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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野生 씨 말리는 밀렵

    겨울철 밀렵행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녹색연합은 최근 강원도 백두대간인 해발 1,000m의 석병산 일대에서 잇달아 세 차례에 걸쳐 올무 450여개를 수거했다.3∼5㎜ 굵기의 철선으로 된 올무에는 죽은 지 1년 이상 돼보이는 오소리 등의 사체도 확인됐다고 한다.‘전국습지보전연대회의’도 전남 해남지역 갯벌에서 청둥오리를 잡은 밀렵꾼 3명을 적발했다. 야생동물의 씨를 말리는 밀렵행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밀렵꾼들은 지리산 오대산 월악산 등 백두대간을 무대로 각종 올가미와 덫을 설치해 천연기념물인 사향노루 산양을 비롯,고라니 오소리 여우 너구리 등을 닥치는 대로잡고 있다고 한다.이들은 야산이나 늪에서도 총기나 심지어 독극물을 이용,쇠기러기 등 겨울철새를 잡고 있다. 이같이 밀렵꾼이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수요가 있기 때문에 공급을 창출한다고 볼 수 있다.수요의 주범은 바로 ‘몸보신 좋아하는 사람들’이다.몸에 좋다고만 하면 곰쓸개,호랑이뼈에서 굼벵이 구렁이 두더지에 이르기까지 마구 먹어치우는 유난스러운 몸보신 행태가 우리 주변에 깔려 있기때문이다.최근엔 야맹증에 좋다고 박쥐까지 한 마리에 5,000∼1만원선에서거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동물구조협회가 지난해 조사한 야생동물 불법거래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의 전문밀렵꾼은 2만여명,야생동물 밀거래시장 규모는 연간 3,0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또 전국 1만7,000여개의 보신건강원 가운데 90% 이상이 야생동물을 중탕으로 만들어 팔고 있으며 여기에 소비되는 야생동물은 전체 밀거래시장의 절반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구잡이 밀렵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밀렵꾼→브로커→전문상인→건강원→몸보신 소비자로 연결되는 밀렵고리의 단계마다 감시와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특히 수요단계에서의 적발은 물론 홍보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우선 올 겨울 강원도처럼 순환수렵지역으로 지정된 곳에 대한 밀렵 감시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국립관리공단이 밀렵 신고자에 대해 특별포상금을 주기로 한 것도 공급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수요 측면에서는 전문상인이 밀집해 있는경동시장,모란시장 등에 특별감시원을 상주시키고 건강원에 대한 불시단속을 강화해야 한다.그리고 무엇보다 검증되지 않은 야생동물의 약효에 맹신을 하고 있는 ‘보신족’들을 계몽해야 할 것이다.
  • 민주열사 열전:19/前 성균관대생 崔東(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운동 헌신… 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분신/‘인노회’ 관련 구속… 수면기능 망가져 정신분열증세/‘인간 파괴’ 절망의 벼랑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선택 ‘어찌하여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죄를 지었노라고 자백하지 않았느냐? 고문자들 앞에 서거든 유죄임을 인정하고 죽어라.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16세기초 독일의 프리드리히 슈페 폰 랑엔펠트 신부가 했던 말이다.그는 종교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죄인들과 처형장까지 동행했던 참회신부였다.죄없는 사람들이 고문에 버티다 결국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진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수없이 보았다.그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무엇일까.바로 고문 앞에 한없이 무력한 인간과 고문이 가져오는 인간성 파괴였다. 수십년 독재정권을 겪었던 우리 사회도 고문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문은 정권수호를 위한 강력한 도구였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최대 피해자는 결국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정권에 도전한 사람들이었다. ○법정진술서 “도덕적 승리” 주장 전 성균관대생 崔東(80년 입학)도 그들중 하나였다.그는 10여년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섰다.그러나 어느날 공안기관의 조사를 받은 뒤 정신분열현상을 보이다 황폐한 삶을 마감했다. 최동은 90년 8월7일 한양대의 한 강의실에서 분신자살했다.하지만 그의 유서에는 시국관련 분신자들이 흔히 남기는 ‘독재타도’나 ‘외세타도’ 등 정치적 내용은 없었다.‘저들의 목적은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저는 폐인이나 다름 없습니다’란 절망적 몸부림의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이는 그가 걸어왔던 노동자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을 더이상 갈 수 없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었다.그리고 분신은 그런 길을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 부정이었던 것이다. 朴炯圭 목사는 장례식 조사에서 이렇게 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다.“지배자들은 사람들에게 굴복할 것을 강요합니다.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정신적으로 불의에 맞설 힘이 없었던 최동 열사는 무릎을 꿇기보다는 마지막 싸움의 무기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최동은 대학1학년때부터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80년 5월 문무대 병영집체교육 거부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였고 2학년때는 공개적 이념동아리인 ‘심산연구회’ 결성을 주도했다.심산(心山)은 성균관대 설립자이고 반독재운동가인 金昌淑 선생의 호이다.최동은 여기서 1학년 후배들 뿐만 아니라 2학년 동기들에게까지 학습을 지도했다.그리고 4학년때 광주항쟁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학내시위를 주도했다가 처음으로 구속된다.이때 재판에서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 승리,도덕적 승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 신념에 가득찬 민주투사로사의 면모를 보여준다. 9개월 복역후 출소한 최동은 정부의 복학허용을 개량화 조치라며 거부하고 84년 노동운동에 뛰어든다.부천의 삼창정밀 동광정밀 등에서 프레스공으로,(주)세일에서 재단사로 일한다.수형전력이 발각될까봐 주로 소규모 작업장을 전전하며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의식을 일깨우는데 주력했다.외부에서는 다른 노동운동가들과 연대작업에 힘을 기울였다.그러나 활동가 중심의 노동운동이 현장과의 유리라는 한계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현장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운동’을 표방하는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는 그런 한계를 넘어보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최동은 88년 3월 인노회 결성에서 산파역할을 했다. ○기각된 영장 재청구해 발부 받아 89년 2월 검찰은 국가보안법 이적단체구성죄를 적용해 인노회 관계자 6명을 구속했다.최동도 4월 부천 심곡동 자취방 앞에서 붙잡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된다.하지만 관련자들은 인노회가 공개적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라고 주장했다.담당판사도 인노회가 노동운동을 위한 단체임을 인정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그러나 검찰은 강성의 다른 판사에게 재신청하여 영장을 발부 받는다. 최동은 동료들에게 시간을 벌도록 처음에는 묵비권으로 버티었다.또 고문조작 수사를 막기 위해 취조실 욕조에 머리를 찧어 자해를 기도한다.그러나 경찰병원에서 7바늘을 꿰매는 응급치료만을 받고 다시 20여일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구치소 수감 직전에도 그는 극도의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다칫솔대를 부러뜨려 목을 찌르는 자해를 한다.하지만 이때도 외상만 치료받고 하룻만에 구치소에 수감되고 만다. 최동은 출소후 조사기간 내내 거의 잠을 못자며 취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이 교대로 취조를 했고 취조를 안할 때는 밝은 조명과 괴상한 소음을 이용,잠을 못자게 해 수면기능을 파괴했다고 말했다.고문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수많은 고문중에서도 잠을 안재우는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다고 말한다.어머니 金順玉 여사(62)는 “동이가 구치소 수감 직전부터 이미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경찰병원 의사도 주의깊은 관찰과 치료가 요구된다고 진단했다”고 밝혔다. 그는 구치소에서도 조사 때의 수면기능 파괴로 인한 불면에 계속 시달렸다. 그리고 7월 초부터 심한 발작과 실어증세를 보인다.의도하지 않은 말 등 의식과 행동이 따로 작용하는 증세도 뒤따랐다.책이나 신문도 전혀 못 보는 등 상태가 악화되자 종로신경정신과에서 외래진료를 받았는데 ‘정신분열증’ 진단이 나왔다.하지만 이런 비정상적 정신상태에서도 수감된 채 재판이 계속 진행됐다.9월18일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가 결정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비정상적 정신상태서 재판 출소후 종로신경정신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적들이 나를 무능하게 만들었다” “AIDS균으로 나를 죽이려 한다”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고 하는 등 극도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였다.그리고 90년 4월 부천의 한 자취방에서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한다.이후 그는 수영장에 가거나 집에서 가까운 한양대로 산책을 나가며 건강회복을 위해 힘쓴다.정치이념이 철저하고 논리가 ‘칼’같아 마오쩌뚱에서 이를 따 ‘마동’으로 불렸던 최동.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와 노동현장에서 인정받았던 이러한 탁월함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노력도 헛되이 스스로 한많은 세상을 뒤로 하고 말았다.8월 7일 아침 평소처럼 “운동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던 그는 잠시후 검게 탄 시신이 돼 있었다. □약력 ●1960 서울 정동 출생 ●80 서울 환일고 졸업.성균관대 국문과 입학 ●81 학내 동아리 심산연구회 창립●83 광주항쟁 진상규명 요구시위 주도.9개월 복역 ●84 부천에서 노동운동 투신 ●88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결성 ●89 인노회사건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90 한양대에서 분신.한양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운명 ◎崔東 가족들/“치료만 제때 받았어도…” 회한/4남매중 셋이 학생운동/아버지 홧병으로 사망 “제때 치료만 받았어도 그렇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최동의 어머니 김순옥 여사가 가슴에 묻고 있는 안타까움이다.대공분실 조사때부터 입원치료를 애원했으나 거절당했다고.구치소에서도 ‘충분한 휴식과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계속 무시했다고 한다.결국 출소할 때까지 제대로 손도 못쓴 채 아들의 증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는 것이다.김여사는 아들이 노동운동을 할 때도 부천에 전세방까지 얻어주고 밥도 해주는 ‘후원자’였다.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자 기왕 할거라면 굶지 말고 하라는 모정때문이었다.그런 아들이 제때 치료를 못받아 죽은 것이다. 김여사의 비극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아들의 49재가 끝나자마자 남편 최수호씨(당시 56세)까지 잃은 것이다.여자인 자신과 달리 슬픔과 분노를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기만하다가 홧병으로 가고 말았다고 했다. 4남매중 셋이 학생운동을 한 ‘덕’에 김여사는 구치소라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장남인 최동의 바로 밑 여동생 숙희씨(35)는 서울여대 재학시절 야학문제로 1주일간 유치장 신세를 지고 나왔다.오빠가 구치소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같이 어머니와 함께 옥바라지를 했다.출가했지만 친정어머니인 김여사와 함께 사는 그녀는 “면회때면 제게 항상 귀엣말로 동료들을 조심시키라고 당부했다”며 “오빠이기 이전에 동지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고백한다. 둘째동생 재동씨(34)도 민정당연수원 점거사건으로 영등포구치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고 2년간 수배생활을 하기도 했다.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현재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 제2건국위 총점검­개혁과제 주요 내용

