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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후퇴뒤 혼란정국(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4)

    ◎거창학살­국민방위군 사건 잇달아 발생/이 대통령,국회와 마찰… 대통령 직선 추진 한국전쟁은 1951년 새해가 밝으면서 개전 2년째를 맞았다.미 공군은 설날에도 전폭기 편대들을 전선과 북한지역 깊숙이 발진시켰다.그리고 8백12회의 출격을 설날에 기록했다.전선은 남쪽으로 크게 밀려나 38도선 부근에 와 있었다.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전선이 압록강 한·만국경에 고착될 것으로 기대한 한국민의 희망을 깡그리 앗아갔던 것이다. 정부는 1월3일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결정하고 다음날 서울을 비웠다.전해 9·28수복으로 환도했던 정부의 공식 서울 철수를 역사는 1·4후퇴로 기록하고 있다.서울시민 30만명이 피란길에 오른 가운데 5일에는 중공군 선발대가 한강을 건너 영등포까지 진출했다.주문진,홍천,양평,수원을 잇는 제2방어선도 곧 무너졌다.유엔군은 7일 오산을 포기해 버렸다. ○양민희생자 6백명 그 2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경남 거창에서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공비토벌에 나섰던 육군 제11사단 9연대 제3대대가 2월11·12일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저지른 이 사건의 희생자는 6백명이나 되었다.이유는 공비와 내통했다는 것이었는 데 일일전과 보고는 주민 희생자수를 1백87명으로 기록했다.국회가 이를 문제시하고 4월7일 현지조사에 나섰다가 공비로 가장한 군의 공격을 받고 철수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주동자들은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받았다.그러나 모두 1년안에 풀려났다.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5월7일 해임되었다.그의 해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거창 사건말고 새로 불거져나온 국민방위군 사건이 더 크게 작용했다.이 사건은 51년1월 국민방위군 집단후송과 수용과정에서 고개를 들었다.국민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17∼40살의 장정들을 방위군에 편입시켜 경북지역 각 교육대에 수용했다.이를 계기로 방위군 고위 간부들이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렸다.그 부정규모는 당시 화폐 24억원,양곡 5만2천섬에 달했다. 국회는 4월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했다.이에따라 5월12일 방위군이 공식 해산되었으나 장정들의 귀향조치는 3월중순부터 이루어졌다.사건이 확대되고 희생자가 날로 늘어나자 정부는 진상조사에 나서 김윤근 사령관을 구속했다.다른 간부 5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사형이 선고된 5명의 방위군 간부들에 대해서는 8월13일 대구 근교에서 총살이 집행되었다.숱한 청장년을 헐벗게 하고 굶긴 건국이래 최대의 비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방위군 간부 5명 총살 1951년의 이 두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임기 내내 따라붙은 불명예였을 뿐 아니라 정적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특히 거창사건 주동자 가운데 김종원의 경우 뒷날 경찰총수인 치안국장으로 기용했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도덕성을 문제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이 사건들은 이기붕을 권력의 주변으로 끌어들인 결과를 가져왔다.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신성모 후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이를 단초로 이승만 대통령을 핵으로 한 권력의 인맥이 새롭게 발전할 것이라는 장래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기용에 앞서 거창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병옥 내무장관,김준연 법무장관의 권고사직을 4월24일과 25일에 전격 수리했다.대통령은 조병옥을 오랫동안 못마땅하게 여겼다.당시 대통령의 업무일지에는 1951년1월 서울에서 내려온 이후 조병옥은 내무부가 있는 대구보다는 부산에 더 많이 머물러 있다고 기록했다.그 이유는 정치적 책략을 동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그리고 대통령을 찾아오는 일이 없고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게 고작이라는 불만도 곁들였다. 조병옥은 사퇴서를 보내놓고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그래서 4월24일자 대통령 업무일지는 「조병옥은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굳혔고 대통령에 반대해서 싸울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주한 미국대사 무치오는 조병옥의 사표수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했다.이를놓고 이승만 대통령 쪽에서는 미국이 다음 대통령 선거를 좌지우지 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하고 무치오가 새로운 내무장관을 장면과 같은 온건한 인물로 꼽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장면에게는 이미 국무총리직이 수임되어 있었다.장면은 사실상 주미대사로 워싱턴에 더 머물기를 희망했다.그럼에도 이승만은 새해들어 그의 소환을 결심하고 1월5일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시영 부통령이 5월9일 「시위」에 앉아 소찬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기 때문에 물러난다」는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했다.이와 더불어 부통령직 사임서를 피란국회에 보냈다.사임서가 국회에서 반려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본인의 고사로 3일후 국회 본회의가 이를 수리했다.국회는 두 차례의 보궐선거끝에 5월16일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뽑았다.그 역시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1952년 정치파동의 와중에 전격 사임해 버렸다. ○개헌 결심…자유당 창당 한반도를 아비규환의 전쟁으로 몰아붙인 그 6월이 또 다가왔다.4월11일 전격해임된 맥아더장군에 이어 리지웨이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은 6월19일 철원,김화,평강으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중공군은 금성지구 한국군 2군단 전면에서 춘계공세 이래 최대의 공격을 개시했다.공산군은 4월22일 제1차 춘계공세 이후 6월17일까지 21만5천9백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그럼에도 유엔군사령부는 아직 대공세 능력을 상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승만은 계속 국회와 부딪쳤다.일반적 여론은 국회가 대통령을 간선으로 선출할 경우 그가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래서 헌법개정을 결심했다.8월15일 그의 신당구상은 11월19일 자유당 창당으로 실현되었다.자유당 창당 이전인 10월17일 국무회의는 대통령 직선과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의결하고 11월20일 이를 국회에 제출했다. ◎미 「알렉시스 존슨 파일」/미,한국전중 “기독교도 구출” 논의/전쟁 확산→한반도 포기상황 전제/북한측 박해 밝혀져 인권차원 거론 미국은 한국전쟁이 확산되어 한반도를 포기할 경우 한국민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구출하는 문제를 토의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입수한 「알렉시스 존슨(Alexis Johnson)파일」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인 구출문제에 대한 논의는 1951년 11월2일에 작성한 미 국무성 회의비망록에 들어있다.회의에는 미 국무성 극동국의 러스크,동북 아시아과의 맥 크러킨이 참석했다.이는 미국 장로교인 트류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당시 미국은 다른 종교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특히 한국전쟁 이전에 북한 공산권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이 큰 박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유엔군 북진에서 드러나 더욱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 북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철저하게 말살되었다.가톨릭의 경우 함경남도 덕원 면속구의 피해는 컸다.1945년 민족해방 이후 1949년 5월9일 이후 수도원은 몰수 당했다.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부와 수사,수녀들이 고난속에서 순교했음이 밝혀졌다.개신교에서도 많은 순교자를 냈다는 사실이 서방에 전해짐으로써 기독교인들의 구출은 인권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민 기독교인 구출은 한국에 살고있는 미국 민간인 철수작전과 더불어 제기되었다.한국전쟁 발발 당시인 1950년 서울은 물론 대전이 예상이외에 빨리 북한군에 점령되어 미국의 민간인들이 포로로 취급받은 데 따른 대비책으로 미 민간인 철수는 심도있게 논의됐다.그러니까 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가 불투명했다는 추론이 나올 수 있다. 알렉시스 존슨은 1930년대 후반 한국에도 살았던 외교관으로 이승만이 미국에 망명해 있던 시절 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이다.한때 미 국무성 극동아시아과에서 영향력을 가진 관리로 활약했다.
  • 이미 사용한 외국 핵연료/러 “저장·재처리 해주겠다”

    ◎한·일·대만·스위스등에 거래 타진 【모스크바 AFP 연합】 러시아는 이미 사용된 외국의 핵연료를 러시아 영토 내에 저장,이를 재처리할 것이라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내린 대통령령이 1일 밝혔다. 원자력부 대변인 게오르기 카우로프는 AFP통신 기자와의 회견에서 즉각 발효된 대통령령에 따라 『우리는 러시아가 건설한 핵발전소의 연료 뿐아니라 서방국가들이 건설한 핵발전소의 연료도 재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산하 생태환경위원회의 알렉세이 야블로코프 위원장은 새 대통령령이 핵로비 단체의 압력을 받고 서명되었으며 러시아의 생태환경에 큰 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면서 정부당국은 사용된 핵연료의 저장 및 재처리를 거래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로서 스위스,한국,대만 및 일본을 포함한 국가들과 이미 접촉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의 서방 핵전문가는 사용된 핵연료의 일부가 현재 아직도 건설중에 있는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26 공장에서 재처리될 예정이며 재처리가 끝나면 핵연료는 발송된 국가로 반송될 것이라고 말했다.
  • 「국제민주연합」 서울 총회(사설)

    전세계 보수민주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당수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이번에 신규 가입한 러시아,몽골등을 포함,30여개국 보수민주정당들의 당수및 전현직 국가수반등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평화와 안정,자율을통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주제로 열띤토론을 벌이고 「서울선언서」도 채택했다. 이번 IDU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된 것은 탈냉전이후의 전세계적인 자유보수민주정치에서 차지하게된 한국보수정당의 비중과 역사적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다.『한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사회경제분야의 세계화를 앞장서 추진하고있는 분』이라는 찬사를 받은 김영삼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자유민주체제의 위대한 점은 스스로 변화와 개혁을 할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서방의 보수 자유민주주의와 옛소련 동구의 진보 사회주의간의 지난 50년간에 걸친 체제경쟁의 결과에 대한 핵심적 지적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서방의 승리는 평등이라는 사회주의 장점을 수용한 변화와 개혁을 할수 있었기 때문이며 사회주의의 패배는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흡수할 그것을 하지못한데 있는 것이었음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다. 그 변화와 개혁을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그 위성국이었던 동구와 베트남 몽골등이 뒤늦게나마 진통속에서 서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같은 변화와 개혁의 수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 북한이다.이번 총회가 그러한 북한을 주목하고 변화와 개혁을 촉구한 것은 반드시 서울총회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회의의 「서울성명서」는 사회주의체제에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북한주민들 스스로가 자유로운 개방선거를 통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수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곤궁이라는 오늘의 분단한반도 현실은 동서체제경쟁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성명서」는 북한으로 하여금 이 냉엄한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하루속히 세계적인 변화와 개혁의 대열에 나서라는 촉구라 해야 할것이다.
  • “중국이여 노벨 과학상을 잊지 말아다오”/조홍주(해외논단)

