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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논란…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논란…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여부를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커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 역시 “문 후보자가 친일파로 몰린 것에 억울해하며 명예회복을 원하자 오늘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0년 보훈처 자체 발굴로 독립유공자 애국장 포상을 받은 문남규 씨와 문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총리실이 문 후보자 조부의 과거 행적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당국이 이를 확인함으로써 문 후보자의 명예가 회복될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문창극 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남규 선생이 문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서둘러 확인해 준 것 같은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문창극 후보자는 2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고 자진사퇴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애국지사 자손 보도, 민족문제연구소 “확정할 자료 없어”…문창극 아버지 생전 한 말은 무엇?

    문창극 애국지사 자손 보도, 민족문제연구소 “확정할 자료 없어”…문창극 아버지 생전 한 말은 무엇?

    문창극 애국지사 자손 보도, 민족문제연구소 “확정할 자료 없어”…문창극 아버지 생전 한 말은 무엇? 민족문제연구소는 23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할아버지로 밝혀졌다는 보도에 대해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면서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유 책임연구원은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설령 문창극 후보자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그의 잘못된 가치관과 역사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그의 발언은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으로, 선대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더욱 언행을 조심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날 조선일보는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자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창극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하다…조부라 해도 언행 문제”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하다…조부라 해도 언행 문제”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문창극 할아버지’ 민족문제연구소가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설령 문창극 후보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그의 잘못된 가치관과 역사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그의 발언은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으로, 선대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더욱 언행을 조심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문창극 할아버지 확정할 자료 없어” 반박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문창극 할아버지 확정할 자료 없어” 반박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문창극 할아버지 확정할 자료 없어” 반박 민족문제연구소는 23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할아버지로 밝혀졌다는 보도에 대해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면서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유 책임연구원은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설령 문창극 후보자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그의 잘못된 가치관과 역사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그의 발언은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으로, 선대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더욱 언행을 조심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날 조선일보는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자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창극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문남규 선생 맞나…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문남규 선생 맞나…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여부를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커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 역시 “문 후보자가 친일파로 몰린 것에 억울해하며 명예회복을 원하자 오늘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0년 보훈처 자체 발굴로 독립유공자 애국장 포상을 받은 문남규 씨와 문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총리실이 문 후보자 조부의 과거 행적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당국이 이를 확인함으로써 문 후보자의 명예가 회복될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문창극 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남규 선생이 문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서둘러 확인해 준 것 같은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변희재 트위터 “문창극, 지적으로 열린 사람”…문창극 아버지 생전 얘기는?

    변희재 트위터 “문창극, 지적으로 열린 사람”…문창극 아버지 생전 얘기는?

    변희재 트위터 “문창극, 지적으로 열린 사람”…문창극 아버지 생전 얘기는?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문남규 선생으로 밝혀졌다는 보도와 관련 “문창극은 지적으로 크게 열려있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변희재 대표는 23일 자신의 트위터에 “문창극씨 조부, 일제 때 무장 항일 투쟁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21살의 나이에 일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고 적었다. 이어 “무장 항일 투쟁과 대별되던 노선이 이승만의 외교 독립노선이다. 무장 항일 투쟁으로 전사한 조부를 두고도 이승만식 외교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문창극은 지적으로 크게 열려있는 인물이다”라고 칭찬했다. 변희재 대표는 “조부가 항일투쟁의 순국자인데 손자가 친노종북 세력으로부터 친일 매국노로 몰려 매장당한다면 조부 볼 낯이 없다. 문창극은 목숨 걸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상식적으로 친 할아버지가 일본군에 살해당했는데 손자가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마음이 나겠나. 실제 힘으로 일본을 제압해서 굴복시키자는 게 문창극의 일관된 주장이었다”라면서 문창극 후보자를 감쌌다. 또 “문창극 강연 전문 다 본 정상적인 사람의 부정적 반응은 ‘설마 대한민국이 일본, 중국, 미국을 넘는 세계중심 될 수 있어? 과대망상 아닌가’ 이 정도일 것”이라면서 한 평론가를 겨냥해 “문창극 강연 전문을 다 봐도 친일이 화가 난나던데 어느 문장이 친일인지는 짚지도 못한다”고 비난했다. 이날 조선일보는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자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창극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문남규 삭주 검색해보라”…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논란

    문창극 “문남규 삭주 검색해보라”…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논란

    ’문창극 삭주’ ‘문남규 삭주’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여부를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커지고 있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24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문남규 삭주’를 검색해보라”면서 “조부가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검증팀이 보훈처에 확인한 결과 2010년 조부가 애국장에 추서된 것이 확인됐다”면서 “검색창에 ‘문남규 삭주’를 검색해보라”고 말했다. 자신의 조부가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동일인임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 역시 “문 후보자가 친일파로 몰린 것에 억울해하며 명예회복을 원하자 오늘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0년 보훈처 자체 발굴로 독립유공자 애국장 포상을 받은 문남규 씨와 문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총리실이 문 후보자 조부의 과거 행적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당국이 이를 확인함으로써 문 후보자의 명예가 회복될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문창극 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남규 선생이 문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서둘러 확인해 준 것 같은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문창극 후보자는 2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고 자진사퇴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조부 알고보니 독립유공자…일제시대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문창극 조부 알고보니 독립유공자…일제시대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각종 ‘망언’으로 자격 논란을 일으킨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독립활동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유공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일보는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의 말을 빌어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文南奎) 선생과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문남규 선생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3.1운동 이후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병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1919년 3월 결성한 단체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문남규 선생은 192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 보훈처는 2010년 11월 순국선열의 날에 문남규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문남규 선생의 유족 확인이 안 돼 훈장을 임시로 보관했다고 전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문남규 선생은 문창극 후보자 조부와 원적지(평북 삭주)가 같고, 한자 이름도 동일하다. 또 1989년 사망한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는 생전에 “7살(1921년) 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기석씨는 1914년 생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문창극 후보자는 총리 지명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면서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창극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대한독립단 대원 애국지사 확인…네티즌 “할아버지 독립투사였는데 손자는 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대한독립단 대원 애국지사 확인…네티즌 “할아버지 독립투사였는데 손자는 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문창극 할아버지’ ‘대한독립단’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소식이 전해졌다. 문창극 할아버지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3일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밝혔다. 최근까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친일 논란에 휩싸이며 여론의 뭇매를 맞아왔다. 이날 보훈처 관계자는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특히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1989년 사망)씨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고 문기석씨는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문남규 선생은 192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같은 내용은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은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숨졌는데 손자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했으니” 등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조부 대한독립단 대원 애국지사 확인…네티즌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는데 손자는 왜”

