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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착상태 중동회담에 새 전기/클린턴­아사드회담의 성과

    ◎“시리아 대화상대 인정” 큰 의미/이스라엘/「아랍보이콧」 해제로 실리추구/시리아/골란고원 확보·서방원조 손짓 「아랍형제국」의 미세 시리아가 16일 대이스라엘 관계정상화 용의를 천명하고 나섬으로써 침체국면을 걷던 중동평화회담에 다시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던 아랍의 군사강국 시리아는 중동평화회담의 마지막 장애로 인식됐던 나라다.미국은 시리아의 참여 없는 중동평화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해온 터였다.시리아는 그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간의 평화협정에 불만을 터뜨려왔을 뿐 아니라 오는 24일 워싱턴에서 계속될 평화회담에도 불참할 것임을 공언해왔다. 따라서 이번 미­시리아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평화회담 테이블에 시리아를 끌어들였다는데서 찾을수 있을 것이다.클린턴 대통령은 정상회담후 기자회견에서 24일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협상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아가 지금까지 강경노선을 견지한 직접적인 이유는 골란고원문제에서 비롯됐다.골란고원을 반환하지 않으면 평화협상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시리아의 일관된 입장이었다.반면 이스라엘은 평화에 대한 확실한 담보 없이는 골란고원을 반환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골란고원의 안전보장을 위해 미군파견을 요청해왔다.이와 관련,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정상회담후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요청이 있을 경우 이를 검토하겠다고 말해 평화협상의 진전 가능성을 예고했다. 시리아의 영토였다가 지난 67년 3차중동전때 이스라엘에 점령된 골란고원은 73년 시리아가 일부를 회복했으나 아직도 대부분 이스라엘 점령지로 남아있는 전략요충이다.골란고원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부터 불과 5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골란고원반환외에 또하나 시리아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얻으려 한 것은 미국이 시리아를 테러국 리스트에서 제외,서방의 원조를 약속받으려는 것이었다.미국은 이에 대해 아직까지 확실한 약속은 하지않고 있다. 자원빈국 시리아에게 있어서 서방의 원조는 골란고원문제 못지않게 절실한 것이다.지난 90년 시리아가 미국의 이라크 제재에 협조한 것도 서방의 경제원조를 노린 것이었다. 시리아의 대이스라엘 화해제스처는 결국 경제적 실리를 노린 현실적 대안이라는 진단이 많다.이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이스라엘도 아랍국들의 대이스라엘 금수조치인 이른바 「아랍 보이콧」으로 영토를 강점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온 터였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에 앞서 이스라엘의 환경장관이 골란고원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경제적 실리에 대한 의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전후해 확인된 시리아와 이스라엘 양측의 실리에 입각한 외교정책은 중동평화의 실질적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회담전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이 예견했듯이 미­시리아 정상회담이 평화정착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그러나 이번회담은 양국정상이 중동평화 문제를 놓고 오랜세월 서신과 전화통화를 가져온 끝에 성사된 첫번째 회담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 수절노파 몸서 사리모양 결정체(조약돌)

    ◎흑·회·옥색 등 4백31개 수습 “눈길” ○…지난 7일 하오5시쯤 경남 고성군 상리면 자은리 고성공설화장장에서 화장을 한 조기순할머니(75·고성군 마암면 화산리 290)의 엉치뼈와 다리뼈등에서 지름 6.5㎝에서부터 좁쌀만한 크기에 이르기까지 옥색·회색·흑색등의 다양한 색깔을 띤 사리모양의 결정체 4백31과가 수습돼 눈길. 조카 김윤식씨(42)에 따르면 『지난 6일 집앞에서 뺑소니차에 치여 숨진 이모 조씨를 화장해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결정체가 나와 고성에 있는 보성사에 보관해놓았다』며 『미처 수습하지 못한 좁쌀만한 크기까지 합치면 모두 1천여과가 더 넘을 것』이라고 설명. 40여년전 결혼했다 곧바로 혼자된 조씨는 평소 음식은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었으며 남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고 혼자 산에 자주 다녔으나 절에는 한번도 간 적이 없었다는 것. 한편 충무 서광사 주지 보경스님은 『스님들의 사리와 모양이나 색깔이 똑같다』고 감정.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건설현장 안전점검/6곳 작업중지명령/노동부

    노동부는 지난 6일부터 18일까지 전국의 건설현장 가운데 추락·낙하·붕괴 등의 위험이 있거나 건설업종 평균재해율을 웃도는 9백37곳에 대해 안전점검을 실시한 결과,안전난간 등을 갖추지 않은 서광의 창원 덕산서광아파트 신축공사장 등 6개 현장에 대해 안전시설을 갖출때까지 전면 작업중지명령을 내렸다고 27일 밝혔다.
  • 멕시코:하(세계의 개혁현장:47)

    ◎저임 무기로 자동차수출 연60% 증가/“원가 4∼10% 절감” 미기업 집중 유치/국영기업 대폭 민영화… 생산성 높아져 멕시코에서 전화를 새로 설치하려면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급행료없이는 수개월내지 수년까지 걸렸다.그러나 국영기업이었던 전화회사 텔멕스가 지난 90년 민영화된 이후 설치기간은 한달이내로 단축됐다.민영화 이후 전화가입자수를 5백30만회선에서 7백30만회선으로 40%정도 늘리고 매출액을 50% 늘리는등 의욕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직원수는 오히려 5백여명 줄었다. 국영에서 민영으로 전환된 기업들은 대개 이같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대부분 적자에서 허덕이던 기업들이 흑자로 돌아섰는가 하면 흑자기업들의 경영도 혁신됐다.멕시코에서 경제개혁의 와중에 살아남는 길은 경쟁력 강화외에는 없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로 확산돼 나가고 있는 것이다. 국내 시멘트시장의 60%를 점유하는 세멕스의 경우 시멘트 1t 생산에 소요되는 인력이 5년전 1.4시간분에서 현재는 0.8시간분으로 줄어 노동생산성이 40%나 증가했다.유리시장의 90%를 점유하는 비트로의 경우 3년사이에 사무직원이 30% 줄었다. 경쟁이 치열한 여타분야의 체질개선 노력은 실로 치열하다.오랜 잠에서 깨어나 서비스개선·품질향상·효율적 인력관리·시설현대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의 열풍에 휘말려 있는 것이다. 산업경쟁력을 위한 생산요소인 임금·지가·금리면에서 멕시코는 금리를 제외하고는 조건이 좋다.최근 3년간 제조업 노동생산성이 평균19% 증가했지만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아직도 일당 4.5달러(약3천7백원)에 불과하다.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수는 전체 노동자의 16%에 달한다.멕시코에 진출해 있는 미국의 빅3자동차메이커는 저렴한 노동력으로 인해 미국내에서보다 4∼10%의 원가절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멕시코를 미주수출용 소형차 생산기지화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자동차 운송기기등 고부가가치품목의 수출증가율은 연평균 60%대를 마크,성장을 리드하고 있다.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원유등 원자재 비중이 70%에 가까웠으나 현재는 공산품 수출비중이 77%에 이른다. 멕시코시티등 일부 대도시를제외하고는 지가도 높은편이 아니다.정부가 재정운용에서 생긴 여유를 도로 항만등 사회간접자본에 집중투자,예산에서 차지하는 공공부문의 비중을 2배가까이 늘린것도 아직 미흡하기는 하지만 수출경쟁력 향상에 보탬이 되고 있다.5년사이에 도로 7백35㎞가 신설됐고 1천3백㎞가 확장됐으며 1만㎞가 보수됐다.전력생산은 5년동안 20%가 늘었다.25만개의 중소기업에 대한 재정·기술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다만 평균 16∼17%대를 오가는 고금리가 문제이기는 하다.그러나 외국인 단독 또는 합작투자 기업이나 국내 대기업의 경우 금리가 싼 미국등지에서 직접 달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때문에 별 문제가 안된다. 이같은 개방정책하의 산업현대화 과정에서 죽어나는건 중소기업들이다.수입대체산업 육성발전 전략시절에 수십년 묵은 설비로 그럭저럭 운영해오던 중소기업들은 값싸고 품질좋은 수입품이나 외국인 투자기업의 제품과 하루아침에 경쟁상대가 될수는 없었다.설비교체를 위한 자금조달도 예삿일이 아니다.우선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것 자체가 쉽지않다.대출을 받더라도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2배에 가까운 금리를 물어야 한다.연리 23∼24%나 되는 높은 이자를 물고는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그 결과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했다.섬유·신발·완구등 경공업분야는 쑥밭이 됐다.섬유시장의 외제점유율은 현재 48%나 된다.급성장 도시인 몬테레이가 속해 있는 누에보 레온주의 경우 지난해 10만개 기업이 파산,신설 기업수를 20%나 웃돌았다.멕시코내에서 구조조정을 끝낸 기업이 40%이고 아직 조정과정중에 있는 기업이 20%이며 나머지 40%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쳐야 한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외자도입에 따른 고용증대 효과 못지않게 도산 및 시설현대화에 따른 과도기적 실업효과도 커서 공식실업률은 91년 4.2%에서 현재 4·8%로 늘었다.공식실업률은 주1시간이상 취업기준이어서 실제실업률은 15%이상으로 추정된다. 멕시코시티에서 사무용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라미로 고메즈 베르날씨(61)는 『신정부 수립후 수입개방정책에 따라 경쟁력 향상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익보다는 피해가 크다고 생각된다.도산업체가 부지기수고 제조업체중에서도 수입상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멕시코대통령실의 한 고위관리는 『도약을 위한 과도기적 고통은 불가피하다』고 전제하면서 『올들어 8월말까지 수입은 6% 증가에 그친 반면 비석유 수출은 15%나 증가,무역적자가 93억달러로 전년동기에 비해 8% 감소했다.이제 NAFTA가 내년부터 발효되면 여건은 더욱 좋아진다.도약의 서광이 비치고 있는 셈』이라고 낙관론을 폈다.최근 5년간 경제성장률도 인구성장률을 상회하는 3%대 이상을 줄곧 유지했다.
  • 유교와 기독교/칭지음,임찬순·최효선옮김(화제의 책)

