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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 버금가는 만델라 추모 행렬

    교황 버금가는 만델라 추모 행렬

    오는 15일(현지시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치러지는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추모행사에 각국의 지도자와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기로 하면서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추모행사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부가 이번 주 추모행사 참석을 위해 남아공을 찾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부도 남아공을 방문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특히 백악관과 연방정부 건물, 군기지, 해외 외교 공관 등에 9일 일몰 때까지 조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하는 등 거의 미국 내 국장(國葬) 수준으로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찰스 왕세자,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도 남아공에 간다. 일본에서는 나루히토 왕세자가 9일 남아공으로 출국한다. 왕세자가 해외 왕실과 무관한 인사의 추도식에 참석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호주의 토니 애벗 총리와 야당인 노동당 대표 빌 쇼튼도 10일 남아공을 방문한다. 한국에서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8일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남아공으로 출국했다. 생전 만델라와 친분을 유지했던 유명인들도 속속 남아공에 도착할 예정이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를 비롯해 록그룹 U2의 보컬 보노,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 등이 남아공 현지 추모행사에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만델라 추모행사의 규모를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과 비교하기도 한다. 당시 교황의 장례식에는 세계 각국 지도자 70여명과 국왕 5명을 포함, 약 200만명이 참석한 바 있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지난 6일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에게 보낸 조전에서 “만델라 선생은 세계에 명예를 떨친 정치가”라고 애도했다고 인민일보가 7일 보도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도 조전에서 “중국인민은 오랜 친구를 잃은 것에 비통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델라 전 대통령의 타계로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가 재조명되면서 그를 감옥에 가둔 중국 당국이 곤혹스러운 처지로 몰리고 있다. 8일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중국은 인권·자유·평등을 위해 투쟁한 만델라를 추도하지만 정작 중국에서 만델라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은 감옥에 있다” 등의 글들이 확산되고 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만델라 생전 ‘마지막 모습’ 공개…증손자와 함께

    만델라 생전 ‘마지막 모습’ 공개…증손자와 함께

    지난 5일 밤(이하 현지시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95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간 가운데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이 공개됐다. 지난 7일 영국매체 데일리메일이 단독 보도한 이 사진은 만델라의 손자 엔다바(30)가 지난 5월 요하네스버그의 자택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진 속에서 고인은 평소 자신이 가장 애용했던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띄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그 옆에는 고인의 증손자인 올해 3살 르와니카가 할아버지의 손을 꼭잡고 웃고있다. 손자 엔다바는 “할아버지가 일요일 오후 TV를 시청하며 한가로이 쉬고 계신 모습을 촬영했다” 면서 “우리가 함께 사진을 찍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만델라는 이 사진을 촬영한 지 한달도 안돼 병원에 입원했으며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엔다바는 “고인은 ‘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리셨지만 아들 르와니카에게는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였을 뿐” 이라면서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꼭 안아주던 순간이 그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자유를 향한 먼 여정’을 끝마친 고인의 영결식은 오는 10일 요하네스버그 FMB 경기장에서 열린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北 기록영화서 장성택 흔적 삭제…실각설 사실인 듯(종합)

    北 기록영화서 장성택 흔적 삭제…실각설 사실인 듯(종합)

    북한이 기록영화에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모습을 삭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실각설을 뒷받침했다. 중앙TV는 이날 오후 약 1시간 분량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군부대 시찰 기록영화 ‘위대한 동지 제1부 선군의 한길에서’를 재방송하며 종전에 나왔던 장성택 부위원장의 모습을 모두 없앴다. 북한은 그동안에도 주요 간부를 숙청하고 각종 보도 매체에서 이들의 ‘흔적’을 지우는 행태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장성택 부위원장의 실각설이 사실이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 역사에서 사진까지 삭제한 인물이 재기한 예가 없다는 점에서 추후 재기도 불가능해 보인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이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계모인 김성애의 사진을 모든 기록물에서 삭제했다. 또 2010년 3월에는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하고 나서 기록영화에서 그의 생전 모습을 모두 없앴다. 이날 방송된 기록영화를 과거 방송분과 비교한 결과 예전에 담겼던 장성택 부위원장의 모습이 모두 13군데나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TV는 지난 10월 7일 이 기록영화를 처음 방송한 뒤 같은 달 28일까지 9차례 내보냈다. 과거 방영된 기록영화에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한 건물 앞에서 리병철 항공 및 반항공군 사령관과 악수를 하고 귀엣말을 나눌 때 뒤쪽에서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 현철해 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과 함께 장성택 부위원장이 손뼉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나 이날 방영된 기록영화의 같은 장면에서는 장성택 부위원장의 팔과 다리 등 신체 일부만 등장하고 얼굴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장성택이 김정은 제1위원장과 함께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아예 장성택 부위원장이 사라졌다. 장성택 부위원장의 모습을 삭제하기 어려운 장면의 경우 기존에 없던 화면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중앙TV가 이 기록영화를 40일 만에 재방송한 것은 북한 당국의 의도된 행동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선군’ 관련 기록영화가 수십편이나 되는데 장성택의 실각설이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장성택의 모습을 삭제해서 내보냈다는 것은 사실상 그의 실각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주려고 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앞서 국가정보원은 지난 3일 장성택 부위원장의 핵심측근인 당 행정부의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지난 11월 하순 공개처형됐다며 장성택 부위원장이 실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억압을 용서로, 차별을 화합으로… 350년 인종분규 끝낸 ‘투사’

