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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시장 주름잡는 작지만 강한 기업

    세계시장 주름잡는 작지만 강한 기업

    아이슬란드에서는 능력있는 전문기술자를 ‘바더맨’이라고 부른다. 뛰어난 기술자들은 대체로 바더 시스템으로 교육받기 때문이다. 바더(Baader)는 생선가공 장비에서 세계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인구가 330만명에 불과하지만, 양은 7000만마리나 키운다. 전기로 작동하는 울타리 업계의 세계적 선두주자인 갤러거(Gallagher)는 이렇듯 목축에 관한 발명품이 나오기 적합한 환경에서 출현했다. ●성공비결과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 운동기구업계에서 세계 2위를 달리는 테크노짐(Technogym)은 아드리아해에 면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감베톨리에 있다.2008 베이징 올림픽에 운동기구를 독점납품하는 이 회사는 선두업체인 미국의 라이프 피트니스(Life Fitness)를 3년 안에 추월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렇듯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틈새시장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세계를 주름잡는 기업들이 있다. 대중에게는 생소하지만 엄청난 성장세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히든 챔피언’(헤르만 지몬 지음, 이미옥 옮김, 유필화 감수, 흐름출판 펴냄)은 ‘세계시장을 제패한 숨은 1등 기업의 비밀’이라는 부제처럼 업계를 선도하는 알짜배기 중소기업들의 성공비결과 미래 기업이 지향해야 할 핵심가치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는 마인츠대학 교수를 지내며 전략·마케팅·가격결정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독일의 경영학자이다.1980년대 말 최고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를 히든 챔피언이라고 불러 널리 회자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용어가 우리나라에서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경쟁력은 매우 높다는 ‘강소기업(强小企業)’으로 정착됐다. ‘히든 챔피언’은 20년동안 숨어있는 기업의 속내를 파고들어 2000개 기업을 추리고 다시 500개 기업을 선택하여 집중 분석한 결과물이다. 지은이는 이 가운데서도 바더맨와 갤러거, 테크노짐을 비롯해 인터내셔널SOS, 테트라, 화가네스, 란탈, 페츨, 다라뤼, 벨포르, 알박, 오리카, 사피, 아모림, 델로, 벨루가, 니바록스, 게리츠 등 50개 기업을 대표적 히든 챔피언으로 제시한다.“여러분이 아는 회사가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지은이가 큰소리칠 만큼 실제로 생소한 회사들이다. ●유럽식 경영의 진수 맛보게 해 ‘히든 챔피언’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대기업에서 배우는 것이 정답인 양 가르치는 미국식 경영학 이론에서 벗어나 강한 중소기업으로 세계시장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유럽식 경영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지은이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세상에 알려진 성공 사례나 뛰어난 경영 사례는 대부분 대기업에 관한 것이나 현실에서 경제의 큰 부분은 중소기업들로 이루어져 있다.”면서 “그럼에도 세계시장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세계화의 중요한 동력인 숨은 챔피언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시각변화’를 촉구했다. 독일은 인구가 미국의 4분의1, 일본의 3분의2이지만 미국보다 20% 이상, 일본보다 2배 이상 수출하는 이유는 오로지 중소기업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히든 챔피언들은 이른바 경영의 대가들의 가르침이나 한 시대에 유행하는 경영 풍조와는 사뭇 다르게 행동하고, 대기업과도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매우 야심차게 자신의 강점에 집중하면서 다각화를 기피하고 ▲결연한 자세로 세계로 나아가 고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많지 않은 자원으로 획기적인 혁신을 이루어내고 ▲아웃소싱을 멀리하는 등 마치 옛날 경영방식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나아가 이 같은 히든 챔피언의 원리는 독일이나 유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기업에도 똑같이 유효하다고 강조한다.3만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대한민국 60돌-미래로 세계로] 1948년 6월 서울에서는…

    신문이 한 시대의 사회상 모두를 담아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시대의 모습을 재구성하기에는 그리 모자람이 없는 정보를 제공한다. 정부 수립을 눈앞에 두었던 1948년 6월의 서울신문에도 당시 서울시민들이 즐겼던 문화의 양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려교향악단은 안병소 지휘와 백창규의 피아노로 12∼13일 옛 명동예술극장 자리의 시공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을 들려주었다. 서울교향관현악단은 제4회 정기공연을 23∼25일 역시 시공관에서 펼쳤다. 롤프 자코비 지휘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가운데 ‘몰다우’와 하이든의 ‘시계’교향곡, 테너 이인범과 협연으로 마스네의 ‘마농’ 가운데 ‘꿈’ 등을 연주했다. 해방 이후 탄생한 고려교향악단은 이 즈음 40명 남짓한 단원이 서울교향관현악단으로 옮기면서 해체의 길을 걸었다. 최승희의 제자인 김미화의 무용 신작 발표회는 19∼20일 시공관에서 열렸다. 서울신문이 후원하여 광고는 물론 ‘우리 무용계의 지보적 존재’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갔고, 공연평도 실렸다. 이 달의 유일한 무용 공연이었다. 이 해엔 당시 문교부가 주최한 제1회 전국연극경연대회가 열렸다. 대회 참가작인 극단 신청년의 김영수 작 ‘혈맥’은 25일부터 30일까지 중앙극장 무대에 올랐다. 사실주의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1998년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되기도 했다. 역시 대회 참가작인 극단 호동의 ‘황포강’은 ‘민족진영 순수연극’을 표방한 이진순 연출로 중앙극장에서 공연됐다. 이밖에 세실 B 데밀 감독의 ‘대평원’과 킹 비더 감독의 ‘텍사스 결사대’, 찰스 코번 주연의 ‘폭풍의 청춘’, 그리어 가슨과 로널드 콜맨 주연의 ‘마음의 행로’ 같은 외국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국산영화로는 16mm 무성영화인 멜로드라마 ‘검사와 여선생’이 전국에서 상영됐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경기여고 불교문화재 훼손 물의