    ◎동서문화 만남·갈등·유사성 해석 유교전통과 기독교전통으로 각각 대변되는 동서문화의 만남과 갈등,그리고 화합의 실마리를 둘 사이의 유사성에 바탕을 두고 풀었다.유교의 자기 반성으로부터 시작해 유교와 기독교의 공통된 주제인 인간 신 초월성 정치성 의례등을 두 전통의 가장 근원적인 텍스트인 신약성서와 사서오경에 입각해 다뤘다. 유교의 종교적 측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신학적으로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이질적으로 다른 전통에 대한 심층적인 지식이 자신의 전통을 더욱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책.지은이는 중국 상하이출신으로 현재 캐나다의 토론토대학 교수. 이 책은 현대와 같은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개방된 시각을 가지고 유교전통을 살아숨쉬는 전통으로 가꾸어 나가도록 독려하고 있다.줄리아 칭 지음 임찬순·최효선 옮김 서광사 6천5백원.
  • 가압식 급수펌프 시스템 개발/옥상 물탱크없이 급수 가능

    그동안 불결한 위생문제로 식수오염 논란을 빚어 왔던 아파트 옥상의 물탱크를 대체할 수 있는 가압식 급수펌프시스템이 개발됐다. 26일 건설기술연구원과 중견 건설업체인 서광산업은 아파트단지의 물 사용량에 따라 펌프의 압력을 조절,적정량의 수돗물을 지하 저수조에서 각 가구로 보낼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특수 펌프에 장착될 메모리칩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기존 옥상 물탱크 설치 등에 따른 공사비가 40% 절감되는 한편 메모리칩 등 관련 부품 국산화로 종전 수입품을 쓸 경우 1백만가구당 1천7백억원에 달하던 설치비용이 9백60억원으로 줄어 7백40억원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두게 됐다. 특히 새로 개발된 펌프시스템을 쓰게 되면 정수장에서 공급되는 수돗물을 지하 저수조에서 곧바로 각 가정에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고가 저수조의 청소및 유지관리 불량으로 인한 수질 오염 우려를 없앨 수 있다. 또 옥상 물탱크가 없어짐으로써 아파트의 지붕모양(스카이 라인)을 다양하게 설계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과학기술처의 신주택 기술개발 자금과 서광산업이 각각 9천5백만원을 출연해 이번에 개발한 가압식 급수펌프시스템은 서광산업이 시공중인 안성의 서광아파트단지에서 선보이게 된다.
  • 멕시코/“NAFTA로 외자유치·수출 서광”

    ◎미하원의 비준안 가결에 반색/“88년이후 개방정책 이제 빛볼것”/“일자리늘고 임금상승” 부푼 기대/“미·가에 유리… 환경파괴 가속” 걱정도 미하원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비준안 표결이 행해지던 17일밤.멕시코시티내 레포르마가에 위치한 한 스탠드바에서 술을 마시던 시민들의 시선이 한쪽 구석의 TV로 집중됐다.축구중계를 중단하고 끼어든 워싱턴에서의 표결장면 중계 도중 찬성표가 가결에 필요한 2백18표를 넘어서자 실내는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이제 외국인투자가 늘어나고 수출도 잘 돼 일자리가 늘어나겠지』『그러면 봉급도 오르고 살기 좋아지는거 아냐』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표정은 갑자기 장미빛 미래를 맞은듯 했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은 이날밤 TV연설을 통해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거부이자 멕시코의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라며 미의회의 NAFTA비준을 환영했다. 18일자 조간신문들은 NAFTA 비준소식을 일제히 1면 머리기사로 다루며 환영의 논조를 폈다. 지난 88년말 살리나스대통령 취임이래적극적인 수입개방및 외자유치정책을 펴온 멕시코에는 최근 5년 사이에 약 3백60억달러의 외국인투자가 몰려들었다.올들어서만 10월말 현재 약1백억달러가 유치돼 작년 대비 18%나 늘었다.NAFTA비준여부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확정 이후로 투자를 미룬 경우까지 고려하면 투자는 앞으로 더욱 급증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멕시코의 총투자액과 전체 교역량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에 달한다. 물론 멕시코에도 NAFTA에 대한 반대가 없진 않다.야당인사들은 정부가 협상과정에서 지나치게 양보,미국과 캐나다에만 유리하게 됐다는 주장이고 환경보호단체들은 이 협정이 충분한 환경보호장치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환경파괴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비난한다.상당수 중소기업가들도 정부가 멕시코기업의 생산성이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준비기간을 설정하지 않은채 한꺼번에 무차별적으로 개방,대량 도산을 유발했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인다. 마킬라도라(보세가공무역)프로그램에 의해 국경지대에 설치된 외국기업 2천2백여개가 52만명의 멕시코인들을 고용하는 등 외국인투자의 고용증대 효과는 크다. 여당의석이 90% 이상인 멕시코상원의 NAFTA 비준안 표결은 22일로 예정돼 있고 통과가 확실시된다. 대통령궁의 한 고위관리는 『내부자본이 부족한 멕시코가 국제화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방과 외자유치가 불가피하며 산업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강화만이 유일한 돌파구다.산업현대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문제는 그러한 과도기적 고통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 하는 것이고,그것이 그리 짧지만은 않으리란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 피아니스트 백낙호씨(이세기의 인물탐구:38)