    억압을 용서로, 차별을 화합으로… 350년 인종분규 끝낸 ‘투사’

    1918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넬슨 만델라는 권투와 달리기를 좋아하던 해맑은 소년이었다. 이 소년이 350여년 역사의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투사’로 변모한 것은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발을 담그면서부터다. 1940년 포트헤어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다 시위를 주도한 대가로 퇴학당한 그는 ANC 청년연맹을 창립했다. 투쟁의 대상은 남아공의 악명 높은 인종격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였다. 백인과 흑인은 강제로 거주 지역이 분리됐고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만델라는 1952년 대학 동창 올리버 탐보와 요하네스버그에 처음으로 흑인 법률회사를 차린 뒤 빈곤층을 도우며 다수 흑인들을 압제하는 소수 백인사회에 정면으로 맞서 나가기 시작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창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롤모델로 삼았던 만델라를 180도 바꿔 놓은 것은 1960년 3월 발생한 샤프필학살사건. 요하네스버그 인근 샤프필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 나섰던 흑인 69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평화시위운동의 엄혹한 한계를 체감한 만델라는 비폭력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급선회했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마오쩌둥 등의 저서를 섭렵하며 전략을 모색한 그는 비밀군대 ‘움콘토 웨이즈웨’(민족의 창) 최고사령관으로 활동하다 경찰의 지명수배에 쫓기게 됐다. 1961년 남아공이 영연방에서 탈퇴하면서 국제사회는 본격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 이어 1962년 다시 체포된 만델라는 46세이던 1964년 내란음모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막노동에 치이고 6개월간 방문객이 단 한 명만 허용되는 지독한 옥살이였다. 하지만 그는 교도소에서도 투사를 길러내는 등 투쟁을 계속해 나가며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수감자’가 됐다. 당시의 혹독한 경험에 대해 그는 “나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패배와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유인으로 아프리카 땅을 두 발로 걸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이 같은 공로로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렐네루상,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잇달아 받은 만델라는 어느덧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결단을 내린 건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 전 대통령이었다. 1990년 옥살이 27년 6개월 만에 결국 만델라는 72세 노인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1991년 ANC 의장으로 선출된 만델라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 데클레르크 백인정부와 협상을 벌여 350여년간의 인종분규 종식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이러한 공로로 두 사람은 1993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94년 남아공 총선은 흑인들이 처음으로 한 표를 행사한 선거이자 만델라를 첫 흑인 대통령으로 만든 역사적인 선거였다. 1999년까지 재임하며 흑인과 백인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한 만델라는 세계 각국에서 ‘용서와 화합의 위대한 지도자’로 환영받았다. 그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조용히 지난 인생을 반추하고 싶다”며 2004년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세 차례 결혼한 그는 6명의 자녀와 20명의 손자를 뒀다. 저서로는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힌 ‘투쟁은 나의 인생’(1961)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1995) 등이 있다. 한편 만델라가 남긴 재산은 ‘남아공 최고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이름 값에 힘입어 1000만 파운드(약 172억 8000만원) 규모에 이른다고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이날 전했다. 생전에 그가 남긴 자서전 인세와 보유한 펀드 27개, 가족들의 만델라 브랜드 업체 운영 등에 따른 것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유유제약 유특한 회장 추모식

    ㈜유유제약은 6일 서울 중구 신당동 유유빌딩 본사에서 유특한 회장 14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유 회장은 생전에 유유제약을 창립해 치료 의약품 원료 국산화에 앞장서며 제약보국의 일념으로 국내 제약산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1941년 일제강점기에 ㈜유유제약의 전신인 유한무역주식회사를 창업했다.
  • [속보]北 기록영화에서 장성택 지워졌다…장성택 실각 사실인 듯

    [속보]北 기록영화에서 장성택 지워졌다…장성택 실각 사실인 듯

    북한이 기록영화에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모습을 삭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실각설을 뒷받침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7일 실각한 것으로 알려진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모습을 삭제한 기록영화를 내보냈다. 북한은 이전에도 주요 간부를 숙청한 뒤 각종 보도 매체에서 이들 간부의 ‘흔적’을 지우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 때문에 장성택 부위원장의 실각은 사실인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은 과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이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계모인 김성애의 사진을 모든 기록물에서 삭제했다. 또 2010년 3월에는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하고 나서 기록영화에서 그의 생전 모습을 모두 없앴다. 조선중앙TV는 지난 10월 7일 첫 방송 이후 같은 달 28일까지 9차례 내보냈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군부대 시찰 기록영화인 ‘위대한 동지 제1부 선군의 한길에서’를 7일 오후에 재방송했다. 이날 방송된 기록영화를 과거 방송분과 비교한 결과, 과거에는 담겼던 장성택 부위원장의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삭제됐다. 과거 방영된 영화에서는 김 제1위원장이 한 건물 앞에서 리병철 항공 및 반항공군 사령관과 악수를 하고 귀엣말을 나눌 때 뒤쪽에서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 현철해 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과 함께 장 부위원장이 손뼉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나 이날 방송된 기록영화의 같은 장면에서는 장 부위원장의 팔과 다리 등 신체 일부만 등장하고 얼굴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또 장성택이 김 제1위원장과 함께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장 부위원장이 아예 사라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거인’ 넬슨 만델라 영면…남아공 현지 분위기는

