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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제의 책]

    * ‘서울대생들이 직접 쓴 캡장 논술' 동서양 고전을 통해 배우는 논술고사 지침서이다.이 책에 실린 글은 서울대 지정 ‘동서양 고전 200선’ 가운데 문학편에 해당하는 고전을 서울대생들이 직접 엄선했다. 책은 특히 최고의 고전을 읽고 느낀 감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읽는 힘’과 ‘생각하는 힘’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예컨대 김동인의 ‘감자’에서는 작가 및 작품배경과 논술핵심 포인트,학생이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고전을 바탕으로 문제가 출제되는 처근의 논술시험 경향에 맞춰 수험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게 엮었다.총 24편의 동서 고전이 실려 있다. 서울대생 공동 지음창작시대 8,500원 * ‘왜 벼락맞은 대추나무가 행운을 가져올까?' 클린턴은 왜 링컨 흉상의 코를 만졌을까.첫날밤 신랑이 신부를 안아 방으로 들어가는 의미는.현관문은 왜 안쪽으로 열릴까….인간은 언제나 모든 일이잘되기를,운이 좋기를 바란다.하지만 행운은 바란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금기문화가 우리 생활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이 책은 인간의 관심사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문화풍속을‘행운’이란 단어를 빌려 분석한다.책 말미에는 세계의 길상(吉祥)문양과부적을 실어 이해를 돕는다.저자는 문화풍속에는 동서양 가릴 것없이 ‘행복은 자랑하지 않아야 지켜진다’는 통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밝힌다. 박영수 지음프리미엄북스 8,500원 *‘중산층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IMF 이후 국내의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지고 빈곤층은 1,000만명에 이르고 있다.이 책은 이같은 모순된 사회현실과 구조를 고치는 대안을 제시한다.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과교수인 저자는 사회조직의 ‘허리’격인 중산층이 적어지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이며 이같은 부작용은 ‘자유기업시스템’을 위태롭게 한다고 지적한다.또 빈곤층 문제는 중산층에서 거둔 세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무지함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주장한다.저자는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로잡으려면 저임금근로자를 고용하는 기업에 고용보조금을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펠프스 지음·신동욱 번역한국경제신문사 8,000원정기홍기자
  • 서울대생 한밤 흉기 피살

    22일 0시3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6동 주택은행 앞 길에서 서울대 공과대 2학년 김권선(金權善·20·응용화학부)씨가 흉기에 찔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경찰은 김씨의 손목과 목 앞쪽에 1∼2㎝ 길이의 예리한 흉기로 찔린 상처가 있는 점으로 미뤄 타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했다. 한편 올들어 서울대에서는 김씨를 포함,지난 9월 일어난 실험실 폭발사고로 3명,지난 5월에는 동아리 모임 중 학부생 2명이 연못에 빠져 숨지는 등 공대생들만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영우기자 yw
  • [사설] 고문없는 나라 만들기

    고문수사 사건에 관련됐던 전직 경찰관들을 상대로 국가가 구상권(求償權)청구에 나섰다.국가는 28일 경찰청을 소송수행자로 삼아 박종철(朴鍾哲)씨고문치사 사건과 김근태(金槿泰)씨 고문 사건에 가담했던 강민창(姜玟昌) 전 치안본부장 등 전 치안본부 소속 경찰관 13명을 상대로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한 금액을 갚으라”며 각각 2억4,000여만원과 5,890여만원의구상금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낸 것이다. 국가는 지난 87년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씨 유족과 85년 고문수사를 당한 김근태씨(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각각 패소가 확정돼 모두 2억9,890여만원의 손해배상을 한 바 있다. 강제연행과 고문수사는 명백한 불법행위다.따라서 공무원이 불법행위로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면 국가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구상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그런데도 이 사건에서 구상권을 행사할 것인지를 놓고 그동안 논란이있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고문은 그 자체가 비인도적인 범죄행위다. 범죄를 징치(徵治)하는 게 국가의 임무 아닌가.더구나 국민의 정부는 인권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고문 경찰관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하면일선 수사관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은 전시대적 발상이다.고문을 자행한 수사관은 형사 처벌과 함께 경제적 불이익도 받아야 한다.그래야만 고문의 불법성에 대한 경각심이 생긴다.따라서 우리는 뒤늦게나마 정부가 이들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하는 것을 평가하고 싶다.그것은 고문을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 대공수사기관에 끌려간 피의자들에게 혹독한고문이 가해진다는 것은 국민적 상식이었다.잠안재우기,물고문,전기고문,비녀꽂기,통닭구이 등등 고문의 종류도 갖가지로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였다.고문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것은 부도덕한 정권이 그것을 용인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용공조작도 서슴지 않았다.이런 경우 당연히 고문이 동원됐다.고문행위가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자당국은 고문이라는 말 대신 ‘가혹행위’라는 말을 썼고 언론이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쓴적도 있다.그러나 이제는 그런 암울했던 시대와 결별해야 한다.고문 경찰관들에 대한 정부의 이번 구상권 행사가 ‘고문 없는 나라’ 만들기의 의미있는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 [굿모닝 새천년 ‘기초부터 다지자’](10)프로정신

