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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들의 바보’ 잠들다] 교황청, 세번째 추기경 임명 앞당길 듯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한국 천주교계에 닥쳐올 변화에 교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주교계는 교회 기구와 운용을 비롯한 천주교 내부의 큰 지각 변동은 당장 없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한국 천주교의 유일한 추기경이 된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의 은퇴가 사실상 얼마 남지 않았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사회활동과 관련한 일반인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천주교 교회가 적지 않은 변화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새 서울대교구장 취임·정진석 추기경 은퇴 임박 만 75세면 주교에서 은퇴하도록 하고 있는 천주교 규정상 78세인 정진석 추기경은 이미 정년을 3년 넘긴 상태. 정 추기경이 로마 교황청에 은퇴 의사를 밝혀 교황청이 이를 받아들일 경우 한국천주교는 가장 상징적이고 높은 자리인 서울대교구장을 새로 맞게 된다. 천주교계에 따르면 정진석 추기경은 정년을 맞은 시점부터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혀 왔다. 정 추기경의 은퇴와 그에 따른 새 서울대교구장의 취임 이후 대주교, 주교들의 연쇄 이동이 예상된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추기경에 이은 세번째 추기경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제3의 추기경 탄생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같은 관측은 교황청이 정진석 추기경을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 특사로 전격 임명해 김 추기경의 장례를 서울대교구장에서 교황장으로 격을 높여 치르도록 한 것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김 추기경의 선종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연일 이어지는 조문행렬을 본 로마 교황청이 한국천주교를 새롭게 인식, 새 추기경 임명 시점을 앞당길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사회약자 위한 천주교 나눔·생명운동 탄력 한국천주교 교회의 성격과 관련해선 대(對)사회에 초점을 맞춘 활동이 더욱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추기경의 생전 활동이 부각되고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가면서 교회의 역할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대전 교구를 비롯한 일부 교구에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 강조하고 치중했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활동을 높일 것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해 김수환 추기경이 1989년 발족시킨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비롯한 천주교 사회복지 단체엔 가입을 원하는 이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본부장인 김용태(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장)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천주교계의 나눔과 생명 운동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특파원 칼럼] 중국 자원외교와 세계의 우려/박홍환 베이징 특파원

    [특파원 칼럼] 중국 자원외교와 세계의 우려/박홍환 베이징 특파원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유력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은 평소의 진중한 언행 때문에 속내를 읽기 힘든 인물로 꼽힌다. 중후한 풍채와 온화한 얼굴 등 외양까지 겸비했다. 그런 그가 어지간히 화가 났나 보다. 중남미 순방 중 멕시코 거주 화교들과의 간담회에서 “배부르고 할 일 없는 외국인들이 함부로 중국을 비판한다.”며 중국의 자원독식 문제 등을 제기하는 일부 국가들을 향해 날 선 경고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은 13억 국민의 먹을거리 등 기본적인 것을 해결해 인류사회에 이미 위대한 공헌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맞는 말이긴 하다. 연간 소득이 1000위안(약 20만원)에 못 미치는 빈곤층이 아직 4300만명이나 남아 있지만 13억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국민들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것은 개혁개방 30년의 성과이자 중국의 위대한 승리라고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씁쓰레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가난을 구제하고, 기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국가 및 지도자의 당연한 의무일 뿐 공치사의 대상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하에서 지금 전 세계의 눈은 그나마 경제의 동맥이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 쏠려 있다. 미국을 위시한 많은 국가들이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국이 갖고 있는 이런 ‘힘’ 때문일 것이다. 시 부주석의 강성 발언도 그 힘이 바탕에 깔린 자신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국가 지도자들이 연초부터 전 세계를 돌며 외교력을 과시했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필두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 부주석, 후이량위(回良玉) 부총리 등이 그들 표현대로 ‘정월외교’에 진력했다. 후 주석은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지원으로 건설된 종합운동장 준공식에 참석하고, 교량 건설 자금을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은 풍요로워진 자신들이 가난한 국가들의 후원자로 나서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비쳐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시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연초부터 몰아치는 중국의 자원확보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중국은 지금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내세워 전 세계 자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석유, 철광석, 알루미늄…. 중국의 ‘아프리카 공들이기’ 등 외교전략의 배후에 자원확보 전략이 깔려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물론 내 국민들을 잘살게 하기 위한 산업을 가동하기 위해 자원을 확보하겠다는 데야 누가 뭐랄 일도 아니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들도 그런 행태 속에 지금의 위치를 확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은 13억명이라는 대인구가 몰려 있는 거대국가라는 게 딜레마이다. 13억명을 골고루 잘 먹이고, 잘살게 하는 데 필요한 그 많은 자원을 다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인가. 중국인들의 풍요가 지구의 제한된 자원에 도대체 어떤 충격파를 가져올 것인가. 오죽하면 ‘중국의 가난은 인류의 재앙이고, 중국의 풍요는 지구의 재앙’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최근 지인이 보낸 전자우편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말씀 한 대목이 들어 있었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봐야 한다.” 중국의 ‘이웃’들은 지금 풍요로워진 중국, 부강해진 중국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고 예전의 가난한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이웃들의 걱정에 마냥 성을 내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지구의 공동번영을 위한 지혜를 짜내는 데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박홍환 베이징 특파원 stinger@seoul.co.kr
  • 기형도 시인 20주기,배우 이은주 4주기…그리운 이들