    ‘거인’ 넬슨 만델라 영면…남아공 현지 분위기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5일 밤(현지시간) 이 나라 역사과 국민을 ‘통합’의 키워드로 묶어낸 한 영웅의 운명에 울었다. 이날 ‘자유를 향한 먼 여정’을 마치고서 95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간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타계 소식은 남아공 전역을 일순 깊은 슬픔과 추모의 열기로 몰아넣었다. 당장 요하네스버그 하우튼 지역에 있는 고인의 자택 밖에는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애도객과 취재진 등 수많은 사람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애도했다. 일부 추모객의 손에 들린 촛불이 검은 밤을 뚫고 영롱한 빛을 발하는 매튜 라마카차 라는 이름의 시민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뉴스를 보고 달려왔다.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라고 답했다. 만델라가 한때 거주한 소웨토 지역에서도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노래와 춤으로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요하네스버그 신흥 도심 샌톤에 있는 ‘넬슨 만델라 광장’에도 흑인, 백인, 인도계 등 많은 이들이 만델라 동상 밑에 서서 고인의 넋을 기렸다. 생전에 만델라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남아공의 주요 인사와 단체들은 언론을 통 해 비통한 심정을 밝혔다. 아파르트헤이트(흑인분리정책) 기간 마지막 백인 대통령이자 1993년 만델라와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F.W. 데 클레르크 전 대통령은 CNN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위대한 통합자”라며 “그의 가장 큰 유산은 화해를 강조한 것”이라고 칭송했다.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데스먼드 투투 주교는 “마디바(만델라의 경칭)는 우리에게 함께 살고 서로 신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며 그의 타계를 애도했다. 제이콥 주마 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아버지를 잃었다”며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깊은 상실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만델라가 이끌었던 현 집권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남아공과 세계가 ‘거인’을 잃었다”며 “그의 삶은 우리에게 가난과 배고픔을 끝내고 발전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넬슨 만델라 재단, 넬슨 만델라 어린이 재단, 만델라 로즈 재단 등 만델라와 관련 있는 재단도 “어떤 말로도 (그의 타계로) 남아공과 세계가 받은 거대한 상실감을 적절하게 나타낼 수 없다”며 슬퍼했다. 인터넷 공간도 추모의 글로 가득했다. 남아공 영문 일간지 ‘더스타’와 주간지 메일앤드가디언 등의 인터넷 부고기사에는 몇 시간 만에 수백건의 댓글이 달렸다. “거인의 타계를 애도한다”, “만델라의 명복을 빈다”, “그가 그리울 것” 등의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주마 대통령이 만델라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글도 있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구본영 칼럼] 대한민국의 뉴 프런티어 어디서 찾나

    [구본영 칼럼] 대한민국의 뉴 프런티어 어디서 찾나

    얼마 전 영면한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전우애가 큰 울림을 줬다. “전우들 곁에 잠들고 싶다”던 생전의 유지대로 건군 이래 장군으로는 최초로 한 평짜리 사병 묘역에 묻히면서다. 마침 50주기(周忌)를 맞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 국제적인 추모 물결이 일던 터였다. 서로 깎아내리는 데만 익숙해진 각박한 우리 풍토에서 영웅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 베트남전서 산화한 무명용사 모두가 영웅으로 꼽아도 좋을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월남전 참전 한국군은 총 32만명으로, 이 중 전사자만 5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흘린 피땀은 자원도 자본도 없는 이 땅에 산업화의 싹을 틔운 밑거름이었다. 파병의 정당성 논란은 일단 제쳐 두자. 참전용사들이 송금한 달러와 미국의 군사원조, 그리고 국내 기업의 월남 특수로 번 돈을 포함한 50억 달러는 박정희 정부의 1, 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종잣돈이었지 않은가. 최근 한반도와 동아시아 안보지형이 격변하고 있다. 중국이 이어도 해역을 포함하는 방공식별구역을 일방 선포하면서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어느새 G2(주요 2개국) 반열에 오른 중국의 굴기(?起)와 이를 견제하려는 미·일의 대응이 동북아에 격랑을 몰고 오고 있다. 핵카드를 흔들며 협박하고 있는 북한이란 고약한 동족까지 곁에 둔 우리다. 가히 3각 파도를 맞이한 꼴이다. 게다가 내부적으로 경제 성장동력도 소진되어 가고 있다. 어느 논객은 주변 열강의 침탈에다 조정마저 친중·친일·친러 등으로 갈려 국권을 상실한 구한말 상황에 비견하기도 한다. 독립 이후 이만큼이나 국력을 키운 대한민국을 노환으로 뼈만 앙상했던 대한제국에 빗대는 것은 지나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꽉 막혀 있는 듯한 형국이다. 하긴 우리에겐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순간마다 돌파구를 열어온 저력은 있다. 한·일 수교로 받은 5억 달러 유·무상 청구권자금으로 포항제철과 발전소 등을 지어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는 해외 건설현장에서 흘린 땀방울로 이겨냈다. 당시에는 낯설었던 열사의 땅 중동이 한국경제에 숨통을 틔워준 기회의 땅이었던 셈이다. 사후 50년이 된 케네디에게 미국민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암살되는 통에 획기적 업적도 남기지 못한 그인 데도 말이다. 답은 더 이상 개척할 서부가 없던 미국인에게 ‘뉴 프런티어’(변경)를 제시했던 데서 찾아야 할 듯싶다. 우주개발 청사진과 전 세계에 평화봉사단 파견으로 미국민에게 도전정신을 심어 줬던 그가 아닌가. 까닭에 우리가 개척해야 할 새로운 변경은 어디인가라고 자문하게 된다. 내부자원이 고갈되었다면 진취적으로 신천지를 찾아 나서야 한다. 지난 십수년간 한반도 평화관리라는 미명으로 추구해온 분단고착화 노선 대신 적극적 통일정책을 모색할 때이다. 위험부담이 따르겠지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도 참여하는 등 보다 모험적인 개방도 감수해야 한다. 앞을 내다보는 지도자라면 이 과정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일도 분명 있을 게다. 어쩌면 박근혜 정부도 임기 중 욕먹을 각오로 그런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는 안보와 경제 양 측면에서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인지도 모른다. 하루속히 비상구를 찾아야 하는 마당에 영일 없는 정쟁으로 에너지를 소진해선 안 될 말이다. “인간은 흔히 작은 새처럼 행동한다.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머리 위에서 독수리가 내리 덮치려 하는 것도 모르는 참새처럼 말이다.” 자신의 조국 피렌체공화국이 반목과 질시로 쇠락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마키아벨리가 남긴 말이다. 청와대는 물론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다 돼가도록 드잡이만 하고 있는 여야 지도자 모두가 새겨야 할 경구다. kby7@seoul.co.kr
  • 고모부 장성택은…‘3대 세습’ 만들어 낸 김정은 후견인