    ◎음악혼 불사르는 건반의 마술사/풍부한 예술감각·정상의 기량으로 청중 매료/연주회 2백여회… 베토벤곡 “환상적 해석” 평가 「스위스 루체른호에서 달빛을 받고 일렁거리는 조각배」. 이는 베토벤 월광소나타를 듣고 19세기 유럽시인들이 평한 찬사다. 한번 귀기울이기 시작하면 그곳에 흠뻑 빠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현란한 음의 희롱과 꿈결같은 멜로디,우울과 불안과 기대와 사랑에 눈먼 쓰라림을 극복하려는 듯 4분의 4박자 프레스토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몸부림친다. 피아노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는 「사람의 혼을 조용히 일깨우는 아다지오 소수테누토와 격정의 프레스토 사이에서 행복감을 노래하는 제2악장」을 향해 가라앉은 분위기의 리타르단도와 점점 거세지는 크레센도의 「두개의 심연속에 놓여진 꽃」 또는 이 둘 사이의 「금빛 가교」에 비유하기도 했다. 백락호의 「월광」은 좀 더 영롱하다.처음엔 구름을 헤치고 활짝 드러낸 얼굴처럼 눈이 부시리 만큼 한점 티없이 휘황찬란하다.절제된 감정과 은은하고 환상적인 녹턴(야상곡)의 분위기는 듣는 이의 가슴을 진주 타래로 꾸며준다.그러다가 차츰 음 하나하나가 생동감있게 연결되고 종장으로 치닫는 속도가 거세지면서 달빛은 산산조각 분쇄되어 폭우로 퍼붓는다. ○확신에 찬 두들김 그의 연주는 어느 경우에도 애매하다든가 모호한 감은 찾아볼 수 없다.간혹 화창한 봄날의 청람같은 무드가 느껴지는가 하면 확신을 가지고 두들기는 건반은 청중에게 안심과 안도를 안겨준다. 음악평론가 이강숙씨는 그의 베토벤 연주는 「음악의 혼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화성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남다르다」고 말한다.음악적 진실에 과장이 없고 음악의 상을 명확하게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그의 연주는 그만큼 설득력이 강하다.한치의 오차없이 음색의 변화에 깊이 파고들어 곡의 완성과 함께 벅찬 감동과 품위있는 여운이 깃들어 있다. 그가 연주하지 않은 피아노곡은 거의 없다.모차르트에서 베토벤,베버와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차이코프스키 스크리아빈에 이르기까지 지난 45년간 그가 애정과 정성을 쏟지않은 곡은 없다고 할 수 있다.그중에서도 베토벤과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해석은 「환상적 경지」란 평을 듣고 있다. 「노워크 아워」지의 에드워드 버가미니나 그와 두차례나 협연한 바 있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벌 세노프스키도 「어느 한 대목에도 허점이 없이 면밀한 주의력과 힘찬 핑거레이션」에 감탄한 바 있다. 대부분의 연주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5살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서울 가회동에서 의학박사 백태성씨(고)와 조은희여사(86)사이의 5남4녀중 장남으로 출생.외과의사인 부친은 플루트를 직접 연주하고 집안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는 병원에서 큰 수술이 있으면 시술하는 것을 눈여겨 보기도 했지만 폴란드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파데레프스키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월광에 호소하는 듯한 천상의 소리와 엘먼의 달콤하고 매력적인 바이올린 선율에 매료되어 장차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부친은 의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장남이 음악에 심취하자 파데레프스키가 빈의 거장 레세티츠키 밑에서 피아노를 사사하던 이야기,베를린파리 런던 뉴욕에 진출하여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의 입지전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단 한번의 회의나 갈등없이 그는 음악의 길로만 똑바로 걸어왔다고 말한다.『음악은 이미 숙명이며 나의 생애였기 때문에』 그는 어떤 곡에도 당황하지 않는다.수많은 평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처럼 「확신에 찬 두들김」으로 청중의 가슴을 정확하게 두들길 뿐이다. ○음악을 숙명으로 75년 대구 영남대가 강당을 새로 짓고 그를 초청했을때 연주회가 시작되자마자 불이 나간 적이 있었다.그날의 첫 곡은 슈만 피아노 협주곡 2번. 빠른 템포의 알레그로 비바체로 힘찬 화음에 이어 제1테마가 나타나기도 전에 불이 나간 바람에 장래가 술렁거리는 중에도 그는 아름다운 안단티노에서 스케르초와 프레스토까지 17분의 연주를 완벽하게 끝냈다.물론 다음곡 다음곡에서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촛불이 출렁거리는 속에서 연주를 진행해나갔고 어느때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으나 그는 「연주자를 믿는 청중의 태도」에 박수를 되돌렸다. 지난해 런던 비숍스게이트홀에서의 피아노 독주도 마찬가지다.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연주중에 어디선가 벌이 날아들어 아무리 피아노를 두들겨도 그의 왼쪽 손등에서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벌에 쏘일 경우 손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오로지 연주에만 몰두했다.청중은 이를 알리 없었고 그의 매니저인 찰스 핀치씨만이 이 사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그리고 그의 끈질김과 인내심과 암보에 감탄했다. 백낙호씨는 온화하고 겸허하다.정중하고 진솔한 성격으로 좀체 희비의 높낮이를 드러내지 않는다.다만 음악에서만은 좀더 공부하고 싶은 갈망에 목말라 했으나 유학의 길은 손에 닿지 않았다. 부친은 개성에서 경북등 도립병원으로 전전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했고 형제가 많은데 외국유학까지 가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날아들었다.당시 미국대사관부영사이자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던 마이클 베이츠가 그의 독주회에서 베토벤 「비창」과 「열정」을 듣고는 예일대 장학생으로 추천해준 것이다. 베토벤은 이처럼그와 인연이 깊다.후에 빈 교향악단의 지휘자 쿨트 뵈스와도 바로 「월광」연주가 계기가 되어 「황제」협연이 이루어졌다.그는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53년 예일대에서 1학년부터 다시 시작했다.그러나 크나이젤 하계 음악학교에서 아튀르 발삼교수를 만나 사사하고 예일대 관현악단과 협연을 하게 되기까지 그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낮에는 학교공부와 시간강사 피아노조교로,밤에는 접시닦이와 청소 아르바이트 그리고 새벽엔 연습등 예일에서의 6년은 인생의 전환이 될만큼 슬픔·고뇌·가난으로 점철되었고 비로소 뉴욕 줄리어드로 진출하면서 그의 앞길에 연분홍빛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첫번째 행운은 음악도의 선망인 에델마커스교수에게 지휘법·실내악·피아노문헌을 공부한 일이고 폴 주코프스키와의 줄리어드정기연주 협연,타운홀 WQXR(뉴욕FM)방송국에서의 독주회,그리고 잊지못할 일은 정명화·경화자매의 줄리어드 입시때 피아노반주를 맡은 일,루빈스타인·리히터·하이페츠연주와 뵈링의 마지막 「토스카」를 본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행운은 이어져 모교인 서울대가 그를 교수로 불러들였고 귀국독주회에서 특유의 베토벤 「열정」소나타 바하 「파르티타」 쇼팽·스크리아빈·드뷔시를 고루 선보여 유한철·박용구·김형주등 국내 평자들로부터 「진실한 예술성」 「세련된 의지」 「맑은 쾌감」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탁월한 테크닉」등의 화려한 평에 휩싸였다. 그해 KBS의 인기아나운서이던 이정희씨를 만나 결혼,1남2녀가 모두 빈음대 졸업후 음악가가 된 것도 행운의 하나다(장녀 혜영씨는 KBS 교향악단 제1바이올리니스트,차녀 혜선씨는 뉴서울 필하모니 첼리스트,아들 정엽씨는 빈음대서 피아노 전공후 연구과정중). 그는 요즘도 새벽5시에 일어나서 예일대 줄리어드 음대시절과 똑같이 연습에 임하고 있다.75년이후 런던 심포니 매니저인 찰스 핀치씨와 계약되어 동남아·유럽연주 스케줄을 짜기 때문에 그는 교수와 연주활동을 적절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따라서 하루 2시간씩의 매일 연습으로 해외연주 서울 지방연주 협연 등에 대비하고 있다.음악없이 어떻게 살 수있었을까.그는 피와 살과 그를 구성하는 세포하나까지도 음악으로 이루어졌음을 부인하지 않는다.입속에서 한소절의 허밍만으로도 벌써 몸속에 희열과 의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낀다. ○7년만에 독주회 91년 학교와 연주외에 모처럼 IMC(국제음악협의회)한국대표로 참여,지난 제25차 총회에서 동양권에서는 처음으로 임기 6년의 집행위원에 피선되었고 한달에 한번씩 예일대 재경 동문회 조찬에 나가는 정도.술은 맥주 한두잔에 애연가.선배인 전봉초,동료 이남수씨 등과 전람회장,연주회장 등에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그는 수많은 지방연주 해외연주 협연등 2백여회의 연주에도 불구하고 지난봄 호암아트홀서 7년만의 서울 독주회를 개최,그날의 「월광」소나타는 세월이 갈수록 영롱함과 격정이 진하여 피아노의 칸타빌레는 한층 우아하고 리타르단도와 크레센도는 정열의 다이내믹스로 절정을 이루었다. 마침내 그의 월광은 산산조각으로 분산되었고 청중도 연주자도 달빛의 폭우에 흠뻑 젖어 한동안 침묵에서 헤어 나올줄을 몰랐다.내년이면 대학교수 정년,그의 예술의 열정시대가 아마도 그때부터 막을 올리게 됨을 예고하고 있었다. □연보 ▲1929년 서울 출생 ▲1946년 개성 송도중 졸업 ▲1946년 서울대음대 입학 ▲1949년 서울대 음대관현악단 협연으로 「신인연주회」데뷔 ▲1950년 6월24일 백낙호 피아노 독주회(서울시공관) ▲1950년 해군교향악단 입단 ▲1952년 서울대 음대 졸업(김원복 윤기선사사) ▲1953년 서울대 강사·도미 ▲1957년 예일대 음대 졸업(예일대교향악단협연) 아튀르 발삼 사사 ▲1958년 예일대 음대대학원 졸업·예일대 강사·에델마커스 갈라미안 사사 ▲1962년 줄리어드 음대 연구과수료·줄리어드 정기연주회협연 ▲1962년 뉴욕 타운홀에서 피아노 독주회 ▲1963년 귀국 서울대 음대 재직 ▲1963년 서울시공관서 귀국독주회 ▲1964년 KBS교향악단과 협연(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1972년 대북 시립교향악단과 협연 ▲1972년 싱가포르에서 피아노 독주회 ▲1975년 빈교향악단과 협연,쿨트 뵈스지휘 ▲1975년 하와이대학서 피아노 독주회 ▲1976년 방콕서 피아노 독주회 ▲1977년 빈교향악단과 협연·서울시향협연(홍콩 시민회관)·말레이시아시향 협연(콸라룸푸르)·국향협연(국립극장) ▲1978년 방콕·싱가포르 피아노 독주·일본 도쿄교향악단 협연 ▲1979년 하와이대학서 피아노 독주회 ▲1980년 빈 교향악단과 협연·핀란드시향협연(81년)·미시간에서 피아노 독주회(82년)·빈교향악단·핀란드교향악단·서울시향협연(84년)·영국 아바딘 음악제서 서울대음대교향악단과 연주(85년)·KBS교향악단과 서울 수원 부산 인천 연주·대전 협연(87년)등 협연·해외독주등 2백여회 ▲1987년 서울대 음대 학장·LA심포니·춘천시향협연·이탈리아 우르비노 하기 국제대학초빙교수(88년)·KBS교향악단과 데뷔 40주년기념 연주회(89년)·이탈리아 페사로 하기음악제초빙교수(90년) ▲1992년 영국 런던 비숍스게이트홀서 피아노독주회및 런던음악제 초빙 교수 ▲1993년 3월 서울 호암아트홀서 피아노독주회및 부산 대구 대전서 독주회 서울대 음대 교수·IMC(국제음악협의회)한국대표(91년이후)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한국 피아노 학회 회장·IMC 집행위원 대한민국 문화예술상·80년 올해의 음악상(음협제정)·「월간음악」상·영창음악상·예술대상(예총)
  • 망신 낙서질(외언내언)

