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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라야마 “그 시대 한국에 필요했던 대통령”

    일본 언론들이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한국 민주화에 대한 공헌, 대일 입장 등을 조명했다. 아사히·니혼게이자이·요미우리 등 주요 신문들은 1면에 주요 기사로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했다. 신문들은 “김 전 대통령이 군부독재 아래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1992년 당선으로 문민정권을 부활시켰다”면서 “재임 중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체포를 명하고 1980년 광주사건(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의 진상 규명에 노력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일부 신문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중에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중앙청으로 쓰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독도에 접안 시설을 건설한 것도 소개했다. NHK 웹사이트에서 김 전 대통령 서거 기사는 많이 읽은 5위 등에 랭크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김 전 대통령이 역사나 영토를 둘러싸고 일본에 강경한 발언을 많이 했으나 2002년에는 와세다대 특명교수로 취임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91) 전 일본 총리는 이날 “그 시대 한국에 가장 필요한, 어울리는 대통령이었다”면서 “마음으로부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95년 8월 15일 총리직에 있던 무라야마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한·일 관계의 기본 틀을 만든 역사적 담화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무라야마 전 총리의 역사 반성 등에 대한 일본 내 국수주의적 정치인들의 반발과 망언이 늘면서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 한·중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 관련 망언에 관해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강한 어조로 언급해 양국 관계가 경색되기도 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휠체어 조문’ JP “YS는 신뢰의 분”

    ‘휠체어 조문’ JP “YS는 신뢰의 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였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8시 50분 휠체어를 타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들고 10초 정도 눈을 감은 뒤 양손의 깍지를 끼고 묵념을 올렸다.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3김 중 김 전 총리만 홀로 남게 됐다. 조문을 마친 김 전 총리는 내빈실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상도동계였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등과 김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김 전 총리는 “아침도 마음대로 못했다”면서도 현철씨에게 수차례 “자당(慈堂)을 잘 챙겨 달라”는 당부를 반복하며 부인 손명순 여사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회자정리라는 말이 떠오른다”며 생각에 잠겼다. 김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을 회상하며 “하여간 신뢰의 (상징인) 분이다. 다른 사람이 못 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래도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계시니까’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허탈함이 있다”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공개석상에서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편인 김 전 총리는 “끝까지 아버지를 모시던 충신은 어디 갔느냐”고 퇴임 후 줄곧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김기수 전 비서관을 찾은 뒤 그에게 “잘 모셨다. 긴 세월 일편단심 잘 모셨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김 전 총리는 현철씨에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잊히지 않는 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면서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얘기다.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라고 밝혔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들에게 보내 줬던 ‘민주 멸치’를 언급하며 “여야가 나뉘어 있는데, 멸치를 매년 보내 주셔서 잘 먹었다”면서 “정치적인 찬반을 제쳐 놓고 멸치가 한창 잡힐 때니 먹어 보라”라고 권하기도 했다. 1926년생인 김 전 총리는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최근 회복됐지만 여전히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주변에서 건강을 묻자 “(김 전 대통령이) 단식을 여러 번 하셨다. 밥 못 먹으면 국민은 불행이고, 그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朴대통령 “깊은 애도… 예우 갖춰 장례 준비”

