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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금숙의 만화경] 나이 드니까 여자로 안 봐

    [김금숙의 만화경] 나이 드니까 여자로 안 봐

    “나이 드니까 남자들이 먹잇감으로 안 봐서 좋아.”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그래픽노블 ‘풀’ 프랑스 출간을 기념해 작가와의 만남을 서점에서 가진 뒤 화가 A언니, 일인 출판을 하고 있는 B와 서촌의 수제 맥주집에서 한잔하던 중이었다. A: “나이 드니까 여자로 안 봐. 사람으로 봐. 그래서 좋아.” 나는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아이고, 언니 나이 아직 50도 안 됐거든” 하고 발끈했다. A: “그래도 갱년기야, 나.” 그녀의 표정이 웃프다. 나: “갱년기면 뭐 여자 아닌가? 80 먹어도, 90 먹어도 여자야.” A: “그렇지. 하지만 남자들한텐 아니거든. 크크크.” A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얼마 전엔 상 엎었어.” 놀라 쳐다보는 우리에게. “아니 글쎄, 내 엉덩이가 대문짝만 하다나 어쨌다나. 나도 애기 낳기 전에는 안 그랬거든.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서 그대로 상 엎어 버렸어.” 상 엎었다는 A의 말에 실은 조금은 충격이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와! 잘했다 언니. 절대 그냥 수긍하면 안 되지.” 옆에 있던 B도 한술 거든다. “설거지 좀 한다고 마치 지가 무슨 페미니스트 남편인 것마냥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이라니. 아직 멀었어. 잘했다. 잘했어. 여성들을 위하여 건배!” 우린 쨍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곧 김빠진 맥주처럼 심드렁해졌다. “하긴 나도 절대 늙지 않을 줄 알았어. 난 나이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요즘엔 노안이 와서 눈이 정말 금세 피로해져.” 마음속에 있던 불안이 혼잣말처럼 튀어나왔다. “내가 언제까지 작업할 수 있을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였는데 들었나 보다.A: “나도 요즘 통 작업을 못 하고 있어. 1년 전 개인전 한 이후로…. 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네. 후후…. 빨리 작업해서 그림을 팔아야 먹고사는데….” B: “형부는 뭐하시고? 일 안 하셔? 그림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는 정도면 언니 잘 나가나 보네.” A: “그래도 한 점 팔면 몇 달은 생활이 되지. 그이는 집에 있은 지 오래됐고.” A의 남편 이야기를 더이상 자세히 듣고 싶지는 않아 화제를 돌렸다. “만화보다 훨씬 낫네. 우리 쪽은 나처럼 출판 만화만 하면 어렵거든. 지원 사업이라도 안 되면 방법이 없어. 그림책 쪽은 어때? 견딜 만해?” B를 향해 물었다. “난 뭐 괜찮아. 올해엔 책 6권이나 냈어.” 반지하에 월세로 살면서도 늘 긍정적인 B가 참 대단하다. “작가들은 힘들지. 어떤 그림 작가는 일 년 수입이 이백이래. 그림책은 그림 수정 요구도 많고. 물론 나는 엔간한 출판사보다 선인세를 더 줘.” 나: “물가도 땅값도 매일 오르는데 작가들 인세는 몇 년 전보다 훨씬 못 해.” B: “사람들이 책을 안 읽으니까.” 나: 왜지? B: “노력하기 싫은 거지. 책 읽는 건 노력이 필요하니까.” A: “쥐꼬리만 한 봉급에 몇 시간 되지 않던 강사 자리도 잘리고. S대나 H대를 나왔어야 했는데…. 아니 소설을 써야 했나? 크크크.” 나: “갑자기 웬 소설? 그리고 언니는 유학도 갔다 왔잖아?!” A: “소설가는 인세가 몇 천, 몇 억이래. 글고 미국을 갔다 왔어야 했지. 프랑스는 뭐 끈이 없어요. 차라리 독일 유학파는 더 나아.” 나: “소설가도 베스트셀러 작가나 그렇겠지.” B: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고 사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20대에서 30대 초반 여성들이래. 인세 많이 받고 싶어? 독자들을 겨냥해 봐.” 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쓰는 데 좋은 작품이 나올까? 난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인데. 여튼 괜찮아 뭐. 고흐는 살아생전 평생 작품 딱 하나 팔았대. 근데 봐. 지금 얼마나 비싸게 팔리냐?” 위로한다고 한 말이 위로가 될 턱이 없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로 눈이 마주치며 빵 터지고 말았다. “슬픈데 왜케 웃기냐? 오~ 가난한 중년의 여성 예술가들이여! 크크크.” “그래 그나마 고흐는 예술에만 집중했지. 여성을 이용하진 않았어. 봐. 세계의 거장들을. 피카소, 자코메티, 고갱, 드가, 에곤 실레…. 하물며 우디 앨런까지.” 우리의 대화는 예술 작품과 예술가 삶의 모럴로 옮겨 갔다. 어두워진 경복궁역 가로수길엔 여름 햇살에 노랗게 타 버린 은행잎들이 바람에 뒹굴며 너울댔다. 술을 마시면 조금 덜 추워야 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너무 추워져 버린 날씨에 몸을 잔뜩 웅크리며 A와 B는 전철역 쪽으로, 나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바삐 걸었다.
  • ‘최동원상’ 다섯 번째 수상자 6일 발표

    ‘최동원상’ 다섯 번째 수상자 6일 발표

    ‘최동원상’의 수상자가 6일 공개된다. 최동원기념사업회는 5일 “제5회 BNK 부산은행 최동원상 수상자를 6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강남구 야구회관에서 발표한다”며 “이 자리에서 올해 최고의 아마추어 투수에게 시상하는 ‘아마추어 투혼 최동원상’ 수상자도 함께 발표한다”고 밝혔다. 2014년 시작된 ‘최동원상’은 그해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상이다. 2014년 양현종(KIA), 2015년 유희관, 2016년 장원준(이상 두산)에 이어 지난해에는 양현종이 두 번째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올해부터는 외국 선수에게도 후보 자격을 줬다. 최동원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생전 최동원 감독이 2군 선수들의 열악한 환경에 주목해 선수회를 결성하려 시도하는 등 선수들의 차등 없는 권리 증진을 위해 애썼다”며 “진정한 최동원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올해부터는 내외국인 투수를 가리지 않고 객관적 성적을 기준으로 해 최고의 투수를 뽑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아마추어 야구 활성화를 위해 ‘아마추어 투혼 최동원상’도 신설했다. 성적뿐 아니라 인성, 역경 이겨낸 의지 등을 종합해 수상자를 결정할 예정이다. 최동원기념사업회는 8인으로 선정위원회를 구성해 지난달 23일 회의를 열고 수상자를 선정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뉴질랜드 낚시꾼이 파도에 떠밀려온 18개월 아기 구조

    뉴질랜드 낚시꾼이 파도에 떠밀려온 18개월 아기 구조

    뉴질랜드 북섬의 마타타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던 남자가 낚시를 하던 중 18개월 된 아기가 파도에 떠밀려오는 것을 발견해 구조했다. 현지 언론은 이를 전하며 ‘괴이쩍은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지난달 26일 아침 6시 15분쯤 이곳 해변의 머피스 휴가 캠프에 놀러온 거스 훗이란 남자가 어느날처럼 낚시를 하려고 바다로 들어갔다가 마주한 기적이 5일 뉴질랜드 헤럴드 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당시 신문은 사건이 일어난 날 아기 엄마가 이이를 건져냈다고 보도했는데 열흘을 훌쩍 넘겨서야 훗이 아기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확인하고 바로잡았다. 이 캠프를 자주 찾았던 훗은 평소에는 캠프 정문을 나와 곧바로 바다를 향해 걸어 나갔는데 이날 따라 다른 낚시 포인트를 찾아보고 싶어 왼쪽으로 100m쯤 이동한 뒤 바다에 걸어 들어가 낚싯대를 드리울 지점을 찾았다. 그런데 작고 이상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인형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아기 같아 보여 신음 소리를 냈다. 훗은 “인형이라고 생각했다. 다가가 팔로 그를 안았다. 그러면서도 인형이구나 생각했다”고 뉴질랜드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사내 아이였다. 그는 이어 “얼굴이 도자기처럼 새하얗게 보였다. 짧은 머리칼은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때 그녀석이 조그맣게 끼익 소리를 냈다. 해서 난 ‘아 신이시여, 아기이고 살아있구나’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또 천천히 떠밀려 오고 있었다며 “만약 1분이라도 늦었다면 그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훗은 아기에 대해 “그는 지독하게도 운이 좋았다. 그가 (바다에) 가려고는 안했겠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수가 캠프 직원에게 알렸더니 해변에서 아기와 있었던 가족은 단 한 가족이라고 했다. 아기가 생전 처음 바다를 보고 너무 흥분해 몰래 부모 텐트의 지퍼를 열고 나와 바다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아기를 수건으로 감싸 부모에게 데려갔더니 까마득히 몰랐던 엄마가 비명을 질러댔다. 한참 뒤 아기가 아무렇지 않음을 확인한 가족은 해변을 떠나며 훗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이 캠프의 주인장 아내인 솔터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비극적인 사고로 결말지어질 수 있었는데 아주아주 운 좋은 결말이었다”고 말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으로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으로

