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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준희, 결혼 앞두고 ‘돌잔치 영상’ 공개…故 최진실 “시집갈 때 꼭 다시 초대”

    최준희, 결혼 앞두고 ‘돌잔치 영상’ 공개…故 최진실 “시집갈 때 꼭 다시 초대”

    고(故) 최진실의 딸 최준희가 결혼식을 앞두고 어머니의 생전 모습이 담긴 과거 영상을 공개했다. 20여 년 전 돌잔치 현장에서 딸의 미래를 축복하던 어머니의 약속이 담긴 영상은 대중의 마음을 먹먹하게 하고 있다. 최준희는 지난 1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할머니가 여태 간직하고 계시던 제 돌잔치 비디오를 복구해봤다”는 글과 함께 짧은 영상을 게시했다. 해당 영상에는 생전의 최진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린 최준희를 품에 안고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모습이 담겼다. 영상 속 최진실은 “우리 수민이(최준희)가 앞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예쁜 숙녀로 자랄 때까지 오늘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 수민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며 딸을 향한 사랑을 드러냈다. 그는 “나중에 오신 분들 한 분 한 분 제가 다 기억해뒀다가 우리 수민이 시집갈 때 꼭 다시 초대할 거니까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라고 전했다. 딸의 결혼식에 하객들을 다시 초대하겠다던 어머니의 생전 약속이 현실이 된 시점에서 공개된 이 영상은 보는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더했다. 최준희는 “정말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이 이제 제 결혼식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뭉클했다”며 “한편으로는 그 모든 자리에 엄마, 아빠만 없다는 사실이 제일 슬프다”고 세상을 떠난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결혼을 준비할수록 여러 감정이 새록새록 올라온다”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그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각종 루머와 억측에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시사하며 “제가 어떤 사랑 속에서 자랐는지 담겨 있는 이 영상 하나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또한 자신의 본래 이름이 ‘조수민’이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지금의 이름인 준희가 훨씬 잘 어울린다”는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다. 한편 최준희는 오는 16일 11세 연상의 비연예인 남성과 결혼식을 올린다. 2003년생인 최준희는 23세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 소식을 전했다.
  • “지옥서 불탈 것”…10세 여아 살해범의 최후, 조문객조차 없었다 [핫이슈]

    “지옥서 불탈 것”…10세 여아 살해범의 최후, 조문객조차 없었다 [핫이슈]

    영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소햄 아동 살인 사건’의 범인 이언 헌틀리가 장례식도 조문객도 없이 비밀리에 화장된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은 국가가 지원하는 장례식을 거부했고, 영국 법무부는 수감 중 사망자에게 적용되는 최소 절차만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LBC와 더선, 인디펜던트 등에 따르면 헌틀리의 시신은 뉴캐슬 로열 빅토리아 병원에서 인근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별도 장례식이나 추모 예식은 없었고 조문객도 참석하지 않았다. 한 소식통은 더선에 “장의사가 시신을 인수했다”며 “장례도 예식도 조문객도 없었다. 화장됐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밝혔다. 헌틀리의 죽음 직후 친딸 서맨사 브라이언은 영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장례식은 필요 없다. 그는 지옥에서 불탈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천국에 그가 갈 자리는 없다”며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보다 안도를 느꼈다고 밝혔다. 헌틀리는 지난 2월 26일 더럼의 최고보안 교도소 프랭클랜드 작업장에서 다른 수감자의 공격을 받았다. 금속 막대기로 머리를 맞고 중태에 빠진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지난 3월 7일 숨졌다. 사인은 둔기에 의한 머리 손상으로 조사됐다. 헌틀리를 공격한 혐의로 같은 교도소 수감자 앤서니 러셀이 기소됐다. 러셀은 살인과 성폭행 등 중범죄로 복역 중이던 인물로 알려졌다. ◆ 가족도 장례 거부…“어떻게 장례 치르나” 헌틀리 가족은 국가가 지원하는 장례식을 거부했다. 피해자 가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는 설명도 나왔다. 소식통은 “가족은 단호했다. 그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겠느냐”며 “가족의 생각은 여전히 피해자와 그 유족에게 가 있다”고 전했다. 앞서 영국에서는 헌틀리의 장례 비용을 세금으로 부담해서는 안 된다는 청원도 제기됐다.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해당 청원에는 약 6만 4000명이 서명했다. 논란이 커지자 영국 법무부는 3000파운드(약 599만원)가 실제 지출액이 아닌 정책상 한도라고 선을 그었다. 새라 새크먼 법무부 장관은 LBC에 “그는 최소한의 절차 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인디펜던트는 법무부가 헌틀리의 화장 관련 비용으로 1915파운드(약 380만원)를 지출했다고 보도했다. 비용에는 장례 서비스, 시신 이송, 화장용 관, 직원 입회·감독 등이 포함됐다. 헌틀리는 265파운드(약 52만원)짜리 친환경 관에 담겨 화장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관은 생분해성 소재로 만든 제품으로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가장 저렴한 관이었다고 영국 언론은 전했다. 더선은 유골이 친척에게 전달된 뒤 비밀 장소에 뿌려졌다고 보도했다. ◆ 영국 뒤흔든 ‘소햄 아동 살인 사건’ 헌틀리는 2002년 8월 영국 케임브리지셔 소햄에서 10세 소녀 홀리 웰스와 제시카 채프먼을 살해했다. 두 소녀는 가족 바비큐 파티 뒤 사탕을 사러 나갔다가 실종됐다. 당시 학교 관리인으로 일하던 헌틀리는 두 아이를 집으로 유인해 살해한 뒤 시신을 약 16㎞ 떨어진 도랑에 유기했다. 실종 직후 영국 전역에서는 대규모 수색이 벌어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함께 찍은 두 소녀의 사진은 매일 언론에 등장하며 사건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헌틀리는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언론 인터뷰에 나서 자신이 두 소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일 수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 가족을 위로하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뒤 영국 사회는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법원은 2003년 헌틀리에게 최소 40년형의 종신형을 선고했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맥신 카는 허위 알리바이를 제공해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고, 출소 뒤 새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헌틀리는 끝내 장례식도 조문객도 없이 화장됐다. 생전 친딸이 “지옥에서 불탈 것”이라고 했던 범인의 마지막은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끝났다.
  • “성적 매력은 이럴 때 빛난다”…메릴린 먼로 마지막 인터뷰

    “성적 매력은 이럴 때 빛난다”…메릴린 먼로 마지막 인터뷰

    메릴린 먼로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남긴 솔직한 발언이 60여년 만에 다시 공개됐다.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는 8일(현지시간) 라이프지 리처드 메리만 편집장이 1962년 메릴린 먼로와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 신간 ‘메릴린: 마지막 사진, 마지막 인터뷰’를 통해 공개된다고 보도했다. 책은 12일 출간된다.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섹스 심볼’ 이미지에 대한 먼로의 생각이었다. 그는 “제가 무언가의 상징이 된다면 다른 것보다 섹스 심볼이 되는 게 낫다”며 “성적 매력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일 때만 매력적이다. 나는 한 번도 성적인 관점을 의식하며 촬영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모두 성적인 창조물로 태어났다”며 “진정한 예술은 거기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명성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그는 인기를 “캐비어 같다”고 표현했다. 먼로는 “캐비어를 먹는 건 좋지만 매일 먹는다고 생각해보라. 너무 많지 않겠느냐”며 과도한 관심과 유명세의 부담을 토로했다. 특히 자신의 영향력을 처음 실감한 장소로 한국을 꼽아 눈길을 끌었다. 그는 “1954년 한국에 가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며 “7만 5000명이 눈밭에 있었는데 내가 나오기만 했는데도 10분 동안 이름을 외치고 휘파람을 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먼로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또 케네디 전 대통령 생일 축하 무대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면서도 “그 무대가 내 인생 마지막 무대가 되더라도 노래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가족에 대한 솔직한 고백도 남겼다. 그는 “내 아이가 내가 겪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랐다”며 “어쩌면 행복한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하는 신포도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는 1962년 8월 기사화됐고, 이틀 뒤 먼로는 3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번 책은 다음 달 1일인 먼로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그의 삶과 내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간된다.
  • [씨줄날줄] 로봇 스님