    “한국에 월가(Wall street)사람들과 회의할 수 있는 전문가 10명만 있었어도…”.전 한국은행총재 이경식(李經植)씨가 지난 2월 환란특위에 출석,외환위기와 관련된 증언을 하면서 쏟아낸 탄식이다.당시 국제통화기금(IMF)관계자들이 우리 관리들과 금융기관 당국자들의 ‘무식함’에 경악했다는 것은익히 알려진 사실.국제금융 프로,즉 전문가 부재가 빚어낸 참담한 결과는 현 우리 사회의 프로지수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알려준 쓰디 쓴 경험이다. ‘프로는 아름답다’.낭만적인,어쩌면 매우 상업적인 이 명제는 그러나 더이상 낭만의 화두가 아니다.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지향과 체질화는 21세기 우리 한국인의 명운이 걸린 관건이다. 한국사회의 프로지수는 얼마나 될까. 수많은 문화재와 무형문화재를 언급할 때 우리는 ‘장인정신’의 결과란 말을 써왔다.그러나 역사적으로 진정한‘장인정신’지수는 바닥에 가깝다는게 김용운(金容雲)교수(울산대 석좌교수)의 결론.매니지먼트(관리·감독)만 있었지 프로페셔널리즘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세계 문화사에 빛나는 고려청자,팔만대장경에 작가의 이름은새겨져 있지 않다.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고 사회도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까닭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책입안에서 결정,시행까지를 관리자가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모두가 관리·감독자가 되려 할 뿐,한곳에서 자신의 직업에 천착(穿鑿)하지 않는다.자신의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사람도 드물다. 서울대생의 80%가 고시를 지망하고,매년 실시되는 사법시험 결과 이공계통출신이 점차 느는 사실도 전문가 천시현상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만족스럽지 않은 자리에서 창의성과 자기개발,1인자가 돼야겠다는 의지가 나올리만무다. 최덕인(崔德印)한국과학기술원(KAIST)원장은 “과학기술인 사이에서도 자식은 관리자로 키우지,과학기술인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며 ‘제너럴리스트’ 위주의 병폐를 지적했다. 프로페셔널리즘의 진작은 개인의 각성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 분위기가 결정적이다.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대접받는 풍토가 우선이다.그러나 현실은 대기업이건,관료조직이건 인사 원칙은 ‘돌리기’에 있다.조직원이한우물을 파도록 지원하지도,기다려주지도 않는다.현장에서의 전문가적인 시각은 제너럴리스트의 ‘상식적’인 잣대아래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것 저것 다 잘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팔방미인(八方美人)이란 단어가 ‘전문가 정신의 나라’ 일본에선 다르게 쓰인다.일본말 ‘핫포비징’(八方美人)은 이것 저것 걸치는 사람이 제대로 하는 일이 뭐 있겠느냐는 나쁜 의미로 쓰인다.여러 대에 걸쳐 한분야에 매진하는 전통으로 유명한 일본인들이얻고자 하는 타이틀은 해당 분야의 ‘1인자’다. 전문가 부재 및 프로페셔널리즘의 부족에서 비롯된 우리의 위기에 대한 처방은 오히려 저해요소가 될 수도 있다.구조조정의 명분아래 연구소 등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할 부문이 우선 순위에서 잘려나간다는 것이다. 프로는 물론 아름답다.매력이 있다.그들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동체에 대한 자세이다.미국 조지아주 대법원이 10년째 주내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해온 ‘프로페셔널리즘 고양’교육의 제1모토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80년대 전문분야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지금의 호황과 안정을 누리고 있는 미국사회의 성숙된 프로페셔널리즘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프로페셔널리즘이란 자기의 직업,그리고 그 직업과 관련된 기능 및 전문 지식에 강한 자부심을가지는 것을 말한다.끊임없는 탐구심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자기개발을 추진하려는 의식과 행동양식을 일컬으며,동시에 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자각하는 정신이다.전문적 직업의식 또는 프로의식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인(匠人)정신이라는 말을 대용어로 써오고 있다.그러나장인의 원뜻은 전 근대사회에 각종 수공업을 전업으로 삼는 직업군의 사람. 나중에 대를 물려가며 혼을 쏟아 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정신을 헤아려,프로의식을 장인정신에 빗댔다. -미국의 사례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뉴올리언스에 사는 찰스 스미스(42)씨는 이름 그대로 대장장이 일을 4대째 해오고 있다. 옛 것의 보존이 잘된 이곳에서 관광객을 위한 솜씨자랑과 함께 가정용 수제도구를 파는 일자리가 마련된 것도 대를 물려가며 대장장이 일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다.역사가 짧은 미국이지만 대를 잇는 일들은 뜻밖으로 많다. 그런가 하면 뉴저지에 사는 한국 교포 오모씨(34)처럼 미 증권가에서 활약하는 증권맨들은 40대 초반이면 벌써 은퇴를 계획하고 있다. 가업이 후대에 전수되거나 뉴욕 월가의 증권맨들이 40대에 은퇴를 계획하는 것은 얼핏 보면 상반되는 것 같지만 바로 미국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상징하는 편린(片鱗)들이다. 한쪽은 한 분야에서 천직임을 자처하며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장인정신을 발휘하고 이를 후대에 전수하고 있다.다른 한쪽은 누구에게도 뒤지지않는 노력과 분석력으로 재산을 형성해 조기은퇴가 가능한 사례다.모두가 전문가들만이 만들 수 있는 일들이다. 미국의 역사는 이같은 프로들이 만든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미시시피강을 처음 개척한 데이빗 클라크같은 탐험가,대장장이,소몰이꾼,와이엇 어프와 같은 총잡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일류가 되기위해 서로 경쟁하고,때에따라서는 목숨을 걸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미국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잘 드러나는 분야는 스포츠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는 잘 알려진 대로 잔인하리 만치 냉혹하다.잘못하더라도 안면이 깊고 한때 기여한 바가 크면 그런 대로 봐주는 애정어린 세계가아니다. 그렇다고 누가 누구를 원망하거나 인정없다고 욕하지 않는다.오히려 잘못한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게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첨단과학 분야를 지배하는 것도 역시 프로정신이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 앞서가는 회사들의 창설자가 대부분 30대인 것도 그들이 일찍 자기가 개발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물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연구하고 노력하는 이유도 없지는 않다. 바로 이 최고들이 모여 우주탐사를 벌이고 방위산업을 주도하고,세계를 들여다보며 정책을 주도하는 위치로 미국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hay@-밀레니엄 탐방/외환은행 딜링룸 무제한의 정보와 무한대의 변수(變數).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보의 날줄과 씨줄을 엮어 ‘판돈’을 걸고 책임을 진다.결과가 좋으면 그만이지만 잃으면 회사 돈이 날아간다.늘 스트레스 덩어리.그래도 아찔한 외줄타기 승부의 재미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의 외환딜러들이 살아가는 프로들의 세계다. 원-달러 딜러들이 하루에 사고 파는 돈은 5억 달러 선.80% 정도가 수출입에 따른 환율위험을 막기 위한 기업들의 요구를 받아서 하는 경우다.거래 고객의 일이다 보니 더욱 신경이 쓰인다.일반거래의 경우는 그래도 나은편이다. 선물같은 투기거래가 되면 아예 모니터 앞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야한다.이들에게 주어진 손해의 범위는 15%.이 한계를 넘으면 사유서도 쓰고 경고조치를 받는다.책임이 돌아오는 이럴 때가 가장 힘들다. 외환딜러들은 스스로 ‘조직의 이단아’라고 느낀다.혼자서 손익을 구성해주문을 내지만 결과는 조직의 틀안에서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탓이다.더욱 외환딜러들은 외환외 다른 은행업무에대해서는 일반 고객 수준이다.그래서다른 부서으로 옮기기 힘들고오히려 은행간 이동이 많은 편이다. 마음고생을 많이 하지만 거기에 대한 성과급은 그동안 거의 없었다.외환위기가 오고 외환딜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제야 성과급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상황은 다른 국내은행도 모두 마찬가지다. 딜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10여년간 딜링룸을 지킨이창훈(李昌勳·43) 과장은 “판에서는 누구나 잃고 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그는 손실액이 10%가 되는 순간을 전환점으로 삼고 있다.실패를 인정함으로써 더 이상의 손실을 막는 것이다.늘 미련을 갖지 않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는 외환딜러를 ‘소신을 가진 카멜레온’이라고 표현한다.시장의 힘에 따라 몇 초만에도 마음을 바꾸지만 저변에는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전경하 기자 lark3@
  • [대한광장] 정체성 상실과 집단적 광기

    만민중앙교회 MBC난입 사건은 우리사회 안에 얼마나 위험한 전근대적 요소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발생상황은 다를지 모르지만,이 사건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서울대생 익사사건과 같은 맥락위에 놓여 있다.두 사건은 모두 우리사회가 언제라도 집단적인 광기에 휩쓸려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정체성 상실’에 시달리고 있는 탈근대 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세계와 존재를 설명하는 준거틀의 상실,공동체 의식의 퇴조,무한히 열려서 터져 버린 주체의 해체,게다가 손만 뻗으면 이루어질 것처럼 선전되는 욕망의 폭발 등 현대인들의 상황은두려울 정도로 허공에 내던져져 있다. 이 허공 안에서 근대를 충분히 통과하지 못한 유약한 영혼들은 ‘내가 누군지 알게 해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탈근대 사회에서 종교와 전통을 빙자한 ‘집단적 정체성’의 이데올로기가 슬금슬금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그때문이다.사교라든지 집단적 입사의식의 광기 뒤에는 이처럼 ‘자아’를 확보하지 못하고 정체성 상실에 시달리는 대중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네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여기에 네가 들어와 편히 쉴 수 있는 존재의 큰집이 있느니라.여기에 들어오려거든 돈을 내든지,네 존재를 집단에 복속시켜야 하느니라.네오 파시즘이나 근본주의가 싹을 틔울 수 있는 바탕은 이처럼현대인의 정신적·영적 공황상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그러나 한꺼풀들어내고 보면,이 집단이데올로기 뒤에는 이를 조작하는 자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어른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는 우리 사회 특유의 맥락을 타고 다른 사회어디에서보다 더욱 더 자주,그리고 대규모의 정신적·물질적 낭비를 동반하며 터져나오고 있다.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미성숙한 전근대적 개인들을 유사 탈근대 상황안에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토록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것이다. 세기말 분위기에 실려 근대성을 심화시키지 못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몰각상태는 더욱 더 기승을 부릴지도 모른다.언제 어디서 또‘집단적 정체성’이라는 마약주사를 맞은 유약한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려 들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성숙한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줄 거국적 교육플랜이 필요하다.그러나 그렇게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마인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자아’의 문제에 관한 한,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조차 명확한자아의식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그들조차 혼자서 우주와 마주서지 못하고,일종의 ‘가족집단’처럼 함께 모여 있다.그리고는 그 집단 구성원이 아닌 사람이 이의제기를 하면,합리적 이성의 수준이 아니라,정서적 수준에서 집단적으로 반응한다.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서 정도 이상으로 불거지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그것은 언론과 정치권력이 ‘돈’과 ‘표’만 보면 그것이 약인지 독인지 가리지도 않고 무턱대고 ‘꿀꺽’ 하고 본다는 사실이다.월간 ‘말’지가 꼼꼼하게 보도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이재록 목사의 ‘돈’과 ‘표’의 유혹에 언론과 정치인들이 무방비로 투항,그 바람에 종교의 이름을 빙자한 사건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던 것처럼 보인다.희생자들이 진상을 알리기 위해 발이 닳도록 쫓아다녔지만,신자들의 집단행동이 두려워 어느 언론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공영방송인 KBS가 아니라 민영방송인 MBC가 이 사건을 보도했다는 것이 씁쓸하고 쓸쓸하다.근래에 발생했던 여러 상황을 지켜보면,상업성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민영방송이 시청료를 받는 공영방송보다 더 언론개혁과 공영성 제고에 적극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서울대생 7명 똘똘뭉쳐…PC방 천하통일 대야망