    한국의 영화 역사와 함께한 ‘은막의 풍운아’가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국민배우’로 오랜 시간 사랑받은 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별세했다. 81세.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 왔지만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과 작별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 조연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그는 1960~7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조각 같은 수려한 외모로 ‘한국의 알랭 들롱’, ‘한국의 제임스 딘’으로 불린 그는 당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원조 꽃미남’ 스타로 시대를 풍미했다. ‘맨발의 청춘’(1964), ‘별들의 고향’(1974), ‘겨울 여자’(1977) 등 숱한 히트작을 남겼고, 데뷔 이후 50여년간 500편 넘는 작품에 출연하는 독보적인 기록을 세웠다. 투병 중에도 영화 ‘소확행’(가제) 제작과 김홍신 작가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 영화화를 구상하는 등 열정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6일 서울아산병원, 장지는 고인이 생전에 직접 지은 경북 영천 ‘성일각’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소룡·성룡 발굴한 ‘홍콩 영화계 대부’ 레이먼드 초우 별세

    이소룡·성룡 발굴한 ‘홍콩 영화계 대부’ 레이먼드 초우 별세

    이소룡(브루스 리)과 성룡(청룽)을 발굴하고 1970∼90년대 홍콩영화 전성기 이끌었던 ‘홍콩 영화계의 대부’ 레이먼드 초우(鄒文懷) 골든하베스트(嘉禾電影) 설립자가 지난 2일 별세했다. 91세. 3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에 따르면 초우는 생전에 코미디와 액션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600편 이상을 제작하면서 여러 명의 세계적인 스타와 감독들을 발굴했다. 과거 홍콩 영화 제작을 독점하고 있던 쇼브라더스(邵氏集團)에서 최고 책임자 자리에까지 올랐던 초우는 1970년 회사를 나와 골든하베스트를 설립했다. 그는 1971년 ‘당산대형’을 시작으로 이소룡과 함께 ‘맹룡과강’, ‘용쟁호투’ 등을 만들며 연이어 흥행기록을 써나갔다. ‘용쟁호투’는 최초로 미국 할리우드와 홍콩 제작사가 합작한 영화이다. 초우는 1973년 이소룡이 33세의 나이에 돌연사한 뒤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977년과 1978년 홍금보(洪金寶)와 성룡을 차례로 영입하면서 골든하베스트의 제2 전성시대를 열었다. 성룡은 1980년 ‘취권’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초우는 ‘사제출마’ ‘캐논볼’ 등을 제작, 흥행 기록을 새로 쓰면서 1994년 골든하베스트를 홍콩 증시에 상장시켰다. 성룡은 골든하베스트에서 ‘프로젝트A’와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홍번구‘ 등 액션물로 인기를 끌면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등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골든하베스트는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뒤 홍콩 영화계가 활력을 잃는 과정에서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초우는 2007년 골든하베스트 지분 전부를 중국 부호 우커보(伍克波)에 양도하고 영화계 일선에서 은퇴했다. 1927년 홍콩에서 태어나 1949년 상하이 명문 성요한대를 졸업한 초우는 지난 1일 입원했다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한국 영화의 큰 별’ 신성일, 폐암으로 별세 ‘장례는 영화인장’

    ‘한국 영화의 큰 별’ 신성일, 폐암으로 별세 ‘장례는 영화인장’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이 폐암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4일 한국영화배우협회 측에 따르면 명예 이사장인 신성일은 이날 오전 2시 25분께 폐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앞서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오며 회복에 힘써왔다. 그러다 전날인 지난 3일부터 병세가 위독해져 그간 치료를 받아오던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의 곁은 아들 강석현 등 가족들이 지켰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거행된다. 현재 한국영화배우협회와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등 영화계 관계자들이 유족과 영화인장의 구체적 절차를 놓고 논의 중이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6일로 예정돼 있다. 장지는 고인이 직접 건축해 살던 가옥이 위치한 경북 영천 성일각이다. 신성일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적 스타 배우였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성일은 생후 사흘 만에 부모의 이사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고인은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면서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고 신성일 부인 엄앵란 “저승서 ‘순두부 여자‘ 만나 구름 타고 놀아라”

    고 신성일 부인 엄앵란 “저승서 ‘순두부 여자‘ 만나 구름 타고 놀아라”

    “우리 남편은 저승에 가서도 못살게 구는 여자 만나지 말고, 그저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 재미있게 손잡고 구름 타고 그렇게 슬슬 전 세계 놀러 다니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4일 타계한 고(故) 신성일의 부인 엄앵란(82)은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뭔가’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고인에 대한 절절함이 배어 나오는 한마디로 들린다. 엄앵란은 이날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기자들을 만나 고인을 떠나보낸 심정을 밝혔다. 그는 고인과 인생의 동반자이자 동료 배우로 55년을 함께 했다. 그는 고인의 생전에 대해 “가정 남자가 아니었다. 사회 남자, 대문 밖의 남자지 집안의 남자가 아니었다. 일에 미쳐서 집안은 나한테 다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러 다녔다”고 회고했다. 이어 “집에서 하는 것은 늦게 들어와서 자고 일찍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며 “늘그막에 재밌게 살려고 했는데 내 팔자가 그런가 보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고인은 차녀 수화 씨에게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가서 참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했다고 해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고인의 최근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부산영화제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 직전에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돌았다”며 “가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야겠다며 내려갔는데 갔다 와서 몸이 안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남편은 영화 물이 뼛속까지 들었다. 까무러쳐서 넘어가는 순간에도 영화는 이렇게 찍어야 한다고 했다”며 “그걸 볼 때 정말 가슴 아팠다. 이런 사람이 옛날부터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화려한 한국 영화가 나온다는 생각에 넘어가는 남편을 붙잡고 울었다”고 전했다. 이어 “내가 존경할만해서 55년을 살았지 흐물흐물하고 능수버들 같은 남자였으면 그렇게 안 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앵란은 마지막으로 “우리 남편이 돌아가셨는지 확인하려고 제주도에서도 전화가 왔다. 어떤 남자는 울기도 했다. 그런 팬들의 변화를 겪고 나니까 우리의 가정사나 사생활은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다”며 “이 사람들 때문에도 열심히 살아야겠다.흉한 꼴 보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신성일 별세, 3일 전 방송서 건강한 모습 ‘안타까워’

    신성일 별세, 3일 전 방송서 건강한 모습 ‘안타까워’

    故 신성일의 생전 마지막 모습에 누리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1일 방송된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김수미 편에는 2017년 폐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인 신성일이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 신성일은 건강이 호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지인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김수미는 신성일과의 과거를 회상했다. 당시 두 사람은 영화 ‘잔류 첩자’의 촬영 중이었다. 김수미는 “대본에는 없는데 옷을 다 벗으라고 하더라. 반나절 동안 촬영을 못했다. 그때 선생님이 ‘신혼 여행 갔다 온 새색시에게 갑자기 벗으라고 하면 벗겠냐. 오늘 촬영 접자’고 무마시켜 주셨다”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일이 가장 고마운 일 중 하나다”고 전했다. 이에 신성일은 “신인 배우들은 항상 제 가까이에 있다 보니까 내가 보호를 안 하면 해 줄 사람이 없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만큼은 보호해줬다. ‘그러지 말라. 오늘 찍지 말라’고 촬영을 펑크낸 것”이라고 후배 배우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수미는 “화면에서만 보던 선배님이 감독에게 내 편을 들어준 것”이라며 감사함을 표했다. 한편 신성일은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춘 지 3일 만인 4일 새벽,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은막의 스타’ 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전날 오후 한때 고인이 별세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단지 위중한 상태로 전해져 오보인 것으로 정정됐다가 결국 몇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적 스타 배우였다. 본명은 강신영이지만 고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썼고, 이후 본명을 표기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예명과 본명을 모두 살린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성일씨는 생후 사흘 만에 부모의 이사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고인은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다작이 성행했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해도 신성일씨는 출연 작품 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면서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거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화인 단체 대표들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릴 예정이었으나 23호실로 옮겨졌다. ☎ 02-3010-2000(대표번호)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북녘의 향기 그리워 고향의 온기 그리다

