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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병원, 인프라·교통망으로 ‘승부’

    부산 병원, 인프라·교통망으로 ‘승부’

    “더 이상 암 수술 받으러 서울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거꾸로 고속철도(KTX)를 타고 어서 부산 병원으로 오십시오.” 부산에 사는 이모(49)씨는 얼마 전 부산 기장군 동남권 원자력의학원에서 폐암 수술을 받았다. 2기 진단을 받은 그는 당초 서울의 유명 병원에서 수술받을 계획이었으나 부산 병원이 첨단 장비를 갖추고 로봇을 이용해 폐암 수술을 하는 전문센터라는 이야기를 듣고 수술을 결정했다. KTX 개통 등 교통환경이 나아지면서 지방 환자들의 서울행 【서울신문 7월 15일 자 9면〉 이 줄을 잇는 가운데 부산에서는 KTX를 역으로 이용해 서울과 수도권 등 다른 지역 환자 유치에 나섰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서울 병원 수준의 첨단 시설과 장비, 실력파 의료진을 갖춰야 한다. ●수도권 등 외부환자 비율 23.3% 26일 부산시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에 따르면 2009년 부산 지역 총진료 인원은 456만 6000명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에 울산, 경남 등 인근 도시와 수도권 등지에서 온 외부 환자 수(진료 인원)는 106만 2000명으로 전체 환자 수의 23.3%를 차지했다. 반면 서울 등 외지로 빠져나간 역외 유출 환자는 63만 9000명(14%)으로 ‘역외 유출’보다 부산의 의료기관을 찾은 환자 수가 훨씬 많았다. 또 유입 환자들은 진료비로 5974억원을 사용했으며, 외부 유출 환자들은 3579억원을 지출해 2395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서울로 환자들이 대거 몰리는 이른바 ‘빨대 효과’가 부산에서만큼은 이제 남의 얘기다. 현재 부산에는 부산대학병원 등 기존의 대형병원에 이어 양산부산대병원(2008년 10월), 동남권 원자력의학원(2010년 7월), 인제대 해운대백병원(2010년 3월)이 개원했다. 올 3월에는 해운대 지역에 한방 전문인 자생한방병원이 문을 열어 환자를 맞고 있다. 내년 6월에는 동아대병원에 심· 뇌혈관 질환 전문센터, 2013년에는 부산대병원에 외상전문센터 등이 각각 문을 열 예정이다. ●동남권 원자력의학원 호평 지난해 7월 개원한 동남권 원자력의학원은 꾸준히 환자 수가 늘고 있다. 초기 월 3000명이었던 내원객이 지난 3월부터는 75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진료 수입도 월평균 11억원에서 30억원으로 대폭 증가했다. 특히 의학원 인근에 건립될 ‘꿈의 암 치료기’인 중입자 가속기 센터가 2016년부터 본격 가동되면 외부 환자가 급격히 증가해 이 병원뿐 아니라 부산 지역 의료산업 전체 규모도 한층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의학원 관계자는 “지역 환자 역외 유출 방지는 물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경제 활성화 큰 도움 지난 3월 문을 연 해운대백병원도 개원 초기 하루 내원객이 1500여명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2000여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 병원은 로봇 수술 장비와 사이버나이프 등 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중증외상센터와 장기이식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간 이식과 절개 없이 심장을 수술하는 최소 침습 분야에 뛰어난 양산부산대병원의 외래 환자 수는 개원 초 하루 540명에서 최근 2600명으로 5배 가까이 늘었다. 김기천 보건위생과장은 “의료 서비스 산업은 높은 성장 잠재력과 일자리 창출 효과가 기대돼 향후 적극적인 육성이 필요한 산업”이라면서 “지역 병원들의 협진 체계를 구축해 고부가가치인 의료 서비스 산업의 파급 효과를 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정부, 울릉도 방문 日의원 입국금지 카드 뽑나

    정부, 울릉도 방문 日의원 입국금지 카드 뽑나

     울릉도 방문을 위해 다음달 1~4일 방한하는 일본 자민당 의원 4명에 대해 정부가 ‘입국금지 카드’도 불사하겠다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출입국관리법 등 관련 법에 따라 물리적 대응도 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26일 “국내법인 출입국관리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이익 등을 해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는 사람 등에 대해 법무부 장관이 입국을 금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입국 금지도 하나의 옵션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그 동안 울릉도 방문 자제 요청 등 외교적 대응을 해 온 만큼 일본 측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일본 의원들이 울릉도를 방문할 경우 물리적 충돌 등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어 우려되고, 양국 관계 악화 등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입국금지가 법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지만 실제 이행 여부는 관련부처 간 계속 협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조병제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일본 의원들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 울릉도를 가겠다는 것은 양국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미 의견을 전달했고, 발리에서 있었던 양국 외무장관회담에서도 이런 뜻을 전달했다.”며 “그 전제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환 외교장관은 지난 23일 마쓰모토 다케아키 일본 외무상을 만나 일본 의원들의 울릉도 방문 계획에 대해 신중히 대응해줄 것을 촉구했다. 마쓰모토 외상은 “우리 측도 입장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일본 자민당 의원들은 8월 1일 오전 도쿄를 떠나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 우리 측 국회의원 및 학계·시민단체 등과 면담을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포항을 거쳐 2일 울릉도로 들어간 뒤 3일까지 머무르며 독도박물관 시찰 등을 계획하고 있으며, 3일 오후 서울로 돌아와 4일 오후 도쿄로 떠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이기환 방재청장 깜짝 기용 반응 ‘어리둥절…열렬환호’

    떠나는 사람도, 돌아온 사람도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21일 오전 청와대의 인사 발표 직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만난 박연수(58) 전임 소방방재청장은 “지금 청장들 중에서 내가 가장 오래 했다. 원래는 지난 5월 떠나야 했으나 장마가 지나갈 때까지 유예된 것”이라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전격적으로 이뤄진 청장 교체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는 못했다. 이는 이기환 신임 청장 내정자도 마찬가지. 그는 지난 18일 사직서를 낸 뒤 산하 기관인 소방안전협회장 선거를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날 아침 고향(경북 청도)으로 내려가다 인사 발표에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전임 청장도, 신임 청장 내정자도 사전에 구체적으로 언질받지 못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이날 오후 갑작스레 치러진 청장 이임식에 참석한 소방방재청 직원들은 전임 청장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지만 신임 청장에 대한 기대감도 잊지 않았다. 한 일반직 공무원은 “우리 조직은 방재 분야도 있지만 소방 분야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소방을 잘하는 것이 본연의 업무를 더 잘해 나가는 것이라 본다.”면서 “신임 청장이 조직 내부의 혼란도 잘 융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방직 공무원은 “이렇게 갑자기 이임식을 하게 되니 가시는 분한테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새로 오신 청장님이 조직, 인사, 예산 등에서 전보다 더 낫게 하시리라 생각한다.”면서 “소방관 업무를 직접 해보고 잘 아는 분인 만큼 지금보다 현장 소방관들의 근무 여건을 잘 개선할 것으로 본다.”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 청장 내정자가 1년 10개월 동안 차장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소방직, 일반직을 가리지 않고 신뢰를 얻은 데다 조직 내부 혼란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함께 작동했기 때문이다. 일선 소방 현장의 반응은 더욱 뜨겁다. 경남의 한 소방관은 “소방직 출신 청장은 모든 소방공무원들의 염원이었다.”면서 “현장의 고충을 잘 아는 분인 만큼 열악한 소방 공무원의 처우도 상당히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 전 청장의 정책을 공개비판한 류충(대기발령 중) 전 음성소방서장<서울신문 7월 7일 자 11면>은 “이 신임 청장 내정자는 누구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줄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현재 과잉 경쟁으로 업무 비효율을 초래하고 있는 화재와의 전쟁 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실질적인 3교대 근무 정착을 비롯해 행안부로부터의 소방청 독립 등을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성국·김양진기자 psk@seoul.co.kr
  • [복지는 현장이다] 전북 완주군 삶과 복지 바꾼 ‘단체장의 의지’

    [복지는 현장이다] 전북 완주군 삶과 복지 바꾼 ‘단체장의 의지’

