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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선거권 제한’ 등 처벌규정 미흡/왜 안지켜지나

    ◎선관위 한달간 1건도 적발 못해 통합선거법의 ‘축·부의금품 등 상시제한’규정이 겉돌고 있다. 서슬퍼렇던 중앙선관위의 단속 의지는 온 데 간 데 없다.지난 한달동안 1건의 위반 사례도 적발하지 못했다.중앙 선관위는 “6·4 지방선거 후보자 비용실사로 손이 모자라 단속지시를 못했다”고 해명했다.‘상시 제한’의 취지가 무색할 지경이다. 정치인들의 주례가 거의 없어지고,경조비가 감소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각종 편법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개정법 관련 규정은 시행 한 달여만에 있으나 마나한 한 내용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법 규정의 모순과 정치인의 준법정신 결여가 가장 큰 원인이다.정치인들이 선거구민의 주례를 서거나,경조사에서 1만5,000원 이하의 물품이 아닌 그 이상을 금품을 축·부의금으로 내놓으면 위법이지만 피선거권제한(벌금 100만원 이상)과는 관계가 없다.50만원 이하의 벌금만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입법취지를 살리려면 처벌규정을 강화,피선거권을 제한해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규정에 어긋나는 축·부의금품 제공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문제다.잔칫집과 상가에서 축·부의금품을 제공한 정치인의 명단을 확보하고,사법처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혼주나 상주의 제보를 기대할 수도,명부를 뒤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선관위는 효율적인 단속을 위해 1만5,000원 이하의 물품제공도 금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반면 경조사에 빈손으로 갈 수 없다는 반론이 거세다.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법 규정에서 적용대상으로 들고 있는 일부 애매한 개념도 문제다.‘입후보 예정자’나 ‘선거구민과 연고가 있는자’등이 그 예다.
  • 白凡 재조명:4·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위대한 白凡사상 새정부서 법통 계승”/통일염원 안고 넘었던 38선 반세기 만에 다시 열려/京橋莊 반드시 복원… 문화재로 지정 영구보존 해야 서울신문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 일환으로 백범 金九 선생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이면서도 잘못된 평가를 받아온 金九 선생을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통해 일그러진 현대사와 가치관의 혼돈을 바로잡고 사회정의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金九 선생의 업적·사상·통일론 등과 이들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백범 재조명을 마무리하는 좌담회를 통해 알아본다. 서울신문 金三雄 주필의 사회로 열린 좌담회에는 金九 선생 아들 金信 장군,저명한 백범연구가인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과 李萬烈 숙대교수(한국사 전공)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 金信(金九 선생 아들) 金祐銓(전 광복회부회장) 李萬烈(숙명여대 교수) 金三雄(사회·주필) ▲金三雄 주필=金九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은지 50년만에 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땅을 밟았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정황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백범이 갔던 길을 반세기만에 鄭명예회장이 다시 간것은 중요한 역사의 발전입니다. 백범이 서거한지 거의 50년만에 백범노선과 같은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며 정경분리·상호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 물꼬가 트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중 미국도 대북 제재중 일부를 해제할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국제환경과 남북관계의 이러한 변화로 백범노선을 실천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의 상황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백범사상과 통일론 등에 대해 우선 논의해 보죠. ○좌·우파 모두 포용… 문화국가 건설 ▲李萬烈 교수=백범은 동학·유학·불교·기독교 등을 섭렵하며 그들을 민족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완전히 용해시켰습니다. 다원적 종교가 있는 사회에서 여러 종교를 민족주의로 수렴시킨 것은 큰 의미가 있죠. 백범은 또 좌파세력과 민족주의 우파의 통합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한 포용력을 배경으로 독립과 통일,더 나아가 문화국가 건설을 지향했습니다. 통일이 안되면 완전한 자주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차원 더 높은 문화국가는 더욱 어렵다고 인식했죠. 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은 임시정부를 27년간이나 이끌었습니다. 그러한 예는 세계사에도 없는 일이죠. 독립운동사에서 백범의 역할과 위치는 어떻습니까. ▲金祐銓 부회장=임시정부에서 백범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화신이었죠. ▲金주필=그러나 백범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李교수=백범 반대세력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죠. 통일지향 세력이 아니라 남북분단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을 묵살했습니다. 집권세력은 백범의 업적도 평가절하했죠. 백범에 대한 잘못된 평가의 긴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金주필=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후에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죠. 해방공간에서 백범이 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金부회장=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도권은 잡았으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었죠. 5·10선거 후에도 국회에서 金九 선생 지지가 많았어요. 남북협상 때도 108명의 문화인이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金九 선생이 돌아가신 후 반대파가 정권을 잡아 빛을 보지 못한것 뿐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미국의 입장에서 백범을 본 오류의 결과입니다. ▲金信 장군=주도권 문제와 관련,金부회장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어요.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강요로 개인 신분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는데다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반발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죠. 친일세력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판단아래 똘똘 뭉쳤습니다. 일본에 아부했듯이 그들은 미군정에 아부했고 李承晩에게도 아부했습니다. 李박사정권에서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죠.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가족에게 고통을주고 개인과 조상을 희생하면서 싸워온 독립투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때 친일파 형사들에게 잡혀갔던 독립투사들이 해방후에 다시 그들에게 잡혀가는 기막힌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친일세력들은 해방후 당연히 벌을 받고 독립투사들은 보상을 받았어야 했는데 거꾸로 됐죠. 그때 잘못된 역사 청산작업 때문에 현대사가 일그러진 것입니다. ▲金주필=백범은 분단을 거부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습니다.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남북지도자 공동성명 발표 큰 의미 ▲金부회장=남북협상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대표자 연석회의는 북측의 각본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지만 백범이 관심을 가진 것은 남북지도자 회담이었어요. 金九 선생,金奎植 박사,金枓奉,金日成 등 4명의 지도자들은 4월30일 회담후 공동성명까지 발표했죠. 공동성명은 전문과 4개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명시하고 있어요. 남북지도자가 만나 공동성명까지 발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북한 단독정부 수립도 적극 반대 ▲金장군=평양에서 아버님이 연설하실 때 남쪽만의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한다고 말씀하시자 열렬한 공산당식 박수가 터져나왔죠. 그러나 북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고 하시자 장내는 조용했습니다. 북쪽만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는 것은 언론에도 일체 보도되지 않았어요. 북측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내용만을 발표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 정신을 오늘의 상황과 어떻게 연계시킬수 있을까요. ▲金장군=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자 뿐만 아니라 좌파와 무정부 인사도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충칭(重慶)으로 옮겨왔을 때도 연합정부였죠. 연합정부였던 임시정부의 법통과 아버님의 통일론을 이어받아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독립운동 때도 독립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일은 비현실적이라는 비관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독립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통일도 지금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金주필=임시정부는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승국으로 대접받고 전후 처리문제에서도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죠. 그러나 연합국은 그러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李교수=프랑스는 소극적이나마 임시정부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영국 등은 인정하지 않았죠. 미국은 임시정부가 분열돼 있기 때문에 어느 정부를 인정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았어요. 사실은 독립운동때 임시정부가 중국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때문이었죠. ▲金주필=시해되던 날은 일요일이었는 데도 金信 장군은 그날 옹진에 가셨죠. 암살음해 세력이 金장군을 떼어놓기 위한 음모는 아니었나요. ▲金장군=유엔대표단과 함께 갔었습니다. 그러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어요.어떤 음모가있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양에서 돌아온 후 암살에 관한 여러가지 풍문이 많았고 그것들을 여러차례 아버님께 말씀드렸죠. 돌아가시기 이틀전에는 박동엽씨 등 2명이 경교장으로 찾아와 보다 안전한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말도 했어요. 그말을 아버님께 전했으나 나는 떳떳하며 겁낼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념관 건립·학술상 제정 등 절실 ▲金주필=새정부의 탄생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법통계승과 백범사상을 이어받을 사업을 추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백범 기념관 건립,전집 출판,학술상 제정,백범과 3열사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 성역화 작업 등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념관 건립과 관련,李교수께서 말씀해 주시죠. ▲李교수=백범 기념관은 꼭 필요합니다. 서거 50주년(1999년)이나 2000년의 새 세기가 시작되기전 기념관이 지어져야 합니다.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기념관을 지을 때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장소는 서대문형무소 자리일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곳은 통일로의 출발점입니다. 백범의 독립과 통일정신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죠. 효창공원도 국립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망월동 묘지는 이미 국립묘지 수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효창공원이 국립묘지 수준이 안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金주필=백범이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문제는 어떻습니까. ▲金부회장=영구 보존을 위해 우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합니다. ▲金주필=백범을 기념하는 독립상과 통일상 등을 만들면 어떨까요. ▲李교수=좋은 생각입니다.그러나 셋방살이도 꾸려가기 힘든 백범기념협회에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죠. 상을 만들려면 백범의 이상인 독립국가·통일국가·문화국가를 상징하는 독립·통일·문화상을 만들고 차차 확대하는 것이 어떨까요. ▲金주필=金九 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의 사상과 통일론 등이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로 제2건국이라 할 수 있는 金大中 대통령 정부에 의해 이땅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남북의 화해와통일로 이어지도록 모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집니다.
  • 白凡 재조명:3­1(정직한 역사 되찾기)