    서울대생들이 전국의 PC방 정복에 나섰다. 인터넷의 관문인 포털 사이트(Portal Site) 선점 경쟁에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도전장을 낸 벤처기업 한국멘텔㈜.서울대 창업동아리 ‘벤처’ 회원 등서울대생 7명이 이 회사의 주축이다.포털 사이트란 다른 사이트를 연결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인터넷 사이트로서 관련 업체들이 최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이들의 사업 전략은 전국에 1만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PC방을 하나의연결망으로 묶는 것이다.PC방을 컴퓨터,각종 입장권 및 관람권 즉석 판매장과 사이버 증권 객장 등을 겸한 ‘인터넷 토탈마켓(ITM)’으로 만든다는 생각이다.브랜드 이름은 ‘러시(Rush)’.이익은 회원사인 PC방과 50대 50으로나눈다. 학생들은 PC방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오는 9월까지 완성한다는 목표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이 프로그램은 PC방의 게임 및 사이트 접속 정보,수리 서비스,원격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및 PC방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는다. 대표이사 임희현(林熙賢·22·벤처 회장·조선해양공학 4년)씨는 “PC방은빠른 전송선과 최신 컴퓨터를 갖춰 인터넷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서 “한 곳의 하루 이용자를 50명으로 잡아도 한달에 1,500여만명이 이용할 정도로 사업성이 매우 좋다”고 설명했다. 이미 LG IBM과 PC방용 컴퓨터 공급,한국 컴퓨터와 각종 입장권 및 관람권즉석 발급,대만의 에이서와 컴퓨터 완제품 판매,LG증권과 사이버증권 객장설치를 위한 계약을 마쳤을 정도로 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워드프로세서,바이러스 백신,인터넷 포털사이트 분야의 계약도 곧 성사될 전망이다.지금까지 700여개의 PC방을 회원사로 만들었으며 프로그램이 개발되는 대로 본격적인 회원사 모집에 나설 계획이다. 자본금 2억원은 12년 동안 은행에서 일했고 택배 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강형래(姜亨來·39)씨가 댔다.강씨는 “학생들의 기술력과 젊은 감각을큰 자산이라고 여겨 지분도 60%를 주었고 학생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면서 “사업이 성공한다면 PC방이 유해업소라는 이미지를 벗고 정보 인프라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 임직원들은 강의가 끝나면 서울대 앞 신림동 ‘녹두거리’에 있는 회사에서 컴퓨터와 씨름한다.일에 빠지다 보면 밤을 새우기가 예사다.연구원박용학(朴容學·21·컴퓨터공학3년)씨는 “친구 만날 틈도 없이 바쁘다”며활짝 웃었다. 전영우기자 ywchun@
  • 동아리축제 사망사건 관련…서울대생 3명 구속 영장

    서울 관악경찰서는 20일 동아리 회장을 연못에 빠뜨려 숨지게 한 서울대생이모(19·원자핵공학과2)군 등 3명에 대해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한편 서울대는 외부 안전전문회사에 의뢰,학교의 모든 시설에 대한 종합적인 안전점검을 실시하기로 했다.또 이번 사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유족들에게 위로금과 장례비용 일부를 지급할 계획이다. 전영우기자 ywchun@
  • 서울대 망국론-康俊晩 전북대교수 특강

    “서울대가 망해야 나라가 산다?” ‘서울대 망국론’을 주장해 관심을 끌었던 전북대 강준만(康俊晩·44·신문방송학)교수가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강연을 했다.강교수는 ‘서울대가 우리 사회에 끼친 폐해’를 조목조목 열거하며 서울대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식으로 서열화된 우리사회의 지식생산 구조와 권력집중 현상을 비판했다. 서울대 총학생회(회장 朴慶烈·사회학4)의 초청으로 19일 오후 6시 인문대강의실에서 열린 ‘강준만교수의 서울대 읽기’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강교수는 “우리나라 교육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출발점인 서울대의 개혁 없이는 교육개혁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을 펼쳤다. 강교수는 특히 교육계에서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서울대 구조조정과관련,“서울대 개혁을 이 대학 교수들에게 맡기는 것은 기업구조조정을 사원들에게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국민여론 형성을 통해 입학정원 절반축소 등 과감한 서울대 개혁조치를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봄축제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 자리에서 강교수는 “서울대 출신들이 우리사회의 권력과 금력을 장악,의사결정과정을 지배하고 있다”면서 “이렇게권력이 집중된 상태에서는 다양한 출신의 인재들이 능력에 따라 경쟁,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서울대생은 “강교수의 주장에 일리가 있으나서울대를 비롯한 우리 대학의 문제는 지엽적인 교육개혁이 아닌 사회개혁으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영우기자ywchun@
  • 안티미스코리아대회 성황/30명 열전

    지난 15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안티(反)미스코리아대회’에서 이화여대생 4명으로 구성된 ‘노허즈 밴드’가 대상인 안티미스코리아상을 수상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30여명의 출전자들이 나와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노래,춤,퍼포먼스 등을 보여주고 이에 대한 관객들의 열띤 호응으로 축제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노허즈 밴드’는 미스코리아대회를 패러디한 짧은 연극과 노래로 대상을받았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갖고 나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덕할머니,딸에게 주는 편지를 낭독한 여성장애인 김진옥씨가 ‘웃자’상을 차지했다. 유일한 남성 출전자인 서울대생 전한해원씨는 성의 역할을 바꾼 퍼포먼스와 패션쇼로 ‘뒤집자’상을 수상했다.이밖에 “여성의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강조한 박복련(89)할머니,여성의 자아찾기를 주장하는 노래 ‘가요 가요 나는 가요’를 부른 고은광순,‘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모임’대표 등은 특별상을 받았다.
  • 서울대 이웃사랑추진본부 3년째 봉사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이웃과 사랑을 조금씩 나누는 거죠” 서울대 ‘이웃사랑추진본부’의 회원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랑의 전령사’다. 97년 여름 만들어진 이 동아리의 회원은 130여명.서울대생이 중심이지만 다른 대학 학생도 있다.학생 스스로 사회의 ‘음지’를 찾아가 봉사한다. 올들어서는 자원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지원자들이 몰려 회원들은 무척 고무돼 있다.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며 새로 동아리를 찾은 학생은 80여명이나 된다. 봉사활동은 대부분 혼자 한다.클래식 기타를 전공하는 權정구씨(27·서울대 음대 3년)는 1주일에 한번씩 동작구 신대방동 서울시립정신지체인복지관을찾아가 장애인들을 거리로 데려간다.버스나 지하철 타는 방법,가게에서 물건 사는 요령같은,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알려준다.유원지나 오락실에 같이가기도 한다.병원에서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기타 연주도 해준다. 金信愛씨(25·여·이화여대 기독교 4년)는 양천구 신정사회복지관에서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힙합댄스를 가르친다.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이건전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朴美貞씨(20·여·서울대 물리교육 3년)는 강남구 삼성동 강남청소년쉼터에서 가출청소년들에게 과학을 가르친다.朴씨는 “돈을 받고 과외지도를 하는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즐겁다”면서 “학교가 청소년들을 제대로 감싸주지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양로원이나 보육원 등에서 오갈 데 없는 노인과 어린이,청소년들을 돌보는 학생들도 있다.맹아·농아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병원에서 간병인으로 활동하기도 한다.참여연대나 경실련 등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회원도 있다. 강서구 가양동 기쁜우리복지관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지체장애인들을 돕는 朴宰輝씨(23·서울대 윤리교육 4년)는 이렇게 말했다.“오히려 우리가 배우는 것이 훨씬 많아요”
  • [大學고시반을가다] (3) 고시 메카 서울대

    서울대 물리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金모씨(27)는 지난 1월 오랜만에 연구실을 벗어나 중앙도서관에 들렀다.자리를 잡고 영어 원서를 읽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전공서적을 읽고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었고,모두들 법전을 펼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고시열기는 서울대에서도 불타오르고 있다.金씨는 “놀랍기도 했지만 왠지가슴 한 구석이 쓸쓸했다”고 돌이켰다.인문대 교수들이 얼마전 학문이 설자리를 잃었다고 자성한 것도 이런 고시열풍과 무관하지만은 않다.고시반이없는 서울대는 도서관 전체가 ‘고시반’ 역할을 하고 있다.한 어문학과의지난해 졸업생 24명 가운데 취업자는 단 한명.학교측이 올해 졸업생 가운데2,789명을 표본조사한 결과 진학·입대를 뺀 순수 취업률은 21.3%로 나타났다. 바꿔 말하면 졸업생 5명 가운데 4명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미취업자의 상당수와 재학생들이 고시,특히 사법시험으로 몰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宋모씨(28·법학과졸)는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등의 1차시험을 앞둔 3월 초에는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80∼90%는 고시준비생들로 가득찼다”고 말했다. 사회학과 4학년 張모씨(26)는 “법대를 비롯해 인문·사회과학·사범대 등문과계열 학과 3·4학년 가운데 70%정도는 고시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한다.7년째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한 노장파 고시생은 “취직했던 동기생들도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와 함께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고시열풍은 3∼4년 전부터 이공계열까지 불어닥쳐 이공계 학생들이 법대 강의실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胡文赫법대교수는 “수강생들의 4분의 1정도는법대 학생이 아니다.특히 이공계 학생들은 사법시험과 변리사 시험관련 과목을 주로 듣는다”고 말했다.법과대 강의 수강을 신청하려고 새벽부터 줄을서는 현상은 몇년째 계속되고 있다.법대 강의실은 넘쳐나는 학생들이 복도까지 메우고 있을 정도이다. 서울대생 또는 졸업생들은 사법시험을 비롯한 각종 고시를 휩쓸고 있다.유일하게 2위를 차지하는 것은 공인회계사(CPA)시험이었지만 요즘은 경영대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기업에 비해 전문성을 가지면서도 자유롭다는 점이 최대의 매력이다. 하지만 서울대생이 고시준비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도서관이 고시생들로 가득찬 듯한 현상은 주로 시험에 임박했을 때에나타나는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얘기다.인문대 관계자는 “순수학문에 전념하는 학생들도 많지만 그들은 눈에 띄지 않을 뿐”이라며 서울대생들 전체가고시생으로 비치는 데 불만을 표시한다. 장택동
  • 의문사 장군의 아들/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대한광장)

