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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통신] 반한류 대책 세워라

    [한류통신] 반한류 대책 세워라

    지난 몇 년 이래 한류는 중국사회의 빼놓을 수 없는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TV연속극과 영화에서부터 음식, 복장, 심지어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얼굴 모습까지 닮으려는 풍조가 퍼졌고 미용법과 성형수술까지 유행하면서 중국사회를 근저에서부터 흔들어댔다. 중국에 오는 한국 가수나 영화배우마다 대박을 터뜨렸고 TV연속극과 영화는 정상을 놓치지 않았다.13억 인구의 대국이,5000년 역사의 ‘문명의 종주국’이 물밀듯 쏟아져들어오는 한류에 어찌하여 이렇듯 쉽사리 무너져버리고 그 매력에 휩싸여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한국 대중문화의 다양한 소재와 신선감, 생명력과 톡톡튀는 연출, 배우들의 매력 등이 자리잡고 있지만 한국문화가 갖고 있는 중국 문화와의 유사성, 동질감과 친화력의 역할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류가 전성기를 맞으면서 한류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게 생기고 있고 이를 폄하하거나 대항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이미 실제로 한국TV드라마에 대한 ‘원성’과 식상한 사람들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한국 연속극들이 인기에 편승,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늘리고 끈다는 지적이다. 또 여성들의 눈물을 짜내는 뻔한 ‘순애보식’ 이야기 전개 등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 한국 연속극들은 정상에 있고 그 기세는 당당하다. 이런 속에 보다 ‘조직적인 반한류 움직임’도 보인다.“중국 문화당국이 한국 연속극의 수입 수량을 제한하고 방영을 규제하기 시작했다.”는 등의 입 소문 등은 그것이 사실 여하를 떠나서 반한류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한국에선 중국 연속극이나 영화를 거의 공중파에서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에 중국 영상물 제작자 등 관계자들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한국측이 중국 영화의 한국내 알리기에는 무성의하고 일방적인 수출에만 관심이 있다.”는 식의 부정적인 여론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류를 보면서 더 많은 중국인들은 한류의 좋은 점을 중국 문화의 일부분으로 흡수해야 한다는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 중국문화가 한류를 통해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수 있다고 많은 중국인들은 믿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한류에 대한 곱지 않은 눈길과 의도적으로 이를 제한하려는 일부 움직임에 대해선 그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해서 장기적인 차원의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할 때라고 본다. 한류의 롱런을 기대한다. 쑨커즈 중국 푸단대 교수
  • [열린세상] 정치바람에 시달리는 아토피/이성낙 가천의과학대학교 총장

    어린아이들이 즐겨 먹는 과자가 아토피를 유발한다는 내용이 TV를 통해 방송되자 이른바 ‘과자의 공포’가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자녀들의 먹을거리를 걱정하는 엄마들이 ‘과자 NO! 아토피 NO!’라는 팻말을 들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기억에 생생한 ‘만두 파동‘을 다시 보는 듯해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아토피(Atopy)’라는 의학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심한 가려움증으로 인해 온몸의 피부가 성한 곳이 없는, 특히 많은 어린아이들이 고생하는 난치성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는 아토피는 그 병인(病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내용을 집약해 보면 국내의 오염된 생활환경, 오염된 먹을거리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캐나다, 미국, 호주 같은 선진국으로 ‘도피 이민’을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저소득층은 상대적인 좌절감에 빠지고, 이런 현상을 ‘양극화’의 결과인 양 해석한 정부·시민단체 그리고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타도 아토피’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말하자면 아토피가 ‘정치 바람’을 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의료인들은 아토피에 대한 그런 관심이 고맙기보다 오히려 불편하고, 불안할 따름이다. 1960년대, 필자가 독일에서 피부과 전문의 과정을 밟을 때만 해도 아토피는 그리 흔하게 쓰이는 용어가 아니었다. 국내 피부과 전문의에게 아토피라는 용어가 익숙해진 것은 1970년대 후반이며,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90년대 말이다. 아토피는 대부분의 경우 피부 관리만 적절히 해주면 치유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드물게 우리 피부과 전문의들에게 참담한 패배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어 ‘a-topos’에서 유래된 ‘Atopy’는 ‘비정상적인(out of place)’이라는 뜻과 함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니만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건축 자재를 비롯한 오염된 주거환경은 물론 먹을거리가 아토피의 병인으로 집중 부각되고 있다. 건축 자재에서 발암 물질이 있고, 먹을거리에 불량·불순 첨가물이 있다면 마땅히 제거하거나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염된 주거와 식생활 환경이 아토피를 악화시키는 요인일 수는 있지만, 아토피의 원인으로 일반화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악화 요인과 발병 원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생활환경이 좋다는 스위스, 노르웨이, 캐나다에서도 아토피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토피는 복합적(multi factors)인 원인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더욱 치료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고, 아토피가 최첨단 면역학 분야의 연구 대상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질병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우리나라의 대장암 발생 빈도가 뚜렷한 증가 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서구화된 식생활, 즉 예전에 비해 육식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아토피도 우리네 생활양식이 서구화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어쨌거나 이제 아토피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난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급조된 정치성 규제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연구를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어떤 행정 규제를 통해 아토피 문제를 풀 수 있었다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당시 ‘명성’을 떨치던 K치안국장이 기자들끼리 “인플루엔자가 극성을 부려 걱정”이라고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는 “그렇다면 그자를 즉시 잡아넣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아토피 해결 방법과 흡사한 듯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이성낙 가천의과학대학교 총장
  • [사설] 탈북청소년 낙오자 만들지 말아야

    탈북자를 지칭하는 새터민 청소년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이후 안타깝게도 학교적응에 대부분 실패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다. 국가청소년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입국한 20세 미만 새터민 1300여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중도에 학교를 그만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정규 교육과정을 포기하는 것은 남북한 교육체제 및 학제에 차이가 나는 데다 탈북과정에서의 오랜 학습공백으로 학력차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생활양식과 문화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새터민들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지만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은 크게 미흡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새터민들은 입국하면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서 3개월동안 정착교육을 받는다. 국민임대아파트를 알선해주고 정착금 및 주거지원금이 제공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나마 정착금은 절반가량이 탈북 브로커들의 손으로 들어가 남한 사회에 정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새터민 청소년들에겐 충분한 교육훈련의 기회도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한겨레 중·고교를 세웠지만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에 따라 형편이 닿지 않는 청소년들은 집 근처의 정규학교에 들어가지만 이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이나 상담프로그램 등이 없어 따돌림 당하기가 일쑤다. 새터민 청소년들을 교육사각지대로 방치하는 것은 그들을 사회적 낙오자로 만드는 것이다.2세들을 위해 학교시설을 확충하고 일반 학교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적응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은 교육 외엔 없다.
  • 탈북청소년 절반이 자퇴

    1990년대말에 탈북했다 5년간의 중국체류를 거쳐 2년 전 입국한 새터민 김나래(18)양은 한 초등학교에서 2년 동안 5∼6세 어린 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았다. 이어 지난 3월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바로 그만뒀다. 그는 출석일수 미달로 재적처분을 받으면 고입 검정고시를 칠 계획이다. 김양은 “초등학교도 다른 대안이 없어 졸업까지 겨우 버텼을 정도”라며 한국 적응이 쉽지 않았음을 털어놨다. 북한에서 9년 동안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오미영(가명·21·여)씨도 지난해 다니던 학교를 결국 그만뒀다. 늦깎이로 남한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20일 국가청소년위원회에 따르면 새터민 청소년들의 방황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입국한 20세 미만 새터민 1300여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정규 학교에 편입했다 1∼2년 안에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 중도 포기율이 국내 학생에 비해 무려 10배다. 남한학교 취학률은 중학교 과정이 58.4%, 의무교육 과정이 아닌 고등학교는 10.4%에 불과했다. 청소년위원회는 새터민 청소년들이 정규 교육과정을 포기하는 이유에 대해 ▲남한 학교적응 실패 ▲남북한 교육제도 차이 ▲직업훈련과정 미흡 ▲정서·신체적인 문제 등을 꼽았다. 관계자는 “중국 등 제3국가에서 오랫동안 체류해 학습공백이 있는 데다 남북한 학제와 학력 차이가 커, 국내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한다.”면서 “남북한 생활양식에도 차이가 있어 또래 문화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들을 책임질 교육기관은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대안학교를 빼고는 거의 없다. 정부가 세운 학교로는 지난 3월 문을 연 기숙 대안학교인 한겨레중·고등학교가 유일하다. 지난해까지 탈북청소년 1300여명이 입국한 것을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있는 민간이 운영하는 대안학교들도 시설이 열악한 데다 훈련된 전문교사와 학습교재가 부족하다. 이들을 위한 별도의 직업훈련원도 전무했다. 일반 학교에 진학한 대부분의 새터민 청소년을 위한 해결책은 아예 없다. 청소년위원회는 이런 실정을 감안, 오는 2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무지개 청소년센터’를 연다. 하지만 이 시설은 탈북청소년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혼혈 청소년까지 사용하는 시설이라 새터민 청소년을 위한 맞춤 시설은 아니다. 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관계자는 “최근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 청소년들은 국내 교육과정에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처음부터 정규 학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서 “탈북청소년들에게는 남북한 통합 교육을 시켜야 하고 혼혈 청소년들은 그들에게 맞는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데 청소년위원회가 세우는 시설은 교육복지 차원에서 두 가지 사안을 한 데 묶은 것이라 실효성이 의문”이라고 전했다. 경기대 이부미 교수는 “학교에서 벗어나는 탈북 청소년들의 학력을 제대로 측정한 뒤 여러 교육기관으로 재배치해야 한다.”면서 “기존 공교육에서 해결할 수 없으면 대안학교나 직업 훈련원 등 다양한 해결 방안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19) 궁(宮)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19) 궁(宮)

