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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646)-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9)

    儒林(646)-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9)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9) “알겠습니다, 나으리. 두향 아씨께 전해 드리겠나이다.” 여삼이가 물동이를 걸망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퇴계는 웃으며 말하였다. “…그릇에 담아서 술이나 식초에 담아두면 언제까지라도 물맛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시게나.” “알겠습니다, 나으리. 쇤네는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부디 옥체 만강하옵소서.” 서당을 나와서 한참을 걸어가던 여삼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서당 앞 우물 곁에 퇴계는 아직 서서 모퉁이를 돌아서려는 여삼에게 연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물맛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직 동이 트기 전 몸소 여삼이를 문 밖까지 배웅하며 직접 두레박을 던져 정화수를 동이에 한가득 채워 두향이에게 보낸 퇴계. 그 이상의 정표가 있을 것인가. 열정(冽井). 퇴계가 도산 남쪽 기슭에 서당을 옮겨 짓기로 결심하였던 것도 바로 이 우물물 때문이 아니었던가.‘도산잡영’에서 퇴계는 ‘여기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 산과 들을 굽어보고 있고, 골짜기 속은 깊숙하고 넓으며, 바위기슭이 선명하고 돌우물의 물이 달고 맑아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땅이다.’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돌우물의 물이 달고 맑다.(石井甘冽)’란 표현에서 퇴계가 직접 열정(冽井)이라 명명하였던 돌우물. 퇴계가 이 우물물에 심취하고 이 우물물을 만나 비로소 물의 참맛을 얻고, 또한 밭농사를 짓는 농부가 사용하던 우물 역시 자신을 알아주는 진인(眞人)을 얻었다는 상호교감의 심정은 퇴계가 지은 열정(冽井)이라는 시 속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인 것이다. “서당의 남쪽 돌 우물물은 달고 맑네. 천년 오랜 세월을 산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었으니, 이제부터는 언제까지나 덮지 말게나.(書堂之南 石井甘冽 千古烟沈 從今勿幕) 돌 사이에 우물물이 너무 맑고 차가워서 저 홀로 있어도 어찌 내 마음 슬프겠는가.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 여기 터 잡고 엎드려 사니, 한 바가지의 물로 샘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네.(石間井冽寒 自在寧心惻 幽人爲卜居 一瓢眞相得)” 비교적 인생의 말년에 지은 퇴계의 이 시는 단순히 우물물을 예찬한 절구(絶句)는 아니다. 이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퇴계가 이 무렵 얼마나 역학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던가를 미루어 짐작케한다. 공자가 말년에 역을 좋아하여 주역을 읽는 사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고 논어에서 ‘나에게 몇 년을 보태주어 오십세에 이를 때까지 주역을 공부할 수 있었다면 큰 과오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던 것처럼 퇴계 역시 항상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평생의 지병을 얻은 것도 이십세 때 이르러 주역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기에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 儒林(64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8)

    儒林(64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8)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8) 하룻밤을 머물고 여삼은 동트기 전 신 새벽에 행장을 차리고 서당을 나섰다. 떠나기 전 나으리께 문안인사를 올려야 한다고 완락재 앞에서 여삼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으리, 기침하셨습니까.” 아직 새벽이었는데도 방안엔 불이 켜져 있었다. 여삼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퇴계의 일상생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나으리가 잠자리에서 깨어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구신가.” “여삼입니다요.” “무슨 일인가.” “날이 밝기 전에 먼 길을 떠나야 하옵기에 문안인사를 여쭙니다.” “잠깐 기다리게나.” ‘퇴계언행록’에 의하면 퇴계는 ‘항상 날이 밝기 전에 반드시 일어나 갓을 쓰고 띠를 띠어서 서재에 나가면 얼굴빛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어디에 몸을 기대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한 퇴계의 율신(律身)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곧이어 서재의 문이 열리는데 과연 퇴계는 갓을 쓰고 띠를 두른 정제한 모습이었다. “아침은 드셨는가.” “아닙니다요, 나으리. 가야할 길이 멀어 서둘러 떠나려 하나이다.” “그럼 잠깐 부엌에 가서 물동이를 들고 따라 오시게나.” 여삼이가 부엌에서 작은 물동이를 들고 서당 앞 뜨락으로 나서자 퇴계는 이미 우물 옆에 서서 여삼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 옆 후박나무 옆에서는 시끄러운 소리로 까마귀가 우짖고 있었다. 제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어둑새벽이었다. 여삼이가 물동이를 들고 오자 퇴계는 두레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우물 속에 집어던졌다. “아이구, 나으리.” 여삼이가 당황해서 퇴계의 손에서 두레박을 빼앗으려 다가서며 말하였다. “쇤네가 물을 긷겠나이다.” “아니다. 내가 직접 물을 긷겠다.” 퇴계는 천천히 두레박에 물이 가득 담겨지기를 기다려 이를 끌어 올리며 대답하였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길어 올린 물을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는가.” “정화수라고 하지 않습니까요, 나으리.” “그렇다. 이른 새벽에 처음 길은 우물물을 정화수라고 부른다. 물의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고 독이 없어 물의 으뜸이라고 부르지.” 퇴계는 손수 길어 올린 우물물을 동이에 부었다. 한번 길어 올린 우물물로 동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므로 퇴계는 다시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 올렸다. 반쯤 찬 동이에 물이 흘러 넘치도록 가득 따라 주고 나서 퇴계는 여삼을 쳐다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물을 두향 아씨께 전해 드리게나.” 퇴계는 후박나무의 잎을 따서 직접 아가리에 닫고 물이 흘러 넘치지 않도록 새끼로 단단히 여미며 말하였다.
  • 儒林(64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7)