    중국관리 과학연구원 조홍주 부원장(53)은 최근 중국 「과기일보」에 「중국이여 노벨과학상을 제발 잊지 말아다오」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중국인으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는 리 숭다오(이정도),양 첸닝(양진령)등이 있으나 이들은 국적이 모두 미국이라 필자는 중국의 성과로 인정하지 않고 건국이후 47년간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중국 과학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있다.우리에게도 시사점이 많다고 생각돼 이를 싣는다. 오늘날 2개의 상이 국제사회의 중추신경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하나는 체육올림픽상이고 다른 하나는 노벨과학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2개의 상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가 판이하다는 점이다.중국 축구팀이 아시아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데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고 있으며 마음 아파한다.하지만 중국이 건국 47년간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한데 대해서는 담담하다.한 조사에 의하면 20∼30세의 국민들 가운데 겨우 21%가 노벨상에 대해 알고 있다. 하나의 민족은 도대체 자기의 노벨과학 인재가 있어야 하는가,아니면 없어야 하는가.이에 대해서는 역사가 회답한다.노벨과학상은 인류사회 최고단계 지역활동에 대한 평가와 장려방식으로 세계 최고급 단계의 상이다. 노벨상을 수여받은 사람은 지력,의지및 지식누적면에서 모두 매우 높은 수준에 달했다.이 수준은 수세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이다.1900년 노벨상이 제정된 이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노르웨이 일본이 노벨상을 석권했고 세계 각국이 모두 크나큰 열정으로 자기 민족의 획득상황에 관심을 쏟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신흥국가는 건국 50년내에 노벨상을 탔다.구 소련은 건국 39년만에,체코슬로바키아는 41년만에 노벨과학상을 받았다.심지어는 개발도상국인 파키스탄과 인도도 건국 30년 안에 노벨상을 탔다.중국은 과학영재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엇때문에 노벨과학상이 「0」을 돌파하지 못하는가. 여기에는 심각한 역사적·사회적 원인이 있다.첫째,과학 지식의 누적이 모자란다.중국의 근대 과학기술은 역사적인 원인으로 서방국가에 비해 무척 뒤떨어져 있다.특히 기초과학 지식의 누적이 모자란다. 미국의 역대 노벨상 수상을 분석해 보면 과학세대 사이의 연속성이 노벨인재 성공의 중요한 요인임을 알수 있다.지식량의 누적은 선배들의 노동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세대간의 지역릴레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명의 노벨수상자를 양성하는 데는 적어도 3세대의 지식누적이 있어야 효과를 볼수 있다.여기에는 교육,과학연구환경,특히 가정교육의 기초역할이 포함된다.학문을 연구하는 태도,연구방법,사유관습은 은연중의 감화작용으로 「유전」된다.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많은 면에서 노벨과학인재 양성의 사회기초를 닦지 못했다. 둘째,과학연구시간이 모자란다.과학자의 노동은 보통의 노동과는 다르다.어떤 때는 하루종일 침식을 잊고 실험실에 붙어 있거나 컴퓨터앞에 앉아 있다.어떤 때는 휴식하며 세계각지를 돌아다니며 교류하고 학술강연을 해 두뇌가 다시금 충전되게 한다.때문에 전시작업이 필요하다. 미국의 과학자수는 1백만명도 되지 않지만 전부가 전시 과학자이다.반면 현재 구소련의 과학자수는 1백만명이라고 하지만 전시 과학자수로 환산하면 겨우 수십만명 밖에안된다.「회의도 하고 학습도 하고 기타활동에도 참여하는」 중국식 작업은 과학연구시간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 셋째,과학자 군락이 모자란다.과학은 개인의 능동성 뿐만 아니라 동료간의 협력도 중요하며 집단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에서 서로 다른 분야 연구자들의 「잡교」는 늘 노벨급 과학연구과제 성공의 관건이 돼왔다.현대의 과학자는 자기분야의 「전문가」이면서 다른 분야의 「능수」가 돼야 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대부분의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서로 다른 전공을 한 과학자이며 그래야만 과학연구의 선두에 설수 있고 과학교류의 주요한 루트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 과학계는 노벨과학 인재의 「온상」과 이에 따른 과학자 군락이 없고 연구생들은 교차분야에서 작업하는 능력이 모자라 세계수준의 과학연구 프로젝트가 아직도 많지 못하다. 넷째,과학 인재에 대한 식별과 선발메커니즘이 부족하다.노벨과학인재는 보통과학인재와는 다른 특징들이 있다.초기나 중기에 「싹」을 선발,양성해 계획적으로 그들의 과학능력을 제고시키며 노벨상의 목표를 향해 나가게 해야 한다. 축구는 어릴때 공을 쥐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내 견해로는 노벨과학인재 양성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중국 과학계에서 더욱 더 많은 1세대 과학자가 「3세대의 지역릴레이」를 감안하고 「국가 노벨과학 인재계획」을 세운다면 오래지 않아 노벨과학상 「0」의 수치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 나토,세계에 최대규모 공습/창설 46년만에

    ◎전투기 60여대 출격… 3차례 맹폭/세계 “공습 나토기 2대 격추”/EU 감사원 등 12명 사망설 【사라예보·브뤼셀 외신 종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사라예보에 대한 포격으로 37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낸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에 대해 30일 새벽(이하현지시간)부터 하오까지 3차례에 걸쳐 나토사상 최대 규모의 공습을 단행했다고 나토 소식통들이 밝혔다. 나토 전투기들의 이날 공습으로 사라예보 지역의 세르비아계 점령지에서 유럽연합(EU) 감시단원 5명등 모두 12명이 사망했다고 세르비아계 통신 SRNA가 비공식 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특히 이날 공습에는 영국등 5개국과 아드리아해상의 미 항모 데어도어 루즈벨트호등에서 발진한 F­15E,F­18D,F­16 등 60여대의 전투기들이 대거 참가함으로써 40개월을 끌어온 보스니아 내전기간을 포함,지난 1949년 나토 창설 이래 지금까지 단행된 폭격 가운데 최대 규모의 공습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토와 유엔 관계자들은 이번 나토 공습으로 세르비아계 목표물들이 「괴멸적인」 피해를 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공습에 참가한 나토 전투기 2대가 세르비아계의 방공포에 의해 격추됐다고 세르비아계 라디오 방송이 주장했으나 나토의 공식확인은 아직 없다. 이날 2차 공습후 4시간뒤 단행된 3차 나토 공격에서 목표물들이 정확히 피격됐는지는 즉각 알려지지 않았으나 앞서의 1·2차 폭격은 보스니아 서부의 모스타르시,동부 고라주데,북부 투즐라 등 보스니아 전역의 세르비아계 방공미사일기지와 통신시설,레이다 기지,탄약소,군수공장,지휘소등에 집중된 것으로 전해졌다. 나토는 추가공습을 위해 현재 이탈리아와 프랑스,독일,그리스,영국 및 아드리아해상의 항공모함등에 모두 1백76대의 전폭기와 요격기,정찰기등을 대기시켜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위협 제거때까지 공습 계속”/유엔대변인 밝혀 【사라예보·런던 AFP 로이터 연합】 유엔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사라예보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제거될 때까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엔군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진지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유엔 대변인이 30일 밝혔다. 알렉산더 이반코 유엔 대변인은 이날 나토의 사라예보 외곽과 보스니아 중부 및동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진지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있은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베르나르 장비에 유엔보호군(UNPROFOR) 사령관이 이같은 서방측의 의지를 라트코 믈라디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군 사령관에게 통보했다고 전했다. ◎나토선 격추 부인 【나폴리 로이터 연합】 나토는 30일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진지에 대한 대규모 공습에 참가한 전투기 중 격추되거나 파손된 공군기는 없다고 나토 남부 사령부 대변인이 밝혔다. ◎미 특사­세공 대통령/공습직후 긴급회담 【베오그라드 로이터 연합】 빌 클린턴 미 대통령 특사인 리처드 홀브룩 미국무부차관보는 30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시작된 후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세르비아대통령과 긴급회담을 가졌다. ◎나토 대공습 왜 하나/“「보」 내전 끝내자” 세계 초토화/미­영 등 합동작전… 3∼4일 더 공격 30일 새벽 단행된 나토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점령지역에 대한 공습과신속대응군의 포격은 유례없이 큰 규모였다. 지난 28일 사라예보 중심가를 강타한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37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응해 벌어진 이번 나토의 공습은 40개월동안의 보스니아 내전중 꼭 11번째이다.그동안 나토의 공습은 세르비아계의 군사적 공격에 대한 보복용으로 위협을 가하는 수준이었던데 반해 이날 공습은 나토가 밝히고 있듯이 「보복」 차원이라기 보다는 「억제책」의 성격이 짙다. 그동안 보스니아내전에서 군사적 우위를 보였던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에 크로아티아내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는 등 위축됐고 나토의 보복 공습위협에 밀려 유화 자세를 보이는 틈을 타 세르비아계를 확실히 약화시키고 분명한 양보를 얻어내겠다는 나토의 밀어붙이기 식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나토의 공습이 앞으로도 3일 정도,나토의 목적이 완전히 이행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추측으로도 뒷받침된다.또 이번 공습으로 어떻게든 보스니아 내전의 종결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이번 공습이 이처럼 신속하고 대규모로 이루어진데는 모처럼 강대국들의 의견이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이 한몫을 했다.18개월만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세르비아의 공격에 대해 미·영·프랑스·독일·러시아 등 5개국 접촉그룹은 물론,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세르비아계를 비난하며 군사조치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또 그동안 보스니아 사태를 놓고 위상과 그 역할에 대해 회의를 불러 일으켰던 나토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중요한 시험대로 여긴 영향도 컸다. 이처럼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 나토의 공습은 첫번째 목표를 방공시설에 두었으며 방공시설이 파괴되면 걸프전 때와 마찬가지로 세르비아계의 다른 지상목표물들에 대해서도 3∼4일간 공격하는 일이 쉽게 진행될 것이라고 CNN은 보도했다. 나토는 이날 3차공습을 끝낸 뒤 공습 결과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드러냈다.지난 공습 때 번번이 세르비아계가 유엔군을 인간방패로 삼아 더이상의 공격을 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유엔군이 미리 고립되거나 공격이 쉬운 지역들에서 철수,인질로 잡힐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없애 유엔과 동맹국 사령관들이 쉽게 작전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공습 직전 보스니아 영토를 51대 49로 분할하는 미국측 평화안을 환영하고 평화협정 체결 준비가 돼있다고 선언했다.이에 대해 서방측은 군사행동을 피하기 위한 세르비아계의 술책이라고 일축하고 있으나 이번 공습의 여파로 세르비아계가 평화안을 수용할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의 북한 감싸안기/이석우 북경특파원(오늘의 눈)