    북녘의 향기 그리워 고향의 온기 그리다

    인민군·국군으로 살아야 했던 미술학도 6·25전쟁의 아픔 잿빛 화폭에 담아 통일 염원은 화려한 색채로 그려내 매번 다른 상상 속 어머니 담은 작품도“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서도….”고향을 떠올리던 여든여섯의 화가는 말 중간중간 젊은 기자들의 눈치를 봤다. 이동표 화가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동운면 주산리. 고향 땅 저수지를 떠올리며 비슷한 풍경의 경기도 양평 땅에 자리잡았다는 화가다. 해방 소식도 고향 저수지에서 멱 감다가 봤다는 화가는 한국전쟁 이래 이날 입때껏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2일까지 열리는 이동표 초대전 ‘달에 비친’전. 북녘에서 태어나 해방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60여년 실향민으로 살기까지, 노 화가의 삶이 오롯이 담긴 전시는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다. 그는 오랜 시간 어머니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화가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산후병으로 저세상 사람이 됐다. 어머니와 일면식도 없는 그는 오로지 상상에 의지해 어머니를 그렸다. 아이를 보듬는 어머니의 손이 유독 크고 두껍다. 화가는 “자식과 차마 헤어지지 못하겠는 마음에 손이 이렇게 커졌다고 누가 그러대”라고 했다. 화폭 속 어머니는 그날그날 상상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 모습이다. 미술학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6·25전쟁을 소재로 한 역사화는 유독 잿빛이다. ‘일인이역 골육 상쟁’(2000) 속 국군과 인민군은 모두 화가 자신이다. 1947년 해주예술학교 미술과에 입학해 그림을 그리던 소년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1·4 후퇴 때 월남해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 이번에는 국군으로 입대해 신산한 삶을 이어 갔다. 머리에 지게에 짐을 이고 지고 떠나는 ‘6·25전쟁과 피난 행렬’(2004), 총부리를 앞에 두고 부르짖는 ‘고향에 가고 싶다’(2005)는 모두 그때의 기억에서 비롯됐다. 10년 전서부터는 톤이 좀 바뀌었다. “6·25만 그리면 뭐하냔 말이야. 집에 가야 하는데.” 칠순 중반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통일이다. 고향 가자’라는 제목의 연작 시리즈는 색채부터가 빨강, 주황 일색으로 화사하다. 인물들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다함께 모여 옛집 찾아가세’, ‘만세 부르며 이날을 기뻐하세’ 등 깨알같이 글귀도 많다. “습관적으로 그러는데, 평론가 김윤환 선생이 보고 ‘더 표현하고 싶은 말을 글로 했다’고 하더라고. 내 마음을 더 쏟아내고 싶은데 (그림만으론) 한계가 있잖아.” 통일이 코앞인 양 일견 다급함도 느껴지는 그림. 최근의 남북 해빙무드가 화가의 마음을 더 들뜨게 한 걸까. “예술가들은 뭐 어느 시기에도 좋고 나쁘고가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 고향 가는 길목에서 한 거지 뭐.” 화실 한켠에 고향 땅을 확대한 구글 어스 지도를 두었다는 그. 생전에 고향 땅에 갈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화가는 말했다. “어쩌면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가면 늦지 않잖아. 건강하고 그러니까. 실은 (꿈에서) 엊저녁에 고향집에 갔어. 집은 없는데 석류가 이렇게 큰 게 있어 가지고 가서 까먹고….” 고향의 추억이, 실향의 아픔이 그에겐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런 그가 눈치를 보게 하는 젊은 사람이라는 게 되레 미안해졌다. 글 사진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女기상캐스터를 전사로 만든 한국형 신형 전투장비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女기상캐스터를 전사로 만든 한국형 신형 전투장비