    북한 장성택(67)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노동당 행정부장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고모부로 올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위원이 됐다. 부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인 김경희 당 부장이다. 김일성 가계의 일원이지만 북한 내 대표적인 관료이자 북한 경제발전 노선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으로 출범한 김정은 체제에서 후견인 역할을 하며 당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다. 오랫동안 당 핵심 부서에서 일해 온 덕에 북한 권력 체계를 훤히 꿰고 있고 인맥도 폭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 제1위원장에게 올해 내각 총리로 발탁된 박봉주와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도 그동안 장 부위원장의 측근으로 분류됐다. 이번 숙청 작업을 주도한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과도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고리 권력’을 놓고 경쟁 구도를 형성했던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도 의형제로 한때 그의 측근으로 여겨졌다. 장 부위원장은 2004년 초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일하다 분파 행위를 이유로 숙청된 바 있다. 최룡해도 당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2년여 만에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재기했고 2007년 12월 당 행정부장으로 권력의 중심에 섰다. 당 행정부장은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위부 등 북한의 정보·사법 기관을 지도·통제하는 핵심 권력이다. 2009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에 오른 후 2010년 6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국방위 부위원장이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김 위원장에게 셋째 아들인 김정은 제1위원장의 후계자 내정을 건의한 것으로 전해지는 등 현 후계 구도 확립에 공을 세웠다. 2002년 신의주 행정특구 사업을 조직한 경험을 가진 장 부위원장은 최근 북한의 경제개발구 등 경제개방정책을 주도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박봉주 내각의 경제 개혁 조치에도 관여했다는 후문이다. 노동당 비서를 지냈던 황장엽씨는 생전에 “김정일이 파티에서 장성택의 빰을 때렸는데 그는 돌아서서 나를 보고 씩 웃을 정도로 배짱도 있고 카리스마도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공포정치와 대중친화’ 두 얼굴의 통치술

    개혁·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북한 사회를 철저히 통제하면서도 따뜻한 지도자 이미지를 얻기 위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공포’와 ‘대중 친화’라는 양면의 통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체제를 이탈한 주민에게는 채찍을 들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주민에게는 당근을 주는 ‘두 얼굴의 통치술’은 1국가 2체제(자본·사회주의)에 가까운 경제 실험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회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김 제1위원장은 지난해 4월 김일성 주석 생일 100주년을 맞아 진행된 대규모 열병식에서 20여분간 육성연설을 하는가 하면 스스럼없이 웃고 손을 흔들며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혔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 단 한차례 육성을 공개하고 대중과도 일정한 거리감을 두며 ‘신비화’를 추구했던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훈련 중 숨진 군인의 묘지를 직접 참배하고, 사병들과도 사진 촬영을 하는 등 밀착형 행보로 충성심을 끌어냈다. 반면 주민 통제는 더욱 강화해 지난 10월에는 ‘불순 출판선전물을 몰래 보거나 유포시키는 자들을 엄격히 처벌함에 대하여’란 제목의 포고문을 발표하고 불순 영상물 관련자들을 ‘계급적 원수’로까지 규정해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비록 유야무야되기는 했지만 체제 부정적인 당 간부 자녀들이 반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9월 해외주재 외교관들에게 자녀들을 1명만 남기고 귀국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하는 등 관리들에게도 감시의 칼날을 번뜩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개혁·개방에 다가설수록 이 같은 사회적 통제가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시에 김 제1위원장의 거침없는 대중 스킨십 역시 확대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기업 자율 등 개혁정책 박차… 치적용 관광사업 많아 성과 미지수

