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서리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서희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세부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910
  • “독도는 울릉군 소속 영토”/을사조약 직후 일관리 인정 자료공개

    ◎서울대 규장각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독도가 울릉군소속 영토임을 명확히 밝힌 당시 강원도 관찰사 서리의 보고서를 서울대 규장각(관장 한영우교수·국사학)이 13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 1906년 4월29일 울릉도와 독도를 관장하던 당시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가 『독도가 이제는 일본 영토로 되었다』는 일본인 관리 일행의 언행을 중앙정부의 참정대신에게 보고하는 가운데 확인된 것이다. 이명래 관찰사 서리는 보고서에서 『울릉군의 관할구역인 독도가 1백여리 바다 밖에 있나니,1906년 3월28일 일본인 관리 일행이 울릉군수 심흥택의 관사로 찾아왔다』고 밝혀 독도가 울릉군 소속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 1급이상 공직자 24명 재산공개 내역

    ◇김광일대통령비서실장(28억4천4백만원) △본인 ▲대지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20억6천만원 ▲답 부산시 기장군 임광면 회전리 6백34만원 ▲임야 부산기 기장군 일광면 화전리 외 1건 4천1백만원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 130.23㎡ 3억9천4백만원 ▲예금 2천3백만원 ▲한국콘도 회원권 5백만원 △배우자 ▲임차권 1억2천만원▲95년식 마르샤 ▲예금 1억2천5백만원 △장남 ▲아파트 부산시 중구 보수1동 대림에이스타운 76.545㎡ 7천4백만원 ▲94년식 쏘나타 ▲예금 1천4백만원 ◇문종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6억7천8백만원) △본인 ▲서울 서초구 반포동 효성빌라 85.06평 3억2천만원 ▲서초구 반포4동 한신서래아파트 51평형 3억3천만원 ▲사무실 전세권 1억4천만원 ▲93년식 그랜저 ▲현금 1천2백만원 ▲유가증권 6백만원 ▲채무 3억원▲동양화 2점 △배우자 ▲94년식 쏘나타Ⅱ ▲예금 8천1백만원 △장남 예금 1천8백만원 △차녀 예금 1천8백만원 △양녀 ▲전세권 2천5백만원 ▲예금 2천5백만원 ◇남주홍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차장(4억6천6백만원) △본인▲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한강맨션 38평형 2억3천만원 ▲서초동 오피스텔 17평 2천6백만원 ▲예금 6천만원△배우자 ▲서울시 이촌동 공무원아파트 12평형 7천5백만원 ▲예금 4천만원 ▲채무 1천6백만원 ◇정재롱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1억6천만원) △본인 ▲강남구 대치동 우성아파트 31평형 1억4천7백만원 ▲임차권 1억3천1백만원 ▲자동차 91년식 쏘나타 ▲채무 1억1천7백만원 ◇윤증현재정경제원 세제실장(5억7천9백만원)△본인▲토지 경남 함안군 대산면 3천7백만원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50평형 3억3천8백만원 ▲강남구 도곡동 아파트형 조합주택 1억4천5백만원▲예금 2천9백만원 ▲채무 6천만원 ▲뉴코아과천헬스글럽·휘닉스 파크 콘도미니엄 회원권 2천1백만원 △배우자 ▲자동차 92년식 엘란트라 △모 ▲동작구 사당동 신동아아파트 25평 5천6백만원 ▲예금 1천1백만원 ◇권오기통일부총리(8억1천7백만원) △본인 ▲임야 경기도 시흥군 군포읍 산본리외 2건 6천7백만원 ▲성동구 옥수동 한남하이츠아파트 58평형 3억7천3백만원 ▲마포동 오피스텔 21평형 5천만원 ▲자동차 93년식 그랜저·90년식 쏘나타 ▲채무 1천8백만원 ▲한성컨트리클럽·신라호텔헬스클럽 회원권 8천1백만원 △배우자 ▲예금 2억6천3백만원 ◇안병영교육부장관(5억9천3백만원) △본인 ▲임야 경기도 용인군 6천8백만원 ▲단독주택 서대문구 연희동 3억8천7백만원 ▲근린생활시설 경기 성남시 성남동 건물 1억4천9백만원 ▲예금 1천8백만원 ▲유가증권 1천5백만원 ▲채무 2억5천만원 △배우자 ▲유가증권 1천8백만원 △장남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대지 1천1백만원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답 2천2백만원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전 외 1건 7백만원 ▲단독주택 서대문구 연희동 1억4천3백만원 ▲유가증권 2천1백만원 △장녀 ▲자동차 93년식 세피아 ◇이보영교육부기획관리실장(6억1천1백만원) △본인 ▲단독주택 광진구 중곡동 1억7천7백만원 ▲연립주택 종로구 평창동 1억3천3백만원 ▲자동차 89년식 쏘나타 ▲예금 4천만원 ▲채무 6천만원 △장남 ▲관악구 봉천동 복권아파트 17평 3천만원 ▲전세권 3천만원▲예금 1천만원 ▲채무 4천5백만원 △차남 ▲예금 2천9백만원 △장녀 ▲예금 1천5백만원 ◇서재문공주교육대학교총장(6천5백만원) △본인 ▲답 충남 공주시 계룡면 내흥리 2백만원 ▲임야 충남 공주시 월송동 2천6백만원 ▲연립주택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 홍익빌라 6천1백만원 ▲92년식 엘란트라,90년식 에스페로 ▲채무 1천5백만원 △배우자 ▲채무 1천만원 ◇정종택환경부장관(9억2천5백만원) △본인 ▲전 충북 청원군 오창면 여천리 4천9백만원 ▲답 충북 청원군 오창면 화산리외 1건 5천5백만원 ▲아파트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64평형 6억3천3백만원 ▲농가주택 충북 청원군 오창면 여천리 1천만원 ▲88컨트리클럽·청주컨트리클럽 회원권 8천4백만원△배우자 ▲답 충북 청원군 오창면 화산리 4백만원 ▲연립주택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동 보성빌라 1천2백만원 ▲유가증권 1천6백만원 ◇황홍석환경부기획관리실장(1억5천5백만원) △본인 ▲임야 경남 함안군 철원면 운곡리 2백만원 ▲아파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31평형 9천6백만원 ▲자동차 91년식 쏘나타,96년식 티코 ▲예금 1천4백만원 ▲유가증권 2천4백만원 △배우자 ▲유가증권 1천8백만원 ◇김양배보건복지부장관(6억7천2백만원) △본인 ▲답 전남 곡성군 석곡면 농파리외 1건 8백만원 ▲건물 강남구 신사동 6억7천7백만원 ▲전세권 강남구 신사동 현대아파트 182.95㎡ 2억8천만원 ▲91년식 그랜저 ▲채무 2억9천9백만원 △배우자 ▲전 전남 곡성군 석곡면 능파리 5백만원 ◇오형환총무처소청심사위원(2억7천5백만원) △본인 ▲임야 충남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외 1건 3천6백만원 ▲대지 충남 부여군 양화면 암수리 4백만원 ▲답 충남 부여군 양화면 암수리외 1건 1백만원 ▲아파트 서초구 반포동 주공아파트 32평형 1억8천6백만원 ▲전세권 서초구 잠원동 대림아파트 34평형 1억5백만원 ▲자동차 93년식 쏘나타Ⅱ ▲예금 3천6백만원 ▲채무 1억1천5백만원 △배우자 ▲예금 2천만원 ◇문동후총무처소청심사위원(5억3백만원) △본인 ▲대지 대구시 동구 율하동 7천8백만원 ▲임야 경북 금릉군 구성면 상좌원리 1천5백만원 ▲전 충북 청주시 현암동 3백만원▲아파트 강남구 개포동 우성아파트 31평형 1억3천8백만원,강서구 방화동 삼환아파트 48평형 1억9천5백만원 ▲자동차 90년식 쏘나타 ▲예금 3천3백만원 ▲유가증권 1천만원 ▲채무 9천1백만원 △배우자 ▲임야 전남 신안군 비금면 고서리 2백만원 ▲예금 1천만원 △장녀 ▲예금 1천2백만원 ◇조만후정무제1장관실 정무차관(4억3천3백만원) △본인 ▲답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3백만원 ▲대지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1백만원 ▲아파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아파트 55평형 2억8천만원 ▲예금 6천5백만원 △배우자 ▲자동차 94년식 쏘나타Ⅱ ▲예금 6천2백만원 △장녀 ▲예금 2천만원 ◇주정중 부산지방국세청장(3억2천2백만원) △본인 ▲임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삼암리 2천4백만원 ▲대지 부산광역시 영도구 2천9백만원 ▲송파구 잠실동 우성아파트 43평형 2억5천6백만원 ▲자동차 94년식 쏘나타Ⅱ ▲예금 1천1백만원 ◇오문희대전지방국세청장(3억3천3백만원) △본인 ▲강남구 대치동 국제아파트 48평형 3억1천6백만원 ▲자동차 91년식 쏘나타 ▲예금 1천7백만원 ◇김본식경찰청기획관리관(3억2천8백만원) △본인 ▲근린생활시설 강남구 포이동 4억6백만원 ▲자동차 93년식 쏘나타 ▲채무 9천5백만원 △배우자 ▲임차권 1천7백만원 ▲자동차 90년식 쏘나타 ◇김종우경찰청형사국장(3억3천1백만원) △본인 ▲강남구 대치동 우성아파트 41평형 2억7천5백만원 ▲연립주택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 건영빌라 60평 2억1백만원 ▲자동차 94년식 쏘나타Ⅱ ▲채무 1억7천2백만원 △배우자 ▲임야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신봉리 6천7백만원 ▲임차권 4백만원 ▲채무 4천5백만원 ◇조석봉경기지방경찰청장(14억7천4백만원) △본인 ▲임야 경기도 이천군 백사면 7천8백만원 ▲대지 강남구 역삼동 4억2천8백만원 ▲단독주택 강남구 역삼동 5억3천만원 ▲근린생활시설 영등포구 신길동 3억8천1백만원 ▲92년식 쏘나타 ▲예금 2천3백만원 △배우자 ▲답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 9백만원 ▲예금 1천9백만원 ▲유가증권 2백만원 ◇이택천경북지방경찰청장(5억3천7백만원) △본인 ▲전 경북 성주군 용암면 기산리 1천5백만원 ▲답 경북성주군 용암면 3천1백만원 ▲임야 성주군 용암면 기산리 40만원 ▲단독주택 경북 성주군 용암면 기산리 8백만원 ▲강남구 수서택지개발기구 목련타운 48평형 3억4천5백만원 ▲전세권 1억3천만원 ▲93년식 쏘나타 ▲예금 5백만원 △배우자 ▲95년식 아반떼 ◇김금도경남지방경찰청장(4억9천6백만원) △본인 ▲동대문구 청량리1동 미주아파트 43평형 1억7천4백만원) ▲오피스텔 강남구 역삼동 18평형 3천2백만원 ▲92년식 쏘나타,90년식 스쿠프 ▲현금 1천2백만원 ▲예금 3천5백만원 △배우자 ▲예금 1억6천5백만원 ▲금 460g △장남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 24평 5천5백만원 ▲예금 4천2백만원 ▲채무 4천2백만원 △장남의 배우자 ▲예금 2천3백만원 ▲금 600g ◇이한구 병무청차장(6억2천6백만원) △본인 ▲서대문구 충정로2가 현대아파트 35평형 1억5천만원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32평형 1억9천7백만원 ▲93년식 쏘나타 ▲예금 9천5백만원 ▲채무 8천만원 △배우자 ▲예금 1억2천3백만원 △장남 ▲임야 충남 논산군 연산면 1백만원 ▲대전광역시 유성구한빛아파트 43평형 8천7백만원 ▲예금 9천3백만원 ▲채무 4천3백만원 ◇김선주 농어촌진흥공사부사장(3억1천9백만원) △본인 ▲단독주택 은평구 역촌1동 1억3천5백만원 ▲92년식 캐피탈 ▲현금 1천2백만원 ▲예금 1백만원 ▲채권 6천5백만원 △배우자 ▲현금 1천9백만원 ▲예금 1천9백만원 ▲채권 1천5백만원 △차녀 ▲예금 1천만원 △장남 ▲예금 1천만원
  • 남북대화기피 교역엔 적극적/작년 대남수출량 2억3천만불로 급신장