    중앙정부 차원에서 추진했다면 언제 내려올지 모를 정책이 지자체의 의지에 따라 곧바로 주민의 삶에 스며든다. 정부가 읍·면·동 복지 인력을 늘린 이유도 일선 현장의 유동성을 높이려는 조치다. 현장에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요인은 바로 단체장의 ‘의지’다. 최근 지자체별로 전개되고 있는 ‘풀뿌리 복지’ 현장은 단체장의 의지가 어떻게 지역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지방의 작은 지자체 사례를 통해 단체장이 어떻게 지역민의 삶과 복지를 변화시키는지 살펴보자. 차로 10여 분을 가도 보이는 것은 산과 논, 개천뿐이었다. 마주치는 사람 가운데 젊은이는 10명 중 1명에 불과해 보였다. 인구라야 고작 8만 4000여명으로, 바로 인접한 전주시 인구(64만 6000여명)의 7분의1도 안 된다. 엄연히 이곳에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도 ‘전주공장’이라고 하고, KIST분원도 ‘전주분원’이라고 한다. 외지 사람들이 여기 지명보다 전주를 더 많이 안다는 게 이유다. 그래서 전주의 ‘위성도시’라는 말까지 듣는 곳, 바로 전북 완주군이다. 그런데 이 시골 지자체의 기세가 요즘 하늘을 찌른다. 올해 예산이 5200억원이 넘는다고 자랑한다. 예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려면 전주시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인구는 7배 이상인 전주시 올해 예산은 9100여억원 정도다. 이런 변화는 민선4기 임정엽 완주군수가 부임하면서부터 나타났다. 이들의 자신감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수장 한 사람이 바뀌면서 공무원의 생각과 주민의 경제, 교육, 환경, 복지 등 모든 것이 함께 변했다는 사실이다. ●올 예산 5298억 5년새 2배늘어 “정부 공모사업에 응모하러 서울에 가다가 인근 지자체 공무원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 분이 저를 보더니 ‘공모사업 된다고 나한테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수 때문에 힘들겠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들으면서 같은 ‘공무원인데 이렇게 생각이 다를 수 있구나.’ 싶더군요. 단언컨대 공무원이 된 후 가장 신나게 일하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지난 6일 완주군청에서 만난 지역일자리담당 유왕기 주무관의 말이다. 그는 올해 5건의 정부 공모사업을 신청해 3건을 확보했다. 완주군은 민선5기 1년 동안 공모사업과 신규 국가예산 사업 등을 신청해 모두 171개 사업 1997억원을 확보했다. 군 예산의 절반 가까이가 정부부처를 상대로 ‘세일즈’를 한 결과에서 나오는 셈이다. 군이 공모사업에 뛰어든 것은 임 군수가 취임한 민선 4기때부터다. 유 주무관은 “실패해도 좋으니 도전하라.” 임 군수의 말에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임 군수는 2006년 취임과 함께 군청을 확 바꿨다. 군의원을 통해 인사청탁을 한 직원은 ‘보기 좋게’ 한직으로 물러났다. 신임 군수에게 결재서류를 건네며 ‘봉투’를 슬쩍 넣어 준 직원에게는 “나를 거지로 아느냐.”는 불호령을 내렸다. ‘두뇌’로 통하는 직원은 매년 1명씩 “견문을 넓히라.”며 시민단체에 파견근무를 보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지역협력사업비를 연간 5000만원씩 주는 조건으로 농협이 관례적으로 맡아오던 군 금고 선정방식을 공개입찰로 바꿨다. 이에 반발한 농협 조합장들이 연일 시위를 벌였지만 임 군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전북은행이 4년간 협력사업비 22억원을 주는 조건으로 군 금고로 선정됐다. 완주군이 생기고 군 금고가 바뀐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지난해 군 금고 공개입찰에서는 다시 농협이 선정됐다. 협력사업비 25억원을 주는 조건이었다. 그는 또 청사가 비좁아 별관을 지어야 한다는 직원의 말에 청사를 빌려쓰던 시민사회단체들을 청사 밖으로 내보냈다. 완주 상하수도사업소 건물을 쓰던 선거관리위원회도 “이 건물은 군민을 위해 쓸 공간”이라며 나가게 했다. “사회단체와 선관위의 심기를 건드리면 재선도 못한다.”는 주변의 조언도 듣지 않았다. 임 군수는 정부와도 싸웠다. 공공기관은 콘크리트로만 지어야 한다는 규정에도 그는 나무로 된 ‘목조보건소’를 짓겠다며 보건복지부와 2년 동안 밀고 당겼다. 전재희 당시 복지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담당 공무원을 서울로 보내 중앙부처 공무원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지난해 2월 개소한 전국 최초의 목조보건소 ‘동상면 보건지소’다. 임 군수가 취임한 2006년 예산은 2440억원이었지만 올해는 5298억원으로 217% 증가했다. 전북도내 군 단위 지자체 가운데 가장 많은 예산이다. 임 군수는 필요하지 않은 예산은 과감히 삭감했다. 취임 이후 소싸움축제, 딸기축제, 대둔산축제 등 지역축제를 모두 없애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업과 유사했던 저소득층 보호비 예산 등도 없앴다. 축제 보조금을 삭감하자 임 군수에게 소똥을 뿌리는 주민도 있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또 완주산업단지와 전북과학단지에 기업을 활발히 유치했다. 2006년부터 올해 6월말 현재까지 유치한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솔라월드코리아(주) 등 174개로 투자액은 1조 7154억원 규모다. 지난해 지방세는 511억원으로 2006년에 비해 300억원가량이 늘었다. 오경택 완주군 지역경제과장은 “일부 기업은 3일만에 인허가를 내줄 정도로 기업 유치에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말했다. ●“복지시설 늘린다고 능사 아냐” 임 군수는 경쟁적으로 늘어나던 요양기관 등 노인복지시설 증축을 중단시켰다. 군내 노인복지시설은 16개로 이미 충분하고, 시설 신축은 업자들만 이득을 보는 공급자 중심의 복지라는 게 이유였다. 대신 재가노인복지시설을 9개로 늘렸다. 재가시설은 집에 있는 노인에게 방문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무실 하나만 있으면 운영할 수 있다. 또 저소득층 대상 무료틀니, 보훈수당(3만원) 등을 지원하고 부식비를 추가해 경로당 운영비도 2배로 늘렸다. 이 같은 복지확대는 예산이 5년전 보다 2배나 늘었고 세출방향도 바꿨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 과장은 “현대차가 낸 세금을 경로당 난방비, 학교급식비 등에 쓴다고 보면 된다.”고 비유했다. 물론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복지가 늘어난다고 해도 농촌이라는 완주군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일자리, 고령화 문제 등 완주군이 당면한 문제는 여느 농촌 지자체와 다르지 않다. 완주군이 찾은 해결책은 바로 지역경제공동체였다. 임 군수는 2007년 읍·면·동의 마을지도자들을 모아 일본 연수를 보냈다. 선진국에서 어떻게 농촌경제를 살리는지 직접 보라는 뜻이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마을기업인 경천 원용복 두부마을, 장애인일자리기업인 떡메마을과 희망발전소, 노인일자리사업인 두레농장 등이 민선4기 때 만들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민선5기 주요 과제로 지역경제공동체인 ‘마을회사’를 100개까지 육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해 7월 농촌활력과를 새로 만들고 기획, 예산 업무를 맡던 핵심인력에 업무를 맡겼다. 실례로 지역민들이 생산한 농식품을 포장 형태로 주1회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꾸러미 사업’은 월 매출액이 1억 2000만원으로, 시작한 지 10개월 만에 본궤도에 올랐다. 꾸러미사업은 지난 3월 이명박 대통령 주재 정부고용정책회의에서 지자체 사업으로는 유일하게 회의 의제로 채택돼 보고되기도 했다. 정회정 완주군 기획담당 계장은 “공모사업이 뭔지도 모르고, 중앙정부에 다녀오라면 겁부터 먹던 직원들이 달라졌다.”면서 “복지와 경제성장을 모두 할 수 있다는 무형의 자신감은 민선 4기와 5기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완주 안석기자 ccto@seoul.co.kr ■ 도움 받은 책 바보군수의 희망보고서(권지희/푸른바다)
  • 장관들의 이유있는 ‘근무지 이탈’

    장관들의 이유있는 ‘근무지 이탈’

    산업계를 책임지는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과 교육을 담당하는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잠시 역할을 바꾸는 이색 방문 행사를 가졌다. 수요 창출 기관인 산업현장과 인력 공급 기관인 학교 간의 산학협력을 돈독히 해야 한다는 의견일치에 따른 것이다. 최 장관은 19일 서울 일원동 서울로봇고를 찾아 교사들의 직업교육 애로사항과 학생들의 취업·진학 고민 등을 주제로 대화했다. 최 장관은 “고교 졸업생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취업 후 얼마든지 성장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하며 정부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최 장관은 구체적으로 민간기업과의 대화를 통해 특성화고 출신을 채용하도록 권고하고, 사회 전반에 이공계 우대 풍토를 조성하는 방안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서울로봇고가 오는 8월 중 교과부에 마이스터고 지정 신청을 하는 것과 관련해 “졸업생들의 취업보장, 로봇마이스터고 교과 편성, 산학협력 커리큘럼 준비 등과 관련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시간 이 장관은 경기 안산시 반월 시화공단의 중소기업을 찾았다. 이 장관은 중소기업 현장 근로자, 기업인 등과 만난 자리에서 산업 현장의 인력난에 관한 의견과 애로사항을 들었다. 이 장관은 “산학협력을 통해 지역대학과 지역산업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교과부와 지경부가 협력해 기업에서 풍부한 현장 경험을 쌓고 퇴직하신 분들을 대학의 ‘산학협력 중점교수’로 채용해 대학 교육을 혁신하는 데 중점적으로 투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상도·김효섭기자 sdoh@seoul.co.kr
  • [세종시 어떻게 돼가나] 가상 시나리오로 본 ‘2013년 7월’

    [세종시 어떻게 돼가나] 가상 시나리오로 본 ‘2013년 7월’