    儒林(64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7)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7) 어떤 여인의 향기. 그것은 20년 만에 종신수절하면서 홀로 매분을 키우고 길러 보내 주었던 두향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임이 돌아간 뒤에도 천향을 피우리라.’는 맹세는 매화꽃의 맹세가 아니라 실은 두향의 맹세가 아니었을까. 다시 긴 침묵이 왔다. 어느덧 핏빛 노을도 지고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땅거미가 스물스물 기어들고 있었다. “나머지 물건도 전해 드렸습니까.” 다시 방안에서 두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해 드렸나이다. 나으리께서는 쇤네에게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말씀하셔서 별채의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더니, 나으리께서 아씨마님께 전해 드리라 해서 걸망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왔나이다. 하룻밤을 유하지 않고 그냥 왔더라면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만 나으리께서 붙잡으시는 바람에 이제사 돌아왔나이다, 아씨마님. 나으리께 받은 물건은 어떻게 할까요.” “툇마루 위에 놓아 주시지요.” 여삼은 걸망에서 퇴계로부터 받은 물건을 꺼내어 툇마루 위에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나으리께서 막 길을 떠나려는 쇤네를 직접 서당 앞뜨락까지 마중해 주옵시고 그곳에서 아씨마님께 드리라고 특별한 물건을 따로 챙겨 주셨사옵기에 함께 가져 왔나이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물입니다.” 여삼은 걸망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동이라고 부르는 양옆에 손잡이가 있으며 아가리가 넓은 질그릇이었다. 동이 속에는 물이 한가득 들어 있는 듯 여삼은 조심스럽게 항아리를 꺼내어 툇마루 위에 함께 놓았다. “서당 앞에는 나으리께서 특히 아끼시는 우물이 하나 있사온데, 아무도 바깥 나들이 하지 않은 신새벽에 나으리께서 친히 쇤네를 배웅해 주시 오며 길을 떠나려는 쇤네를 잠깐 막아 세우신 후 두레박으로 직접 물을 길어 올려 동이 한가득 물을 채워 이것을 아씨마님께 전해 드리라 하셨나이다.” 정화수(井華水).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길어 낸 우물물. 온갖 정성을 들이거나 약을 달이는 데 쓰는 신성한 물. 그 정화수를 나으리께서 직접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 여삼의 말대로 동이 한가득 물을 채워 나에게 보내 오신 것이다. 두향은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숨조차 쉴 수 없는 질식감을 느꼈다. 숨죽인 두향의 두 눈에서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나으리께서 내게 물을 보내 오셨다. 두향은 숨죽여 울면서 중얼거렸다. 나으리께서 내게 정화수를 보내 오셨다. 나으리께서 내게 생명수(生命水)를 보내 오신 것이다.
  • 儒林(64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4)

    儒林(64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4)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4) 설혹 내가 갈대를 베어내 그 날카로운 잎으로 얼굴을 긁어내려 망신창이를 만들고 그 상처 위에 곤죽같이 된 흑감탕을 발라 일부러 성이 나게 하여 곯고 부어오른 추악한 귀신의 얼굴이 된다 하더라도 나으리께서는 이 두향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시고 나를 내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강물을 거슬러 오는 듯한 뱃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평소에도 강선대가 마주 보이는 강 건너편에는 이조대란 바위가 있어 바위를 굽돌아가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가 아니라 강을 거슬러 오는 나룻배의 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두향은 전모를 쓰고 집 밖으로 나가 보았다. 과연 호수 위로 나룻배 한 척이 노를 저으며 두향이가 있는 강선대 쪽으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춘삼월이라 쌀쌀하였지만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들은 한꺼번에 해빙되어 물살들은 와랑와랑 성미 급한 물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었고, 마침 석양 무렵이었으므로 강물 위는 그대로 핏빛 천지였다. 나룻배 위에 탄 사람이 누구인가, 두향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닷새 전에 매분을 가지고 안동으로 떠났던 아전이었던 것이다. 순간 두향은 선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방금 전 낮잠 속에서도 큰 별이 떨어지는 흉몽을 꾸었으므로 행여 공들여 키운 분매를 나으리께 전하지도 못하고 대신 나으리께서 돌아가셨다는 흉보를 전해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노심초사하여 두향은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버린 듯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나룻배는 강선대 바위에 닿았다. “아씨마님.” 강 한복판에서부터 나와 기다리는 두향이를 보고 있었던 듯 배가 바위에 닿자 여삼이가 뛰어내리며 말하였다. “방금 안동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요, 아씨마님.” 여삼이가 다가오자 두향은 전모를 눌러쓴 채 얼굴을 가리고 먼저 초막집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삼이가 한때 나으리를 모시던 아전이라 하더라도 두향에게 있어서는 엄연한 외간 남자. 두향은 먼저 방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창호지를 사이에 두고 내외하며 말하였다. “나으리는 만나 뵈셨습니까.” “물론입니다요, 아씨마님. 만나 뵈었을 뿐 아니라 하룻밤 서당에서 황공스럽게도 쇤네를 유하게 해주시었기 때문에 지척에서 모실 수도 있었나이다.” 다시 긴 침묵이 왔다. 여삼은 툇마루에 앉은 채 답답한 마음으로 하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책꽂이]

    ●들리지 않던 총성 종이폭탄!(이윤규 지음, 지식더미 펴냄) 히틀러는 1939년 9월1일 새벽 폴란드를 기습공격하기 전 수년 동안 유럽정복계획을 위장하기 위해 각종 평화공세를 폈다. 북한도 1950년 6월25일 기습공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평화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조만식 선생과 간첩 김삼룡·이주하의 교환을 제의하는 등 심리전을 구사했다. 현역 육군 대령인 저자는 6·25전쟁과 관련된 심리전의 유형을 사례 중심으로 살핀다.‘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듯, 평화의 시기에도 들리지 않는 총성은 계속되고 있다.2만 5000원.●한국인의 정치사상(김한식 지음, 백산서당 펴냄) 상고시대 홍익인간 이념부터 현대 민주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조명. 저자(국방대 교수)는 한국정치사상 연구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상고사에 있다고 주장한다.‘규원사화’‘한단고기’ 등 상고사 문헌에 따르면 상고시대 선인들의 활동무대는 한반도와 만주 남부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 하북성까지 포함된다. 회대지방과 요동, 산동지역 전부를 망라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단고기’에 문제점이 많다면 적어도 ‘규원사화’ 같은 상고사 문헌은 수용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한국정치사상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3만원.●아리랑 시원설 연구(김연갑 지음, 명상 펴냄) 낙랑 남쪽 자비령의 이름인 ‘아리’에서 비롯됐다(이병도),‘아리’는 ‘밝(光)’의 고어로 ‘아리랑 고개’는 ‘광명의 고개’다(양주동), 고향을 뜻하는 여진어 ‘아린’에서 유래했다(이규태)…. 아리랑의 시원에 관해서는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저자(아리랑세계화위원회 사무총장)는 아리랑은 목은 이색의 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정선 7현과 인연이 깊은 이색의 시에는 ‘(정선)아라리’의 뿌리라 할 만한 수지(誰知) 즉,(이 마음을) 누가 알리오라는 글귀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2만 5000원.●귀신론(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계로(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자 공자가 답했다.“아직 사람을 섬기는 일도 잘하지 못하거늘,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일본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성인 저자는 논어 ‘선진’편에서 공자가 제자인 자로(계로)와 나눈 문답을 귀신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책은 고문사학파를 이끈 오규 소라이의 귀신론을 시작으로 귀신과 제사의 의미를 둘러싼 일본 유학자들의 담론투쟁을 생생히 보여준다.1만 2000원.●다 빈치의 두뇌 사용법(우젠광 지음, 류방승 옮김, 아라크네 펴냄) 1452년 피렌체공화국 빈치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며 상상력이 뛰어나고 두뇌를 잘 사용한 인물로 꼽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좌뇌와 우뇌 중 한쪽만 치우쳐 사용하는 데 반해 다 빈치는 좌뇌와 우뇌를 균형있게 사용할 줄 알았다.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의 업적을 정리한 바사리는 다 빈치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때때로 하늘은 인간이 아닌 신을 우리에게 내려 보낸다. 우리 모두는 그의 생각과 뛰어난 지식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뇌력(腦力)의 비밀이 담겼다.1만 5000원.●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김규원 지음, 시공아트 펴냄) 평화와 사랑이 충만한 황금색. 그것은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축제를 위한 색이다. 이 축제는 한 해의 말미를 장식하는 중유럽의 중요한 행사다. 크리스마스 정령 같은 황금빛 소품들이 진열된 장터에서 글뤼바인을 마시며 독일의 음울한 겨울 날씨를 음미해보자. 원초적 본능이 꿈틀대는 바르셀로나 메르세 축제의 빨간색은 희망의 상징. 이탈리아의 전통 경마대회인 팔리오 축제에는 17가지 색 무지개가 수를 놓는다. 색으로 보는 유럽축제 이야기.1만 5000원.
  • 儒林(62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2)