    朴대통령 “깊은 애도… 예우 갖춰 장례 준비”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고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아세안 정상회의 등 참석차 말레이시아에 체류 중인 박 대통령은 이같이 말하고 “정부는 관련 법과 유족들의 뜻을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박 대통령은 전날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만찬 행사를 마친 뒤 서거 소식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변인은 박 대통령의 조문 계획과 관련해 “결정되면 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23일 새벽 귀국한다.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 때로는 동지로, 때론 맞수로 ‘숙명적 관계’를 이어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시대를 연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사에서 양김(兩金)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합치면 3김(三金)이 된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세 사람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김 가운데는 김 전 총리만 남아 3김 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DJ는) 나하고 가장 오랜 경쟁 관계이자 협력 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다.”(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22일 타계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숙명의 맞수’이자 ‘동지’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둘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맞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는 든든한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경쟁자’였다. ‘양김’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 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 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까지 정치적 명운을 건 승부를 벌였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국회 등원은 훨씬 빨랐던 YS가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맞붙었던 1970년 대선 경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도 결선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했다. YS는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와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면서 지원 유세에 나섰지만 95만표 차로 패배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극적 승리를 일궈 냈다. 양김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다. 하지만 협력은 여기까지였다.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실패한 뒤 DJ는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양김은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고 대선에 뛰어들었고, 결국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훗날 DJ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이후 대립 구도는 가속화했다. YS는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 및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했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1992년 대선에서 DJ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 끝에 먼저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DJ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YS에게 권좌를 넘겨받았다. 양김은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22년간 반목을 이어 갔다. DJ는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YS를 비난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렸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서로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는 표현을 써 가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자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YS가 사경을 헤매던 DJ를 문병한 뒤 취재진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상도동 막내 ‘무대’ 손 떨며 오열… 동교동계 한화갑 “참 아쉽다”

    상도동 막내 ‘무대’ 손 떨며 오열… 동교동계 한화갑 “참 아쉽다”

    22일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정치인과 각계 인사의 조문 행렬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김 전 대통령의 측근 그룹인 ‘상도동계’ 인사들은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등 전·현직 청와대 인사들과 주요 여야 정치인 등 3200여명(오후 10시 30분 현재)이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었다. 비보를 접하고 가장 먼저 장례식장으로 달려온 사람은 김 전 대통령과 정치 역정을 함께한 상도동계 인사들이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마지막 국회의장을 지내고 현재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 전 의장은 오전 2시 30분쯤 처음으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상도동계 막내였던 김 대표도 이날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날이 밝자마자 빈소를 찾아 오열했다. 손이 떨렸는지 불붙인 향을 바닥에 떨어트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나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며 “그는 최초의 문민정부를 연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재임 중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위대한 개혁 업적을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이들은 뒤이어 장례식장을 찾은 서 최고위원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등 상주와 마찬가지로 조문객을 맞았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신 박찬종 전 의원은 “직정경행(直情徑行·생각한 것을 꾸밈없이 행동으로 나타냄)의 신념의 지도자, 안식하소서”라고 명복을 빌었다. 상도동계와 정치적 협력 관계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에서는 한화갑 전 의원이 참석했다. 그는 “오늘같이 사회가 복잡하고 대립하면서 과거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필요할 때 이런 분을 잃게 돼 참 아쉽다”고 밝혔다.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포함한 다른 동교동계 인사들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23일 함께 조문할 계획이다. 권 고문은 한 언론과의 통화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항상 약속 장소에 15분 먼저 와 계셨다. 집에 온 손님에게는 손수 커피나 차를 끓여 대접했다”고 회고했다. ‘이명박 정부’ 인사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임태희 전 대통령 실장, 김효재 전 정무수석, 이동관 전 홍보수석,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 ‘친이(친이명박)계’는 이 전 대통령이 오전 11시쯤 장례식장 입구에 도착하자 동행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간 이 전 대통령은 빈소에 15분가량 머물렀다. 이 전 대통령은 문상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문재인 대표 등 새정치연합 지도부와 조우했지만 악수만 나눈 뒤 바로 헤어졌다. 문 대표는 빈소를 방문한 뒤 침통한 표정으로 “중·고교 선배이시고 (제가) 동향 후배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고인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좀 더 비통하다”고 말했다. 그는 트위터에 “민주화의 큰 산이었고 문민정부를 통해 민주정부로 가는 길을 연 그의 서거를 애도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오후에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과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 장의(葬儀) 위원장으로 결정된 황 총리는 방명록에 ‘민주화를 이루시고 국가 개혁을 이끄신 발자취를 우리 모두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귀를 남기고 20분간 유족과 장례 절차를 상의했다. 청와대에서는 이병기 비서실장과 현기환 정무수석이 빈소를 찾았다. 주요 여야 정치인도 빈소로 몰려들었다. 새누리당에서는 원유철 원내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이인제 최고위원 등이 모습을 보였고 새정치연합에서는 정세균 의원을 시작으로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전 의원, 안철수 의원, 손학규 전 상임고문 등이 고인을 기렸다.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국회에 입성한 손 전 고문은 칩거 중인 전남 강진 토담집에서 서울로 상경해 “현대 민주주의 역사라고 하면 김영삼 정부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으로 생각된다”며 명복을 빌었다. 안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씀처럼 통합과 화합을 위한 정치로 국민으로부터 다시 신뢰받는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당초 24일 문 대표가 제안한 문·안·박(문재인·안철수·박원순) 연대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로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 이후로 미룰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정부가 영결식을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하기로 하면서 국회 본회의도 오전 10시로 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본회의는 통상 오후 2시에 열리지만 시간이 겹치면서 여야가 모처럼 의견을 같이한 셈이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뇌졸중·협심증으로 입원 반복”