    미국 뉴욕의 지하철은 낙서로 한때 명성을 떨친바 있다.울긋불긋 갖가지 색깔의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진 낙서가 차체를 온통 뒤덮어 뉴욕의 「명물」이 됐던 것이다.자칭 「낙서예술가」들이 클럽까지 만들어 밤이면 지하철 정류장에 세워놓은 객차에 숨어들어 낙서를 해댔고 이를 지우고 단속하기에 지친 지하철당국은 『낙서용 객차를 따로 제공할 테니 일반객차에는 제발 낙서를 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성명서를 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뉴요커보다 더 지독한 낙서광은 한국인이 아닐까 싶다.전국의 유명한 산이나 섬의 바위 곳곳엔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이름이 씌어진 볼썽사나운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북한의 낙서는 보다 공식적이어서 백두산·금강산·묘향산등 경치가 뛰어난 곳의 바위마다 김일성부자 우상화 문구와 혁명구호등이 3백90여개소에 2만여자에 이르도록 새겨졌다는 통계가 있다.「저항문화」로 의미부여를 받기도 하는 뉴욕 지하철의 낙서와 달리 우리의 「이름남기기 낙서」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행태다. 뉴욕지하철의 낙서가 사라진 이제 한국인의 무분별한 낙서질이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명성을 얻게 됐다.미국에서 발행되는 산악잡지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 최신호가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 암벽에 씌어진 한국등반대의 낙서사진을 공개한 것이다(스포츠서울 10월11일자).검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KOREAN INCHON EXP」라고 쓴 낙서사진과 함께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산악인은 산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도 곁들였다. 안나푸르나봉뿐만이 아니다.세계의 관광지마다 한국인의 부끄러운 이름들을 담은 낙서를 자주 보게 된다.영화 「황태자의 첫사랑」무대인 독일 하이델베르크 고성의 지하창고 한쪽 벽면은 한국인 이름으로 뒤덮여 있다시피 하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우리 속담의 참뜻은 그런 낙서질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 김기수 경찰청차장(새 경찰수뇌부 4인 프로필)

    ◎차분한 일처리… 독서광 온화한 성격에 일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처리한다.모나지 않은 성품에 부하직원들에게 자상해 잘 따른다는 평.독서를 좋아해 틈만나면 책을 읽는 것이 취미이나 이것이 업무처리에도 도움을 많이 준다고 말한다.부인 이상호씨(53)와 1남1녀. ▲강원도 평창출신·57세 ▲서울대법대졸·행시11기 ▲강원평창서장 ▲치안본부 장비·외사과장 ▲LA총영사관 주재관 ▲치안본부4차장 ▲경찰대 교수부장 ▲부산경찰청장
  • 한약 불법제조 판매/약국 3백10곳 고발/한의원 원장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성보한의원 원장 김석씨(36)는 4일 『정부당국이 약국의 한약조제,판매를 방치하는 바람에 약사가 조제한 한약을 복용한 환자가 하반신마비의 부작용을 낳았다』며 송정숙보사부장관을 직무유기등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김씨는 고발장에서 『최모씨(26)가 어깨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H약국에서 조제한 한약을 복용한뒤 하반신이 마비됐다고 호소하고 있다』면서『약국들이 약사법을 어기고 한약을 조제,판매하도록 방치됨으로써 이같은 불상사가 일어난만큼 보사부장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서울 양천구 신월동 광진한의원 원장 서광진씨(34)도 이날 『시중 약국들이 관련법규를 어기고 한약을 판매하고 있다』며 서울 강동구 고덕동 K약국 등 3백10개 시중약국을 약사법및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 정부 제3청사 서광 수주/낙찰금액 1천4백99억원

    조달청은 올해부터 대전에 건축할 예정인 정부 제3청사 신축공사입찰에서 서광산업이 낙찰됐다고 22일 발표했다. 제한경쟁·최저가낙찰방식으로 진행된 이날의 낙찰가격은 1천4백99억6천만원으로 예정가격(1천6백36억1천2백만원)의 91.7%이며 선경건설·현대건설·대우등이 서광산업의 공동수급자로 선정됐다.
  • 「…남자의 옷입기」서 소개하는 남성패션 연출법

