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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만 27명 어린목숨이…자식을 죽이는 사회

    어린 생명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의 손에 목숨을 뺏기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주로 빚에 찌들린 부모들이 ‘아이의 불행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일을 저지르고 있다.전문가들은 자녀를 소유물이나 분신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왜곡된 가족관,예방·보호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이같은 현상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상담창구조차 없는 사회 자녀 살해 사건의 이면에는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신용불량자로 몰린 ‘신빈곤’의 문제가 있다.카드 빚과 사채가 계속 불어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최후의 극단적 선택을 한다.일을 저지르기까지 개인과 가족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고민을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상담 창구조차 없다는 데 심각성이 크다.개인파산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고 있다.빚에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 지난 19일 발생한 ‘남매 한강투기’ 사건에 앞서 7월에는 인천에서 30대 주부가 카드빚에 시달리다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고,9월에는 전주에서 생활고를 비관한 가장이 아내,세 자녀와 함께 차에 불을 질러 5명 모두 숨졌다.지난 3일에는 70대 할머니가 아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겠다며 손녀를 살해했다. 경찰 등에 따르면 올해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거나 동반 자살한 사건은 모두 20건으로 27명의 어린이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귀한 생명을 잃었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49) 교수는 “제대로 돼있지 않은 정부의 복지체계가 생계비와 양육비 부담을 부르고,자녀 살해라는 극단의 결과까지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올해 27명 어린 목숨 부모 손에 사라져 부모의 자녀 살해는 미래에 대한 극단적인 비관이 부르는 일종의 ‘정신파괴’다.서울대 사회학과 서이종(42) 교수는 “미래가 없고 원칙이 뒤집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합의된 룰을 가지고 정진하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좌절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부모’라는 역할을 성숙하게 해낼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이 뒷받침돼야 한다.중앙대 의대 필동병원 정신과 기백석(51) 교수는 “남매를한강에 투기한 사건에서 보듯 정신지체가 100% 사고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면서 “자녀를 양육할 준비가 되지 않은 미성숙한 가치관이 화를 불렀다.”고 말했다. ●비정한 아버지 구속 서울 용산경찰서는 21일 카드빚에 쪼들려 두 자녀를 한강에 던져 숨지게 한 이모(24)씨를 살인혐의로 구속했다.이씨는 이날 오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에서 받은 영장실질심사에서 “동작대교 위에서 계획적으로 벌인 짓을 모두 인정한다.”면서 “순간적인 판단 잘못으로 아이들을 숨지게 한 것을 무척 후회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경찰은 지난 20일 오전부터 동작대교 일대 물밑을 수색해 이씨가 두 자녀를 던진 지점에서 하류 쪽으로 20여m 떨어진 물속에서 시신을 모두 찾아냈다.모두 티셔츠 차림으로 두 팔을 조금 굽혀 앞으로 내민 채 몸이 얼어 있었다. 이영표 이유종기자 tomcat@
  • 대낮 두자녀 한강에 던져

    경마와 도박으로 인한 카드빚에 시달리던 20대 가장이 생활고를 비관,두 자녀에게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먹인뒤 한강에 던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비정한 아버지는 범행장소를 현장답사하는 등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관련기사 7면 19일 오후 3시 57분쯤 서울 용산구 이촌동 동작대교 북단에서 200m지점에서 이모(24·인천시 계양구)씨가 몰고 가던 트라제 XG차량을 세운뒤,차안에 있던 아들 주성(6)군과 딸 주은(5)양을 한강으로 내던지고 달아났다.경찰은 이씨의 승합차 뒤에서 달리던 승용차 운전자들로부터 신고를 받고 출동,2시간 남짓 주변 한강을 수색했으나 이들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목격자가 제보한 차량번호를 추적한 끝에 이씨의 어머니 천모씨(52)의 차량임을 확인,이날 오후 6시30분쯤 인천 부평구 이씨의 부모집에서 이씨를 붙잡았다. 이씨의 부인 조모(23)씨는 “오늘 오후 남편에게 전화가 왔는데 ‘아이들을 한강에 던져 버렸다.너도 죽이러 간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경찰에서 “경마와 경륜·도박에빠져 3500여만원의 카드빚을 져 2주전 부터 아이들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면서 “닷새전 수심이 깊은 곳을 미리 봐뒀다.”고 말했다. 이영표 박지연기자tomcat@
  • 한국네슬레 ‘145일 파업’ 교훈/ 지노위(지방노동위원회)가 ‘한국 노사관행’ 이해시켜

    아웃소싱과 고용안정은 동전의 양면이다.구조조정이 사측에 경영합리화라면,노조엔 고용불안이자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다. 다국적기업 한국네슬레 노사가 장기파업을 겪은 것은 ‘아웃소싱=경영권’,‘고용불안을 위협하는 것은 쟁의대상’이라는 시각차에서 비롯됐다.한국네슬레 노사가 어떻게 이러한 인식차를 극복하고 정상화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짚어본다. ●대리점 아웃소싱이 분규 촉발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것은 지난 7월7일이지만 발단이 된 것은 4월부터 시작된 임금협상 과정에서 대리점 판매방식을 아웃소싱키로 했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영업부 직원들의 고용불안이 가중됐다. 노조가 6월26일 충북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신청을 하자 사측도 곧바로 아웃소싱을 발표하고 영업부 직원 44명을 시장수요조사부서로 전환 배치했다.노조원들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송정동 청주공장에 모여 부분파업을 벌였다. 전국의 영업사원과 서울사무소 직원들도 동참했다.회사는 또 희망퇴직 실시를 발표하고 커피믹스 제조기계 13대분을 줄이고 외주로 하겠다고밝혔다.노조는 회사측이 고용불안을 유발하는 계획을 잇따라 내놓자 “노조와 협의없이 구조조정하고 있다.”며 철야농성을 벌이면서 투쟁강도를 높여나갔다. 회사도 8월21일 서울사무소에 이어 9월4일 청주공장,전국의 영업본부와 물류창고에 대한 직장폐쇄를 단행했다.‘한국 철수’까지 내비치기도 했다.노조는 전면 파업으로 맞섰다.회사는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직원과 간부를 동원,공장을 돌렸다.가동률은 30%.노조원들도 청주공장의 담 밖에 천막 30개를 치고 장기 철야농성에 돌입하는 등 노사 양쪽은 마치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듯했다. 노사는 부당노동행위,업무방해로 충북지노위와 경찰에 맞고발 및 고소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회사는 업무 외주나 인사 등은 ‘경영에 해당되는 문제로 노조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는 입장이었고,노조는 ‘직원 생존권 문제’라며 물러설 수 없다고 맞섰다. ●결정적 계기는 지노위의 결정 11월 중순부터 이삼휘 사장이 직접 협상에 나섰으나 진전이 없었다.노조는 같은 달 17일 스위스 본사에 원정투쟁단을 보내 회사를 압박했다. 회사측은 당초 임금협상 외에는 모두 경영권 침해로 간주해왔으나 장기 파업으로 적자가 400억원 이상이 나자 ‘이러다간 공멸하겠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노조가 제기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충북 지노위의 결정내용.지노위는 부서 폐지,인원 감축 등은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단체교섭의 대상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측은 결정내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나오자 협상에 나서게 됐다.이렇게 된 데는 지노위의 신뢰가 밑바탕이 됐다.마지막 쟁점은 ‘무노동 무임금’.노조는 1인당 1300만원쯤 되는 5개월치 임금을 포기했고 회사는 1인당 400만원의 특별지원금을 지급했다. 또 ‘근로 및 고용유지위원회’를 설치해 고용안정을 보장했고 임금은 회사측에서 제시한 것에 가까운 3% 인상에 합의됐다. 청주 이천열기자 sky@ ■네슬레 스위스본사 태도는 스위스 네슬레 본사는 노사분규에 대한 전권을 한국네슬레에 위임했다며 한발 비켜서려는 태도를 보였다.그러나 한국네슬레에 협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청주공장의 폐쇄 검토 지시를 내리는 등 사실상 사측 대표로 나섰다. ●노조측 대화 요구 철저 외면 스위스 본사는 이달 초 노조투쟁단이 방문,협상을 요청했지만 단 한 차례도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OECD(경제협력개발기구)와 국제식품노련,본사 노조 등이 가세해 압박했지만 “한국네슬레와 대화하라.”며 회피했다.가레트 부회장은 “현지 노사 문제는 지역 법률과 관행에 따라 사업장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사협상 과정에는 본사가 깊숙이 개입한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무노동무임금 고수와 노조의 경영권 참여 배제 등을 마지노선으로 두도록 한국네슬레에 지시했다.한국네슬레 관계자는 “협상 과정에서 변동사항은 본사에 보고하고 지시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의 고용 보장 요구에 대해 수용불가 입장을 고수했던 한국네슬레가 일정 부분 수용한 데는 본사의 승인이 있었다는 분석이다.이삼휘 한국네슬레 사장은 “서둘러 사태를 마무리하라는 본사 지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경영과 한국적 정서의 충돌 노조의 불법 행동과 경영권 참여를 수용할 수 없다는 네슬레 본사의 원칙과 일단 밀어붙이는 한국적 노조의 관행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이번 분규는 장기화됐다. 이 사장은 “노사 합의는 만족스럽지만 지난 4개월간을 돌이켜 보면 한국에서 사업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김경두 기자 golders@ ■전택수 노조위원장 “이번 파업을 통해 노사가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습니다.” 전택수(田澤秀·사진·42) 노조위원장은 “거대 다국적 기업이어서 협상이 무척 힘들었지만 노사 모두 이같은 인식에 공감하면서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전 위원장은 “힘든 조건에서도 노조원들이 잘 따라주었다.”고 웃었다.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일부 노조원은 파업동참과 함께 밤에 대리운전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전 위원장은 “노조원들이 임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으면서 카드 빚을 지거나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웠다.”고 말했다.노조는 조합비만으로 파업비용을 댈 수 없자 일일 호프집을 열어 보탰다.채권을 발행,다른 회사 노조에 팔아 충당하거나 시민단체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는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민주노총과 충북노동위의 적극적 중재가 큰 도움이 됐다.”고 고마워했다.이와 함께 노조에 대한 회사측의 손해배상 및 가압류 조치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독소조항이라고 지적했다.전 위원장은 “노사가 서로를 인정하고 충분히 대화해야 갈등을 사전에 막을 수 있을 뿐더러 기업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서로간에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청주 이천열기자
  • ‘南北 오락가락’ 끝은 법정행