    ◎의식·생활·제도 개혁 ‘방향키’ 잡았다/대형예산사업·주요정책 결정·평가 시민참여 제도화/100만 일자리 창출·인권 살아있는 나라 만들기 주력 ‘제2의 건국’운동의 핵심과제는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분야별 7대 국정과제다.제2건국위는 이들 과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과제별 작업단(Task Force)을 구성해 본격적인 작업을 진행해왔다. 다음은 제2건국위가 이달 말 실천계획을 최종 확정하기에 앞서 24일 밝힌 7대 분야의 21개 기획과제 추진방향 가운데 눈길을 끄는 내용들이다. ●정부혁신 대형예산사업,주요 정책결정 및 평가에 시민참여를 제도화한다. 공공부문의 경쟁을 확대하고 경영마인드를 높이기 위해 공무원 충원제도와 직급제 개편을 추진한다. ●지역갈등 극복 지역차별금지를 입법화하는 등 차별금지를 제도화한다.지역감정 선동을 처벌하는 입법을 통해 지역감정의 정치적 동원을 억제한다. ●경제살리기(100만 일자리 창출) 주요 업종·분야별로 창업을 촉진하고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규제완화 및 창업 인센티브를 발굴한다.청년 실업자의 해외취업을 지원하고,‘1실험실 1사 창업운동’‘엔젤투자운동’‘코스닥주식 갖기운동’을 전개한다. ●경쟁환경의 조성 영업범위·지역 등과 관련한 경쟁 제한적 인허가제도를 개선한다.공정위의 전문성을 높이고 역할을 강화한다. ●인권국가의 확립 인권법을 제정하고 국민인권위원회를 설치한다.구속수사요건을 엄격히 적용하고,불법감청을 억제한다. ●세계시민 교육과 문화한국 건설 외국인을 개방적으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증진한다.외국인의 국내투자와 부동산 취득,국제결혼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외국인이 살고 싶은 한국만들기’ 캠페인을 전개한다. ●과학기술과 미디어산업의 진흥·개혁 과학기술 안보체계를 강화한다.방송등 미디어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노사간 협력과 신뢰구축 노사분쟁에 공정한 법 집행으로 대응한다.종업원지주제를 발전적으로 개선하는 등 근로자 참여제도를 확충한다. ●남북간 화해환경의 조성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북한의 실상 알리기’를 통해 이질감을 해소한다.북한의 국제사회 진출 여건을 조성하고 ‘한민족 네트워크 공동체’를 통한 대북 협력을 촉진한다. ◎각 부처 어떤일 하나/차관 총괄 ‘추진반 구성’ 99개 실천과제 제출/행자부­민간 인사교류 확대/노동부­노동시장의 유연화/재경부­불로소득 과세강화 정부 각 부처의 ‘제2의 건국’운동 참여는 정부부터 자기개혁을 선행하는 것이 국민생활과 밀접한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위원회측은 설명한다.각 부처는 현재 차관을 총괄책임관으로 ‘추진반’을 구성하고,이미 99개 실천과제를 제2건국위에 제출해 놓았다.다음은 부처가 추진할 주요 실천과제들이다. ●입법과정에 국민참여확대 입법예고 매체를 다양화하는 등 예고방식을 개선하고,입법의견은 반영결과를 반드시 통보하고,우수한 입법의견을 낸 국민은 포상하는 제도를 신설한다.(법제처) ●공직사회의 경쟁력 강화 정부와 민간부문의 인사교류를 확대하고,고등고시제도를 바꾼다.(기획위·행자부) ●효율성·투명성을 높이는 재정개혁 총괄경상경비 및 효율성배당제도,산출예산제도 및 분산조달제도,복식부기,발생주의회계제도를 도입한다.(기획위) ●조달기능으로 수출·중소기업 지원 중소기업만 참여하는 구매제도를 확대한다.중소건설업체의 입찰규모를 확대하고 공동계약제도를 확충한다.(조달청) ●노동시장 유연화 추진 퇴직금제도와 근로시간,휴가제도의 개선방안을 마련하고,성과급제를 정착시키는 등 임금제도를 개선한다.(노동부) ●수출입 및 외국인 투자에 대한 관세행정 지원 서류없는 관세환급 및 수입통관체제를 구축하고,관세자유지역제도를 도입한다.(관세청) ●공평한 세정 강화 음성·불로소득과 변칙 상속·증여에 대한 과세를 강화한다.봉급생활자와 사업소득자간 세부담의 형평을 도모한다.(재경부) ●식·의약품의 국제화 식품 및 첨가물,기구 및 용기,의료용구의 기준과 규격을 국제화한다.(식의약청) ●실력이 우선되는 사회조성 학습과정과 평가인정기관의 내실화를 통해 학점은행제를 활성화한다.직업능력인정제의 도입을 추진하고,문화·예술 분야의 문하생 학력인증제를 도입한다.(교육부) ●남북기상협력의 내실화 서울·평양 사이 기상전용 통신회선과 한반도 중·북부 해역에서의 실시간 기상관측망을 구축한다.(기상청) ◎지방조직은/자치단체장 자문에 역점둔다 제2건국위의 지방조직은 중앙조직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다.시·도와 시·군·구에는 별도의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동안 참여가 부진했던 영남지역에서도 95% 이상의 자치단체가 지방위원회의 법적근거가 되는 조례제정작업을 마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각 시·도청과 시·군·구청은 부단체장을 반장으로 하는 추진반을 이미 구성해 놓은 상태다. 제2건국위측은 또 지방조직이 중앙조직의 계선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2건국위의 한 관계자는 “부정부패추방이 전국 공통의 과제라면 관광도시는 지역실정에 맞게 관광업체와 관청과의 유착을 막는 것이 최대의 과제일 수 있는 만큼 지방조직은 필요한 것”이라면서 “지방위원회는 대통령의 자문기구가 아니라 각각 당적이 다른 자치단체장의 자문기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방위원회가 현 정부의 정치조직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제안 어떤것 있나/“광복절 한라에서 백두까지 인간사슬 만들자”/한달새 436건 접수 ‘2002년 8월15일 광복절에 200만명이 남북한을 잇는 인간사슬을 만들어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연결하는 한민족 평화축제를 열자’‘영아 유기를 막기위해 병원에서 출산과 동시에 출생신고 업무를 자동처리하도록 하자’ 제2의 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에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국민들의 제2건국 아이디어 일부다. 제2건국위는 국민들이 생활현장에서 느끼는 불편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11월부터 각종 아이디어를 받고 있다.지금까지 모두 436건의 제안이 접수됐다. 시민 朴대일씨는 법원 등에서 민원서류를 접수시킬 때,은행처럼 순번표를 활용하자고 제안했다.급행료 등 법원직원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여·야 국회의원 등 사회저명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국가홍보 CF를 만들어 국민사기를 높이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있었다.짓다가 중단된 아파트 등 대형건물의 건물주,공사책임자를 찾아 정부나 지자체가 공사를 재개토록 해 도시미관을 개선하고 범죄예방도 도모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아파트 입구에 제2건국 상징이 있는 신문수거대를 제작,폐지도 수집하고 외화절약 및 제2건국 운동을 홍보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제시됐다. 덕수궁 안에 있는 세종대왕상을 세종로에 옮겨 ‘세종로’라는 거리이름에 맞게 하고 이순신 장군 동상 뒤에 두면 문무상징의 의미도 높일 수 있다는 제안도 있었다. 제2건국위는 접수된 아이디어를 매달 심사해 위원회에서 처리할지,각 부처에서 처리할지 여부를 결정한다.제안자에게는 2,000원짜리 전화카드가 기념품으로 주어지고 내년 초에는 우수제안자를 뽑아 대통령 표창 등을 줄 계획이다. 제안은 전화 (02)720­0209 또는 팩스 (02)3703­2969를 이용하면 된다.E­메일은 j209@reko.go.kr. ◎정치적 논란은/민·관 서로 견제하며 개혁 ‘채찍질’/‘대통령 자문’본업 명확… 추진력 얻어/활동 성격 둘러싼 정치적 공방 주춤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가 그 활동 목표와 성격을 둘러싼 정치공방 속에서도 하루하루 추진력을 얻어가고 있다.제2건국위는 최근 대통령에 대한 ‘자문기구’라고 성격 규정을 명확히 하면서 운신이 보다 자유스러워진 것 같다.또 대통령이 제2의 건국을 정치개혁과 함께 내년도 2대 국정과제로 손꼽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활동에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제2건국위는 23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21개 개혁과제를 확정하고 내년도 중점과제 및 실천 계획을 의결했다.건국위는 우선 활동의 목표에 의식·생활개혁과 함께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제도 개혁도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건국위 관계자는 “자문기구는 아무런 제약없이 모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어야 제 역할을 한다”면서 “특히 의식과 생활의 개혁이 구체화되려면 제도적 개혁이 반드시 앞서거나 뒤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감사원장 자문기구인 정방지대책위원회도 93년 이후 사회 전 분야의 부패 실태 조사와 개선책 제시는 물론 감사원의 조직 개편 문제까지도 건의해왔다는 것이 건국위측의 설명이다. 제2건국위가 건의할 개혁의 내용을 金대통령이 수용하느냐는 또다른 문제다.그러나 제2건국위는 갖고 있는 역량껏 국정전반의 개혁에 대한 연구와 제안을 하는 것이 자문위로서의 역할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건국위가 발표한 개혁과제에는 그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행정조직 개편,공정거래위원회 역할 조정 등 정부혁신 분야가 그대로 포함돼 있다. 공무원 충원 제도와 직급제 개편,부처·지역간 인사교류 확대,정부 기관 민영화 등의 핵심 사안을 피해나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제2건국위는 또 야당측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李康來 정무수석 등 청와대와 정부 인사의 참여와 지방조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모든 운동에는 중심적인 추진체가 필요하며,제2건국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청와대가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제2건국위를 민관(民官)합동기구로 추진하는 것은 ‘중이 제 머리 못깎는’ 우리 사회의 풍토와도 연관돼 있다고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정부가 정부를,민간이 민간을 스스로 개혁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관을 개혁하려면 민의 힘이,민을 개혁하려면 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서로가 견제하면서도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특히 제2건국위가 내년도 개혁과제로 선정한 정부 혁신 과정에는 공무원들의 적지 않은 반발이 예상된다.따라서 일단 내년에는 민간의 힘을 빌어 정부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이 제2건국위 핵심의 복안인 것같다. 물론 앞으로는 제2건국위 기획단장을 민간인으로 임명하거나 민·관 공동단장·부단장제를 도입하는 등 조직개편 문제를 검토해나갈 방침이다. ◎국회통과 법안요지/해외이주 결격사유 완화·알선업 등록제로/청소년 보호범위 확대·유해행위 처벌 강화/지역예비군 대원 거주지 신고의무 없애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과 동의안은 다음과 같다. ●지방세법(개정) 내년 1월부터 비영업용 승용자동차의 등록세율을 채권금액의 3%에서 0.2%로 인하.그외의 자동차에 대해서는 비영업용인 경우 2%에서 0.2%로,영업용인 경우는 1%에서 0.2%로 하향 조정하고 배기량 2000㏄ 초과 비영업용 승용자동차의 자동차세를 ㏄당 220원으로 단일화.1가구 2차량에 대한 취득세·등록세의 중과세제도를 폐지. ●청소년보호법(개정) 청소년보호법에 의한 보호대상을 18세 미만에서 19세 미만으로 확대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청소년에게 신체적 접촉 또는 은밀한 부분의 노출 등 성적 접촉행위를 하게 하는 행위,청소년에게 구걸을 시키는 행위,혼숙을 하게 하는 행위 등 9개 청소년유해행위를 금지하고 처벌규정을 새로 규정. ●해외이주법(개정) 해외이주의 결격사유를 대폭 완화해 금치산자·한정치산자·정신지체인 및 전염질환자 등을 포함한 일반국민이 보다 자유롭게 해외이주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해외이주알선업의 허가제를 등록제로 전환하고 수수료 상한선 폐지.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개정) 원사업자가 발주자로부터 위탁과 관련해 결제받은 현금 비율 이상으로 수급사업자에게 하도급대금을 지급토록 의무화하고어음으로 결제하는 경우엔 발주자로부터 원사업자가 교부받은 어음의 결제기간을 초과하는 어음을 교부할 수 없도록 규정. ●국군조직법(개정)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에 대한 지휘·감독권한을 지금까지는 육군참모총장이 행사했으나 그 권한의 일부를 해병대사령관이 행사할 수 있도록 함. ●군인사법(개정) 장관급 장교의 계급정년을 1년 이내의 기간에 한해 각 군별로 단축 또는 연장할 수 있도록 하고,영관급 장교는 2년 이내의 기간에 한해 정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함. ●군무원인사법(개정) 3급 이상 군무원과 6급,7급 일반군무원의 정년을 1년씩 단축하고 4급 이하 일반군무원에 대한 정년연장제도를 폐지. ●전자서명법(제정) 공인인증기관이 인증한 전자서명은 법령이 정하는 서명 또는 기명날인으로 봄. ●향토예비군설치법(개정) 향토예비군조직 대상자의 예비군대원 신고제도와 지역예비군대원의 거주지 이동 및 병적사항 변동시 신고의무를 폐지. ●국군포로대우 등에 관한 법(제정) 국방장관은 등록된 포로로서 군인연금법에 의한 퇴역연금을 받을 권리가 없는 자에 대해 억류기간 중의 행적에 따라 등급을 정해 정착금을 지급하도록 함. ●공공차관도입계획에 대한 동의안 중소기업은행과 한국전력,한국가스공사가 일본수출입은행으로부터 도입하고자 하는 미화 23억5,000만달러에 대해 정부가 지급 보증. ●공공차관도입계획 변경에 대한 동의안 아시아개발은행 금융부문 프로그램차관 40억달러 중 이미 인출돼 당초 국회동의에 따라 한국산업은행에 전대된 30억달러를 제외하고 향후 인출될 10억달러에 대한 전대차주를 한국산업은행에서 예금보험공사 및 성업공사로 변경. ●1999년도 미국의 수출신용공여(GSM)에 따라 발생하는 국내은행의 대외채무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 미국 상품신용공사의 수출신용공여프로그램에 의해 발생하는 15억달러 이내의 대외채무에 대해 국가가 지급을 보증. ●기타 통과법안 ▲전파법 ▲낚시어선업법 ▲항만법 ▲방위산업에 관한 특별조치법 ▲한국국방연구원법 ▲전산망보급 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 ▲잠업법폐지법안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자본유치촉진법 ▲한국보건의료산업진흥원법 ▲책임운영기관의 설치 운영에 관한 법 ▲정보통신공사업법 ▲정보화촉진기본법 ▲전자서명법 ▲수산물검사법 ▲연안관리법 ▲공유수면 관리법 ▲종자산업법 ▲농수산물품질관리법 ▲외무공무원법 ▲해난심판법 ▲해양개발기본법 ▲선주상호보험조합법 ▲유류오염손해배상보장법 ▲항로표지법 ▲99년 비료계정의 한국은행 차입원리금 상환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 ▲99년도 미국의 수출신용공여(GSM)에 따라 발생하는 국내은행의 대외채무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
  • 평안도 출신 권력 엘리트의 비밀