    27일 밤 북경 서북쪽의 북경전람관.중국문화부 초청으로 북경·남경 등의 순회공연을 시작한 북한의 간판예술단 왕재산경음악단이 북한식 전통음악과 무용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나의 조국 최고」,「사회주의가 좋아요」 등 노래가 선보일 때마다 극장은 박수소리로 가득했다.중국과 북한간 우정의 무대라고 할 수 있었다. 관객가운데는 강택민총서기겸 국가주석,차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호금도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대외연락부·외교부 고위관계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75분에 걸친 공연이 끝나자 강주석을 비롯한 관객들은 기립박수까지 보냈다.강택민주석,호금도정치국위원 등은 연단으로 올라 공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치하하기도 했다. 28일 당기관지 인민일보는 1면에 커다란 사진과 함께 이를 보도했다.사진에는 강주석과 주창순 북한대사가 꽃같이 환한 왕재산경음악단 여성단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이 신문은 공연에 앞서 강주석이 왕재산경음악단 관계자들과 이미 한차례 만나 격려 및 환담을 나누었다고 보도했다.『두 (공산)당,두 나라,두 국민은 전통적 우의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는 두나라 국민의 피로 응결돼 이루어진것』이란 최근에 드문 「혈맹」을 강조하는 우정의 다짐도 격려 속에 들어있었다.「중·조 두 나라,두 국민의 우의는 만고에 푸를것」이란 부제도 눈에 띈다. 최고지도자의 이례적 환대는 최근 북한 감싸안기에 열올리는 중국의 모습을 보여준다.두 나라는 지난 6월 한·중 수교후 2년간 중단됐던 외교부와 공산당의 차관급 정례방문을 재개했다.7월중순엔 중국대외연락부 부부장 등 관계자가 북한노동당초청으로 북한을 비밀방문,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중국에게 북한은 놓칠 수 없는 동반자요,서방세력 침투의 완충지란 의미는 지금도 여전하다.1백억달러를 넘는 한·중 교역량도 아직은 중·북한 사이의 역사적 관계와 운명적 동류의식을 뛰어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심양총영사관 설치 문제나 안승운씨 실종사건만해도 정부관계자들의 자신에 넘친 호언과 달리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서도 메워나가야할 한·중사이의 간극이 얼마만큼인지를 짐작케 한다.
  • 러 “이란에 원자로 추가공급”/영지 보도

    ◎4백㎿급 2기… 최근 비밀계약 【런던 AP AFP 연합】 러시아는 이란의 핵능력을 제한하려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최근 모스크바에서 비밀계약을 맺고 이란에 2기의 원자로를 추가공급하기로 했다고 영국의 선데이 텔레그라프지가 27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최근 이란원자력기구 책임자인 레자 아므로할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4백Mw짜리 원자로 2기를 이란에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이 원자로들이 이란 북부 네카핵연구단지에 건설될 것이라며 『서방정보기관들은 이란의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연구계획의 일환으로 이 원자로를 도입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이미 이란에 1천Mw짜리 원자로를 공급하기로 합의한 바 있는데 이 원자로는 금년말 이란 남부 부셰르지역에 건설되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의 이란에 대한 원자로 공급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 서방 내정간섭 경고/중 강택민 총서기

    【북경 로이터 연합】 강택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25일 서방의 침투와 내정간섭 음모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중국이 중국출신 미국인 반체제 인사 해리 우(오홍달)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곧바로 그를 국외추방한데 이어 나온 강의 이같은 경고 발언은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 한국에선… 일본 대사관(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20)

    ◎“과거인식 잘못” 반일정서에 곤혹/비중있는 재외공관… 직원 50명/교역 급속 증가… 경제업무 중시/정치·안보 밀접한 동맹… 정무분야 중요 서울 종로구 중학동 18의 11,한국일보사와 연합통신사의 사이에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1백m쯤 떨어진 미국대사관이 세종로 큰 길가에 보란듯이 서 있는 것에 비하면 일본대사관은 주변의 고층빌딩 사이에 5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을 숨기듯 웅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일본정부의 사무소가 처음 설치된 것은 지난 65년이다.우리가 먼저 49년 1월에 주일 대한민국 대표부를 설치했으며,일본이 65년 주한 일본정부 사무소를 설치한 것이다. 65년 12월18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이 발효되면서 양측 대표부와 사무소는 대사관으로 승격했다.일본은 이후 부산에 총영사관을,제주도에 출장소를 각각 1곳씩 설치했다. ○11명째 대사 보내 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뒤 일본은 66년 3월16일 기무라 시로(목촌사랑칠)초대 대사를 부임시킨이래 지금까지 모두 11명의 대사를 한국에 보냈다. 현재의 주한 일본 대사는 야마시타 신타로(산하신태랑).32년생으로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뒤 외무성에 들어가 미국 안전보장과장과 독일대사관 참사관,태국 대사,정보조사국장등의 요직을 거친 엘리트 외교관이다.야마시타대사는 특히 미국과의 안보조약 업무를 계속 담당해왔기 때문에 한·미·일 3국간의 안보협력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주한 일본대사가 접촉하는 인사의 폭은 매우 넓고 깊다는 것이 외무부 관계자의 설명이다.일본대사가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열리는 환송연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등 각 분야의 한국내 유력인사는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야마시타 대사의 경력이 말해주듯 주한 일본대사관은 일본의 재외공관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곳으로 손꼽힌다. 5대 대사를 지낸 스노베 료조(수지부양삼)의 경우 외교관으로서 최고직인 외무차관에 오르기도 했다.또 일본 외무성에서 아주국장과 북동아과장등 아시아쪽의 중요한 외교포스트를 맡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을 거쳐야 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일본의 재외공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은 물론 워싱턴의 주일대사관으로 외교관 숫자만 1백명이 넘는다. 현재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은 모두 50명선.이 숫자는 미국과 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보다는 적지만,일본이 중시하는 서방선진 7개국(G­7)에 파견한 외교관의 숫자의 평균과 비슷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의 90%가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아파트 지역에 몰려산다는 점이다.한국에 파견된 일본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다.일본대사관의 한 직원은 그 이유를『개포동에 있는 일본인 학교에서 동부이촌동에 스쿨버스를 보내기 때문』이라고 자녀교육을 이유로 들며『집단거주촌을 만든다든지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고 설명했다. 65년 수교이래 한·일관계가 양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일본대사관의 한국정부와의 협의사항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한·일 양국이 정치,안보상의 동맹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정무분야도 중요하지만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분야의 업무도 마찬가지로 중시되고 있다. ○비판여론에 촉각 일본대사관측이 양국관계에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바로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적 여론이다.특히 올해 광복 50주년,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도 일본에 대한 한국 국민의 「적대적」태도가 그다지 바뀌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일본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일본도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한 현안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며,지난 8월15일의 무라야마총리 담화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국민의식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그러나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의 책임도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같다』고 최근의 한국내 여론조사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일본대사관은 한국내에서 반일감정이 확산될 때마다 학생시위대의 공격목표가 되기도 한다.지난 75년 8월15일 문세광이 육영수여사를 저격했을 때 일본대사관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으며,지난 6월6일에도 학생들이 안국동 일본공보문화원에 화염병을 던져 도서관이 불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양국의 인적교류가 확대되고 있으며,이에 따라 주한대사관의 영사업무도 폭주하고 있다. 일본대사관측이 제공한 일본 법무성자료의 통계에 따르면 93년 일본인의 해외여행지 1위는 미국,2위는 한국이다.또 같은해 한국인의 해외여행지 1위는 일본,2위는 미국이다.87년부터 우리정부가 해외여행을 단계적으로 자유화하면서 일본 방문자는 87년 16만9천9백74명에서 지난해 59만5천6백90명으로 크게 늘었다.그러나 아직까지 약간의 규제가 있지만 미국처럼 비자받기가 어렵다는 불평은 나오지 않고 있다고 여행사 관계자들은 말한다. ○대부분 지한파로 한편으로 일본 대사관이 「관리」해야 하는 한국내의 일본인은 1만1천명 정도다.94년 10월1일을 기준으로 볼 때 장기체류자가 8천7백18명,영주자가 4백79명으로 공식집계되고 있다.장기체류자는 역시 민간기업인이 2천1백90명으로 가장 많고,유학생이나 연구원이 1천6백46명,자유업이 98명,특파원등 언론관계인이 74명,기타 4천4백9명등이다.유학생 가운데는 대사관에 체류를 신고 하지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고된 숫자는 실제 체류자보다 적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 체류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인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한국에 염증을 느끼거나 애정을 느끼거나 한다.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한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 외교관들은 대체로 지한파의 성향을 갖게 된다고 한다.양국의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가운데 적극적으로 양국관계를 개선하려다 보니 자연히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 “망명 하산 수십억달러 챙겨 탈출”/이라크 야당 지도자

