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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름 속으로, 그 기운 속으로…초록 속으로, 그 고요 속으로

    구름 속으로, 그 기운 속으로…초록 속으로, 그 고요 속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부는 요즘입니다.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싶어 남쪽으로 달렸습니다. 전남 영암. 목포 옆 동네, 서울에서 차로 꼬박 5시간이 걸리는 도시, 어디에서든 월출산이 보인다는 곳.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영암에 머무는 내내 시선의 끝에는 언제나 월출산이 걸렸습니다. 일렬로 늘어선 바위 봉우리가 어찌나 힘차고 옹골차던지요. 너른 들판을 품에 안은 바위산은 땅에서 훅 솟아난 듯 하늘에서 툭 떨어진 듯 신비로웠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월출산은 기가 대단했습니다. 목적지인 구름다리에 이르기까지 바위를 타다가 단풍을 밟다가 기암괴석을 올려다보느라 심장이 쉴 새 없이 쿵쿵거렸습니다. 구름다리에서 마주한 바위 봉우리는 영암을 지키는 수호신인 양 굳건해 보였습니다. 역동적인 늦가을 산행이었습니다.영암과 월출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영암에 오면 이 말을 십분 이해하게 된다. 우선 영암 어디에서나 월출산이 보인다. 고깔을 가로로 이어 붙인 듯한 능선은 고요한 마을을 감싸 안는다. ‘신령한(靈) 바위(巖)’를 뜻하는 영암이라는 지명도 월출산에서 비롯됐다. 월출산 구정봉에 흔들바위 3개가 있었는데, 바위들이 산 밑으로 떨어지자 그중 하나가 스스로 올라왔다고 한다. 말 그대로 ‘신령한 바위’다. 월출산은 바위산이다. 소백산맥의 한줄기가 서남해안 평지에 우뚝 솟아났다. 800m가 조금 넘는 산이라고 얕봤다가는 큰일 난다. 바위 능선이 날카롭고 깎아지른 듯한 급경사의 절벽이 매서운 기를 내뿜는다. 때문에 정상 천황봉(809.8m)을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다. 다행인 점은 월출산의 명물, 구름다리가 산을 찾는 이에게 적당한 목적지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지상 120m 높이에 설치된 다리에서 아스라하게 이어지는 산의 능선과 기암괴석의 위용을 마음 벅차도록 감상할 수 있다.●화승조천의 산세… 원적외선 내뿜는 화강암 여기는 영암군청 근처의 식당.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주변에서 월출산에 갔다 왔느냐고 한마디씩 한다. “영암에 왔으면 월출산은 꼭 가봐야 한다”, “난 한 달에 한 번씩은 오른다”, “산의 기가 무진장 세다”며 저마다 월출산에 얽힌 소회를 푼다. 영암 사람들 말이 빈말은 아니다. ‘택리지’를 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월출산을 두고 “화승조천(火昇朝天)의 지세”라고 했다. 산세가 아침에 하늘로 타오르는 불꽃 같다는 말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아침에 화르르 타는 불꽃이니 기가 약할 리 없다. 게다가 월출산을 이루는 화강암의 80%는 사람에게 이로운 원적외선을 내뿜는 맥반석이란다. 산을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천황사 주차장을 출발해 구름다리를 지나 천황봉을 찍고 도갑사로 내려오는 8.9㎞ 코스, 도갑사에서 억새밭과 구정봉을 지나 전남 강진군 쪽의 경포대로 내려오는 7.1㎞ 코스, 천황사 주차장에서 천황봉까지 올랐다가 천황사로 돌아오는 6.7㎞ 코스 등이다. 등산 초보자에겐 하나같이 녹록하지 않은 거리와 난도다. 산과 친하지 않거나 가벼운 등산을 하고 싶은 이들은 구름다리를 목적지로 삼아도 좋다. 왕복 2시간 반의 산행은 월출산의 정기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아찔한 구름다리 위에서 펼쳐진 장엄한 풍광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30분쯤 걸어 본격적인 출발점, 천황사를 마주한다. 천황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바람폭포와 구름다리 코스가 나뉘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두 코스 모두 구름다리까지의 거리는 1㎞. 걸리는 시간은 40분 정도로 비슷하지만 길이 품은 풍경은 사뭇 다르다. 바람폭포 코스는 폭포를 벗하고 물소리를 들으며 산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구름다리에 가까워질수록 철 계단이 이어져 등산하는 재미가 떨어진다. 구름다리 코스는 돌과 바위가 첩첩이 쌓여 있다. 바위를 연거푸 오르느라 막간에는 다리가 뻐근할 정도지만 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흡수하기에 제격이다. 바위가 낸 길을 따르기를 1시간쯤 됐을까, 새빨간 구름다리가 보인다. 회백색 봉우리 사이에서 대번 도드라지는 색이다. 다리는 월출산의 매봉과 사자봉을 잇는다. 1978년에 다리가 만들어지며 매봉에서 사자봉까지 34시간이나 걸리던 것이 5분으로 단축되었단다. 다리는 시간이 지나며 노후화되어 잠시 철거되었다가 2006년에 재개통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다리의 폭은 1m. 예전 폭에서 두 배 가까이 넓어져 지나가는 사람끼리 눈인사를 나누거나 둘이 걷기 맞춤해졌다. 구름다리는 120m 높이의 수직 절벽에 걸쳐져 있다. 땅에서 올려다보는 것만도 아찔한데 다리를 건널 때 바람이 불면 살짝 흔들리기까지 해 스릴이 더욱 고조된다. 안개가 짙은 날은 공중을 걷는 듯한 기분이란다. 구름다리에 첫발을 내디딜 땐 모두가 신중하다. 발뒤꿈치에 힘을 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다. 다리를 반쯤 걸었을 때 고개를 들고 마주한 풍경은 장엄함 그 자체다. 앞뒤로 수직 절벽이 첩첩이 늘어선 모습에 무협지 속 산중에 들어선 듯하다. 운무가 짙은 날에는 선계의 풍경과 닮았으리라. 단풍으로 군데군데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봉우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그 앞에 선 인간은 압도해오는 풍경을 두 눈에 얌전히 담을 수밖에 없다. 구름다리가 있는 부근은 골이 진 터라 바람이 제법 매섭다. 위풍당당한 봉우리는 바람에 꿈쩍하지 않은 채 영암의 들판을 내려다본다. ‘신령한 바위’, 영암의 지명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F1 선수처럼…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 정적이 깨진다. 굉음이 울려 퍼진다. 차들의 양보 없는 레이싱 한판이 한창인 이곳은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 최정상 모터스포츠인 F1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국제 자동차 경주장이다. 185만 3천여㎡의 광활한 대지에 서킷 5615㎞, 12만 석의 관람석, 미디어센터 등을 갖췄다. 일정이 맞으면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KIC)에서 열리는 KIC트랙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경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레이서가 된 듯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 맞은편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카트 레이싱을 즐길 수 있는 카트경기장이 있다. F1 경기의 아마추어 버전이랄까. 카트는 1인승과 2인승, 두 종류가 있는데 미취학 아동은 보호자와 2인승 카트를 타면 된다. 카트는 F1 경기용 차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차체와 지면의 간격은 고작 8㎝. 트랙을 내달리는 바퀴의 진동이 온몸에 전해질 만한 거리다. 카트 작동은 단순하다. 오른쪽 페달은 엑셀, 밟으면 앞으로 나아간다. 왼쪽 페달은 브레이크, 밟으면 멈춘다. 계기판이 없어 카트를 타며 속도를 조절한다. 카트경기장 트랙은 F1 서킷을 축소한 형태다. 쭉 뻗은 직선 코스, 코너링을 돌 수 있는 S자 코스를 고루 갖췄다. 직선 코스에서 속도를 힘껏 내다가 S자 코스 진입로에서 속도를 살짝 줄이는 등 탈수록 요령이 생겨 탑승 시간 10분이 짧게만 느껴진다. 중년의 아마추어 레이서들은 아이의 얼굴로 돌아간다. 함박웃음을 짓다가도 옆 카트가 추월이라도 할라치면 이를 악물고 속도 내기에 집중한다. 트랙을 달리는 동안 그렇게 일상의 걱정거리를 날려 보낸다.● 초록빛 비밀의 다원 ‘덕진차밭’ 여행깨나 다녀본 이들의 바람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풍경은 모자람이 없는 명당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들에게 덕진차밭은 반가운 여행지다. 영암 군민도 “어디 가신다고요?”하고 되물을 만큼 인지도가 낮다. 전남 보성이나 경남 하동의 이름난 다원에 비해 크기도 아담하다. 그럼에도 덕진차밭이 가볼 만한 건 월출산이 정면에 보이는 풍광과 차밭의 한갓진 분위기 때문이다. 차밭을 찾아가는 건 쉽지 않다. 인터넷 글마다 주소도 제각각이다. 몇 번 허탕을 치다가 군청 관광과에서 목적지를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143-1번지’ 혹은 ‘운암저수지’로 설정하라는 답변을 들은 뒤에야 비밀처럼 숨겨진 차밭이 나타났다. 덕진차밭은 백룡산 자락에 있다. 한국제다에서 1979년에 조성했으니 40년 가까이 됐다. 이곳에서 나는 차의 90%는 재래종, 나머지는 외래종이다. 비스듬한 언덕에 초록 이랑이 층층이다. 봄이나 초여름 차밭이 싱그러운 분위기라면 늦가을 차밭은 추수가 끝난 들녘처럼 고요하다. 인적이 드문 차밭 사이를 걷다 보면 칙칙했던 마음에도 초록 물이 오른다. 이곳을 찾기에 최적의 시간대는 차밭에 안개가 자욱하고 월출산 능선이 수묵화 같은 선을 그리는 새벽, 최고의 조망점은 차밭 꼭대기 정자다. 너른 차밭과 굽이진 월출산 봉우리가 완벽한 구도를 이룬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 서울에서 자동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와 논산천안고속도로를 지나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호남고속도로 논산분기점부터 1시간 정도를 달리다 ‘나주, 운수IC’ 방면으로 진입한다. 무안광주고속도로 운수IC와 빛가람장성로를 지나 왕곡교차로에서 ‘해남, 영암, 국립나주박물관’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천황사교차로에서 ‘영암, 월출산국립공원, 천황사’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천황사로를 따라가면 월출산국립공원이다. →맛집 : 영암은 1980년대에 간척지가 되기 전까지 항구를 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바다에서 난 재료가 들어간 음식이 많다. 독천식당(472-4222)의 갈낙탕이 대표적이다. 갈비탕 국물에 세발낙지 한 마리가 통으로 들어간다. 남도한정식이 당긴다면 파랑새정원(461-2021)이 어떨까. 젓갈 정찬을 주문하면 생선구이를 중심으로 젓갈과 계절 반찬이 한 상 가득 깔린다. 돌쇠정(464-3337)의 연잎 떡갈비정식은 떡갈비를 연잎에 싸서 찐 다음 구워내 잡냄새가 없다. →잘 곳 : 영암에는 정갈한 전통 한옥집이 많다. 월인당(471-7675)은 ‘달빛이 도장처럼 찍히는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월출산 사이로 솟은 달빛이 유난히 환하다. 객실에 개별 화장실과 취사시설이 있고, 주인장이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준다. 호텔현대목포(463-2233)는 영암금호방조제 입구에 위치해 영암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이 일품이다. 전 객실에 전망 발코니가 있어 어디에 묵어도 풍경이 보장된다.
  • [포토] ‘YS 서거 3주기 추모식’에 모인 정치수장들

