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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실 ‘소충·사선 문화제’ 폐막

    전북 임실군민의 날과 함께 열리는 ‘소충·사선(昭忠·四仙)문화제’가 향토색을 살린 지역축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난 4일부터 8일까지 열린 제38회 소충·사선문화제에는 주민 화합 한마당잔치에 관광객들이 크게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무사고와 풍년을 기원하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막을 연 이번 축제는풍물시장,향토음식경연대회,농악경연대회,시조경창대회,서예전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마련돼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번 축제에서는 유종근(柳鍾根) 전북지사가 특별대상을 받는 등 부문별로 소충·사선문화상 수상자 7명이 선정됐다. 이형로(李瀅魯) 임실군수는 “소충·사전문화제를 흥겹고 신명나게 전통문화를 만끽할수 있는 전국적인 문화예술행사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정치·뉴스라인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이 고향인 거제도에 자신의 개인 기념관 건립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도동 관계자는 2일 “YS의 고교(경남고) 동문과 친구들이 내년 착공을 목표로 구체적인 추진일정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오는 12월쯤 서울이나 부산에서 서예전시회도 가질 예정이다. ■여야 386 등 젊은 초선의원들이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반대하고 정부 예산지원을 저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민주당 김성호(金成鎬) 송영길(宋永吉) 임종석(任鍾晳) 정범구(鄭範九) 이종걸(李鍾杰) 의원과 한나라당 정병국(鄭柄國) 심규철(沈揆喆) 안영근(安泳根)의원 등이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이들은 조만간 모임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기념관 건립에 지원될 정부예산이 국회에 제출될 경우 처리를 적극 저지할 방침이다. ■오는 30일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나서는 김근태(金槿泰)지도위원을 지지하는 모임이 노무현(盧武鉉)지도위원과 이창복(李昌馥)의원 등 10명의 원내외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2일 오전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렸다. 이재정(李在禎) 이호웅(李浩雄)의원이 주도한 이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정통세력이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철학과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나갈 차세대 한국정치 주도세력으로서 김지도위원의 당선이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김종필(金鍾泌) 자민련명예총재의 회장직 사퇴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 엄호성(嚴虎聲)의원은 2일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당리당략에 따라 국회법 개정안의 날치기를 유도했고 개인적인 골프약속 때문에 국회 개의시간까지 바꾸게 한 김명예총재는 회장 자격이 없다”며 연맹에 소속된 한나라당 의원 87명의 사퇴서명운동 동참을 호소했다.
  • 이 사람…송파구보건소 기능직8급·서예가 김재신씨

    “생이 다하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을 겁니다” 서울 송파구 보건소 보건행정과에는 이순(耳順)을 앞두고도 두마리 토끼를잡기위해 열정을 아끼지 않는 이가 있다.20여년을 공직에 몸담아온 공무원이지만 서예가로 더 잘 알려진 김재신(金在信·57·기능8급)씨. 그는 지난 20∼23일 세종문화회관 1·2·3전시실에서 서예전시회를 가졌다. 일반인이 세종문화회관 3개의 전시실을 모두 대관,개인전시회를 갖는 것은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전시회에는 단군의 천부경과 천부인,애국지사들의 우국시편,불경의 금강경,팔만대장경의 경문목록 등 김씨가 지난 12년동안 써온 작품 109점이 전시됐다.근무를 해야 하는 낮시간을 피해 밤과 공휴일을 이용,틈틈히 작품활동을한 결실이다. 김씨는 80년대 초반부터 병마와의 싸움을 계속해오고 있다.이런 그가 몸 구석구석을 떼내고 잘라내면서도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서예다.어린시절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배웠던 한학을 기초로 차근차근 서법을 연마하며 병마를 이겨냈다. 서도(書道)를 향한그의 굳은 의지는 결국 92·93년 대한민국종합미술대전특선을 시작으로 92∼95년 4차례에 걸친 한국서화예술대전 특선,99년 예술대전 우수작품상 수상 등으로 이어졌다.김씨는 “아픈 몸에 때로는 절필(絶筆)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준 서예를 버릴 수는 없었다”면서 “이제는 일과 작품에 다 열중할수 있어 붓을 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졌다. 최여경기자 kid@
  • 움직이는 서예 독특한 아름다움

    ‘움직이는 서예전’. 서예가 유경식씨의 서(書)예술 이벤트 ‘유경식의 열린 서예전’이 경기도 성남시 분당 중앙공원에서 열린다(20일까지). 서예는 벽에 걸어 놓고 글의 내용이나 글씨의 조형성 등을 감상하는 정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이처럼 야외로 끌고 나와 관객들이 직접 만지면서 감상하도록 한 것은 이번이 국내 처음. 서예의 이벤트화,장식이 아닌 기치(旗幟)로서 서예,움직이는 서예로의 연출,민족 고유의 풍습의 순수예술로 환골탈태 등을 위해 마련됐다. 유씨의 예술철학에 맞게 한글의 모음이나 자음과 닮은 갖가지 형상을 깃발로 내건 이번 설치전은 한마디로 그리예술의 극적인 퍼레이드다. 장례식에 사용하는 만장(輓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0346)716­6104
  • 한글서체 다양한 해체/여태명 서예전

    한글서체에 대한 다양한 해체작업을 거듭해오고 있는 서예가 여태명씨가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하는 개인전을 지난 29일부터 서울 서초구서초동 서초갤러리(523­1213)에서 갖고 있다. 여씨는 전각과 문인화 현대서예 등 파격적인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서예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작가.전각기법으로 하드보드에 응용한 지각예술과 민체연구 물파시리즈전으로 발전해가면서 캔버스 오일 아크릴칼라 민예품 오브제 등 각종 재료에 의한 실험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원시적인 이야기가 담긴 일련의 암각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과 함께 종전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을 내놓고 있다.흑백의 대비가 나타나는가 하면 붉은 태양과 꽃·새·짐승·인물까지 등장하는 해체된 모습의 서예작품들이다.5월5일까지.
  • ‘호두까기 인형’ 12년간 26만 관람

    ◎예술의 전당 부문별 최단관객동원작 선정 월간소식지 ‘예술의전당’은 12월 지령 1백호를 맞아 특집으로 예술의전당 기획 공연·전시중 부문별 최다관객 동원작을 선정,발표했다. ▲오페라=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초청 ‘살로메’(94년4월12일∼17일).1만여명 동원.정명훈씨의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취임 공연. ▲무용=‘호두까기 인형’(12년 연속 210여회 공연).26만명 동원.예술의전당 공연은 94년부터. ▲연극=‘덕혜옹주’(95년5월3일∼6월4일).45회에 걸쳐 2만2천여명 관람. ▲아동극=‘베짱이의 모험’(97년7월23일∼8월2일).8천348명 관람. ▲콘서트=‘청소년음악회’(90년부터 3월∼12월 매월 셋째주 토요일).13만명 관람. ▲미술전시=‘고대 이집트 문명전’(97년6월4일∼7월22일).22만935명. ▲서예전시=‘위창 오세창전’(96년3월12일∼4월7일).6천451명.
  • 서예가 이미경(이세기의 인물탐구:146)