    최근 육군의 가장 ‘뜨거운 감자’는 뭐니 뭐니 해도 '워리어 플랫폼(Warrior Platform)'이다. 워리어 플랫폼은 그동안 가장 값싼 소모성 전투 자원으로 인식되어왔던 개별 전투원을 정예화해 전투원의 전투력과 생존성을 극대화하겠다는 한국형 미래 보병체계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신형 전투복 등 피복류 10종, 신형 방탄헬멧 등 전투장구 10종, K2C1 소총 등 신형 전투장비 13종으로 구성된 워리어 플랫폼은 그동안 언론을 통해 집중적으로 홍보됐다. 일단 이 워리어 플랫폼을 입기만 하면 군대 다녀오지 않은 50대 여성도 특등사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육군 측의 주장이었다. 지난 8월, 육군은 자문위원들을 대거 초청해 이 장비의 체험 행사를 가진 바 있었다. 당시 참여한 자문위원들 대부분 10발 중 8~9발 이상이 표적지 중앙에 명중한 사격 결과를 받아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바 있었는데, 사실 당시 참여한 대부분의 자문위원들이 과거 사격 교육을 받은 ‘군필자’였기 때문에 “누구든 입기만 하면 특등사수가 된다”는 군 당국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워리어 플랫폼이 마치 SF 영화 속의 ‘아이언맨 슈트’처럼 누가 입어도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이라면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착용해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군 당국 주장대로 입기만 하면 특등사수가 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육군 측에 공개 실험을 요청했다. 실험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공인 가운데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여성을 주요 피실험자로, 군대에 다녀온 지 오래된 예비역들을 비교 대상 실험군으로 삼아 실험을 실시했다. 여성 피실험자로는 월드미스유니버시티 출신 기상 캐스터로 유명하지만 군대라고는 면회도 가본 적 없는 모 방송국 남혜정 기상캐스터가 섭외됐다. 비교 대상 실험군으로는 군 생활 중 소총 사격은 별로 해본 적 없다는 전역 30년차 예비역 병장인 50대 대학 교수, 전역 10년차 예비역 장교인 30대 직장인 각 1명이 섭외됐다. 피실험자 3명은 경기도 모처의 백마부대 실내 사격장에서 사격 실험을 실시했다. 우선 워리어 플랫폼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K-1A 소총 사격을 먼저 실시했는데, 25m 거리에서 A4 용지 크기의 표적지에 10발을 사격한 결과는 예상한대로 3명 모두 엉망이었다. 생전 처음 소총 사격을 해본 남혜정 기상 캐스터는 단 1발도 표적지에 맞추지 못했다. 심지어 표적은 고사하고 표적지로 사용된 A4용지조차 맞추지 못해 그녀가 사격한 총탄은 모두 엉뚱한 곳에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총 사격이라는 것이 난생 처음이기도 했고, 170cm의 큰 키에 40kg대 깡마른 체구가 소총의 강한 반동을 제대로 제어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 캐스터가 사격한 총탄은 반동 억제 불량으로 인한 상탄(上彈), 즉 대부분 표적지 상단의 천장이나 벽에 박혀 있었고, 표적지 종이에는 그을음만 잔뜩 묻어 있었다.두 번째 사수로 나선 전역 30년차 50대 대학교수는 군필자답게 비교적 안정적인 탄착군을 보였다. 10발 중 9발이 표적지에 명중했으나, 표적지 중앙의 검은 원(8~10점)에는 단 1발도 맞추지 못하면서 총점 54점을 기록했다. 이 교수는 시력 때문에 표적지가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사격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세 번째 사수였던 전역 10년차 30대 직장인은 가장 최근에 군대를 다녀온 피실험자답게 10발 모두를 표적지에 맞추기는 했지만, 단 2발만 검은 원에 맞췄을 뿐 나머지 8발은 중구난방으로 표적지에 맞춰 총점 56점을 기록했다. 이 직장인 역시 시력 저하로 인해 표적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미필자 0점, 군필자 평균 55점을 기록했던 워리어 플랫폼 미착용 사격 실험 종료 후 피실험자들은 워리어 플랫폼 장비를 착용하고 다시 10발 사격에 나섰다. 우선 소총에 워리어 플랫폼 장비인 레일과 3배율 확대경, 도트사이트 및 레이저 표적지시기를 장착하고 워리어 플랫폼 장구류인 방탄복과 헬멧 등을 착용했다. 장비를 착용한 뒤 동일한 25m 거리 표적에 대한 사격을 실시한 결과는 놀라웠다. 장비 미착용 사격에서 10발 중 2발만 표적 중앙을 명중시켰던 전역 10년차 30대 직장인은 8~10점대 표적지에 10발 모두 명중시키며 85점을 기록했고, 전역 30년차 50대 교수 역시 조준 착오로 인한 3발을 제외한 7발 전부를 표적지 중앙에 명중시키며 70점을 기록했다. 가장 극명한 효과를 보여준 것은 유일한 여성 참가자였던 남혜정 기상 캐스터였다. 장비 미착용 상태에서 단 1발도 표적지 종이에 명중시키지 못했던 남 캐스터는 워리어 플랫폼 장비를 착용하고 10발 모두를 표적지에 명중시켰다. 심지어 10발 중 6발이 표적 중앙에 명중했으며, 이 가운데 4발은 거의 같은 지점에 명중하며 총점 86점으로 단숨에 1등을 차지했다. 0점에서 86점으로 점수가 급상승한 이유는 바로 워리어 플랫폼이었다. 소총에 부착된 수직 손잡이와 신형 개머리판 덕분에 보다 안정적인 소총 파지와 견착이 가능해 안정적인 사격을 도왔고, 3배율 조준경과 도트사이트는 쉽고 빠르면서도 정확한 조준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장비들이 만들어낸 시너지 효과는 총이라고는 쏴본 적 없는 가냘픈 체구의 여성이 90%에 육박하는 명중률을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야간사격이었다. 원래 우리 군의 K2 소총에는 가늠쇠 부분에 야광물질인 트리튬(Tritium)이 삽입되어 있어 이를 이용해 야간 사격 하도록 되어 있지만, 트리튬의 수명이 짧고 발광 능력이 약해 이를 이용해 야간 사격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그러나 워리어 플랫폼을 이용한 야간 사격은 주간 사격처럼 표적이 환하게 보이는 가운데 주간사격만큼이나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우선 실내 사격장의 전등을 모두 소등해 칠흑 같은 어둠을 만든 뒤 방탄헬멧에 장착된 야간투시경을 착용, 전원을 켜자 전방이 대낮처럼 밝게 보였다. 소총에 장착된 레이저 표적지시기를 켜고 표적 중앙에 레이저를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기자 총탄은 마술처럼 표적지 중앙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격 결과 실험 대상 3명 모두 모두 표적지에 10발을 명중시켰으며, 최고점은 90점, 최저점은 73점을 기록했다. 이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워리어 플랫폼은 육군이 구상하는 3단계 발전 구상 가운데 1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육군은 1단계 워리어 플랫폼을 2023년까지 보급해 개선·보완 방향을 모색한 뒤 2026년부터는 개인과 전술지휘통제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동한 3단계 워리어 플랫폼 보급을 시작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3단계 워리어 플랫폼이 전력화될 경우 육군의 보병은 게임 상에서 ‘치트 코드(cheat code)’를 썼다고 표현할 정도의 가공할 전투 능력을 갖게 된다. 일부 게임에서는 게임 중 특정 치트 코드를 입력하면 캐릭터가 무적이 되거나 모든 적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어드밴테이지가 주어진다. 3단계 워리어 플랫폼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워리어 플랫폼 3단계 장비에서는 개인 또는 분대 단위로 지급되는 소형 단말기 화면을 통해 자신과 주변 전장 환경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다. 가령 적이 몇 미터 전방 어느 건물 몇 층 몇 번째 창문 뒤에 숨어있는지, 어느 벽이나 언덕 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단말기 화면에 표시된다. 과거 전쟁처럼 제압사격으로 수백발의 실탄을 낭비할 필요 없이 위치가 파악된 적을 수백 미터 밖에서 고배율 조준경으로 조준해 단발에 제거하거나 지능형 유탄 혹은 아군 지원화력을 요청해 간단하게 제압하면 된다. 이러한 가공할 시스템을 갖추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현재 시스템 기준 개인당 약 600만원이다. 2026년 이후부터 지급될 3단계 Block II형은 헬멧 디스플레이와 연동되는 차세대 소총, 일체형 전투복 및 근력증강 시스템 등이 통합되어 있어 현재 개발되고 있는 선진국 유사 체계보다 강력한 성능을 발휘하는 시스템으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혹자는 개인에게 엄청난 비용을 써가면서까지 워리어 플랫폼이라는 것을 추진하는 군에 대해 “이번에는 또 얼마를 해 먹으려는 것이냐”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훈련과 정신력으로 극복 가능한 것을 돈으로 메우려는 짓”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워리어 플랫폼은 비용 등 다른 제반 이슈들을 떠나 그동안 사람을 가장 값싸고 무가치한 자원으로 인식해왔던 한국군이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갖기 시작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러한 인식 전환이 그간의 개혁 시도와 같이 잠깐의 이벤트로 흐지부지되도록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인식 전환과 개혁 시도는 오랫동안 ‘괴짜’나 ‘파격’의 꼬리표를 달고 비주류 취급을 받았던 김용우 육군참모총장 등 소장파 장성들이 육군 수뇌부에 자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개혁은 개혁에 대한 의지가 자리에 대한 욕심보다 강한 사람들이 주요 직위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처럼 육군의 개혁이 전군의 환골탈태로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수뇌부가 자리를 걸고 덤벼든 개혁과 혁신의 불꽃이 중간에 꺼지지 않도록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국민이 강력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이일우 군사 전문 칼럼니스트(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finmil@nate.com
  • [애니멀 픽!] 북극곰의 인생샷…4.5m 고래뼈와 함께 ‘찰칵’

    [애니멀 픽!] 북극곰의 인생샷…4.5m 고래뼈와 함께 ‘찰칵’

    알래스카의 북극곰이 거대한 고래 뼈 주위를 맴도는 모습이 포착됐다. 일본 오사카 출신의 사진작가 에이지 이토야마(48)는 최근 알래스카에서 약 1살 된 새끼 북극곰과 그 가족을 포착했다. 이들 북극곰 가족은 버려진 거대한 고래 뼈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고래 뼈에서 건질 만한 먹이가 없는지 살피는 중이었다. 사진이 포착된 알래스카 카크토비크 마을에 사는 에스키모족은 합법적으로 1년에 3마리의 북극고래를 포획할 수 있으며, 살을 발라내고 남은 뼈와 사체를 북극곰 서식 지역에 내다 버리는 관습이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북극곰들이 고래 사체에 남아있는 살을 발라먹어 배를 채울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다. 사진 속 북극곰 가족이 발견한 고래 뼈는 길이가 4.5m 이상으로, 생전 몸무게는 75t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토야마는 “새끼 북극곰 여러 마리가 거대한 뼈 위에 올라타거나 주위를 달리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았다. 어미 북극곰은 새끼들이 안전하게 놀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며 놀이가 끝나길 차분하게 기다렸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사진 속 고래 뼈는 버려진 지 이미 몇 년이 지나 보였지만, 여전히 배고픈 북극곰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면서 “북극곰 가족은 이 거대한 고래 뼈에서 30분이 넘게 놀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덧붙였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中무협소설 대가 김용 타계…‘영웅문’, ‘녹정기’, ‘소오강호’ 등 남겨