    “장군아들 의문사도 묻어둔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오죽 하겠소”. 의문의 죽음을 당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장군은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한마디로 피력했다. 예비역 중장,그것도 1997년 12월에 예편한 장군이 자신의 아들 의문사를 밝히는데 그토록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다. 아들이 자살했다는 군의 공식발표에 의문을 품고 아내와 함께 사망한 아들의 소속 전역 부대원을 수십차례 찾아다니며 눈물로 호소한 끝에 겨우 토로하게 된 진실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한국계 미국인 법의학자까지 동원하여 자살이 불가능함을 증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국회국방위산하에 이 사건에 관한 진상파악소위원회까지 구성되게 하였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국방부가 특별조사단을 꾸려 이 사건을 전면 재수사하겠다는 뜻을 밝히도록 만들었겠는가. ○사인 의혹에도 모두 자살처리 자식을 군에 보낸 뒤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통고받고도 의문투성이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채 죽음같은 세월을 살아온부모들이 2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김두황 이병,한영현 이병,최온순 이병,정성희 일병,이윤성 일병은 지난 80년대 초반 운동권학생에게 프락치활동을 강요한 이른바 ‘녹화사업’의 희생자들이다. 김용권 상병,박상구 하사,정연관 상병,우인수 일병,박종근 이병,박성은 방위병도 바로 군부대내에서 의문사한 사람들이다. 군대에 아는 사람 하나 제대로 두지 못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관계기관을 찾아다니고 같은 운명에 처한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농성하는 것밖에 없었다. 군부대에만 의문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생들의 의문사도 적지않다. 1985년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우종원 서울대생,1986년 부산 송도앞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된 서울대 김성수군,1989년 거문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중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군,1990년 교통사고 피살체로 발견된 속초 동우전문대 학생회장 김용갑군 등도 의문사 리스트에 올라 있다. 정경석,문용섭,이재호,박창수씨 등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한 케이스들이다. 이들은 외관상 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자살로 처리되고 말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신치하의 최종길교수 사건,장준하선생 사건등도 여전히 의혹 속에 싸여있다. 이 모든 사건들은 이미 공소시효나 소멸시효가 지나고 말았기 때문에 민사·형사적 배상과 처벌이 모두 불가능한 상태이다. 비인도적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는 것이 엄연한 국제관습법이라고 국제법학자들이 말하고 있건만 우리나라 판·검사들은 이런 이론에는 귀머거리일 뿐이다. 유족들이 바라는 건 단지 진실뿐이다. ○공소시효 지나 처벌 불능 상태 지난 12월10일,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식은 이나라에서도 화려하게 벌어졌다. 대통령은 “인권은 그 어떠한 명분과 구실로도 제약받거나 유보될 수 없는 천부의 권리”임을 힘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이 의문사 진상규명은 아무런 힘도 없는,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인권위원회가 담당하는 것으로 당정이 협의하였다고 한다. 인천에는 ‘인권의 길’이 만들어졌고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리는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의문사의 비밀을 여는 진실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그리고 한해가 또 가고 있다.
  • 金 대통령의 아시아 전통문화 시각은

    ◎대선후보 시절 서울대 강의 내용 묶은 ‘동양의 눈으로 세계를…’ 출간/“맹자·묵자·부처사상 민주주의와 연결 동학 민본주의·과거제도 훌륭한 전통”/학생들과의 질의·응답내용도 수록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의 전통문화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가,또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의 가치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김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서울대에서 강의한 내용과,이를 주축 삼아 한학기를 공부한 서울대생들의 보고서를 한데 묶은 책 ‘동양의 눈으로 세계를 향하여’(한상진 엮음)가 최근 나남출판에서 나왔다. 책을 엮은 한상진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김대통령이 서울대 강단에 선과정을 먼저 소개했다.지난해 봄 ‘포린 어페어스’가 세계를 움직이는 18편의 글을 뽑아 단행본으로 냈는데 그 안에 이광요 전 싱가포르 수상과 논쟁을 벌인 김대통령의 글이 포함됐다는 것.따라서 그를 ‘저자와의 대화’프로그램에 초청했다고 한다. 그 결과 김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해 9월26일 서울대에서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주제로 40여분동안 특강을 했다.책의 초반부는 강의 내용 전문과 이어진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됐다. 이 강의에서 김대통령은 ‘경제를 빨리 성장시키려면 개발독재가 필요하다’는 이광요의 주장을 일축한다.그는 “오늘의 세계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 통합되어 간다“고 전제하고 아시아에도 민주주의와 상통하는 철학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맹자의 ‘역성혁명’,묵자의 ‘겸애설’,부처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모두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아시아문화의 뿌리라고 밝힌다. 김대통령은 우리 역사에도 동학의 민본주의를 비롯해 과거제도의 정착,조선조의 왕권견제와 언론자유 등 민주주의와 상통하는 훌륭한 전통이 있다고 역설한다.다만 민주적 제도나 행정체계를 발전시키지 못해 서구모델을 빌려 쓰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이제는 자연을 우리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제의한다.김대통령은 ‘자연과 조화되는 지구적 민주주의’‘후진국의 자유·번영·정의를 도와주는 도덕적 민주주의’를 제창하며 “이런 것들이 동양사회가 세계에 이바지하는 길이자 젊은이들이 21세기를 향하여 해야 할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한상진 교수는 이같은 강의내용을 교재로 해 98년 1학기 ‘현대사회와 인권’강좌를 개설했고 교육과정의 하나로 ‘DJ강의’ 토론방을 차렸다.이에 수강생 350여명이 적극 참여했고 그에 따라 학생들이 ‘DJ강의’에 대해 내린 평가·주문·해석·비판 들이 책의 후반부를 구성한다. 서울대생들의 평가는 대부분 적극적인 지지와 함께 DJ정책에 새로운 요구를 추가하는 것이었다.물론 “동양에는 민주주의 전통이란 없으며,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국문과 95년 입학생)고 주장하는 식의 반론들도 없지는 않았다. 한상진 교수는 서문에서 “김대통령은 서울대 강의에서 젊은 세대,지성의 중심에 있었고”“이 시대의 과제를 대중적인 용어와 감각으로 풀어내는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가졌다”고 찬사를 보냈다.한교수의 말처럼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젊은 지식인’들과 나눈 흥겨운 학문토론의 장은 우리 시대에 귀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 민주열사열전:17/88년 투신·분신3명의대학생(정직한역사되찾기)