    ‘조선인민군 전사-탄광 광부-사로청 책임지도원-온성군 수출지도원-우산공장 지배인-탈북-숯불갈비집 사장-입북-노동당 입당-재탈북’ 탈북했다가 입북,재탈북했다가 2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남수(45)씨의 기구한 인생역정이다.1996년 탈북한 남씨는 당시 국내 정착금 864만원 및 주택지원금 840만원과 생계보조금으로 매월 108만원을 받으며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1999년 결혼,자녀까지 둔 남씨는 대출받은 1억원으로 연 갈비집이 망하면서 극심한 생활고와 가정불화를 겪었다.남씨는 자신의 불행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으로 인식,2000년 8월 중국 베이징을 통해 북한에 입국했다.전처와 재결합한 남씨는 북한에서 잘나가는 탈북방지 강사로 활동했다. ‘공화국이 그리워 다시 돌아온 모범주민’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동당에도 입당했다.남씨는 “남조선으로 도주했지만 영웅 대접은커녕 전기고문을 받으며 상갓집 개처럼 살았다.자본주의는 세금도 수없이 많고 귀순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강연하며 탈북을 막았다. 그런 그가 동생,아들 2명과 함께 재탈북해 지난달 중국 베이징 한국 공관을 통해 국내로 돌아왔다.검찰 관계자는 “자본주의를 경험한 남씨가 사회주의 체제에도 결국 적응을 하지 못한 것 같다.”면서 “반성은 없고 억울하다는 심경만 보인다.”고 전했다.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吳世憲)는 이날 국내 정보기관의 활동과 탈북자 근황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알려준 남씨를 자진지원·잠입·탈출·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편집자에게/ “부유층선 연탄 때는 극빈층 생각을”

    -‘연탄동네 도시속 섬’ 기사(대한매일 11월24일자 1·3면)를 읽고 기사를 읽고 1982년 초등학교 1학년 때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세들어 살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느 겨울날 아침 잠에서 깼는데 방안에 매캐한 가스냄새가 배어 있었다.온 가족이 가스를 마신 상태였다.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덜컥 겁이 났던 순간이었다.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미 많은 사람들 사이에 ‘추억’ 속으로 사라진 연탄이 아직도 일상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몇몇 음식점에서나 별미로 연탄에 고기를 굽는 세상이 아닌가.그런데 아직도 이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우울해진다.특히 대한매일이 지적했듯 연탄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80%가 월수입 50만원 미만의 극빈층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벗어나기 힘든 형벌 같은 가난이 짐지워졌다는 생각도 든다.서울시 전체적으로는 연탄을 쓰는 사람의 수가 줄었겠지만 그들의 생활고는 20년 전과 비교해 크게 변한 게 없다.오늘도 백화점의 고가 수입브랜드 매장에는 사람이 몰린다.돈을 물처럼 펑펑 쓰는 사람에게 ‘연탄섬’ 주민의 일상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그러나 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연탄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 이상 모른 체해서는 안될 것이다.내년 겨울에는 연탄 때는 사람들의 사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란다. 한은정 회사원·서울 영등포구 신길3동
  • ‘국적회복’나선 中동포/(상)‘강제출국’ 안타까운 사연