    문창극 조부 대한독립단 대원 애국지사 확인…네티즌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는데 손자는 왜”

    ‘문창극 조부’ ‘문창극 할아버지’ ‘대한독립단’ 문창극 조부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3일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밝혔다. 최근까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친일 논란에 휩싸이며 여론의 뭇매를 맞아왔다. 이날 보훈처 관계자는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특히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1989년 사망)씨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고 문기석씨는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문남규 선생은 192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같은 내용은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은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숨졌는데 손자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했으니” 등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불꽃인지… 꽃불인지…무주, 초여름밤의 축제

    불꽃인지… 꽃불인지…무주, 초여름밤의 축제

    요즘 다소 달라졌다고는 하나, 전북 무주는 여전히 나라 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오지다. 두메 곳곳마다 질그릇 같은 투박함이 스몄다. 한데 무주의 초여름 밤 풍경은 달랐다. 매끈하고 고혹적이었다. 남대천 물길 위에서 펼쳐진 낙화(落火)놀이가 특히 그랬다. 정념을 갈무리한 불꽃이 비처럼 흩날리는 모습은 화사하면서도 절제미가 돋보였다. 밤하늘을 형광빛으로 수놓은 반딧불이의 혼인비행도 그에 못지않게 단아했다. 투박함 위로 고졸한 정취가 덧씌워진 풍경, 무주의 초여름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무주를 횡으로 가르는 남대천. 그 물길 위로 주황빛 불꽃들이 분분히 날리고 있다. 한 올 한 올 여인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닮은 불꽃이다. 30분 남짓 현란한 풍경이 이어지는데도 강변을 딛고 선 사람들은 입을 열 줄 몰랐다. 말을 잊게 하는 강한 힘, 그게 무주 남대천 낙화놀이엔 있었다. 낙화놀이는 낙화봉에서 불꽃들이 떨어지는 모양새가 꽃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줄불놀이, 낙화유(落火遊) 등으로도 불린다. 장대에 연결된 줄에 200개 정도의 낙화봉을 달고 불을 붙이면 불꽃이 아래로 휘날리며 불꽃쇼를 펼친다. 오래전엔 음력 정월대보름이나 사월 초파일 등 특별한 날에 열렸지만, 요즘엔 지역 축제장에서도 간혹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주 남대천 낙화놀이다. ●낙화봉은 뽕나무·참나무 태워 만든 숯이 주재료 낙화봉은 뽕나무나 참나무를 태워 만든 숯이 주재료다. 여기에 소금, 말린 쑥 등을 섞어 한지 위에 올린 뒤 둘둘 말아서 만든다. 낙화봉에 불을 붙이고 나면 30분 이상 불꽃이 떨어져 내린다. 초여름 밤을 수놓기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의 양이다. 서양의 불꽃놀이나 중국의 폭죽놀이가 화려하고 역동적이라면 낙화놀이는 더없이 잔잔하고 서정적이다. 물 위로 빛 그림자를 드리우며 떨어지는 불꽃을 보자면 우리 선조들의 미적 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단박에 알게 된다. 무주 낙화놀이의 시발지는 안성면 금평리 두문마을이다. 덕유산 자락에 기댄 산골마을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맥이 끊긴 낙화놀이를 마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되살렸다. 마을 위쪽의 작은 방죽에서 소규모로 벌이던 낙화놀이는 입소문을 타고 금방 퍼졌고, 몇 해 전 무주 반딧불축제에 첫선을 보인 이후부터는 축제의 핵심 볼거리로 자리를 잡았다. 축제는 끝났지만 낙화놀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다. 두문마을에서 오는 8월 1~2일 낙화놀이를 벌인다. 규모는 작아도, 한여름밤의 정취로 보자면 남대천 낙화놀이에 전혀 뒤질 게 없다. 마을 홈페이지는 ‘불꽃이춤추는마을.kr’이다. 기상 상황이 낙화놀이의 가장 큰 변수이니만큼, 방문에 앞서 일기예보를 꼼꼼히 살피는 게 좋겠다. 낙화놀이 체험, 목공예 체험 등 다양한 농촌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천연기념물 반딧불이들의 ‘혼인 비행’ 도 장관 낙화놀이가 사람이 만든 작품이라면 반딧불이의 비행은 자연이 그린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관찰되는 반딧불이는 운문산반딧불이와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등이다. 나라 안에서 청정 지역으로 소문난 무주에서조차 반딧불이가 귀해 녀석들의 서식지를 천연기념물(제322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무주에선 3개종을 모두 관찰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운문산반딧불이가 가장 먼저 나오고, 뒤이어 애반딧불이와 늦반딧불이가 밤하늘을 수놓는다. 반딧불이는 종에 따라 발광신호가 다르다. 운문산반딧불이와 애반딧불이는 점멸광, 늦반딧불이는 지속광이다. 다만 애반딧불이의 경우 빛의 밝기가 현저히 낮고, 활동 반경도 다른 종에 견줘 상대적으로 작다. 따라서 반딧불이를 보았다면 열에 여덟아홉은 운문산반딧불이일 가능성이 높다. 빛의 형태가 무엇이건, 빛을 내는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짝짓기를 앞둔 혼인비행이다. 반딧불이 암수는 빛으로 유혹의 춤사위를 펼치며 서로를 찾아간다. 그러니 반딧불이의 비행을 본다는 건 녀석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것과 다름없다. 반딧불이 출몰 시기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 운문산반딧불이의 경우 무주에선 보통 5월 하순경에 관측됐다. 하지만 올해 5월을 달군 기상이변으로 반딧불이 출몰시기가 당겨졌다. 현재 무주에서 운문산반딧불이의 집단비행과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애반딧불이와 늦반딧불이를 관찰하는 것으로 목적을 변경하는 게 좋다. 세 종의 반딧불이 가운데 가장 늦게 등장하는 늦반딧불이는 해가 진 뒤 1시간가량 빛을 내며 날아다닌다. 기상여건에 따라 변화가 심해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예년의 경우 8월 초순부터 하순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다만 올해 운문산반딧불이가 1주일 이상 일찍 관찰됐듯, 늦반딧불이 또한 다소 일찍 혼인비행을 시작할 수도 있다. 무주군에선 토요일인 8월 23·30일 오후 7시 30분 ‘늦반딧불이 신비 탐사’를 떠난다. 참가 신청은 반딧불이 축제 홈페이지(www.firefly.or.kr)에서 받는다. ●무주 읍내 등나무운동장에서는 ‘산골영화제’ 무주 읍내의 등나무운동장은 꼭 한 번 가볼 만하다. 무주 군민들이 나라 안 운동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운동장으로 꼽는다는 곳이다. 무엇보다 운동장 조성 경위가 인상적이다. 오래전 주민체육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더운 날이었는데, 하필 ‘본부석’에만 차양막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관중석에 앉아 쏟아지는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아야 했던 주민들에게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주민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를 안 군수가 관중석에도 등나무 그늘을 만들자는 의견을 냈고, 그 작업을 ‘감응의 건축가’라고 불리는 고 정기용(1945~2011)에게 맡겼다. 당시 무주에서 인간미 물씬 풍기는 건축물을 여럿 설계했던 정기용은 생전 자신이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꼽을 건축물을 이 운동장에 세운다. 그게 바로 등나무 스탠드다. 정기용은 등나무와 비슷한 굵기의 철봉을 엮어 관중석 전체에 지줏대를 세웠다. 줄기 뻗을 자리를 만난 등나무는 순식간에 자랐고, ‘본부석 차양막’보다 훨씬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다. 등나무 그늘에 들면 건축은 홀연히 사라지고 자연이 오롯이 주인공으로 남는다. “모더니즘 건축이 놓친 자연과 인간의 교감과 감성을 일깨워준 곳”이란 정기용의 표현 그대로다. 등나무운동장에서 산골영화제가 열린다. 올해 2회째를 맞은 새내기 행사다. 26~30일 창, 판, 락, 숲, 길 등 5개 부문으로 나뉘어 무주 일대에서 열린다. 17개국 51편의 영화가 관객을 찾는다. 등나무운동장에선 5개 부문 가운데 ‘락’ 부문 행사와 개막식이 펼쳐진다고 한다. 가족·고전 영화와 음악공연 등이 준비됐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6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무주읍 방면으로 가다 당산교차로에서 한풍루로로 갈아탄 뒤 곧장 가면 등나무 운동장이 나온다. 한풍루, 예체문화원 등이 이곳에 몰려 있다. 경관 조명이 아름다운 ‘사랑의 다리’(남대천교)는 등나무운동장에서 무주군청 쪽으로 가면 나온다. 두문마을을 먼저 보겠다면 덕유산 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낫다. 이어 19번 국도로 사전교차로까지 간 뒤 덕유산로로 갈아타고 곧장 가면 된다. 일곱 못과 일곱 폭포, 이른바 칠연칠폭(七淵七瀑)으로 유명한 칠연계곡도 지척이다. 묶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맛집 무주구천동 초입의 별미가든(322-3123)은 산채정식, 무주읍내 금강식당(322-0979)은 어죽, 무주나들목 만남의광장 반디어촌(322-1141)은 어탕국수와 다슬기 수제비로 이름난 집들이다. →잘 곳 적상면 사천리 서창마을의 ‘언제나봄날’(적상산 황토펜션)은 가재잡이와 반딧불이 투어 안내로 이름난 집. 설천면 청량리 ‘통나무펜션’(320-5665)도 깔끔하다. 일반 숙박업소는 무주읍내에 많다. 무주관광안내소 324-2114. 글 사진 무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축구 자료 4만여점 수집 이재형 축구역사문화연구소장