    ◎무기구입 커미션 20∼30억달러/스위스은행·아랍 유령회사에 보관 【카이로 AP 연합】 이달초 요르단으로 망명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사위 카말 하산 중장은 그가 관리하고 있던 수십억달러를 갖고 도주했다고 이라크 야당 지도자들과 기타 소식통들이 21일 말했다. 서방 외교관이 포함된 이들 소식통은 이 돈의 대부분이 스위스 은행을 포함한 전세계 비밀은행계좌와 하산 장군이 이라크 산업장관및 이라크 군수산업기구 책임자로 있을 때 요르단,터키,이탈리아,튀니지,모로코 등에 해외거주 이라크인 명의로 설립한 유령회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일부 소식통들은 하산 장군이 아직도 관리하고 있는 자산이 20억∼3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으며 다른 소식통들은 이라크가 많은 양의 무기를 구입했을 때 커미션으로 생긴 이 자산의 액수가 더욱 많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소식통들은 하산 장군이 망명했을 때 동행한 그의 사촌 이제딘 모하마드 하산 소령은 하산 장군과 사업가들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했으며이라크 대표단이 외국 회사들과 협상할 때 항상 관여했다고 말했다. 또한 작년에 망명한 한 이라크 외교관은 그가 1980년대에 파리 주재 이라크 대사관에서 하산 장군의 돈거래를 관리했었다고 말했다.
  • 동아시아국가 고도성장 지속될 수 있는가/산업연구원 국제학술회의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고도성장은 지속될 수 있는가.미국 경제학계의 거두인 폴 크루그만 교수(스탠포드대)와 앨리스 앰스덴 교수(MIT대)는 2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산업연구원 주최 광복 5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이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제시했다.고도성장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비관론을 제시한 크루그만 교수의 논문 「아시아경제 성장의 교훈」과,낙관론을 제시한 앰스덴 교수의 논문 「동아시아의 후기산업화 정책」을 요약한다. ◎비관론/폴 크루그만 미 스탠포드대 교수/인적·물적 자본 축적 그쳐/시간 지날수록 성장 둔화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단순히 인적,물적 자본의 급속한 축적을 통해 달성된 것이다.이를 근거로 정부의 개입 또는 산업정책 그리고 전략적 무역정책 등을 중심으로 한 소위 「아시아 체제」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시아 경제는 그 특성을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초기에는 저축과 투자율이 매우 낮았으나 점차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높은 수준으로 증가되었다.또한 아시아 각국은 GDP(국내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여타국의 평균치를 상회하고 있다. 이같은 특성을 가진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설명하는 기존의 학설들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첫째,홍콩과같이 자유무역을 함으로써 아시아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견해이다.둘째는 정부 개입 등을 통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보호무역과 함께 수출 지향적인 정책으로 성장했다는 견해이다. 셋째는 아시아 제국들이 유교적 전통에 의해 성장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한국과 태국 그리고 일본과 중국과의 문화적 유사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세번째 견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문제는 두번째 견해인데 최근의 몇가지 연구를 살펴보면 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는 단순히 투입요소의 증가율이 산출물의 증가율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수정주의자(revisionist)의 주장대로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아시아 특유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는 특별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아시아의 경제가 단순히 생산요소의 투입 증가만으로 성장해 왔다고 해서 곧바로 아시아의 경제가 곤두박질 칠 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성장이 점차 둔화될 것임을 의미한다.일본의 경우 최근까지도 다른 선진국들보다 높은 성장률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매우 빠른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나 이것은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에서 오는 효율성의 증가분까지를 포함한 것이다.따라서 향후 세계의 경제대국은 1위가 미국,2위가 유럽제국,3위는 중국,그리고 일본이 그 뒤를 잇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 다음을 차지할 것이다.결론적으로 아시아 제국의 경제정책이 서방의 경제정책보다 우월하다는 견해나,다른 개도국들이 아시아 NICs(신흥공업국)의 성장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모두 잘못이다. ◎낙관론/앨리스 앰스덴 미 MIT교수/정부의 수출 지원책 훌륭/미국도 개입정책 배워야 후발 산업화 국가인 한국과 대만은 생산성 향상으로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경제에 깊게 개입했다.중남미 국가들은 무상공여 원칙에따라 보조금을 배분한 반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성과기준에 따라 보조금을 배분했다.보조금을 지급하는 성과기준으로 수출을 이용함으로써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산업화의 성숙 과정은 3단계로 구분된다.1단계는 부존자원과 미숙련 노동을 이용해 성장주도 부문을 육성하는 단계이다.2단계는 중화학·기계전자·반도체 등의 기초산업을 확장하는 단계로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가 여기에 해당된다.3단계는 새로운 제품과 생산기술의 개발을 통해 기초산업 부문의 품질을 고급화 하는 과정으로 후기산업화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한국·대만·싱가포르가 이 단계에 있다. 한국과 대만등은 후기산업화를 위해 중간기술(mid­technology)을 필요로 하고 있으나 외국으로부터 이를 도입하는데 점점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 국가들은 연구개발투자의 확대,정부조달 분야를 통해 대규모 공공사업에 외국기술을 유치하고 국내기업에의 하청을 통한 기술습득,과학단지·특별산업지역의 조성을 통한 과학자와 기술자 유치,비관세 무역장벽,특혜금융 등을 후기산업화의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후기산업화 시대에 진입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정부의 역할은 여전히 필요하다.이들의 후기산업화 정책은 WTO(세계무역기구)체제하에서도 어느 정도는 허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우선 보조금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지만 연구개발투자 관련 보조금을 예외조항에 해당되어 허용될 수 있다.정부조달 분야는 전단계가 투명해야 하고 외국기업도 국내기업과 동일한 대우를 보장해야 한다. 미국은 이같은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정부의 개입에 의한 성과기준 방식의 산업지원 정책을 배워야 한다.세계시장의 완전한 자유화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경제성장과 안정에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동아시아 국가들의 변화를 감안할 때 미국은 이들 나라를 더욱 자유화 시키려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현재 전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정부개입의 수준을 받아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미국의 대외경제정책은 국내의 특정 이익단체로부터의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야 하며 외국의불공정 무역행위에 대한 제재는 미국내 해당 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성장 가능성을 기준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 미 CIS 마자르 박사 「북한과 핵…」 강연 내용