    ◎서울대 김상택씨 논문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서 분석/구한말서 일제까지 번성한 기독교 영향/서양문물 접한 청소년 대거 미국 유학/해방후 남하… 미군정 특별대우 받아/냉전이데올로기속 반공·친미 성향 유지 도산 안창호,고당 조만식,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한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장면 전 총리,강영훈·이영덕 전 국무총리….이들은 한말부터 최근까지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지도층 인사들로 모두 평안도가 고향이다. 이밖에 장리욱 전 서울대 총장,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춘원 이광수 등 평안도 유명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서울대 강사 김상태씨는 역사비평 겨울호에 게재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평안도인들이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에 파워 엘리트가 된 배경을 설명한다.김씨는 평안도가 기독교 및 미국과 가지는 함수관계를 분석,권력 엘리트 충원과정의 비밀을 풀었다. 구한말부터 일제까지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했다.1898년 7,500여명의 한국 장로교 교인가운데 79.3%인 5,950명이 평안도와 황해도 즉 서북인이었다.조선후기 평안도인들은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는 등 정치적으로 소외받았다.이 때문에 이 곳에서는 교역 및 상업이 번성했고 변화를 바라는 자립적 중산층도 많았다.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의 주무대는 평안도였다.당시 일본은 교회를 치외법권 지역으로 보호해줬는데 평안도에서 기독교가 번성할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토양이 됐다. 평안도에서 기독교는 종교일 뿐 아니라 근대문명으로 접속하는 통로였다. 기독교계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한 청소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와 미국적 가치관을 배웠다.반면 보수적 경향이 짙었던 경상도와 전라도인들은 주로 현해탄을 건넜다.1920년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가 유행하지만 미국은 사회주의 무풍지대였다.당연히 미국 유학파들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에 경사되지만 일본 유학파들은 사회주의나 민중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해방 이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평안도인들은 반공투쟁에 나서거나 38선을 넘는다.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월남자 가운데 미국 유학을 한 기독교계 엘리트들은 미 군정의 ‘특별대우’를 받는다. 평안도 출신 인사들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의 탄압을 받아 야당으로 밀려나지만 민주당 신파를 형성,반독재투쟁에 나서 4.19로 집권하게 된다.장면 총리를 비롯 외무장관 정일형,문교장관 오천석,상공장관 오정수,부흥장관 주요한,외무·정무차관 김재순,참의원 의장 백낙준,육군 참모총장 장도영,검찰총장 이태희,총리 비서관 송원영 등이 평안도인들이다. 김씨는 평안도 출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50년대의 대표적 학술잡지로 자리잡은 ‘사상계’의 전반적인 논조 역시 철저한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반공 친미 성향을 유지했다는 점을 감안,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평안도 출신 핵심 엘리트들이 일반적으로 반공 친미 성향을 띠게 된 이유를 체계적으로 규명했다.
  • ‘11월 좋은 프로’뽑힌 K2TV‘시청자 칼럼­우리 사는 세상’