    [포토] ‘YS 서거 3주기 추모식’에 모인 정치수장들

    이낙연 국무총리(왼쪽)가 22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에 앞서 문희상 국회의장 등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서울포토]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

    [서울포토]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에서 김현철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이 유가족을 대표하는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여성 독립운동 예우받길“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여성 독립운동 예우받길“

    임정 비서장 차이석 부인 홍매영 서훈 신청 8년만에 인정받아 백범 선생 중매로 32살차 차이석과 결혼 독립당 당원으로 광복군 임정 활동·인정 아들 영조씨 “묘소 현충원 이장이 남은 일” “2010년 2월에 어머니(홍매영 여사)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8년이나 기다렸습니다. 그간 정권이 바뀌고 여성 독립운동가도 인정받는 세상이 왔네요. 평생의 큰 소원을 이뤘습니다.” 차이석 선생(임시정부 비서장)과 홍매영 여사의 아들인 차영조(74)씨는 19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남기신 한국독립당(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차이석 선생 등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 당원증으로는 독립유공자 인정이 안 된다고 수차례 들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이번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에 드디어 인정받게 돼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의 명패도 추후 전달할 계획이다. 홍 여사는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생활과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한책임한국광복군군관소비합작사 사원으로 재직했고 이곳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을 지원한 공이 인정됐다. 평안북도 의주에 살던 홍 여사는 남편의 제안으로 임정으로 가기 위해 나무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중 남편이 중국 국경인 단둥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연행됐다. 홍 여사는 첫 중국행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5살·2살인 두 아이를 데리고 중국 시안의 광복군 진지에 도착했다. 차씨는 “어머니는 광복군으로서 훈련을 받았고 1942년 그곳에 들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32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또 다른 독립운동’이라고 했었다고 어릴 때 어머니께 들었다”고 덧붙였다. 1944년 차씨가 태어났고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이 됐지만 차이석 선생은 귀국 준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다 9월 9일에 숨을 거뒀다. 세 아이를 데리고 1946년 귀국한 홍 여사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서울 충무로 1가 한미호텔)에서 거주하며 노상에서 불법 담배장사를 했다. 차씨는 “마약 단속하듯 단속반이 발로 차고 지나가기 일쑤였고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며 “오히려 취업 때 불이익을 받을까 광복군 경력을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가족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충남 부여로 피난을 갔다. 차씨는 “형편이 힘드니 형과 누나는 고아원으로 갔고 김구 선생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나를 차(車)씨가 아닌 신(申)씨로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며 “6학년 때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학교를 관두고 아이스크림 행상이나 술집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홍 여사는 1979년 운명했고 부여의 작은 교회 공동묘지에 묻혔다. 차씨는 “독립유공자가 됐으니 현충원으로 모시는 게 남은 일”이라며 “독립운동에 나섰던 남편을 돕고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고, 남모르게 독립투사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기워준 여성도 합당한 예우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 어머니가 인정받는 날 왔네요”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 어머니가 인정받는 날 왔네요”

    “2010년 2월에 어머니(홍매영 여사)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8년이나 기다렸습니다. 그간 정권이 바뀌고 여성 독립운동가도 인정받는 세상이 왔네요. 평생의 큰 소원을 이뤘습니다.”차이석(임시정부 비서장) 선생과 홍매영 여사의 아들인 차영조(74)씨는 19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남기신 한국독립당(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차이석 선생 등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 당원증으로는 독립유공자 인정이 안 된다고 수차례 들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이번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에 드디어 인정받게 돼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의 명패도 추후 전달할 계획이다.홍 여사는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생활과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한책임한국광복군군관소비합작사 사원으로 재직했고 이곳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을 지원한 공이 인정됐다. 평안북도 의주에 살던 홍 여사는 남편의 제안으로 임정으로 가기 위해 나무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중 남편이 중국 국경인 단둥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연행됐다. 홍 여사는 첫 중국행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5살·2살인 두 아이를 데리고 중국 시안의 광복군 진지에 도착했다. 차씨는 “어머니는 광복군으로서 훈련을 받았고 1942년 그곳에 들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32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또 다른 독립운동’이라고 했었다고 어릴 때 어머니께 들었다”고 덧붙였다.1944년 차씨가 태어났고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이 됐지만 차이석 선생은 귀국 준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다 9월 9일에 숨을 거뒀다. 세 아이를 데리고 1946년 귀국한 홍 여사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서울 충무로 1가 한미호텔)에서 거주하며 노상에서 불법 담배 장사를 했다. 차씨는 “마약 단속하듯 단속반이 발로 차고 지나가기 일쑤였고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며 “오히려 취업 때 불이익을 받을까 광복군 경력을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가족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충남 부여로 피난을 갔다. 차씨는 “형편이 힘드니 형과 누나는 고아원으로 갔고 김구 선생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나를 차(車)씨가 아닌 신(申)씨로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며 “6학년 때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학교를 관두고 아이스크림 행상이나 술집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홍 여사는 1979년 운명했고 부여의 작은 교회 공동묘지에 묻혔다. 차씨는 “독립유공자가 됐으니 현충원으로 모시는 게 남은 일”이라며 “독립운동에 나섰던 남편을 돕고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고, 남모르게 독립투사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기워 준 여성도 합당한 예우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유시민 “노무현 비판·부정할 자유 전적으로 존중”

    유시민 “노무현 비판·부정할 자유 전적으로 존중”