    기업 자율 등 개혁정책 박차… 치적용 관광사업 많아 성과 미지수

    “북한 주민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경제개혁과 개방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개혁·개방은 체제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은 2011년 2월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의 개혁·개방이 불러올 역기능을 이렇게 지적했다. 개혁·개방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성 확대는 그동안 김 위원장과 그의 측근들이 끈질기게 개혁·개방을 반대해온 이유였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김 위원장의 사망으로 삼남 김정은이 바통을 이어받자 북한 전문가들은 당분간 ‘유훈통치’로 개혁·개방에 대한 북한의 정책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예상보다 빨리 독자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해 지난해 6월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6·28 조치’를 발표했다. ‘김정은식(式) 경제개혁’의 시발점이었다. 지난 3월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채택했고, 4월에는 2002년 일부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고안자인 박봉주를 내각 총리에 등용해 새 경제조치에 힘을 실었다. 그 결과 공장과 기업소의 자율성이 상당 부분 보장되고, 인센티브에 따른 임금 차별화(최고 100배 차등 지급), 대형 기업소의 자율적 해외 무역거래 허용,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시장경제 요소가 확산됐다. 최근에는 희토류 등 희귀 광물질 매장지의 군부대와 보안시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개발을 보장하라는 지침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각 도에는 관광·농업·공업 등으로 특화된 1개 경제특구(신의주)와 13개 경제개발구가 착공을 앞두고 있고 평양에는 ‘위락시설’ 건설붐이 일고 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이미 북한의 사회주의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라고 진단했다. 문제는 김 제1위원장이 단기간 내 성과를 낼 수 있는 ‘치적쌓기용’ 관광사업에만 치중한 탓에 내실 있는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1·2차 산업은 부실한데 3차 산업만 비대해져 있는 상태다. 14개 경제특구 및 경제개발구도 수익성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은 “중국이 투자를 해주면 일정 부분 성공할 가능성은 있지만, 미국이 대북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발전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제1위원장의 아버지인 김 위원장은 생전에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망하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바로 한국 때문이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한국을 이웃에 두고 있는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며 외부세계와 적극 교류한다면 자본주의 사조가 물 밀듯 들어오고, 내부 폭동이 일어나 자칫 체제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중국은 워낙 대국이기 때문에 타이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경제개혁을 할 수 있었고, 베트남은 경제개혁에 나섰을 때 이미 통일국가였다는 점에서 북한과는 상황이 다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최근 한 학술회의에서 김정은식 경제개혁에 대해 “성공 가능성은 낮지만, 성공한다면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을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체제를 건 김 제1위원장의 도박이 성공한다면 북한은 도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지만, 개혁·개방이 부메랑이 되어 체제 붕괴를 앞당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영화처럼 가버린 폴 워커, 생전 마지막 모습

    영화처럼 가버린 폴 워커, 생전 마지막 모습

    영화 ‘분노의 질주’에서 브라이언 오코너 역을 맡아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배우 폴 워커(40)가 30일(현지시간) 교통사고로 숨졌다.폴 워커는 사고가 나기 1시간 30분전 탑승했던 빨간 포르쉐 승용차와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이 공개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폴 워커가 탑승한 이 포르쉐 승용차는 화염에 휩싸여 뼈대만 남은 채 타버렸다. CNN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워커는 이날 오후 3시 30분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리타에서 친구가 모는 포르셰 승용차를 타고 가다 차가 전복되면서 화재가 일어나 변을 당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경찰은 포르셰 승용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포르셰 승용차는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소방차가 출동해 진화에 나섰지만 뼈대만 남을 만큼 모두 타 버렸다. 경찰은 승용차 내부에서 워커와 워커 친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사고 장소는 할리우드에서 50㎞가량 떨어진 곳이다. 워커는 샌타클래리타의 공원에서 열린 태풍 하이옌 피해 필리핀인 돕기 자선 행사에 참석하려고 친구와 함께 가던 길이었다. 사진=TOPIC / SPLASH NEWS(www.topicimages.com)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거꾸로 ‘다이빙’…바닥에 처박힌 여우 포착

    야생 여우가 먹이 사냥에 나선 이색적인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마치 만화처럼 눈 바닥에 거꾸로 머리를 처박은 듯한 여우의 모습은 최근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의 한 야산에서 촬영됐다. 사진 속 주인공은 북아메리카와 아이슬란드등 세계 곳곳에 서식하는 붉은 여우(red fox). 붉은 여우는 몸길이 약 60~90cm의 작은 덩치지만 절대 먹잇감을 놓치지 않은 사냥의 명수다. 이날 여우의 ‘저녁식사’는 바로 야생 들쥐. 여우는 공중으로 1m 가량 점프한 후 그대로 바닥에 다이빙했으며 놀랍게도 여우의 입에는 들쥐 한마리가 잡혀있었다. 이 사진을 촬영한 야생전문 사진작가 마이크 이스트먼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정말 여우가 놀라운 사냥솜씨를 보여줬다” 면서 “딱딱하게 얼어버린 바닥으로 다이빙해 쥐를 잡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며 놀라워했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분노의 질주’ 폴 워커 사망 30분 전 사진 공개