    ◎시청자 주권시대 연 5분짜리 미니프로/시청자 직접 출연 사회 불합리한 구석 고발/‘잊고사는 권리 찾기’ 한 몫… 하루 제보전화 20∼30건 5분짜리 프로그램이 시청자 주권시대를 열고 있다. KBS­2TV의 ‘시청자 칼럼­우리 사는 세상’(월∼금 밤 9시45분)은 시청자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다.불과 5분 프로가 볼거리 없는,10배나 긴 다른 프로보다 더 알찬 결실을 거두는 저력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시청자가 시청자를 위해 만든다는 철학이 스며있다.최근 시청자가 참여하는 포맷이 꾸준히 늘었다.하지만 대개 웃기는 소리를 연출하는 들러리거나 ‘즉석 마이크’로 스쳐가는 역에 머물고 있다. ‘시청자…’는 형식적인 참가를 거부한다.가성이 아닌 육성을 담기에 보는 사람이 ‘어 나도 저랬는데’라고 무릅을 치게 한다. 공감의 힘은 제작진의 문제의식에서 나온다.“불합리한 관행을 비판하거나 그것을 고쳐가는 과정을 담아서 아직도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곪은 부위를 수술하려고 합니다”.담담PD 4명중 막내인 백주환 PD의 말이다.그는‘문제의식 확산’에 무게를 둔다. “뭔가 잘못된 것을 보거나 느껴도 그냥 묻어두고 가는게 우리 관행인데 이런 풍토에 대한 개선 필요성도 함께 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청자가 평소의 머뭇거림을 떨치고 ‘잊고사는 권리’를 되찾으려 나서도록 돕겠다는 것이다.이런 공감대가 넓혀지려면 시청률이 높아야 하건만 아직 현실은 ‘낮은 한자리 수’로 싸늘하다.그러나 안주연 구성작가는 달리 해석한다. “시청률이란게 뭐죠.그저 눈으로 보는 행위에 그치는 숫자도 섞여 있는게 아닌가요.그런 면에서 우리 프로는 체감시청률이 높아요’. 뜨거운 사안이 나간뒤면 어김없이 전화가 폭주한다.하루 20∼30통의 관련 제보가 몰려 업무가 힘들 정도다.체감시청률을 내세울 만하다. 주연이 일반 시청자인지라 촬영중 해프닝도 많다.카메라가 낯설고 어색한 출연자들이 말을 못잇는 경우가 허다하다.어느 할머니의 경우 25번이나 NG가 났다.그러기에 끈기가 필요하다고 백PD는 전한다. 강원도 영월 동강댐건설 반대나 수해 농민의 사연 등 5분으로 담지 못하는경우엔 4회로 나눠 방영하기도 한다. 비록 5분이지만 캐낸 사연은 다양하다. 경찰의 고압적 교통벌칙금 부과에 항의하여 3년째 싸우거나,이중 부과된 양도소득세를 바로잡기 위해 7년을 맞서거나,요리 솜씨가 뛰어나지만 자격증에 필요한 학력이 안되 고용이 안된 사연들이 빛을 보았다.그리고 불합리한 상황이 나아졌다. ‘내 목소리’ 열기를 이끈 공로에 후한 점수를 준 시민단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는 이 프로를 11월의 좋은 방송프로로 뽑았다.
  • 김종영씨 그림과 조각전/미술

    작고한 조각가 김종영의 그림세계를 엿볼 수 있는 ‘김종영특별전­그림과 조각’전이 12월6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서 열린다. 이번 특별전은 그의 서거 17주기를 맞이하여 열리는 그림전시회로 유화 드로잉 에스키스 등 50여점이 선보인다. 단순히 조각 창작을 위한 밑그림 수준이 아니라 한때 화가를 꿈꾼 수준높은 그의 필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회이다. 전시작 중에는 1932년 고교시절에 그린 유채풍경화를 비롯,서울대 교수 부임후 파스텔과 목탄으로 그린 인물화,정물화,자화상,가족그림,콜라주 등이 포함돼 있다.
  • 그린벨트제도 개선­‘대폭 해제’ 의미와 과제

    ◎“현실에 맞게” 27년만의 대수술/재산권 보호­토지 이용 극대화 겨냥/보존 필요한 녹지만 엄격 관리키로/개발이익 노린 투기 차단책 필요 정부가 70년대 이후 ‘뜨거운 감자’로 불려온 그린벨트 문제를 꺼내들었다.사안의 민감함과 중대성 때문에 역대 어느 정권도 건드리지 못한 그린벨트를 과감히 개혁의 수술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그린벨트 제도개선 시안은 현행 그린벨트가 71년 지정된 것으로,시대적 여건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그동안 그린벨트에 대해서는 끈질긴 보전요구 못지않게 토지소유자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았다.당초 지역실정을 감안하지 않은 채 지도상에 두부 자르듯 선을 그은 탓이다.해당지역 주민들은 사유재산권 침해를 주장하며 정부의 보상이나 선별적인 구제를 끊임없이 촉구해왔다. 지난 97년 대선에서 ‘그린벨트 재조정’을 공약한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뒤 “환경평가를 실시해 녹지가 필요없는 지역은 해제하고 보존이 필요한 지역은 지가증권을 통해 매입하라”는 원칙을 제시했다.시대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불합리한 지역은 재조정해 엄격하게 관리하되 지난 27년간 재산권 행사와 기본적인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한 해당주민들에게 마땅히 지원과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부는 이번에 그린벨트 개혁의 처방전으로 ‘지방 중소도시권역 전면 해제’와 ‘수도권을 포함한 대도시권역 부분해제’ 방안을 제시했다.지정의 실효성이 적은 중소도시권은 구역 전체를 해제하고 대도시권역은 보전가치가 낮은 지역을 부분해제한다는 구상이다.재조정이 아닌 대폭 해제를 기조로 내세우고 있다. 이에 따라 춘천권·진주권·통영권·제주권 등 중소도시권역은 전면 해제가 확실해졌으며,수도권과 광역권을 제외한 모든 권역이 전면 해제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따른 우려도 적지 않다. 우선 환경단체들의 반발이 가장 큰 부담이다.그린벨트가 있었기에 그나마 대도시 환경이 이만큼이라도 보전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이들은 수도권 인구 유입을 막고 부동산투기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린벨트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투기의혹이 짙은 그린벨트 소유자의 개발이익 처리방안도 현실적인 고민거리다.현재 외지인이 전체 그린벨트의 57%를 소유하고 있다.그린벨트 해제에 따른 이익이 이들 외지인이나 투기꾼들에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원주민의 재산권 보호와 토지활용이라는 제도개선의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투기차단책이 마련돼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궁금증 문답풀이/투기막게 ‘토지거래 허가’ 계속 시행/연말에 대상도시 확정/내년 6월 해제지역 지정 24일 건교부가 발표한 그린벨트 제도개선안에 대해 궁금한 내용을 문답으로 알아본다. ­전면해제되는 도시권은 언제 발표하나. ▲현재 도시권별로 인구규모·증가율,개발밀도,녹지율,지정목적 등 각종 지표를 분석하고 있다.이 결과와 개선안에 대한 공청회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연말에 대상도시가 확정되면 도시계획절차를 거쳐 내년 6월까지는 해제지역을 발표할 것이다. ­전면해제되면 토지거래허가제는 폐지되는가. ▲전면해제와 관계없이 토지거래허가제는 투기우려가 있는 한 계속 시행된다. ­해제가 되면 모든 건축행위가 허용되나. ▲해제되면 도시계획상 자연녹지지역이 되며 건축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단독·연립주택 등의 신축이 가능하나 아파트 등 대규모 개발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난개발 방지를 위해 토지형질변경을 제한할 계획이다. ­집단취락지역은 모두 해제되나. ▲그렇지는 않다.집단취락 주변이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될 경우 해제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그러나 이 경우도 ‘취락지구’를 지정해 건축규제를 크게 완화해줄 계획이다. ­‘취락지구’ 안에서의 건축규제는 어떻게 완화되나. ▲그린벨트지역 안에 있는 주택을 ‘취락지구’로 이전하면 논과 밭에도 건축이 가능하고 건폐율도 40%로 완화된다. ­존치지역 건축규제는. ▲대지나‘취락지구’등 보전가치가 낮은 지역은 건축규제가 완화되나 환경 평가결과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은 보전을 위해 건축규제가 강화된다. ­구역지정 이전부터 대지로 분류되던 곳에는 주택을 신축할 수 있나. ▲있다.구역조정이나 해제와 상관없이 내년 4월부터 건폐율 20%,용적률 100%의 자연녹지지역 수준으로 주택을 신축할 수 있다. ­존치지역의 일부토지는 매수하나. ▲구역지정 이전부터 땅을 소유하고 있는 원주민이 매수청구를 해올 경우 매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매입규모,재원조달,토지이용 규제제도 전반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그린벨트제도 어제와 오늘/녹지보호 취지로 71년1월 도입/‘환경보호’ 대세에 초기골격 유지 그린벨트제도는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막고 녹지를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지난 71년 1월 도시계획법 전면 개정과 함께 도입됐다. 그해 7월30일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일부가 처음으로 지정된 이후 지난 77년 4월18일 여천(여수)지역에 이르기까지 8차례에 걸쳐 전국토의 5.4%에 해당하는 5,397㎢(14개 도시권)가 그린벨트로 묶였다. 그린벨트는 고 朴正熙 대통령의 치적으로 꼽힐 만큼 국내외 환경론자들의 찬양을 받았다.지정 초기에는 朴전대통령의 서슬이 무서워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감히 조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朴전대통령이 서거하고 5,6공화국을 거치면서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치를 때마다 그린벨트지역 주민표를 의식한 정치인에 의해 조정문제가 제기됐다.그렇지만 세계적으로 환경기준이 강화되는 추세에서 그린벨트를 개발하자는 정책을 들고 나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정책이라는 환경보호론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지정 초기의 골격이 바뀌지는 않았다. ◎崔相哲 제도개선協위원장 문답/“무리한 부분 손질 균형발전 도모” 다음은 崔相哲 그린벨트제도개선협의회 회장(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과의 일문일답 내용. ­오늘 발표된 시안은 협의회 안에서도 찬반이 엇갈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결정했나. ▲협의회 23명 위원의 전원 합의형식으로 결정했다.30여차례의 협의과정에서 존치지역의 토지매입에 관해서만 투표로 가결했다.이 문제는 매입규모,기준, 재원마련 등에 관해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 난상토론이 이뤄졌다. ­대폭적인 조정이 이뤄진 배경은. ▲도시의 평면적 확산이나 도시와 도시가 연접해서 개발될 가능성이 없는 구역은 전체를 해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영국의 예를 보더라도 중소도시 그린벨트 지정은 거의 없다. ­일본 등 선진국에서조차 높게 평가하고 있는 그린벨트제도를 손대는 것이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나. ▲개인적으로 그린벨트제도 도입 당시 기준이나 논리적 근거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무리하게 지정된 부분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그린벨트 해제·조정은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적으로 개발하자는 것이고 다른 토지이용 규제수단을 활용하면 된다고 본다.역사적 평가에 대해 위원 모두 심사숙고했다. ­존치지역은 주민반발이 예상되는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이번 조정을 통해 존치지역의 주민들은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이 가중될 것이다.그래서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 토지매입을 해주도록 방향을 잡은 것이다.
  • 새로쓴 言官史官(金三雄 칼럼)