    2012년 말부터 세종시 입주가 본격화된다. 총리실에 이어 국토해양부와 환경부가 첫 이삿짐을 꾸린다. 아직 1년 6개월이 남아 있지만 이전 부처 공무원들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녀들의 학업문제를 비롯, 편의시설 마련 등 세종시가 행복도시로 자리를 잡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예상이다. 서울신문은 앞으로 2년 뒤 입주가 진행된 시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시나리오로 엮어 봤다.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에 대한 사전 대비책을 마련해 보자는 취지다. 2013년 7월. 부처 이전이 한창 진행 중인 세종시는 건물만 완성된 채 아직도 주변 조성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연말 18대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세종시 이전문제가 뜨거운 정치적 이슈로 다시 부각되긴 했지만, 전 정부 때 부처이전 계획대로 이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먼저 이사해 자리를 잡은 국토부, 환경부, 농림수산식품부 역시 어수선하긴 마찬가지다. 겨우 각 실·국이 배치도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공무원과 민원인들 모두 불편함을 호소한다. 우선 지리적으로 접근이 쉽지 않은 데다, 주변에 이용할 만한 교통과 교육 등 생활 편의시설도 태부족해서다. ●공무원 대부분 수도권서 출퇴근 새로운 정부가 출범되고 각 부처 수장들이 바뀐 지도 얼마 되지 않아 회의가 잦아졌다. 무엇보다 세종시로 부처가 옮겨가면서 소속기관이나 산하기관장들은 간부회의 소집 때면 전날부터 긴장해야 된다.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입주 부처 직원들은 아직도 생경한 세종시 생활에 고충을 호소한다. 대부분 직원은 수도권에서 통근버스를 이용해 출퇴근하면서 여가시간 활용은 꿈도 꾸지 못한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각 부처 수장들의 대면회의가 잦다. 정부는 행정부처 이원화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종 회의는 영상회의로 대처한다는 복안이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행정력 낭비를 줄이기 위해 당초 국무회의를 비롯, 각종 부처협의는 가능한한 대면회의를 줄이고 영상회의로 진행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말뿐 영상회의가 부자연스러워 꺼린다. 따라서 세종시 입주부처 수장들은 서울과 세종시를 오가느라 길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일부 장관들은 서울에 올라오는 김에 여러 가지 일정을 몰아서 처리한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귀찮고 업무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이런 과정에서 장관의 허락을 받기 위한 결재 라인에 부하가 많이 걸리기도 한다. 어떤 때는 장관 대면조차 어려워 결재서류가 일주일씩 밀리기도 한다. ●화상회의 정착안돼 행정력 낭비 장관들의 잦은 청와대 회의 참석으로 세종시 이전 부처들은 장관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수도권 산하기관 사무실을 이용하고 있지만 이동거리 등이 만만치 않아 불편함을 호소한다. 부처 공무원들도 예산과 인원조정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사흘이 멀다 하고 서울로 향한다. 일부 공무원들은 서울에 올라온 김에 핑계를 대고 수도권 집으로 퇴근 후, 다음 날 아침에 내려간다. 행정개혁시민연대 서영복 사무총장은 “세종시 이전초기 부처 간 협조 등 업무 기틀을 잡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면서 “사전에 예행연습 등을 통해 낭비요인을 최소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와대를 비롯, 예산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등이 앉아서 다른 부처 공무원들을 관행처럼 오고가게 해서는 행정 효율을 높일 수 없다.”며 “부처나 기관 간 낡은 틀을 깨고 효율적인 ‘실천 매뉴얼’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공동주택 입주 공무원 위화감 세종시로 집 전체를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다 결국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어느 주무관. 입주한 아파트에는 여러 부처 다양한 직급의 공무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갈수록 아내의 불평이 잦다고 한다. 이유는 이웃들과 공동생활에서 남편의 직급에 따라 식구들도 서열화되는 것 같아 불편하다는 것이다. 직원들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세종시에는 노선별 셔틀버스가 운행 중이다. 하지만 세종시로 이주해 정착한 공무원들이 적다 보니 셔틀버스는 항상 붐빈다. 출퇴근하는 공무원 대부분은 자녀들의 교육문제나 부모봉양 등을 이유로 이사를 하지 않고, 본인들이 불편을 감수하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산이나 서울외곽 지역에 사는 공무원들은 새벽 4시부터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퇴근시간이 되면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특히 금요일 오후가 되면 서울로 올라오는 차량 때문에 세종시 주변과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돼 버린다. 서 사무총장은 “독일의 경우 본과 베를린으로 양분된 수도 통합을 20년 만에 다시 추진하고 있다.”면서 “2만명이 넘는 공무원이 동서로 500km를 왕복하는 데 따른 인적·경제적 낭비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화상회의 등으로 연간 147억원을 소모해 불필요한 행정력 낭비도 줄이려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세종시 이전도 이런 사례들을 거울삼아 부작용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58개띠, 세상을 바꾼다] 개띠 4인방 “우린 베이비 부머 세대의 허리”

    [58개띠, 세상을 바꾼다] 개띠 4인방 “우린 베이비 부머 세대의 허리”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듯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받은 전례가 없다. 전쟁이 끝난 뒤 매년 60만~70만을 헤아리던 신생아 울음이 갑자기 80만의 합창으로 증폭됐다. 이렇게 1958년에 태어난 이 땅의 ‘개띠’들은 초등학교 내내 콩나물 교실과 2부제 수업에 시달려야 했고 중학교와 고교 입시제도가 바뀌는 행운(?)을 누렸다. 권력자의 아들 덕을 봤다는 얘기가 평생 따라붙었다. 1977년을 전후해 최고의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간 이들은 유신과 휴교령에 맞서야 했고, 산업화 진군에 부응해 울산과 포항·마산 등으로 몰려간 이들은 막강한 숫자와 특유의 응집력으로 다른 연령집단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았다. 몇몇의 비아냥에서 시작된 별칭은 스스로 몸을 굴려 영향력을 키웠고 이제 그것이 ‘집단 운명’을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군대에선 운동권으로 ‘찍혀 박박 기어야’ 했고, 1987년 6·10 항쟁에 넥타이 매고 머리띠 두르고 나서 민주화와 민주노조 운동에 함께 나섰던 이들. 이제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 잡나 싶을 즈음, IMF 구제금융 사태로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했다. 어느새 53년, 이제 어쩔 수 없이 제2 또는 제3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해 기준 712만명으로 추산된 베이비 부머 세대(1955~1963년생)의 ‘허리’인 이들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감히 질문을 던져 본다. 4인의 속내도 들어봤다. 앞선 베이비 부머와도 차별되는 ‘신노년’의 도래가 가시권에 들어왔는데 정부나 사회는 얼마나 대비하고 있는지도 짚어본다. ■ ‘우리가 맏형’ 임영빈 바른몸 상무 서울 청량리에서 버스를 운전하던 이북 출신 아버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미군이 나눠준 빵을 뜯어먹고 자란 우리에겐 가난과 인내가 ‘DNA’처럼 새겨져 있다. 중학교 진학할 실력이 안 됐는데 박지만 덕분에 추첨제(서울지역 첫 시행은 1969년)로 바뀌어 어렵지 않게 진학했다. 집안이 어려운 데다 동생들 뒷바라지도 해야 할 것 같아 고교 때부터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지.’ 생각하고 컸다. 고교 졸업 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취직, 당시 삼성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았다. 술 사 먹고, 동생들 학비 보태라고 집에 돈을 보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곳에서 병역을 해결하면서 지방 대학에 다녔다. 전두환 정권 들어 인력을 절반으로 줄이라는 압력이 거세지자 그만두고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컴퓨터 설계 장비 등을 주로 취급했는데, 남들은 전에 일하던 회사 제품과 경쟁하는 제품을 거래해 재미를 보곤 했다.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 세대의 특징이기도 한데 남한테 폐 끼치지 않겠다는 의식이 유달랐다. 그렇게 여러 무역업체를 운영해봤다. 후배를 믿고 사업을 벌였다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현재는 의료 관련 비즈니스를 새로 준비하고 있다. 오랫동안 구축한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큰 수익은 못 내도 힘들지 않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하기 때문에 난 괜찮은 편이다. 항상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와 도전을 하면서 살아왔다. 남은 24년 정도를 ‘작게 꾸준히’ 수익을 내면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한 우물만을 파온 동년배들이 걱정된다. 이들을 위해서 정부와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임금피크제 등 정부 정책이 피부에 와 닿는 뭔가를 전해주지 못하더라. 고교 동창들 모두 부모 봉양과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부양까지 책임져야 하는 ‘낀 세대’라고 입을 모은다. 일부는 자녀가 노후를 돌보지 않겠느냐는 미련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런 태도에 대해 구박하는 분위기가 대세다. 유난 떤다고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변화를 선도했다. 우리가 뭉쳐 일자리와 제2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다면 그 열매는 우리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베이비부머 세대의 동생들, 나아가 우리 아이들까지 혜택을 본다. ■ ‘개띠 공돌이’ 김형만 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 경남 마산 바닷가 마을에서 5남3녀의 일곱째로 태어나 열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강냉이죽, 이듬해 빵을 학교에서 나눠줬다. 우리만 이런 추억이 유달리 강렬한 건 이전 세대는 아예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골인데도 한 반에 65~70명이나 됐는데 절반만 빵을 먹을 수 있었다. 겨울엔 난로에 들어갈 솔방울 주우러 다녔으니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었나. 1974년에 고입 시험이 추첨제로 바뀌었지만 마산은 시험을 치렀는데 떨어졌다. 2차로 공고에 진학했는데 학생들이 가방에 끌, 대패, 망치 등을 넣어다녔다. 흉악했는데도 의리가 있었다. 공부 잘하던 애들은 시험 보면 정답을 알려주곤 했다. 전국의 공고 학생들이 졸업하면 취업할 데는 널려 있었다. 울산, 포항에 전국의 ‘공돌이’들이 모여들었다. 58년 개띠는 그때 나온 얘기 아닌가 한다. 마산수출자유지역엔 여성 근로자가 엄청 몰리면서 연애 문화도 급변했다. 공고를 졸업한 뒤 포철에 입사해 쇳물 만드는 일을 8년 정도 했다. 장학금 준다고 해 창원대학에 진학한 뒤 1989년부터 서강대 대학원에서 또래 교수들 밑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까지 땄다. 1994년에야 사회로 나와 올해로 사회생활 17년째다. 그러니 뭔들 준비가 돼 있겠나. 첫아이가 이제 고2다. 역사와 세월에 맡기고 열심히 사는 것뿐이다. 직장에도 또래가 4명 있는데 잘 뭉친다. (1957년생) 닭띠들도 꼼짝 못한다. 베이비 부머 중에서도 늘 변화의 중심이었다. 숫자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제도가 바뀌지 않았나 싶은데 이런 때 우연히 첫 주자(중학 추첨제가 전국으로 확대된 건 1971년)였을 뿐이다. 우리 뒷세대만 해도 자기 생각에 빠지곤 했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던 것 같다. 내일 어떻게 될지라도 오늘 끝장을 본다, 뭐 이런 거. 조국이나 집단에 대한 애착에서도 그렇다. 사회 구조가 몇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바뀌지 않을 때 방향성을 찾아가는 힘이 뭔지 궁금하다. 그때 개띠란 게 한몫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미래가 확실해서 간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좌절하지도 않고 이겨낼 수 있다고 그냥 생각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그런 게 있다. 분명히 다른 띠에 견줘 또래끼리 얘기가 잘 통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고 58년 개띠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를 할 것도 없다. 과거의 표상일 뿐이지, 하지만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띠를 제쳐두고 개띠만 중심에 놓고 볼 때는 말이 안 되는 구석이 있다. ■ ‘해외에서 본 개띠’ 한주호 GE 헬스케어 전무 일본과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초등학교 마친 뒤 아버지 직장 때문에 일본에 갔다. 미군이 배급하던 빵의 추억은 공유하고 있다. 박지만 때문에 중학 입시가 바뀌었다는 소식에 ‘그 친구가 뭔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일본에서 고교 2년까지 다녔는데 어느 날, 세살 위 형을 제치고 소집 영장이 나와 귀국했다. 병무청은 사무 착오라 했다. 학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 고교를 다시 들어가 두 살 아래 동생들과 다녔다. 1979년 입대해 전북 정읍에서 근무하면서 광주항쟁을 지켜 봤다. 이런 비극은 우리 세대에 끝내고 50~100년 뒤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면 제대로 민주주의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버드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인터넷이 없어 대학 주소 알아내는 데만 석달 걸려 5년 동안 도전해 입학 허가를 얻었다. 들것에 실려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 우등생 졸업했다. 환경미화원 일도 했고 미국 명문가 자제들이 얼마나 겸손하고 겉멋 부리지 않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는지 보고 감명받았다. 코넬대학 로스쿨에 진학해 94년 미국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강단에 서겠다는 꿈은 집안 사정 탓에 포기했다. 한국에 돌아와 법무법인 광장에 들어가 일하다 2005년 10월에 지금의 직장으로 옮겼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힘든 시절을 견뎌내며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뤘다. 그리고 이전 세대보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컴퓨터와 영어를 할 수 있어 정치와 사회·문화적으로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점, 앞으로 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양극화, 부패, ‘SKY’란 표현으로 상징되는 1등주의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다. 특정한 해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정부나 사회에 요구해 기회를 갖자는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그로 인해 과도한 ‘파워’를 갖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직장 그만두는 게 은퇴가 될 수 없다. 지금도 나는 미국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의 면접을 본 뒤 따로 시간을 내 그 친구들에게 나의 경험을 들려 주고 있다. 일종의 사회 환원이라고 생각한다. 정년 연장이나 임금피크제, 재취업 등이 목적이 될 수도 없다고 본다. 많은 이들이 그런 고민과 기대를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가정을 꾸리고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 이 사회, 자녀, 후손에게 뭘 넘겨줄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탤런트를 사회에 환원하고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제도와 정책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여자 58개띠’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 초등학교 3학년까지 수원에서 다니다 서울로 와 부모와 따로 떨어져 학교를 다녔다. ‘마누라는 없어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던 구로동에 인구가 엄청 유입되면서 학교가 둘로 나뉘기도 했다. 고교 진학할 때 재단이 새로 생기면서 담임 교사들이 몇 등부터 몇 등까지는 어느 학교로, 그 아래 점수는 다른 학교로 이런 식으로 배정했고 장학금 몇푼으로 유혹했다. 좋은 학교 간 아이들은 좋은 대학 가는데, 다른 쪽에선 돌멩이 주워 학교 건물 지었다. 그게 싫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않았다. 한 번도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고 우연히 시작한 영화 칼럼과 책 쓰는 일이 평생 일이 됐다. 하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니까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애국하는 길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 정도로 내가 단순하다.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으니 누가 결혼하겠는가. 지금 아이들 취업도 못해 낑낑대는데 정부 등에선 많이 낳아야 한단다.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 때는 성실하게만 일하면 직장 구해 먹고살 수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잖은가. 중학교가 남녀 공학이라 동창들이 많이 모였는데 IMF 외환위기로 인해 고꾸라진 친구들이 많았다. 동창회 시작할 때만 해도 ‘아이들 신경 쓰지 말고 부부가 시골 가서 살자.’고 다짐했는데 요즘은 그런 얘기가 쑥 들어갔다. IMF 이후 요식업을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모두 힘들어하고 미래를 불안해한다. 여자친구들에게 이제 한숨 돌렸으니 시민단체라도 가입해 활동하자고 권하면 젊은 시절, 젖먹이 떼놓고 직장 다녔던 죄의식으로 “손자들이라도 봐야지.” 하더라. 그런 친구들 은근히 많다. 사회에 봉사할 때가 됐는데 손자 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소모되는 삶을 사는 것 같아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장학금 주는 성공회대 NGO 여성학 대학원에서 공부하느라 고생하고 있다. 중년의 우울을 건강하게 극복하는 방법은 일하는 것과 공부밖에 없다고 하더라. 폴란드에서 공공기관 근무자들이 대부분 머리 희끗한 분들이어서 놀랐다. 왜 우리는 어르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젊은이가 하는 등 거꾸로 돼 있는가 많이 생각했다. 거리 청소 같은 건 젊은이들이 하고 체력이 덜 소모되는 일은 어르신들이 하는 게 맞지 않나. 또 경제가 이만큼 됐으니 정부나 사회도 문화를 가꾸는 쪽으로 우리 ‘58년 개띠’들을 유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정리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멈추고… 찜통되고… ‘고장鐵’ KTX

