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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주의 학습장’… 봉하마을에 노무현 기념관 개관

    노무현 전 대통령 기일이자 서거 13주기 추모제가 엄수된 23일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으로 운영될 ‘깨어 있는 시민 문화체험전시관’(이하 체험관)이 특별 개관했다. 오는 8월 27일 정식 개관을 앞둔 체험관은 노 전 대통령의 고향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삶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시민 문화의 성장을 담아낸 곳으로 대화와 타협, 토론 문화 등을 배울 수 있는 민주주의 학습장이다. 노 전 대통령이 사법시험 공부를 했던 토담집인 ‘마옥당’도 복원돼 공개됐다. 체험관은 노 전 대통령 생가 맞은편에 임시 건물로 있던 ‘노무현 대통령 추모관’을 허물고 세웠다. 체험관 2층에는 전시관 입구와 가족쉼터, 기념품점, 세미나실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마옥당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은 노 전 대통령 일생을 소개하는 10개 전시실과 150석 규모의 다목적홀로 이뤄졌다. 노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제1전시실을 시작으로 각 전시실에서 학창 시절·군 복무·사법고시를 거쳐 판사가 된 노무현,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노무현, 그가 5년간 이끈 참여정부의 발자취와 공과,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온 노무현을 소개한다. 마지막 제10전시실은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그가 생전에 강조한 ‘깨어 있는 시민’, 진정한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 盧 13주기… 기념관서 다시 체험하는 ‘노무현 정신’

    盧 13주기… 기념관서 다시 체험하는 ‘노무현 정신’

    노무현 전 대통령 기일이자 13주기 추모제가 엄수된 23일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으로 운영될 ‘깨어 있는 시민 문화체험전시관’(이하 체험관)이 특별개관했다. 오는 8월 27일 정식 개관을 앞둔 체험관은 노 전 대통령 고향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있다. 체험관은 8092㎡ 부지에 담장 없는 2층 건물과 접시 모양 야외공연장으로 이뤄졌다. 건축 연면적 4121㎡ 규모로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설계한 이로재 건축사무소의 승효상 대표가 설계했다. 체험관 2층에 전시관 입구와 가족쉼터, 기념품점, 세미나실 등이 있다. 1층은 노 전 대통령 일생을 소개하는 10개 전시실과 150석 규모 다목적홀로 이뤄졌다. 노 전 대통령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제1전시실을 시작으로 각 전시실은 학창 시절·군 복무·사법고시를 거쳐 판사가 된 노무현,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노무현, 그가 5년간 이끈 참여정부 발자취와 공과,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온 노무현을 소개한다. 마지막 10전시실은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그가 생전에 강조한 ‘깨어 있는 시민’, 진정한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 文, 盧 13주기에 “깨어있는 강물 돼 바다 포기 않을 것”

    文, 盧 13주기에 “깨어있는 강물 돼 바다 포기 않을 것”

    盧 ‘깨어있는 시민 정신’ 강조2017년 이후 5년 만에 추도식 참석‘성공한 대통령’ 놓고 “약속 지켰다”문재인 전 대통령이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3주기를 맞아 “우리는 늘 깨어 있는 강물이 돼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신처럼”이라고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한 뒤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켰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어 “감회가 깊다. 그리운 세월이었다”라면서 “아내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라고도 적었다. 문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참석한 것은 2017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참석했던 추도식 이후 5년 만이다. 문 전 대통령은 당시 추도식에서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면서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돼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었다. 문 전 대통령이 SNS에서 언급한 ‘깨어있는 강물’과 ‘바다’는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강조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 표현하며 시민의 참여 정신을 역설했다.文, 盧 생전 즐겨 쓰던 문구 소개에 선거 앞두고 野 지지 우회 당부 분석 이날 추도식이 퇴임 후 나서는 첫 공개석상이었던 만큼 정치권에서는 문 전 대통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에 관심이 쏠렸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러나 추도식 참석 후 취재진과 별도의 접촉 없이 봉하마을을 떠나 경남 양산의 사저로 향했다. 문 전 대통령 측 관계자는 언론에 “조용히 추도식을 치르고자 했다”면서 “애초에 특별한 메시지를 준비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다만 SNS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쓰던 문구를 소개한 것은 결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권을 지지해 줄 것을 우회적으로 당부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이준석 “盧 모시는데 소홀함 없이 할 것”“권양숙 여사, 尹 참 좋게 본다 인상 받아” 한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참석한 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예방했다. 이 대표는 예방 후 기자들과 만나 권 여사와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 “선거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논쟁이나 이런 것들이 좀 격해지는 그런 게 있어서 지난해 제가 ‘대선 중에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말씀드렸고 지방선거 중에도 없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면서 “여사님도 그런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또 윤석열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 언론을 통해 몇 차례 언급했던 것도 대화 주제로 올랐다고 한다.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몇 번 좋게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 (권 여사의) 언급도 있었다. (윤 대통령이) 그 말씀을 언론에 한 것을 보신 것 같다”면서 “여사님께서도 (윤 대통령의) 그런 걸 참 좋게 보신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저는 ‘앞으로 협치의 틀도 그렇고 노 전 대통령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도 저희도 소홀함이 없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덧붙였다. 권 여사 예방이 끝난 뒤 이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인사들은 정 전 총리의 안내를 받아 노 전 대통령 기념관을 둘러봤다.
  • ‘손흥민 득점왕’에 흥분한 이다해…“너무 소리 지르고 싶어”

    ‘손흥민 득점왕’에 흥분한 이다해…“너무 소리 지르고 싶어”

    배우 이다해가 손흥민의 EPL ‘득점왕’ 순간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23일 이다해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내 팔이 이렇게 굵었나? 너무 소리 지르고 싶은데 거의 음소거 수준”이라며 “자랑스런 대한민국 손흥민, 페널티킥 없이 득점왕, 최고, 내 팔뚝 굵다, 내 친구 욕한 거 아님”이라는 글과 함께 득점왕에 등극한 손흥민을 축하하는 영상을 올렸다. 공개된 영상 속 이다해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손흥민의 득점왕 등극 순간을 환호성과 함께 크게 기뻐하고 있다. 자기 일처럼 이 순간의 행복한 감정을 참지 못하며 즐기고 있는 이다해는 진심으로 손흥민의 득점왕 등극 순간을 기록하며 축하하고 있다. 이를 본 누리꾼들은 “드라마는 언제 나오세요? 연기하는 모습이 꼭 보고 싶어요”, “살아생전에 이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리의 보배 손흥민.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손흥민은 23일(한국시간) 영국 노리치의 캐로우 로드에서 열린 노리치 시티와의 2021-22 EPL 최종 38라운드에서 2골을 넣으며 5-0 승리를 견인했다. 그는 노리치 시티와의 최종전을 마무리로 최종 23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 [월드피플+] 생후 2개월 아들과 마지막 인사…하늘의 별이 된 ‘우크라 영웅’ (영상)