    ◎통일사상의 정수/“自主없는 통일 허구” 날로 새로워/列强 간섭 배제하고 ‘민족의 힘으로’ 역설/지역·이념 뛰어넘는 화합의 정신 일깨워 20세기 후반 세계사를 지배하던 냉전은 끝났다.그러나 한반도의 냉전은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이다.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거대한 시대의 흐름도 남과 북의 이념적 분단의 벽은 넘지 못했다.철옹성 같은 분단의 벽을 넘어 화해와 통일의 길로 가는 일은 이 시대 우리들의 소명이다.그 일의 출발점을 金九 선생의 민족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론에서 찾으면 어떨까. 백범이 추구한 이상의 완결편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이었다.그는 생의 마지막 부분을 민족통일을 위해 바쳤다.1948년 2월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시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백범은 냉전이라는 불리한 국제정세와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를 구성하려는 어려운 시대상황에서도 통일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었다.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방문했다.북측에 의해 미리 짜여진 각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그러나 남북협상의 성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민족의 자주적 힘에 의한 평화통일 노력 그 자체도 중요했다.민족의 운명을 외세에만 맡기지 않고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 쓴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역사다. 백범은 한반도가 분단의 위기에 빠지자 정치·이념적인 반대세력과도 손을 잡았다.그의 통일노력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백범은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민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그의 우려는 모두 현실화됐다.한반도에는 이념적 분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남쪽에는 정치·지역감정에 의한 또 하나의 분단이 있다.그 ‘마음의 분단’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다시 확인됐다. 지역감정·혈연·이념 등에 의한 분열은 민족의 화합으로 바뀌어야 한다.백범의 애국적 민족사랑은 좋은 전환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념과 정치적 이익을 초월한 백범의 민족사랑 정신은 세속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도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오늘의 유효한 통일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 통일은 물론 우리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미국·중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중요한 변수다.강대국들은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노력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백범의 자주적 통일론이 오늘의 통일정책에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는 지금 과거와 다른 차원의 남북교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그러한 변화를 남북화해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동안 ‘박제’됐던 백범의 민족화해와 통일론에 생명을 불어넣어현재화해야 하지 않을까. 백범은 ‘今日我行跡(오늘 내가 걸어간 자국은) 遂作後人程(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휘호로 즐겨 썼다.그가 넘었던 38선을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6일 다시 넘는다.반세기만에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그의 더 큰 소망인 민족의 화해와 통일도 가까워질 것이다. ◎DJ와의 인연/상대후보 백범암살 배후 드러나 3選 의원에/효창공원 골프연습장 공사 중단시켜 “報恩”/기념사업회 이사… 동상 건립 적극 재정 지원 金九 선생과 金大中 대통령은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민족의 큰 지도자 백범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金대통령은 20대 초반이었다.그러나 두사람간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인연이 있다. 그들의 인연은 60년대 중반 金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 그가 존경하던 백범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며 시작됐다. 金대통령은 67년 7대 총선에서 힘겨운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朴正熙 정권은 야당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당시 金大中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집권당인 공화당의 물량공세로 金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목포는 흥청거렸다. 집권당의 전략적인 집중 공세로 金대통령의 3선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상대방 후보였던 김병삼(당시헌병 대위)씨가 백범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金대통령측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金洙振(66·현재 국민회의 당총재 특보)씨는 선거 열흘전쯤 김병삼씨 관련 내용을 담은 책을 준비했던 金龍熙(77)씨를 찾아가 金大中 후보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金씨는 상대방 후보가 김병삼이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기로 했다.金씨는 李承晩 정권이 무너지자 안두희를 잡아 검찰에 넘긴 사람이다.그는 안두희의 고백과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병삼씨의 관련 내용을 담은 ‘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을 준비했다. 金大中 후보 진영은 절판됐던 이책을 비밀리에 다시 제작했다.투표 나흘전인 6월4일 목포역에 15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박순천 초대 신민당당수는 “공화당후보 김병삼씨는 백범암살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입니다.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폭로했다.‘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 3만5,000부가 즉석에 배포됐다.선거분위기는 급변했다.6월8일 투표결과 金大中 후보가 당선됐다. 金大中 대통령은 백범 추모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그때의 간접적 도움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백범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67년 서울시가 효창공원내 백범묘소와 3의사(義士) 묘소중간에 골프연습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했었다.국회건설위 소속이었던 그는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는 백범기념사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매년 백범 추모제에 참석해 왔다.남산에 백범동상을 세울 때도 자금지원을 했다. ◎초라한 ‘묘역 성역화’/담장교체·소나무 식재 기념관 건립 예산 부족/구청 녹지과 관리맡아 “국가관리 필요” 여론 金九 선생의 묘는 효창공원에 있다.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이동녕·차이석·조성환 선생의 묘도 함께 있다.많은 사람들은 최고 지도자였던 백범을 비롯 7명의 애국지사가 안장돼 있는 선열들의 묘를 국립묘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시는 지금 효창공원의 장·단기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단기계획(97년∼99년)에 따라 담장 교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용산구청의 유동렬씨는 1,326m에 이르는 담장공사는 연말까지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소나무 600그루도 새로 심었다.호국이념을 상징하는 대형 조형물(높이 11.7m 폭3m)도 공원입구에 세울 예정이다.장기계획은 7명의 애국지사들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다.하지만 예산이 문제라고 유씨는 말한다. 성역화 작업이 진행중인 효창공원은 그러나 국립 현충원(국립묘지)과 비교할 때 너무도 초라하다.국립묘지는 국가가 관리하지만 효창공원은 용산구청의 공원녹지과에서 관리한다.기능·고용직 공무원 7명이 관리인의 전부다. 백범기념사업협회의 선우진 상임이사는 金九 선생이 귀국후 45년 12월부터 49년 6월 암살당할 때까지 3년6개월간 숙소 및 집무실로 사용했던 경교장(京橋莊)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고/세계화시대의 백범/都珍淳 창원대교수·한국현대사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비운의 생을 마감하자,엄항섭은 그의 서거를 ‘달은 하나지만 뭇 강에 자신의 모습을 도장처럼 박아내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표현하였다.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길 민족주의자 백범의 월인천강은 남아 있는가. ○개방과 주체 선택 강요 한반도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에 휩싸여 있어 선진 문물의 수입 등에서 적지 않은 장점도 있지만,사대와 식민 그리고 분단의 역사가 증거하듯 늘 강한 원심력이 작용하였다.따라서 한반도의 ‘역사적 화두’는 늘 대외적 개방과 민족적 주체를 겸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대개 어느 하나로 편향되는 경향을 띄었고,그 극단에 민족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개방과 선진만 쫓아가면 사대·식민·분열의 굴레로,주체와 자주만 강조하면 후진과 망국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지난해 말 나라가 환란(換亂)위기에 빠진 이후,이제 우리는 진정 세계화되어 가고 있는 지 모른다.삼척동자도 IMF을 운위하고,뉴스는 언제나뉴욕 월가(Wall Street)의 동향을 전하며,국내 증시 또한 이에 따라 춤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민족현실에 굳건히 뿌리 내린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때문에 작금의 현실은 백범이나 민족주의를 박물관의 골동품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과거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 현재적 생명력으로 되살려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남북의 화합과 통일이라고,누구나 이야기한다.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습적·수식적 문구(文句)에 지나지 않고 생활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하기 위해 최근 외국의 한반도 문제 권위자나 기관의 진단을 들어보자.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라느니,‘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유엔 관리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느니,‘남·북한이 민주적 분단관리체제로 영연방과 같은 느슨한 연방(confederation)이 필요하다’는 등의 언급은 다름아닌 ‘분단체제에 대한 균형적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최근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적 발언’이 아니라,역사와 구조를 지닌 ‘전략적 개념’들이다.북한이 강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통일하려 했던 한국전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소련·동구권의 붕괴 이후 남한이 우월한 경제력으로도 북한을 흡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강력하고 일방적인 통일 한반도의 출현을 열강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현재 남북관계는 분명 ‘냉전적 대립’에서 ‘평화적 교류’로 나아가고 있지만,그것이 통일의 기초가 될지 분단의 장기 지속을 초래할 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따라서 우리는 두번 깨어나야 한다.먼저 남북 사이에 누가누구를 삼킬 수 있다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하며,다음에는 평화를 넘어 통일에 이르는 길은 자주적 노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필요가 있다.강대국이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보장이다. ○강대국 역할 제한적 해방 직후 백범도 좌우·남북의 체제 대립적 정치구도의 한가운데 있었다.그러나 민족 분단의 위기가 박두하는 것을 목도하면서,그는 좌우·남북 대립의 구도 속에서 유실되었던 민족문제에 다시 주목하여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다.민족을 위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이것이야 말로 백범이 남긴 월인천강의 핵심인 것이다.이후 백범이 노래한 시와 글도 모두 ‘자주적 평화통일’로 요약되거니와,그의 죽음도,그리하여 그의 부활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백범의 모습은 어떠한가.정치적 입지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위해 백범을 거론하면서도,그 생애의 총 귀결점인 ‘평화통일의 민족적 백범’은 허다하게 유실되어 있는 실정이다.백범은 자신의 미진한 바를 민족 앞에 바로 세웠으되,추앙한다는 우리는 백범를 다시 거꾸로 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 白凡 재조명:3­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백범일지/진솔한 필법… 自傳문학의 古典/벽촌 출생서 임시정부 주적까지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20여종 출간 상당수가 오류/97년 都珍淳 교수 定本 출간 백범일지는 金九 선생의 자서전이다.그의 생애와 사상을 진솔한 육성으로 기록한 20세기 전기문학의 고전이다.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있던 그는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백범일지를 썼다고 밝혔다.황해도 벽촌의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나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오른 민족 지도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다.백범일지는 여러 단체·기관에서 추천 도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상권은 1928년 2월과 3월 사이에 집필을 시작,다음해 5월3일에 마쳤다.하권은 1942년에 탈고했다.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는 백범의 독립을 위한 간절한 소망과 함께 백범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원문은 국한문 혼용체다. 백범일지는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 발간된 이후 20종 이상이 출판됐다.그중 상당수가 오류와 탈락으로 원본이나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그러한 오류를 수정하고 누락된 부분을 보완한 백범일지가 첫 출간 50주년이던 1997년에 출간됐다.숙명여대 李萬烈 교수,창원대 都珍淳 교수 등의 ‘백범일지’다.都교수는 백범의 친필본(94년 집문당에서 영인),백범 아들인 金信 장군이 갖고 있는 필사본,백범의 측근이던 엄항섭씨가 만든 등사본,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씨의 필사본,국사원본,서문당본 등 중요한 출간본들을 비교·검토하여 백범일지 정본(定本)을 4년간의 작업 끝에 출간했다. 都교수는 변변한 자료나 보조원 없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일정기간 집중적으로 집필했기 때문에 원전의 서술에서도 시기·인명·지명 등에 착오가 많다고 설명했다.그는 원문에 있는 오류를 각종 사료를 통해 보완했으며 난해한 문장은 읽기 쉽게 풀어썼다. 백범일지는 중국어와 일본어 판으로도 출판됐다.대만에서는 70년에 출판된 이후 20만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중국에서도 94년 4,000부가 발행되어 매진됐다.중국은 곧 백범일지를 추가 발행할 예정이다.일본어백범일지는 73년에 발행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다.미국에서도 영어판 백범일지가 올해 발행될 예정이다. ◎어린이 백범교실/청소년 민족캠프/조국 사랑 심는다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은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했다.그는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의 교육을 강조했다.그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식 조국사랑 등을 청소년들에게 가르쳐 건전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하는 프로그램이있다.‘어린이·청소년 백범교실’과 ‘청소년 백범 민족캠프’다. ‘청년백범 교사모임(대표 안성균 대광중학 선생님)’은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후원을 받아 1992년 어린이·청소년 백범교실을 열었다.매년 여름·겨울방학에 한차례씩 지금까지 12회 교육을 실시했다.교육기간은 3일이며 한번에 초등학생 40명이 참여했다. 교육은 효창공원 옆에 있는 백범기념협회 강당에서 주로 실시돼 왔다.프로그램은 金九 선생에 관한 슬라이드 상연과 강연,효창공원 선열묘소 참배,독립군가 배우기,전통예절 배우기,심성훈련 등 다양하다. 청년백범 교사모임은 96년 여름방학 때부터 청소년 백범 민족캠프도 마련했다.교실을 떠나 자연속에서 백범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교육 내용은 백범교실과 비슷하지만 보다 다양하다.40명의 초등학생이 참가한다.첫번째는 속리산 보람원에서 두번째는 97년에 포천에 있는 베어스타운에서 열렸다.올 여름방학에도 7월27일부터 29일까지 베어스타운에서 캠프가 열린다.참가자격은 초등학교 4학년∼6학년 학생이며 선착순 마감이다.백범기념협회의 홍소연 총무주임은 “어린이들의 반응이 좋아 공고가 나가면 보통 하루만에 마감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앞으로 중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안성균 교사모임 대표는 “金九 선생의 생애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조국사랑과 통일의지를 심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그밖에 우리 문화,전통예절,공동체 생활 등 교육은 민족문화에 눈을 뜨고 좋은 인간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석규관 선생·곽태영 의장/‘백범일지’ 30년간 무료 보급/사재 털어 구입… ‘1가정 1권’될때까지 석규관선생(63)에게 백범일지는 ‘바이블’이다.그는 백범일지를 경전이라 부른다.중국어를 가르치는 그의 가방엔 중국어책과 함께 백범일지가 언제나 들어 있다.백범일지를 나누어주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생활의 한 부분이다.그와 함께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다.곽태영(63) 4·19혁명회 공동의장이다.그는 65년 안두희를 비수로 찌른 사람이다.백범기념사업협회 상임이사를 맡기도 했다.그들은 68년 ‘백범독서회’를 만든 후 30년 이상 백범일지 무료보급운동을 하고 있다.백범독서회 회장은 곽태영 선생이 맡고 석규관 선생은 운영위원장이다.김용삼·김삼열씨 등도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그들은 사재를 털어 학교 도서관이나 개인들에게 백범일지를 나누어주고 있다. 곽태영 선생은 70년대 백범일지 7,000부를 사재로 구입,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석규관 선생은 오랫동안 자신의 월급에서 반을 떼어내 백범일지를 구입한 후 나누어주었다.그는 80년대 초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등에게 거의매달 2,000여부를 나누어주었다.79년부터 83년까지 대만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많은 학원과 대학 등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백범사상도 함께 가르쳤다.백범독서회 사람들은 6월26일 백범서거 49주년 행사에서 3,000부를 나누어줄 예정이다.지금까지 나누어준 백범일지는 5만부가 넘는다.그들은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에게도 훈련소에서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그들의 더 큰 소망은 ‘1 가정 1 백범일지’의 꿈을 하루 빨리 실현하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 李昌淳·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주춤거리는 정계개편/與 ‘대통령외유중 파문’ 곤란 판단