    ◎글씨마다 유·절·곡… 궁체의 대가/획과 여백이 미 조화 붓끝에 예술혼 담아/작품 미·캐나다박물관 소장 ‘국제 서도인’ ‘멀고 먼 서법의 길/가도가도 끝없어라/지름길 따로 없어/한 골로만 모는 채찍/외로운 발자국마다/내모습이 찍힌다’ 한글서예중에서 궁체의 우뚝하고 독보적인 존재인 꽃뜰(하정 이미경)의 시조 ‘서법의 길’ 전문이다.그는 틈틈이 남모르게 써온 시조들을 모아 지난 여름 ‘붓끝에 가락 실어’란 제목으로 시조집을 엮어냈다.서여기인이라면 시·서·화에 능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서예가의 타이틀로 시조집을 펴낸 것은 아마도 꽃뜰이 처음일 것이다.그의 글씨만큼이나 시조 또한 구절구절 영롱하고 근엄하여 마지막 이조여인의 기개인 ‘양반은 외부의 자극에 함부로 동하지 않는다’는 ‘강류석부전’을 굳건히 지킨다. ○‘붓끝에 가라길어’ 시조지보 꽃뜰은 바로 한글서예에서 갈물체를 이룩한 이철경(전 금란여고 교장)의 친제이다.언니인 갈물과 비슷한 시기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으면서도 결혼생활로 한동안 서단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고 그의 성격이 남앞에 나서기를 꺼려하여 지금까지 신문이나 잡지에 개인적 풍모가 소개된 적도 드물다.그러나 서예계 원로들이 한글서예를 말할때 ‘꽃뜰’을 으뜸으로 점치면서 일중 김충현은 그가 발간하는 ‘서법예술’에다 ‘꽃뜰의 궁체’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표명한 바 있다.‘고통을 인내할줄 아는 한국여성 특유의 자세로 고전을 발굴하여 계승시킨 여사의 궁체는 아담하며 청초하면서도 그 운필은 찬연하고 풍격은 고고하다’고 했다.우선 그의 글씨에서는 ‘향기’가 우러난다.그의 아호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뜨락이기 때문인지 그가 펼치는 글씨는 한다발의 백매나 홍매,어느때는 모란향같은 기품이 은은히 풍겨나온다. 글씨를 쓰는데 있어 한자는 획수가 많은 편이어서 공간처리가 용이하지만 한글은 획수가 적어 여백처리가 난해한 편이다.이른바 그림에 비유한다면 한글서예는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동양화에 비유되고 한자는 화면을 꽉채우는 서양화에 가깝다.그래서 획과 여백의 비중을 똑같이 배분해야만 치졸이 배제된다.여백처리에서 만약 실오라기만한 틈새를 보여도 궁체가 지니는 특징은 삽시에 소멸된다.백낙청이 ‘비파행’에서 비파소리를 ‘은쟁반에 떨어지는 옥구슬’이라고 했듯이 ‘그의 글씨야말로 옥구슬 금구슬을 꿰어낸듯 오색광채를 발한다.글씨가 구슬인 것은 꽃뜰의 글씨를 보면 실감된다’는 평은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다. 특히 이은상의 ‘만폭동팔담가’며 2천여자가 넘는 ‘관동별곡’,동해에서 해뜨는 광경을 보고 쓴 ‘동명일기’ 등은 10곡병풍을 펼치는 순간 문자그대로 ‘보석이 쏟아지는 현란한 현기증’이 느껴진다.글씨마다 흐르고(유) 맺히고(절) 감돌고(곡) 굽이치면서 정자에서 흘림,진흘림과 반흘림이 초성에서 종성까지 반듯하게 대맥을 이어나간다.그리고 어느 글씨를 쓰든 글씨의 결론은 그것이 예술답게 아름답다는 정답을 얻어내고야 만다.시조시인 정완영은 꽃뜰의 서체에 대해 ‘이분은 청산 한나절 넉넉하게 기대앉은 초가삼간처럼 한유해 보이면서도 자강불식의 심락을 누리는 그림같은 분’이라고 했다. ○이화여전땐 피아노 전공 본래 그의집안은 강원도 원주이지만 한성의학교(서울대 의대전신)를 나온 부친 이만규씨가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4녀2남중 위로 세 언니와 오빠는 개성출신이고 부친이 다시 서울 배화학교 부교장에 부임하여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서예를 하게 된 것은 집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편지쓰실때 글줄이 자를 대고 줄친 것처럼 고르게 뻗은 봉서의 흘림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다.성격이 강명한데다 필재가 뛰어난 것을 보고 부친이 붓을 잡고 천자문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14살 되던해 ‘애련설’을 써서 교내습자대회에서 입선하자 더욱이나 글씨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배화학교 졸업후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그의 음악공부가 글씨쓰는 일에 특별한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이른바 문자예술에서 한번 지나간 것은 다시 덧칠하지 않는 일회성,생체리듬과 음악의 리듬같은 율동성으로 작품을 이루는 순간의 서법등이 음악을 이루는 과정과 같은 맥락을 지녔다는 것이다.그러나 대학졸업후 서울공대 출신인 남상인씨(전 서울공대 교수)를 만나 결혼했고 지금의 홍제동한옥에 정착하면서 시할머니(57년 91세로 작고) 시어머니(93년 97세작고)를 모시고 사는 엄격한 시집살이를 감당해왔다.그의 고옥은 초가을인데도 녹음이 창연하고 청결한 한복차림으로 그는 마루에 나앉아 아침나절이나 마음이 움직일때 붓을 잡는다.요즘은 주로 자작시조를 서두로 잡고 있다. 언니인 갈물이 갈물회를 발족한 것은 58년이고 그는 50대에 들어와서야 뒤늦게 서예활동을 시작하여 갈물회 정회원이 된것은 72년이 처음이다.그때 글씨를 회원전에 내놓았고 ‘유독 그 영롱한 필체가 돋보여 뭇시선을 끌었다’고 생전의 갈물이 자랑한 바 있다. ○‘궁체서예의 제일봉’으로 아직도 꼿꼿하고 청청한 그는 ‘한글서예의 우뚝한 존재’임을 극구 부인하면서도 ‘글에 대한 예술성은 10년정도의 서력으로는 인지하기 힘든 경지이며 보통 30년정도의 서력을 길러야만 서예와 서도를 터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그리고 여전히 멈추지 않고 ‘서예의 대가가 시조의 신인’이 되어 ‘서중유시’를 이뤄낸 것이다.한연대가 흘러가면 한사람의명인에 의해 그 시대의 정서가 아로 새겨지듯이 일중은 번뇌를 해탈하는 ‘오도일이관지’에서 따온 ‘일이당‘을 꽃뜰의 당호로 내려주면서 ‘궁체서예 제일봉의 외로움’을 격려해 마지않았다. 무현고금이라고 했던가.‘줄이 없어도 울리는 거문고’처럼 그의 시서 쌍전은 혼탁한 진토속에서도 백옥같은 빛을 발하며 먼 훗날에도 그의 붓끝은 심혼의 절조를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다. □연보 ▲1918년 서울 출생 ▲1936년 배화여고 졸업 ▲1940년 이화여전 기악과 졸업,미세스 골먼에게 피아노 사사 ▲1958년 갈물서회 발족 ▲1954∼63년 이화여중 서예강사 ▲1970∼74년 서울YWCA 서예반 강사 ▲1972년부터 갈물서회 회원전출품 ▲1974년부터 갈물회 대표 ▲1977년 미국 워싱턴 시카고 LA 샌프란시스코 ‘한글서예’전시 ▲1982년부터 신사임당상 수상,한국미술협회 회원 ▲1983년 ‘갈물 이철경­꽃뜰 이미경’자매전(캐나다 토론토,미국LA) ▲1986년부터 국제서도회 이사 ▲1987년 꽃뜰 이미경 서예전(백악미술관) ▷작품소장◁ ‘동유기(동유기)’(예술의 전당)‘만폭동 팔담가(만폭통 팔담가)’(세종대왕 기념관) ‘한국 여성서체’(미국 시애틀박물관)‘오우가’(샌프란시스코 아시아박물관)‘속미인곡’(캐나다 로열박물관)외 ▷저서◁ 갈물 꽃뜰 공저 한글’(81년) 꽃뜰 이미경 쓴 ‘한글서예’(82년) 이미경 시조집 ‘붓끝에 가락 실어’출간(97년 토방출판사)
  • 정산종사 탄생 100돌 앞으로 3년/원불교 대대적 추모사업