    ◎‘허울뿐인 민주’ 항거… 생명의 불꽃 살라/조성만­민주화운동 통일논의 새장 열어/최덕수­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 요구/박래전­“양심수 석방… 죽음 더 없어야” 유서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함께 1988년 6공화국이 시작되었으나 진정한 민주정부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허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직선제란 모양을 갖췄을 뿐 6공 盧泰愚 정권은 5공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인식이었다. 6공은 공식 출범 전부터 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을 구성하며 ‘민주화’ 정책을 차례로 발표했다.군사독재 정권인 5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언인 셈이었다.그러나 6공 출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중순부터 20일간에 걸쳐 3명의 대학생들이 ‘노태우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젊은 목숨을 잇따라 내던졌다. 87년 12월 대선 때 문민정부의 도래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함께 6공 출범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나아가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80년 5·18 광주학살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민주화추진위에서 증언하기도 했다.그러나6공이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내놓은 민주화정책들은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정권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진정한 개혁이 절실한 때에 어설픈 개랑주의의 깃발만 펄럭이는 모습이었다.세 젊은 학생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대학생의 잇따른 투신·분신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운동권의 좌절감과 방향감각 상실을 웅변해준다며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고 정권도 이런 쪽으로 몰고갔다.그러나 수십,수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세 학생은 직선제 정부의 출현에 만족해하려는 현실순응의 추세를 질타하면서 우리에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민주 현안이 산적해있음을 죽음으로 일깨웠다.이에 많은 국민들이 각성하고 공감을 표한 것이었다. ○시청앞 장례식 노제 30만 인파 운집 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가협 등 재야 민주단체 주최로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다른 한쪽에서는 100여명의 청년들이 참가한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명청) 주최 ‘광주항쟁계승 마구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출발신호를 기다리던 오후 3시38분.서울대생(화학과 2년)으로 명청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장인 趙城晩이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 나타나 핸드마이크로 사이렌을 울린 뒤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1분여 동안 외쳤다.이어 흰색 농민복을 입은 조성만은 오른손에 든 칼로 복부를 찌르고 몸을 뒤로 날려 마당으로 떨어졌다.투신 직후 인근 백병원으로 옮겨진 조성만은 이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5월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뤄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 3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1년전 시민항쟁 당시의 열기가 느껴지는 군중모임으로 4월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이룬 당시 야당의 金大中 평민당총재와 金泳三 민주당총재도 참가했다.조성만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전주 도심을 지날 때와 망월동 묘역으로 떠나기 전 광주 도청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도 수만명의 시민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전북 김제 농촌에서 하급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조성만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신부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다.그는 투신 오래전에 일기에서 ‘10년 세월에 휼륭한 사제가 되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느냐 한순간에 나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했다.조성만은 투신 당일 아침 작성한 유서에서 특히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소리높여 요구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논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 전사’로 불리는 조성만은 유서 말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어머님 얼굴,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오월항쟁 계승 군부독재 타도” 외쳐 조성만의 장례식이 있기 하루전인 5월18일 오전 10시30분 단국대 천안 캠퍼스 시계탑 밑에서 이 학교 법학과 2학년에 다니다 휴학중인 崔德秀가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했다.성명서를 통해 ‘광주학살 비리주범 노태우를처단하자’‘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을 발동하라’고 주장한 최덕수는 천안 순천향병원에 이어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 9일만인 26일 운명했다. 빈한한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쉬고 공장과 고향 농촌을 오르내려야 했던 최덕수가 분신할 당시 정가는 4월 총선후 국회개원을 앞두고 광주항쟁 진상조사 특위구성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그의 30일 서울역 노제에는 1만5,00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했고 광주도청 분수대 노제에는 3만여명이 모였다.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 호소 그리고 6월4일 오후 4시30분 대학생들의 통일논의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가운데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朴來佺(국문3)이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했다.박래전은 이미 분신 이틀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학살원흉 노태우 처단’ ‘통일논의 자유보장’ ‘양심수 즉각석방’ 등을 주장했다.그는 특히 학생들과 사회인 모두에게 안일과 무감각 그리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고 단결의 투쟁 대오를 갖추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손실일 뿐입니다.”“어두운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이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그리고 개량의 환상,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지금은 슬프시겠지만 제가 원하는 그날이 오면,두분 부모님,아니 그날이 오기까지 힘드시더라도 눈감지 마세요.” 분신 이틀 뒤인 6일 운명한 박래전의 장례식은 12일 수천명이 참가한 시청앞 노제와 함께 치뤄졌다. ◎박래전의 형 박내군씨/인권운동 사랑방 사무국장 활동/동생보다 먼저 민주화운동 투신/유가협 일맡아 희생자 50여명 처리 인권 ‘지킴이’로 이름높은 인권운동 사랑방의 朴來群 사무국장(37세·연세대 국문과졸)은 분신자살한 숭실대생 박래전의 바로 윗형이다.민주 열사 가족들 가운데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이다.그러나 박래군 사무국장은 동생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의식화(?)한 것은 전연 아니다.그는 “대학 학회장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뿐이며 동생은 스스로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수원에서 버스로 한시간 달려가야 하는 남양반도 끄트머리 시골 출신으로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어렵게 대학에 보낸 두 아들이 모두 민주운동을 한다면서 감옥에 가고 그러다 끝내 분신하는 아들까지 나오게 된 시골 부모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아릴 필요는 없을 터이다.박래전이 유서에서 염려했던 부모는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박래전이 대학 1학년 때인 82년 가을부터 가두 시위에서 형제는 서로 마주치곤 했다.박 사무국장이 86년부터 2년형을 살고 있던 감옥에서 87년 6월 항쟁으로 석방돼 나온 뒤에 형제는 자취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때 래전이는 특히 몇몇 운동한다는 사람들의 불성실 무책임에 가슴아파했다.” 동생이 죽은 후 그는 유가협 일을 맡아 5년동안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50구가 넘는 민주화 희생자들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동생의 분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같은 무렵 통일논의에 물꼬를 튼 조성만의 분신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연보 ◆박래전 63년 경기 화성 출생 82년 숭실대 국문과 입학 83년 휴학,입대 86년 제대 87년 복학 12월 민중후보 선거대책위선전국장 88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88년 6월4일 학생회관 분신 88년 6월6일 운명 ◆최덕수 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87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88년 휴학 88년 5월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성명서 낭독 88년 5월18일 분신 88년 5월26일 운명 ◆조성만 64년 전북 김제 출생 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84년 서울대 화학과 입학 85년 군입대 87년 제대,복학,명동성당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87년 12월 대선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데모 관련 구류 10일 88년 5월15일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 투신,운명
  • 민주열사 열전:16/연세대생 李韓烈(정직한 역사 되찾기)