    ◎野,수도권 20여명 탈당설 부인/국민회의 일각 “지도부 정치력 부족” 지적 국민회의가 추진하는 정계개편이 주춤거리고 있다.지방선거가 끝나면 일거에 여소야대가 무너지고 정가의 지각변동이 일어나리라던 일반의 기대와 달리 정가는 설만 무성할 뿐 미동도 없다. 국민회의측은 영입작업을 金大中 대통령 귀국 후로 미룬다고 공식 발표했다.대통령이 해외에서 국익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국민회의는 선거기간에는 물론 지금도 조만간 수도권지역의 한나라당 의원 두 자리수가 국민회의로 오게 될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다.과연 국민회의가 호언한 대로 金대통령 귀국 이후(6월 14일)에는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뀔까. 한나라당에서는 “꿈도 야무지다”는 반응이다.실제로 국민회의에서 1차로 지목하고 있는 ‘97년 대선과 6·4지방 선거에서 해당 지역구가 패배한’수도권의 한나라 의원들(20여명)은 한결같이 그 가능성 을 부인하고 있다. 국민회의측 설명은 사뭇 다르다.당 기조위원장으로 영입작업에 관여하고 있는 薛勳 의원은 “빅 딜 이야기가 나오면서 개별 입당키로 했던 한나라당의원들이 ‘그 때 함께 움직이겠다’며 결행을 미루고 있다”는 설명이다.한나라당 내부사정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출을 하자면 가정불화가 있어야 하는 데 한나라당 내부가 그렇게까지 어수선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국민회의측 호언과 달리 한나라당 내부사정에 따라 金대통령 귀국 후에도 영입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당 일각에서는 당 지도부의 정치력 부족을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한다.도상계획은 그럴 듯 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데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들은 정계개편 3단계 작업중 첫 단계부터 金대통령이 직접 나서거나 메신저들이 움직여야 일이 풀릴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당이 총재인 金대통령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金 대통령 訪美­정상회담 뭘 논의했나

    ◎韓·美,北韓 연착륙유도 접점 확인/한 햇볕론·미 포용정책 결국은 일치/미 기업 대한투자 늘릴 장치도 마련 【워싱턴=梁承賢 특파원】 새 정부들어 처음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한국 새 정부의 국정이념에 따라 양국이 새로운 차원의 동반자 관계를 맺어나갈 것임을 천명한 자리였다. 두 정상은 이날 양국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규정하면서 한국 새 정부가 표방한 대북정책 기조의 지지와 함께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대북정책과 관련,한국 새 정부의 ‘햇볕론’과 미국의 ‘포용정책’이 궁극적으로 대북 연착륙에 있어 유사성이 많다는 점도 확인됐다. 金대통령은 대북 봉쇄정책보다는 포용정책을 취하며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기 위해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입장을 미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남북관계의 진전과 조화속에서 미북관계의 진전도 바람직하며 ▲미국이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것은 미 정부가 결정할 일이지만 한국과 협의하면서 단계적으로 해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전달했다. 미국은 특히 대북제재 해제문제를 먼저 제안한 한국정부의 취지를 크게 환영하며 구체적인 문제는 앞으로 계속 협의하자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새 정부는 미북관계와 남북관계의 진전속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무방하다고 보고 있다.과거 남북관계와 미북관계의 진전을 선후(先後)로 명확히 구분한 데서 탈피한 이같은 정책방향은 한국이 자신감있게 대북관계를 주도해나가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함께 두 정상이 미국 기업의 대한투자확대를 겨냥해 한·미 투자협정체결,과학기술협력을 위한 한·미 소프트웨어 협력위를 설치하기로 한 것도 의미가 크다. 특히 다음달 체결을 목표로 하는 한·미투자협정은 무역자유화협정의 사전단계로 한국내 신규 또는 기존 미국기업에 한국기업과 똑같은 내국민 대우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협정은 한국이 외국인 투자유치를 내걸고도 좀처럼 투자확대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규모가 큰 미국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일종의 제도적 장치다. 협정체결로 국내기업에 대한 미국기업의 M&A(인수합병)등이 크게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된다. 이밖에 동북아지역의 안정을 위해 미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 이 지역에서 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이 필요하다는 우리측의 지적에 이어 동북아 지역안보를 위한 양국 의견도 조율됐다.
  • 白凡 재조명:2­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백범 사상/“민족만이 영원할 뿐”/열린 민족주의 바탕 인류의 평화 역설/문화의 힘 드높은 ‘아름다운 나라’ 소망 백범이 바라는 한국의 미래는 아름다운 문화국가였다.그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높은 문화의 힘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의 힘과 가치를 강조했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사랑의 문화평화의 문화로 우리와 인류전체를 잘 살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범사상은 이러한 문화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백범연구가들은 분석한다.그의 사상은 ‘백범일지’ 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 잘 나타나 있다.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을 두루 포용했다.그의 종교·사상은 민족애로 수렴됐다.백범일지에서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민족만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백범은 독립운동과 해방후 민족통일 노력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강조했다.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민족주의는 저항 민족주의였다.그러나 저항 민족주의는 식민통치라는 시대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민족과 민족관계,국가와 국가관계는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민족주의의 최대 과업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다.피압박 국가의 독립이 궁극적으로 세계평화의 기본적인 전제다”라고 말했다.백범의 민족주의는 이 때문에 유럽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르다.자유의 존중과 독재의 배격을 강력히 내세운 민주적 성격을 담고 있다.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열린 민족주의다.백범의 민족주의를 종족관념 또는 저항 민족주의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백범 민족주의의 원류는 열린 민족주의다. 백범은 보편성을 갖는 민족주의와 함께 자유의 소중함을 강조했다.그는 백범일지에서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자유다”라고 표현했다.백범이 말하는 자유는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야 한다’는 주권재민 사상과 연계된다.“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을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에 달렸다.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온다”고 백범일지는 강조하고 있다.자유 아님의 대표적 예는 계급독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로 보았다.소련식 공산당을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는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는 독재를 막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범의 민족주의·자유주의·문화주의는 각각 별개의 사상이 아니다.큰 틀속에 하나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백범 사상의 이상은 열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나라의 자주독립과 문화의 힘을 통한 인류의 평화라 할 수 있다.그 이상을 실현하는 열쇠는 자유의 보장이다. 세계는 그의 이상대로 문화의 힘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미래학자들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백범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中國 피난처·臨政청사 복원 金九 선생이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있던 중국의 자싱(嘉興)은 우리에겐 잊혀진 도시였다.그가 일본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듯이 자싱은 우리의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제는 망각의 도시가 아니다.金九 선생이 숨어있던 집이 유적으로 복원되며 우리곁으로 돌아왔다. 백범은 19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이후 일본경찰의 추적이 집요해지자 상하이(上海)에서 서남쪽으로 80㎞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자싱으로 피해왔다.그는 자싱에서 추풍청(저보성)씨가 마련해준 집에서 은신했다.그곳은 추씨의 수양아들 별채였다.백범은 일본 정탐꾼이 자싱까지 오자 하이옌(海鹽)으로 피신했다. 중국정부는 96년 백범이 약 2년간 숨어있던 두 곳을 복원해 유적지로 지정·관리하기 시작했다.자싱에 있는 백범 유적지는 메이완 거리에 있다.2층 건물 현관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한자로 쓴 녹색간판이 붙어 있다.백범이 당시 접견실로 썼던 1층 벽에는 백범과 그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추씨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2층에는 침대와 옷장 등이있다. 하이옌에 있는 피난처는 주쟈루이씨 집안의 별장이었다.주쟈루이씨는 백범을 하이옌으로 피신시킨 추씨의 장남 펑장(鳳章)의 부인이다.펑장씨는 자신의 부인을 백범의 부인으로 위장시켰다.대나무숲 속에 단장돼 있는 유적지에는 백범의 흉상과 함께 ‘김구 피난처’라는 한자 간판이 있다.전시실에는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추풍청,주쟈루이 등의 경력과 활약상을 담은 각종 사진과 자료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金九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해외독립운동 구심점이었던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도 93년 복원됐다.청사는 26년부터 7년동안 사용했던 3층 연립주택이다.삼성물산 등의 지원으로 61년만에 복원된 청사는 1층 회의실·접견실·부엌,2층 국무령 집무실과 직원사무실,3층 요인숙소 및 전시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실과 집무실에는 당시 사용했던 책상·의자 등 집기와 비품이 갖춰져있다.3층 전시실엔는 尹奉吉 의사의 의거장면 등 독립운동관계 사료 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임시정부는 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후 일제의 탄압과 추적공세가 강화되자 상하이를 떠나 유랑하다 40년 충칭(重慶)에 정착했다.임시정부는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충칭의 청사도 95년 복원됐다.중국은 백범이 경계한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그의 독립운동과 민족사랑을 높이 평가,그의 발자취를 복원했다. ◎국민의 힘으로 기념관을/과거 집권층 왜곡­평가절하 탓/애국혼 깃들일 곳 없이 반세기/26일 종합계획 발표… 내년 기공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다.그러나 사후 반세기나 지났지만 그의 국내 발자취는 여전히 망각의 역사속에 묻혀 있다.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은 병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기념관도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鮮于鎭 상무이사는 “기념관 건립과 발자취 복원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그의 위업을 왜곡하고 평가절하했던 집권층과 잘못된 사회풍토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협회는 그러나 기념관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金泳三 전 대통령 집권때인 96년 8월14일에는 발기인대회도 열렸다.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金九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는 金泳三 전 대통령이 기념관 건립을 위해 담당 비서관까지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기념사업협회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이후 기념관 건립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金대통령은 金九 선생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어 기념관 건립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鮮于이사는 말했다. 그러나 건립기금과 장소선정 등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鮮于이사는 “국민성금과 정부지원으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러나 IMF시대의 경제난 때문에 성금 모금운동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그는 말했다. 장소도 문제다.金九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을 선정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고 기념사업협회측은 말한다.기념사업협회는 金九 선생 서거 49주년인 6월26일에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발표할 예정이며 서거 50주년인 내년에 기공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기념관은 총건평 1,200평의 지상 3층 건물로 구상되고 있다.1층은 유물 전시실,2층은 자료실·도서실·사무실,3층은 국제회의장·소회의실·영사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념관 건립은 金九 선생의 사상이나 업적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민족교육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실현돼야 한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그들은 범국민운동을 펼치고 정부도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金九 선생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고종과 嚴妃(秘錄 南柯夢:13)