    “재단도 바다처럼 품 넒은 모임 되어야”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방하는 행위에 대해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전적으로 존중한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은 16일 노무현재단이 운영하는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노무현 대통령을 비방하는 행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표현의 자유란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과 업적을 비판하고 부정할 자유를 포함한다는 것을 깊게 인식한다”고 덧붙였다.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와 보수논객을 중심으로 퍼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글, 이미지 등에 대한 대응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유 이사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해 거짓이나 부정확한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조처하겠다”며 “불합리하거나 잘못된 견해를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견해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조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명백히 노 전 대통령을 모욕할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에는 단호하게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유 이사장은 밝혔다.유 이사장이 노 전 대통령 비방행위에 대한 대응방침을 분명히 한 것은 일부 회원과 시민들로부터 재단이 이런 행위를 바로잡는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 이사장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노무현재단은 이메일과 홈페이지, 페이스북 등을 통해 330여건의 노 전 대통령 비방 사례를 제보했다. 일부 회원은 재단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면서 후원 중단을 통보하거나 후원금 환불을 요청했다고 유 이사장은 전했다. 유 이사장에 따르면 재단은 지난 2014년 이사회를 열어 노 전 대통령 비방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응방침을 정했다. ▲사회적으로 인지도와 영향력 있는 단체 대표, 정치인, 교수 등의 허위 사실 유포는 엄중 대응한다. ▲언론에 모욕 이미지와 정보를 유포하면 직접 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 사과를 받는다. ▲온라인과 SNS 계정을 통해 명예 훼손 사진과 정보를 유포하는 네티즌에 대해서는 대응하지 않는다. ▲단, 포털 등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공간인 경우 사이트 담당자에게 삭제를 요청한다.유 이사장은 현재 재단이 처한 환경과 과제가 당시와 달라져 대응방침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 달라진 정치의식과 정권 교체 상황, 노 전 대통령의 높아진 위상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유 이사장의 생각이다. 그는 “생시의 노무현 대통령은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이었지만 서거 10주기를 앞둔 지금은 ‘어떤 강물도 마다 않는 바다’가 되셨다”며 “우리 재단도 바다처럼 품이 넓은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은 이와 같은 방침은 재단의 공식 입장이 아닌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회원들의 비평과 제안을 반영하겠다고 덧붙였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31) ‘회장님’보다는 ‘대표’로 불리길 원하는 구광모 ㈜LG 대표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31) ‘회장님’보다는 ‘대표’로 불리길 원하는 구광모 ㈜LG 대표

    구 대표, 구본무 회장의 서거로 40대에 그룹 총수에 올라지주회사 경영자로서 미래준비, 인재투자, 정도경영에 중점낮은 자세로 임하지만 깜짝인사카드로 혁신DNA 이식중 “풍부한 현장경험이 기업 경영의 밑천이다.”  구자경(93) LG명예회장과 고 구본무 선대회장은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현장에서 혹독한 실무경험을 쌓았다. 이런 전통은 구인회 창업주의 뜻에서 이뤄졌다. 구인회 창업주는 “대장간에서 호미 한 자루를 만들때도 수없는 담금질로 단련한다”면서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름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구본무 선대회장은 생전에 그룹 관계자에게 부친의 엄격한 경영수업과 관련해 “아버님은 장남인 나에게 엄하셨다. 동생인 본능, 본준, 본식에게는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지만 장자였던 내게는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등 엄격하게 키우셨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LG의 현장경험 중시 경영수업은 4세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영동고와 미국 로체스터 인스티튜드 공과대를 졸업한 구광모(40) 대표는 지난 2006년 LG전자 재경부문에 대리로 입사했다. LG전자 미국 뉴저지 법인, HE(홈엔터테인먼트)사업본부 선행상품기획팀, HA(홈어플라이언스)사업본부 창원사업장과 ㈜LG 경영전략팀 등을 거치며 제조 및 판매, 기획, 국내외 및 지방 현장 경험을 쌓아 왔다. 2015년 (주)LG 상무로 승진한 이후 LG의 주력 및 미래사업을 탄탄히 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기획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구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경영수업은 속도를 냈다. 올해 초부터 ㈜LG 대표 취임 전까지는 LG전자의 성장사업 중 한 축인 B2B사업본부의 ID사업부장으로서 글로벌 사업을 이끌었지만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한다. 지난 5월 고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6월말 ㈜LG 대표로 취임한 구 대표는 이런 분위기를 감안해서인지 몸을 낮췄다. 지주회사 임직원들로부터 ‘회장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대표’로 불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부 그룹 임원들이 40대지만 그룹의 총수인데 ‘회장’이라는 호칭이 맞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구 대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LG그룹은 지난 6월 29일 ㈜LG 대표이사 회장 선임을 알리는 보도자료에서도 ‘구 대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대표’ 호칭에는 겸손하고 사려깊게 전문 경영인들과 소통하며 경영을 해나간다는 구 대표의 의지가 담겼다. ‘회장’이라는 직위보다는, 지주회사 대표라는 직책이 갖는 의미가 더 강조된 것이다. 이런 구 대표의 낮은 자세는 구본무 회장으로부터 평소 겸손, 배려, 원칙에 대해 자주 가르침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고 그룹 관계자는 설명했다. 구 선대회장은 구 대표에게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잘 듣고, 인재들이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면서 “엘리베이터에서 아는 직원들을 만나면 항상 먼저 인사해라. 모두의 하루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는 등의 당부를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자주 들었다고 한다. 구 대표는 취임 직후 ㈜LG 사내 게시판에 올린 인사말에서 “고객가치 창조, 인간존중, 정도경영이라는 LG Way에 기반한 선대회장의 경영 방향을 계승 발전시키는 동시에,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꾸준히 개선해 시장을 선도하고 영속하는 LG를 만들어 나가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취임 초기 낮은 자세를 견지한 구 대표지만 인사에서는 단호할 정도로 ‘깜짝 카드’를 들고 나왔다. 지난 9일 LG화학 부회장에 ‘외부인사’인 3M의 신학철(61) 수석부회장을 내정한 것이다. LG화학이 외부에서 CEO를 영입한 것은 1947년 창립 이후 사상 처음이다. LG그룹은 신 부회장의 영입과 관련해 “글로벌 사업 운영 역량과 사업전반에 대한 통찰력, 급변하는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면서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적임자로 구 대표가 적극적으로 영입의지를 표명했다”라고 밝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구 대표가 2009~2011년 미국 뉴저지 법인 재직 당시 신 부회장의 혁신적인 리더십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차기 3M 회장 후보였던 신 부회장을 직접 만나 LG맨으로의 영입을 성사시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구 대표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하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지녔으며 실행을 중시한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를 드러낸 셈이다. 구 대표의 신 부회장 발탁은 ‘1회용 반짝기용’으로 그칠지, 아니면 LG가 보수적 색채를 벗고 혁신과 개방으로 전환하는 ‘구광모 새 체제’의 신호탄이 될지 재계에 관심이 쏠려 있다. 이와 함께 구 대표는 이달 초 고 구본무 회장의 ㈜LG 주식 11.3% 가운데 8.8%를 상속받아 기존 6.2%에서 최대주주에 해당되는 15.0%가 돼 명실상부한 그룹의 젊은 총수가 됐다. 구 대표는 연부연납 제도를 통해 앞으로 5년간 나누어 7000억원대로 추정되는 역대 규모의 상속세도 투명하고 성실하게 납부키로 했다. 사실 구 대표는 구본무 선대회장의 둘째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이다. 2005년 7월 아들을 잃은 구본무 회장의 양자로 입적됐다. 입적은 당시 구씨가 가족회의에서 ‘장자경영’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결정됐다. 구 회장이 슬하에 딸 2명만 둔 상황에서 장자의 대를 잇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려면 아들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구 대표의 부인은 식품원료 전문기업인 보락 정기련 대표의 장녀 정효정(36)씨다. 두 사람은 미국 유학중에 만나 교제를 했고 2009년 9월 화촉을 밝혔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박근혜 모친 육영수 여사 숭모제 29일 열려

    박근혜 모친 육영수 여사 숭모제 29일 열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친인 고 육영수 여사를 기리는 숭모제가 개최된다. 충북 옥천군은 매년 이 행사에 지원하던 700만원의 예산 지급을 중단했다. 옥천문화원과 민족중흥회(박정희 기념사업단체)는 육 여사 생일인 오는 29일 옥천 관성회관에서 숭모제를 열겠다고 11일 밝혔다. 이 행사는 2001년부터 시작됐는데 옥천군이 매년 700만원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됐다. 옥천군은 육 여사가 서거한 광복절에 열리는 추모행사에도 예산을 지원했다.그러나 반대 여론이 일자 작년부터 모든 지원을 중단한 상태다. 옥천문화원 관계자는 “고향에서 하는 순수한 추모사업을 정치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말아 달라”며 “후손과 추모단체 등이 모여 조촐하게 기념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옥천군은 지난 2011년 37억 5000만원을 들여 육 여사가 유년 시절을 보낸 생가를 복원하기도 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중국의 눈엣가시 달라이 라마, 후계자 나온다