    ◎탄생지 경북 성주군일대 성지 조성/법어 번역·대규모 학술대회 추진도 원불교는 오는 2000년 첫 종법사 정산종사(1900­1962)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부터 추모사업을 대대적으로 준비한다. 우리 고유의 민족종교인 원불교는 최근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기념사업회’(회장 김삼용·전 원광대총장)를 발족,정산종사(본명 송규)의 뜻을 기릴수 있는 각종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1943년 열반한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에게 법통을 이어받은 정산종사는 해방 전후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원불교의 기반을 탄탄히 다져 오늘의 교단을 육성한 주역.기념사업회는 정산종사 탄생지인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일대를 교단의 성지로 지정하고 부지 1만1천여평을 매입,‘정산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다.오는 2000년 완공될 이 기념관은 순례자의 훈련관과 기도실,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원불교 제2의 성지로 태어난다. 사업회는 또 2000년안에 영남지역에 대규모 공원묘지도 조성하는 한편 청소년 훈련소도 건립하고 문제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도 대구 인근에 세운다.전북 익산에 중앙총부를 두고있는 원불교가 올해를 계기로 과거 전남·전북지역의 포교에서 벗어나 영남지역 교화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방침이다. 사업회는 또 학술과 편찬,역경사업에도 전에 없는 관심을 쏟기로 했다.98년 익산에서 99년 대구에서 차례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2000년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연다는 것.또 기념논문집인 ‘정산종사와 원불교사상(가제)’ ‘삼동윤리와 종교협력운동(가제)’ 등을 펴내고 정산종사 법어도 영어와 일어·중국어·에스페란토어로 번역한다. 탄생 100주년 해당년도인 2000년에는 대규모 기념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원불교예술제 사진전서예전 미술전시회 등도 개최하고 정산종사의 전기집필과 삼동윤리의 사회화운동 전개 등도 계획중이며 3년전부터 추진중인 FM라디오방송국인 ‘원음방송국’설립도 추진한다. 정산종사는 9살때 ‘통감’을 읽고 나라를 바로잡는 큰 인물이 되겠다는 뜻을 품은뒤 스승을 만나기 위해 1917년 전북 정읍을 찾아 ‘불법연구회’라는 교단을 창설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삼고 원불교 교단을 창건했다.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그의 유지에 따라 교단발전에 진력,원광대학을 설립하고 원불교역사 ‘불법연구회 창건사’,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시 ‘원각가’,해방후 국가건설 강령을 제시한 ‘건국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열반때 남긴 게송 ‘삼동윤리’는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소태산 대종사의 일원주의에 입각한 세계평화의 실천이념이 잘 드러나 있다.삼동윤리란 ‘한 울안 한 이치’라는 뜻의 동원도리,‘한집안 한권속’의미의 동기연계,‘한 일터 한 일꾼’이라는 뜻의 동척사업을 일컫는다.
  • 서예가 조수호(이세기의 인물탐구:120)