    기형도 시인 20주기,배우 이은주 4주기…그리운 이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집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입속의 검은 잎’으로 한국 문학계에 큰 울림을 남긴 고(故) 기형도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다음달 5일 ‘기형도 시를 읽는 밤’이란 행사가 열린다.  중앙일보 기자였던 기형도 시인은 29세 젊은 나이에 서울 시내의 한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짧은 생을 마쳤다. 그의 유고시집은 40만부 이상 팔렸으며 ‘빈집’ ‘엄마 생각’ 등은 애송시로 사랑받고 있다.  홍익대 앞 이리카페에서 열리는 ‘기형도 시를 읽는 밤’ 행사에는시인이자 대중문화 평론가인 성기완씨가 사회를 맡아 성석제, 한강, 이문재, 황인숙 등 문인들의 시 낭송과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의 리더 백현진씨의 음악 공연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www.aladdin.co.kr)에 댓글을 남기면 된다. 많은 이들이 “내 20대를 지배했던 시인, 그를 다시 읽고 싶습니다.” “10대때부터 30대 중반인 지금까지, 생이 메마를 때마다 여전히 ‘입 속의 검은 잎’을 펴듭니다.”란 댓글을 남기며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에 앞서 오는 22일은 영화배우 고 이은주씨의 4주기이도 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시작된 추모 행사에는 빠른 속도로 많은 네티즌들이 25살의 젊은 나이에 스러진 아름다운 여배우에 헌화하고 있다.  이은주씨의 팬클럽과 전 소속사 등에서는 추모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며 21일 서울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서 그녀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가 무료로 상영된다.  ‘요절’이란 공통점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을 짠하게 만드는 이로는 고 김성재씨를 빼놓을 수 없다. 최근 한 청바지 광고에 가수 김성재씨의 생전 모습이 다시 등장하면서 그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불붙고 있다. 그의 의문사를 재수사하라는 네티즌들의 청원도 이어지고 있다.  고 이주일과 고 이소룡에 이어 사후에 광고모델이 된 가수 김성재씨의 의문사는 네티즌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재수사가 이뤄질지 불투명하다. 공소시효가 2년 남아있기는 하지만 2심에서 살인 혐의를 받던 여자친구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대법원에서의 상고심도 기각됐으며 당시 판결이 잘못됐다는 새로운 증거도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서울신문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추모] “세상에 남긴 사랑의 삶 실천운동 펼칠 것”

    [김수환 추기경 추모] “세상에 남긴 사랑의 삶 실천운동 펼칠 것”

    “평신도를 대표해 김수환 추기경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고별사를 하게 돼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추기경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유지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데 평신도들이 앞장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때 평신도 대표로 추도사를 하는 한홍순(66) 한국천주교평신도협의회(평협) 회장은 19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추기경님은 생전 평신도들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보이셨다.”며 추기경의 큰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운동을 벌여나갈 계획을 밝혔다. “추기경님은 누구와도 차별 없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교회 안팎에서 평신도들이 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하고 지원해 평신도들의 위상 변화 측면에서도 큰 발전을 낳았다.”며 평협이 결코 그 뜻을 잊어선 안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추기경님이 우리 민족을 위해 하신 일들은 추기경 생전에도 충분히 알았지만 선종 뒤 연일 이어지는 추모 행렬을 보면서 더욱 크게 다가온다.”면서 특히 “520만 신도들은 추기경의 큰 일들을 말로만 칭송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 남긴 ’사랑의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집안의 구성원들이 각각 다른 역할을 하듯이 천주교 교회에서도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의 할 일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최후를 맞기 전 제자들과 함께 밀떡과 포도주를 나누신 것은 공동체의 역할과 일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평신도들도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제 못지않게 교회와 공동체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큰 일들이 있습니다.” 한 회장은 김수환 추기경이 평생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야말로 국장이나 다름없이 온 국민의 추도 속에 진행되는 추기경의 장례를 계기로 모든 이들이 깊이 새겨야 할 큰 뜻이라고 강조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우리들의 바보’ 영면하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의 영원한 삶을 시작했다. 20일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 어제 내린 눈, 비는 흔적이 없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환히 밝히기라도 하듯 성당을 감싼 하늘이 청정하기만 하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신자와 시민이 성당 정문부터 들머리, 대성당 입구를 가득 메워 발디딜 틈이 없다. 밤사이 손이 시릴 만큼 쌀쌀했던 날씨마저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정성의 물결엔 주눅이 들었다. 입당 성가로 시작된 장례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신자석을 향해 누운 채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소박하게 치러달라.’는 김추기경의 뜻을 따라 일상 그대로 진행되는 미사의 의식들. 하느님이 고인을 평화와 빛으로 불러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와 말씀전례. 그리고 이어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된다.’는 복음은 김 추기경이 생전 즐겨 읽고 인용한 말씀. 성당 곳곳에 흐느낌의 파도가 인다. 성찬전례에 이어 주교단과 유족이 일일이 김 추기경을 돌아 올리는 영성체 예식, 그리고 고별사가 이어졌다. “세상살이가 어려운 시기에 추기경님의 떠나심이 더욱 안타깝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바보 웃음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떠난 님의 사랑과 나눔의 큰 뜻을 잊지 않겠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들을 고인은 듣고 있을까. 두 시간 만에 미사가 끝나고 성당 북쪽 문을 통해 서울대교구의 가장 젊은 사제 8명이 운구를 시작하자 구름처럼 모여 있던 신자와 수녀들이 일제히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린다. 운구차량이 서서히 성당을 벗어나자 아쉬운 듯 뒤를 따르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울음이 명동을 뒤덮는다. 때마침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33번의 종소리. 추기경은 이제 더 이상 이 종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 성직자 묘역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20분가량. 남산1호터널과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들기까지 길가 곳곳에서 손을 흔들거나 성호를 긋는 시민들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운구차량 행렬이 매몰차게 느껴진다. 묘역에 다다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 사이, 첫 한국인 주교이자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의 묘 바로 옆에 준비된 추기경의 자리가 눈에 든다. 기다리던 신도들의 찬송과 기도, 산에서 울려퍼지는 정진석 추기경의 축복에 이어 하관이 있자 울음과 기도가 바람에 섞인다. 이제 정말로 추기경을 보내야 한다. 주교단과 수도자, 유족 대표가 관 위에 흙을 덮자 참례자들이 입을 모아 위령 성가를 부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목마른 사람은 내게 오라. 무거운 짐진 자 멍에 벗겨주고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리.’ 김 추기경의 영원한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글 / 서울신문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헵번의 모든 것 일·사랑·친구·스타일…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하게 말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네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눠라.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헵번이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에 두 아들에게 남긴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말로 남아 있다. ‘워너비 오드리’(멜리사 헬스턴 지음, 이다혜 옮김, 웅진윙스 펴냄)에는 이 말 외에 그의 생전 인터뷰와 측근의 이야기, 드러나지 않았던 70여컷의 사진이 담겨 있다. 지은이는 5년 동안 좇은 헵번의 발자취를 일반 자서전 같은 일대기 형식이 아닌 일, 사랑, 가족, 친구, 스타일 등 10가지 키워드로 분류해 ‘수고의 결정체’를 만들어냈다. 늘 ‘로마의 휴일’ 속 앤 공주일 것 같은 헵번의 아름다움은 물론 선천적이다. 그러나 그도 어린 시절 전쟁과 가난을 겪고, 배신과 이혼, 유산을 경험한 아픔이 있다. 그 속에서도 늘 유쾌하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박애주의자로 만든 것은 이것을 뛰어넘는 그의 ‘품격 있는 태도’이다. “다른 사람이 우선이고 내가 그 다음이라는 고전적인 사고 방식은 멋지다.”거나 “절대로 누구와 누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 속에 배려와 사랑이 녹아있다. 책을 읽는 내내 헵번의 아름다운 사진이 눈을 사로잡는다. 책을 덮고 나면 책의 원제(How To Be Lovely)처럼 멋진 사람이 된 나 자신을 발견한다. 1만 2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최은희에게 신상옥이란

