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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기름값, 소비자만 봉인가

    치솟는 기름값 때문에 가계의 자동차 연료비 및 교통비 부담이 점점 커지고, 산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휘발유, 액화천연가스(LPG), 경유 등 자동차 연료비는 올들어 5월 말까지 7.8% 올랐다. 이는 같은 기간의 소비자 물가상승률 1.9%의 4배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휘발유 소비자가격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물론 중국 등 경쟁국에 비해 훨씬 비싸다. 높은 유류세율 탓이다. 미국은 17%, 일본은 46%가 세금이지만 우리나라는 소비자 가격의 60%가 세금이다. 덕분에 유류 관련 세금수입이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나 지난해에만 정부는 25조 9000억원을 거둬들였다.6년만에 10조원이나 폭증한 것이다. 고유가 논쟁이 일자 재경부는 유류세는 그대로 두고 휘발유, 경유 등 수입완제품의 관세율을 5%에서 3%로 낮추겠다고 했다. 그러나 수입완제품은 국내 판매 비중이 2%도 안 되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그야말로 생색내기식의 정책이다. 이제 자동차는 서민들에게도 필수품이 됐다. 휘발유는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다. 자동차를 운전해야 먹고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지금의 유류 고세율 정책은 소비자의 고통 위에 정부와 정유회사만 배불리는 구조다. 소비자를 희생시키는 정책은 더 이상 정당하지 못하다. 에너지 절약은 세금이 아니라 기술개발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유류세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손쉽게 세금을 거둘 수 있다고 해서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다.
  •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2) 강원도 춘천시 동면 품걸리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2) 강원도 춘천시 동면 품걸리

    소양호수변 가리산(해방 1050m) 자락에 위치한 산간 마을 품걸리(品傑里). 품걸리는 소양호가 생기면서 물길로 고립돼 첩첩 산중에 들어 앉은 춘천시의 ‘등잔 밑’ 마을이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50분 정도 들어가면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육로로 가려면 홍천 시내에서 야시대리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가, 다시 원시림 같은 울창한 숲을 따라 난 비포장 임도를 따라 산 고개를 오르내리며 15㎞를 더 가야 한다. 품걸리로 가는 육로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고요한 숲과 산새뿐. 터지지 않는 휴대전화는 이내 쓸모가 없어진다. 마을에 들어서자 짝짓기 철을 맞이한 고추개구리들이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이방인을 맞이한다. “길을 잘 찾아 오셨네요!” 이장 김성민(51)씨가 부슬비가 내리는 와중에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인심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외로움이 배어 있었던 것일까. 연신 웃는 얼굴로 반가워하더니 끼니를 거르며 산길을 짚어 온 손님에게 이내 점심부터 권한다. 더덕에, 취나물에, 자연산 푸성귀 반찬이다. “이기… 꿀로 만든 술이래요. 토종 꿀로 만든 술인데, 꿀 술 드셔봤어요?” 입에 넣기도 전에 침부터 넘어간다. 천천히 한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목으로 넘기자 숲 향기가 살짝 나는 것이 달달하면서도 찌릿하다. “여긴 학교가 없어요. 애들 공부 때문에 부인네들이 다 춘천에 나가 있지요.” 대부분의 가장들이 홀아비 아닌 홀아비 생활을 한다고 불평한다. 주민이 80가구 400여명에 이르던 예전에는 초등학교 분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날이 쇠락해 지금은 토박이 30가구와 외지에서 들어온 5가구를 포함해 80여명만이 살고 있다. 논이 얼마 되지 않는 이곳에서 주민들은 주로 다락밭을 일궈 고추, 호박, 더덕 등을 심고 토종꿀을 치며 산다. 박광호(70)할아버지는 토종꿀을 특산물로 생산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벌 도사’로 통한다. 이곳에선 너나 없이 시각장애인인 박씨에게 봄철 분봉 날짜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기술을 지도받는다. 네 살 때 시력을 잃었다는 박씨. 그는 스물다섯 되던 해에 우연히 이웃집 벌통에 드나드는 벌들의 다양한 소리에 흥미를 갖게 됐고 그때부터 3년동안 벌의 날갯 짓 소리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 후 본격적인 토종꿀 농사를 시작해 지금까지 40년 동안 토종꿀을 따오며 살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토종꿀 재배는 이제 마을의 큰 수입원이다. 비포장 임도인 늘목 고개에서 만난 품걸1리 김호성(52)씨.4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다. 그는 더덕과 고추 농사를 하고 있지만, 매일 오후4시가 되면 계약직 집배원으로 변신한다. 소양댐 수몰 지구를 운행하는 배가 전해주는 주민들 우편물을 받아 오토바이를 타고 전달하는 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아진 게 있어야지. 생필품이나 구입할 수 있도록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홍천읍내 행 버스가 다니면 좋겠네요.” 김씨의 투정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숙원으로 들렸다. 이튿날도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자 이장은 밭일을 못한다며 조촐한 마을 잔치를 마련했다.2년 전에 폐교된 분교를 공동임대해 운영하는 민박집 운동장으로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였다. 각자 준비해 온 음식으로 시작된 점심은 시간에 겨 때우는 끼니가 아니라서 그런지 느긋하고 한가롭다.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얼굴도 얼큰해지고 분위기도 푸근해진다. “품걸리 주민은 큰 욕심이 없어요. 지을 수 있을 만큼 농사를 지어 수확하는 것에 만족하지요.” 막걸리 한사발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주민들에게서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의 철학이 느껴진다. 사진 글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목포 남서쪽 105㎞ 조그만 섬 ‘만재도’

    목포 남서쪽 105㎞ 조그만 섬 ‘만재도’