    멈추고… 찜통되고… ‘고장鐵’ KTX

    KTX 열차 사고가 하루 동안 두 차례나 일어났다. 17일 오전 9시 40분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TX 120호 열차가 오전 11시쯤 경북 김천 황악터널 안에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결함으로 멈추었다. 사고가 나자 코레일은 긴급 복구반을 투입해 모터를 고친 뒤 1시간여 만인 낮 12시 3분 운행을 재개했다. 재운행 때까지 터널 안의 상행선이 막혀 하행선만을 이용함에 따라 후속 열차 운행도 1시간 이상 지연됐다. 코레일은 “긴급 복구반을 투입해 고장 난 부분을 고쳤다.”면서 “해당 열차는 서울역까지 운행을 마쳤고, 현재 차량기지에 입고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황악터널은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을 잇는 길이 9.975㎞ 구간으로 KTX 열차가 지나는 터널 가운데 부산 금정터널(20.3㎞)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이날 사고로 승객 400여명은 터널 안에서 정차와 함께 차량 전원까지 끊기면서 1시간 동안 찜통 더위와 공포에 떨었다. 승객들은 “모터에 이상이 생겨 열차가 정지했다는 안내 방송만 나왔을 뿐 후속 대책 없이 1시간 넘게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며 코레일 측에 항의했다. 승객들은 또 동대구역에서 10분가량 늦게 출발하면서도 사과 안내 방송조차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7호 객실에서는 50대 남성이 “가슴이 답답하다.”며 구조를 요청, 119구조대가 출동했으나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승객 100여명은 오후 1시 30분쯤 사고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대합실 내 여행센터 앞에 몰려가 환불을 요구하는 등 거세게 항의했다. 친구들과 함께 부산을 방문했다 돌아오던 이병찬(35)씨는 “승객 중에는 입원해야 할 부모를 모시고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다.”며 “코레일은 장시간 터널에 갇혀 있느라 겪은 정신적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성토했다. 이씨는 이어 “열차에서 내릴 때도 코레일 책임자 중에 나와서 사과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우리 원칙이 이러니 받아들여라’ 하는 태도인 것 같아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한 중년여성은 “환불도 필요없다.”면서 “심장질환을 앓는데 숨 막혀 죽을 뻔했다.”고 가슴을 쳤다. 분노한 일부 승객들은 코레일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코레일 관계자는 “승무원 인원이 적어 응급 조치를 하다 보면 승객 개개인을 다 챙겨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정신적 충격까지 모두 고려해서 보상하기 어려워 지연 시간에 따라 규정대로 보상을 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이날 오후 1시 45분쯤에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가던 KTX 252호 열차가 부산역을 출발한 직후부터 냉방 장치가 고장나 승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승객들은 대전역에 이르러서야 비상운행 열차로 갈아탔다. 한 승객은 “30도가 넘는 폭염에도 냉방 장치가 전혀 가동되지 않아 힘들고 짜증이 났다.”며 “올 들어 KTX 열차의 사고와 고장 소식이 끊이지 않지만 코레일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박성국·김진아기자 psk@seoul.co.kr
  • 病나면 서울로… 病나는 지방병원

    病나면 서울로… 病나는 지방병원

    지방 환자들이 서울로, 서울로 빠져나가고 있다. KTX 개통 등 교통환경이 나아지면서 서울행이 줄을 잇고 있다. 환자들이 달아나면서 지방 병원의 경영난은 가중되고 있다. 인천 연수구 동춘동에 사는 최모(57)씨는 올해 초 인천 K병원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은 서울 S병원에서 했다. 인천은 대학병원이 2개나 있어 의료환경이 괜찮은 편이지만, 주민들은 좀 큰병이다 싶으면 서울로 간다. 완치에 대한 기대감과 정신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갑상선 종양제거 수술을 받은 제주 주민 임모(46)씨는 “제주의 의료진이 신뢰를 주지 못했다.”면서 “제주에서는 당장 수술이 가능했지만 서울에서 수술 순서를 한참 기다렸다가 수술을 받고 내려왔다.”고 말했다. 황모(14)군은 제주지역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등 3곳에서 정계정맥류 진단을 받았지만 병원별로 “당장 수술해야 한다.” “필요없다.”는 상반된 진단 결과가 나오자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진료를 받았다. 제주지역 의료계 관계자는 “의료 장비나 시설은 수도권 병원에 절대 뒤지지 않는데, 환자들이 막연하게 의료진의 수준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서울에서는 수술 순서를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지만 지방 환자들은 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공무원 김모(42)씨는 2009년 11월 청주의 한 병원에서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고민 끝에 서울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진단도, 수술도 간단치 않았다. 강남의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난해 1월에야 진단을 받았고, 수술도 5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도 6개월마다 검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야 하지만 김씨는 “검사받는 날은 하루 휴가를 내고 올라가지만 서울에서 수술받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이 안 되면 수도권 병원이라도 찾고 있다. 충북 음성의 서모(60·여)씨는 지난달 5일 충주 대학병원에서 폐색전증 진단을 받은 뒤 서울 아산병원으로 올라왔으나 병실이 없자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했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KTX가 개통되자 더 많은 지방 환자들이 서울로 더 빠져나가고 있다.”면서 “대구 등 지방 병원들은 자치단체와 손잡고 해외환자 유치 등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열악하다.”고 말했다. 전국종합·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규모 다를뿐 의료 질 차이 없어… 응급실 대기 짧고 의료비도 절반”