    언론인 출신의 사학자 千寬宇 선생은 ‘언관과 사관’이란 글에서 현대의 언론인은 왕조시대의 사관과 같다고 했다. 임금의 말 한마디로 생명이 좌우되기도 하는 시대,그 속에서도 할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언관의 책임이라는 것,그는 언관의 기개를 서거정(徐居正)의 말을 빌어 “항뇌정(抗雷霆) 도부월(蹈斧鉞) 이불사(而不辭)”(벼락이 떨어져도 목에 칼이 들어가도 서슴지 않는다)라고 썼다. 추상열일과 같은 언관의 기개다.조선왕조가 끊임없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도 500년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언관과 사관의 기개 때문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과 함께 역사를 쓰는 사가들의 기개 또한 대단하였다.단재 신채호 선생이 31세때인 1910년 국치 4개월 전에 안창호·이갑 등과 망명길을 떠나면서 가져간 책이 있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필사본이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이 22년간에 걸쳐 완성한 노작으로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실학기의 대표적 역사서다. 단재는 이 책을 짊어지고 고국을 떠나 만주·노령연해주·중국땅을 전전하면서 우리 고대유적과 유물,사서(史書)를 두루 섭렵했다. 단재는 이 책을 자료로 삼고 연구를 거듭하여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등을 집필하였다. 안정복이 단재의 스승인 셈이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원칙으로 ①계통을 밝힐 것 ②찬탄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할 것 ③시비를 바르게 내릴 것 ④충절을 높이 평가할 것 ⑤법제를 상세히 살필 것을 들었다. 안정복의 다섯가지 원칙은 언론인이 지켜야 할 수칙이기도 하다. 오늘의 언론인은 어제의 언관이고 내일의 사관이기 때문이다. 언관이고 사관인 언론인은 모름지기 역사를 의식하면서 글을 쓰고 말을 해야 한다. 군사독재시절부터 길들여진 냉전논리와 수구세력과의 유착 커넥션에서 벗어나야 한다.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젖어온 안보상업주의 멘탈리티를 깨뜨려야 한다. 남북이 차츰 화해와 교류의 물꼬를 트고 서유럽국가들의 정치이념 지도가 바뀌는 터에 냉전의식과 매카시즘으로 중세기적 마녀사냥을 계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히틀러 피아노 건반 언론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앙그리프(Hangriff:공격)’란 신문을 창간하면서 “신문은 피아노 건반이다”고 썼다. 히틀러는 이를 받아서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천국도 지옥으로 느끼게 하고 반대로 더없이 비참한 생활을 낙원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은 나치즘적 언론관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양심세력을 모해하는 글쓰기 행태를 지양해야 한다. 나치가 패망한 지 반세기도 더 지났는데 언제까지 ‘피아노 건반’식의 글쓰기를 한다면 언론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레이몽 아롱의 비판정신 ‘지식인의 아편’을 쓴 레이몽 아롱은 지식인의 비판활동의 유형으로 기술적 비판, 논리적 비판,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들면서, 어떤 유형의 비판활동이든 양심과 진실의 전제가 아니면 비판의 자격이 주어질 수 없다고 했다. 언론인과 지식인은 레이몽 아롱이 지적한 양비론의 기술적 비판이나 길들여진 냉전논리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지양하고 당당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논리적 비판정신을 따라야 한다. 개혁과 민족화해 ‘시대정신’으로 모아지는 때에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식의 언론활동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그리하여 선배 언관과 사관에 부끄럽지 않은 언론인으로 개혁과 민족화해의 선도자가 돼야 한다.
  • 南北 안중근 의사 유해 찾자(金三雄 칼럼)

    오는 10월26일은 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지 89주년이다. 흔히 ‘10·26’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안기부장에게 암살된 날로 기억하지만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안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날이다. 안의사는 의거 이듬해인 1910년 3월26일 일제 형법에 따라 불법적으로 중국 뤼순(旅順)감옥의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定根·恭根 두 아우를 통해 남긴 유언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 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순국한 지 88주년, ‘국권이 회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는 당일 오전 10시15분 교수형으로 순국하여 5분 후 백포(白布)에 싸인 관은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오후에 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우리 항일 투쟁사에 으뜸가는 애국자 안의사는, 중국 袁世凱가 안의사 서거를 슬퍼하여 지은 “몸은 삼한 땅에 있었지만 이름은 만국에 빛났고/생은 백보가 못 되었지만 죽음은 천추에 남을 것이다”란 시 그대로 겨레의 스승이다. ○남북정부 유해발굴 나서야 남북한 정부는 ‘국권회복’ 5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의거일을 맞아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안의사 유해를 찾아야 한다. 안의사의 유해는 뤼순의 시 감옥 묘지에 묻혀 그후 돌보는 이 없다가 현장의 개발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8월 朴三中 스님과 조선족 동포 및 재일교포 몇 분이 안의사가 수감돼 있던 동(東)수감동 앞뜰에 추모비를 세우고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에서 가져간 무궁화 1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뜻있는 분들의 추모사업도 필요하지만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환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해방 반세기가 지난이때까지 안의사의 유해를 해외에 방치해온 것은 한민족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금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최적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통절한 사죄’를 함으로써 안의사를 죽인 죄업에도 사죄를 받게 되었으며, 안의사가 이루고자 했던 ‘동양평화’가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정권의 수립과 함께 민간차원의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조금씩 화해의 서광이 보인다. 이럴때 남북에서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인물’로 꼽히는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을 양쪽 정부가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화해와 통일을 위해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남북의 눈치를 보면서 안의사의 유해 확인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주 출신인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북한의 ‘연고권’ 주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은 남북한과 국교를 갖게 되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봉환하는데 협조할 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유해만확인되면 남북합의에 따라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어 모시고 통일의 상징으로 삼으면 어떨까. ‘연고권’ 문제는 안의사를 욕뵈는 일이다.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자. 정부는 즉각 북한에 제의해주었으면 한다. 정부 레벨이 안되면 민간차원이라도 나서자.
  • 裴說과 梁起鐸의 삶(다시 태어난 ‘대한매일’:3)

    ◎‘구국민족지’이끈 울타리­대들보/배설­1904년 들어와 넉달만에 창간.35세 짧은 삶 마감 때까지 이국땅서 일제와 목숨건 싸움 대한매일의 역사를 말하자면 裴說과 梁起鐸 두 사람을 첫머리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창간자이자 발행인인 배설이 대한매일의 울타리요 지붕이었다면 양기탁은 이를 떠받친 기둥이자 대들보였다. 두 사람 가운데 양기탁의 삶은 그 당시 애국지사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대한매일이 일제에 넘어간 뒤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평생을 국권수호와 광복에 바쳤다. 반면 영국인 배설(Ernest T.Bethell)이 한국사와 맺은 인연은 독특하다.그는 31살(앞으로 배설의 나이는 생일까지 따져 만으로 표기)때인 1904년 한반도 땅을 처음 밟아 넉달 만에 대한매일을 창간했다. 배설은 입국 전까지 16년 동안 일본에서 사업을 벌였다.더욱이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1902년 이미 체결했다.일본에서의 오랜 생활 경험이나 영국이 일본의 동맹국이란 사실에서 배설은 친일 성향 가능성이 높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낯선 땅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일 수 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그의 삶에서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배설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당시 양조회사 경리사원이었으나 후에 극동을 상대로 한 무역회사를 차린다.배설은 고향에서 전문대 수준의 상업·기술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 회사의 일본 사무소가 있는 고베로 건너간다.만으로 15살 때이다. 고베에서 골동품상을 하던 배설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로부터 특별통신원으로 종군취재를 해달라는 제의를 받는다.이에 앞선 기자 경력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 자신은 1908년 6월 열린 재판에서 “일본에서도 신문에 관계한 일이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배설은 1904년 3월10일 한국땅에 들어와 크로니클지 4월16일자에 ‘경운궁 화재’를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그러나 곧 해임되는데 ‘친일적 기사를 싣는 신문사 방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이어 그는 대한매일 창간에 들어간다.중국·일본에서는 영자지가 여럿 나오는데 한반도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가장 매력적인 요소였을 것이다.그의 성격도 창간에 한몫을 했으리라고 여겨진다.배설 사후 대한매일에 실린 ‘배설공의 약전(略傳)’에는 ‘공의 성질을 대강 의론할진대 의협강의(義俠剛毅) 네 글자에 지나지 않으니’라고 밝혔다.곧 정의를 위하는 뜻이나 기질이 굳세다는 의미다. 양기탁과의 만남도 큰 힘이 됐을 것이다.배설은 입국 직후 통역 겸 번역자로서 양기탁을 소개받았다.이후 신문사를 만들어 함께 일하면서 같은 또래(양기탁이 한살 많다)로서 우정과 신뢰를 쌓아갔다. 배설은 일제에 의해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두차례 법정에 선다.두번 다 영국인이 재판장이었지만 판결은 일본측 입김을 강하게 받는다.1908년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또 이를 어길 경우 추방한다는 판결을 받는다.그럼에도 기는 꺾이지 않아 1909년 1월 영자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속간했다.이때 워싱턴 포스트지는 ‘배설을 중단시키는 방법이란 암살밖에 없을 것’이라는 서울발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배설은 그해 5월1일 35살의 길지 않은 삶을 이 땅에서 마감한다.일본은 물론 영국·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은 그의 죽음이 ‘눈엣가시’를 뺀 듯 후련했겠으나 ‘한국인들은 투쟁으로 일관한 가장 믿었던 벗을 잃은’(후임 발행인 만함의 애도사 중에서)것이다. 우강(雩岡) 양기탁이 대한매일에 기여한 공은 어쩌면 배설을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배설이 일제 탄압을 가로막는 보호막을 대한매일에 제공했다면 그 안에서 실제 신문제작과 경영을 도맡다시피한 사람은 그이기 때문이다. 양기탁은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어려서 한학을 배워 10대 중반에 이미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우국지사,동학당과의 교류로 애국심을 키워나갔다.서울의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일본 나가사키상업학교에서는 2년반 동안 한국어교사로 일해 영어 일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정부기관인 예식원에서 번역관보로 일하다 1904년 8월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다음날로 그만두고 대한매일 제작에 본격적으로 매달린다.창간호가 7월18일 나왔을 때도 이미 간여한 만큼 그는 신문사 일과 예식원을 한동안 같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에서 ‘총무(general manager)’로 통했다.공식 직함은 아니지만 편집과 업무일을 두루 책임지고 맡아해 모두들 그렇게 불렀다.지금 직제로는 전무쯤에 해당되는 셈이다. 대한매일이 1905년 영문과 국한문판을 분리하면서부터는 국한문판 제작이 중심이 되었고 그 제작은 전적으로 양기탁이 맡았다.배설 스스로도 “나는 한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지면제작의 전권을 그에게 맡겼다”고 밝혔었다. 1908년 5월 일제 통감부의 기관지인 영자지 ‘서울 프레스(Seoul Press)’의 다음 기사는 양기탁의 지면제작 방향을 그대로 보여준다.이 신문은 대한매일 국한문판·한글판에 대해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원본으로 보이는 영문판과 판이하게 다르다.한국어판들은 영문판에 비해 훨씬 나쁘고,있는 그대로 못된 신문’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양기탁은 한민족에게 직접 배포되는 국한문·한글판에서 더욱 강력하고 공격적으로일제를 비판한 것이다. 1910년 6월14일 대한매일의 발행인이 만함에서 李章薰으로 바뀌자 양기탁은 ‘대한매일에서 손을 뗀다’는 광고를 신문에 낸 뒤 단호히 물러났다.이후 대한매일을 기반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사건으로 6년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 만주로 건너가 무장독립단체인 의성단·통의부·정의부 등을 만들어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1933∼35년에는 남경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으며 38년 그 땅에서 서거했다.그의 유해는 지난 5월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 백범 전집 편찬위원회 모임/어제 본사회의실서