    국내에 체류 중인 중국동포들이 극한투쟁에 돌입했다.오는 17일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예고된 가운데 이들 중국동포는 ‘고향땅에 살 권리’를 주장하며 헌법소원에 이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중국인으로 불법체류자일 뿐’이란 법률 논리와 ‘고향에 왕래하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라는 역사성을 강조한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중국동포들의 현주소와 역사적 배경,해법 등을 살펴본다.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중국동포들이 ‘고향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접수시키고 있는 동안 재판소 밖에선 5000여명의 중국동포들이 손에 손을 잡은 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누군가가 시작한 노래가 커다란 울림이 돼 퍼지면서 이들이 한 민족임을 실감케 했다. ●“우린 조국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 할아버지 묘지도 있고,내 호적도 있고,친척들도 있는데 왜 제가 이 땅에서 쫓겨나야 합네까.” 새문안교회 단식농성장에서 만난김자연(가명·55·여)씨는 두 손을 꼬옥 말아 쥔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한국에 온지 6년이 됐지만 그동안 모은 3000만원은 얼마전 사기를 당해 다 날려버렸다.그는 “쫓겨날 상황에서 단식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면서 “우리는 아픈 역사의 희생자일 뿐 조국이 싫어 떠난 사람들이 아닌 만큼 무조건 불법체류자라는 굴레로 엮지 말아달라.”며 하소연했다. 5살 때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간 이형상(64)씨는 “우린 동포 아니냐.”며 말문을 열었다.그는 “중국 땅에서 수십년간 이방인이라는 눈총을 견디며 풀뿌리처럼 살다 어렵게 찾아왔는데 조국마저 우리를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여기 모인 사람 중 조국 땅 싫어 떠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도 딱한 처지는 마찬가지겠지만 중국동포들이 이 땅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법률자문을 맞고 있는 정대화 변호사는 “재중동포의 국적문제는 단순히 헌법적인 차원을 넘어 일제 강점기의 수탈을 피해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한민족의 역사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면서 “중국동포들이 자진해서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만큼 이들이 국적을 취득할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또 “독일이 통일 후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10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에게 국적회복을 해준 만큼 우리도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재중동포의 국적회복의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일제단속에 생이별의 아픔도 불법체류자라는 족쇄 때문에 일제단속이 시작되면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중국동포들도 적지 않다.이충일(32·여)씨는 요즘 아들 성민(가명·3) 때문에 외출을 할 수도 없다.세살밖에 안되는 아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밖에 나가면 경찰아저씨가 엄마 잡아가.”라며 엄마의 다리를 잡고 떨어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이씨가 한국에 온 것은 6년 전.식당에서 일하다 한국인인 장모(38)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성민이를 갖게 됐다.하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돈도 모아 함께이씨의 고향인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살자던 부부의 약속은 이내 남편의 외도로 무참히 깨져버렸다.지난 8월 한국 여자가 생긴 남편은 이후 이씨를 폭행하고 아들 성민이마저 빼앗아갔다.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열흘 남짓만에 아들을 되찾았지만 모자(母子)가 함께 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17일부터 시작되는 단속에 적발되면 이씨는 아들을 남겨둔 채 강제출국을 당하고 호적법에 따라 성민이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혼한 어머니를 찾아 옌볜(延邊)을 떠나 한국에 온 현아(가명·14·여)는 국내법상 불법체류자다.미성년자인 불법체류자들은 학교의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학교장 재량에 따라 강제출국은 피할 수 있다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현아는 지난 2000년 방학을 맞아 한국 남자와 재혼한 어머니 김선숙(35)씨를 만나러 왔다가 함께 살게 되었다.학교장의 배려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입학은 했지만 1학년 1년 동안은 시험조차 볼 수 없는 청강생 자격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서울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이선희 소장은 “학교장 재량에 따른다는 애매한 조항에 따라 현아와 같은 미성년 불법체류자 역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영규 유지혜기자 whoami@ ■이은규 서울조선족교회목사 “중국동포들에게도 조국에서 살 권리를 주십시오.” 중국동포의 국적회복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서울조선족교회 이은규(사진·43) 목사는 “중국동포들은 우리 나라에서 단순히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국적회복 운동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목사는 “중국동포 대부분은 일제 시대에 독립 운동이나 생활고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떠난 사람들의 후손”이라면서 “해방 후 북한에 들어선 김일성 정권 때문에 귀국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머물러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이어 “1948년 제정된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에 의해 한국 국민이 됐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한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국제 미아’가 된 중국동포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이라며 이번 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 목사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주지 않은 법무부에 대해 ‘책임 방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이 목사는 “우리나라는 지난 92년 중국과 수교를 맺을 당시 국내법 효력을 갖는 ‘재중동포의 지위에 대한 협정’을 만들지 않았다.”면서 “이는 만들어야 할 법을 안 만든 ‘입법 부작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또 “법무부는 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 신청을 거부함으로써 같은 동포의 국적선택권,평등권,행복추구권을 위배했다.”면서 “정부는 스스로 양산한 중국동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책임방기를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 목사는 이와 함께 “우리 국민들도 중국동포 문제에 대해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 ■190만 中동포 이주 역사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 동포는 190여만명에 달한다.대부분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시기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생활고를 피하기 위해 한반도를 떠난 이주민의후손들이다. 주로 ‘동북 3성’으로 불리는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베이징,톈진,신장,상하이,광저우 등 중국 전역 대도시로 진출하고 있다. ●첫 이주는 1860년 베이징조약 직후 재중 동포 이주사는 크게 3기로 나뉜다. 1기는 19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로 대부분 가난과 탐관오리들의 폭정을 피해 압록강을 건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2기에는 항일운동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 주를 이뤘다. 3기는 45년 해방까지의 시기로 당시 일본은 일본인을 조선으로,조선인을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시키는 환위이민(換位移民) 정책에 따라 대규모 강제이주를 실시했다. 1기 이민은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 직후에 이뤄졌다.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청조의 발상지인 만주지방에 대한 ‘봉금정책’을 풀고 주민들을 국경지대로 이주시켰다.그러자 조선의 헐벗은 농민들도 비옥한 미개척지를 향해 강을 건넜다.이들은 이주 초기 청의 관헌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1880년대 청 조정이 간도개척을 위해 조선족 포용정책을 펼치면서 간도지방 곳곳에 조선족 마을이 생겨났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부터 한·일합병 직전까지 20여만명의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한·일합병 직전까지 20만명 이주 일제의 한국침략이 노골화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1919년 3·1운동 전후까지는 주로 항일인사들의 정치적 망명이 많았다.국내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홍범도,유인석,이범윤 등이 을사조약을 전후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전후에는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기획이민’이 활발했다.이상설,이동녕,안창호,박은식,신채호 등이 이 시기 만주에 정착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지방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대규모 개발계획을 세운다.이에 따라 황무지였던 이곳에 조선 농민의 집단이주를 추진,38년 처음으로 간도와 랴오닝지방에 조선인들이 정착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후에는 전쟁 물자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개척이민단’이란 이름으로 조선인농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세영기자 sylee@
  • 책 /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지난 8월 기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씨의 부음기사를 쓰며 적잖이 애를 먹었다.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는 큰아들에게 “아무것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즐겁게 살다갔다고만 전하라.”고 신신당부하며 먼길을 떠났다.정확한 발인 시간조차 알 길이 없었을 수밖에. 그렇게 야속하도록 황망히 떠나버린 작가의 편지글이 책으로 나왔다.서정과 애상이 뚝뚝 묻어나는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한길사 펴냄)란 서간집이다.아동문학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후배 권정생씨와 주거니 받거니 한,아주 오래된 필담(筆談) 묶음이다. 30년 전인 1973년으로 거슬러올라간 시점에서부터 선후배의 사연은 고리를 건다. “다녀가신 후,별고 없으셨는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弟)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설익은 재롱만으로 문학을 한다는 것부터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권씨가 이씨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글이다.한자한자 사연을 적어내리며 그는 어느결에 문학하는 자세를 다잡고 있다.권씨는 타협을 모르는 고인의 꼬장꼬장한 성정이 힘들어 ‘독불장군’이라고 뒤에서 불평한 적도 많았노라고 머리글에서 고백하기도 한다. 열두 살이나 벌어지는데도 두 사람은 꼬박꼬박 서로를 ‘선생님’이라 존대하며 진솔한 의견을 주고받기에 바쁘다.안동 근처의 벽촌에서 교편을 잡던 40대의 고인이 30대 중반의 후배에게 형님처럼 자상히 크고작은 인생의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한다.아동문학가협회 가입을 권하며 손수 가입서까지 동봉한 글,부디 건강을 챙기라는 염려의 말,어렵게 출판한 동화집의 판로를 걱정해 주는 사연 등은 말할 수 없이 사변적인데도 신통하게도 찡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친교가 두터웠던 문우(文友)였다.권씨는 기억이 더 빛바래기 전에 살뜰히 고인을 추억해 놓고 싶었으리라.그에게 고인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듬직한 언덕이었다.젊은 시절의 그가 무시로 설익은 삶의 철학을 내보일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저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올해도 보리밥 먹고,고무신 신으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가난한 것이 오히려 편합니다.” 86년7월 고인의 사연으로 끝을 맺는 두 사람의 필담에는 울타리가 없다.문학과 교육,자연을 생각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인간과 통일을 이야기한다.해묵은 교감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오롯이 현재성을 띠고 복원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글’은 후하되 ‘말’은 박하기로 소문난 두 글쟁이들이 아닌가.속살 같은 생활고백을, 그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1만원. 황수정기자 sjh@
  • [마당] 지도자의 눈물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상륙한 태풍 ‘매미’가 엄청난 피해를 주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뮤지컬 관람을 했다.대통령의 행위에 대한 찬반 토론이 벌어졌고,일부 비판 여론 속에서 청와대는 “국민들께 송구스럽다.”고 유감을 표명했다.대통령도 한 인간이며 대통령직도 직업의 하나인데 일할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쉴 시간에 쉰다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이러한 인식이 자리잡은 상황에서 대통령이란 직업을 생각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그것은 현대적이며 기능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문제는 다수의 국민들이 전근대적이게도 직업적 대통령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국정에 무한책임을 지는 총체적이며 초인적인 대통령을 원한다는 데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가끔 임금이 육선(肉饍:고기 반찬)을 들지 않아,신하들이 고기 반찬 드시라고 애원하는 대목이 나온다.임금이 육선을 들지 않는 이유는 궁중의 흉사 또는 가뭄과 같은 국가적 재해가 있을 때이다.“하루는 왕이 영조와 함께 앉아 있었다.강관(講官)이 삼남(三南)지방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말하였는데,왕이 이 말을 듣고 이날 저녁 반찬에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다.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왕이 대답하기를,‘때마침 굶주리는 백성들이 생각나 측은한 생각이 들어 차마 젓가락이 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순조편) 여기서 왕은 정조이다.이 기록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노여움으로 죽은 마당에 어떻게든 할아버지 영조의 마음에 들어야 했고,따라서 애민정신을 가장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근본적으로 정조의 행위는 조선시대 제왕의 애민정신에서 비롯한다고 할 것이다.임금이 솔선수범하고 근신하여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최근 출판된 ‘CEO 히틀러와 처칠,리더십의 비밀’이란 책을 보면,1940년 9월 독일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런던 외곽의 이스트 엔드를 처칠은 신속하게 방문한다.그곳에서 처칠은 눈물을 흘리고 상처받은 시민들을 위로한다.이때 처칠의 눈물은 패배자의 눈물이 아니라 지도자의 국민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눈물이었고,그 눈물은 영국인들의 대독 항전의지를 결속시켜 결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한 다수의 유권자들은 선거운동 기간에 배우 문성근의 찬조 연설 때 눈물을 훔치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보았고,그 눈물에서 인간 노무현의 역경과 그의 정서적인 측면을 유추했었다.그 눈물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였을 것이다.만약 태풍이 전 국토의 30%를 초토화시키고 지나갔던 직후 대통령이 뮤지컬 관람을 하던 그 시간에,반대로 대통령이 신속히 재해지역을 방문해 피해 주민들의 손을 잡고,그들의 불행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해 따뜻한 눈물을 흘렸더라면,재난 극복에 대한 국민의 의지는 더욱 강건해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흉년이 들었을 때 임금이 고기를 먹는다 해도 그 양이 얼마나 되었겠는가.처칠이 위기 상황에 눈물을 흘렸다 해도 그것은 몇 그램의 수분과 염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국민에게 큰 힘이 된다.한 국가의 지도자는 그 구성원들의 모든 불행에 가슴 아파해야 한다.태풍으로 인한 재난뿐만 아니라,수능 점수가 모자라 자살한 여고생에 대해서도,신용카드 빚으로 인해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서도,생활고로 하루에 평균 두 명이나 자살하는 세태에 대해서도,한국의 대통령은 가슴 아파해야 한다.진심으로 가슴 아프지 않더라도 눈물의 상징을 이해해야 하며,그것을 정치의 기술로 응용해야 한다.프로페셔널의 정치가 보고 싶다. 하 응 백 문학평론가
  • 冬鬪 해법없나 / (상)출구 안보이는 노정대결