    ‘분노의 질주’ 폴 워커 사망 30분 전 사진 공개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 주인공으로 스타덤에 오른 폴 워커가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고 발생 30분 전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공개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 이 사진은 폴 워커가 사고 차량인 포르쉐에 막 올라타려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 장면은 사고가 발생하기 불과 30분 전의 모습인 것으로 알려졌다. 폴 워커는 선글라스를 쓰고 편안한 티셔츠 차림이며, 밝은 표정으로 포르쉐 차량의 문에 손을 짚고 있다. 사진 속 워커는 전 세계 팬들을 설레게 한 웃음을 짓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현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폴 워커는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래리타에서 친구가 운전하는 차량에 동승했다가 전복사고를 당했다. 사고 직후 차량이 폭발하면서 화재가 발생했고, 폴 워커와 동승한 친구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는 인근에서 열리는 자선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폴 워커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 스타인 빈 디젤과 함께 내년에 개봉 예정인 ‘분노의 질주’ 7탄 출연을 앞두고 있었다. 또 거대한 허리케인으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아버지 역을 맡아 열연한 독립영화 ‘시간들’로 또 한번 연기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분노의 질주’ 파트너인 빈 디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천국이 새 천사를 데려갔다”며 생전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하며 애도를 표했다. 사진=TOPIC / SPLASH NEWS(www.topicimages.com)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 국립묘지 안장 결정

    과거 조세법 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국립묘지 안장이 취소됐던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구익균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국내외에서 20여년간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다. 1929년 신의주 학생 의거를 일으킨 뒤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의 한국유학생 지도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 4월 8일 10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선생은 대전현충원에 모실 예정이었지만 국가보훈처가 발인을 하루 앞두고 돌연 안장을 취소했다. 선생이 1972년 사문서 위조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1973년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됐다. 선생의 막내딸 구혜란(57)씨는 지난 5월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국가보훈처의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행정심판위는 29일 “도산 안창호의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일제에 항거하다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의 형을 받는 등 고인의 생전 공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고인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며 안장을 거부한 국가보훈처의 처분은 부당하다”고 결정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연명의료 심의’ 국가·병원윤리위 만든다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 이른바 존엄사의 법제화 준비가 한창이다. 정부는 28일 의료계와 환자단체, 종교계 등이 참석하는 ‘연명의료의 환자결정권 제도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방안 공청회’를 연세대 의과대학강당에서 열고 연명의료결정법안을 집중 논의했다. 하지만 환자 가족이나 병원 결정만으로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법제정까지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이일학 연세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이날 주제발표를 통해 법안의 주요 내용을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법안은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권고를 반영해 환자의 명시적 의사와 의사 추정, 대리 결정에 따라 임종을 앞둔 환자의 특수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근거를 담았다. 법안은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여러 가지 사안을 심의하는 국가의료윤리위원회를 구성하고, 병원에는 연명의료와 관련해 의사 결정을 하는 병원윤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또 연명의료 중단 절차가 일선 의료기관에서 제대로 작동하도록 관련 건강보험수가를 신설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공청회에서는 환자가 무의식 상태여서 연명의료에 관한 의사를 확인할 수 없을 때 가족이나 병원(무연고자)이 대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대리 결정’ 조항을 놓고 여전히 논란이 일었다. 법안을 마련한 이 교수 등은 ‘환자가 생전에 연명치료를 원치 않았다’는 가족 2인의 진술이 있으면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하도록 하고, 무연고자라면 병원윤리위가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시민단체와 환자단체에서는 대리결정 허용을 반대하거나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연명치료 중단은 ‘환자의 자기선택권 실현’보다는 병원비 압박에 따른 ‘강요된 결정’인 경우가 많다”면서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장치가 아닌 의료인의 면책 수단으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故채명신 장군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현충원 첫 사례

    故채명신 장군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현충원 첫 사례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지난 25일 별세한 채명신 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이 생전 이 같은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와 국방부는 27일 고인이 남긴 이 유언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결과를 유족에게 통보했다고 국방부 관계자가 밝혔다. 별세한 장군은 현충원에 마련된 장군 묘역에 안장된다. 그러나 고인은 별세하기 전 유족에게 사병 묘역에 묻히길 희망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장군이 자기 신분을 낮춰 사병 묘역에 안장되길 희망한 것은 현충원 설립 사상 최초”라면서 “숭고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확정했다”고 전했다. 고인이 묻히게 될 묘지 크기는 일반 사병과 같은 3.3㎡이다. 김형기 서울현충원장은 “고인의 묘지와 비석 크기는 일반 사병과 같다”면서 “파월참전자회장을 맡아왔던 고인이 추모행사를 해왔던 2번 사병 묘역에 안장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이날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방문, 유족들에게 정부의 결정을 공식 전달할 계획이다. 베트남전의 영웅인 고인은 1949년 육군사관학교(육사 5기)를 졸업하고 이듬해 6·25 전쟁에 소위로 참전했다. 1953년에는 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5년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1969년까지 4년 가까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지휘했다. 이후 육군 2군사령관을 거쳐 19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군 복무기간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에는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과 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씨와 1남2녀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웃음 배달부 50년… 영원한 코미디언 남보원

