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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로의 아침] 영화와 생태관광 이야기/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영화와 생태관광 이야기/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휴고 위빙) 요원이 한 말이다. “이 행성의 모든 포유류는 주위 환경과 자연적인 균형을 맞춰 지내는데 너희 인간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희는 어느 곳에 이주하면 번식을 거듭해 마침내 모든 자연 자원을 소진하고 그다음에는 유일한 생존 방법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이 행성에 그 같은 생존 방식을 따르는 생물이 하나 더 있다.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 인간은 이 행성의 암이다.” 비슷한 대사가 ‘지구가 멈추는 날’에도 나온다. 신과 ‘거의 동급’일 정도로 전능한 외계인 클라투(키아누 리브스)가 지구로 날아온다. 푸른 지구를 인간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다. 물론 인류의 씨가 마르기 직전 클라투가 이를 저지하긴 하지만 인간을 바이러스로 보는 관점에서 스미스 요원과 클라투는 이견이 없다.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도 그랬다. 악당 밸런타인(새뮤얼 잭슨)이 세계 유력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나름의 논지를 편다. 이를 요약하면 지구가 열을 내는 건 바이러스와 싸우기 때문인데 그 바이러스가 바로 인간이라는 거다. 영화가 당대의 시각을 반영하는 경향성이 뚜렷한 매체라고 전제한다면 서양 사람들이 생태계에 대해 느끼는 위기감이 절박한 수준인 듯싶다. 시각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인간을 조롱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방안은 없다. 마음은 급하더라도 차근차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 방안 중 하나가 생태관광 활성화다.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비교적 조명을 덜 받았던 관광 분야다.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들의 생태를 아는 것이다. 생명의 순환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애정도 도타워질 테니 말이다. 그러니 생태관광의 본질은 결국 다른 생명을 이해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겨울철은 생태관광 비수기다. 반면 가장 이채롭고 아름다운 생태계 풍경과 만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철새들이 선사하는 풍경이다. 한데 우리는 철새 월동지에 접근할 수 없다. 겨울철 철새 탐조가 축산 농가에 죄를 짓는 행위처럼 돼 버렸기 때문이다.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의 주범이 철새인지, 극도의 이윤 창출만 따졌던 인간의 몫은 아닌지 면밀히 따져 보지 않은 채 우리는 한때 철새를 향해 방역제를 뿌려 댔다. 요즘 영국 BBC 등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자면 우리가 생태관광의 후진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이 프로그램을 통해 주장하는 건 한결같다. 예컨대 상아를 얻자고 코끼리 11종 가운데 8종을 멸종시키기보다 코끼리 보라고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게 더 지속 가능한 산업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목을 접할 때면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들이 ‘OECD’ 가입국인 우리에게까지 그런 식으로 조근조근 설득하는 듯해서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낙곡 한 톨까지 싸그리 긁어 가는 것보다 그 정도는 두루미를 위해 남겨 두는 게 낫다, 가금류를 밀생시키는 축산 방식은 조금씩 줄이고 철새 탐조로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게 미래와 환경을 위해 더 남는 장사라고 말이다. angler@seoul.co.kr
  • 청소부 여인과 괴생명체의 사랑이야기…‘셰이프 오브 워터’ 예고편

    청소부 여인과 괴생명체의 사랑이야기…‘셰이프 오브 워터’ 예고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로맨스 판타지 영화 ‘셰이프 오프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프 워터) 메인 예고편이 공개됐다. ‘셰이프 오프 워터’는 언어장애를 가진 청소부 엘라이자와 비밀 실험실에 갇힌 괴생명체의 만남을 그린 작품이다. 공개된 예고편은 물이 가득 들어찬 집 안 소파에서 잠이 든 엘라이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어 정부의 비밀 실험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그녀가 괴생명체를 만나는 과정이 아름다운 음악과 환상적인 비주얼로 담겨 있다. 여기에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이 시작된다’라는 카피는 이들이 그려낼 특별한 사랑을 궁금케 한다. 더불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독특하고 감각적인 연출, 주인공 ‘엘리사’ 역을 맡은 샐리 호킨스의 열연이 눈길을 끈다. ‘셰이프 오프 워터’는 영화비평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100%를 기록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또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과 제43회 LA비평가협회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촬영상, 제75회 골든 글로브 감독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시대의 냉소주의에 대해 치유제가 될 만한 희망과 구원을 담은 아름답고 품격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연출 의도를 밝혔다. 또 그는 “물의 모양은 곧 사랑의 모양”이며 “불안한 시대를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다. 청소부 여인과 실험 대상인 괴생명체의 섬세하고 아름답고 긍정적인 사랑이야기”라고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영화는 오는 2월 22일 개봉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123분.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우주 공간에도 수많은 바이러스 있을 것” (연구)

    “우주 공간에도 수많은 바이러스 있을 것” (연구)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곳곳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상당수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발표됐다. 바이러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생물’ 중 하나이자 여전히 인류가 탐구해야 할 것이 많은 영역으로 꼽힌다. 이러한 바이러스의 존재는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공간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미국 포틀랜드주립대학 연구진으로부터 나왔다. 연구진은 바이러스가 지구상의 생명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바이러스를 연구하면 외계 생명체를 찾는데 결정적인 열쇠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바이러스는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나 토성의 위성인 엔셀라두스의 숨겨진 바다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같은 기관의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샘플을 채취해 바이러스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우주의 별과 별의 대기 및 토양 등을 분석하는 기술이 쓰이고 있지만, 향후 외계 생명체 및 지구 생명체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우주 공간 내의 바이러스를 추출하고 이를 분석하는 기술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진의 주장이다. 연구를 이끈 포틀랜드주립대학의 켄 스테드먼 교수는 “인류가 지구상에서 최초로 바이러스를 발견한 지 1세기가 넘었다. 바이러스 학계는 새로운 세기에 진입했으며, 마침내 지구 저편의 다른 곳에서 바이러스를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구상의 바이러스는 다른 어떤 생물보다 10~100배까지 많기 때문에, 다른 행성과 위성에서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양의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다”면서 “바이러스는 아마도 고대부터 존재했으며 생명의 기원과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지구의 주요 진화 과정에도 관여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우리는 이번 연구를 통해 바이러스 연구와 우주 생물학이 통합되는데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길 바란다. 또 바이러스 생체 신호의 검출과 바이러스가 외계인에게도 전염될 수 있는지 등 천문학계에서 대답하지 못한 질문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우주생물학‘(Astrobiology) 2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김선자의 신화로 문화읽기] 신화 속의 물고기와 산천어 ‘축제’

    [김선자의 신화로 문화읽기] 신화 속의 물고기와 산천어 ‘축제’

    만주 퉁구스 계통의 민족에게 전승돼 오는 물고기 여신에 관한 신화가 있다. 동화 속의 인어가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들 민족에게 전해지는 동해의 물고기 여신은 사람의 몸에 물고기 머리를 하고 있다. 그 여신의 이름은 ‘더리크’라고 했다.태초에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였을 때, 바다표범의 등에 올라탄 두 명의 남녀만 살아남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물속에 잠겨 물고기로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천생의 여신 아부카허허가 햇빛을 물속까지 비치게 하여 물의 온도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 덕분에 물고기가 됐던 사람들이 차츰 다시 원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완전하게 변하지는 못하고 머리 부분이 물고기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물고기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여신이 된 것이다. 그들은 원래 인간이었기에 인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빛과 행복을 인간 세상에 가져다주었다. 그 여신들이 지켜준 덕분에 인간은 대대손손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고, 사람들도 여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리곤 했다. 바다와 강을 가까이 두고 있던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야 했지만, 그들은 먹기 위해서만 물고기를 잡았을 뿐 취미로 물고기를 잡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에 등장하는 잉어의 보은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잉어가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놓아 주었더니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인데, 왜 이야기 속에 그렇게 잉어가 자주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잉어의 수명이 80년이나 되며, 갈고리에 한 번 걸리고 나면 갈고리에 대한 기피증이 생겨 그 기억이 3년이나 간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영특한 물고기인 셈인데, 사실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렇지 ‘물고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자연계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잘못을 범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말을 할 줄 안다고 믿는 것은 그중 가장 큰 오해다. 사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뿐이지 새도 고래도 말을 한다. 자신들만의 언어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침묵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화 속의 잉어와 달리 잡힌 물고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그저 퍼덕거릴 뿐이다. 그래서 물고기들은 아무런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고 우리는 굳게 믿는다. 과연 그럴까. 이런 신화들을 읽다 보면 인위적으로 기른 수백만 마리의 물고기를 얼음장 밑에 풀어 놓고 그것을 낚아 올리는 행위가 ‘놀이’이며 ‘축제’라고 불리는 것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버둥거리는 커다란 물고기를 입안에 반쯤 밀어 넣고 포즈를 취하는 외국인의 모습도 뉴스 화면에는 자주 보인다. 누가 통계를 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 4대 겨울축제’라는 타이틀과 함께 등장하는 그런 장면은 그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가 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겨울축제들 중에 수백만 마리의 물고기를 인위적으로 풀어 놓고 잡게 하는 그런 축제는 없는 듯하다. 물론 우리는 소, 돼지, 닭도 먹고 물고기도 먹는다. 인간이 잡식성이니 뭐든지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화 속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우리의 먹을거리가 돼 주는 생명체들에게 감사해하는 마음과 함께 그들의 고통을 줄여 주는 최소한의 배려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축제’를 만들어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주최 측의 간절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것이 왜 하필 살아 있는 물고기를 잡는 ‘놀이’여야 했는지, 이래저래 묵직한 마음이다.
  • [강태진의 코리아 4.0] 교육개혁, 늦어도 빠르다