    “뇌졸중·협심증으로 입원 반복”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치의인 오병희(62) 서울대병원 원장은 22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에서 “과거 반복적인 뇌졸중, 협심증, 폐렴 등으로 수차례 입원했다가 지난 19일 고열로 입원했다”며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이 겹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다음은 오 원장과의 일문일답. →어떤 상황이었나. -(김 전 대통령은) 동맥경화 때문에 심장 혈관이 막힌 부분이 있어 과거에 여러 차례 시술을 받았다. 패혈증과 같은 급성 스트레스가 겹쳐 심장 기능이 갑자기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스텐트 시술을 하는 등 혈관 관련 병이 많았다. 지병이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거하기 전에 의식이 명료했던 시점은 언제인가. -지난 19일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어느 정도 의식은 있었다. 갑자기 많이 악화돼 입원하게 됐다. 입원 당시 고열과 함께 호흡곤란 증상이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질 때는 의식이 없었나. -의식의 정도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된다고 보고 중환자실로 옮겼다.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는지. -(김 전 대통령이) 워낙 고령이고 중증 질환이 반복됐다. 중환자실에서 최선의 치료를 했으나 심장 기능이 회복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8, 2009년부터 뇌졸중이 있었다. 가장 큰 뇌졸중은 2013년 4월에 있었다. 이후 18개월 정도 입원했고 그 후에는 통원 치료를 했다. 상황에 따라 입원하기도 했으며 3~4년 정도 제가 직접 진료했다. →서거 직전에 누가 곁에 있었나. -저를 포함한 의료진과 가족들이 있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민주화 이끈 큰 어른” 아이들 손잡고 문상

    “민주화 이끈 큰 어른” 아이들 손잡고 문상

    22일 새벽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오랜 군사정부 시대를 종식시키고 ‘문민’(文民) 정부를 구현해 낸 민주화 투사로서 그의 행보가 다시 한번 회자되는 한편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등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들에 대한 평가들도 나왔다.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초등학생 자녀들과 함께 빈소를 찾은 최호용(45·서울 성북구 안암동)씨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23일간의 단식도 마다하지 않은 큰 어른의 국상”이라며 “역사의 흐름도 배우고 견문도 넓히게 할 겸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이모(80·여·서울 서초구 반포동)씨도 “너무도 존경하는 분이라 몇 번 자택에도 찾아갔는데 새벽에 뉴스를 보고 놀라서 일찌감치 찾아왔다”며 “정직하고 양심이 바른 저런 분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 포털의 뉴스 댓글 등에는 고인의 업적에 대한 회상이 이어졌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김 전 대통령 부고를 알리는 뉴스에는 “금융실명제와 전직 대통령 청문회 등 민주주의를 실현한 고인을 존경합니다” 등 댓글이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다. ‘좌우 진영 논리에 관계없이 추모하고 존경해야 할 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대학원생 조은상(30)씨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어느 진영에서나 완전한 숭배나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현대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앞으로 함께 회고하고 토론해야 할 인물”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박모(36·여)씨는 페이스북에서 “김 전 대통령이 ‘IMF 사태’(1997년 말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인 양 몰아대는 주장이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민주화의 세례를 온전히 받은 세대로서 그가 어떤 지도자보다 열정적이었고 자존심과 철학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고 애도했다. 직장인 송수근(44·서울 구로구)씨는 “하나회를 숙청해 군인이 정치에 더는 개입하지 못하게 싹을 자른 일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장면이 선명하다”고 회상했다. 시민사회단체들도 금융실명제나 공직자윤리법 제정 등 고인의 생전 업적을 언급하며 ‘오늘날 필요한 시대 정신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은 “김 전 대통령은 결단력, 추진력에 있어 최고의 국가 지도자였다”며 “오늘날도 공무원 연금 개혁이나 노동 개혁 등 개혁 어젠다가 잘 추진되지 않고 있는데 당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킨 금융실명제를 실현시킨 건 지하 경제에 정의를 세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연합 사무총장은 “고인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형식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애쓴 것 외에 집권 이후 사회 투명성 제고를 위한 요소들을 찾아내 실천했다”면서도 “그러나 사회·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해 임기 말에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은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65년 반려자 잃은 손명순 여사 “춥다”

