인 서울의 모습이 발아래 펼쳐지고, 서울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선 북한산과 도봉산의 능선도 인상적이다. 동쪽 운길산 옆으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아름답다. ●한강·북한산·도봉산 한눈에 전망바위에서 10분만 더 오르면 억새밭이 나오고 검단산 정상이 올려다보인다. 다시 30분 비지땀을 흘리면 정상 도착.100여평의 널찍한 공터에 헬기장이 놓여 있다. 정상의 조망도 나쁘진 않지만 잡목들이 시야를 가려 전망바위만은 못하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서면 아래배알미동으로 하산하는 길이고, 남쪽으로 가면 안부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호국사를 거쳐 창우동 애니메이션고교 앞으로 원점회귀할 수 있고, 산곡초교로 하산하려면 능선을 계속 타야 한다. 완만한 능선을 20분 밟으면 삼거리, 오른쪽으로 내려서야 벽곰약수터다. 여기서 계속 능선을 이어가면 고추봉, 용마산으로 나아가게 된다. 벽곰약수터부터 본격적인 하산로인데,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차고 맑은 물이 흘러 땀을 식히기 좋은 계곡을 따라 40분 내려서면 하산곡동 산곡초교 앞이다. 글 정수정 사진 진우석(월간 MOUNTAIN 기자)
  • 애걔걔, 검사님이 지붕타고 줄행랑

    애걔걔, 검사님이 지붕타고 줄행랑

    6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높은분으로 위장한 다음 어리숙한 시민, 경찰관을 속여오던 사기꾼이 14번째의 범행을 저지르다 경찰에 덜미를 잡혀 쇠고랑을 차게 되었다. 이 희대의 사기꾼은 지난 17일 서울중부 경찰서에 공무원 자격사칭 동행사 및 사기등 혐의로 구속된 가짜 검사 김광원(金光元·34·서울 서대문구 응암동 139). 택시운전사에 명함주고 수표든 지갑도 맡기는체 지난 16일밤 11시20분쯤 서울영 2-6175호「코로나·택시」운전사 임창봉(林昌鳳·40)씨는 통금시간이 다 되어 신당동 집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차가 서울 용산역앞에 이르렀을때 35살 가량의 신사 한명이 차를 세웠다. 「택시」를 탄 이 신사는 임씨에게 명함 한장을 건네주었다. 명함을 본 임씨는「백미러」로 손님을 쳐다보면서 방향을 물었다. 손님은 운전사에게 이태원쪽으로 차를 몰라고 지시했다.「서울 지방 검찰국 193호 김광원(金光元)」이라고 인쇄가 선명한 명함을 받아 쥔 임씨는 우선 지위높은 분을 태웠다는 생각에 운전에 더욱 조심하면서 서서히 남산쪽으로 차를 몰았다. 차속에서 김검사라고 자칭하는 손님은 임씨에게『결혼생활 7년동안에 아내가 어린애를 낳지 못해 오늘 아주 이혼하고 나오는 길이다』고 설명하면서 기분이 울적하니 이 차를 2시간만 전세내어「드라이브」나 하자고 제의해왔다. 그러면서 김검사는 돈 지갑을 펴 보이면서 수표 비슷한 종이가 한 묶음 든 수첩을 폈다 덮으며『이 지갑에 보수 1백70만원이 들었는데 이 돈을 보관 좀 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술기가 좀 있어 보이는 이 가짜 검사는 운전사 임씨가 지갑을 운전대 옆(서랍)에 집어 넣자『그 돈 다 써도 좋다』고 말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임씨는『이런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 오죽 속이 상하면 저럴까?』하고 동정이 앞섰다고. 이날밤 11시40분 차가 대한극장 앞에 이르렀을때 김은 임씨에게『현금이 하나도 없으니 현금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순진한 임씨는「포키트」에 보관하고 있는 보증수표도 있고 해 월요일 아침에 보수를 현금으로 바꾸어 준다는 말만 믿고 1만2천6백원을 빌려 주었다. 돈을 빈 김은 한 술 더 떠서 임씨에게『어디 놀만한 여자하나 없겠느냐?』고 은근히 물어왔다. 임씨는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말한뒤 약수동으로 갔다가 여자가 현찰을 주지않으면 안 된다는 바람에 실패, 다시 차를 무교동 쪽으로 몰아 이날 밤 11시50분쯤 무교동에서 부부 한쌍과 젊은 여자 한사람을 태운뒤 부부 한쌍은 한남동에서 내려 주고 집이 금호동이라는 아가씨 한명만 태우고 심야「드라이브」로 나섰다. 무교동 U「살롱」에 나간다는 정(鄭·21)모양을 태운「택시」는 이 가짜 검사의 위세(?)를 빌어 통금시간인데도 야간근무초소를 무난히 통과하여 경부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김은 제3한강교 근무초소에서 근무 경찰관에게 명함한장을 내 주면서『대전으로 수사독려차 나가는 길이라』고 둘러 대면서 큰소리쳤다. 아가씨 태우고 거침없이 새벽 2시까지 드라이브 고속도로「톨·게이트」에서도 마찬가지 수법으로 무사히 통과했다. 고속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리는「택시」안에서 김은 정양과 하룻밤의 풋사랑을 이루기위한「무드」조성에 열을 올리는 가운데 수원에서 다시 차를 돌려 서울로 들어온 시간이 7일 새벽2시. 여섯군데의 야간초소를 가짜 검사 명함 한장으로 무난히 통과하여「아스토리아·호텔」로 가기 위해 차가 충무로 5가 B초소에서 검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이 가짜 검사는 예의 명함을 내주며 호통을 치다가 근무중이던 충무로5가 파출소 근무 김용활 순경이『명함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나서면서 차를 일단 초소 앞으로 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김은『신분증을 집에 두고 안가져 왔다』고 버티면서 운전사 임씨에게 그대로 뺑소니 치라고 요구했다. 이때 임씨가 아무래도 김의 태도에 의심이 가자 서랍에 넣어둔 지갑을 꺼내보려고 하자 김이 급히 뺏더니 차에서 내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호텔로가다 검문에 걸려 운전사도 수상히 여기자 김은 중구 충무로4가181 W여관지붕위로 올라가 지붕을 타고 계속 달아나다가 추격해 온 경찰관에게 줄행랑 30분만에 붙잡혔다. 