    삼국시대 이래 조선조까지 우리의 역사는 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는 왕조체제였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5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다. 조선사회에서 정치·행정의 중심지였던 궁궐은 그 시대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의 공간이며 생활 공간이다. 궁궐은 신전이나 종교건축과 더불어 규범과 격식을 갖춘 당대 최상의 건축물이다. 건물들은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졌으며 저마다 쓰임새가 달랐다. 기능에 따라 정사를 위한 정무 공간,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공간,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공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무공간이 앞에 오고, 생활 건축물은 뒤편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궁궐은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에 비하면 아담한 편이다. 당시 전체주의적 의식구조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우선 자연을 생각하고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 규모와 비례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은 명실공히 조선의 정궁(正宮)으로서 건국의 의지와 왕도(王都)에 따르는 명당 풍수설, 유교 사상 등이 가장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종묘는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음악과 함께 연주 장소로서 독특한 건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위패를 모신 각각의 신실(神室)도 눈길을 끈다. 신실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나 건물 칸마다 한 왕의 위패를 모시기 때문에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선이 강조되어 있다. 월대의 한없이 넓게 펼쳐지는 돌바닥도 정전 앞 공간의 엄숙함과 고요함을 더해 준다. 조선의 궁궐은 지금도 서울 한복판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현대식 콘크리트 숲속에서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과거의 건물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뿐 아니라 600년 전과 다름없는 종묘의 제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문화적 경이라고 하겠다. 전제군주 국가에서 왕실의 권력을 표현하는 복식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가장 중시되었다. 조선의 궁중의상은 종류와 재료는 물론 색상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왕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 주고, 왕비의 기품과 우아함을 느끼게 해 준다. 흔히 왕이 집무시에 착용한 예복으로 알려진 곤룡포(袞龍袍)에는 왕을 상징하는 문양인 용을 금실로 수놓아 만든 원보(圓補)가 가슴과 양어깨를 장식하고 있다. 어느 옷보다도 화려하면서도 왕의 위엄을 더해 주는듯하다. 왕과 왕실의 건강과 가장 밀접한 식생활 문화인 궁중음식은 전통적인 한국음식을 대표한다.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최고의 재료가 조리기술이 뛰어난 주방상궁과 대령숙수(待令熟手)들의 손에 의해 가장 잘 다듬어져서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생활양식과 문화가 상호 교류되었던 서울 양반가의 음식이 흡사하지만 궁중음식과는 이름을 달리하였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관료라도 임금님께만 차리는 12첩 반상은 들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궁중문화는 500년 조선시대 문화 예술사의 실천 주역 중의 하나이다. 또 왕실의 문화는 귀족과 평민문화의 본보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교류를 통하여 국가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에도 앞장섰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왕실문화는 바로 조선 왕실의 문화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성취한 고급문화의 정수(精髓) 자체인 것이다. 글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건물로 보는 한국종교의 이면

    모든 건축물은 단지 개개 건물의 존재의미를 넘어 당 시대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결정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을 통해 종교와 관련해 지어진 건축물들은 신앙과 종교활동의 편린, 혹은 총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전 세계에는 숱한 종교 건축이 산재해 있고 한국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전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종교 관련 건축물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양식과 특징을 보여줍니다. 한국은 각종 종교가 각기 만만치 않은 교세를 자랑하고 있는 다종교 국가입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민족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나름대로 탄탄한 교리와 조직을 갖춘 채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종교계는 종교간 마찰 없이 평온하게 공존해 세계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평화와 상생을 큰 가치로 삼고 살아온 우리민족의 성정이 이같은 종교간 화합과 공생을 가능케 한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건축물들을 통해 이 땅의 종교를 들여다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엄청난 박해와 순교를 딛고 자생적인 교회를 틀었던 천주교를 비롯해 1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간화선(看話禪) 중심의 선(禪)불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장을 이루고 지속해가는 개신교, 독자적인 교리와 민중의 호응을 통해 뿌리를 굳게 내리고 있는 원불교 등 민족종교…. 이처럼 각 교단별 특성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사와 관련한 편린들이 담긴 건축물들은 모두 한국 종교의 과거와 현재를 웅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미래의 모습까지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신문이 4월부터 격주 월요일 연재하는 ‘김성호 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는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건물을 통해 한국 종교의 이면을 추적하는 시리즈입니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민족종교 등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눠 각 교단·종단별 상징적인 건물을 통해 한국 종교의 정치·사회·문화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합니다. 건축 차원에서 바라보는 종교의 영역은 또 하나의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 [독자의 소리] 학교급식 햅쌀로 공급해야/차형수

    인스턴트 식품의 범람으로 갈수록 우리의 주식(主食)인 쌀이 외면받고 있다. 생활양식이 서구화하면서 밀가루를 많이 먹다 보니 국민 1인당 쌀소비량이 해마다 3㎏씩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먹고 있는 쌀은 자포니카 계통의 찰기가 있는 쌀이다. 쌀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는 품종으로, 이 쌀을 많이 씹으면 저작근(筋)이 발달되고 저작근 발달은 추리-판단-기억-사고력을 높이는 전두엽을 발달시키는 원동력임이 연구 결과 입증되었다고 한다. 섬유질이 많은 자포니카종을 주로 먹어온 우리 한국인의 소장(小腸)은 서양 사람들보다 약 40㎝ 정도가 더 길다고 한다. 소장의 길이와 환경의 악조건에 인내하는 힘은 비례한다는 학설로 볼 때, 은근과 끈기에 관한 한 한국인을 따라올 민족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지구력과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이는 어쩌면 밥보다 햄버거나 피자 등을 많이 먹고 소장의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학교 급식만큼은 가장 우수한 우리나라의 햅쌀로 공급했으면 좋겠다. 급식비가 다소 비싸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끈기와 인내를 기르게 하자. 이는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된다. 관계당국의 시급한 검토 및 조속한 시행을 당부한다. 차형수<회사원·서울 송파구 신천동 미성아파트>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살랑거리는 바람에 온기가 실려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어나는 햇살이 마치 솜털구름처럼 포근하다. 흐르는 물은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포효하며 콸콸 흐른다.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묵은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은 뒷간인가, 엊그제 하얀 명주수건으로 곱게 닦아놓은 차솥에서인가, 아니면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서인가, 그렇다. 살아 있는 것들이 환희롭게 깨어나는 소리다. 바람과 햇볕과 물을 어미의 자궁으로 삼아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하는 것 역시 기쁨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존재로도 고귀한 것이고 축복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 우주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소중한 존재다.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굳었던 대지의 가슴에 불을 놓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바람처럼, 그 어느 곳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골고루 내리쬐는 햇살처럼 자신을 환희롭게 행복하게 바라봐야 한다. 차의 살림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찻그릇 속에서 우리는 온 우주를 담아내는 자신의 살림살이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살림살이를 살아온 분들이 바로 한 잔의 차에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의 큰 도를 담아온 선비들이다. 이른바 군자다도이다. 선비다도의 핵심은 바로 수신과 수양의 길이다. 이색의 시 한구절은 그같은 선비다도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깨어진 노구솥에 노아차를 달이네/귓바퀴가 갑자기 밝아지고/코로는 차향을 맡네/별안간 눈에 가린 편견이 없어지니/밖으로 보이는 데는 티끌이 없구나/혀로 맛본 후 목으로 내려가니/살과 뼈가 똑발라 비뚤어짐이 없도다/마음은 한 뙈기 좁은 밭/밝고 깨끗하니 생각에 그릇됨이 없네/어느 겨를에 천하 다스리는 일에 생각이 미치겠는가/군자는 마땅히 집안을 바르게 해야 하리.” 선비들의 차 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다. 차를 끓이기 위해 손수 물을 뜨고 귀한 노아차를 달여 먹으며 밝고 깨끗하고 그릇됨이 없는 삶을 생각하는 선비들의 차 문화는 수신과 제가, 치국의 근본을 담아내는 또하나의 문화적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개념은 지식인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알고 출발해야 한다. 유교문화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 속에 깃든 고리타분하고 현상유지적인 것이 아닌, 학식과 인품을 갖춘 지식인을 선비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비는 당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인 그룹이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선비문화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다. 백제·신라도 건국 초기에 선진적인 사상과 문화 중 하나였던 유교를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선비문화는 우리 문화의 삶과 철학을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였다. 선비들의 차문화가 절정을 이뤘던 때는 고려 300년간 쯤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선비문화의 발판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무신란이다. 무신란을 지켜본 선비들은 도성을 떠나 산과 물이 좋은 곳을 찾아 은거하며 차 생활을 즐기게 된다. 무신란은 고려시대 선비 차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화려한 차문화는 쇠퇴하게 되고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을 중심으로한 차문화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는 음다 풍속에서부터 시작됐다. 귀한 단차를 갈아 말차를 마시던 음다 풍속에서 만들기 쉬운 잎차를 즐기게 된다. 그에 따라 다구도 변화를 했다. 유차를 담는 고급 찻그릇인 ‘다구’보다 맑은 탕차도 겸해서 담을 수 있는 ‘다완’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배그룹으로부터의 소외는 물적 토대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졌고 당시 수입해 공유했던 값비싼 단차를 맛볼 수 없었다.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은 우리나라에서 손쉽게 제조하고 구할 수 있는 아차(芽茶) 즉, 잎차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잎차의 선호는 그에 따라 다구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시대 차인들은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다석(茶席)’‘다연(茶筵)’‘명석(茗席)’‘명연(茗筵)’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찻자리는 초대장을 미리 받아야 했으며 손님의 자격에 따라 앉는 자리도 달라졌다. 당시 찻자리의 손님 자격으로는 ‘청덕과 영명, 즉 명예를 갖춘 사람’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유교적 규범에 따라 다례에도 철저하게 규범과 절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찻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바로 ‘다담(茶談)’이었다.‘다담’이란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로 당시 사상적·철학적·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지식 기량과 수양 깊이를 나눠보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찻자리는 자격과 규범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선비다도를 대표한 차인은 이색이다. 성균관 대사성·대제학 등을 지낸 이색은 차를 전문적으로 구해오는 ‘가동(家童)’과, 전다하는 전문 노비가 있었을 정도로 차의 명인이었다. 차의 불꽃을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는 법을 공부하며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색은 ‘다종(茶鐘)’‘화자’(꽃무늬 오지찻잔),‘노아’‘영아’‘다탑’(차마시는 평상)등 차 용어도 만들어 전파시켰다. 이색은 육우의 ‘다경´ 속 시들을 섭렵하며 차 문화 공부도 했다. 이색의 차생활은 당시 고려시대 선비차인들의 보편적인 차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차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했으며 그에 따른 지식적 기반도 축적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선비들의 차생활은 훗날 조선시대를 건국하는 이념적·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선비들은 차의 청덕(淸德) 정신을 매우 애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 나무를 사람을 맑게 하는 청인수(淸人樹)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헌공하는 차를 청공이라 부를 정도로 차의 청덕을 중요시했다. 차의 청덕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지향했던 선비들의 삶의 문화와 잘 부합되었다. 서거정은 그같은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다인이다. 대사헌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후 6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며 45년간 공직에 머문 서거정은 지붕에 구멍이 난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선비 다인 중 차끓이는 일과 차 맛내기에 달인으로 불리는 서거정은 70편이 넘는 다시를 남길 정도로 깊은 차생활을 영위했다. 청빈한 공직자의 초상으로 불리는 청백한 삶을 산 서거정은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한가롭게 게 눈차를 끓인다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없는 구멍뚫린 초가집에 살며 다리 부러진 쇠솥과 금 간 찻잔을 쓰며 청빈한 삶을 산 서거정 모습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차생활이 어디에 있음을 일깨운다. 참으로 멋스럽고 멋스러운 삶속에 자신의 삶을 최고로 극대화시킨 차인 서거정의 삶은 아련한 아픔과 경탄스러움을 던져준다. 선비 다인들의 검박한 차살림살이는 ‘다실’에서 볼 수 있다.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지어 그것을 ‘소실’‘소재’‘소려’‘소루’라 부르기도 했으며 기와가 아닌 억새나 짚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초당’‘모옥’‘모암’‘초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허균의 ‘누실명’은 이같은 선비들의 차살림살이를 잘 말해준다. 작은 다실에서 청빈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여긴 허균은 “사방은 아홉자 크기의 단칸방으로서, 책을 갖춰두고 차 마시고 향 피우며 지내는데, 남들은 누추하다고 하나 심신은 편안하다. 누추하다고 함은 몸과 이름이 썩어버림을 말하니 군자를 지향하는 내가 사는 방은 누추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 허균처럼 대부분의 선비다인들은 차에 그 어떤 부와 명리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비차 문화의 핵심은 바로 청빈의 덕을 통해 개인과 가족, 국가의 경영을 영위하는 지혜를 쌓는 데 있었다. 자연과 벗삼으며 버림을 통해 세상을 얻는 미학을 터득한 선비들의 차 생활은 진정한 차의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잘 일깨우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자하 신위는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밥 먹는 것은 아무리 즐거워도 색·향·미가 뛰어난 차보다 못하다. 좋은 차는 좋은 사람과 같아 자신에게 웃음을 준다.”고 적고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끼니는 굶주림을 겨우 면할 뿐인데. 차를 병처럼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다.” 차는 좋은 삶의 양식과 같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부끄럽게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한 혜안을 준다. 차가 우리삶에 있어서 우주처럼 넓고 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지암 암주 ■ 조선시대 법정의 다례의식 우리 차문화사에 있어서 차례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지닌 채 발전해왔다. 죄와 법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왕과 신하들이, 또한 사헌부에서 사형 등 중형을 지닌 죄인들의 죄를 판결하거나 사면할 때 차를 통해 엄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고려시대에 왕과 신하들은 죄인을 사형시키느냐 아니면 섬에 유배를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 함께 다례의식을 행했다. 그당시 실제로 행했던 다례의를 살펴보자. 다례가 시작되기 전 왕이 내전의 남쪽 행랑에 앉고 신하들이 재배한 후 제자리를 잡는다. 다례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차를 담당하는 다방참상원이 각종 다구들과 차를 보관하는 별채에서 차를 들고 들어온다. 칠품원의 관직을 가진 내시가 뚜껑을 연다. 집례가 전의 앞기둥 밖으로 올라와서 왕과 마주보고 절 한후 차를 권하고 놓은 뒷전 아래로 내려온다. 다음은 문무고관대작들에게 차를 올린다. 원방의 8품 이하 벼슬아치가 다례를 담당한다. 집례가 다시 전에 올라가 엎드려 차를 내어갈 것을 청한다. 붉은 붓과 먹을 든 주대원(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관원)이 들어와 “단필로 참형을 결정하시되 유인도에 들어갈 자를 제외하소서.”라고 아뢴다. 형이 결정된 후 왕과 문무 고관대작들에게 차를 권하고 신하들은 다시 재배를 한다. 다례가 끝난후 신하들은 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한다는 분부를 전달받고 차례로 나간다. 다례의에서 형을 결정하기 전 왕과 신하들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탁한 말차를 마셨으며, 중형 결정 후에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탕차(湯茶)를 마셨다. 고려시대에는 또 죄를 사면해주는 ‘사면다례’도 행해졌다. 고려 때 왕은 중요한 죄인을 사면할 때 죄를 사면하는 공식 의례를 행했다. 이때 의례에 동참하는 행렬에 행로와 휴대용 화로를 든 군인인 다담군사 4명이 함께한 것을 볼 때 중요한 사면의식 때도 차례는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사헌부의 다시(茶時)도 차를 단순한 행다를 넘어선 문화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은 ‘사헌부 제좌청중신기´에 “부의 청에서는 두 가지 일을 하였다. 그 하나는 다시이며 또 하나는 제좌이다. 다시란 다례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대관은 다만 임금에게 간언하는 책임만 맡았고, 관청의 일반적인 일은 다스리지 않아서 하루에 한번 모여 차 마시는 자리를 베풀고 헤어졌다.”고 적고있다. 사헌부 감찰을 엮임했던 정극인도 “대관들이 다 모이지 않아서 임금을 뵐 때가 되지 않았으면 잠시 물러나 있기를 청하여 아뢰고 차를 점다하여 시장기를 메웠다. 그러므로 감찰은 다시라는 두 글자를 들고 들어가서 임금께 아뢰었다.”고 말한 것을 볼때 차를 마시는 일이 지금처럼 단순한 휴식이 아닌, 하나의 업무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에서는 각 관청에서 사헌부의 검사를 청할 때 전날 다시에 통보하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에서도 간단한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흠흠심서´에서 “감찰이 다시라는 패를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가면 비록 대관을 만나더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적고있다. 이는 다시가 간단한 업무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다시는 모든 관아에서 철저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다시의 본뜻이 상실되어갈 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민족은 매우 신중한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죄의 결정을 신중하게 하기 위해 차를 마시며 지나온 판결을 되짚는 것은 올바름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되짚는 신중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차는 올바름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엄정하고 평등한 정신을 내재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차를 단순한 음료의 도구를 벗어나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성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켜낸 위대한 족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차는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운용하는 삶의 뿌리로서 각인되고 있다.
  • [이현세 만화경] 표범, 그 위대한 인내심과 품격