    65년 반려자 잃은 손명순 여사 “춥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65년 반려자’ 부인 손명순 여사는 22일 오전 큰 충격을 받은 듯 침통한 표정으로 빈소를 찾았다. 검은 상복 차림으로 휠체어를 타고 이날 오전 10시 15분쯤 빈소에 도착한 손 여사는 거친 숨을 내쉬며 차남 현철씨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의 도움을 받아 입장했다. 손 여사는 내실에서 등받이 쿠션을 찾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전 7~8시쯤 서거 소식을 접한 손 여사는 “춥다, 안 추웠는데 춥다”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셋째 딸 혜숙씨가 전했다. 손 여사는 빈소 내실에 6시간 머물다 오후 3시 54분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손 여사는 이화여대 3학년 재학 중 동갑내기였던 김 전 대통령과 중매로 결혼한 이후 정치적 고난과 영광을 함께했다. 손 여사는 이날 새벽 평생 해로한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현철씨는 기자들에게 “제가 아침에 말씀드리고 왔다”면서 “쇼크가 올 것 같아서 (새벽 서거 때는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결혼 60주년이었던 2011년 회혼식 때 “인생에서 가장 잘한 두 가지는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한 것과 60년 전 아내와 결혼한 것”이라며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편인 저를 높여 줬다. 화를 잘 내는 저에게 언제나 져 줬다”고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맹순이(명순이)가 예쁘고 좋아서 60년을 살았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측근들도 “YS가 정치 9단이라면 손 여사는 내조 9단”이라며 손 여사의 내조가 김 전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민주화 ‘巨山’ 떠나다…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1927~2015

    민주화 ‘巨山’ 떠나다…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1927~2015

    우리 국민에게 군부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고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금융실명제를 도입했으며 한때 철권을 휘둘렀던 전직 대통령들을 법정에 세우고 일제 잔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과감히 해체했던,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지극히 무모해 보였던 개혁을 무섭게 밀어붙였던 인물이 영원히 잠들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88세로 서거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이어 이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민주화를 주도하며 대한민국 정치의 격동기를 양분해 이끌었던 ‘양김(兩金) 시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저물게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쯤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사망에 이르렀다고 오 원장은 설명했다.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 옆에는 차남 현철씨 등 가족이 자리해 임종했으나 부인 손명순 여사는 곁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이명박,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전·현직 대통령들이 애도를 표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등 여야 지도부는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조의를 표하는 등 사회 각계에서 애도 행렬이 이어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등 해외 주요 인사들도 조의를 전했다. 외교부는 김 전 대통령 조문소를 세계 160여개 재외공관에 설치하기로 했다. 현철씨는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을 묻는 조문객들에게 “사실 2013년 입원하셔서 말씀을 잘하지 못하시고 필담으로 글씨를 좀 쓰셨는데, 평소 안 쓰시던 ‘통합’하고 ‘화합’을 딱 쓰셨다”면서 “무슨 의미냐고 여쭤 보니 ‘우리가 필요한 거라고, 우리가 필요한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대화를 끝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필담을 포함해 일절 대화가 불가능했다고 현철씨는 덧붙였다. ‘통합’과 ‘화합’이 사실상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이었던 셈이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 금융실명제·공직 재산공개… OECD 1년만에 외환위기