    中무협소설 대가 김용 타계…‘영웅문’, ‘녹정기’, ‘소오강호’ 등 남겨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무협소설 ‘영웅문’, ‘녹정기’, ‘소오강호’ 등을 쓴 작가 진융(김용·金庸)이 30일 별세했다. 94세. 홍콩 명보(明報)에 따르면 진융은 이날 오후 홍콩 양화병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앞서 지난 2010년에도 진융 사망설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는 등 유명세만큼이나 그를 둘러싼 허위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고인의 작품은 한국독자에게도 친숙하다. ‘영웅문’(사조영웅전·신조협려·의천도룡기), ‘녹정기’ 등은 1980년대 영화, TV시리즈물로 제작되면서 전세계로 퍼졌다.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경계를 종회무진하는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층은 전세계에 3억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고인의 무협소설 ‘천룡팔부’는 중국 인민교육출판사가 2004년 11월에 펴낸 전국고등학교 2학년 필수과목인 어문독본 제2과에 실리기도 했다. 중국출판과학연구소가 발표한 ‘전국 국민 열독 조사’에서 고인은 바진(巴金), 루쉰(魯迅), 충야오(瓊瑤)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1997년 중국이 홍콩의 주권을 회복한 이후 홍콩 작가로는 처음으로 차량융(査良鏞)이라는 본명으로 중국 작가협회에 가입했다. 이어 3개월 뒤인 지난 9월 홍콩의 헌법 격인 홍콩 기본법 작성에 관여하고, 중국-홍콩의 통합에 노력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이 협회 명예 부주석으로 추대됐다. 범중국 최고 문장가로 평가받는 고인은 문학계 외에 언론계에서도 오랫동안 몸담았다. 대학 졸업 후 상하이 대공보에서 국제부 편집을 담당했고 1959년 명보를 설립해 1968년 명보 주간지도 만들었다. 그러다가 1989년 명보 사장직을 그만뒀다.고인은 중국이 번영하게 된 주요 원인을 중국 민족의 융화적 특성으로 봤다. 생전 한 인터뷰에서 “현대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을 강조하지만, 이는 좋지 않은 현상으로 세계가 중국의 융화 사상을 배워 충돌과 불화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친 바 있다. 중국 매체와 네티즌도 일제히 애도의 반응을 쏟아냈다. 인민일보 해외판은 ‘세상에 김대협(협객)이 더 이상 없다’는 제목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 등 중국 SNS에는 ‘정말 한 시대의 막이 내렸다’, ‘세상에 더 이상 무협은 없다.’, ‘김 선생님이 가니 순식간에 내 청춘이 무너져 내렸다’ 등 그의 타계를 애도하는 글이 꼬리를 물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故 김주혁 오늘(30일) 사망 1주기, 아직 가시지 않은 슬픔...비공개 추모식

    故 김주혁 오늘(30일) 사망 1주기, 아직 가시지 않은 슬픔...비공개 추모식

    배우 故 김주혁이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30일 故 김주혁이 사망 1주기를 맞은 가운데, 소속사 나무엑터스 측이 비공개 추모식을 진행한다. 이날 소속사 측은 “고인의 지인과 동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추모식을 연다”고 밝혔다. 이어 “소박하고 배려가 넘쳤던 고인 생전 성향을 고려해 추모식 장소와 참석자 명단 등 세부 사항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한편 1998년 SBS 공채 8기로 연예계에 데뷔한 김주혁은 다양한 영화, 드라마에서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카이스트’ ,‘프라하의 연인’, ‘무신’, ‘아르곤’, ‘광식이 동생 광태’, ‘청연’, ‘싱글즈’, ‘아내가 결혼했다’, ‘비밀은 없다’, ‘공조’ 등에 출연했다. 이외에도 KBS2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1박 2일’에 출연해 시청자와 교감하며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故 김주혁은 지난해 10월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고 당시 주변 차량 블랙박스 화면을 확인한 결과, 故 김주혁이 몰던 벤츠 SUV 차량은 도로 위에서 천천히 서행하다 서서히 방향을 잃고 옆 차선에 있던 그랜저 승용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뒤 오른쪽 아파트 벽면에 부딪혔다. 사고 이후 차량 급발진, 심근경색, 약물 복용 등 사망 원인에 관한 여러 추측이 나왔으나, 부검, 사고 차량 감식 등을 거친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팬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故 김주혁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가 생전 출연한 작품 ‘독전’, ‘흥부’ 등이 개봉하면서 팬들 그리움을 샀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레스터 구단주 “인터뷰 마다하고 누굴 돕는 데만 열심이었던”

    레스터 구단주 “인터뷰 마다하고 누굴 돕는 데만 열심이었던”

    2016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창단 후 처음 우승했을 때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 레스터 시티 구단주는 로열 레스터 인퍼머리(서민 진료소)에 100만 파운드(약 14억 6000만원)를 기부하겠다고 공표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27일(이하 현지시간) 헬리콥터 참사로 세상을 뜬 스리바다나프라바 구단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헬리콥터가 참변을 당하는 순간을 목격한 이언 스트링거 BBC 기자는 “돈 많고 성공한 억만장자였으며 검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기도 했다”고 고인을 돌아봤다. 하지만 생전에 인터뷰를 극구 마다하고 사생활을 오롯이 즐겨 개인적 면모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고인은 태국 관광산업이 최근 20~30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한 과실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했다. 면세점 체인인 킹파워 인터내셔널을 창업해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늘 독점과 특혜 시비로 눈총과 질시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16년 레스터가 동화처럼 우승하며 그의 프로필과 이미지가 완전 달라졌다고 조너선 헤드 BBC 기자는 짚었다. 그의 면세점은 1989년에 창업해 고속 성장을 했다는 점만 알려져 있을 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중국계 혈통인 그는 네 자녀를 뒀는데 모두 킹파워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헤드에 따르면 중국계 가족 경영의 전형이라고 했다. 헤드는 “그는 인터뷰를 하지 않아 그렇게 레스터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레스터의 홈 경기를 관전한 뒤 런던 집과 버크셔주 별장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말들을 돌봤다. 또 좋은 와인을 감별하는 것과 도박, 말들을 사랑했다. 영국 왕실 사람들과 폴로를 즐기는 모습도 간혹 눈에 띄었다. 태국 왕실과도 긴밀해 국내 경제에서 많은 혜택을 받은 이들이 응당 지역사회에 많은 것을 돌려줘야 한다며 많은 자선 활동에 동참했다. 지난 7년 동안 왕실의 자선 활동에 가장 많은 동참을 한 인물이 스리바다나프라바 구단주였다. 태국 불교 사원에서 경기 전 선수들과 팀의 행운을 빌기도 했고 승려를 모셔와 라커룸 안에서 축원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스트링거 기자는 레스터 구단만 10년 넘게 출입했는데 구단주가 자신의 생일 때면 케이크를 모두에 나눠주고 서포터들에게 음료나 원정 여행 경비, 아침식사, 스카프 등을 ‘쏘는’ 것을 숱하게 봤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열흘 안쪽에 레스터 시의회는 1억 파운드(약 1460억원)를 들여 훈련 구장을 짓도록 승인했는데 구단주는 이런 식으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구단에 해주는 일을 매우 즐거워 했다. 서포터 클럽 회장인 클리프 지네타는 “구단주 가족은 레스터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세계지도에서도 알아볼 만한 도시로 키웠다. 수백만 파운드를 구단에 투자했고 병원, 어린이 시설에도 많은 돈을 썼다. 성탄절이면 파이와 음료까지 공짜로, 그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고 말했다.구단주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는데 2016년 우승 직후 아들 아이야왓트가 댄 론 BBC 기자와 한 것이 예외적이었다. 아이야왓트는 “기적이라고요. 그렇죠. 영감을 불어넣었고 사람들이 얘기하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스포츠의 기준을 새로 설정하고 세상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었어요. 스포츠만이 아니라 인생이 그런 것이지요. 레스터를 삶의 잣대로 삼는다면 사람들은 싸우고 해보려 할 거에요. 그리고 언젠가는 이루겠지요. 모든 이는 그런 일을 할만한 권리를 갖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이 도시를 위해 기적이지요. 선수들을 위한 기적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열심히 일해 이만한 위치에 이르렀어요. 운만으로는 안될 일”이라고 밝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1박2일’ 김주혁 1주기 특집 “잘 지내고 있냐 동생들” 목소리에 ‘뭉클’

    ‘1박2일’ 김주혁 1주기 특집 “잘 지내고 있냐 동생들” 목소리에 ‘뭉클’