    중국의 눈엣가시 달라이 라마, 후계자 나온다

    인도에 망명중인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83)의 후계자를 뽑는다. 미국의소리(VOA) 방송 등은 7일(현지시간) “이르면 이달 29일 시작하는 고승(高僧) 위원회에서 후임 선임을 할 수 있다”고 달라이 라마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달라이 라마가 인도 다람살라에서 VOA 등과 가진 회견에서 이같이 밝히면서 자신의 후계자는 ‘고승’이거나 ‘20세 안팎의 티베트 불교 승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1959년 티베트를 떠나 인도 다람살라에 근거지를 두고, 티베트인들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반중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이냐는 것은 중국 정부의 중대한 이해관계이자 국제사회의 관심거리가 돼 왔다. 달라이 라마의 이같은 후계선임 절차 공개는 연고권과 승인권을 앞세운 중국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라고 매체들은 지적했다. 앞서 티베트 망명 정부의 롭상 상가이 총리는 지난 1월 티베트 불교 각파 고승들이 2018년 말 혹은 2019년 초 다람살라에 모여 달라이 라마 15세의 선출 방법 등에 관한 논의에 들어간다고 전한 바 있다. 당시 달라이 라마 15세 경우 현행 윤회전생 제도 외에 로마교황청처럼 고위 성직자인 추기경에 의한 비밀투표 선출, 달라이 라마의 지명 가운데 방식을 선택해 뽑게 될 것이라고 롭상 상가이 총리는 설명했다. 고령인 달라이 라마에 대해 근년 들어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그의 후계를 누가 맡을지에 관심이 커졌다.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독립분자‘로 적대시하는 중국은 달라이 라마 15세를 지명할 권리가 있다고 고집하면서 후계자 선임에 개입할 의사를 확인, 망명 티베트인 사회의 경계감을 불렀다. 달라이 라마도 자신의 사후 중국 정부가 고분고분한 후계자를 뽑아 티베트 통치에 이용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은 현행 ‘티베트 불교 활불 윤회전생 관리법’(活佛轉世管理辦法)에 근거해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등 공인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2011년 정교(政敎) 분리를 선언한 달라이 라마는 2014년 환생을 찾는 방식으로 이어진 티베트 불교의 전통적인 후계자 선정을 더는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달라이 라마는 앞서도 여러차례 “(현임 달라이 라마가) 죽기 전에 후계자를 선정하는 방법이 안정적”이라면서 “과거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달라이 라마 서거 후에 윤회전생 전통에 따라 후계자를 선임할 경우, 수년간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그 사이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 15세 지명을 강행할 우려가 없지 않다고 티베트 인들은 우려해 왔다. 이를 염려해 달라이 라마 본인도 자신의 사후 윤회전생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이재명측이 김부선 고발한 사건 경찰, 불기소 의견 檢송치

    이재명 경기지사 측이 ’여배우 스캔들‘ 의혹을 제기한 바른미래당 김영환 전 경기지사 후보와 여배우 김부선 씨를 고발한 사건에 대해 경찰이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성남 분당경찰서는 지난 1일 이 지사와 관련한 의혹 사건을 마무리하고 검찰에 넘기면서 이 사건도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송치했다고 설명했다. ’이재명 가짜뉴스대책단‘은 지난 6월 “김 전 후보와 김씨가 ‘김씨의 서울 옥수동 집에서 이 경기지사 당선인과 김씨가 밀회를 나눴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라며 두 사람을 검찰에 고발했다. 가짜뉴스대책단은 두 사람이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된 날짜에 김씨는 제주 우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시 이 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봉하에 조문을 갔다가 이튿날부터는 분당에 분향소를 차려 상주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른바‘옥수동 밀회’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고발인 측과 김 전 후보, 김씨를 모두 조사하는 한편 관련 자료를 살펴본 후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의견’ 검찰 송치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김부선 씨가 공직선거법 위반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이재명 지사를 고소한 사건을 서울남부지검으로부터 8일 넘겨받을 것으로 알려져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이 지사의 ’여배우 스캔들‘과 관련한 각종 고소·고발 사건을 모두 맡게 됐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81세에 정승 발탁된 원칙주의자 허목… 조선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81세에 정승 발탁된 원칙주의자 허목… 조선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

    ‘예기’(禮記)에서는 ‘대부가 칠십이 되면 벼슬에서 물러난다’(大夫七十而致事)고 했다. 동양에서는 고래로 이 조항이 고위 공직자의 은퇴 시기를 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칠십도 아닌 팔십 대에 우의정으로 발탁된 인물이 있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이 그 주인공이다.# 조정을 뒤흔든 한 통의 상소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도록 정승으로 재직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세종대 명상 황희는 87세까지 정승의 직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64세에 우의정이 된 뒤로 20년 가까이 줄곧 정승 자리를 지킨 사례다. 그런데 허목은 이와 달리 거의 평생을 재야의 학자로 지내다 81세가 돼 우의정으로 발탁됐다. ‘백세시대’라는 말이 익숙해진 현대라도 흔하지 않을 일인데, 그 시대에 이처럼 파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상황과 허목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진다. 허목이 우의정에 발탁된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하다고 하겠다. 1660년 66세로 사헌부 장령이 된 허목이 올린 한 장의 상소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 상소는 ‘예송’이라 불리는 논쟁의 발단이었다. 소현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효종이 인조의 두 번째 장자로서 나라를 이어받았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해 재최 삼년복을 입어야 예법에 맞는데, 지금 예를 강등하여 기년복을 입으셨습니다.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첩자(妾子)이기 때문입니다. -‘기언’ 추정상복실례소(追正喪服失禮疏) 1659년에 효종이 승하했을 때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의 복제(상복 차림에 대한 규정)를 기년복으로 정한 것이 오례(誤禮)라는 주장이었다. 이 상소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기년복은 효종을 인조의 적자가 아닌 첩자로 본 데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었다. 부왕 효종의 국상 복제가 잘못 정해졌다는 것만도 놀랄 일인데, 효종을 첩자로 취급했다는 말에 현종은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복제를 다시 검토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기해년 복제는 송시열의 주도하에 서인들이 정한 것이었다. 실상 송시열은 효종을 서자로 본 것이지 첩자로 본 것은 아니었으나, 예학에 정통한 허목이 ‘의례’(儀禮)의 ‘상복조’를 근거로 제시한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집권 서인들은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은 ‘경국대전’에 근거한 것이라며 기왕에 정한 복제를 그대로 밀고 나갔다. 더 큰 파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허목의 상소는 채택되지 못했고, 그가 삼척 부사로 좌천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했다.# 15년 뒤에 일어난 일대 반전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예송이 재연됐다(갑인예송).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제를 대공(大功·9개월)으로 정하면서 서인들이 효종을 서자로 보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장자·차자와 달리 장자부·차자부에 대한 복제가 기년복·대공복으로 구분됐기 때문이다. 갑인예송은 서인 고관들과 현종 사이에서 전개됐으나, 이 과정에서 15년 전 허목이 올렸던 상소가 다시 크게 부각됐다. 복제 문제로 서인의 주요 인사들이 축출되고 남인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정국이 개편됐다. 그러다 현종이 서거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더 큰 반전이 일어났다. 숙종이 81세나 된 고령의 허목을 우의정으로 전격 발탁한 것이다. 왕실 복제의 중요성은 짐작할 수 있지만, 허목의 상소 한 통이 15년이 지난 뒤까지 그토록 큰 파급력이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허목이 왕실 예제의 특수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의 예론은 보편적 규범을 따르기 때문에 국왕도 사대부와 동일하게 다루어진다.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더라도 차자이므로 장자로 대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반면 허목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만큼 적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사대부와 동일시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임을 인정한 것이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 지칭되는 현종대를 이어 즉위한 숙종은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을 법하다.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그에 맞는 논리가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허목의 상소에는 그에 맞는 정치이념이 제시돼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하면 반드시 글로 써서 살펴보다” 이런 뚜렷한 행적 때문인지 허목은 사람들에게 정치가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뛰어난 학자였다. 허목의 학문적인 업적과 특색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게 바로 ‘기언’이다. 나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성현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여 평소에 말을 하면 반드시 글로 써서 날마다 살펴보며 힘썼다. 그러므로 이 글을 ‘기언’이라 이름하였다. -‘기언’ 자서(自序) ‘기언’은 허목이 직접 엮은 문집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인물의 사후에 그 제자나 후손이 유작을 정리해서 만드는 것이 문집임을 생각하면, 기언을 자편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허목은 ‘기언’이라는 독특한 이름도 스스로 정했다. 기언은 ‘말을 기록하다’는 뜻이다. ‘언’은 모범이 될 만한 말과 글, 곧 진리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기언’은 평범한 문집이라기보다 후대에 남기려는 의도로 적었던 ‘언’, 다시 말해 허목 나름의 진리라고 하겠다. 기언은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고 예악(禮樂)을 참고하고 백가(百家)의 변론을 널리 포괄한 것이다. 이 글은 간략하면서도 두루 갖추어졌고, 장황하면서도 체제는 엄격하다. -‘기언’ 자서(自序) ‘자서’의 한 대목에서도 그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기언’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함은 글을 수록한 방식이다. 문집에 사용되는 문체별 분류가 아닌 학, 예, 문학, 고문, 유림 등 주제별 분류 방식을 택했다. 허목이 문체보다는 글에 담긴 내용과 사실(진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말을 기록하다’라는 기언의 뜻과도 상통한다. ‘기언’ 편집 작업은 88세로 임종할 때까지 계속됐다. 허목은 이 과정에서 스스로 서문을 두 번이나 지었다. 기언의 표제(標題)는 유서(類書)처럼 주제별로 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선생이 직접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만든 기준에 따라 간행한다. 학(學)·예(禮)·유림(儒林) 등 편목(篇目)은 중복된 듯하지만, 그렇게 한 데에는 선생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함부로 고치지 않는다. -‘기언’ 범례(凡例) 허목 사후 문집 출판을 담당한 제자는 범례에서 이렇게 밝혔다. ‘기언’의 독특한 구성에 대해 ‘선생님의 뜻’이라며 독자들에게 이해를 구한 것을 보면, 그 제자들도 기언의 편집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허목의 구상은 그만큼 독창적이었다. 어쩌면 그는 제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맞게 문집을 엮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직접 편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목은 ‘기언’을 완결하지 못했다. 범례에 언급되었듯 수고본에는 중복으로 수록된 작품도 있고 표제와 내용이 일치되지 않은 곳도 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첨삭을 가하지 않고, 허목이 머릿속으로 구상하며 엮어 가던 모습 그대로 ‘기언’을 간행했다. 유례없이 독특하고 독보적인 문집 ‘기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미완성의 ‘기언’이 완성을 본 셈이다. 조순희 한국고전번역원 교수●기언(記言) 모두 93권 방대한 문집 원집·속집·별집 나눠져 모두 93권에 달하는 방대한 문집이다. ‘원집’과 ‘속집’은 허목이 직접 엮었다. 80세 이전 저술을 정리한 게 원집이고, 그 이후 저술과 원집에 빠진 글을 수록한 게 속집이다. 허목 사후에 제자들이 원집과 속집에 빠진 글을 정리해 붙인 ‘별집’은 문체별 분류 방식을 따랐다. 1689년 숙종의 명으로 간행했다. 연보는 5대손 허뢰가 1772년 간행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06∼2008년 번역해 8책으로 출간했다.
  • [글로벌 인사이트] 美·中 경쟁에 양안 갈등 심화… 무력 시위로 파도치는 대만해협