    [이현세 만화경] 표범, 그 위대한 인내심과 품격

    어느새 친구의 아들들이 군에 가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 술자리에 모이면 군대 얘기가 안주가 된다. 군에 보내서 기어코 고생을 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어제의 육군 병장들이 막상 때가 되니 걱정되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걱정도 되고 궁금도 해서 얼마 전에 만화학과 제자들과 함께 전방 GOP 경계체험을 갔다. 한마디로 군대는 좋아졌다. 내무반은 일인침대와 휴게실로 꾸며져 쾌적했고, 목욕탕과 도서관도 만족스러웠으며 구타는 없어졌다. 이 세상 어떤 조직보다 사고율만 따져도 아들을 맡기기에는 가장 안전한 곳이 군대였다. 하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군대는 여전히 힘들고 괴로운 곳이다. 몇 년 전에 군대를 소재로 한 만화 ‘까치병장’을 제작한 적이 있었다. 군대얘기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영화·연극·드라마·문학 작품들이 그렇듯이 내가 그린 ‘까치병장’ 역시 낯선 조직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야기되는 갈등관계가 주요 소재였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 교훈을 담아냈다. 그런데 이번 GOP 경계체험에서 경계근무도 같이 서고, 대화시간도 가지면서 두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 하나는 여태껏 ‘문화상품의 소재로 주목받을 수 없었던 극적인 생활양식의 발견’이다. 영하 20도의 야밤, 전방의 철책선은 웅웅대며 울고 있었고, 가로등의 희뿌연 불빛 사이로 함박눈은 쏟아졌다. 이곳에서 GOP 근무 장병들은 해지기 전에 경계근무에 투입되어 날이 밝을 때까지 겨우 서너시간 쪽잠을 자가며 매일 똑같은 일상을 일년이나 반복한다. 이 장병들의 생활이야말로 젊은 시절 가장 혹독하고도 가장 극적인 삶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은 대개 충성과 명예, 용기 등이 차지했지만 이것은 어쩌면 극적인 소재만을 좇는 대중문화가 만들어 낸 순위 조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군인의 자질을 가진 병사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다수의 작가들은 서슴없이 ‘네팔의 구르카 용병’을 꼽는다. 강철처럼 단련된 신체, 올빼미에 견줄 만한 시력, 거기에다 물불 가리지 않는 용맹성까지. 그러나 대다수 작품들이 놓치고 있는 구르카 용병들의 가장 우수한 자질은 ‘인내심’이다. 한번 매복을 명 받으면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몇날 며칠이고 움직이지 않고 적의 움직임을 찾아 전방을 주시한다. 이 인내심이야말로 구르카 용병을 최고라고 칭하게 하는 최고 요인이지만 이 덕목은 극적 요소로 전환이 어려워 작품화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군인의 최고 덕목은 인내심이고,GOP의 장병들은 극한의 인내심을 요구 받는다. 반대로 사회에서 소위 조직폭력에 몸 담았던 자원이 대체로 군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었다. 그 이유는 체력이나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루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인내력 부족’이었다. 또 한가지 발견은 군에 오기 전에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인하여 문화 예술을 접하기 어려웠던 병사들이 군에 와서도 문화적 인프라 부족 탓에 역시 문화예술과는 담 쌓고 사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젊은 장정들에게 주고 싶은 소프트웨어는 너무나 많지만 도서관이나 공연장, 전시장 같은 하드웨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이 병영이었다. 장병들은 우리 모두의 젊은 아들들이며 ‘군복 입은 시민’이다. 우리사회의 미래는 청년들의 몫이고,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인한 왜곡된 가치관과 문화적 미성숙이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병영에서 모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젊은 피와 탄력있는 육체를 가진 장병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으면 아름다운 표범이 보인다. 표범이라면 흔히 아름다운 점박이 무늬와 잘 빠진 몸매, 그리고 앙칼진 성격과 날카로운 발톱을 생각하고 가끔은 제 덩치보다 더 큰 사슴을 나무 위까지 물고 올라가는 힘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표범을 생각하면 먼저 단 한번의 사냥에 모든 것을 걸고 몇날 며칠을 위장하고 풀숲에 숨어서 먹이를 노리는 표범의 노란 눈이 생각난다. 내게는 바람도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침묵의 인내심이 표범이다. 그리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 그 우아한 품격이 표범이다. 한때 한국의 모든 야산을 주름잡고 포효하던 표범은 지금은 철책선 남방 아래에는 한 마리도 없다. 옛날 표범과 함께 살았던 우리 조상 중 누구 하나가 표범의 종말을 알았을까. 앞으로 군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할 기회가 있다면 군의 덕목 중에는 인내심이 최고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범국민운동’으로 병사들이 좀더 많은 문화·예술 환경을 접할 수 있도록 시설을 확충해야겠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분명 GOP의 장병들은 ‘극한의 인내심’속에 생활하고 있고 병영체험을 하러간 학생들은 그 인내심을 경이와 존경의 눈으로 봤다. 장병들은 단절된 바깥세상의 문화예술을 그리워했고, 나와 함께 간 학생들은 집중력과 인내심을 배우고 왔다.
  • [시론] 중산층 몰락론에 대한 시각/양춘 고려대 사회학 명예교수