    경기여고가 교내에 있던 불교제중원(佛敎濟衆院) 표지석과 5층석탑, 석등을 땅에 파묻는 바람에 불교계가 크게 반발하는 등 물의를 빚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경기여고는 지난 5월 말 학교 100주년 공원화 사업을 벌이면서 1920년대 만들어진 불교제중원 표지석 등 문화재 3점을 굴착기로 땅에 묻었다. 학교측은 일부 교사가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자 이달 초 문화재들을 다시 파냈고, 현재는 창고와 화단에 보관하고 있다. 석등은 땅에서 파내는 과정에서 하단 일부가 훼손됐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25일 성명을 내고 “학교 관계자의 특정 종교에 대한 개인적 신앙이 아무리 깊더라도, 국가적 문화재를 임의대로 훼손하고 방치한 것은 교육자의 신분을 망각한 것”이라면서 “문화재청은 이들 문화재를 즉각 복구하고 문화재 훼손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경기여고 측은 “학교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 유물들을 땅에 묻자는 제안이 있었고, 문화재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공사를 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불교제중원은 불교중앙포교소가 1923년 설립한 최초의 현대적 의료기관으로 내과와 외과, 조산과를 두었다. 불교계는 이 표지석을 근대불교사의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하고 있다. 이 문화재들은 덕수궁터에 있었던 것으로 경기여고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시절 학교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편입되었고,1988년 학교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겨졌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제주의 미래 ‘장수산업’으로 열어야”

    “제주의 미래 ‘장수산업’으로 열어야”

    “제주의 미래에 대한 해답은 자연 인프라와 제주도민의 삶 속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제주 발전의 유일한 대안은 장수산업(長壽産業)이라고 말하고 싶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제주 발전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산업으로 ‘장수산업’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동안 제주는 감귤과 같은 환금작물과 관광산업을 경쟁력으로 내세웠으나, 더 이상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산업화는 경쟁력을 전제로 하는데, 경쟁력의 확보는 각자의 개성과 특징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것이 기본”이라면서 “장수는 그동안 제주의 특성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른바 성장동력을 위한 신산업으로 장수산업은 제주의 미래를 위한 희망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조선시대 제주목사 임제가 1577년 30가구가 살고 있는 해안마을에서 100세가 넘은 노인을 7명이나 만났다는 기록을 남겼을 만큼 제주는 예부터 장수지역이었다는 것이다. 27일 제주시 제주영상미디어센터에서는 ‘제주 민속의 산업화’를 주제로 제주국제협의회와 제주발전연구원이 공동 주최하는 국제 세미나가 열린다. 학문적 연구의 영역에 머물렀던 민속을 산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점에서 뜻깊은 자리이다. 민속학·인류학·국문학·건축학 등 다양한 전공의 한국·일본·캐나다 학자가 참여하는 이번 세미나에서는 기대처럼 ‘실천 학문’의 차원에서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는 몇가지 발표가 이루어진다.‘장수산업’을 주창하는 전 교수의 ‘민속으로서의 제주 장수와 성장동력으로서의 장수산업-실천인류학의 사례’도 이 자리에서 발표된다. 전 교수는 미리 공개한 발표문에서 “장수산업이란 기본적으로 제주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배운 지혜와 지식을 기초로 한다.”면서 “제주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 즉 제주 민속에서 발견되는 장수 요인들을 결집하고 그것을 콘텐츠로 삼아 산업화의 아이디어와 접목시킨다는 전략이 장수산업을 구성하는 요체”라고 밝혔다. 그는 장수산업의 ‘벤치마킹’대상으로 1993년 ‘장수 일본 넘버 원’이라는 기념탑을 세우고 1995년 ‘세계장수헌장’을 발표하는 등 장수라는 개념을 지역발전 프로그램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오키나와를 지목한다. 전 교수는 “제주 민속을 깊이 성찰할 때 제주의 특성을 배울 수 있고, 제주에서 배운 지혜를 기초로 제주에 맞는 성장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메이드 인 제주’라고 분명하게 원산지 표시를 할 수 있을 때 세계로 발신된 상품과 아이디어는 제주 사람들의 주머니를 불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부심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날 현길언 한양대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는 제1부에서는 쓰하 다카시 일본 유구대 교수가 ‘조상숭배의 비교문화론-제주도와 오키나와’, 아미노 후사코 일본 전수대 교수가 ‘제주 무속의 현대적 재발견’을 발표한다. 김용범 국민대 겸임교수가 진행하는 제2부에서는 전 교수의 논문과 윌리엄 캐논 헌터 제주대 관광경영학과 초빙교수의 ‘상품화, 관광 그리고 제주 돌하르방’, 강영봉 제주대 국문과 교수의 ‘제주어의 관광 상품화’를 놓고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진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단양의 수양개 구석기 유적 연구 한권에

    1983년부터 발굴이 이루어진 충북 단양의 수양개 유적은 한국의 구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로, 특히 후기 구석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충북대에 재직하던 시절 수양개 유적의 발굴을 주도한 이융조 한국전통문화학교 초빙교수는 국제 구석기학계에서 이 유적의 위상을 분명히 하겠다는 뜻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구상한다. 이에 따라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라는 이름의 국제학술대회가 한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탄자니아 학자가 참여한 가운데 1996년 10월 단양에서 처음 열리게 된다. ‘수양개와 그 이웃들’은 이후 구석기 분야의 비중있는 학술대회로 성장하며 중국과 일본, 러시아, 폴란드 등에서도 개최되었다. 올해 제13회 대회는 오는 12월 일본, 내년의 제14회 대회는 탄자니아에서 열린다. 2005년 단양에서 열린 제10회 대회까지 발표된 논문은 모두 99편에 이른다. 수양개 유적에 관한 연구는 물론 제4기 지질연구, 고환경, 고동물학, 고인류학, 석기, 고경제, 선사예술까지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충북대박물관과 단양군이 펴낸 ‘수양개와 이웃들 Ⅰ’(이융조 편)은 이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한데 모은 것이다. 앞으로 제2권과 3권이 차례로 나오게 된다. 국제학술회의가 단양향토문화연구회를 이끈 지역인사의 도움으로 열릴 수 있었던 데 이어 논문집도 단양군의 지원으로 발간되는 등 지역 사회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뜻깊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29일 ‘박봉술제’ 무대서는 송순섭 명창