    [글로벌 인사이트] 美·中 경쟁에 양안 갈등 심화… 무력 시위로 파도치는 대만해협

    독립 투표 요구 첫 시위 등 분리 움직임 美, 대만해협서 해상 훈련 등 힘 실어줘 中 “어떤 대가라도 각오” 무력 사용 경고 수교국 빼가기 등 외교적 압박까지 동원 자국내 민족주의 고조… 강경 대응 불가피“분열을 막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웨이펑허 중국 국방부장) vs “어떤 (중국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겠다.”(차이잉원 대만 총통) 중국 대륙과 대만 섬을 사이에 둔 대만해협이 출렁이고 있다. 2016년 5월 차이잉원 대만 총통 취임 이후 삐그덕거려 온 ‘양안 관계’가 올 하반기 들어 긴장의 수위를 더 높이고 있다. 양측 모두 양보 없이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마주 보고 달리는 두 열차와 같은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갈등의 초점은 ‘하나의 중국 원칙’과 대만 독립 문제. 중국은 “대만은 나뉘어질 수 없는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차이잉원의 민진당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차이잉원 정부가 ‘대만 주권 독립권’을 견지하자 중국이 압박을 강화하면서 마찰이 커졌다. 앞선 마잉주 전 총통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과 중국은 하나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였었다. 양안 갈등이 전과 달리 첨예하게 전개되는 배경에는 미·중 경쟁·갈등이 있다. 미·중 관계가 수교 후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갈등이 전략·군사 분야까지 확산되면서 양안 관계 갈등에 기름을 붓는 양상이다. 남중국해 등 바다에서 중국이 군사적 영향력을 넓히자 미국도 대만과 대만해협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며 대응한 것이다. 폭 131~150㎞ 정도인 대만해협은 동중국해에서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전장 400㎞의 전략적 요충지다. 일본, 한국, 중국으로 이르는 사활적인 수송로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군비를 증가하자 미국이 부랴부랴 대만해협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대만에 힘 실어 주기에 나선 까닭도 이 때문이다. 패권 경쟁의 첨예한 대치 지점이다. 미·중 물리적 충돌이 일어난다면 남중국해보다 대만해협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이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대만 문제에서 물러서거나 발을 뺄 수 없는 길로 달려온 점에서도 그렇다. 차이잉원 정부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자 중국은 ‘대만 수교국 빼가기’, ‘국제기구 등에 대한 대만의 국제회의 주최 무산 압박’, ‘대만해협에서의 군사훈련’ 등 무력시위 강화 등으로 대응했다. 대만의 독립 움직임이 구체화되는 상황에서 이를 좌시하면 시진핑 정부는 국내 정치에서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 국내적으로 민족주의 요구가 뜨거운 상황에서 중국 정부도 대만 문제에서 양보를 한다면 국내 여론을 잠재우거나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중국 정부에는 대만 문제에서 퇴로가 없는 셈이다. 대만 정부 관계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고, 중국의 무력 사용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현상 유지 정책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만 국민들 사이에서 “중국 대륙과 무슨 관계냐”, “대만은 중국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20일 대만에서 일어난 독립 투표를 요구하는 13만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도 이 같은 분위기를 상징한다. 대만 독립추진단체 포모사(喜樂島)연맹 주최로 이날 집권당인 민진당 청사 등 타이베이 시내에서 진행된 시위는 대만 독립을 국민투표로 가릴 것을 요구했다. AFP통신은 “독립 투표를 요구하는 첫 시위”라고 전했다.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웨이펑허 국방부장(장관)이 직접 무력 사용을 경고했고, 군 최고 통수권자인 시진핑 국가주석까지 나섰다. 웨이 부장의 발언은 지난달 25일 베이징에서 열린 ‘샹산포럼’ 개막 연설에서 나왔다. 그는 “중국군은 대만 분리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필요한 행동을 할 것”이라며 “중국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웨이 부장의 발언은 원칙적인 입장을 넘어 현 상황에 대한 강경 대응 입장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됐다. “대만 분리를 시도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필요한 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발언이 무게감과 현실감을 지닌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태도는 군 당국의 위협을 넘어 민족주의가 고조돼 있는 일반 중국 국민들의 정서란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 주석은 지난달 25일 대만과 남중국해 작전을 맡은 남부전구를 방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해 분위기를 더 팽팽하게 했다. 시 주석은 “전쟁에 대비해 군부는 전투 준비에 한 치의 오차가 없어야 하고, 대응 능력을 높이기 위해 연합작전을 자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 정부가 2007년 11월 항모 ‘키티호크’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7월 대만해협에 이지스 구축함 머스틴함(DDG89)과 벤폴드함(DDG65)을 보낸 것에도 이 같은 긴장과 위험성 고조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중국에 대한 경고를 날리면서 대만해협과 대만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서다. 미국은 1979년 대만과 단교했지만 ‘대만관계법’으로 대만을 사실상 보호하고 있다. 이 법에 따라 대만에 무기를 팔고 있고, 중국의 대만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으름장만큼 미국의 무력 시위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 미국은 7월과 10월 두 차례 군함들을 대만해협으로 보낸 데 이어 이달 중 대만해협에서 중국을 겨냥한 대규모 해상 군사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미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지난달 “미 해군의 대만해협 항해는 인도태평양의 자유개방을 향한 의지”라며 “국제법이 허용하는 곳이면 미 해군은 어디든 비행하고, 항해하고, 운용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중국과의 대결 자세를 보여 준다. 대만해협의 긴장은 대만과 미·중 삼각관계 속에서 계속 높아지면서 동북아의 불안정성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3대 혁신으로 ‘완전히 새로운 경남’… 일에 파묻혀 지냅니다“