    [시론] 중산층 몰락론에 대한 시각/양춘 고려대 사회학 명예교수

    최근 중산층의 규모와 몰락에 대해 언론이나 학자들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사회의 중산층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 산업화 및 경제성장과정에서 점진적이면서도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우리사회의 중산층 또는 적어도 중간계층은 중요한 사회세력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겪으면서 한국사회의 계층구조가 빈부격차의 양극화(兩極化)가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 후 IMF체제에서 곧 벗어나 새로운 경제성장의 도약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되었으나 최근에는 경제상황의 악화로 인하여 다시 한번 중산층의 수적감소 및 몰락의 징후를 우리 주위에서 체험하고 있다. 중산층 또는 중간계층의 양적 감소에 대하여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짐으로 인해 사회체제 전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경계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사회의 중산층은 계층구조에서 단순히 중간계층이라는 사실보다는 사회안정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중산층의 구성비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구성비는 우리가 선험적으로 정하기는 어렵지만 사회성원의 상대적인 다수가 얼마나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인식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중산층의 규모를 논하기에 앞서 중산층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중산층을 소득계층범주에 따라 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득 이외에 직업 및 교육수준과 같은 객관적인 지표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가령 직업의 측면에서 본다면 소상인, 자영업 등과 같은 구중산층과 사무직, 관리직, 판매직 등 화이트칼라 봉급생활자가 주류를 이루는 신중산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득수준에서는 노동자계급과 중산층간에 차이가 별로 없을 수 있지만 직업 측면에서 서로 구분될 수가 있고 교육수준에서도 노동자계급과 중산층은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중산층을 규정할 때 중산층의 주관적 의식 또는 지표를 또한 고려할 수가 있다. 예컨대 계층구조에서 사람들의 주관적 중산층 귀속의식은 객관적 지표상의 중산층 귀속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가치관의 측면에서 중산층은 다른 계층과 구분된다. 예컨대 소기업 및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가치인 독립성은 그들에게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심어주며 봉급생활자와 같은 신중산층에서는 개인의 승진 및 상향이동의 직업경력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산층의 이러한 의식과 가치관이 그들의 사고와 태도 그리고 심지어 생활양식 및 소비유형에 반영되기 쉬운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국민소득, 수출규모, 국가경쟁력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선진국에의 진입을 앞둔 중진국으로서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기침체, 성장력둔화, 실업의 증대, 소비위축 등 전반적인 경제상황이 악화됨으로써 빈부격차 및 중산층의 수적 감소로 이어지는 현상이 중대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래서 빈부격차의 확대 및 양극화현상은 매우 염려스러운 사태로서 중산층의 입지가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물론 중산층에 속하는 소득계층이 점차 감소되어 가는 현실이지만 중산층을 단순히 소득계층의 한 범주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상황을 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즉 국가정책기조의 변화를 통해 경제가 다시 활성화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면 한국의 중산층은 다시 과거와 같은 중산층의 위치로 언제든지 환원될 수 있다고 믿으며 현재의 중산층 위축 또는 감소현상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양춘 고려대 사회학 명예교수
  • 한·미·일 히트상품 트렌드 재미 + 디지털생활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과 미국, 일본 등 3국의 지난해 히트상품의 공통점으로 ‘재미(fun)’와 ‘디지털 생활’을 좇는 소비 트렌드를 꼽았다. 이민훈 연구원은 3일 ‘세리 CEO’사이트에 게재한 ‘집중비교! 2005 한·미·일 히트상품’ 보고서에서 “지난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모은 청계천, 이종격투기 K-1, 카트라이더(온라인 경주게임)나 미국의 히트상품인 아이토이 휘트니스(게임형 다이어트 프로그램), 랜드롤러사의 개량형 인라인스케이트 등은 모두 여가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려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일본에서 지난해 3월부터 9월까지 무려 2205만명의 입장객을 불러모으며 12조원의 경제효과를 창출한 아이치 엑스포나, 연령층을 초월해 선풍적 인기를 끈 닌텐도의 휴대용게임기 ‘DS’ 등도 다양한 체험 기회와 재미가 성공의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 디지털 생활양식의 확산도 3국 소비의 중요한 키워드로 꼽혔다. 지난해 한국에선 DMB(이동멀티미디어방송)폰, 내비게이션, 블로그 등이 유행했고, 미국에선 컴퓨터에 연결하지 않고 쉽게 사진을 출력하고 메일로 전송할 수 있는 코닥의 ‘이지쉐어 카메라’가 주목받았다. 일본에선 애플의 ‘아이팟 나노’가 크게 유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 연구원은 3국의 상이한 경기 상황에 따라 소비 경향에선 다소 차이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지구촌 문화체험 소개 ‘큐리어스’ 시리즈 완간

    세계 각국의 독특한 문화와 사람,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는 ‘큐리어스’(휘슬러 펴냄) 시리즈 1차분 50권이 완간됐다. 이 시리즈는 1990년대부터 중국·일본 등 10여개국에서 번역·출판되어 온 ‘컬처 쇼크(Culture Shock)’ 시리즈를 번역, 보완한 것. 원서가 놓친 부분이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을 보충했으며,‘페루’와 ‘몽골’ 편은 한국인 저자가 직접 써서 완성했다. 큐리어스 시리즈는 유명한 유적지나 자연경관, 식당과 호텔을 소개하는 여행가이드에 머물지 않고 현지인들의 생활양식과 대화법, 언어와 문화, 사업, 에티켓 등 작은 일상의 모습까지 세밀하게 소개하는 ‘지구촌 문화체험 가이드’를 표방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 ‘올댓월드’(www.allthatworld)를 개설, 책에 담긴 나라들에 대한 각종 정보와 사진들을 무료로 서비스한다. 각권 1만 2000∼1만 5000원.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9일 개봉 ‘크리스마스 건너뛰기’

    9일 개봉 ‘크리스마스 건너뛰기’

    물이나 공기가 돼버린 제도관습을 새삼 고찰해보는 방법에도 참 여러가지가 있다. 서구인들의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에 대한 고정관념에 할리우드 스타일로 딴죽을 건 영화가 ‘크리스마스 건너뛰기’(Christmas with the Kranks·9일 개봉)쯤 되겠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온가족이 함께 보면 좋을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믹드라마.‘타임 투 킬’‘펠리칸 브리프’‘의뢰인’ 등 법정 스릴러물의 대가 존 그리샴이 드물게 펴낸 순소설이 원작이다.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외동딸이 페루로 떠나버리자 루더(팀 알렌)와 노라(제이미 리 커티스) 부부는 매사에 심드렁하다. 딸이 보고 싶어 시무룩한 아내를 위해 루더가 낸 아이디어가 크리스마스에 크루즈 여행을 떠나자는 것. 크리스마스를 건너뛰자는 제안에 처음엔 펄쩍 뛰던 노라도 조금씩 마음이 바뀌고, 부부는 이내 이웃들 몰래 여행을 떠날 준비에 들어간다. 크리스마스를 건너뛰겠다는 계획을 이웃들에게 쉬쉬하며 진행하는 부부의 해프닝 자체가 우리에겐 완전한 공감을 얻어내긴 어렵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양식을 인정하고 작품을 감상키로 접어준다면, 별 맺힌 데 없이 무난한 드라마이다. 화면을 온화하게 다듬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고조된 풍경들, 더러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유쾌한 중년부부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은 소재적 참신함을 십분 살려냈다. 페루에서 새로 사귄 남자친구를 데리고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오겠다는 딸의 기별을 갑자기 들은 부부는, 크리스마스를 원래대로 치르기 위해 또 다시 온갖 호들갑을 떠는데…. ‘허허실실’ 전략이 꽤 빛나는 드라마라고 할까. 성탄 무드를 담뿍 실은 화면은 체온만큼 따뜻한데, 그 이면의 (‘형식’에 ‘내용’이 눌려버린 크리스마스)제도에 대한 풍자정신은 신랄하다.12세 이상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데스크시각] 이제는 ‘민박(民博)’이다/김종면 주말매거진WE팀 차장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관람객이 몰리면서 요즘 ‘박물관 신드롬’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역사와 문화에 목말라왔던가.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지만 세계 여섯번째 규모의 박물관을 갖게 됐으니 문화민족의 자긍심도 가질 만하다. 그 위상에 걸맞은 내실을 어떻게 다져나가느냐 하는 과제는 남아 있지만 우리 박물관 문화는 분명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박물관은 더이상 우리의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호기심의 상자’가 아니다.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일반 대중 누구나 쉬면서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느끼며 배울 수 있는 친숙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용산 중앙박물관의 개관은 그 같은 박물관의 진정한 효용가치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이즈음 기자의 머리에는 하나의 단어가 맴돈다. 물실호기(勿失好機). 이처럼 고양된 국민의 문화적 관심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한국 박물관 르네상스의 전기로 삼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용산 중앙박물관에 대한 환상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열악한 박물관 현실에 다시 눈을 돌려야 한다. 먼저 주목해야 할 곳은 단연 국립민속박물관(일명 민박)이다. 민속이란 한 민족의 얼과 혼이 깃든 생활양식이요 기층문화다. 이 살아있는 문화를 담아 놓은 곳이 바로 민속박물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그동안 한 해에 30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등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박물관으로 자리잡아 왔다. 특히 외국인 관람객이 절반 이상을 차지해 ‘소프트 관광’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최근 박물관 로비 천장을 우리 고유의 녹색 단청으로 꾸미고 뮤지엄숍 등 편의시설을 새롭게 단장하는 등 1993년 이전·개관 이래 처음으로 본격적인 건물 리모델링에 나섰다. 상설전시장 구조도 바꿔 보다 입체적인 공간연출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전국 57개 생활사박물관과 함께 하는 ‘민속생활사박물관 협력망’ 구축이나 ‘찾아가는 민속박물관’ 프로그램 등 적지 않은 문화교육사업 성과도 올렸다. 그러나 민족문화센터로서의 국립민속박물관의 위상은 여전히 초라하다.2급 관장 아래 곧바로 4급 과장체제로 이어지는 기형적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학예연구실도 사무국도 없다. 그러니 전통 민속문화에 대한 발굴이나 조사, 수집 등 고유 업무뿐 아니라 유기적인 통합·조정 역할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을 물론 같은 줄에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중앙박물관이 고고·미술 중심이라면 민속박물관은 생활사 중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상하의 개념이나 우열의 관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또 알리기 위한 양대 축으로 병행 발전해야 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민속’이란 고부가가치를 낳는 유망 산업으로 대접받는다. 옛 유물이나 유적 관람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먼저 흥미를 갖는 것은 도대체 한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사야말로 21세기 역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요 역사교육의 화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관람객 수에서 늘 국립중앙박물관을 앞서왔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국립민속박물관은 상대적으로 무관심의 영역에 머물러 왔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명실상부한 생활사 대표 박물관으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재의 관장직급은 1급으로 올려야 하고, 조직 운영 또한 적어도 1실(학예연구실) 1국(사무국) 체제를 갖춰 연구와 관리 기능을 이원화해야 한다. 아울러 2025년 마무리되는 경복궁 복원사업에 따라 국립민속박물관 이전·건립에 대한 공론화작업도 보다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올해 문화관광부 주요 업무계획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용산 이전 문제가 포함돼 있다. 새로운 국립민속박물관의 건립과 관련, 규모가 작더라도 4대문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민속박물관의 특성에 맞게 충분한 야외전시공간이 확보돼야 한다는 점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금부터 공청회라도 열어 중·장기 발전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 ‘민박(民博)’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김종면 주말매거진WE팀 차장 jmkim@seoul.co.kr
  • [발언대] 향토문화·역사연구 지원 절실하다/신상구 충남 천안북중 교사·향토사학자