    29일 ‘박봉술제’ 무대서는 송순섭 명창

    “저녁 일곱시부터 ‘흥보가’를 부르기 시작하여 밤 열한시 반이 되었으니 조금 있으면 새해가 밝을 참인데 한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박수를 칩디다. 말로는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재미 때문에 말려도 자꾸 완창에 나서는 것 같소.” 송순섭 명창이 국립극장의 완창판소리 무대에 다시 오른다.29일 오후 3시부터 달오름극장에서 박봉술제 ‘적벽가’를 부른다. 드물게 동편제 소리를 고수한 그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로 이어지는 이른바 송판 ‘적벽가’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송 명창은 2006년 12월31일 국립극장의 제야 완창판소리에서 ‘흥보가’를 부르기에 앞서 “나이가 칠십이니 다시 완창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1936년생으로 올해 72세지만, 호적에는 1939년생으로 올라 있다. 주변에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송 명창의 마지막 판소리 완창’이라고 이날 무대에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웬걸, 그는 한밤중의 소리판에서 오히려 ‘엔돌핀’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이 좋은 소리, 앞으로 더 오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스승 박봉술 명창 이어 송판 ‘적벽가´ 독보적 존재 송 명창은 2000년 풍을 맞았다. 남성적인 ‘적벽가’가 장기로 알려진 소리꾼이 ‘흥보가’를 한번 불러봤더니 청중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박수바람에 미쳐서 돌아가다 보니’ 그해에만 완창이 5차례였다. 그는 결국 11월16일 쓰러졌다. 그럼에도 자신의 표현대로 ‘덜렁덜렁한’ 오른 팔과 다리로 약속한 두 개의 공연을 마치고 나서야 입원했다. 그러는 사이 문화재청에서 한 통의 공문을 받았다.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려면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2001년 5월31일 ‘적벽가’를 완창하여 예능보유자에 올랐다. 가족과 제자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말렸지만, 그는 오히려 ‘적벽가’를 부르며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2000년 풍 맞고도 그해 완창무대 5차례 올라 전남 고흥 출신인 그는 광주에서 공옥진 명인의 아버지 공대일 선생, 성창순 명창의 아버지 성원복 선생, 김명환 명고수에게 소리를 배울 때 “박봉술의 소리가 중후한 소리라는 것을 세상사람들은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에 새겼다. 그는 이후 부산에 살던 박 명창을 찾아가 그곳에 눌러앉았고, 스승이 서울에 자리잡자 다시 밤기차로 오가며 배웠다. 그는 지금도 박 명창에게 ‘적벽가’뿐 아니라 ‘흥보가’와 ‘수궁가’까지 세 바탕을 물려받았다는 데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송 명창은 순천에 세워진 동편제판소리전수관에 박봉술 명창의 무덤을 이장하는 한편 동편제판소리보존회를 만들어 송만갑 명창의 자서전을 펴내고 명맥이 끊어졌던 ‘순천대사습’을 되살리는 데도 힘쓰고 있다.2006년부터는 광주시립국극단장도 맡고 있다. 송 명창은 요즘 하루에도 서너 시간씩 소리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부터의 완창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하늘이 주시는 기회라는 것이다. 그는 “기운이 딸리는 것은 걱정이 아닌데 가사를 잊어버리거나, 아니리를 하면서 말더듬이가 될까 걱정”이라며 웃었다. 북은 박근영과 정항자. 전석 2만원.(02)2280-4115∼6.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한국 것은 한국 것이라고 진실을 밝혀라

    미국의 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0∼1996)은 1941년 ‘15세기 일본의 선(禪)화가 연구’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교토의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불교미술을 연구하고, 하와이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강의하면서 대표적인 일본미술사학자로 활동했다. 코벨은 그러나 1978년부터 1985년까지는 한국에 머물며 한국문화를 탐색하고 일본문화에 대한 영향을 밝히는 글을 1000편 넘게 쓰게 된다. 하와이대학을 정년퇴직하자마자 한국으로 날아온 것은 일본미술사를 파고들면 들수록 한국의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1930년대 나라와 교토에서 구다라(백제)관음 같은 불상과 호류지(法隆寺)의 아스카 불교미술을 보았을 때 20%는 한국에서 직접 들어왔거나 강력한 영향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1980년대에는 한국의 영향이 95%에 이른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적도 있다.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김유경 편역, 글을읽다 펴냄)은 그가 한국에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던 글의 일부를 엮은 것이다. 요즘에는 한국문화가 일본문화, 특히 일본의 고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는 진부하게 느껴질 만큼 흔하디 흔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많은 예술품이 사실상 한국 것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있는 것처럼 이집트의 문화재는 런던에, 일본의 문화재는 보스턴에 많다. 그런데 이집트 문화재는 이집트 것, 일본 문화재는 일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의 한국 문화재는 일본 것이나 중국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코벨은 특히 1981년의 상황이기는 하지만,“한국의 모든 박물관장은 일본인에게 훈련받은 사람들로, 그 때문인지 엄연한 사실을 밝혀서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는 젊은 학도라면 박차고 일어나 한국 것은 한국 것이라고 진실을 밝혀서 케케묵은 주장들을 일소해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꼭 코벨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우리 학계가 27년 전과는 다르게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2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천하대란’ 외면한 조선 세도정치

    1850년 10월 중국 광서성 금전촌에서 봉기한 홍수전(洪秀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는 ‘지상낙원’의 건설을 선언하고, 이듬해 2월 천왕(天王)에 즉위한다. 태평천국은 농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속에 1853년 남경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하고, 과거시험을 치러 관리를 등용하는 등 15년 남짓 중국 전역에서 위세를 떨쳤다. 태평천국의 기세가 한풀 꺾일 무렵인 1856∼1960년 영·불연합군은 이른바 제2차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침공했고 베이징을 점령당한 청왕조는 서구 열강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다. ‘태평천국과 조선왕조’(하정식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는 내부적으로는 1862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인 임술민란을 겪고, 외부적으로는 이양선의 출몰에 극도로 긴장하는 등 내우외환에 직면하기는 청나라와 다름 없었던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태평천국의 난’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응해 나갔는지를 깊이있게 바라보고 있다. 숭실대 사학과 교수인 지은이의 시선은 특히 조선의 지배층이 청나라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위기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대응했기에 결국 피식민지배라는 ‘파국’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맞춰졌다. 지은이는 연행사절을 통하여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구성해보면 언제, 누가, 어디서, 왜 군사를 일으켰고, 그 형세가 어떤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정보에는 물론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이 긴박한 안팎의 정세를 제대로 인식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철종 연간은 세도정치가 심화·확대되던 시기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세도정권은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진 ‘위기의 15년’을 ‘철종실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태평의 시간’으로 꾸며놓았다고 지적한다. 스스로 ‘천하대란’으로 시국을 진단했음에도 사회 통합의 능력과 지배의 논리를 잃고 안주하고 있던 조선의 지배층은 폭풍우가 이미 시야에 들어왔는 데도 이를 애써 먼 산 소나기로 여기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개항은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기도 전인 1876년 갑자기 이루어졌고, 열강 침략의 파고도 더욱 높고 거셀 수밖에 없었다고 지은이는 분석했다.2만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중앙박물관, TV드라마 속으로