    [강태진의 코리아 4.0] 교육개혁, 늦어도 빠르다

    우리 인간은 꾸준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발전시켜 나간다. 돌이켜 보면 인류의 역사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갖은 위험 속에서 실패를 했고, 이를 극복하며 발전해 왔다. 18세기 말 1차 산업혁명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기아와 질병에서 해방됐다. 이 시기에는 인간의 생산성 향상 속도와 문명의 발전 속도나 인구 증가 속도가 비슷했다. 그런데 2차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의 생산성은 기존보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향상돼 인구 증가 속도를 앞지르게 된다. 인류에게 진정한 물질적 풍요를 선사했다. 3차 산업혁명의 특징은 정보혁명으로 SNS와 같은 네트워크의 형성과 이를 통한 명예와 자아의 실현이고,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게 됐다. 인류의 삶의 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됐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추진해 어느덧 현재 수준에 이르렀다. 과거 특출한 인재가 세상을 설계하고 실현하던 것에서 벗어나 대중이 함께 각자의 목표를 추진하고 이것이 모여서 기대하지 못했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렇듯 혁신은 변화 속에서 변화를 낳으며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수시로 그려 내고 사라지는 다양한 조건이 만난 결과물이고, 끊임없이 전광판에서 색상과 점과 선이 변하듯 새로운 기술로 업데이트되며 바뀌어 간다. 현재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을 학습한 것이다.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우리의 삶에 스며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의 생명체까지도 예고한다. 수많은 개개 기술의 다양한 융복합으로 엄청난 파생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최근 이러한 혁신의 총아로 떠오르는 것이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각을 데이터 알고리즘을 통해 구현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을 컴퓨터가 수행하며, 감성·의지·의식의 영역까지 확장될 수 있다. 지난 산업혁명의 경제성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고, 인간의 지적 노동을 상당 부분 보조하거나 대신하며 오늘의 혁신을 촉진한다. 인공지능을 통해 인류는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 미래 혁명을 위해 더 많은 열정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의 결합을 비의식적 알고리즘의 혁신적 발전이라고 했다. 비유기체적인 인공 지성의 탄생을 예견한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널리 알려진 블록체인은 사회관계망에서의 신뢰성 회복을 확보하는 시스템으로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네트워크와 암호화 기술을 결합한 것이다. 당사자 모두가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분산형 네트위크 기술이어서 비대칭적이거나 국가의 간섭이나 통제가 배제되고 투명성이 보장된다. 앞으로 금융·물류·의료·환경·교육 등에서 산업 판도를 바꿔 놓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개개인의 경험을 편리한 쪽으로 극대화한 또 다른 세상이고, 모르는 여러 사람과 함께 협력하고 일할 수 있어 직접 민주주의 보완과 산업 혁신의 인프라 기술이 될 것이다. 이처럼 전례 없는 속도와 수준으로 펼쳐질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의 여러 현상을 바꿔 놓고 있다. 과거의 30년이 지금 우리 사회에 유례없는 양상의 큰 충격을 던졌지만, 30년 후에는 그보다 더 큰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 기술 발전이나 사회변화 속도에 비춰 볼 때 30년은 결코 먼 미래가 아니다. 이렇게 급격한 세상의 변화에서 교육과 인재 양성 혁신의 시급함을 자각하고, 서울대 교수 21인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바람직한 교육 비전을 펴냈다.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이 요구하는 혁신이 무엇인지 생각해 그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30년에 걸쳐 내놓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 전망은 상대적으로 가장 확실한 것이다. 누구나 속도나 수준의 차이는 있어도 과거의 발전 패턴을 넘어 전례 없는 속도와 수준으로 발전하며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 [지금, 이 영화] ‘아름다운 별’

    [지금, 이 영화] ‘아름다운 별’

    감독 이름인 경우가 있다. 어떤 영화를 볼까 고르는 기준 말이다. 연출을 맡은 사람이 ‘그(녀)’라고 하면 그 작품을 그냥 본다. 그것은 신뢰하는 브랜드 제품을 주저 없이 집어드는 행동과 비슷하다. 조금의 편차는 있어도 결코 실망은 하지 않으니까. 나에게는 요시다 다이하치가 그런 감독 중 한 명이다. 거액을 횡령한 은행원의 사연을 다룬 ‘종이 달’과 기리시마는 정작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청춘물 ‘기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이렇게 딱 두 편의 영화를 접한 뒤, 나는 앞으로 그가 내놓는 모든 작품을 보기로 결심했다. ‘아름다운 별’은 그래서 고른 요시다의 신작이다.이 영화는 미시마 유키오의 동명 소설(1962년 일본 출간, 국내 미번역)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렇다고 줄거리를 영상으로 똑같이 옮긴 것은 아니다. 시대상과 캐릭터 등 여러 설정이 달라졌다. 다만 ‘지구에 위기가 닥쳐, 한 가족이 외계인이 되기로 한다’는 원작의 뼈대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잠깐, 외계인이라고? 그렇다. 아빠 주이치로(릴리 프랭키)는 화성인, 아들 가즈오(가메나시 가즈야)는 수성인, 딸 아키코(하시모토 아이)는 금성인. 저마다 황당한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세 사람은 점점 자신들이 외계에서 온 생명체라고 믿게 된다. 엄마 이요코(나카지마 도모코)는 지구인이지만 뭐 어떤가. 우주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우주인이다.요시다는 말한다. 이 작품은 “일본인이 아니라 지구인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외계인이 돼야 하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원작에서 전 지구적 위기는 핵전쟁의 공포였다. 영화는 이를 몇 가지 테마로 변주한다. 예컨대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환경 문제에는 주이치로가, 왜곡된 아름다움을 바로잡는 일에는 아키코가 매달리고 있다. 가즈오와 이요코도 각각 정치 영역과 건강 사업에서 나름대로 자기 사명을 찾는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별’은 외계인들이 위태로운 지구를 구하는 내용일까. 한마디로 “지구를 구할 가치가 있나요?” 라는 물음에 “아름다운 별인데 당연히 있죠”라고 착하게 대답하는 작품일까. 실제로 이런 대사가 영화에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단단하게 보였던 대상이 사실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이었는가를 폭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기에는 ‘나는 외계인이다’는 자각도 포함된다. 그러나 겨우 이 정도뿐이라고 한다면, 전작에 비해 강렬함이 덜한 ‘아름다운 별’은 변변찮은 영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요시다는 영리한 스토리텔러다. 그는 허상이 가리고 있던 실재를 포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실재가 또 하나의 허상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 요시다는 우리가 가짜로 여기던 것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한다. 이것이 내가 그의 이름을 신용하는 이유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아하! 우주] “토성의 타이탄, 지구와 놀랄만큼 닮았다” (NASA)

    [아하! 우주] “토성의 타이탄, 지구와 놀랄만큼 닮았다” (NASA)