    바다는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게다. 꼭꼭 숨겨두고 자기만 바라보고 싶었던 게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05㎞ 떨어진 외로운 섬 만재도(晩才島).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작고 앙증맞은, 여자아이 같은 섬이다. #고요함 속에 아름다움이 숨쉬는 곳 만재도는 ‘먼데섬’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우리나라 섬 가운데 접근하기가 가장 어려운 섬 중 하나다. 무려 5시간여나 걸린다. 흑산도와 홍도 등을 에둘러 돌아간 쾌속선이 맨 마지막에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5.5㎞.45가구 100여명의 주민들이 변변한 밭뙈기 하나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뭍에서 접근하기가 어려운 만큼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자동차는 물론 오토바이도, 경운기도 없다. 간간이 들려오는 어선 엔진소리를 제외하면 온통 자연의 소리뿐이다. 만재도에서 가장 먼저 외지인의 넋을 빼는 것은 ‘앞짝지’해수욕장. 앞산 밑 ‘건너짝지’, 마을 남쪽 벼랑아래 ‘달피미짝지’ 등 세 곳의 몽돌해수욕장 중 대장격이다. 둥그런 반원을 그리며 돌아나가는 모양새가 어찌나 정연한지, 반월도(半月刀)를 보는 듯 하다. 차르르∼. 몽돌사이로 빠져나가는 파도 소리가 꼭 여자아이의 웃음소리를 닮았다. 해안가에서 먹이를 잡던 흰날개해오라기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 옥빛 바다위로 줄행랑을 친다. 뭍에서 사는 잿빛의 해오라기와는 달리 하얀 날개를 가진 녀석이다. 앞짝지 해변에서 볼 때 왼쪽은 앞산, 오른쪽은 큰산, 멀리 뒤쪽은 물세이산(물살이 센 산)이다. 먼저 만만해 보이는 앞산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인 바위들이 절경을 그려내고 있다. 고저장단을 맞추며 서 있는 것이, 마치 파도소리에 맞춰 춤사위를 펼치는 듯하다. 무릎까지 자라난 풀숲을 헤치고 조금 더 오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눈을 의심케 한다. 왼쪽은 현란한 자태를 뽐내는 암석해변, 오른쪽은 단순하면서도 고고한 몽돌해변으로 나뉘어지는 것. 두 개의 반월도가 시퍼런 날을 맞대고 선 형국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은 큰산(176m)이다. 할아버지 당산과 등대를 차례로 지나면 곧바로 까마득한 낭떠러지. 이 절벽 아래 만재도가 자랑하는 주상절리대가 있다. 직사각형의 바위를 차곡차곡 포개 놓은 듯하다. #언제나 평온한 쉼터 뭍과 유리된 탓에 믿기 어려운 얘기들도 전해져 온다. 뱃길이 끊기는 경우가 많아 자유당 말기에 병역기피자들이 숨어들기도 했고, 세금받으러 간 목포세무서 직원은 두 달 가까이 갇히는 바람에 집에서 젯상받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도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황금어장으로도 소문나 있었다. 조기가 겨울을 나고, 전갱이·다랑어·농어 등 고급어종들이 회유하는 길목이어서 연중 어로가 가능했다. 해녀들이 마을 앞 공동어장에 자맥질 한번 하면 전복 등 해산물이 광주리에 가득찼다. 재물이 가득차 있다 해서 ‘만재도(滿財島)’라 불렸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요즘도 물고기가 많이 나기는 하지만 예전만은 못하다. 최규환 이장은 “한 때 ‘돈 섬’이라 안혔소. 그란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전갱이가 몇십년 전부터 딱 끊기면서 궁벽한 섬이 되부렀지라. 요즘엔 주민 3분의2가 기초생활 수급자요.”라며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5월1일부터 목포에서 쾌속선이 매일 운항하면서 주민들은 관광지로서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폐교가 된 흑산초등학교 만재분교를 콘도로 리모델링하고,‘쇠끝너머(마을너머)’에는 지하수를 담수해 하루 100t가량 생산할 수 있는 취수원도 마련해 놓았다. 부녀회에서는 외지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간단한 생필품을 구비한 편의점도 열 계획이다. 여유로운 쉼이 있어 좋은 곳. 이제 뭍과의 거리는 적잖이 좁혀졌다. 주민들의 삶도 점차 나아질게다. 하지만 지금의 평온한 모습만은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글 사진 만재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비하인드 뉴스] 美쇠고기 검역 수입업체 ‘꼼수’ 못말려

    ●美 현지서 `X-레이´ 3번 검사후 수출 3년 5개월만에 시중에 유통된 미국산 쇠고기가 검역과정에서 지난해와 달리 ‘뼛조각’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가 수출업체측의 발빠른 ‘사전 정지 작업’ 때문이라는 후문. 한 육류수입업체는 “수출 직전 미국 현지에서 물량 전체를 ‘X-레이’에 3번이나 통과시켜 미세한 뼛조각들을 모두 걸러냈다.”면서 “기계 성능도 한국 것보다 한 수 위라 농림부가 뼛조각을 발견하려 애를 써봤자 헛심만 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농림부 관계자는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이 검출되면 ‘박스 부분 반송’이 아닌 ‘전체 물량 반송’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수출업체들이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2t남짓 소량으로 5차례 이상 나눠 수출하는 ‘꼼수’를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남북철도 개통은 1회성 행사? 지난 17일 남북 철도의 시범운행 이후 단계적인 철도 개통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일각에선 ‘1회성 행사’로 그칠 것이라는 지적. 당시 개성을 다녀온 정부 관계자는 25일 “북측의 관심은 철도 운행보다 우리가 지원을 약속한 경공업 물자와 쌀 등에만 쏠린 것 같다.”고 말했다. 개성에서 열린 환영 행사만 해도 과거 장관급 회의에 비해 훨씬 소규모였고 주민들의 접근도 철저히 차단했다는 것. 특히 시범운행에 대한 북한의 보도가 거의 통제된 것을 감안하면 최근 기본적인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이 마지못해 우리측 요구를 수용했을 뿐이라는 분석.●생보사 공익기금, 관심 NO! 앞으로 20년에 걸쳐 조성될 생보사 공익기금 1조 5000억원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 생보사들이 마뜩찮다는 반응. 지난 4월 조성안이 발표된 뒤 돈은 아직 한푼도 모아지지 않았는데 생명보험협회에는 기금 사용에 대한 제안이 이어지고 있다고. 청와대 김용익 사회정책수석은 지난 22일 저소득층의 자활을 위한 사회투자재단 재원으로 생보사 공익기금이나 상장차익 등을 기부 형태로 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생보협회가 마련중인 공익기금은 저소득층과 빈곤층을 위한 보험, 자살방지 활동, 생명건강연구소 등 보험업계의 신뢰를 높이는 데 쓰기로 돼 있다. 보험업계는 공익기금이 궁극적으로는 계약자 돈인데도 공짜돈이라 생각하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기자실 통폐합에 공적 금융기관들 ‘어찌하오리까’ 정부가 기자실을 통폐합하겠다고 발표하자 증권거래소 등 공적인 성격의 금융기관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모습. 다만 금융감독원의 기자실 운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금감원이 기자실 운영에 변화를 줄 경우 ‘따라하기’에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새롭게 기자실을 만들거나 기존 기자실을 확대하려던 공기업들도 계획을 연기하고 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영역 확대를 위해 기자실 신설이 급선무이지만 일단 내년 이후로 계획을 미뤘다.”면서 “기자실 통폐합 역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지급결제권 논쟁에서 은행들이 진 것은 당연? 결제리스크를 감독하는 한국은행이 초기에 증권사의 지급결제 허용을 막아보기 위해 관련 국회의원 등과 접촉해본 결과, 증권사가 은행을 이긴 것이 너무나 당연하더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이 시중 거대 은행의 영업 형태 등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들이 많고, 또 은행들은 최근 3∼4년간 수십조원대의 이윤을 내다 보니 주변의 평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더라.”라고 말했다. 게다가 우리·신한·하나은행 등 주요 금융지주사들이 증권사를 계열화하고 있다 보니 반대 강도가 약했다는 것.경제부
  • 레바논 혼미… 팔 난민 수천명 탈출행렬

    |파리 이종수특파원|지난 20일 레바논 북부 나흐르 알바리드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벌어진 레바논 군과 팔레스타인 민병조직 파타 알이슬람 사이의 교전이 사흘째 이어지면서 내전으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양측은 난민촌 주변에서 22일(현지시간) 새벽과 오후 두 차례 충돌했다. 파타 알이슬람측은 이날 오후 2시 “휴전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레바논 군이 거부했다. 난민 수천명은 전투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 탈출에 나서는 등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영국 BBC 인터넷판은 “이번 교전이 17년 전 내전이 종식된 이후 가장 큰 유혈 사태”라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80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이번 사태는 지난 19일 레바논 군이 북부 트리폴리 인근에서 발생한 은행강도 사건 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나흐르 알바리드에 근거지를 둔 팔레스타인 민병대 파타 알이슬람측을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150∼200명 정도의 민병대원을 거느린 파타 알이슬람이 반격하면서 무력충돌로 비화됐다. 양측의 교전으로 생필품 공급이 중단된 구호품을 전달하려던 유엔 차량 행렬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난민 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알자지라 방송은 “주민들이 유엔 구호품을 받으려고 할 때 포탄이 떨어져 여러 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또 난민촌 인근 트리폴리 시내의 한 건물에서는 파타 알이슬람 요원 1명이 레바논 군과 대치하던 중 몸에 두르고 있던 폭탄 띠를 터뜨려 사망했다. 한편 다른 난민촌 주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교전이 확산되며 ‘제2의 레바논 내전’ 우려가 제기되자 미국은 레바논 정부군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사이의 충돌 사태에 간접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레바논측이 사태해결을 위해 2억 8000만달러 추가지원을 요청하자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레바논에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가 관리하는 12개의 난민촌이 있다. 이 난민촌에는 레바논 전체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35만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거주하고 있다.vielee@seoul.co.kr
  • “피보다 더 진한 가족의 정 나눠요”