    儒林(62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2)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2) “놓고 가거라.” 퇴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언제 단양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이제 나으리께 두향 아씨로부터 받은 모든 물건을 전해 드렸으니, 당장이라도 밤을 도와 돌아가려 하나이다.” “벌써 날이 저물었다.” 퇴계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하였다. 이미 뉘엿뉘엿 기울던 햇살은 저물어 곧 땅거미가 스며드는 저녁녘이었다.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떠나시게나.” 마침 완락재 옆에는 작은 쪽방이 하나 있었다. 서당을 지을 때 대목수 역할을 맡아하던 정일 스님이 머무르던 당직실이기도 하였다. 그곳에는 작은 부엌 아궁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는 취사용이 아니라 난방용 공간이었다. 몸이 쇠약하여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는 퇴계를 위해 장작 같은 것을 쌓아두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곳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자연 완락재의 방바닥에 온기가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된 작은 쪽실이었다. 유생을 불러 노인을 그곳에서 하룻밤 유하도록 하게 한 후 퇴계는 묵묵히 완락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서탁 위에는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두향의 편지가 있었으나 퇴계는 피봉을 뜯지 않고 여전히 묵묵히 매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퇴계는 평생 동안 매화를 사랑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매화사랑은 북송시대의 학자 임포(林逋)를 마음깊이 사숙하고 있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었다. 임포는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20여 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오직 학을 사육하고 매화를 완상하면서 살았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처럼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렸다. 후세사람들은 ‘매처학자’란 말로 청빈한 선비생활을 비유하였는데, 이 무렵 퇴계야말로 아내도 없이 오직 매화를 사랑하는 매처학자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평소에 임포와 일치된 삶을 본받고자 했던 퇴계였으므로 평생 동안 75제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퇴계는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해 부르면서 매화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퇴계는 살아생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매화를 노래한 시집까지 편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두향이가 보낸 매화야말로 퇴계가 지금까지 보았던 매화 중에 으뜸이었다. 매화꽃을 꺾고 책상 위에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뜨락의 매화를 바라보고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문답시까지 읊었던 퇴계. 때로 매화를 형이라 부르면서 찾아온 문인들과 술잔을 나누기도하고, 매화가 겨울추위에 손상되었음을 슬퍼하는 애상(哀想)의 시를 읊기도 했으나 두향이가 보내온 매화야말로 임포가 아내로 삼았던 매처(梅妻) 그 자체였던 것이다.
  • [19일 TV 하이라이트]

    ●사이언스+(YTN 오후 1시35분) 과학은행, 첨단 연구에 필수적인 실험소재를 국내 연구자들에게 지원해주는 특수 소재은행을 말한다.95년 과학기술부가 시작한 특수연구소재은행 지원사업은 ‘과학연구의 핵심 보급창’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대 이항 교수의 야생동물 유전자은행과 인천대 이태수 교수의 야생버섯균주은행을 찾아가 본다.   ●살림의 여왕(EBS 오전 11시) 집에서 해먹은 요리를 취미 삼아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것을 계기로 알려진 문성실 주부. 그녀만의 요리비법은 누구나 따라하기 쉽고, 간편하면서도 가족들을 위한 웰빙 요리라는 점. 방문자 수는 배로 늘고, 게시물 스크랩도 무섭게 늘어갔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그녀의 행복한 요리 세상으로 들어가 본다.   ●솔로몬의 선택(SBS 오후 8시40분)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아내. 아이 때문에 이혼을 선택할 수 없었던 아내는 남편과 이혼을 전제로 각서에 공증까지 받고 별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후, 남편은 아내 소유의 집에 허락 없이 드나들며 아내의 생활을 방해했다. 참을 수 없는 아내는 남편에게 각서대로 별거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데….   ●넌 어느 별에서 왔니(MBC 오전 11시) 승희는 내일부터 자기와 계속 일하자고 하고, 복실은 좋아서 정말이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복실은 혜수 동생이어서 직접 데리러 왔다는 승희의 말에 표정이 굳어버린다. 한편 진희는 복실에게 생일을 알려주고, 지금까지 못 챙긴 것을 한꺼번에 보상하겠다며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인간극장(KBS2 오후 8시45분) 철쭉이 한가득 길을 메우고 있는 지리산 바래봉. 해발 600m 고지대에 훈장님인 이학규씨와 안주인 김미옥씨 부부가 서당을 지어 살고 있다. 밭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아버지를 모시고 아이 셋, 수련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들 부부. 식구가 많다보니 안주인이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열아홉 순정(KBS1 오후 8시25분) 우경을 생각하던 윤정은 우경의 휴대전화를 집어온 뒤 돌려받고 싶으면 운전연수를 해달라고 떼를 쓴다. 혜숙은 홍영감에게 일부러 옥금이 만든 수수부꾸미가 먹고 싶다고 말하고, 옥금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만들어준다. 한편, 국화의 촌스러운 옷차림이 못마땅한 윤후는 국화에게 새 옷을 사준다.
  • 儒林(626)-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9)