    ◎쫓겨났던 嚴 상궁 돌아와 妃되니…/高宗,명성황후 서거후 失意의 나날/문상 온 嚴씨 우연히 재회… “궁에 머물라”/못생긴 얼굴에도 총애… 아들 보니 英親王 명성황후가 비명에 돌아가시기까지 고종은 창덕궁과 경복궁을 번갈아 오가며 살았다.그 뒤 경복궁 서쪽의 영추문을 빠져나와 정동의 아관(러시아 공관)에 피신했다가 바로 담만 넘으면 다시 아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었다. 이처럼 정궁인 경복궁을 두고도 이곳 저곳 별궁을 돌아다녀야 했던 것이 대한제국 황제의 신세였다. ○외아들 純宗에 지극정성 명성황후의 서거는 고종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남기고 간 외아들 순종에게로 모아졌다.그래서 덕수궁 함녕전에서 두 부자가 꼭 붙어서 함께 기거했던 것이다. 그럴 때 엄상궁이 나타났다.일설에 의하면 명성황후에게 쫓겨났던 엄상궁을 고종이 즉각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는 것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종이 부른 것이 아니라 엄상궁이 고종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엄상궁도 장상궁처럼 궁궐에서 쫓겨난 뒤 줄곧 수절하고 있었다. ‘엄상궁(嚴尙宮)은 중전마마가 생존해 계실 때에 죄가 있다고 하여 궁궐에서 쫓겨났었다.그 뒤로는 다시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다.그런데 밖에서 생활한 두어해 사이에 의식주가 곤란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생활이 매우 구차하였다.그러던 차에 갑자기 곤궁(명성황후)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리하여 대궐에 들어가서 문상을 하게 되었는데,그 뒤로는 자주 안상궁(安尙宮)이 거처하는 방에 드나들었다.그러던 어느 날 상감께서 마침 엄상궁을 보시고 물으시기를 ‘네가 엄상궁이 아닌가.근년에 왜 궁궐을 나가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느냐.’ 하시니 대답하기를‘자연히 궁궐밖에서 생활하다 보니 들어오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교시를 내리어 말씀하시기를 ‘지금부터는 궁궐 안에서 머무르고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시었다.그리고 며칠 후에 불러다가 동쪽에 있는 온돌로 된 지밀(至密) 방안에서 머무르게 하였다.그런 뒤에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으니 곧 지금의 영친왕(英親王)이다.엄상궁이 영친왕을 낳은 뒤에는 귀인(貴人:內命府의 종일품 封爵)에 봉해지고 경선당(慶善堂)에 거처하면서 왕실의 재산을 주관했으니 누가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겠는가’ ○32세 되어 高宗 눈에 들어 엄상궁에게 죄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고종의 사랑을 받아 승은(承恩)하였다는 이야기다.엄상궁은 나이 다섯 살때 궁궐에 애기나인으로 들어와 커서는 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승격한 궁녀였으나,나이가 벌써 32세나 되어 고종의 눈에 들기에는 어려운 과년한 노처녀였다.거기다 장상궁처럼 얼굴이 예쁘지 못했다.예쁘지 못했다기 보다는 못생겼다는 표현이 훨씬 진실에 가까웠다.그런데도 고종은 중전 몰래 엄비를 사랑하여 침소에 불러들여 잠자리를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임금님은 중전의 눈을 피해 상궁과 동침을 하게 되며,상궁은 그렇게 쉽사리 임금님에게 몸을 맡겼는가.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한데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보통 임금님의 침소는 임금님과 중전만단둘이 자는 것이 아니라,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병풍을 쳐놓고 네 상궁이 각각 병풍 뒤에 누워서 밤을 지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으니 상궁들로서는 방안의 숨가쁜 상황을 일일히 듣고 감상할 수 밖에 없었다.엄상궁같은 지밀상궁은 거의 매일처럼 침소에 들어 숙직하였으니 비록 병풍으로 가려 있었으나 임금님과 한 방에 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그래서 왕은 때때로 상궁같은 나인을 불러들여 시침(侍寢)했는데,이를 승은이라 했다.엄상궁도 승은의 영광을 입은 분이었다. 정환덕이 덕수궁에서 처음 고종을 알현하였을 때 우연히 엄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그때 일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엄씨 일가 모두 요직 앉아 ‘네 칸 정도 될까 하는 온돌방이었는데 전등빛이 휘황하게 밝았고 비단으로 만든 카텐에서는 향내가 가득했다.조금 있더니 살찐 얼굴에 기름끼가 번질한 한 미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머리 위에 무엇이 있던가.푸른 포도잎 같은 것이 달려 있고 등 뒤에는 구슬로 허리를 감은 것 같이 보였다.엷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 하고 바람이 눈을 날리는 것도 같았다.또 아침해가 안개 속에 떠오르는 듯하고 연꽃이 푸른 파도 위에 뜬 것도 같았다.한마디로 말해서 갑자기 궁안에 선녀가 내려온 것으로 착각했다.바로 그녀가 엄비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제 밤에 새로 임명받은 시종관 정덕환입니다” “어찌 이곳에 홀로 앉아 있는가”하고 다시 물었다.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여기서 기다리라 하시어 앉아 있습니다” 하였다.그러나 엄비는 성난 듯한 얼굴로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더래도 여기 지밀(至密)한 곳에 함부러 들어와 앉아 있는가.썩 나가도록 하라”고 하였다.이말을 들고 밖으로 쫓겨 나오니 정신이 아찔하였다.’ 이상이 정환덕이 엄비를 처음 뵙고 쫓겨난 사연이었는데 그 뒤 고종이 정환덕을 불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정환덕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 잊어버린 것을 볼 때 고종에게 심한 건망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황상께서 입대하라는 명이 있어 즉시 입시하였는데 황상께서 신에게 위로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번에는 갑자기 손이 있어그렇게 되었으니 너무 놀라지 말고 안심하라’ 하셨다.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보니 송구스럽 짝이 없어 불안한 마음 가시지 않았다.왜냐하면 상궁과 시녀가 밤참을 들고 탑전(榻前:임금님앞)에 올릴때 용상 뒤에 모시고 서 있는 분이 바로 엄귀인(嚴貴人)이셨기 때문이다.엄귀인은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을 낳은 분이시다.’ 엄상궁이 다시 궁안에 들어온 뒤 영친왕을 낳았고,그 때문에 엄귀인으로 승격하고 이어 엄비로 재차 승격하였으니 그 영광은 엄비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엄씨 일가 모두에게 돌아가 요직을 맡게 되었으니 장상궁의 경우와는 정반대되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 白凡 재조명:1/金九 연구 어디까지(정직한 역사 되찾기)