    금융실명제·공직 재산공개… OECD 1년만에 외환위기

    ■ YS가 남긴 功 김영삼 전 대통령도 국내외의 다른 모든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功)과 과(過)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역사적인 평가와 재평가가 계속 이어지겠지만 김 전 대통령 시절의 대표적인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 도입’ ‘군 사조직(하나회) 숙청’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일제 잔재 청산’ 등이 꼽힌다.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등도 주요 성과로 기록됐다. 김영삼 정부의 첫 번째 업적으로 금융실명제를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모든 금융 거래를 실제 명의로 하도록 하는 제도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거액 어음 사기 사건’ 발생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됐다. 제도 도입 전에는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으로도 금융 거래가 가능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음성적 거래가 심각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했다. 그는 당시 “국회의 법 개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금융시장 동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긴급명령’ 방식을 택했다”고 밝혔다. 또 “금융 거래에서 부정부패, 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해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돈’을 걷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금융실명제는 부동산 실명제로 이어졌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자금이 부동산 투기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1995년 1월 6일 부동산 거래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다. 입법도 단 3주 만에 이뤄졌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대대적인 정치 개혁에 나선 김 전 대통령은 군의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했다. 하나회는 1963년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이다.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군부세력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0일 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멤버였던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다. 다음날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웃었다고 한다. 이어 군부 실세들이 줄줄이 경질됐다. 모두 42개의 별이 날아가며 군사 정권의 종식을 알렸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전격적으로 숙청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베일에 가려 있었던 30조원 규모의 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 비리에도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쇠말뚝 뽑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과 같은 일제 잔재 청산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1993년 8월 광복절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지시가 떨어진 이후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8월 15일 중앙돔 해체가 시작돼 1996년 11월 13일 지상 부분 철거까지 모두 완료됐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취임 사흘째인 1993년 2월 27일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의 재산을 공개했다. 17억 7822만 6070원이었다.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의 첫 출발점이었다. 대통령이 솔선수범하자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군 장성, 판검사들이 잇따라 재산을 공개했고 이 과정에서 전·현직 국회의장의 부정 축재 의혹이 드러나기도 했다. 고위 관료들의 부동산 투기 정황도 대거 노출됐다. 또 청와대 국무회의나 각종 회담 자리에서 제공된 ‘칼국수’는 개혁의 상징이 됐다.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정상외교 확대, 지방자치제 부활, 2002년 월드컵 유치 등도 김 전 대통령이 일궈낸 성과다. 현행 초·중·고교에서부터 대학까지의 교육제도 기틀을 잡은 1995년 5·31 교육개혁도 김영삼 정부의 공으로 평가된다. 민선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켜 지방분권 시대를 연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 YS가 남긴 過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선진국으로의 진입에 대한 기대감은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켰지만 동시에 금융위기 사태를 초래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패착으로 인식된다. 김영삼 정부는 9%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적극적인 시장 개방이 이뤄지자 1996년 12월 OECD에 가입했다. 대한민국이 6·25전쟁의 상흔을 딛고 40여년 만에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고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여권은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야권은 “외화 출자, 개발도상국 지원 등 의무 사항이 많다”며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OECD 가입은 1년 만에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방만한 경제 운영과 부실한 대처는 결국 ‘외환위기 사태’를 불러왔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았다. 삼미와 기아자동차, 쌍방울, 해태,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연이어 쓰러졌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훌쩍 넘었다. 해외 금융기관들의 부채 상환 요구가 쇄도했고 정부는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 유예)을 가까스로 면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비판이 김 전 대통령과 한국에 쏟아졌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11월 22일은 공교롭게도 18년 전인 1997년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의 개인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으로서도 잊지 못할 ‘역사적인 날’이 된 셈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공기업 민영화와 재벌 정책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외적으로 공정 거래를 강조하면서도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대재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세계화’ 역시 방향 설정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만 생기면 내린 고위 공무원 경질이라는 ‘충격적 처방’은 관가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과도한 사정은 역풍을 가져왔다. 정권 말 정작 자신의 차남인 현철씨가 알선 수재·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수감되면서 김 전 대통령의 부패 척결 드라이브는 빛이 바랬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반기문의 ‘조문 전화’