    ◎“「북핵 장기화」 일관성 없는 정책탓”/한·미 동맹관계 유지속 분명한 대북 압박 필요/북 관리들 김일성 사망 예상… 핵 협상 타결 시도 한반도 및 국제문제전문가인 미국제전략연구소(CSIS)의 마이클 J 마자르박사(국제안보담당 선임연구원)는 서울신문사 초청으로 22일 하오 프레스센터 12층강당에서 「북한과 핵,그리고 한반도」란 주제로 특별강연을 갖고 북한문제에 대한 일관성있는 정책수립과 겸손한 문제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아·태안보협력위원회 창설멤버이기도 한 마자르박사는 현재 CSIS가 간행하는 국제관계전문 권위지 「The Washington Quarterly」의 편집인이며 한·미 두나라의 대북정책을 포괄적으로 연구한 「북한과 핵­핵확산방지의 한 고찰」 등 7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다음은 강연내용 요약. ○평양 내부사정 오리무중 북한과 북한의 핵야욕에 대해 연구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를 원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사용을 저지하기 위한 것인지,세계를 위협해 정치·경제적 양보를 얻어내려는 것인지,아니면 남침 능력을 키우려는 것인지.북한의 핵개발 이유를 모르고서는 그 위험에 대해 포괄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우리는 또 북한내부의 정책토론 특성에 관해서도 아는게 별로 없다.일부에서 믿고 있듯이 강경파와 개혁파들사이에 명백한 분열이 있는지,오늘날 평양에서 누가 결정을 내리고 있는지. 게다가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를 실제로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아마 알기 어려울 것이다.우리가 영변에 있는 핵폐기물 처리시설 2곳을 사찰한다고 해도 여전히 명확한 답변을 얻지 못하리라고 나는 단언한다. 북한은 핵무기를 한개 갖고 있는가,아니면 두개인가.우리는 잘 모른다.북한이 핵폭탄을 갖고 있다고 우리 정보기관이 말할 때 그것은 추측이다. 내가 북한 핵문제를 연구하면서 배운 것은 그 문제에 대해 겸손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가 모르는게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연구과정에서 발견한 몇가지 중요한 사실과 교훈을 얘기하겠다. 세가지 발견중 첫째로,여러분들은 부시 전대통령이 지난 91년9월 한반도를 포함한 미국의 모든 지·해상배치 전술핵무기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북한에 대한 미국 외교의 중요한 터닦기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발표는 그보다 1년전에 이뤄질 수 있었다.부시의 그같은 핵구상은 90년 8월2일 애스핀연구소 연설문에 포함됐었다.그러나 연설 몇시간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미국은 후세인을 조금이라도 안심시키는 어떤 신호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그 구상을 연설문에서 빼버렸다.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주도는 1년전에 시작됐을 것이고 북한에 대한 미국 외교의 전반적인 과정은 급격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두번째로,클린턴행정부 출범직후 애스핀 미국방장관은 한반도에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계획을 내놓았다.그 계획은 미국이 고위급 사절을 평양에 보내고,만약 북한이 핵무기제조작업을 중단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제공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거부하면 제재와 봉쇄를 준비해야한다는 세가지 제안을 담고 있었다. 이같은 접근방식은 당시 미정부의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거부됐다.그러나 미국 외교는 결국 국방부계획이 적시한 바와 같이 세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을 때만 성공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즉 지미 카터 전대통령이 평양에 갔고,「합의의 틀」은 북한에 대해 이익 제공을 명시했으며,제재에 대한 미국의 반복된 언급은 위협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한반도 핵철수 90년 구상 마지막 발견은 북한의 94년초 사고방식과 관련돼 있다.그해 4,5월 북한은 핵프로그램 동결 약속을 깨고 원자로에 핵연료를 재장전하겠다고 위협했다.이러한 위협은 커다란 위기를 자아냈고 이 위기는 카터가 평양에 갔을 때야 해결될 수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옵서버들은 북한의 동기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그러나 북한으로부터 흘러 나온 새로운 정보들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공했다.일부 북한 관리들은 김일성이 단지 몇달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평양측이 94년초 들었다고 외부의 학계에 밝혔다.그 당시 북한내에서 핵문제 타협을 원했던 층들은 김이 생존해 있는 동안 그의 승인을 받아야만 타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94년 봄의 위기는 세계의 이목을 끈 뒤 김이 죽기전에 거래를 마무리하려 했던 북한 관리들에 의해 도발된 것일 수 있다. 내가 연구과정에서 발견한 몇가지 사실들은 우리가 북한의 사고에 대해 참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제 두가지 교훈으로 화제를 바꾸겠다.하나는 핵확산 금지가 한·미 양국의 국익에 얼마나 부합되는지의 문제에 관한 것이고,다른 하나는 우리가 북한에 대해 일관성 있고 의미있는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첫째,우리 두나라 가운데 어느 쪽도 핵비확산이 국익에 얼마만큼 도움이 되는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에 있어서 이것은 범세계적인 문제다.한국에게는 주로 북한문제다.그러나 우리 두나라는 동일한 기본적 결정에 직면하고 있다.핵확산금지는 국익과 외교정책목록의 어느 위치에 놓여져야 하는가. 미국과 한국의 관리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핵비확산은 절대적인 이해의 문제라는 성명을 발표했다.『북한이 단 한개의 핵무기도 갖는 것을 용인할 수없다』는 성명도 나왔다.이러한 목표를 위해 양국은 제재와 봉쇄,심지어는 전쟁불사까지도 위협했다. 때때로 북한에 대한 미국 외교는 핵비확산이 북한과의 관계개선보다 더 중요하고,심지어는 평화롭고 안정된 통일보다도,평화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조건부 관계 개선이 최선 그러나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핵비확산이 절대적인 이해의 문제는 아니다.그것은 많은 이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만약 북한이 한 쪽에 한두개의 핵무기를 들고 있고 다른 쪽에 전쟁이라는 카드를 보인다면 우리는 항상 핵무기쪽을 선택할 것이다.우리는 북한의 붕괴나 중국과 불화,대가가 큰 북한해안의 봉쇄보다도 한두개의 애매모호한 핵무기를 선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렇게 균형잡히고 적절한 방식으로 핵비확산을 생각해오진 않았다. 핵비확산의 진정한 중요성에 대한 우리 사고의 혼란은 특히 목표설정과 관련이 있다.우리는 북한 핵개발계획의 완전 중단을 추구하는가,아니면 미래의 핵개발 중단만을 추구하는가.어느 수준까지 모호성을 용납할 수 있는가.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한·미외교의 첫번째 주요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즉 우리는 외교정책에서 핵비확산의 역할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사고하고 잘 정의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교훈은 북한에 대한 전반적 전략과 관계가 있다.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북한에 대해 아무런 전략이나 일관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의 민주화와 책임있는 행동을 촉구하는 최선의 방법이 북한과 관계개선인지,고립화인지하는 큰 문제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혼란은 시작된다.미국은 쿠바와 이란을 고립시키지만 중국·베트남과 유대관계를 추구한다.우리는 전략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즉 국내 유권자들때문에 북한에 대해 중간적인 자세를 취한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폭넓은 전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핵문제에 대해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할지를 모른다.만약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면 중요한 경제투자 제의가 의미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는그렇지 않다.고립이 북한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제재조치가 올바른 정책이 될 것이다.그러나 적어도 그에 대한 컨센서스는 없다. ○핵 비확산 중요성 정의를 북한의 핵문제는 핵무기나 인권 등 북한에 대한 개별적 정책이 보다 커다란 전략을 벗어나서는 지속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그러한 전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전략적인 틀이 없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강경에서 온건으로,관계개선에서 고립으로 표류할 것이다. 두가지 교훈을 종합할 때 우리는 먼저 한반도에서의 핵비확산의 진정한 중요성을 정의하고 그 다음 북한으로부터 우리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분명한 전략을 개발해야만 한다.우리가 이 두가지 과제를 완성했을 때에만 북한에 대한 미국의 외교가 강해지고 일관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난 1월 클린턴 미대통령은 「합의의 틀」을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한 기회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물론 정치적인 이유때문이었다.이것은 올바른 결정일 수도,아닐 수도 있다.그같은 결정이 보다 큰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게 내 견해다. 핵문제가 한·미관계에 긴장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핵위기를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데 있어 북한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이나 협상방식,합의의 형태 등에서 때때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정책을 조율해야 한다.또 일치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양국간 안보관계의 지속이라는 대명제이다.우리의 동맹관계는 지난 40년간 평화라는 대의명분에 이바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자르 인터뷰/“쌀 제공 통한 북한 변화 기대 어려워” 『최선의 대북한 기본전략은 관계개선 추구라고 생각한다』­마이클 바자르박사는 22일 하오 한국프레스센터에서의 북한핵을 주제로 한 강연에 앞서 서울신문사와 가진 단독 인터뷰를 통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강조했다. ­북한이 서방국가들에 쌀을 요청한데 대해 실용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이라는 시각과 정권의 위기라는 시각이 있는데. ▲쌀문제가 실용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이라든가,북한정권 최후의 위기라든가 어느 쪽도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한국이나 일본이 쌀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에는 중국이라도 나서서 북한의 붕괴를 막도록 지원할 것이다.쌀제공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무리다.우리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북한정권 붕괴를 강요할 경우 한국에 굉장한 부담이 될 것이다. ­북한에 대한 한·미양국의 바람직한 기본전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관계개선 추구인가,아니면 고립화인가. ▲최선의 대북한 기본전략은 조건부 관계개선 추구정책이라고 생각한다.한·미 양국간 의견조율은 계속돼야 한다.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가 북한의 이해득실이 걸린 문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관계가 증진될수록 북한의 이해관계는 높아진다.물론 북한이 계속 잘못한다면 이득될 것이 없다는 메시지는 계속 전달돼야 하며 이미 전달됐다.앞으로 남북한간 정치·경제교류가 많아지면 우리는 위기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한·미·일과의 관계를 전담하는북한내 지도층 인사는 문제가 생길 경우 관계악화를 막도록 힘쓸 것이다. ­북·미간 연락사무소 상호 개설이 늦어지고 있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경수로 제공과 관련한 실무적인 문제는 상당한 의견접근을 이뤘다.큰 위기가 없다면 적어도 연내에 연락사무소 개설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전망은.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우선 북한이 지도층간의 분열이나 식량부족등 내부문제로 인해 동독처럼 갑작스럽게 붕괴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그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북한정권이 어느 정도 계속 존재하면서 남북한이 점진적으로 관계개선을 이뤄 통일이 수년간 지연되는 시나리오다. 북한이 2∼4년내에 붕괴한다거나 5∼7년중에 통일이 가능하다는 예상도 있으나 내가 보기에 한반도 통일은 그보다 훨씬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같다.북한은 10년이상 존속하고 결국 두정부의 협상에 의해 통일을 이룰 것으로 본다.
  • 서방,「발칸분쟁」 중재 중단/미 특사 참사로

    ◎세계­크로아 대공세 채비 【사라예보·워싱턴 AP 로이터 연합】 구 유고사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미국의 중재노력은 21일 참사를 당한 사절단 일행이 희생자의 시신과 함께 귀국함으로써 새로운 팀이 구성될 때까지 당분간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게 됐다. 리처드 홀부르크 미국무차관보등 일행은 중재노력을 중단한채 이날 교통사고로 숨진 사절단의 시신과 함께 귀국했다. 미국과 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로 구성된 5개국 교섭그룹도 로버트 프레이저 미국측 대표가 사망함에 따라 22일 제네바에서 갖기로 했던 회의를 연기했다. 한편 평화중재노력의 표류가 예상되는 가운데 크로아티아의 해안도시 두브로브니크에서는 1만명의 크로아티아군 병력이 세르비아계 진지를 경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등 긴장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한편 보스니아 동부의 회교도 고립지역인 고라주데의 상황과 관련,유엔관리들은 세르비아계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야포와 보병,탱크등을 집결시키는등 대공세의 조짐이 있을 경우에 한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전쟁 기원」 논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2)