    儒林(626)-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9)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9) 노인은 유생을 따라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서당 안 동쪽구석에 조그마한 연못 하나가 있었다. 아직 철이 아니어서 연꽃이 피어 있지 않았지만 퇴계가 직접 땅을 파서 만든 연못이었다. 정우당(淨友塘). 퇴계가 스스로 지은 시속에 ‘조용히 떠나는 모습 가만히 생각하니 진실로 어려운 친구로다.’고 표현하였던 것처럼 ‘청정한 벗’인 연꽃을 상징하는 정우당. 그 연못가에 퇴계가 홀로 서 있었다. 퇴계를 보자 노인은 그 즉시 무릎을 꿇고 문안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아이고 나으리,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뉘시온지” 퇴계는 미천한 사람을 만나도 결코 ‘너’라고 부르는 식의 하대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젊은 제자들을 만나도 공대를 하곤 하였다. 그러자 노인이 황송하여 몸을 굽히며 말하였다. “나으리, 쇤네를 모르시겠나이까.” 퇴계는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알 것 같이 낯이 익긴 하였으나 가물가물하여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소이다만” “나으리” 노인은 읍을 하며 대답하였다. “쇤네는 나으리께오서 일찍이 단양에 군수를 하시 올 때 이방으로 있던 자이나이다.” 순간 퇴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인의 말을 들은 순간 희미한 옛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20여 년 전 퇴계가 9개월 동안 단양의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 퇴계를 도와 인사와 비서노릇을 하던 이방아전이었던 것이다. “그대의 이름이 여삼이가 아니었던가.” “그렇습니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쇤네의 이름까지 아직 기억해 주시다니요.” “그뿐인가. 그대는 나에게 삼베까지 주려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말은 사실이었다. 퇴계가 20여 년 전 명종4년 10월, 단양군수를 사직하고 이웃한 풍기로 전근가기 위해서 죽령고개를 넘고 있을 때 퇴계가 탄 가마를 관졸들이 헐레벌떡 쫓아왔었다. 그 중에 앞장을 선 사람이 이방 여삼이었던 것이다. 그때 여삼은 손에 다발을 들고 뛰어오지 않았던가.‘무슨 일이냐.’고 퇴계가 묻자 이방이 나서서 ‘나으리, 이것은 삼베를 짜는 삼이옵니다. 이것은 아전에서 거둔 것인데, 퇴임하는 사또께서 노자로 쓰기로 전례가 되어 있어 가져온 것이기에 바칩니다.’하고 삼베다발을 내어 밀지 않았던가. 아전이란 관청에 딸린 밭으로 동원근처에서 심은 삼이었던 것이다. 아전은 국가의 토지인 만큼 대부분 관아에서 사용하는 비용이나 특히 사또의 개인사비로 충당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례에 따라 이방을 앞세운 군졸들이 삼베를 거두어 퇴임하는 퇴계에게 가져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 儒林(62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8)

    儒林(62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8)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8) 비록 간략하게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있고, 서탁 위에는 분매 한그루가 놓여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서탁 위에 놓인 분매 한그루는 바로 두향이가 퇴계를 위해 보내온 정표이니, 퇴계가 ‘비록 옛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결코 얕지 않도다.’라고 도산을 영탄(詠嘆)하는 것은 두향이가 보내온 분매가 뿜어대는 천향(天香)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물끄러미 분매를 완상하던 퇴계가 한 곁에 물러서 있던 유생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누가 이 매화를 가져왔더란 말이냐.” 그러자 유생이 대답하였다. “웬 낯선 노인 하나가 선생님께 드릴 물건이 있다면서 걸망에서 꺼냈나이다.” “그 노인은 어디 있느냐. 이 매분만을 전해주고 떠나버렸느냐.” “아니옵니다.” 유생은 대답하였다. “아마도 서당 앞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나이다. 선생님께오서 매화꽃을 받아보신 후 자신을 부르시면 들어와서 문안인사를 여쭐 것이고, 부르시지 안 사오면 그대로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 것이라 하였나이다.” “그러면 어서 가서 그 노인을 들어오도록 하게나.” 퇴계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생은 알았다는 듯 물러서며 대답하였다. “알겠나이다. 가서 노인을 불러 대령토록 하겠나이다.” 유생은 서둘러 완락재를 벗어났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서당에서 함께 기거하고 있는 제자들이나 문인을 빼어놓으면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퇴계언행록’에 보면 제자 김성일은 스승 퇴계가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 앞에서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퇴계가 문인이나 제자들을 제외하고 찾아오는 손님들 앞에서 침묵을 지켰던 것은 오로지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침묵은 마치 화두에 전념하기 위한 불교적 묵언(默言)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스승께서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낯선 노인을 손님 대접하여 직접 자신의 완락재로 부르고 있음이 아닌가. 과연 노인은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이제라도 먼 길을 떠나려는 채비를 갖추듯 신고 있던 헌 짚신을 버리고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있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유생이 나타나자 노인은 일어서면서 물어 말하였다. “선생님께오서 잠시 들어오시랍니다.” 순간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식의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 儒林(62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儒林(62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그 무렵 퇴계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중병을 퇴계 자신은 ‘극병(劇病)’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퇴계는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예감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퇴계의 심정은 퇴계 자신이 쓴 ‘도산기(陶山記)’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신유년(辛酉年)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당사 두 채가 다 이루어지니, 비로소 거처할 만하게 되었다. 당은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라고 부르고, 동쪽 한 칸은 암루헌이라고 부르며, 합해서 도산서당이라고 현판을 내붙였다.…(중략)… 나는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으므로 비록 산중에 살아도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한다. 항상 속이 울적하고 숨을 조절하기 힘들다.…” 자신의 표현처럼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었던 퇴계’. 그러한 퇴계에게 20여년 만에 두향이가 인편으로 붙여온 빙기옥골의 백매화분은 퇴계의 지친 심신을 쇠락하게 만드는 청량제(淸凉劑)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심정은 ‘도산기’에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때로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상쾌해지는 때가 있다. 이럴 때에는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고 하면 감개가 저절로 생긴다. 그러면 곧 책을 던지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서 난간에서 연못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사(社)를 찾기도 하며, 혹은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하며,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혹은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기도 한다. 마음대로 걸어 다니며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저절로 일어나 한껏 즐긴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 있고, 서탁 위에는 분매 한 그루가 놓여 있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한다. 이따금 얻는 것이 있으면 다시 반기어 흐뭇함에 음식도 잊어 버린다. 혹 틀린 것이 있으면 벗을 찾아 물어보고 그래도 알지 못하면 분발하여 속으로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끄집어내어 허심탄회하게 생각하며 저절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다. 산새가 즐겨 울고, 초목이 우거지고, 바람, 서리 차가워지고, 눈과 다리 싸늘하게 빛을 내니 사시(四時)의 경치 서로 다르고 흥취 또한 끝이 없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바람이 너무 불거나 비가 너무 오는 경우가 아니면 어느 때 어느 날 나가지 아니함이 없다. 나가면 이러하고 돌아오면 또 이러하다. 이것이 한가롭게 병을 조섭(調攝)하는 하염없는 일이다. 비록 옛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결코 얕지 않도다.”
  •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유생은 황급히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방금 선생으로부터 열정의 물을 떠오라는 분부를 받고 물동이를 들고 서당 앞뜰로 나온 길이었다. 도산서당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중간의 한 칸인 완락재(玩樂齋)에 퇴계는 거처하고 있었다. 완락재 앞에는 여느 집의 대청마루와 같은 기능을 가진 암서헌(巖栖軒)이란 넓은 마루방이 있었다. ‘완락재’란 이름은 퇴계가 주자의 ‘명당실기’에 나오는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하다.’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고, 몸소 제자를 가리키던 암서헌이란 마루방의 당호도 주자의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갖지 못하였더니 바위에 깃들어 살자 조그만 효험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라는 글에서 인용하여 온 것이었다. 퇴계는 언제나 완락재에 기거하며 학문을 연구하였고 암서헌에서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지금은 휴식시간, 서당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숙소에 유하면서 바깥나들이를 삼가고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시간이었던 것이다. 완락재. 주자의 말처럼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곳’, 주자철학의 성실한 계승자이자 주자철학의 가장 소중한 해석가였던 퇴계.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의 숲이 맹자와 주자를 거쳐 마침내 해동의 이퇴계에 의해서 성리학적 이치가 완성된 바로 그곳 완락재. 이 완락재에 대해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공경을 주로 함은 의리를 길러 모으는 공력이 있네. 잃지도 억지도 기르지도 않는 이치를 차츰 통달하여 나가서 주렴계의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르게 되니, 천년 이어내린 즐거움이 이와 같았음을 알겠노라.” 퇴계의 시속에 나오는 ‘천년 이어 내린 즐거움’, 즉 천년 이어 내려온 유학의 정신을 바로 완락재에서 되새겨 퇴계는 바로 이곳에서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유생은 서당 서북편 부엌에 물동이를 놓아두고 방금 떠온 우물물을 종지에 담아 퇴계가 머무는 완락재로 다가갔다. “물을 떠왔습니다.” 퇴계는 서탁 위에 책을 놓고 안석을 벽에 세우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놓고 가거라.” 한번 독서에 열중하면 스승은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선생님” 조금 전 노인으로부터 분매를 받아왔으므로 유생은 선뜻 물러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무슨 일인가.” “웬 낯선 노인 하나가 선생님께 드릴 물건이 있다하여 가져왔나이다.” “그게 무엇이냐.” “바로 이것이나이다.” 유생은 분매를 조심스럽게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 儒林(62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4)