    ◎내년초 1∼3권 편찬 등 논의 서울신문사가 백범 金九 선생 서거 50주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백범전집 발간을 위한 편찬위원회 모임이 16일 서울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편찬위원들은 전집 발간 주체의 이름을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로 정하고,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국내외 기관 단체 등에 협조공문을 보내 연말까지 자료수집 작업을 끝내기로 했다. 편찬위원들은 또 전집의 전체 규모를 20권 정도로 정하고 백범일지 도예실기 등 백범 저작물과 그 번역본 및 동학 활동 때의 백범 모습을 담을 1∼3권 편찬 작업을 우선 내년 초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발간은 원칙적으로 백범 서거 50주기인 내년 6월에 하기로 하되 시간이 부족할 경우는 2회로 나누어 하기로 했다. 이날 모임에는 尹炳奭 인하대·趙東杰 국민대 명예교수,愼鏞廈 서울대·李萬烈 숙명여대·金喜坤 안동대·韓詩俊 단국대·尹慶老 한성대·都珍淳 창원대 교수,崔起榮 서강대 강사,金三雄 서울신문 주필 등 편찬위원 전원이 참석했다.
  • 홍명희 문학비 제막식/17일 충북 괴산 생가서

    벽초 홍명희의 문학비 제막식과 제3회 홍명희 문학제가 17일 오후 2시 충북 괴산 군민회관에서 열린다. 사계절출판사와 충북 민예총 문학위원회가 주최하는 이번 제막식과 문학제는 벽초 서거 30주기와 ‘임꺽정’ 연재 70주년을 맞은 해에 열려 의미를 더한다. 이날 제막식과 문학제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신경림 회장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구중서 의장 등이 참석한다. (0431)258­2202
  • 臨政 대통령의 초라한 生家/李炫熙 성신여대 교수(기고)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들을 도와서 선두에 내어 세우며 타(他)의 부족을 보(補)하고 부족을 개도(改導)함이 선생의 일생의 미덕인데 선생의 최후 일각까지 애호를 받은 사람은 나 한사람이었다” 이 글은 불후의 명작 ‘백범일지’에 나오는 임정 주석 석오 李東寧 선생 서거에 대한 백범 金九 선생의 애도의 한 단면이다. 백범은 李東寧 선생이 1940년 3월 13일 중국 기강에서 서거하시자 우리 독립운동계의 대손실이라고 아쉬워하며 추모하는 가운데 이같은 솔직한 심정을 나타냈다. ○백범과 20여년 동거동락 백범이 석오를 처음 만난 것은 전덕기 목사의 소개로 상동교회를 다닐 때였다. 그뒤 신민회를 같이 조직하였으며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상하이에서 다시 합류하였다. 두 분은 임정시대부터 李東寧 선생이 서거할 때까지 20여년간을 같은 집에서 지내며 가난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했던 선후배 사이였다. 석오가 백범보다 7년 연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석오가 주요 직책을 맡은 뒤는 곧백범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거나 적극 추천해서 그 임무를 빛내게 독려하였다. 중국에 있던 임정(1919∼45)은 27년동안 합법적으로 5차례나 개헌을 해서 지도체제,원리를 변경했는데 2차 개헌때인 1925년 이후에는 백범을 대통령격인 국무령에 강력 천거해서 ‘임정의 문지기’만 되어도 족하다던 백범이 최고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민주공화제를 실시한 임시정부였으나 그때까지도 동지들은 봉건의식이 남아 있어 지체가 높지 못한 ‘백범 국무령 추대론’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석오가 “백범은 내가 책임지겠으니 그리 알고 국무령을 삼읍시다”라며 그를 적극 추천,백범이 주석직에까지 올라 최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석오는 행정부에서 내무·법무총장 국무총리 대통령대리 주석을,입법부에서는 초대 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을 맡은 이후 여러번 의장을 역임했다. 이런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올 때마다 석오는 늘 양보하고 출중한 동료 지사를 천거했었다. 그러나 많은 동지가 합의해서 그를 수장의 자리에 추대했다. “난국을 지혜롭게 이끌어가고 분열·파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인격적으로나 학덕으로 보나 석오만한 인물이 없다”고 그를 국난극복의 구심점,대표자로 지목한 것이다. 개화민권운동가,독립협회 간사,제국신문 논설위원,신민회 조직,신흥무관학교 설립,임정 수립,이봉창·윤봉길 의사의 배후지도,한국독립당 조직 등 그의 보람찬 70평생은 나라를 위한 고귀한 공인의 생애일뿐 개인 생활은 전혀 누릴 수 없었다. 그는 임정을 수립하면서 “지금으로부터 우리는 대한제국 국민이 아니고 민간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국의 국민입니다”라고 말했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내 좁은 건물에서 그는 50대 초 입법부의 의장으로 3권분립을 통한 자유민주주의를 소리높여 외친 것이다. 석오는 곧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의 아버지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아버지 그가 출생한(1869년) 곳은 지금 독립기념관이 지척인 충절의 고장,천안시 목천면 동리였다. 지금 그의 생가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임정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임에도 임정의 대통령이던 석오의 생가를 가보면 너무 초라하고 누추하여 볼품이 없다. 이곳이 과연 큰 어른이 태어난 곳인가 하고 의심해 놀랄 지경이다. 별것 아닌 어떤 대통령의 생가가 번쩍 빛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독립기념관에는 하루에도 몇백명이 찾아와 감탄,열복하고 가지만 바로 코닿을 곳인 李東寧 주석(대통령)의 생가는 늘 쓸쓸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이곳이 50년된 대한민국 건국의 법통성이 발원한 성지요,돌봐야 할 터인데도 잡초만 무성하게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 “민주의 시초요,대동화합,단결의 실천자인 李東寧 선생이 탄생한 곳인줄 그 누가 알랴”
  • 테레사 ‘聖女’ 추서 추진/오늘 서거 1주기

    ◎추모 열기 본격화… 공인기간 크게 단축될듯 ‘빈자(貧者)의 어머니’로 살다 간 테레사 수녀가 조만간 ‘성녀(聖女;교회가 죽은 자에게 내리는 최고의 칭호)’ 반열에 오를 것 같다. 서거 1주기를 맞아 바티칸 교황청은 테레사 수녀 ‘성녀’ 선포 절차에 들어갔다. 5일 기념미사를 포함한 화려한 1주기 기념식도 마련한다.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다이애나비의 추모 열기가 빠르게 식어 가고 있는 반면 테레사 수녀에 대한 본격적인 추모는 이제부터인 셈이다. 30대에 인도 캘커타 빈민가에 투신,지난해 9월5일 87세로 명이 다할 때까지 줄곧 병들고 굶주린 이들을 돌봐온 테레사 수녀를 민심은 진작부터 ‘살아있는 성녀’로 불러온 터. ‘성녀’ 공인에는 몇십년씩 끄는게 보통이지만 테레사의 경우 기간이 크게 단축되리라는 전망이다. 캘커타 교구에서 수집한 테레사 생애 자료가 이미 바티칸 심사에 올라 갔다. 최종 결정권을 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주기를 앞두고 그녀를 ‘20세기가 낳은 인물의 하나’로 극찬했다. 사후 5년안에 시성식(諡聖式)을못 치르도록 돼있는 규정만이 ‘성녀’ 승인을 2002년 이후로 미뤄두고 있는 셈. 테레사 수녀가 세운 빈민 쉼터 ‘사랑의 선교회’ 캘커타 지부에선 거창한 1주기 추모식은 없다. 테레사 서거후 원장이 된 니르말라 수녀가 테레사만이 ‘마더’라며 아직껏 ‘시스터’ 호칭을 고집하고 있듯 여기서 추모란 나날의 삶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업혀 들어오는 빈자의 수는 줄지 않고 있다. 니르말라 수녀는 이곳 안마당에 안장된 테레사의 넋이 아직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 백범기념사업협회 李壽成 회장/“국민정성 모아 백범기념관 건립”