    [월드피플+] 생후 2개월 아들과 마지막 인사…하늘의 별이 된 ‘우크라 영웅’ (영상)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우크라이나 영웅이 생후 2개월 아들을 뒤로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동유럽매체 ‘비셰그라드24’는 18일(이하 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투기 조종사 세르히 파르코멘코(25) 대위의 장례식이 거행됐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공군 제299전술항공여단 항공부대 소속 전투기 조종사 세르히 파르코멘코(25) 대위는 이번 전쟁에서 미그(MiG)-29기를 몰고 38차례 출격했다. 그간 러시아군 탱크 20대, 장갑전투차량 BBM 50대, 군용차량 55대, 연료탱크 20대를 박살 내고 적군 수백 명을 무찌르는 등 활약했다.  대위는 그러나 지난 14일 자포리자 훌리아이폴레에서 임무 중 전사하였다. 아내와 생후 2개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 85일째였던 지난 19일 파르코멘코 대위에게 사후 훈장을 수여하고 ‘우크라이나의 영웅’ 칭호를 추서했다. 대위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다른 전사자 47명과 국군 162명에게도 각각 사후 훈장과 국가 훈장을 수여했다. ‘우크라이나의 영웅’으로 생을 마감한 대위의 장례식은 18일 빈니차 공군기지에서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대위의 부모와 아내, 생후 2개월 된 아들과 전우들이 모여 대위의 죽음을 슬퍼했다. 빈니차 하늘에선 대위의 업적을 기리는 전투기 추모 비행이 진행됐다. 대위의 유족과 전우들은 생전 고인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그 사이로 영문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는 대위의 아들은 전쟁의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냈다.사망한 대위는 개전 직후인 지난 3월 아들을 얻었다.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혔지만, 국가를 위해 전투기를 몰며 전장을 누비다 전사했다. 아기는 할아버지 품에 안긴 채 아버지와 기억하지 못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영정사진 앞에서 버둥거리는 아기를 보고 곳곳에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주말 사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 지휘 본부와 탄약고 등을 목표로 동부 전선과 남부 미콜라이우주 등에 미사일과 로켓포 공격을 퍼부었다. 우크라이나군도 교량을 파괴하는 등 러시아군 진격을 막는 데 전력을 다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돈바스 상황이 매우 어렵다. 러시아의 공격을 매일 힘겹게 막아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투를 중단하면 러시아가 더 강하게 반격할 것이다”라며 다시 한번 결사 항전 의지를 보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 13주기 추모제 맞아 기념관 23일 특별개관

    노무현 전 대통령 13주기 추모제 맞아 기념관 23일 특별개관

    고 노무현 전 대령이 서거 13주기 추모제가 엄수된 23일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으로 운영될 ‘깨어있는 시민 문화체험전시관’이 특별개관했다. 오는 8월 27일 정식 개관을 앞둔 ‘깨어있는시민 문화체험전시관’(이하 체험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시민문화의 성장을 담아낸 곳으로 대화와 타협, 토론문화 등을 배울 수 있는 민주주의 학습장이다. 노 전 대통령이 사법고시 공부를 했던 토담집인 ‘마옥당’도 복원돼 공개된다. 체험관은 노 전 대통령 생가 맞은편에 임시 건물로 있던 ‘노무현 대통령 추모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 8092㎡ 부지에 담장 없는 2층 건물과 접시 모양 야외공연장으로 이뤄져 있다. 건축연면적 4121㎡ 규모로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설계한 이로재 건축사무소의 승효상 대표가 설계했다. 땅·건물·전시물 등은 김해시가 소유하고, 운영은 노무현재단 봉하기념사업단이 맡는다. 지상 2층의 체험관은 건물 2층에 전시관 입구와 가족쉼터, 기념품점, 세미나실 등이 있다. 2층에서 노 전 대통령이 사법고시 공부를 했던 토담집 ‘마옥당’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은 노 전 대통령 일생을 소개하는 10개 전시실과 150석 규모 다목적홀로 이뤄져 있다. 노 전 대통령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제1전시실을 시작으로 각 전시실은 학창 시절·군 복무·사법고시를 거쳐 판사가 된 노무현,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노무현, 그가 5년간 이끈 참여정부 발자취와 공과,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온 노무현을 소개한다. 마지막 10전시실은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그가 생전에 강조한 ‘깨어있는 시민’, 진정한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 “이런 세상이라 미안해”… 한 그림책 작가의 마지막 ‘최선’

    “이런 세상이라 미안해”… 한 그림책 작가의 마지막 ‘최선’

    가정폭력, 위험에 내몰린 청년 노동자, 죽음 등의 주제를 다뤄 ‘다크 그림책 작가’로 불리는 고정순(47) 작가가 ‘잘 가’(웅진주니어)와 ‘봄꿈’(길벗어린이)을 잇따라 출간했다. 고 작가는 22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 책들을 ‘애도의 그림책’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우리 사회는 애도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며 “슬픔에 빠진 존재들이 슬픔 앞에서 실컷 울 수 있게 한 뒤에 스스로 생을 긍정할 수 있도록 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봄꿈’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찍은 사진 속 아빠의 영정을 들고 있는 다섯 살 아이에게 권정생 작가가 생전에 남긴 편지를 모티브 삼아 만든 책이다. ‘잘 가’에는 인간의 이기심에 유명을 달리한 동물들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가 담겼다.‘봄꿈’에는 ‘광주의 조천호군에게…’라는 부제가 붙었다. 지난해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측은 14주기 추모식을 준비하면서 이 편지를 발견했다. 재단이 ‘책으로 발표했으면 좋겠다’고 출판사에 제안했고, 고 작가의 손까지 편지가 오게 됐다. “처음 원고를 받았을 때는 못 하겠다고 했어요. 부담스럽기도 하고 사진 속 주인공에게 너무 미안했거든요. 하지만 ‘끝내 전하지 못한 편지가 되는 게 옳은 건가’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평범한 가정에서 가장이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집에 남은 소년에게 유년을 선물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고 작가는 지난해 9월 편지의 주인공을 만나러 광주에 다녀왔다. 편지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도 되는지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아픈 기억을 꺼내는 일이라 매우 조심스러웠어요. 허락과 함께 부탁을 받았지요. 아직 자녀들에게 사진 속 영정을 든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말하지 못했으니 책으로 대신 전해 달라고요.” 결국 권 작가가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는 고 작가의 노력으로 30여년 만에 그림책이 되어 조씨와 그의 아이들에게 전달됐다.‘잘 가’는 사계절 내내 더위를 참고 견뎌야 했던 북극곰, 사육장 담을 넘은 퓨마, 홀로 좁은 수족관을 떠돌던 벨루가(흰고래), 산불에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간 코알라 등 일상의 무관심에 스치듯 세상을 떠난 동물들을 기억하기 위한 그림책이다. “제가 ‘다발성 통증 증후군’이란 난치병을 앓고 있어 앞으로는 세밀하고 밀도 높은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그린 작품이에요. 희생을 강요한 주체가 누구이고 희생을 당한 존재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고 작가는 올해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 독자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이런 세상이라 미안해. 그리고 작가로서 좀더 신나고 재미있는 책을 만들지 못해 미안해.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주렴.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누군가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 전 아내 메신저 6개월 염탐한 조성민…“오해할 만한 대화였다”