    토성의 위성 타이탄이 기존의 예상보다 지구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타이탄은 비록 지구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구와 마찬가지로 바다가 존재하며, 타이탄의 바다도 지구처럼 평균 해발이 존재한다. 다만 타이탄의 바다는 지구와 달리 액체 형태의 물이 아닌 탄화수소로 가득 차 있다. 해당 연구를 이끈 코넬대학교 연구진에 따르면 타이탄의 표면을 채우고 있는 액체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일정 평균을 유지하며, 이러한 성질의 별은 태양계 내에서 지구를 제외하고는 타이탄이 유일하다. 또 타이탄 표면에 있는 가장 작은 호수는 타이탄의 평균 해발고도보다 수 백 ㎞더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이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티티카카호(湖)와 유사하다. 티티카카호는 해발고도 3810m,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대호(大湖)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이 해발고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타이탄의 액체가 타이탄의 표면과 연결돼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의 대수층(물을 보유하고 있는 층으로, 지하수로 포화된 투수성이 좋은 지층)과 유사하다. 즉 타이탄의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탄화수소는 지구의 물이 지하의 다공성 암석이나 자갈을 통과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타이탄의 표면 아래를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보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토성 탐사선인 카시니호가 지난해 9월 임무를 완수한 뒤 산화되기 몇 개월 전, 레이더 장비를 이용해 측정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통해 토성의 거대한 위성인 타이탄은 원시 생명체를 찾는데 중요한 열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지구 최초의 생명체를 탐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지구물리학회가 발간하는 지구물리학연구지(Geophysical Research Letters) 최신호에 실렸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진짜’ 위협하는 가짜뉴스… “법으로 막겠다” 선전포고 통할까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진짜’ 위협하는 가짜뉴스… “법으로 막겠다” 선전포고 통할까

    “2017년 최악의 가짜뉴스상 수상자는 뉴욕타임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저녁 자신이 선정한 ‘2017년 가짜뉴스상’ 수상자 명단을 공개했다. 뉴욕타임스와 ABC뉴스, CNN, 타임, 워싱턴포스트, 뉴스위크 등 전통을 자랑하는 주류 언론 6곳이 포함됐다. 증시 등 미국 시장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폴 크루그먼의 칼럼을 실은 뉴욕타임스가 1위를 차지했다. 지난 대선에서 러시아 정부와의 공모를 다룬 모든 기사를 11위에 선정했다. 일본 방문 때 물고기 밥을 상자째 던져 준 장면을 보도한 CNN도 포함됐다.한 나라의 대통령이 비판적인 언론 보도에 ‘가짜뉴스상’을 주는 이벤트는 해외토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 대통령이 트럼프라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웃어넘기기에는 함의와 파장이 적지 않아 언론들의 고민이 있다. 트럼프는 201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짜뉴스’(fake news)라는 단어를 세계 최고의 유행어로 히트시켰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성 언론 보도를 싸잡아 가짜뉴스로 몰아치며 지지층과 비판층으로 가르고 정치적·사회적 양극화를 고착화하고 있다. 트럼프식의 가짜뉴스 공격은 뉴스에 대한 정의와 경계를 모호하게 해 디지털 시대에 그렇지 않아도 위기를 맞고 있는 언론의 신뢰성에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트럼프식 가짜뉴스 활용 전략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 세력과 관련된 가짜뉴스가 주를 이뤘지만, 가상화폐 광풍과 북핵 위기 등을 악용한 신종 사기에 가짜뉴스가 동원되면서 폐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홍콩에서는 최근 미국과 북한 간에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금 투자를 유도해 1640만 홍콩달러(약 22억 4000만원)를 챙긴 금융사기범들이 경찰에 검거됐다. 일상어가 된 가짜뉴스 정의부터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범위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대책을 세우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가짜뉴스는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뉴스 형식을 차용해 만들어 낸 허위 및 거짓 정보”로 정의된다. 문제는 지난해 이후 가짜뉴스라는 표현이 보편화되면서 증권가 정보지 이른바 ‘찌라시’류의 ‘카더라 통신’까지 모두 가짜뉴스라는 프레임에 얼버무려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깊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이 선화 공주와 결혼하려고 만들어 낸 가짜였으며, 1923년 간토대지진 한국인 학살도 가짜뉴스에서 비롯됐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역사가 긴 가짜뉴스가 새삼 2016년 집중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가짜뉴스가 유통되는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사람들은 가짜뉴스인지 알면서도 소비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것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의견이 비슷한 뉴스를 소비하려는 이른바 ‘확증편향’ 때문으로 분석되곤 한다.사람들은 흔히 가짜뉴스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지칭하곤 한다. 선거를 앞두고 더욱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국제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포함해 16개국에서 선거 때 가짜뉴스가 등장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국은 지난해 대선에 이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당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가짜뉴스신고센터 및 태스크포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8일 개설된 더불어민주당 가짜뉴스 신고센터에는 14일까지 2000여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비방글, 정부 정책에 대한 왜곡 글이 모바일 메신저를 통한 ‘정보지’와 카페·블로그 글 등의 형태로 유포되고 있다고 한다. 가짜뉴스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게 많지만 구분이 무의미해진 상태다.앞서 지난 5일 민주당은 개헌 관련해 “동마다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거나 동성애와 관련한 헌법 개정안을 마련한다” 등의 가짜뉴스를 만들어 유포하는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고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가짜뉴스는 단순 허위·조작된 뉴스가 아니라 기존 체제 전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용어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미국 비영리재단 퓨리서치의 2016년 가짜뉴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미국 성인의 64%가 가짜뉴스 때문에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의심을 갖게 됐다고 답했다. 최근의 갤럽 조사에서도 공화당 지지층의 42%는 특정 정치인이나 단체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 뉴스는 사실이더라도 가짜뉴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민주당 지지층의 17%도 그렇다고 답변해 심각성을 더한다. 가짜뉴스가 ‘진짜 뉴스’에 대한 신뢰도에 타격을 주는 것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가짜뉴스로 인해 진짜 뉴스를 볼 때에도 가짜인지를 의심한다’는 질문에 75.9%(매우 동의 25.0%, 약간 동의 50.9%)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오세욱 선임연구위원은 “가짜뉴스가 기존의 정상적인 뉴스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폐해가 심각해지면서 규제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본격화하고 있다. 독일은 지난 1일부터 ‘네트워크시행법’ 시행에 들어갔다. 가입자 200만명 이상인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 운영 업체가 혐오 발언이나 가짜뉴스가 포함된 글을 발견한 지 24시간 안에 삭제하지 않으면 최대 5000만 유로(약 640억원)의 벌금을 물린다. 시행 첫날 혐오 발언을 올린 극우정당 소속 정치인의 트위터 접속이 12시간 차단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짜뉴스를 막는 새로운 법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선거 기간 중 가짜뉴스가 퍼지면 법원이 해당 웹사이트나 SNS 계정을 폐쇄하고 뉴스 삭제를 명령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우리나라에도 지난해 여야 의원들이 가짜뉴스 확산을 저지하고자 공직선거법,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등을 제출해 놓고 있다. 민주당은 독일처럼 가짜뉴스 생산·유포자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가짜뉴스 vs 진짜뉴스’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법적 규제와 함께 SNS 업체들의 자율 규제, 팩트체크 강화, 가짜뉴스를 가려내는 미디어 교육이 진행돼야 가짜뉴스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다고 보지만 결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가짜뉴스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 붓으로 그은 듯…토성 위성 타이탄의 ‘신비한 연무’

    붓으로 그은 듯…토성 위성 타이탄의 ‘신비한 연무’

    거대한 붓으로 한 획 그어놓은 듯하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 있는 대기 상층부를 찍어놓은 모습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15일(현지시간) 과거 토성 탐사선 카시니호가 촬영한 타이탄 위성의 대기 모습을 담은 이미지를 공개했다. 한폭의 그림 같은 해당 이미지는 카시니호가 2005년 3월 광각 카메라로 포착한 것이다. 타이탄은 지금까지 토성에서 발견된 위성 약 63개 중에서 가장 크며, 태양계에서 지구 외에 액체 상태의 호수가 존재하는 천체로 알려져있다. 특히 타이탄은 지구처럼 질소가 풍부한 대기를 갖고 있으며 유기 분자와 메탄 가스를 함유하고 있어 과학자들은 생명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8월 발표된 한 연구에서는 타이탄의 대기에 원시 세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화학물질 아크릴로나이트릴이 다량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구에서 시안화 비닐로도 알려진 이 물질은 플라스틱 제조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타이탄과 같이 혹독한 환경에서는 세포막과 유사한 안정적이고 유연한 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토성 궤도를 돌며 타이탄 등 여러 위성을 관측한 카시니호는 수명이 거의 다해 지난해 9월 토성 대기권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1997년 지구를 출발해 2004년 토성 궤도에 진입한 카시니호는 20년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연료가 고갈돼 우주의 쓰레기가 될 수도 있었지만 타이탄 등의 위성과 충돌하면 환경을 오염시킬 우려가 있어 토성 대기 성분을 조사한 뒤 대기권과 충돌해 불타 사라졌다. 사진=NASA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임한웅의 의공학 이야기] 유전자 수술 시대