    노조에 대한 손배소와 가압류를 중단하라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앞세운 과격시위로 이어지고 있다.잇따라 분신을 할 정도로 막다른 곳에 몰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경제에 미칠 악영향과 시위의 폭력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노동자들의 요구와 사측·정부의 입장,얽힌 갈등을 풀 방법은 없는지 3회에 걸쳐 살펴본다. 노동계의 동투가 급격히 격렬해지고 있다.손배소와 가압류에 따른 노동자의 잇단 자살을 계기로 열린 지난 9일 노동자의 시위현장에서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난무했다. 도심에서 화염병이 등장한 것은 1년8개월 만으로,참여정부 들어서는 처음이다. 앞으로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12일 민주노총이 8시간짜리 총파업을 펼친다.매주 파업을 벌이기로 하는 등 연말까지 각종 시위성 행사가 줄줄이 예고돼 있다.노동자들은 손배소와 가압류에 따른 자살의 연결고리를 이참에 반드시 끊겠다는 각오다.그러나 정부는 불법시위는 철저히 차단한다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어 노동자 대량 구속사태가 빚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출범 초기 보여주었던 참여정부와 노동계의 밀월관계는 지난 9일의 시위로 완전히 깨졌다는 게 노동계의 분석이다. 게다가 민주노총은 향후 노동계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면 강공으로 맞받아치겠다는 입장이다.우선 12일 제조업은 물론 철도와 지하철 등 공공부문까지 가세시켜 제2차 총파업을 강행키로 하는 등 투쟁수위를 당초 계획보다 한층 높이고 있다. 이어 매주 수요일에는 단병호 위원장을 배출하고,화염병을 준비한 금속연맹노조를 중심으로 집중투쟁에 나서기로 했다.또 ▲15일 노무현 정권 심판대회 ▲19일 농민대회 ▲12월3일 민중대회로 이어지는 각종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한국노총도 오는 23일 서울 대학로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노사개혁 로드맵 반대,정치개혁 등을 요구하기로 해 노동계의 동투는 이달 말쯤 절정에 이를 전망이다. 그러나 노동계 일각에서는 손배·가압류 문제 등 노동현안은 풀지 못한 채 ‘화염병 시위’를 계기로 따가운 여론의 지탄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노동계의 한 관계자는 “노동계의 근본적인 현안은 사용자의 지나친 손해배상청구·가압류를 금지하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라면서 “노동계와 경찰간 폭력사태로 이런 요구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폭력 부분만 부각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노총도 이날 성명서를 내고 “정부는 화염병시위를 이유로 노동계의 합리적 요구를 묵살하거나 의도적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해 노동탄압의 빌미로 악용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정부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차별해소와 공무원노동기본권 보장 등 당초 노동계와 약속했던 현안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정부도 노동계의 이같은 극한투쟁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정부는 이미 노무현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부터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5대 차별의 하나로 규정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또 노조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 개정작업에 들어갔으나 이 또한 노동자의 요구수준에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용수 기자 dragon@ ■험악해지는 시위현장 최루탄과 함께 90년대 중반까지 시위 현장의 ‘단골’이었던 화염병이 서울 도심의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다시 등장,시민을 긴장시켰다.그러나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대나 이를 막는 경찰 모두 화염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몰라 당황해했다. ●“설마 화염병을 던지랴” 9일 시위에서 나타난 화염병은 전날 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린 서울 흑석동 중앙대 교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10일 밝혀졌다.민주노총 산하 연맹 가운데 강경파인 금속연맹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800개가 제조됐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학생들로 구성된 사수대는 9일 오후 6시20분부터 30여분 동안 종로 일대에서 화염병을 던졌다.그러나 화염병 가운데 절반은 중도에 불이 꺼져,경찰이 이를 다시 시위대를 향해 집어 던지기도 했다.시위 지도부는 “전경 5m 앞까지 가서 바닥에 내리꽂아.”라고 연신 외쳤다.하지만 일부 사수대는 경찰 30m밖에서 불 붙인 화염병을 던지는 데만 급급했다. 경찰도 화염병 대처에 미숙했다.경찰은 이날 오후 금속연맹 간부 김모(37)씨가 중앙대에서 화염병을 싣고 시청앞 집회 장소로 향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남대문경찰서 측은 화염병 박스가 현장에 쌓여 있는 것을 알고 압수수색을 시도했지만 화염병 압수에 실패했다.경찰 관계자는 “‘설마 화염병을 던지랴.’ 싶어 적극 대응하지 않았다.”면서 “시청앞 현장에 있던 화염병 박스 주변에 사수대가 에워싸고 있어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이에 대해 민주노총 사무노련 박영기 상황부장은 10일 “경찰이 사전에 알고도 압수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폭력 시위를 유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너트 새총과 죽창까지 가세 이날 시위에서는 새총과 죽창도 나타났다.새총과 너트는 80년대 후반 노동자 집회 때 간간이 사용됐다.90년대 들어 자취를 감췄다가 지난 5월과 8월 1,2차 화물연대 파업 때 나타났다.농민 집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죽창도 이날 노동자집회에서 이례적으로 선보였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시위에서 화염병 사용을 공식 승인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나 정부가 노동 현안에 대해 가시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집회를 원천 봉쇄하는 등 강경하게 나온다면 ‘화염병 시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민주노총 공공연맹 나상윤 기획국장은 “정부가 폭력 진압으로 맞선다면 절박한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두걸 유지혜 기자 douzirl@ ■화염병 도화선 손배 가압류 실태 지난 9일 노동자들이 화염병까지 동원한 과격시위를 벌인 데 대해 노동계는 “노동자들이 직면한 현실이 절박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올 겨울 노동계의 최대 현안은 손해배상 및 가압류와 비정규직 차별 문제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현재 46개 사업장에서 1480억원대의 손배 가압류에 시달리고 있다.가압류 신청은 재산보전을 위한 임시적인 조치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대부분 받아들여진다.그러나 일단 가압류가 인정되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돼 노조원들은 엄청난 생활고를 겪게 된다.정부는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지만 노동자들은 믿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차별 문제도 심각하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784만여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55.4%를 차지하고 있는데 평균임금은 정규직의 51%에 불과하다.퇴직금,상여금도 대부분 받지 못하고,사회보험이나 휴가 등에서도 정규직에 비해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여기에 최근 한진중공업 노조 김주익 위원장,세원테크 노조 이해남 지회장,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위원장 이용석씨,한진중공업 곽재규씨 등이 손배 가압류와 비정규직 차별 문제로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됐다.9일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우리도 겁이 나지만 도심에서 수만명이 모인 모처럼의 기회에 ‘뭔가 보여줬어야만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고 토로했다.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사업자별로 수십억씩 가압류돼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하는 등 사태가 심각한데도 정부는 아무런 해결책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면서 “분위기는 격앙돼 있는데 정부에서 성의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또 노동자들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배신감’도 한몫하고 있다.어느 정부보다 친노동적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무현 정권은 자본과 수구보수세력의 참여정부”라고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장택동 이유종 기자 taecks@
  • [CEO 칼럼] 이제는 희망을 얘기할 때