    지난 1995년부터 지방자치제도가 다시 부활됐다. 그러나 자치단체들은 경제적인 면에 행정의 무게를 두고 있다. 자칫 향토 문화와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지방자치제도는 마치 사상누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향토문화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양식으로 향토의 가치척도가 되고 지방화의 기반이 되고 있어 연구가 필요하다. 중앙 중심의 일반 사료만 가지고는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잘 알아볼 수가 없다. 한민족은 신라가 서기 676년 삼국통일을 한 이후 1300년 동안 중앙집권의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우리 문화와 역사 연구는 중앙과 권력자 중심의 일반 문화와 역사 연구에 치우쳐왔다. 그 결과 우리 나라는 향토 문화와 역사가 올바로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민족문화가 형성되고 국사가 편찬돼 국가와 민족의 균형발전 차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향토문화를 증언해줄 만한 분들도 한분 두분 타계하고 있다. 아쉽게도 향토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향토사학자들에 대한 지원이 유명무실해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향토사 연구의 맥이 서서히 끊어지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다음과 같은 지원 대책을 촉구하고자 한다. 향토 문화와 역사 연구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현직 교사나 공무원이 향토사 관련 우수논문을 발표할 경우 승진 가산점을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 향토사 연구를 초과근무로 인정해주고, 연구공간도 마련해줘야 한다. 연구 관련 전문 도서 구입비도 지원해줘야 한다. 쥐꼬리만한 원고료와 조사연구비를 현실화해 향토 사학자들의 연구 분위기도 조성해줘야 한다. 향토 문화와 역사 연구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역사, 지리, 언어, 민속을 전공한 지역 대학의 교수는 물론 연구소의 연구원과 박물관의 학예연구사들도 전국 문화원에 딸린 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참여하도록 해봄직하다. 신상구 충남 천안북중 교사·향토사학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태평양그룹 창업주 고 서성환(1924∼2003) 회장은 화장품업계의 신화가 됐다.‘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인 서 창업주는 어려서부터 개성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기업경영에서 개성상인의 맥이 면면히 흘렀다. 서 창업주는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평양이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재단이 3개이며 후원 단체는 셀 수없이 많다. 신용과 근검절약을 가장 큰 밑천으로 삼는 개성상인의 기질,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는 2세 경영으로 넘어온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업 태평양은 1945년 9월5일 창립됐지만 연원은 좀 더 거슬러올라간다. 태평양의 역사를 알려면 서성환 회장의 가족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서 회장은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 창업주 가족은 소학교 시절인 1930년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개성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인 동현동에 정착했다.‘상인의 도시’ 개성 생활은 소년 서성환에게 이후 기업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 정착한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 윤 여사가 책임졌다. 전 재산을 털어 조그마한 상점을 열고 잡화를 취급하다가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윤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이웃으로부터 ‘여중군자’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사교적이었다.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개성지방은 소득수준이 높아 우수한 품질의 동백기름이 잘 팔린다는 것을 간파한 윤 여사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 기름을 썼지만 상류층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애용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머릿기름을 자르르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태평양 모체는 어머니의 ‘창성상점’ 동백기름에서 자신을 얻은 윤 여사는 차츰 사업영역을 확대했다.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도했다. 또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소년 서성환도 물건을 도매상에 배달해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며 가업에 참여했다. 당시 제조방식은 물론 가내 수공업이었다. 솥을 걸어놓고 그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직접 젓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품질은 우수하다는 평을 얻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을 얻은 윤 여사는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상품에 ‘창성당제품’‘오리지날’ 등을 표기했다. 가업에 참여한 소년 서성환의 경영 수업은 계속됐다. 보통학교시절부터 소년 서성환은 하루 끼니인 도시락 세개를 자전거에 싣고 해뜨기 전에 개성을 출발,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곤 했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 화장품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거래 도매상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직접 팔기도 했다. 자전거로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 유통에도 눈을 떴다.10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글리세린과 향료, 빈 병을 사는 일을 도맡았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백화점에도 들어갔다. 백화점에 작은 코너를 개설, 자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인기가 높던 다른 회사의 제품도 위탁 판매했다. 제조와 판매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도 함께 판다는 서성환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화장품 제조법도 어머니 윤 여사로부터 직접 배웠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열을 가하는 강약 정도,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의 비율 등에 따라 화장품의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화장품 유통에 이어 제조까지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스물한살이던 1944년 강제징용되면서 그의 화장품 수업은 중단됐다. ●‘블루오션’ 태평양으로 광복을 맞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청년 서성환은 화장품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와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도전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광복정국의 혼란속에서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났다. 서울로 이주, 회현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청년 서성환은 당시 누님 한분이 내려오지 못한 이산가족의 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이 즈음 부인 변금주(77)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모조품과 위조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50년대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 값에 팔 수 있다.”며 시종일관 품질을 강조했다.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은 태평양 1호 제품의 영예를 안았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6·25가 터졌다. 그는 피란길에도 화장품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의 집념을 보여줬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1951년 순식물성의 ABC포마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화장품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서성환 회장이 직접 작명한 ABC포마드는 60년대까지 대히트 브랜드로서 태평양의 성장 기틀이 됐다. 청년 서성환은 환도 이후 1954년 후암동시대를 열면서 기술력에 대한 갈증에서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1953년 처음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을 통해 화장문화가 태동한 것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향기나는 밥, 그리고 최초의 연속… 서성환은 후암동 시절 잘 팔리던 화장품을 구해 직원들과 함께 실험을 거듭했다. 생산직 여종업원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가내 수공업에 실험기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지사. 향료가 밴 솥과 물바가지를 이용해서 밥을 하면 향내 나는 밥이 되고, 크림을 만들었던 도구를 쓰면 구리무 향밥이 됐다고 한다. 56년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 성장가도에 들어섰다. 서성환은 57년부터 해마다 기술자들을 독일과 일본에 유학시켰고,58년엔 동양 최초로 고성능 미분기를 도입했다.59년 주식회사 체제로 출범했고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장업사의 새 장을 열었다.60년 장업계 최초의 해외방문,64년 오스카 브랜드로 최초의 화장품 수출, 당시 획기적인 방문판매제와 아모레화장품 개발 등에 힘입어 급신장했다.68년 매출이 14억 2800만원으로 창업 이후 처음 10억원대를 돌파했다. 당시 태평양의 품질은 어느 정도였을까?지난 71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화장품 콘테스트에서 3개의 금상을 수상했다. 화장품 제조 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74년 장업계 최초의 소비자과를 신설, 정부의 소비자 기본법안보다 3년 빨리 소비자 중심을 지향했다. 순항하던 태평양은 90년대 들어 무한경쟁시대를 맞았다. 서 창업주는 창업 50년을 맞은 95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을 다짐했다. ●태평양에 순항중인 2세 경영 서 창업주는 개성상인 특유 기질을 두 아들에게 물려줬다. 서 창업주는 지난 82년 장남 영배(49)씨를,87년 차남 경배(42)씨를 입사시키면서 2세들에게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영배씨는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 지사를 거쳐 태평양증권 부사장 태평양종합산업의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태평양개발 회장으로 기업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영배씨는 태평양개발을 연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 건설업체로 키웠다. 차남인 경배씨는 재경본부를 시작으로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태평양증권·태평양패션·프로야구단 돌핀스·여자농구단 등 계열사를 정리했다.97년 3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태평양에 2세 경영의 배를 띄웠다. 지난해 매출은 1조 1053억원. 후계작업이 부드럽게 진행되던 2003년 1월 장원 서성환 회장은 영면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 태평양은 해마다 50억원 가량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여성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여성에게 되돌려준다.’는 취지에서 주로 여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이윤의 사회환원은 기업윤리 이전에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소신이라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는 “창업주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돈을 버는 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다.‘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후덕함도 있었다. 그러나 창업주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는 개성상인의 ‘짠돌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서 창업주는 지난 63년 중앙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성환 장학금’을 만들었다. 중앙대 최초의 외부장학금이다. 당시의 기업가치고는 사회적 책무를 빨리 깨달은 편이었다. 첫 수혜자는 리대룡(64)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후 75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학업 성적이 좋은 여고생 9700여명에게 17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난 9월부터 태평양학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학술연구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성들에게 유방은 모성의 상징이자 여성답게 해주는 상징적인 기관이다. 여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은 2000년 9월 한국유방건강재단을 만들었다. 태평양이 전액 출자한 재단은 국내 최초의 유방암 전문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지금까지 1만 2000여명의 여성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거나 무료로 검진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 환원은 태평양이 출연한 재단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003년 6월 서 창업주가 타계한 다음 태평양 주식 7만 4000주와 이익배당금 전액 등 5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전달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아들 서경배 사장으로 이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의 고향이 북한인 것을 감안, 북한 어린이와 여성을 돕기 위해 유니세프에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억원을 기부했다. ■ 오늘의 태평양 일군 3인방 오늘날의 태평양을 일군 데는 창업주 서성환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3인방이 있다. 태평양의 사사에 남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인식시키고, 국민 생활양식을 한층 높인 신화 창조의 주역이다. 