    儒林(62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4)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4) “하오면” 노인은 등에 메었던 걸망을 벗어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퇴계 선생께오서 서당에 계시옵니까.” “무슨 일이오.” 유생은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두레박에 든 물을 물동이에 가득 채우면서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한눈에 보아도 서당 안을 드나들 수 있는 선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놈도 아닌 중인의 행색을 하고 있었으나 선생의 안부를 물을 만한 위치의 사람은 더더욱 아니어서 유생의 말투는 자연 시비조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있어서 그러나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벗은 걸망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우물가에 놓았다. 유생은 노인이 꺼낸 물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분매였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그 매화는 여느 매화가 아니었다. 흔히 흰눈이 내리는 엄동설한에 피는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고 하였고,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奇友),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古友)라 하였는데, 노인이 꺼내놓은 매화는 고우 중의 으뜸인 백매(白梅)였던 것이다. 유생은 매화에 문외한이었으나 퇴계 선생이 유난히 매화를 사랑하여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해 부르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유난히 매화를 사랑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스승께서는 서당 서동쪽에 절우사(節友社)의 단을 쌓고 솔, 대, 매화, 국화를 심고 이들과 함께 절의를 맹세하는 결사를 이루지 않았던가. 이때 스승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솔과 국화는 도연명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더니 매화형(梅兄)은 어이해서 참가 못했던가. 나는 이제 넷과 함께 풍상계를 맺었으니,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 풍상계(風霜契). 문자 그대로 함께 바람과 서리를 견디는 결사를 맺은 스승 이퇴계. 스승은 이들 중에서 매화를 가장 사랑하여 매화를 형으로까지 부르고 있지 아니한가. “어디서 온 누가 보내는 물건이라고 여쭙는단 말이오.” 남루하기 짝이 없는 걸망에서 나온 화려한 분매를 보자 유생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졌다. “그것은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나으리께서 이 분매를 받아보시면 자연 누가 보낸 것인가 알아보실 것이나이다. 쇤네는 이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나으리께서 매화꽃을 받아보신 후 쇤네를 부르시면 들어가서 문안인사를 여쭐 것이옵고, 부르시지 않으시오면 그대로 이 우물가에서 찬물이나 몇 잔 더 마시며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 것이나이다.” “알겠네.” 유생은 선뜻 한 손에는 물동이를 다른 한 손에는 노인으로부터 받은 분재를, 들어올리며 대답하였다.
  • 儒林(62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儒林(62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퇴계가 특히 이 돌우물을 사랑하고, 그 샘물의 맛을 ‘달고 맑다.’고 극찬하고,‘서로의 마음을 얻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맹자의 말처럼 자신의 학문이 아홉 길이나 팠으나 아직 수맥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남은 인생을 바로 이 돌우물이 위치한 도산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며 진리의 근원에 이를 때까지 여생을 거경 궁리할 것을 결심하는 단심가(丹心歌)였던 것이다. 분황(焚黃). 조선시대에 있었던 사후의식으로 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조정에서 추증된 관직의 사령장과 황색종이에 쓴 부본(副本)을 주는데, 이를 받은 사람은 추증된 선조에게 고하고 황색종이 부분을 그 자리에서 태우는 의식을 분황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이미 59세의 나이 때 이 분황의식을 치렀었다. 넷째형 해(瀣)가 사화에 휩쓸려 유배 도중에 장독으로 급사하게 되었으며, 훗날 조정으로부터 억울하게 죽어 사후에 벼슬을 받게 되었으므로 퇴계는 자신이 직접 분황의 제사를 올려 주었던 것이다. 그 때 퇴계는 가장 사랑하였던 형 온계의 무덤에서 조정에서부터 내려온 황색부본을 태우며 울면서 생각하였다. 이 종잇조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죽은 후에 ‘정민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추증으로 ‘대사헌감사’란 벼슬이 내려진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퇴계가 67세 때 명종이 승하하고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여론이 분분하였음에도 끝내 이를 물리치고 서당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이미 자신에게 내려지는 벼슬이 죽은 사람에 내려지는 분황에 불가하다는 자의식 때문이며, 여생동안 진리의 원천인 수맥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한 우물을 파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남아 있는 도산서원 앞마당에 있는 돌우물,‘열정’은 퇴계의 마음을 닦는 심경(心鏡)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돌우물 곁에 내려진 두레박을 천천히 들어올려 우물 속으로 집어 던졌다. 첨벙― 바위틈을 뚫고 지표로 솟아오른 샘물의 깊이는 아득하였다. 두레박 가득 물을 담은 노인은 끈을 잡아 당겼다. 이윽고 노인은 두레박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갈증이 해소된 듯 남은 두레박의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서당에서부터 인기척이 있었다. 갓 쓴 유생 하나가 서당 쪽으로부터 물동이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마실 물을 떠갈 요량 같았다. 우물가에서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던 노인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며 물어 말하였다. “여기가 도산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퇴계 선생님이 계시오신 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소이다.” 유생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남루한 차림의 노인을 쳐다보면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 儒林(61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