    ◎석고문을 법첩으로 독창적 행장구축/“글씨보다 인품”… 흐트러짐 없는 자세 일관/“개인전은 최상의 기량때 일생 한번” 고집 동강의 글씨는 패기와 강유를 겸하고 그의 난죽은 칼날 같고 풋솜 같고 세찬듯 부드럽다. 음악에 음조가 있듯이 명필에는 선조가 숨어 있다.옛대가의 서체를 두루 완수한 동강의 행초는 「천변만화를 구사하는 경지」에서 일생일작을 놓고 냉엄한 생사의 소명을 수행하는 시기다. 그는 서단에서는 여러 모로 남다른 존재다. 첫째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했다.동양화가 아닌 서양화를 전공한 것은 서구적인 미학의 특성과 이질감을 접목하여 동양예술을 심도 있게 탐색,창조하자는 의도에서다.둘째는 미대재학중 「사군자」성적이 「100점」 만점을 기록한 일화가 있고 25세인 49년 제1회 국전 특선이후 57년부터 연 4회특선,아직 30대초반에 국전추천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만만치 않은 기세로 서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서양학과 전공 이색경력 또 서예를 보는 눈과 이론에 정연하여 강물처럼 쏟아내는 명강의로 유명하다.84년,중국정부주최로 열린 「안진경 서거 1천2백주년 기념 국제서법학술대회」에서 그가 강의한 「안진경의 위치와 중국서법에 끼친 영향」은 중국서단의 거봉인 요몽각·우우임을 감동시켰고 그 내용이 중국 문화일보에 전면게재된 바 있다.이에 앞서 「예술의 파죽지세」로 지칭되는 그의 대작 「난죽도」를 대북의 역사박물관과 중국서화회겸 중국서법학회 이사장이던 마수화와 황군벽이 구입하여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강의 예술관은 「글씨에 앞서 고매한 인품을 먼저 형성시켜야 한다」는 자세가 굳건하다.문자의 의상에서 창출되는 서예술은 글씨의 점과 획,장법도 중요하지만 「부단한 노력과 수련을 통해 진실을 발견해야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는 지론이다.그런 맥락에서 그는 「누에가 실을 토할 때」의 「여잠토사」와 「송곳으로 모래를 그린다」는 「추획사」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고 언제나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심신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붓을 잡는다. 그가 좋아하는 법첩은 전예해행초가 모두 들어 있는 「석고문)」을 최고로 꼽고 있다.「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는 천가지 비문을 배워야만 비로소 글씨를 이룰 수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와 안진경·구양순을 임서하는 과정에서 글자의 형태에 중점을 두는 「형임)」과 운필과 필세를 체득하는 「의임」,마음속으로 외워서 쓰는 「배임」의 과정을 섭렵한 끝에 자신의 체질에 맞는 정묘하고 유심한 행초의 세계에 접근하게 되었다. ○정연한 논리의 달변가 그는 고향인 경북 선산에서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웃의 부탁을 받아 「입춘대길」을 쓰기 시작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전통사회의 엄격한 집안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묵향에 젖어들게 되었고 대구사범 심상과에서 현재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의 부친인 우당 김용하 선생에게 서예와 교육심리학을 배웠다.그때 스승이 추천해준 왕희지의 「난정서」와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은 서법수업에서 일생의 지침서가 되었다. 평소의 성격은 괴팍하며 불의가 싫은 나머지 이에 저항하는 기질이과격한 편이다.가식과 겉치례를 경멸하고 현실과 의기투합한 속물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친구의 범위도 산정 서세옥이나 오정 김진해에 한하고 생존해 있는 유일한 스승인 월전(장우성)을 극진히 모신다.지금도 청년같이 건강하여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정의감은 「원문 한줄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국전이나 서예전에서 입·특선하는 기미가 보이면 추호의 용서없이 몰아붙인다. 『나에게 순탄하고 행복한 역정을 지내왔다고 하지만 나나름대로 고통과 인내,탄압과 분노,좌절과 희망으로 점철된 청춘기를 보냈다』고 그는 돌아본다.『국민학교 교사로 있던 일제시대에는 사상이 불온한 반일교사로 지목되어 왜경의 감시에 시달리다 징병으로 끌려간 적이 있고 6·25때는 굶주림과 뼈저린 외로움을 겪었으며 죽음을 넘긴 여러 번의 체험 탓인지 어떤 일도 함부로 포기하는 일이 없어졌고 침식을 거르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하면서 자신의 운명에 책임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국제전에 출품하고 국제서법학술대회에 참여하면서도 75년 문예진흥원이 주관한 국전초대작가상 수상기념전에 응한 것 외에 서울에서는 정식으로 개인전을 연 적이 없다.이에 대해 동강은 『자연의 사계가 다르고 해마다 피는 꽃의 자태와 빛깔이 다르듯이 나만의 빛과 나만의 자태와 나만의 향기가 절로 우러나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새롭고 신묘한 기운」이 현현할때 일생 단 1회 개인전을 생각할 수 있다』고 밝힌다.다만 그 시기는 예정된 것은 아니지만 첫특선이 50주년이 되는 99년에 지금까지의 화업과 서업을 한자리에 펼쳐 스스로를 돌아보고 검토하고 반성하는 자리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다. 90년 서울교대 정년퇴임후 종로3가 세운상가에 있는 서실에 나와 그는 아침부터 난과 죽의 은은한 향기를 눈부신 백지에 뿜는다.일생을 걸고 한판 승부를 건 듯한 그의 서체는 세상을 질타하는 듯한 필획과 결구를 표출하여 「한획보다는 한폭에 흐르는 탐신의 미학이 구축된」 독창적 풍모다. 가족은 「글씨를 사랑하여 나를 따르던 묘령의 착한 소녀가 어느새 백발로 변한 아내」와 장남의 가족과 함께 종로구 구기동에서 살고 있다.아호는 달 밝은 밤이면 강이나 산으로 밤새도록 헤매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 「월명」을 지어 가졌으나 고향이 낙동강부근이라는 데 착안하여 소전(손재형)이 「동강」을 내려주었다. ○퇴임후 종로에 서실 내 사람과 글씨가 함께 무르익는 「인서구로」를 지나 「마음속에 이미 대를 그리고 있는 흉중성죽」을 성취한 동강은 「묵과 획이 서로 화목하고 운치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심오한 유현의 세계를 유유자적으로 누리는 시기다. 그러나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예술가는 선택된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과 「예술가는 자기노래를 부르면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고,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태워나가는데서 희열을 느낀다」는 진언은 바로 자신을 향한 심혼의 혈서일지도 모른다. □연보 ▲1924년 경북 선산 출생 ▲45년 대구사범 심상과 졸업 ▲47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 입학, 전국대학생미전 「고궁」특선 ▲49년 제1회 국전 서예부문 「어부사」특선 ▲57·58·59·60년 국전 서예부문 연속4회 특선 ▲51년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졸업, 김용진·손재형·김용준·장우성사사 ▲62년 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 ▲68∼90년 서울교육대학 교수 ▲74년 국전초대작가상 수상 ▲75년 초대작가상수상 세계일주기념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77∼83년 제1·2·3회 아시아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76년 한중교류전(대북역사박물관) ▲78∼81년 문교부 1종도서 중학교서예교과서 개발위원장 ▲81년 중화민국 중화학술원서 명예철학박사,중국정부초청 서화개인전 ▲83년 제1∼3회 아시아 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84년 중화민국정부주최 「안진경서거 1천2백주년기념」국제서법학술대회 한국대표,대구매일신문사 특별초대전 ▲85년 문교부 중·고교미술교육과정 심의위원 ▲86년 중화민국 서법학회명예이사,부산일보 초대개인전 ▲91∼현재 한국국제서법연맹 회장 ▲94년 대북국제서법연토회 한국대표 ▲95년 광복50주년기념 95 서울국제서예전 대회장(예술의 전당) ▲96년 대구국제서예전 대회장(대구 문화예술관) 〈저서〉 「근례비편해열」(80년) 「동강 조수호서화집」(81년) 문교부검인정교과서 「고교서예」편찬 〈수상〉 경북문화상(60년) 국민훈장목단장(90년)
  • 여 대권주자들 “정중동”/겉으론 대권논의 해금 기다리며 “동면”

    ◎속으론 주자들간 회동·밑바닥 훑기 분주 대권논의 자제령으로 신한국당 대권예비군도 「동면」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현재 공식 행사라곤 중간쯤 끝난 지구당개편대회가 고작이다.그것도 2∼3명이 번갈아가며 참석,「이미지메이킹」을 하는 정도다. 이 기간동안 눈길을 끄는 움직임이래야 이홍구 대표의 「젊은 후보론」에 이은 출처 불명의 「당정분리 및 민주계 대표설」,지난주 김윤환·박찬종 고문의 청와대 개별면담,그리고 최형우 고문의 「온산 서예전」이 전부이다. 이처럼 외형상 예비주자들의 행보는 일단 「해금」을 기다리는 정치휴년병 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윤환 고문의 얘기처럼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일 뿐이다.한걸음 내딛는 것 자체를 실전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일전을 위한 준비의 성격이 짙다.지난 15일 최고문의 서예전에 1천여명이 몰려 전시회장 일대가 대혼잡을 빚었듯이 주자군마다 대세확보 경쟁과 물밑을 훑는 잠행이 한창이다. 공통적인 특징은 강연·인사접촉 등으로 시간을 쪼개 쓰고 있다는 점이다.이홍구 대표는 공휴일에도 개인적인 조찬 약속부터 시작,종일 잠시도 짬을 내기가 어렵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서예전으로 바쁜 최고문도 15일 전시회 개막식이 끝난뒤 곧바로 강릉대 경영대학원 특강에 참석,「취약지역」을 누빌 정도로 열심이다. 이회창 고문은 다소 관계가 껄끄러운 재계에 자신의 무기인 「대세론」을 전파하기에 여념이 없고,14일 청와대 방문이후 측근들과의 폭음으로 관심을 모은 박찬종 고문은 「강연정치」까지 중단한채 접촉반경을 확대,영입파로 원외라는 취약점의 보강에 역점을 두고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빈도수를 높여가고 있는 주자들간의 물밑회동이 관심을 모은다.지난 8일 최형우 고문·김덕용 정무제1장관의 회동에 이어 지난주 초에는 김윤환 고문과 김정무 장관이 깊숙한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진다.김장관은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사람들의 동지애는 각별하다』며 『개인적인 만남일 뿐』이라고 정치적인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다른 예비주자 진영에서는 정치는 먼저 만남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때 예사롭지 않다는시각이다. 독서광인 이한동 고문은 다음달 출간할 자신의 정치철학과 국가경영론을 담은 책발간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당내 하위직인사들과의 접촉반경을 확대중이다.그는 또 다음달 2일 아랍에미리트 국왕즉위 기념식과 쿠웨이트에 대통령 특사로 출국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진다.
  • 최형우 고문 서예전 개막/500여명 참석 대성황