    [씨줄날줄] 로봇 스님

    불교는 석가모니 이후 2500년이 넘는 동안 혁명적 변화를 끊임없이 만들어 냈다. 부처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불상을 빚어낸 것도 그렇다. 부처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내 몸을 보지 말고 내가 깨달은 진리를 보라”고 가르쳤다. 금강경은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는 것은 그릇된 길을 행하는 것이며 여래를 볼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 석가모니 입멸 직후는 부처를 형상 대신 상징으로 표현하는 무불상 시대였다. 부처가 앉았던 방석,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수, 가르침의 전파를 의미하는 수레바퀴, 부처의 자취인 발자국을 새겼다. 그런데 인간을 닮은 불상이 1세기에 등장하자 곧 불교 문화의 핵심이 됐다. 대승불교는 조금 앞선 BC 1세기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초기 불교, 곧 소승불교는 스스로 깨달음을 찾는 종교였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핵심 이상은 ‘나 혼자의 해탈’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함께 구제하는 것이었다. 깨달은 존재인 부처와 더불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보살의 존재가 이 시기 등장한다. 이런 대승불교 사상이 석가모니의 생전 가르침에 부합하는지를 놓고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고 한다. 선불교도 인도 불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지만 본격 정립된 것은 5~6세기 중국에서였다. ‘경전 밖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한다’라거나 ‘경전의 가르침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파격적이다. 직관적 통찰을 중요시하는 선불교는 동양 사상의 도교와 닿아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서울 조계사에서 로봇 스님 수계식이 열렸다. 가비((迦悲)라는 법명을 받은 로봇 스님은 명예 스님으로 활동할 것이라고 한다. 이미 메타버스 법당, 디지털 불상, VR 명상 공간, 아바타 스님이 어색하지 않은 한국 불교다. 대중문화를 활용해 젊은 세대를 잡으려는 노력도 활발하다. 사회 변화에 적응하려는 한국 불교의 모습이 반갑다. 불교가 역사를 통해 보여 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DNA’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 세계 최초 ‘24시간 뉴스’ CNN 창립자 별세

    세계 최초 ‘24시간 뉴스’ CNN 창립자 별세

    세계 최초 24시간 뉴스 전문 채널 CNN을 세운 ‘미디어 거물’ 테드 터너가 6일(현지시간) 별세했다. 87세. CNN 등은 이날 고인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는 2018년 진행성 뇌질환 루이체 치매를 앓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1938년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24세에 아버지의 옥외광고 사업을 물려받아 미디어 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라디오 방송국들을 인수하며 방송 사업을 시작한 그는 1980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세계 최초의 24시간 뉴스 채널 CNN을 선보였다. CNN은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CNN 특파원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당시에는 생소했던 24시간 보도 채널은 큰 성공을 거뒀다. 그해 타임지는 “150개국 시청자들을 역사의 생생한 목격자로 만들었다”며 그를 ‘올해의 인물’에 선정하기도 했다. 1996년 CNN을 타임 워너에 매각하며 사업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CNN은 인생 최고의 업적”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사임 후 고인은 자선사업가로 활동했다. 유엔에 10억 달러(약 1조 4000억원)를 기부해 유엔 재단을 설립했고 핵무기 폐기와 환경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 故김수미 남편 별세...아내 떠나보낸 지 1년 7개월 만

    故김수미 남편 별세...아내 떠나보낸 지 1년 7개월 만

    배우 고(故) 김수미의 남편 정창규씨가 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이날 오후 1시 11분 숨을 거뒀다. 2024년 10월 아내 김수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7개월 만이다. 고인은 1974년 김수미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김수미는 생전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수 정훈희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는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아들인 정명호 나팔꽃 F&B 대표는 배우 서효림과 결혼했다. 서효림은 김수미와 함께 MBC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에서 모녀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빈소는 한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 9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6일 오전 9시 40분이며 장지는 수원시연화장이다.
  • 변사자 금목걸이 빼낸 검시조사관…‘점유이탈물횡령’ 주장했으나 ‘절도’ 유죄

    변사자 금목걸이 빼낸 검시조사관…‘점유이탈물횡령’ 주장했으나 ‘절도’ 유죄

    변사 현장에서 고인의 금목걸이를 가져간 경찰 검시조사관이 ‘점유이탈물횡령’ 혐의를 주장했으나 법원은 절도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3일 연합뉴스와 인천지법 등에 따르면 인천경찰청 과학수사대 소속 검시조사관 A(34)씨는 지난해 8월 20일 남동구 빌라의 변사 현장에서 숨진 50대 남성 B씨가 착용한 시가 2000만원 상당의 30돈 금목걸이를 빼내 자신의 운동화에 숨겨서 나왔다. 그러나 경찰이 최초로 촬영했던 고인 사진에서 금목걸이가 확인됐는데 유류품에서 누락된 사실이 파악됐다. 이에 수사가 진행되자 A씨는 범행을 자백했다. 검찰이 절도 혐의로 기소한 재판에서 A씨는 자신의 행위가 절도가 아닌 점유이탈물횡령이라고 주장했다. 형법상 절도는 6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지만, 점유이탈물횡령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형량이 훨씬 낮다. A씨는 금목걸이를 가져간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행 당시 금목걸이의 주인인 B씨가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금목걸이가 ‘주인 없는 물품’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누구의 점유에도 속하지 않은 물품인 만큼 절도가 아닌 점유이탈물횡령이라는 취지다. 사건을 심리한 인천지법 형사9단독 김기호 판사는 A씨가 금목걸이를 가져갔을 때 이미 숨진 B씨의 점유가 계속되고 있다거나 B씨의 상속인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A씨가 B씨의 사망에 관여하지 않았고 범행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밀접성도 없기 때문에 사회통념상 사망한 B씨의 생전 점유는 소멸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A씨의 행위는 절도죄로 판단됐다. 금목걸이가 있던 장소가 경찰의 엄격한 통제와 관리가 이뤄지던 변사 사건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는 물건을 잃어버린 장소가 타인의 관리 아래 있을 때 관리자의 점유를 인정하고 제3자가 이를 무단으로 취할 경우 절도로 본다. 이에 따라 김 판사는 출동 경찰관들이 B씨 주거지를 변사 사건 현장으로 관리하고 초동 조치와 함께 출입을 통제한 점을 고려해 ‘관리자로서 현장 물품을 점유한 상태’로 간주했다. 결국 공소사실대로 A씨의 절도 혐의가 인정됐고, 1000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김 판사는 “피고인은 변사자 검시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공무원으로 고도의 직업윤리를 부담하고 있지만, 고인의 유품을 훔쳐 비난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다만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될 경우 당연퇴직 사유에 해당하는데 이는 피고인에게 다소 가혹하다고 여겨진다”면서 “피해품이 유족에게 반환돼 원만히 합의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 ‘10원’까지 아끼던 중국 노부부, 심장병 아동 455명 살렸다 [여기는 중국]

    ‘10원’까지 아끼던 중국 노부부, 심장병 아동 455명 살렸다 [여기는 중국]