가짜 검사 명함 한장으로 심야의 밤거리를 누볐던 김은 경찰조사결과 전과13범의 지능범임이 밝혀졌다. 지난해 8월 6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출감한 김은 일생동안 직업이라고는 한번도 가져본적이 없고 집에는 아내와 딸하나가 있다. 국민학교를 겨우 마치고 고향인 충북 보은군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에 입대, 지난 61년8월 탈영하면서부터 교도소 생활을 해왔다. 군에서 탈영했을 때는 헌병과 방첩대 하사를 사칭, 경기도 의정부에서 군수품 장사들을 등쳐오면서 돌아다니다가 68년과 69년 2차례에 걸쳐 보수 10만원짜리 24장 15만원짜리 6장등을 위조해 사용해오는 등 호화찬란한 범죄이력을 갖고있다. 김은 감옥에서 출감하면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 광원이라는 본명이외에 김종X(金種X), 서정X(徐廷X) 등 6가지의 이름으로 행세 해왔다고. 경찰에서 신문을 받으면서『그래도 이 세상에선 높은분을 사칭하는 것이 행세하기에 상당히 편하더라』고 말하고『엄한 통금시간에도 명함 한장으로 영업용「택시」에 접대부까지 태우고 돌아다녀도 걸리지를 않아 야간 근무태도도 엉망이더라』고 비웃고 있었다. [선데이서울 71년 1월31일호 제4권 4호 통권 제 121호]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죽은 뒤 추대 형식으로 즉위했지만 한(汗)의 위치에 걸맞은 권력과 권위를 갖지 못했던 홍타이지는 전쟁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다. ●조선과 무역 통한 식량 확보도 전쟁 도발 배경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해 강경론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부친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공격하라고 청했다. 특히 1619년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심하 전역에서 패하여 투항한 뒤에는 ‘후금과의 화의에 미온적인 조선의 장졸들을 전부 살해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의 입장은 달랐다. 두 사람은 ‘조선이 명의 배후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적대하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던 홍타이지가 한으로 즉위한 것 자체가 조선에는 재앙이었던 셈이다.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즉위 당시 홍타이지의 권력은 미약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한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들과 연정(聯政)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촌형 아민은 홍타이지 추대에 반발하여 자신의 기(旗)를 이끌고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 홍타이지가 조선을 치러 가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아민을 임명한 것은 시사적이다. 아민에게 원정의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그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고,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아민은 실제 원정 도중 홍타이지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독단적인 행보를 보임으로써 홍타이지의 ‘기대’에 부응한 바 있다. 후금이 전쟁을 도발했던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제적 문제였다. 홍타이지의 즉위 직후 만주 지역에는 심각한 기근이 닥쳤다.‘청태종실록’에는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여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점령 지역은 늘었지만 농작에는 아직 서툴렀던 후금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명나라 상인들과 곡물 무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명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심각한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후금에 조선의 존재는 특별했다.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유일한 나라였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무역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고자 했다. 후금의 전쟁 도발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모문룡 문제’였다. 모문룡이 가도에 머무는 한, 후금의 서진(西進) 시도는 언제나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문룡의 존재 때문에 한인들이 계속 후금을 탈출하고 있었다. 모문룡이 군사적으로는 미약했지만 후금에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그 ‘가시’를 제거하여 ‘후고(後顧)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아민, 홍타이지에 증원군 긴급 요청 조선 조정은 황해도 이북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전열을 다시 정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에게 평안도 지역의 패잔병과 함경도, 강원도 등지의 병력을 모아 임진강을 방어토록 했다.