    ◎「이데올로기 잣대」 따라 남침­북침설 대립/본지연재 「모스크바 새증언」이 남침 입증 한국전쟁의 진행 상황은 본지 연재물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했습니다.따라서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시리즈에서는 전황을 직접 다루지 않는 대신 한국전쟁 기간중 있었던 주요 사건·사고와 정치·경제·사회적 흐름을 주로 소개하겠습니다.독자 여러분께 배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25일 상오 4시 38선 일대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드리워 있었다.일요일을 맞아 새벽 단잠에 빠진 한국군부대 막사 위로 한순간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더니 이어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었다.이에 앞서 상오 3시30분쯤에는 북한 게릴라 3천1백여명이 해군 상륙선단편으로 동해안 옥계·삼척·임원 등 3곳에 상륙했다.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터진 것이다. ○북 군사력 한국 압도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경상도·제주도를 제외한 국토 전역을 수중에 넣는 등 파죽지세로 대한민국을 유린했다.북한군이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공세를 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북한은 일찌감치 전쟁준비에 나서 개전 당시 군사력에서 한국을 압도했다. 개전 초기 양쪽의 전력을 볼 때 북한이 침략의도를 갖고 대한민국을 먼저 공격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쪽이 어디냐는,곧 「한국전쟁의 기원」을 따지는 논쟁이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이는 한국전쟁이 단순히 한민족간에 벌어진 내전이나 국지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세계가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블록으로 갈라져 냉전체제로 돌입한 다음 벌어진 첫 대결의 장이었다.따라서 한국전쟁 기원에 관한 학설에는 전쟁 자체의 성격 분석을 전제한 이데올로기적 잣대가 작용하게 마련이었다.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시각은 냉전 발생의 책임을 미·소 중 어느쪽에 두느냐에 따라 두갈래로 나뉜다.하나는 「소련의 공격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이 미국의 단호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전통주의 학파다.거꾸로 「미국이 월등한 군사·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므로 소련이 불가피하게 대응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쪽은 수정주의 학파라고 부른다.기본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남침설」을,수정주의자들은 「북침설」을 지지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자 수상인 스탈린을 대개 지목하며 그 동기는 다음 몇가지로 분석한다.첫째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유럽에서 압박을 가하자 이를 분산시키려고 극동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압력분산설」이 있다.또 ▲세계 적화를 노리는 스탈린이 미국의 대응 의지를 떠보려고 도발했다는 「저항력 실험설」 ▲주한미군 철수,애치슨라인 설정으로 미국이 한국방위를 허술히 한데다 한국에서도 「5·30선거」에서 우익세력이 패하자 그 틈을 노렸다는 「허점공격설」 등이 있다. ○냉전발생책임에 무게 반면 수정주의 학설은 「맥아더와 이승만이 공모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가설에서 출발했다.미국의 좌파 언론인 스톤이 제기한 이 주장은 「이승만은 국내 정치위기를해소하려고,맥아더는 미 정부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전쟁을 획책했다는 논지로 구성됐다.정확한 근거없이 단순한 추측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점차 미국·일본 등 서방국가 좌파 지식인사이에 널리 퍼져 수정주의라는 한 갈래를 이뤘다. 「6·25」를 겪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처구니없어 할 「북침설」이 나름대로 세력을 이룬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먼저 전통주의자건,수정주의자건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냉전논리로만 파악했다는 점이다.이들은 당시 남북한의 정세나 군사력 비교 등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다만 소련 또는 미국이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분석했다.또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북한·소련측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은 점도 학자들의 연구를 제약한 큰 요인이었다.예컨대 북한군의 남침을 밝히는 한글 문헌은 1986년까지 한건밖에 공표되지 않았다. 이같은 학계 분위기는 80년대 후반 들어 반전한다.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북한 노획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이 「6·25」를 철저히 준비했고,치밀한 계획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음이 속속 밝혀졌다.「북한 노획문서」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에 나선 미군이 평양 등 북한 각지에서 압수한 각종 문서를 총칭하며 그 분량이 1백60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이 북한측 자료는,인민군 5개 사단이 6월23일부터 24일 밤사이 38선이북 수㎞ 안에 집결해 25일 새벽 선제공격을 가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가령 6사단 문화부가 6월13일 예하부대에 내려보낸 「전시 정치·문화사업」명령서를 보면 38선으로의 이동­공격 개시­점령지에서의 정치선전 활동에 이르기까지를 5단계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북한 노획문서」의 공개와 이에 근거한 연구성과 발표는 어느쪽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전쟁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이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준 자료가 서울신문이 올해 발굴해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러시아 소장 비밀문서 9백50여건이다.러시아 외무부·대통령궁·옛소련공산당 중앙위·국방부에서 각각 입수,이번에 처음 공개한 이 자료더미는 한국전쟁 준비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풀리지 않던 많은 의혹들을 해명해 주었다. ○“3인 공동정범” 밝혀 이에 따르면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은 한국전쟁에 있어 각각 주요 역할을 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을 만나 먼저 전쟁을 제의한다.이를 거부하던 스탈린은 50년 3∼4월 회담에서 남침을 허락했고,이후 5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전쟁을 주도한다.전쟁 계획을 확정하고,중공군을 끌어들였으며,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에도 휴전을 거부하는 등 주요 결정은 모두 스탈린이 내렸다.한편 모택동은 초기에 참전을 주저하긴 했지만 막상 중공군을 투입하고 부터는 전쟁터를 책임진다. 러시아 비밀문서 발굴로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해묵은 논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한민족에게 최악의 상처를 남긴 「6·25」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공동정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로 증명됐다. ◎「당 7∼8월 사업계획서」/북,108군·1168면에 「인민위」 설치/도·시·군·면 행정단위 남노당위 “재건”/「평화옹호 서울위」,지지 서명 받아내 전쟁 개시 3일만인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국토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점령지에서 당·정 기관의 건립,토지개혁,군지원을 보장하는 활동에 즉시 돌입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비밀문건을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국내 처음으로 공개한다.「당 중앙본부 7월∼8월 사업계획서」라고 이름붙은 이 문서는 「절대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등사본으로 50부만 찍은 귀한 자료다.이 문건은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북한이 세운 전략을 알려준다. 사업계획서는 점령지 행정 중심방향으로 ▲옛 남로당조직 복구등 당세 강화 ▲군수품 생산 증대 ▲군·면·이 단위 인민위원선거 및 토지개혁 실시 ▲사회단체 활동 강화 ▲농촌에서의 증산 장려와 현물세 징수 등 5개항을 제시했다.또 10일마다 회의를 열어 이같은 지시사항을 점검하도록 했다. 이 문서에서 나타나듯 북한은 행정구역에 따라 중앙(서울)·도·시·군·면 단위로 각급 당 위원회를 재건하는 동시에 임시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들을 복구했다.당 위원회 재건작업은 북로당원으로서 파견된 공작대원,남로당 출신 월북자,형무소에서 출감한 남로당 간부 출신,빨치산 간부들이 맡았다.이어 두단계에 걸쳐 「인민정권기관」을 지체없이 세웠다.먼저 점령지에 지역 정권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곧바로 선거를 거쳐 인민위원회를 정식 설치했다.남한에서 인민위원회가 들어선 곳은 1백8개 군,1천1백68개 면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북한에서 실시한 예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했다.「무상 몰수,무상 배분」을 원칙삼아 일제와 한국 정부,지주 소유 토지는 모두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자작농은 5∼20정보만 인정했다. 북한은 정치 선전·선동에도 힘을 기울여 7월14일 「평화옹호 서울시위원회」를 조직,북한을 지지하는 서명을 억지로 받아냈다.그 내용은 ▲유엔에 미국의 참전 중지를 요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등 대한민국 요인을 반역자로 지목,처형을촉구한 것이었다.
  • 광복과 항복의 두얼굴/김승희 시인·미 버클리대 교환교수(서울광장)

    미국의 가장 서쪽 바닷가에 앉아 눈앞에 망망히 펼쳐져 있는 태평양을 바라본다.누군가 여기서 저 바다를 쭉 따라 가면 우리나라 동해가 나온다고 말한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여기는 미국 대륙의 가장 서쪽,우리말로 하자면 서부의 토말리(전남 해남땅의 맨끝에 있는 땅끝마을)와도 같은 곳인데 우리나라쪽에서 보면 동해가 되니 세상이란 참 이상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우리나라의 동해가 이쪽에서 보면 서해가 된다는 사실은 세상에는 단지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있을 뿐 절대 변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것,불변의 향방 같은 것은 없는 것이 아니냐 라는 상대주의적 인식을 준 것이다. 그런 상대주의적 인식은 「종전 50주년」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만날 때도 강하게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우리는 올해를 「광복 50주년」으로 부르면서 해방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이곳 버클리 대학 동아시아 도서관에 소장된,서울에서 건너온 잡지들만 봐도 많은 잡지들이 「광복 50주년」특집 증면호들을 마련하여 해방이후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을 만날 수 있다.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의 「종전 50주년」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나가 일본과 독일의 제국주의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는 강한 자부심과 더불어 『그러나 과연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인류평화를 위해 꼭 필요불가결했던 것인가』라는 양심의 반성을 담고 있는 것 같다.그래서 지난 일요일에는 히로시마를 생각하는 시민들의 모임이라는 행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기도 했다.「종전 50주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이렇게 자기힘의 확인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반성이 어울린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올해를 「항복 50주년」이라 부르고 있는 일본의 태도는 철저하게 항복의 슬픔과 히로시마의 고통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피해자 측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히로시마 사진전이나 히로시마의 후유증들을 매스컴을 통해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서방세계에 죄의식을 일으키고 동시에 자신이 가혹하게 지배했던 다른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 가해자로서의 책임과 죄를 면제받고 싶어하는 것이다.심지어 『과연 일본이독일이나 다른 유럽국가였다면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겠는가? 히로시마는 미국이 아시아를 무시한 결과다』라고 말하는 재미교포를 본 적도 있다.일본제국주의의 지배로 인한 고통을 누구보다도 많이 당했던 한국이 같은 아시아권이라는 이유하나로 일본의 피해자의식에 동의해준다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에 가혹한 가해자였다는 역사조차를 잊어버린 편리한 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상조차 안하고 있는 그들이 아닌가. 어쨌든 우리는 광복 50주년에 이제야 옛 총독부건물의 상징적 해체를 시작했지만 일본은 항복 50주년에 이미 미국을 경제적으로 정복하여 미국의 길에는 일본 자동차가 쫙 깔리고 미국가정의 거실에는 일본이 만든 만화영화가 소니 텔레비전을 통해 넘쳐들고 있다.항복의 시간뒤에 이미 경제의 힘으로 자신의 빚을 되찾을 광복을 철저하게 만들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우리가 광복절만 되면 광복을 분에 넘치게 자축한다는 일이 부끄러운 일임을 느낄 수 있게 된다.히로시마의 결과로 광복을 얻었지만 겨레는 두동강이 되었고 아직도 남이 채워준 족쇄를 허리에 차고 있는 형편이며 방송과 광고는 일본베끼기에,인기있는 신세대 문인은 일본작가 하루키 베끼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50년전의 역사적 광복과 항복이 이제 뒤집혀져 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우리에게 동해가 남에겐 서해일 수 있듯이 우리에겐 광복이 남에겐 항복이었으며 그 항복의 절망이 경제적 정복을 낳는 긴 시간동안 우리는 분단이라는 기형적 현실을 고치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슬픔을 우리가 직시할 때만 참으로 의미있는 새 광복을 만들 수 있을 것같다.
  • “일본경제는 결코 취약하지 않다”(해외논단)