    후원자 400명과 결연대상자 400명이 참가해 1대1로 결연증서를 교환하는 ‘서초 한가족 맺기 만남의 날’ 행사가 23일 서초구민회관에서 열린다. 22일 서초구에 따르면 한가족맺기 행사는 저소득층을 위한 말벗 도우미부터 청소와 학습도우미, 법률상담, 생일상 차려주기, 주치의 활동까지 복지대상자가 필요로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정해 1대1로 맞춤 후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존의 후원이 일회성이고 대부분 현금지원에 치우쳐 있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1월부터 시작했다. 김덕룡·이해훈 국회의원,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 가수 김세환·김창완, 탤런트 남일우·김용림부부, 코미디언 남보원, 고승덕 변호사 등 각계 인사와 기관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덕분에 불과 5개월도 되지 않아 3억원 상당의 쌀, 생필품 등 현물과 현금지원은 물론 빨래·설거지, 말벗 도우미, 장애인 활동보조 등 1만 7000회가 넘는 생활도우미 활동이 진행됐다. 23일 행사에서는 최근 개발한 ‘저소득 맞춤형 생활지원설계사’ 전산시스템의 시연회도 갖는다. 박성중 구청장은 “어려운 이웃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파악한 뒤 이를 관리하고 있다.”면서 “금전적 지원이 아니더라도 퇴근 후 짬을 내 어려운 이웃을 돕는 후원가정이 많은 아름다운 서초구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3만여원 내면 20만원어치 ‘봉사’

    경기도는 15일 혼자 힘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가사 및 활동도우미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인돌보미 바우처’ 사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도는 소득 수준이 전국 월평균 소득(4인가족 기준 353만 2000원)의 100% 이하이거나, 치매 중풍 등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65세 이상 노인 4500여명을 선정해 각 가정마다 봉사원을 파견, 식사·목욕·청소·세탁·외출·생필품 구매 등을 돕도록 했다. 이에 따라 지원대상자로 선정된 노인은 본인이 매월 3만 6000원을 선납하면 20만 2500원의 서비스 이용권이 제공돼 주말을 제외한 월∼금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주 2∼3회, 월간 27시간의 각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서비스 이용료는 기본 2시간 2만 1000원에 1시간 추가 때마다 5500원이 부가된다. 도는 봉사원 파견 등 노인돌보미 사업 주관시설로 61곳을 선정했으며 이들 시설에서는 유급봉사원을 900여명 고용, 본격적인 서비스에 들어갔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교정 대상 본상] 박애상 곽신 원주교도소 종교위원

    원주 평안감리교회 목사로 1986년 교정 참여인사로 봉사활동을 시작해 22년이 넘게 수용자 신앙지도와 불우 수용자 지원에 참여했다. 지금까지 종교집회를 200여차례 열고, 교리지도를 600차례 진행했으며 9000여만원어치의 다과류와 생필품을 지원했다. 수용자 생일행사와 장애인의 날 행사를 주관했다. 지역봉사 활동도 열심히 해 원주에 있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의료지원 사업을 폈다.1995년부터 소외된 독거노인에게 무료 점심을 제공하고,97년부터는 이·미용 봉사활동을 폈다.
  • [이젠 포스트 BRICs] (10) 인도네시아 (하)

    [이젠 포스트 BRICs] (10) 인도네시아 (하)