    중앙박물관, TV드라마 속으로

    17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졌다. 평소 같으면 학술세미나의 발제자들이 앉아있었을 ‘근엄한’ 단상에는 배우 이동건과 김선아, 이주현, 김정화가 자리잡았고, 객석에서는 문화재담당기자 대신 연예담당기자들이 질문공세에 열을 올렸다. 중앙박물관 역사상 처음으로 TV드라마의 제작발표회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오는 23일 첫 방송하는 MBC TV의 드라마 ‘밤이면 밤마다’는 이동건이 연기하는 미술사학자와 김선아가 맡은 문화재청 도굴꾼단속반원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멜로 코믹물이다. 따라서 박물관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수. 제작진은 지난 4월 중앙박물관과 협의를 시작하면서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박물관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기관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손형석 PD는 전작인 ‘옥션하우스’를 연출할 때도 중앙박물관에 촬영장소를 빌릴 수 있겠느냐고 요청한 적이 있지만, 대답은 ‘노(No)’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최광식 중앙박물관장은 제작진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물론 직원들에게 최선을 다해 도우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렸다. 박물관이 국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데 TV 드라마에 노출되는 것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중앙박물관은 2005년 용산으로 이전하여 재개관한 뒤 한번씩 다녀간 관람객들을 다시 찾게 만들 수 있는 유인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중앙박물관도 제작진에 갖가지 요청을 쏟아냈다. 거울못과 거울못 레스토랑, 미르폭포, 석조유물공원 등 매력있는 공간이 최대한 화면에 비쳐져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특히 박물관의 야경과 정원의 아름다움을 강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일반인들이 보존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보존과학실의 작업 모습도 비쳐질 수 있도록 했다. 드라마 포스터에는 박물관 소장품이 등장하고, 출연진이 언론매체와 인터뷰할 때도 중앙박물관이 노출된다.MBC 의 ‘밤이면 밤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문화재 사진을 올리는 네티즌에게 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페르시아’전 티켓을 선물하는 ‘문화재를 찾아라’이벤트도 벌인다. 사무실 장면을 찍는 문화재청 서울사무소에도 기획전과 테마전 등의 포스터를 붙여 박물관 분위기가 날 수 있도록 했다. 박물관 직원들의 호응도 적극적이다. 드라마의 대본이 나오면 학예실 직원들이 먼저 읽고 실제 박물관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다른 내용은 제작진과 토의하여 바로잡는다. ‘밤이면 밤마다’는 16부작 월화 드라마로 오는 8월12일 막을 내린다. 중앙박물관은 이 드라마가 기대처럼 인기를 끈다면 쵤영장소로 이용됐던 장소를 중심으로 ‘밤이면 밤마다 박물관 투어’를 만드는 등 홍보효과를 더욱 극대화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MBC 관계자는 앞으로 다른 드라마의 제작발표회도 중앙박물관을 이용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물관 쪽에서도 윤은경 작가와 손 PD에게 후속드라마는 아예 중앙박물관의 학예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어떻겠느냐는 의사를 타진했다고 한다. 배용준이 주연한 윤 작가의 전작 ‘겨울연가’의 촬영지 남이섬에 일본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이 몰려든 것처럼 중앙박물관도 외국인으로 북적이게 하여 드라마 촬영장소뿐만 아니라 전시실에 있는 ‘한국 문화의 정수’까지 보고 가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고구려 호로고루서 제사도 지냈다”

    한강과 임진강 주변에는 적지 않은 고구려의 유적이 남아 있다. 대부분이 군사시설로 한강변에는 1997년 이후 집중발굴이 이루어진 서울 구의동보루와 홍련봉보루·구리 아차산보루, 임진강변에는 2000년 발굴된 경기 연천의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은대리성·전곡리토성·당포성 등이 있다. 그런데 한강변에서는 고구려의 전방 요새인 홍련봉1보루, 임진강변에서는 성곽형태의 기지인 호로고루가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천신(天神)이나 수신(水神)을 제사하는 역할까지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왔다. 백종오 충주대 교수는 한국고대학회와 서울 광진구가 지난 13일 광진문화예술회관에서 가진 ‘2008 고구려역사문화계승을 위한 학술대회’에서 ‘남한 내 고구려 유적·유물의 새로운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기와전문가인 백 교수는 “기와는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90곳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 10곳에서만 확인됐을 만큼 계층적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건축 부재”라면서 “특히 호로고루와 홍련봉1보루에서만 나온 수막새는 모두 가장자리인 주연부를 인위적 타격을 가하여 조심스럽게 떼어낸 흔적이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막새는 고구려 고분 위에 선왕을 추모하고자 세운 총상건물(塚上建物) 등 국가적 의례에 주로 사용됐다.”면서 “어떤 의례를 위하여 수막새의 주연부를 떼어내는 현상은 집안의 서대묘, 태왕릉, 장군총 등에서도 확인되는 만큼 홍련봉1보루나 호로고루에서 나온 수막새의 양상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교수는 “호로고루의 지하시설에서 나온 소, 말, 맷돼지, 개, 사슴, 노루의 동물뼈도 고구려 시조전승에 나타난 동물과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각종 제의의 희생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소는 대부분의 뼈가 수습되었음에도 발굽만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고자 소를 죽여 발굽의 모양을 보는 우제점(牛蹄占)을 쳤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호로고루에서 나온 관모형(冠帽形) 토제품과 토제 삼족 벼루, 토제와 석제 저울추와 홍련봉1보루에서 출토된 솥모양 토기 등도 일상적인 생활용품이라기보다는 의례 행위에 사용되는 특수기물일 것으로 추정했다. 백 교수는 “고구려에서 ‘동맹’과 같은 제의가 이루어졌다면 호로고루나 홍련봉1보루처럼 지역의 중심의 위계가 높은 건물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두 유적은 군사적 기능도 있지만 오히려 상징적인 의례행위가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의미도 부각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꼬마 용달차 ‘딸딸이’ 문화재 된다