    “규모 다를뿐 의료 질 차이 없어… 응급실 대기 짧고 의료비도 절반”

    박창일(64) 건양대의료원장은 국내 재활의학의 최고 명의로 꼽힌다. 연세대 세브란스의료원장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인기가수 클론의 강원래를 다시 무대 위에 서게 했다. 지난 3월 대전 건양대병원으로 옮긴 그는 14일 “모든 게 서울에 집중되면서 인식만 그럴 뿐이지, 서울과 지방 병원 사이에 의료의 질은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왜 지방 병원으로 왔나. -20여년 간 병원경영을 해 오면서 세브란스병원을 발전시켰다고 자부한다. 이 경험을 잘 살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교수 정년이 1년 남았고, 서울에서도 정년이 없는 병원장으로 오라는 곳이 많았지만 건양대병원이 발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김희수 건양대 총장과 뜻이 맞았다. 건양대병원은 설립 11년밖에 안 돼 행정시스템이 덜 여물었다. 그래서 하나하나 기반을 세워나가고 있다. 할 일이 많은 곳이고, 이곳 생활에 만족한다. →서울지역 병원과 많이 다르지 않나. -규모의 차이다. 수도권 대학병원은 대부분 1500~2000병상이지만 대전은 1000병상 수준이다. 서울은 응급실 바닥에 7~8시간씩 누워 기다릴 만큼 혼잡하다. 그러니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여기는 여유롭다. 노인과 시골 환자들이 많다 보니 순박한 점도 기분을 좋게 한다. →지방 병원은 서울로 환자들이 모두 달아난다고 난리다. -행정 등 모든 분야가 서울에 집중되다 보니 의료까지 그렇다. 하지만 서울이나 대전이나 진료에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지방은 의료비가 서울의 절반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예컨대 자기공명영상(MRI)은 양쪽 다 있지만 2대냐, 4대냐 차이일 뿐이다. 환자들이 그걸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의료진 수준은 어떤가. -의사 한 명이 100명을 보느냐 50명을 보느냐의 차이일 뿐 실력차는 거의 없다. 전문의 진료 분야에서도 서울에 100개가 있다면 여기는 80개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80개 분야에서의 질은 큰 차이가 없다. →어느 대학 출신인지도 영향을 미치지 않나. -서울이나 지방이나 전국 1% 안팎의 학생이 의대에 들어간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의대를 모두 채우고 나서 서울대 공대에 간다는 말이 있지 않나. 수능시험 한두 문제 차이로 실력차가 나지 않는다. 지방의 우수 학생이 오히려 집 근처 의대에 가기도 한다. 지난해 전국 42개 의과대학 중 건양대가 평균 입학점수 3위를 차지했다. 서울대, 연세대와 평균 1~2점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의대 교육과정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지방 병원에는 이른바 ‘스타 의사’가 많지 않다. -스타 의사라는 것은 실력도 있지만 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았다는 것 아닌가. 우리도 자연스럽게 스타 의사가 나올 것이다. →스타 의사인데도 직접 진료를 한다고 들었다. -내 자랑이지만 재활의학 분야에서 명의 10명 중 1위로 뽑혔다. EBS 프로그램 ‘명의’에도 나왔고 언론도 많이 탔다. 그런데 이곳에서 처음 진료하는 날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웃음). 서울에서는 환자들이 6~7개월 기다려야 했는데, 참 당황스러웠다. 이후 소문이 났는지 논산 등지는 물론 부산과 서울에서도 찾아온다. 부산 환자에게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대전에 사는 친지들이 알려줬다고 하더라. 지금은 3~4개월만 기다리면 된다. →지방병원에서 일하며 보람을 찾는다면. -서울과 부산에서 환자들이 역류해 오고 있지 않나. 지방 병원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느꼈다. 노인들이 “서울까지 가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가까운 곳에서 진료받을 수 있어 좋다.’”고 할 때 힘이 솟는다. 건양대병원이 지방 환자의 서울 엑소더스를 막는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 →어려움은 무엇인가. -서울에 젊은 의료진이 집중돼 데려오기 어려운 점이다. 좋은 의료진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여러가지 복지 수준을 높이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지방병원이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유능한 의료진, 첨단장비, 친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지방병원은 행정시스템이 미흡한 게 문제다. 여러 부서의 업무 분장이 세분화되면 유기적으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다. 우리 병원 응급실의 평균 대기시간이 1.1시간으로 전국 최고 수준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글 사진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길섶에서] 어머니의 편지/허남주 특임논설위원

    또 어머니의 편지가 왔다. 여든을 넘기신 몇해 전부터 뜸하던 편지가 요즘 들어 잦다. 우리를 모두 서울로 보낸 후 어머니는 일기 쓰듯 편지를 쓰셨다. 화단의 꽃 이야기에서부터 아버지의 점심메뉴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셨다. 늘 마무리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잘될 것”이라는 당신의 소망을 담은 격려였다. 편지는 손자 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조카들은 편지 쓰는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했다. “아니, 왜 이렇게 틀린 글씨가 많아?” 오자를 보고 한마디 하면 “고모, 할머니 학교 다닐 때와 철자법이 달라졌잖아!” 흉보는 고모에게 눈까지 흘겨가며 조카들은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눈이 좋지 않으신 탓에 편지의 글씨는 커졌고, 한두 문장으로 끝나 버린다. 서울로 이사하신 후, 어머니의 편지를 받으면 미안함이 더 커진다. 어머니는 절대로 전화를 걸지 않으신다. 한창 일하는 딸에게 방해가 될까봐. 어머니의 휴대전화는 수신전용이다. 어머니의 편지는 짧지만 길고, 깊다. 전화 답이라도 자주 해야겠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상암 ~ 파주 20분에 OK

    상암 ~ 파주 20분에 OK

    경기 파주신도시와 서울 상암동을 승용차로 20분 만에 오갈 수 있는 제2자유로가 개통됐다. 2007년 12월 첫삽을 뜬 지 3년 6개월여 만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13일 오후 경기 고양시 대화동 법곶IC에서 제2자유로 준공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제2자유로는 총연장 22.69㎞, 폭 31~34m의 왕복 6차로 도로로 지난해 7월 부분 개통, 올 1월 전면 개통, 이날 정식 준공식을 가졌다. 파주운정택지개발지구 및 고양국제전시장 광역교통 개선 대책의 하나로 개통된 제2자유로는 총 공사비 1조 4792억원이 투입됐다. 진출입 교차로는 총 10곳(평면 2개, 입체 8개)으로 구룡교차로부터 덕은교차로~현천IC~강매IC~능곡IC~신평IC~한류월드IC~법곶IC~장산가좌IC~송산IC가 있다. 이 중 법곶IC와 강매IC는 기존 자유로와 연결이 가능해 파주신도시에서 자유로를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인천국제공항, 강변북로 등 서울로 직접 접근이 가능하다. 특히 대중교통 우선의 버스전용차로제(BRT)가 계획됐고 지능형 도로정보시스템(ITS), 중앙녹지대 등이 적용돼 최첨단 친환경도로로 평가받고 있다. LH는 제2자유로 개통으로 파주신도시에서 서울 상암동까지 20분 정도 소요(규정속도 80㎞ 주행시)돼 기존 자유로보다 거리상 10㎞정도, 시간상 20분 정도 단축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제2자유로를 이용, 파주신도시와 서울을 잇는 수도권 광역급행버스가 도입돼 하루 65회 운행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노선이 배정될 예정이어서 그동안 파주신도시 입주민 등이 겪었던 출·퇴근 불편이 상당 부분 해소될 전망이다. 또 고양 국제전시장(킨텍스), 파주 LCD산업단지, 문산 및 월롱첨단산업단지, 문발지방산업단지 등 경기 북부지역에 몰려 있는 산업단지들의 물류 수송비용도 크게 절약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조승우 “10년 전 박칼린 선생님이 ‘조로役’ 잘 어울릴 거라 하셨는데…실제론 너무 정의감 넘쳐 문제죠”