    최은희에게 신상옥이란

    최은희를 알려면 신상옥을 알아야 한다. 신상옥 없는 최은희의 삶은 무의미하다. 그녀가 홀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유도 먼저 간 신감독이 못 다한 일을 마치기 위해서다. 그들의 운명적 만남은 1953년 이뤄졌다. 이후 이혼과 납북으로 떨어져 있던 기간을 빼면 45년 동안 부부였고 동지였다. 방배동 자택에 가 보면 신 감독과의 동거는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 감독은 최은희가 숨쉬는 공기속에 스며 있다. 자택 응접실 TV수상기 바로 위에 신 감독의 대형 액자사진이 신주단지 모시듯 올려져 있다. 응접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아프리카 그레이종 10살짜리 앵무 ‘코코’도 신 감독과 미국서부터 같이 살았던 친구다. 세계 각국을 돌며 수집한 손때 묻은 피에로 인형과 오리 목조각, 각종 트로피도 진열대에 가득하다. 그 많던 트로피를 납북소동 와중 분실한 것이 아쉽다. 남은 것은 10여개뿐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선 ‘3가락지’가 유난히 빛난다. 신 감독이 생전 해준 쌍가락지에, 유품으로 남긴 가락지까지 3개다. 헐렁한 신 감독의 것은 손가락 안쪽에 넣어 보호하고 있다. 미술학교를 다닌 신 감독이 직접 그린 유일한 그림 한 점이 서재에 걸려 있다. 여배우 오수미 사건으로 헤어져 있던 어느 날 동부 이촌동집으로 불쑥 찾아와 “그동안 내가 그린 그림이오.” 하면서 건넸다는 경복궁 근정전을 그린 유화다. 어두웠던 그의 마음처럼 찬바람 부는 풍경이다. 자필사인과 날짜는 적혀 있지 않다. 최은희는 신 감독을 ‘영화와 자유를 사랑했던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다. 형식을 따지지 않던 영화 외골수였다. 어쩌면 ‘여배우 최은희’도 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랑했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남과 북을 오가며 만든 250여편에 이르는 영화 속에 각양각색의 인생을 담았지만 사실 그들의 삶과 사랑 자체가 한 편의 영화였다.
  • [김수환 추기경 추모] 추기경이 남긴 가르침

    [김수환 추기경 추모] 추기경이 남긴 가르침

    ■ 최종태 조각가 병 중에도 남 배려한 휴머니스트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만난 것이 40년 전인 69년 말입니다. 나는 이화여대 가톨릭학생회의 지도교수였는데, 학생들의 일부 행사가 관행에서 벗어났습니다. 당황해 하는데, 행사장인 이화여대 중강당에 추기경님이 장익 신부님과 함께 행사 5분 전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염려가 물안개처럼 사라지고 행사는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 때 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저 분만 만나면 모든 것을 풀 수 있겠다!’ 이후 열 살 위 큰 형님하고 노는 것처럼 추기경님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 분이 서울교구장직을 놓으시고 혜화동에 계실 때입니다. 동서남북 이야기가 번지다가 문득 마음 비우는 데로 이어졌습니다. 마음 비우는 일이 잘 안되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나도 그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죽어야 돼.” 하시고 또 “(사람이 죽은 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15분이 지나야 돼.” 그래서 모처럼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그 시절의 비서 수녀님이 오라 해서 여의도성모병원에 갔습니다. 추기경님은 옷을 깨끗이 입고 반듯이 앉아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30분 내내 방문객을 즐겁게 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은 며칠 전 아침 미사를 빠뜨렸다고 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인 즉 ‘한국의 추기경께서 늦잠 자다가 아침미사를 빠뜨렸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실이 폭소판이 됐는데 추기경께서 내게 속삭이는 말씀이 “밖에 나가서는 얘기하지 마!” 하십니다. 그래서 “말로가 아니라 내가 만천하에다 글로 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서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저 분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기쁘게 해 주려고 그러셨구나 싶어서 가슴이 울컥하였습니다. 인천 소래의 사르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피정의 집 바깥 산에 14처 조각을 설치할 때입니다. 현장에는 전날 오신 추기경께서 나오셨습니다. ‘예수 사형선고를 받으심’ 제1처의 예수님의 이마에 월계수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추기경님이 돌작품을 꼼꼼히 보고 계시는데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이마에 원래는 가시관을 만들었는데 어쩐지 마음에 안 들어 지우고 월계수 가지를 붙였습니다. 혹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추기경님 말씀이 “아니다. 이 사형수에게는 이미 승리가 예고된 집행이기 때문에 승리의 월계관을 미리 붙인들 무어가 잘못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용기를 얻어서 나는 한국의 교회미술 개척의 탄탄대로를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고치라고 하셨다면 오늘의 최종태는 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누가 있어 세상에다 그 큰 사랑을 또 쏟으실까요. 파도를 잠재운 큰 강물 같은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의 어깨에는 너무도 큰 짐이 실려 있었습니다. 다 벗으시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 추기경 구명운동으로 사형 면한 양동화씨 “억울한 사람들의 든든한 성벽” “엄혹했던 시절, 추기경님은 스스로 고난을 감내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큰 어른의 표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양동화(51)씨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어렸다. 1986년 그가 전두환 정권 최대의 간첩조작사건인 ‘구미(歐美)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그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가톨릭 교회의 7성사 가운데 세례성사 다음에 받는 의식)를 주러 온 것을 계기로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펼침으로써 1988년 무기징역 감형, 1998년에는 광복절 특사로 나올 수 있게 도와 준 이가 김 추기경이었다. 양씨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은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기대는 곳,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가 지친 몸을 의탁하는 곳이었다. 양씨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1989년부터 출소 전까지 김 추기경과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모든 내용이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보고돼 자세한 얘기는 쓰지 못했다. “고생하고 있으니 좋은 일 있을 거다. 고통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다.”가 전부였다. 양씨는 “그 말을 거듭 새기며 수감 생활을 견뎠다.”고 회고했다. 편지를 주고 받다 보니 10년간 양씨의 옥바라지를 해온 연인 민연자씨에 대해서도 김 추기경은 알고 있었다. 1998년 양씨가 출소한 직후 찾아간 자리에서 김 추기경은 다짜고짜 “결혼은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었다. “이제 해야죠.”란 대답에 추기경은 “주례는?” 했다. 조심스레 부탁을 하니 추기경은 기다렸다는 듯 “날짜를 잡아 봐라.”고 말했다. 그렇게 김 추기경은 양씨의 결혼식 주례까지 자청했다. 출소 4개월 뒤 양씨는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 16일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들은 양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은연 중에 추기경님은 오래 사실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생전에 추기경님과 ‘인중이 길어 장수하실 것’이라는 농담도 주고 받았습니다.” 18일 명동성당을 찾아 김 추기경의 시신을 보고서야 양씨는 가슴 속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것을 느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날 빈소를 방문하는 것을 보며 김 추기경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고 그는 말했다. 양씨는 “추기경님은 그동안의 고난을 피할 길이 있으셨는 데도 온몸으로 묵묵히 받아 내셨다. 그분이 오래 앓아 오신 불면증은 그분의 남모를 고통의 방증”이라면서 “그래서 많은 분들이 추기경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부재(不在)를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추모] 추기경이 남긴 가르침