    ◎“슬럼프 빠져 허우적” 미 언론서 실상 왜곡보도/일 경제 「무서운 성장」 계속… 멀지않아 미 능가할것 「한때」 호적수였던 일본의 경제가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주 취약해져 이제 미국을 걱정스럽게 하고 있다는 최신 뉴스도 있지만 일본경제의 「무서운」 실상이 서방·미국 언론의 왜곡보도로 가려져왔다는 주장 또한 강하게 제기된다.「맹점:일본은 20 00년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다」의 저자이며 경제평론가인 이먼 핑글턴이 시사월간지 「워싱턴 먼스리」에 기고한 「일본경제는 결코 취약하지않다」라는 글을 소개한다. 지난번 미·일 무역마찰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미국 유수언론의 사설란마다 「오른쪽 핸들」 얘기가 빠짐없이 등장했다.일본이 자동차시장을 좀 더 개방하지 않으면 일본 고급수입차에다 60억달러의 보복관세를 매기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세상 물정을 잘못 알고서 세웠다고 이 사설들은 꾸짖었는데 이유는 문제가 일본이 아니라 미국 자동차 제조업자에게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오만한 미국의 빅스리 자동차사는 미국과 반대인 일본식 오른쪽 핸들형 자동차제작을 등한시해 일본 판매량이 저조할 수 밖에 없다면서 미국무역대표부는 문제도 안되는 걸 가지고 문제삼고 있다는 비난 논조를 편 것이다. ○사설마다 미 정책 비난 그러나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유럽 현지공장을 통해 유럽식인 오른쪽 핸들 자동차를 고품질로 잘 만들어 내고 있었다.핸들이 어디에 붙었든 미국산이 일본에서 잘 팔리지 않은 것은 일본 자동차판매업소들이 꼼짝없이 국내 제작회사에게 장악된 탓이다. 그럼에도 미국 미디어를 통해서는 이같이 간단하고 즉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앞의 비근한 예는 다소 과장되어있다 하더라도 일본 경제보도에 관한 미국언론의 시각은 이상하게 일본을 역성드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제조업 수입량이 소규모에 그치는 걸 지적하면서도 『보호주의가 그 이유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친절한 설명을 붙이거나(89년 에코노미스트),미국의 대일 무역적자와 관련해 『이 문제의 해결책은 이에 대한 보도를 중지하는 것』이라는 사설(94년 월스트리트저널)을 실었다. ○「일본 봐주기」 노골화 6백60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대일무역적자에 대한 책임의 상당부분을 일본에게 면제시켜준 유수언론의 이같은 논조는 곧 다른 언론매체에서 원숭이같이 곧이곧대로 되읊어지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그 결과 일반 미국독자들은 일본의 경제적 확장이 얼마나 서방에 위협적인 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언론이 퍼뜨린 가장 해로운 일반상식은 『일본의 보호주의 관행은 미련한 사람만이 저지르는 자충수』라고 할 수 있다. 그대로 가만 놔둬도 시간이 흐르면 일본은 현재의 어리석은 대외배척 성향을 버리고 대문을 활짝 열고서 미국 제품을 맞아들일 것이란 얘기다.그러나 경제전문가들이 지적하다시피 영리한 보호주의 조치를 통해 저축률을 극대화한 일본은 불경기를 견뎌내는 강한 체질을 길러왔다. ○일 GDP 미국의 85% 일본경제가 깊은 「슬럼프」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른다고 일반인들도 믿게 되면서 언론의 일본봐주기는 보다 노골화되고 있다.90년대들어 일본 경제가 눈에 확 띌 정도로 끈질긴역경에 처해있다는 얘기를 줄곧 듣다보니 미국인들은 이제 다시 일어선 미국이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일본을 눌러버렸다고 은연중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다.이 생각은 착각도 보통 큰 착각이 아니다. 다음 몇가지 통계수치를 살펴보면 일본이 슬럼프에 빠졌다는 기간동안 미국의 손해를 디딤돌로 해서 얼마만큼 경제력을 키웠는지 금방 알수 있다.이런 수치들은 묘하게 미국언론에는 잘 먹히지 않았다. ▲현재 환율로 계산해서 일본의 경제력(국내총생산)은 미국의 85%이상에 이른다.80년대 말에는 55%였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현 환율로 세계최고다. ▲93년 기준으로 일본의 순저축액은 8천1백90억달러인데 그해 24개 선진국그룹인 OECD의 총 저축증가액 중 56%를 차지했다.미국은 5%점유에 그쳤다. ▲일본의 대외원조는 세계최대이며 중요한 동아시아 지역의 경우 미국보다 20배나 더 많이 원조한다. ▲인구가 미국의 절반인 일본은 미국보다 제조업 상품을 더 많이 수출하고 있다. ▲일본의 실업률은 세계최저 기록을 계속하고 있으며 「슬럼프」에도 불구 90년이후 총 3백20만개의 일자리가 순수하게 늘어났다. 이같은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 언론은 「미국이 일본을 쳐부쉈다」는 식의 얘기와 논조를 줄창 지속한다. 지난 90년4월의 저점을 기준으로 해서 엔화의 달러시세는 그간 배로 올랐는데 이만한 규모의 환율변동은 일본산업에 엄청난 압력이었음이 틀림없겠지만 이것은 건강한 압력이었다.이 기간동안 일본의 주요 제조업체 가운데 망해 나자빠진 기업은 단 한개도 없다. ○실업률 증가 거의 없어 서방 언론 특히 미국은 예전부터 일본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역력했다.지난 30년대말 일본경제력을 얕잡아 보는 바람에 중국에서 일본황군의 의도를 캐치하는데 실패했고 50년대초에는 독일한텐 전쟁배상금 8백억달러를 물리면서도 같은 전범국 일본에겐 10억달러 배정에 그쳤다.70년대 중반 오일쇼크 때 서방언론들은 일본이 최대의 희생자라면서 동정을 아끼지 않았는데 개중엔 전체적으로 매출이 55%까지 격감될 것이라면서 이대로 가다간 자칫 군국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떤 매체(이코노미스트)도 있었다.말할 것도 없이 일본경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그러기는 커녕 실업률증가가 거의 기록되지 않은 채 더 강해졌다. 90년대의 슬럼프 이야기도 비슷하다.멀지않아 일본 경제력은 미국보다 광년만큼 앞서있을 것이다.그때 미국언론과 독자들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나 하고 머리만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따름일 터이다.
  • 러시아입장 고려 NATO확대 신중히/예브게니 바자노프(지구촌칼럼)

    ◎동구국가입 서두르면 96년 러 대선서 민주개혁파 곤경에 러시아와 서방과의 사이에 놓인 가장 큰 쟁점중 하나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확대문제다.문제의 발단은 소련의 옛군사동맹국들인 동구권이 자신들의 적이었던 나토에 가입하겠다고 나선 데서 시작됐다. 그렇게 나선 이유는 다소 복잡하다.동구국들은 우선 나토가입을 통해 서방의 일원으로 대접받고 싶어한다.물론 경제적인 이득도 기대한다.이와 함께 나토 가입이 안보보장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동구,경제적 이익 기대 이들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 반드시 강대국의 먹이가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갖고 있다.체코는 2차대전 전 나치독일의 먹이가 됐고 폴란드도 마찬가지였다.지금 체코,폴란드,기타 동구국들의 우려 대상은 나치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란 점이 다를 뿐이다.이들은 2차대전 뒤 모두 러시아에 의해 점령돼 비인간적이고,비효율적인 공산주의에 의해 속박됐다.몇몇 나라들은 이 속박을 벗어나려고 하다 소련군의 침공을 받아 저지됐다.동구국들은 이런 아픈 역사의 기억이 있다. 러시아가 민주화됨으로써 동구국들은 큰 혜택을 받았다.이들은 자유를 되찾았고 서구식 사회 건설의 기회를 얻었다.이웃 대국 러시아에 대해 품었던 공포감도 사라지는듯 했다.그러나 러시아의 개혁이 비틀거리고 외교정책 기조가 흔들리면서 이 공포감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1993년 12월 총선에서 극우민족주의자 지리노프스키의 압승은 동구국들을 아연 긴장케했다.지리노프스키는 수시로 동구권을 포함,주변국들을 러시아영토로 귀속시켜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외에도 러시아 정치인들중에는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펴는 인물이 많다.정치적 불안정,경제·사회적 제불안요인은 동구국들로 하여금 러시아의 앞날에 대해 짙은 우려를 갖게 했다.이같은 상황에서 자신들의 독립,자유,안보를 지키기 위해 동구국들은 나토로 몰려든 것이다. ○러시아­서구 관계 냉각 애초에 러시아 민주지도자들은 나토확대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91년,92년 공산주의를 종식시킨 승리감에 도취돼 있을 때는 모든 서방국들이 하나같이 동맹국처럼 느껴졌다.처음 폴란드의 나토가입문제가 나왔을 때 옐친대통령은 주권국가가 어떤 국제기구에 가입하든간에 그것은 그나라의 고유권한이라고 말했다.한때는 러시아 자신도 나토가입을 고려했을 정도였다.이같은 입장은 그러나 보수민족주의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바뀌기 시작했다.러시아와 서방과의 관계도 긴장관계로 바뀌었고 러시아내 서방에 대한 기대,신뢰분위기도 급속히 냉각됐다.러시아에서 반서방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동구국들은 더 결사적으로 나토가입을 희망했다.그러면서 러시아 역시 나토확대에 강경반대입장을 고수했다. 지금 나토문제는 러시아정부의 최대현안이다.러정부의 입장을 몇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첫째,서방은 처음부터 러시아를 기만했다.소련이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해체했는데도 서방은 그 대응기구인 나토가 동구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존속시키고 있다.둘째,나토를 동구권으로 확대하려는 것은 서방이 여전히 러시아를 적으로 본다는 증거이다.셋째,나토확대는 유럽을 분열시켜 대결분위기를 조장한다.넷째,나토확대는 러시아를 유럽대륙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다. 위 4가지 논지는 러시아정부내 대부분의 인사들이 동감한다.극우민족,공산주의자들은 여기에 몇가지 주장을 더 추가한다.우선 나토확대는 러시아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온다는 것이다.러시아는 서방의 군사,정치적 위협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주장이다.또한 이런 세력불균형은 종국에는 전면대결로 발전케 된다고 말한다. 나토확대에 관한 러시아정부의 공식입장은 매우 강경하다.옐친대통령은 이 움직임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그러면서도 미국등 서방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시키고 싶어한다.그래서 타협의 여지는 있다.러외무부가 나토국들에게 제시한 몇가지 방안을 보자. 첫째,나토를 해체하고 전유럽을 포괄하는 안보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물론 서방은 이에 반대한다.그 다음으로 내놓은 안이 바로 동구권을 받아들이되 정회원이 아닌 동반자관계 자격으로 받으라는 것이다.러시아정부의 지도자들은 서방지도자들에게 최소한 나토확대를 서두르지는 말아달라고 주문한다.나토확대를 서둘러러시아내 보수여론을 자극할 경우 96년 대통령선거에서 보수파들이 승리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이다.반대로 민주개혁파가 승리하면 나토확대에 크게 반대하지도 않을 뿐더러 동구국 역시 굳이 나토에 가입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논리이다. ○회원국들 입장 엇갈려 나토국 내부에서도 확고한 컨센서스는 아직 없다.예를 들어 스페인,이탈리아는 나토확대에 반대입장이다.기구가 너무 커져 자신들의 입지가 더 좁아지는 걸 우려해서이다.미국 역시 러시아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신중히 추진하자는 자세이다.반면 독일은 이를 빨리 추진하고 싶어한다.독일국경에 맞닿은 나토방위선을 동쪽으로 밀어내보내고 싶기 때문이다.그 경우 독일은 실로 50년만에 최전방국가의 짐을 벗는 것이다.군사전문가들은 대체로 나토확대에 신중한 견해를 밝힌다.무엇보다 그렇게 비대한 기구를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우선 동구국들은 가입하더라도 군사장비,인력을 재무장하고 재훈련시켜야 한다.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할 때 나토확대는 최소한 수년은 걸려야 해결될사안이다.그리고 미·러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무리하게 추진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양국 모두가 그런 사태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 군사력 압도적 우세… 점령은 “무리”/중국,대만공격 능력 있나