    조승우 “10년 전 박칼린 선생님이 ‘조로役’ 잘 어울릴 거라 하셨는데…실제론 너무 정의감 넘쳐 문제죠”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이하 ‘지킬’)는 배우 조승우를 빼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흥행에 있어 그의 힘이 컸다. 2004년 초연 때부터 그는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 2010년 군 제대 이후 그가 선택한 복귀작 또한 ‘지킬’이었다. 그런 조승우가 ‘지킬 박사’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쾌걸 조로’로 변신했다. 오는 11월 4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뮤지컬전용관에서 공연 예정인 뮤지컬 ‘조로’의 주인공을 맡은 것. ‘조로’는 2008년 7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개릭시어터에서 개막해 8개월 만에 31만명을 불러 모은 화제작이다. 존스턴 매컬리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귀족 신분을 숨긴 채 서민 편에 서서 악당들을 응징하는 조로의 모험담이다. 국내 초연이다. 조승우는 총 95회 공연 중 30여회에 출연한다. 11일 서울 중구 소공동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조로’ 제작발표회에서 조승우를 만나 봤다. →신작을 맡은 소감은. -개인적으로 너무 흥분된다. 앞서 데이비드 스완 감독님이 뛰어들어 오셨는데 그렇게 뛰고 싶을 정도로 기쁘다. 연말에 좋은 작품 보여드리겠다. ‘조로’는 꼭 한번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공연이다. →‘지킬’이 워낙 성공해 차기작 선택에 고민이 컸을 것 같은데 ‘조로’를 선택한 이유는. -‘조로’의 프로덕션 매니저인 재키형이 군대 가기 전부터 꼭 함께 하자고 꾀었다. 하하. ‘조로’ 오리지널 공연팀의 주연배우들 친필 사인까지 가져와 ‘꼭 네가 해야 한다’고 해 넘어갔다. 무게감 있는 쇼 뮤지컬에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Z’라는 영문자를 좋아한다. 군대 가서 명찰에 성을 영어로 ‘Cho’가 아닌 ‘Zo’라고 새겼을 정도다. 조로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 하하. 연출가인 데이비드 스완을 100% 신뢰하는 것도 (작품 선택의) 한 이유다(스완 감독은 ‘지킬’의 연출가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 안 하면 삐친다(웃음). →연인 ‘루이사’ 역의 조정은씨와는 고교(계원예고) 동창이다. 오랜 친구와 러브신도 연기해야 하는데…. -조정은씨는 10년 지기다. ‘조로’에서 ‘라몬’ 역할을 맡은 최재웅씨도 고등학교 친구다. 고등학교 때부터 뮤지컬 하겠다고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던 친구들이 다 모였다. 저도 처음에는 러브신이 고민됐는데 ‘지킬’ 때도 그렇고 연기니까 괜찮을 것 같다(조정은은 ‘지킬’에서 지킬 박사의 약혼자인 ‘엠마’역을 맡아 조승우와 호흡을 맞춘 적 있다). →주로 시대극 뮤지컬을 많이 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개인적으로 낭만적인 걸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들, 옛날 시대를 다룬 작품에 가슴이 설렌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가 보고 싶다. →조승우가 생각하는 ‘조로’는 어떤 인물인가. -처음부터 무슨 구상을 하고 그림을 그린 채 접근하면 오히려 좋지 않다. 데이비드 스완 감독과 ‘지킬’ 초연을 해본 결과, 서로 의견을 나누며 함께 만들어가는 게 최상의 결과를 낳는 것 같다. →영화 ‘퍼펙트게임’도 촬영 중인데 연습은 언제 하나. -안 그래도 부산에서 촬영하다가 어제 새벽에 서울로 올라왔다. 8월 말에 촬영이 끝날 예정이어서 뮤지컬 연습에는 아무 지장 없다. →‘조로’와 조승우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보나. -10년쯤 전에 뮤지컬 ‘명성황후’에 출연했는데 당시 음악감독이었던 박칼린 선생님이 ‘승우는 나중에 조로 역할 하면 잘 어울리겠다’라고 한 적이 있다. 남자들은 슈퍼맨이나 배트맨 등 영웅담을 보면 가슴 뛰는 게 있다. 물론 제 모습에 그런 정의로움이 있는지는…. 하하. 때로는 너무 정의감이 불타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5) ‘금오신화’ 김시습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5) ‘금오신화’ 김시습

    다섯 살에 ‘대학’과 ‘중용’을 배우고 시와 산문을 지었던 신동,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했던 생육신, 천재 시인이자 전기소설의 저자, 공자적인 이상과 원칙을 죽을 때까지 고수했던 유학자, 세상을 등진 채 산림을 방랑하며 술 마시고 곡하며 노래했던 ‘거짓 미치광이’, 머리 깎고 유랑하며 불교 공부에 매진했던 비구, 노자와 장자를 공부하며 연단과 양생을 실천했던 도가. 김시습(1435~1493)의 화려한 이력이다. 김시습, 그는 평생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삶의 여정을 걸었다. 그는 유학의 원칙을 포기한 적이 없으면서도 승려로 자처하고,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의 길을 가면서도 불제자로 알려지기를 거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밀한 것을 탐구하고 괴이한 일을 행하는 색은행괴(索隱行怪)나 방외인’으로 단정 짓기도 어렵고, ‘행적은 승려지만 본마음은 유학자’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지기였던 대제학 서거정의 말처럼 그는 입산도 출산도 마음대로 하고 유학에도 불교에도 구애됨이 없었다. 그는 공자이면서 불자이자 노장이었고, 동시에 공자도 불자도 노장도 아니었다. 김시습의 사상적 방랑은 줏대 없는 흔들림과는 달랐으니 진리를 현현하는 구도자의 몸부림 그 자체였다. 김시습은 천재였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식별하여 말보다 먼저 천자문을 배웠으며, 세 살 적엔 글을 지을 줄 알았고, 다섯 살에는 시와 산문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세종이 그 천재성에 감탄하여 비단을 하사하고 장성하면 크게 쓰리라 약조까지 내렸다. 그는 학문에 놀라운 진전을 보이며 관료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갔다. ●불의한 세상에 맞서기… 비타협의 순수성 그러나 1455년 21살 그의 삶은 전변한다. 북한산 중흥사에서 과거를 준비하던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신하가 왕을 참람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절망하여 책을 불사르고 똥통에 몸을 빠뜨리는 등 미친 척 행동하며 유랑을 시작한다. 얼마 뒤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이 사형당하고, 끝내 단종도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다. 김시습은 저자에 버려진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고, 제사 지내주었다. 그는 희망 없는 세상과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 관서, 관동, 호남 등지를 떠돌며 때론 비분강개하고 때론 처절한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그네 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김시습이 머리를 깎고 승려를 자처하며 전국을 떠돈 이유는 단순히 목숨을 보존하고 세상을 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유학자로서는 현실을 구제할 수 없고, 탈속한 승려로서만이 그 정의의 세계, 비타협의 정신을 현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멱라수에 빠져 죽음으로써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초나라의 굴원과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미치광이, 천치바보 등 사람들이 조롱하고 욕해도 김시습은 타협하지 않았다. 불의한 세상에 대항하는 길은 거기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일뿐이었다. 김시습은 더욱 견결하게 세상을 비판하며, 혼탁한 세상과 대치했다. “이내 마음 못 꺾으리 어느 위력도/ 옛날도 지금도 이 마음 빛나리라/ 순 임금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 높고 낮은 차이란 본디 없는 것/ 대장부는 언제나 염치가 있는 법/ 세상 눈치 보면서 이리저리 따르랴/ 학자와 문인은 역사에 남아 있다/ 제왕의 칼부림도 역사는 못 막으리(‘대장부’)” ●묘비에 ‘꿈꾸다 생을 마친 늙은이’라 써달라 1462년 28살, 김시습은 긴 유랑을 끝내고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의 용장사에 정착한다. 그는 매일 맑은 물을 올려 예불하고 예불이 끝나면 곡을 하고 곡이 끝나면 노래하고 노래가 끝나면 시를 지었다. 시가 끝나면 또 곡을 하고는 시를 태워버렸다.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조문하는 고통스러운 행위. 김시습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 서서 불의한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절대 낙관할 수 없는 절망적 현실의 횡포, 그렇다고 비관만 하며 사람살이의 이상과 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는 상황. 바로 이 지점에서 전기소설 ‘금오신화’는 탄생한다. 김시습은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 사회의 인정과 진실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단코 포기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한다. 아버지를 여의고 장가도 못간 채 홀로 사는 양생, 왜구의 침입으로 절개를 지키다 결혼도 못하고 죽은 낭자, 이 두 사람의 기이한 만남과 사랑.(‘만복사저포기’) 임금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간신배들을 물리치지 못해 원한을 품고 죽은 한 선비가 마침내 저승(남염부주)에서 간악한 무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고, 한미하지만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경주 선비 박생이 남염부주의 차기 왕으로 임명되는 이야기.(‘남염부주지’).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았던 사랑이나 정의와 같은 진리들이 반드시 인간 세상 밖에서라도 해원될 수 있으리라는 불가사의한 희망을 보여준다.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암흑일지라도 인간은 꿋꿋이 신념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 함부로 낙관할 수는 없지만 신념을 지키며 고군분투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진리가 실현되리라는 것. 이것이 김시습이 은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진실을 믿는 김시습.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1471년 성종이 즉위하자 37살 김시습은 서울로 올라와 수락산 근처 폭천정사에서 10여년을 지낸다. 성종의 등극으로 김시습은 세상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며, 경세제민의 능력을 갈고 닦는다. “나라 창고에 쌓인 재물은 모두 백성들이 마련한 것이며, 윗사람들의 옷과 신발은 바로 백성들의 살가죽이며, 음식 요리는 백성들의 기름이며, 궁전과 수레도 백성들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며, 세금과 공물, 그리고 모든 용품도 죄다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백성들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나라에 바치는 것은 원래 군주에게 총명과 예지를 다하여 백성들이 잘살 수 있도록 다스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애민의’) 꺾이지 않은 예봉, 정치에 관한 확고한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훼손된 세상은 되돌아올 줄 몰랐다. 1481년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47살 김시습은 다시 양양으로 발길을 돌린다. ●일상의 처한 자리가 곧 깨달음의 장 김시습은 한 번도 안주한 적이 없었다. 세상을 등졌을 때도, 세상으로 나왔을 때도, 방랑할 때도, 정착했을 때도 어느 한 순간도 진리를 향해 가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방편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학의 도이기도 하고, 불교의 도이기도 하고, 노장의 도이기도 했다. 그에게 유불선은 ‘길은 달라도 마음을 기름은 한 가지’로 회통된다. 일상의 모든 행동에서 사심을 끊어버리고 공평한 마음을 회복하여 인을 실현하는 유교의 길, 양생이나 연단으로 탐욕을 끊음으로써 본연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노장의 길, 일상응연처(日常應然處)에서 모든 집착을 끊어내고 나라는 실상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존재들이 상호관계에 있음을 깨닫는 불교의 길은 김시습에게 공히 진리를 찾아가는 방편들이었다. 일상의 처한 자리에서 필요에 따라 유자도 되고 불자도 되고 노장도 되었다. 그에게는 이 사상 사이에 어떤 차별도 없었다. 욕망이 들끓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불의한 세상과 대결하기 위해 그는 모든 사상의 자양분을 섭취하고 실천했다.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일상과 진리 사이에 어떤 틈도 없게 하는 것. 진리 그 자체로 살아가는 일. “나의 삶과 부처 사이에 틈이 없으며 나의 유통이 곧 부처의 유통이다. 부처의 원이 자재하고 장엄하므로 나의 원도 자재하고 장엄하다.” 김시습은 부처의 진리가 그대로 삶이 되게 하고, 공자의 진리가 그대로 삶이 되게 하고, 노장의 진리가 그대로 삶이 되도록 방랑하고 또 방랑했다. 그 어느 길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김시습의 삶은 결국 하나였다. 구도의 길이자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길이 바로 그것. ‘꿈꾸다 생을 마친 늙은이’(夢死). 묘비명에 새겨달라고 했던 이 말보다 더 잘 그를 형용할 표현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길진숙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 “일은 각이 서도록… 마음은 둥글게”