    반기문의 ‘조문 전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조의를 표했다. 반 총장은 이날 오후 3시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 전화를 걸어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 3분간 통화했다. 반 총장은 “회의 때문에 당장 한국에 갈 수 없어 미안하다”면서 “한국에 가면 꼭 찾아뵙겠다”고 말했다고 현철씨가 전했다. 반 총장은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앞장선 분”이라며 애도의 뜻을 전했으며 손명순 여사의 건강을 걱정하며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거듭 당부했다고 현철씨는 덧붙였다. 이에 앞서 반 총장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참석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한 직후 발표한 ‘조문 메시지’에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사회의 투명하고 건전한 발전을 위해 과감한 개혁을 이룩하신 분”이라며 애도했다. 반 총장은 김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제1차관보를 거친 뒤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현철씨는 “고인이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반 총장에 대해 애정을 갖고 계셨다”면서 “반 총장도 (한국에) 오시면 항상 (고인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민주화 상징 인물” “임기말 경제 위기”

    주요 외신들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을 긴급 기사로 타전했다. 외신들은 대체로 ‘한국의 민주화 지도자 출신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각지 한인회가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외신들은 야당 대표 시절의 민주화 여정과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을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고루 강조했다. AFP 등 유럽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이 군부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출범시킨 대목에 주목했다. 영국 BBC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가택연금을 당했던 사실과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의 북핵 시설 공습에 반대했던 일화를 전했다. 프랑스 일간 르파리지앵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1993년 한국에서 군사정권을 끝내고 (실질적인) 민간정부의 시대를 처음 열었다”고 보도했다. 한편으로 외신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상황이 초래되며 그가 대통령 임기 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도 비중 있게 다뤘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반부패 개혁을 추진 중인 중국의 언론들은 문민정부 시절 군 개혁 및 반부패 개혁 정책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중국신문망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인사를 소개하며 “김 전 대통령이 반부패, 청렴을 기치로 개인의 배경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실천했다”고 보도했다. 해외 한인회들도 잇따라 애도의 뜻을 밝혔다. 김훈 재외동포언론인협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에 항거해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내신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이라면서 “가슴 깊이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박우민 재영 한인여성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신 분이란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라며 명복을 빌었다. 외교부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사실을 재외공관에 통보하고 조문소 설치를 지시했다. 유제헌 재독한인총연합회 회장도 “어려운 시절, 젊어서부터 정치에 입문해 역경을 거쳐 승리했던 분이라고 본다”면서 “잘한 일도, 또한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임기 내내 美와 ‘대북 갈등’… 동맹은 강화

    임기 내내 美와 ‘대북 갈등’… 동맹은 강화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미국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과 함께 방송인 CNN, ABC 등이 서울발로 긴급하게 보도했다. 이런 가운데 NBC는 김 전 대통령과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빌 클린턴(69) 전 미국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북 정책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지만 한·미 동맹 강화에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93년 초 한달 간격으로 집권한 김 전 대통령과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닥친 난관은 북한 핵 문제였다. 김 전 대통령의 5년 재임 기간 내내 미국 대통령은 클린턴이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미신고 시설 두곳의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벌어진 ‘1차 북핵 위기’로 한·미 간 대북 협상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이자 민주당 대선 유력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이 그해 7월 방한하자 김 전 대통령은 좌우명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직접 쓴 휘호를 건넸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북·미 회담에 대한 큰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1994년 초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둘의 관계는 더 불편해졌다. 미국은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를 추진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돌변했다. 당시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 계획까지 검토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미국이 주한 민간인 소개령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이를 전쟁 임박 징후로 이해하고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를 불러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 전쟁을 할 수는 없다”며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했다. 이들은 북핵 문제로 갈등을 겪었지만 개인적 우의를 유지하며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1993년 한국 방문에 대해 “영빈관에 묵었는데 그곳 실내 수영장에 몸을 담그려 하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며 “한·미 동맹에 대한 감사와 그것을 유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화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한국 현대사의 ‘거목’