    ◎정장땐 흰양말 신지 않도록/비표준형은 몸의 곡선 안드러나게 「한국신사의 흰양말」.우리나라 남성들의 뒤떨어진 패션감각을 빗대는 대표적인 말이다. 그러나 점차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국제적인 업무활동이 많아짐에 따라 남성패션에 대한 관심및 신사복문화를 제대로 알고자하는 욕구도 높아지는 추세다. 이런 가운데 올바른 신사복입기에 대한 교양서적이 다채롭게 쏟아져 남성들에게 희소식을 안겨주고 있다. 주식회사 서광의 「신사복이야기」,(주)서울트레드클럽의 「이런남자」,반도패션의 「멋과 여유」등 주로 신사복 제조업체들이 고객을 대상으로한 비매품으로 배포하고 있는데 이어 최근 「성공하는 남자의 옷입기」란 제목의 국내최초의 남성실용패션 교과서도 출간됐다. 「못생긴 톱모델 김동수의 차밍스쿨」이란 책으로 인기를 끌었던 모델 김동수씨와 미술을 전공한 정혜인씨(바다저작권회사 기획실장)가 함께 만든 「성공하는…」은 깔끔한 비즈니스맨 배역으로 정평이 나있는 탤런트 유인촌씨와의 패션대담을 시작으로 정장의 품위,개성적인드레스셔츠,넥타이의 이미지,감각적인 콤비,대담한 캐주얼등 다양한 남성패션 연출법을 소개하고 있다. 『정장은 전통에 따라 튀지 않게, 캐주얼은 어떻게하면 좀 튈까 하는 기분으로 입어야 멋이 산다』,『멋있는 정장연출은 격식과 전통을 알아야 하고 캐주얼을 멋지게 입기 위해서는 감각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책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다. 다음은 이책이 조언하는 체형에 따른 남성정장의 선택요령. ▲대체로 체형이 표준형을 벗어나면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유럽 스타일보다는 넉넉한 아메리칸 실루엣이나 이탈리안 스타일을 입는다. ▲키크고 마른 체형=겉저고리의 깃과 어깨가 넓고 각이진 어깨선의 정장을 입도록 한다.조끼까지 셋갖춤으로 입으면 야윈 체형을 감추는데 도움이 된다.너무 헐렁하게 입으면 오히려 말라깽이로 강조돼 역효과. ▲키가 작고 몸도 마른 왜소한 체형=몸에 딱 붙는 것보다 좀 넉넉하면서 길이가 짧은 상의를 선택한다.색상은 밝은 바탕에 가로 줄무늬가 어울린다. ▲뚱뚱한 체형=선명한 세로 줄무늬가 좋고 장식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이 어울린다. 너무 크거나 몸에 달라붙게 입지 말고 몸치수보다 약간만 여유를 주어야 덜 뚱뚱하게 보인다. ▲어깨에 비해 허리가 가는 체형=어깨선을 강조한다.배가 많이 나왔으면 약간 긴 겉저고리를 입어 체형의 약점을 감춘다.
  • 상해 부시장 내한

    중국의 서광적 상해시 제1부시장이 15일 우리정부 초청으로 내한,1주일 동안 머물면서 외무부와 경제기획원 차관등 정부관리와 서울·부산시장 등을 만나 양국 도시간 우호협력관계 증진방안에 관해 협의한다. 서부시장은 또 무역협회 주관으로 열리는 상해시 투자환경 설명회에 참석하고 포항제철,대우자동차,삼성전자 등 대기업과 대전엑스포 현장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 최형우의원 부인 청탁 부인/경원전문대 수사

    경원학원 입시부정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청 수사2과(과장 조창래총경)는 19일 최형우 전민자당사무총장의 둘째아들 재완군(22·미국유학중)의 90학년도 경원전문대 입시부정혐의와 관련,최씨의 부인 원영일씨(52)를 소환·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이날 하오2시쯤 원씨를 소환,조사를 벌인뒤 이날밤 일단 귀가조치했다. 원씨는 이날 조사에서 『우연히 경원전문대 미술대 시간강사인 서정순씨를 만나 이 대학에 지원한 아들을 잘 봐달라고 부탁한 일은 있으나 부정입학을 청탁하거나 금품을 건네준 사실은 없다』며 『이를 폭로한 박춘성부교수는 만나 적도,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또 구속된 박춘성부교수(38)를 조사한 결과 박씨로부터 『지난 90년도에도 전문대에서 1백여명을 부정입학시켰으며 이를 위해 김재호 전교학처장(90년 사망)과 정세윤전산주임(37)·서광수교수등 7명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 한양아파트에서 가짜 OMR카드 답안지를 작성했다』는 새로운 진술을 받아내고 수사하고 있다.
  • 메조 소프라노 백남옥씨(이세기의 인물탐구:24)