    “일은 각이 서도록… 마음은 둥글게”

    “공무원으로서 일은 각이 서도록 네모나게, 마음은 둥글게 살려고 했습니다.” 1일 명예퇴직한 윤귀성(59) 서울시 동부수도사업소장은 만 41년 공무원 생활의 소회를 이같이 풀어냈다. 일은 확실히 하되, 인간관계는 원만히 하자는 것이 그의 공직생활 철학이었다. ●서울신문 보고 공무원 시험 도전 전남 무안 출신. 중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고교 3년 때는 답십리 뚝방 쪽에서 단칸방 생활을 했던 터라 대학은 엄두도 못 냈다.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대신 공무원시험을 봤다. 18세 어린 청년이 될 무렵 동대문구 답십리 3동 사무소에서 공직에 몸을 담갔다. “큰형이 서울신문에 난 공무원 공고를 가져와서 시험을 봤습니다. 그후 서울신문을 쭉 구독했을 만큼 저와 인연이 깊습니다.” ●후배들에 길터주느라 정년 1년 당겨 그는 1984년부터 시청에서 기획관리실 투자관리담당관, 기획관리실 심사분석담당관, 행정관리국 인사행정과, 기획예산실 조직제도담당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윤 소장은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서울시 상반기 정년·명예 퇴임식에서 홍조근조훈장을 받았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느라 정년을 1년 앞당겨 명예퇴직한 그에게 시는 한 단계 올린 부이사관의 직급으로 화답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그날 몸을 던져서라도 나도 함께 데려가라고 매달렸어야 하는 건데…. 내무서 앞에 끌려나온 남편 모습을 보니 정신이 핑 돌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 24일 서울 청량리동에서 만난 김항태(83) 할머니는 말문을 열자마자 흐느꼈다. 주름이 조글조글한 손으로 가슴팍을 연신 내리쳤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그때 내가 임신 1개월째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 남편은 우리 딸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갔으니…. 딸은 남편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야.” 결혼 1년 5개월 만에 스물두 살의 새댁은 남편을 북으로 떠나보냈다. 할머니의 남편 김재봉(91) 할아버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말 강화군 교동도의 신혼집에서 인민군과 마을 좌익 청년들에게 잡혀 북한 황해도로 끌려갔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전쟁통에 홀로 낳은 딸이 올해로 환갑이 됐다. 4년 전부터 할머니를 괴롭히는 고관절 디스크의 고통은 가슴을 까맣게 태운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그냥 끊어지는 전화가 오면 남편이 나를 찾아 전화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 전화가 올 때면 가슴이 떨려.” 북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올해로 아흔 살이 넘었을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아직 체념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 직후 남편과 생이별 할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충격으로 날짜 감각을 잊은 채 멍하니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할머니는 국군이 서울을 되찾은 지 며칠 뒤라고 기억했다(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도 되찾아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북으로 간 남편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쾅, 쾅쾅’ 그날 새벽녘 귓전을 울리는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북한군이 다시 내려온 건 아닐까….’ 정신을 차려 보니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집 대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미처 몸을 숨길 새도 없이 거센 발길질에 대문이 부서졌다. 십수명의 정체 모를 청년들이 들이닥치자 무서움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들은 내무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반동 세력이니 내무서로 함께 가야겠다.’면서 다짜고짜 남편의 팔을 붙들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남편의 가슴팍에 내무서원은 기다란 총부리를 들이댔다. 남편은 그렇게 내무서로 끌려갔다.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희뿌옇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내무서 앞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포승줄에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매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방안 끝에서 끝을 가리키며) “그때 남편이랑 같이 붙들려 간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될 거야. 두 줄로 섰으니 한 스무명 정도….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은 죄 끌고 간 거지.” 내무서원들은 남편과 청년들을 교동도 항구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울먹이며 남편의 뒤를 따라갔지만 함께 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 순간이 진짜로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이 탄 배는 건너편 황해도 연백군이 바라다보이는 교동도 항구를 떠났다. 배를 타고 30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를 건너가는 남편의 뒷모습,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김 할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식은 남편이 끌려간 지 이틀 만에 보낸 작은 쪽지 한 장이었다. 함께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면 서기와 이웃 청년 2명이 풀려 나오면서 전해준 것이었다.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종이엔 ‘내 걱정하지 마세요. 배 타고 건너와 잘 있습니다. 당신의 남편 김재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단정하게 또박또박 적힌 이 세 문장이 60년이 넘도록 김 할머니 가슴에 박혀 있다. 조심스레 쪽지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작은 종이 쪼가리, 귀퉁이가 다 닳도록 만지고 보면서 35년을 간직했는데, 80년대 중반에 이사하다 모두 태워버렸어. 그때는 ‘어차피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인데 갖고 있은들 뭐하나’ 이런 심정이었지.” ●쪽지 35년 간직하다가 불 태워 할머니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남편 김 할아버지는 서울농고를 졸업하고 교동도 금융조합(현재의 농협) 서기로 입사한, 똑똑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사랑방에 둘러앉아 시국 토론도 하는 열혈 청년이었다. 전쟁 전에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념 대립이 팽팽하던 전쟁 직전, 남편은 좌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공산당이 득세한 교동도에서 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원 가입도 거부했다.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동네 빨갱이들이 명부를 들고 다니면서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는데 그게 공산당 가입 명부였다.”면서 “교동도에는 빨갱이들이 많았는데, 그게 다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공산당에 넘어갔던 탓”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자상함은 한도 없었다. “이 양반은 이렇게 내 가슴을 아프게 하려고 그랬는지 그렇게도 별났다. ‘김치도 맛있다, 빨래도 잘 넌다’ 하면서 항상 칭찬해줬다. 무거운 것도 하나 못 들게 했다. (주먹 쥔 손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탕탕 내리치면서) 그런 말을 바로 엊그제 한 것 같고,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는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남편이 북으로 간 뒤에도 김 할머니는 교동도를 떠나지 못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농사일로는 커 가는 딸과 생활하기가 벅찼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딸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딸이 10살이 되던 1961년 서울로 왔다. 외삼촌이 살고 있던 답십리에 방을 구했다. 다른 환경에서도 남편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딸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이 조용해지면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남편과 함께 자식 기르는 재미로 살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벼락을 맞았으니…. 죽어야 잊지 그전엔 못 잊어.” 80년대 중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자 남편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납북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납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북에서 저렇게 뻗대니 어떻게 햐. 절대 용서가 안 돼.” 할머니는 남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을 저몄다. 인고의 세월은 끝이 없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방문 상봉이 합의되자 김 할머니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불편한 다리로 이북5도청에 마련된 이산가족 민원 창구를 찾았다. “교동도 지도를 가져가 여기서부터 저기로 내 남편이 끌려갔다고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 절절한 심정을 이해나 해줄는지. 못 만나게 할 거면 살아 있는지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北서 납북자 인정 안 해줘 분통 “몇 년 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남편을 꼭 찾아주겠다며 걱정 말라는 서신도 보내왔는데 결국 허사였어. 내 남편은 납치돼 간 건데 정부에서 책임지고 찾아줘야 해.”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결기가 느껴졌다. “60년 동안 남편이 딱 한 번 내 꿈에 나온 적이 있어. 교동도 안방 아랫목에 앉아 내 이름을 부르기에 화들짝 놀라 깼는데 꿈이지 뭐야. 꿈인 걸 안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로 꿈에도 한 번 안 나오니 야속한 사람이지. 내 마음에는 그 사람의 사랑이 불에 넣어도 안 탈 거 같고 물에 넣어도 안 떠내려갈 거 같고 그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가슴을 후비는 탓이리라. 김 할머니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남해 생활폐기물 처리시설 본받을 만”