    신한국당 예비후보군의 대권논의 자제분위기 속에 대권주자의 한사람인 최형우 고문이 15일 하오 3시 서울 안국동 백상기념관에서 「온산 최형우 서전」을 열었다.불우한 장애인들을 돕기 위한 행사다. 이번 행사는 지난 89년 첫 개인전 이후 두번째이다.50점의 출품작에는 그가 즐겨 쓰는 「대하무성(큰 강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도 들어있다. 그래서일까.최고문은 당이 「민주계 대권 배제론」「민주계 대표론」「정치총리론」「당정개편 연기론」등으로 요동을 칠 때도 공식적으론 입을 굳게 닫아왔다.필력이 넘치는 50점의 이번 출품작은 요즈음 그의 정치철학과 포부를 담고있다는 평이다. 이날 행사에는 김수한 국회의장,김용준 헌법재판소장,김덕용 정무제1장관,김윤덕 정무2장관,김상현 국민회의지도위의장,이인제 경기지사,유세준 공보처차관,서석재 김종호 김정수 의원 등 40여명의 의원과 서예은사인 여초 김응현 선생 등 500여명이 참석,대성황을 이뤄 이 일대 도로가 한때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 신한국 최형우 고문/장애인돕기 서예전

    ◎서울·부산서 작품 100점 선봬 신한국당 최형우 고문이 서예전을 갖는다.오는 15일 서울 백상기념관에서,23일엔 부산상공회의소에서 각각 닷새씩 자신의 호를 넣은 「온산서전」을 연다.지난달 부산 「꽃동네」를 방문한 뒤 장애인들을 돕는 방안으로 마련하게 됐다는 것이 최고문측의 설명.수익금은 전액 장애인돕기에 사용된다. 서예에 대한 최고문의 깊은 관심은 정가에 익히 알려져 있다.국회의원서도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조부로부터 서예를 익혔고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5공화국 때는 서예가 김응현 선생에게 사사를 받았다.89년 민주당 원내총무를 그만 둔 직후 가진 뒤로 두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회에 최고문은 각각 50점의 작품을 냈다.그중에는 즐겨쓰는 「대하무성」이라는 휘호도 들어있다.
  • 서울신문/10월1일부터 전면 가로쓰기

    ◎제호 바꾸고 본문글씨 키워/기사는 고급,읽기는 쉽게 서울신문이 10월1일부터 새로운 제호와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하면서 다시 태어납니다. 초일류 고급정론지를 지향하고 있는 서울신문의 혁신적인 지면개혁은 21세기 세계화에 걸맞게 독자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서 보다 많은 정보를 알차게 제공하는 국민의 신문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서울신문의 새 제호는 훈민정음 글꼴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한글고체를 미학적,미래지향적으로 다듬어 여러차례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토대로 마련되었습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독자와 더불어 애환을 함께해온 서울신문은 이번에 전면 가로쓰기를 시행함으로써 국민과 더욱 친밀한 새시대의 젊은 신문이 될 것입니다.가로쓰기는 청소년에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령층이 선호하고 있으며 교과서를 비롯 대부분의 출판물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가로쓰기는 읽기에 편하고 읽는 속도가 빠를뿐만 아니라 정보화시대와 컴퓨터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신문이 당연히 나가야할 길입니다. 또한 현행 본문 서체보다 크고 미학적인 서체(가로 3.25,세로 3.75㎜)를 개발,독자들의 가독성을 한층 높였습니다. 서울신문은 이번 지면혁신을 계기로 독자들로부터 더욱 사랑받는 신문이 되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끊임없는 사랑과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한글고체에 현대적 감각 부각 서울신문 새 한글제호는 한글 고체를 기본으로 하면서 현대적 감각을 살린 형태로 글자꼴의 평형성을 유지하면서도 파격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서체입니다. 각 글자의 원심성을 강조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서체로 부조화속의 조화를 이뤄내 발전적인 미래지향을 추구하는 서체입니다. 새 제호의 작가 신두영씨는 1979년 국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현대미술초대전과 한일서예교류전,한국서예1백년전,국제현대서예전을 통해 아시아권에서 독특한 서체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서예가로 특히 동양적인 감각의 한글서예체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고답적인 서체보다는 현대성을 강하게 부각시킨 이번 서울신문 제호는 신씨의 독창성을 최대한 반영,파격의 묘를 살린 시도로 단순한 서예차원을 넘어 뛰어난 조형성으로 독자 여러분의 신선한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 한글서예의 모든것 보여준다/「오늘과 내일전」오늘부터 예술의전당서

    ◎문자적 조형성 부각… 서예변천사 한눈에 우리의 한글은 얼마만큼 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나.우리민족의 독창적 문자인 한글을 예술적 시각에서 접근,「문자적 조형성」을 부각시키는 대규모 서예전시회가 처음으로 열린다.예술의 전당이 한글반포 5백50돌을 기념,1일부터 25일까지 전당 서예관에서 마련하는 「한글서예의 오늘과 내일전」. 문자문화로서 한글의 중요성이 높이 인식되는 데도 불구하고 문자예술인 서예에서 한문에 비해 크게 소외된다는 지적에 따라 기획된 이 자리에선 한글서예의 근·현대작가 2백명의 작품과 한글서체를 디자인측면에서 시도한 모델을 선보인다. 초대작가중에는 근·현대 작고작가를 비롯해 원로·중견작가,20∼30대 젊은 작가등이 폭넓게 걸쳐 있어 명실공히 한글서예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자리가 된다.특히 현역작가는 모두 신작을 발표,예술성을 최대한 반영하는 서예전의 형식을 갖춘다.유명 작고작가는 남궁억·윤백영·이철경·손재형·서희환씨 등이 포함돼 있고 현중화·김기승·이미경·김충현씨 등 80∼90세 원로현역작가 등 우리 서예계의 대가가 망라돼 있다. 이밖에 중진작가 김응현씨,국전에서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은 서희환씨,미전에서 대상을 받은 김단희씨,서전에서 대상을 받은 현병찬·이은혁씨 등 중견작가,예술의 전당 청년작가전 출신인 20∼30대 유망작가가 참가해 한글서예의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출품작은 정통작품과 실험작품으로 대별되며 정통작품은 궁체와 판본류로 나뉜다.궁체는 정자체·반흘림체·흘림체·궁서변형체 등에서 모두 53점이 출품되고,판본체는 고문과 현대문으로 쓴 정음체류·월인체류·오륜체류 등으로 나누어 60점이 나온다.특히 87점의 실험작이 출품돼 한글서예의 조형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회자문위원인 박병천 교수(인천교대)는 『1백년 한글서예역사에서 기틀마련을 위한 한글서예발전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은 5년에 불과하다』면서 『이 전시는 한문서예에 밀려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글서예의 대중화와 다양한 한글서체개발과 발굴에 목표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김성호 기자〉
  • 고국에 온「학교종이 땡땡땡…」/작사·작곡가 김메리할머니 미서귀국