    [화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한국 현대사의 ‘거목’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永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서울대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88세로 고령에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 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고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겼다. 지난 10일 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17일까지 입원했다 퇴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의 ‘양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김영삼 서거]”나도 얼마 안남았어” 홀로남은 김종필의 눈물

    [김영삼 서거]”나도 얼마 안남았어” 홀로남은 김종필의 눈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였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8시 50분 휠체어를 타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들고 10초 정도 눈을 감은 뒤 양손의 깍지를 끼고 묵념을 올렸다.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3김 중 김 전 총리만 홀로 남게 됐다. 조문을 마친 김 전 총리는 내빈실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상도동계였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등과 김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김 전 총리는 “아침도 마음대로 못했다”면서도 현철씨에게 수차례 “자당(慈堂) 을 잘 챙겨 달라”는 당부를 반복하며 부인 손명순 여사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회자정리하는 말이 떠오른다”며 생각에 잠겼다. 김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을 회상하며 “하여간 신뢰의 (상징인) 분이다. 다른 사람이 못 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래도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계시니까’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허탈함이 있다”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공개석상에서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편인 김 전 총리는 “끝까지 아버지를 모시던 충신은 어디 갔느냐”고 퇴임 후 줄곧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김기수 전 비서관을 찾은 뒤 그에게 “잘 모셨다. 긴 세월 일편단심 잘 모셨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김 전 총리는 현철씨에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잊히지 않는 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면서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얘기다.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라고 밝혔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들에게 보내 줬던 ‘민주 멸치’를 언급하며 “여야가 나뉘어 있는데, 멸치를 매년 보내 주셔서 잘 먹었다”면서 “정치적인 찬반을 제쳐 놓고 멸치가 한창 잡힐 때니 먹어 보라”라고 권하기도 했다. 1926년생인 김 전 총리는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최근 회복됐지만 여전히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주변에서 건강을 묻자 “(김 전 대통령이) 단식을 여러 번 하셨다. 밥 못 먹으면 국민은 불행이고, 그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라며 희미하게 웃었다.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YS 서거]전국 각지에 분향소·26일까지 관공서 조기 계양