    ◎그의 죽음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참역사의 불꽃 스러지고/식민유산 씻을 주체 상실 평화통일론 어둠속 유배/국가차원 연구후원 全無 이젠 정당한 평가 필요 백범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다.순수한 열정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독립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1949년 6월26일 암살됐다.타계한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면 현대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력은 그를 왜곡했다.이제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한다.정직한 역사를 되찾기 위해 金九 선생을 재조명한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이었던 민족의 큰 스승 백범 金九.그는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끈질긴 생명력으로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었다.그의 헌신적 민족사랑은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그러나 그 불빛은 정의의 역사로 승화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그의 비극적 죽음은 ‘정의의 역사’가 현실에서 패배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됐다.암살범은 일본인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같은 민족이었다.그러나 ‘암살범’은 안두희라는 개인이 아니었다.그는 거대한 음모의 한낱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金九 선생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에 희생된 것이다.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안두희의 총성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결국 잘못된 현대사에서 파생된 권력의 폭력은 5·18 광주민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金九 선생을 죽인 권력과 친일세력들은 그를 낡은 역사속에 묻어두려했다.그들은 金九 선생의 최고 가치였던 독립과 민족통일론을 매도했다.그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그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현실에서의 ‘패배자’로 왜곡됐다.자유당정권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출판도 금지시켰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과 그이후 全斗煥·盧泰愚 정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군사정권들은냉전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백범의 민족통일론을 외면했다”고 창원대학의 都珍淳 교수(한국사)는 말했다. 金九 선생을 죽게한 일그러진 현대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현대사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마땅히 단죄됐어야 할 민족반역자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도 부와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백범의 죽음은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청산할 주도세력의 상실을 의미했다.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굴절된 현대사의 어둡고 긴 그림자 속에서도 백범은 일반대중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아왔다.SBS방송 조사결과,金九 선생은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타났다.그는 고대 신문이 실시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백범은 국민들에게는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현대사가 권력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백범연구는 활발할 수 없었다.문민정부에 들어와 그의 연구는좀더 적극화됐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일부 정치세력이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면서도 그의 기념관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중국에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회의까지 열렸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도 불투명하다.그가 서울에 설립했던 2개의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백범 푸대접은 정통성이 약한 과거의 권력이 그의 영웅화를 두려워하고 그의 통일론과 분단상황이라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그러나 냉전체제도 무너지고 金九 선생에 각별한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都교수는 예상한다. 金九 선생은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백범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삶의 철학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도 ‘등불’이 될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생애 ▲1876년(고종13년) 해주에서 탄생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동학접주가 됨 ▲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 때려 죽임. 해주감옥에 감금됐다 인천으로 이감 ▲1898년(23세) 인천감옥 탈옥.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1904년(29세) 최준례와 결혼 ▲1909년(34세)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자로 체포됐다 석방 ▲1919년(44세)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3년(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1924년(49세) 부인 최준례 여사 사망 ▲1926년(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 ▲1930년(55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57세) 이봉창 의사의 日王 저격,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지휘.상하이에서 자싱(嘉興)으로 피신 ▲1933년(58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35년(60세) 난징(南京)에 학생훈련소 설치 ▲1938년(63세) 호남성 장사로 피신.민족진영3당 통합을 논의하던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1939년(64세) 어머니 곽낙원(81세) 여사 사망 ▲1940년(65세)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 ▲1941년(66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정.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대일선전포고 ▲1945년(70세) 중국에서 귀국.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 전개 ▲1947년(72세) 제2차 반탁운동 전개.인재 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개설 ▲1948년(73세)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발표.남북연석회의 위해 평양방문후 귀국 ▲1949년(74세) 백범학원·창암학원 설립.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1969년 남산에 동상 세움(서거 20주년)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cslee@seoul.co.kr
  • 高宗의 외도(秘綠 南柯夢:12)

    ◎중전 잠든 새 至密상궁 불러 雲雨之情/소문난 엄처 황후 사실 알고 “믿는 도끼에…”/상궁 궁밖 축출… 친정 일가붙이 요직서 내쫓아/한달 남짓 지나 낳은 사내아이가 義和君 李堈/대궐 들어온 참봉의 12살 딸에 “기다려라” 언질도 고종에게는 후사가 귀했다.열네살때 명성황후를 정비로 맞아들였으나 여러차례 유산한 끝에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으니 이가 바로 순종이다.선원계보(璿源系譜)에 보면 명성황후는 2남인 순종만 순산하였을 뿐 1,3,4남 등 아들 셋과 1녀를 합해 넷이나 유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 셋·딸 하나 유산 아픔 사가에서도 후사가 없다는 것은 집안이 망하는 징조로 알고 있었던 당시에 왕가에 후손이 없다는 것은 온 국민의 걱정거리이어서 망국의 조짐으로까지 여겼다.그래서 그런지 고종은 명성황후 생존시 소문난 엄처시하(?)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외도(外道)하기를 서슴지 않았다.그 중의 하나가 김승현(金勝絃)의 딸이었다.이 사건은 1885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 어느 해인가 김승현(金勝絃)이 딸 하나를낳았다. 나이가 열 두살 되던 해에 나인을 따라 대궐에 들어와 마음대로 뛰어 놀고 있는데,그때 마침 상감께서 춘생전(春生殿)에 납시어 그녀를 발견했다.물으시기를 ‘너는 누구 집의 딸인가’ 하셨다.대답하기를 ‘전 참봉 김승현의 딸입니다’ 하였다.상감께서 ‘나이는 몇살인가’ 하시니 대답하기를 ‘열두 살입니다’라고 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곳에 들어왔느냐’고 하시니 대답하기를 ‘나인 정씨를 따라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아이의 용모와 언어와 행동하는 예의 범절이 찬찬하고 자세하며 또한 조용하니 참으로 귀인의 모습이다’하시고 드디어 불러서 앞에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그리고는 자세히 살펴보니 고운 자질을 타고나 보통 여염(閭閻) 집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자태가 아니었다.드디어 희롱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가서 잘 배우고 잘 자란 뒤에 내가 부르는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시었다” 춘생전은 경복궁에 있던 건물로서 지금은 없다.고종은 을미사변이 일어나는 1895년까지경복궁에 기거하고 있었다. “김승현의 딸은 본래 서울에서 생장하여 조숙한 나머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똑똑한데다가 마음씨가 곱고 재주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가지를 알았다고 한다.드디어 궁궐을 나와 집에 돌아간 뒤에는 내칙(內則) 등 여러 책과 경전(經典),예설(禮說) 등을 읽어서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옛날의 여러 제도까지도 널리 배워 비록 이름난 선비라도 그녀를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궁과 나인들이 모두 이 이야기를 듣고 김승현의 집을 끊이지 않게 내왕하였다.이 때문에 상감께서도 이 사실을 들으시게 되어 온 궁궐안에 소문이 자자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러나 중전마마(명성황후)께서 호랑이가 넘보듯 감시하고 있었으니 상감께서 비록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고는 하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서거했을 때 김승현의 딸은 스물 두살이었다.스스로 믿기를 황상께서 자기를 불러들여 황후로 삼을 것이라 믿고 고대하였으나 이것은 이른바 늙은 처녀가 신랑감을 기다리는 격이었다.마침내궁궐에서 아무 소식이 없었으니 김씨집에서는 다만 근심만 더하고 심란할 뿐이었다.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그녀의 나이가 꽤 들었다.그 부모가 시집을 보내려고 했으나 죽기로써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 하면서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았으니 그 부모도 딸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황후 삼으리라 믿고 고대 김승현의 딸이 그 뒤 시집을 갔는지 평생 노처녀로 고종 황제를 사모하였는지는 모르나 어찌되었건 한번 임금에게 간택되면 한 여인의 운명은 그로써 최종 부도처리(?)되는 것이었다.그러나 김승현의 경우는 딸 하나로 불행이 끝났으나 장상궁의 경우는 그 화가 일가친족에 다 미쳤으니 가히 멸문지화라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가장 아끼고 믿고 있던 장상궁(張尙宮)을 고종이 건드림으로써 일어났다.그러니 아무리 임금님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외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당했던 張씨 일가 망해 “장상궁은 중전(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금옥(金玉)처럼 사랑을 받고 있었다.그래서 중전이 장상궁을 지밀(至密)에 두시고날마다 아침이면 머리를 빗게 하고 쪽도 맺게 하여 화장 분(粉)을 내려 주시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그 때문인지 장상궁의 친정 일가붙이가 모두 요직에 임명되어 부자가 된자가 부지기수였다.그런데 상감께서 장상궁에게 마음을 두신 지가 꽤 오래되었다.그러나 틈을 얻지 못하여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중전께서 깊이 잠든 새를 이용하여 장상궁을 부르시어 갑자기 무산의 운우(巫山雲雨:남녀의 정사)를 나누었다.그 뒤에 장상궁이 임신하게 되어 배가 점점 불러오고 얼굴색은 점차 파리해져 갔다.중전마마가 ‘네가 무슨 병이 있기에 얼굴이 그러한가’ 물으시었으나,대답하기를 ‘음식이 맛이 없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사지가 나른하여 기운이 없을 뿐이지 다른 증세는 없습니다’하였다. 그래서 중궁은 어의(御醫)에게 진찰을 받게 하여 약을 쓰게 했는데 뱃속의 태아는 장차 어떻게 숨기고 지낼 수 있겠는가.임신 8∼9개월에 이르자 장상궁의 배는 매우 불러 뚜렷하게 표시가 나게 되었다.중궁을 가까이 모시던 나인들이 몰래 그 사실을 고해바치니 이에 곤궁(坤宮·명성황후)은 크게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것도 분수가 있지 어찌하여 이와같이 귀신도 모르게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시고는 드디어 장상궁을 궁궐 밖으로 내쫓고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그 뒤에 장상궁의 친정 일가붙이는 모두 요직에서 쫓겨나 버리니 그렇게도 당당했던 장씨의 집안이 일시에 망하고 말았다” 불쌍한 장상궁은 궁궐에서 쫓겨난 뒤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곧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공이었다. “장상궁이 한달 남짓 지나 한 사내아기를 낳았으니 이 분이 의화군이시다.몇해가 지나지 않아 장상궁이 돌아가시자 궁의 이름을 의화라고 했다.그러나 장씨 집안은 문득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 즉 남가일몽(南柯一夢:꿈같은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이 되고 말았다”
  • 쥬라기의 사람들/孫靜淑 기자(객석에서)

    ◎희곡­연출의 불화 모든 연극은 재해석의 속성이 있다.희곡이란 일차 질료 위에서 있기 때문이다.입체화 과정에서 이걸 일부 넘어서거나 배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희곡이 그어놓은 문자공간의 금밖으로 아예 도망치기란 불가능하다.희곡을 대하는 연출은 그래서 대화적이어야 한다.주도권은 쥘 수도 넘겨줄 수도 있다.하지만 밀고 당기며 희곡을 탐색하고 육화해 가는 과정을 건너뛴다면 안이하게 달아오른 연인처럼 불화와 파경으로 치닫기 쉽다. 예술의전당 이강백 연극제로 공연된 ‘쥬라기의 사람들’(∼24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은 희곡과 연출의 불화를 나쁘게 보여준 예라고 할 수밖에 없다.불화라고 다 나쁜건 아니다.때론 거짓 화목보다 훨씬 정직하다.또 불화와 파탄으로 밖에 보여줄 수 없는 불모지경도 삶엔 분명 있다.희곡과 치열한 말싸움 끝에 귀결할 수밖에 없는 불화라면 그 연출은 희귀한 개성,더욱 고통스런 비타협의 몸짓일지 모른다.하지만 이번 불화는 아무리 봐도 희곡의 밑바탕 정서와 따로 놀아버린 연출의 ‘일탈’로밖에 보이지않는다. 탄광의 폭발사고를 빌미로 사회의 그물망속에서 조금도 손해보지 않겠다고 버둥대는 인간군상을 포착하는 희곡의 언어는 양파껍질 벗기듯 중층적이다.죽은 자가 “석탄을 파 나가다 파 나가다 보면 언젠가 한줄기 빛과 만날 수 있잖겠느냐”고 희망을 토로하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은폐적이다.이기심만이 삶의 추동 원리가 된 곳,그 고리를 끊을 방법도 뵈지 않는 세계….그런데 이같은 희곡의 고민은 연극 속에서 대나무 부러지듯 부러져 버렸다.작가의 문제의식을 함께 고민한 연출이라면 이처럼 쉽고 편한 해피엔딩에 유혹될 수 없다.본질을 장악하지 못한 끌과 정이 인물들의 대립을 적절하고 날카롭게 부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할 터.강약도 유기적 연관도 없는 기계적 입장의 나열들 뿐이었다. 연인을 사랑하면 그 고통의 외침을 소홀히 뭉개지 못하는 법.연출가가 희곡을 사랑하지 않는 건 단지 게을러서인가,아니면 사랑할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 梁起鐸 선생 유해 60년만에 환국