    [김문이 만난사람] 축구 자료 4만여점 수집 이재형 축구역사문화연구소장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2002년 월드컵 승리를 기원하며 ‘붉은 악마’라는 시를 지었다. ‘붉은 악마들의/끓는 피 슛! 슛! 슛 볼이/적의 문을 부수는/저 아우성! 미쳤다. 미쳤다/다들 미쳤다 미치지 않은 사람은/정말 미친 사람이다.’ 그랬다. 2002년 6월 18일이다. 이탈리아와 16강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환상적인 헤딩골을 터뜨려 온 국민을 환각상태에 빠뜨리게 했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다면 당시 그 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2003년 어느 날이다. 한 TV방송에서 월드컵 1주년을 맞아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이탈리아전에서 주심을 맡았던 에콰도르의 바이런 모레노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당시 모레노 주심은 거친 플레이를 일삼는 이탈리아 공격수 토티에게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시켰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편파 판정, 홈팀 봐주기’라고 맹비난했다. 방송사는 모레노 주심을 만나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다시 물었고 모레노는 공명정대한 판정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시 안정환 선수가 넣은 골든볼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남자는 심장이 멎을 듯한 전율을 느꼈고 ‘저 공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고 다짐했다. 축구역사문화연구소 이재형(53) 소장이 바로 그 남자다. 이 소장은 그날부터 혼자서 안정환의 골든볼을 찾아오는 작전에 들어갔다. 우선 수소문 끝에 모레노의 주소지를 파악한 다음 모레노에게 줄 선물을 마련했다. 그냥 달라고 하면 선뜻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월드컵 사진집에서 가장 잘 나온 모레노의 사진을 골라 서울시내의 한 동판 제작사를 찾았다. 되도록 최고급으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마침 제작사 사장이 축구를 좋아했던지라 이 소장의 뜻을 전해듣고 원래 가격보다 좀 싸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동판이 완성되자 이 소장은 동판 제작과정을 촬영한 연속사진과 월드컵 기념 히딩크 넥타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사진집, 월드컵 기념 공 등 네 가지 선물을 꾸린 보따리를 들고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로 날아갔다. 이때가 2004년 2월 3일이었다. ‘키토 0203 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름대로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다짐에서 작전명을 세웠던 것이다. 지난 13일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이 소장을 만나 당시 내용을 들었다. “모레노의 집에 도착했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틀 전 업무차 미국 마이애미로 떠나 20여일 후에나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허탕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더군요. 고민 끝에 현지에서 봉제업을 하는 교포에게 부탁했습니다. 모레노가 오는 즉시 ‘골든볼을 꼭 기증해 달라’는 간곡한 내용의 편지와 함께 선물을 맡기고 귀국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한국에 돌아와 연락을 애타게 기다린 지 20여일 지나자 골든볼을 기꺼이 기증하겠다는 대답을 듣게 됐고 며칠 뒤 공무차 귀국하는 주에콰도르 대사관 직원을 통해 인천공항에서 전달받았다. 또한 모레노가 보낸 보따리에는 골든볼뿐만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 선수 토티를 퇴장시킨 레드카드와 자신이 입었던 주심 유니폼, ‘대한민국 국민이 이 볼을 보면서 월드컵의 감격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이재형 소장에게 영구히 기증한다’는 내용의 서신까지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일월드컵 16강에서 터뜨린 안정환의 골든볼은 현재 수원월드컵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에는 스페인전에서 패널티킥으로 4강 신화를 쏘아 올린 ‘홍명보의 볼’이었다. 월드컵조직위원회, 대한축구협회 등에 수소문했으나 어느 누구도 공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여러 자료를 뒤진 끝에 ‘2002 FIFA 공식보고서’를 통해 한국과 스페인전 주심이 이집트의 가말 알 간두르라는 사실과 이집트축구협회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즉시 간두르에게 이집트에 갈 일이 있을 때 꼭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고 그렇게 해도 좋다는 답신을 받았다. 이 소장은 2006년 8월 3일 작전명을 ‘0803’이라고 정하고 카이로행 비행기에 올랐다. 3일 뒤 마침내 가이드와 함께 간두르의 집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한·일월드컵 당시의 상황이 화제가 됐다. 모호한 판정으로 스페인 축구팬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던 일, 그래서 학교 다니는 딸에게 1년간 경호원을 붙였던 일 등을 털어놨다. 이어 간두르는 4강볼을 보여주었다. 볼에는 당시 4강 신화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여러 사인들이 있었다. 주심과 부심, 감독관 등의 친필 사인이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간두르는 심판들에게 “현역 심판복을 벗는 마지막 월드컵 무대에서 4강을 결정지은 공을 보관하고 싶다”고 말해 각자 공에 사인을 해주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그러나 간두르는 기증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이 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설득했다. 4강볼이 이집트에 있으면 한 개인의 영광이겠지만 한국에 가면 한 나라의 영광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때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계속 얘기를 했습니다. 4강볼은 한국축구 100년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증거자료로 빛을 발할 것이며 박물관에 영원히 보관하면서 가말 알 간두르란 이름으로 명패를 새겨 공과 함께 당신의 명예가 영구히 보존되도록 할 것이라고 몇번이고 말을 했지요. 언제든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도록 초청하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러자 간두르는 마음이 흔들렸던지 잠시 가족회의를 열고 나서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공을 바친다’는 편지와 함께 4강볼을 건네줬지요.” 이 소장의 끈질긴 설득과 축구 열정에 감동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됐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틀 후 대사관에서 공식 전달식이 열렸다. 간두르가 대사에게 기증하고 이 소장이 공을 전달받는 형식을 거친 뒤 귀국했다. 이러한 사실은 곧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일부에서는 ‘홍명보의 4강볼’이 경매시장에 내놓으면 22억원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 소장은 간두르와의 약속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이처럼 한국 축구의 보물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지만, 그가 세계 40여개국을 다니면서 꾸준히 모은 축구자료는 통틀어 모두 4만여점에 이른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온통 축구자료로 가득하다. 한국축구 100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각종 사진자료, 1954년 월드컵 때부터 입었던 유니폼 등을 비롯해 축구대회 포스터, 축구화, 축구공, 국내외 축구스타 사진, 엠블렘 등 말 그대로 축구에 관한 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모은 것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펠레가 무명시절에 찼던 축구공이다. 가죽 조각을 일일이 이어붙인 다갈색의 수제품으로 펠레의 친필사인과 브라질축구협회의 인증서도 있다. 2003년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골동품 경매장에서 경매물건으로 나왔다는 지인의 연락을 받고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직접 구입했다. 펠레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귀한 공을 수집한 후 펠레 관련용품만 100여점을 모았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때 입고 출전한 등번호 10번의 유니폼, 펠레 관련 서적들, 펠레 모형의 인형, 기념우표, 초상화 등이 대표적이다. 펠레와 함께 세계축구사에서 전설로 통하는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우의 공도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경매장에서 입수한 뒤 2004년 리스본에서 에우제비우를 만나 직접 사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가 축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하면서였다. 계속 축구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에 축구부가 없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축구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축구선수가 되지 못하자 보상심리가 발동돼 축구관련 자료수집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서울 돈암동의 한 은행에서 받은 축구공 모양의 플라스틱 저금통이 최초의 수집품이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축구장을 찾았고 여러 자료들을 모아나갔다. 대학에서 금속학을 전공한 그는 국내외 축구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월간축구’(현 베스트일레븐)라는 축구잡지 기자를 지원했다. 이때부터 경기를 관람하고 좋아하는 축구선수들과 만나는 것이 일이자 취미가 됐다. 그렇게 바삐 지내다 보니 아직 결혼을 못했다. 그는 자료수집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어김없이 축구장에 나가 직접 선수로 뛴다. 이때마다 공격수로 평균 두세 골씩 넣곤 했는데 축구황제 펠레의 통산 1300골보다 더 많은 4000골을 넣었다며 웃는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축구복합문화센터, 축구박물관을 짓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인터뷰를 마친 이틀 후 그는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브라질로 향했다. 어떤 귀중한 자료를 수집해올지 궁금해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재형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동기계공고와 인하대 금속학과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축구선수였으며 중학교 때부터 축구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2004년 3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안정환의 골든볼’을 에콰도르에서 찾아냈다. 2006년 8월에는 한·일월드컵 때 4강 신화를 쏘아 올린 ‘홍명보의 4강볼’을 이집트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지금까지 40여개국을 다니면서 귀중한 축구 관련 자료 4만여점을 모았다. 그동안 소장전을 몇 차례 가졌다. 현재 축구자료 수집가로 활동하면서 축구역사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축구잡지 ‘베스트일레븐’ 이사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22억짜리 축구공’이 있다.
  • [사이버대 특집] 원광디지털대, 웰빙·한국문화·실용복지 특성화