    ● 다툼·갈등의 세상 묵묵히 품어 내-김지길 목사 김수환 추기경은 그저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늘 마음 속의 친구처럼, 때로는 듬직한 동지처럼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는 1923년생이고 김 추기경은 1922년생이니 나이도 비슷했고, 비록 교파는 달랐어도 신을 섬긴다는 입장에서도 그러했다. 게다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 하나로 그 엄혹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헤쳐온 연대 의식도 컸을 것이다. 참 말없고 묵묵한 분이었다.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이야기하기보다는 늘 남의 이야기를 듣는 축이었다. 그래서 생각이 다른 이도, 기대에 못미침을 불평하는 이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도 모두 한 품에 넉넉히 안아냈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 나는 명동성당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과 마주 앉았다. 아마도 1986년 남짓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개신교도 천주교도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을 펴나가던 상황이었다. 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으로서 김 추기경을 만나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내자고 제안했다. 당시 개신교와 천주교 모두 몇 차례씩 성명서를 내며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을 때였지만 각자의 영역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단결과 연대가 절실했다. 우리의 힘과 목소리를 더욱 키우기 위해 같은 목소리를, 같이 담아서 내보자는 취지로 명동성당을 찾은 것이고 김 추기경에게 이같이 제안한 것이었다. 이날 김 추기경은 묵묵히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화한 표정으로 긍정의 미소를 보내며 공동성명을 함께 내자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결국, 공동성명을 내지는 못했다. 비슷한 목소리로 각자 성명서를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당시 추기경 비서실에서 공동 성명의 형식을 반대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화가 나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미 김 추기경에게 충분히 마음이 전달됐고, 김 추기경의 마음을 전달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그이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1987년 6월 들불처럼 번졌던 뜨거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도, 투쟁의 방향을 고민하는 회의석상에서도 김 추기경은 없었다. 여기저기 나다니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어른의 역할이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친구이자 동지로서 늘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TV를 통해 선종 소식을 들었다. ‘아, 먼저 갔구나.’하는 생각이 맨먼저 들었다. 병상에서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그렇게 편안하게 갔으니 다행스럽다. 다툼과 갈등, 미움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몸으로 보여줬던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가 새삼 다시 울려퍼질 수 있게 된 점도 다행스럽다. 참 존경스러운 분을 이제는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돼 울적하다. 나중에 다른 세상에서 만나게 되면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 KNCC 회장> ● 낮은 곳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유시춘 작가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과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가위눌려 지내던 이 척박한 우리 현대사의 한가운데 늘 계셨다. 부끄러운 ‘유신’왕정 시대에 민주공화국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기본적 자유와 권리가, 그 아름다운 헌법의 가치가 한낱 휴지처럼 구겨박혔을 때 명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제들은 ‘진리와 양심을 외면하고 거역하는 집권자의 죄악’을 직시하고자 분연히 일어났다. 그때부터 명동은 민주 회복과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이땅의 가장 낮은 곳에 거주하는 가난한 이들의 등대이자 구난처가 되었다. 그러다가 ‘폭도’의 누명을 쓴 채 거처할 곳 없이 황량한 거리를 배회하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과 그 가족들이 처음으로 기댄 곳도 김 추기경이었다. 80년대 들어 군사정권의 압정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캠퍼스마다 성난 물결이 넘치고 감옥이 양심수들로 그득했을 때, 우리는 명동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크나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민주화의 들불로 타오르기까지 수많은 회의와 집회와 농성은 명동에서 진행되었다. 우리는 명동의 어르신인 당신의 허락을 얻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이 계셨으므로 그곳은 바로 우리의 ‘진지’라고 지레 믿었다. 1986년 찌는 듯한 어느 더운 날에 우리는 ‘부천서 성고문사건 규탄연대집회’의 장소를 구하기 위해 김 추기경을 찾았다. 그때 동석한 한 야당 지도자를 향해 김 추기경께서는 ‘국민이 선출해 주었으면 국회에서 잘해야지.’하시며 마뜩잖아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조차도 암묵적 동의와 격려로 알고 집회를 강행했고 그곳은 수라장이 되었다. 하여, 드디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된 그 ‘명동농성’이 있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명동은 김 추기경이 있어 어두운 시대의 지친 영혼들이 쉴 수 있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고 절절한 소망을 외치던 그 수많은 수녀님과 신부님들의 행진을 우리 역사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던 예수의 가르침이 교회의 견고한 벽을 뚫고 중생의 번뇌로 출렁이는 사바세계로 현현한 순간이었다. 그때 교회는 진실로 화려하고 장중한 교회건물로부터 그리고 성탄절마다 소리내는 자선냄비로부터 해방되어 이땅의 고난 속에서 스스로 거듭난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이 땅의 모든 양심, 고해에 허덕이며 내일에의 꿈을 잃지 않은 고달픈 중생들에게 이제 김수환 추기경은 영원한 ‘이데아’요, ‘역사’요, ‘대중의 의지를 대표하는 위인’이었다. 우리 시대는 아직 위인을 부르고 있다. 빈자의 절규는 하늘을 찌르는데 권력은 자꾸 뒷걸음치려 한다. 바라건대 부디 생전처럼 높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고 ‘아무 곳에나 잘자라는 앉은뱅이 민들레로 돋아/ 타는 마음으로 이 땅을 지켜보다/ 꽃 다하면 풀씨로 산천 떠돌며’ 이 땅을 굽어 살피시기를. <전 국가인권위원>
  • ‘바보’의 나눔 바이러스 온 세상에 번지나