    ◎타고난 미성·미모 겸비 “한국의 뮤즈”/독특한 음색·풍부한 성량 조화로 “청중매료”/완벽주의 추구… 온몸으로 최상의 무대 연출/서울대 시절 “음악계 샛별” 찬사 받아… 쪽진머리·한복 즐기고 눈부신 조명을 받고 무대에 선 백남옥의 모습을 보고 음악평론가 김원구씨는 「한국의 뮤즈 탄생」이라고 찬사를 보낸적이 있다. 한상우씨는 「진한 색감,표현의 다양함은 듣는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야만다」고 했고 한때 유한철씨는 백남옥의 메조소프라노에 현혹되어 「수십년만에 만나볼수 있는 목소리」로 요란하게 신문의 음악평을 장식하기도 했다. 넓은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거침없는 목소리는 과연 청중을 사로잡는데 추호의 빈틈도 없어보인다.더구나 목소리에 버금가는 출중한 미모는 어떤 무대에 세워도 결코 손색이 없는 조건을 이미 갖춘 예술가다. 그러나 성악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해도 그 소리가 미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 이겠는가.그래서 타고난 미성과 미모를 겸비했기 때문에 백남옥은 그때마다 화제의 초점이 되는지도 모른다.아름다운 용모에 아름다운 목소리,그렇다면 백남옥은 어떤 사람인가. ○별난 성격의 소유자 그는 마음씨가 곱고 착하고 여리고 겸손하며 자신을 죽일줄 아는 전형적 동양여성의 특징은 지니고 있지 않는것 같다.그렇다고해서 거세고 드세게 만사에 나서기를 즐기는 적극적 성격이라고도 할수 없다.또는 이 모든것이 해당될수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다시 말하면 일반의 상식선에선 쉽게 설명되어 지지않는 별나고도 별난축에 속한다. 우선 싫은것도 많고 꺼리는 것도 많다.이른바 원만하고 부드럽고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구석은 찾아볼수 없다.따라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편은 못된다.오히려 좀더 가까워지지 않는 묘한 긴장과 거리감을 준다.물론 그 자신도 자신의 그런 면을 십분 알고 있다.다만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다.그로서는 남을 불편하게 한적도 심적 폐를 끼치려는 의도도 없다.자신은 짐짓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믿는다.남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라곤 없다.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도심 한복판을 갑자기 가로지르는 상쾌한 바람처럼 정신이 번쩍드는 기분이다. 또 꼼꼼하고 완벽하다.종이한장도 똑바로 놓여야만 안심하는 주의다.그래서 쉴새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정돈하고 챙긴다. 그의 집에 가보면 알수 있다.커튼에서 카펫,식탁보 하나에 이르기까지 봄이면 봄답게 엷은 핑크에 화사한 꽃문양,커튼이 꽃문양이면 바닥은 단색,식탁위에 놓이는 찻잔과 스푼하나에도 섬세하게 배려하는 취미다. 무대의상도 마찬가지다. 오페라나 교향악단 협연에서는 역할에 맞는 의상을 골라 입지만 그는 대부분 한복차림으로 무대에 오른다.똑바로 가르마 탄 쪽진 머리에 비녀를 지르고 손가락엔 칠보쌍가락지,자신의 음반이 국제 레코드시장에 진열됐을때 자켓의 한복차림은 「한국의 백남옥」을 한눈에 알수있게 하리라고 말한다. 곧 지루해하고 곧 새로운 것을 원해서 아침에 입었던 옷을 하오 외출에선 반드시 바꿔 입는다.하나의 물건에 오래 집착하지 못한다.다만 한번 사귄 사람과는 평생을 간다. 연주를 앞둔 연습때도 소위 끈질긴 인내심을 읽을 수 있다.테이프에 녹음해서 조목조목 결점을 찾아 그 대목을 보충하고 스스로 완벽하다고 인정되지않으면 며칠 밤이고 파고든다.바로 이 완벽주의가 일상생활에서도 그를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노래의 가사도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시속에 담긴 시심을 꿰뚫어 시가 지닌 정감에 감동하고 도취돼야만 비로소 멜로디에 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시가 말하려는 테마는 물론 한구절 한구절에 녹아들 만큼 집착하여 쓴사람의 심중을 깊이 헤아려야만 직성이 풀린다.77년 KBS에서 「노산 이은상 가곡의 밤」때 이은상작시 홍난파 작곡의 「사랑」에서 그때까지 막연히 이해했던 단어들을 노산에게 또박또박 점검한 적이 있다. ○성용도아 휘호받아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 마소」의 「부대마소」나 「애제 타지 말으시오」 「생□으로 있으시오」등 방언이나 고어를 사용했을 때의 효과는 어떤가고. 하도 정교하게 물으니 노산이 기특히 여겨 이 미인에게 「성용도아(모든것이 우아하고 단정하다)」라는 휘호를 남긴 에피소드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백남옥은 까다롭고 별날거라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그는 청중들에게 한아름의 꽃다발을 정성스럽게 안겨주는 자세로 노래부른다.황폐하고 무미건조한 현대의 메커니즘 속에서 첨예해진 사람들의 감정을 맑고 청량하게 다스리는듯 폭풍우 후의 찬란한 햇살같은 감동을 누구에게나 고루 베풀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한사람의 예술가로서 좀더 진수의 경지를 지향하기 위해선 그가 걷고있는 모든 과정을 몇번이고 찬찬히 헤아리기를 잊지않는다.『결과는 두고 볼뿐』진정한 예술정신의 도정은 그 과정에 담긴 성실함의 무게일거라고 말하면서. 백남옥은 부친 백인엽장군과 정숙일여사의 2남2녀중 장녀.서울사대부국과 이화여중 3학년이 될때까지는 세단을 타고 경무대에 세배가고 무비카메라로 일상생활을 찍히는 소공녀로 성장했다.그러나 5·16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부모가 헤어지자 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난생처음 가난과 비극적 환경을 체험했다. 대학4학년 때인 68년 어머니의 헌신적 뒷받침으로 학생신분으로선 감히 생각지도 못할 본격적독창회를 개최,명동 시공관무대에 데뷔했을때 맑고 따뜻한 그의 메조소프라노는 오페라와 예술가곡을 부를수 있는 재능이 두드러져 음악계는 이 신성에게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었다.그때 취재하러왔던 당시 대한일보기자 정준극씨가 그의 부군이다. ○독일 국립음대 유학 단돈 6만원으로 시작한 신혼생활,사글세방으로 10여차례나 전전하는 어려운 중에도 부군은 독일유학을 서둘러 주었다.여전히 각박한 유학생활이었으나 베를린 국립음대에서의 지도교수인 바리톤 H·브라우어 박사는 고음위주의 레퍼토리로 그의 음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다른 동양권 학생들은 테크닉이 앞선다.당신은 테크닉도 뛰어나지만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다음해 베를린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며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리히트 오디션에 참가,「리케르트 시에 의한 말러의 마지막 7개 가곡을 불러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발탁되는 영광을 안았다.그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고 그도 왠지 세계무대 장악이라는 별빛같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때 어머니 타계소식이날아들었다.그에겐 청천벽력과도같은 충격이었다.가장 섬세한 사춘기에 어머니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했던 그로선 눈앞에 둔 성공이 허망하기만 했다.그때 귀국후 더이상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싶지않아 베를린 국립음대 오페라단 입단을 포기해버렸다. 오페라 출연등 연주제의를 받을때마다 그는 나에게 꼭맞는 무대인가를 여러모로 고려해본다.예를 들어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좋아하는 오페라이긴 하지만 기모노를 입을때 마다 강한 거부감이 생겨 서서히 그 역할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또 83년 한 방송국이 주관한 8·15경축 음악회에서 「민족의 해방을 경축하는 자리」에 가슴이 파진 드레스를 입는 것이 송구스럽게 느껴져 그때부터 한복을 고집하게 되었다. 80년초 큰 병을 앓고난후 그는 예술과 인생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어떤 부분에서도 별로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그가 한 일은 늘 옳았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를 수 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는 사랑하는 남편과 다 자란 딸(은진 서울대미대),하루종일 화초를 가꾸고 여전히 집안의 구석구석을 깔끔하고 예쁘게 꾸미면서 그런 생활이 음악 못지않게 소중한 것임을 알고있다.그의 생활은 결국 그의 예술을 지켜주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를 필요로하고 그를 보고자하는 사람들에겐 그가 지닌것만큼 주저없이 나누고 싶어한다.군민을 위로하는 군민음악회나 구민음악회,장애자를 위한 예술학교 기금모금 자선음악회등 크고 작은 음악회에 기꺼이 참여한다.다만 왼손이 한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여 화려한 그의 이면에 이런 면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작은 음악회라도 「이무대는 나의 첫무대」 「언제나 새로운 최상의 무대」여야 한다는 각오로 혼신을 다한다.풍부한 성량과 날이 갈수록 윤기를 더하는 투명한 목소리,온몸이 악기가 되어 자유자재로운 기교로 노래부르지만 그에게서의 예술은 단순한 재능과시나 화려한 영광을 위한 기교는 더이상 아니다. 「예술은 인간 가슴의 심연에 빛을 보내는 일」,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완벽추구와 긴장을 잃지않는 백남옥의 노래는 바로 그 청중의 가슴에 던지는 한줄기 빛처럼 따사롭게 흘러들고 있다. □연보 ▲서울 출생 ▲1965년 서울예고 졸업 ▲1969년 서울대 음대 졸업 ▲1973∼76년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가곡과 오페라 전공) ▲1976∼78년 중앙대·서울예고 출강 ▲1979∼현재 경희대 음대 교수(이화녀중때 김학근,예고때 오현명,서울대 음대때 이정희,베를린국립음대 때 브라우어 교수 사사) ▲1964년 서울대 음대 주최 제15회 전국남녀학생음악경연대회 특상 입상 ▲1966년 제16회 동아음악콩쿠르 성악부 1위 입상 ▲1968년 제1회 독창회(명동 시공관) ▲1969년 오페라 「순교자」(국립오페라단) ▲70,71,72년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국립오페라단 김자경오페라단)〃 모차르트 오페라 「마적」(국립오페라단),비제 오페라 「카르멘」(김자경오페라) ▲1974년 베를린 국립오페라단 오디션1차합격,베를린 국립오페라단 퐁키엘리 4막오페라 「라조콘다」 ▲1975년 독일유학시 베를린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말러가곡 솔리스트(리케르트시에 의한 말러 마지막 7개의 가곡으로 프랑스의 파리 툴르즈 바이안느 지방 순회연주) ▲1976년 동아일보·동아방송주최 귀국독창회(류관순기념관),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국립오페라단) ▲1977년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김자경오페라단) ▲1985년 음악의 소극장 운동을 위한 제1회음악회(현대극장 소극장) ▲1986년 독창회(호암아트홀) ▲1986년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호암아트홀) ▲1987년 오펜바흐 가곡 「호프만의 이야기」(김자경오페라단) ▲1989년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투테(여자는 다 그런것)」(김자경오페라단) ▲1990년 캐나다 토론토,미 워싱턴등지 독창회 ▲1991년 8·15경축음악회 미애틀랜타 휴스턴 시애틀 워싱턴등지 순회독창회 KBS교향악단,시향10여회협연,지방연주 20여회,KBS·MBC­TV 「봄맞이 가곡의 밤」「8·15경축음악축전」독일문화원 주최 「독일가곡의 밤」해마다 참가. 「백남옥 우리가곡 모음」(78년)「애창곡집」(79년)「우리가곡집」(86년)「매혹의 목소리 백남옥 우리가곡」CD출반(92년)이상 성음,「백남옥 우리가곡」LD출반(93년 삼성)외.
  • 도예가 황종례씨(이세기의 인물탐구:23)