    ‘1박 2일’ 김준호-차태현-데프콘-김종민-윤동구-정준영과 故 김주혁 지인들이 함께 떠난 ‘김주혁 추억 소환’ 여행이 펼쳐졌다. 영원한 맏형 ‘구탱이형’ 김주혁 1주기를 보내는 ‘1박 2일’만의 방법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28일 방송된 KBS 2TV ‘해피선데이-1박 2일 시즌3’(연출 유일용, 이하 ‘1박 2일’)은 전국 기준 12.9%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 시간대 일요일 예능 프로그램 중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한편 동 시간대 예능 프로그램 MBC ‘복면가왕’은 평균 7.4%(1부: 5.9%, 2부: 8.8%), MBC ‘궁민남편’은 3.3%, SBS ‘집사부일체’는 평균 7.7%(1부: 6.0%, 2부: 9.3%) 수치를 기록했다.(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날 방송에서는 김주혁 1주기를 맞아 여섯 멤버들과 그를 그리워하는 지인들이 모여 고인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날 여섯 멤버들은 ‘제2회 최고의 가을밥상’에서 만든 낙지호롱, 낙지물회, 돼지갈비를 갖고 제작진이 마련한 특별한 사진전을 방문했다. 그 곳은 여섯 멤버들과 故김주혁의 어색했던 첫 만남을 시작으로 구탱이형 별명 탄생, 눈물 가득했던 이별까지 전국팔도를 함께 여행하며 웃고 울었던 소중한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이 마련됐고 특히 “잘 지내고 있냐 동생들”이라는 생전 음성이 공개되자 바로 눈물을 훔치며 울컥하는 멤버들이 모습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 날 김주혁 추억 소환 여행을 위해 특별히 그의 가장 절친했던 배우 한정수와 정기진이 자리한 가운데 정기진은 “주혁이가 처음으로 소개해준 연예인 친구가 ‘1박 2일’ 친구들”이라며 김주혁 덕분에 이뤄진 소중한 인연을 소개했고 여섯 멤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애틋했던 故김주혁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더욱이 ‘1박 2일’ 연출을 맡았던 유호진 전임 PD,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를 함께한 배우 봉태규, 영화 ‘공조’ 김성훈 감독, 소속사 김종도 대표, ‘전원일기’ 편에서 엄마와 아들로 따뜻한 감동을 안긴 김점순 할머니 등이 함께해 눈길을 끌었다. 김주혁과 함께 찍은 사진이 가장 많았던 데프콘이 “저 사람을 챙겨야겠다는 느낌이 강했다”며 김주혁과의 첫 만남 당시 속마음을 털어놓은 가운데 막내 정준영과 김준호와 형제애도 회자됐다. 유호진 전임 PD는 “사석에서도 준영이가 주혁이 형을 진짜 따랐다”는 말로 17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김주혁과 정준영의 끈끈한 형제애를 밝혔고 김준호는 자신의 성대모사에 항상 배꼽잡고 웃어주던 김주혁을 기억했다. 특히 멤버들은 ‘1박 2일’ 촬영 동안 항상 최선을 다했던 김주혁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망가짐 불사는 물론 본인이 가장 싫어했던 노래 부르기와 냉수 마찰 등을 거리낌없이 해내며 매사에 열심이던 김주혁. 여섯 멤버들 모두 입을 모아 ‘금연 여행’, ‘김제 신덕마을’ 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말했고 ‘1박 2일’과 김주혁의 아쉬움 가득했던 이별에 대해 김종도 대표는 “주혁이가 우는 걸 많이 안 봤는데 마지막에 차 탈 때 촌스러운 울음이 터진 걸 보고 이 친구가 ‘1박 2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구나 생각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데프콘은 “이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며 차태현은 “여행지 곳곳마다 남겨진 형 흔적을 볼 때 가장 그립다”라는 말로 애틋함을 드러내는 등 멤버들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인을 그렸다. 이처럼 김주혁에게 최고 웃긴 동생 김준호에서 믿음직한 동생 차태현, 항상 챙겨주고 싶은 동생 데프콘, 말하지않아도 서로의 진심을 알아줬던 김종민, 순수하게 서로를 좋아했던 막내 정준영까지. 김주혁과 함께 했던 행복했던 기억 속 그와 함께한 2년 추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ing)로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을 기약했다. 이 날 방송 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와 SNS 등에서 “구탱이형 첫 화부터 하드캐리했잖아”, “하나하나 기억나네”, “구탱이형 ‘1박 2일’ 그만두고도 애정이 많았었지”, “구탱이형이 멤버들 사랑한 거 이상으로 멤버들도 구탱이형 진심이잖아. 정말 이멤버 리멤버 포에버”, “마지막 날 스태프들이 엉엉 울기 시작하니까 왜 우냐면서 억지로 참으면서 웃는 표정이 아직도 생생”, “정말 재미 이상으로 멤버들 합이랑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보였다” 등 반응을 보였다. ‘1박 2일’은 매주 일요일 오후 4시 50분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생생리포트]‘누가누가 더 큰 불상 세우나’ 경쟁하는 중국 지방도시들

    [생생리포트]‘누가누가 더 큰 불상 세우나’ 경쟁하는 중국 지방도시들

    중국 각 지방에서 좀 더 큰 불상을 세우기 위한 승자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중국 산시(山西)성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구리 불상이 3억 8000만 위안(약 622억원)을 투자해 건설됐다. 한 사업가가 8년여에 걸쳐 만든 이 불상은 높이만 88m로 22층 빌딩에 해당하는 규모를 자랑한다. 허난성 핑딩산시 루샨현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불상이 있다. 2008년 108㎏의 금으로 만든 금불상이 12억 위안을 들여 세워졌다. 루샨현은 연간 주민 소득이 1만 2800위안(약 200만원)에 지나지 않는 가난한 시골 마을이다. 건설에 11년이 걸린 이 금불상의 높이는 208m에 이른다. 2011년 이 일대는 중국 최고 등급의 관광지인 5A급 관광명소로 지정되었다. 중국에서는 몇 년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조각상이 들어서고 있다. 관광객을 모으기 위한 초대형 조각상은 단지 부처만이 아니라 관우, 노자, 공자, 황제, 영락제, 마조, 마오쩌둥 등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황금을 입힌 마오쩌둥 조각상은 2016년 허난성의 한 빈곤촌에 세워졌지만 당황한 지방 정부에 의해 바로 다음날 산산조각이 났다. 생전에 마오는 우상과 종교 숭배를 금지했지만 중국 각 지방에서 불상을 비롯해 대형 조각상을 세우는 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다. 중국의 관광지는 물가 대비 입장료가 비싸기로 악명이 높다. 중국 국가종교사무국의 왕쭤안(王作安) 국장은 “중국의 몇몇 불상은 지나지게 큰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어 “만약 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을 세우면 다음에 더 큰 불상을 세우려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라며 중국의 거대 불상 세우기 경쟁을 설명했다. 경쟁적으로 대규모 조각상을 세우는 것은 199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이는 1997년 우시에 들어선 88m의 링샨 불상의 성공 때문이다. 당시 링샨 불상이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조명받으면서 경쟁적으로 더 큰 불상이 생겨나게 됐다. 중국 불교협회와 국무원, 국가종교사무국에서는 더 이상 대규모 야외 불상을 세우지 말라며 불상 건설 경쟁을 자제시키려 했지만 관광 수익을 벌어보려는 이들은 당국의 경고를 무시했다. 하지만 링샨 불상이 연간 400만명의 관광객을 쓸어모으는 명소가 된 것은 단지 거대한 불상 때문이 아니라 불교문화 박물관, 불교 주제 민속촌 등을 건설하고 세계 불교 포럼을 여는 등의 노력 때문이다. 관광 전문가들은 거대한 조각상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국외여행으로 눈이 높아진 중국 관광객을 그러모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나는 작품 지키는 묘지기”…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 별세

    “나는 작품 지키는 묘지기”…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 별세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예언자가 없더라도 이제는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남의 작품에 대한 평을 쓰는 자신을 ‘묘지기’로 비유했던 문학평론가가 갔다. 1세대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가 25일 오후 7시 30분쯤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한국문학의 산증인인 고인은 평생을 한국문학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는 일에 몰두했다. 수십년 간 쉬지 않고 문예지에 발표된 거의 모든 소설 작품을 잃고 월평(月評·다달이 하는 비평)을 썼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30여년간 교편을 잡으며 내로라하는 국문학자, 문학평론가, 작가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쉼없이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인생이었다. 그렇게 남긴 학술서와 비평서, 산문집, 번역서만 무려 200여 권에 달한다. 1936년 경남 진영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955년 서울대 사범대 국어과에 입학해 같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 ‘문학방법론 서설’과 ‘역사와 비평’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그는 생전에 “글을 쓰고 싶어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중도에 작가의 꿈을 접고 국문학 연구에 빠져들었다”며 ‘겁도 없이 청무밭에 뛰어든 흰나비꼴’이었다고 스스로를 회상했다. 고인은 여든이 넘어서도 꾸준히 소설 작품을 읽고 월평을 써 후배 평론가들의 귀감이 됐다. 특히 오직 작품만으로 평을 쓴다는 원칙을 고수해 작가들에게 존경받았다. 당대 현장비평을 담은 ‘우리문학의 넓이와 깊이’, ‘우리 소설의 표정’, ‘현대 소설과의 대화’, ‘소설과 현장비평’, ‘우리 소설과의 대화’, ‘혼신의 글쓰기 혼신의 읽기’ 등을 냈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이광수·염상섭·김동인·박영희·임화·이상 등의 문학 활동을 비평적 전기 형태로 정리해 널리 알려졌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 ‘염상섭 연구’, ‘임화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좌익 문인단체인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연구하고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신론’, ‘한국근대문학양식논고’, ‘한국근대문학사상사’ 등 문학사에 관한 연구서도 냈다. 200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예술원 문학분과 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황조근정훈장(2001)과 은관문화훈장(2016)을 받았다. 현대문학신인상, 한국문학 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편운문학상, 요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대상(학술 부문), 청마문학상도 수상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27일 오후 5시에 추모식을 한 후 28일 오전 7시 발인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가정혜씨가 있다. 유족은 조화와 조의금을 정중히 사양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스티븐 호킹이 본 우주 그리고 신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스티븐 호킹이 본 우주 그리고 신