    ‘바보’의 나눔 바이러스 온 세상에 번지나

    “추기경 김수환은 바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바보’라고 불렀다. “바보같이 남을 도와야 세상을 구원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김 추기경이 세상에 던진 ‘바보의 사랑’이 우리 사회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2002년 아호인 ‘옹기(甕器)’에서 이름을 따 만든 옹기장학회는 그가 몸소 실천해온 사랑과 나눔의 결정체다. 옹기는 김 추기경의 부모가 옹기 장사를 하며 당시 박해 받던 천주교를 전파한 데서 연유한다. 옹기장학회는 사제들이 특별히 마련된 옹기에 십시일반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가정형편이 어려운 신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설립 이후 지난해 8월까지 87명의 학생에게 1억 8000만원의 장학금이 전달됐다. 지난해 가을 장학금을 받은 권오영(28·가톨릭대 6학년)씨는 “장학금을 주시면서 ‘옹기는 보잘것 없고 쓸모 없어 보이지만 사실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옹기 같은 사제가 돼 달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을 계기로 자신도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시민들도 늘고 있다. 김 추기경이 초대 이사장을 지낸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는 17일 장기기증과 후원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장기기증 운동 단체인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는 하루 평균 30명 내외인 장기기증 서명자가 이날 오후 7시 현재 100명을 넘어섰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이날 평화방송 라디오 ‘김수환 추기경 추모 특별 생방송’에 출연해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김 추기경이 직접 설립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서울 성북동의 미혼모 자녀 입양기관인 ‘성가정입양원’에도 이날 입양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입양원 관계자는 “입양 문의가 평소 일주일에 열 통 정도였는데 오늘은 하루에만 대여섯 통이 왔다.”면서 “추기경님의 선종 때문에 입양을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는 “공동체가 파괴된 우리 사회에서 추기경은 바보같이 남을 도운 사람들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떠났다.”면서 “우리 사회에 바보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도 “김 추기경은 자화상으로 바보를 그렸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약삭빠른 계산을 떠나 진심으로 돌아가는 바보스러운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면서 “그분처럼 우리도 바보가 되자.”고 했다. 박성국 최재헌기자 haru@seoul.co.kr
  • ‘95년 사망’ 故 김성재, 의류모델로 부활

    ‘95년 사망’ 故 김성재, 의류모델로 부활

    지난 1995년 의문사로 세상을 떠난 가수 故 김성재가 의류 브랜드 모델로 다시 부활한다. 김성재는 오는 2월 말 국내에 론칭하는 이탈리아 의류브랜드 ‘리플레이’의 모델로 선정 돼 생전의 모습을 다시 내비친다. 신문 지면 화보와 인터넷 동영상 CF 등을 통해 공개 될 고인의 모습은 생전 마지막 활동곡인 ‘말하자면’ 당시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해 낸 작품이다. 의류 브랜드 관계자는 “故 김성재의 ‘제임스 딘’ 같은 이미지가 브랜드가 지향하는 이미지와 부합 돼 유족들에게 섭외를 제의했으며, 이메일로 어머니를 설득해 계약이 성사됐다.”고 밝혔다. 또한 “다른 남성 모델과 여성 모델로 먼저 촬영한 후 김성재의 생전 모습을 CG로 자연스럽게 옮겨 붙이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일부 네티즌들이 고인의 생전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며 상업적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광고 측은 “유족들의 동의를 얻었으며 그를 다시 보고 싶은 팬들의 마음을 헤아린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1993년 이현도와 함께 듀오 ‘듀스’로 가요계에 입문한 김성재는 ‘나를 돌아봐’, ‘우리는’, ‘여름 안에서’ 등의 히트곡으로 큰 인기를 누리던 중 1995년 11월 20일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 돼 충격을 안겼다. 한편 고 김성재의 의류 브랜드 광고 및 화보는 오는 20일 첫 베일을 벗는다. 사진 = 리플레이 코리아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수환 추기경 선종… 안구기증 2명에 ‘새 빛’

    한국 천주교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87세.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 메시지를 전했다.”며 애도했다. 고인의 주치의인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 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으며 임종을 지킨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2~3일전부터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지난해 8월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고인은 전날부터 갑자기 폐렴증세를 보이다 이날 오후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장기 기증 약속에 따라 선종 후 병실에서 안구 적출 수술로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 김 추기경의 안구 기증으로 2명이 새 빛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김 추기경의 시신은 이날 밤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됐다. 교황의 선종과 마찬가지로 추기경의 시신은 발인 때까지 유리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는다.  서울대교구는 정진석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20일 오전 10시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미사를 치르기로 했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마련된다. 글 /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애국가 저작권 기증 각별한 한국사랑

    애국가 저작권 기증 각별한 한국사랑

    │파리 이종수특파원│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1906∼1965년) 선생의 부인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로리타 안) 여사가 16일 오전 11시(현지시간)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4세. 스페인 출신인 고인은 1946년 마요르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안익태 선생과 결혼했으며, 1965년 선생이 59세를 일기로 작고한 뒤에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페인 휴양지 마요르카에서 외손자와 함께 지내온 고인은 생전 한국사랑이 각별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전인 한국-스페인전을 앞두고는 “나는 한국사람이고 스페인전에서 한국팀이 (스페인팀에) 이기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팀이 한 경기 한 경기 이길 때마다 너무 행복하다.”고 말해 남편의 조국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지난 2005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당시까지 논란을 빚고 있던 ‘애국가’의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당시 한국을 찾은 고인은 “애국가는 한국인의 것”이라면서 애국가의 저작권을 조건없이 무상으로 한국 국민에게 양도하겠다는 뜻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 남편의 업적을 길이길이 추모하려는 고인의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2006년에는 안익태 선생이 생전에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로부터 받은 편지를 포함한 유품 15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안 선생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안익태기념재단을 통해 피아노 1대와 가구들을 비롯해 지휘봉과 볼펜, 시계, 다이어리, 훈장 등 남편의 손때가 묻은 유품들을 흔쾌히 고국의 후손들을 위해 전달한 것. 당시 셋째딸과 함께 방한한 고인은 “남편이 그랬듯 우리도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고 말했다. 안익태 선생은 1946년 마요르카 섬에 정착해 로리타 여사와 결혼한 뒤 스페인으로 국적을 바꿔 유럽무대에서 주로 활동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족으로는 아나 세실리아, 엘레나, 레오노르 등 세 딸이 있다. vielee@seoul.co.kr
  • 통영시, 예술인 친필 간판글씨로 활용