    |자카르타·차궁칠린칭(인도네시아) 이창구특파원|우기(雨期) 막바지에 접어든 인도네시아는 찜통 더위가 계속되다가도 오후에는 어김없이 한 차례씩 장대비가 내렸다. 지난달 25일 자카르타 북쪽의 차궁칠린칭에 있는 보세 수출공단인 KBN공단을 가기 위해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에도 비가 쏟아졌다.1시간 남짓의 폭우로 고속도로는 차량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물에 잠겼다. 비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허술한 배수로 시설이 문제였다. 경제 관료들이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가장 절실하다.”고 외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2시간에 걸쳐 조심스레 달려간 끝에 도착한 KBN공단은 1970년대 구로공단을 깨끗하게 업그레이드한 모습이었다. 컨테이너를 짊어진 트럭이 쉴 새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젊은 여공들의 눈빛이 빛났다. ●한국의 전방위 투자 53만평에 펼쳐진 KBN공단은 한국 업체가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주 봉제업체 165개 가운데 120개가 한국 기업이다. 숫자뿐만 아니라 규모나 시설 면에서도 타이완이나 중국 업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타이완 업체 사장은 “임금은 한국 기업과 차이가 나지 않는데 복리후생이나 시설 면에서 격차가 커 노동자들이 한국 업체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공단에서 두 개의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는 한세상사 박정운 전무는 “한국에서는 이제 봉제 공장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인도네시아의 봉제 산업은 한국 기업이 다 장악했다.”면서 “캄보디아나 필리핀에 비해 임금이 비싼 편이지만 노동자의 자질은 훨씬 훌륭하다.”고 말했다. 실업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인도네시아 정부도 노동집약적 산업인 봉제산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한국의 인도네시아 투자는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봉제 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가전 시장에서 수위를 다투고 있다.1979년 진출 이후 19개의 대형 공사를 따낸 쌍용건설은 지난해 일본 최대 건설사인 시미즈와 17개월간의 경쟁 끝에 1억 3000만달러 규모의 ‘플라자 인도네시아’ 확장 공사를 따냈다.47층 규모의 초호화 주상복합 건물로 자카르타의 새 상징물이 될 전망이다.SK㈜도 인도네시아 국영 석유기업인 페르타미나와 합작해 하루 8000배럴 이상의 윤활유를 생산하는 정유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투자조정위원회(BKPM)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한국의 투자액(승인기준)은 8억 7740억달러로 4위였다. 건수로는 312건으로 가장 많다. 코트라(KOTRA) 자카르타 무역관 김병권 관장은 “1102개의 한국 업체가 진출했고, 인터넷 콘텐츠 사업자도 몰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일본, 1992년 이후 304억달러 투자 ‘세계 최다´ 한국의 투자 경쟁상대는 일본이다.1942년부터 3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일본의 자본은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빠져나갔다가 최근 회귀하는 양상이다.1992년 이후 일본의 인도네시아 투자액은 304억달러로 전세계에서 가장 많다. BKPM의 하리 바키티오 규제개혁국장은 “일본이 없으면 인도네시아도 없을 정도로 일본 자본이 우리 경제의 바탕을 이룬다.”면서 “지난해 말 기준 총외채 1307억달러 가운데 33%가 일본 부채”라고 밝혔다. 특히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시장은 일본 업체가 90% 이상 장악해 좀처럼 틈새를 찾을 수 없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팔린 31만 8883대의 자동차 가운데 29만 6492대가 일본차다. 한국의 KOTRA격인 일본 제트로(JETRO) 자카르타 센터에는 제트로 직원은 물론 경제 부처와 대기업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상주하며 인도네시아 시장을 분석하고 있다. 일본 대기업들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각국에 진출한 현지법인간 거래를 활성화시켜 자체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한다. 미쓰이물산에서 제트로에 파견된 미노루 야수이 투자자문관은 “올해가 인도네시아 투자의 터닝 포인트(전환점)가 될 것”이라면서 “대기업들이 현지화한 만큼 이젠 대기업에 납품하는 일본 중소기업들이 시장 공략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window2@seoul.co.kr ■ 코린도 그룹 이원제 사장의 현지 진출 전략 |자카르타(인도네시아) 이창구특파원|3만여명에 이르는 한국 교민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기업은 단연 코린도(KORINDO·코리아+인도네시아) 그룹이다.1969년 인도네시아에 진출, 목재업으로 사업을 일궈 지금은 연매출액 8000억원 규모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펄프·제지·컨테이너·금융에 이어 최근 팜오일 등 바이오 에너지에 이르기까지 사세를 확장했다. 인도네시아 재계 순위 20위권에 들어간다. 승은호 회장은 해외에서 가장 성공한 한상(韓商)으로, 동남아에서 화상(華商)과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 기업인으로 꼽힌다. 현지 한인회장, 상공회의소회장은 그의 당연직처럼 여겨진다. 승 회장과 함께 34년 동안 ‘코린도 신화’를 일군 이원제 사장은 “합판 수출액이 지난해 3억 5000만달러이고, 지난 3월 현대자동차와 상용차 및 버스 조립공장을 세웠다.”면서 “1만 3000㏊에 이르는 팜오일 플랜테이션 농장을 10만㏊로 확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장은 “1998년 폭동이 났을 때에도 한국인들만 떠나지 않았고, 이 사실을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면서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밀림에서 맹수와 싸우며 벌목을 했던 기상으로 한국 기업들은 이제 새 사업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망한 진출 분야에 대해 이 사장은 “코린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네시아가 가장 큰 경쟁력을 지닌 원목에 승부를 걸었기 때문”이라면서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쟁력이 높은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KOTRA 자카르타 무역관은 인도네시아 진출 전략으로 ▲소비계층 분화에 대비한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 개발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 및 IT 투자 확대 ▲석유대체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 참여 등을 꼽았다. window2@seoul.co.kr ■ “폭발적 증가 중산층 겨냥 고급 생필품·IT쪽 승부를” |자카르타(인도네시아) 이창구특파원|“일본 기업들은 앞으로 식품가공이나 화학, 의약품 쪽에 눈을 돌릴 전망입니다.” 제트로(JETRO·일본무역기구) 자카르타 센터의 다케시 혼조 부관장은 “자동차, 전자, 휴대전화 등 그동안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성공한 일본 제품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는 동시에 다른 국가들이 하기 힘든 전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케시 부관장은 특히 “도로·철도 건설이나 에너지 개발 등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사업은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인도네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이 투자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면서 “일본과 한국은 인도네시아 경제가 성장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중산층이 요구하는 수준 높은 생활필수품이나 최첨단 정보기술(IT) 제품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시장의 강점으로 풍부한 천연자원,2억명이 넘는 거대한 내수시장, 근면한 노동력,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 등을 꼽았다. 반면 인도네시아 투자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는 불분명한 조세정책과 노동법을 들었다. 다케시 부관장은 “부가가치세율의 산정 근거가 모호하고, 환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8년 근무한 노동자가 직장을 그만둘 경우 11개월치의 월급과 위자료까지 줘야 하는 현행 노동법 때문에 ‘야반도주’하는 외국기업까지 생기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케시 부관장은 현대자동차가 최근 현지 한국 기업 코린도그룹과 함께 상용차와 버스 조립공장을 세운 데 대해 “관공서 버스나 앰뷸런스, 경찰 순찰차 등 공공부문에 마케팅의 초점을 맞추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window2@seoul.co.kr ■ 공장설립 첫발 18개월 소요 “기다릴 줄 알아야 사업 성공” |자카르타(인도네시아) 이창구특파원|‘기다릴 줄 알아야 이긴다.’ SK㈜ 자카르타지사의 이경일 지사장은 인도네시아 비즈니스의 성공 요인으로 ‘시간’을 꼽았다. 이 지사장은 “국영석유기업과 공장 설립을 논의하기 위해 첫 대면을 하는 데만 1년 반이 걸렸다.”면서 “한국적인 ‘스피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시간 개념이 약하다. 기자는 10여명의 현지 관료와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약속 시간에 맞춰 나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인터뷰 직전에 시간과 장소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쌍용건설 자카르타지사 이희원 지사장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웬만하면 ‘노(No)’라고 말하지 않는다.”면서 “상대방의 태도에서 긍정과 부정을 느껴야지, 말만 믿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우리은행 자카르타법인 이민재 법인장도 “‘뭉킨 비사’라는 말이 있는데,‘아마 가능할 것’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을 뜻할 때가 더 많다.”고 소개했다. KOTRA 무역관 복덕규 차장은 “‘고맙다.’는 표현이 ‘트리마 카시’인데 이는 ‘받고, 주다.’라는 뜻”이라면서 “상대방이 뭔가 먼저 해주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봉제업체 한영의 박창후 과장은 “이슬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이슬람을 폄하하는 발언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window2@seoul.co.kr
  •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0) 인천 옹진군 덕적면 울도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0) 인천 옹진군 덕적면 울도

    서해안 먼바다 깊고 깊은 곳, 섬은 그대로인데 마을은 영광의 시대를 뒤로 하고 명맥만 유지한 채 나날이 쇠잔해가고 있다. 인천에서 배편으로 덕적도까지 간 뒤 다시 배를 갈아 타고 두 시간 남짓 더 가야 하는 섬. 행정명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울도리. 험한 파도를 헤치고 문갑도와 굴업도, 백아도를 거쳐 울도항에 배가 도착하자 오랜만에 들어오는 생필품을 기다리던 주민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작은마을과 큰마을로 형성된 울도엔 모두 16가구 3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해질녘 작은 어선에서 어망을 내려 생선을 털어내자 양동이에선 주먹만한 우럭과 놀래미들이 팔딱거린다. 황량하고 바람부는 부두에는 아낙 홀로 길고긴 어망을 수선하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쓸쓸하게 한다. 비탈진 곳에 위치한 어민의 작은 집 마당에는 한 노인이 금방 앞바다에서 채취한 홍합을 손질하고 있다. 갯벌에 뿌리박은 그물닻에는 굴딱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주인 잃은 폐선은 흉물스러운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섬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민어·조기·새우잡이가 한창이었고 호황일 때는 파시(波市)가 열렸다. 외지인들이 수백명씩 들어와서 작은마을에는 객주점(客酒店)이 즐비할 만큼 흥청거렸다. 이후 꽃게잡이가 번성할 때는 주민들도 20여척의 꽃게잡이배를 부리며 남부럽지않게 돈도 만졌다. 근해에서 조업하는 꽃게잡이배들도 섬으로 몰려들어 아낙들도 어구손질만으로 한 해 천만원씩 소득을 올렸다. 40명이 넘는 아이들이 10년전 폐교된 덕적초등학교 울도분교를 웃음소리로 가득 메웠고, 마을은 선주들이 고용한 외지 어민들의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어부들은 너나없이 인천에 별도의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평생동안 바닷속만 들여다 보고 살았다는 한 늙은 어민은 기자에게 그 옛날의 영광을 들려주었다. 지금 섬에는 바람과 파도를 피해 들어온 몇척의 배와 어구 적치장을 가득 메운 어망만이 주인인양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대로 이 섬에 살았다는 정광성(72) 할아버지는 “한때 2척의 꽃게잡이배를 가지고 5가구나 고용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하면서 “어선들이 대형화되고 물고기를 남획하면서 5년전부터 게가 잡히지 않아 지금은 마을주민이 소유한 꽃게잡이배가 단 1척에 불과하며 그나마 꽃게잡이하는 주민도 거의 없다.”고 아쉬워했다. 부인과 함께 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정병우(40·전도사)씨는 “본적과 주소지를 아예 울도로 옮겼다.”면서 “바깥 세상과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가는 주민들이 너무나 순하고 착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응급환자가 발생하거나 아플 때는 대책이 없어 불편하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현재는 갯벌에서 간간이 채취하는 고둥이나 홍합 굴에다, 소형 배를 이용한 낚시잡이 외에는 어족자원이 고갈되어 뾰족한 소득원이 없지만 주민들은 그래도 희망에 부풀어 있다. 주5일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섬을 찾겠다는 문의전화가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사중인 준설작업과 항만공사가 끝나고, 인천에서 갈아타지 않고 올 수 있는 객선이 취항을 하면 관광객들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게다가 종패를 뿌려 놓은 바지락과 굴 양식장이 수확을 시작하는 2년 뒤쯤이면 섬은 점차 활기를 찾게 된다며 들떠 있다. 뭍에서 멀어서 울면서 들어가고, 나올 때는 훈훈한 인심에 떠나기 섭섭해서 울고 간다는 울도, 살기가 어려워 섬 주민치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울도라는 유래가 생겼다는 섬. 바람과 안개에 며칠째 발이 묶였던 이방인은 주민들의 소망이 이루어져 새로운 영광의 시대를 맞게 되기를 기대하며 섬 울도를 떠났다. 사진 글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한·미 FTA 시대] 1994년 NAFTA 발효후 환란 맞은 멕시코 그후