    우주전문사이트 스페이스닷컴은 21일(현지시간) 스티븐 호킹의 마지막 저서를 소개하면서 “우리 우주에 신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선언한 호킹의 주장을 보도해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살아생전 스티븐 호킹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책상에서 또는 그 너머로 자신의 마음을 블랙홀의 가장 깊숙한 데까지 소용돌이치게 하고, 시간의 시작과 만나기 위해 가없는 우주를 가로질러 수십억 년의 시간을 거슬러오르기도 했다. 그는 우주의 창조를 과학자의 눈으로 보았고, 저 거대한 수수께끼들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우주에는 우리뿐인가? -에 관한 토론에 초청받으면 언제나 과학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밝혔고, 그것은 때로 종교인들을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다. 호킹이 첫 부인과 결별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호킹의 종교관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벤텀 북스가 지난 16일에 출간한 스티븐 호킹의 마지막 책 '큰 질문에 짧은 답변'(Brief Answers to Big Questions)은 호킹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골치 아픈 문제, 곧 ‘신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호킹의 소견으로, 10편의 은하계 에세이로 시작된다. 호킹의 대답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족과 동료,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인터뷰, 수필, 연설 등을 통해 수집된 것으로, 호킹의 독자들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니다. 지난 3월에 별세한 호킹 박사는 저서에서 “나는 우주가 과학의 법칙에 따라 무에서 저절로 탄생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히면서 “자연법칙이 그렇게 정해진 거라고 받아들이면 곧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면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라고 말한다. 호킹은 평생 빅뱅이론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우주는 원자보다 작은 한 특이점에서 갑자기 폭발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 원시원자로부터 우주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물질, 에너지, 공간이 생겨났고, 이 모든 원시 물질은 엄밀한 과학법칙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우주로 진화했다는 것이 빅뱅 이론의 요지다. 호킹과 빅뱅론자들은 중력과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및 몇몇 법칙들을 조합하여 우주 만물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호킹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원한다면 자연법칙이 신이 하는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신이라는 존재의 정의 그 이상의 것이다.” 요컨대, 우주가 과학적으로 유도된 자동조종 장치로 운행되고 있다면, 전능한 신의 유일한 역할은 우주의 초기 조건을 설정하여 그 법칙이 구체화될 수 있게 하고, 그런 다음 빅뱅을 일으키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것을 지켜보는 일일 거라는 얘기다. “빅뱅이 일어날 수 있도록 신께서 양자 법칙을 만들었을까?”라고 반문한 호킹은 “나는 신앙인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지만, 과학은 신적인 창조자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책에서 말한다. 호킹의 설명은 아원자 입자의 행동을 설명하는 양자역학에서 시작된다. 양자역학에서 양성자나 전자 같은 아원자 입자가 행동하는 방식은 우리 상식을 벗어난 것으로, 존재하지 않던 입자가 잠시 모습을 나타내다가 다음 순간 사라져 전혀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난다는 식이다. 그 중간 단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호킹은 “우주는 한때 원자보다 작은 아원자 입자의 크기였기 때문에 빅뱅에서 양자와 유사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더없이 광대하고 복잡한 우주 자체는 자연의 알려진 법칙을 위반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신이 양자 크기의 특이점을 만들었다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양자 역학적인 스위치가 찰칵 켜져 빅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킹 박사는 이에 대해서도 과학은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선 블랙홀 물리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블랙홀이란 붕괴된 별이 극한의 밀도로 응축된 결과 중력이 무한대인 존재로서, 빛마저도 여기서 탈출할 수 없다. 나아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왜곡된다. 간단히 말해서, 블랙홀 속에는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도 특이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빅뱅 이전에는 시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빅뱅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질문에 대해 호킹은 “빅뱅 이전에는 시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이전이란 없다”고 설명하면서 “원인을 찾을 만한 시간이 없기 때문에 마침내 원인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곧 창조자가 존재할 시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창조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호킹은 이렇게 부연한다. “빅뱅 이전의 사건들에는 아무런 관찰 결과가 없으므로 이론으로 추구할 대상에서 벗어나며, 시간은 빅뱅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호킹의 주장이 유신론자들을 설득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호킹의 의도는 결코 그들을 실망시키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킹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거의 종교적인 열정을 지니고 ‘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과학자였다. 그의 우주관에서 볼 때 창조자와 자연법칙은 양립할 수 없지만, 호킹의 우주에는 여전히 믿음과 희망, 경이, 특히 감사가 가득 넘치고 있다. 호킹은 그의 마지막 책 첫 장의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주의 이 장대한 디자인을 감상할 수 있는 이 한 번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담당 의사가 쓴 분노의 글···“다시 불씨가 되기를···”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담당 의사가 쓴 분노의 글···“다시 불씨가 되기를···”