    유통기한 임박 우유만 찾고, 부러진 안경은 테이프로 감아 썼다. 그렇게 아껴 모은 전 재산은 결국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향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다 떠난 상하이 노부부의 선택이 중국 사회를 울리고 있다. 상하이에 살던 두잉룽과 루쑤잉. 자식 없이 살았던 이들의 삶을 담은 기념 전시가 지난 27일 열렸다. 전시장에는 두 사람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군복과 군용 수통, 수십 년을 함께한 청진기, 러시아어와 영어 교재, 빛바랜 테이프. 바이올린과 레코드 플레이어, 배드민턴 라켓, 그리고 꼼꼼하게 적힌 가계부까지. 하나같이 낡고 평범하지만, 그 자체가 두 사람의 삶이었다. 남편 두잉룽은 대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 은퇴했고, 부인 루쑤잉은 군 복무 후 병원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부는 2018년, 상하이 화교사업발전기금회에 총 500만 위안을 기부했다. 우리 돈으로 약 1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모두 선천성 심장병을 앓는 빈곤 지역 아동의 수술비로 쓰이도록 지정했다. 평생 이어온 기부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은 놀라울 만큼 소박했다. 기금회 관계자는 “정가 우유를 사 오면 왜 그런 걸 샀느냐고 화를 냈다”며 “유통기한 임박 할인 제품이면 충분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집 안 가구는 낡아도 바꾸지 않았고, 새 공책이 있어도 쓰지 않았다. 폐지에 글씨를 빽빽하게 적어가며 생활했다. 이 기부를 계기로 부부는 기금회와 깊은 신뢰를 쌓았다. 당시 남편 두잉룽의 건강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그가 가장 걱정한 건 ‘자신이 떠난 뒤 아내를 돌볼 사람’이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노후와 사후를 모두 기금회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판단 능력을 잃게 될 경우 기금회가 법적 보호자가 되고, 사망 이후 재산은 전부 기부되도록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갔다. 사망 이후에도 기금회가 부동산을 처분해 기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별도의 위임 계약까지 맺었다. 생전에 사후 기부 구조까지 설계한, 중국에서도 드문 사례다. 모든 절차가 끝난 지 나흘 뒤, 두잉룽은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기금회는 전담 인력을 꾸려 루쑤잉을 돌봤다. 정기 방문과 병원 치료 지원, 일상 관리까지 이어졌다. 관계자들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두 사람의 태도다. 자신에게는 끝까지 인색했다. 안경다리가 부러져도 테이프로 감아 썼고, 새 공책은 끝내 아껴두었다. 그러나 기부만큼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2009년 이후 태풍 피해 지역 지원, 지진 구호, 우물 설치 사업, 빈곤층 학생 지원까지. 이름을 남기지도, 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이어졌다. 2025년 초, 루쑤잉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31일,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이 남긴 돈으로 지금까지 수술을 받은 선천성 심장병 아동은 455명으로 알려졌다.
  • [강기자의 세종실록] 국가고시센터 세종 이전 추진 왜?

    [강기자의 세종실록] 국가고시센터 세종 이전 추진 왜?

    221개 과목 4840문항 출제 300명 보름 합숙에 방 146실뿐 당구대·체력단련실서 자기도 출제 수요 늘면서 합숙기간 30%↑ 44년 된 역량평가센터 등 채용시설 누수에 면접장 천장 두 차례 붕괴 인사처, 세종 국가채용센터 건립 추진 접근성·출제 품질 개선…연 5억 절감 경기 과천에 있는 ‘국가고시센터’를 아시나요? 녹봉을 받으며 나라에서 일할 공무원(5·7·9급)이 되기 위해 매년 수십만명이 응시하는 시험 출제와 채점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시험 성격상 보안이 매우 중요한 국가보안시설이죠. 공무원 시험을 관장하는 인사혁신처는 지난 23일 4년 만에 이 공간을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21년 동안 두 번째 공개입니다. 이유는 ‘더는 이곳에서 못 있겠다’는 겁니다. 인사처는 2030년을 목표로 세종시에 국가채용센터를 지어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대중교통을 이용해 현장에 가봤습니다. 시험 출제를 지원하기 위해 인사처 공무원들이 가듯이 말이죠. 세종청사에서 출발해 과천청사역까지 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세종의 지하철’인 간선급행버스(BRT)를 타고 충북 오송역으로 가서 KTX 기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지하철을 타고 과천청사역까지 40분 내려오는 방법입니다. 지하철역에 내린다고 끝이 아니죠. 약 30분을 걸어가야 고시센터에 도착합니다. 4시간이 족히 걸립니다. 시험 출제하기 전에 진이 다 빠질 지경입니다. 2005년 문을 연 고시센터는 지난해 시험 출제를 위해 다녀간 인원이 4만 1621명입니다. 고시센터 옆에는 고위공무원과 과장 승진 심사를 위한 역량평가센터, 개방형 직위에 민간 인재를 선발하는 중앙선발위원회, 5·7급 면접을 하는 옛 기숙사를 리모델링한 면접 공간, 채점·집행사무실 등 국가채용 관련 시설이 몰려 있습니다. 1982년 준공된 국가인재개발원의 과천 분원을 수리해 44년간 여러 건물에 부분적으로 입주해 있습니다. 이곳은 최초 언론 공개였는데요. 역량평가센터는 대기 공간이 없어 화장실 앞 협소한 복도에 일렬로 평가자들이 앉아 화장실을 오가는 분리 원칙인 평가위원들과 동선이 계속 겹쳤습니다. 면접 시험의 보안성이나 신뢰성 훼손이 우려되는 부분이죠. 면접 장소는 2023년 천장이 낡아 두 번이나 무너져 내린 사고가 있었습니다. 면접 중에 붕괴됐다면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겠죠. 면접 공간은 비가 오면 물이 새 벽면 보수 공사가 수시로 이뤄진 상태였습니다. 고시센터와 이곳 채용 시설들에는 20년간 출제위원·면접자·공무원 등 90만명이 생활했습니다. 고시센터 상황은 더했는데요. 이곳은 시험 출제가 이뤄지는 보름간 300명이 철통 같은 감시 속에 외부와 단절된 채 수용 인원의 절반도 안 되는 146개 방에서 동시 합숙해야 합니다. 이 중 60%인 85개가 여러 사람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다인실입니다. 객실이 부족하니 1인실을 2~3인실로 바꾸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화장실 공간을 비롯해 3.3㎡ 남짓한 2인실부터 최대 5인실까지 함께 써야 합니다. 방이 좁아 트렁크 가방을 열 자리가 없다는 불만이 쇄도한다고 하네요. 지난해 이곳에선 21종의 시험의 221개 과목 4840문항이 출제됐습니다. 2010년 170개 과목, 3460문항보다 출제 과목과 문항은 대폭 늘어났는데 출제와 검토에 필요한 공간은 2005년에 멈춰 있는 상태입니다. 이곳에서 합숙하는 사람은 주로 교수 등 출제위원과 난이도를 검토하는 전년도 합격한 공무원인 재검토위원, 인사처 시험출제과 직원들, 청소·주방 관계자, 생활요원, 간호사 등이 다 포함됩니다. 옷을 갈아입거나 잠잘 때 최소한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3인실은 궁여지책으로 병실처럼 침대 사이에 커튼을 설치했지만 불편하다는 민원은 여전하다고 합니다. 화장실은 타이밍을 잘 잡아 써야 하고요. 2인실은 커튼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었는데 예민한 일부 교수는 침대 매트리스를 벽처럼 중간에 세워 놓고 잠을 잤다고 하네요. 이렇다 보니 출제위원 위촉을 거절하는 사례도 늘어 양질의 문제를 출제에 어려움을 많다고 합니다. 고시센터는 스마트폰은 물론 블루투스가 되는 스마트워치나 다이어리는커녕 메모장 하나조차 들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시험 정보를 유출하지 못하도록 숙소 내 창문이 모두 불투명입니다. 거기에 창문을 열지 못하도록 자물쇠에 실내는 물론 복도까지 창문에는 이중으로 테이프를 붙인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 같아 보였습니다. 국가직 7급 공채 시험은 포화율이 200%에 달하는데 2021년 코로나 당시 7급 공무원을 많이 뽑을 때는 잘 곳이 없어 당구대 위와 체력단련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잤다고 합니다. 잘 공간이 부족한 마당에 휴식이나 운동 시설은 더욱 부족해 중앙정원은 이동하는 인원간 부딪히는 걸 막기 위해 요일별로 걷는 방향이 정해져 있을 정도입니다. 이럴 때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라도 발생하면 잘 공간은커녕 격리 공간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채용 업무 대응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 우려됩니다. 출제 과목과 문항 수는 점점 늘고 있는데 숙소 부족으로 출제 관리나 검토 직원이 부족해지면 자연스럽게 출제 오류가 발생할 위험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국가 채용의 심장부’ 치고는 2주 넘게 합숙하며 늦은 밤까지 한 치의 오류 없는 문제를 만들기 위한 환경이 가혹해 보입니다. 고시센터는 연간 282일을 사용하고 이 가운데 189일이 합숙 기간입니다. 합숙 기간은 출제 수요가 증가하면서 2010년보다 30% 이상(67일) 늘었고요. 이런 맥락 속에 인사처는 지난해 기본구상 연구용역을 거쳐 BRT로 오송역에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세종시 6-1 생활권에 연면적 3만 906㎡의 5층 규모로 국가채용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나 다른 기관의 공공부문 위탁 출제 수요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총사업비 1387억원을 들여 현 과천 국가채용시설의 두 배 규모로 지을 예정입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같이 추진 중인데 지난달 예비타당성조사 면제가 확정됐습니다. 출제부터 면접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고 합숙자들에게도 보다 쾌적한 공간이 제공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같은 세종시에 있다 보니 인사처 직원들이 구태여 출제·채점을 준비하고 마무리하기까지 일주일씩 숙박이나 오가는 교통비에 들어가는 예산 1억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차료 1억원을 내고 세종 시내에 따로 있는 역량평가센터도 통합으로 예산을 줄일 수 있습니다. 대규모 공간과 접근성 개선을 통한 이런 각종 행정업무 비효율과 여비 개선 등으로 인사처는 연간 5억원의 예산을 아낄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인사처의 시험 출제 오류율은 0.02%입니다. 정부 기관 중에서 가장 낮은 수치라고 합니다.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좋은 정책을 만들려면 우수한 인재가 제대로 된 양질의 시험 절차를 거쳐 들어와야 합니다. 단순히 보안만 생각한다면 접근성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재는 끊임없이 충원되어야 살아 있는 조직이 되듯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국가 일꾼을 뽑는 과정에서 5만명이 노력해 합심해야 만들 수 있다면 그만큼 미래 인재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필요 이상으로 겉만 화려한 게 아닌 실속 가득한 공간으로서 말이죠. ‘강 기자의 세종실록’은 대한민국 행정의 수도 세종시에서 생산되는 정부 정책과 관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코너입니다. 세종시에 포진한 각 정부부처가 내놓는 모든 정책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고, 오늘의 행정이 내일의 역사가 된다는 관점으로 ‘세종 현대사(現代史)’를 기록하겠습니다.
  • [정지욱의 창가에서 바라본 영화] 신록의 푸르름과 함께 만나는 배우 안성기