    [임한웅의 의공학 이야기] 유전자 수술 시대

    A, C, G, T. 이것은 일종의 암호다. DNA가 전하는 신호다. 서로 짝을 이뤄 이중으로 배열된 이 암호에는 생명이 스스로를 복제하고 생화학반응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DNA 염기에는 4가지 종류가 있으며 아데닌(A), 시토신(C), 구아닌(G) 그리고 티아민(T)이 그것이다. 이 염기 배열이 만드는 신호로 방대한 양의 유전정보가 전해진다. 20세기 중반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과 같은 과학자들의 경쟁적 연구로 DNA의 나선형 구조가 밝혀진 이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염기서열에 대한 분자구조적, 생화학적 연구의 길이 활짝 열렸다. 생명의 비밀이 어떤 정보 안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정보인 유전자 염기서열이 생물의 종을 막론하고 서로 호환한다는 것은 커다란 발견이었다. 이런 DNA를 자르거나 잇고 전달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그 대답을 찾아냈다. DNA를 이어 주는 ‘중합효소’, DNA를 잘라 주는 ‘분해효소’가 발견됐고 특정 염기서열 조각을 만드는 ‘제한효소’도 밝혀냈다. 1970년대에 유전자의 재조합에 성공했고 유전자를 복제하는 ‘클로닝기법’이 나왔다. 최근에는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 혁명’이 생명공학계의 뜨거운 화두다. 유전자 가위 기술은 생명과학자들에게는 혁명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위력적인 기술이다. ‘유전자 마법지팡이’라고도 불린다. ‘유전자 가위’는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이 붙인 이름인데, 이 효소 기능을 매우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유전자 가위 기술 중 3세대는 ‘크리스퍼’다. 크리스퍼는 세균에서 유래한 ‘Cas9’라는 단백질에 RNA를 붙여 만든 유전자 가위다. 이전 세대 유전자 가위보다 건당 비용이 30달러 정도로 싸고 빠르며 오류가 적어 비약적인 성과를 보였다. 유전자 가위로 암과 같은 질병을 정복할 수 있을까. 이제는 여러 길이 보인다. 지난해 8월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인간 배아에서 ‘비후성심근증’과 같은 유전질환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도려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이 연구는 김 유전체교정연구단장과 슈크라트 미탈리포프 미국 보건과학대 교수가 주도했다. 사이언스지에 따르면 지난해 말 미국 국립보건원(NIH) 자문위원회는 암 환자를 치료하는 데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적용하는 펜실베이니아대 연구팀의 제안을 승인했다. 인간 배아 유전자 교정 연구에는 생명윤리 문제가 뒤따른다. 현재 국내에서는 관련 연구가 금지돼 있기 때문에 국내 연구진은 해외 연구팀과 공동연구를 통해서만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 연구 속도를 규제와 법률이 따라잡는 것은 어렵다. 연구 성과와 효용에 맞춰 규제에 변화를 주는 방식은 자칫 국제적 경쟁력 약화와 개발동기 저하라는 된서리를 맞기 십상이다. 모처럼 얻을 수 있었던 원천기술의 선점에서 밀려난다면 그것이 주는 영향은 길고 강력할 것이다. 과거 사람의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이 윤리적, 학문적으로 의문의 대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험관 아기나 정자 보관도 초기에는 윤리적 문제로 찬반이 엇갈렸던 기술이었다. 과학문명은 과학자들의 순수한 열망, 더 나은 삶을 원하는 인간의 소망이라는 세포들이 이루고 있는 거대한 생명체다. 과학문명 발전은 이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보이기도 한다. 보편적 정서에 따라 유전자 재조합 기술 적용에 대한 규제는 하더라도 기초 연구는 할 수 있도록 합법화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안전한 길일 수 있다.
  • 나비와 나방, 정설보다 7000만년 앞당겨진 2억년 전부터 진화

    나비와 나방, 정설보다 7000만년 앞당겨진 2억년 전부터 진화

    나비와 나방은 정설로 알려진 1억 3000만년 전보다 훨씬 오래 전인 2억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왔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독일 하노버에서 발굴된 고대 암석 가운데 먼지 덩이만큼 아주 작은 나비 화석을 연구한 결과 곤충 중에서도 가장 각광받고 많이 연구되는 나비목의 기원과 초기 진화에 관해 많은 새로운 정보가 나왔다고 영국 BBC가 11일 전했다. 나비와 나방은 워낙 부러지기 쉬운 종이라 화석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로 여겨진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 연구진은 산(酸)을 이용해 고대 암석을 잘게 쪼갠 뒤 초기 나방과 나비의 날개들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대학의 바스 판데 슈트브뤼헤 박사는 “이 정도 크기의 형태에서도 완벽한 유기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나비와 나방들은 과즙을 잘 삼킬 수 있는 스토로 모양의 혀를 갖고 있어 오늘날의 그것과 같은 종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판데 슈트브뤼헤 박사는 “이번 발견으로 우리는 혀나 (곤충의) 입을 갖고 있는 종의 진화를 거의 7000만년 가까이 앞당길 수 있게 됐다”고 말한 뒤 “꽃과 함께 진화해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종자가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 독자 생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쥐라기는 공기 중의 꽃가루를 잡아 단 과즙을 생산할 수 있는 송백류(松柏類·conifers) 같은 겉씨식물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였다. 원시 곤충은 이 과즙을 먹고 자랐을 것이며, 꽃을 피우는 식물이 1억 3000만년 전 출현하면서 나비가 함께 진화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번 연구에 함께 하지 않아 조금 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러셀 가우드 박사는 휘감긴 입 부위가 이들 동물들이 꽃가루를 옮기면서 진화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며 “새로운 증거들은 아마도 휘감긴 입 부위는 꽃식물이 진화하기 전 다른 역할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이번 연구는 또 어떻게 나비와 나방이 전 세계에 살아남아 남극만 제외하고 모든 대륙에서 살아남았는지를 밝힐 단서를 제공했다. 초기 나비목들은 지구의 많은 다른 생명체들을 휩쓸어버린 트라이아스기(삼첩기·三疊紀) 말에도 살아남았다. 공동 논문의 대표 저자인 티모 판엘지크 박사는 현재 인공적으로 기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곤충류와 그들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폭넓은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며 현대의 종 보호 노력에 대해 많은 지식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현대 나비, 나방의 유전자 증거를 통해 생명의 진화 과정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문화마당] 세상이 환상이라면/박성진 스토리허브 대표

    [문화마당] 세상이 환상이라면/박성진 스토리허브 대표

    “가진 연장이 망치뿐이라면 모든 문제를 못으로 보게 된다.”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어떤 분이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하셨나 싶어 찾아보기까지 했다.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햄 매슬로! 그의 말대로 사람은 세상을 저마다의 창을 통해서 본다. 창에 망치가 걸려 있다면 되도록 세상에 못이 많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 스토리를 만든다. 증강현실(AR)과 혼합현실(MR) 기술을 개발한다. 그러니 나로서는 세상이 ‘가상공간 속 재미난 이야깃거리’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세상이 현실을 넘어선 꿈이거나 혹은 환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년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기념 토론회가 열린다. 2016년 토론회의 경우 주제가 자못 황당했다. “우리는 시뮬레이션 우주에 살고 있는가?” 너와 나,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컴퓨터가 0과 1로 만들어 내는 가상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 인류가 그렇게나 찬탄하는 사랑의 감정조차 데이터가 만들어 내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영화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주장을 두고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진지한 토론을 펼쳤다. 2016년 6월 1일 솔라시티의 회장 일론 머스크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2025년까지 인간을 화성에 보낼 거라고 말하면서 시뮬레이션 우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리가 있는 곳이 현실일 가능성은 수십억분의 일입니다.” 경악스러운 기술의 발전 속도가 곧 인간을 실제 현실과 가상의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세상으로 이끈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모의 현실을 만들 수 있다면 이미 만들어진 모의 현실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철학자이자 옥스퍼드대학 교수인 닉 보스트롬의 제안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발달하면 지적 생명체는 언젠가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기술도 갖게 될 것이다. 기술을 갖기 전 문명이 멸망하거나 기술을 갖고도 시뮬레이션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경우는 제외하자. 보스트롬 교수는 어떤 문명이 우주를 시뮬레이션할 수준에 도달하고, 시뮬레이션에 흥미도 가질 가능성을 20% 정도로 본 모양이다. 그 경우 존재들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고자 할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시뮬레이션된 우주도 자체의 시뮬레이션을 창조할 수 있다. 무수한 시뮬레이션의 연쇄가 만들어질 테니 우리의 현재 우주가 시뮬레이션일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 보스트롬의 주장이다. 복잡한 과학이론으로 흘러가기 전에 말꼬리를 얼른 익숙한 옛 우화로 돌리자. 장자의 꿈. 봄날 나비꿈을 꾼 장자는 자신이 나비를 꿈꾸는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꾸는지를 궁금해한다. 나 역시 시뮬레이션이 나를 꿈꾸는지, 내가 시뮬레이션을 상상하는지가 궁금하다. 하지만 문득 생각하면 장자의 꿈이면 어떻고 나비의 꿈이면 또 어떨까. 내가 시뮬레이션 속에 있다 해도 나를 꿈꾸는 나비 역시 또 다른 나일 것이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꿈을 대신 꿔줄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세상이 환상이라도 상관없다고 결론 내리자. 꿈이라면 더 아름답게 꾸고, 환상이라면 더 화려하게 펼치면 될 일이다. 나는 스토리텔러고 확장현실을 펼치는 사업가다. 전체가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를 우주 지구에서 태어났으니 나로서는 직업을 무척이나 잘 정했다.
  • 공생하지 않으면 멸종…인생 실험실의 깨우침