    최근 한 방송에서 급증하는 자살 사건을 조명한 프로그램을 인상깊게 본적이 있다. 자살 동기 중 가장 큰 것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상실감이 깊이 내재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올들어 유난히 늘어난 ‘일가족 동반자살’의 현실은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생활고를 비관해 자식들과 동반 자살한 어느 주부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지만 비정한 현실의 한 단면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아 사회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높은 실업률과 자살률,이민열풍이 세태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국가 앞날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푸념만 할 수는 없다.더욱이 ‘IMF(국제통화기금)외환위기 때보다 더 하다.’는 게 요즘 통설이지만 빈익빈(貧益貧)부익부(富益富)의 논리로 이 모든 난제들을 풀어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목표로 각계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그러나 각각의 해법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점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건전한 기업 활동이 활성화되고 움츠러든 기업의 의욕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청년 세대들은 취업난을,중소기업은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다.무엇이 문제인가.견실한 중소기업들은 미래 우리 산업의 핵심이다.대기업 중심의 체질을 개선해 중소기업의 역량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인력 풀(pool)을 체계화해 인턴십 강화와 글로벌 현장 실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자리를 창출,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면 실업을 방지하고 산업 전반에 걸친 불경기를 해소하는 값진 열쇠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나라의 기본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지금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조국을 사수한 우리의 아버지와 형님들은 나라를 구해야 되겠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숱한 고통을 이겨냈다.전쟁의 파편이 던지고 간 허허벌판에서 맨 주먹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고 공업입국의 기치를 드높였다. 이같은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서로에 대한 믿음과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어떠한 상황에서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잠재적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고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을 수 있다. 가지지 못한 것,잃어버린 것에 대한 미련과 욕심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상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혹독한 시련은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했던가.태풍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재민도 남겼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희망만은 가져가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간절히 의지해야 한다.정부가 국민에게,대기업이 중소기업에,부유한 이가 가난한 이에게,명예를 가진 이가 평범한 이에게 또 그 반대의 입장에서도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과 요구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고 상생(相生)의 두바퀴를 만들어야 할 때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회적 무관심 속에 버려지는 또다른 비극적인 자살 사건을 계속 지켜보며 살아갈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태 용 대우 인터내셔널 대표
  • 기초단체장 보유 ‘의회사무국직원 인사권’/區의회로 이관 촉구

    지방의원들이 의회사무국 직원의 인사권을 자치단체에서 의회로 이전하기 위한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서울시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대표 이재창 강남구의장)는 31일 지방의회의 사무직 신설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의장회는 최근 모임을 갖고 “지난 7월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지방의원들의 ‘무보수 명예직’ 조항은 삭제됐지만 아직 의회직 신설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지방분권 시대에 걸맞은 의정 활동을 위해서는 사무국 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의회의 감시대상인 단체장이 갖고 있는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의장회는 이같은 결의를 바탕으로 의회직 신설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국회의원 전원을 대상으로 서명받기로 했다. 의회직 신설을 골자로 한 ‘지방공무원법중개정안’은 민주당 김성순 의원 등의 발의로 지난 6월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계류됐지만 이에 대한 검토는 다음 회기로 미뤄졌다. 현재 의회사무처 직원들 대다수가 ‘승진 후 자치단체로의 복귀’를 바라고 있어 집행기관에 대한 견제를 중시하는 지방의회의 의정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미국,일본 등에서는 지방의회나 의장이 사무직원을 임명한다. 의장회는 또 지방의원 활동비와 관련, 회기당 하루 7만원(광역의원 8만원)에 불과한 수당도 현실화해 줄 것을 행정자치부에 건의키로 했다. 의원 활동비 인상이 ‘총선용 선심행정’이라는 일부 비난 여론에 대해서도 “활동비가 지난 3년간 동결된데다 우수한 인력들이 ‘생활고’에 제약받지 않고 의정활동을 펴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므로 현실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이재창 의장은 “의회직 신설과 회기 수당 현실화를 위해 전국 3485명 기초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행자부와 국회에 전달한 뒤 조만간 대규모 결의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
  • [사설] 현실로 다가온 제조업 공동화

    경제가 골병이 들어가고 있다.극심한 투자 부진과 공장들의 해외 이전으로 국내의 생산기반이 무너지고 있다.거리에는 일할 곳이 없어 놀고 있는 청년 실업자들이 넘쳐 나고 시중에는 생산현장을 이탈한 뭉칫돈들이 떠돈다.부동산 투기는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노동계는 새로운 ‘동투(冬鬪)’를 준비중이다.경제의 구석구석 병이 깊어지고 있는데 정치권은 정쟁에만 몰입한 나머지 경제에 관심을 기울일 생각조차 않고 있다.경제가 나빠져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만 걱정이 태산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광업·제조업 통계조사가 시작된 지난 1967년 이후 35년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제조업의 생산설비가 전년 대비 1.7% 감소했다.경제개발이 본격화된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연평균 20%의 증가율을 보였고 심지어 외환위기 와중에도 증가세를 지속해온 것을 감안하면 우리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는지를 말해준다.설비의 신·증설이 이뤄지지 않고,기존 설비마저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생산설비가 줄면 경제는 성장을 멈추게 된다.제조업 공동화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경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가장 큰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SK 비자금으로 촉발된 불법 정치자금 파문이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과 특검 논란으로 이어지며 정치권이 연일 4색 당쟁에 빠져들고 있다.정치가 불안하면 경제가 불안해지고,경제가 불안하면 기업들은 투자를 포기하게 된다.그 결과 기업들은 해외로 떠나고,산업은 공동화하며,경제는 성장을 멈추고,일자리가 갈수록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이제 정치가 더 이상 경제에 걸림돌이 되게 해선 안 될 것이다. 국민들은 정치권이 제발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는 정치를 그만 접고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정치를 펴주기를 갈망하고 있다.지금은 경제 살리기에 국력을 모아야 한다.그 역할은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여야 정치 지도자들의 몫이다.
  • 탈북… 자진 재입북… 또 탈북…/다시 돌아온 경계인?

    남한에 정착해 살다가 생활고 등으로 자진 재입북했던 남수(사진·46)씨가 재탈북해 다시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확인됐다.국내에 정착해 한국국적을 취득한 탈북자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다시 입북해 활동하다 재탈북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으로 정부의 향후 처리 방향이 주목된다. 정부 소식통은 26일 “자발적으로 북한에 다시 들어갔던 탈북자 남씨가 다시 탈북해 지난 22일 국내에 들어왔다.”며 “현재 관계기관으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으면서 재입북 및 재탈북 경위,그간의 활동사항 등을 조사받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특히 남씨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재입북,북한에서 탈북방지 강연 활동 등을 해 왔다는 점에서 대공 용의점 등을 집중 조사할 것으로 전해졌다.남씨는 함경북도 온성의 우산공장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다가 탈북,지난 1996년 1월 홍콩을 거쳐 국내에 들어와 정착했으나 2000년 7월 중국으로 출국한 뒤 소식이 끊겼었다.이후 남씨는 북한으로 자진 입북했고 북한당국은 그를 탈출했다가 다시 돌아온 ‘모범’으로 선전하며 국경지역에서 탈북방지를 위한 강연을 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남씨는 남한에서 생활하는 동안 결혼을 해 아들 하나를 두고 있으나 자신이 개업한 식당 운영이 제대로 안되자 “정부가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며 불평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탈북자가 북한에 다시 들어갔다가 재탈북한 것은 지난 2001년 유태준씨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이지만 당시 유씨는 자진 입북이 아니라 아내를 만나러 밀입북했다가 북한당국에 체포돼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재탈북해 국내로 다시 들어왔었다. 이도운기자 dawn@
  • 외국 공무원에 한국교육 ‘외길’/국제교육협력관 박경배 씨