    儒林(61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 문 안을 기웃거리던 노인은 문 위에 내걸린 ‘도산서당’이란 편액글씨를 발견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제대로 찾아와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서당이라면 분명히 글 배우는 소리가 문 안에서부터 들려올 것이고, 오가는 서생들의 인기척 소리도 들려와야 하지만 서당 앞뜨락은 왠지 빈 절간처럼 적적하고 적요하였다. 그 순간 노인은 무엇을 발견한 듯 천천히 지친 걸음을 움직였다. 마당 한구석에 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앞에는 화강석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洌井” 직역을 하면 ‘맑은 우물’이란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돌우물 앞에 이름을 새긴 화강석을 세운 것도 퇴계 자신이었다. 퇴계가 10년 동안의 계당을 버리고 도산서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남쪽 기슭에 터를 점지한 것도 바로 이 돌우물 때문이 아니었던가.‘도산기’에서 퇴계가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퇴계가 얼마나 이 샘물에 심취되어 있었던가를 미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우물은 퇴계가 터를 확보하기 전에 이곳에서 밭을 부쳐 먹던 농부가 사용하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퇴계는 이 샘을 만나 물의 진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또한 이름모를 우물은 퇴계를 만나 자신을 알아주고 이름을 붙여주는 은인을 얻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다.’는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은 ‘맑은 우물(洌井)’이란 시 속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서당의 남쪽 돌우물의 물은 달고 맑네. 천년 오랜 세월은 산안개 속에 묻혀 있었으니, 이제는 언제까지나 덮어 놓지를 말게나. 돌 사이 우물물이 너무 맑고 차가워 저 혼자 있어도 어찌 측은한 생각이 들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 여기 터 잡고 엎드려 사니, 한 바가지의 물로 샘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구나.” 한갓 돌우물에 불과한 열정을 두고 ‘서로 마음을 얻었다.’고 노래한 퇴계의 마음은 일찍이 맹자가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하고자 함이 있는 사람이 비유해 말하면 마치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우물파기를 아홉 길이나 파내려 갔다 하더라도 샘솟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인 것이다.(掘井九 而不及泉 猶爲棄井也)” 맹자의 이 말은 일찍이 공자가 ‘자한(子罕)’편에서 ‘학문하는 것을 비유하건대 산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다. 돌과 삼태기가 모자라는 데서 그만두었다면 그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가리킨 내용을 부언하여 설명하였던 것이다 즉 우물을 깊이 파들어 가더라도 수맥(水脈)에 도달하기 전에 그친다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맹자의 가르침은 이 무렵 ‘위기지학’에 전념하고 있던 퇴계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1568년 선조원년 춘3월. 도산서당 정문 앞에 행색이 남루한 노인 하나가 이제 막 도착하여 문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곤 하지만 한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노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허리에 메고 있는 걸망에는 해질 때 갈아 신을 짚신이 대롱대롱 매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내쳐 걸어온 모양이었다. 정오가 지나고 어느덧 짧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도산서당은 이퇴계가 완전히 퇴거계상(退居溪上)하여 살고 있었던 은둔처였다. 단양과 풍기군수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는 고향에 ‘계상서당’을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계당시대는 1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청년 이율곡이 스승 퇴계를 만나러 와서 2박3일의 운명적인 상봉을 하였던 바로 그 곳이었다. 그러나 계당은 좁고 허술하였으므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적당치 않았으므로 퇴계는 그의 나이 57세 되던 1557년 도산 남쪽 기슭에 서당을 새로 짓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여기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 산과 물을 굽어보고 있고 골짜기 속은 깊숙하고 넓으며 바위기슭이 선명하고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퇴계 스스로가 쓴 ‘도산기’에 나와 있는 묘사 그대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땅을 발견한 퇴계는 ‘그 안에서 밭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가 있어 대금을 치르고 사서 토지를 확보한 후’ 1558년 3월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는 착공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서당을 짓는 일은 퇴계 집안의 종택으로부터 서쪽으로 4㎞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용수사라는 절의 법연스님이 도맡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사이 퇴계는 잠시 명종에게 불려 한양에서 공조판서라는 중책을 제수하고 있었는데, 퇴계는 그동안에도 법연에게 서당의 설계도를 그려 보이는 등 서당의 건립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당을 맡아 짓던 법연은 1년 만에 입적하고, 뒤를 이어 역시 용수사에 있던 정일스님이 뒤를 이어 공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유년(1561년)에 이르는 5년 동안 서당인 도산과 살림집인 농운정사 두 집이 대강 이루어져 퇴계는 마침내 평생소원이었던 자신의 서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퇴계는 온 식구들을 이끌고 정사로 이주하였으며, 그의 가문을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는 대학사(大學舍)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퇴계가 지은 ‘도산서당’이란 시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순임금은 그릇을 구우면서 즐겁고 편안했고, 도연명은 농사를 지으면서 즐거운 얼굴이었네. 성현의 마음을 내 어찌 알겠냐만 백발의 나이에 돌아와서 숨어 사는 즐거움을 맛보노라.” 스스로 노래하였던 대로 퇴계가 꿈에 그리던 도산서당으로 돌아와 숨어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은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 ‘이웃집 야마다군’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방한