    문화재청은 17일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전 및 업무용 승용차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소방차, 최초의 국산 트럭인 삼륜차 등 자동차 8건을 등록문화재로 예고했다. 대통령의 자동차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전용 캐딜락(1956)과 박정희 대통령의 업무용 시보레 비스케인(1960), 의전용 캐딜락(1968), 업무용 지프(1965), 의전용 벤츠(1968) 등 5대이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이승만 대통령의 의전용 캐딜락은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대통령 의전용 승용차이자 국내 최초의 방탄 승용차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4륜구동 지프는 미국 카이저 제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을 시찰할 때 사용한 우리나라 경제 재건의 상징적인 유물이다.상주의용소방대 소방차는 1933년 미국 포드 트럭을 일본에서 개조한 뒤 들여와 쓰던 것이다.T-600 삼륜차는 기아산업이 일본의 동양공업과 기술제휴하여 1963년부터 만든 577㏄에 20마력을 내는 2기통 엔진의 꼬마 화물트럭으로 ‘딸딸이’라고 불리며 용달차로 인기가 높았다.퍼블리카는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 모델을 들여와 1967년부터 생산한 800㏄ 공랭식 엔진의 경차급 승용차로 모두 한국 자동차 산업 발달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는 평가를 받았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오페라판 ‘위기의 주부들’

    오페라판 ‘위기의 주부들’

    출연하는 성악가는 모두 합쳐서 세 사람이다. 무대 아래엔 오케스트라 대신 피아노 한 대가 달랑 놓인다. 그 앞에 앉은 지휘자는 이 네 개의 ‘악기’ 만으로 음악을 만들어가야 한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알렉산더 젬린스키(1871∼1942)의 한국 초연 오페라 ‘피렌체의 비극’은 이렇듯 오페라에 가졌던 고정관념을 깬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아내들의 반란’도 오페라 같지 않은 오페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슈베르트와 친구들이 그의 음악으로 하룻밤을 즐겼다는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니 극장용이 아니라 살롱을 위한 오페라이다. 피아노 반주의 ‘한계’를 목소리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듯 14명의 출연진은 쉴사이 없이 수다를 떨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성남아트센터가 21일부터 25일까지 378석짜리 앙상블시어터 무대에 올리는 두 오페라는 대극장에서 공연한다면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매우 소극장 오페라답다. 두 오페라가 이른바 ‘그랜드 오페라’와 다른 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의 미완성 희곡을 각색하여 만들었다는 ‘피렌체의 비극’이 가진 현대적 감각도 그렇다. 피렌체 공작 귀도가 아내와 밀회한 행상 시모네를 결투 끝에 ‘응징’하고, 아내 비앙카는 남편의 새로운 모습에 강렬하게 매혹되어 서로 포옹한다는 줄거리는 그동안의 오페라가 가졌던 상투성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다. ‘아내들의 반란’(원제 Die Verschworene·음모자들)은 극작가 카스텔리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타’의 배경을 십자군 시대로 바꾸어 각색한 만큼 고전적이다. 하지만 밤낮으로 전쟁에 나가는 남편들을 기다리는데 질려버진 아내들이 다시는 남편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기 전에는 잠자리를 거부하겠다는 결의로 시작되는 줄거리는 충분히 파격적이다. 제작진 사이에서는 두 작품이 요즘 케이블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의 오페라판이라는 농담도 오고갔다고 한다. 우리 음악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소극장 오페라는 주어진 현실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최대한 명분을 살려가기 위한 아이디어의 하나이기도 하다. 성남아트센터는 2005년 개관 당시 5막짜리 구노의 대형 오페라 ‘파우스트’에 이어 2006년에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지난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국내 초연하는 등 의욕적인 기획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기초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연장으로는 쉽지 않은 투자였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올해부터는 소극장 오페라와 그랜드 오페라를 해마다 번갈아 올리기로 했다. 두 작품의 번역과 연출은 조성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지휘는 양진모가 맡았다. 조 감독은 1997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아내들의 반란’의 한국 초연을 주도하기도 했다. ‘피렌체의 비극’(50분)에는 귀도에 테너 전병호, 시모네에 바리톤 성승민, 비앙카에 메조소프라노 서은진이 출연한다. 피아노 김윤경.‘아내들의 반란’(60분)에는 박준혁, 정영수, 이정환, 박경현, 김동섭, 김지단, 배성희, 석현수, 남지아, 황윤미, 김민아, 김소영, 김성아, 전희영이 나선다. 피아노 홍지혜. 21·22일은 오후 5시,23일은 공연없음,24·25일은 오후 7시30분. 전석 3만원.(031)783-8000.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컨테이너 박스의 가치 재발견

    컨테이너 박스의 가치 재발견

    1956년 4월26일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 항구에서는 트럭에서 분리된 강철 적재함이 기중기로 유조선을 개조한 화물선 아이디얼X호로 옮겨지고 있었다. 팬애틀란틱의 말콤 맥린 사장은 58개의 컨테이너가 실린 아이디얼X호가 부두를 빠져나가자 비행기를 타고 휴스턴으로 날아가 부두에서 ‘최초의 컨테이너선’의 입항을 기다렸다. 맥린은 이 새로운 운송방식으로 1t에 5.83달러였던 중간 크기 비포장 화물의 선적비용을 15.8센트로 줄일 수 있었다. 이 해 4월에서 12월 사이 팬아틀란틱의 화물선은 컨테이너를 싣고 미국 동부해안을 모두 44차례 운항했다. 맥린은 컨테이너의 대명사로 한동안 군림한 시랜드(Sea Land)를 이듬해 창업했다. ●물류수송 시스템 바꿔 경비 절감 사실 당시에도 화물용 강철박스는 모양과 크기만 달라졌을 뿐 수십년 동안 사용되고 있었다. 미국 증기선 회사인 시트레인도 1929년부터 이미 부두에 거대한 기중기를 두고 유개화차를 특별히 제작한 배로 수송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맥린의 성취를 얕잡아보는 역사가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맥린이 컨테이너를 화물 수송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한 수많은 기업과 달랐던 것은 화물이 움직임는 전 과정에 승부를 걸었다는 데 있다. 그는 운송산업의 경비절감은 전체 시스템, 다시 말해 항구와 선박, 기중기, 창고 시설, 트럭, 기차 등 수송과정의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더 박스-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마크 레빈슨 지음, 김동미 옮김,21세기북스 펴냄)은 화물을 운송하는 수단으로 컨테이너가 어떻게 고안되어 세계 경제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운송 방식이 되어버려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컨테이너의 경제적·사회적 영향을 밝혀낸 최초의 분석서이다. 컨테이너가 도입되기 전 샌프란시스코와 몬트리올, 함부르크, 런던,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세계 주요 도시들은 부두를 몇 개씩 가지고 있었다. 화물운송은 도로와 부두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필요한 산업이었다. 부두의 이웃에는 창고가 즐비했고, 창고가 아니라면 어김없이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제조업체들은 원자재를 쉽게 가져다 완성된 제품을 내보낼 수 있도록 부두 근처에 본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다. ●완제품·부품 이동 쉬워 국제교역 급증 이런 상황에서 컨테이너 체제를 도입한 데 따른 효과는 물류혁명에 머물지 않았다. 완제품뿐 아니라, 부품 또는 원료가 활발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국경을 넘나드는 교역도 증가했다. 운송비가 대폭 줄어들면서 생산자는 소비자와 가깝지만 땅값과 인건비가 비싼 대도시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교외나 해외에서 훨씬 낮은 비용으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 또한 전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사서 쓸 수 있었다. 컨테이너는 운송 거점이 되는 항구도 재편시켰다. 컨테이너 운송에 부정적이던 뉴욕이나 런던은 위상이 낮아진 반면, 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부산이나 시애틀은 물류 허브의 신흥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 물류 허브 강자로 급부상 지은이는 ‘뉴스위크’와 ‘이코노미스트’의 선임기자와 경제학 담당 편집자를 역임한 저널리스트이자 경제학자.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만큼 컨테이너의 덕을 본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조선산업을 국가과제로 추진하던 한국이 1973년 석유파동에 따른 유조선 시장이 움츠러들어 어려움을 겪을 때 컨테이너선 수요의 폭증은 난감한 상황을 오히려 엄청난 호황으로 반전시켰고, 보잘 것 없던 부산항 또한 1974년 처음으로 컨테이너 부두가 생긴 뒤 급성장하여 1995년 세계 5대 컨테이너 항구로 당당히 올라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반세기 전만 해도 컨테이너가 그처럼 커다란 변화를 낳을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면서 “한국이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적인 무역국가로 거듭난 것도 이 ‘단순하고 멋대가리 없이 생긴 직육면체 상자’가 예기치 않게 낳은 수많은 결과의 하나”라고 주장했다.2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양성지는 아첨꾼 아닌 주체적 실학자”