    공생하지 않으면 멸종…인생 실험실의 깨우침

    덥수룩한 턱수염이 인상적인 ‘털보 과학자’ 이정모(55) 서울시립과학관장은 어느 날 어머니 집의 안방 침대가 대각선으로 놓여 있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아니 글쎄, 안방에 수맥이 흐르지 않니. 그거 피하느라 이렇게 뒀지”라고 말했다. “아파트 12층에 수맥이라고요?” 동네 문화센터에서 수맥 탐지법을 배우고, 고가의 탐지봉까지 산 모친은 수맥 탐사에 흠뻑 빠졌다. 한참 과학적 설명을 하며 원래대로 침대를 돌려놓던 그에게 모친이 역정을 냈다. “으이구, 니네 과학자들이 뭘 안다고 그래. 그냥 놔둬!”사기꾼 퇴치법부터 우주 이민까지 과학 지식과 유머를 차지게 버무려 놓은 그의 신간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에 나오는 얘기다. 인공지능(AI)과 4차 산업혁명이 시대의 화두인 ‘과학의 시대’라고 하지만 과학은 종종 세상물정보다도 한 수 아래 취급을 받는다.●과학적 지식 빨리 퍼져도 일상 속 잘못된 상식은 중세 수준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쓰는 저술에 능한 그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이라는 반어적 제목을 붙인 것도, 부제가 ‘털보 과학관장이 들려주는 세상물정의 과학’인 이유도 여전히 과학을 세상물정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세태에 대한 불만을 넌지시 드러내기 위한 게 아닐까. 지난 3일 서울 노원구 서울시립과학관에서 만난 이 관장은 “과학적 지식은 빨리 퍼지는데 과학적 삶의 태도는 중세시대나 지금이나 거의 바뀌지 않았다”며 “잘못된 상식이 과학적 지식으로 대체된다면 우리 삶도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그중 전자레인지의 전자기파가 발암 물질을 만들고, 인체 세포를 손상시킨다는 괴담이 대표적이다. 이 관장은 “전자레인지 전자기파는 정형외과에서 쓰는 적외선보다도 에너지가 약하다”며 “헤어드라이어의 전자기파는 전자레인지에 코를 대고 들여다볼 때 쬐는 것보다 10배가량 높고, 3㎝ 두께의 요를 깐 전기장판도 훨씬 많은 전자기파를 방출한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가습기의 전자기파는 전자레인지의 14배에 달하고 화장실 비데의 전자기파는 20배나 된다. 이 관장은 “이런 식으로 따지면 세계보건기구(WHO)의 발암등급표에 휴대전화와 동일한 등급(2B)으로 올라 있는 김치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책에는 그가 평범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번뜩이는 과학적 통찰이 담겨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표현도 과학의 눈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일으켜 산소를 공급하지 않으면 웅덩이는 썩어서 아무것도 살지 못하죠. 직장에 미꾸라지 같은 직원이 들어와 갈등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갈등 요인이 많은 조직에서 바른말을 하며 썩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학 지식은 우리 일상 속에서 접점을 맺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태도는 과학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는 “얼마 전 장관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6000년이라는 신앙적 지구 나이와 46억년이라는 과학적 지구 나이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참담했다”며 “더 놀라운 건 그런 발언이 전혀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인생이라는 큰 실험실에서 그가 깨닫는 세상물정의 이치는 명료하다. ‘공생(共生) 즉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도생하면 각자 망한다. “자연사는 멸종의 역사예요. 공생하지 않으면 멸종하고, 공생한 생명만이 진화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지구는 백악기 시대의 공룡 멸종 등 다섯 번의 대멸종기를 거쳤고, 이제 여섯 번째 대멸종기가 진행되고 있어요. 다섯 번의 대멸종을 보면 그 시대의 지배종은 다 멸종했어요. 과학자들은 여섯 번째 대멸종기가 빠르면 500년, 길면 1만년 내 완성될 것으로 봐요. 인간 정도 크기의 생명체라면 150만년은 존재해야 정상인데,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 지 겨우 20만년 만에 대멸종을 걱정하는 신세가 된 거예요.” 이 관장은 지구를 사수하며 겸허하게 사는 삶을 연습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스티븐 호킹 박사나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를 보면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생존에는 수만종의 미생물과 동식물이 어울린 생태계가 필요하지만 1ℓ짜리 물 한 병을 지구 밖으로 운반하는 비용만 수십 억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은 봄꽃들도 수정하고 번식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핀다고 말한다. 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만약 자잘한 꽃들이 각자도생하겠다고 나서면 죽을 힘을 다해 꽃을 피워 봤자 생존할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인간도 살아남으려면 눈에 보이는 주변 생명들과 잘 어울려 살고 연대해야 하는데, 우리가 가장 많이 보고 가깝게 접하는 생명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대학 청소노동자들에게서 휴식 공간을 뺏고 화장실에서 밥을 먹게 하거나 아파트 경비원을 노예처럼 다루는 인간들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달팽이나 도롱뇽, 풍뎅이랑 어떻게 어울려 살 수 있겠어요?” ●한국처럼 자원 쓰면 지구 8개 필요… 낭비하는 삶의 자세 끝내야 지구 인구 75억명을 다 모으려면 가로세로 높이 2㎞인 상자가 필요하다. 1800년에 10억명이던 인간은 2000년 60억명, 2045년이면 90억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인간 종 하나가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생물양은 거대한 인구압이 돼 대멸종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관장은 “더 효율적인 기술 개발로 더이상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조금 먹고 조금 쓰는 식으로 삶의 자세를 바꿔야 한다”며 “현재 지구에서 국토 면적당 생태 자원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한국 사람처럼 생태자원을 쓰려면 지구가 8.4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과학자와 시민 사이에 서 있는 ‘거간꾼’으로 표현하는 그는 양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겠다는 꿈을 자신이 관장으로 일하는 과학관에서 실험한다. 서울시립과학관 전시실에는 ‘만지지 마시오’, ‘떠들지 마시오’ 같은 팻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장하자면 전시물을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으로 망가뜨려 놓으면 이 관장은 기뻐한다. 그는 “과학관은 ‘보는’(Seeing) 곳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것도 시도)하는’(Doing) 곳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과학적 태도를 생활어로 번역하면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미 우리는 과학에 대한 강력한 욕구를 갖고 있는 셈이지요.”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하지현의 사피엔스와 마음] 자잘한 기쁨의 힘