    원광디지털대(wdu.ac.kr, 총장 성시종)는 오는 27일까지 2014학년도 2학기 신·편입생 795명(정원 외 포함 1810명)을 모집한다. 모집 학과는 웰빙건강학부(한방건강학과, 한방미용예술학과, 요가명상학과), 한국문화학부(전통공연예술학과, 한국복식과학학과, 차문화경영학과, 한국어문화학과, 동양학과, 원불교학과), 실용복지학부(사회복지학과, 언어치료학과, 중독재활복지학과, 경찰학과, 부동산학과, 얼굴경영학과) 등 3개 학부 15개 학과다. 고등학교 졸업자 또는 졸업 예정자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일반전형, 학사편입학전형, 산업체위탁생전형 등 자신에게 적합한 전형을 선택해 지원하면 된다. 전형 관련 서류는 27일까지 제출해야 한다. 합격자 발표는 다음달 3일이다. 미달하면 다음달 10일부터 8월 13일까지 2차 모집을 진행한다. 웰빙, 한국문화, 실용복지 분야에서 특성화된 교육 과정이 강점인 원광디지털대는 지난해 교육부의 ‘선취업-후진학 특성화 대학’에 선정됐으며 지난해 교육부와 한국원격대학협의회의가 진행한 사이버대 역량평가에서 전체 영역 ‘최고’ 등급을 받았다. 서울,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익산에 지역 캠퍼스에서 오프라인 특강이 열리며 동아리 모임, 학생 활동도 학교가 적극 지원한다. 김효철 입학협력처장은 “한국 문화와 웰빙에 대한 관심은 세계적인 트렌드로 해당 분야 인재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에게 든든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nter.wdu.ac.kr,1588-2854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사이버대 특집] 서울사이버대학교, 1년 4학기제… 3년 만에 졸업 가능