    ◎45년 전차속서 악상떠올라… 47년 미로/아서 봉사활동… 네일 출판기념회 참석 동요 「학교종이 땡땡땡…」의 작사·작곡가 김메리 할머니(92·미국 거주)가 1일 하오 뉴욕발 대한항공 025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평소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공항에 도착한 김할머니는 『어린이 날을 맞아 고국을 방문하게 돼 기쁘다』며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김할머니는 『어린이들이 밝게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 기쁨』이라며 『그동안 자주 오지못했는데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자주 와서 어린이들과 어울리겠다』고 말했다. 동요를 불러달라는 기자들의 요구에 『학교종이 땡땡친다.어서 모이자…』를 또렷또렷하게 부른 뒤 『원래는 「땡땡땡」이 아니라 「땡땡친다」였다』고 설명하고 『노래가 쉬워 많이 부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할머니가 학교종 노래를 만들게된것은 지난 45년.해방 직후 우리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가 없어 현제명,김성태선생과 함께 초등학교 음악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이다. 김할머니는 『전차속에 앉아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처음 등교하는 정경을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학교종」의 가사와 멜로디가 저절로 어우러져 나왔다』며 작사·작곡의 사연을 밝혔다. 47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김할머니는 미 웨인 주립대학에서 미생물학을 전공,20년간 병원에서 근무하고 78년에는 평화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한국민요집을 펴내고 서예전을 여는 등 활동을 하던 김할머니는 89년 뇌일혈로 쓰러졌다 다시 건강을 회복,자서전을 펴냈다. 김할머니는 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 출판기념회에 참석한다.15일 출국할 예정이다.〈주병철 기자〉
  • 「학교종이 땡땡땡…」작곡가/재미 김메리 할머니 자서전 출간

    ◎13세때 첫 교사생활… 90평생 남위해 봉사/근대화의 격랑 헤쳐온 삶 진솔하게 드러내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해방후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교과서,그 가운데 초등학교 1학년 음악책에 실렸던 동요 「학교종」은 여지껏 애창되는 노래이다. 요즘도 노래 자리에서 사람들이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르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그럼에도 이 노래를 작곡한 김메리할머니(92·미국 거주,미국이름 Mary Kimm)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김할머니의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이 최근 출간됐다(현대미학사 펴냄).이 책에는 90여 인생을 자기계발과 이웃사랑으로 치열하게 산 한 여성의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김메리는 1904년 서울에서 김익승의 셋째딸로 태어났다.아버지가 대한제국 외무대신을 지냈고,해방정국에서 이승만·김구와 함께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은 김규식이 4촌오빠인 명문가 출신.「메리」는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이다. 평생 자기 공부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남을 가르치는그의 삶은 어려서 시작된다.배화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그가 논산의 한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할 때의 나이는 열세살.김메리는 『새 선생이 온다고 교장과 학생들이 마중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나 「아기 선생」노릇은 여섯달만에 끝나고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그러자 집에서는 결혼을 서둘렀고,김메리는 삼촌을 따라 만주 용정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3년을 보낸다.귀국후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친 그는 1930년 미시간대학으로 첫 유학을 가 거기서 전공을 피아노로 바꾼다. 이후 남편이 되는 조오흥씨와의 만남,석사학위 취득과 귀국,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부임,약혼자의 뒤따른 귀국과 결혼으로 이어진다.남편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해야 했고,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이산가족이 된다. 해방이 되자 김메리는 초등학교 음악교과서 편수에 참여,「학교종」을 비롯한 동요들을 작곡한다.해방된 조국의 모교에서 후진양성에 애쓰던 그는 어느날 음악과 학과장 자리를 떨쳐버리고 다시 미국길에 오른다.남편과 합쳐야 하는데다 새로운 학문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가졌기 때문. 이때부터 평범을 거부하는 그의 치열한 삶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웨인대학에서의 화학·미생물학 공부,칠순 나이에 평화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의 2년 활동들이 그것.아울러 미국에서 한국민요집을 발간하거나 서예전을 갖는등 한국문화 홍보에도 애쓴다. 지난 89년 뇌일혈로 쓰러졌던 김메리할머니는 젊은이 못잖은 의지로 건강을 회복했다.국내에서 자서전을 출간한 것과 관련,5월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이용원 기자〉
  • 전통 「해양문화축제」 열린다

    ◎경남 통영서 13∼17일까지 각종 행사 펼쳐/한산대첩 기념… 「해상연주회」 최대 볼거리 우리의 전통 해양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해양문화축제」가 열린다. 문화체육부가 이천도자기축제에 이어 해양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이번 축제는 13∼17일까지 경남 통영에서 열려 이충무공의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각종 문화행사와 관광이벤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해양레저시설 충무마리나 리조트와 한산도 등 주변 볼거리·먹거리도 풍성해 주말 가족여행지로 찾아볼만하다. 13일 전야제에서는 한산도 제승당에서 성화가 채취돼 선박과 육상으로 통영 충렬사까지 봉송된 뒤 한산대첩축제를 알리는 제를 올린다.공설운동장에서 여객선부두까지 축등행렬이 있고 불꽃놀이와 「해군 군악의 밤」행사로 축제무드를 고조시킨다. 14일에는 개막식에 이어 육상군점(해상군점 15일)재현및 승전무(무형문화재 제21호)공연이 펼쳐진다.특히 군점은 임란당시 충무공이 삼도수군의 군비·군력·군기를 점검하던 지금의 사열식행사로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이번행사의 하이라이트는 14일 하오 펼쳐지는 「해상 대연주회」.국내최초의 통영항 해상무대에서 3백50명의 출연진이 국악· 오케스트라·대중음악으로 나누어 음악의 대향연을 펼친다. 국립국악원연주단의 대취타·민요·사물놀이,서울 팝스오케스트라의 라데츠키행진곡·한국환상곡,인기가수 박미경·인순이·주현미 등이 출연해 화합의 한마당을 이루게 된다. 이와 함께 연극·전통무용·백일장·학생음악경연대회·무용경연대회·미술사생대회·서예전·특선영화 등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축제기간동안 시내 일원에서 계속된다. 충무마리나 리조트광장에서는 향토 특산품과 음식이 판매돼 관광객들의 미각을 돋우게 된다. 교통편은 서울발 아시아나항공이 상오9시20분,낮12시30분,하오4시,7시20분 하루 4차례 있고 철도는 진주까지 간 뒤 승용차(1시간)를 이용하면 된다.승용차로는 구마고속도로로 통영까지 7시간 정도 걸린다.
  •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세기의 인물탐구:77)

