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판사’ 시대 오나
인사철마다 고위 법관들이 줄사표를 던지는 현상이 수그러지고 있다. 변호사 시장이 침체된 데다 지난해 도입된 단일호봉제의 영향일 것이라고 법조계는 분석한다. 대법관이나 고위 법관이 못되더라도 ‘평생 법관’을 하겠다는 생각이 확산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30일 대법원에 따르면 다음달 정기인사를 앞두고 일부 법원장급이 사의를 표명했지만 예년에 비해 그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대법관교체 인사 앞두고 사의 급감
법원은 대법관 인사 주기인 6년에 한번씩 소용돌이를 맞는다. 대법관이 결정된 뒤 떨어진 선배, 동기 판사들이 일제히 용퇴하는 까닭이다.6년 전인 99년에는 전체 판사 1367명 가운데 97명이 옷을 벗었다. 퇴임 비율이 6.7%에 이르러 재판일정에 차질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도 나왔었다.
올해 사의를 표한 판사는 60명 정도다.1월 현재 1870명인 전체 판사의 3.2%다. 이근웅 사법연수원장(사시 10회), 김인수 서울행정법원장(12회), 오세립 서울서부지법원장(13회), 김재진 부산고법원장(13회) 등이 사표를 냈고, 서울고법 부장판사(차관급) 2명도 사의를 전달했다. 지법 부장판사 등 일선 판사 50여명도 사표를 낼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시 13회인 양승태 특허법원장이 대법관에 임명됐는데도 김동건(11회) 서울고법원장, 강완구(11회) 대구고법원장은 그대로 남았다. 조용무(13회) 대전지법원장과 송기홍(13회) 서울가정법원장은 오는 2월과 7월 만 63세로 정년 퇴임하기로 했다.
●6년전 퇴임비율 6.7%→올 3.2%로
지법부장 판사 사이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올해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할 법관은 대부분 사시 22∼23회다. 예년에는 한 기수 가운데 3∼4명이 고법 부장으로 승진하면 나머지는 탈락과 동시에 용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올해에는 22∼23회는 물론 사시 21회 판사들도 법원에 남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승진 인사 대상자인 한 부장판사는 “판사를 계속하고 싶어도 승진에서 떨어지면 눈치보느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대법원도 중견 판사의 사직을 막고 판사의 연소화를 우려하는 분위기라 마음이 한결 편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도입한 법관 단일 호봉제가 변화의 원동력이라 법조계는 말한다. 대법원은 모든 판사를 대법관과 판사로만 구분하도록 법률을 개정했다. 법원장, 고법부장을 직급 개념에서 보직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대법관, 고법부장 판사, 판사로 나눠 호봉을 결정하는 것이 승진에 탈락한 판사들을 쫓아내는 원인이란 지적에 따른 것이다. 다른 부장판사는 “승진 탈락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만, 최소한 경제적 불이익은 사라져 퇴임할 것인가 한번 더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승진 탈락자들도 사표관행 제동
변호사 업계의 침체도 법관들이 선뜻 사직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대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과거엔 ‘힘들면 개업하면 되지’라고 쉽게 말했는데 요즘은 엄두를 못낸다.”면서 “판사 출신이라해도 전문성이 없으면 사무실 운영도 어렵다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대한변호사협회 김갑배 변호사는 “로펌이나 기업체로 가는 것도 한계에 이르면 승진과 상관없이 평생 판사로 퇴임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면서 “배석, 단독, 부장 등 다단계 승진구조를 완화해 이런 분위기를 정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