    통영시, 예술인 친필 간판글씨로 활용

    경남 통영출신 유명 예술인들의 글씨체가 통영시내 거리의 간판글씨로 활용된다. 통영시는 16일 시내 주요 거리 간판글씨를 박경리·유치환·김춘수·김상옥 등 통영출신 유명 예술인들의 서체로 디자인하는 간판시범거리조성 사업을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시는 지난해 10월 한국디자인진흥원 등에 용역을 맡겨 간판디자인과 가로경관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최근 중간보고회에서 박경리·유치환 등 통영출신의 걸출한 예술인들이 생전에 원고지나 편지 등에 썼던 글씨체를 본뜬 간판 서체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는 다음달 용역이 완료되면 이를 토대로 실시설계를 해 오는 6월부터 도천동 횟집거리의 간판 52곳을 유명 예술인 서체로 디자인해 정비할 예정이다. 이어 연차적으로 강구안 김밥거리와 윤이상 거리 등으로 간판 디자인 및 거리경관 정비사업을 확대한다. 간판 정비와 함께 보도와 조경, 가로시설 등도 지역 특성에 맞게 특색있게 새로 디자인한다. 시는 지역 출신 유명 예술인들의 개성있는 글씨체를 시내 거리 간판 글씨로 활용하면 문화예술 도시 통영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글ㆍ사진 통영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영화 ‘피아니스트’ 실제인물, 유태인 상 수여

    영화 ‘피아니스트’ 실제인물, 유태인 상 수여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피아니스트를 도운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펠트(Wilm Hosenfeld)가 이스라엘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됐다. 호젠펠트는 지난 2002년 폴란드 출신 유태인 음악가 블라디슬라브 스필만(Wladyslaw Szpilman)의 실화에 바탕을 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국 ‘텔레그래프’ 온라인판은 “이스라엘 야드 바솀(Yad Vashem) 홀로코스트 박물관 측이 호젠펠트에게 ‘세상의 의로운 사람에게 주는 상’(Righteous Among the Nations)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고 16일 보도했다. 영화 속에서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숨어있던 주인공 스필만이 한 독일군 장교와 마주친 뒤 그에게 쇼팽의 피아노 곡을 연주해 주는 장면은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스필만은 생전에 영화의 원작이 된 자신의 일기와 함께 “호젠펠트는 1944년 11월 내가 숨을 곳을 찾는 걸 도와주고 담요, 음식 등을 제공했다.”는 편지를 야드 바솀 측에 보내며 호젠펠트의 공로가 인정되길 요청했다. 이번에 호젠펠트가 수상하게 된 ‘세상의 의로운 사람에게 주는 상’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 유태인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건 비 유태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수여되는 상이다. 스필만의 가족을 포함 수천 명이 호젠펠트가 이 상을 수여 받도록 오랫동안 청원했지만 야드 바솀 측은 “그가 전쟁범죄에 연관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수상을 연기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야드 바솀 측은 성명을 통해 “호젠펠트의 개인 일지와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포함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상을 수여한다.”고 전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그의 자녀들이 대신 상을 받을 예정이다. 호젠펠트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소련군에 체포돼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후에 25년으로 수감기간이 감형됐지만 결국 1952년 소련에서 숨을 거뒀다. 사진=영화 ‘피아니스트’ 공식 홈페이지 서울신문 나우뉴스 문설주 기자 spirit0104@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수환 추기경 선종] “부디 하늘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 시민·네티즌·천주교회 반응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애도했다. 특히 1970~1980년대 소용돌이의 한국 현대사에서 언제나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올곧은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 김 추기경의 생전 행보에 시민들은 교파를 떠나 안타까워했다. ●종파 초월한 포용정신 기려 오승균(27·학생)씨는 “우리나라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가장 높은 자리에 계셨던 분이 선종하셨다는 소식이 실감나지 않는다.”면서 “누구나 거리낌 없이 존경할 만한 분이셨는데 아쉽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천주교 신자인 이지은(24·여)씨는 “정진석 추기경 이전 우리나라 유일한 추기경으로서 그분은 거목 같았다. 병환에 오래 계셔서 곧 선종하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소식을 들으니 당황스러울 뿐”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종교가 없거나 다른 시민들도 김 추기경이 생전 보여줬던 포용의 정신을 기렸다. 직장인 최모(54)씨는 “종교인이 보여야 할 표상을 평생 온몸으로 실천한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인터넷에는 김 추기경을 기리는 추모사이트가 마련됐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고 김수환 추기경 편히 잠드소서’라는 추모사이트(http://web.pbc.co.kr/legacy/event/cardinal_ksh/)에는 추기경의 약력과 영상모음, 추모게시판 등으로 꾸며졌다. 아이디 ‘성요셉’이 “서민들 마음 속 빛이 되셨던 추기경님 편히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길”이라고 올리는 등 수백편의 글이 올라왔다.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ID ‘술래잡기’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셨던 추기경님. 이렇게 가시다니…. 부디 하늘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소서….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애석해 했다. 네이버에도 그의 선종을 알리는 게시판에 순식간에 추모 리본이 수천개씩 달리며 추모의 물결이 계속됐다. ●전국 천주교회 슬픔에 잠기다 김 추기경이 태어난 곳이자 사제 서품을 받은 대구대교구 등 전국의 천주교회에서는 이날 밤 곧바로 추모 미사를 준비하는 등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대구대교구는 선종 소식을 접하자마자 ‘주교평의회’를 소집해 1951년 9월 김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은 계산성당에서 17일 오전 11시 공식 분향소를 설치, 신도들의 조문을 받기로 했다. 대구대교구 관계자는 “추기경님은 격동의 한국사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신 분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1966년 김 추기경이 주교로 임명된 마산교구도 17일 교구 차원에서 분향소를 설치할 예정이다. 마산교구 관계자는 “추기경님이 주교로 처음 임명된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어 의미가 남다르다.”면서 “내일 마산교구 차원에서도 빈소가 차려지고 각 성당별로 추모 미사와 기도가 잇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당시 주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재임하던 중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주교로 임명됐다. 부산과 광주대교구 역시 17일 오전 사제평의회를 열어 추모 미사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김재학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은 “추기경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에 큰 구멍이 난 것 같다.”면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 봉사했던 가톨릭의 큰 어른을 잃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서울 이재연·대구 김상화기자 oscal@seoul.co.kr
  •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한국 천주교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87세.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 메시지를 전했다.”며 애도했다. 고인의 주치의인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 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으며 임종을 지킨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2~3일전부터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지난해 8월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고인은 전날부터 갑자기 폐렴증세를 보이다 이날 오후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장기 기증 약속에 따라 선종 후 병실에서 안구 적출 수술로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 김 추기경의 안구 기증으로 2명이 새 빛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김 추기경의 시신은 이날 밤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됐다. 교황의 선종과 마찬가지로 추기경의 시신은 유리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는다. 서울대교구는 정진석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20일 오전 10시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미사를 치른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마련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존엄사법/황진선논설위원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지만 말기 환자에 대한 의료나 죽음 교육은 크게 뒤떨어져 있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고, 웰빙(well being) 속에 웰다잉(well dying)을 생각해야 하는데, 죽음에 대한 교육이나 논의를 금기시한다. 생전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보니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니며 죽는 사람도 드물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의료기기에 둘러싸여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을 자주 목격한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죽음 교육을 시키고 있다. 생사학자(生死學者)들은 죽음준비교육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삶을 더 의미있게 살도록 도와준다고 얘기한다. 세계 최초로 자연사법(Natural Death Act)을 만든 곳은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였다. 뉴저지 주에 살고 있던 21세의 카렌 앤 퀸란은 친구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해 술을 마신 후 정신안정제를 복용했다가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카렌의 아버지는 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기보다 편안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소송을 냈다. 뉴저지 주 대법원은 “딸에게 보장된 헌법상의 사생활 권리는 치료거부권도 포함되어 있으며 아버지가 그 대리인”이라고 판결했다. 캘리포니아의 자연사법은 카렌의 죽음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 끝에 탄생했다. 그때부터 미국 사회에서 약물을 투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라는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면서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존엄사라는 말이 등장했다고 한다.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가 그제 11개월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할머니(77)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도 좋다고 판결, 존엄사 법제화 논의가 활발해질 전망이다. 현재 미국은 40여개 주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법으로 인정하고 있다. 독일은 법규 없이 의사협회가 기준을 마련해 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나라당의 신상진 의원이 지난 5일 회복가능성이 없고 기대여명이 짧은 환자의 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존엄사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앞으로 존엄사 논의와 함께 죽음준비 교육도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황진선 논설위원 jshwang@seoul.co.kr
  • 간디가 쓰던 ‘안경과 샌들’ 경매 나온다