    ◎예술혼 담긴 「귀얄문양」 대가/탁월한 기품·여성스런 섬세함 한획으로 표출/망망대해·일렁이는 갈대숲 등 깊은맛 일품/32세 “늦깎이” 입문… 남을 의식않고 제작에만 몰두 벽제의 하늘은 아름답다.청자의 비색처럼 영롱하다.산자락에 걸친 구름은 분청사기의 문양인듯 엇비슷 비껴있다.이곳이 바로 현대도예에서의 일인자 위치를 지키는 도예가 황종례씨의 작업실이다.절간같은 고요,사람의 기척이라곤 별로 없이 작가 혼자서 흙으로 성형하고 소성한 도예에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가 벽제에 온것은 72년 초봄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진흙구덩이가 푹푹 패이는 삭막한 황무지였으나 도심에서는 가마를 가질수가 없어 일찌감치 이곳 정착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넓은 터에 장작을 때는 흙가마와 기름을 때는 현대식 가마를 갖추었다.그로서는 가마를 갖게된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그동안 축적한 것을 이뤄나가면 그만이다. 새벽 6시면 그는 벌써 작업실로 내려온다.직접 흙을 반죽하고 까다로운 여러 공정을 거쳐 유약칠과 채식에 들어가 한 획으로 문양을 넣기 시작한다.물론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의 도예에서의 특징은 귀얄문양이다.그는 이 과정에서는 거의 몰아의 경지다.느긋하고 너그러워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으나 이때만은 비호처럼 날쌘,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한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다.그때도 그의 얼굴표정에는 온화한 여유가 만만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붓이 자꾸 흙에 달라붙어 기면의 흡수에 비해 둔한 붓놀림이 따르지 못하자 유화붓을 쓰거나 강도가 센 페인트 붓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귀얄만으로 능란하게 그림을 구사하게 되었다. 귀얄문의 특징은 그릇의 표면이나 내면에 속도감있게 붓자국을 내며 돌리지않으면 습기있는 기면이 당장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단숨에 그릴 수 있는 기량과 기술이 필요하다.그릇의 한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미리 구상해두었던 그림을 일순간에 성립하는 식이다. ○분청사기에서 힌트 옥색하늘이 아득히 푸르르고 망양한 바다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숲,희미한 새벽 서광과 붉게 타는 낙조등 도예기가 보여주는 회화세계는 화선지에서와는 다른 그나름대로의 참신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안료의 농도에 따라 얼마든지 절묘한 표현을 자유자재롭게 만들어 나갈수 있는 것도 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필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그는 60년대 초부터 청전 이상범에게 붓놀림과 먹의 농담이용법,옥산 김옥진에게 사군자,오당 안동숙에게 풀 나무 산과 바위를 사사하면서 수년간 자기표현을 위한 기초적 탐색을 감행해 왔다. 그의 귀얄무늬는 물론 분청사기에서 쓴 귀얄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고려상감(상감)같은 상감을 이용한 화장법을 거쳐 분청사기의 귀얄무늬를 추상적 회화로 모색해 나갔다. 그 시절의 그런 그릇에 왜 귀얄 붓자국을 썼는가,시간틈틈이 골동품가게나 박물관을 기웃거리며 관계서적과 도록을 빌려다가 밤을 지새워 연구하기도 했다. 발이나 호·기에다 투각수법의 무늬로 부분장식을 표현하거나 단일색인 소문백자의 경우엔 부드럽게 흐르는 몸체에서 무한한 품위가 배어나왔다. 더구나 화사기에서 쓰이던 회청·회회청의 코발트색깔은 지금도 창조하기 힘든 기발한 색조임에 스스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꽃잎흩날리는 비화문이며 풀잎 나뭇잎 얼킨 초엽문의 활달한 율동감,살얼음이 깨어진 듯한 빙렬등은 현대도예에서도 시도해 봄직한 분방한 방법임에 틀림 없었다. 황종례의 그릇의 형태는 비교적 큼직하고 대담한 편이다.쑥쑥 뻗은듯 휘어진 곡선을 지니면서 탁발한 기품과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다.너무 작아 조잡하거나 너무 우람하여 넘치지 않는다.야무진 티나 인위적인 기교는 없다.꾸미지않은 순결함속에 오랜 전통을 바탕에 둔 든든한 경륜의 실력이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안심과 환희를 안겨준다. 도예의 기물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자 이번엔 좀더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시도에 앞장 섰다.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시간이 짧기만 했다. 몇사람 되지않는 창작도예에서 「독자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예의 길은 멀고 그리고 어렵다』고 말한다. ○성취가 일생 과제로 고전하여 어렵게 이룬것만큼 높이 평가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도무지 그런 울결(울결)과 방종에서 벗어나 흔연한 자세다. 남에게 관심을 갖거나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그런 자자분한 세상사에 눈돌릴 겨를이 없다.예술가의 자세란 작품에 밀착하여 새 세계에 도전하는 일,그리고 성취만이 평생의 과제이며 목적이다. 그는 인건비등으로 다투는등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도 싫어 인부들과 손을 끊고 몇년전부터는 흙만드는 일을 직접하고 있다. 12번째 개인전을 연후 수많은 해외전시에 참가,틈틈이 86년 13번째의 개인전을 앞두고 준비해온 1천여점의 작품을 하루 아침에 망친 사건이 있었다. 어느때보다 실험작품이 많아 스스로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허허!」 한바탕 웃는 것으로 이를 단념해 버렸다.이미 끝난것에 집착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원인은 간단하다.필요한 양을 정확하게 혼합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물과 흙의 분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이를 지켜보지못한 자신의 불찰로 돌렸다.광주나 이천에 나가면 만들어진 흙을 얼마든지 사다 쓸수 있는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직접만들어 쓰려다가 생긴 이 낭패가 그로서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후론 아직 결혼전인 차남(영학씨·조각·상명여대 출강)이 어머니를 돕고 있다.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은 시기에 그의 도예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부군 이진우박사(전 영동피부과 제일의원)가 몸져 눕는 바람에 한동안 간호에 매달리느라 이럭저럭 작업을 미룰수 밖에 없었다. 황종례씨는 고려청자의 재현이라는 전통도예를 가업으로 가진 황인춘씨를 부친으로 역시 원로 도예가인 황종구씨(전 이대교수)가 그의 오빠다. 어릴때 영등포 대방동에 있던 그의집 과수원속에 부친의 가마가 있었고 그는 그릇을 빚고 건조시키고 조각하고 백토칠에다 다시 이를 벗겨내고 유약등 까다로운 작업을 지켜보는 유년시절에도 하나의 사기나 파와(파와) 한쪽을 어루만지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옛 고려왕조·이조왕조의 생활이 따뜻하게 전해졌다고 기억한다. 그후 국민학교 1학년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개성에 이주,일인들이 선죽교부근에 마련해준 연구소에 살면서 호수돈여고에 다녔다. 미대진학을 꿈꾸며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스승이던 유달영선생의 가르침은 「버려진 제것에 대해 눈뜨라」는 것이었고 특히 졸업을 앞두고 「청년이어 일어나라」는 교훈은 그에게 「나도 무엇인가 나의 일을 하겠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집안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나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이대미술학부에 진학,어릴때 손바닥 감촉으로 느꼈던 사기의 온기를 못잊어 대학졸업 9년만인 32살때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도예를 전공했다.그때도 부군이 그의 협력자가 되어주었다. 대학원 졸업전인 61년에 첫 개인전,청자의 태토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곳에 단숨에 귀얄문을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낀것은 68년 6번째 개인전때부터다. ○“독보적 존재” 평가 「청·백자의 선이 아무리 탁발하다 해도 이를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조작적이고 기교적이 아닌,이른바 이조자기에서 볼수 있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멋』을 담아 새롭게 선보였다. 실내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도예를 널리 일상생활에 참여시킨일종의 도예의 활성화 시도였다. 『몇 안되는 창작도예를 만드는 도예가중에서 독자적인 색유사용으로 새 경지를 개척해 왔다는 점에서 황종례는 현대도예에서 단연 독보적 존재』라는게 미술평론가 박래경씨의 평이다.1천여점 작품실패로 9년간 미뤘던 13번째 개인전은 오는 13일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흰색으로 시작됐던 그의 귀얄문은 더욱 다양한 아름다운 색깔로 변모되었고 매끄러운 표면은 입체감과 함께 품위있는 추상회화로 조형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청자빛 하늘과 파도치는 바람,흩날리는 꽃잎등 조선시대의 사람의 감정과 미의식을 담은 그의 현대적도예 세계는 그의 성격처럼 온유하고 따뜻하여 번거로움과 무질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인정과 사색,그리고 은은한 기쁨을 넉넉하게 뿌려주는 안식의 경지다. □연보 ▲1927.12.9 서울출생 개성호수돈녀고 26회 졸업 ▲1945.∼1950.5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미술학부 서양화과(학사) ▲1959.9∼1962.2 이화녀자대학교 대학원(도예전공·석사) ▲1963∼19 81 이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출강 ▲1965.3∼1966.2 상명녀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조교수 ▲1975.3∼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교수 ▲1961.12 도예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3.10 도예개인전(〃) ▲1964.11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6.5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7.8 도예개인전(미팔군전시장) ▲1968.8 도예개인전(일본,경도 조화랑) ▲1971.9 도예개인전(신세계백화점 전시장) ▲1975.4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78.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81.1.20 도예개인전(미국 뉴욕) ▲1982.1.29 도예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84.4.24∼4.2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61∼1983 대한민국 미술전 출품 ▲1968.7∼1981 대한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디자인 포장센터)심사위원 ▲1973 한국현대도예작가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5 전국공예가 초대전(미술회관)문예진흥원 주최 ▲1976 여유도예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7 역대 국전수상작품전(국립현대미술관) ▲1979 한·중·일 국제도예전 초대출품(일본명고옥) ▲1979 한국도예가회 창립전(신세계 미술관) ▲1979 한국미술전람회(뉴질랜드) ▲1980.9.27 한국도예가전 회원전 2회(신세계미술관) ▲1980 국전 초대출품(국립현대미술관) ▲1980.7.10∼7.16 도예2인전 일본 매일신문사 주최(일본 동경도 대환백화점) ▲1981 한국도예가회 회원전 3회(신세계미술관) ▲1982.3.6 도예2인전(일본 구주 복강시) ▲1983 도예2인전(일본 대판시) ▲1984.3.15∼3.20 도림전 출품 ▲1981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81∼1990 현대도예전 일본 순회전(10연간) ▲1982 제1회 대한민국미술제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2 서울신문사도예공모전 초대출품·심사위원,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출품(미국) ▲1982 한국현대도예가 회원전 9회(신세계미술관) ▲1983 한독수교 100주년기념출품(독일) ▲1983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68.8 국제미술교수협회 주최 도예세미나(일본,경도) ▲1975.5 한국도예특강 초대(일본 요업시험소) ▲1980.2 자유중국 교육시찰 ▲1983.8.2∼8.20 한일교류전 출품및참가(일본 구주)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주최 ▲1983.12 MBC초대전 출품(MBC별관 전시관) ▲1986.9 한국현대도예가회 일본 전시 ▲1987.6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출품 ▲1987.8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출품및 참가(일본 구주) ▲1987.9 서울신문사주최 도예공모전 심사및 초대출품 ▲1989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및 운영위원장 ▲1988 대한산업미술가 협회 이사장 역임 ▲1990 서울현대도예비엔날례 초대출품 ▲1991 대한민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1992 서울 공예대전 출품 ▲1993 벨기에 앤트워프 박물관 주최 ▲1993.3.26 한국도예문화 특별전 출품 ▷작 품 집◁ 황종례 도예작품집(미진사간) ▷수상◁ 국무총리상·국전 초대작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출강·대한미술산업가협회 회원·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이사
  • 체임문제로 다투다 주방장이 주인살해