    전 아내 메신저 6개월 염탐한 조성민…“오해할 만한 대화였다”

    가수 겸 프로듀서 조성민이 과거 전 아내인 배우 장가현의 메신저를 봤다고 털어놨다. 지난 20일 방송된 TV조선 예능 ‘우리 이혼했어요2’에서는 조성민과 장가현이 대화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성민은 “당신 덜렁거리는 것 알고 있냐. 나는 꽂히면 집요하게 파는 성격”이라고 말하며 “대충 눈치챘겠지만 당신 작업 컴퓨터에 카카오톡 메신저 로그인이 계속 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꾸 대화가 보였고, 오해할 만한 사적인 것이었다. 다 알면서 예은이(큰딸)한테 엄마가 혹시 아빠 말고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봤다”고 덧붙였다. 이에 장가현은 “로그아웃 안 하고 계속 봤냐?”며 충격을 받았고, 조성민은 “생전 못 먹던 술을 한동안 먹고 들어왔다”며 당시 외도를 의심했다고 밝혔다. 장가현은 “그때 진짜 남자가 없었다. 내가 말한 연애는 최근”이라고 설명했다. 조성민은 “당신이 그때(이혼 조정 기간) 많이 방황하고 다녔다. 남자와 (메신저) 한 공간에서 그런 대화가 나눠지던데”라고 반박했다. 결국 눈물을 보인 장가현은 “카톡 몇 개월을 본 거냐?”고 물었고, 조성민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니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보고도 많은 것을 상상했다”고 말했다. 장가현은 “거의 6개월 이상을 본 거네. 난 내가 성실한 아내라고 생각했다. 원래 게으른데 본성을 거스를 만큼 성실히 살았다”며 “20년 만의 일탈인데 그 카톡을 다 들여다보고 나쁜짓 한 거라니. 너무 억울하다”며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내가 뭐 얼마나 의심받을 짓을 하고 살았냐. 어머니 15년째 누워 계시고 애 둘 키우면서 일했다. 난 진짜 사과하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내 20년 충성, 사랑, 우정을 다 부정당한 것 같다. 분해서 미칠 것 같다”며 오열했다. 조성민은 “부끄럽다.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장가현은 “됐다”며 자리를 피했다.
  •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제8회 남윤철 교사 장학금’ 수여식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제8회 남윤철 교사 장학금’ 수여식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가 ‘제8회 남윤철 장학금’ 수여식을 했다고 18일 밝혔다. ‘남윤철 장학금’은 교사의 사명과 제자 사랑을 실천한 고(故) 남윤철 교사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장학제도다. 수여식은 서울문화예술대 대회의실에서 온라인 실시간 양방향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국내외 한국어교육학과 재학생 10명에게 장학금이 전달됐다. 이날 서울문화예술대 한국어교육학과 재학생과 동문의 장학금 기탁식도 함께 열렸다. 전 세계 6개국에서 온라인으로 수여식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번 장학금 수여식이 남 교사의 희생정신을 다시금 되뇔 수 있는 뜻깊은 기회였다는 소감을 밝혔다. 남윤철 교사는 생전에 안산 단원고 영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안산 지역의 다문화 가정 및 외국인 근로자들의 한국어 공부를 돕고자 서울문화예술대 한국어교육학과에 편입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기울어져 가는 배 안으로 다시 들어가 학생들을 구하다 35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 태중 막내 둔 채 낙동강 전선 전사… 아들 제보로 가족 품에

    태중 막내 둔 채 낙동강 전선 전사… 아들 제보로 가족 품에

    6·25 전쟁에 참전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말을 새겨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찾아온 아들의 제보로 6·25 전사자의 신원이 확인됐다. 17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12년 경북 포항 입암리에서 발굴한 6·25 전사자 유해의 신원을 김종술 일병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해병 1사단은 6·25 당시 개인호(병사 개인용 참호) 지역을 기초발굴하는 과정에서 대퇴골 일부를 발견했다. 이어 전문 병력이 주변을 확장 발굴해 완전한 유해 형태를 수습했다. 당시 유리병 조각 등 유품 4종이 함께 발굴됐으나 신원을 특정하기에는 부족했다. 신원 확인은 유족이 국유단의 문을 두드리면서 이뤄졌다. 장남 김석만씨는 2020년 6월 국유단이 집중적으로 벌인 유해발굴사업 홍보를 접하고, 6·25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는 생전 어머니의 말을 떠올려 직접 국유단에 제보했다. 국유단 탐문관은 자택을 방문해 유전자 시료를 채취했다. 국유단은 제보자의 유전자를 정밀 분석한 결과 2012년 포항 입암리에서 수습한 유해와 부자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6년 9월 14일 경북 김천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9월 4일 아내와 젖먹이 아들 둘, 태중의 막내를 뒤로한 채 대구의 제1훈련소에 입소했다. 이후 8사단 소속으로 영천지구전투가 끝나고 북쪽으로 반격하는 과정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영천지구전투는 1950년 9월 22일까지 치러졌다. 낙동강 방어선의 일부인 영천을 북한군에게 빼앗기자 국군 제8사단이 북한군을 저지하고 제7사단과 인접 사단이 사흘간 교전해 지역을 탈환했다. 김종술 일병의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는 이날 서울 노원구에 있는 김씨의 자택에서 열렸다. 국유단은 고인의 참전 과정과 유해발굴 경과를 설명하고, ‘호국의 얼 함’을 전달했다. 2000년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전사자 191명의 유해에 대한 신원이 확인됐다.
  • 우크라서 한국어 가르쳤던 교수 전투 중 사망