    ◎교역품목 2백개로 급증… 북,아연괴 등 주종/의류외 가전품도 위탁가공… 경제실리 챙겨/계약불이행 방지책­직교역대비 법규제정 절실 전쟁중에도 적국과 장사는 계속된다.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대화가 단절된 채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지만 교역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경제난으로 북한의 전체 대외교역량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특히 북한의 대남반출은 90년과 북핵문제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9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지난해엔 남한이 일본에 이어 2위의 수출대상국으로 부상했다.우리와의 당국간 대화는 계속 거부하면서도 자원수출,임가공을 통한 경제적 실리는 최대한 챙기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북한과의 교역을 내국간 거래로 간주하고 있다.분단국이라는 특수한 사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북쪽으로 나가는 것을 반출,북쪽에서 들여오는 것을 반입이라 부르는데 북한쪽에서 보면 대남반출은 수출,대남반입은 수입에 해당된다. 지난 88년 대통령 7·7특별성명 발표이후 시작된 남북간 교역은 처음엔 1백% 간접교역형태로 이뤄지다가 89년에 위탁가공용 원자재의 대북반출이 시작되면서 본격화하기 시작했다.남북간 교역량은 거래가 시작된 89년에는 1백3만달러에 불과했으나 그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91년엔 1억달러를 돌파했고 92년에 2억달러,그리고 지난해엔 3억달러를 넘어서는 급신장세를 보이고 있다.그러나 이 기간중 북한의 대외수출은 갈수록 크게 줄었다. 89년에 20억달러를 넘어선 것이 91년엔 절반으로 감소했고 94년에는 10억달러도 채 안되는 8억4천만달러로 줄었다.아직 95년 추정자료는 나오지 않았으나 북한의 대내외여건으로 보아 더 감소했을 것으로 북한경제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이 북한의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90년에는 0.13%에 불과했으나 지난해는 29%수준으로 높아졌다.이는 다시말해 북한의 대남 무역의존도가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다.북한의 지난해 주요수출국을 보면 일본이 2억8천만달러로 가장 많고 남한이 2억3천8백만달러로 2위,중국이 6천만달러로 3위다.94년엔 중국이 2위였으나 지난해는 우리한테 밀렸다.그러나 북한과의 전체교역면에서는 중국이 4억9천만달러로 1위,일본이 4억8천만달러로 2위,남한이 3억1천만달러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과의 교역에서 주목되는 것은 직거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93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홍콩등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이 대부분이었으나 94년부터 직거래가 늘기 시작,지난해에는 9%수준으로 높아졌다. 이처럼 직교역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북측으로부터 간접교역을 통해 한약재와 농산물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북한산이 아닌 다른 나라 것이 위장반입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또 현격한 격차를 보이던 반입·반출비율이 좁혀지고 있다는 점도 향후 교역증대와 관련,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가 북한에서 들여오는 것과 북한에 들여보내는 비율을 보면 94년엔 무려 8대 1이었으나 지난해에 3.2대 1로 좁혀졌다.북측이 의류위탁가공을 위해 원부자재만 주로 들여가다가 지난해부터 메타놀등 화확제품,강관등 철강금속류,세탁기 및 밀가루등을 많이 가져간 것이다.북한이 반입을 늘리고 있는 것은 이들 제품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남한에서 들여가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교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교역품목수도 크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94년 1백42개이던 것이 지난해엔 2백개로 40%나 증가했다.우리가 북한에서 들여오는 것은 금·아연괴등 광산물과 농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엔 솔잎기름·소나무꽃가루·고구마전분·은행잎에끼스·농업용엔진·생수등이 반입됐다.반면 북한이 가져간 것은 밀가루·과자류·쇠가죽·용접봉·전구·중고지프·냉동기·콩기름·여자구두·화장품등이다.우리의 대북교역업체수도 지난해말 현재 2백8개로 94년의 1백60개사에 비해 30%나 늘었다. 북한과의 교역에서는 물자의 반출입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지만 북한으로부터의 위탁가공품 반입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위탁가공이란 우리나라 기업체가 북한에 원자재와 제조설비등을 제공하고 기술지도를 하여 북한 근로자가 우리측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북측은 이를 통해 상당액의 가공임을 받기 때문에 외화획득은 물론 소득 및 고용증대효과를 거둘 수 있고 기술을 축적할 수 있는등 1거4득의 혜택을 보게 된다.위탁가공교역이 북핵 및 우성호사건등 남북관계의 잦은 경색에도 불구하고 타격을 받지 않고 큰 증가세를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92년 코오롱상사가 학생용 및 등산용 가방을 만들어 들여오면서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위탁가공은 초기엔 의류와 신발제조가 주종을 이루었다.이른바 노동집약적 업종으로 분류되는 제품들이다.그러나 지난해부터는 기존의 의류 및 신발 외에 액세서리부품·헬멧내피등으로 확대된 데 이어 컬러TV·스피커등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부가가치가 높은 품목으로 다양화하고 있는 것이다.LG전자는 올해부터 평양인근 공장에서 컬러TV를 본격적으로 위탁조립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위탁가공품은 품질면에서 국내제품보다는 다소 처지고 수송과정에서의 물류비용이 많이 드는 편이지만 북한의 값싼 노동력에 힘입어 상당한 가격경쟁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품목별로는 섬유·신발등은 값싼 노동력에 힘입어 중국·동남아 제품보다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 남북한 경제교류에서 아직까지 합작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지난 92년부터 추진된 대우와의 합작이 성사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대우는 남포공단에 5백12만달러를 투자,북한 근로자 1천3백명과 대우측 29명등을 고용해 셔츠·블라우스·재킷·가방등을 만들 계획이다. 앞으로 위탁가공을 포함한 북한과의 교역은 갈수록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이와 관련해 계약불이행등에 따른 위험부담방지대책,직교역에 대비한 법규 제정,결제방식등 여러가지 보완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또 북측이 남북대화를 계속 기피한 채 우리 기술자의 방북을 막는 것도 쌍방교역확대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그런 만큼 북측은 호혜원칙을 존중,당국간 대화를 재개하고 이중플레이를 지양하는등 정치뿐 아니라 교역면에서도 신뢰를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 철령의 성주 이씨들(압록강 2천리:24)