    ◎‘최루탄 희생’ 6월항쟁 시민참여 계기로/대학입학후 사회의식 눈떠 시위 적극 동참/‘뇌사상태’ 알려지자 시민·학생 공감대 확산 1987년 6월9일은 80년대 한국 민주운동사에서 시민 승리의 한 분수령이 됐던 날이다.그날 일어난 연세대생 李韓烈(경영학과 2년)의 최루탄 피격 사건이 민주화 열망이 폭발한 6월항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된 것이다.시민들은 신문에 실린 이한열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그는 피를 흘리며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힘없이 동료에게 안겨 있었다.외국기자가 찍은 그 한장의 사진은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기에 충분했다.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그 분노의 폭발은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 됐다. ○신문사진 보고 시민들 분노 이한열은 그날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6·10대회를 위한 연세인 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그리고 오후 5시 쯤 최루탄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달리다 SY44 최루탄에 ‘직격’으로 뒤통수를 맞았다.그가 쓰러진 교문 안 3m 지점과 최루탄을발사한 경찰과의 거리는 20m에 지나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쫓겨 들어가던 한 학생에 부축돼 경찰의 손을 피한 그는 동료들에 의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 날 申廷淳 세브란스 병원장이 발표한 이한열의 용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신경외과 중환자실에 산소마스크를 쓴 채 입원해 있던 그는 두개골 골절 및 뇌좌상,뇌출혈,뇌이물질 등으로 의식불명이고 수술은 불가능한 상태였다.그러나 그의 절망은 민주화의 희망으로 승화됐다.그는 입원한지 27일만에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입원기간 동안 밖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도도한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대고 있었다. 그 물결은 87년 1월 서울대생 朴鍾哲 물고문 사망사건으로 비롯된 물줄기가 불어난 것이었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점화된 국민의 분노는 정권의 고문사건 축소조작 음모가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뜨겁게 타올랐다.4월 5공정권의 직선제 개헌 유보 발표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가져왔다.‘호헌철폐’‘독재타도’로 압축된 외침은 서서히 학교를 빠져나와 도심 곳곳에 울려 퍼졌다.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건은 독재정권에 결정타가 됐다.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메아리쳤다.회사원들이 빌딩 위에서 꽃다발과 휴지다발을 던지는 현상을 보고 외국언론은 ‘충격적’이라고 표현하고 ‘또 다른 형태의 민중의 힘’이라고 보도했다.‘넥타이부대’를 비롯한 중산층이 시위에 적극 가세하면서 부터는 6월항쟁을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중산층의 민주화 욕구 분출로 결론짓기도 했다.6월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는 6월항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인파인 25만여명이 참여했고,결국 정권의 6·29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넥타이부대’ 대거 시위 참여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禹相虎씨(36)는 “한열이의 최루탄 피격은 학생과 시민의 결집력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회고했다.6월9일 이전까지만 해도 민주화투쟁의 승리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했지만 한열이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학생·시민들에 확산됐다는 것.그것은 도심 가두시위에 겁을 내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한열은 당시 학생운동권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와 서서히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1학년 2학기 이후 시위에 적극 참여했는데,이는 운동권 조직원으로서가 아닌,개인적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대학에 들어와 광주항쟁의 참상을 알고 분노한 수많은 학생 중 한명이었으며 고문 추방을 외치며 명동과 을지로 골목을 누비던 ‘보통학생’ 중 하나였다. ‘…그대 왜 갔는가/어딜 갔는가/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마저 팔찌끼고 갔는가’라며 박종철의 죽음을 목놓아 서러워 했던 여린 마음의 젊은이였다. 특별히 과격하지도 않은 우리의 착한 아들 딸도 정권폭력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 때문이었을까.이한열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시민들은 6월29일 당일보다도 오히려 이한열의 장례일인 7월9일 6·29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 했다. ○시청앞 1백만 장례 행렬 연세대에서 10만여명으로시작된 추도행렬은 신촌네거리 노제를 지내며 30만,시청 앞에선 100만여명으로 불어났다.대형 태극기와 영정,‘한열이는 부활한다’‘한열아,너의 가슴에 민주를’ 등이 적힌 300여개의 만장을 앞세운 운구행렬을 수십만의 시민·학생이 따랐다.참으로 장엄했다.그것은 이한열을 애도하는 인파였고,민주사회를 갈망하는 국민 염원의 물결이었다.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6월 항쟁은 민주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의 발전이었다. □양력 ·1966년 8월 전남 곡성 출생 ·82년 2월 광주 동성중 졸업 ·85년 2월 광주 진흥고 졸업 ·86년 3월 연세대 경영학과 입학 ·87년 6월9일 연세대 교문 안쪽에서 시위 중 최루탄 피격 ·87년 7월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 ◎이한열 어머니 裵恩心 여사/아들 소망 풀려고 민주화 운동/의문사 진상규명 법 제정해야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어두웠던 시대에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자식을 잃은 많은 어머니들.이들의 가슴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함께 자식이 죽기전 이루고자 했던 소망도 고스란히 묻혀 있다.이한열의 어머니 裵恩心(58) 여사 또한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관심과 100만 추도 인파 속에 ‘성대히’ 아들의 장례를 치뤄 ‘속없는’ 사람들의 ‘부러움’까지 샀던 배여사.하지만 배여사는 오늘도 여의도 국회 앞 차가운 천막속에 있다.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벌써 24일 째다. “민주를 달라고 싸우다 숨진 사람들이 아직도 범법자의 굴레를 쓰고 있어요.암울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숱한 의혹을 남긴 죽음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고요.이것을 그대로 묻어둔 채 진정한 새출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장례식에서 “이제 다 풀고 가라.엄마가 갚을란다.한열아… 한아 가자,우리 광주로”라고 피끓는 통곡을 토해냈다.그 이후 아들의 소망을 풀기 위해 민주화와 노동운동 현장에 항상 있었고,지금도 아스팔트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배여사는 “대통령도 특별법 제정 검토를 지시했고,국회의원들도 만나는 사람마다 협조하겠다는데 법안은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며 답답해 했다. ◎피격현장 동료 이종창씨/한열이 모습 아직도 생생/항쟁의 정신 잊지 말아야 6월항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이한열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힘없이 늘어져 있고,한 학생이 그를 껴안은 채 분노의 눈빛으로 앞을 쏘아보고 있는 사진이다.로이터통신 기자가 극적으로 잡은 이 장면은 세계 곳곳으로 한국 민주화투쟁을 알리는 생생한 기록으로 알려졌다. 그 분노한 눈빛의 주인공인 이종창씨(32·연세대 상경대도서관 사서)는 “‘내일 시청 앞에 가야 하는데’라고 힘없이 말하던 한열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도서관학과 2학년이던 그는 그날 학교 앞 택시정류장 쪽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경찰에 쫓겨 최루가스로 거의 앞이 안보이는 상태에서 뛰어 들어가다 왼쪽에 검은 물체를 느꼈지요. 한열이었습니다. 20여m 앞에 전경들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를 껴안고 무조건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는 이한열을 20m 이상 끌고 가다 먼저 쫓겨갔던 학생들이 달려왔을 때에 야 기진맥진해 주저앉았다.“쓰러진 한열이가 경찰 손에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씨도 6월항쟁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하나다.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은 며칠뒤 그 또한 학교 앞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았다.2회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회복될 수 있었다. 6월 항쟁의 한 가운데 있던 그는 항쟁의 정신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 했다.언젠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세대 백양로를 지나는 학생들에게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진을 보이자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라는 것.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던 그때의 뜨거운 열정과 희생의 참뜻은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에 꼭 살아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 민주열사 열전:15/前 서울대생 朴鍾哲(정직한 역사 되찾기)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民主불씨’/‘체육관선거’ 잡음 없애려 시국사범 검거령/‘남영동’으로 연행당해 물고문 도중 질식사/6·10항쟁 도화선… 4개월후 전모 밝혀져 1987년 1월14일 만 21세의 대학생 朴鍾哲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5공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고문살인이었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5공은 여느 때처럼 국민을 속이려 했으나 1987년 역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시국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 군사정권에게도 박종철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5공은 87년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치뤄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86년 말 경찰 수뇌들은 운동권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는 87년 1월초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인 박종철이 서울대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朴鍾雲을 은닉하고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박종철을 연행 수사하여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운다. 1월14일 아침 7시20분경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 대공 소속 경찰들은 신림동 하숙집을 급습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로 연행,신문했다. 10시40분경 신문장소를 옮겨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박종철을 닥달하였으나 모른다고 하자 조한경 등은 박종철의 가슴과 다리를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물이 가득 채워진 조사실 안의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반금곤 황정웅이 각각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강진규가 욕조안에 들어가 양손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집어넣고 한참 후에 끌어내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이때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더 혼내주라는 조한경의 지시에 이정호가 가세,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가했다. 이때 박종철은 목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 11시20분경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30,40분 만에 저질러진 이 물고문 살인으로 결국 5공의 정권연장 야욕은 물건너가게 된다. 박종철의 물고문 질식사는 4개월 후에야 그 잔혹한 진상 전반이 파악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일반에 알려졌다. 그간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죽어갔으나 의문사란 말만 남기고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경찰과 정권이 몇겹으로 세운 두꺼운 벽을 뚫고나와 ‘양지’로 향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정통성없는 5공 정권의 취약한 근저를 흔들었다. 2월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밖에없었다. ‘제2의 김주열’로 불리기도 하는 박종철은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는 남달리 강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 때문에 재수없게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고문사함으로써 우연히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대공 3부의 고문경찰들이 연행 직전 작성한 수사계획서는 박종철을 민민투의 중요 지도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에서 말단 공무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종철은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온 직후부터 동아리 가입과 농촌활동참여 등을 통해 현실 인식을 깊게 했다. 2학년 때 미국 문화원농성 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으며 여름방학에는 안양공단 근처의 ‘닭장집’에 살면서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86년 3학년때 언어학과 과회장에 뽑힌 박종철은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과거 전과 때문에 구속됐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15일 출소했다. 86년11월23일 81학번 사회학과의 동아리 선배로 민추위 사건에 지명수배된 박종운이 박종철의 하숙방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난다. 87년 1월8일 박종운이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다시 박종철 하숙방을 찾았다. 6일 뒤 박종철은 발가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물고문당하다 죽었다. □朴鍾哲 연보 1965년 4월:부산 출생 83년 2월:혜광고 졸업 84년 3월: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86년 4월: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참가,구속 86년 7월: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87년 1월: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구속 경찰관·유족들 지금은/5명 실형선고… 형기 마치고 출소/경찰청 산하단체 근무하다 해임도/유족들 배상금 2억여원 수령 고문 경찰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기에서 최고 7년3개월의 수형 후 가석방 등으로 현재 모두 출소했다. 올 6월 이들 중 3명이 규정을 어기고 경찰청 산하 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곧 해임됐다. 이정호씨와 강진규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경찰공제회에 들어가 일반직 4급으로,조한경씨는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들과는 달리 범인도피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박처원 전 치안감 등 4명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한편 박종철의 유족은 89년 9명의 경찰관과 국가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95년 11월 “국가와 조씨 등 고문 경찰관 5명은 연대해 1억4,700만원을 배상하고 강씨 등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족은 국가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손해배상금 2억4,000만원을 수령했다. 국가가 배상금 전액을 지급한 만큼 검찰은 직접적 책임이 있는 조씨 등에게 구상금청구 소송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받아내야 하나 최근 이들에 대한 재산 자력조사 결과 배상금 지급 능력이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리거나 노점상으로 생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문 밝혀지기까지/모든 수단 동원해 은폐 시도/3차 수사후 고문치사 확인/치안총수 등 경차 9명 구속/‘탁치니 억 쓰러져’ 유행어로 경찰과 5공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지만 결국 3차의 수사 끝에 치안총수를 포함 9명의 경찰이 구속됐다. 1월14일 물고문하던 경찰들은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러 응급처치를 간청했으나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날 밤 9시 안상수 검사 입회하에 행해진 부검에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은 물고문 도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 같다는 부검소견을 피력한다. 강 치안본부장 등은 황 과장에게 심장마비사로 부검감정서를 써줄 것을 협박 회유하기 시작한다. 16일 가족들이 벽제에서 화장한 유골을 임진강에 뿌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씨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해 국민들을 울렸다.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된다. 5월29일에는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 司試 낙방 서울대생 자살/고시원 옥상서 투신