    “경남 남해군의 친환경 행정에 큰 감명을 받았어요. 특히 생활폐기물 전처리시설(MBT)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본받을 만하죠.” 일일 군수로 다녀온 차성수 금천구청장이 23일 이렇게 말했다. MBT는 남해군이 지난달 8일 건립한 것으로, 쓰레기 수거 후 소각용과 매립용·재활용으로 분류하는 것 외에 가연·불연성을 따져 연료로 쓸 수 있는 것을 구분해 매립양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시설이다. 생활쓰레기 배출량이 많은 도시의 특성상 차 구청장이 관심을 가질 만한 대목이다. 차 구청장은 지난 17일 하루 남해군과 기관장 교환 근무를 했다. 정현태 남해군수는 서울로 올라와 금천구청장을 맡았다. 차 구청장은 또 “축구를 조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지훈련하면 떠올리는 스포츠마케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기초단체”라며 “이 같은 사실 말고도 어떻게 성공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자리매김했는지 등을 벤치마킹하는 기회였다.”고 밝혔다. 금천 가산디지털단지 브랜드를 활용하는 방안에 시사점을 줬다고 덧붙였다. 도농(都農) 상생 문제 해결에 대한 학습의 기회로도 삼았다. 농촌과 농업 활성화 및 도시의 안전한 먹을거리 제공을 연계한 시스템 확보의 필요성을 느꼈다. 2003년 10월 자매결연한 이후 금천구와 남해군은 태풍피해 복구 지원, 농수산물 판매장 운영, 초등학생 홈스테이 등 다양한 교류를 통해 우호관계를 증진해 왔다. 이번 기관장 교환근무는 지금까지의 관계를 한 차원 높이기 위해 차 구청장이 직접 짜낸 아이디어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오세훈시장 “무상 급식 소신 밝히고 대화 모색”

    오세훈시장 “무상 급식 소신 밝히고 대화 모색”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해 12월 시의회와의 협의를 중단한 지 6개월여 만에 조건 없이 시의회에 출석한다. 오 시장은 서해뱃길 답사에 나선 지난 18일 제주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전면 무상급식 조례가 통과된 이후 6개월 동안의 진통과 숙성을 끝내고 새로운 정치 지형에 접어들었다.”면서 “새로운 화해와 대화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시의회에 조건 없이 출석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0일 시작되는 제231회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오 시장은 민주당 시의원들과 무상급식 등을 놓고 격론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오 시장은 “내 뒤엔 주민등록번호를 드러내면서까지 서명한 80만 시민과 말 없이 지지하는 1000만 서울시민이 있다. 무상급식에 관련한 소신을 당당히 밝히고 대화에 나서겠다.”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오 시장은 지난해 12월 1일 시의회 민주당 측이 시내 초등학교에서 무상급식을 전면 실시하는 내용의 조례안을 강행 처리한 데 항의하는 의미로 이튿날 시정협의 중단을 선언하고 시의회 출석을 거부해 왔다. 이후 양측은 전면 무상급식 조례와 오 시장의 시의회 불출석, 양화대교 공사 등을 놓고 마찰을 빚었으며, 이 과정에서 시의회 민주당은 지난해 말 직무유기 혐의로 오 시장을 고발했다. 오 시장은 최근 청구된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관련해 “과잉복지로 가느냐 아니면, 정말 필요한 분들에게 최우선 순위의 복지를 제공하느냐의 길목에서 주민투표는 꼭 필요하다.”면서 “정치는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를 지킬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때론 외로운 길을 갈 때도 있지만, 그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 시장은 서해 뱃길과 관련, “서해 뱃길이 마치 부자들을 위한 전유물이라는 시각이 팽배한데, 경부고속도로가 생길 때도 그런 비난은 있었다. 군산·목포·제주· 부산까지 동반성장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뱃길을 여는 일인데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더는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시의회가 끝까지 (서해 뱃길에) 제동을 건다면 경인아라뱃길(한강갑문~서해갑문 18㎞)이 열리는 10월 15일 김포에 관광버스를 대서라도 중국 등의 부자 관광객들을 서울로 유치하겠다.”고 강조했다. 제주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포토다큐 줌인] 마이스터高 학생들을 만나다

    [포토다큐 줌인] 마이스터高 학생들을 만나다

    서울 남산 중턱의 정화미용고등학교. 수업을 마친 신다솔(17)양이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오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솔이가 향하는 곳은 학교 근처의 미용실. 헤어스타일리스트가 꿈인 다솔이는 방과 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겸한 실습을 한다. “올해 안으로 국가기능사 자격을 따면 바로 취업할 거예요. 대학에 갈 생각은 없어요.”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 엄마를 졸라 이 학교로 전학 올 때부터 다솔이의 꿈과 진로는 확고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생활비에 용돈까지 충당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세계최고 피부미용사·플로리스트·셰프를 꿈꾼다 지난 4월 피부미용 국가기능사 자격증을 딴 임가빈(17)양. 선생님 추천만 받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병원이나 미용 클리닉에 취직할 수 있지만 가빈이는 부천 집에서 학교까지 두 시간이 넘는 힘겨운 통학을 감내하면서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처음에 적응을 잘 못하던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자격증을 따 사회에 진출하는 걸 보면 마치 백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든든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 학교 황지영 선생님의 말에 애정과 자부심이 가득하다. ●로봇대회 금메달 딴 후 삼성전자 취업·병역 특례도 강남공고로 출발한 서울로봇고는 2009년 캐나다 캘거리 국제기능올림픽 때부터 생긴 로봇 종목에서 이 학교 학생이 금메달을 따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금메달을 딴 학생은 졸업과 동시에 삼성전자에 취업을 했으며 병역 특례도 받았다.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갖고 우리 학교에 지원하는 학생이 적지 않습니다. 로봇에 흥미와 열정이 있으면 우리 학교에서도 일류 대학 출신 못지않은 성공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상범 교장은 멀쩡한 아이들이 무한경쟁에 내몰려 성적에 스트레스받고 열등생 취급받는 풍토가 안타깝다고 한다. 특성화 고교가 훌륭한 대안과 탈출구가 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집중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특성화 고교 중 일찌감치 자리매김하면서 유명해진 곳은 요리전문 고등학교다. 경기 시흥의 한국조리과학고는 웬만한 전문 대학들을 능가하는 커리큘럼으로 교육하고 있다. “10년 전에는 어떻게든 실업계 행을 막아 보려는 부모들과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부모가 권유해서 오는 케이스도 많답니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거죠.” 일류 호텔 조리사 경력 20년인 김영운 교감의 말이다 경기도 고양고등학교에서 플로리스트를 양성하고 있는 문혜령 교사는 화훼 장식이 데코레이션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독창적인 문화 코드와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세계적으로 독일 플로리스트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국내에 선진국 교육과정이 다 들어와 있어요. 굳이 유학 갈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프로 뺨치는 실력을 가진 고등학생들도 많답니다.” ●“이젠 부모들이 권유… 시대가 변하고 있는 거죠” 과거 실업계, 기술고라는 차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특기, 취미를 살려 꿈을 이루려는 청소년들. 또래들이 사교육의 늪에서 헤매고 있을 때 이들은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또래들이 겨우 들어간 대학에서 비싼 등록금에 숨이 턱에 차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취업의 문턱에서 절망의 결정타를 맞을 때, 이들은 약관의 나이에 벌써 한 분야의 장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고학력 실업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우리 교육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좇아 존재를 인정받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 그런 미래를 만드는 힘. 그 힘을 이들 청소년들의 눈빛 속에서 찾아본다. 글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꿈이 저당 잡힌 공간 ‘불완전한 집’ 고시원

    예전 ‘고시원’은 사법시험 등 국가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학업의 효율을 위해 잠시 머무는 공간이었다. 요즘은 사뭇 달라졌다. 전통적 개념의 고시원 외에도 시설과 환경 등이 고급화된 ‘고시텔’ ‘리빙텔’ 등 다양한 명칭의 고시원들이 늘고 있다. 공부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사실상 ‘집’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셈이다. 이름은 달라도 이들이 공유하는 생활 여건은 별반 차이가 없다. 한 건물에 비좁은 방이 밀집돼 있고, 별도의 계약금 없이 관리비나 각종 공공요금 등을 통합한 월세만 받는다는 것. 영역도 확장됐다. 이른바 ‘고시촌’으로 잘 알려진 신림동과 노량진 등을 넘어 일용직 노동자들이 주거하는 경우가 많은 영등포구와 동대문구, 사무직 노동자들이 주로 주거하는 서초구와 강남구, 송파구 등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다. 대학 밀집 지역인 서대문구와 성북구 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자기만의 방’(정민우 지음, 이매진 펴냄)은 내 집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한국 사회와 그 안에 사는 젊은이들의 삶을 ‘고시원’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 저자는 고시원에 거주한 10명의 젊은이들을 만나 고시원 생활사와 내집에 관한 꿈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 고시원 현황과 성장 과정 등에 관한 세밀한 연구를 보탰다. 홈리스를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던 상태는 고시원에 거주하는 자신 또한 ‘잠재적인 홈리스’라는 말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어려움 없이 자라 대학원까지 졸업한 자신이 언제든 홈리스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다시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간다. 상태의 에피소드는 한국의 청년 세대가 놓여 있는 구조의 단면을 잘 보여 준다. 누구든 ‘홈리스’가 될 수 있는 불안정한 사회. 더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 청년들은 사회 진출을 유예하며 ‘스펙’을 갈고닦는다. ‘인(in) 서울’ 해야 취직에 대한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기에, 청년들은 모든 자원이 집적된 서울로 이주한다. 청년들에게 온전한 ‘집’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젊은이들은 저마다 다른 사회적 조건을 갖고 고시원에 들어가고, 살며, 나온다. 정훈은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분 상승을 위한 공간으로 고시원을 선택했다. 규태는 비좁은 한 평짜리 방이지만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 독립의 출발을 다지게 해준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책은 이처럼 ‘불완전한 집’ 고시원의 풍경을 담아내면서도, 이를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아울러 젊은이들이 어떻게 구조에 매몰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지난한 협상을 시도하는지 보여 주고 있다. 1만 70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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