    서울 강서구 PC방에서 아르바이트생 피살 사건에 대해 국민적 공분이 폭발하는 가운데 당시 담당 의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분노의 글을 올리며 상황을 전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지난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재된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 또 심신미약 피의자입니다.’는 19일 오후 6시 30분 현재 51만 7000여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청와대 답변 기준(30일 기간에 20만명 이상 동의)을 가뿐히 넘겼다. 이와 관련해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이날 오후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강서경찰서를 방문해 수사 진행 상황과 관련한 브리핑을 받고 유족을 만나기도 했다. 이 청장은 “PC방 살인사건과 관련한 수사 상황을 보고받고 엄정한 수사를 지시하기 위해 왔다”며 “마침 유족들이 조사받기 위해 와 계셔서, 고인의 명복 빌고 유족들께 심심한 애도와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터넷이나 언론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의혹에 대해서도 유족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서 철저하고 엄정하게,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수사할 것을 당부했다”며 “유관단체와 협조해서 유족들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지원도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를 받고 있는 권익현 서울남부지검장도 이날 ‘가해자 동생 책임론’과 관련된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를 받고 “철저히 지휘해 진상파악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금 의원이 “경찰이 규정과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도 살펴봐달라”고 재차 당부하자, 권 지검장은 “네”라고 답했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전문이다. 1. 나는 강서구 PC방 피해자의 담당의였다. 처음엔 사건에 대해 함구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였고, 알리기에는 공공의 이익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사망 이후의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아침 이후로 혼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지냈다. 하지만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하고 많은 사실이 공개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고인이 어디에서 몇 시에 인체 어느 부위를 누구에게 얼마나 찔렸으며, 어느 병원으로 이송되어 몇 시에 죽었는지 알고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당시 확인하지 못했던 CCTV나 사건 현장 사진까지 보도됐다. 그러기에 이제 나는 입을 연다. 지금부터 내가 덧붙이는 사실은, 그가 이송된 것으로 알려진 병원의 그 시각 담당의가 나였다는 사실과, 그 뒤에 남겨진 나의 주관적인 생각뿐이다.2. 그는 일요일 아침에 들어왔다. 팔과 머리를 다친 20대 남자가 온다는 연락을 먼저 받았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데, 구급대원의 목소리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곧 그가 들어왔다. 그는 침대가 모자랄 정도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에 더 이상 묻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그를 본 모든 의료진은 전부 뛰어나갔다. 상처를 파악하기 위해 옷을 탈의하고 붕대를 풀었다.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잘생기고 훤칠한 얼굴이었지만 찰나의 인상이었다. 파악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상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복부와 흉부에는 한 개도 없었고, 모든 상처는 목과 얼굴, 칼을 막기 위했던 손에 있었다. 하나하나가 형태를 파괴할 정도로 깊었다. 피범벅을 닦아내자 얼굴에만 칼자국이 삼 십 개 정도 보였다. 대부분 정면이 아닌 측면이나 후방에 있었다. 개수를 전부 세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나중에 모두 서른 두 개였다고 들었다. 따라온 경찰이 범죄에 사용된 칼의 길이를 손으로 가늠해서 알려줬다. 그 길이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보통 사람이 사람을 찔러도 칼을 사람의 몸으로 전부 넣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에게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해자는 이 칼을 정말 끝까지 넣을 각오로 찔렀다. 모든 상처는 칼이 뼈에 닿고서야 멈췄다. 두피에 있는 상처는 두개골에 닿고 금방 멈췄으나 얼굴과 목 쪽의 상처는 푹 들어갔다. 귀는 얇으니 구멍이 뚫렸다. 양쪽 귀가 다 길게 뚫려 허공이 보였다. 목덜미에 있던 상처가 살이 많아 가장 깊었다. 너무 깊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복기했을 때 이것이 치명상이 아니었을까 추정했다. 얼굴 뼈에 닿고 멈춘 상처 중에는 평행으로 이어진 것들이 있었는데, 가해자가 빠른 시간에 칼을 뽑아 다시 찌른 흔적이었다. 손에 있던 상처 중 하나는 손가락을 끊었고, 또 하나는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 사이로 들어갔다. 피해자의 친구가 손이 벌어져 모아지지 않았다고 후술한 기록을 보았다. 그것이 맞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하나가 형태를 파괴할 정도로 깊었다.미친 새끼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미친 새끼라고 생각했다. 피를 막으면서 솔직히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극렬한 원한으로 인한 것이다. 가해자가 미친 새끼인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둔 뿌리 깊은 원한 없이 이런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무 살 청년이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원한을 진단 말인가. 그런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같이 온 경찰이 말다툼이 있어서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을 찌른 것이라고 알려 줬다. 둘은 이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미친, 경악스럽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순간 세상이 두려웠다. 모든 의료진이 그 사실을 듣자마자 욕설을 뱉었다. 환자는 처음부터 의식이 없었다. 손과 발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수만 있었다. 칼은 두개골을 뚫지 못했고, 흉부와 복부의 주요 장기 손상은 없었다. 얼굴과 목과 손은 주요 장기는 아니다. 막아야 하는 것은 출혈뿐이라고, 그래서 살 수도 있겠다고,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온 병원의 수액과 혈장 용액을 쏟아붓고, 혈액을 준비하던 내원 이십여 분 만에 심박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심정지였다. 잠깐의 심폐소생술 후 환자는 돌아왔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의료진이 상처를 거칠고 급하게 막았다. 심장이 느려지면 피가 멎었다가 다시 심장이 뛰면 모든 상처에서 다시 피가 솟구치고 부었다. 상처가 너무 많아 어떤 주요 혈관이 어떻게 상했는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주요 동맥을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 때문에 혈관을 색전할 수도 없었고, 그전에 집중치료실을 떠날 수도 없었다. 상태가 급박해 시행할 수 있는 영상검사도 없었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두경부의 깊은 곳에서도 피가 쏟아지는 듯 했다. 그의 혈액은 처음부터 수액과 섞여 물처럼 묽었다. 이후 그의 심장은 한 번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피를 부으면 상처에서 피가 솟았다가 심장이 멈추면 멎기를 반복했다. 심폐소생술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에 심각한 범발성 혈관 내 응고증이 찾아왔다. 그는 그 짧은 시간에 피를 사십 개나 맞았다. 사방이 피바다였다. 그는 결국 그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죽었다. 참담한 죽음이었다. 얼굴과 손의 출혈만으로 젊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려면 정말 많은, 의도적이고 악독한 자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많은 자상을 어떻게 낸단 말인가. 그럼에도 의사로서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복잡한 심경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보도된 현장 사진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알았다. 그가 내 앞에 왔을 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서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내고 왔던 것이다. 그것을 머릿속으로 예측하는 것과 현장에 흩뿌려진 피를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한 사람이 쏟았다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피였다. 그는 여기서 죽었지만 실제로는 현장에서 거의 죽은 사람이었다. 악독하게 찌르는 칼을 받아내고 저 정도의 피를 순식간에 흘린 사람을 살리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구나. 나는 의학적인 면에 있어서 죽음을 다소간 납득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기력했다. 그 젊은이에게, 가해하는 사회에게, 무작위로 사람을 찌르는 번뜩이는 칼에, 그리고 있을 수 있었던 만약에, 모든 것에 나는 무력했다.3.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죄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끼리 언론에 보도된 CCTV를 보았다. 가끔 정말로 잔인한 장면보다, 아무것도 아닌 화면이 더 잔인해 보일 때가 있다. CCTV에서는 어떤 상처도 입지 않은 그가 당일 내가 보았던 옷을 입고 멀쩡히 걷고,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손가락질하던 누군가가 그를 덮치는 장면에서 영상이 끝나는데... 나는 그 이후를 직접 목격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보지 못했던 그전의 장면이 왜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잔인해 보였는지. 그래서 그 걸음걸이가 왜 우리 모두를 놀라고 두렵게 했던지. 그는 상처 하나 없었는데. 그는 그전까지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다만 내가 본 그 옷을 입은 사람이 그 화면에서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는 영상일 뿐이었는데. 그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일까. 그것마저 사람을 공포심에 들게 하는 것일까. 나는 이후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한동안 말을 멈췄고, 학회장에서도 문득 이를 악물었으며, 사람들과의 식사에서도 잠깐씩 뇌압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피가 내 몸에서 씻겨 나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고 있었다. 사건을 직접 목격한 나는 그 분노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서도 참담했다. 상처의 이미지와 실재했던 상처의 간극. 그에 지쳐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죄스러운 느낌, 참담한 느낌, 악한 본성에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 그의 목덜미에 들어갔던 비현실적인 자상과 벌어져 닫히지 않는 손가락. 모든 죽음이 그렇지만, 어떤 죽음은 유독 더 깊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었다.4. 그가 우울증에 걸렸던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은 그에게 칼을 쥐여주지 않았다. 되려 심신 미약에 대한 논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울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잠재적 살인마로 만드는 꼴이다. 오히려 나는, 일요일 아침 안면 없던 PC방 아르바이트 생의 얼굴을 서른 두 번 찌를 수 있던 사람의 정신과적 병력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더 놀랄 것이다. 그것은 분노스러울 정도로 별개의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울증은 그에게 칼을 쥐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 개인의 손이 집어 든 것이다. 오히려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심신미약자의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것이라는 게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사건과 사실 관계, 처벌과 공권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그리고 이 청원과 여론과 이어지는 논란에 대해서, 직접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솔직한 마음으로 회의감이 든다. 그 끔찍한 몰골에 도저히 나를 대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인죄의 처벌이 더욱 엄격해지고 공권력이 극도로 강해진다고 해도, 이런 상식 밖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이 올까? 그것들이 일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사람을 삽시간에 서른 두 번 찌르는 사람을 막을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처벌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도리를 생각해서 이런 범죄를 벌인 것일까? 모두 그렇지 않다. 이렇게 인간을 거리낌 없이 난도질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고인은 평범한 나와 같아 보였다. 환자를 진료하고 돌아가는 퇴근길에 불쑥 나타나는 칼을 든 사람을,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목덜미와 안면을 내어주는... 그것은 밥을 내던 식당 주인일 수도 있고... 고객을 응대하던 은행 직원일 수도 있고... 그렇게 직업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던 여러분일 수도 있었다. 어떤 이가 지닌 인간의 본성은 최악이다. 그것들이 전부 우리가 조종할 수 없는 타인의 인격이라는 한도 내에서 우리는 영원히 안전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것은 다시 어딘가에 있는 누구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할지라도 이 사실을 바꾸는 것은 절망적으로 불가능하다.5. 나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언급해서 고인과 유족에게 누가 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나는 나름대로 참담했지만, 잠깐 만난 환자와 생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의 슬픔을 비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슬픔을 생각하면 나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다. 다만 나는 억측으로 돌아다니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언급함으로써 이 사건의 엄중한 처벌과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고, 사회적으로 재발을 방지되기를 누구보다도 강력히 바란다. 그래서 이 언급이 다시금 그 불씨나 도화선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고도 믿기 힘들었던 비인간적인 범죄 그 자체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짓을 진짜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무기력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이 사건에 대한 무기력함의 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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