    [정지욱의 창가에서 바라본 영화] 신록의 푸르름과 함께 만나는 배우 안성기

    곧 오월이다. 신록의 푸름과 붉은 장미가 그득해지는 눈부신 계절이다. 일교차로 저녁엔 다소 쌀쌀하지만 아름다운 두 도시에서 날아온 영화제 소식으로 반갑다. 올해로 27회를 맞는 전주국제영화제와 처음 개최되는 부여히스토리영화제다. 선을 넘고 경계를 무시하며 새로운 도전을 지속하는 것을 정체성으로 하는 전주국제영화제는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슬로건으로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전북 전주시 영화의 거리 일대에서 열린다. ‘역사영화’라는 장르로 5월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 충남 부여군에서 열리는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는 정림사지와 부여읍 일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두 영화제가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배우 안성기가 출연한 작품들을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인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배우였던 고인은 지난 1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필자를 ‘정 선생’이라 불러 주며 예를 다해 주셨다. 학교 선배이기도 한 그를 나는 주로 ‘선배님’이라 부르며 가까이 모시고 따랐다. 아역배우로 데뷔한 그는 청소년 시절 잠깐을 빼곤 줄곧 연기 활동을 펼쳐 출연작이 200편이 넘는다. 우리나라에선 ‘국민배우’로 칭송되며, 친근한 이미지와 똑같이 평소에도 영화인이건 일반 관객이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배우 김지미와는 한 달가량의 시간차로 비보를 전해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 줬다. 특히 두 분은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에서 보육원 고아와 보모 역할로 데뷔한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필자가 고인과 직접적으로 만나 소통하게 된 것은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원회’에서다. 당시 그는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필자는 홍보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한동안 매주 한 번씩 긴 시간 토론과 회의를 함께 하며 지냈다. 2006년 광화문에서 일인시위를 하던 날 그가 오전부터 나서겠다는 것을 겨우 만류해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하게끔 한 적도 있었다. 현장에선 많은 시민들과 대화하며 스크린쿼터에 대해 설명하고,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여러 영화인들을 생각하며 “영화 촬영 때보다는 쉽다. 이런 날씨에 물에 들어가라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지금도 이 순간 많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추운 날씨에 고생하고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1980년 초 그와 가수 조용필이 함께 모교를 찾아 교정에서 일본 NHK 방송 프로그램을 촬영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촬영을 했는데, 마침 체육 시간이던 나는 자꾸 그쪽으로 가는 공을 주우러 가서 두 분 선배 얼굴을 훔쳐본 적이 있다. 나중에 그때 얘기를 했더니 기억난다며 “왜 자꾸 공이 올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정 선생이 나와 이어지고 싶었던 거구먼”이라며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이 들어 올렸던 내 혼배 미사의 신랑 측 증인을 해 달라 요청한 적이 있다. 흔쾌히 승낙을 했는데, 마침 그날 부산에서 유니세프 행사가 잡혔다. 다른 건 몰라도 유니세프 행사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는 말에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 후 아내와 나를 살뜰히 챙겨주시며 축하해 주셨다. 아내와 함께 진행했던 일본 잡지사 인터뷰나 취재에 누구보다 먼저 응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23년 여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과 춘천영화제에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 스타’ 상영을 마친 뒤였다. “이즈미상은?”이라며 아내가 함께 오지 않은 걸 궁금해하며 또 빙긋이 웃어 주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필자는 고인이 성인 연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의 작품들은 거의 다 스크린으로 봤다. 극장 스크린뿐 아니라 여러 행사들에서 만났다. 부산과 전주, 부천을 비롯한 국제영화제에서는 당연히 함께했다. 무엇보다 안타깝고 죄송한 것은 외국에 체류하는 바람에 빈소에 가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귀국하자마자 명동성당으로 달려가 장례미사에 겨우 참석했는데, 젊은 시절의 잔잔한 미소로 반겨 주시며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라고 하시는 것 같아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조금 낯선 안성기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상영된다. 고인이 상업영화뿐 아니라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의 가까운 동료였다는 걸 알 수 있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일곱 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또 부여히스토리영화제에서는 ‘탄생’(2022) 등 그가 와병 초기까지 출연했던 네 편의 작품이 정림사지 야외무대 등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우리는 초여름의 푸른 녹음 속에서 펼쳐지는 두 영화제를 통해 고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땅 위에서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은막을 수놓았던 배우 안성기는 이제 하늘의 영원한 별이 됐다. 우리 사회에서 영화배우뿐 아니라 여러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이후 한국의 영화산업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지금, 하늘에서 한국 영화산업의 내일을 위해 빌어주실 것이다. 한국 영화에 대한 고인의 애정을 잊지 말고 더 정진해 세계 속 한국 영화가 우뚝 설 수 있도록 자세를 바로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
  • “코끼리 쏘느니 내가 죽겠다”…끝내 참변 맞은 사파리 가이드 [핫이슈]