    ◎서울신문사의 전집 발간 적극 협력 李壽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2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범기념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 모금운동을 연내에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백범기념관 건립 계획은. ▲백범기념관은 국민의 이름으로 건립돼야 한다. 사회 각 분야의 덕망있는 인사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할 생각이다. 건립 자금은 국민들의 모금운동으로 충당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민족의 중요한 자산인 金九 선생의 민족사랑과 애국심을 널리 전파하고 되새기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바람직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금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진정한 애국심이 필요하다. 백범은 민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가졌던 지도자로 모든 국민이 그의 애국심에 공감할 것으로 믿는다. 기념사업협회는 연내에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서거 50주기인 내년에 기념관이 준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장소는 金九 선생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기념사업협회,전문가 등과 협의하여 결정할 예정이다. ○민족사랑·애국심 전파 ­백범기념사업협회 활성화 방안은. ▲과거의 정권이 백범을 견제했기 때문에 기념사업협회의 활동도 위축됐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백범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金九 선생의 올바른 평가 등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협회 회원을 늘릴 예정이다. 현재의 회원은 14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청소년들에 대한 백범사상 교육도 보다 활성화할 방침이다. ○학술상 제정 반가운 일 ­서울신문사는 50주기를 맞아 백범 학술상을 제정하며 백범전집을 발간하기 위해 자료수집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서울신문사와 기념협회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백범이 서거한지 반세기나 지났는 데도 그의 전집이 발간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서울신문사가 이번에 전집을 발간하고 학술상을 제정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전집 발간과 학술상 제정은백범사상,순수한 애국심,민족사랑 등을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협회는 전집발간을 위한 자료수집 등에 적극 협력할 것이다. 발간과 배포 등에도 가능한 최대의 지원을 하겠다.
  • “北 反민주실상보며 고국 그리웠다”/범청학련 5명 일문일답

    ◎北 분열만 부추길뿐 진지한 통일노력 외면/귀국허용 소식듣고 진정한 민주화 깨달아 朴聖熙씨 등 범청학련 관련자 5명은 19일 기자회견에서 시종 반성하는 표정으로 귀국 배경과 심경변화의 동기 등에 관해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특히 북한의 실상을 체험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북한과 한총련에 대한 비판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기자회견을 갖게된 경위는. ▲都鍾華=독일 베를린의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에서 활동을 하는 동안 한총련과 북한의 여러가지 모습을 접했다.시간이 지날수록 북한의 관료주의적 이고 반민주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유의 품이 그리웠다. ­한총련에 대한 소감은. ▲崔晶南=한총련은 통일문제에 대한 편협한 사고에서 탈피, 균형적이고 현실에 입각한 통일관을 가져야 한다.한총련의 노골적인 친북 입장은 통일에 대한 국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으며,바람직한 학생운동의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다. ­북한에 체류하면서 많은 북한당국자들과 학생들을 만났을텐데 지금 시점에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都鍾華=북한은 결코 통일사회의 대안이 아니다.오히려 남한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을 뿐 전 민족을 상대로 진정한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 ­독일에 지내면서 어려웠던 점은. ▲朴聖熙=망명자 생활자금을 받느라고 2주에 한번씩 관청을 들락거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아무런 장애없이 한국으로 돌아갈때 내 처지를 비관,며칠동안 우울한 심경에 빠졌다. ­기자회견이 진보운동세력에 미칠 파장을 생각해 봤나. ▲柳世洪=한총련의 운동행태에 대해 많은 진보세력들이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북의 실상 등을 경험한 우리가 얘기를 꺼내는 것이 오히려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 ­현 정부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은. ▲成墉乘=귀국이 허용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민주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학교에 복학할 수 있다면 평범한 대학생으로 지내고 싶다. ◎범청학련 5명 행적/91.8­박성희·성용승씨 2차 범민족대회에/94,95­최정남씨 김일성 100일제 행사참석/96.8­도종화·유세홍씨 7차대회 개막식에 범청학련 공동사무국 남측대표를 지낸 朴聖熙씨(29)는 경희대 작곡과에 재학 중이던 91년 8월5일 전대협 대표로 건국대 행정학과에 다니던 成墉乘씨(29)와 함께 밀입북,10월28일까지 체류했다.두사람은 8월15일 판문점에서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개최한 ‘제2차 범민족대회’에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윤기복 등과 함께 참석했다. 베를린에 체류하던 두사람은 92년 8월15일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철폐,연방제방식 통일 실현’ 등을 강령으로 채택한 이적단체 범청학련을 결성했다. 崔晶南씨(29)는 94년과 95년 두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북,범청학련 북측본부로부터 단군릉개건 준공식과 김일성주석 서거 100일제 행사에 참석했다. 연대 기계공학과 재학중이던 都鍾華씨(24)와 조선대 치의대 본과에 다니던 柳世洪씨(27)는 96년 8월10일에 밀입북해 14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7차 범민족대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들은 97년 12월 베를린의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자진 폐쇄했다.
  • 어느 교육자의 태극기사랑/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서울광장)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국기를 바라보며…조국은 잃었으나,너만은 잃지 않고 광복의 앞날을 위하여 나의 애국지성을 바치겠다고 되새겨 다짐하였다’. 어느 저명한 교육자가 약관일때 국권이 피탈되자 태극기를 땅속에 묻을 생각을 굳히고 이러한 애국적 의지를 표했다.그는 ‘나는 남몰래 널빤지와 못을 얻어 손수 만든 조그마한 나무상자에 고이고이 접어서 넣은 국기를 장롱속에 깊숙이 간직하였다.기회있을 때마다 장롱속을 엿보던 나의 가슴에는 항상 뜨거운 조국애의 그리움이 용솟음쳤다’고 말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30대 초반으로 손수 설립한 동원(동덕)여학교의 교장이었다.사회저명인사가 된 그 분은 일제의 감시를 받아 장롱속에 숨겨둔 국기가 발각될까 염려하여 장독대 밑을 파고 국기상자를 달밤에 은닉하였다.얼마뒤 묻어 둔 국기상자를 파내 보니 나무상자는 퇴색하고 뒤틀려서 국기만 꺼내 다시 정성스레 함 속에 보관하였다. ○국기만 지닌채 피난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함 속의 국기를 꺼냈다.햇빛을 못본 국기는 좀이 먹어구멍이 뚫렸으나 형체는 그대로였다.‘나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국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아래 엎드렸다’고 그는 소감을 피력하였다.그리하여 곧 학교로 달려가 태극기를 게양대에 올리고 독립만세를 서울이 떠나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남북분단 속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서울이 남침 3일만에 붉은 군대에 짓밟히자,그는 다시 국기를 숨겨야 했다.국기를 옷속에 넣어 꿰맨 후 괴나리봇짐 속에 넣어 생명같이 모시고 어루만지며 9·28 수복을 기다렸다.1·4후퇴(1951)때는 가재도구 속에 국기만 넣어 부산으로 피난갔다. 이 태극기는 1908년 춘강 조동식(1887∼1969)이란 교육자가 손수 제작해서 눈물겨운 정성을 쏟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금년 그 국기의 나이는 90인 것이다.약 1세기 가까운 긴 세월 속에 천도 낡고 좀먹은 구멍도 있는 그 국기는 헝겊으로 꿰매져서 지금은 동덕여대 박물관에 액자로 모셔져 있다. 이 국기야말로 고난·역경과 애국의 상징으로,춘강이 서거한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요즘도 위용과 광채를 발하고있다.이 태극기는 가로 174㎝,세로 160㎝ 규모의 견직으로 제작되었는데,국권피탈 이전(1908)에 제작되어 국가 상징물로서,그리고 한 애국인사의 지성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사랑 강인한 집념 마침 소장자쪽에서 그 국기를 국가지정 문화재로 검토해줄 것을 문화재관리국에 요청하여 문화재전문위원인 필자가 그 곳을 방문,조사한 일이 있었다.그 국기를 보고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춘강의 태극기는 태극이 청색이 아니고 검정색이며 건곤감리의 순서도 지금의 표준형과는 다른 양상이다.그렇지만 교육자 춘강의 숨은 애국의지,독립정신,나라사랑의 강한 집념을 읽어볼 수 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춘강의 국기는 국가상징물로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겠다.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의 아름다운 나라사랑의 삽화인 것이다.
  • 함석헌 선생의 얼 되새기기 결실