    ◎임란때 출병한 이여송은 성주 이씨 후손/부친 이성량은 요동일대 최고 군수권자/15세손 이영 홍무때 망명,철령에 터잡아/1994년 한국종친회서 소둔촌에 비석 세워 우리는 이여송(?∼1598년)이라는 역사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명나라 제독으로 방해어왜총병관이 되어 군사 4만을 이끌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무장이다.그런데 왜 이여송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려는지 더러 의문을 가질 것이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조선의 성씨인 성주이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성주 이씨들은 지금 요령성 철령시소둔촌에 많이 몰려 살고 있다.그리고 해마다 조상의 묘역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추모 대상은 이여송과 그의 아버지 이성량(1526∼1615년)등이다.한반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성주 이씨의 한 갈래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온 것은 명나라 연호로 홍무(1368∼1398년)연간이었다.성주 이씨 15대손 이영이 죄를 짓고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철령으로 피신해왔다는 것이다. ○소둔촌 주민 거의 이씨 이영의 망명 이후 제5대손이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이다.이성량은 집안이 가난하여 선조들이 세운 군공을 계승하지 못한 채 한 시절을 백면서생으로 살았다.그러다 입신의 기회를 얻어 요동 험산참장이 되었다.또 융경원년(1567년)에는 한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요동부총병의 자리에 올랐다.그 후에 몽골과 여진족을 쳐서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만력2년(1574년)에는 요동 최고 군사지휘자인 요동총병 지위를 차지했다. 이성량 사후에는 여송,여백,여정,여장,여매등 네 아들이 총병관을 지냈고 다른 네 아들은 참장에 이르렀다.이 가운데 여백과 여매는 임진왜란 때 여송과 함게 조선에 출병하여 전공을 세웠다.그렇듯 이씨 가문이 거머쥔 병권은 대단하여 그들을 모함하는 글발이 황제에게 전해지기도 했다.그들은 실제 도읍의 한 변방을 호령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틀림 없었다. 이씨 가문의 권세가 당시 어떠했는가는 요령성 철령시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에서 확인되었다.소둔촌에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 그의 묘소 입구에는 돌조각 사자상이며 석인상이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섰다.규모는 비록 작아도 북경 팔달령에서 정릉으로 가는 사이에 자리한 선도를 연상케 했다.선도처럼 보이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비석이 있다. 이성량을 기린 대리석 비석은 지난 1994년 한국의 이씨종친회가 세운 것이다.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지위가 오늘날 같이 높지 않았더라면 과연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했을까.여기 사는 이씨들도 한국이 보잘것 없는 나라였다면 조상에 대해 별 집착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백여 가구 1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 70∼80%가 이씨라는 이 소둔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가 성주 이씨를 자청했다.그러면서 비록 한족으로 살아가지만 한국의 발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철령현 당시 부현장 자리에 있다가 퇴직한 이유한(67)노인도 성주 이씨라고 했다.그래서 철령 이씨종친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떳떳하게 성주 이씨를 내세울 수 있게 된 오늘의 처지를 고맙게 여겼다. ○누루하치와 사돈지간 『나 자신도 그동안 뿌리를 숨기고 살았습네다.그저 한족으로 행세한 거디요.집안 노인들이 가끔 이성량을 이야기하면서 성주가 본이라고떠들면 핀잔을 줬지 뭡네까.그러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부터는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절로 한국과 성주란 말이 튀어나옵데다.그 전엔 창피스럽던 것이 자랑스러워지더란 말입네다.그래서리 퇴직하고 나서 좌상들과 상의해서 종친회를 꾸몃디요』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는 어엿했다.봉분도 제법 커서 이성량이 묻혀있는 무덤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그런데 선뜻 납득할 수 없는 몇가지 의문점이 머리를 스쳤다.이씨들이 조상에 관심을 둔 것도 근간의 일이고 역사적으로 청나라를 일으킨 누루하치가 이성량의 무덤을 파엎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량은 살아 생전에 누루하치와 떨쳐버릴 수 없는 악연을 맺었다.이성량이 요동총병관으로 제수되었을 때 누루하치는 15세 소년이었다.그런데 이성량은 자신의 수하장군이었던 누루하치의 할아버지 창안과 아버지 타거를 부하의 밀고로 죽여버렸던 것이다.그 해가만력11년(1583년),누루하치는 21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있었다.천명3년(1618년)반기를 들고 마침내 명나라를 뒤엎은 누루하치는 「7대 원한」을 갚겠노라 선언했다.이성량이 첫째로 꼽힌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씨 가문과 누루하치는 사돈간이었다.이성량의 둘째아들 여백이 바로 누루하치의 조카딸을 첩으로 들였던 것이다.그러나 원한이 사무친 누루하치는 천명4년 철령성을 함락하고 이성량 일가를 붙잡아들였다.당시 해를 당한 이씨들 가운데 역사에 기록된 인물만도 24명에 이른다.누루하치 복수의 그물에 든 사람들은 죽고 더러는 도망쳤다.그래서 산동성 임저지구와 광동성 번우지구,사천성,북경 등지에도 성주 이씨들이 지금 살고있다. ○상당수 요직에도 진출 누루하치는 오늘의 중국 동북지방 쪽을 우선 통일하고 나서 수단을 바꾸었다.성주 이씨들을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다.그 결과 강희(1662∼1722년)말년 청나라 왕조에서 7품 이상 벼슬을 한 성주 이씨는 자그마치 1백여명이나 되었다.요동시단의 삼노의 한 사람인 이개는 많은 시를 썼고 「상서」등의 역사책을 편찬했다.그의 저서들은 강희말년에 나온 거서「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그리고 태원지사를 지낸 이청서는 서예에 조예가 깊어 그의 「고보현당법서」네권은 지금도 중국 서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성주 이씨들은 수 백년이 흐른 지금도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철령지구의 경우 현급 간부 14명,국급 간부 13명,과급 간부 18명이 성주 이씨로 되어있다.이들은 지난 1991년에 성주이씨 종친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성주이씨 대종회와 정상적인 교류를 해왔다.그리고 「철령성주이씨보계」,「이성량종족역사기년」,「한국성주이씨중국파굴기」등을 펴냈다. 그래서인지 요령성 북령시에는 중국에서 성주 이씨를 명문으로 일으킨 이성량의 흔적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이성량과 같은 봉건 착취계급의 유산이 문화혁명과 같은 난세를 견디어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그 하나가 명나라 신종이 명하여 만력8년(1580년)에 세운 공적비 석방이다.높이 9m,너비 13m의 누각형인데 「진수요동총병겸 태자태보령원백 이성량」이라는 글발 등이 들어있다.그리고 용문을 뛰어넘는 잉어,여의주를 굴리는 용,사슴과 꽃 등을 새겨 석방은 호화롭기 그지 없다.명나라 때 중국대륙 동북방에는 분명히 「이성령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적이기도 했다.
  • 한표 욕심이 타락부른다(선거풍토 개혁 내손으로:2)

    ◎금품 아예 주지도 받지도 말아야/「호화판 김밥」·「찜찔방 향응」 등 마구 제공/“법망만 피하자” 주례서고 축의금까지 서울지역 3선인 이모의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다음 날부터 다음선거 걱정을 하게 되더라』고 술회했다.그는 한때 낙선한 뒤 와신상담,4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역구를 발로 누볐다.금배지를 달고 있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이제 총선이 불과 60여일남짓 앞으로 다가왔다.전국 곳곳에서는 금배지를 달기 위해,또는 금배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많은 후보들이 사실상 선거운동에 전력투구하고 있다.경주의 한 전직 국회의원은 지난 12월부터 3개월째 택시회사에 임시기사로 취업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객들을 상대로 자신을 홍보하고 있다.유권자들은 냉담하지만 출마 희망자들은 숨이 가쁘다. 곳곳에서 사전선거운동 시비가 벌어지고 이미 사전선거운동혐의로 구속되는 후보자까지 나왔다.과열 타락을 상징하는 「호화김밥」「찜질방 선심」등 신종 풍속도도 등장했다.지난달 28일 충남 당진의 자민련 후보인 김현욱전의원은 출판기념회에서 참석한 주민들에게 시가 8천원인 책을 무료나 반값으로 나눠주고 호화김밥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다.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속속 드러나고 있다.선거법에는 당원교육이나 지구당 확대당직자회의에서는 다과 떡 음료외에 김밥도 제공할 수 있도록 돼 있다.그러나 문제는 김밥의 질이다.김밥이라면 간단한 식사를 의미한다.경기도 군포의 모 후보지망자는 이 규정을 악용해 고기 생선등 호텔에서 2만원은 갈만한 수준의 도시락에 김을 살짝 얹은 「위장김밥」을 제공해 호화김밥 논쟁을 빚었다.선관위에도 이런 규정과 관련한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생선초밥도 김밥으로 볼 수 있느냐」「김밥과 함께 오뎅등 국물도 제공할 수 있느냐」등등…. 극성 후보부인들도 심심찮게 화제에 오른다.상가집이나 잔치집,양로원에서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하는등 「근로봉사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고전에 속하는 얘기다.대구의 한 지역에서는 단속의 눈길을 피해 단속원의 접근이 용이치 않은 여성 찜질방에서 향응을 베푼 사례까지 등장했다.신고를 받은 선관위 직원은 벌거벗은 여자들만 있는 곳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여성 단속원을 특채해야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 중앙선관위는 하루 평균 2백통,지역선관위는 50여통의 선거법 관련 문의를 받고있다.내용은 주로 선거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다.선거법에 의하면 의정보고대회에서는 당원에게 다과와 음료를 제공할 수 있다.그러나 의정보고에 앞서 「당원이 아닌 사람은 나가 주세요」라고 사회자가 한마디만 하면 비록 당원이 아닌 사람이 참석해 있었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돼 있다.선관위 단속반의 한 관계자는 『뛰는 선거법 위에 나는 후보자』라고 꼬집으며 『법을 교묘하게 피해나가는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선관위가 단속 발표한 사례를 보면 각양각색이다.지난달 19일 충남의 한 출마예정자 이모씨는 여러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해 감사헌금 명목으로 기부금을 낸 사실이 지적됐다.경기도의 한 지구당위원장은 일요일이면 5∼6차례 주례를 서주고 축의금을 30만원씩 전달했다.이같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며 지역을 누비는 후보지망자들이 적지않지만 법이 일일이 허점을 메우며 개정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중앙선관위의 임좌순선거관리실장은 『주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며 서로 감시할때 타락과 불법이 발을 붙일 수 없다』고 「3박자론」을 전개했다.이를테면 후보자들은 불법행위를 하지 않고 유권자들은 금품을 요구하지 않으며 선관위와 공선협등 민·관의 선거감시기구들은 타락을 감시해 공명선거풍토를 정착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후보자나 유권자,선거 감시기구의 활동과 자각만으로는 공명선거풍토조성이나 과열을 방지할 수는 없다.중앙당의 총력전이 과열의 또다른 주범이 되고있다.서울대의 손봉호교수는 『중앙정치와 정당들의 과열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근 신한국당,국민회의등 여야는 조기과열에 따른 따가운 비판여론을 의식해 선거대책기구 발족을 3월초로 미뤘다.그러나 이는 「눈가리고 아웅식」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선거대책기구만 구성하지 않았지 여야 각당이 공천자를 서둘러 발표하고 지구당 위원장 선출등을 통해 사실상 선거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지구당행사 참석을 이유로 각당대표들의 지방나들이도 부쩍 잦아졌다. 과열 현상에 대해 박상기변호사는 『지자제선거와 대통령선거,국회의원선거등 2년마다 큰 선거가 치러지는데 선거때마다 중앙당과 후보자들이 과열상을 보인다면 사회혼란은 물론 유권자들의 정치불신은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 “1910년까지 제주에 왜구 출몰”