    서울사이버대(iscu.ac.kr, 총장 강인)는 다음달 8일까지 2014학년도 하반기 신·편입생 1800명(정원 내)을 모집한다. 모집학과는 사회복지학부(사회복지 전공, 복지시설경영 전공, 아동복지 전공, 청소년복지 전공, 노인복지 전공), 심리·상담학부(상담심리학과, 가족상담학과, 군경상담학과), 사회과학부(부동산학과, 법무행정학과, 보건행정학과), 경상학부(경영학과, 국제무역물류학과, 금융보험학과), IT·디자인학부(컴퓨터정보통신학과, 멀티미디어디자인학과, 뉴미디어콘텐츠공학과), 문화예술학부(문화예술경영학과) 등 6개 학부 18개 학과(전공)다. 신입학은 고졸학력 이상이면 고교 내신이나 수능성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2학년 편입학, 3학년 편입학은 학년별 학력 자격만 충족하면 된다. 서울사이버대는 국내 사이버대 최초로 1년 4학기제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봄·가을학기 중 6주를 여름·겨울 학기로 운영해 연간 42주 수업을 한다. 신입생은 3년 만에, 3학년 편입생은 1년 6개월에 조기졸업이 가능하다. 학생 개인의 일정에 꼭 맞는 ‘맞춤형 학기 이수제도’ 등 서비스도 제공한다. 일반전형을 비롯해 산업체위탁생전형, 군위탁생전형, 학사편입전형, 장애인전형 등 다양한 전형이 있으며 전형료는 무료다. 16일까지는 휴먼서비스대학원 사회복지 석사과정 신입생 30명도 모집한다. 학사학위 취득(예정)자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이 인정된 자라면 전공과 관계없이 지원할 수 있다. apply.iscu.ac.kr, (02)944-5000.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왕권의 존엄성을 성곽에 세우다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서인 ‘택리지’를 지은 청화산인 이중환은 한양도성을 보고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라고 평가했다. 한양도성은 한양을 둘러싼 백악~낙타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흐른다. 성곽은 암벽을 만나면 멈춘다. 자연이 인공을 대리하는 절묘한 경관이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내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잊게 된다. 평지에 세워진 성곽이 안팎을 차단하는 데 반해 한양도성 성곽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다. 성곽이 산수(山水)와 한 몸을 이루는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경관이다.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중국식 성과는 뚜렷하게 다른 조선만의 것이다. 조선 개국의 기획자이자 서울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한양팔경’에서 “성은 높아 철옹인데 천 길이요/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해마다 상원(上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해마다 서울사람들 놀며 즐기네”라고 도성의 풍광을 맘껏 읊었다. 성종 때 온 명나라 사신 동월은 ‘조선부’에서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했고/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로 덮였다/산들이 성벽을 둘러싸며 훨훨 나는 봉황이 환히 빛나고/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흰 눈이 갓 갠 듯하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양도성 성곽은 도성 출입자를 통제하거나, 침입자를 막는 단순 용도에 머물지 않았다. 성 밖을 파서 연못으로 만든 해자(垓子)가 없다는 것은 방어개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도성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드나드는 8개의 크고 작은 문 중 숭례문 밖 남지(南池), 흥인지문 밖 동지(연지), 돈의문 밖 서지(반송지)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은 물의 부족과 화기를 막으려는 풍수기법이었다. 성문은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 종루에서 울리는 인경(밤 10시)과 파루(새벽 4시)의 종소리에 맞춰 열고 닫았다. 성문의 개폐가 곧 통행금지와 해제를 뜻했다. 한양도성 내 일상생활의 시작과 끝이 한양도성 성곽에서 비롯되고 맺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으로 무너진 도성 성곽을 숙종이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지어 허술한 방어체계를 보완한 숙종의 속마음이 ‘비변사등록’에 드러나 있다. 숙종은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조선 왕들은 도성 축조에 매달렸을까 그렇다면 조선의 역대 왕들이 그토록 한양도성 성곽의 축조와 개·보수에 매달린 까닭은 무엇일까.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통치질서를 확인하고, 외적 방어와 내부 적대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국력을 표현하면서, 왕권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이다. 무릇 성(城)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관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 성곽은 조선 태조가 18㎞의 울타리를 처음 정한 이후 역대 왕이 개·보수를 거듭한 육백 년의 역사 층위가 오롯이 살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렇듯 큰 수도성곽이 유지돼 남은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기록, 성벽에 새겨진 축조 당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등 네 임금이 주로 쌓았는데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석축기법이 성곽에 남아 있다. 개국조 이성계는 내사산을 따라 도읍의 윤곽을 정한 자리에 성을 쌓았다. 고구려 때부터 전해 오던 산성 축조기법을 주로 썼고 성곽의 3분의2는 흙으로 쌓았다. 이성계는 석재를 구하려고 문무 양반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돌을 바치도록 독려했으나 쉽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한 세종은 흙 성을 메주 크기의 돌로 바꿨다. 현재의 한양도성 성곽을 사실상 재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성은 무용지물이었다. 선조는 싸울 의지도, 겨를도 없이 몽진 길에 올랐다.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가 흥인지문 옹성의 위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가 60일을 끈 것을 참작하면 조선관군이 한양도성에서 버텼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40여년 후 병자호란에 휘말렸다. 청은 항복 조건에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45일간 결사항전하자 함락에 실패한 분풀이였다. 이후 축성 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조선 국왕들은 청의 감시를 틈타 도성과 산성의 개·보수를 암암리에 진행했다. 숙종과 순조 때는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장정 4명이 들 정도의 크고 반듯반듯한 돌을 사용하는 등 성석(城石)의 대형화와 규격화를 꾀했다. 조선왕들은 태조에게서 성곽 쌓기라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성곽 돌에 새겨진 이름과 지명 등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는데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에 따르면 2013년12월 현재 한양도성에는 모두 252개의 각자성석이 존재한다. 각자성석에 나타난 시대를 분석한 결과 14명의 임금 이름이 등장하는데 확인이 불가능한 44개(17%)는 제외됐다. 이 중 세종 때 것이 113개로 44%를 차지했고 순조 40개(15%), 태조 23개(9%). 숙종이 19개(7%)의 순서였다. 그래서 어느 임금 때, 어느 지역에서 동원된 인력이 성곽을 쌓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태조 대의 토성은 남산 일대에 일부 남아 있고 세종대에 쌓은 돌 성이 현재 남아 있는 성곽 12km 중 메주돌 부분이다. 이성계는 1, 2차에 걸쳐 98일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4대문(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돈의문)과 4소문(소의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의 이름을 지었다. 토성이 칠할, 석성이 삼할을 차지했다. 토성이 장마에 무너지자 세종은 4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견고한 돌 성으로 개축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호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672만명이었고 도성 인구는 10만명이었다. 일부 신하들을 중심으로 인력동원의 문제와 석재난 등을 들어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무악재~남산 부분만 돌로 쌓자고 건의했으나 상왕인 태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이 빗발치자 10만명을 줄여 32만 2400명의 동원을 결정했다. 석공 등 장인 2211명은 별도였다. 태조 때 봄·가을 2차례에 걸쳐 19만 7000명을, 고려 현종 때 개경 나성 축조에 23만명을 동원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역사였다. 도성 인구의 3배를 넘는 인력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세종은 엄격했다. 병력을 늦게 보낸 경상도 관찰사에게 죄를 묻고, 수령은 봉고파직시켰다. 태종과 세종은 수시로 술을 내려 격려했다. 공사는 38일 만에 끝났지만 87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도성에 쌀이 동나고 전염병이 돌아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조선 최대 역사(役事)가 최고 역사(歷史)로 남다 한양도성 축조는 막무가내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역사정과 인구에 따라 인력과 담당구역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부역은 고달프지만 불평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안배됐다. 태조 1차 축조 때 동원된 인력은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의 함주(함흥)이남,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11만 8049여 명이 동원됐다. 청천강 이북과 함경도 국경지역은 국방상의 이유로 제외했다. 황해도, 경기, 충청도 등 도성 가까운 지역 인력은 차후 보완 및 보수를 위한 예비인력으로 남겼다. 농번기를 피했고 도성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서로 겹치지 않게 했다. 성터 전체가 영조척(營造尺·약 30㎝)으로 5만 9500자이므로 백악에서 시계방향으로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이다. 97개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조상 조(吊)까지 차례로 순서를 정하고 담당 구간을 균등 배분했다. 예를 들면 동북면 함주 이남에서 동원된 1만 953명은 백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 일(日)까지 9개 구간이며 맡은 길이는 5400자였다. 4만 9897명으로 팔도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경상도는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41개 구간을 맡았다. 어느 구간을 맡든 1인당 평균은 0.493자로 같았다. ●조선의 국혼 깃든 도성 축조… 항일의병 촉발 원동력 공사의 감독체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총감독으로부터 아래로 점차 구역별 책임자가 늘어나는 피라미드식 그림이 나온다. 하나의 자호(字號) 구간은 600자 구간을 다시 6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 100자(약 30m)를 가장 작은 구역 단위로 삼았다.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이라는 감독관을 두었다. 성곽을 담당한 지역의 이름과 감독자,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겨 무너지거나 부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었다. 요즘 서울시내 보도블록에 시공자의 이름을 새기는 ‘공사 실명제’가 이때 이미 실행된 셈이다. 도성 축조의 대역사는 신생국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팔도에서 몰려든 장정들은 한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타지방의 정보를 얻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이웃 고을과 먼 고을을 보고 물산을 터득했다. 도성 축조는 단순한 부역동원이라기보다 당시 백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힌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무학대사의 이야기와 세종과 한양의 풍광에 대한 얘깃거리가 방방곡곡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조선 초 한양도성 성곽 축조로 말미암아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때 처음 본 한양에 대한 인상이 내 자식은 한양으로 벼슬살이를 보내겠다는 서울중심주의를 형성했을 것이다. 한양도성과 성곽의 축조는 ‘역사’(役事)가 아니라 ‘역사’(歷史)가 되었다. 조선이 오백 년이라는 긴 수명을 유지한 원천이 됐다. 내 손으로 지은 도성의 위용을 경험한 백성의 마음속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혼이 깃들었다. 이것이 의병과 위정척사, 항일의병을 촉발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선임 기자 joo@seoul.co.kr
  • [씨줄날줄] 위안부 할머니의 유고/문소영 논설위원

