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민주, 버려야 산다/박찬구 정치부 차장
덕지덕지 때 묻은 스티로폼과 은박지 깔개, 두 손으로 여민 얇은 홑이불이 전부였다.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경사진 진입로에 ‘용산 유가족’은 그렇게 둥지를 틀었다. 또 다른 ‘용산 유가족’이 아래쪽에서 주섬주섬 잠자리를 챙겼다. 그녀들 옆에는 ‘보장하라’는 글과 함께 ‘생존권’이 피켓 속에 갇힌 채 널브러져 있었다. 같은 시각, 공사가 한창인 신청사 앞 서울광장에서는 요란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분, ‘함께’ 불러요.” 가수의 외침이 이어졌다. 지난 추석 연휴 전날 밤이었다.
‘용산’은 세기 초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야만(野蠻)의 현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용산참사에서는 정부도 정치도 보이지 않는다. 여당은 그렇다 치고 제1야당도 대안과 지평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민주당의 시계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멈춰 버린 듯하다.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버거운 숙제를 짊어지고 우왕좌왕하는 몰골이다. 박원순이 고소당하고, 김제동이 퇴출되고, 손석희가 압박을 받아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목소리는 “정치 보복”에서 그치고 만다. 상황 타개를 위한 어떤 기제도, 동력도 민주당에서는 찾을 수 없다.
“여당 내 쇄신 기류가 묻힌 1차 책임은 민주당에 있다.” 한나라당 초선 의원은 “민주당이 허약해 여당과 정부의 긴장감이 떨어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의 위기는 낯설지 않다.
지난 대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보개혁 진영이 패배를 예감할 때다. 민주당의 전신인 대통합민주신당 안팎에서는 대선보다는 ‘대선 이후’를 고려해 정책정당의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정체성 논쟁이다. 하지만 미련은 눈앞의 대선에 집착했고, 인물에 매달렸다. 그로부터 2년 후 민주당은 여전히 대안과 비전에서 뒤처지고 있다. “그때 ‘대선 이후’를 제대로 고민했다면….” 가정법은 어리석다. 당시 상황 타개를 위한 승부수도 거론됐다. “수도권 386 의원들이 모두 의원직을 내놓자.” 무위로 끝났다.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7일 23차 라디오 연설 이후 새로운 레토릭을 구사하고 있다. 연설문에는 경기 포천시의 장애인 직업시설에서 만난 전현석씨와 구리시 재래시장의 어느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 대통령은 “코끝이 찡”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힘내십시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민생 사례를 언급하며 여론의 감성에 호소했다. 한 야권 인사는 “그건 우리의 영역이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레토릭의 변화가 우호적인 정치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수사에 그칠 수 있다. 말과 실천은 별개라는 얘기다. 두고 볼 일이다. 야권 인사의 탄식은 그보다는 민주당이 의제 설정(어젠다 세팅)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됐다.
“정 후보가 당선됐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용산참사 현장에 천막을 치고 ‘용산 지킴이’가 된 한 신부의 마중 인사에 무소속 정동영 의원은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흐느꼈다고 한다. 역시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그 신부는 민주당의 역할 부재를 지적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민주당의 무능함은 안줏거리로 회자될 정도다. 최근 일이다. “민주당은 뭐하는 거예요. 용산만 해도, 그 흔한 모금운동이라도, 뭔가 하는 시늉은 내야죠.” 역설적으로, 아직도 민주당에 거는 기대가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버려야 산다. 기득권을 놓고, 틀어쥔 주먹을 펴야 한다. 당 대표부터 측근을 물리치고, 대표직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손바닥에 ‘대통합’을 제대로 쓸 수 있다. 그것이 야당의 감동이다. 만시지탄이겠지만, 나를 살리고, 진영을 세우고, 야만과 맞서기 위한 미약한 시작은 바로 거기서부터다.
박찬구 정치부 차장 ckpark@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