    “양성지는 아첨꾼 아닌 주체적 실학자”

    규장각은 조선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개혁정치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세웠지만, 단초는 300년 이상이나 앞선 세조 9년(146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규장각 설치를 건의한 사람은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5∼1482)였는데, 정조는 규장각을 출범시키면서 그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가 내놓은 ‘양성지-조선 수성기 제갈량’(지식산업사 펴냄)은 눌재를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평전이다.1992년부터 4년 동안 서울대 규장각 관장을 지낸 한 교수는 “눌재를 되돌아보게 된 것은 정조의 정신적 스승의 하나가 그였다는 사실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성지는 눌재라는 아호처럼 더듬거리는 말투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동료들이 사육신이나 생육신으로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할 때 세조의 총신(寵臣)으로 자리잡아 훗날 사림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어눌함을 극복하고자 항상 글로 뜻을 드러내어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않고는 못배긴다.(知無不言·지무불언)’는 평을 들을 만큼 자신을 끊임없이 독려한 인물이다. 세조와는 시정개혁과 국방정책의 적극적인 조언자이자 이론가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눌재를 제갈량에 비유한 것도 세조이다. 한 교수는 “1970년대 초 ‘눌재집’을 읽고 그 애국적이고 주체적인 경륜에 놀랐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조선 선비들은 주체성이 없고 중국을 지나치게 숭상한 사대주의자들이었다고 단정한 것은 나뿐 아니라 당시 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였으나 ‘눌재집’은 나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고 털어놓았다. 한 교수는 눌재를 ‘주체성 있는 실학적 성리학자’로 규정한다. 그는 “눌재의 상소문 대부분은 관념적인 주장보다 병학, 지리, 역사, 문학 등 각 분야의 실용적인 정책 제안을 담고 있다.”면서 “눌재가 추구한 ‘유용지학(有用之學)’,‘경제실용(經濟實用)’의 학문은 18세기 이후 실학의 학문적 토양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눌재 사상의 기본 목표는 ‘자주독립된 부강한 왕조국가의 건설’이었다.”면서 “그는 단군을 전조선왕(前朝鮮王)이라는 역사적 실재인물로 파악하고, 중국과 우리는 제가끔 하늘의 일방(一方)을 차지하여 별개의 건곤(乾坤·구역)을 이루는 나라라고 우리 역사의 독립성을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눌재는 특히 조선은 강토가 본래 요동을 포함한 ‘만리지국(萬里之國)’으로 우리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군사력의 강화는 물론 명나라 세력이 이 지역으로 뻗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조의 지나친 부국강병 정책은 지방세력의 희생을 강요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이런 점 때문에 성종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신진 사람이 눌재를 ‘오직 임금에게 아첨하고 재물을 탐한 노인’으로 보는 근본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한 교수는 분석한다. 한 교수는 “눌재가 300년 만에 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위대한 실학자로 부활한 것은 사림 정치가 부작용을 낳으면서 왜란과 호란을 불러오고, 다시금 강력한 지도력과 실용정치를 요구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라면서 “명분보다 실리를 중요시하고, 왕권강화를 옹호하는 실학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그 선구자로 양성지가 주목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20세기 초 日 미술에 스며든 고대 한국