    “코끼리 쏘느니 내가 죽겠다”…끝내 참변 맞은 사파리 가이드 [핫이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베테랑 사파리 가이드가 생전 “코끼리를 쏘느니 내가 죽겠다”고 말해온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실제로 관광객들과 도보 사파리에 나섰다가 코끼리 공격으로 숨지는 비극이 벌어졌다. 현지에서는 야생을 깊이 존중해온 인물이 끝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 충격이 이어지고 있다. 남아공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클라세리 프라이빗 자연보호구역 공동소유주인 게리 프리먼(65)은 지난 9일 림포포주 보호구역 안에서 관광객들을 안내하던 중 코끼리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그는 관광객들과 함께 차량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 관광객 안내 중 돌진한 코끼리…총 들었지만 발사 정황 없어 현지 경찰에 따르면 사고는 코끼리가 갑자기 수풀에서 나타나 프리먼에게 돌진하면서 벌어졌다. 그는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꺼내 코끼리를 물리치려 했지만 공격을 막지 못했다. 이후 일행이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의료진을 불렀지만 끝내 숨졌다. 경찰은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며 총기가 실제 발사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이 더 주목받은 건 프리먼이 평소 코끼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왔다는 주변 증언 때문이다. 영국 데일리메일과 이를 인용한 뉴욕포스트 등에 따르면 그는 사고 당시 총을 꺼내 들었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 1990년대부터 도보 사파리 이끈 베테랑…추모 이어져 피플은 프리먼이 1990년대 초부터 도보 사파리 운영을 이끌어 왔고, 최근까지도 사실상 이를 홀로 맡아온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보호구역 측도 그가 손님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지역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해 왔다고 평가했다. 보호구역 측은 그를 두고 “진정한 신사이자 클라세리의 일부였던 인물”이라고 추모했다. 현지 언론과 지역사회에서도 그의 보전 의식과 오랜 현장 경험, 손님들과의 깊은 유대에 대한 애도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클라세리 보호구역은 크루거 국립공원과 맞닿아 있는 민간 보호구역이다. 현지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야생동물 관광의 매력 뒤에 도사린 위험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아무리 경험 많은 가이드라도 예측 불가능한 야생의 돌발 상황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있다는 점에서다. 데일리메일은 프리먼 사망 소식을 전하며 지난해 잠비아에서도 도보 사파리 중 관광객 2명이 코끼리 공격으로 숨진 사례를 함께 소개했다. 인간과 야생의 거리를 좁히는 체험이 늘어날수록 안전 관리와 현장 판단의 중요성도 더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짧은 생 위대한 예술, 에곤 실레[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짧은 생 위대한 예술, 에곤 실레[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스물여덟 생애, 작품 활동 10년334점 유화·2503점 드로잉 남겨“예술가 최고 덕목 독창성·진실성”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생명력‘육체’를 통해 증명해 낸 선구자오스트리아가 낳은 천재 화가 에곤 실레(1890~1918)는 스물여덟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림에 쏟아부으며 미술사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예술가다. 그가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간은 불과 10년 남짓이었지만 334점의 유화와 2503점의 드로잉을 남기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무엇이 젊은 화가로 하여금 육체와 정신이 한계에 달하는 순간까지 작업에 몰두하게 했을까? 실레가 남긴 편지와 일기를 따라가며 짧은 생애를 밀도 높은 예술로 바꾸어 낸 힘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 명언 “새로운 예술가는 반드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그는 창조자여야 한다.” 이 말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모방이 아니라 독창성과 진실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당시 유럽 화단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전통적 미의 기준을 중시하고 있었다. 실레에게 예술은 남의 양식을 빌려 오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하는 일이었다. 가장 나다운 것을 찾겠다는 실레의 인생관을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환경 속에서 성장했는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툴른에서 기차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중산층 가정이었지만 정서적으로는 평온하지 않았다. 실레가 누구보다 의지했던 아버지가 매독으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훗날 편지에서 “나의 고귀한 아버지를 이토록 슬프게 기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라고 적을 만큼 아버지의 부재를 깊은 상처로 안고 살았다. 이른 상실의 경험은 소년의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삶에 대한 집착을 심어 주었고 훗날 그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법적 후견인이 된 숙부 레오폴트는 실레가 철도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하고 열여섯 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입학하며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다. 빈 미술 아카데미는 고전적인 이상미와 역사화의 전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매우 보수적인 교육 기관이었다. 실레의 지도 교수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는 학생들에게 석고상을 정확히 베끼는 훈련을 강요했고 실레의 예민한 감수성과 재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그는 실레의 그림을 보고 “악마가 너를 내 수업에 배설해 놓았구나”라고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결국 실레는 입학한 지 3년 만인 1909년 학교를 떠나게 된다. 남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자기만의 예술을 창조해야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은 그가 남긴 100여점의 자화상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국 등불꽃과 함께한 자화상’은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내면의 불안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함께 드러내며 보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는다. 실레의 예리한 눈빛은 오른쪽을 향하지만 고개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어긋난 방향성 때문에 어깨선이 각진 턱뼈까지 바짝 치켜 올라가며 화면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자칫 불안정하게 보일 수 있는 구도를 절묘하게 붙잡아 주는 것이 화면 왼편의 중국 등불꽃(꽈리)이다. 기울어진 어깨와 조응하는 가느다란 줄기와 붉은 열매는 피부와 눈동자, 입술에 스며든 붉은 기운과 호응하며 화면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 자화상에서 실레는 자신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날카로운 선과 거친 붓터치, 탁월한 색채 감각으로 육체 안에 숨겨진 자기 과시, 본능적인 욕망과 공포,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구현했다. 두 번째 명언 “나는 3월까지 클림트의 길을 따랐으나 오늘은 그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레가 1910년 11월 오스트리아의 미술평론가 아서 뢰슬러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말이다. 오스트리아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 아래 화단에 입문한 실레가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걷겠다고 밝힌 역사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전통을 거부하고 빈 분리파를 이끌며 새로운 예술적 자유를 개척한 인물인 클림트는 실레가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우상이었다. 특히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클림트의 메시지는 아카데미 안에서 문제아로 취급받던 실레에게 자신의 길을 가도 된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1907년 열일곱 살의 실레는 클림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 자신의 드로잉을 보여 준다. 클림트는 그의 비범한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자네는 재능이 있네. 다만 너무 많아서 탈이지”라고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한동안 실레의 초기 작품에는 금박과 화려한 문양, 평면적인 구성과 우아한 곡선 등 황금의 화가 클림트의 서명과도 같은 요소들이 짙게 스며든다. 그러나 1909년 빈에서 열린 국제 쿤스트샤우 전시는 실레가 스승의 영향권을 벗어나 자기만의 독창적인 표현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클림트는 자신이 주도한 국제 미술전에 열아홉 살의 실레를 참여시키며 그가 본격적으로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줬다. 실레가 출품한 네 점 가운데 한 점이 막내 여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한 ‘게르티 실레의 초상’이다. 이 그림은 당시 실레가 스승 클림트의 조형 언어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게르티의 옷은 금색과 은색,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었고 인물의 자세 역시 클림트가 초상화에서 즐겨 사용하던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실레는 국제 쿤스트샤우 전시에서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반 고흐, 폴 고갱, 마티스 등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파를 이끌던 거장들의 작품을 처음으로 직접 보게 된다. 클림트의 장식적 화풍과는 전혀 다른 인간 내면의 고통과 감정을 화면 위에 거침없이 분출하는 새로운 예술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 충격이 실레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1909년 아카데미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신예술그룹을 결성한다. 마침내 “나는 클림트를 통과했다”고 선언하며 예술가의 주관적 감정과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는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세 번째 명언 “예술가를 억압하는 것은 범죄이며, 그것은 싹트는 생명을 살해하는 행위다.” 이 말은 실레의 생애에서 가장 치욕적이면서도 예술가로서의 각오를 단단하게 벼려 낸 노이렝바흐 사건과 맞닿아 있다. 1912년 연인 발리 노이칠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 노이렝바흐에 머물던 실레는 미성년자 유괴 및 추행 혐의로 체포되어 24일간 투옥되는 시련을 겪는다. 중범죄 혐의는 무죄로 밝혀졌지만 아이들이 드나드는 작업실에 누드 드로잉을 두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정에서 판사가 그의 드로잉 한 점을 촛불로 불태우는 충격적인 일도 벌어졌다. 예술이 도덕의 이름으로 검열되고 처벌받는 현실에 분노한 실레는 옥중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정화되는 기분이다. 내 그림은 신성한 사원에 걸려야 한다.” 실레가 에로티시즘에 주목한 배경에는 매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저물어가던 세기말 빈의 사회 분위기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빈은 겉으로는 제국의 질서와 도덕이 견고하게 유지되는 듯 보였지만 이면에는 성매매와 성병이 만연한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무의식과 성적 충동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던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실레는 이런 사회적·지적 흐름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한 화가였다. 그는 겉치레와 위선을 중시하는 빈 사회의 도덕주의를 혐오했고 성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실존적인 진실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욕을 부정하는 자야말로 가장 추잡한 인간이며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는 비열한 자”라는 그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性)이 자아를 탐구하고 억눌린 욕망과 불안을 드러내는 심리적 통로라고 여겼던 실레의 예술관은 연인 발리 노이칠을 그린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등을 대고 누운 발리’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화면 속 발리는 성적 욕망을 암시하는 새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누운 채 관람자를 바라본다. 허벅지를 노출하고 있는 그녀의 자세는 도발적이지만 표정에는 불안과 긴장감이 서려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성적 욕망과 실존적 고독이 깃든 인간 내면의 초상처럼 다가온다. 1915년 에디트 하름스의 결혼은 실레의 화풍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초기 작업을 지배하던 에로티시즘과 날카로운 시선 대신 가족애와 모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전에는 뼈마디가 드러나는 앙상한 신체와 뒤틀린 인물 표현으로 불안과 고립감을 극대화했다면 결혼 후에는 선이 한층 부드러워지고 신체는 안정된 형태를 띠게 된다. 미술사학자들이 이 시기를 실레 예술의 심리적 안정기이자 회화적 완성기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18년 2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빈 화단을 이끌 젊은 거장으로 떠오른다. 같은 해 3월에 열린 빈 분리파 제49회 전시회는 그에게 경제적 안정과 국제적 명성을 안겨 주었다. 출품작 대부분이 판매되고 하름스를 모델로 한 후기 대표작 ‘예술가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주립 갤러리(오늘날의 벨베데레 미술관)에 소장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하던 그해 가을 스페인 독감이 빈을 덮치면서 임신 중이던 하름스가 세상을 떠났고 실레도 사흘 뒤인 10월 31일 스물여덟 살로 생을 마감했다. 실레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가장 크고 아름다우며 가치 있고 순수하며 소중한 열매가 될 것이다.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의 말은 자신의 미래를 내다본 예언처럼 들린다. 오늘날 실레는 육체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생명력을 증명해 낸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실레가 확신했던 것처럼 그는 미술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예술의 열매로 남아 있다.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
  • 농부가 아내에게 바친 사랑의 선물 ‘나무로 그린 기타’ [여기는 남미]