    지난 6일 오전 8시3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9동 C고시원 옥상에서 서울대 휴학생 許洪碩씨(27·미학과 4년)가 13m 아래 화단으로 투신,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진 許씨는 일기장에 “세상이 너무 변해 살기가 힘들다,살기가 힘들 때에는 죽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등 세상을 비관하는 내용을 적었다. 許씨의 고교 동창인 金모씨(27)는 “96년 군에서 제대한 뒤 고시준비를 해오다 지난 6월 사시 1차시험에 낙방한 뒤 ‘살기 싫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내성적인 許씨가 시험에 떨어진 뒤 추석에도 대구의 집에 내려가지 않는 등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변사람들의 말에 따라 낙방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 민주열사 열전:4/金相眞 서울농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할복 자결… 反 유신의 魂으로 부활/학생운동사 목숨 던진 첫 인물/꺼져가던 투쟁의 불씨 되살려/암울한 시대 희망의 새싹 틔워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합법을 가장한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75년 4월11일 상오 11시. 서울대농대 4학년 金相眞은 수원에 있는 농대 캠퍼스에서 그렇게 ‘양심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격정의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차분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는 비장함에 묻혀 이내 사그라졌다. 선언문 낭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이 보잘것 없는 생명,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는 말이 나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 그는 품속에서 과도를 빼 치켜들었다. 그리고 하복부를 깊게 찔러 위로 그어올렸다. 그는 친구들에게 들려 택시까지 가며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수원도립병원에서 1·2차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중이던 12일 상오 8시55분 그는 앰뷸런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죽어가며 “애국가 불러주오”金相眞 열사는 민주화투쟁 학생운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최초의 인물이다.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죽음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했고,그 파장까지도 충분히 예측했던 것 같다. 75년 2월 朴正熙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의 승리를 내세워 강경으로 선회했다. 정부가 약속했던 구속학생과 교수들의 복학·복직을 불허하고 극심한 언론탄압을 일삼는 등 유신체제가 오히려 폭악화되자 그는 어떤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미온적인 동료·후배들의 자세도 그를 피할 수 없는 ‘결단’으로 밀어댔다. 그는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꼼꼼히 작성했다. 그리고 4월9일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8명이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가 무섭게 사형당했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과도를 구입했다. 인혁당사건은 10년 뒤인 95년 모방송사가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법사상 ‘가장 치욕스런 판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상진기념사업회 安鍾健 회장(50·방송대 교수)은 “相眞이는 복학후 되도록 시위에서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74년말부터 급격히 암울해지는 시대상황에 매우 당혹스러워했고,무언가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회고했다. 安회장은 金相眞 열사와 고등학교 및 대학 같은 과 동기다. 그는 또 “相眞이가 할복 전날 밤 자신을 찾아와 칼을 보여주며 가족과 애인 걱정을 했다”고 전한다. “相眞형은 항상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어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때다’‘내가 해야할 것 같다’고 결의를 나타내기도 했구요”후배 鄭鉉敦씨(축산·74학번)의 회고다. ○시위 확산에 긴급조치 9호 선포 朴正熙 정권은 金相眞의 죽음이 반유신의 상징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숨을 거둔 지 15시간만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게 했으며,서울대 농대를 사실상 폐쇄했다. 각 대학에도 휴교·휴강 조치를 내려 4월 중순까지 25개 대학이 전면 휴강에 들어갔으며,시위 주동자의 대량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5월13일 체제에 관한 어떤형태의 반대의견이나 행동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5월 22일 관악 캠퍼스에서 기어이 ‘金相眞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고 긴급조치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5·22사건’이다. 朴炯圭 목사는 95년 金相眞 20주기 행사때 “모든 사람들이 좌절할 때 꺼져가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긴 이가 金相眞 열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튼 민주화와 정의의 물길을 우리가 제대로 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반문했다. 당시 5·22사건으로 수배됐던 金槿泰 의원(국민회의)은 “金相眞형과 그 사건은 아직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진정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의 폭압아래 똑같은 나이(27살)에 옥사한 尹東柱의 ‘서시’는 그의 이상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金相眞 열사는 尹東柱의 ‘서시’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민주화투쟁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승화됐고 밝은 미래의 희망으로 존재할 것이다. ◎어머니 朴載娟 여사의 통곡/“정부에 의한 명예회복 평생소원” “에미로서 자식 마음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겪다 가게 했어요…” 金相眞 열사의 어머니 朴載娟 여사(80)가 아직도 못내 아쉬워하는 점이다. ‘군대까지 다녀와서 데모에 끼겠느냐’며 항상 어머니를 안심시키던 아들. 그가 죽자 슬픔과 원망이 뼈에 사무쳤지만 朴여사는 차차 목숨을 던져야 했던 아들의 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相眞이는 유난히 정이 많고 심지가 깊었어요. 친구를 무던히도 좋아했지요. 친구들을 몰고와 내가 음식상을 내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어머니는 95년 20주기 행사때 손수 음식을 장만해 벽제 묘소로 가져가 100여명의 아들선·후배 동료들을 먹였다. 朴여사는 아들이 죽자 병원에서 “제발 화장하지 말고 묘를 쓰게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은 포항에 있던 맏아들을 불러올려 억지로 설득해 화장을 강행했다고. 그녀는 “화장터로 쫓아가 ‘우리가 뿌릴 터이니 유골단지를 달라’고 해 중앙청 옆 법륜사에 감췄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후에 金相眞 열사는 벽제공원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朴여사는 현재 서울 갈현동 자그마한 한옥에 혼자 산다. 신경통과 위경련을 앓고 있지만 심하지는 않은 듯했다. 고려컨테이너 부사장인 맏아들 상운씨와 대한투신 원주지점장으로 있는 둘째아들 상근씨 등 8남매가 모두 건실하게 살고 있어 흐뭇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들이 공식적으로 정부에 의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죽기 전에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후배 鄭赫基씨의 맺힌 恨/“긴 겨울 몰아낸 ‘민주햇살’ 빛 봐야” 김상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鄭赫基씨(42·산야농산 대표)는 “相眞이 형이 죽은 이후 학생들은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재야나 지식인들이 자기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金相眞 할복사건이 유신독재정권이 내리막길을 걷는 시대적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朴正熙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달해 정권 말기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죠. 공권력으로는 도저히 국민의 항거를 막기 힘들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 당시 축산과 새내기였던 그는 金相眞 열사가 할복하는 순간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뒤에 있던 선배들은 그가 칼을 빼드는 순간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덮쳤지요. 그러나 정작 저는 ‘단순히 각오를 다지기 위해 빼들었겠지’했어요. 그런데 막상 할복하고 쓰러지자 정신이 멍하고 아찔했습니다” 그는 “그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鄭씨는 지난 95년 기념사업회가 출간한 金相眞 열사 평전 “긴겨울 얼음뚫고’의 정리작업을 맡았었다. 3년이나 걸린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대한 빚갚음의 의미도 있지만 相眞이 형의 진실이 진정한 역사로 기록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화가 후퇴하고 권력이 부패하면 언제라도 제2,제3의 金相眞이 나올수 있다”는 鄭씨. 그는 “全·盧 시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며 “지금의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이 항상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金相眞 열사 연보 ▲1949년 金東壽·朴載娟씨의 3남6녀중 여섯째로 서울에서 출생 ▲1962년 혜화국민학교 졸업 ▲1965년 보성중학교 졸업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서울대농대 축산학과 입학 ▲1971년 군입대.경기 포천의 공병대에서 근무 ▲1974년 2학기 복학 ▲1975년 4월11일 서울대 수원농대 교정에서 유신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낭독하고 할복 자결 ▲1975년 4월12일 상오 8시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도중 사망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5·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거듭나야할 법조/“권력이익이 우선” 탈법 방조/악법운용에 직간접 연관 고문 등 양심수주장 외면/최근에 검은돈에도 연루 ‘최후의 인권보루’ 요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법을 순진하게 잘 지키는 사람만 손해본다” 우리사회에 그동안 유행돼온 법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말들이다.이는 법이 결코 대다수 국민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인식의 결과이다. 이런 법치문화의 위기는 법을 악용하고 조작한 독재권력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법조인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악법과 법 운용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법부와 검찰은 왜곡된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의 법조로 거듭나고 있는 것일까.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그 역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태입니다. 특히 1987년 이래 폭발적으로 분출해온 온 국민의 민주화열기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오늘날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88년 6월15일 서울지역의 판사 59명이 발표한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란 성명서 내용의 일부다. 이 성명사태는 전국 법원으로 확산됐고,마침내 金容喆 대법원장의 퇴임과 李一珪 대법원장 취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와 움직임은 없었다. 수많은 양심수를 양산해내고 고문 주장에 얼굴을 돌렸던 부당한 재판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도,사죄 한마디도 없었다. 수색영장 남발,고문주장 사건의 증거 인용 등 탈법적인 수사활동을 조장·방조하는 일이 이어졌다. 검찰은 행정부에 소속된 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검사들은 업무의 특성상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도록 준사법관으로서 법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따라서 검찰이 성역없는 법 적용을 통해 추상같은 검찰권을 세워야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검찰은 그동안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지난 88년 金淇春 검찰총장의 취임사는 국민들이 검찰의 변신에 대한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국민에 준법을 선도하고 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검찰부터 수사상의 적법절차를 엄히 지키고…,우리 검찰권이 중립성과 독립성이 존중되어야하는 국가공권력임을 잠시라도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임사로 끝났다. 사법부와 검찰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아직도 씻겨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올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법조인들의 돈과 관련된 비리사건들은 우리 법과 법조인의 왜곡됨이 그 한계에 다다른 느낌마져 주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민들이 법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법조인들을 신뢰하고 존경할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은 수백만달러의 연봉이 보장된 변호사를 포기하고,수십만달러를 받는 봉급장이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미국 국민들이 있고,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결정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우리 법조인들이 깊이 되새겨보아야할 점이다. ◎시국사건판결 50년명암/권력에 맞선 소신 판사 줄줄이 해임/반공법사범 석방하자 뇌물사건 엮어 보복/대법원장이 “현실을 직시하라” 훈시하기도 격동의 반세기 속에서 많은 판사들이 권력의 편에 섰다. 굴욕을 거부하고 용기있게 권력에 맞선 법조인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굴욕을 감수하면 살아남고,이에 맞서면 옷을 벗어야 했다. 정의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법조계의 반세기도 이같이 굴절된 어두운 역사로 얼룩져 있다. 1958년 7월 서울지법 유병진(재판장)·이병용·배기호 판사는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된 조봉암 진보당위원장에게 국가보안법 일부 위반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정적제거를 위해 사건을 조작한 이승만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같은 달 조용순 대법원장은 사법감독관회의를 열어 “법관이라 하여 국가목적을 위한 숭고한 정신을 망각하고 주관적인 견해만을 고집한다면 국가이념에 배치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라고 훈시했다. 사법부의 수장 스스로 정치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어 서울고법 김용진(재판장)·최보현·조규대 판사는 항소심에서 조봉암에 사형을 선고했고,다음해 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7월 사형이 집행됐다.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판사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법관 연임이 거부됐다. 판사가 권력에 맞서 소신판결을 내리면 즉각 권력의 반격이 뒤따랐다. 대법원은 71년 국가재정 형편을 이유로 군인과 군속이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대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 판결에 참여한 대법원판사 9명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2년후 모두 의원면직됐다. 또 비슷한 시기에 신민당사에 들어간 서울대생들과 월간 ‘다리’지 사건에 연관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임중빈씨 등에 대한 무죄가 선고됐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보복을 불러,반공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 판사들이 제주도에 출장가면서 항공료 등 9만3,000원의 뇌물을 받았다며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 기각과 재청구,재기각 사태가 벌어졌고,급기야 전체 법관의 3분의 1인 153명이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 유신시대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때이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해 합헌이라고 판결,독재정권의 손을 들어줬다. 국민들의 저항권 자체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민복기 대법원장은 75년 법원장회의에서 “현실을 직시하라.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이고 사법부의 권위를 앙양시키는 길인가를 생각하라”고 훈시했다. 이때 판사들은 대다수의 긴급조치 위반자들에게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朴禹東 변호사 인터뷰/“법조인들 나약해 법치주의 위협받아”/통치권자 사면권도 남용되면 곤란/오판위험 줄이게 피고·원고 모두 연구를 “법조 50년에 대한 평가요? 법조인치고 우리 법과 법조인이 제역량을 해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朴禹東 변호사(64)의 우리 법조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인색하다. 그 자신 33년간 판사생활을 했고 지금도 재야법조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은 사정이 없다. 법치가 외면받고 위협받아온 가장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법조인들의 나약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에 과감히 맞서 싸운 법조인이 많았다면 독재정권이 오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고만 있어도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요. 법치주의가 서려면 지금이라도 법조인들이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대법관,법원행정처장 등에 임명될 때 마다 ‘학구파’,‘선비형’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朴변호사. 그는 후배 판사들이 존경하는 선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몇 안되는 법조인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은 판사시절을 돌이켜보며 “왜 좀더 깊이 검토하지 못했을까.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만큼,원고와 피고 양쪽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했던 것일까”라고 반문해보곤 한다. 그리고 항상 후배들에게 “50%가 아닌 100%의 연구와 검토를 양쪽 모두에게 쏟으라고 주문한다고. 그래야만 오판의 위험을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법조가 일부 판사와 변호사들의 비리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것에 대해 朴변호사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99.9%의 판사는 깨끗하고,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변호사들의 수임 관련 비리도 대한변협의 적극적인 자체정화 노력으로 점차 자취를 감출 것으로 내다 봤다.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변호사들은 수임이 어려워 비리의 유혹을 받기 쉬운 만큼 개업보다는 법인에 취업하기를 권했다. 사법개혁 차원에서 사법시험 합격자를 양산하는 것에 대해 그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법조인 수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과 사법시험 체제에서 합격자만 늘리는 것은 법조인의 질을 떨어뜨릴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전에 외국의 로스쿨 같은 폭넓은 시각을 갖춘 법조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해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朴변호사는 법치문화 정착을 위해서는 통치권자의 사면권 남용도 지양돼야 한다고 본다.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이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대법원에서 확정받고,해도 넘기기 전에 풀려나는것을 보면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했겠느냐고 했다. 그는 “앞으로 대통령은 과거와 같은 ‘고유권한적·자의적 사면권 행사’라는 의혹을 받지 않도록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특집기획팀 ▲李昌淳 팀장 ▲許南周·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가족 대담