    우크라서 한국어 가르쳤던 교수 전투 중 사망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다 군인이 된 데니스 안티포우(Denys Antipov)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학교 한국어과 교수가 전투 중 사망한 사실이 알려졌다. 서른 세 살의 재능있고 열정적인 청년이었던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한국 네티즌들은 “고인을 애도한다” “부디 아픔 없는 곳에서 편하게 쉬시길” 등 추모의 댓글을 남기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현지 소식을 전하는 블로거 겸 군인 오퍼레이터 스타스키(Operator Starsky)는 최근 자신의 유튜브 커뮤니티에 데니스 안티포우의 사진을 올리고 “타고난 보병이자 고등 교육을 받았고 명석했으며 한국어에 능통했던 나의 친구 데니스가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편히 쉬기를 바란다, 형제여”라는 글을 게재했다. 하르키우 인근 이지움에서 복무했던 안티포우는 지난 3월 포탄에 맞아 치료를 받다가 최근 다시 전투에 나섰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목숨을 잃던 지난 11일에도 소셜미디어에 영상을 올려 “방공호에 들어가면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주사위 놀이를 한다”라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생전 퇴역 군인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항상 남을 돕는 데 앞장섰다.안티포우는 지난 3월 JTBC ‘톡파원 25시’에 재한 폴란드인이자 ‘비정상회담’ 프셰므의 친구로 출연했다. 그는 포탄 공격을 입고 입원 중인 상황에서 제작진에게 영상 편지를 보냈다. 당시 안티포우는 “나는 우크라이나 군 중위로 복무하고 있다. 며칠 전 병원에 입원했으며 러시아 군대는 우리 (우크라이나) 국민을 목표로 미사일, 폭탄 등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세계가 우크라이나가 먼저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고 우리의 영토, 집, 가족을 지킬 뿐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계속해서 국토 침탈에 저항하고 싸울 것이다. 국제사회가 우리를 지지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안티포우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다니엘 린데만은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 투옥·고문 속에서도 유신독재에 저항… 죽음을 넘어 생명 노래[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투옥·고문 속에서도 유신독재에 저항… 죽음을 넘어 생명 노래[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지난 8일 김지하 선생이 별세했다. 1941년 신사(辛巳)생이니 우리 나이로 여든둘이다. 재작년쯤부터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지만 결국 생전에 뵙지 못했다. 누군가 세상을 등지면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표현을 하곤 하는데, 김지하 선생만큼 이러한 은유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할 만한 이도 드물 것이다. 선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목포와 원주라는 지명, ‘황토’와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언어의 섬광, ‘꽃 한 송이’라는 뜻의 본명 영일(英一)과 ‘언더그라운드’를 연상시키는 필명 ‘지하’(芝河)를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실꾸리처럼 한없이 풀려 나오는 김지하 브랜드의 파상들은 해방 이후 한국 근대사를 아프게 증언하는 역사적, 미학적 원형을 모두 품고 있지 않은가.●감옥에서도 ‘문학’과 ‘사회’ 서적 탐독 선생의 험난한 생애는 이미 가계(家系)에서부터 암시된다. 증조부는 동학군에 참여했다가 돌아가셨고 조부는 노름으로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아버지는 빨치산 경력으로 죽음을 맞을 뻔했지만 전기 기술을 가지고 있어 천행으로 살았다. 이처럼 가난과 몰락과 소외의 과정에서 선생은 실제적인 죽음도 여럿 보았다. 전쟁 때 뒷산에 수북하게 쌓인 흰옷 입은 시체들도 보았고 이념이 할퀴고 간 마을 사람들의 참화도 뚜렷이 목격했다. 선생이 말년에 펼친 생명사상은 어쩌면 이때 경험이 빚어낸 반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의 내면에서 생명과 죽음은 그렇게 호혜적 반사체가 돼 줬을 것이다.생명과 죽음이 서로를 껴안은 첫 줄기는 1960년 4월 혁명이었다. 1961년 5월 초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이 남북학생회담을 북쪽에 제안했을 때 선생은 남쪽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며칠 후 당시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가 있었고, 그네들이 추진했던 통일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선생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수배와 도피와 체포의 시간을 이어 갔다. 선생은 1964년 6·3항쟁에 참가하면서 첫 옥고를 치렀는데, 이때부터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석방을 반복하는 젊은 날을 보냈다. 이미 선생은 국내외의 수많은 탄원과 강력한 구명운동으로 세계적인 저항시인의 상(像)을 구축한 상태였다. 유신독재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표상이자 민족문학의 상징으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만의 위상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상,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등 쟁쟁한 국제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인지도와 파급력을 갖추기도 했다. 