    “3대 혁신으로 ‘완전히 새로운 경남’… 일에 파묻혀 지냅니다“

    “경남도지사 자리는 정말로 일 ‘구디’(구덩이의 경상도 방언) 그 자체입니다.” 김경수(51) 지사는 31일 서울신문 인터뷰 초입에 “지난 7월 취임한 뒤 날마다 일에 파묻혀 지낸다”며 살짝 웃었다.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도정을 들여다 보고 챙기는 동안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에도 특히 경남지사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할 일이 많은 자리인지 알게 돼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또 “특정한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을 간섭받지 않고 알아서 할 수 있는 국회의원에 견줘 이젠 도내에서 일어나는 일 대부분에 관계돼 마음이 쓰이고 뉴스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늘 긴장되는 자리다. 그렇지만 사람은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자기 뜻과 어긋나지만 꼭 해야 하는 일도 있다. 지사 출마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마음을 굳힌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청 공무원들은 ‘도지사 김경수’에 대해 “직원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일을 꼼꼼하게 챙기며, 결정을 신중하게 하는 스타일로 보인다”고 귀띔한다. 대담:송한수 부국장·사회2부장→김경수 도정 방향과 비전은. -민간 주도로 소통하는 지속적인 3대 혁신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경남을 도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게 목표다. 단순히 새로운 것이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게 된다. 그러나 ‘완전히 새롭다’는 것은 토대부터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혁신은 스마트 공장 확대를 중심으로 제조업 혁신을 집중적으로 추진해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제조업을 혁신하지 않으면 경남 경제를 살리기 어렵다. 스마트 공장은 제조업 생산현장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적용해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분석해 의사결정을 하는 지능형 생산공장을 가리킨다. 2022년까지 이러한 공장 2000개를 만들고 스마트 산업단지와 스마트 시티도 확대하겠다. 스마트 산단 개수를 떠나 그것을 통해 경남 중소 제조업이 혁신되고 경쟁력 강화로 경남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게 목표다. 스마트 공장이 늘어나면 좋은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진다. 사회혁신은 사회문제 해결과정에 공익과 사회통합 등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는 가운데 도민이 직접 참여하고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말한다. 공감대 확산과 시범사업 발굴 등 의견수렴을 한 뒤 본격 추진할 방침이다. 도정혁신은 경제·사회혁신이 제대로 안착하고 실행될 수 있도록 도청의 조직, 인사 시스템, 일하는 시스템 등 도정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국책사업으로 결정된 김해신공항 건설에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김해신공항을 동남권 관문 공항 기능을 수행하도록 건설하겠다는 게 대통령 공약사항이었다. 그러나 민선 7기 출범 전후로 지역 주민과 지자체, 정치권 등에서 안전성과 소음, 확장성에 문제가 있음을 꾸준히 제기했다. 경남·부산·울산이 신공항 민간전문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검토한 결과 안전성과 소음 대책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국토교통부에 지적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경·부·울이 ‘동남권 신공항 검증단’을 구성해 국토부와 함께 신공항 주요 쟁점을 점검하고 문제 해소 방안을 마련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검증단과 국토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무총리실에 중재를 요청할 계획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점검과 논의를 거쳐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가 나오도록 하는 게 도지사의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한다.→도지사로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보람을 느낀 일이라면. -(웃으면서) 좀 고민해야겠는데. 얼마 전 통영을 방문한 이낙연 총리가 정부에서 남부내륙철도(서부경남 KTX) 사업을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로 건설하겠다고 처음으로 약속했다. 낙후한 서부경남 균형발전을 위해 하루빨리 착공해야 할 사업이다. 도지사로서 행정 성과를 내는 게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서부경남 KTX는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결정해야지 경제성만 따져서는 추진력을 얻지 못한다. 연내 정부재정사업으로 결정되면 철도 길목인 진주, 고성, 통영, 거제 등은 새로운 투자여건 마련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속도를 붙일 것이다. KTX 건설과 연계해 주변 지역 발전 비전을 마련해 추진하는 일도 중요하다. 도와 해당 시·군이 서둘러 논의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통영·거제는 많은 관광자원을 적극 활용해 관광산업 비중을 높이면 조선업 불황에 맞닥뜨려도 영향을 덜 받게 될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경남’을 도지사 4년 임기 한 번에 이룰 수 있을까.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도 5년 단임은 짧다고 본다. 많은 나라에서 중임제를 선택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첫 임기에 열심히 해 옳은 방향이면 국민들이 한 번 더 선택해 마무리까지 하도록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굵직한 국정과제를 해내기엔 5년은 짧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정책은 중단되기 일쑤여서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다. 지방정부도 마찬가지다. 4년 열심히 해서 평가를 받고 선택 여부에 따라 두 번까지 8년 정도 하면 적당하다는 생각이다. 3선 12년은 너무 길다. 꼭 도지사를 한 번 더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지금으로선 드루킹 댓글 조작 연루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데 도정에 어떠한 차질도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점을 거듭 밝힌다. 정리 사진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인간 김경수의 행보 노 전 대통령과 ‘운명’…요직 맡아 국정 경험…어려운 사람 곁 ‘진국’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고 노무현(1946~2009) 전 대통령을 비서관으로 끝까지 보좌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재학 때 학생운동으로 세 차례 옥고를 치른 그는 신계륜 의원 정책비서를 지내다 2002년 7월 제16대 대통령선거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전략기획팀 부국장으로 합류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당선인 비서실 기획팀을 거쳐 노 전 대통령과 나란히 청와대로 들어가 국정상황실 행정관, 연설기획비서관, 공보담당비서관 등 요직을 두루 맡으며 국정을 경험했다. 2008년 퇴임해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한 노 전 대통령을 따라 내려갔던 그는 노 전 대통령 별세에 따른 충격으로 자다가 깨는 때도 잦았다고 한다. 김 지사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정치의 길로 떠밀지 않았을 테고 문재인 대통령도 정치를 하지 않고 양산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그는 2012년과 2017년 18대·19대 대통령선거 땐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수행팀장과 대변인을 지낸 문 대통령 최측근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으로부터 ‘늘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는 진국’이란 말을 듣는다고 한다. 김 지사는 2012년 김해시 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남지사를 지낸 당시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에게, 2014년 도지사 선거에선 역시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와 맞붙어 패배했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배지를 달았다. 이어 올해 6·13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강력한 요청으로 국회의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출마해 자유한국당 김태호 후보를 꺾어 뜻을 이뤘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이봉창 의사 기념관, 고향 용산에 생긴다

    이봉창 의사 기념관, 고향 용산에 생긴다

    서울 용산에서 나고 자라 묻힌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 의사의 삶을 되새기는 기념관(투시도)이 세워진다. 무대는 그가 살았던 용산구 효창동 118번지 인근 소공원(479.1㎡)이다. 용산구는 내년 10월 10일 이봉창 의사 서거 87주기에 맞춰 기념관 건립 기본계획 수립에 착수했다고 25일 밝혔다.지상 1층, 연면적 60㎡ 규모의 기념관은 2020년 4월 완공될 예정이다. 내부 전시 방법, 소장품 구매 등은 용역 연구를 통해 결정된다. 구가 최근 마무리된 효창4구역 주택재개발사업으로 마련한 소공원을 역사공원으로 바꾸는 절차도 병행된다. 이 의사는 용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다. 1901년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태어나 1917년 효창동 118번지로 이사했다. 1919~1924년에는 용산역 역무원으로 일하다 192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1931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백범 김구 선생과 대화를 나눈 뒤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동경거사’를 감행했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뜻은 당시 침체됐던 항일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이후 1932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처형당한 이 의사는 1946년 유해가 봉환돼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묻혔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기념관을 통해 투사의 생애를 널리 알리고 역사도시 용산의 정체성을 확립할 것”이라며 “기념관이 의사의 높은 뜻을 되살릴 수 있도록 유물 기증 등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봉창 의사 기념관, 고향 용산에 생긴다

    이봉창 의사 기념관, 고향 용산에 생긴다

    서울 용산에서 나고 자라 묻힌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 의사의 삶을 되새기는 기념관이 세워진다. 무대는 그가 살았던 용산구 효창동 118번지 인근 소공원(479.1㎡)이다. 용산구는 내년 10월 10일 이봉창 의사 서거 87주기에 맞춰 기념관 건립 기본계획 수립에 착수했다고 25일 밝혔다. 지상 1층, 연면적 60㎡ 규모의 기념관은 2020년 4월 완공될 예정이다. 내부 전시 방법, 소장품 구매 등은 용역 연구를 통해 결정된다. 구가 최근 마무리된 효창4구역 주택재개발사업으로 마련한 소공원을 역사공원으로 바꾸는 절차도 병행된다. 이 의사는 용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다. 1901년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태어나 1917년 효창동 118번지로 이사했다. 1919~1924년에는 용산역 역무원으로 일하다 192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1931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백범 김구 선생과 대화를 나눈 뒤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동경거사’를 감행했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뜻은 당시 침체됐던 항일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이후 1932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처형당한 이 의사는 1946년 유해가 봉환돼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묻혔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기념관을 통해 투사의 생애를 널리 알리고 역사도시 용산의 정체성을 확립할 것”이라며 “기념관이 의사의 높은 뜻을 되살릴 수 있도록 유물 기증 등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현재에서 과거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느낌”

    [흥미진진 견문기] “현재에서 과거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느낌”