    [한·미 FTA 시대] 1994년 NAFTA 발효후 환란 맞은 멕시코 그후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1994년 멕시코에는 농민봉기와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이듬해부터는 물가가 30%대까지 치솟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를 두고 FTA 반대론자들은 미국 경제에 종속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0년 뒤 멕시코의 경제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외환보유고는 NAFTA 발효 직전인1993년 249억달러에서 10년 뒤인 2004년에는 628억달러로 2.52배로 증가했다. 물가도 2000년부터 한자릿수로 떨어져 2005년에는 4%를 기록했다. 멕시코에 대한 직접투자액도 93년 47억달러에서 2003년에는 166억달러로 4배 가까이 늘었다. LG경제연구원 김형주 책임연구원은 한국과 멕시코를 비교한 보고서에서 “만약 멕시코가 NAFTA와 같은 개방정책을 취하지 않았으면 여전히 부패와 경제위기가 반복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농민들 역시 절대빈곤 수준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NAFTA 출범으로 미국 자본이 진출하면서 임금격차 현상이 심화되고 토지제도 붕괴로 남부 지역의 이농현상이 격화되는 등 부작용이 적잖게 드러났다. 그러나 1996년을 고비로 물가는 안정되고 실업률도 2%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불안은 94년 세디요 정권이 교육과 의료 등 복지정책을 줄이면서 재정개혁을 단행한 데다 NAFTA 출범으로 생필품 등에 대한 가격지원정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상업자본이 등장한 북부 농업지역에선 생산규모가 확대되고 기업농이 나타나면서 활기를 띤 반면 보조금에 의존하던 남부 농업지역에선 지역 토호들의 횡포까지 겹쳐 농민봉기로 이어졌다. 그 결과 농촌으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이 공급되면서 임금이 하락,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감소했다. 반면 기술집약적 분야에서의 근로자 임금은 증가했다. 다만 2000년 이후 소득불균형 지표는 개선과 후퇴를 거듭했다. 김형주 책임연구원은 “멕시코는 소수 엘리트 집단이 눈앞에 닥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FTA를 서둘러 전략산업 육성이나 후속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면서 “그 결과 경쟁력이 약한 기업들은 무너지고 성장가능성이 있는 유치산업들은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정치인·관료·금융인·기업인·농장주들이 밀착한 탈법행위로 개혁이 지연되고 경제주체간 불신과 갈등이 심화됐다.2000년이 지나서야 이같은 문제점이 제기되고 해결책 모색에 나섰으나 소모적인 찬반 논쟁으로 아직도 후유증을 적잖게 앓고 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선임 연구원은 3일 “멕시코는 우리와 많이 다른 나라이지만 외환위기를 경험했고 미국과 FTA를 체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FTA 추진의 최대 수혜자는 (국적을 초월한) 자본이고, 기업이고, 주주”라고 평가했다. 멕시코는 1995년 페소화 위기를 맞았다. 김 연구원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두가지 경험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외피를 쓰고 나타났던 미국식 자본주의 이식과정으로 ‘자유교역의 증진’,‘주식시장이 중시되는 주주 자본주의’ 등이 도입됐다.”고 지적했다. 흥미로운 점은 멕시코가 농민들의 저항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마킬라도라’라 불리는 단순 조립 가공산업은 성공했지만 발전이 덜 돼있던 내수 지향의 전기전자 업종은 몰락했고, 농업도 미국과 가까운 북부지역은 흥하고 남부의 곡물생산농가는 퇴출되는 등 극심한 양극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백문일 전경하기자 mip@seoul.co.kr
  • 우리나라 쇠고기 값 세계 최고