    [하지현의 사피엔스와 마음] 자잘한 기쁨의 힘

    연말이라 오래간만에 뷔페를 갔다. 중년을 넘어가다 보니 칼로리 걱정은 본능에 삽입된 영역이 된 지 오래, ‘비싼 돈을 내고 줄 서서 접시에 모양 없이 담아 먹는 모양새’가 흉하다며 나는 뷔페가 싫다고 주장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막상 식당에 입장하는 순간 놀이동산에 놀러 온 어린이의 마음이 된다. ‘이 뷔페는 일식부가 좋군’ 하며 품평을 하고, “오늘 양갈비가 좋네”라고 옆 사람에게 정보 공유를 하는 것은 뷔페만의 미덕이다. 디저트까지 꼼꼼하게 챙겨 먹고 나오는 포만감은 중독성이 있는 행복이었다. 음식을 쓸어 담은 배를 만지작거리며 이틀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잘 지낼 것 같아 뿌듯했는데 다음날 아침 다시 배가 고팠다. 도대체 내 뱃속의 그놈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더욱 괴로운 건 전날 온갖 음식을 먹은 후라 며칠 동안은 딱히 당기는 음식까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라면을 끓여 먹으며 배고픈 건 반나절도 못 참겠는데, 포만의 행복감은 허망하게 쉽게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비슷한 것이 로또다. 한번 크게 맞으면 조용히 사표 내고 외국 가서 살겠다며 로또를 산 날 꼭 여권의 유효기간을 확인한다는 친구가 있다. 로또 당첨이란 엄청난 행운은 영원히 지속될까. 안타깝지만 거액 당첨자들의 상당수가 몇 년이 지나자 가정파탄, 사업실패, 사기 등으로 더욱 불행해져 버렸다는 뉴스만 흘러다닌다. 이건 당첨 못 된 99.9%를 위한 위로일 뿐인가 했는데 로또와 행복을 연구한 것들도 유사한 결과들을 보고한다. 배고픈 것, 사람에게 뒤통수 맞은 거, 실패의 기억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자 이제 뷔페와 로또, 둘 다 큰 거 한 방이란 공통점을 갖는데, 이게 오래 지속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해야 할 타이밍이다. 인간은 결국 생명체고 행복감은 동물적 포만감이란 본능 영역의 만족에서 비롯된다. 배가 부르면 포만감을 느끼며 엔도르핀 수용체가 활성화되며 음식 섭취를 멈추고 행복해진다. 문제는 이 기분이 오래가게 세팅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아 뱀같이 먹은 걸 다 소화시킬 때까지 충분히 오랜 기간 가만히 있어도 될 자격은 사자와 같이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있는 생명체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포만감에 취해서 드러누워 있다가는 자칫 포식자의 먹잇감이 될 위험이 크고, 새 먹이를 언제 구할지 알 수 없는 주제에 배가 빈 이후까지 오래 포만감을 유지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배고픔은 조금이라도 빨리 느껴서 최대한 빨리 먹을 것을 찾는 행동을 하도록 재촉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조금만 배가 비면 배가 고프고, 뭐라도 입에 넣고 싶어지고, 혈당이 떨어지면 예민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포만감은 금방 사라지고, 배고픔은 쉽게 느끼고 오래가게 다른 시간대로 세팅을 맞춰 놓게 된 것이다. 이후 포만감은 안녕감과 행복으로, 배고픔은 위기와 불행이란 고차원적 심리기제로 발전하게 되지만 여전히 기본 세팅은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평소 모르고 산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승진, 결혼, 합격과 같은 큰 행복이 될 만한 일이 있어도 며칠 심장이 터지게 기쁘고 행복감이 충만하지만 의외로 오래가지 않는다. 반면 속상한 일, 실패와 좌절은 떨쳐 내려 해도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이런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기쁨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교만으로, 슬픔이 오래 남는 것을 자존감 저하로 오인하지 않을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배꼽시계에 속아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면 어쩌라고? 여기에 대해 학자들은 어쩌다 한 번 오는 큰 행운보다 자잘하지만 자주 기쁠 일을 만드는 것이 행복을 유지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마치 폭식증을 치료하기 위해 적은 양을 자주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출근길 전철에서 좌석에 앉은 것, 점심 식사에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는 것 같은 소소한 일상의 사건을 행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어쩔 수 없이 짧은 유효기간을 갖도록 세팅된 행복 시스템을 켜진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뇌와 마음의 세팅에 울고 웃는 우리, 이런 마음의 메커니즘을 잘 알아야 행복감도 늘어나게 되는 것 같다.
  • [생태 돋보기] 우주생태 시대를 대비하자/정길상 국립생태원 생태기반연구실장

    [생태 돋보기] 우주생태 시대를 대비하자/정길상 국립생태원 생태기반연구실장

    영화에서 묘사되는 미래 지구는 인간에 의해 파괴돼 황량하고 암울한 모습이다. 지구에 살아남은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깨끗한 땅을 찾아 오지로 나서거나 아예 우주로 떠난다. 우주의 별 가운데 화성은 특히 지구인에게 관심이 높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이라서 그럴 게다. 지구를 떠나 화성에 정착하는 내용은 영화의 단골소재가 된 지 오래다. 최근에는 화성에서 조난당한 우주인이 극한의 생존 투쟁을 벌인 끝에 지구로 무사히 돌아오는 영화가 화제였다. 그 영화에서 화성에서 식물을 키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상상이 아닌 현실로 점차 다가오고 있다. 지난 50여년간 화성에 대한 프로젝트는 55개나 되고 대부분은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가져온 결과물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030년까지 인간의 화성 이주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고 한 민간기업은 2025년부터 화성에 기지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럽연합(EU) 역시 화성에 관심을 갖고 임무를 수행 중이며 유럽의 민간기업들도 이에 맞춰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국은 2020년에, 일본은 2024년에 무인우주선을 화성에 착륙시킬 계획을 세웠다. 화성 이주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느냐’라고 할 수 있다. 얼핏 땅에 식물을 심고 비료를 주면 그냥 자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명체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데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하물며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결실을 맺으려니 얼마나 힘이 들까? 네덜란드 연구진은 NASA와 협업해 수년간 노력 끝에 화성과 유사한 환경에서 여러 종류의 채소를 기르고 있다. 지력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지렁이가 이곳에 알을 낳는 단계까지 와 있다. 그럼 네덜란드 연구진이 식물을 재배하는 화성의 토양은 어디서 왔을까? 지구에는 화성의 토양과 성분이 유사한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하와이 화산섬 지역이다. 네덜란드 연구진은 이곳에서 토양을 가져와 화성 환경에 맞게 실험하고 있다. 또 하나는 바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제주도다. 제주도는 약 200만년 전 화산이 폭발해 생겨난 섬으로 한라산 기슭을 따라 여러 생물들이 살아가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췄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우주 발사체를 독자개발한 강국이다. 우리 국민의 70% 이상이 달 탐사계획에 찬성하는 등 열의도 높다. 우주에서 식량을 자급하기 위한 생태 노하우는 우주개발시대의 핵심사업이다. 이를 준비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가진 땅과 흙은 우리나라 우주산업의 미래를 밝힐 중요한 자산이다. 이처럼 첨단 우주 시대에도 생태 분야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생명과 생태라는 방증이리라.
  •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플랫폼 (김민수)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플랫폼 (김민수)