    농부가 아내에게 바친 사랑의 선물 ‘나무로 그린 기타’ [여기는 남미]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밭을 도화지 삼아 ‘나무’로 그린 기타가 화제다. 아르헨티나 언론은 15일(현지시간) “나무 기타의 주인공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 4명이 여전히 기타 숲을 정성껏 돌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들 중 1명인 이그나시오 우레타는 “똑같은 색의 나무가 단 1그루도 없지만 자라면서 서로 어울려 예전보다 더 멋진 기타를 그려내는 것 같다”면서 “비가 내린 후에는 특히 아름다워 부모님이 더욱 그리워진다”고 밝혔다. 이색적인 나무 기타는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남부의 유명한 팜파스 평원에 위치해 있다. 25헥타르 땅에 나무 7000여 그루를 심어 기타를 그려냈다. 나무로 그린 기타의 길이는 약 1100m에 달한다. 밀과 대두 등을 경작하는 밭이 나무 기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경까지 정성껏 칠한 한 폭의 그림 같다. 나무 기타를 조성한 주인공은 2019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농부 페드로 마르틴 우레타다. 그는 1970년대 말 아들들과 함께 기타 모양의 숲을 조성하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땅에 그린 기타 그림에 따라 나무를 심는 데만 꼬박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기타를 그리는 데 주로 사용된 나무는 사계절 푸른 캘리포니아 사이프러스다. 여섯 개의 기타 줄은 유칼립투스로 구분했고 브리지 부분은 파인 사이프러스로 표현했다. 우레타는 나무 기타를 그리기로 작정하고 조경사들을 만나 문의했지만 프로젝트를 맡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직접 땅에 기타 그림을 그리고 아들들과 함께 나무를 심기 시작한 이유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기타 그림을 내려다본 적은 없다”면서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이렇게 기타를 잘 그리셨는지 놀라울 뿐”이라고 전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비행기를 탄 적이 없는 우레타는 생전에 자신이 조성한 기타 나무를 공중에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농부 우레타는 왜 뜬금없이 나무로 기타를 그리겠다고 나섰을까. 나무 기타는 우레타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해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의 선물이었다. 우레타의 아내 그라시엘라는 다섯째를 임신 중이던 1977년 25세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동맥류였다. 유난히 기타를 좋아했던 아내 그라시엘라는 생전에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기타 모양으로 숲을 꾸며봤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아내와 다섯째 복중 태아를 한꺼번에 잃은 우레타는 아내의 꿈을 이뤄주겠다면서 나무 기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아들들은 “처음에 나무를 심었을 때는 여러 번 나무들이 죽어 실패했었다”면서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무를 심으셨고 그 결과가 지금의 아름다운 기타 나무”라고 밝혔다. 이어 “기타 나무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이라면서 “앞으로도 더욱 정성을 다해 기타 나무를 돌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 캄보디아, 세계 최초 ‘영웅 쥐’ 동상 세운 이유…지뢰 109개 찾아내 [여기는 동남아]

    캄보디아, 세계 최초 ‘영웅 쥐’ 동상 세운 이유…지뢰 109개 찾아내 [여기는 동남아]