    [김문이 만난사람] 웃음 배달부 50년… 영원한 코미디언 남보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하면 복이 올까. 우선 일주일간 웃고 사는 방법을 만들어 보자. 예를 들어 ‘월요일에는 원래 웃고, 화요일에는 화가 나도 웃고, 수요일에는 수수하게 웃고, 목요일에는 목청껏 웃고, 금요일에는 금방 웃고 또 웃고, 토요일에는 토끼처럼 예쁘게 웃고, 일요일에는 일어나자마자 웃고’ 등이다. 하하, 호호, 헤헤. 웃음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한다. 그 선물 상자 중 일부를 뜯어보면 이렇다. 10초 동안 웃는 것은 노 젓기 3분, 한번 크게 웃기는 윗몸일으키기 25번, 15초 동안 박장대소하는 것은 100m 달리기를 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그만큼 웃음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긍정적인 상태로 만든다는 의미다. 마음을 즐겁게 먹는 것은 많은 질병을 방어하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최선의 약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웃음은 혈압을 안정시키고 혈액과 근육 내 산소를 증가시키며 소화를 촉진하는 등의 생리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잘 웃는 방법은 무엇일까. 혼자 실실 웃을 수도 없고…. 이런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50년 동안 ‘웃음 배달부’로 살아온 영원한 코미디언 남보원(77)씨. 그의 이름에서 보듯 웃음 선사에 관해서는 여전히 넘버 원(No.1)이다. 원맨쇼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국보급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요즘도 각종 기념식장이나 결혼식장은 물론 장례식장에서까지 웃음을 선사한다. 지난 18일 저녁 개그맨 김학래씨가 운영하는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중식당. 이날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선생이 ‘2013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송해, 남보원, 엄용수 등 선후배 코미디언들이 모처럼 모여 축하 파티를 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이때 남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남씨는 원래 2년 전부터 술을 끊은 상태였지만 옆자리에 앉은 송해씨가 자꾸 술을 권하는 바람에 두어잔 마신 상태였다. ‘자, 내가 노래 한 자락 하갔시요’라고 말을 꺼낸 남씨는 요즘 뜨고 있는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일부 개사해서 불렀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훈장받는 데 나이가 있나요’라고 했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구)봉서형, 오늘 같은 날 더 젊어지신다. 자, 노래 한 자락 더 나옵니다”고 한 뒤 ‘청춘을 돌려다오, 못다 한 그 사랑이 태산 같은데’ 등을 메들리 형식으로 불렀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여기저기에서 구봉서 선생을 향한 후배들의 러브송이 이어졌다. 2010년 7월 동료 코미디언 백남봉씨의 장례식장에서 남씨는 ‘한오백년’을 불렀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백남봉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를 회심곡 스타일로 불러 주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잠시 후 문상객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갔더니 가수 조영남씨가 얼른 다가와 “형님, 내가 죽으면 무슨 노래 불러 줄라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씨가 “야, 너는 화개장터밖에 더 있냐”라고 대답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남씨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요즘 나는 세상만사를 노래로 하면서 살아. 노래를 하다 보면 나도 즐겁고 듣는 사람도 즐겁지 아니하겠습네”라며 자신의 고향인 평남 사투리를 섞어 가면서 웃었다. 이어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고 색소폰 소리로 반주를 했다. “오늘 기자와 만나 좋은 인연을 맺었으니, 얼씨구나 뿌뿌.” 만나는 사람이나, 가만히 있는 사물이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그에겐 즉석 타령이자 민요로 다가온다. 그러니 어찌 세상 일이 즐겁지 않을까. 나이 먹을 겨를이 없겠다고 하자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라는 현철의 노래로 대신한다. 이어 “사는 게 별거 있더냐, 욕 안 먹고 살면 되는 거지, 술 한잔에 시름을 덜고, 너털웃음 한번 웃어 보자 세상아, 시곗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 길을” 이렇게 말 대신 자신의 인생을 구성진 노랫가락으로 풀어 나간다. 예나 지금이나 늘 오라는 곳이 많다. 그는 몸이 아파도 각박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을 배달하는 기쁨과 보람으로 언제든지 달려간다. 축가, 조가, 경음악, 재즈, 서도소리, 판소리 등 다양한 음악 장르로 좌중을 휘어잡는다. 최근에는 ‘독도는 우리 땅’을 판소리 버전으로 불렀다.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에, 에/아베는 듣거라 독도는 우리 땅이야’ 그러다가 이은관 선생의 서도소리 버전으로 마무리해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러 지자체 노인 잔치와 향우회 모임 등에 자주 초청되지만 10년 전부터는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부르기도 하며 젊은이들과 어울린다. ‘사랑을 위하여’를 부른 뒤 즉흥 원맨쇼로 하객들의 배꼽을 빠지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주례 선생님이 신랑과 신부의 진실한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만있어 보자, 어 빠진 거 없나, 아 있다. 여당과 야당의 사랑이 빠졌네요”라고 한다. 다음 달에도 세 차례 결혼식장에서 즉흥 원맨쇼를 벌일 예정이다. “이렇게 저렇게 삼팔선을 넘어 웃음의 배달부로 50년을 살아왔네, 하하하.” 그는 전직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아주 잘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일날을 기억한다. 1990년 6월 프란체스카 여사의 90회 생일을 맞아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축하연이 벌어졌다. 남씨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수양 아들 초청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생일 케이크에 불이 켜지고 축하 노래가 이어졌다. 잠시 후 티타임 시간이 되자 남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 전 대통령의 목소리를 흉내 내 말했다. “나의 사랑 프란체스카, 당신의 90회 생일을 진정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오래오래 사시다가 100년 후 스카이라운지에서 다시 만납시다. 하늘나라에서 닥터 이승만.” 목소리가 생전의 이 전 대통령과 너무나 닮아 마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어느 직장에 강연을 간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국민의례 할 때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애국가 곡이 준비가 안 됐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애국가 반주를 했습니다. 양손을 입술에 대고 트럼펫 소리로 즉석에서 애국가를 연주했더니 다 따라 부르더군요.” 그는 목소리 얘기가 나오자 “부모님이 준 큰 선물이다. 아버지가 수심가를 아주 잘 불렀다”면서 “지금의 개그맨들은 잔재주를 부릴 것이 아니라 성대모사를 잘해야 국제적으로도 오래간다. 임기응변보다는 자신만의 개인기가 필요하다”고 후배들을 향해 충고를 한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비록 말이 안 통하더라도 성대모사로는 서로 충분히 통한다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2005년 나이 칠순에 신곡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나는 나는 삐에로, 삐에로로 살아갈래’로 시작되는 ‘삐에로’와 ‘인생은 레디고, 백년을 다 살아봤자 삼만육천오백일, 사랑도 인생도 우정도 한번뿐이야, 인생역전 한방이 이 안에 있다, 돌아라 돌아라 돌아라’라는 내용이 담긴 ‘인생은 레디고’라는 노래다. 이후 틈이 날 때마다 ‘눈물 젖은 두만강’ ‘선창’ ‘내 마음 별과 같이’ ‘암스트롱 메들리’ 등 16곡을 모아 CD로 제작했고 앞으로도 그 작업은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 50년 동안의 일 중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을까. “지금까지 공연에서 박수를 못 받은 것은 딱 한 번, 평양 공연 때였습니다. 백남봉과 밤새 연습한 것들을 실수 없이 다 보여줬는데도 박수가 전혀 나오지 않았지요. 공연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의 본명은 김덕용이다. 1963년 연예계 데뷔 당시 대부분 ‘후라이보이’ ‘스리보이’ 등의 예명이 많아 고민 끝에 평소 ‘깡패가 되려거든 우두머리가 되고 딴따라가 되려거든 넘버원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 남쪽 보물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남보원(南寶元)이라고 했다. 그는 연예계에 힘들게 데뷔했다. 성우, 아나운서, 영화배우, 탤런트 시험에 다 떨어진 뒤 20대 후반에야 영화인협회가 주최한 ‘스타 탄생’ 코미디 부문에 합격했다. 데뷔 후 첫 무대는 서울시민회관이었다. 이때 현인, 최희준 등 당대 인기 가수의 성대모사와 팔도 방랑기 등을 쏟아내 인기를 끌면서 이후 원맨쇼의 일인자가 됐다. 지금까지 살면서 후회는 없었을까. “원맨쇼도 인간문화재로 지정돼야 하는 것 아니야”고 반문한 뒤 “후계자를 키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키울 수도 없고…아마도 내가 가고 나면 원맨쇼의 맥도 끊길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 같은 놈이 세상에 툭 튀어나와 웃기는 일도 많이 했다. 앞으로도 국민들에게 박수받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회한과 포부를 밝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남보원은 193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덕용(金德容). 1951년 1·4후퇴 때 월남했다. 서울 성동공고를 졸업한 뒤 경찰공무원이 되고자 동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1963년 영화인협회에서 주최하는 ‘스타 탄생’ 코미디 1위로 데뷔한 뒤 ‘원맨쇼’를 개척했다. 영화 ‘공수특공대작전’ ‘귀신 잡는 해병’ ‘오부자’ ‘새알 각하’ 등에도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연예인 축구단을 만들어 ‘남펠레’로 활약했다. 현재 ‘연예인NO.1’ 축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98년 동국대 국제정보대학원 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으며 1996년 예총예술문화상(연예부문), 파월 장병 및 사할린 교포 위문 공연 등의 공적으로 1997년 제4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화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 독립운동가 故한형석 선생 주택 새단장