    ‘이웃집 야마다군’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방한

    8일 선보이는 ‘이웃집 야마다군’은 일본 애니메이션치고는 상당히 독특하다. 일본 애니하면 으레 풍부한 질감과 화려한 색감을 기대한다. 그러나 4컷짜리 신문 연재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이웃집 야마다군’은 2차원적이다. 여기에다 여백도 풍성하다. 야마다 가족이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 차는 몇가닥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고, 창밖 풍경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웅대한 스토리 대신, 흔하디흔한 주변 이웃의 사소한 에피소드만 나열했다. 옛 만화 팬이라면 윤승운(맹꽁이서당)·신문수(로봇찌빠)·길창덕(꺼벙이)의 작품들이 생각날 법도 하다. ‘이웃집 야마다군’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71)가 한국을 찾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다카하타 감독의 방한은 3번째이다. 다카하타는 ‘이웃집 야마다군’의 조촐한 표현방식을 ‘애니메이션적’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유행하는 ‘3D애니메이션’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였다. 최신 기술 자체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3D는 입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선으로 그린 그림은 진짜는 아니지만 실물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지적했다.“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혹은 발전할 것이다 소멸할 것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연장선상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애니만의 표현법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가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현재 일본 애니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다카하타 감독은 “일본 애니가 대체적으로 화면이나 이야기를 흡인력있게 이끌어가는 방식을 택했다면,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데 더 주안점을 뒀다.”고 대조했다. 그래서 미야자키 감독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지금은 좋은 친구로 지낼 뿐,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사실 이런 그의 철학은 ‘이웃집 야마다군’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케세라∼세라∼’(Que sera,sera·될 대로 되라)를 합창하는 등장인물들이나, 인생표어가 뭐냐는 학생의 질문에 ‘적당(適當)’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이는 선생님이 그렇다.‘이웃집 야마다군’을 일본 전통 시가인 ‘하이쿠’로 봐달라는 다카하타 감독의 주문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하이쿠’는 17자짜리 시로 압축적이고 해학적인 맛이 넘치는 짧은 시다. 별개의 ‘하이쿠’를 모아 또 다른 장편 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웃집 야마다군’은 “너무 단단하면 무너진다, 적당히 살자.”는 소시민적인, 그래서 더 와닿는 애니인 셈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학원 수강료 환급불가 약관 무효”

    수강생이 학원 수업을 도중에 포기하더라도 수강료 가운데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4일 수강 신청서와 영수증 등에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는다.”는 약관을 사용해 온 14개 학원을 적발하고 이 가운데 10곳에 시정조치를 내렸다. 시정조치를 받은 학원은 부산외국어학원, 광안 민병철외국어학원, 원더랜드 동작어학원,㈜민병철교육그룹, 국가공무원학원, 육서당고시학원,㈜디지털대성, 정일학원,㈜파고다아카데미,㈜고시가이드 등이다. 장원고시학원,㈜원광캐드,㈜페르마에듀,㈜이루넷 등 4곳은 적발된 뒤 불공정 약관을 삭제하거나 고쳤다. 이들 학원은 ‘개강일 이후 환불은 불가능합니다.’,‘일단 접수된 수강료는 환불하지 않습니다.’,‘수강생의 귀책사유로는 수강료를 반환하지 않습니다.’ 등의 약관을 사용했다. 공정위는 수강생이 수업을 철회한 시점이나 환불요구의 사유에 따른 반환금액을 정하지 않고 학원이 일방적으로 수강료 환불을 제약한 약관은 불공정하다고 설명했다. 현행 학원법은 학원등록 말소 등 수업중단의 귀책사유가 사업자에 있을 때에는 강의를 듣지 못한 기간만큼의 금액을 돌려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수강자가 본인의 의사로 수업을 포기할 경우 학원수업 이전에는 납부한 수강료 전액을, 이후에는 반환 사유가 발생한 날이 속한 달의 수강료를 공제하고 나머지 금액는 돌려주게 돼 있다.하지만 수강료를 2개월 이상 받은 학원들은 수강생이 수업을 포기하면 무조건 한푼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공정위는 교육인적자원부에 시정조치 내용을 송부하고 학원들이 불공정 약관을 고치게 하도록 협조를 요청했다.백문일기자mip@seoul.co.kr
  • [열린세상] ‘사립 국민’ ‘국립 국민’이 따로 있나/이성낙 가천의대 총장

    얼마전 유럽의 한 일간지 기자에게서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원동력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그 질문을 받고 ‘그게 과연 무엇일까.’ 몇번 자문자답하면서 서원(書院)제도를 떠올린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때부터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이 언제고 그 자리를 떠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고장에 크고 작은 서당 또는 서원을 세웠다. 학식이 높은 그들이 집안 구성원이나 이웃을 위해 서당을 세우거나, 조금 크게는 고향 마을 사람들을 위해 향교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학식이 출중한 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마을 단위를 넘어 전국에서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들어 서원이 형성되고 서원 중심의 학파가 생겼다. 이처럼 서당·향교·서원이라는 교육 네트워크가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오늘의 우리나라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때부터 인재 교육을 사학에 많이 의존해 왔다는 얘기다. 그리고 지금도 인재 교육을 사학에 의존하기는 별다를 바 없다. 우문(愚問)이겠으나 만일 조선시대에 서당과 서원이 없었다면, 그리고 지난 세기 동안 사립학교, 특히 사립대학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국가가 지금처럼 사립대학을 홀대하여도 되느냐라는 것이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국가가 연구비 관련 정책자금을 배정할 때면 으레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을 차별한다. 그 액수를 비교해 보면, 국립대학이 사립대학보다 10∼20배나 많다. 이런 불합리한 정책이 거의 관행처럼 되어 있다. 국립대학의 운영에 필요한 인건비·관리비를 포함한 재정을 국가 예산으로 책정하여 배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가 책정한 연구비나 특정 프로젝트(예를 들면 BK21)에서 국립대 몫이 따로 있고 사립대 몫이 따로 있다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사립대학에 몸담은 교수는 물론이고 대학생 모두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아닌가 싶다. 미국에서 한때 국가 정책으로 의사 배출을 권장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국립 의과대학과 사립 의과대학을 차별하지 않았다. 배출된 의사의 머릿수에 따라 균등하게 국가 보조금을 지급했다. 독일에서는 수년전 병원 시설을 현대화하는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실적에 따라 보조금을 분배한 적이 있다. 그때도 병원의 병상 규모에 따라 환자당 지급액에 차이를 두었지, 병원이 국립인지 사립인지 또는 종교 기관에서 관리하는지가 차등 지급의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사립대학도 엄연히 사회적 공공영역(Public domain)이다. 하물며 사립대학에 적을 둔 학생 또한 국가에 세금을 내는 대한민국 국적의 아들·딸인데, 어떻게 사립대학에 다닌다는 이유로 국가가 주는 각종 수혜사업에서 차별을 받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는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립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국립대학에 다니는 학생에 비해 ‘조금 덜 공부해도 되고’,‘조금 손해를 봐도 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러다 우리나라가 사립대학에서 교육받은 ‘사립 국민’과 국립대학 출신의 ‘국립 국민’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국가가 배분하는 보조금은 재단의 성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대학 교육의 질을 확보한다는 기본적인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대학의 학적에 따라 국가에서 학생을 차별하는 것은 헌법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 [통계로 본 서울] (19) 초등학교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콧물을 닦기 위해 하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운동장에 모여 ‘앞으로 나란히’를 하며 낯선 친구들과 줄을 맞추던 초등학교 입학식. 설렘보다는 낯선 풍경이 무섭기만 했던 그때.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아직도 30대 중반 이후의 사람들에겐 초등학교 입학식이 이렇게 각인돼 있다. ●42곳 노원구 최다… 12곳 중구 최소 23일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05년 말 현재 초등학생수는 71만 1136명, 학교수는 563곳, 학급수는 2만 1689개다. 교원수는 2만 6758명으로 이 가운데 남자 교사가 4919명, 여자 교사가 2만 1839명이다. 교사 5명 가운데 4명이 여자 교사인 셈이다. 구별 학교수는 노원구가 42곳으로 가장 많고, 이어 강서·송파구 33곳, 강남구 30곳, 성북·양천구 27곳, 강동구 25곳 등의 순이다. 중구가 12곳으로 가장 적고, 종로·강북구가 14곳으로 뒤를 이었다. 학교수는 늘어나고 있지만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매년 학생수는 급격하게 줄고 있는 추세다. 학생수는 5년전(2000년 말 기준) 75만 9443명에 비해 무려 4만 8307명이 줄었다. 성비의 불균형도 심각하다. 남학생은 37만 4204명인 반면 여학생 33만 6932명이다.3만 7272명이 남학생끼리 짝을 해야 할 정도다.5년 전에 비해 여학생은 2만 1558명이 줄어든 반면 남학생은 2만 6749명이 줄었다. 교원 1인당 학생수는 26.6명으로 5년전 30.0명보다 크게 줄었고, 학급당 학생수도 32.8명으로 5년전 37.3명보다 여유가 생겼다. ●사립 40곳… 최고 경쟁률 6.6대1 추첨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는 사립초등학교는 40곳으로 올해 4495명을 뽑았다. 평균 경쟁률은 1.90대 1이며, 유명 사립초등학교의 경우 6.6대 1에 이른다. 공립은 모든 게 무료지만 사립은 분기별로 50만∼80만원의 등록금을 내야 한다. 초등학교의 유래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경당, 고려·조선시대의 서당 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들어오면서 ‘소학교’가 생겼다. 일제시대인 1941년 일왕의 칙령으로 국민학교가 생겼고,1996년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명칭이 현재의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개교 100년 넘은 곳 많아 가장 오래된 학교는 112년의 역사를 지닌 종로구 삼일로 교동초등학교.1894년 9월 왕실학교로 문을 열었다. 왕궁 근처에서 왕족과 관리의 자제들에게 신식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만든 학교다.1895년 4월 관립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1906년 9월 관립교동소학교로 개칭됐다. 이어 종로구 가회동 재동초등학교가 1895년 7월 공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문을 열었고,1896년 5월 서대문구 미근동 미동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 밖에 역사가 100년이 넘는 초등학교로는 종로구 효제동 효제초등학교(1902년 9월)와 영등포구 문래동 영등포초등학교(1905년 4월) 등이 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서울의 문화재] (3) 양천향교