    ◎소설가 오성찬씨 9일 와세다대서 특강/20여년전 입수한 「추자도명」 인용 주장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1910년까지도 제주도에 대한 왜구의 침입이 계속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소설가 오성찬씨(제주역사연구회 회장)가 일본에서 번역출판하는 일어판 「제주문학선집」출판기념을 겸해 오는 9일 일본 와세다(조도전)대학 국제회의장에서 가질 강연 「제주와 일본의 역사적 관계와 문학작품」의 내용을 통해 밝혀졌다. 와세다 대학 조선문화연구회 주최로 열릴 강연에서 오씨는 『20여년전 제주의 추자도를 취재하던중 이 섬사람인 추대엽이 철필로 쓴 「추자도명」이라는 책을 구했으며 이 책속에서 1910년 한일합병이 되던 해까지 왜구가 제주도를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하고 『기록에 따르면 남정네들이 고기잡이를 나간 한낮에 제주도 대서리에서 약탈을 하고 돌아가던 왜구 12명이 일본인 잠수기선의 어부들에게 붙잡혀 대서리 앞바다의 속칭 「소만여캐」에 며칠동안 내버려진 채 굶어 죽은 것으로 돼있다』고 밝혔다. 또한 현길언·문충성·현기영 등 제주출신 문인들의 작품소개와 함께 일제하 제주를 중심으로 한 항일투쟁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면서 오씨는 이른바 「잠녀투쟁」에 대해서도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즉 1930년대 초반 약 3개월에 걸쳐 1만7천여명의 해녀들이 참여해 일제에 항거했던 「잠녀투쟁」은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의 항일투쟁이었다는 것이 그의 평가이다. 한편 강연제목에서 보듯 오씨는 제주도 출신 문인들의 작품성향을 제주와 일본과의 특수관계에서 찾고 있다. 우선 그는 제주와 일본의 관계를 서로 돕는 이웃으로서가 아니라 뺏고 뺏기는 적대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전제한다.어쩌면 천형적으로 맺어진 관계이면서도 서로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간 역사,그러나 오늘날까지 이런 역사를 극복하고 승화시킨 작품은 빚어지지 않았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과제로 남아있다고 오씨는 주장한다.
  • 솔잎음료 시장이 후끈 달았다는데(박갑천 칼럼)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지거늘/솔아 너는 어이 눈서리를 모르는다/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하여 아노라』.고산 윤선도의 오우가에 나오는 솔 예찬가다.솔은 윤고산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수명이 길면서도 잎은 사시장철 푸르렀기에 옛사람들은 절조·장수·번영에 빗대면서 솔을 예찬했다. 한자 「솔송=송」은 「목」과 「공」으로 이뤄졌다.나무 가운데 지체높은 존재임이 나타난다.그에 대한 일화도 전한다.오나라의 정고란 사람이 자기 배위로 소나무가 자라는 꿈을 꾼다.꿈얘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말했다.『당신은 18년후 삼공의 한사람이 되리다』.「송」자가 「십팔(목)」과 「공」으로 되었기 때문이다(「오록」). 우리말 「솔」은 거슬러오를때 「□」이 뿌리말로서 「살다(주)·살(육)·수리(정수리)…」따위와 핏줄을 함께한다.전국의 토박이땅이름에 보이는「살·사라·사로·사리·설·서라·서리·솔·소라·소래·소로·소리·술·수라·수리…」가 다 「□」에서 출발되어 뜻에서 「삶」과 관계를 갖는다.그러므로 나라의 산을 「철갑두르듯」 덮고있는 솔은「국토의 살­살나무­솔나무­소나무」였다 할것이다. 초근목피로 보릿고개 넘기던 시대의 그「나무껍질」은 소나무 껍질속의 흰살이었다.그리고 그땐 솔잎도 먹었다.그솔잎은 옛날 도가들의 신선식이기도.「순오지」에 쓰인 수나라장수 장손성얘기도 그를 말해준다.장손성이 여산(이산)에서 사냥하다가 털복숭이여인을 만났는데 나뭇가지로 날아오르는 품이 나는 새와 같았다.그여자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진시황 궁녀인데 항우가 함곡관 넘던날 산속으로 피해와서 지금껏 솔잎을 먹고 살았소』.말하자면 1천년도넘게 살아왔다는,『번갯불에 솜구워먹은 소리』다.어쨌거나 솔잎의 장수효과 한번 공골차구나 싶다.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솔잎마실거리 시장이 달아올랐다 한다.이름난 회사들이 고개 내밀고자 종부돋움하고 있다는것.그걸로 지난해 66억여원어치를 판 한업체는 올해 1백50억원어치를 팔 계획이라니 그 열기를 짐작할만하다.그건 좋지만 외목장사하는 세상도 아니고 솔밭이 메숲진것도 아닌데 단거리 솔잎은 어찌 조달하는지.「새로운 인간송충이」로 되고 있지나 않는 것일까.「지봉유설」(훼목부)의 다음 글귀도 심기를 불안하게 만든다.『소나무와 잣나무는 잎으로 뿌리를 보호한다.그래서 잎을 자르면 다시 가지가 나지 않는다』.
  • 단동시 영화산기슭 항미원조기념관(압록강 2천리:23)

    ◎한국전 유물 1천여점 10곳에 전시/부지 18만㎡에 연건평 1만2천㎡… 58년 건립/김일선·모택동 친필서한·명령서등도 전시/영웅실엔 전사한 모택동 맏아들 석고상도 중국과 북한이 손을 잡고 치른 한국전쟁을 통해 오늘의 단동시인 당시 안동은 영웅도시가 되었다.그로 인해 1958년 9월 중앙문화부의 비준을 거쳐 안동에 이른바 항미원조기념관이 세워졌다.이 기념관이 오늘의 모습으로 확장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 93년의 일이다.기념관의 확장은 19 83년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단동(안동)에 들른 중앙군사위 부비서장 홍학지의 주선으로 실현되었다. ○등소평 친필 든 탑 세워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영화산기슭에 있다.글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 전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의 현판은 당시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곽말약(곽말약)이 썼다고 한다.18만㎡나 되는 부지에 1만2천㎡에 이르는 건물을 지었다.그리고 지난 1953년에는 등소평동지의 친필이 든 높이 53m의 탑을 세웠다.탑높이 53m는 1953년의 정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10개의 전시실을 두어 한국전쟁에 관한 1천1백8건의 문물이 전시되었다.이 가운데 주목을 끈 자료는 김일성이 모택동주석에게 보낸 친필서한이다..연합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중국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 김일성의 친필서한은 여러 자료 가운데 백미인지도 모른다.김일성 서한 옆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조직을 채근한 모택동의 친필 명령서가 나란히 진열되었다. 그러니까 대륙의 거인이던 모택동의 휘필 한점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작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그 명령에 따라 1백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화속으로 뛰어든 것이다.장백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조선족 서군(65)선생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당시 중국지원군 참전상황이 잘 드러난다.19 50년 당시 장백현 공청단위원회 선전부장이던 그는 한달 훈련을 받고 중국지원군 고사포부대 제1사 제1탄소속 부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가을이 깊을대로 깊은 10월19일로 기억하지비.그날밤에 안동을 떠나 장전하구로 와서 이내 압록강철교를 건넜수다.극비의 행동이라 중국말도 못하게 했고 중국을 떠날 때 글이 있는 물건은 못 지니게 했구마.삭주를 거쳐 평안남도 북진에 도착한 것이 10월28일인가,그렇지비.그날밤 거기서 5리쯤 떨어진 영봉에서 우리 지원군과 미군이 첫접전을 붙지 않았겠슴둥.그게 운산전투였지지비』 그 운산전투에서 미군은 3일간 포위되었다.11월1일 미군이 포위망을 뚫었으나 지원군은 미군 2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그 무렵에 지원군을 「38군」이라고 불렀는데 모택동이 「만세 38군」이라는 친필까지 내려 전공을 치하했다.그러나 지원군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특히 서군선생이 소속된 고사포부대는 박살이 났다.장비가 일본군이 쓰던 것이라 포탄이 포신에서 발사되어도 12초가 지나야 터졌다.그런 상황이어서 미군의 포격과 공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서군선생이 소속한 고사포부대는 12월25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요령성 금주시로 철수했다.거기서 소련제37.85포로 재무장하고 이듬해 3월18일 집안을 거쳐 만포로 건너갔다는 것이다.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비해 모든 장비가 열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도 확인되었다.기념관내 공군진열실에서 본 쌍방의 공군장비에서는 너무 엄청난 차이가 났다.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전체 전투기가 2백대도 안되었지만,연합군비행기는 1천2백대였다는 것이다. ○연합군 비해 장비 열세 1951년 3월15일 지원군 공군사령부가 안동에 창설되었다.사령원은 유진이었는데,더러 미그15기가 F84 미군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그러나 공중전 전과는 미미한 것이어서 조선인민군과 함께 대공포화에 중점을 두었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 사는 김창권(66)씨는 전쟁 때 고사기관총소대에 복무했다.방호산이 사령으로 있던 조선인민군 제5군단 12사 1연대 1중대 고사기관총소대 사수이던 그는 당시 활동상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고사기관총소대는 대우가 달랐디요.일반전투원은 하루 배식량이 8백g이었는데 우리는 1천g이었단 말입네다.12.7㎜ 소련제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재수가 좋으면 적기를 명중시켰디요.함경남도 함주군에 주둔할 때니끼리 1951년 1월18일 오전쯤 됐을 겁네다.미군기 한대가 저공으로 공격해와서리 갈겼디요.그거이 명중되어 처음 한대를 잡고서리 뒤에 두대를 더 잡았디 뭡니까.그래서리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았댔습네다』 그에게는 일생동안 무료치료에 자식의 대학진학특전 등이 돌아왔다.그러나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한때 무효가 되었으나,지난 1987년 전공을 다시 인정받아 지금은 매달 3백원씩 연금을 받는다는 것이다.그는 전쟁을 회고하기를 떴다하면 미군 비행기고,아군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그렇듯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북한은 물론 중국쪽 국경지대에도 낙하산부대들이 투하되었다. 1952년 11월15일 백두산일대에 낙하산병이 투하되자 장백·임강·무송현이 발칵 뒤집혔다.경찰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5주야를 산을 수색했다.이들에 의해 1명이 사살되고 15명을 포로로 잡았다.「장백현지」를 보면 이보다 앞서 1951년 6월29일 낙하산 침투병을 잡는 데 공헌한 장백현 12도구 사람 채후남(1888∼1974년)이야기가 인물록에 나온다.채후남은 마을에 살다 행방불명된 김형길이라는 청년이 낙하산으로 떨어져 이미 이사한 어머니를 찾아 숨어든 것을 신고했다는 것이다. ○관광·참배객 줄이어 항미원조기념관 맨 위층에 마련한 전쟁묘사공간 「청천강전역」은 스케일이 엄청 컸다.그림과 실물조각,조명과 음향이 한데 어울린 이 공간은 높이 17m,너비 1백32m나 되었다.마치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그 공간을 넋잃은 듯 바라보는 노인이 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아니나다를까,전쟁에 참가했다는 노인이었다.자신을 평안북도 창성 태생으로 지금은 단동시에 사는 조선족 최정근(69)이라고 소개했다. 『은산전투를 마치고 청천강으로 나갔다.나는 포병이라 부근부대를 뒤따라 조을리에 이르니 전투가 끝났다고 그라데…,시체가 즐비해서 밤이면 얼어서 뻣뻣한 미군시체를 바람막이로 쌓아놓고 잠을 잤디 않았갔수.죽은 미군 신발을 벗겨 신는 것은 약과고 속옷까지 벗겨 입었으니 원….손을 옷속에 넣으면 이가 한줌씩 잡혔으니 별도리가 없었디』 전쟁은 가혹한 것이었다.항미원조기념관 영웅모범열사실에는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의 석고상이 전시되었다.지원군사령부 근무중 미공군 폭격에 사망한 그의 유해는 북한에 묻혀 있다.어떻든 전쟁은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예찬이 아닌 전쟁억제에 더 큰 비중이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 북한 상품 전용판매점 북경에 “오픈”