    ◎대만 첨단장비 무장… 충돌땐 중도 큰 타격 중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시위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이와 때를 맞춰 인민해방군의 대만침공준비설도 그럴듯하게 퍼져가고 있다. 중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침공은 가능한가.군사적인 측면에서 볼때 중국군사력은 대만의 7.4배인 3백11만명.42만여명의 대만군에 비해 무려 2백69만명이 많다.대만은 북경까지 닿는 장거리 미사일이 없지만 수도 타이베이를 비롯,대만의 모든 도시는 중국 미사일의 사정거리안에 있다.대만은 핵도 없다.지난달에 이어 15일부터 재개된 대만해협부근 공해상에서의 미사일발사 훈련은 이점에서 대만인들의 안보불안을 부채질한다. 전투기도 4천2백여대 대 3백90여대,함정도 9백24척 대 96척,잠수함 1백20척 대 4척등 수치상 전력면에서 대만은 중국의 적수는 아니다.그러나 대만장비들이 최첨단의 현대무기이고 중국의 장비 노후화를 고려할 때 단순비교엔 무리가 따른다.북경의 외국군사연락관사이에도 항공모함 한척없는 중국의 대만점령은 용이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무력공격 전단계로 실시가능한 해상통로봉쇄도 약간의 경제적 타격을 제외하고는 군사·전략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들 지적이다. 국내외적 정세를 고려할 때 중국의 대만침공 가능성은 당분간 실현성이 적다.이념이 퇴색하고 대신 경제발전성과가 정권의 정통성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최소한 몇년간은 중국경제의 뒷걸음질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냉전붕괴이후 중국의 급성장에 대한 주변국가들의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태에서 군사적인 충돌을 야기,고립의 길을 자초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수수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중국국내정치가 혼란,군부가 득세하고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일 경우 침공시나리오도 전혀 배제할순 없다. 대만에 대한 실제적인 침공여부완 관계없이 당분간 대만에 대한 중국의 무력시위와 대만 침공설은 강도를 더해갈 것으로 보인다.중국정부는 대만을 강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정리했다는 북경외교가의 주장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잇따른무력시위와 침공가능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대만내부의 민심을 흔들어 흡수통일을 위한 정치적,심리적 발판을 닦아보자는 것이 중국의 의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올해말 총선및 내년초 총통 직접선거를 앞두고 대만내부에서 일고 있는 독립열기와 국제연합(UN)발족 50주년을 앞두고 대만당국이 벌이고있는 UN재가입등 국제무대복귀외교를 좌시할수 없다는 것이 중국의 확고한 자세이다. 뿐만아니라 중국의 무력시위는 대만뿐 아니라 대만 뒤의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나칠 수 없다.이등휘총통의 미국초청과 같이 대만을 인정하는듯한 태도를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과시하자는 것이다.
  • “핵강국 발돋움” 강한 집념 표출/중국의 「핵실험 재개」 저변

    ◎서방위협에 대응력 확보 전략/“강력한 핵탄두 제조 시도” 분석 중국의 핵실험 강행은 냉전후 강화되고 있는 세계적인 반핵분위기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서방측 위협에 대한 확실한 억제력으로서의 독자적인 핵강국에 강한 집념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세계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난 5월15일에 이어 17일 또다시 43번째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중국의 계속되는 핵실험은 국제적 압력이나 여론보다는 국익을 우선하는 중국 특유의 정책적 독자성의 한단면을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올해 적어도 1차례의 핵실험을 더하고 내년에도 3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할 것으로 보인다.중국은 다른 핵보유국보다 핵실험이 크게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핵실험을 실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실제로 중국의 핵실험은 미국(9백50회),러시아(6백회),프랑스(2백회),영국(60회)보다 적은게 사실이다. 미국 등 다른 핵 보유국의 핵무기보다 낙후됐다고 판단하고 있는 중국은 핵실험을 통해 핵 기술을 축적하고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탄두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군사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중국은 약4백5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이 갖고 있는 핵무기의 전체적인 위력은 2차대전때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1만6천배에 해당된다고 그린피스는 주장하고 있다.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중국이 핵실험을 계속 강행할 경우 아시아에서 핵무기경쟁이 유발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중국은 핵실험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 개발,무기 현대화등 군비증강을 계속,군비감축이라는 세계적인 흐름과는 역행하고 있다. 중국의 핵실험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아시아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일본은 중국의 핵실험을 강력히 비난하며 차관의 추가 감축을 시사하고 있다.그러나 중국의 핵실험은 세계적인 비난과는 관계없이 중국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한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중국은 포괄적인 핵실험조약이 발효되면 핵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 “경기부양 필요” 미·일 공동개입/달러화 급상승 배경

    ◎79엔대서 4개월만에 98엔대로 점프/독·스위스까지 개입… 엔화 하락 가세 미국의 달러화가 연일 초강세 상승행진을 계속하고 있다.16일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및 일본은행(BOJ)과 함께 독일 분데스방크와 스위스 국립은행도 달러화 공동구매에 적극 가세,달러화가 6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달러당 1백엔에 가까운 수준을 보여주며 「엔화 약세」를 기정사실화했다.독일 분데스방크와 스위스 국립은행의 개입은「달러화 강세」와 「엔화 약세」를 확실히 가르는 분수령이 됐다. 달러화는 16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99엔대에 육박하는 초강세를 보였다.달러화는 이날 뉴욕 외환시장에서도 1달러당 96.90엔까지 치솟아 지난 3월1일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또한 마르크화에 대한 달러화의 환율은 1달러당 1.48마르크까지 올라가 지난 2월21일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달러화는 특히 최근 며칠동안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달러화는 지난 4월19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79.75엔까지 폭등해 전후 최고를 기록했었다. 선진4개국 중앙은행들의 적극 개입으로 이날 달러화의 가격은 1달러당 각각 3엔과 3페니히씩 오른 셈이 됐다.4개국 중앙은행의 동시개입은 최근 달러화가 꾸준한 오름세를 보이기 시작한 점에 미루어 볼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따라서 이를 뒤집어보면 특히 미·일·독등 3대 경제강국들이 달러화의 강세를 그만큼 계속적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엔 약세와 마르크 약세가 무엇보다 시급한 일본과 독일,여기에 달러 강세가 필요한 미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국제외환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특히 미국은 달러강세를 통해 인플레 압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장기금리를 인하하고 경기후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미국은 올 2·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5%로 지난 분기 2.7%보다 떨어졌는데도 장기금리가 오히려 올라가고 있는 점을 매우 우려해왔다. 최근 경기침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독일 역시 인플레에 연결될 수 있는 금리인하를 피하면서 경기를 상향조절하기 위해 달러 매입과 마르크 매각을 통한 외환시장 개입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이날 달러화의 공동구매에는 독일이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 준다. 일본에서는 의외로 엔화 약세가 급격히 진전돼 향후 3개월 이내에 달러당 1백엔까지 엔화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지난 2일 미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한데 이어 15일부터 나타난 독일의 가세가 촉발제가 됐다고 보고 있다.4월의 서방선진7개국(G7)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담에서 합의된 「외환변동의 질서있는 반전」내용이 실질적으로 기속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뉴욕의 외환전문가들은 『4개국 중앙은행의 달러화 집중구매가 성공을 거두면서 1달러당 1백엔대와 1.5마르크대가 이미 사정권에 들어왔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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