    [YS 서거]전국 각지에 분향소·26일까지 관공서 조기 계양

      정부는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국가장 기간인 오는 26일까지 관공서에는 조기(弔旗)가 게양된다. 아울러 온 국민이 함께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유족들과 협의를 거쳐 전국 각지와 재외공관에 분향소를 설치하도록 했다. 정부 대표 분향소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마련된다. 황교안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장례위원회는 국가장의 방법·일시·장소, 묘지 선정 및 안장, 영구(靈柩)의 안치·보전, 예산 편성·결산 등 장례의 대부분 사항을 관장하게 된다. 국가장 비용은 국고 부담을 원칙으로 하지만, 조문객 식사비나 노제·삼우제·49재 비용, 국립묘지 외의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 한편 현행 ‘국가장법’ 이전엔 국장을 치를 경우 영결식 당일을 관공서 휴무일로 결정할 수 있었다. 국민장엔 해당하지 않았다. 국장은 9일 이내, 국민장은 7일 이내로 못박았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은 9일간,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은 6일간 치러졌다. 2006년 최규하,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은 국민장이었다. 최 전 대통령은 5일장, 노 전 대통령은 7일장이었다. 1965년 이승만, 1990년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예우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지난해 11월 시행된 국가장법은 종전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한 것이다. 국장과 국민장을 국가장으로 통일하면서 법 이름도 바뀌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永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서울대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88세로 고령에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 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고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겼다. 지난 10일 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17일까지 입원했다 퇴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의 ‘양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5·6·7·8·9·10·13·14대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에서도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과 최다선(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함께 갖고 있다.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를 다섯 차례나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됐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에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상징됐던 양김의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역사를 이끌었다.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2월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한 바 있다.그러나 이후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면서 박철언 전 의원과의 대결 끝에 대선 후보가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는 ‘군정 종식’을 선언했고 ‘문민시대’를 열었다. 특히 ‘칼국수’를 즐겨먹는 것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면서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실시,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에 비해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했고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는 등 임기 초반에 누렸던 절대적인 지지를 대부분 상실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이자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의 ‘대부’로 자리하며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 씨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88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긴급 브리핑에서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쯤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하면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오 원장은 설명했다.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 옆에는 차남 현철씨 등 가족이 자리해 임종했으나 부인 손명순 여사는 곁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고령인 데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앞서 지난 10일 검진 차 병원을 찾아 17일까지 입원한 뒤 퇴원했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김홍조와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 경남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된 이후 9선(5·6·7·8·9·10·13·14) 의원을 지냈다.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채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민정당·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합류했고, 박철언 전 의원과 사활을 건 대결 끝에 대선후보를 쟁취했다. 19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역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섰다. 양김의 ‘상도동·동교동’은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둘은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서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해 87년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직선제 개헌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 기반으로 삼은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평생 거르지 않다시피한 새벽 조깅과 영문이니셜 애칭 ‘YS’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거행하고 장지는 현충원으로 하기로 유족 측과 행정자치부가 합의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63), 혜정(61), 혜숙(54)씨, 아들 은철(59), 현철(56) 씨 등 2남 3녀가 있다. 정부는 22일 낮 12시 30분 김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이를 공식 결정할 예정이다.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국가장 진행, 장례위원회 구성, 장지, 영결식과 안장식 등 장례 절차 전반을 심의한다. 국가장 절차는 정부와 유족의 협의 후 행정자치부 장관이 제청하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결정한다. 5일간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면 김 전 대통령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YS 서거]금융실명제 ·하나회 해체 성과, 외환위기 초래 뼈아픈 실정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첫번째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가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모든 금융거래를 실제 명의로 하도록 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현재 은행 예금에서 본인 명의로만 계좌 개설이 가능한 것이 이 제도 때문이다. 제도 도입 전에는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으로도 금융거래가 가능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음성적 거래가 심각했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거액 어음사기사건이 발생하면서 논의가 시작된 금융실명제는 대통령의 ‘긴급명령’ 형식으로 시행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회의 법개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금융시장 동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대통령의 ‘긴급명령’이라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또 “금융거래에서 부정부패·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해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 돈’을 걷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군의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으로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군부세력’ 대부분이 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한지 10여일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멤버였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경질하며 군부 척결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음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이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웃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숙청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42개의 ‘별’이 물갈이 됐고, 하나회는 해체됐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인정부 이후 처음으로 ‘문민 정부’를 표방하며 ‘군사 정권’의 종식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위 공직자와 공직 후보자의 재산공개 의무화,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정상외교 확대, 지방자치제 부활, 2002년 월드컵 유치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야기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최대 과오로 꼽힌다. 재벌들의 지나친 문어발 확장 묵인과 수출산업 강화, 임금인상, 물가상승, 외화낭비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부실이 원인이 됐다. 1997년 11월 21일 당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국가는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원·달러 환율은 2000원대까지 치솟았고, 대량해고 사태가 빚어졌다. 김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 임기초 국난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임기 초반 90%를 웃돌았던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아들 현철씨 비리와 외환위기 등으로 임기 종반 10%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와 관련,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가입국이 된 것이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선진국 진입’에만 도취 돼 ‘세계화’라는 명분 하에 해외 기업과 자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이 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는 또 공기업 민영화와 재벌정책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외적으로 공정거래를 강조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대재벌’을 탄생시켰고, 이에 중소기업은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문제만 생기면 ‘경질’이라는 ‘충격적 처방’을 내려 개혁적 이미지는 한층 부각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효성에서 적잖은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세계화’ 역시 방향 설정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문민정부의 과감한 민주화 조치 등은 민주주의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평등과 복지 확대에 있어서 소홀했던 것은 과거 정권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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