오원식(69)전 부사장은 40년이 넘게 입에 오르내리는 브랜드 ‘아모레’를 1961년 작명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가곡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상금으로 당시 거금인 1만원(당시 월급 7000원)을 받았다. 오 전 부사장은 1967년부터 한방미용법을 연구, 지난 73년 인삼 사포닌을 이용한 화장품 아모레 진생삼미를 탄생시켰다. 진생삼미는 브랜드 진화를 거듭하다가 가장 한국적인 명품 ‘설화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설화수는 단일 브랜드로 매출이 2000년 1000억원을 달성했으며,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3000억원을 돌파했다. 화장품 사상 유래가 없는 기염을 토했던 브랜드다.82년 대한화장품학회 회장을 지낸 오 부사장은 87년 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기술개발에 힘썼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연구부문을 총괄하면서 태평양 40년 연구와 생산 분야의 산증인으로서 화장품 기술의 과학화에 큰 획을 그었다. 그 어렵던 50년대의 태평양 생존 기틀을 닦은 데는 구용섭(81)초대 연구실장의 공을 빠뜨릴 수가 없다. 좋은 원료 확보를 위해 암거래 시장에서 발품을 팔았다. 서울 환도이후 후암동의 가내 수공업 시절의 ‘향기나는 밥’과 ‘구리무밥’을 먹으면서도 제품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이같은 노력 덕분에 태평양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화장품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발판을 마련했다.68년 한국화장품 화학자회 창립회장에 취임,80년까지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화장품 발전에도 공이 크다. 머리를 감을 때 비누에서 샴푸로 바꾸게 한 사람이 김창규(66) 고문이다. 프랑스 파리 이과대학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중 태평양에 스카우트됐다. 그가 73년 개발한 브랜드 ‘타미나’는 7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이 됐다.78년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화장품학회 국제회의에서 인삼사포닌이 모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 고문은 80년대 태평양의 생활용품 사업을 일궜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리도 푸로틴 샴푸는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비누로 머리를 감던 국민들의 생활양식을 샴푸로 머리를 감게 바꿨다.88년 가정용품을 연구하는 기술연구소장과 92년 태평양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91년부터 대한화장품학회장을 연임하면서 화장품학계 발전을 위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chuli@seoul.co.kr ●정·관·재계로 연결된 화려한 혼맥 창업주 서성환 회장은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4녀, 송숙(58), 혜숙(55), 은숙(52), 영배(49), 미숙(47), 경배(42)를 두고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정·관계를 비롯해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인연이 이어진다. 방우영(77)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비롯해 신춘호(73) 농심그룹 회장, 최두고(84) 전 국회의원 등의 기업인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을유문화사 정진숙(93) 회장, 최주호(작고) 전 우성그룹 회장, 박세정(88)대선제분 회장과는 혼맥을 쌓았다가 끊어졌다. 서 창업주는 또 사돈가의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통해 정재문(69) 대양산업 회장(전 의원), 신춘호 농심 회장을 통해 서봉균(79) 전 재무장관과는 ‘사돈의 사돈’으로 간접 혼맥을 이루고 있다. 김치열(84) 에이오에스 회장(전 법무·내무장관)과는 신춘호 농심 회장을 거쳐 박남규(85)조양상선 회장을 통해 연결된다. 서 창업주는 이같은 순환 혼맥을 통해 김일환(작고) 전 내무장관, 정운갑(작고) 전 농림부 장관, 김영생(작고) 전 의원, 김도창(작고) 전 법제처장 등 정·관계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는 자녀 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유명세’와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관계의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 측근의 설명이다. 관계(官界)의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뒤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고 전한다.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56)씨와 지난 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 출신으로 상공·내무·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회장으로 활동하다 물러났다.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했다가 서울 인사동에서 목인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공부하고 있는 근종(29)씨와 LG전자에 다니는 우종(27)씨를 두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용(53)씨와 지난 77년 결혼했다. 상용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부부에겐 ㈜태평양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환석(27)씨와 미국에서 학업중인 양희(23)씨 등 1남1녀가 있다.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 부사장을 거쳐 태평양개발 회장을 맡고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45)씨와 지난 83년에 결혼했다.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인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서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혜성씨는 태평양학원(성덕여중·성덕여상)의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영배씨 부부는 2남1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학생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지난 90년 11월, 농심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인 윤경(37)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평소 자주 만나 인사를 나누던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87년 태평양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첫발을 내디뎠다.90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을 지내는 등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배씨는 학생인 두딸 민정(14), 호정(10)을 두고 있다. chuli@seoul.co.kr ■ 故서성환 회장의 차사랑 “기다리는 시간의 맛도 있고, 잔의 맛도 있고, 차 맛도 있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을 모신 회의에서 손수 차를 우려드렸던 서경배 사장의 회고담이다. 요즘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전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초스피드 시대에서 여유를 찾아주는 음료이다. 철학이 담긴 고급 문화로 이해된다. 이런 차가 화장품 회사 태평양과 어떻게 이어졌을까? 서 창업주는 60년대 일본 등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차를 대접받았다. 일본 거래처를 찾았을 때 가루차가 늘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고작이었다. 특히 서 창업주는 일본 거래처 사람들이 고려·조선왕조의 다구(茶具)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차에 관심을 기울여 70년대 후반부터 녹차사업을 시작했다. “차밭을 조성하되 반드시 불모지를 개간해야 한다.”80년 녹차밭을 구상하면서 서 창업주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당시 차밭 개간은 무모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차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부족한 전문인력과 제주도 땅의 척박함 등 그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골프장을 짓는다거나 땅투기를 한다는 등의 오해까지 받았다. 축적된 기술과 자료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회사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모두 만류했다. 그러나 서 창업주는 뚝심을 발휘해 밀어붙였다. 대한농구협회 회장 시절인 80년 중국을 방문, 공안(公安)을 설득해 황제차로 유명한 용정차(龍井茶)의 고향 항저우를 둘러봤다. 차가 거대한 산업임을 확인했지만 차 박물관은 그저 형식만 갖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연히 풀렸다.90년대 초 사업을 위해 찾았던 그는 미국 하와이의 파인애플농장 안에 있는 돌(Dole)사의 파인애플하우스, 즉 파인애플박물관에 들렀을 때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겨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할까말까 하던 차사업을 차박물관으로 견인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차박물관은 가슴에 고스란히 묻어두었다. 말년, 몸이 쇠약해진 서 창업주는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머물면서 파인애플하우스를 가보곤했다. 지난 99년 아들 서경배 사장이 부친 문병을 위해 하와이에 들르자 그는 짐을 풀던 아들을 다짜고짜 차에 태우고 돌사의 파인애플농장으로 데려갔다.“바로 이거야, 이렇게 만들어봐라.”와병중이던 아버지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설록차박물관 오’설록이 탄생했다. 지난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에 문을 연 오’설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찻잔 등 다구가 잘 진열되어 있다. 차에 관한 명상의 최적 공간으로 소문나면서 연간 30여만명이 찾는다. 장원 서성환의 정성과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chul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열린세상] 정부혁신을 바라보는 시각/최창수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지난 수년 동안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왔던 표현중의 하나가 소위 세계화이다. 세계화는 국가의 통제력이 과거보다 약화되면서 다양한 행위주체, 즉 기업, 지방정부, 개인들 간에 상호작용의 횟수가 증가하고 그 내용도 심화되는 현상으로서 표준화와 경쟁의 심화라고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표준화는 전세계적으로 생활양식이나 문화, 기술 등의 측면에서 동질성 내지 동일성이 증가하는 것이고, 경쟁의 심화는 상호작용이 증가하면서 보호 장치가 점점 약화되어 발생하는 현상이다. 지난 십수년간 지속된 세계화는 기업뿐만 아니라 공공부문, 즉 정부에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의 통제력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지만 반면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경쟁이 심화되는 환경 변화에 따라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결정이 내려질 수 있도록 구조와 문화를 개혁할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부혁신은 이러한 환경변화에 대응하려는 노력이다. 현 정부의 정부혁신은 중앙정부의 구조개편을 추구하기보다는 행정의 과정을 개선하고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정권의 행정개혁과 차이가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보는 사람에 따라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정부혁신에 대한 이해가 달라 약간의 혼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정부혁신을 부패청산으로 이해하고 있고, 지방의 민선단체장들과 공무원, 정치인들은 정부혁신을 분권과 지역혁신체계로 인식하고 있다. 분권은 집권화되어 있는 국가의 의사결정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는 것이고 지역혁신체계는 산·학·관 협력체계 구축을 통해 지역의 발전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반면 중앙정부에서는 행정과정의 개선을 통한 효율성 제고와 행정서비스 품질 향상을 통한 고객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혁신의 목적이 정부의 미진한 부분을 개선하여 궁극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이라면 정부 혁신은 당연히 이 모든 내용을 포함해야 하며, 이 세 가지 요소가 균형적으로 이루어질 때 혁신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 또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부혁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양분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정부의 혁신추진노력을 정치적 목적을 가진 시도로 바라보면서 긍정적인 측면은 전혀 보지 않으려고 한다. 반면 정부혁신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하향식 추진방식에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규범화된 틀을 강조함으로써 각 공공조직의 자율성과 특수성에 기초한 혁신노력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혁신은 사고의 전환을 통해 행동양식과 조직문화의 변화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성과를 극대화하는 과정이다. 공공부문의 구성원들이 서비스 수혜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스스로 개선사항을 찾아내어 이를 효율적인 방식으로 개선해나갈 때 혁신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혁신은 일정 부분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학습해가는 과정이다. 기존의 업무처리방식에 익숙한 공무원들에게 이러한 노력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혁신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장기적 성과를 창출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공공부문의 혁신노력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둔 부분도 많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잘한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해주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과 함께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공공조직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또 여전히 우리들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최창수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 “한인동포 정체성·생활문화 급변 한민족 네트워크 위한 조사 절실”