    ◎대한매일신보 창간·臨政 참여 독립운동/어제 中서 봉환… 14일 국립묘지에 안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대표적인 애국계몽 언론인이자 무장독립운동가인 우강(雩岡) 梁起鐸 선생의 유해가 8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1938년 중국 상소성 율량 고당암에서 서거해 현지에 안장된 지 꼭 60년만이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하오 3시30분 아시아나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손자 梁俊一씨와 손녀사위 朴維徹(독립기념관장)에 의해 봉환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영현봉안관에 임시 안치됐다. 이로써 李相龍 선생(90년),朴殷植 선생(93년) 등 국외에 안장돼 있던 8명의 임시정부 수반급 요인이 모두 국내로 봉환됐다.雩岡 선생은 민족독립을 위해 몸소 가시밭길을 걸어온 참 민족주의자였다. 평양 소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25세때인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의 길로 들어섰다.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는 수난의 시작이었다. 선생은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합작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으며 외국인에게 사장을 맡기면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십분 활용,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며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했다.이와 함께 전국의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항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이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로 인식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일제에 맞설 때마다 중심축이 됐던 선생은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대한매일신보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해 직접 총무를 맡으며 전국적 국민운동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후 安昌浩·李東輝 선생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해 활동하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33년 여러 차례에 걸친 추대에 겸양으로 거절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조선혁명당 한국광복전선을 조직하는 등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민족화합을 위해 온몸을 던져 일하다 과로로 1938년 이역만리에서 서거했다.유해는 일반인이 참배할 수 있도록 오는 14일 정오까지 영현봉안관에 안치되며 14일 하오 2시 안장식이 거행된다.
  • “日 금융기관 추가 도산 가능성”/자민 간사장 경고

    【워싱턴 연합】 일본은 조만간 금융기관이 추가 도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가토 고이치(加藤肱一) 자민당 간사장이 6일 말했다. 가토 간사장은 이날 워싱턴 소재 경제전략연구소(ESI)가 주최한 포럼에 참석해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과 야마이치 증권의 도산이 “선단(船團)에서 처음으로 배가 처진 케이스였다”면서 이같이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금융 자유화가 지속돼 (금융) 선단이 쪼개지면 크게 앞서거나 뒤지는 배들이 생길 것”이라면서 “그렇게되면 더 많은 선박들이 가라앉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존 F.케네디(美國의 대통령 문화:19)

    ◎뉴 프런티어정책 편 美 상징적 지도자/평화봉사단 창설… 후진국 교육·영농지도/蘇의 쿠바 미사일 배치 기도 ‘힘’으로 봉쇄 【보스톤(美 메사추세츠주)=羅潤道 특파원】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를 묻지 마십시요.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요.” 1961년 1월20일,43세의 나이로 미역사상 최연소의 기록을 세우며35대 대통령에 취임한 존 F.케네디 대통령(1917­1963)의 취임사는 냉전체제에 대한 염증 때문에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미국민들에게 신선한충격으로 다가왔다. 63년 11월21일 댈러스에서의 총성으로 최고의 전성기에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서게 된 케네디는 불과 2년10개월(1천37일)의 짧은 집권기간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포토맥강 건너 알링턴 국립묘지 한복판,워싱턴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중앙 언덕에 ‘불멸의 불꽃’(eternal flame)으로 살아 미국민들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다. 첫 20세기 출생 대통령인 그는 많은 업적을남겼다.‘뉴 프런티어’라고 불린 그의 정책은 루즈벨트의 ‘뉴 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평화봉사단’을 창설,미국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세계 구석구석 후진국을 찾아가 교육과 영농을 지도케하는 인류애적 차원의 일에 적극 나섰다.흑인인권 보호를 위해 흑백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안도 만들었다.소련보다 한발늦기는 했지만 선구자적인 의지로 우주개발계획을 추진,미국이 최초의 달정복 국가가 되도록 했다. ○흑백차별금지법 제정 대외적으로도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대한 강력한 대처,쿠바내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저지키 위한 쿠바 봉쇄 등 ‘힘’으로 소련을 굴복시킨 그의 강력한 대외정책은 미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물론 국제적인 관심또한 불러 일으켰다.비록 쿠바침공 실패로 국제적 망신을 하기도 했지만 60년대 들어 대중문화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미국적 이상을 실현할 젊고 용기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던 미국민들에게 케네디는 ‘미국의 상징’으로까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고 강력한 의지력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다.더우기 정계 입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치적 성장과정이 백만장자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금권을 앞세운 적극적 개입에 의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그가 강력하고 진보적인 정책을 펼수 있었던 것은 겸손하고 노력하는 자세 때문이다.그는 사려깊고 여러 사회문제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민주주의 원칙의 수호자로 이미지를 심었다. 1917년 보스턴 교외의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프와 로즈 케네디 사이의 9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케네디는 병약하고 그다지 학교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사람을 사귀기 좋아했고 스포츠를 좋아했다.부친이 루즈벨트 행정부때 영국대사를 지내 런던대학에도 잠깐 재학한 일이 있는 그는 하버드에 입학,광범위한 여행을 즐겼다. 그러나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점차 학업에 흥미를 보였다.영국의 나치 독일에 대한 대응 실패를 다룬 그의 졸업논문은 ‘왜 영국은 잠을 잤는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이어 1942년 진주만 폭격 직전 미해군에 입대해 PT(어뢰정)지휘관으로 활약,일본군과 싸운 공로로 은성훈장을 받기도 했다.45년 디스크 수술로 전역한 그는 부친의 권고로 46년 민주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에 출마,당선됐다. ○57년 퓰리처상 수상 52년 3선의원인 케네디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이듬해 그는 조지워싱턴대를 나오고 워싱턴타임스­헤럴드의 런던특파원 이던 24세의 재클린 부비어와 결혼했다.지성과 미모를 갖춘 재클린과 미남 총각 상원의원과의 결혼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두사람의 결혼생활은 케네디의 바람기로 원만치 못했다. 57년 미의회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의원들의 이야기를 엮은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저술,퓰리쳐상을 받은 케네디는 바른 이상을 가진 정치인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TV토론이 처음 실시된 60년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을 근소한 차이로 따돌릴수 있었다. 백악관에 들어간후 재클린은 훌륭한 참모이자 동반자 역할을 했으며 특히 63년 8월 2살바기 아들 패트릭이 죽은 후에는 두사람의 금슬이 상당히 좋아진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이 좋은 금슬도 케네디의 피격으로 3달밖에 지속되지 못했다.케네디 가문은 대통령과 3형제 상원의원을 내는 등 미역사상 가장 번성한 집안의 대명사가 됐지만 두아들이 총에 맞아죽고 아들과 딸들이 사고로 죽는 비운의 가문으로도 남아 있다. 서거 35주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그는 미국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 남아있으며 보스턴항 남부의 컬럼비아 포인트에는 케네디도서관이 우뚝 서 케네디 대통령 당시 각종 자료 및 유물을 집대성하고 있다.또 브루클린에는 그의 생가,히아니스항 인근에는 하계별장 등이 잘 보존돼 있다.
  • 클린턴 “킹 목사는 위대한 영웅”/서거 30주년 라디오 연설

    【워싱턴 AFP 연합】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4일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목사 서거 30주년을 맞아 “그는 미국의 위대한 영웅중 한 사람”이었다고 칭송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주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이같이 킹 목사에게 찬사를 보내고 미국민들은 킹 목사의 말씀에 유념해야 할 것을 촉구했다.
  • 명성황후 피란 일화(비록 남가몽:4)