    ◎비학과 첩학을 접목한 온자한 서풍/우리 전통서예 존중,「옛것」 부활 노력/동방연서회 설립… 후학 7천명 양성/보통학교때 붓글씨 시작… 단 1점의 타작도 안써 「고졸하나 우둔하지 않고 활달하나 법도가 있고 염미하나 속되지 않고 웅혼하나 패도하지 않아 강과 유가 서로 돕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즉 『글자마다 생동미 넘치는 운필은 자연스러운 리듬과 균형미에 따라 「중화의 기」가 흐른다』는 뜻이다.이는 여초 김응현 서법에 대한 종명선 교수(서안교대)의 평이다.종교수는 현재 중국서협 학술위원이며 평론가,중국서법대가의 한 사람이다.지난 92년 한·중건교기념 김응현서법전에 붙여진 이 찬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경사범대 교수이며 당대 명서법가로 명성을 떨치는 계공은 여초의 서법을 전대의 대가인 추사와 비유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다.우선 두 사람이 모두 「금석고고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비학과 첩학의 접목을 중시하여 자재로운 천취를 얻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단지 추사의 글씨가 「바람을 끼고 비를 몰고오듯 유유자적하게 걸어나오는 데 비해 여초의 서법은 유고유아한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70년대 북경서 초대전 널리 알려지다시피 여초는 우리 서예계에서 옛것을 존중하여 전통을 부활시키며 이를 연구하여 마침내 새로운 것을 이뤄내는 데 전생애적 노력을 기울여온 원로다. 그는 일찍이 국제무대로 눈을 돌려 70년대 중반에 대북과 도쿄에서 각각 초대전을 가졌고 80년대말에는 본격적으로 중국본토에 진출하여 북경의 계공,상해의 사치유·왕북악등과 교분을 트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북경 천안문광장 혁명기념관에서 개인전을 개최,연변·장춘·심양등을 순회하여 그곳 서예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중국여행중 발표한 「당대의 해서가 동국에 미친 영향」 「안진경이 한·일서법에 끼친 영향」제하의 논문은 「중원시대의 문자와 단군시대의 문자,중원서법과 고구려의 인연관계」를 정밀하게 파헤쳤고 「동방의 금석은 자발적으로 진전됐으며 서체 또한 중국 영향권에만 있어왔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여 한·중 학자간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그러나 「심도 있는 견해와 견실한 입론,광활한 사로로 펼쳐진 그의 문장은 추호의 빈틈 없는 치학태도」로 평가되어 오히려 중국 서법가들의 공감과 호감을 산 바 있다. 여초의 초기의 서법은 주로 진의 왕희지,당의 구양순,원의 조맹부에 영향을 받아 「새벽바람 속의 잔월(효풍잔월) 같은 청려,대해파도 같은 웅호,뜬구름 스치듯한 표일,고하고 졸하며 기하고 위한 여러 글씨체를 지나」비학을 통한 광개토왕비체와 훈민정음체를 탐구하면서 「화려와 아첨(유미)을 몰아낸 강건한 주경을 성취」한 것으로 대찬되고 있다. 그는 18대째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대부명가의 후손이다.그의 증조부는 구한말 종일품벼슬을 지내다 경술국치때 순국한 김석진 학자이며 조부는 비서원승직을 지낸 동강 김영한,창문여고 설립자인 김윤동씨의 5남3녀중 3남으로 태어나 숭인보통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벌써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휘문중시절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율곡의 격몽요결 등 옛명현의 시문에 접근해 있었다.그러다가 1944년 아무 연고없이 일경에 연행됐다가 풀려나온 데 대한 후유증으로 도봉동 초가에 묻혀 그때부터 법첩으로 독학한 것이 친형인 김충현·창현 등과 함께 서예의 길을 걷게 된 동기다. ○불의에 타협않는 성품 성품이 꼿꼿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그는 50년대 중반 「평론 없는 분야는 독립된 분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 60년대초까지 스스로 필봉을 휘둘러 「붓에 먹을 찍어서 종이에 긋기만 하면 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문의 뜻도 모른 채 쓰거나 글씨를 그림그리듯 하거나 남의 글씨를 임서하거나 손끝의 재주로 숙달된 필체」가 아닌,「오랜 서법에 의해 연마되고 탁마된 고매한 인격에서 우러나온 작품」을 주장해왔고 국전 서예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선현의 가언경구나 명문장을 선택하여 민족의 나갈 바를 열어주는 진취성 있고 주체적인 내용」,그리고 「아무리 원로라도 공부하지 않는 원로」는 심사위원으로 추대할 수 없으며 「추호의 사정이 깃들이지 않은 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심사원 선출」을 역설하여 서예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서예계의 난맥상을 쇄신한다는 차원에서 56년 체계적인 서예연구와 보급을 위해 지금의 동방연서회를 창립,전예해행초 오체의 철저한 연구와 훈련끝에 그동안 배출한 서예인만도 7천여명,서예전문지 「서통」을 지난 30년간 개인의 힘으로 꾸준히 발간해오고 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신조로 삼는 것은 노자의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라는 글귀다.「스스로의 만족됨을 알게 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아니하고 그칠 바를 알아서 위태롭지 아니하여 오랠 수 있다」는 경구다. 그런 그에게 사욕이란 있을 수 없다.더구나 지난 91년 봄 손위 형인 창현씨가 「대화도중 갑자기 쓰러져 타계」하는 것을 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인생」에 무상을 절감한 나머지 그해 여름 자신의 사재 18억원을 출연,「사람은 사라져도 세상에 무엇인가 의미있는 것」을 남긴다는 취지와 함께 동방연서회를 재단법인으로 재출범시켰다. 그는 지금도 새벽이면 도봉동에 있는 그의 집을 나와 아침 8시 서실이 있는 동방연서회에 도착,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서실은 글씨를 쓰는 책상외에 방안 가득히 서법에 관한 서적이 산적해 있고 행길가인데도 난향과 수석과 녹차향 때문일까,온자한 서풍이 감도는 속에서 그는 「오늘은 심선이 그려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엄숙히 자문해본다.낙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그는 한점의 타작도 용납치 않으려는 주의다.그래서 한평생 붓을 잡으면서도 지금까지 아무 때나 기분내키는대로 가볍게 붓을 잡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심기가 평화롭고 사방이 청결하고 날씨가 화창하면 그날은 왠지 일점일획에도 오차가 없는 「정수」가 탄생될 것을 기대해 볼 뿐이다. ○세속적 취향과는 멀어 전보다 많이 옳은 말을 줄이고 일체의 세속적 취향에 타협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골프를 하고 싶어도 「자연을 훼손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같아 철저히 외면한다.물론 서예와 관련된 모든 잡사에도 끼어들지 않는다.하오에는 문중 사람을 더러 만나지만 특별히 친분 있는 사람도,그렇다고 서로 소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시기다.다만 그의 개인전을 집중적으로 주선해온 동방화랑의 서정철사장과는 30여년간 난향 같은 청교를 나눈다.가족은 부인 강영순 여사와 5남매,서예를 잇는 자녀는 없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안되는 것이 글씨다.서법은 쓰는 사람의 내면의 성숙과 외율의 조화이기 때문에 천질만으로도 부족하고 노력만으로도 미치지 못한다.따라서 서예는 미숙만이 있을 뿐 영원한 프로는 있을 수 없다」.이는 여초의 변이다. 그러나 그 서체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천외천,예술외 예술」로 찬사되고 있는 시점에 서 있다.명지대 진태하 교수의 평처럼 「고희를 내년으로 앞둔 여초의 세계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넘치는 가운데 원숙과 창로의 경지에 들어 혼연천성하고 묘합자연하여 자신만의 서법언어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이제 그로서는 「예술이상과 예술도에 이른 자신의 지음을 눈부신 지면에 향기로 뿌리는 일만이 남았다. □연보 ▲1927년 서울 출생 ▲46년 휘문중 졸업 ▲51년 고려대 졸업 ▲50∼61년 국회보 주간,국회도서관 창설참여 ▲56년 동방연서회 창립멤버 ▲60년 국전 추천작가 ▲69년동방연서회 이사장 ▲70년 숙대·홍대·성균관대 강사 ▲71년 동방연서회 회장 ▲74년 방화전(중국국립 고궁박물원) ▲75년 국전 초대작가,한중 서법학대회 대회장 ▲76년 현대화랑초청 개인전 ▲78년 동방화랑초청 개인전 ▲79년 국제서도연맹초청 개인전(도쿄),중국국립 역사박물관 초청 개인전(대북) ▲80∼현재 한국전각학회 회장 ▲82년 동방화랑초청 개인전 ▲83년 신가파 중화서화협회고문 ▲84년 이마미술관 초청 개인전 ▲86년 중앙일보사 초청 개인전 ▲89∼현재 사단법인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동방연서회 서법교류 방중단단장 ▲90년 김응현서법전(중국북경 천안문광장 혁명기념관),신가파 제1회 국제서법교류대전 ▲91년 염황예술관이사회 명예이사,절강성박물관·서호서원 명예원장,서안 중국서법예술박물관·종남인사 예술고문,서안서학원 특격원위 ▲92년 김응현·김종길시화전,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의전(추모의전),김응현서법전(서안 중국서법예술박물관 및 상해) ▲93년 산동대학 동방서화연구원 고문겸 교수,김응현서법전(정주 하남성서화원),하남성서화원 고문 ▲94년 김응현·계공서법전(북경 영보재) 김응현서법전(서울 동방화랑) ▲95년 7월3일부터 8월7일까지 한·중·일 산경 서법전(한국 김응현·중국 계공·일본 임금동 일본 동경 선샤인문화회관)예정
  • 석주 원로스님 서예전/「반야심경」·「오반가」 등 70여점 전시