어둑한 음각이지만 ‘시인 김지하’의 한 절정이 새겨졌던 시기였다. 삽화 하나. 어느 출판사 대표 한 분이 서울역에서 숙대입구 쪽으로 가는 헌책방에서 을유문화사 문고판 에스카르피의 ‘문학의 사회학’을 구했다고 한다. 이채롭게도 장서인(藏書印)은 어느 교도소 이름이었고, 책 뒤에 꽂힌 대출자 카드에는 ‘김영일’이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 김지하 선생이 복역했던 시공간과 일치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혼자 빌려 선생은 감옥에서마저 ‘문학’과 ‘사회’라는 두 기둥을 탐독했으리라.●저항문학의 극점기에 생명사상 싹터 1970년대의 언더그라운드에는 ‘3K’가 있었다. 김대중, 김민기, 김지하다. 정치와 노래와 시에서 그들이 던진 메시지는 암울한 시대를 때로는 비추고, 때로는 안타깝게 하는 흐릿한 등불 같았다. 바로 그때 서정적 비극성의 최전선으로 피어난 시집이 ‘황토’였다. “간다/울지 마라/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길/몸 팔러 간다”(‘서울길’) 이런 음색이 담긴 선생의 첫 시집은 선연한 흙빛을 따라 역사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다. ‘오적’(五賊)은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라는 미학적 장치를 통해 비판한 출중한 성취였고, ‘타는 목마름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개진해 간 뜨거운 노래의 성채였다. 이러한 성취는 저항문학의 극점이기도 했지만 이때부터 선생은 이미 생명사상의 맹아를 틔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감옥에 있을 때 운동을 하고 돌아와 누군가 감방 철창 쇠받침과 시멘트 틈에서 돋아난 풀에 물을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풀이 아니라 개가죽나무였다. 바람이 불어 흙먼지와 함께 날아든 씨앗이 시멘트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것이다. 선생은 거기서 진짜 생명을 보았다. 한낱 미물도 저렇게 스스로의 몸을 피워 올리는데 과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자기 연민과 다짐이 동시에 북받쳐 올랐다.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이채로운 책 두 권이 일본에서 출간된다. 작품집 ‘불귀’와 옥중투쟁기 ‘김지하는 누구인가’였다. 발행처는 ‘일본가톨릭정의와평화협의회’라는 곳이었다. ‘불귀’에는 당시 국내에서 읽을 수 없던 시편들과 1975년 5월 서울구치소에서 쓴 ‘양심선언’ 등이 담겼다. 일부 글은 한일대역으로 실렸다. 옥중투쟁기에는 선생의 옥중 메모 친필과 각종 법정 자료들이 실렸다. 이미 선생은 한반도 바깥의 시인이었다. 선생의 30대가 그렇게 저물어 갔다.●1980년대 동학·생명사상 창의적 접목 불혹의 연대 1980년대가 돼 선생은 감옥을 나와 동학과 생명사상을 창의적으로 접목해 ‘애린’, ‘이 가문 날에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등을 썼다. 선생이 주창했던 ‘흰 그늘’과 ‘율려’의 미학은 생명사상의 정점에서 피어난 고갱이였을 것이다. 특별히 ‘흰 그늘’은 후기 미학을 집약하는 비유적 표상이었는데 선생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4·19 직후 서울농대에서 겪은 스무살 때의 아득한 흰 밤길의 한 환상, 민청학련 무렵인 서른세 살 때의 우주에의 흰 길의 한 환상, 재구속되어 옥중에서 백일참선에 돌입했던 서른여덟 살 때의 흰빛과 검은 그늘의 교차 투시, 해남에서 두 계열의 연작시 ‘검은 산, 하얀 방’의 분열 구술, 목동 시절의 컴컴하고 침침한 ‘쉰’의 그늘과 일산 이사 직후의 그 눈이 멀 듯한 ‘일산시첩’의 흰빛들의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날카로운 모순 대립. ‘흰 그늘’은 나의 미학과 시학의 총괄 테마가 되었다.”(‘흰 그늘의 길 1’, 2003) 그렇게 선생의 생애는 역사의 ‘황톳길’에서 생명의 ‘흰 그늘’로 나아갔다. 1990년대 이후 타계할 때까지 선생이 드문드문 보여 준 정치적 선택은 세상을 뜨겁게 달구면서 비판과 논란을 이어 갔다. 1991년 강경대 사건 때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에 쓴 “죽음의 굿판 당장 집어치우라”라는 표현은 두고두고 선생을 따라다니는 전향문 같은 역할을 했다. 죽음의 흐름을 막아 보고자 하는 충심을 읽을 수도 있었지만 강대강(强對强) 대치 상황에서 그러한 속성은 속절없이 잊히고 묻혀 갔다. 이러한 굴곡을 한없이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시인 김지하’, ‘사상가 김지하’는 척박한 한국문학사의 돌올한 유산이자 그때그때의 맥락 속으로 귀환할 강렬하고도 흐릿한 등불로 남을 것이다. 숱한 투옥과 고문의 형극 속에서, 불온을 넘어 저항으로, 폐허를 건너 생명으로, “황톳길에 선연한/핏자국”(‘황톳길’)을 넘어 지금-이곳까지 영욕의 세월을 건너온 선생의 죽음을 마음 깊이 애도한다.●한 시대 전범·한국문학으로 우뚝할 것 앞으로도 우리는 선생이 남긴 아름다운 서정시 ‘황톳길’, ‘녹두꽃’, ‘빈 산’, ‘애린’을 깊은 감동으로 읽을 것이다. 목청껏 불렀던 ‘새’, ‘금관의 예수’, ‘타는 목마름으로’를 때가 되면 줄탁동시의 기운으로 소환할 것이다. “왜 날 울리나 눈부신 햇살 새하얀 저 구름/죽어 너 되는 날의 아득한 아아 묶인 이 가슴”,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그 누가 있어 한 시대를 이렇게 어둑하고도 아름답게 돌파해 갔겠는가.자연인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그래도 ‘시인 김지하’의 언어는 한 시대의 전범이자 한국 문학의 선연한 역사로 우뚝할 것이다. 이제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1974년 1월’)를 맞으면서, 우리는 선생의 언어를 빌려 ‘저항’과 ‘생명’이라는 차원을 새롭게 사유해 갈 것이다. 앞으로 선생에 대한 여러 해석과 평가가 따르겠지만, 첨예한 쟁점으로 김지하 담론이 펼쳐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한 시대의 거인을 추모하면서 선생의 평안을 마음 깊이 빌 뿐이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임권택 감독 “故 강수연, 더 많이 살다 가야 되는데…”