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는 남한산성을 본거지로 삼아 하삼도 군사를 통괄 지휘하여 한강을 방어토록 했다. 그리고 통제사 구인후(具仁)가 거느리는 수군 병력으로써 적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도록 조처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인조가 머물고 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문제였다. 전쟁 초반의 전체적인 전황(戰況)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후금군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윤훤은 후금 측에, 조정에 품의(稟議)한 후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이 갑자기 화의를 제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점이다. 후금은 조선 침략에 약 3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청천강 이북을 점령했던 직후, 이미 홍타이지에게 사람을 보내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3만명의 병력으로는 한편으로 전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점령 지역을 방어하고 그곳의 조선 관민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은 원숭환의 위협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조선으로 쳐들어가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미 살폈듯이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이후, 후금군의 서진은 좌절되었고 오히려 영원성에 주둔하는 원숭환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 산해관과 영원의 병마와 모문룡의 병력을 동원하여 배후를 협공함으로써 조선을 원조하자는 내용이었다. ●답장 내용 놓고 설전 후금이 화의를 제의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조선 조정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양사(兩司) 관원들은 ‘평안감사 윤훤이 엄한 말로 오랑캐의 서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답장을 주겠다.’고 응답한 것을 비난하고 인조에게 신중히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이윽고 후금 측은 강홍립의 종자인 언이(彦伊) 등을 다시 윤훤에게 보내 ‘화의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을 서울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윤훤의 장계를 통해 두번째 화의 제의를 받자 인조는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서신을 받자마자 화친을 허락하면 우리가 겁을 내서 그런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흠(申欽)은 ‘명나라도 그들과 화친하려는 판에 우리만 화친을 피할 수 없다.’고 했고, 이귀는 ‘적이 평양으로 진격해 오면 사태 수습이 불가하다.’며 답서를 꾸며 강홍립의 아들 강숙 편에 부치자고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먼저 서신을 보낸 주체가 후금의 한 홍타이지가 아니라 사령관 아민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도체찰사 장만의 명의로 답하되, 무고하게 침략하여 군민들을 도륙한 허물을 따지고 ‘위협적인 맹약은 죽어도 따를 수 없으며 침략 사실을 명에 알리겠다.’는 내용을 집어넣자고 했다. 명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의견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후금 측의 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사간 윤황(尹煌) 등 삼사 신료들은 인조가 강화도로 떠나기 전부터 반정공신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황 등은 ‘전하께서 총애하는 김류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등 반정공신들은 해도(海島)로 들어가거나 산성으로 올라가고, 혹은 호위(扈衛)를 칭하거나 검찰(檢察) 직책을 맡아 안전하고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로지 힘없고 배경이 없는 장만만을 맨손으로 적진에 보냈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맨 처음 도성을 떠나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베고 인조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여하튼 강숙 등은 조정의 답서를 가지고 1월27일 후금군 진영에 도착했다. 후금군은 이미 중화(中和)까지 남하해 있었다. 답서의 핵심은 이러했다.‘조선은 명을 200년 이상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 명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조선의 답서 내용에 반발했다. 그는 ‘조선은 명의 은혜만 강조하는데 과거 후금도 조선에 커다란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고 맞받았다. 바야흐로 ‘은혜’를 둘러싼 설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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