    ◎뱃사공에 금반지 빼주고 한강 건너 피신/경기도 광주땅 지나는데 아낙네들 험담/“중전때문에 이 고생… 군졸에 밟혀 죽었다”/두달후 환궁 “아낙네마을 없애 버려라” 1882년 6월의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실각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 대원군으로서는 실각한지 8년만의 일이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창덕궁까지 가는데 여덟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팔인교)를 탔고 앞뒤에는 파초선을 든 하인들이 그를 인도했다.대원군의 공복 등에는 거북 등(구배)이 붙어 있어 사람들은 그가 곱추처럼 보여 아니꼽기만 했다.더욱 가관인 것은 그동안 운현궁 사랑방을 출입하던 문객,즉 가신들을 중앙과 지방의 요직인 각 도 감사(도지사)와 유수(시장) 그리고 군수직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난을 피해 한강을 건너가던 민비는 전혀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그러니 그야말로 절치부심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중전이 나루터에 서서 급히 사공을 불러 배위에 올라타니 수레바퀴같은 붉은 해는 비웃듯이 솟아 오르고삼각산의 뜬 구름도 즐겁기나 한 듯 뫼 위에서 피어나고 있었다.삼국지에 보면 옛날 한나라 환관 십상시의 난에 개똥벌레가 한소제를 북망산천으로 인도하였고 채모 장군이 추격함에 유비가 말을 타고 단계천을 뛰어 건넜다고 하는데,그 쓸쓸한 모습이 옛날이나 지금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드디어 뭍에서 내려 길을 가다가 얼마후 깨끗한 여관에 들어가니 아침밥을 지어 바치는데 한나라 광무황제가 호타하에서 먹던 보리밥처럼 꿀맛과도 같았다.그러나 비록 이같이 배고프고 목마른 가운데서도 단맛을 느끼지 못하였다.도로를 왕래하는 사람이 시끄럽게 자주 서울의 군란소식을 전하여 주었는데 들어보니 곤궁(민비) 전하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겠고 혹은 서거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었다.그 밖에 흉흉한 설은 이루 다말하기 어려웠다. 듣기를 마치고 드디어 수레를 타고 수행원의 보호를 받으며 바로 충주 옛고을로 향하여 편안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잠시 화를 피하였다. 며칠이 지나 잠깐 조보에 발표된 내용을 보니 ‘민중전이 군란의 와중에서 서거하여 백성은 부모를 잃은 것 같이 슬퍼하고 모두 흰옷을 입었고 온 나라는 악기를 일체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생국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명성황후가 여주로 피난할 때 남긴 일화가 많다.한강을 건널때 사공이 민비를 건네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고 한다.한강을 차단하라는 긴급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사공의 주장이었다.이에 민비는 즉각 금가락지를 빼어 사공에게 던져 주었고 사공은 뇌물을 받고서야 순순히 배를 저었다는 것이다. ○대원군,시신없이 국상 채비 한강을 건너 충주로 가는 도중에도 괘씸한 일이 일어나 민비의 가슴을 쥐어짰다.경기도 광주땅을 지나가다가 교자꾼들이 가마를 길에 놓고 잠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길가던 아낙네들이 “이렇게 어여쁘신 아가씨가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민비는 재치있게 “서울에서 충주로 피난가는 길이요”라고 대답했다.그러자 아낙네들이 “중전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까지고 생하는 구려” 하면서 “중전은 군졸들에게 짓밟혀죽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괘씸한 생각이 들었겠는가.민비는 이들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두달 후 서울로 환궁하자 곧 아낙네들이 사는 마을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했다.또 수행원들이 “한강의 뱃사공은 어떻게 하오리까” 하고 묻자 민비는 “그대로 두라”고 했다 한다.그도 그럴것이 사공이 뇌물을 거절하고 한강을 건네주지 않았던들 민비는 잡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울에서는 대원군이 민비의 국상을 서둘렀다.시신이 없어 국상을 치를 수 없다는 반대가 강했다.그러나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대원군은 민비의 옷을 시신으로 삼아 염을 한뒤 관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그리고는 장례식부터 치러 민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려 했다.생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장례식부터 치르려 한 대원군의 심사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할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대원군은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청국군에게 납치되어 머나먼 중국땅으로 끌려가고 말았고 민비는 살아 돌아왔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몇 개월이 지났다.고종과 세자는 아득하게 소식을 알지 못하여 마음이 슬프고 애통할 뿐이었다. 이 때에 군란의 소요가 가라앉자 곤궁 전하는 고종에게 소를 올려 ‘신은 죽지 않고 지금 충주 장호원 등지의 민가에서 피란하고 있으며 처분이 어떠하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고종 부자분은 소를 자세하게 살펴본 뒤에 심신이 황홀하여 꿈결도 같고 술에 취한 것도 같았다.즉시 궁궐로 돌아오라는 뜻을 담은 교를 내려 조처를 취하니 하늘의 해가다시 밝았고 땅의 바람이 일어나 솟아오르는 듯하였다.안으로 3천명의 관료와 밖으로는 800명의 관료가 축하하여 일시에 만세를 부르니 남산과 북악의 초목과 곤충들도 모두 정채가 감돌았다. 우선 급무는 공로가 있는 자에게 시상하는 건이었다.무슨 벼슬로 상을 줄것인가.양주목사 자리이다.양주목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이번에 충주까지 수레를 태워주고 수행하여 보호하는 일을 맡은 홍태윤(홍계훈의 잘못)이었다.” ○한때 ‘육백팔흑’ 유행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자취를 감춘 것이 6월이요,돌아온 것이 8월이었으니 불과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당시 사람들은 6월에 흰 옷을 입고 울었다가 8월에 검은 갓을 쓰고 살아돌아온 국모를 환영했다 하여 육백팔흑이란 말이 유행했다 한다. 명성황후를 업고 나온 공으로 양주 군수로 발탁된 홍계훈 이외에도 서울에서 충주로 가는데 필요한 여비 500궤미(말을 판 돈이었다)를 댄 조충희는 전남 영광군수로 임명되었다.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북청 물장수 출신의 이용익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과 충주를 왕래하면서 중앙의 정세 변동을 민비에게 보고하였으니 그 뜨거운 충성심과 추종을 불허하는 건각은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홍계훈은 뒷날 동학란 토벌대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을 맡아 이른바 광무개혁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임오군란은 개항 6년만에 국고가 바닥이 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대사건으로 조선왕조가 망해가는 첫걸음이었다.그러므로 민비와 대원군 사이의 사전쟁 이상의 것이었다.이 군란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서울이 분탕질을 당하고 일본군이 인천항에 상륙하여 열강에 의한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 도산 배우기/최홍운 논설위원(외언내언)

    겨레와 나라 위해 한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다 간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정확한 사망시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주요한의 ‘도산 전기’에는 “1938년 3월10일 밤,시계가 12시를 땡땡 치는 것과 동시에 도산의 맥박과 호흡이 끊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938년 3월10일자로 종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각 경찰서장에게 보낸 경종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2468호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을 보면 0시 6분으로,그리고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경동고비(경성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1070호 ‘정치 요시찰인 사망에 관한 건’에는 0시 5분으로 돼 있다. 1∼6분의 차이가 있어 당시 시계의 정확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겠는가.민족의 큰 별이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떨어진 사실만은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10일 상오,선생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묘소에서는 신임 김의재 보훈처장과 권쾌복 광복회장,흥사단원 등 200여명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비록 조촐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추모식이었다. 선생께서 그토록 염원했건만 결국 보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던 조국의 광복이 이룩된 지 53년,그리고 나라가 세워진지 50년이 되었건만 우리는 지금 6·25이후 최대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IMF관리하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밥을 먹어도 독립을 위해,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외친 민족주의 사상가 도산 선생의 가르침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되새겨야 할 부분은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한다’는 뜨거운 민족애와 ‘폭력보다 정신력이 앞서는 독립운동’을 주창하고 실천한 평화주의,수감중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심문을 받는 중에도 ‘조선민족 독립의 대업을 이루려는 것이 흥사단과 동우회의 목표’라고 분명히 밝힌 용기와 정직성일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는 결코 자신이 나서지 않고 이승만을 앞세웠던 점도 정부요직 인사철인 요즘 생각해볼 일이다.‘무실역행’. 정신적인 실력뿐아니라 현실적인 실력도 길러 실천하는 길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 ‘고졸 대통령’ 해리 트루먼(미국의 대통령 문화:8)

    ◎냉전속 국제질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전후 서유럽 부흥위해 ‘마샬 플랜’ 강력 추진/일에 원폭 투하·맥아더 해임 등 결단력 돋보여/한국에선 “한반도 분단 책임자” 시선 곱지 않아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그는 보통사람이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그리고 대통령도 일반 시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972년 12월26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만의 조사(조사) 마지막 부분을 컬럼니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이렇게 끝 맺었다. 원폭투하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2차대전후 극렬한 대립을 보인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양극의 한 정점에서 냉전의 국제질서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트루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대통력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결단력을 보여준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보통사람’대통령으로 꼽힌다. 45년 4월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80여일만에 숙환으로 급서,당시 부통령으로서 트루만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됐을 때 미 언론들 대부분은 루즈벨트의 큰 자리를 트루만이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우려했다.왜냐하면 트루만은 당초 민주당내 부통령 지명과정에서 최적의 인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좌파 헨리 월리스와 보수파 제임스 번즈의 각축 중에 중도파로 있다 어부지리로 부통령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두차례의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2차대전중 수십억달러의 국방예산낭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을 당시 차분하고 공정한 업무처리로 인정받았던 그는 3차투표까지 간 부통령 지명전에서 막판에 루즈벨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정중히 사양했으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가까스로 응했다. 국민들이 우려를 나타낸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20세기 미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고졸대통령’이라는 점이었다.과거 무학 대통령들의 입지전적인 스토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20세기들어서는 직전의 루즈벨트가 하버드 출신인 것을 비롯,스탠퍼드 출신의 후버,프린스턴의 윌슨,예일의 태프트 등과 같이 최고의 학력이 대통령의 필수조건처럼 돼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으로서의 트루만은 어떤 명문대학 출신 못지 않은 업무수행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차대전 이후 새로운 전후질서 형성과정에서 미국을 부동의 지도국 위치에 올려놓았고 국내적인 안정도 가져와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조사 각분야에서 상위를 기록,41명중 종합 7위로 나타났다. 2차대전 막바지 대통령직에 오른 그에게는 전쟁의 마무리가 가장 큰 임무였다.독일은 5월초 무조건 항복을 했으나 일본이 문제였다.45년 2월 맥아더 장군의 마닐라점령을 계기로 연합군이 승기는 잡았으나 일본군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상륙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100만명의 인명손실이 예상되고 있었다.따라서 때마침 실험에 성공한 원자탄이 자연스레 그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트루만은 그해 8월6일과 9일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가장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우기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야욕에 맞서 그는 외교안보적으로는 공산세력의 침투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했다는 평가를 받는 ‘트루만독트린’을,경제적으로는 전후 피폐해진 서부유럽국가들의 부흥을 위한 대대적 경제원조인 ‘마샬플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같은 그의 강공은 소련의 베를린봉쇄를 가져왔고,유엔 설립을 위한 대서양헌장 채택,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탄생 등 냉전체제의 골격을 완성시켰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해 국방부와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취임초기 물가상승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높아져 46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됐다.48년 마샬플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내 반대세력이 늘어갔으며 또한 민주당내 분열이 심화돼 언론들 대부분은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당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그러나 트루만은 유명한 3만마일 역전유세를 통해 유권자에 직접 호소,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후 트루만은 농민보조금 제공,의무적 건강보험 실시 등 새로운 사회개혁정책을 시도했다.이 정책은 “모든 집단과 모든 개인은 정부로부터 공정한 대우(Fair Deal)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연설에서 ‘페어 딜’정책으로 명명됐다.그러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의회내 보수파들에 의해 대부분 묵살돼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당시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중국군대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만주에 원폭투하를 요청하면서 트루만과 공공연히 맞섰는데,이에 그는 맥아더 사령관을 전격 해임해 대통령직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단호히 대처했다.한국쪽에서 볼 때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맥아더의 해임은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민들에게 남아 있는 트루만은 정치적 업적보다도 그의 인간됨이다.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소읍을 둘러싸고 청년농부 트루만과 후에 퍼스트레디가 된 읍내 소녀 엘리자베스 월리스(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와의 사랑이야기는 ‘아메리칸 러브스토리’로 남아 있다.그가 그녀에게평생을 쓴 1천600통의 사랑의 편지는 지금도 젊은이들의 연애편지로 읽히고 있다. 그는 52년 퇴임후 20년 동안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여준 보통사람으로서의 삶 때문에 후세에 더욱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다.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1마일쯤 떨어진 트루만도서관의 사무실로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강의와 회고록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특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동네사람들,옛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생을 보내던 그가 가장 불편해 했던 것은 63년 케네디 암살 이후 통과된 전직대통령 경호법에 의해 경호팀이 집부근에 상주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게된 일일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보통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의 그의 사저 일대는 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인근의 언덕위에 높게 자리잡은 트루만도서관과 함께 보통사람 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관광객과 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랜드 스웰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자료담당관/퇴임후 평범한 삶 후세에 귀감/한국 좋아해 고려청자 현관에 보관/어머니에 배운 피아노 연주 수준급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옆의 소읍인 인디펜던스시 북부의 언덕위에 넓게 위치한 트루만도서관은 냉전 초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이 도서관의 랜드 스웰 자료담당관은 “트루만대통령은 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서 결단력과 대통령직을 마친 후 평범한 이웃으로 다시 돌아온 점이다.대통령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에서 살다 죽은 예는 흔치 않다. ­대통령 퇴임후의 생활은 어땠는가. ▲인디펜던스 읍내 노스 델라웨어 스트리트 219번지 자택은 원래 트루만의 부인 베스 트루만의 집으로 1919년 결혼후 줄곧 이 집에서 살아왔다.그는 퇴임후 강연과 저술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59년 입법 후에야 전직대통령에 대한 연금이 지급됐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도서관의 특별한 활동은. ▲95년부터 그의 ‘50주년 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지난해는 트루만독트린 50주년 세미나및 전시회를 가졌고 올해는 이스라엘 건국 50주년,99년에는 NATO 50주년,2000년에는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국인들은 트루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그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나. ▲공산주의 저지의 최후 보루로 인식했기 때문에 남침 즉시 유엔 결의를 기다릴 것 없이 미군의 참전을 명했다.다만 한국전쟁때 마샬플랜에 더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했다.46년 한국 교육계대표 장이욱 박사로부터 선사받은 고려청자가 현관에 보관돼 있는데 의 위치는 그가 잡은 것이다. ­그의 피아노를 잘 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수준급에 달해 45년 포츠담회담때 처칠과 스탈린 앞에서 연주했고 케네디 취임식때도 연주했다.트루만이 백악관 당시 즐겨 치던 피아노가 닉슨 대통령의 기증으로 전시관에 진열돼 있다.
  • ‘퀵 서비스’업체 된서리/불황여파로 이용객 급감