    한 자리에 1년을 채우기도 힘든 공직사회에서 23년 붙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분명 이색 공무원이다. 지난 80년부터 올해로 23년째 경기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경배(朴京培·52) 국제교육협력관(3급). 그는 그동안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113개국 2052명의 외국공무원 교육을 맡아 왔다.특히 20년동안 688명의 공무원을 교육원의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시킨 말레이시아 공직사회에서는 ‘한국 공무원의 대부’로 까지 회자되고 있다.그는 “우리나라 전체 공무원의 ‘얼굴’이 된다는 점에서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언제나 몸가짐에 조심 박 협력관은 교육원에서 근무하며 ‘절제’와 ‘성실’을 생활신조로 삼게 됐다.세계 여러나라에서 건너온 외국 공무원들의 눈에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한국공무원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는 점을 의식한 결과다. 그는 “잇따른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다보면 몸이 피곤할 때도 있지만 외국 공무원들을 의식해 싫은 표정을 지을 수 없다.”고 털어 놓는다.그렇다고 박 협력관이 우리의 좋은 점만을 교육하는 것은 아니다.외국 공무원들에게 한국의 발전상 뿐만 아니라 실패의 경험도 배워 시행착오를 줄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알려야 한다는 게 그의 교육철학이다. 박 협력관은 “외국 공무원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면 교육효과를 낼 수 없다.”면서 “외국 공무원들이 우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도록’ 배려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외국 공무원들 수료후에 한국 인식 바꿔 우리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채로 연수프로그램에 참가한 외국 공무원들은 이런 시스템의 교육을 받고 나면 이같은 인식을 바꾸게 된다고 박 협력관은 설명한다.외신을 통해 데모하는 모습 등 부정적인 면만을 집중적으로 시청해온 외국 공무원들이 수료 때는 한국인들을 땀으로 기적의 드라마를 일궈낸 국민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처음과 끝이 다른’ 외국 공무원들의 이런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외국 공무원들에게 ‘한국 공무원의 얼굴’이 돼 버린 박협력관은 처음부터 공직을 흠모하거나 천직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숭전대(숭실대 전신) 대학원을 76년에 졸업한 그는 대전 목원대와 한남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시간강사 생활을 해왔다.예나 지금이나 생활고를 겪는 시간강사를 4년동안 하다보니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때마침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별정직인 어학담당 계장(5급)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딱 2∼3년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80년 공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징검다리로 삼겠다는 요량이었다. ●토종 영어의 전도사 그러나 공직자가 된 뒤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그는 “문동후 전 월드컵조직위원회 사무총장과 김범일 대구시 정무부시장,박명재 중앙공무원교육원장 등 능력있는 분들을 모시면서 일을 배우다 보니 선입견들이 하나둘씩 무너졌다.”고 회고한다.결국 그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발판삼아 외국 공무원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데 한평생을 걸게 됐다. 교육원에서 우리말보다 영어로 말하는 시간이 더 많은박 협력관은 ‘토종 영어’의 전도사이기도 하다.집과 사무실에서 CNN과 BBC를 항상 틀어놓고 매일 4∼5시간씩 영어를 공부한다.“영어에는 왕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그는 “‘멍청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공부하는 게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태어나도 공직자가 되겠다.”는 박 협력관은 자신의 ‘외길 인생’을 추호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자신과 같이 한 길을 파온 사람들이 자주 배출돼야 우리 공직사회도 행정의 전문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종락기자 jrlee@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
  • ‘동반자살 희생’ 딸 동시집 출간 김지인 양 어머니 ‘꽃도 눈물‘

    (별아 별아 / 넌 숨지도 못하지? / 초롱초롱 하얀 눈땜에 / 숨지도 못하지?)지난 6월23일 생활고를 겪던 아버지가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어린 두 딸과 동반자살을 하면서 짧은 생을 마감한 고(故) 김지인(11·충남 태안초등학교 5년)양이 하늘나라로 가기 직전 쓴 ‘별’이란 동시의 전문이다. 네살배기 동생(예인)과 함께 이승을 슬프게 떠난 김양이 시인을 꿈꾸며 생전에 썼던 동시와 일기를 한데 묶은 ‘꽃도 눈물을 흘린다’(오늘의 문학사)란 동시집이 출간됐다. 이 시집은 김양의 어머니 김순영(35)씨가 다니는 교회 목사 최장희(46·시인)씨와 함께 사랑했던 두 딸의 유품을 정리하다 아름다운 동시와 진솔한 내용의 일기가 담긴 큰 딸의 일기장을 발견하면서 빛을 보게 됐다. 134쪽 분량의 이 동시집에는 ▲‘별’,‘동생’ 등 김양의 동시 50편 ▲‘배드민턴’,‘칼국수가 먹고 싶은 날’ 등 김양의 일기 20편 ▲사랑했던 두 딸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절망과 슬픔,애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하루’ 등 시 17편과 ‘맹순이 내 딸’ 등 일기 7편이 실려 있다. 태안 연합
  • 냉대·무관심 못 견뎌…/ 장애할머니·손자 자살 시도

    지체 장애인 할머니와 손자가 사회의 ‘무관심’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동반자살을 시도,할머니가 숨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5일 오후 4시30분쯤 대전시 서구 모 아파트 1113호에서 김모(72·여·장애 2급)씨와 손자 구모(27·장애 3급)씨가 수면제를 다량 복용해 의식을 잃은 것을 옆집에 사는 지모(66·여)씨가 발견해 119응급구조대에 신고했다.이날 김씨는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숨졌고,구씨는 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중풍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씨와 정신지체 3급인 구씨 단 둘이 살아온 방 안에서는 수면제 봉지 수십개와 구씨가 노트에 쓴 유서 4장이 발견됐다.유서에는 ‘장애인’으로서 받아온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이들의 한달 생활비는 김씨에게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장애연금 20만원이 전부였으며,몸이 건강한 구씨는 직장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번번이 ‘장애’를 이유로 거절당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 프리랜서 기자천국 日