    사비는 순서를 기다린다. 복도의 고요함은 일부러 꾸며진 듯하다. 문이 닫히는 소리. 누군가 사비를 지나쳐 간다.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이지만, 그를 향한 적의가 있다. 사비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깜빡 졸았던 걸까. 그의 이름이 들린다. 관료, 학자들. 권위로 데워진 공기가 거북하다. 사비가 의자에 앉고도 그들은, 한참 동안 파일을 뒤적거린다. 넘어갔다가 돌아오고, 다시 구겨지는 문서들. 무작위적인 리듬으로, 자기 역할에 몰입한 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사비는 그게 잘 안 된다. 침묵을 깨야 한다면, 그만한 무게를 지녀야 한다. 위원이 말한다. “우리는 첫째로 근무자들의 파견지 이탈 건을 조사하기 위해 당신을 불렀어요.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당신에게 형식상의 협조를 바랄 뿐입니다.”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다른 위원이 말한다. “둘째로 최근 보고된 인간 반출 사건을 조사할 겁니다. 이 경우 당신의 위치는 썩 좋지 못해요.” 기관의 배려를 기대했던가. 그래도 사비는 동요하지 않는다. 마음 작용의 세부사항들을 잃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그는 위원들의 질문에 답한다. 일정한 어조로 이어지는 질문들. 때로는 위원들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탈과 반출. 그것은 사비의 언어가 아니다. 사비와 위원회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한다. 위원회는 사비를 의심하고 있다. 그가 아는 만큼 말하지 않고, 교묘하게 말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비는 그들만큼이나 아는 게 없다. 오히려 그에겐 새로운 질문거리만 가득하다. 심문은 계속될 것인가? 사비는 구금되지 않는다. 위원회에 그럴 권한은 없다. 즉석에서 다음 출석을 예고받는다. 서명하고, 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는다. 그의 뒤로 문이 닫힌다. 이미 어두워진 복도. 그는 천천히 걸어 나간다. 무수히 많은 창문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곳을 지나기가 두려워진다. 그는 골목길을 택한다. 그 길은 비밀스럽다. 불규칙한 계단을 내려가고, 곳곳에서 오래된 그림자들을 본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은 다른 골목과 맞닿아 있다. 사비는 다른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주변을 살핀다. 담벼락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다. 왼편 불 밝힌 상점에, 진열대 사이로 점원이 보인다. 그녀는 웃고 있다. 웃음은 준비된 기호다. 그녀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소는 신비한 제안 같아서, 사비는 다른 생각에 물들지 못한다. 달콤하다.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다. 진열대에 술병이 빼곡하다. 사비는 화려한 단어들을 본다. 덧붙은 상징들도. 갖가지 색과 형태의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다. 모두 똑같이 중요한 동물들과 도형들. 그는 방향감각을 잃고, 발을 헛디뎌 술병을 모두 깨뜨리게 될 것만 같다. 땀이 맺힌다. 손등으로 땀을 닦는데 불쑥 인사말이 들린다. 사비는 점원의 입을, 눈을 본다. 그리고 미처 감추지 못한 수동성을 엿본다. 그녀의 조화롭지 못한 목소리가 거슬린다. 사비는 짧은 사이 실망을 내비쳤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부러 들릴 듯 말 듯 대꾸한다. 점원은 한발 물러나 웃음으로 돌아간다. 어떻든 그녀는 변함없다. 그녀가 사람이었다면, 사비는 다른 반응을 기대해도 좋았을 것이다. 선택이 한정되어 있고, 외부에서 주입되었더라도 온전히 그녀만의 것으로 머무는 감정들을. 손가락으로 아무 병 하나를 가리킨다. 그녀는 상품을 스캔하고, 가져가 버린다. 사비는 그런 행동이 그녀만큼 시늉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포장이 사비의 손에 들린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상점을 나선다. 사비는 단조로운 풍경을 내다본다. 버스가 이미 지나온 길도 다시 훑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느리고, 목적지에 갈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모로를 만나려면 한참 더 외진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도시 외곽도 아니고, 마을이라 부르기에도 어중간하다. 기억이 맞는다면 이쯤에서 내려야 한다. 버스가 떠나자 어두워진다. 멀지 않은 곳에 파도가 친다. 사비는 도로를 벗어나 흙길로 들어선다. 길가를 내려다보니 경사가 가파르다. 풀이 자라지 않은 길을 골라 내려간다. 해안이 있고, 움푹 들어간 형태로 숲을 등진 주거지가 보인다. 집은 몇 채 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비는 알 것 같다. 그 집은 모로의 성향과 닮아 있다. 작고, 뽐내지 않는다. 문을 두드려 본다. 모로. 기척이 없다. 사비는 집 주위를 돈다. 창문에 얼굴을 대지만, 안을 볼 수 없다. 사비는 모래사장을 거닐기로 한다. 불을 밝힌 집이 몇 채 보인다. 이편은 어둠이다. 사비는 구두를 벗어 손에 든다. 파도 소리가 불쾌하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 그는 갑작스럽게 고향의 선율을 느낀다. 단조로운 흐름이다. 어떤 이유로 연상되는 것일까. 선율은 감각에 새겨졌고, 때때로 통증처럼 거기에 있다. 흐릿하게. 불빛 속에 남자가 보인다. 그는 작은 고깃배 옆에 앉아 그물을 손보고 있다. 사비는 그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그물을 놓고 일어선다. “오늘은 너무 늦었는데.” 사비는 그를 살핀다. 심술궂은 눈. 주름들. 그리고 들쭉날쭉한 억양. 하지만 흐릿하게나마 장난기가 비친다. 관리자의 인상이다. 확신할 수는 없다. “그쪽으로 가봤자 아무것도 없을 거야.” 사비는 고개를 돌려 어둠을 본다. 그의 말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린다. “초입에 있는 작은 집을 찾아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사비는 손가락을 들었지만, 어떤 것도 가리키지 못한다.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실수인 것처럼, 그의 뒤로 현관문이 조금 벌어져 있다. 그가 오랜 시간 홀로 지내왔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남자는 그물을 추스른다. “나도 이곳 사람들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는 사비를 훑는다. 사비의 손에는 술병이 있다. “들어오겠나?” 그를 따라 들어간다. 다른 차원에 들어서는 것 같다. 사비는 아직도 그런 경험을 잘 설명해낼 수 없다. 테이블과 낡은 의자들과 벽에 붙은 계획표. 책장 위에 술병을 놓는다. 사비는 그가 의자를 권할 때까지 기다린다. 남자는 부엌의 작은 문을 열고 그물을 던져 넣는다. 책장의 지저분한 책들이 눈길을 끈다. 사비는 대부분의 책 제목을 알아보지 못한다. “거기 앉아.” 남자는 술을 따른다. 그는 두꺼운 책을 고른다. 그의 손은 책을 옭아매는 성긴 보금자리 같다. 사비는 술잔을 들어 입을 적신다. 책을 들고 있는 남자의 손마디를 살펴본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서 노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짐작과는 다르다. 어쩌면 그는 오랜 세월 학자로서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무엇에 관한 학자인가. 언어들? 비밀스럽고, 신비 가득한 형태로 눈을 어지럽히며 우리를 넘어서는 의도를 품고 있을 것 같은 바깥 세계의 소란. 막연히 우상화되는 시인들. 남자는 책장을 넘긴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눈을 치켜뜬다. 사비는 어서 그가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책을 읽는다. 한동안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심각한 그의 얼굴이 곧 부서져 버릴 것 같다. “요즘 이곳은 어때?” 사비는 말을 꺼내는 게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남자는 책을 내려놓는다. “예전에는 좋았지. 지금은 뭐라 말하기 어려워.” 흔해 빠진 의견. “여길 떠나는 자들이 늘었지. 그게 뭘 말해주겠나? 전보다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걸.” 사비는 마지못해 수긍한다. “자네도 누군가를 찾아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런 건 핑계에 불과해. 난 많이 봐와서 잘 알지. 결국엔 떠나는 거야.”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렇다면 잘 선택한 거야. 여긴 매력을 잃었어. 다신 돌아오지 말게.” 남자는 다시 책을 펼쳐 든다. 사비는 침묵 안에서 흔들린다. 마음을 다잡기 어려워진다. 바깥 그리 멀지 않은 물밑 어딘가에서 불분명한 형체가 지상으로 올라온다. 모래사장에 다다랐을 때 그것은 모습을 드러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심해의 생명체가 몸을 비틀며 기어온다. 호흡하는 비늘과 가시들을 과시하면서. 성미 급한 놈이다. 거대한 입속으로 겹겹이 덧난 이빨에는 독이 흐른다. 놈은 모래를 파헤쳐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 속으로 숨는다. 구덩이 위를 지나는 자들을 모두 집어삼키려고. 놈의 입과 뱃속에서 희생자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모로의 흔적도 그곳에 걸려 있다. 대기는 신음으로 가득해 질식해 버릴 것 같다. 사비는 술잔을 내려놓고, 남자의 구겨진 얼굴을 다시 한번 본다. 그는 가끔 입술을 달싹이는 것 말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비는 자신의 손과 발을 내려다본다. 시간을 체감하는 신체기관이 있다면, 그건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흉물스럽게 늘어졌을 것이다. 확장된 외연으로서 발에 차이고 목을 휘감았을 것이다. 사비는 말한다. “그래도 난 언젠가는 돌아와야 해.” “쉽지 않을 거야.” 사비는 그에게 나약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서 준비해야겠어. 언제 다시 방문하면 될까?” 남자는 손을 내젓는다. 조금 더 기다려 보지만 그뿐이다. 현관을 나선 사비는 바깥 공기에 압도당한다. 사비는 이보다 더 적은 자극을 원한다. 사비의 생각은 몇 차례나 분절된다. 구덩이라니. 잠을 자고 싶다. 잠을 자야만 벌어진 틈을 이어 붙일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정신은 점점 파편화되어, 말라죽은 나무의 껍질처럼 떨어져 나간다. 다른 가능성이 물꼬를 튼다. 모로의 작은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환하다. 아니, 그 집은 모로의 집보다도 좀더 넓고 안락해 보인다. 그럼에도 사비는 그 집이 여전히 모로의 집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비는 정원을 가로질러 간다. 