    현재의 시공간에서 점점 과거의 시공간으로 옮겨 간 것 같은 코스였다. 윤현경 해설사를 따라 광나루 터 표석을 보러 출발했다. 40년이 돼 가는 워커힐아파트는 재건축이 예정돼 있어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80년이 넘은 충정아파트처럼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아파트를 보는 게 점점 어려워질 것 같다.한강 쪽으로 방향을 돌려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오래된 가로수들이 가을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좀더 내려가니 흘러가는 강물이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곳에 광나루터 표석이 있었다. 광진 정보도서관 건물 일부분이 배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이곳이 나루터였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강변길을 벗어나 광진교로 올라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강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행자를 위해 특화된 다리라는 설명처럼 광진교에는 화단도 예쁘게 조성돼 있었고 음악이 나오는 의자도 마련돼 있었다. 다리 기둥 아래쪽에 있는 광진교 8번가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 아래에 이런 전망대 시설이 돼 있는 곳은 전 세계에 3곳뿐이라고 한다. 광진교 다리 위에서 행정구역이 강동구로 바뀌었다. 강동구에 속한 광진교 남단에서는 서거정의 강동예찬시비를 보았다. 도미부인상 옆에는 광진교의 옛 교명주가 있었다. ‘단기 4269년 9월 30일 준공’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교명주의 돌 색깔이 이 다리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주택가 샛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서울시미래유산인 한국점자도서관이었다. 한국 최초의 점자도서관이고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점자도서나 녹음 도서를 우편이나 온라인으로 대출해 주고 있다. 다음 장소인 암사동 선사유적지로 향했다. 강동선사문화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거리 전체가 들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로 양쪽에는 빗살무늬토기 모양의 종이등이 걸려 있어서 이곳이 선사유적지임을 한눈에 알게 해 줬다.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은 또 다른 상상을 넓혀 주는 경험이었다. 전혜경(책마루독서교육연구회)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서울서 문명 처음 싹튼 강동…‘한강의 기적’까지 이뤄냈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서울서 문명 처음 싹튼 강동…‘한강의 기적’까지 이뤄냈네

    신석기·한성백제 거쳐간 고대도시 1963년에야 서울 편입한 신생도시 거북바위 절터에 자리잡은 암사동 1925년 대홍수, 역사 속 유물 드러나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4회 강동(광나루길) 편이 지난 13일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 및 암사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각종 행사와 모임이 겹치는 가을 황금 주말을 맞았지만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투어에 동참했다. 옷을 껴입고 나온 이들은 윗도리를 벗어야 했다. 종착지인 암사동 유적지에서는 때마침 제23회 강동선사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축제를 만끽했다. 행사 기간 중이어서 입장료는 무료였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2번 출구에서 집결한 투어단은 광진정보도서관 앞 광나루 표석을 보고, 광진교에 올라 올림픽대교·천호대교·강변테크노마트·롯데월드타워가 한데 어울린 한강 조망을 감상했다. 이어 광진교 8번가~도미부인상~서거정의 강동예찬비~한국점자도서관~선사마을~암사동 선사유적 순으로 코스를 밟았다. 해설을 맡은 윤현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이화여대 박사 과정)는 문학예술경영학 석사답게 전문성을 살려 답사단을 이끌었다. 참가자들은 “내가 사는 곳의 역사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해설자의 성실함이 돋보였다”, “광진교 8번가, 서울에 이런 곳이!” 등의 호평을 설문에 남겼다. 서울의 동쪽 끝에 위치한 강동구는 이중성을 가진 도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도시이지만 건재 순으로 따지면 서열이 그렇게 높지 않은 신생도시이다. 6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물이 쏟아지고,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선사시대와 고대의 도시인 데도 불구하고 서울 진입은 늦었다. 1963년 광주군 구천면에서 서울 성동구로 처음 편입됐고, 1979년 강남구에서 분구했다. 강동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암사동이다. 한성백제 역사는 송파구에, 광나루 영광은 광진구에 각각 넘겨주고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차지했다. 서울에서 구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한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은 곳이 암사동이다. 그러나 오래된 도시라는 이미지는 강동구의 빛과 그늘이다. 암사동은 ‘바위절 마을’(岩寺洞)을 한자로 옮긴 지명이다. 암사동 산 23번지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지어진 절이라고 하여 구암사(龜岩寺)라고 했다. 그러나 강동구 홈페이지에는 “신라시대에 절이 9개 있어서 구암사(九岩寺)라고 하였다”라는 근거 없는 유래 설명이 붙어 있다. 구암사 옛 터에는 구암정(龜岩亭)이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구암서원(龜岩書院)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자리에 있던 백중사를 암사라고 기록하고 있고, 서거정이 지은 ‘백중사’라는 시를 통해서도 구암사와 백중사가 이름은 다르지만 동일한 장소에 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게 한다.2010년 강동문화원에서 펴낸 ‘강동역사와 문화’에 “암사동 동명의 유래는 백중사에서 연유한다. 예부터 백중사를 바위절이라고 불렀으며 이 바위절을 인용해 암사동의 유래가 됐다. 삼국시대 때 암사동에 절이 9개 있었다는 말은 큰 오류다”라고 바로잡았다. 구 홈페이지 오류부터 수정해서 선사유적지에 서 있던 ‘거북바위절’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되찾기 바란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까지는 망각의 장소였다. 대홍수로 한강변의 가옥과 전답이 모조리 수몰되고, 떠내려갔으며, 땅속이 뒤집혔다. 사대문 안까지 물이 찼다고 하니 홍수의 피해는 엄청났을 터이다. 2만여명이 사망하고, 30여만명의 이재민을 남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버금가는 재앙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뜻하지 않게 뭍으로 드러난 게 암사동 선사유적이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를 품은 유물층이 솟아났다. 한강은 우리 문명의 젖줄이자 역사의 물줄기였다. 한강 물줄기가 서울과 처음 만나는 강동지역에 선사시대와 한성백제시대 문화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한 데 주목해야 한다. 한강 유역의 신석기 유적 140여곳 중 대표적 유적지인 암사동은 을축년 대홍수가 남긴 유물이며, 뼈아픈 기억 단자이다. 또 한 번의 반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소양강댐과 팔당댐을 건설, 한강 통제에 성공했기에 1980년대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투어단이 찾아간 광진교 옛 교명주(橋名柱) 옆에 백제시대 정절의 여인을 상징하는 도미부인의 전신상과 전설이 새겨져 있다. 생뚱맞게 이곳에 서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이곳을 도미나루라고 착각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도미나루는 따로 있다. 신경림 시인이 ‘목계장터’에서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라고 노래한 것처럼 남한강 물길의 시발점 충주 목계에서 서울까지는 뱃길로 사흘 거리였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를 거쳐 족자섬과 다산 정약용이 나고 자라 묻힌 마재~소내나루 다음 나루가 도미나루이다. 여기서 팔당~당정섬~덕소~미음나루~돌섬을 거치면 광나루에 도착한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역이나 김포공항,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것과 마찬가지다. 광나루는 서울에서 광주 가는 단순한 나루가 아니라 한강의 동쪽 관문이었다.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기 전까지 한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가 다니던 물길이다. 강배와 뗏목의 길이다. 서해안에서 한강을 거슬러 오르던 바다배와는 모양이 다르다. 거친 파도를 헤쳐야 하는 바다배는 배 밑을 둥글거나 뾰족하게 만든 반면 강배는 얕은 여울에서 강바닥에 긁히지 않도록 평평하다. 소금이나 젓갈, 생선을 실은 바다배는 조류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와서 양화진이나 마포나루에 짐을 부렸다. 이곳에서 강배에 짐을 옮겨 싣고 서강~용산~한강진~두뭇개~뚝섬~송파~광나루를 거쳐 내륙으로 들어갔다. 목계나루를 떠난 강배는 주로 세곡선이나 땔감용 나무로 만든 뗏목이었다. 남한강 상류에서 곡물을 실은 세곡선은 용산과 서강의 창고까지 들어왔다. 물길로 나르고 운반한다고 해 조운선(漕運船)이라고도 했다.우리는 흔히 강남 개발 이전까지 한강의 남쪽 지역을 허허벌판으로 잘못 알고 있다. 조선의 사대문 중심 역사서술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그대로 수용한 탓이다. 영등포가 처음으로 서울에 편입된 이후 1970년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놓일 때까지 강남은 ‘고요한 목초지’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로 그랬을까? 사실과 다르다. 18세기 이후 서울 사대문은 중세 봉건 왕도의 성격이 강했지만, 한강변은 역동적인 상업도시였다. 사대문 밖은 신분보다 돈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요지경 세상이었다. 전국의 장사꾼과 일꾼이 몰려와 한강변 성저십리(성 밖 10리)에 거주했다. 세종(1428년) 때 호구조사 결과를 보면 도성 안 인구는 10만 3328명인 데 반해 도성 밖에는 6044명이 살았다. 도성 밖 인구는 전체 서울인구의 10%에 못 미쳤다. 그러나 정조(1789년) 대에 가면 도성 안에 11만 2371명이 살 때 성 밖에는 7만 6782명이 살았다. 18세기 후반 한강변을 중심으로 한 도성 밖 인구가 전체 서울인구의 절반이 넘었다. 한강은 전국의 뱃길을 연결하는 최대의 소비시장을 낀 물류 중심지였다. 전국 팔도에서 물품을 싣고 서울에 모여드는 배가 연간 1만척이 넘었다. 한강변은 흥청거렸다. 을축년 대홍수가 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갔을 뿐이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싹튼 강동지역을 비롯한 한강의 남쪽은 천지개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일정:상암동(문화비축기지) ●일시:10월 20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노란 넥타이’ 유시민 “언젠가 할 줄 알았지만…공직에는 다신 안 나간다”