    서울용산경찰서는 27일 서광호씨(30·무직·전과2범·종로구 사직동18)를 살인 및 살인미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씨는 이날 하오3시40분쯤 자신이 일하던 용산구 보광동 A중국음식점에서 밀린 임금문제로 다투다 이 음식점 종업원 임종호씨(27)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고 주인 정모씨(38·여)에게도 중상을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서씨는 지난 17일부터 한달에 1백10만원을 받기로 하고 주방장으로 일해오다 10일만인 26일 그만둔뒤 그동안 일한 임금 30만원을 받으려다 정씨로부터 『영업에 방해가 되니 나가달라』는 말을 듣고 격분해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 턱시도/모닝코트/테일코트/남성 혼례복 새 바람

    ◎“한번뿐인데 멋있게” 수요 크게 늘어/맞춤점외 10개 대형사도 본격 제작/턱시도 35만∼60만원… 빌릴땐 12만∼15만원 「일생에 한 번 뿐인 결혼」.봄바람을 타고온 꽃소식과 함께 본격적인 결혼시즌이 시작됐다.최근에는 서양의 전통 혼례복인 턱시도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신랑들이 부쩍 늘어 관심을 끌고있다. 특히 올 봄에는 결혼날짜를 잡기에 제일 좋다는 윤달이 4년만에 다시 믿아와 결혼식 행렬이 줄을 이을 것으로 전망된다.이와함께 국내 의류업계 역시 턱시도와 테일코트등 예전에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남성예복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제까지 남성의 결혼예복은 짙은 색의 깔끔한 정장을 새로 맞추거나 사입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현실.조금 멋을 부리는 사람들이 아이보리색이나 순백색의 정장을 입어 하객들의 주목을 끄는 정도였다.서양식 전통예복을 입고 혼례를 치르는 사람은 극소수로 일반인들에게는 영화속의 주인공들이 즐겨입는 호사스런 사치정도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전반적인 국민소득 향상과 젊은 세대에일기 시작한 개성주의가 남성의 결혼예복에도 일대 혁신을 불러왔다.여기에는 남녀의 구분이 애매모호한 신세대 「유니섹스」물결도 한 몫을 거들고 있다.결혼식하면 신부의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떠올리게 되는데 요즘은 이에질세라 신랑도 신부의 아름다움에 걸맞게 차려입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현재 남성용 결혼예복을 생산하는 대형 의류업체는 10여개.2∼3년전만해도 맞춤전문 양복점들이 주문이 있을때만 턱시도 한두벌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신원·캠브리지·제일모직·코오롱·논노·서광등 의류전문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남성예복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아직은 업체내의 판매비중이 미미한 편이나 수요전망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여진다.이는 결혼식의 비디오 촬영이 인기를 끌면서 신랑의 화장과 예복착용등 예전에는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던 일들이 대중화돼가는 추세로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관련업계의 분석이다. 신원의 남성예복 전문디자이너인 임해주씨는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이제는 여성뿐이 아니라 남성들도 결혼예복에 많은 관심을 쏟고있다』면서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턱시도나 모닝코트 같은 서양의 전통 예복을 아무리 비싸더라도 결혼식때 한번 입어보자는 것이 요즘 신랑 신부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남성예복도 여성예복처럼 대여도 가능하다는 점이 침체에 빠진 국내 의류업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턱시도의 판매가격은 35만∼60만원대이고 대여가격은 12만∼15만원선이다.턱시도보다 격식을 더 갖춘 모닝코트나 테일코트의 경우 판매가격은 70만∼90만원에 달한다.대여하는데도 20만∼25만원은 지불해야 하므로 씀씀이가 헤퍼지는 결혼식비용으로도 무리가 많이 가는 편이다. 이밖에 예복에 갖춰야할 드레스셔츠·보타이·커머밴드등 일체의 액세서리는 대부분의 업체가 예복을 대여하면 무상으로 제공한다.색상은 검정·아이보리·흰색 등이 있는데 계절에 따라 흰색 예복이 봄·여름에 많이 나가는 반면 가을·겨울에는 검정과 아이보리 색상이 선호된다. 지금은 남성예복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턱시도가 19세기 후반무렵 미국 사교계에 처음 등장했을때는 정장을 무시한 파격으로 충격을 던져주었다고 한다.엉덩이를 덮는 제비꼬리 모양의 날렵한 뒷부분을 가진 테일코트를 반토막 낸 모양의 턱시도의 낯선 모습에 비난이 많았다는 것.그러나 간편함과 개성적인 매력으로 금세 전세계에 퍼져 현대까지 전통예복중 가장 인기있는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서양에서는 결혼예복 뿐아니라 각종 사교모임과 행사의 필수복장인 턱시도는 원래 격식을 많이 따지는 옷이라 제대로 차려입기가 보통 힘들지 않다.넥타이는 검은 보타이가 일반적이나 보타이를 매지않을 때는 은회색의 밝은 타이를 매야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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