    ◎도자기·그림·수공예품·뱀·인삼술 등 갖춰/한국관광객 겨냥… “주문땐 서울까지 우송” 북한상품 전용판매점이 북경에 최초로 문을 열었다.「평양상점」이란 이름으로 최근 조양구 조양공원안에 문을 연 이 상점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가슴에 커다란 김일성배지를 단 20대초반의 북한처녀들이 조선족과 함께 안내와 판매를 맡고 있다. 1백70여평 남짓한 이 상점은 형식상 재미교포 무역상 윤영선씨(미국 영패밀리인터내셔널)와 조선족 실업가 김성수씨의 합작으로 발족됐다.그러나 실상은 북한대사관과 김씨의 합작기업으로 주요고객은 한국인관광객이나 현지주재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지난해말 평양에서 노동당산하 대성무역상사 고위관계자와 이 사업에 합의했다고 말했다.북한대사관 무역참사관들이 사업구상 초기부터 참가했고 주창순주중북한대사의 허가와 격려도 있었다는 귀띔이다.북한측은 물건을 대고 김씨는 장소등을 제공하는 형태로 매출액의 절반씩을 나누기로 했다는 것이다.물건은 윤씨가 북한에서 수입하는 형식으로 들여와 전시된다. 이곳엔 북한에서 최고성가를 올리고 있는 만수대창작단의 도자기와 그림·수공예품을 비롯해 술·담배등 기호품,안궁우황환)등 약품과 약재류,악세서리등이 구비돼 있다.장신구 및 장식품이 하나에 3만3천원꼴로 비싸긴 하지만 북한영화 비디오테이프도 있고 각종 그림엽서 및 서적도 보인다.우리 돈 3만∼7만원정도면 그럴듯한 도자기를 살 만하고 대형금강산그림도 10만여원이면 살 수 있다.술값은 비싼 편인데 개성고려인삼술·양덕불로술(뱀술)등이 눈에 띈다. 미술천재아동 오은별의 그림이 없느냐는 질문에 『오은별의 것은 물론 다른 물건도 주문하시면 2∼3일내로 도착되고 원하면 서울 주소로 우송도 해주겠다』고 북에서온 점원이 친절하게 답한다.「평양상점」근무를 위해 이달 중순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는 20대초반의 앳된 5명의 북한처녀 판매원은 북한대사관 공관에서 기거한다.이들에게 한국의 쌀지원을 아느냐고 묻자 『북에도 쌀이 많은데 무슨 쌀지원』이냐며 모른 체했다.이들은 『온 지 이틀밖에 안됐지만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면서 『조국통일을 위해 여기에 와 일한다』고 말했다.상점 관계자는 올 3∼4월 상점확장에 맞춰 5명의 평양처녀가 더 올 것이라고 했다. 윤영선씨는 『북한유엔대표부의 지원으로 오는 3∼5월에 뉴욕·워싱턴·LA등에서 북한상품전시회를 갖기로 결정했으며 상설매장설치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김성수씨도 『중심가 쿤룬호텔부근에 건평 2천평의 4층 건물을 임대했으며 수리한 뒤 이곳으로 상점을 옮겨 본격적인 조선상품전시·판매장으로 만들어 관광의 명소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 조선족기업가는 북한측이 도별 무역회사조직을 통해 이같은 외화벌이전문상점을 중국에 설치할 계획으로 알고 있다면서 무역관련부서의 경우 조선족과 교포등을 통한 접촉을 더욱 활발히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한의학과 물/허종회현대한의원원장(전문의 건강칼럼:4)

    ◎맛·기운따라 추상수·정화수 등으로 세분/한 모금씩 씹듯이 음미하며 마시는게 원칙 요즈음 우리의 생활속에서 깨끗한 물,맑은 물,살아 있는 물 등 물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커지고 있다.아마도 몇번의 수돗물 파동과 생수의 시판,산성비 등 환경오염 문제가 현대인에게 물의 참모습을 그리워하게 만든 듯하다.문명화된 생활일수록 물의 사용량이 많아지고 그 역할이 커짐을 볼때 현대인과 물은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한의학에서는 물은 물 그 자체의 물질적인 의미와 더불어 물이 변화한 생리적 개념의 혈,진,액,정,수 그리고 병리적 개념인 습,담 음 ,어혈등 실로 다양하고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먼저 우리가 사용하고 마시는 물도 예로부터 그 기운과 맛에 따라 상세히 구분하여 쓰임새를 달리해왔다.섣달말쯤 온 눈을 녹인 물은 해독 살충의 약으로,정월 처음내린 빗물은 입춘 우수라 하여 양기를 돋우는 물로,5월에 내린 빗물인 매우수는 종기 치료제로,가을의 이슬은 추상수라 하여 소갈병과 안색을 좋게 하는 뜻으로 써왔다.겨울에온 서리는 술독을 풀고 코막힘을 뚫어 주는 약으로,우박은 장맛을 좋게 하기 위해 장속에 넣고,얼음은 열을 가라앉히고 열로 인한 설사에 사용하였다. 한의학에서 수는 화와 열과는 상반되는 뜻으로서 그 차가운 기운은 몸에서 생긴 열을 식히는 냉각제로서,또 쉽게 움직이는 유동성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정은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서 가장 맑고 좋은 기운이 변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뇌와 척수에 영양분이 되고,생식에도 관계하고 몸을 윤택하게 하는데 정기,정수,정액,정수등의 용어로 사용된다. 또 진액이란 인체내의 모든 정상적인 수분을 말하는 것으로 피,눈물,땀,침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된다.혈이란 음식물이 소화된 영양분의 몸속의 기와 열에 의하여 변화된 것으로 혈액과 음기,호르몬을 합한 의미다.병리적으로 사용되는 수분의 의미로는 먼저 습이 있는데 독이 있는 좋지 못한 수분으로 부종,설사,코막힘,관절의 통증을 일으키는 물질이다.또 담이란 수분이 비정상적인 열을 받아 탁하고 끈적한 것으로 변한 것이고 음이란 수분이 정상적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한곳에 머물러 변한 것인데 비교적 맑은 것을 말한다. 한의학에선 물을 먹을 때는 지나치게 차갑거나 뜨거운 물을 피해 맑은 물을 한모금씩 씹듯이 음미하며 마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그리고 옅게 우려낸 차와 온수를 많이 복용하여 몸의 신진대사를 돕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는 작은 비결이기도 하다.짙은 차나 카페인이 많이 든 음료는 오히려 앞서 말한 습과 담을 만드는 원인이 되므로 가급적 피함이 좋다.
  • 6·25와 단동시(압록강 2천리:22)

    ◎폭격에 끊긴 신의주행 철교는 관광명소로/전쟁발발 2개월 뒤부터 미군기 공습피해/중국지원군으로 참전… 눌러앉은 한인 많아/저목장에 화재잦아 일명 “화도”… 한국전으로 “이름값” 압록강 우안에 자리한 요령성 단동시는 중국에서 제일 큰 인구 70만의 변경도시다.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장장 7백90㎞를 흘러 내려온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금강산을 등지고 있다.단동시는 이름 그대로 「붉은 동방」이라는 뜻을 지녔거니와 중국 변경의 사회주의 혁명화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당나라 때 안동도호부관할지역이었다는 점과 연관시켜 1965년까지는 안동으로 불렀다. 단동에서 압록강 건너를 바라보면 북한땅 신의주다.「모진 사람 곁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 속담처럼 신의주를 가까이 한 탓에 한국전쟁 당시 피해도 꽤 입었다. 예부터 저목장에 불이 자주 나 「불의 도시」(화도)라고도 했는데 특히 한국전쟁 때 그 이름이 적중한 셈이다.그리고 19 50년이 저물면서 한국전쟁에 참가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도시여서 「영웅도시」라는 칭호도 가지고있다. ○30년전 지명은 안동 단동은 어떻든 간에 한국전쟁에 피해를 입어 그 전쟁의 흔적이 아직도 멀리 보였다.당시의 안동∼신의주를 잇는 철교가 신의주쪽으로 절반은 교각만 앙상하게 남게 된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다.단동시에서 펴낸 「단동시정」을 보면 한국전쟁에서 입은 피해기록이 나온다.「1950년 9월22일 미군 비행기 1백여대가 신의주를 폭격,압록강대교를 끊었으나 안동철도분국에서 그날 밤 10시에 복구했다.그러나 1951년 2월 폭격에 너무 심한 손상을 입어 운수가 중단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 때 미군기의 단동시 첫 폭격은 전쟁발발 2개월 뒤인 1950년 8월27일에 있었던 것으로 「단동시정」은 기록했다.이날 하오 4시40분 B­52폭격기 두대가 시내 랑두비행장 상공에 날아와 약 2분여 동안 기총소사 하는 것으로 시작된 첫 공습의 피해는 노동자 3명 사망과 19명 부상,자동차 2대 파손으로 집계되었다.또 같은해 9월22일 두번째 공습에는 B­29 중폭경기 한대가 떠서 12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이 공습으로 2명이 죽고 28채의 집이 무너졌으며 폭음으로 파손된 집도 3백여채를 헤아렸다는 것이다. 오늘 날의 단동은 평화도시다.북한의 국경도시 신의주와는 사뭇 다른 도시인 것이다.그래서 전쟁으로 끊어지고 기관포탄이 무수히 박힌 단동쪽 압록강철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광명소가 되었다.특히 몰골사납게 교각만 앙상한 신의주쪽의 전흔은 전쟁이 남긴 교훈을 보여준다.10원씩을 주고 절반쯤 건너간 철교 위에서 한국전쟁 당시 중국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다는 김인형(69)선생을 우연히 만났다. ○요양원서 만나 화촉 그는 경북 의성 태생이었는데 전쟁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전쟁이 나면서 인차 남한 전체를 점령하는 줄 알았지.그런데 시월 잡아서 부터 조선 피란민과 군인들이 중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기라.그해 5월 성간부학교에 들어가 다섯 달을 공부한 나는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지.통화에서 겨우내내 조선인민군과 피란민속에 묻혀 살다 보이 눈코 뜰새가 없데. 중국 변경이 전쟁에 시달리는 판이었으니 강 건너 북한땅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장백·임강·집안·관전·안동(단동)지역 맞은편 북한땅 혜산·중강·만포·삭주는 미군기폭격에 불바다를 면할 날이 없었다.임진왜란 때 의주에 통곡동이라는 동네가 하나 생겼다고 하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압록강유역 북한땅 모두가 통곡동이 되었다. 단동에 살고 있는 윤옥순(65)씨는 전쟁이 나던 해 겨울 안동의 중국지원군병원에 근무했다.함북 무순 태생으로 16살부터 동북해방군에 참전한바도 있는 그녀는 당시의 참상을 몸서리치듯 털어놓았다.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 매일 쏟아져 들어왔지비.팔다리가 끊어지고 코가 떨어진 사람,사지가 다 날라가 덩그러니 몸뚱이만 남은 부상자들도 있었구마.몸뚱아리나마 남은 부상자들은 애기 눕히듯 보자기에 싸서 한 침대에 넷씩을 눕히기도 했슴매.새파란 나이에 죽기가 원통해 발악하는 걸 보면 불쌍해서 같이 울기도 했지비.공습경보가 울리면 부상병을 업고 방공호로 뛰어가는 일을 얼마나 했는지….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원망스럽더구마』 안동은 한국전쟁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얼떨결에 북으로 올라온 남쪽의 사람들이안동에 들어왔다가 주저앉기도 했다.북으로 가기도 싫고,그렇다고 남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이방인들이었다.단동에 머무는 동안 그런 처지의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경북 영천군 고경면이 고향인 최정순(64)씨도 그런 사람이다.지원군병원 간호원이었던 그녀는 한국군과 미군포로 부상자에게 까지 남다른 애정을 쏟은 것 같았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 뿐 아니라 국군과 미군 부상병까지 들이닥쳤지예.인민군 부상자들은 포로들을 보면 때려 죽인다고 날뛰어 병동을 구분했십니더.미군에게는 빵과 같은 음식을 주었는데,처음에는 독이 들었는 가봐 안먹데예.그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가 먹어야 그제사 입을 댔십니더.어떤 한국군은 우리 병원에서 다리 절단수술을 했는데 수혈할데가 없다 아닙니꺼.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피를 주고 대소변도 받아내고….업고 다니며 영화도 구경시키곤 했십니더.상처가 아물어 포로수용소로 가는 날 그렇게 울더니…』 단동시 오룡배 영예군인 요양소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박명심(66)씨도 남한 출신이다.전쟁전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살았다.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2학년 때 6·25를 맞았어요.전쟁전에 이미 지하혁명조직에 가담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요.인민군에 있다가 후에 중국지원군 20병퇀 67군 정치부로 전속되어 전선으로 갔어요.선전방송 임무를 맡고 일하는데 참호에 포탄이 날아들어 그만 허리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지 뭡니까.53년 7월21일 안동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지금까지 요양원에 살고 있습니다』 ○44년째 이산의 아픔 박씨의 남편도 두 다리를 잃은 불구자다.남편 위덕렴(65)은 한족으로 중국지원군 116사 346퇀 통신병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큰 부상을 입었다.그가 1954년 안동요양원에 들어와서 서로 만난 이들은 이듬해 10월 결혼했다.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박씨는 지난 94년 서울에 편지를 해서 조카들이 다녀갔다고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한국이 놀랍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이야기로 들었다면서 날보고 서울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단동에서 만난 또 다른 여인 전명옥(67)씨는44년째 가족소식을 모르는 이산의 아픔을 갖고 있었다.당시 북한땅이었던 강원도 화천 태생인 그녀는 집 근처 임시 인민군병원에서 간호일을 돕다가 후퇴명령이 급히 내려 2백m 밖에 안되는 집에도 못 들르고 떠나왔다.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화천이 남한땅이 되고,가족소식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것이다.
  • 미국/학력따른 수입격차 심화/워싱턴 김재영(특파원코너)