    20세기 초 日 미술에 스며든 고대 한국

    20세기 초반 일본에서는 유럽의 르네상스처럼 고대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르네상스가 모범으로 삼은 고대가 그리스·로마라면, 일본이 본받고자 설정한 고대는 아스카(飛鳥·538∼710)와 나라(奈良·710∼798) 시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스카와 나라 시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섭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던 시기인 만큼 이 시기 일본 미술에서는 당연히 한국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밖에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관 테마전-일본 미술의 복고풍’은 일본의 미술에서 보이는 한국 문화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는 자리이다. 중앙박물관이 갖고 있는 16세기 이후의 일본 미술품 30점이 출품되었는데, 아무래도 ‘복고풍’이 커다란 흐름을 이루던 20세기 초반의 근대 미술 작품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요시무라 다다오(1898∼1952)의 ‘쇼토쿠 태자’(1936)는 일본의 불교를 중흥시킨 쇼토쿠 태자(성덕태자·573∼621)와 부인 아치바나 오이라쓰메를 그렸다. 그림 속 쇼토쿠 태자의 앞에는 그의 스승인 고구려 승려 혜자(?∼623)의 이름이 새겨진 까치모양의 향로가 그려졌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모티브가 사용된 의상을 입은 다치바나가 무궁화를 들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선승혜 학예연구사는 “무궁화는 최치원이 신라를 근화지향(槿花之鄕)이라고 했을 만큼 우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을 통털어 다른 작품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꽃”이라면서 “화가가 1930년대 당시 한국을 상징하던 무궁화를 소재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토 세이이치(1893∼1984)가 조각한 ‘훈염(薰染)’의 상체는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과 판박이 같다. 가만히 보면 연꽃 대좌도 삼국시대 금동불입상의 그것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살지 않는 호랑이는 아스카시대에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로 일본에 수용된 이후 채색 도자기에서도 인기있는 소재였다. 호랑이는 이번에 출품된 17세기 말 가키에몬 양식과 구타니 양식의 접시에도 등장한다. 호랑이는 수출용 도자기에도 중요한 문양으로 그려져 유럽까지 전파되었다. 이밖에 전시회에서는 김명국의 달마그림을 연상시키는 일본 선화의 선구자 후가이 에쿤(1568∼1654)의 ‘달마도’, 안견 화풍을 모사한 것으로 알려진 가노 단유(1602∼1674)의 ‘소상팔경도’, 조희룡과 구별되는 나카바야시 지케이(1816∼1867)의 ‘매화서옥도’도 볼 수 있다. 선승혜 학예사는 “그동안 일본실 테마전이 에도시대의 풍속화인 우키요에 등 우리가 잘 모르는 일본 미술의 모습을 살폈다면 이번에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것을 모았다.”면서 “앞으로 일본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실을 꾸며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선 학예사는 13일 오후 4시부터 현장에서 특별 전시 설명회도 갖는다. 지난달 27일 개막한 전시회는 오는 11월2일까지 계속된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우선 대극장·미술관부터 품위있게”

    “우선 대극장·미술관부터 품위있게”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내부는 1960년대 수준의 감각입니다. 대극장 로비가 중국집같은 느낌이 든다는 지적도 있었지요. 우선 대극장과 미술관을 품위있게 바꾸겠습니다.” 이청승(63)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9일 취임 이후 첫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홍익대 미대 출신의 기업가로 국제디자인대학원대학을 설립한 주역답게 이 사장은 일단 회관 곳곳의 인테리어가 눈에 거슬리는 듯했다. 이 사장은 “대극장 로비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끼어있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도 유리벽으로 보호시설은 해야겠지만 아예 건물 앞으로 내놓는다면 시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나아가 “세종로광장 조성으로 쓸모가 없어지는 회관 앞 지하차도는 도심에서 디자인을 만날 수 있는 디자인 상설 전시관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사장이 지난달 20일 취임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임 김주성 사장을 찾아가 만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고 새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낭비이자 시민 혈세의 낭비”라면서 “당분간 전임자가 끝내지 못한 일을 정리하고, 미처 챙기지 못한 일을 보완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수준높은 공연을 1000원에 맛볼 수 있는 ‘천원의 행복’같은 프로그램을 강화하여 시민들이 더 많은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정원의 65%에 불과한 산하 예술단체의 단원을 보강하여 역량을 배가시켜나가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장이 취임한 이후 산하 예술단은 23명의 단원을 새로 채용했다고 한다. 이 사장은 기존의 ‘세종 예술 아카데미’를 ‘서울 문화 아카데미’로 확대 발전시켜서 세종문화회관을 발전적인 문화예술 담론의 생산 및 발신지로 키워가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는 “한반도 선진화를 위한 오피니언리더 그룹의 최고위 과정으로 차기 지도자그룹 양성도 겸하고, 그분들과 서울의 발전모델을 디자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마당을 나온 암탉’ 서울 나들이

    ‘마당을 나온 암탉’ 서울 나들이

    볼 만한 공연물은 서울에서 만들어져 지역에 공급되는 것이라는 우울한 통념이 조금씩 깨져나가고 있다. 문화는 중앙에서 주변으로 퍼져나간다는 인식의 흐름을 역류시키고 있는 주인공은 전북 남원의 국립민속국악원이다. 민속국악원은 가족음악극 ‘마당을 나온 암탉’을 들고 12∼13일 서울의 국립국악원 예악당으로 당당히 ‘입성’한다. 지난달 30∼31일 남원의 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열린 초연 무대에서는 650개 객석이 이틀 연속 매진되는 등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황선미 원작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주인이 주는 대로 모이를 먹고 ‘달걀’을 낳다가 ‘닭고기’로 일생을 마쳐야 하는 암탉 ‘잎새’가 알을 품어 아이들(병아리)의 탄생을 보고 싶다는 꿈을 안고 양계장을 떠나, 결국 소망을 이룬다는 감동적인 스토리로 이루어진 장편 동화이다. 사계절출판사에서 펴내 올해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되는 등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을 극단 민들레 대표 송인현이 대본, 김만석이 작곡, 지기학이 연출을 맡아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국악 음악극으로 탈바꿈시켰다. 가족 음악극이라고 이름이 붙여지기는 했지만, 국악작곡가 김만석이 오음계에 판소리 선법으로 만든 만큼 사실상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창작 창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앞서 민속국악원은 2006년에도 전래동화 혹부리영감 이야기를 재구성한 어린이 창극 ‘깨비깨비 도깨비’로 이미 한 차례 전국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지역문화의 힘을 보여주었다. ‘깨비깨비 도깨비’는 지금까지 국립국악원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전국의 지역 박물관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연장에서 초청을 받아 모두 33차례 공연했다. 지난해 참여한 서울아트마켓에서는 부산과 경북 지역 공연장에서 초청의사를 밝히는 등 국내외 관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공연에는 예술감독 박양덕과 악장 심상남을 비롯하여 기악부와 창극부 단원 등 민속국악원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다. 잎새에 정승희, 초록이에 서진희, 어린 시절의 초록이에 한예원, 나그네에 김대일이 나선다. 남원 공연에서는 방수미가 임신을 하고도 잎새 역으로 열연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서울 공연에 끝나면 9월에는 전남 진도의 국립남도국악원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민속국악원의 김일규 공연기획 담당은 “민속국악원은 소리의 고장 남원에 세워진 판소리와 창극의 특성화 기관”이라면서 “앞으로도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창극을 적극 개발하고 브랜드화하여 지역 사회 공연에 그치지 않고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7시30분.70분 공연. 전석 5000원. 부모 동반 3세 이상.(02)580-3333.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안익태 첫 오케스트라 작품 ‘파스토랄레’ 악보 사본 발견

    안익태 첫 오케스트라 작품 ‘파스토랄레’ 악보 사본 발견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1965)의 첫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추정되는 악보 사본이 발견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의 허영한(51) 교수는 “안익태가 유학했던 미국 필라델피아 시립도서관에서 지난 3월 그의 1936년 작품인 ‘파스토랄레’(Pastorale·전원곡) 악보 사본을 발견했다.”고 5일 밝혔다. 허 교수는 “지금까지 안익태의 최초 오케스트라 작품은 ‘한국환상곡’으로, 작곡 연도는 불확실하지만 연주 기록상으로는 1938년 2월 더블린에서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 시립도서관에서 안익태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이보다 1년 6개월가량 앞선 1936년 9월 부다페스트에서 안익태의 오케스트라 작품인 ‘파스토랄레’가 초연됐다는 기록과 악보 사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또 당시 국내 언론에 부다페스트 공연의 연주곡명이 ‘방아타령’으로 소개된 이유에 대해 허 교수는 “‘파스토랄레’의 주제 선율이 민요인 방아타령과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미국이 아름답다지만 그 뒷면엔?