    우리나라 쇠고기 값 세계 최고

    우리나라 쇠고기 가격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조사됐다. 소비자시민의 모임은 지난 2월 기준 29개국의 20개 주요 생필품 소비자가격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의 국내산·수입산 쇠고기 가격이 가장 비쌌다고 15일 발표했다. 조사대상 20개 품목 중 쌀·쇠고기·포도·오렌지주스·맥주(외식)·프라이드치킨·커피(스타벅스)·화장지·휘발유 등 11개 품목의 우리나라 소비자가격이 가장 비싼 5개국안에 들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명의 지배 아래 있던 여진족은 크게 건주, 해서, 야인의 세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했던 종족은 해서여진이었다. 해서여진은 다시 예허부(葉赫部), 하다부(哈達部), 호이파부(輝發部), 울라부(烏拉部) 등 네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무렵까지 가장 강한 부족은 예허부였다. 이렇게 여진족이 서로 갈라져 있던 상황 아래서 명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진 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듦으로써 패자(覇者)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158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던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라는 ‘패자’가 등장하자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누르하치와 해서여진의 격돌로 나타났다. ●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1593년 6월, 예허부의 지배자였던 부자이(布齊)와 나림불루(納林布祿)는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누르하치가 불손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자이는 하다부의 지배자 멩게불루(蒙格布祿),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萬泰), 호이파부의 지배자 바인다리(拜音達 )를 끌어들였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원정군에는 해서여진 뿐 아니라 몽골의 코르친(科爾沁)부족 등도 가담했다. 모두 아홉개 나라, 대략 3만 가까운 병력이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누르하치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한창 뻗어 오르고 있었던 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자카( 喀)라는 험준한 요새에 진을 쳤던 누르하치의 건주군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부자이를 비롯하여 연합군 4000여명을 죽이고, 말 3000필, 갑주 1000개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布占泰)를 생포했다. 아홉개 나라의 연합군으로도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몽골족 가운데서 누르하치에게 귀부(歸附)하는 종족이 나타났다. 연합군에 가담했던 코르친 부족과 다른 몽골부족 칼카부(喀爾喀部)가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코르친과 칼카 몽골의 귀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몽골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건주여진이 더욱 성장하여 후금(後金), 청(淸)으로 변신하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몽골과의 제휴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훗날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산하이관(山海關)을 우회하여 베이징의 명나라 황궁(皇宮)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 협조 덕분이었다. 곧 몽골 부족이 만리장성 외곽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연 때문에 명을 멸망시킨 이후 청은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고, 열하(熱河)에 행궁(行宮)을 두어 몽골족을 우호적으로 통제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단초는 바로 누르하치 시절에 마련되었던 것이다. ●해서여진, 누르하치에게 손을 내밀다 해서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뒤부터 누르하치는 만주 전체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자신감이 넘친 누르하치는 1595년 6월, 군대를 이끌고 호이파부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은 부잔타이를 주물러 울라부의 내정(內政)에까지 관여했다. 1596년 7월, 울라부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만타이와 그의 아들이 피살되었다. 누르하치는 억류하고 있던 부잔타이를 송환했고, 부잔타이는 형의 뒤를 이어 울라국의 국주(國主)로 즉위했다. 누르하치에게 은혜를 입은 부잔타이는 누이 후나이를 건주여진으로 보냈고, 누르하치는 그녀를 동생 스르가치(舒爾哈齊)와 혼인시켰다. 당시 누르하치는 해서와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는 한편, 그들 부족과 혼인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폈다. 실제 누르하치의 첫째 부인인 나라씨(納喇氏)는 예허 출신이다. 누르하치는 16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 모두 16남8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바로 혼인정책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해서여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1597년 예허, 울라, 하다, 호이파부는 일제히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부도했음을 사과한 뒤 우호를 다시 맺자고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느긋하게 이들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바야흐로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로 떠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명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명은 개입하여 누르하치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바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잠시 랴오양(遼陽), 광닝(廣寧) 등지로 물러나 있던 명군은 대거 조선으로 들어갔고, 명 조정의 관심은 온통 일본군에게 쏠렸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떠벌렸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해서여진과 화약을 맺어 여유를 얻은 누르하치는 1598년 1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몽골의 안출라쿠(安楚拉庫)를 공격하여 1만여에 이르는 인축(人畜)을 획득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인구도 늘고, 재물도 늘었다. 임진왜란 시기 누르하치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르하치, 내실을 다지고 정체성을 강조하다 이미 말했듯이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모피와 인삼의 유통로를 장악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명나라라는 대시장(大市場)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명 상인들을 통해 소금, 직물 등 생필품이 유입되다가 점차 은(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은 여진족 내부에서 화폐로 유통되었고, 유통경제에 눈을 떴던 누르하치는 1599년 만주 지역에서 금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 위주의 여진족 경제에 변화가 일어났고, 화폐의 확보를 위해서 주변국과의 무역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어느 집단이나 국가든 규모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면 자의식도 따라서 커지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무렵, 누르하치는 자신이 통일한 건주 부족을 만주(滿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문수(文殊)’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만주는 ‘문수보살의 도(徒)’를 의미한다. 누르하치는 이제 ‘만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해서나 야인여진은 물론 명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열망은 문자(文字)를 만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났다.1599년 누르하치는 만주 문자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까지 만주는,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명이나 조선 등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했다. 누르하치는 이같은 현실에서 몽골 문자를 토대로 만주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석촌동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에 만주어, 한문, 몽골어 등 3개국 문자가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명군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명은 다시 만주로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로서는 ‘좋은 시절’이 끝난 것을 의미했다. 명의 압력이 누르하치에게 미칠 기미가 보이자 당장 세력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약을 맺은 이후 잠시 잠잠했던 하다와 예허가 누르하치에게 다시 싸움을 걸었다. 만주와 하다, 예허, 명 그리고 궁극에는 조선까지 얽힌 격변의 또 다른 막이 올랐던 것이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 여진족과 만주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 여진족과 만주Ⅱ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장차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대격변의 첫걸음을 내디딘 해는 1583년이었다. 이 해부터 시작해 1626년 사망할 때까지 누르하치의 일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여진의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단계에서 출발해 나중에는 직접 명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누르하치는 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는가? 그리고 명은 왜 누르하치가 댕겼던 불씨에 휘말려 끝내 자신의 온몸을 태우고 말았는가? ●명, 건주·해서·야인 여진을 주무르다 명나라 시절 만주의 여진족은 거주지역에 따라 크게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 여진으로 구분되었다. 누르하치를 배출한 건주여진은 주로 요동에 가까운 조선의 압록강 너머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일찍부터 농경에 종사했다. 해서여진은 과거 금을 세웠던 아구다의 직계로서 오늘날 하얼빈 부근과 송화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다. 야인여진은 송화강 북방, 흑룡강 남쪽에 거주했다. 명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데다 주로 수렵에 종사했기 때문에 가장 미개한 종족으로 취급되었다. 여진족 내부에서 아구다와 같은 패자가 출현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명나라는 정치적 통제 이외에도 경제적 통제 수단을 교묘히 활용했다. 당시까지 여진족들은 곡물을 비롯해 소금, 포목, 철제 농기구 등 생필품을 자급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산물인 말(馬), 모피, 인삼, 진주 등을 주고 명나라 상인들로부터 생필품을 구입했다. 명 조정은 상인들끼리 교역하는 장소를 엄격히 제한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 황제 명의의 칙서(勅書:교역허가증)를 소지한 여진족 유력자에 한해서만 교역을 허가했다. 명이 정한 규칙을 위반하거나, 명의 권위에 도전하려 할 경우 칙서는 가차없이 회수되었고 교역은 금지되었다. 생필품 공급이라는 ‘목줄’을 틀어쥠으로써 여진족들을 길들이려는, 명의 입장에서는 아주 편리하지만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수단이었다. 그같은 명의 지배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이 건주여진 출신의 왕고(王)였다. 누르하치의 외조부로 알려진 왕고는 1574년, 부족의 병력을 이끌고 랴오양과 선양을 공격했다. 명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신에게 교역을 금지시킨 데 따른 반감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하지만 3000여명에 불과했던 왕고의 병력은 6만명에 이르는 명의 진압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왕고는 겨우 탈출해 해서여진의 하다부(哈達部)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하다부는 왕고를 포박하여 명군 사령관 이성량(李成梁)에게 넘겼고, 왕고는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돼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값으로 얻은 기반 이성량이 왕고를 진압할 무렵,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가(覺昌安)와 부친 타쿠시(塔克世)는 이성량의 편에 서서 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타쿠시는 장인인 왕고를 진압하는 명군의 작전에 협조했고, 그 대가로 명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했다. 1583년, 더 참혹한 비극이 일어났다. 자신의 부친을 죽게 만들었던 하다부와 명군에 대해 원한을 품었던 왕고의 아들 아타이(阿台)가 복수에 나섰던 것이다. 아타이는 하다부와 대립했던 해서여진의 예헤부(葉赫部) 등을 끌어들여 하다부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성량이 걸림돌이었다. 이성량은 교창가와 타쿠시, 누르하치까지 이끌고 아타이가 쫓겨 들어간 고륵채(古勒寨)성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성이 거의 함락될 무렵, 교창가와 타쿠시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아타이의 아내가 교창가의 손녀(누르하치의 백부의 딸, 누르하치의 사촌)였기 때문에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타이는 항복을 거부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고,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윽고 명군은 성안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는데, 교창가 부자도 그 와중에 적으로 오인되어 피살되었다. 눈앞에서 조부와 부친이 피살되는 장면을 목도했던 누르하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명은 이제 그에게 ‘만세불공의 원수’가 되었다. 누르하치가 훗날 명에 선전포고하면서 일곱 가지 원한(七大恨)을 내세웠는데, 그 가운데 명군에 의한 부조(父祖)의 피살을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난감해진 것은 이성량과 명 조정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피살이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누르하치에게 칙서 30통과 말 30필을 배상금으로 주었다. 동시에 그에게 타쿠시가 명으로부터 받았던 도독(都督) 직함을 물려주었다. 이윽고 1583년 5월, 누르하치는 부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 대상은 명이 아니라, 명에게 협조적이었던 주변의 건주여진 부족이었다. 당시 스물다섯의 약관에 불과했던 누르하치에게 명은 아직 상대하기가 몹시 버거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명으로부터 받은 칙서 30통은 군사활동에 필요한 자금줄이 되었다. 칙서를 많이 가진 누르하치에게로 명 상인들과 무역을 원하는 여진의 인삼, 모피, 진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인삼, 모피, 진주의 유통로를 장악했으며 무역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이제 군사 지휘관인 동시에 확실한 기반을 지닌 거상(巨商)이기도 했다. 1589년,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했다. 누르하치에게서 ‘아구다’의 재림(再臨) 조짐을 간파한 이성량은 경악했다. 그는 명 조정에 건의하여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그를 명의 관직체계 속으로 끌어들여 견제하기 위한 응급수단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채수(債帥)’ 이성량 이성량(1526∼1618)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다. 그의 조상은 본래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 초기에 요동으로 건너가 철령(鐵嶺)에 정착했다. 뒤에 군공을 세워 철령위 지휘첨사(指揮僉使)가 되었고 40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1570년부터 1591년까지 만주에서 여진과 몽골 세력을 견제하는 명의 최고 군사책임자를 역임했다. 승패가 무상하고, 그에 따른 상벌이 엄격할 수밖에 없는 무장의 세계에서 무려 22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역사는 이성량을 ‘채수(債帥)’라고 부른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조정의 고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그들의 비호 아래 자리를 유지하는 장수를 말한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와 결탁하여 만주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모피와 진주를 밑천으로 명 조정의 중신들을 구워삶았다. 그 결과 그의 패전은 ‘없었던 일’이 되고, 시원찮은 승전은 ‘대첩(大捷)’으로 둔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이여백(李如柏)은 누르하치 동생의 딸을 첩으로 맞이했다. 요동에서는 ‘오랑캐 추장의 사위가 요동을 지킨다.’는 비아냥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부를 한손에 거머쥔 이성량이 누르하치를 제대로 견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장기집권’으로 타락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부패한 명 조정의 중신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뒤에는 태만하고 무능한 만력(萬曆) 황제가 있었다. 이같은 배경에서 1583년은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성량의 군대가 좀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누르하치의 부조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누르하치가 복수심에 불타 명과의 전쟁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궁극에는 조선도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며, 명·청 교체와 같은 대격변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지만 누르하치와 이성량의 행보를 보면 문득 ‘나비효과’라는 용어가 떠오른다.‘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한달 후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물리학의 비유 말이다. 사소해 보이는 인간의 행동 하나가 엄청난 파국으로 이어졌던 역사의 거울 앞에서 문득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연안 여객선 최고운임제 시행 ‘그후 1년’