    ‘인도의 상징’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생전에 쓰던 물건들이 경매에 나온다. 다음달 4일(현지시간)부터 이틀간 미국 뉴욕에서 회중시계, 안경, 샌들을 포함해 간디가 생전에 쓰던 물건들이 경매될 예정이라고 ‘타임스’를 비롯한 영국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이번에 경매로 나온 물건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회중시계, 안경, 샌들이다. 간디가 사용하던 회중시계는 6년 동안 그의 비서로 일한 조카딸 아바(Abha) 간디가 소장하고 있었다. 1910년 무렵 간디가 회중시계를 찬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이 시계가 진품임을 증명하고 있다. 간디의 트레이드 마크인 둥근 금속테 안경은 1930년대에 인도군 대령 H A 시리 디완 나와브(Shiri Diwan Nawab)가 선물로 받아 그 가족들이 갖고 있었다. 당시 간디는 “이것은 나에게 자유로운 인도의 이상(vision to free India)을 주었다.”는 말과 함께 이 안경을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가죽 샌들은 1931년 영국 런던에서 인도의 자치를 둘러싸고 원탁회의가 열렸을 때 자신의 사진을 찍어준 영국군 장교에게 보답으로 준 물건이다. 이 물건들은 각각 선물 받은 사람의 가족을 통해 물려내려 오다 익명의 수집가에 의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번 경매를 주관하는 ‘안티쿼룸 경매회사’(Antiquorum Auctioneers) 측은 이 물건들의 가치를 3만 파운드(한화 약 6000만 원)로 평가했다. 그러나 “간디는 생전에 갖고 있던 물건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이번 경매에 나온 것은 실제로는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한편 간디는 1869년에 태어나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인도의 독립 운동에 헌신했고 ‘비폭력주의’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48년 78살의 나이로 한 극우파 힌두교 신자의 손에 암살되기까지 인도 전통의상을 즐겨 입고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이며 주로 불리는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란 뜻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문설주 기자 spirit0104@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5) 리투아니아 출신 계룡산 무상사 입승 보행 스님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5) 리투아니아 출신 계룡산 무상사 입승 보행 스님