    “내가 두 눈 감기 전에 한을 풀어달라.” 광복절을 하루 앞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세계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용기를 내 공개하면서 이렇게 절규했다. 광복 46년 만의 폭로였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받지 못한 채 김 할머니는 1997년 사망했다. 김 할머니의 ‘한을 풀어달라’는 소망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지 23년이 지났지만 한·일 간의 공방에는 변화한 것이 거의 없다. 1993년 고노 관방장관 담화로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시인하고 책임지겠다는 의사를 밝혀 획기적인 돌파구가 기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는 ‘도의적 책임’에 대한 사과였다. ‘민간업자가 한 일로 정부가 직접 개입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에는 근본적 변화가 없었다. 그 때문에 국가배상이 아닌 ‘아시아 여성 기금’을 통한 보상·위로금을 제시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더 나아가 최근 아베 정부는 “고노 담화를 검증하겠다”고 해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끝까지 일본 정부와 맞설 수 있지만 ‘살아있는 증거’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초기 등록한 237명 중 이제 한국인 생존자는 54명에 불과하고 모두 고령이다. 그제 또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배춘희 할머니가 9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쳤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 할머니는 19세에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 친구네 집에서 ‘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벌 수 있다고 오해해 자원했다가 꽃다운 나이에 생지옥을 만난 것이다. 배 할머니는 1997년부터 피해 할머니들이 함께 거주하던 ‘나눔의 집’에서 가수로 통할 정도로 노래도 잘하는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서 배 할머니는 생전에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경기 김포 중앙승가대학에 장학금 3000만원을 기증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한국인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인 일본이 네덜란드와 중국,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여성도 피해자로 만든 국제적 인권유린의 사례다. 국제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시(戰時) 여성 인권 유린의 문제로 정의하고 일본 정부에 범죄에 대한 인정과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역사 교육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내놓은 이유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한을 풀어주는 것은 한·일 간 증오의 고리를 푸는 것이다. 광복 69주년을 맞는 올해 1992년 이래 매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가 더 필요없는 획기적인 대책이 나오길 희망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김흥수 화백 별세 “95세에도 붓 놓지 않은 근현대미술의 거목 지다”