    ◎업종 전환… 문닫는 곳 속출 IMF한파 속에 ‘퀵 서비스’로 불리던 서류배달업체,경비용역업체,포장이사업체 등이 불황의 몸살을 앓고 있다.대리운전 종사자들도 전전긍긍하며 전업을 서두르고 있다. ‘허리띠 졸라매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들이 맡았던 일거리가 절감 대상 1호가 됐기 때문이다. 서류배달 대행업체들은 심각한 교통체증을 틈타 6백여개가 난립하는 등 최근 몇년동안 유망업종으로 인기를 끌었다.하지만 기업체들이 경비절감을 위해 직원들이 직접 서류배달에 나서거나 시민들의 승용차 이용 자제로 교통사정도 좋아지면서 내리막질을 걷고 있다.지난 달 이후 매출이 40% 가량 크게 줄어들면서 영세업체를 중심으로 20%가량이 이미 문을 닫았다. 경비대행업체들도 경제난 속에 강·절도 사건이 잇따르면서 호황을 누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불황의 여파로 가입자수가 크게 줄면서 전국에 산재했던 7백여개의 업체들 가운데 50%가 업종을 전환하거나 문을 닫았다.강·절도범의 위협보다는 월 10만∼20만원의 비용이 훨씬 부담스럽다는 것이이용자들의 판단이다. 무인경비시스템 업체인 S사의 권모씨(36)는 “지난 달 이후 해약하는 고객의 숫자가 크게 늘고 있다”고 전하고 “범죄가 늘어나면 경비용역업체들이 호황을 누리는 것이 보통인데 IMF의 한파는 이같은 상식을 깨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심야에 취객의 승용차 운전을 대신해주던 대리운전자들도 크게 줄었다.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술집을 찾는 사람들도 줄었고 술을 마시더라도 대부분 버스나 지하철 등이 끊기기 전에 귀가하는데다 택시 잡기도 전보다 훨씬 쉬워졌기 때문이다.
  • 설악산 백담사/눈꽃 만발한 산사엔 만해의 체취(테마 탐방)

    ◎계곡 곳곳엔 작은연못·기암괴석 즐비/폭설잦은 2월이후가 설경 즐기기에 제격/대청봉까지 영산담·황장폭포 등 절경 연속 【백담사=임태순 기자】 아무리 심산유곡의 산사라도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전세계에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엘리뇨는 설악에서 가장춥다는 백담계곡에도 찾아왔다. 예년 같으면 낮에는 영하 7∼8도,밤에는 영하 12∼13도까지 떨어지던 수은주가 올해는 낮기온이 영하 2∼3도,밤기온이 영하 7∼8도로 누그러졌다. 여전히 영하권이지만 살을 에는 추위와는 거리가 있다. 그 때문인지 신년 연휴인 지난 1,2일 조용하던 산사는 갑자기 붐볐다. 정초를 맞아 설악을 찾은 나들이객들이 자녀 또는 연인들의 손을 잡고 백담계곡을 찾았기 때문이다. 백담분소에서 백담사,수렴동 계곡을 지나 대청봉에 이르는 백담계곡은 설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짜기다. 그래서 가을이면 단풍에 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백담은 설악계곡 가운데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야영장,가계가 없는데다 여름에 계곡에 뛰어들면 벌금을 물릴 정도로 철저히보호 되고 있기 때문이다. IMF의 한파는 백담사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은 한기가 느낄 정도로 썰렁하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도 내방객의 요청이 있으면 문을 열어 주지만 평상시에는 굳게 닫혀 있다.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서다. 백담사 큰스님은 “나라에 돈이 없다는데 우리라고 호광스럽게 지낼수 있어”라며 “어째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됐어”하며 혀를 찬다. 백담계곡은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이 다 좋다. 제격으로 치면 불타는 단풍이 울창한 수림과 철철 넘쳐나는 계곡,기암절벽과 어울리는 가을이 으뜸이다.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요란스럽게 물이 흘러 가면서 만물이 소생하는 것을 알리는 봄,무성함으로 무더위를 느낄수 없게 하는 여름의 청량감도 빼놓을수 없다. 그러나 봄부터 가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알몸으로 다가오는 겨울의 스산한 정경도 만만치 않다. 백담분소에서 백담사까지는 7㎞의 완만한 산길. 왕복 3시간 거리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중턱까지 마을버스가 운행되지만 겨울에는 쉰다. 마을버스로는 응달진 곳의 빙판길을 다닐수 없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들어서면 온 산을 빽빽히 채워주던 수목들은 모두 옷을 벗었다. 나목의 골짜기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할퀴고 지나간다. 계곡 곳곳에는 흰 눈사이로 듬성듬성 낙엽이 무성하게 쌓여 있다. 못(지)이 100개나 된다는 이름그대로 계곡을 끼고 두태소,거북바위,청룡담,은선도 등 조그만 소와 기암괴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타난다. 가쁜 숨을 고르고 나면 수심교를 배경으로 백담사가 보인다. 만해가 입산한 곳이다. 좌우측에 만해 기념관과 교육관이 서 있다. 여름이면 교육관에서는 만해 시학교가 열린다. 그 사이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 화엄실이라는 간판으로 서 있다. 조선시대의 시인 김시습이 시를 써서 흘려보냈다는 관음암 앞에는 선원이 들어섰다. 바로 무금선원이다. 말 그대로 현재가 없으니 과거가 있을리 없다. 봄이 되면 정식으로 문을 열 예정인데 입방하면 6년간 나올수 없다고 한다. 물론 득도를 하면 더 빨리 나올수 있고 반대로 깨닫지 못하면 늦게 나올수도 있다. 백담계곡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백담사까지만 둘러본뒤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계곡의 진수는 바로 백담사부터다. 백담사 큰스님은 대청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은 백담까지는 반석위로 흐르지만 백담사를 지나면 바위 밑으로 흐른다고 말한다. 하류로 갈수록 자갈이 흘러내려 쌓이기 때문이다. 백담에서 대청으로 향하면 영산담,황장폭포,구융소,사미소,옥녀봉 등이 줄지어 늘어선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목과 바위 등은 묘한 흡인력으로 사람을 끈다. 대청으로 가까와지면 바람도 얼어붙어 나무에는 눈꽃이 핀다. 백담에서 설경을 즐기려면 2월 이후가 안성마춤이다. 먼 남쪽에서 봄이 기지개를 켜는 2월∼3월에 며칠씩 폭설이 내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 백담은울기 시작한다고 한다. 계곡의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고 바람도 심해진다. 겨울백담은 이렇게 봄을 맞는다. ◎탐방포인트/수심교아래 돌탑 새명물로 각광/연인·친구끼리 찾아와 사랑·우정 확인/계곡물 불어 무너져도 금세 다시 쌓여 백담사로 통하는 수심교아래 개울에는항상 돌탑이 서 있다. 백담사를 찾은 사람들이 하나,둘 쌓아 놓은 것들이다. 돌탑을 영상에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찾아올 정도다. 연인 또는 친구와 한장 한장 쌓아 올린 돌탑이 절이라는 분위기와 어울려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곳 스님들은 여름철 장마비가 퍼부어 냇물이 불어나면 돌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돌탑은 곧 또다시 생겨난다고 말한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한장 한장 정성들여 돌탑을 쌓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성황당에 돌을 얹어 놓았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돌을 얹어 성황당 주변에는 항상 돌탑이 서 있게 됐다. 성황당에 돌을 얹는 것은 앞서 간 사람과 뒤에 올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이정표라고 할수 있다. 서로 얼굴을 모르지만 두사람은 돌을 하나 얹으면서 따뜻한 정을 나눈다. 이러한 풍습은 백담사의 돌탑으로 이어졌다. 백담사의 돌탑은 마음의 정을쌓고 싶은 현대인의 소외,고독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백담사의 돌탑은 오늘 무너져도 내일 또다시 쌓아진다는 것이다. ◎전두환씨 부부 머물던곳/이불·촛대 등 당시 가재도구 보본/호기심 많은 관광객 눈길 끌기도 백담사는 만해와의 인연을 강조하지만 이 곳을 찾은 일반인들은 전두환 전대통령부부가 생활했던 만해당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최근 전,노태우 두전직 대통령이 수감생활을 하다 풀려난 것을 감안하면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유배’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두사람이 생활했던 조그만 방은항상 붐빈다. 아마 호기심과 현장확인 욕구 때문일 것이다. 즉 한때 절대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고 그 현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두사람이 2년1개월 동안 지냈던 방은 잘 보존돼 있다. 이불,촛대,빛 바랜 서랍장 등 가재도구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마루에는 백담사에서 지낼 때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뉜다. 과거에 비해서는 적어졌지만 침을 뱉거나 벌을 더 받아야 한다는 등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부류가 있다. 전직 대통령이 저런 곳에서 생활했구나 하며 무더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의 풍화작용 때문인지 후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라고 한다. 백담사측은 잘못된 것도 역사이기 때문에 현장을 보존,공개하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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