    캄보디아의 지뢰밭에서 5년간 활동하며 100개가 넘는 폭발물을 찾아내 수많은 인명을 구한 아프리카 큰주머니쥐 ‘마가와(Magawa)’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지난 3일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에서는 ‘국제 지뢰 인식과 제거 활동 지원의 날(4월 4일)’을 하루 앞두고 마가와의 2.20m 높이 석상 제막식이 열렸다. 마가와는 공공 기념물로 기려진 세계 최초의 쥐로 기록될 전망이다. 벨기에 비영리 단체 아포포(APOPO)의 의뢰로 제작된 이 동상은 현지 석공들이 사암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동상은 시엠레아프 강변 아포포 본부 인근에 설치됐으며, 생전 마가와가 착용했던 작업용 하네스와 수여받은 금메달을 차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특히 동상 받침대에는 실제 폐기된 폭발물 파편들이 포함돼 의미를 더했다. 마가와의 업적은 실로 놀랍다. 아포포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마가와는 5년간 지뢰 71개와 불발탄 38개 등 총 109개의 폭발물을 탐지했다. 면적은 약 14만 1000㎡로, 이는 축구장 20개에 달하는 넓이다. 2013년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전문 훈련을 받은 마가와는 2016년 캄보디아로 배치됐다. 그는 2021년 은퇴 후 2022년 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이클 레인 아포포 프로그램 매니저는 “마가와는 우리가 보유했던 최고의 쥐 중 하나였다”며 “집중력이 뛰어나고 조련사들에게도 매우 다정했던, 완벽한 성품을 지닌 영웅이었다”고 회고했다. 마가와는 테니스 코트 크기의 면적을 단 20분 만에 탐색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인간이 금속 탐지기로 작업할 경우 며칠이 소요되는 일이다. 아프리카 큰주머니쥐는 몸무게가 가벼워 지뢰를 밟아도 터뜨리지 않으며, 개에 버금가는 후각을 지녀 지뢰 탐지에 최적화돼 있다. 이들은 TNT의 화학 신호를 포착하면 땅을 긁어 알리고, 보상으로 바나나나 땅콩을 받는다. 앞서 마가와는 2020년 영국 수의 자선단체 PDSA로부터 동물계 최고 훈장인 ‘PDSA 골드 메달’을 쥐 최초로 수상했다. 이는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극도의 용기를 보여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영국 최고 권위의 상인 ‘조지 크로스(George Cross)’에 비견되는 영예다. 리 투치 캄보디아 지뢰행동청(CMAA) 제1부의장은 제막식에서 “마가와의 유산은 캄보디아 지뢰 제거 임무에 있어 회복력과 신뢰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캄보디아는 1960~90년대 내전의 여파로 전 세계에서 지뢰 오염이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다. 지난 47년간 폭발물로 인해 약 1만 88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여전히 6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정부는 2030년까지 ‘지뢰 없는 국가’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마가와의 뒤를 잇는 새로운 영웅 쥐들도 활약 중이다. 현역 탐지 쥐 ‘로닌(Ronin)’은 2021년 이후 지뢰 109개와 불발탄 15개를 찾아내며 2025년 세계 기록을 경신한 바 있다.
  • 캄보디아, 세계 최초 ‘영웅 쥐’ 동상 세운 이유…지뢰 109개 찾아내 [여기는 동남아]

    캄보디아, 세계 최초 ‘영웅 쥐’ 동상 세운 이유…지뢰 109개 찾아내 [여기는 동남아]

    캄보디아의 지뢰밭에서 5년간 활동하며 100개가 넘는 폭발물을 찾아내 수많은 인명을 구한 아프리카 큰주머니쥐 ‘마가와’(Magawa)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지난 3일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에서는 ‘국제 지뢰 인식과 제거 활동 지원의 날’(4월 4일)을 하루 앞두고 마가와의 2.2m 높이 석상 제막식이 열렸다. 마가와는 공공 기념물로 기려진 세계 최초의 쥐로 기록될 전망이다. 벨기에 비영리 단체 아포포(APOPO)의 의뢰로 제작된 이 동상은 현지 석공들이 사암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동상은 시엠레아프 강변 아포포 본부 인근에 설치됐으며, 생전 마가와가 착용했던 작업용 하네스와 수여받은 금메달을 차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특히 동상 받침대에는 실제 폐기된 폭발물 파편들이 포함돼 의미를 더했다. 마가와의 업적은 실로 놀랍다.아포포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마가와는 5년간 지뢰 71개와 불발탄 38개 등 총 109개의 폭발물을 탐지했다. 면적은 약 14만 1000㎡로, 이는 축구장 20개에 달하는 넓이다. 2013년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전문 훈련을 받은 마가와는 2016년 캄보디아로 배치됐다. 그는 2021년 은퇴 후 2022년 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아포포의 프로그램 매니저 마이클 레인은 “마가와는 우리가 보유했던 최고의 쥐 중 하나였다”며 “집중력이 뛰어나고 조련사들에게도 매우 다정했던, 완벽한 성품을 지닌 영웅이었다”고 회고했다. 마가와는 테니스 코트 크기의 면적을 단 20분 만에 탐색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인간이 금속 탐지기로 작업할 경우 며칠이 소요되는 일이다. 아프리카 큰주머니쥐는 몸무게가 가벼워 지뢰를 밟아도 터뜨리지 않으며, 개에 버금가는 후각을 지녀 지뢰 탐지에 최적화돼 있다. 이들은 TNT의 화학 신호를 포착하면 땅을 긁어 알리고, 보상으로 바나나나 땅콩을 받는다. 앞서 마가와는 2020년 영국 수의 자선단체 PDSA로부터 동물계 최고 훈장인 ‘PDSA 골드 메달’을 쥐 최초로 수상했다. 이는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극도의 용기를 보여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영국 최고 권위의 상인 ‘조지 크로스’(George Cross)에 비견되는 영예다. 리 투치 캄보디아 지뢰행동청(CMAA) 제1부의장은 제막식에서 “마가와의 유산은 캄보디아 지뢰 제거 임무에 있어 회복력과 신뢰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캄보디아는 1960~90년대 내전의 여파로 전 세계에서 지뢰 오염이 심각한 국가 중 하나다. 지난 47년간 폭발물로 인해 약 1만 88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여전히 6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정부는 2030년까지 ‘지뢰 없는 국가’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마가와의 뒤를 잇는 새로운 영웅 쥐들도 활약 중이다. 현역 탐지 쥐 로닌(Ronin)은 2021년 이후 지뢰 109개와 불발탄 15개를 찾아내며 2025년 세계 기록을 경신한 바 있다.
  • 평생 나눔의 삶…마지막에도 3명 살리고 떠난 ‘지역 일꾼’

    평생 나눔의 삶…마지막에도 3명 살리고 떠난 ‘지역 일꾼’

    평생 지역 곳곳을 누비며 이웃의 고충을 해결해 온 ‘지역 일꾼’ 정구견(61)씨가 마지막 순간 장기를 기증해 3명의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 1월 28일 한림대성심병원에서 정씨가 뇌사 장기기증으로 폐와 신장(양측)을 기증했다고 10일 밝혔다. 정씨는 평소 가족들과 장기기증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내 몸이 건강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기증 의사를 밝혀왔다. 지난 1월 18일 자택에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뇌사 상태에 빠지자 가족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베풀고자 했던 그의 평소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 기증을 결심했다. 전북 정읍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씨는 생전 국회의원 지역사무실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민원 해결과 지역 현안을 챙기는 데 앞장섰다. 늘 타인의 처지를 먼저 생각했고, 라이온스·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맡으며 매년 김장 봉사와 요양원 방문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발걸음을 옮겼다. 5년 전 뇌전증으로 쓰러진 뒤에도 삶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매일 3~4시간씩 산책하며 건강을 회복하려 애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묵묵히 몸을 단련했다. 딸 시영씨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었다”며 “아빠가 살아온 것처럼 우리도 서로 챙기며 잘 지내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많은 사람을 위해 힘쓰는 삶을 살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으로 신념을 지키신 기증자와 그 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 [나태주의 풀꽃 편지] 문인이 죽으면 책도 죽는다