    “한인동포 정체성·생활문화 급변 한민족 네트워크 위한 조사 절실”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은 차 대신 숭늉을 마시는 등 의식주 생활에 한민족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한인 후손들은 한인보다 멕시코인, 미국인 등과 결혼을 해 정체성이 상당히 약화됐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이 한국문화인류학회(회장 김광억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와 공동으로 27일 개최한 광복 60주년 기념학술대회 ‘재외 한인동포 이주의 역사와 문화’에서 소개된 한인동포들의 생활상이다. 이 자리는 민속박물관과 문화인류학회가 지난 10년간 벌여온 한인동포들에 대한 현지조사 연구를 평가하고, 추후 사업 및 정책의 방향설정을 위해 마련됐다. 발표에 나선 김광억 서울대 교수는 “중국 둥베이(東北)지역 조선족의 일상에서는 조선어가 기본이나 30대 이하 사람들은 한어가 오히려 유창하다.”면서 “최근 경제여건이 개선되면서 일생의례 등에서 한국식 생활양식이 전파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중앙아시아 한인동포를 연구해온 전경수 서울대 교수는 “북한과 밀접한 구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이후 남북 대결구도가 조성됐고, 지역별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다.”고 전했다.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재일동포의 문화에 대해 “식생활은 민족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지만 의생활은 거의 일본식으로 바뀌었다.”면서 “일본정부의 동화주의 정책의 영향으로 재일동포의 생활문화는 ‘혼성화’ 및 ‘재민족화’ 성격을 띤다.”고 말했다. 멕시코 한인동포의 문화연구를 맡은 김세건 강원대 교수는 “지난 100년간 한국과 단절돼온 멕시코 한인들의 생활문화는 ‘현지화’와 ‘고립적 정형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서 “그러나 식문화와 세시풍속에서 한국문화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재인식하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김홍남 민속박물관장은 “한인동포 이주의 역사가 140여년이나 됐지만 지금까지 조사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동포들의 생활지역이 남아있고 이미 조사한 지역들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면서 “한민족 네트워크 강화를 위해 이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연구를 강화할 필요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지난 초여름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일지암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다 함께 차를 재배하고 제다를 하는 남천다회 식구들과 차 제다를 마친 후였다. 차를 가꾸고 차를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곡우 전부터 입하까지가 제일 바쁜 철이다. 차인들에게 차를 제다한 후의 충만함은 그 어떤 풍족함에도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다. 평소 존경하는 어른스님들, 선방의 수좌들,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통씩 보내며 푸릇한 찻물이 든 뭉툭한 손을 바라보면 그저 한없는 우주를 담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과 충만함을 ‘확’깨버리는 전화였다. 전화의 주인공은 전남 지리산 화계에서 차를 재배하며 차를 만드는 젊은 차인이었다.“스님! 스님께 차를 맛있게 해서 보냅니다.”“그래 고맙다. 무슨 차를 했니?”“구증구포로 해서 만든 차입니다.” 순간 그 갸륵한 정성과 고마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스쳐갔다.“찐차를 했니, 아니면 덖음차를 했니?”“예 스님 물론 덖음차로 했습니다.”“구증구포를 했다면서 어떻게 한번도 찌지 않고 차를 제다할 수 있니?” 그 젊은 차인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자생설·전래설·해양설 등 다양 ‘구증구포’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일이다. 매달 발간되는 차(茶)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제다법은 구증구포(九烝九曝)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전통적인 제다를 복원하고 알리기 위해 섬진강변에서 제다학교를 만들어 우리 전통차 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진 곳에서 우리 차문화 보급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높이 살 일이다. 그 글대로 하자면 좋은 일이며, 일견 매우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린다.‘구증구포’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떠도는 것은 차를 직접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어제 오늘 일처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구증구포’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본다면 ‘아홉 번을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구증구포’로 만든 차는 우리 전통차인 덖음차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찐차‘도 아닌 실체가 없는 제다(製茶)의 또 다른 ‘유령’인 것이다. 실제로 차를 제다해본 사람들은 잘 안다. 아홉 번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면 차 잎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찢어지고 발겨질 수밖에 없다. 맛과 향도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감소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구증구포’에 의한 제다법으로 만든 차는 극소수로 존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시장’에 정식으로 출품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적인 제다법은 아닌 것이다.‘구증구포’라는 말은 주역에서 최고의 양극수인 ‘九’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는 한약재를 달일 때나 필요한 것이다. 우리 차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자생설’과 ‘전래설’ 그리고 ‘해양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생태학적이고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우리 차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문화는 다양한 교류에 의해 ‘전통’과 ‘변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문화학자가 21세기 우리 문화코드의 사이클은 이제 ‘6개월’이라고 말할 정도로 짧아졌다. 광고 패션 노래 등 다양한 문화들이 뒤섞이며 빠르게 대중들의 기호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화적 현상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신라 고려시대에도 문화적 ‘전이(轉移)´와 그에 따른 변종의 양상은 매우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차도 마찬가지다. 가야 신라 고려시대에도 지배엘리트들은 우리차를 당시 문화중심국이었던 중국에 보내기도 하고 역수입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역사적 고증을 할 수 없는 우리차에 대한 ‘자생설’과 ‘전래설’역시 그런 점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자생설의 핵심은 우리 고대국가인 가야국의 가야차에 대한 것이다. 우리차의 독자성과 관련이 있는 가야차의 존재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언급되어 있다. 이능화는 “김해의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었다. 가야국의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를 심어서 된 것이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여진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이 인도를 건너 가야국까지 오며 피곤해진 허왕후의 측근들에게 난액(蘭液:향기로운 음료, 즉 차)을 주어 쉬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난액’을 차 연구가들은 바로 ‘차’라고 하는 것이다. 가야국 ‘죽로차’의 존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신라에 차씨를 가져와 심은 김대렴의 전래설보다 적게는 400년 많게는 600년 전으로 우리 차 역사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가야차의 존재는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차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에도 중국의 차문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차문화가 나름대로 위치를 점하며 존재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현재 몇몇 차인들에 의해 가야차랄 수 있는 ‘장군차’‘황차’ 등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것은 차인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의 전래설에 따르면 ‘지난 12월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명차 ‘구화산차´ 신라서 가져가 우리차의 역사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명차라고 불리는 ‘구화산차’에 대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많은 엘리트 스님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신라왕자 출신인 김교각(704~803:지장) 스님이다. 김지장 스님은 신라를 떠날 때 신라의 차를 가져갔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끝낸 김지장 스님은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의 구화산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곳 구화산에 신라에서 가져간 차를 심어 보급했다. 중국의 팽정구가 쓴 개옹다사(介翁茶史:1703년)에는 “김지장이 신라차를 구화산에 심어 운경차(雲梗茶)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 시간대별로 따진다면 김지장 스님이 중국에 신라차를 전한 것은 8세기이고 김대렴이 신라에 차를 가져와 심은 것은 9세기가 된다는 점에서 약 100년이란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차의 역사는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해양설’도 많은 타당성을 가진다. 해상왕 장보고는 그 당시 가장 귀중한 물품중 하나였던 차 무역을 전개했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지만 중국의 차와 우리차에 대한 교환, 그리고 인근 대흥사 스님들과 교류를 통해 차를 적극적으로 보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확실한 것은 ‘환경과 지정학적인 요건’에서 빚어질 수 있는 자생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차나무가 생장할 수 있는 최적지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강암지대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차나무가 지구상에 생긴 이래 새나 배, 바다의 조류, 지형의 변화 등으로 ‘차씨’가 계속 옮겨져 번식했으므로 백제와 가야지방에는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역사이전부터 차나무가 이미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좀더 주목할 것은 차나무의 존재에 대한 유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차를 ‘약용’이든 ‘음료’든 직접 제다해서 마셨다는 점이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차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때 우리차의 기원과 그 관련된 논쟁들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것이다. 가야를 비롯한 우리고대국가에서는 차가 약용보다는 떡이나 술과 같이 귀족계급의 기호음료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야의 종묘제사에서는 해마다 세시 때가 되면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등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점에서 고대의 음다풍속은 중국과 다르게 일찍이 ‘기호음료’로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고대국가 중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보유했던 고구려에서도 차는 기호음료로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애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누구나 만들고 마실 수 있는 ‘단차(團茶)´가 유행했다. 그같은 사실은 일본의 유명한 사학자 아오키 박사가 고구려의 옛 무덤을 발굴하면서 3개의 단차를 발견해 우리차계에 많은 충격을 준 것에서 증명되고 있다.‘구다국(句茶國)´이란 차 관련 지명이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차 지명 중 가장 오래된 지명이랄 수 있는 ‘구다국’은 차가 당시 일반민중의 생활양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일상화되어 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백제도 그 문화의 섬세함과 우수성, 지형적 특성을 볼 때 음다풍속이 매우 발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차를 재배할 수 있는 대부분의 땅이 바로 백제였고 자연스럽게 자생차가 그 생명의 뿌리를 깊숙이 박고 있으면서 활발한 차 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행기 스님 일본에 전래한 인물로 이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일본 ‘동대사요록´에 나오는 행기 스님의 존재다. 행기 스님이 일본에 차를 전래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백제의 지도층과 스님들이 7세기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구산선문을 통한 남종선과 차의 유입을 통해 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을 시작한다.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당시 최고의 문화로 꼽혔던 차문화를 보급 확산시키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이 지리산이라는 차의 최적지에 차나무를 생산 보급할 것을 명령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시대에는 왕, 승려,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백성까지 차를 마셨다는 다양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차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바치던 마을인 ‘다소마을(茶所村)´, 귀족들이 차를 마시며 즐겼던 강릉의 한송정, 휴대용 다구(茶具)를 지고 차공양을 가다 경덕왕과 만난 충담 스님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당시 차 문화가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원효 스님의 차방(茶房)이었던 ‘원효방’의 존재는 그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이규보는 ‘남행월일기´에서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2.4m크기의 ‘원효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2.4m의 공간을 반으로 갈라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 스님의 초상화, 외실에는 병하나, 찻잔과 불경을 놓는 책상만 존재하는 매우 작은 차방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에도 다채로운 형태의 다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차의 전성기는 이어진다. 당시 차는 치국(治國)의 도구로 사용됐다.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는 신라귀족들과 승려들에게 통치자의 ‘격려금’으로 차를 하사했다. 또한 차를 준비하고 베푸는 의례를 담당하는 관청인 다방과 다원이 존재했다. 다방은 다방시랑(정3품)에서부터 다방별감까지 있었고 직급에 따라 모자, 옷, 허리띠등이 달랐다. 각 지역의 중심부에 존재하며 아름다운 정원과 정자를 소유해 차를 마실 수 있었던 다원은 경북다방원, 경남다견원, 황해다정원, 충남·경북다정원 등이 있었다. 고려 때는 또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그에 필요한 짐을 담당했던 다군사(茶軍士)가 존재했고 차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차 상인까지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명전(茗錢) 즉 투다(鬪茶:차의 맛을 겨루는 것)를 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행다(行茶)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새로운 왕조의 차 문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소박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수없이 밀려드는 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차문화를 주도했던 사찰의 급격한 몰락은 조선시대 차산지의 폐쇄를 불러왔고 차문화를 소박한 형태로 변형시킨다. 과중한 차세와 차 공납의 심화는 어려운 백성들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용됐다. ●稅茶 등 백성들 수탈 도구로 이용도 세차(稅茶)를 내기 위해 15세기에는 차 한홉과 쌀 한말,17세기에는 차 한말과 무명 30필을 바꾸었을 정도로 차의 폐해는 심각해졌다. 김종직은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관청용 차밭을 일구고 차 공납을 자체적으로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음다풍속이 존재했다. 궁궐이나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에서 차를 주관하는 다방, 관청에서 제대로된 판결이나 회의를 하기 위한 다시(茶時:차 마시는 시간)가 있었다. 그중 ‘야다시’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다. 야다시(夜茶時)는 밤중에 관리들이 다시를 갖는 것으로 파렴치한 치부나 도덕적 패륜을 저지른 관리들을 골라 그 죄상을 흰 널빤지에 써서 그 집 문위에 걸고 가시나무로 문을 봉한 뒤 서명을 하고 돌아갔다. 야다시를 받게 된 사람은 그집에 평생 유폐되어 다시는 세상출입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전 안방극장에 등장했던 ‘다모(茶母)´는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민계층에서 선발된 격이 낮은 여성을 말했다. 그러나 중엽 이후 포도청에서 선발한 여자 비밀형사로 변질되기도 했다. 아직도 한국 차 문화사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거의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차는 군자와 같아서 품성에 삿됨이 없다.”는 말이 있다. 차가 역사속에서 다양한 편린에도 불구하고 당시대의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온 고고한 정신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둡고 후미진 곳에도 우리생은 늘 피어나듯 하얀 황금의 꽃술을 머금은 차꽃도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여기저기 가없이 피어난다. 수없는 역사의 핍박과 수탈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의 힘이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배워야 할 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일지암 암주)
  • [서울 이야기](17) 미세먼지 예보제