    미국이 아름답다지만 그 뒷면엔?

    “대학은 일종의 회사로 변모하였다.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사람에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봉급을 지급하고, 교육을 상품화하고, 학생을 소비자로 모시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위한 기금을 축소하고…. 기업적인 가치가 대학을 잠식할수록 학급 규모가 커졌고, 더 많은 시간강사들이 고용되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대학 존스타운캠퍼스의 경제학 교수였던 마이클 예이츠는 이렇듯 우리 대학이 가고 있는 상황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에 질려 2001년 1월 55세의 ‘젊은’ 나이에 명예퇴직을 신청한다. 마이클과 부인 카렌 코레노스키는 이해 4월 옷가지와 노트북 컴퓨터, 낡은 차를 제외한 나머지 물건을 아이들과 친구들, 비영리 자선단체에 보내고 떠난다.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원제 Cheap motels and hot plates, 마이클 예이츠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 펴냄)는 2005년 여름까지 4년 넘게 두 사람이 미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닌 기록이다. 제목처럼 이들은 주로 모텔에서 묵으며 휴대용 전기 취사도구로 밥을 지어 먹었는데, 여행지에서 발견한 것은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노동의 괴로움, 그리고 환경파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4년 넘게 방방곡곡 떠돌아다닌 기록 32년 동안 노동문제를 연구하고 강의한 예이츠가 여행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경제학자로 노동을 분석하는 것과 실제로 노동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예이츠와 카렌은 얼마간의 낭만을 그리며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찾아가 공원 호텔의 프런트와 식당의 호스트로 취직했다. 하지만 국립공원은 지독한 작업 조건과 불쾌한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위탁운영사의 거대한 작업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표를 던진 예이츠는 ‘돈을 가진 남성과 돈을 가진 소수의 여성이 도시를 통제하는 뉴욕의 맨해튼에서 발간되는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의 협동 편집자로 간다. 뉴욕은 가난한 예술가가 모일 수 있도록 주택의 임대료를 통제하는데, 연간소득이 25만달러(약 2억 5000만원)가 넘어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조차 방 8개짜리 호화 아파트에 시세의 5분의 1로 입주하고자 뇌물을 쓰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의 불평등·환경파괴에 대한 두려움 뉴욕을 떠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데,‘부자들의 놀이터’인 플로리다의 마이애미비치에서는 곳곳에 경호원이 배치되어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한 파티장에 미식가들이 술과 음식을 즐기는 동안 곁에서는 여성 노숙자가 바닷물에 들어가 비누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고급차를 탄 여성이 가난한 이웃집 아이를 치고는 창밖으로 50달러짜리 지폐만 던지고 그대로 가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게다가 항구의 유람선은 라이베리아 같은 나라에 선적을 등록하기 때문에 미국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도 문제다. 궂은 일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 출신의 다양한 유색인종으로 비인간적인 착취에 시달린다. 좌파 경제학자인 예이츠가 가장 분개한 도시는 뉴올리언스이다. 재즈의 고향으로 신화로 가득한 도시라지만,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몰아닥쳤을 때는 피난 계획조차 마련하지 않았던 무방비 도시였다는 것이다. 주민의 3분의 2가 흑인으로, 네 사람 중 한 사람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던 이 도시에 허리케인이 몰아쳐 가난한 흑인 수십만명이 미국 전역으로 흩어졌을 때 ‘뉴올리언스를 미시시피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던 공화당 정권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는 “정부는 가난한 흑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만큼 그들에게 복귀 지원금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수십억 달러의 재건 비용은 연줄이 있는 도급 업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예이츠는 “이 책은 그저 평범한 여행기가 아니라 내가 이해한 미국에 대한 기록”이라면서 “미국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방문한 지역이 경제적·정치적·환경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충고가 아닐 수 없다.1만 6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수난의 우리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

    수난의 우리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

    “3∼4일 전 무기를 가진 일본인 130∼200명가량이 급습해 와서, 관리자와 주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탑을 해체하여 개성철도역으로 운반하고, 다시 부산으로 실어갔다고 한다.…우리 인민이 그 만행과 모욕에 능히 항거하여 일어설 것임은 이미 스스로 표시하였다. 만약 다나카 자작이 그 귀중한 석탑의 불법반출을 기어이 해 간다면 그가 능히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1907년 3월7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논설로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가 조선에 특사로 왔다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는 경천사터십층석탑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서울신문의 전신으로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발행인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는 이후 6월5일자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다나카의 만행을 고발하는 기사와 논설을 실었다. 또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이듬해 일본의 ‘재팬 메일’과 ‘재팬 크로니클’ 등에 관련 내용을 기고해 비난여론을 들끓게 했고, 결국 일본은 1918년 11월 이 탑을 반환했다. 이 탑은 경복궁을 거쳐 지금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문화재청이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눌와 펴냄)를 내놓았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6·25전쟁 등 긴박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민족 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긍심으로 문화재를 지킨 13건의 사례를 담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에서는 500명 남짓한 낙오 인민군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장지량 당시 제1전투비행단 중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미 고문단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끄는 지혜를 발휘하여 해인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산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을 비롯한 수천점의 문화재를 모아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을 이룩한 간송 전형필도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다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낸 재불서지학자 박병선 박사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겸재화첩을 국내에 돌아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 베네딕도수도원의 선지훈 신부와 경복궁 자선당 유구를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정원에서 발견하여 반환받도록 한 김정동 목원대 건축과 교수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문화재청은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과 김정동 목원대 교수, 북관대첩비의 반환에 힘쓴 초산 스님 등 생존인물은 물론 돌아가신 분의 후손을 5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초청하여 감사장을 전달하고 노고를 위로하기로 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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