    독립운동가 故한형석 선생 주택 새단장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음악가인 고 한형석(?~1996) 선생이 생전에 거주했던 부산 서구 부민동 주택과 주변이 말끔하게 단장된다. 시는 한 선생 주택 주변 정비 사업을 다음 달 완료할 방침이라고 20일 밝혔다. 현재 이 집에는 한 선생의 부인이 살고 있다. 이번 정비 사업은 한 선생이 부민동에 한국 최초의 아동 전용 극장인 자유아동극장을 세웠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한 선생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과 항일 가곡 등 100여곡의 작품을 남긴 음악가다. 해방 뒤 부민동의 자유아동극장, 야학 등을 통해 청소년 예술 교육의 터전을 닦은 문화예술 혁명가이며 교육 선각자이기도 하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으로 완료한 임시수도 기념거리 조망 쉼터, 아미골 찬샘물터, 까치고개 푸른 쉼터, 고분도리 전망대, 고분도리 카페, 아미 문화학습관 등과 연계한 관광 코스로 활용돼 산복도로 탐방객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종근당 ‘고촌홀’ 개관

    종근당 ‘고촌홀’ 개관

    12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본사 2층에 마련된 ‘고촌홀’ 개관식 행사를 마친 이장한(오른쪽) 회장 등 귀빈들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창업주인 고촌 이종근 회장의 생전 업적을 기리는 고촌홀에는 2개의 전시실과 14개 테마존에 고인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유품들이 전시된다. 종근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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