    “여자에게 금단(禁斷)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스모(일본 씨름)를 취재하다 보면 승부에 전력투구하는 ‘남자’를 가까이서 실감할 수 있어 매력을 느낀다.”사토(35·여)는 스모 전문기자이다.신문사나 방송국,잡지사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 라이터’(프리랜서 기자의 일본식 표기)이다.프리 라이터의 길을 택한 것은 9년 전.대학을 졸업한 24살 때 사진 주간지인 ‘프라이데이’에 입사,스모를 맡게 된 것이 “평생의 운명을 결정한” 스모와의 만남이었다.2년 뒤 안정된 월급,이름있는 주간지의 명함을 버리고 사토는 ‘프리 선언’을 했다.“명령받고,쫓기는 생활이 싫었다.”는 것이 이유다.신문·방송의 스모 담당기자를 제외하고 스모계를 취재하는 프리 라이터는 10여명으로 그 가운데 여자는 2명이다.거물 스모선수를 연속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는 그녀는 “주위에서 ‘몸을 이용한 것 아니냐.’는 시샘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그만큼 벽이 높고 보수적인 스모계에서 여성이 10년 가까이 프리 라이터로 ‘생존’하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에는 득실거린다고 할 정도로 유난히 프리 라이터가 많다.숫자를 헤아릴 만큼 희소한 한국과는 딴판이다.어떤 프리 라이터는 “2만명 정도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별다른 자격이 필요없는 것이 프리 라이터인지라 그 숫자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본 다나카 가쿠에이’란 책을 쓴 바 있는 쓰루(59)는 그 이유를 “뭔가 기록하고 남기고 싶어하는 활자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뿐만 아니라 웬만큼 글을 쓰면 글 하나로 살아갈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갖춰져 있는 점도 프리 라이터를 다량 배출하는 환경의 하나다.일단 글을 실어줄 매체가 많다. 수천종의 잡지가 쏟아져 나오는 일본은 프리랜서가 활동할 공간이 넓은 편이다.뭔가 쓰고 싶은 사람,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굳이 신문이나 방송사를 택하지 않아도 일정한 실력을 갖추면 프리 라이터가 될 수 있는 셈이다.출판·잡지사는 사원을 고용하는 부담보다는 프리 라이터를 그때그때 활용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다양한 전력의 소유자들프리 라이터의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 뭔가를 쓰고 싶었던 사람들이다.그래서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도 오랜 시간에 걸쳐 꿈을 이루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간노(40·여)는 대학 졸업 후 은행에 들어가 “평범한 OL 생활을 하다,이게 아니다 싶어” 박차고 나와 A신문사 광고국에 계약직 사원으로 재입사했다.“기자로 가는 길에 가깝기 때문”이었다.신문사에 들어갔으나 광고국인 탓에 글을 쓸 수 없었던 그녀는 다시 경제전문 주간지로 옮겨 편집자의 길을 걷는다.결국은 2000년 한국 젊은이들의 반일 감정에 관한 책을 써 프리 라이터의 직함을 갖게 된다.14년 만에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재일교포 2세인 이택수(35·가명)씨는 조총련계 기관지에서 7년간 기자로 일하다 2001년 프리로 독립했다.기관지 기자 생활은 “프리 라이터를 하기 위한 과정”이었다.지난 7월 ‘한국은 드라마틱-엔터테인먼트로 보는 한국 스타일’이라는 책을 쓴 다시로(37·여)는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게이오대 국문과를 나온 그녀는 대졸 여성들이 선망하는 아나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 홍콩 유학을 거쳐 4년 전부터 한국 연예계에 관한 기사를 취재하는 프리 라이터의 길에 들어섰다. ●프리여서 좋지만 수입은 불안정 자기가 취재하고 싶은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매력에 빠져 프리 라이터의 길에 들어섰지만 수입이 적어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다시로는 “아나운서 시절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미치는 아슬아슬한 생활”이라고 털어놓는다.세무소에 신고한 2002년도 수입은 월 평균 20만엔을 넘지 않았다.올해는 좀 넉넉한 편이다.한국 드라마 ‘겨울 소나타’가 일본에서 크게 히트를 친 덕분에 한국 연예계에 갖는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아져 책이 잘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을 드나드는 취재경비나 집 월세,생활비 등을 빼면 여유로운 생활은 꿈꾸기 힘들다. 이택수씨는 “작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이후 북한과 조총련 사정에 관한 원고 의뢰가 많이 들어와 올해 700만엔의 수입을 예상하고 있지만 프리로 전업한 첫해에는 월 5만엔에도 못미치는 수입으로 힘겨웠다.”고 말한다.우익계 잡지건 좌익계이건 “거절하지 않고” 원고를 쓰고 있는 그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택수씨의 경우만 해도 행복한 편이다.상당수 프리 라이터는 살인적인 일본의 고물가 속에서 월 20만엔에도 못미치는 불안정한 원고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간다.그래서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프리에서 조직의 룰이 지배하는 신문사나 공무원의 세계로 역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생활고로 프리에서 재취업 주간지 기자로 활동하다 이름을 얻어 작년 프리 선언을 했던 마쓰모토(36·가명)는 얼마전 신문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중학생을 포함,세 아이를 둔 가장인 그는 고액의 연봉이 보장되는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변신했다.쓰루는 지방의 조그만 지방자치단체의 촉탁직원으로 일한다.도쿄의 출판사,잡지사의 인맥 관리가 힘든 지방에서 프리로 활동하기가 어려운 만큼 고정적 벌이를 확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뒤늦게 공무원이 된 것이다. 이씨는 다른 이유에서 전업을 궁리하고 있다.그는 “일본의 지방경제를 취재하고싶지만 프리 라이터의 신분이나 불안정한 수입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 몇년간 신문사의 지방 지국에 입사해 취재를 하는 방법도 생각 중”이라고 귀띔했다.이름만으로도 통하는 초일류 프리 라이터가 되지 않는 한 ‘프리 라이터’라는 명함 한 장으로는 취재 장벽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이다.간노는 “○○잡지의 기획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 간노라고 소개하지 않으면 프리 라이터가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전한다. ●어둠의 세계 취재하다 봉변 지난 12일 도쿄항 해상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사체의 신원은 프리 라이터 소메야(38).조직폭력배 취재를 하고 있던 그는 “살해당할지 모르겠다.”고 평소 주변사람들에게 말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그는 옴 진리교의 관련시설에 신자를 가장해 잠입취재를 하는 등 평소 접근이 힘든 조직폭력배,중국인 범죄조직,고리업 세계 등을 취재,기사를 쓰고 책도 펴냈다. 이처럼 프리 라이터 가운데는 신문·방송이 좀처럼 다루지 않는 분야에 목숨을 걸고 취재 활동을 펼치는 사람도 더러 있어,언론의 영역을 넓히는 데 언론사의 기자 못지않은 활약을 하기도 한다. marry01@ ■프리 라이터 스즈키 아키라 |도쿄 황성기특파원|스즈키 아키라(사진·57)는 이색 경력을 지닌 프리 라이터이다.거품경제 시절 일본 증권가인 가부토초에서 ‘시테카부(주가 조작)’로 이름을 떨친 마법의 손이었다. 일본 경제에 거품이 한창이던 1980년대 수천억엔대를 주물렀던 장본인.많았을 때에는 130억엔의 개인수익도 올려봤다는 그는 1990년 거품의 종언을 알리는 일본 정부의 ‘총량규제(總量規制)’ 발표와 함께 가부토초에서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그는 수개월 뒤 프리 라이터로서 재기에 나선다.“마이니치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로부터 주가 조작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4쪽짜리 원고를 15만엔에 써주었던 것이 출발이었다.” 그는 모두 15권의 책을 써냈다.올 3월에는 ‘뒷골목 비즈니스,어둠의 연금술’이라는 경제의 추한 이면에 관한 문고본을 출판했다.지금은 2차대전 패전 직후 일본 지하경제에 관한 문고본 출간을 같은 출판사에서 의뢰받고 자료를 수집 중이다. “국회도서관 같은 큰 도서관과 신문사를 돌며 몇십년 전 자료를 모으는 외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증언해 줄 옛날 사람을 만나는 게 큰 일”이라는 그는 “이 나이에 다리품 팔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것이 고충이라면 고충”이라고 말한다. 컴퓨터로도 집에서 자료 검색을 할 수 있으나 워낙 검색료가 비싸 엄두를 못낸다.“경기가 좋았을 때 같으면 출판사에서 경비를 다발로 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고 한다.그가 작년도 세무소에 신고한 수입총액은 500만엔쯤.“잘 나갈 때의 10분의 1에도 못미치는 수입으로 ‘거지’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는 지금 자료수집 중인 책을 쓰게 되면 150만엔쯤의 인세 수입을 올려 “당분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빙긋 웃는다. “우리처럼 400자 원고지에 글을 써서 1장당 얼마에 팔아 살아가는 프리 라이터를 자학적으로 ‘100엔 라이터’라고 부른다.”는 스즈키는 “이 직업은 50살 넘으면 힘들어서사실상 생명이 끝난다.”고 손을 저었다.
  • 車문 잠근 채 방화… 실직가장 일가5명 동반자살/생명 앗아간 잘못된 가족관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 동반자살이 늘고 있다.자살 수법도 독극물,투신자살,차량방화 등 점점 엽기적으로 바뀌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족 동반자살은 가족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가져오는 명백한 범죄행위라면서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부모들의 왜곡된 가족관이 개선돼야 하고 허술한 사회안전망도 하루 빨리 완비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가족 5명 동반자살 26일 오전 6시쯤 전북 전주시 덕진구 고랑동 삼화마을 앞 둑길에서 전북 29고39XX호 쏘나타 승용차(소유주 우모·36·전주시 동산동)에서 불이 나 일가족 5명이 숨졌다.사망자는 우씨와 아내 손모(35)씨,두 딸 대윤(9·초교 2년)과 수민(7)양,아들 봉주(4)군 등이다.사망 당시 우씨는 운전석에,아내는 운전석 뒷좌석에 있었으며 아이들은 조수석과 뒷좌석에 각각 타고 있었다. 경찰 조사결과 우씨는 H사료 직원이었으나 지난해 12월 부도가 나 놀고 있었고 부인은 B학습지 교사로 맞벌이를 해왔다. 보증금 2400만원의 24평형 임대아파트에 살았던 우씨는 지난해 아버지(65·충남 논산시)가 집을 저당잡히고 2000만원을 대출해준 돈을 받아 생활해 왔지만 99년과 2001년 가입한 S생명 보험료(월 22만원)를 지난 1월부터 내지 못하는 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 정모(54·전주시 진북동)씨는 “경적소리가 나 보니 승용차에 불이 나고 있었고 운전자는 머리를 핸들 위에 얹고 있었다.”고 말했다. 신고자 이모(42·전주시 서신동)씨는 “불을 보고 승용차 문을 열려 했으나 안쪽에서 잠금 장치를 해 열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감식 결과 부인과 자녀의 시체가 심하게 훼손됐지만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반항하거나 움직인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씨가 부인과 자녀들을 살해한 뒤 자신도 목숨을 끊기 위해 승용차 문을 잠그고 차 안에 불을 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동반자살 실태 지난 16일 경남 밀양시의 한 여관방에선 사업실패로 수십억원의 부도를 낸 송모(49)씨와 일가족 5명이 농약을 마시고 숨진 채로 발견됐다.앞서 11일에는 경기도 군포시에서 이모(39)씨가 아내와 아들 2명을 승용차에 태운 채 저수지로 돌진,아들들만 낚시꾼들에 의해 구조됐다. 경찰청에 따르면,지난해 총 자살자는 1만 3055명으로 1년 전의 1만 2277명에 비해 6.3% 증가했다.올해에도 7월 말 현재 600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자살원인별로는 지난해와 2001년 전체의 14%이던 생계이유 자살비율이 올들어 17%로 증가했다. ●전문가 분석 한양대병원 정신과 안동현(安東賢) 교수는 “가족 동반자살은 부모의 잘못된 가족일체감에 있다.”면서 “부모가 ‘자식은 내 생명의 일부분’이라고 생각,마음대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주 임송학·황장석기자 shlim@
  • 민주당 전문위원 8명 “속타네”