    졸업장보다 탤런트(재능)를 더 친다는 미국에서 학력에 따른 수입격차와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그래서 「장래 수입과 관련해 대학졸업장은 일단 따고 볼 일이다」라고 미국 경제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학력과 상관없이 재능만으로 출세하고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길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일 뿐 미국 역시 고등학교만 나온 사람과 대학졸업장을 딴 사람과의 수입에는 골이 엄연히 패어 있다.그런 미국에서 최근 몇해 동안 전문가들 사이에 「대학졸업장에 대한 투자는 과연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란 논쟁이 심심치 않게 일곤 했다.언뜻 학력차에 따른 수입차가 별로 없으니 대학교육비를 따로 더 들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탈학력사회적이고 바람직한 논의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학졸업자의 「고졸자급」 임금·직장 취업현상 심화에 따른 자조적 질문이었다. 지난 93년 노동부 통계로 미 대졸자의 18%가 고졸자가 할 수 있고 그런 만큼 고졸자 임금을 받는 직장에 취업중인 것으로 나타났다.이와 관련해 앞으로 미국은 대학졸업자 증가 인원이 「대졸급」 새 일자리를 무려 31%를 웃돌 것이라며 『이럴 바엔 비싼 돈 들여가며 구태여 대학에 갈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그런데 지난주 하버드대와 MIT대의 두 경제학자는 대졸의 하향취업률이 감소세로 돌아서리라는 전망을 내놓으면서 동시에 『미국 임금구조는 연수와 함께 학력간 격차가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학부모 및 학생들에게 재삼 강조했다.대학교육비 투자가치에 회의적인 사람에게 『처음에는 잘 모르나 몇년만 참으면 교육비투자의 본전을 충분히 회수할 만큼 학력임금 격차의 혜택을 본다』고 말하고 있다.즉 「대학졸업장은 남는 장사」라는 결론 겸 충고인 것이다. 94년도 기준으로 23세 때 신참 대졸직장인은 평균 1만7천달러를 받고 같은 나이이나 이미 사회중참인 고졸자는 1만5천달러를 받는다.차이가 9천달러(3만4천달러대 2만5천달러)가 되는 30세를 전후해서 이같은 격차는 훠씬 커진다. 미고등학생의 대학진학률은 70년 52%에서 94년 62%로 늘어났다.두 경제학자의 말대로라면학력헤택으로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늘고 학력피해를 볼 고졸자는 줄어 겹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고졸 임금을 받는 대졸자의 비율이 늘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에는 아직 일러 보인다.
  • 「가담 경위」 등 감안 구속 결정/이종찬수사본부장 일문일답

    ◎“관련 현역의원 사전영장 청구 고려안해/핵심 5명 기소때 전씨도 내란죄로 기소” 12·12 및 5·18사건특별수사본부 이종찬본부장은 17일 하오 장세동씨 등 관련자 5명에 대해 반란중요임무종사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과 불구속의 기준은. ▲관련자가 가담하게 된 경위와 정도·사안의 경중·성행·개전의 정 등은 물론,당시 직책과 5·6공에서의 역할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됐다.수사는 계속되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인가는 기소단계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5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군사반란혐의만 적용된 것인가. ▲영장에는 대표적인 죄명 하나만 기재하면 되므로 대표죄명인 반란 하나만 썼고 적용내용에는 내란죄도 포함돼 있다. ­기소는 언제쯤 하나. ▲수사진척에 따라 먼저 사법처리한 사람 순서대로 할 것이다. ­전두환씨에 대한 내란죄 추가기소는언제쯤 할 것인가. ▲이들의 기소때 추가한다. ­(81년 1월24일 계엄해제일로부터 산정,공소시효 만기일이 되는)오는24일전에 관련자 사법처리를 다 끝내야 하지 않나. ▲현재 여러가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해 수사를 하고 있으므로 그때까지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말하기 어렵다. ­현역의원 가운데 구속대상자는 국회 회기가 끝나면 하나,아니면 회기중 체포동의서를 제출하나. ▲지금 말하기 곤란하다. ­이들에 대한 사전영장도 가능할텐데. ▲그런 것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사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역의원을 제외한 추가구속자는. ▲더 생각해보자.구속자는 수사보안상 이 단계에서 말할 수 없다. ­장세동씨의 구속사유는. ▲12·12 당시 30경비단장으로서 30단장실에서 있었던 경복궁모임에 장소를 제공했다.이는 굉장한 의미다.일몰때는 수경사령관조차도 대통령 경호실장의 허락없이는 못들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또 모임의 일원으로서 반란지휘부를 구성하는 역할을 했고 허삼수보안사인사처장이 정승화총장을 연행할때 자신의 5분대기조 부하 80명을 김진영33경비단장에게 파견,허처장을 돕도록 했다.또 이희성중앙정보부장 서리에게 부탁해 육본 병력의 출동을 저지토록 하기도 했다. ­유학성씨는. ▲12·12와 관련,사전모의에 가담했으며 상대편에 전화를 해 육본병력 출동을 저지했고 5·18때는 시국수습방안논의에 참여,내란모의를 한 것이다. ­황영시씨는. ▲12·12때 1군단장으로 2기갑여단을 중앙청에 진주시키고 휘하 박희모30사단장에게 병력을 고려대에 진주시키도록 했다.고대 진주는 육본 진압병력의 통과를 막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또 5·18때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 「12·12­5·18」 핵심 5명 영장

    ◎유학성·황영시·최세창·장세동·이학봉/허삼수·허화평·정호용·박준병의원 국회 끝난뒤 영장청구/“22일 내란혐의 일괄기소”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서울지검3차장)는 17일 두사건 전개 및 처리과정에서 군권 및 정권찬탈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유학성 당시 국방부군수차관보,황영시1군단장,최세창3공수여단장,이학봉보안사 대공수사과장,장세동수경사30경비단장 등 5명을 내란 및 군형법상 반란중요임무종사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오는 22일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기소하면서 불구속 기소자들과 함께 이들을 일괄적으로 기소할 방침이다. 검찰은 또 허삼수 당시 보안사인사처장,허화평보안사령관 비서실장,정호용특전사령관,박준병20사단장 등 현역 국회의원 4명도 국회회기가 끝나는대로 같은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방침이다. 검찰관계자는 이와 관련,『국회로부터 체포동의안을 발부받아 회기중에 구속하는 안도 함께 고려하고 있으나 동의안의 부결가능성 등여러가지 점을 감안,국회회기가 끝난 뒤에 사법처리하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피고소·고발인가운데 이날 구속된 5명과 현직 국회의원을 제외하고 차규헌 당시 수도군단장,권정달보안사보안처장 등 관련자 15명 안팎을 불구속 기소하고 10여명을 기소유예 처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환서울지검장은 이날 이와 관련,『앞으로 현역의원을 제외하고는 추가 구속자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장세동씨의 구속과 관련,『12·12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의 허락없이는 출입이 일체 금지됐던 수경사30경비단을 모임장소로 제공하는 등 반란군지휘부를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또 이희성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설득해 육본측의 병력출동을 저지하고 정승화육참총장 연행할때 30경비단소속 5분대기조 80여명의 병력을 총장공관으로 출동시켰다는 것이다. 이씨는 정육참총장 연행 및 대통령재가에 핵심적 역할을 맡았으며 5·18이후 정치인과 재야인사 체포를 주도한 혐의가 적용됐다. 유씨와 황씨는 경복궁모임에 참가한 이외에도 2기갑여단과 30사단을 중앙청과 고려대에 진주시키는 등 육본측의 병력동원을 저지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5·18당시에도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하고 시위를 강경 진압하는데 적극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최씨는 또 경복궁모임에 참가한 것을 비롯,정병주특전사령관을 체포토록 지시하는 등 특전사령부를 유혈 진압한뒤 경북궁에 예하 병력을 진주시켰다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기구한 삶 오학증씨(압록강 2천리:21)