    임권택 감독 “故 강수연, 더 많이 살다 가야 되는데…”

    임권택 감독이 배우 강수연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슬퍼했다.  15일 방송된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는 향년 5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의 삶을 재조명하는 특집으로 꾸며졌다. 영화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은 강수연의 출연작을 보며 “수연이가 ‘어디서 이것저것 많이 보고 왔구나’라는 것을 (제가) 피부로 느낄 정도로 꽤 능숙하게 (연기를 해서)속으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며 “(결혼도 안 한 애가) 어떻게 (그 감정을) 느꼈는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참 젊었는데 너무 빨리 죽었다”라며 안타까워 했다. 임 감독은 강수연과의 첫만남을 떠올리며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마도 무슨 방송에서 (처음) 봤을 거예요, 드라마에 출연했는지 안 했는지 몰라도 방송에서 보고 연기자로 기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 같다”라고 했다. 이어 “(배우로서)워낙 좋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외모를 (연기에) 과장도 안 하고 그렇다고 또 안으로 수줍게 감추는 것도 없이 그냥 당당하게 해냈던 연기자고 선천적으로 연기자로서 자질이 갖춰진 사람”라고 덧붙였다. 임 감독은 강수연의 영결식에 가는 길에 “내가 나이가 있으니까 곧 죽을 텐데 조사나 뭐가 됐든 간에 ‘수연이가 와서 (추모사를) 읽어 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게 거꾸로 된 (상황이잖나) 참 말이 안돼, 더 많이 살다가 가야 되는데”라고 했다. 한편, 강수연은 지난 5일 심정지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사흘 만인 지난 7일 오후 사망했다. 원인은 뇌출혈로, 고인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긴 후에도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됐다. 고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취재 중 순직 여기자 아부 아클레 마지막 길도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취재 중 순직 여기자 아부 아클레 마지막 길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도 폭력으로 얼룩졌다. 관이 바닥에 떨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25년 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현장을 취재하다 지난 11일(이하 현지시간) 총격에 스러진 아랍어 방송 알자지라의 여기자 시린 아부 아클레(51)의 장례식이 13일 고인이 태어난 동예루살렘에서 거행됐다. 그런데 이스라엘 경찰이 운구 행렬을 해산시키려다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공개돼 해도 너무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1971년 1월 3일 세상에 태어난 아부 아클레는 생전에 아랍 미디어에서 이름과 얼굴이 가장 널리 알려진 기자로 손꼽혔다. 2차 인티파다(봉기) 등 팔레스타인의 저항 역사를 가장 앞장서 취재했다. 오죽했으면 팔레스타인과 아랍 젊은이들이 그녀를 닮고 싶어 언론인을 지망하곤 한다고 영국 BBC는 14일 전했다. 투철한 취재 정신으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도 했다. 그녀는 요르단강 서안 점령지 제닌에서 이스라엘군이 테러범을 색출한다고 벌인 작전을 현장에서 취재하다 목숨을 잃었다. 팔레스타인 측은 아부 아클레가 이스라엘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방송사, 현장에 함께 있었던 AFP 사진기자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대원들의 총탄에 맞았다고 했다가 나중에 정부 대변인이 어느 쪽 총탄에 맞았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부검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군은 전문적 검사가 필요하다며 아부 아클레의 몸에 박힌 탄환을 자신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팔레스타인은 독자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겠으며 이번 사안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할 것이란 방침을 밝혔다. 앞으로도 고인의 죽음 책임을 놓고 양측이 심각하게 갈등할 것으로 보인다.전날 장례식에는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운집해 참다운 언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AP 통신은 2001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고위지도자 파이살 후세이니 이후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동예루살렘의 성요셉 병원에 있던 고인의 시신은 구시가지의 가톨릭 교회를 거쳐 묘지에 매장됐다.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관이 병원을 나서자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팔레스타인”을 연호했다. 일부는 “시린, 당신을 위해 우리의 영혼과 피를 바치겠다”고 외쳤다. 그러자 이스라엘 경찰은 진압봉을 휘두르며 현장에 난입해 팔레스타인 국기를 찢고 섬광탄을 터뜨리며 해산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 충돌이 빚어졌고, 아부 아클레의 관을 들고 있던 남성 한 명이 놀라 균형을 잃어 자칫 관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고 AP는 전했다. 현장에 있었던 알자지라 특파원 기바라 부데이리는 이스라엘 경찰의 폭력은 아부 아클레를 두 번 죽이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 뒤 이스라엘 경찰은 아부 아클레의 관이 실린 영구차를 호위하면서도 영구차에 붙여진 팔레스타인 국기를 뜯어내려 했다. 동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모두 있는 곳으로, 양쪽 모두 이 지역의 지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1967년 중동전쟁 당시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역을 영원한 자국 수도로 선언했지만,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미래의 독립국 수도로 여긴다. 이스라엘 당국은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를 주장하거나 지지하는 행위를 엄격히 단속하고 있다. 이스라엘 경찰은 병원에 운집한 주민들이 “국수주의적 선동”을 하며 중단하라는 지시에 불응하고 돌멩이 등을 던졌다고 주장했다. 또, 성명을 통해 “군중이 영구차 운전자를 위협해 관을 넘겨받은 뒤 계획되지 않은 행진을 하려 했다”면서 “유가족의 뜻에 부합하는 계획된 방식대로 장례식이 이뤄지도록 개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반응은 냉랭하다. 젠 사키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현장 영상이 “매우 충격적”이라면서 “목숨을 잃은 뛰어난 언론인에 대한 기억을 기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어야 했다. 평화로운 행진이 방해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스라엘 경찰의 행동을 규탄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세세한 점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이건 조사가 이뤄져야 할 일이란 건 안다”고 답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 보안경찰과 성요셉 병원에 모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립, 그리고 일부 경찰이 현장에서 보인 행동에 깊은 근심을 느낀다”고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이례적으로 일치된 입장을 도출해 즉각적이며 철저하고 투명하고 공정하며 편파적이지 않은 조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합의했다. 중국의 방해가 있어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장례 해산 시도에 대해 규탄하자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 5월 눈부셨던 그날, 광주의 조천호군에게 [그 책속 이미지]

    5월 눈부셨던 그날, 광주의 조천호군에게 [그 책속 이미지]

    ‘강아지똥’ 등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의 이야기들을 동화로 쓴 고 권정생 작가의 미발표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편지가 발견됐다. 작가는 아빠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다섯 살 아이의 사진을 보고 ‘광주의 조천호군에게’라는 편지를 썼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사진이다. 작가가 생전에 차마 부치지 못한 이 편지는 이 시대를 사는 고정순 작가에게 닿아 한 권의 그림책으로 탄생했다. ‘봄이 오면 아빠에게 좋아하는 꽃을 제일 먼저 찾아 주겠다’는 아이의 작은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그 슬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가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개인의 일상이 깨지는 아픔을 보여 줌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 [책꽂이]

    [책꽂이]

    팬데믹 브레인(정수근 지음, 부키 펴냄) 팬데믹 3년차를 맞아 코로나19가 우리 뇌와 인지 기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심리학자인 저자는 코로나로 인한 두통과 피로, 기억력 감퇴 등이 다른 뇌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코로나에 걸린 적 없어도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는 피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260쪽. 1만 6800원.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김응종 지음, 푸른역사 펴냄) 사학자의 시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을 고발한다. 공포정치로 50만명이 투옥되고 3만여명이 처형된 혁명의 비극적 종말 과정과 라파예트, 시에예스, 콩도르세 등 반혁명가나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힌 혁명가들을 조명한다. 644쪽. 3만 5000원.우리 곁에 왔던 성자(최홍운 외 18인, 서교 펴냄) 고 김수환 추기경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현직 언론인과 사제, 수도자들이 그와의 추억을 담았다. 2009년 선종한 김 추기경이 생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선 추구를 위한 교회 역할을 강조한 사실과 어떻게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됐는지를 보여 준다. 232쪽. 1만 5500원.휴랭 머랭(최혜원 지음, 의미와재미 펴냄) 언어학자인 최혜원 이화여대 교수가 현대인이 사용하는 신조어와 언어유희, 외래어와 줄임말, 조음법칙 속에서 언어의 본질을 분석했다.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는 왜 영미권에서 ‘람동’으로 소개됐는지, ‘브렉퍼스트’는 왜 시커먼 ‘블랙퍼스트’가 됐는지 등을 재미있게 펼친다. 268쪽. 1만 7000원.여론 굳히기(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예진 옮김, 인간희극 펴냄) ‘홍보(PR)의 아버지’이자 ‘프로파간다’(1928)의 저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1923년 저서가 99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번역 출간됐다. 여론을 중심으로 심리를 활용하는 법을 설명한 저자는 “본능과 보편적 욕망에 호소하는 것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기본”이라고 조언한다. 296쪽. 1만 2800원.왼손잡이 우주(최강신 지음, 동아시아 펴냄) 물리학자의 시각으로 왼손과 오른손에 우주의 작동 원리가 있음을 고찰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적 입자 ‘중성미자’가 오직 왼쪽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우주가 비대칭적이고 자연이 왼쪽과 오른쪽을 차별한다고 설명한다. 전기와 자기, 약한 상호작용, 끈 이론 등 현대 물리학을 쉽게 설명한다. 240쪽. 1만 6000원.
  • “천상의 별이 된 강수연… 한국 영화 끝까지 지켜 줄 겁니다”