    정부 부처에서 민주당에 파견된 전문위원들의 속앓이가 심하다.모두 8명이다.민주당 분당으로 통합신당이 사실상 정치적 여당이 돼 전문위원들이 더이상 민주당에 남아 있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한 뒤 상당기간 특정 정당의 당적을 갖지 않은 채 각 정당과 ‘사안별 정책연합’을 추구해 나갈 경우 이들의 향후 거취는 더욱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높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8명의 민주당 전문위원들은 분당 이후에도 여의도 민주당사 6층에 위치한 정책위원회실에 매일 출근하고 있지만,사실상 업무를 놓은 상태다.향후 거취와 관련해 대통령의 당적이 모호해지면서 통합신당으로 가야할지,민주당에 남아야 할지,아니면 정부 부처로 원대복귀해야할지 고민에 빠져 있다.정부 파견 전문위원들은 대통령과 당적을 같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A전문위원은 “부처에서 온 전문위원들은 통합신당으로 가기로 의견을 모은 상태”라면서 “그러나 대통령이 상당기간 신당에 입당하지 않고 무당적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 고민스럽다.”고 토로했다. 이들의 거취가 불투명해지면서 신분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매달 민주당으로부터 지급받던 450만원가량의 월급이 다음달부터 끊길 공산이 적지 않아 뜻밖의 생활고를 겪어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행정자치부에서 파견된 이승우 전문위원은 내년 총선에서 서울 마포을에 출마하기 위해 사직과 함께 통합신당 입당을 결정했다. ●부처 복귀도 쉽지 않아 전문위원은 대부분 부처 국장급 공무원 가운데 1급 승진대상자 중에서 선발한다.갓 승진한 1급이 전문위원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여당에서 1∼2년 근무한 뒤 소속 부처로 원대복귀하게 된다.공직을 사퇴하고 여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취하며,부처로 복귀할 때에는 탈당계를 내고 특채 형식으로 부처로 되돌아온다.그러나 현재 부처마다 빈 자리가 없어 복귀 결정이 내려져도 상당기간 대기발령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과 비슷한 상황은 지난 98년의 정권교체기에도 있었다.그때는 정권 말기였고 지금은 정권 초기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당시 한나라당에 파견된 전문위원들은 우여곡절 끝에 소속 부처로 되돌아갔지만 대부분 2∼3개월 만에 공직을 떠났다. B전문위원은 “전문위원들에게 힘이 실리는 정권 초기인데도 미아신세가 될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면서 “전문위원을 지원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한탄했다. 이종락기자 jrlee@
  • [마당] 지친 대학강사들의 뒷모습

    “대학강사 5년이면 총기자율화를 주장하고,대학강사 10년이면 전쟁이나 천재지변의 징후를 반가워한다.” “대학강사 5년이면 반항인 되고,대학강사 10년이면 폐인 된다.” 대학강사 시절 강사들끼리 주고받던 자조적인 농담들이다. 자가발전적으로는 ‘프리랜서’,자기부정적으로는 ‘일용잡직’,자기관찰적으로는 ‘보따리장사’.한 외국인 교수는 ‘상아탑의 노예’라고도 했던가.대학강사는 대학 수업의 50% 이상을 담당하지만 대학 교직원에 속하지 않는다.의료보험은 물론 월급(월급이 아니라 시간강사료라 한다.)도 없고 그러니 수당도 상여금도 퇴직금도 없다. 대학강사는 가방이 많다.요일별,대학별,과목별로 출석부와 교재와 강의안과 과제물 등을 가방별로 구분해서 넣고 다녀야 한다.연구실이 없는 대학강사들은 벤치나 차안이 연구실이다.그곳에서 식사를 하고,강의 준비를 하고,심지어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한다.대학강사는 ‘구멍난’ 모든 과목을 가르친다.자신의 전공이 아니면 공부하면서 가르친다.그러나 그 구멍이 메워지면 다음 학기로 그만이다.대학강사는 강사료로 먹고살지 못한다.평균 연봉이 800만원이니 배우자들이 생계를 책임지기 일쑤고,돈이 되는 그밖의 부업을 해야 한다. 열혈 신참강사를 만나면 노련한 고참강사는 반농담 삼아 일갈한다.“야,야,힘빼지 마라,받는 만큼만 가르쳐!”라고.시간당 평균 강사료가 3만원을 밑도니,수강생이 100명이라면 1인당 300원어치만 가르치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게다가 강의 시간의 서너배,경우에 따라서는 열배에 해당하는 수업준비 및 수업 운영 및 평가에 투자되는 시간까지를 합친다면.이런! 나는 이해할 수 없다.같은 학위와 같은 연구실적을 가지고 운좋게 교수가 된 사람과 교수가 되지 못한 강사의 연봉이 10배나 차이 나는 현실과,자신감과 자존심으로 연구와 교육에 몰두해야 할 시기에 생활고와 줄서기로 소진해야 하는 이 현실을.만년 강사가 이혼의 사유가 되기도 하는 현실과 6만명의 강사들이 자녀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평생 대학강사나 해먹고 살아라.”가 가장 큰 욕이 되고 있는 이 현실을. 조금 과장한다면 박사 2명 중 1명이 실업자이고,인문학 박사나 여성 박사는 그 배를 넘어서 4명 중 3명이 실업자에 육박해 있다.대학교육 이외에도 무려 5년에서 10년을 진골이 빠지도록 공부해서 최저 생계비조차 책임질 수 없다면 누가 이 지루하고 초라한 자리를 지키겠는가.명석하고 명민한 젊은이들이 모두 이 자리를 기피한다면 우리 사회의 지식 인프라는 붕괴될 것이고 창조력은 고갈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오늘의 교육이 내일의 사회를 낳는다.특히 대학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장 전문적이고 가장 실용적인 미래 교육을 담당한다.그렇다면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대학강사들의 비전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비전을 퍼뜨릴 수 있는 포자가 아니겠는가.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학문과 교육에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여건 마련과 그 제도적 개선은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이다. 얼마 전에 읽은 대학강사 시인이 쓴 시구절이 떠오른다.“강의동 현관의 ‘잡상인 출입 금지’ 푯말 앞에서/속이 뜨끔해지는 선생”,“가르치기는 하되 ‘쯩’이 없는사람/이 생 전체가 집행유예이고 무임승차”인 사람,“가판대에서 뉴 밀레니엄 복권을 사는 선생/연말은 언제나 파산지경인데 새천년인데”(이영광 ‘함박눈’)… 정 끝 별 시인 열린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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