    [나태주의 풀꽃 편지] 문인이 죽으면 책도 죽는다

    ‘사람이 죽으면 물건도 죽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사람이 쓰던 물건도 따라서 쓸모없게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슬픈 말이다. 그런가 하면 ‘문인이 죽으면 책도 따라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건 더욱 안타까운 말이다. 글쎄, 내가 그다지 오래 산 인생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지나 오면서 보건대 문인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너무나도 빨리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을 보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잡지나 신문에 오르내리던 문인의 이름이나 작품이 깡그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생전에 이름을 드날리고 인간적으로 힘을 쓰고 문단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문인일수록 더욱 속수무책으로 그렇게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인생무상, 허무가 아닐 수 없다. 진정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한탄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한 이치라 할 수 있으며 순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해 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문인이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창조해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목숨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던가. 여기서 각성이 나오고 분발이 나온다. 우선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할 일이다. 어떤 작품일까? 사람마다 입장과 주장이 다르겠지만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본다. 모든 문인이 그렇게 하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시라고 해도 사람을 살리는 시여야 한다. 쓸모가 있는 시여야 한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시여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바꾸어 놓는 시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대의 독자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독자들에게 선택받기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 자신의 입장과 주장만으로 시를 써서는 안 된다. 충분히 동시대 사람들, 타인의 입장과 타인의 삶에 관심을 두고 그들의 삶까지도 아우르는 시를 써야 한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선이라고 해도 독선이 아니고 공동선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선택받기 어렵다. 우리가 모두 아는 일이지만 무릇 시의 문장은 일인칭 문장이다. 일인칭의 하소연과 고백이 이인칭으로 건너가 이인칭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그 동의는 또 다른 이인칭, 삼인칭으로까지 번져 가야만 하리라. 그러지 않고서는 시의 생명력은 애당초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것이 공감이고 나아가 감동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나의 시에 몇 가지 주문을 담아 부탁한다. 짧아져라, 단순해져라, 쉬워져라, 임팩트를 가져라. 앞의 둘은 형식에 관한 요구이고 뒤의 둘은 내용에 대한 요구이다. 시가 진정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오늘에도 가망이 없고 내일에도 가망이 없는 일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에 더할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다. 놀랍게도 인간 세상은 나 한 사람과 나 아닌 모든 다른 사람들, 타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물론 나 한 사람이지만 그 나 한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모든 다른 사람들, ‘너’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인칭이나 삼인칭의 도움 없이는 일인칭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실로 매우 쉬운 진리이고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인간은 나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보다 많은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시인의 시 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나 하나만의 정서와 나 하나만의 문제로 시를 써서는 안 된다. 보다 많이 타인의 마음, 타인의 정서를 헤아려 시에 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그러할 때 시는 오늘에도 살고 내일에도 사는 게 아닐까. 조지훈 선생은 이런 말씀을 남겼다. ‘생전부귀(生前富貴) 사후문장(死後文章)’. 그 모범을 우리는 외국 시인 헤르만 헤세나 윤동주, 김소월 선생에게서 본다. 나태주 시인
  • 비행기 사고로 숨진 남편·시부…시모 “아들 돈도 내 것” 며느리 ‘충격’

    비행기 사고로 숨진 남편·시부…시모 “아들 돈도 내 것” 며느리 ‘충격’

    비행기 사고로 남편과 시아버지를 동시에 잃은 여성이 시어머니와 상속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연이 전해졌다. 9일 YTN 라디오 ‘조인섭 변호사의 상담소’에서는 초등학생 딸을 혼자 키우고 있다는 여성 A씨 사연이 소개됐다. A씨는 “시아버지는 무역 회사를 운영하셨고 외국어에 능통한 시어머니는 사업을 도왔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남편은 보조 역할에 그쳤다”며 “해외 출장도 혼자 가지 못하고 시아버지와 함께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는 중요한 계약이라며 남편 대신 해외 출장을 가겠다고 했다가 출발 직전 마음을 바꿨다. 결국 남편이 시아버지와 출장길에 올랐고, 두 사람은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A씨는 평소 시어머니에게 서운함이 있었지만,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상황을 고려해 섭섭함을 내려놓고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시어머니는 “나 대신 아들이 죽었으니 아들 상속 몫도 내가 가져야 한다. 지금 사는 집 명의를 넘겨줄 테니 그걸로 만족하라”며 “너는 시아버지 병간호나 사업에 기여하지 않았으니 상속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A씨는 “시아버지가 입원했을 때는 어린 딸을 돌봐야 해서 직접 병간호하지 못했다”며 “시아버지가 생전 시어머니에게 부동산과 주식을 꽤 많이 증여한 걸로 알고 있는데도 며느리인 저와 제 딸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니 서럽다. 우리 모녀에게 상속 권리가 없는 건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법무법인 신세계로의 임경미 변호사는 “비행기 사고처럼 누가 먼저 사망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 민법상 ‘동시 사망’으로 본다”며 “이 경우 시아버지와 남편 사이에는 상속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시 사망한 경우에도 ‘대습상속’이 인정된다. A씨와 딸은 숨진 남편 차례를 대신해 시어머니와 함께 시아버지 재산을 공동 상속받는다”며 “남편 고유 재산도 1순위 상속자인 A씨와 딸이 받는다. 시어머니는 이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시어머니가 주장한 ‘상속 결격’에 대해서는 “살해나 유언 방해 등 중대한 사유가 있어야 인정된다”며 “단순한 불화나 부양 소홀만으로는 상속권이 박탈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한 “A씨는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통해 시어머니가 시아버지로부터 미리 받은 재산을 상속재산에 포함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며 “상속인으로서 남편 재산도 확인할 수 있다. 상장주식은 ‘상속인 금융거래 조회 서비스’, 비상장주식은 ‘회사 주주명부’를 통해 파악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 ‘주몽’ 왕소문 연기했던 그 배우, 낙상사고에 시력까지 잃었다

    ‘주몽’ 왕소문 연기했던 그 배우, 낙상사고에 시력까지 잃었다

    드라마 ‘주몽’에 출연했던 배우 순동운이 낙상 사고로 마비를 겪은 이후 재혼 가정에서 지적장애를 가진 딸과 살아가는 근황을 전했다. 최근 유튜브 채널 ‘그때 그 사람’에는 순동운이 아내와 함께 출연해 과거와 현재 삶을 털어놓은 영상이 공개됐다. 영상에서 순동운은 재혼 과정에서 아내의 딸이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머릿속이 멍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아내 역시 “아이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했다”고 전했다. 고민 끝에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 순동운은 현재 딸을 만날 때마다 목소리 연기를 해주는 등 아버지로서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순동운은 40년 연기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으로 드라마 주몽을 꼽았다. 그는 극 중 왕소문 역으로 출연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아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김포에서 국수집을 운영했지만, 잦은 음주와 부부 갈등으로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여기에 낙상 사고로 경추 수술까지 받으면서 건강이 악화됐고, 연기 활동도 중단해야 했다. 특히 그는 현재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라고 전했다. “사극 촬영 때 안경을 벗어야 했는데 밤 장면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며 “다른 배우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스스로 활동을 멈췄다”고 설명했다. 순동운은 아내의 응원과 동료 배우 윤철형의 조언을 계기로 다시 연기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여주에서 생활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그는 “지금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며 “다시 연기를 시작해 활력을 찾고 싶다”고 밝혔다.
  • ‘기부 천사’ 故김지환씨 유족, 2000만원 기부

    군 복무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지환 씨의 뜻을 기리기 위한 나눔이 이어지고 있다.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은 김씨의 유족과 지인들이 고인의 이름으로 자립준비청년 후원금 2000만원을 기부했다고 8일 밝혔다. 유족들은 고인의 뜻을 잇기 위해 지난해 3월에도 장례 조의금을 모아 초록우산에 기부한 바 있다. 당시 후원금도 아동양육시설을 퇴소해 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자립준비청년들을 위해 쓰였다. 공군 복무 중이던 2024년 사고를 당해 지난해 1월 1일 끝내 숨을 거둔 고인은 생전에도 유별난 ‘기부 천사’였다. 아낀 용돈을 기부하고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꾸준히 나눔을 실천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번 기부는 수혜자가 다시 기부자가 되는 나눔의 선순환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지난해 지원을 받았던 자립준비청년들은 “이 도움을 다른 청년에게 다시 나눠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겠다”는 감사 편지를 유족 측에 보내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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