    ◎북한으로 피신… 강제송환돼 감옥생활 11년/79년 출옥후 개가한 아내 수소문해 재결합/독립군 출신 부친도 반동으로 몰려 개죽음 요령성 단동시 조선족소학교 아파트에서 신경질환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는 오학증(64)선생은 기구한 운명을 산 사람이다.그 격변의 대륙에서 조선족 누구인들 정치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모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만,그의 인생역정은 남달리 불행했다.그의 일생은 대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극의 드라마 그것이었다. 『제 아내와는 두 번을 장가 든 셈이디요.그래서리 아이들도 제대로 못 키우고….이자 나같이 사는 사람들이 다시 없도록 평안한 세상이 돼야 합네다.지난일들을 생각하면 다가 악몽이야요』 한 아내에게 두 번을 장가갔다는 말이 의아스러웠다.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는데,자신이 반우파로 몰려 감옥살이 하는 동안 아내가 살길이 없어서 한족 홀아비한테 개가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그가 1979년 1월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남이 되어 있었다.개가한 아내가 사는 곳을 수소문해서 한족영감에게 애걸복걸했다.그렇게 찾아온 아내다.그는 우파누명이 벗겨져 본래의 자리인 소학교로 돌아와 정년을 넘기고 지금은 학교가 내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다시 살고 있다. 그는 요령성 환인현 사전자 태생이다.부친은 평북 구성 사람인 오성오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1930년대 독립군 해산과 더불어 관전현 보달원에서 교편을 잡았다.해방이 되자 부친은 교장 자격으로 손수 학교를 꾸리면서 일본 메이지대 출신 전봉천을 초빙해와 같이 일했다.그무렵 팔로군이 보달원에 들이닥쳤다.그리고 나서 이내 미국식 현대무장을 갖춘 국민당 군대가 밀고 들어왔다.부친이 교사로 초빙한 전봉천은 국민당 편에 서서 한국교민회를 조직했다. 『제 부친께서는 장래의 시국을 예견하신 것 같았습네다.국민당에 붙어서 보달원에 출장온 전봉천선생에게 이런 말을 했디요.이 사람아 자중하게.국민당이 기세당당하게 왔디만 조만간 팔로군이 또 올 것이라고….아니나 다를까 1947년이 되면서 국민당이 꺾이고서리 농촌 전체가 공산당 일색이 되고 토지개혁을 착수했디요.나도 당시 아동단에 참가하지 않았겠습네까.팔에 빨간천을 두르고 목창 개지고 보초도 서고…』 ○통화사범학교 진학 오씨네 일가의 비극은 이 때에 닥쳐왔다.공산당은 국민당과 가까운 사이였던 부친의 독립군 경력과 반동 전봉천과의 관계를 문제삼았던 것이다.『아무개가 반동이다.죽이는 것을 동의하는?』라고 물으면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슬 시퍼런 시대였다.부친은 공산당에 체포되어 몽둥이를 맞고 세상을 떴다.마을사람 김희묵은 빈농이었지만 억울하게 죽었다.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나온 통에 그를 부농으로 착각한 공산당이 조리질을 돌려 죽여버렸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오학증선생의 어린시절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중학교 입학자격마저 잃었다.철저하게 계급을 따진 공산주의사회는 가갸 뒷다리도 모르는 빈농의 자식들 위주로 신입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그러니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다.공산당도 할 수 없이 중학교 시험제를 채택하게 되어 어린 오학증에게도 중학입학의 길이 열렸다.밭에서 가을일을 하다 학교로 달려가 시험을 치러 홍광중학에 들어갔다.한국전쟁이 터져 거의가 지원군으로 나갔지만 나이가 어려 면제를 받고 통화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사범학교 졸업이후 첫 부임지는 지금의 단동인 안동시 북광소학교.학교 당조직에서 자신이 중점 육성대상자가 될만큼 열심히 일했다.그러다가 1957년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교육정책을 바꾸어 한족과 조선족의 연합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교육의 질이 형편없게 떨어졌다.곧은 성질을 가진 오학증선생은 이를 시정해야 된다고 건의했다.그 건의가 화근이 되어 우파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 부친의 청산을 암암리에 보복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는 모략까지 따라 붙었다. ○당국에서 이혼 강요 그에게 내려진 일종의 형벌은 혹사를 통해 정신을 바로잡게 하는 이른바 노동개조.월급은 취소되고 하루 1원57전을 받는 건축공사장에 끌려다녔다.1957년 1월에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지 다섯달이 안되어서 일이다.비단공장에 들어가기로 되어있던 아내의 일자리도 취소되고 말았다.죽지못해 살기를 4년여 성상,1961년 우파 너울이 벗겨져 교사로 다시 복직되었다.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고 1966년 문화혁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그해가 중반에 접어든 6월22일 출근길에 자신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보았다.그러지 않아도 신경쇠약에 걸려있던 터라 병원진단서를 붙이고 학교를 쉬었다.그런 어느날 학교에 들어온 군대표로부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다음날 학교에 꼭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아무래도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날 관전현으로 올라가 압록강을 건넜다.북한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가 북한으로 도망친 것을 눈치챈 학교는 이를 당국에 고발했다.곧 북한당국에 연락되어 1주일간 신의주에서 구류를 살았다.그리고나서 중국으로 강제송환된 그는 15년형을 받았다. 『아내가 감옥으로 면회를 왔습데다.아들 둘 하고 세 돌이 난 딸애를 업고 왔디요.철딱서니없는 어린 딸이 제가 먹던 싸구려 과자를 쥐고 쇠창살 사이로 넣어주는데 고만 눈물이 쏟아집데다.두번째 면회때는 아내가 혼자와서 이혼을 제기하길래 거절했더니 대성통곡을 하고 애들의 앞날을 봐서리 이혼해달라는 것이었디요.그후에 감옥소 소장이 저를 대신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강제 이혼하고 말았수다』 아내 김성란(61)씨도 평북 벽동 사람이다.시집을 가면 죽어도 그 집에서 귀신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터라 도리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아이가 학교에 가면 새끼반동이라고 따돌리고 당국에서도 이혼을 강요해 별 도리가 없었다.막상 이혼을 하고 났더니 문화혁명 이후의 관행대로 산골로 내몰았다. 열세살과 일곱살짜리 아들.세살짜리 딸과 함께 내팽개쳐진 곳은 한족들만이 우글거리는 봉성현 백기공사산하 지리대대.살길이 아득했다. 그의 아내는 고생으로 살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늙었다.남편옆에 앉아 훌쩍훌쩍 울기를 여러차례하고 나서 겨우 말문을 열었다.그 표정은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신경질환으로 고생 『제가 못된 여편네디요.아이들 하고 죽지 못해 한 일이디만….기래도 두 해를 버티다 한족 홀애비 백국영을 만나 재혼했습네다.저녁이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한참씩 울다가는 한족 영감옆에 누어잤디요.그런데 11년만에 무죄석방된 저 양반이 그 산골을 찾아왔디 뭡네까.저는 간염에 걸려 다 죽어가는 터디였디요.저 양반이 하루를 살더라도 복혼하자고 그럽데다.저도 한 마음이었수다.한족 영감도 인생들이 가여웠던지 저를 놔 주었디요』 그들이 재결합한 지도 어언 19년이 되었다.이산부부의 후유증은 아물지 않아 자신은 신경질환을 앓고 큰아들은 뇌종양으로 병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대륙의 몇차례 큰 바람은 이들 가족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 “봉사활동 수혜자 입장도 헤아려야”/허길남(공직자의 소리)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열등감에 빠진 나머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주부가 있었습니다.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자원봉사에 참여하면서 긍정적이고 자기개발에 힘쓰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봉사한 셈이 되었습니다.만일 이 주부에게 자원봉사의 기회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최근 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글의 서두이다.봉사활동이 사회적으로는 물론 개인에게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임을 웅변해 주는 사례이다.봉사를 받는 사람은 물론 봉사자 스스로도 큰 보람을 얻는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자원봉사 활동이 각계 각층으로 확산되는 중이다.전국에서 활동하는 자원 봉사자가 줄잡아 1백만명,많게는 3백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는 이러한 국민의식의 전환기를 놓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봉사할 수있는 동기를 일깨우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부와 자치단체가 자원 봉사자를 안내하는 복덕방을 만들고 자원봉사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단체에는 재정을 지원하는 방안도고려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원봉사 활동의 양적 팽창과 함께 질적 향상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신체 장애자이면서 나름대로 명성을 지닌 한 시인의 절규를 보자.『자원 봉사자들은 나를 교묘하게 파멸시킨다.때로는 나를 응석부리도록 만들고 자주 액세서리로 만들기도 한다.심지어 나를 여름휴가의 과제로 여기기도 한다…』 자원봉사 활동이 일방 통행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말이다.봉사를 「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규이다. 자원봉사를 여가선용,또는 금전적 여유에서 베푸는 자선으로 여긴다면 곧 봉사의 수혜자를 더욱 불행에 빠뜨리는 죄악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애써 모은 헌 옷이나 책이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낭비이다.봉사는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맹목적인 생각에서,봉사의 형태나 내용을 도외시한다면 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봉사를 받는 측의 감정과 수요를 무시한다면 자칫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봉사의 계획과 시간의 운영을 봉사자와 그 대상자가 정성껏 논의하고 합의해야 한다. 올해부터 중·고교생의 종합생활 기록부에 봉사실적이 반영되면서 자원봉사에 참가하는 인구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봉사활동 인구의 저변이 확산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그러나 우려할만한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봉사활동을 학부모가 대신하고 확인증을 받아 가는 사례까지 있다니 말이다. 자원봉사는 나에게 귀중한 시간이나 물건을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어야 한다.또 그런 아쉬움이나 섭섭함을 봉사자 스스로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K공작」 기획 집중추궁/「5·18」 특수부

    ◎허문도·유학성·주영복씨 등 소환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서울지검3차장)는 10일 5·18 당시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이자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이었던 허문도씨와 박영수전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을 처음 소환한 것을 비롯,3군사령관 유학성씨,국방부장관 주영복 등을 재소환,조사했다. 검찰은 허씨를 상대로 당시 전두환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하게된 경위와 언론통폐합 및 신군부측 집권시나리오의 일환으로 알려진 「K­공작」을 기획·추진한 의도 등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검찰은 또 유씨와 주씨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5·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결의된 경위와 5·18 광주 현장 진압을 위해 계엄군이 출동한 과정 등과 관련해 미진한 부분을 캐물었다. 검찰은 12·12 및 5·18 사건의 핵심 피의자들에 대한 사법처리와 관련,「경복궁모임」 참석자,보안사팀,정승화전육참총장 연행팀,광주 진압군 주요지휘관 등 주요 사안별 관련자들을 분류,사법처리 범위와 수위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부자마을 영수촌(압록강 2천리:18)