    김흥수 화백 별세 “95세에도 붓 놓지 않은 근현대미술의 거목 지다”

    김흥수 화백 별세 “95세에도 붓 놓지 않은 근현대미술의 거목 지다” ”화단의 큰 별이 가셨다.” 9일 오전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한 김흥수 화백은 95세의 나이에도 붓을 놓지 않고 열정적으로 작업해 온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목이었다. ”지금에야 머리가 맑아졌고 미술을 알 것 같은데 90대 노인이 돼 버려서 생각대로 못 하는 게 화가 난다”고 말할 정도로 눈을 감기 전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였다. 한국과 일본, 프랑스, 미국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해 온 고인은 오랜 실험 끝에 1977년 구상과 추상을 한 화면에 담는 조형주의(하모니즘)를 선언해 국내 화단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려 완전을 이룩하듯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두 작품세계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용해된 조화를 이룩할 때 조형의 영역을 넘는 오묘한 조형의 예술세계를 전개하게 된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진실인 것이다. 극에 이른 추상의 우연의 요소들이 사실 표현의 필연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은 더욱 넓고 깊은 예술의 창조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조형주의 예술의 선언’ 중에서) 구상과 추상의 화면을 병치해 독특한 조형주의를 선보인 고인은 1990년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미술관, 1993년 러시아 모스크바 푸슈킨미술관, 생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박물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어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부인 고 장수현(1962∼2012) 김흥수미술관장과 사제지간으로 만나 43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1992년 부부의 연을 맺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장 관장은 201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0여 년간 남편에 헌신하느라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못한 부인이 안쓰러웠던 김 화백은 작년 10월 연희동 CSP111 아트스페이스에서 장 관장 1주기 추모전 ‘故 장수현, 김흥수 예술의 영원한 동반자’를 열고 부인의 유작 30여 점을 선보였다. 2002년 10월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척추수술을 이겨내고 작업에 몰두하며 개인전을 열기도 했던 그였지만 ‘예술적 동반자’인 부인이 세상을 뜬 뒤로 눈에 띄게 기력이 약해졌다는 것이 미술계 인사들의 얘기다. 그럼에도 김 화백은 작년 부인의 유작전에서 “하모니즘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었는데 국내에서 너무 몰라줘서 잘 안 됐다”며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재기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작업해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고인은 지난 1월 관훈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찾은 자리에서도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로 1시간반 동안 전시장을 돌면서 작품을 한점 한점 감상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는 90년대 말 예술의전당에서 영재미술교실을 여는 등 어린이 미술교육에도 애착이 강했다. 2002년 평창동에 지상 2층 지하 2층 규모로 김흥수미술관을 건립하고 작품 상설전과 함께 어린이영재미술교실을 운영할 정도였다. 한동안 허리 통증으로 휠체어와 지팡이 신세를 질 때도 매주 꼬박꼬박 미술교육을 했다고 한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는 “어린 아이들의 미술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해 몸이 아파도 미술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며 “어렸을 때 학원 주입식이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끄집어내서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김 화백의 별세 소식에 미술계는 슬픔에 잠겼다. 이 대표는 “최근에 함께 식사를 하며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는데 그 뒤로 더 못 뵌 게 아쉽다”고 말했다. 손성례 청작화랑 대표는 “정도대로 하려 하고 사람에 대한 배려가 좋은 분이었다”며 “생전에 좋은 곳에서 전시를 열어드리지 못한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70년 가슴 속 恨 그대로 안고…

    70년 가슴 속 恨 그대로 안고…

    “봉숭아꽃 꽃잎 따서 손톱 곱게 물들이던 내 어릴 적 열두 살 그 꿈은 어디 갔나. 내 어릴 적 열세 살 내 청춘은 어디 갔나. 내 나라 빼앗기고 이내 몸도 빼앗겼네. 타국 만 리 끌려가 밤낮없이 짓밟혔네. 오늘도 아리랑 눈물 쏟는 아리랑. 내 꿈을 돌려다오 내 청춘 돌려주오.” 8일 경기 성남시 분당차병원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91) 할머니의 빈소. 생전에 ‘소녀 아리랑’을 즐겨 부르던 배 할머니는 이날 오전 5시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노환으로 한 많은 세상과 작별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생존자는 54명으로 줄었다. 친·인척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온 배 할머니의 삶만큼이나 빈소는 쓸쓸했다. 수수한 미소를 머금은 영정 사진 아래에는 2000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그림을 수록한 화집 ‘못다 핀 꽃’의 ‘고향 생각’이 펼쳐져 있었다. 배 할머니가 직접 그린 그림에는 앳된 처녀가 드넓은 강줄기를 뒤로한 채 커다란 나무 밑에 수줍게 서 있었다. 꽃다운 열아홉 살, 단짝 봉순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일자리를 구한 줄로만 알고 만주로 끌려갔던 배 할머니의 자화상이다. 배 할머니는 일본군의 ‘성노예’로 모진 세월을 견뎌 낸 뒤 차마 고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엔카’(메이지 유신 때부터 유행한 일본 대중가요) 아마추어 가수로 활동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1996년 뒤늦게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빈소를 지키던 김정숙 나눔의 집 사무장은 “1998년 홍익대 미대 학생들이 나눔의 집에 찾아와 할머니들에게 그림 심리 치료를 해 줘 남겨진 그림”이라며 “평생 딱 두 점을 그렸는데, 한 점이 ‘고향 생각’이고 다른 한 점은 위안부 시절 생활을 그린 ‘중국에서’”라고 설명했다. 이어 “할머니가 평소 말수는 적었지만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릴 때 가슴에 쌓인 한이 풀린다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에 능통해 외국에서 온 봉사자들을 맞이하는 것은 언제나 배 할머니 몫이었다. 나눔의 집 내 두 번째 연장자였던 배 할머니는 지난해 9월 건강이 악화된 뒤로 ‘자면서 편히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배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 급여(월 90만원)와 광주시 지원금(월 60만원) 등을 아껴 쓰며 모은 3000만원을 2012년 경기 김포시에 있는 불교계 사립대학인 중앙승가대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나눔의 집 3층에 있는 법당에 800만원 상당의 부처님 탱화를 기부했다. 김 사무장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날 오후 빈소를 찾은 이옥선(87) 할머니는 “먼저 간 할머니들은 다 한을 안고 간다”며 “한 분이라도 덜 돌아가셨을 때 위안부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김희리 기자 heeree916@seoul.co.kr
  • 서울사이버대학, 2014년도 하반기 신편입생 모집