    ◎“젊은이들 값진 죽음 관심 가질때”/묻어둔 진실 캐 역사속의 자리 찾아줘야 연세대생 李韓烈군이 전경이 쏜 직격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숨진게 87년 7월5일.그의 어머니 裵恩深씨(58)는 10년이 더지난 지금도 아들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裵씨는 자신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가족을 둔 사람들이 모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회장을 맡고 있다. 이보다 앞서 같은해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끝에 사망한 서울대생 朴鍾哲군의 부친 朴正基씨(69) 역시 이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서고 있다.두사람의 대담을 통해 민주화 희생자 가족의 바램을 알아본다. ▲朴씨=서울신문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서울신문 독자들,나아가 전 국민들이 피지도 못하고 죽어간 젊은이들에게 깊은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裵회장=자식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자식이 죽은 뒤 많은 것을 배웠어요.자식의 죽음이 행여나 헛될세라 노력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회원 어머님들이 매달에 만원씩 내고 대학생 축제에서 장터를 열어 협의회 운영비를 대지만 돈 불평은 없습니다. ▲朴씨=유가족협의회는 86년 만들어졌습니다.87년 韓烈,鍾哲이가 죽었을때만 해도 회원수가 20명을 넘지 않았으나 5·6공과 金泳三 정부를 거치면서 328명으로 늘었습니다.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학생,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다 사망한 근로자 등 희생자들은 자기 개인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양심에 따라 하다보니 죽음에까지 이른 것 아닙니까. ▲裵회장=5·18 18주기 행사를 보고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어요.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구요.4·19나 5·18희생자들은 명예회복이 되는데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희생당한 이들도 빨리 명예회복이 되어야한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朴씨=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공권력에 의해 죽어간 사람이 많습니다.지금 진상을 덮는다고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정부와 기성세대가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 희생자 명예회복의책임을 져야 합니다.민주희생자 합동묘지를 만들고 기념관도 건립,후세에 남겨야 합니다.정부는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경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경제도 중요하지만 민주화도 중요합니다.인권 이상 가는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바로 특별법을 제정해 민주 희생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합니다. ▲裵회장=金대통령을 직접 만나기 힘들어 이렇게 언론을 통해 말씀드립니다.대통령께서도 유신시절 일본에서 납치되어 바다에 산채로 던져질뻔한 경험이 있고,또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사상시비로 고초를 겪었습니까.대통령 스스로는 저희들의 심정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그때문에 金대통령의 당선과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손꼽아 기다려온 것입니다.대통령 혼자 새기시지 마시고 바로 실천하도록 지시를 내려주십시오.민주희생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은 대통령 직권으로 해주셔야 합니다.양심수 추가석방도 간절히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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