    [서울의 문화재] (3) 양천향교

    ‘서울에 웬 향교?’ 서울에 향교(鄕校)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향교는 전국적으로 234곳에 이르지만 서울에는 딱 1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강서구 가양 1동에 있는 ‘양천향교’(서울시 기념물 8호)가 유일하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주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도읍지인 서울(한양)에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서울에는 향교의 상급 관학(官學)인 성균관(成均館)이 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울에 향교가 생겼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양천향교’를 찾았다. #서울에서 유일한 양천향교를 찾아서 21일 오후 어렵게 양천향교를 찾아갔다. 향교 주변에 사는 주민들도 위치를 잘 모를 정도여서 찾아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향교 앞에 서 있는 붉은 홍살문이 먼저 반겼다. 향교 입구인 외삼문을 지나 향교에 들어서자 지난 1988년부터 향교를 관리하며 이 곳에서 ‘충효학교’를 운영하는 오남주(85) 교장으로부터 향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2기(1989년) 졸업생인 오 교장은 인근 구민과 초·중학생들에게 충효교육을 시키며 잠자는 시간을 빼고 이곳에 머문다. 그는 “양천향교는 1411년 태종 12년에 창건해 일대 유생과 제자 등을 양성하던 곳”이라면서 “양천향교는 원래 경기도 양천군 양동면에 있던 것인데 1963년 행정구역변경으로 서울에 편입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1913년 일제가 1군 1향교제를 시행하면서 양천향교가 폐지되고 모든 재산이 김포향교로 통합됐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다시 분리돼 독자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노후화된 시설을 1981년 8월 31일 전면 복원한 것이라고 전했다. 향교 안에는 봄과 가을 두차례 공자 등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명륜당, 제사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 학생들이 머물렀던 동재와 서재 등 5동의 건물이 있다. 이 곳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인과 송조 성현 4인, 우리나라 성현 18인을 배향하고 있다. #조선시대 교육을 만나다. 단체 관람은 강서구청 문화체육과(2600-6077)에 관람을 예약하면 오 교장으로부터 향교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교육제도 등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찾아갈 경우에도 교장선생님이 바쁘지 않다면 친절하고 구수하게 설명해 준다. 입장료는 받지 않으며, 봄·가을 두차례 열리는 초·중학생 예절교육은 교재비 등 실비 정도의 수강료를 받는다. 향교는 지방교육기관. 지금으로 따지면 중·고등학교나 전문대학 수준의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라는 게 오 교장의 설명이다. 동네 사학인 ‘서당’에서 천자문과 학어집, 사자소학, 동몽선습 등을 깨우친 똑똑한 지방인재를 모아 가르치던 곳이다. 나이는 대략 15세 이상이며, 향교에서 쓸 만한 인재는 성균관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오 교장은 “우리나라 교육이 너무 시험위주로 이뤄진다.”면서 “우리 전통과 뿌리가 되는 예절, 전통교육도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뿌리를 찾는 아름다운 봄산책 코스 양천향교는 조만간 봄꽃으로 단장된다. 오 교장이 향교 주변에 취미생활로 가꾼 튤립, 진달래, 개나리, 산동화, 벚꽃, 백합 등이 핀다. 주변에 궁산근린공원 산책로와 배드민턴장, 양천고성지, 임간 휴게소, 소악루 등이 있다. 강서구에서는 향교 앞마당에 마당놀이 등 전통공연이 가능한 전통문화마당을 조성, 오는 10월 개장할 계획이다. 가는 길은 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 내려 3번 출구로 나온 뒤 6644번 초록색 지선버스를 타고, 가양사거리(향교앞)에 내리면 된다. 버스에 내려 골목길을 따라 500m쯤 궁산근린공원 언덕길을 올라가면 왼편으로 붉은색 홍살문과 함께 향교가 나타난다.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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