    ‘노란 넥타이’ 유시민 “언젠가 할 줄 알았지만…공직에는 다신 안 나간다”

    유시민 작가가 15일 새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사장 취임이 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이 아니냐는 여러 언론의 의혹 제기에 유 이사장은 “임명직 공직이 되거나 공식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다시는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노란넥타이를 매고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 사무실에서 열린 이·취임식에 나타난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 링컨 미국 대통령을 존경했다는 말로 취임사를 시작했다. “링컨 대통령은 특정 정파에 속한 대통령이었지만 역사 안에서는 미합중국과 국민 전체의 지도자로 받들어졌다”면서 노 대통령을 떠올린 그는 “노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와 번영, 사회 정의 실천에 노력했던 대한민국 지도자로 국민 마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또 “내년 노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서 재단이 우리 사회의 더 많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들고 시민의 정치 참여와 사회적 연대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분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나가겠다”면서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과 서울 노무현 센터 건립 사업도 계획대로 잘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왜 자리를 수락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는 저도 재단을 위해 봉사해야할 때가 올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이사장 한번 해야지’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권하셨다”면서 “노 대통령 모시고 일했던 사람으로서 지금 사양하는건 도리가 아니겠다고 생각해 맡았다”고 답했다. 유 이사장은 특히 “앞으로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면서 “임명직 공직이 되거나 공직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제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이날로 위원장 임기를 마감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재단을 유 작가에게 넘겨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유(시민) 작가는 노 대통령을 모시고 2002년 선거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가치와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한 휼륭한 공직생활 잘 해왔다”면서 “지금 자유분방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제가 이 무거운 자리 맡기게 되서 죄송하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이 자리 맡아서, 또 중요한 일을 보람차게 잘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노무현재단은 지난달 26일 이사회를 열어 유 작가를 이 대표의 후임 이사장으로 낙점했다. 약 지난 4년 동안 재단 이사장을 맡아 온 이 대표는 당직 취임 후 사임 의사를 밝히고 후임으로 유 작가를 낙점, 직접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와 유 이사장은 이날 오후 경남 봉하마을에 있는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를 예방한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 17일 회고록 출판기념회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 17일 회고록 출판기념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90) 회장의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출판기념회가 오는 17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3·1 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출간한 김 회장의 회고록을 소개하는 자리다.김 회장 가족의 독립운동은 1919년 대한제국 대신이었던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의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으로 시작돼 아버지 김의한(건국훈장 독립장)과 어머니 정정화(건국훈장 애족장)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백범 김구 등 임시정부 주역의 품에서 자란 ‘임시정부의 손자’였다. 그러나 광복은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졌고 김 회장은 백범 김구의 서거와 아버지 김의한의 납북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김 회장은 2006년 재북애국지사후손성묘단을 조직, 평양을 방문해 아버지 김의한이 묻혀 있는 재북인사묘역을 참배하기도 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국민 썸남’ 5급 사무관… ‘9급 올킬’ 프로게이머

    ‘국민 썸남’ 5급 사무관… ‘9급 올킬’ 프로게이머

    누구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길 원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다.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자리에 있다가 ‘무색무취’한 공직사회를 모두 경험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들이 있다. 재경직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얻고도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규빈(25·지난해 5급 공채 합격)씨와 프로게이머라는 화려한 삶을 뒤로한 채 교육 공무원으로 살아 가는 박영민(34·군산남초) 주무관이 대표적이다. 9일 이들로부터 화려했던 전 직장, 힘들었던 수험 생활, 공직에 대한 기대감 등을 들어봤다.●하트시그널 ‘직진 연하남’… 합격 향해 ‘직진’ “어릴 때부터 무척 활동적이었어요. 수험 기간 동안 많이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합격한 마당에 (방송 출연을)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단 생각이 들었죠. 다른 직업군은 TV에 많이 나오는데 공무원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 싶었어요.” 지난 6월 종영한 예능 방송에 출연해 ‘직진 연하남’으로 큰 인기를 끈 이씨에게 방송 출연 계기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지난해 국가직 5급 공채(재경직)에 합격했다. 올해 연수를 받고 내년에 신입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이씨가 5급 공채를 준비한 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교 시절 의사를 꿈꿨던 것도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서였단다. 그는 “대학 입학 뒤 사람들의 삶에 와닿는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단 생각을 했고 그게 공무원이란 생각이 들었다”면서 “활달한 제 성격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염려했지만 일단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뒤부터는 앞만 보고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민족사관고 졸업 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 진학한 이력이 알려지자 ‘엄친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머리가 좋으니 공채에도 손쉽게 붙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씨는 “진짜 빨리 합격하는 사람들은 1년 만에 붙기도 하지만 저는 두 번 낙방했고, 세 번째 응시할 때는 ‘이번에 떨어지면 그만두자’고 마음먹기도 했다”면서 “수험생활을 보내면서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려울 게 없던 이전과는 달리 (수험 기간에는) 심리적으로 위축돼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렵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집과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한 이씨는 1학기 땐 수험 공부에만 매진하고 2학기 땐 학교를 다니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수험생들처럼 수험 기간 내내 휴학 상태에서 공부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살다간 감정이 격해져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그간 쌓아둔 외로움 등을 2학기 때 사진을 찍으며 해소하는 등 나름의 ‘완급 조절’을 했다”고 덧붙였다. 시험에 임박하면 컨디션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지만 이씨는 달랐다. 첫 시험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해 최악의 컨디션으로 시험을 치른 경험이 있어서다. 그는 “큰 시험을 앞두고 긴장을 많이 하다 보니 잠을 3~4시간밖에 못 잘 게 뻔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런 패턴을 몸에 익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면서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피곤한 상태에서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하려고 일부러 늦게 잤다.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합격 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걸 다 해봐야겠단 생각에 방송 출연에 나섰지만 이씨 역시 공직사회의 경직된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입직한 순간부터는 지금처럼 방송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시간이 지나면 저 또한 주어진 부처 업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씨는 “시간이 갈수록 ‘국민과의 소통’이나 ‘정책 홍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 지금의 흐름이 지속된다면 공직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며 “그때가 되면 지금의 경험이 국가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교육 공무원이 된 프로게이머 “프로게이머였던 20대에는 또래 친구들보다 많은 돈을 벌었고 번 만큼 많이 쓰기도 했어요. 하지만 군에서 전역하고 나니 어느새 서른이 눈앞이었어요. 막다른 골목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00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출신 박영민 주무관에게 공무원에 된 이유를 묻자 담담하게 자신의 20대를 이렇게 밝혔다. 박 주무관은 대학생이던 2004년 KBC 파워게임쇼 신인왕전으로 데뷔했다. e스포츠 최초의 신인 드래프트였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신인 드래프트’(2005년)를 통해 프로게임단에 입단했다. 2009년에는 공군 프로게임단에서 복무했다. 2011년 전역 뒤 은퇴를 선언해 영원히 사라진 듯했던 박 주무관의 소식이 다시 들려온 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였다. 인터넷상에 ‘박영민 노량진 목격담’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프로게이머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기간은 매우 짧았고 은퇴 뒤 코치나 지도자로 남아 있는 사례도 매우 드물었다”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프로게이머보다는) 좀더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다고 결심해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고 회상했다. 박 주무관은 수험 생활을 시작하면서 휴대전화를 구식 2세대(G)폰으로 바꾸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최대한 줄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기보다는 합격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프로게이머 시절 연습을 위해 하루 10~12시간씩 앉아 있던 저력이 수험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합격의 문턱은 높았고 응시 첫해 고배를 마셨다.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할 때는 고향인 전북 군산으로 돌아왔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과목은 영어였다. 박 주무관은 “점수가 잘 안 나와 부담이 컸고 공부할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본능에 맡겨두면 나도 모르게 영어 학습량을 줄일 게 뻔해서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어머니로부터 ‘제발 영어공부 좀 그만하라’는 소리가 나올 때쯤부터 점수가 올라갔다”고 말했다. 결국 박 주무관은 국가직과 서울시, 지방직 교육행정(9급)을 ‘올킬’(싹쓸이)했다. 이 가운데 지방직을 택한 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단다. 초창기에는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들과 게임을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관중들 사이에서 승부를 겨뤘던 프로게이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삶의 방식에서 차이가 크지만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생활에 보람을 느낀다”고 미소를 지었다. 10, 20대가 꿈꾸는 두 직업을 모두 섭렵해 부럽다는 시선을 받는 것이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박 주무관은 “계획된 일들이었다기보다는 그 순간 제가 하고 싶은 일과 이루고 싶은 일에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밝혔다. 미래의 아이가 프로게이머와 공무원 가운데 무엇을 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머리로는 ‘공무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하라’고 외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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