    서울사이버대학, 2014년도 하반기 신편입생 모집

    서울사이버대학교(www.iscu.ac.kr, 총장 강인)가 6월 2일부터 7월 8일까지 2014학년도 하반기 신∙편입생을 모집한다. 모집인원은 신입생, 편입생 등 총 1,800명(정원내 기준)으로 신입학은 고졸학력 이상이면 고교 내신이나 수능성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지원 가능하고, 2학년 편입학, 3학년 편입학은 학년별 학력 자격만 충족하면 지원할 수 있다. 모집학과는 ▲ 사회복지학부(사회복지 전공, 복지시설경영 전공, 아동복지 전공, 청소년복지 전공, 노인복지 전공) ▲ 심리∙상담학부(상담심리학과, 가족상담학과, 군경상담학과) ▲ 사회과학부(부동산학과, 법무행정학과, 보건행정학과) ▲ 경상학부(경영학과, 국제무역물류학과, 금융보험학과) ▲ IT디자인학부(컴퓨터정보통신학과, 멀티미디어디자인학과, 뉴미디어콘텐츠공학과) ▲ 문화예술학부(문화예술경영학과)등 총 6개 학부 18개 학과(전공)이다. 지원서는 입학홈페이지를 통해 작성 가능하며, 별도의 입학 전형료 없이 무료로 지원할 수 있다. 이번 모집에서는 다양한 특기와 적성의 학생을 선발하기 위하여 정원 내 일반전형의 장학범위를 폭넓게 확대했다. 그 외에도 일반전형부터 산업체위탁생전형, 군위탁생전형, 학사편입전형, 장애인전형 등 다양한 전형이 마련되어 있으며, 입학홈페이지에서 나에게 맞는 적합한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사이버대학 중 가장 많은 장학금(교외장학 포함 연간 75억원, 2013년 정보공시 기준/재학생 장학금 수혜율 66.4%, 2013년 기준)을 지급하는 서울사이버대학은 사회배려대상자 등에게 학비부담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전형도 마련했다. 교육기회균등전형, 장애인전형, 지역인재개발전형, 북한이탈주민전형 등을 통해 정원 외 전형 지원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평가는 학업계획서 60%, 학업준비도검사(적성검사) 40%를 반영하여 진행하며, 학업계획서는 학과 및 학교 지원동기와 입학 후 학업 및 진로계획에 대해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학업준비도검사는 학습방식부문과 학업잠재력영역으로 나누어 평가하며, 수리와 탐구, 사고력, 대학교 수학능력 등을 평가하게 된다 서울사이버대는 사이버대 최초로 1년 4학기제를 도입, 1년 2학기라는 기존 학사운영방식에서 벗어나 하계∙동계 방학동안 6주의 집중학기를 더해 연간 총 42주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의 졸업 계획에 따라 맞춤형 학기를 설계하고 이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각자의 목표에 따라 신입생의 경우 짧게는 3년, 편입생의 경우 1.5년 만에 졸업이 가능해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직장인 학생들에게 만족도가 높다. 서울사이버대학교 강인 총장은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니즈를 반영한 학생중심의 서비스로 온·오프라인에서 최적화된 학습 환경을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다.” 며 “교육 콘텐츠 향상은 물론, 사이버대 최초 1년 4학기제 시행, 다양한 입학전형제도 확대, 높은 장학금 수혜율 등 차별화 된 학사 운영을 통해 입학부터 졸업까지 학생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이번 하반기 입시에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사이버대는 오는 6월 16일까지 2014학년도 하반기 대학원 신입생을 모집한다. 모집부분은 휴먼서비스대학원 사회복지 석사과정 신입생 30명(정원 외 13명)으로 학사학위 취득(예정)자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이 인정된 자라면 전공에 관계없이 지원이 가능하다. 입학관련 자세한 사항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입학지원센터(http://apply.iscu.ac.kr) 및 전화(02-944-5000)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차대전 승리주역 ‘나바호족 암호병’ 최후 생존자 별세

    2차대전 승리주역 ‘나바호족 암호병’ 최후 생존자 별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암호통신병으로 참전한 ‘나바호 코드토커’였던 체스터 네즈가 뉴멕시코 앨버커키 자택에서 향년 93세로 별세했다고 CNN 등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 체스터 네즈는 미 해병대가 1942년에 처음 암호화 개발을 목적으로 채용한 나바호족 29명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암호용 언어로 나바호어가 선택된 이유는 구문이나 발음이 나바호족 이외의 사람들은 거의 습득할 수 없는 문자였기 때문. 따라서 종전 시에는 나바호 코드토커의 수는 300명을 넘어섰다. 체스터 네즈는 생전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암호를 개발할 때 평상시에도 나바호어를 쓰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 면이 기억하고 유지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과달카날과 괌, 페리류 섬에서 벌어진 전투에 파견돼 암호통신병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와 같은 나바호 코드토커들의 숨은 활약으로 미국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종전 뒤 패전국이 된 일본은 이 암호를 전혀 해독할 수 없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체스터 네즈는 1945년 전역했지만 이후 자원해 한국전에도 참전했다. 코드토커는 암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병대 동료는 물론 가족에게조차 말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기밀이 풀린 것은 1968년. 그를 포함한 29명은 2001년이 돼서야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코드토커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그들은 책이나 영화의 주제로도 다뤄지게 됐다. 2002년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 ‘윈드토커’도 그중 한 예다. 체스터 네즈는 “시간이 걸렸지만 코드토커의 공적은 인정받게 됐다. 나바호족에게는 좋은 일이었다”면서 “해병대는 나바호 군의 암호 방법을 배우지 않았는 데 이 자체가 우리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었다”고 생전에 말했다. 사진=CNN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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