    연안 여객선 최고운임제 시행 ‘그후 1년’

    섬 경제가 ‘연안 여객선 최고 운임제’ 시행 1년 만에 후폭풍에 흔들리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섬 주민에 대한 여객선 운임료를 대폭 할인해 준 이후 이들의 육지 나들이가 잦아지면서 섬 경제가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에 따라 섬 경제를 살리기 위한 관광객 유치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9일 경북도와 울릉군에 따르면 지난해 3월1일부터 제주 및 육지와 연결된 연륙도서를 제외한 울릉도 등 전국의 255개 섬 주민을 위해 여객선 최고 운임제를 도입, 시행하고 있다. 이들의 연안 여객선 운임 중 5000원 초과분은 전액 국비 등으로 지원해 주는 제도다. 이에 따라 울릉 주민은 울릉∼포항, 울릉∼묵호 등 2개 항로의 여객선 이용시 5000원(편도·종전 1등석 기준 3만 9700원)만 본인이 부담하고 있다. 전남 신안군 흑산도·가거도 주민들도 종전 흑산도·가거도∼목포 뱃삯 2만 6200원,4만 7200원에서 현재 5000원만 물고 있다. 이처럼 섬주민들의 여객선 운임 부담이 대폭 줄어들자 육지 나들이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여객선을 이용한 울릉 주민(연인원)은 8만 5023명(출·입도 포함)으로, 전년 5만 8179명 보다 무려 2만 6844명(46.1%)이 늘어났다. 옹진·강화도 주민들도 뭍을 자주 찾기는 마찬가지. 지난해 이들 지역 주민들의 여객선 이용객은 26만 6008명으로 전년 22만 2965명에 비해 4만 3043명(19.3%)이 증가했다. 흑산도·가거도 주민들 역시 여객선 이용이 잦아졌다. 흑산도 예리항∼목포항을 오가는 여객선사측인 동양고속 윤동률 흑산영업소장은 “뱃삯이 싸지기 전에는 하루에 많아야 손님이 80명선이었으나 이후에는 금요일 120명, 토요일 80여명씩이 목포로 빠져 나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섬 지역의 음식점, 슈퍼마켓, 일반 상점 등의 매출이 크게 감소하는 등 섬 경제가 위축되고 있다. 울릉도 도동항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 주민은 “뱃삯이 싸진 이후부터 주민들의 육지 출입이 잦아지면서 소비가 주로 육지에서 이뤄지고 있다.”면서 “울릉도 가게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인근의 한 식당 주인도 “주민들이 사소한 계 모임까지 포항 등지에서하고 있다.”면서 “우린 뭘 먹고 사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흑산도 면소재지인 예리항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을 하는 조은혜(25·여)씨는 “주민들을 상대로 장사하는데 뱃삯이 싸지면서 물건값이 좀더 싼 육지로 몰리면서 매출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말했다. 백령도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조모(48·여)씨는 “주민들이 육지에 나갔다가 생필품을 사오는 일이 전에 비해 늘어난 탓인지 장사가 예전만 못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들 자치단체들은 “여객선 최고 요금제 시행으로 주민들의 오랜 숙원인 왕래 부담은 해소됐으나 지역경제가 걱정”이라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최대한의 관광객을 유치토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최고운임제 시행으로 전국 255개 도서, 연인원 390만명의 섬 주민들이 운임 지원 혜택을 받았다. 섬 나들이가 잦은 육지 사람들은 운임지원 혜택을 받기 위해 주소지를 섬으로 옮기는 사례도 더러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종합·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열린세상] 거꾸로 읽는 부동산 정책/이상묵 삼성금융연구소 연구위원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이미 시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정책이 도입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들은 한결같이 부동산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꺾어야 부동산 가격이 안정된다는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재건축 규제, 양도소득세 중과, 종합부동산세는 부동산 거래에서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려는 정책이다. 분양원가 공개제도나 분양가 상한제도는 주택건설 사업자들이 폭리를 취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 기초한 정책으로는 국민의 주거생활을 안정화시킨다는 부동산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이윤 동기를 허용하고 가격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공급 부족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공급이 부족하면 운이 좋거나 힘이 있어 용케 상품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없다. 어렵게 구한 물건도 품질이 형편없다. 중앙정부가 가격을 정했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인 빵이나 야채를 사기 위해서도 가게가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야 했다. 미리 줄을 서지 않으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주택을 구하기 위한 줄은 그 실체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운도 없고 힘도 없는 일반 사람들은 낡고 불편한 아파트 한 채에 몇 가구가 함께 살아야 했다. 기존 입주자에게는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도록 임대료를 통제했던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했다. 세입자들은 한 번 입주하면 집을 옮기지 않으려고 했고, 건물주는 아파트가 낡아도 돈을 들여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구역의 건물들은 흉가가 되어 갔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성냥갑 모양의 보기 흉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도 과거에 시행했던 분양가 상한제도의 영향이다. 분양가 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건설업자들이 실제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장은 조만간 그 폭리를 제한하게 된다. 건설업자들의 연말 손익계산서에 대규모 흑자가 기록되면 경쟁자들의 신규 진입과 공급 확대로 가격이 하락한다. 경쟁자의 진입과 가격의 하락은 건설업자들이 누리는 이윤이 다른 업에서 누리는 수준으로 내려갈 때까지 계속된다. 부동산 투기나 건설업으로 항상 큰 돈을 버는 것 같지만 경쟁이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주택 건설업을 하다 부도가 나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또 십여 년 전에 산 부동산에 돈이 묶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으로 항상 큰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큰 돈을 번 경우만 눈에 띄고 귀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분양가를 규제하는 것은 성공을 하더라도 푼돈밖에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실패하면 손실을 다 떠안고 빚더미에 앉으라는 말이다. 그런 환경 아래서는 건설업을 버리고 다른 업으로 전업하는 사업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주택 공급이 감소하고 품질이 저하될 것이다. 입주하기 전에 따로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다시 설치하는 일이 늘어나고 20년도 안 돼서 재건축을 논의해야 하는 성냥갑 모양의 불량주택이 또다시 양산될 것이다.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주거생활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부동산으로도 큰 돈을 버는 일을 용인해야 한다. 저소득층의 주택문제는 세금을 재원으로 한 공공주택 사업으로 복지정책 차원에서 해결할 일이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부동산 정책 차원에서 다룰 일이 아니다. 이상묵 삼성금융연구소 연구위원
  • [Seoul in] 전기 안전점검 서비스