    [서울 이야기](17) 미세먼지 예보제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도시를 ‘물리적·사회적·환경적 여건을 창의적·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가는 가운데 개인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고, 시민들이 상호 협력함으로써 최상의 삶을 누리는 도시’라고 규정한다. 그동안 보건·위생차원에서 논의되던 ‘건강’에 쾌적한 환경을 추가한 것이다. 이에 서울시는 건강시민이 건강도시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도시계획과 건축을 포함해 도시의 모습을 시민들의 건강에 이롭게 바꾸는 ‘건강도시 프로젝트’를 2004년부터 추진하게 됐다. 그러나 건강도시, 건강시민을 위협하는 요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미세먼지(보통 머리카락의 10분의 1쯤 되는 굵기인 지름 10㎛ 이하의 입자상 물질.1㎛는 100만분의 1m) 환경이다. 미세먼지는 대기 중에 오랫동안 부유하게 돼, 오염의 영향권 범위가 그만큼 넓게 나타난다. 특히 비가 온 뒤에도 여전히 대기 가운데 미세먼지 오염도가 높게 나타나는 데는 쉽게 침적되지 않는 아주 미세한 입자가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세먼지는 발생원이 복합적이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문제 해결에 매우 어려움을 겪게 하는 오염물질이다.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것으로 토양 및 바위의 침식과 꽃가루와 같은 생물학적인 오염원이 있다. 인위적 발생원으로는 경유버스와 트럭·가솔린 차량 배출, 산업보일러, 석탄연소 발전소, 목재연소, 광산 및 건축 활동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경유자동차 배기가스가 주된 배출원이다. 미세먼지는 발생원에서의 1차적 생성 이외에 대기 가운데 이산화황, 질소산화물 등의 기체상물질이 황산, 질산 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2차적으로도 생성돼 또 다른 건강 영향을 미치게 된다. ●건강시민, 건강도시 위한 미세먼지 관리 서울의 경우 다행스럽게도 미세먼지 오염수준이 2002년 76㎍/㎥에서 2003년 69㎍/㎥,2004년 61㎍/㎥으로 계속 감소하는추세이다. 그러나 대기 중 미세먼지는 천식을 악화시키고 만성기관지염을 일으키는 등 호흡기 계통 질환을 유발할 뿐 아니라 서울 하늘을 뿌옇게 하고 건물에 얼룩을 내는 등 체감 오염도와 관련이 높아,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들어 황사, 시정(視程)장애, 오존 등 미세먼지와 관련된 대기오염 건강피해가 우려되고 있으나, 방지시설 등을 통한 제어가 쉽지 않다. 따라서 차선책이지만 외출을 삼가는 등 오염물질에 대한 노출을 사전에 최소화하는 방법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미세먼지 농도 측정에만 그치지 않고, 예보 및 경보시스템 체제를 가동, 대기오염에 대한 노출을 사전에 막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필요하다. 국내의 미세먼지 예보시스템은 2003년 3월 환경부가 설치해 1년 동안 시험운영을 마친 바 있다. 서울시 미세먼지 예·경보 제도는 실제 적용되는 국내 첫 사례이다. 이는, 서울 전역에서 대기 중 미세먼지의 농도가 일정기준 이상 높게 나타났을 때 시민에게 신속히 경보를 발령함으로써 인체 및 생활환경상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대기오염에 대한 관심과 환경의식 수준을 높이기 위해 지난 2월부터 서울시에서 시행한 제도이다. 그 동안엔 당일 측정한 대기오염도 수치만을 알 수 있었지만,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미세먼지 예·경보 제도를 도입해 하루 먼저 오염상황을 예측해 대비할 수 있게 됐다. ●처음 시행되는 서울의 미세먼지 예보제 서울시 먼지 예보제도란 미세먼지의 농도를 일정한 식을 통해 하나의 점수로 나타낸 뒤 이를 미리 정해둔 위해도 등급에 맞춰 해당점수가 포함되는 등급을 일반인에게 공포하는 제도를 말한다. 미세먼지 오염농도가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르면 주의보나 경보를 발령하고, 신문·방송, 인터넷, 학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으로 외출 자제와 단축수업·휴교, 차량 운행 자제, 업무시간 단축 등을 권고하게 된다. 현재 ‘dust.seoul.go.kr’에서 발표되고 있는 서울시 미세먼지 예보에 따라 경보가 발령되면 각종 매체는 물론 시교육청을 통해 각급 학교와 기관에 즉시 통보된다. 예를 들면, 하루 전에 먼지 농도를 알려주는 예보제도는, 시간당 200㎍/㎥ 이상이 2시간 이상 지속되면 주의보가, 시간당 300㎍/㎥ 이상이 2시간 이상 지속되면 경보가 각각 발령된다. 또 봄철 황사가 발생할 경우에는 황사예보·특보를 통해 시민행동요령을 전파하게 된다. 이제는 일상생활에서 산책, 운동, 외출 전에 오늘의 먼지 상태를 체크하는 생활습관이 요구된다. 시민들은 다음날의 예상수치를 보고 운동, 빨래, 등산, 외출 계획을 세우거나,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야외수업을 적절한 날에 맞춰 선택할 수 있도록 맞춤형 환경정보가 일기예보와 같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예보내용은 대기오염 정도를 좋음, 보통, 민감한 사람에게 나쁨, 약간 나쁨, 나쁨, 매우 나쁨 등 6단계로 구분해 발표하고 있다. 만약 내일의 먼지농도가 약간 나쁨 이상으로 예보될 때에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실외수업을 자제토록 요청하고, 나아가 나쁨이나 매우 나쁨일 경우에는 휴교를 검토하도록 권고하게 된다. 예보 및 경보사항은 서울시 미세먼지 예·경보센터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자치구, 언론기관, 학교 등 관련기관 홈페이지에서 실시간으로 알릴 수 있도록 하며, 이들 기관의 담당자에게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로 전송해 경보내용을 시민들에게 신속히 전파되도록 하고 있다. ●외국에선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 이미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 통계모델을 기본으로 예보제를 시행하여 국민들에게 기상예보와 동등한 수준으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미세먼지 오염에 취약한 노인, 어린이, 또는 기관지염 환자들이 미세먼지 오염도 예보를 생활양식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미국 환경청은 수년 전부터 ‘AirNow’라는 환경정보시스템을 통해 미국 전역에서 측정되는 오염도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적으로 공개해 왔고,2003년 10월부터 오존 및 미세먼지를 대기질 지표인 대기질 지수(AQI; Air Quality Index)를 이용하여 44개 주 275개 도시를 대상으로 예보하고 있다. 예보 작업은 각 주와 지방청의 대기질 전문가 및 기상 전문가 등이 수행한다. 미세먼지의 오염도를 하루 전에 예보를 통해 공개하며, 공개방법은 주·지방정부 대기 담당국 웹사이트, 지역방송과 일간지 등의 일기예보를 활용하고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Oslo)시의 경우, 미세먼지 오염도가 다른 도시에 비해 높은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미세먼지 오염에 대한 저감대책 추진에 매우 적극적이다. 예를 들면, 다음날의 미세먼지 오염농도가 100㎍/㎥(24시간 기준), 이산화질소 오염농도가 200㎍/㎥(1시간 기준)를 초과하는 것으로 예측되면, 자동차 통행제한과 같은 매우 엄격한 제한조치를 취하고 있다. 미세먼지 오염농도 저감을 위해 주요 간선도로를 대상으로 자동차 통행수요 17% 저감효과에 버금가는 자동차 통행속도 제한조치(50㎞/h)를 내리게 된다. 이산화질소 배출량 저감을 위해 삼원촉매장치 미부착 차량에 대해서도 통행제한 조치를 취한다. ●미세먼지 오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서울시 미세먼지 예·경보제는 다음날의 미세먼지 농도를 시민에게 알려,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으로부터 시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시행된다. 이제는 방송 뉴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기예보와 같이, 미세먼지 예보 및 경보제도는 효용가치가 높다. 그러나 아무리 미세먼지 예보제도가 잘 갖췄더라도, 차선책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세먼지 배출원에 대한 적절한 저감대책을 추진해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서울의 시정거리(視程距離)를 단축시키고, 시민의 체감오염도를 증대시킬 뿐 아니라, 시민의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이 미세먼지라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더욱이 이러한 미세먼지는 대부분 자동차 통행에 의해 직·간접으로 발생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남산에서 인천 앞바다를 볼 수 있는 청정한 대기환경 수준’을 만드는 작업은 그만큼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서울의 환경 경쟁력을 배가시키고, 선진 환경 모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감한 미세먼지 오염 개선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서울시는 금년부터 시행되는 수도권 대기환경 개선특별대책과 더불어, 미세먼지 오염원에 대한 총량관리, 천연가스(CNG) 시내버스와 같은 저공해 자동차 운행 촉진을 위한 세제 지원, 경유자동차 매연여과장치 부착 유도, 저공해 엔진으로 개량, 자동차 없는 거리 조성, 운행자동차에 대한 효율적인 정밀검사제도 시행, 도시개발의 사전 환경성 검토 확대, 미세먼지 예·경보제 시행 등의 시책을 적극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특히 서울시는 대기오염의 주된 요인으로 알려진 자동차 배출가스를 줄이기 위해 금년도에 1만 7000여대의 경유자동차를 저공해화하고, 타이어 마모로 인해 발생되는 비산먼지를 줄이기 위해 매일 1회 도로 물청소를 실시하는 등 내년까지 미세먼지를 50㎍/㎥ 수준으로 줄어들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아가 서울이 환경 모범도시로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서울시와 시민들 사이에 상호 협력이 긴밀히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김운수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환경연구부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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