    ◎「인민공사」 설립… 제철 등 20개 공장 직영/이익금 주민복지에… 식량­주택 싼값 공급/병원·유치원 무료… 농민에 퇴직금 실시/340 가구 “한가족”… 범죄자엔 촌민자격 박탈 요령성 심양시 우홍구 조화향 영수촌.그 전설적인 인물 황용세가 살았다는 20간 벽돌 기와집은 폐허의 기념물마냥 간신히 몸꼴을 지탱하고 서 있다.이에 비해 길을 마주하고 자리한 5채의 아파트는 마냥 산뜻했다.그리고 가로수가 늘어선 아스팔트길 한 가운데를 분리선 대신 화단으로 꾸며 마을 인상은 정갈했다. ○1인당 연소득 5천원 영수촌은 하남성 탑하시 임경향 남가촌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문난 공산주의 마을이다.남가촌처럼 「모택동 사상으로 모든 것을 통솔하자」는 따위의 요란한 표어가 내걸리지 않았을뿐 영수촌은 인민공사중심으로 뭉쳐있다.중국대륙전체가 모택동의 극단적 사회주의는 멀리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나가는 마당에 웬 인민공사란 말인가.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을 3백40호 1천3백여명의 인구 가운데 조선족은 1백50호 6백여명이고 나머지는 시버족과 몽골족이 차지했다.인민공사 자산은 논 7백무(2만1천평),양어장 5백무(1만5천평),양식장 3군데,양계장과 양돈장이 각각1군데로 되어있다.이밖에 전구공장,신발공장,강철제련공장등 20개 기업을 운영중인 인민공사는 특수전구공장 하나만을 한국기업과 합작했다.그러니까 개인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영수촌청사는 제법규모가 컸다.장백현이나 관전현 청사와못지 않은 5층건물이었는데,촌지부 당무실에는 가죽소파까지 갖추었다.벽에는 심양시에서 내어준 「모범촌」이니 「문명촌」이니하는 따위의 인정서와 부유한 마을이라는 뜻의 「소강촌」이라는 증서가 붙어있다.평안북도가 선대의 고향인 촌 당지부 김광일서기가 마을을 찾아온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난 78년 개혁개방정책이 나와서리 82년까지 심양시 모든 농촌에서도 개체화를 실시했디요.그런데 영수촌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것입네다.지금 우홍구 양식국장으로 가 있는 한족인 서정봉서기가 위에서 지시한 도급제를 마다하고 인민공사를 지켰디요.그 무렵에 마을 소득은한사람 연평균 1백80원밖에 안됐댔습네다』 중국 전역에 개혁개방이 한창일 때 삼양시에 건축붐이 일었다.서정봉서기는 이른바 사원(모택동시대에 농촌을 인민공사화 하고 농민을 사원이라고 불렀음)들을 이끌고 사방에 널린 모래를 파서 외지에 팔았다.1982년 한해에 모래를 판 돈 30만원을 들여 인철공장을 세웠다.공장을 가동한 첫 해에 1백30만원의 이윤을 올려 그 돈으로 주물공장,육식품 가공공장 등을 세우는데 재투자했다. ○대학생 전원이 조선족 그리고 공업수익을 농업분야에도 투자하여 볍씨 발아실,육모실,이앙기,수확기,탈곡기를 갖추는 등 영농기계화를 서둘렀다.지난해 영수촌의 농공업 총생산량은 8천여만원으로 1인당 연간 5천원꼴의 소득을 올렸다.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사원은 전체 노동력의 6%를 웃도는 30명이다.80년대 까지만해도 공장일을 선호했으나 기계화영농을 실현한 이후는 사정이 달라졌다.어디서일을 하든 매달 4백∼5백원꼴의 노임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에 비해 돈쓸 이유가 별로 없다.식량의 경우 탈곡이 끝나면 국가 수매량을 팔고나서 나머지는 창고에 입고한 뒤 가공비나 보관비 없이 일정한 분량을 싼값에 배급받는다.또 주택은 아파트를 지어 시가의 33%를 쳐서 사원들에게 분양했다.본래살던 단층집들은 1간당 3천원을 보상해준 터라 오히려 아파트에 입주하고도 돈이 남았다.아파트도 여유가 많아 3개씩 가진사원도 여럿 있다. 겨울 난방비는 올해부터 1㎡당 4원을 책정했다.지난해 2원 보다는 비싸다고 하나 도시지역 18원에 비하면 거저다.그리고 병원도 공사에서 직영,치료비가 없는데다 소학교는 물론 탁아소와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 있다.다만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있다.다만 유치원에서는 식비 10원을 받는다.마을에 사는 학생들이 대학을 가는 경우는 연간 5백원의 장학금을 주는데,대학진학생 15명은 모두가 조선족이라 조선족들의 긍지가 대단했다. 중국에서 보기가 드문 농민퇴직금제를 도입한 이 마을은 촌에 호적을 둔 주민들이 나이만 차면 퇴직금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현재 퇴직인원은 1백20명으로 한해에 지급되는 퇴직금은 7만∼8만원에 이른다.그리고 지난 91년도에 18∼45살에 이르는 주민들을 모두 양로보험에 가입시키고 촌에서 보험금 40%를 보조해오고 있다.또 위지할곳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돈을 대어 유료양로원에 보내는 것도 이 마을의 자랑이다. 토지나 기업을 집체화한 것은 물론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모델로 한 것이다.다만 영수촌의 집체화는 모택동이 계급투쟁을 앞세워 경제를 소홀히 한데서 온 총제적 빈곤에서 탈피했다는 점이 다르다.그러니까 튼튼한 경제기초 위에서 촌민의 복리를 우선하고 있는 영수촌은 모택동시대와 등소평시대의 장점을 혼합한 제도적 창신을 실현한 것이다.시장경제를 전적으로 배척한 전통사회주의도,그렇다고 몇몇이 기업을 독점한 전통자본주의도 아니었다. 김서기는 뼈 있는 말을 던졌다.『세상의 길은 많디요.부득부득 외통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습네』라고….그러면서 자신의 마을을 자랑이라도 하듯 육유의 시 한구절을 읊조렸다. 「산이 첩첩/물이겹겹/길 없나했더니/버드나무 우거지고 매화만발한 곳에/또 마을이 있네」 영수촌의 여러민족은 한집안처럼 화목하다.절도나 도박등 나쁜 풍속은 물론 다른 형사범죄가 없는 마을이다.하남성 탑하시 임경향의 공산당마을 남가촌은 모택동 저서를 한달에 한번씩 학습하면서 자아비평을 통해 마을을 정화한다고 하나 영수촌은 그런 일을 하지않았다.영수촌에서는 다만 마을 기풍을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연속적으로 못된일을 저지르거나 형사처벌을 받는 사람은 촌민자격을 박탈하고 있다. ○개인도 승용차 소유 김서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시간이 기울었다.김서기와 함께 당서기와 촌장의 정용차인 일제 도요타 승용차에 올랐다.이 마을에는 80여대의 자동차와 트랙터를 가지고 기동운수대를 운영하고 있다.그리고 공장마다 몇대씩의 트럭과 승용차를 보유한 이외에 10여가구의 촌민들은 개인소유 승용차를 굴린다는 것이다.외길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향수촌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았다.
  • 올해 공 외무 등 3명에 「훈일등」훈장/일본의 한국인 서훈 실태

    ◎80년대 중반이후 11명 최상위 “영예” 일본 고위정치인의 잇따른 과거사 망언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된 올해 한국과 일본정부는 각각 3∼4명의 상대국 국민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정부는 올해 한·일국교정상화 30년을 기념하기 위해 4명의 일본인에게 서훈했다.올해 데라우치문고가 반환되는 데 큰 역할을 한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일·한의원연맹회장(전총리)에게는 수교훈장 광화대장이 수여됐다.또 사할린교포의 귀환문제해결에 정성을 쏟아온 하라 분베에(원문병위) 전참의원의장과 하구라 노부야(우창신야) 일·한경제협회장에게는 수교훈장 광화장이,역시 사할린교포문제해결에 노력해온 이가라시 고조(오십람광삼) 중의원에게는 수교훈장 흥인장이 지난 18일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각각 수여됐다. 올해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한국인은 공로명 외무부장관과 박용학 한·일경제협회장,백선엽 전교통부장관이다.공장관은 지난해 12월까지 주일대사로서 한·일관계발전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지난 1월 훈일등욱일대수장을 받았고,박회장은 지난 4월 한·일경제협력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훈일등서보장을 받았다. 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전장관은 조선전쟁사를 연구하는 일본인에게 아낌없는 협력을 해 양국 전쟁사 관계자간의 교류를 심화했다는 공적사항으로 지난달 훈일등서보장을 받았다. 일본이 준 훈장은 우리와는 달리 광복 50년이나 한·일국교정상화 30년을 기념하는 성격은 아니다. 주한일본대사관의 고위관계자는 『우호친선촉진에 공적이 있는 외국인에 대한 서훈은 각국이 개별적으로 평가해 이뤄지는 것이지 상호주의에 입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정부는 매년 봄과 가을에 일본과의 우호친선증진에 공헌한 외국인을 대상으로,훈일등에서 훈팔등까지 8단계로 나눠 서훈한다. 올해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모두 34명이다.이 가운데 우리국민 3명이 모두 훈일등의 훈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이 한국인에게 훈장을 본격적으로 수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80년대 중반이후로,86년에 신현확 전국무총리가,87년에는 이원경 전외무부장관이 각각 훈일등욱일대수장을 각각 받았다.또 88년 작고한 이병철 전삼성그룹회장과 김용완 전경방명예회장이,89년에는 고 김용식 전외무부장관이,90년에는 고 이한기 전국무총리서리가,91년에는 유창순 전국무총리가,92년에는 고 김정렬 전국무총리가 모두 훈일등욱일대수장을 받았다.
  • 브라질 “내년엔 커피 수입국”/올 원두생산 작년보다 35% 감소

    세계 최대의 커피생산·수출국으로 군림해 온 브라질이 내년 초 사상 최초로 커피를 수입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브라질 커피생산협회가 22일 밝혔다. 협회는 커피 소비량 증가로 물량부족 현상이 두드러지게 될 내년 초부터 커피수입이 시작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많은 기업들이 수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일부는 이미 공급업자를 정한 상태』라고 말했다. 브라질의 커피원두 생산량은 지난 해 6·7월의 가뭄과 이에 뒤따른 서리피해 등의 영향을 받아 지난 94년 60㎏들이 기준 2천6백만부대에서 올해에는 1천6백80만부대로 35% 이상 감소했다.94년 생산량은 지난 90·91년과 비교해 20% 이상 줄어든 것이다. 브라질 정부는 커피 재고량을 발표하지 않고 있으나 업계 전문가들은 총 재고량이 1천5백만부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