    “천상의 별이 된 강수연… 한국 영화 끝까지 지켜 줄 겁니다”

    “지상의 별은 졌어도 천상의 별로 한국 영화를 끝까지 지켜 줄 겁니다.” ‘월드 스타’ 강수연이 11일 영화인들과 팬들의 슬픔 속에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이날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인장으로 엄수된 고인의 영결식에는 유족을 비롯해 100여명의 영화인이 참석했고,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유튜브를 통해서도 1만 5000여명의 팬이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배우 유지태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에 참석한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고인을 추억하며 비통함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김동호(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은 “스물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월드 스타라는 왕관이자 멍에를 졌지만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며 스타답게 잘 견디면서 살아왔다”면서 “강한 리더십과 포용력으로 후배들을 사랑했던 선배였고, 부산영화제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았던 영화제의 별이자 상징이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씨받이’와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통해 강수연을 월드 스타 반열에 올린 임권택 감독은 ”수연아, 친구처럼 딸처럼 동생처럼 네가 곁에 있어서 든든했는데 뭐가 그리 바빠서 서둘러 갔냐. 편히 쉬어라”라는 짧고도 가슴 먹먹한 추도사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후배들의 눈물의 추도사도 이어졌다. 고인과 ‘송어’를 함께한 배우 설경구는 “영화인으로서 애정과 자존심이 충만했고 어디서나 당당했던 선배님은 배우들의 진정한 스타이자 모든 영화인을 아우르는 거인 같은 대장부였다”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던 제게 용기와 희망을 준 영원한 사수”라고 고인을 추억했다. 이어 “선배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별이 돼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문소리도 “한국 영화에 대한 언니의 마음 잊지 않겠다. 다음에 만나면 같이 영화해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고인의 유작이 된 ‘정이’의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은 “작업실로 돌아가 선배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선보일 새 영화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배우 강수연의 연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며 “수많은 사람에게 선배님의 새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 끝까지 동행하겠다”며 울먹였다. 이날 영결식에서는 영화제 수상과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 등 고인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이 상영됐다. 제니퍼 자오 대만영상위원회 부위원장, 차이밍량 감독, 배우 양구이메이 등 외국 영화인들도 추모 영상으로 고인을 기렸다. 고인의 유해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돼 경기 용인공원에 봉안됐다.
  • “독재 견딘 건 김지하라는 정부 덕”… 새달 25일 추모제

    “독재 견딘 건 김지하라는 정부 덕”… 새달 25일 추모제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시로 1970년대 독재정권에 맞선 저항시인 김지하가 11일 영면했다. 지난 8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인의 발인식이 이날 오전 9시 강원 연세대 원주장례식장에서 유족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애도 속에 엄수됐다. 고인의 두 아들인 김원보 작가와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생전 고인과 인연이 있던 이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영정을 든 차남 김 이사장의 뒤로 운구 행렬이 이어졌다. 장남 김원보 작가 등 유족이 뒤따랐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판소리 명창 임진택 연극 연출가, 이청산 전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이사장 등 문화예술계 지인과 후배들도 함께했다. 발인에 앞서 열린 가족예배에서 김 이사장은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가족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청산 전 이사장은 “서슬 퍼런 독재정권 속에서도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은 김지하라는 우리들의 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 땅의 민주주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인의 유해는 오전 10시 화장된 뒤 부인 김영주씨가 묻힌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선영에 안장됐다. 시인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의 외동딸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씨와 1973년 결혼했다. 김씨가 2019년 11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부는 3년여 만에 한 공간에서 영면하게 됐다. 1970년대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수차례 투옥됐던 고인은 1980년대 이후 동학과 전통 사상을 접목한 새로운 생명사상을 정립하는 데 몰두했다. 또 이를 토대로 많은 시를 썼다. 1991년 조선일보에 운동권을 비판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게재해 논란을 불렀다. 2012년 18대 대선 과정에서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으로 진보 진영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빈소에는 나흘간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손학규·이재오 전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강원도당 상임고문인 이창복 전 국회의원 등 고인과 오랜 세월 친분을 쌓은 원로 정치인들이 빈소를 지켰다. 고인의 사상과 문화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행사가 이어진다. 시인의 후배 문화예술인과 생명운동가 등은 49재에 맞춰 다음달 25일 서울에서 화해와 상생 차원의 추모문화제 ‘생명 평화 천지굿’을 열 예정이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인도 전통 현명악기 산투르 레전드 샤르마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인도 전통 현명악기 산투르 레전드 샤르마