    광진구(구청장 정송학) 한국전기안전공사 동부지사와 공동으로 홀로 사는 노인을 돕기 위한 전기안전점검 봉사활동을 편다. 공사 직원 20여명은 21일 노유1동 851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 19가구를 방문한다. 이들은 전열기구를 점검하고 낡은 누전차단기, 개폐기 등을 교체하기로 했다. 전기안점 점검을 마친 뒤에는 30만원 상당의 생필품도 전달할 예정이다. 사회복지과 450-1355.
  • [임일영 특파원의 천일야화] 아랍냄새 물씬나는 ‘수크’

    수크(SOUQ)는 아랍 전통시장을 뜻하는 보통명사. 아름다운 해변이 7㎞나 이어지는 알 코니시 스트리트와 그랜드 하마드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지점에 대부분의 수크가 밀집해 있다. 가장 유명한 시장은 ‘올드 수크(수크 와키프)’. 이곳은 원래 베두인족이 양고기와 양털, 우유 등을 낙타에 싣고 와서 사막에서 필요한 생필품들을 교환해 가던 주말 장터였다.하지만 지금은 회반죽으로 덮인 하얀색 혹은 아이보리색 건물 사이로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좁은 골목을 따라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오후 4∼5시가 되면 붉은 빛이 회반죽 빛과 어우러져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장면에라도 들어온 듯하다. 카페에 들어가 아랍식 커피와 물담배(시샤)를 한 모금 빨아보는 것도 괜찮을 터. 전통의상과 공예품, 카펫, 향신료 등 아랍 색이 물씬 풍겨 넋놓고 골목을 따라가다 길을 잃은 곳에는 대서소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문맹률이 높은 이슬람 형제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고향에 보낼 편지를 써주는 곳. 넋을 잃고 구경하다 길을 잃었다고 울상지을 필요는 없다. 자기 가게를 비워둔 채 수백미터를 걸어가서 길을 찾아주는 오만 사람 자심씨 같은 친절한 이들이 의외로 많다. 길을 건너 한 블록쯤 가면 보석상가인 ‘골드수크’가 있다. 서울의 종로4가를 떠올리면 될 듯싶다. 골드수크의 상권은 인도인들의 몫이다. 카타르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 인도인들은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했다.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등에서 온 사람들이 주로 건설현장이나 식당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반면, 외국어와 상술이 좋은 인도인들 대부분은 상업에 종사한다. 서글서글한 외모에 능란한 화술을 가진 인도 상인들은 손님이 부담 갖지 않도록 호객하는 특별난 재주가 있다. 만만치 않은 쇼핑 고수와 인도 상인의 신경전은 심심치 않은 재미를 준다.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던 인도 상인이 마지막에 던지는 말은 “(이 물건을 위해) 얼마까지 낼 생각이 있냐?“는 것. 판을 깰 정도만 아니라면 적당히 후려쳐도 괜찮다.여기서 취급하는 제품은 백금과 금 제품부터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가격대가 천차만별. 처음 부른 값에서 30%를 깎았다면 바가지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발뻗고 잠을 자도 좋을 듯싶다.도하에서 argus@seoul.co.kr
  • 불우이웃돕기 ‘현금 YES 물품 NO’?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현금·물품의 지정 기탁 및 물품 기탁을 외면해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13일 경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손길을 나누기 위해 이달부터 다음달 말까지 2개월간을 모금기간으로 정해 ‘희망 2007 이웃사랑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이 기간 중 모금목표액은 60억원으로 전년(56억원)대비 7% 증가한 액수이다. 모금접수 창구는 도내 언론사(신문·방송사)이며,23개 시·군이 접수 대행업무를 맡고 있다. 그러나 공동모금회는 이들 기관에 현금 지정기탁과 연탄·쌀·유류 등 일부 생필품 외 물품기탁을 기피해 현금 위주의 모금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기관의 물품 기탁실적이 저조한 데다 이를 기탁하려는 시민들의 ‘성의’가 거절되기 일쑤이다. 실제로 지난 12일까지 경북도모금회를 통해 접수된 전체 물품은 금액으로 1000여만원이 고작이다. 이는 현금 모금액 1억 6000여만원의 6%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다. 시민들은 “공동모금회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손쉽고 편한 방법만 찾아서 되겠느냐.”면서 “물품 등의 기탁도 적극 접수해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동모금회 관계자는 “물품기탁은 기탁자들이 재고물품 처리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 가급적 기탁을 제한하고 있다.”고 해명했다.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학교서조차 수니·시아파 집단싸움 일쑤”

    6일(현지시간) 이라크연구그룹(ISG)의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미국의 대 이라크 정책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영국 BBC의 바그다드 특파원 앤드루 노스 기자는 5일 미국의 정책 변화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냉소와 학교 교실로까지 번져간 종파갈등, 돈벌이에 혈안이 된 사업가 등 이라크의 절망적인 상황을 소개했다. 다음은 노스 기자의 ‘바그다드 일기’ 요약.●“새로운 계획? 뭐가 달라지는데” 미국에서 새 이라크 계획이 나온다고 하지만 바그다드 주민들은 거의 무시한다. 관심을 갖는 것은 나같은 사람뿐. 한 가게 점원은 “뭐가 달라질까? 미국은 전에도 새로운 계획을 제시했지만, 결국 상황은 악화됐을 뿐이다.”고 말했다. 그렇다. 이라크인들에게 최우선의 관심은 생존. 납치되지 않고, 길거리의 교전에서 목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선 주민들은 엄청나게 올라버린 물가에 시달린다. 지난달 23일 사드로 테러 발생으로 통금이 실시된 이후 1㎏에 700디나르(500원)였던 토마토는 3000디나르(약 2150원)로 올랐다. 매달 수만명의 이라크인들이 탈출하고 있다. 한 의사는 “친구들이 만나 주로 하는 얘기는 ‘너도 떠날 거냐’는 것이다.”고 말한다.●학교 운동장까지 점령한 폭력 종파간 균열은 이라크 사회 깊숙하게 침투했다. 지난 주말 한 학교를 찾아갔다.14세 소년은 “우리학교엔 시아·수니 갱단이 있고, 얼마전엔 운동장에서 집단싸움까지 벌였다.”고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을 폭발음과 총소리로 눈을 뜬다. 미 행정부는 현재의 상황이 내전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바그다드 서부 안바르 주 상황을 보라. 여긴 고전적 의미의 전쟁상태다.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군 사망자는 2900명. 이 가운데 40%가 이 사막에서 숨졌다. 나도 최근 미 해병대에 배속돼 팔루자 인근 지역에 갔는데 상황이 심각했다.●모진 인간사의 현장들 이런 와중에 돈벌이를 위해선 목숨을 아끼지 않는 부류도 있다. 미군에 음식·의약품 등을 공급하는 한 남자는 미군측과 계약을 체결, 바그다드와 쿠웨이트를 오가며 생필품을 후송하고, 이를 위한 경호업무까지 맡고 있다. 그는 “지난번 수송작업에 160명이 나섰는데,40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스스로도 여러차례 위험한 순간을 넘겼다고 한다. 왜 계속하느냐고 물었더니 “간단하다. 돈이다.”고 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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