    ◎89년 설립한 기념사업회 곧 사단법인화/월간 교양지 ‘씨알의 소리’ 복간 계획도 종교인이자 민권운동가인 함석헌 선생(1901∼1989)을 기리기 위해 지난 89년 설립된 ‘함석헌 기념사업회’가 곧 사단법인화 된다. 또 월간 ‘씨알의 소리’가 복간되는 등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활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함석헌 기념사업회’가 현 이사장인 이문영 경기대 석좌교수를 발기인 대표로 문화관광부에 제출해놓은 사단법인 설립신청이 내년초 선생의 서거 10주기를 앞두고 금명간 받아들여질 것으로 알려짐에 따른 것이다. 기념사업회측은 과거 세차례 사단법인 신청에도 불구,번번이 거절당했으나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고 밝혔다. ‘함석헌 기념사업회’는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인 고(故) 장기려 박사를 초대 이사장으로 설립된 이래 민중신학자인 고 안병무 박사,이윤구 전 한국선명회 회장 등이 이사장직을 맡아 왔다. ‘함석헌 기념사업회’는 94년부터 동인지 성격의 격월간지 ‘씨알마당’을 발간하는 등 그동안 간헐적인 활동을 벌여 왔다. 함석헌 선생은 88년 평생을 야인(野人)의 자리에서 온갖 박해와 수난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불의의 현실을 꾸짖고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민족의 선각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영원한 민중의 말씀으로 살아 있다. 선생이 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비롯,‘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 20여권의 저서에는 세계에 내놓을만한 한국사상인 ‘씨알사상’이 온전히 담겨 있다. 한편 ‘함석헌 기념사업회’는 선생의 얼을 기리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지난 70년 4월 창간됐다가 91년 3월까지 발행된 뒤 휴간된 월간교양지 ‘씨알의 소리’를 복간할 계획이다. ‘씨알’이란 말은 민(民),즉 피플(people)의 뜻.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말이다. ‘씨알의 소리’는 민중이 알아야 할 것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는 것을 창간이념으로 하고 있다. 새로 출발할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는 선생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민중의 참여를 통한 민족문화를 창달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 北 인민배우 추석봉 사망

    북한군 4·25 예술영화촬영소 소속 인민배우 추석봉이 최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북한 중앙방송이 18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는 인민군 4·25 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 추석봉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해 어제(7·17)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내셨다”고 보도함으로써 확인됐다. 추석봉은 지난 71년 4·25예술영화촬영소 전신인 2·8예술영화촬영소 부총장(공훈배우칭호 수상)에 올라 81년부터는 조선영화인동맹 부위원장직을 수행해왔고 87년 영화배우로서는 최고의 칭호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 육군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5)

    ◎“조국사랑” 참군인 정신 일깨운다/선사시대 이래 군사자료 8,600점 한눈에 金日成 작전명령서·베트콩 전단까지/부서진 총열·녹슨 수통·구멍뚫린 철모…/장렬히 숨져간 무명용사의 외침 절절이 불암산의 서기(瑞氣)가 어린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호국 간성의 요람인 이곳에 들어선 육군박물관은 일반인들의 군(軍)에 대한 거리감을 친근감으로 바꿔주는 묘한 공간이다. ‘한국의 시인 건축가’ 金重業씨(88년 작고)가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그 물꼬를 트는 상징으로 열쇠 형상을 택해 설계했다는 이 건물은 흰색 화강암 건물로 잔디와 숲으로 차분히 정돈된 육사 캠퍼스 남쪽 끝에 들어앉아 있다. 정면에 연병장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바로 앞에는 고 姜在求 소령 동상이 달려가는 듯한 자세로 서 있다. 30여년전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훈련장에서 부하를 구하고 산화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 이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참군인정신과 함께 참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 육군박물관은 이 땅에서 ‘저질러진’ 전쟁에 관한 많은 것을 증언한다.지상3층 지하1층 건물중 고대실·현대실 등 두 개의 전시실에는 가깝게는 6·25전쟁에서부터 임진왜란,멀리는 선사시대의 군사 관련 유품과 문화재까지 모두 8,6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의 가치는 유형의 물질에서 옛 사람들의 혼과 정신을 만나는데 있다고 했던가. 전시실을 떠받치고 있는 14개의 원추형 돌기둥이 두 열로 돌아나간 옥외 전시장에서 당시의 총통과 대포들이 전장의 신음을 오늘에 전한다. 건물 중앙으로 맞닿은 기둥 사이에 朴正熙 대통령이 서거 때까지 타던 캐딜락과,맹호부대가 월남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한 ‘안케패스 전승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군인으로 시작해 대통령이 되고,또 독재자로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한 불운한 정치인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볼 수 있다. 3층에 위치한 현대실에는 광복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각종 무기와 장비 복식 문서 등 4,500여점이 전시돼 있다. 현대사의 흐름을 요약한 다양한 색과 제각각 형태의 볼 것들이 눈을 자극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은 6·25전쟁이다. 전쟁에 쓰였던 장비와 전단 복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붉은빛 일색인 공산군의 그것들은 지금도 섬짓한 느낌을 전한다. 어느 시인은 뜰 안에 핀 장미꽃 빛깔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 0097호’에는 金日成이 전쟁중 직접 작전을 명령한 극비사항이 적혀있다. 1951년 8월8일로 찍혀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지령문’도 있다. 특히 6·25전적지인 설악산 소청봉에서 유골과 함께 발굴된 무명용사의 유품 앞에는 관람객들이 유난히 많다. 소총의 총신부분과 녹슬은 수통·구멍뚫린 철모.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전장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다가 외롭게 숨져갔을 그의 외침이 귓전을 때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6·25전쟁중 물자가 고갈되자 인민군이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쓴 병뚜껑으로 만든 모표,허름한 방한화,버선,철모,수통 등이 월남전 당시의 궁색한 베트콩 군수품과 나란히 진열돼 있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고향의 달밤,임이 그리워 밤마다 웁니다.”“그리운 이여! 딸라도 선물도 싫어요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의 산 목숨뿐” 등 월남전 당시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살포됐던 전단도 눈길을 끈다. 2층의 고대실에는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 이전까지의 군사관련 문화재 4,128점이 시대순으로 전시돼 있다.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주먹도끼 등 석제무기와 3∼4세기 신라의 철검·무쇠도끼·무쇠창 등 철제무기들은 인류를 말살할 수 있을 정도의 현대무기에 비하면 정겨운 느낌마저 든다. 한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조선후기 화살 연발장치인 녹로노나 부녀자도 쏠 수 있게 만든 수노(手弩)인 삼시수노기(三矢手弩機)가 복원품이긴 하지만 눈길을 끈다. 화살을 4개까지 장전해 쏘던 조선전기의 사전총통(四箭銃筒),조총,화강암 탄알인 단석(團石),발사기인 대완구(大碗口)와 비격진천뢰쯤에 이르면 본격적인 전쟁 분위기가 풍긴다. 대완구는 국내 유일한 것이며 비격진천뢰도 연세대박물관과 함께 유일한 소장자로 돼있다. ‘부산진 순절도’와 ‘동래부 순절도’는 임진왜란 당시 군민(軍民)들의 처절한 항전모습을 담은 보물들이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연병장 길을 따라 오른 쪽으로 접어들면 헬리콥터 장갑차 곡사포 전차들이 도열한 야외전시장에 접어들게 된다.50년 6월25일 남침의 선봉에 섰던 북한군 탱크 T­34와 이에 맞섰던 미제 M46탱크,전쟁초기 투입된 적 관측및 업무연락용 항공기 L­19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40여년 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첨예하게 대치했던 주인공들이 지금은 친구가 되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관장 姜性文 중령/“40년 전통 국내 유일 군사종합박물관”/군사문화 발달과정 전시/전쟁유적지 학술 조사도 육군박물관의 현 관장 姜性文 중령(53·18대)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주2회씩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수이기도 하다. 지난 96년 12월 관장직을 맡아 박물관 운영을 책임지랴 강의준비 하랴 하루하루가 바쁘기만 하다. 특히 지난해 2월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관람객이 늘어나는 바람에 할 일이 부쩍 많아졌다. “용산의 전쟁기념관이 한국전쟁에 초점을 맞춘 전쟁과 무기중심의 기념관 성격을 갖추고 있다면 육군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군사관련 종합 박물관입니다. 40년이 넘은 전통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경내를 둘러보는 관광상품이 마련되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지요” 육군박물관은 56년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으로 처음 문을 연뒤 10년만인 66년 육군사관학교 군사(軍事)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83년 지금의 자리에 새 건물이 완공돼 2년뒤인 85년 개관했다. 주변의 넓은 공원 분위기와 어울려 딱딱하게 느껴지는 군사문화를 순하게 바꿔낸다. 군사유물을 통해 군의 업적과 전통·발전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형태가 독특하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유형적인 군사관련 소장품들이 무형의 자산을 표현한다고 할까요.외침이 있을 때마다 민군(民軍)이 일치단결해 민족 수호에 나섰던 조상들의 자취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자부심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지요” 비록 군사문화를 다룬 박물관이지만 전통문화 유지역할에 큰 몫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는게 姜관장의 설명이다. 휴전선 일대 군사유적지에 대한 학술조사와 군사유물에 대한 논문지 발간도 활발하다. 지난 94년부터 파주·연천·철원·포천군 지역의 산성·봉수대·한국전 격전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벌여 보고서를 작성해 왔고 학술 논문지 ‘학예지’도 통권 5권을 펴냈다. 육군 박물관이 군사(軍史)를 다룬 박물관인 만큼 대학 역사교육의 보조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대학의 역사교육에는 군사 문화재의 발달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빠져 있지요. 이 틈새를 메울 수 있는 박물관이 바로 육군박물관입니다. 소장품들이 모두 가치있는 자료들인 만큼 영구보존을 위한 전시장 보완이 시급합니다” ◎육군박물관 가는 길/전철·노선버스 연계/육사후문으로 입장 70만평의 캠퍼스안에 다양한 레포츠 시설과 편의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는 특수목적 대학인 육군사관학교 안에 자리잡은 이색 박물관이다. 육군사관학교가 관리 운영하는 군 관련 시설인만큼 일반인들의 접근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그러나 지난해 봄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고 관광코스도 마련돼 있어 뜻만 세우면 얼마든지 알찬 볼거리들을 만날수가 있다. 전철 1호선이 석계역,7호선이 먹골역까지 닿아 있고 노선버스는 45­2,803,45,745번이 운행한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울여대 앞에서 내린다. 매일 상오 9시 호텔신라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도 있다. 육사 후문에서 안내를 받아 박물관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으며 정기 관광코스는 상오 10시와 하오 2시 등 매일 두차례. 화요일∼일요일 개관하며 관람시간은 상오 10시부터 하오 4시까지. 관람료는 어른 2,000원,학생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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