    인도 북부 지방을 비롯해 서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연주하는 현명악기(絃鳴樂器) 산투르(santoor)는 줄이 무려 100개나 된다. 사다리꼴의 상자가 공명실의 역할을 한다. 양손에 나무로 된 채(망치)를 쥐고 두드려 소리를 낸다.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아버지의 반대에도 이 악기를 배우려고 안달해 일가를 이룬 인물로 조르바를 묘사한다. 이란과 그리스, 루마니아까지 퍼져나갔다. 이 악기를 세계에 알렸으며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오가며 활약한 인도 음악 레전드 쉬브쿠마르 샤르마가 84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영국 BBC가 10일(현지시간) 전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고인은 클래식과 영화음악에 두각을 나타낸 플루티스트 하리프라사드 차우라시아와 듀오 활동을 했다. 또 ‘Silsila’, ‘Chandni’, ‘Darr’, ‘Lamhe’ 등 적어도 여덟 편의 발리우드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영면을 기원할 정도다. 고인은 잠무에서 태어났는데 생전 그의 회고에 따르면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누군가 노래를 부르거나 다른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 우마 두트 샤르마는 사제 가문 출신으로, 클래식 가수였으며 인도 전통 타악기 타블라(tabla)를 연주했다. 1950년대 초 국영 라디오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우마 두트는 현지 수피(sufi) 음악에 사용되는 카슈미르 전통 악기인 산투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산투르를 사서 아들에게 연주해 보라고 했다. 아들은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했다. 샤르마는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는 ‘네 이름과 산투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넌 모를거야. 그것들은 하나가 될 것이야. 그래서 넌 이것을 연주해야 해’라고 말씀하셨다”고 털어놓았다. 열일곱 살이 되자 샤르마는 현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산투르와 타블라를 연주했다. 다재다능한 음악가로 절정을 맛봤고, 나중에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 사로드 연주자 우스타드 알리 아크바르 칸을 위해 타블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가수 비자이 키츨루는 고인이 산투르를 인도 클래식 음악의 주요 구성 요소로 만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산투르, 사로드, 셰나이, 바이올린은 주요 악기로 간주됐으며, 사랑기는 보컬리스트에게 수반되는 악기로 사용됐다.” 고인은 “인도 클래식 음악의 요구 사항에 맞게, 특히 음조의 질을 좋게 하기 위해 악기를 손질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한번 연주할 때 몇 시간이나 8㎏ 나가는 악기를 무릎에 놔두고 연주한 최초의 음악인이었다. 전통적으로 산투르는 연주할 때 나무 스탠드 위에 올려놓곤 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산투르가 고전 악기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혹한” 반응을 보였고, 그는 자신의 아들로부터 “악기를 잘못 선택했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자서전 ‘100개의 현과 여행하기’(Journey with a Hundred Strings)에서 돌아봤다. 샤르마는 끈질기게 버텨냈다. 열일곱 살이던 1955년 발리우드 감독인 V 샨타람으로부터 영화음악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하지만 5년 뒤, 그는 영화산업에서 기반이 될 만한 일을 찾아 뭄바이에 도착했다.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화음악을 전공하는 인 마넥 프렘핸드는 “그의 작품은 60대 가운데 상당 부분과 70대 중 일부 영화와 클래식 두 가지 트랙을 기차처럼 계속 달렸다”고 말했다. 샤르마는 몇년에 걸쳐 클래식 쇼에서 관객을 모으기 위해 연주했으며, 대중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샹카르는 한때 샤르마를 “슈퍼스타”라고 불렀는데, 그는 항상 “산투르를 고전적 세련미의 높이로 끌어 올리는 선구자로 언급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쉽게 넘나드는 희귀한 음악가 샤르마는 라타 망게슈카르, 무함마드 라피, 키쇼어 쿠마르, 무케시 같은 거장들이 뭉친 적어도 40개의 인기있는 힌디어 영화를 위해 산투르를 연주했다. 여덟 번째부터 차우라시아와 협력해 아미타브 바흐찬이 출연한 ‘Silsila’를 시작으로 많은 히트 곡을 남겼다. 바흐찬은 이 영화를 촬영했던 섣달 그믐날을 명확히 기억했는데 듀오가 델리의 한 호텔에서 자정을 넘겨서까지 흥 넘치게 놀았다. 바흐찬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리는 샤르마의 육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이 고갈된 것을 봤다”고 돌아봤다. 1998년에 쿠마르와 차우라시아는 앨러니스 모리세트, 엘튼 존, 필 콜린스와 함께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거행된 노벨상 시상식 무대에 선 최초의 인도 음악인이 됐다. 듀오는 인도 의회의 중앙 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샤르마는 1986년 산게엣 나탁 아카데미상, 1991년 파드마 슈리, 2001년 파드마 비부샨 등 인도에서 가장 큰 영예를 안았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다. 아들 라훌은 리처드 클레이더만, 케니 G와 녹음한 평판 좋은 산투르 연주자이기도 하다.
  • “변절은 오해… 세상과 불화한 채 떠나 안타깝다”

    “변절은 오해… 세상과 불화한 채 떠나 안타깝다”

    민주화 운동을 대표한 저항 시인인 김지하 시인이 지난 8일 별세한 가운데 각계에서 애도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나태주 시인은 9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그는 시인 이상의 삶을 살면서 한 시대의 변화를 가져왔던 큰 에너지를 가진 분”이라며 “시대의 지성, 횃불, 향도로 앞서가면서 민주화라고 하는 큰 사회적 변화를 이루게 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깃발을 들고 앞에 나아가는 사람으로, 같은 편에서는 빨리 나가라고 독려를 받았을 것이고 반대편에서는 제지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양쪽의 압력 속에서 깃발을 든 손을 내릴 수도, 또 멈출 수도 없는 인생을 살아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설가 김훈은 “고인이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학생들의 저항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주된 흐름은 죽음을 만류한 것”이라면서도 “운동권에 의해 오해가 있어 반(反)김지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 일이 시인에게 평생 상처가 됐다”고 했다. 황석영도 “고문과 옥살이로 후유증을 앓았는데 우리 사회가 아픈 사람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며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도 시인을 이용하기만 한 측면도 있다. 사회와 불화한 채로 세상을 떠나게 돼 참 안타깝다”고 애도했다. 이근배 시인은 “1970년 당시 월간지 ‘사상계’ 편집인이 여러 문인에게 글을 청탁했지만 거절당했고 김지하 시인만이 ‘오적’(五賊)이란 시로 서슬 퍼런 권력에 맞서 거대한 붓을 휘둘렀다”며 “이후 생명 사상, 여성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기 소신과 철학을 밝혔는데 그걸 정치권에서 이용했던 것일 뿐 변절이라는 말은 그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한 것은 문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시인의 위대함은 체제에 저항하는 참여 시인을 넘어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위해 사상의 지평을 확대하고 직접 발언한 데 있다”며 “시인이 오해와 비판을 감수하며 말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양심은 지금처럼 성장하고 성숙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페이스북에 애도의 글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생전에 고인이 자신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음에도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했다. 강원 연세대 원주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된 빈소에는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 임진택 경기아트센터 이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이재오 전 국회의원과 이창복 6·15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등이 찾았다. 임 이사장은 “49재인 다음달 25일 서울에서 고인의 행적을 학술과 예술적 측면에서 바라본 문화난장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족의 입을 통해 임종 순간도 전해졌다. 둘째 아들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제 아내와 장인·장모 등 함께 사는 가족 모두 임종을 지켰다. 일일이 손을 잡아 보고 웃음을 보이신 뒤 평온하게 가셨다”며 “말도, 글도 남기지 못하셨지만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셨다”고 말했다. 올해 안에 추모집 성격의 책도 출간된다. 도서출판 작가 측은 “홍용희 교수를 비롯해 연구자 10여명이 고인의 작품을 집중 연구한 책”이라며 “이전부터 준비해 왔지만 추모집 형태로 출간이 이뤄질 것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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