    ◎“수익금 온양 불교복지회관 건립” 불교계 원로 석주스님(86)이 틈틈이 써온 서예작품을 모아 첫 개인전을 19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운현궁미술관에서 연다. 석주스님은 그동안 칠보소년소녀합창단,군포교활동 기금마련을 위한 전시회등 불사와 포교,불우이웃돕기를 위해 몇차례 작품을 내놓은 적은 있으나 개인전을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온양의 불교복지회관 건립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개인전에서 스님은 윤선도의 「오우가」를 비롯,「부모은중경」「반야심경」등 병풍 5점과 불교경전 40여점,불교게송 10여점,도자기작품 10여점 등 모두 7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월하·일타·석정·일장·수명·송월·원학스님 등을 비롯,서세옥·전영화교수(동국대)등 스님과 평소 친분이 두터운 중진화가 30여명도 참여했다.이 전시회는 높은 경지에 다다른 서예솜씨를 엿볼 기회도 되지만 오랜 기간 수행생활을 통해 닦아온 스님의 청아한 마음을 접해볼 수 있는 자리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석주스님은 젊은 시절에는 한글 행서,만년에 들어서는 한문 행서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스님은 지난해 종단개혁 와중에 개혁회의의장을 맡아 불교계 비리척결에 앞장서기도 했다. 석주스님은 『평소 복지회관건립으로 불우이웃에게 따뜻한 쉼터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던터에 이번에 개인전을 갖게 돼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고 말하면서 『몸이 허락하는한 작품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전주서 후학양성 힘쓰는 서예가 송성용옹(향토에 산다)

    ◎“고향서 묵향에 묻혀 사는게 기쁠 따름”/상투 고집하는 「서예의 달인」… 작품전시관·학술재단 설립 앞장 지금 우리 주변에는 태어난 고향을 지키며 살찌운 정신적 양식을 「향토사랑」으로 실천하는 명사들이 꽤나 많다.고향에서의 삶을 통해 건전한 「향토문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 「향토사랑」을 국가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명사들.그러기에 이들의 삶은 늘 우리네 인생의 귀감이 되고 있다.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지역 이기주의와 지역성이라는 비뚤어진 향토의식을 바로 잡으며 향토에 살기를 고집하는 이들의 고귀한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고풍스런 전통 한옥들이 즐비한 전북 전주시 교동 남천교 첫들머리에 들어서면 묵향이 물씬 풍긴다.이 시대 최후의 한학자요 최고의 서예가 강암 송성용(83)옹의 체취가 골골마다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한학을 지금으로 이어주는 한학자이자 강암체의 원조로 흔히 「서예의 달인」으로 칭송되는 강암선생. 『향리에 묻혀서 정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예술의 고장에서 내 예술의 천분을 누릴수 있음이 그저 기쁠 따름』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선생은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19 13년 전북 김제군 백산에서 태어났다.5살때부터 역시 호남의 뼈대있는 한학자였던 유제 송기면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서예를 익혔다. 한국 서예의 일가를 일궈낸 선생의 서예공부 정진은 일제의 단발령에도 목숨걸고 상투를 자르지 않았던 선비의 올곧은 고집이기도 했다.상투를 틀고 갓을 쓴 한복차림의 자세를 한치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선생은 아버지가 작고하고 1년이 지난 43살때인 56년 처음으로 국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입신양명하여 세상과 더불어 사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향리에 눌러 앉아 천분을 지키며 사는 것도 또한 재미』라는 가르침을 거스르지 못해 뒤늦게 세상에 강암체를 선보였다. 선생의 작품은 국전 출품과 함께 세상의 이목을 끌었고 10년만인 66년에는 국전 초대작가로 추앙됐다.국전초대 작가가 되면서 선생은 향리를 떠나게 하려는 유혹에 시달렸다. 『향리에 눌러 앉아 천분을 지키고 싶다』는 선생의 고집도전북지방의 서예를 중흥시키자는 동료 서예가들의 강권만은 이겨내지 못했다. 실제로 선생은 전주로 거처를 옮긴 67년 전북도 미술전시회를 만들어 맥을 이어오고 있다. 『방문만 열면 남고산,승암산자락이 어울려 아름다운 산수를 이루고 완산봉 기린봉이 저만큼씩 좌정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 곳,나는 이 하늘 아래서 숨쉬고 살 수 있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예술의 분위기가 갖추어진 도시요 내 예술을 키워준 「가장 크고 넓은 세상」이라는게 선생의 향토예찬론. 전주가 가장 크고 넓은 세상이라는 선생의 향토 예찬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한국서단에 강직한 선비품격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서필로 호남을 대표해온 그는 요즈음 향토문화를 새롭게 일구기 위한 일들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 강암서예전시관 건립과 강암서예학술재단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독특한 향토문화를 꽃 피우고 꼿꼿한 선비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해 평생숙원으로 추진하고 있다. 강암은 예술의 고장 전주를 서예발전의 본 고장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90년 국내 최초로 서예작품상설전시관건립사업에 착수,오는 4월 준공을 눈앞에두고 있다.93년에는 그동안 모은 재산 6억원을 흔쾌히 기증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예학술재단을 설립함으로써 서예를 학술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흥,보존하고 후진을 양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20여년전부터 국내에서 가장 큰 서단인 연묵회를 만들어 후배,제자들과 함께 일본,대만,중국 등 동남아를 돌면서 서예교류전을 갖는 등 서예의 세계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전·예·해·행·초서 등 모든 서체와 사군자의 달인,일생을 한복만을 고집하며 유학을 숭상,창씨개명과 단발령에 항거했던 한국의 마지막 선비인 강암. 향리에 눌러사는 재미가 어떠하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 대신 벽에 걸린 글귀를 조용한 미소로 응시한다. 「문여하사 서벽산 소이불답 심자한(왜 산중에 묻혀사느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답하니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더라)」 가장 크고 넓은 세상에서 서예를 익혔으니 나머지 여생도 이 고장 후학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강암 송성용옹은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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