    겨울철 스님들의 집단·집중 수행인 동안거(冬安居)의 끝, 해제(解制)를 사흘 앞둔 6일 오후 충남 계룡시 엄사면 계룡산 자락의 국제선원 무상사. 몸과 마음을 챙겨 ‘참나’를 찾기 위한 안거를 나기 위해 15개국에서 찾아든 60여명의 스님, 재가 불자들이 3개월의 수행 정진을 마무리하는 정중동의 엄한 분위기에 몸,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안거철엔 절대 외부인을 사찰 경내에 들이지 않는다.”는 주지 무심(미국) 스님의 물러서지 않는 완강한 거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찾아간 수행공간. 3개월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묵언 수행의 끝자락에 선 수행자들이 해제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주지 스님에게 간곡한 청을 들여 수행자들의 기강을 책임진 입승(立繩), 보행(48·본명 케스투티스 마르시우리나·리투아니아)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무상사는 외국인 스님들이 연중 수행을 하는, 국내 몇 안 되는 국제선원. 특히 안거철이면 ‘한국에서 집중수행을 하며 한 철을 살겠다.’는 외국의 스님들이 대거 몰리지만 이번 동안거엔 지난해보다 20여명이 줄었다는 주지 스님의 귀띔. 스님들이 모여 사는 이곳도 세계 경제불황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모두 자비를 들여 찾아온 무상사에서 숨막히는 3개월의 묵언 정진을 관통한 수행자들의 마지막 단도리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보행 스님이 굳은 얼굴로 기자 앞에 선다. 참선 때마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죽비를 치며 선방 수행자들의 기강을 잡아온 입승 소임 때문일까. 스님이 좀처럼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오늘부터는 죽비를 치지 않고 묵언을 풀어 말을 할 수 있다.”며 불청객을 맞지만 외계인에 대한 경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 눈치다. 화두를 들어 참구하는 수행자의 몸, 마음을 다잡는 입승 스님. 입승 스님은 죽비를 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거듭된 다짐일까, 아니면 도반들의 엄한 공부 챙김일까. ●묵언정진… 외국인 수행자들 기강 책임져 “선방의 마음 하나 몸 하나는 모두 말로 풀 수 없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곳 무상사의 가풍인 묵언 정진은 말로 인한 업을 짓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만 철저히 매달리도록 독려하는 방편이지요.” 스님이 매달려 참구하는 화두가 궁금해졌다. 부모로부터 몸을 받기 이전,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찾기 위한 ‘혹독한 싸움’의 근원이 무엇일까. “이 뭐꼬.” 본래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나는 무엇인가. 외마디로 객에게 던져주는 평범한 화두에 실린 삶의 무게가 심상치 않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지금 리투아니아 공화국 제2의 도시인 카우나스 출신. 사회주의 소련 체제의 붕괴와 조국 독립의 격동기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고통과 혼돈에서 스님은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그 무엇’에 심한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때는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소련군 생활이 싫어 택한 게 고향 카우나스의 폴리테크닉 대학이다. 대학에서 전기공학과 공부를 마치면 군 대체복무가 수월하다는 생각에 원래 되고 싶은 연극 배우의 꿈을 잠시 미룬 채 진학했지만 결국 대학 졸업 후 2년간 소련 육군 병 생활을 해야 했다. 혐오하던 소련군 생활을 마친 뒤 결국 ‘테아트르 앤드 아츠 아카데미’에 들어가 6년간 공부 끝에 작은 극단까지 만들어 연극을 하며 살았다. 오랜 배회 끝에 마침내 올라선 연극 무대에서 배우 겸 연출자로 꿈을 펼칠 수 있게 됐다는 성취감에 마냥 행복했단다. 고등학교 시절 판토마임으로 이름난 선생님을 보고 연극배우로 살겠다는 절실한 꿈을 키웠던 보행 스님. 그 무대에서 막 빛을 보기 시작할 순간 인생 향로를 틀어 지금 무상사에서 죽비를 잡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그는 일찍부터 이른바 ‘무아(無我) 경계’에 눈떴던 것 같다. 고교 졸업후 러시아어로 된 불교 서적들을 읽던 중 ‘네가 너를 세상에 드러내 세우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결코 네 진면목이 아니다.’라는 말에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됐다고 한다. 대학 졸업후 그토록 하고 싶던 연극을 하면서도 줄곧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지만 ‘내 자신이 완전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회의가 계속됐다. 그러던 중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건너온 폴란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조금씩 머릿속의 안개가 걷혀가는 듯했다. 결국 하던 극단 일을 접고 빈 집을 얻어 친구들과 함께 고향 카우나스에 고봉사라는 사찰을 마련했다. 지금도 고봉사엔 매일 법회 때 30여명의 리투아니아 신도들이 모인다고 한다. 고봉사에서 생활하다 유럽 한국불교 포교의 핵심인 폴란드 바르사뱌의 도암사로 건너가 매년 결제에 참가하는 등 행자생활을 했다. 그러다 만난 게 숭산 스님과 지금 무상사의 주지인 무심 스님. 고봉사 생활중 읽은 숭산 스님의 책 ‘부처님께 재를 털면’을 보며 숭산 스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고 하니 도암사로 찾아온 숭산 스님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을까. “‘부처님께 재를 털면’은 미혹에 빠진 일반인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을 쉽게 쓴 책이었지요. 미궁에서 길을 찾던 저에겐 벽력처럼 쳐들어온 이정표였던 셈이지요.” 숭산의 법문에 빠져있던 중 결국 무심 스님의 “한국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출가를 결심했다. 생활이 어려워 비행기 표 사기도 힘들었던 시절, 한동안 접었던 극단 일을 틈틈이 해 모은 돈으로 한국에 온 게 1999년. 이후 화계사 국제선원에 8년간 몸담아 행자부터 살림살이를 맡는 원주, 입승 등 온갖 소임을 두루두루 거쳤다고 한다.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사미계를 먼저 받았지만 부산 범어사에서 조계종 사미계를 다시 받고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컴버랜드시 프로비던스 선센터에서 비구계를 받아 지금은 한국 조계종의 공식 비구계 수지를 기다리는 중. “언제쯤 한국의 비구계를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답 대신 작은 웃음만 보여 준다. “비구계 받는 것이 전부인가요. 끊임없이 공부할 따름이지요. 1000년 이상의 선 불교 역사를 가진 한국 사찰에서 배우고 수행하는 것만도 얼마나 큰 일입니까.” ●한국 온 지 10여년… 온갖 소임 두루 거쳐 이곳 무상사에 옮겨 산 지는 1년 남짓. 절집 살이를 놓고 보면 미국인 조실 대봉 스님과 주지 무심 스님에 이어 세 번째 높은 소임을 맡고 있다. 대봉 스님과 무심 스님은 대하기 아주 어려운 스님들. 몸짓 하나, 말 한마디에서 깍듯한 예의가 묻어난다.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염화미소’(拈華微笑). 스님은 염화미소 화두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곤 한단다.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이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 화두에 스님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염화미소의 사연을 처음 듣는 순간 마치 집을 떠나 오랜 세월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삶은 인연짓기의 반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순간의 만남도 오랜 인연의 공덕 때문이겠지요.” ‘온전하지 못한 내가 남에게 무엇을 내세워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에 절실한 꿈이던 인기 연극배우의 허물을 벗고 인생 향로를 틀었던 스님. ‘이 뭐꼬’ 화두 참구는 언제까지 할 예정이냐는 기자의 우문에 “오직 모를 뿐, 그저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순간 순간 나를 버려가고 있을 뿐”이라는 말만 돌려준 채 자리를 뜬다. 글ㆍ사진 계룡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보행 스님은 ▲1961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출생 ▲1983년 카우나스 폴리테크닉 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1989년 빌뉴스 테아트르 앤드 아츠 아카테미 졸업 ▲1990~1995년 카우나스에 리투아니아인들과 불교사찰 고봉사 창건, 수행 ▲1995~1997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선원 도암사서 수행 ▲1997년 숭산 스님 설법에 감화, 출가결심 ▲1999년 한국입국 ▲1999~2007년 화계사 국제선원서 수행 ▲2001년 화계사 국제선원서 사미계 수지 ▲2003년 부산 범어사서 조계종 공식 사미계 수지 ▲2005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선센터서 비구계 수지 ▲2007년말~ 계룡산 무상사 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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