잘 손질된 정원수. 초인종을 누르자 미소 짓는 점원이 나타난다. 사비는 놀라지 않는다. 그는 초대받은 사람처럼 집 안에 들어선다. 집은 거대한 하나의 침실이다. 사비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녀의 유년 시절과 일상, 갈등과 고민에 관한 이야기 속 세부사항을 통해서 그녀가 가짜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깊은 상처를 간직한 사람처럼 모든 이야기로부터 달아나 버린다. 그녀는 이미 이 세계의 어떤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직 행위의 화신으로, 사비에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녀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근심 따위는 느낄 수 없다. 시간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다. 오래도록 평화롭다. 그러나 그녀의 품에서 사비는 결코 잠들지 못한다. 사비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의식이 또렷하다. 그는 속으로 진짜를 흉내 낸 것들을 모조리 비웃고 있다. 사비는 구두를 손에 들고 주거지의 불빛들을 지난다. 움푹한 해안선은 인위적이거나, 자연을 뛰어넘는 힘이 가해진 것처럼 보인다. 사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의 작용. 가령 겨울이 길어지고, 낮 동안의 빛은 더욱 희미해지는 것. 예측할 수 없던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땅한 이유를 찾아 나서게 한다. 그러나 사비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다. 고향에서는 더 자주 메시지를 보내왔다. 의구심을 품은 자들은 모두 돌아오라고. 사비는 그래도 아직은 끝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작고 허름한 집이 보인다. 짐승은커녕 곤충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사비는 문틈에 얼굴을 대고 문을 밀어본다. 열릴 듯이 삐걱거린다. 그뿐이다. 절망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다른 감정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인기척이 있다. 보드라운 목구멍을 갓 넘어온 따뜻한 숨결이 거기에 있다. 사비는 창문을 들여다본다. 소용없는 짓이다. 물러서서 구두를 던진다. 창문이 깨지고, 깨진 틈으로 모로를 찾는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사비는 창문을 넘는다. 유리 조각에 옷자락이 긁힌다. 사비는 벽을 더듬으며 나아간다. 울음소리가 벽을 타고 온다. 한쪽 구석이다. 구석에서 소리가 난다. 사비는 다가가 몸을 기울인다. 그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 아기가 불가능할 것 같은 방식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본다.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멈추고, 감춰두었던 예리한 날로 그의 목을 긋는다. 사비는 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이 순간 생동하는 가능성을 모두 외면하기로 하자. 이미 어둠 안에 놓인 눈앞이 캄캄해진다. 사비는 자세를 낮춘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거의 엎드린다. 아기를 섬기려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댄다. 아기는 울음을 멈춘다. 시큼한 냄새가 난다.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이, 놀랍도록 위안을 준다. 손을 떼고 싶지 않다. 파도 소리가 바람에 묻히기도 한다. 사비는 그를 흔드는 손길에 의해 깨어나 돌아본다. 모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짓누르려는 듯이. 사비도 모로를 본다. “사비. 왜 이렇게 늦었어?”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다. “창문을 깨고 들어오면 어떡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어.” 그러나 아기는 없다. 감정들이 고스란히 흘러 나간다. 그는 거울을 보는 것 같다. “일행은?” “혼자야. 모두 흩어졌어.” 모로는 실망을 감추지 않는다. “모로, 아기가 실제로 있어?” “있어.” “어디에?” “내 몸에.” 사비는 모로와 아기를 동시에 생각해 본다. 틀림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로가 실수한 거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어쩌려고?” “데려갈 거야.” “그걸 왜?” “왜라니. 기념해야지.” “기념하기 위한 거라면 다른 걸 가져가. 더 적합한 것으로.” 하지만 사비는 더 적합한 것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냥, 인간들을 내버려 두자.” “이제 와서 그럴 순 없지.” 어떤 말을 해도 소모적일 것 같다. 사비는 문을 열고 내다본다. 반드럽게 깔린 살굿빛 사장과 바다 위로 드넓은 하늘의 풍광이 우연처럼 놓인 것 같다. 관리자의 집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 고깃배는 보이지 않는다. “모로. 관리자를 만났어? “아니. 그는 통 잠들질 않아.” 그래서 모로는 여태껏 사비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관리자는 찌푸린 눈으로, 어째서 그것이 기념이 되느냐고 묻겠지만.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사비는 그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고, 그와 멀어져야 한다. 그가 현실의 무미건조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비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수평선까지 배 한 척 보이지 않는다. 관리자는 그 작은 배를 타고 어떻게 플랫폼까지 가는 것일까. 사비는 문을 열어 둔다. “그가 거절할 수도 있어.” “넌 그저 꿈에서 깨어나 배를 기다리면 돼.” “이게 얼마나 대책 없는 짓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플랫폼에서 만나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모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비는 동작을 되감는 것처럼 자리로 돌아가 눕는다. 눈을 감고 하늘을 본다. 이해할 수 없는 거짓이다. 인간의 생에 남겨진 일이라고는 끊임없는 불만족뿐이다. 그런 그를 일부러 고통과 마주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기념이라고? 사비는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게다가, 인간은 우리의 고향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감각이 환경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비는, 모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모로는 사비의 첫 작품이다. 모로는 사비와 같으면서도, 그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모로는 흉내에 불과한가? 모로를 볼 때면 사비의 심정은 늘 복잡하다. 그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지만 막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모로는 자유롭다. 그건 사비가 줄 수 없는 매혹적인 개념이다. 고깃배가 가까워진다. 사비는 몸을 일으킨다. 관리자가 배에서 내린다. 그의 허리까지 물에 잠긴다. 배 안에는 손님이 있다. 그는 몸 대부분을 가리고 있다. 생김새는 물론 그의 형태마저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먼 곳에서 왔으리라. 손님은 땅에 발을 딛는다. 체구가 크다. 사비는 사구에 올라선다. 그러나 손님은 사비를 의식하지 않고 사구를 돌아나간다. 그는 사비가 그랬던 것처럼, 휴식도 없이 곧바로 어떤 목적을 좇는다. 관리자가 사비에게 손짓한다. 사비는 그를 도와 배를 끌고 올라온다. “인사를 나눴나?” 사비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답하는 대신에 눈으로 먼 곳을 좇는다. “뭐, 상관없겠지.” 관리자가 앞서 배를 끌고 간다. 사비는 고물을 민다. 경사진 모래언덕이 난감하다. 사비는 배를 홀로 떠받들고 있는 것 같다. 닳고 부서지고 덧댄 흔적을 본다. 사비로서는 짐작조차 못 할 물밑의 진실을 견디는, 볼품없는 배다. 사비는 때때로 뒤를 돌아본다. 모래사장에는 깊은 족적이 남는다. 관리자는 모래도 털지 않고 그대로 현관을 넘는다. 그는 부엌의 작은 문을 열고 그물을 던져 넣는다. 먼지 앉은 잔에 술을 따르고, 계획표에 문자들을 휘갈겨 쓴다. 사비는 문틀을 붙잡고 관리자의 집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계단에 버티고 서서 말한다. “우릴 플랫폼에 데려다줘.” 관리자는 반응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빨리 떠나는 게 좋겠어.” 그 말은 관리자에게 닿기도 전에 허물어진다. 사비는 문턱을 넘는다. 그와 동시에 부엌의 작은 문이 닫힌다. 하지만 관리자는 부엌을 돌아보지 않는다. 관리자의 널찍한 등은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옆에서 본 그는 매끈한 석상이다. 사비는 그를 찔러보고 싶다. 사비는 부엌으로 다가간다. 작은 문 너머로 속삭이는 소리, 고약한 획책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굴욕감이 드는 순간, 사비는 성급하게 문고리를 돌린다. 방 안에는 그물과 비린내와 모래가 뒤엉겨 있다. 굴욕을 만회할 수는 없다. 관리자는 펜을 놓고 돌아선다. “곧 출발할 수 있겠어.” 관리자는 계획표를 보란 듯이 손바닥으로 친다. 사비로서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관리자가 묻는다. “규모는?” “나와 내 동료 모로, 그리고 아기 하나.” 관리자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고 말한다. “인간?” “작은 인간.” “인간은 안 돼.” 가라앉은 관리자의 말투에는 파고들 틈이 없다.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얼마 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까 배 타고 들어오는 손님 봤지. 방침이 바뀌었어.” 방침. 애초에 그런 건 없었다. “어디서 온 손님인데?” “무례한 질문이야. 더 나은 질문을 해봐.” 사비는 그가 계속 말을 이어 가도록 내버려 둔다. “이제 단 하나의 인간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 모두 모아놓고서, 조용히 끝낼 거야.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게 그가 하려는 일이야.” 생각보다 일찍 다가온 절멸 소식이 놀랍다. 그리고 그것이 벅찬 화려함 가운데 섬광처럼 오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천천히,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혹스럽다. 사비는 미소 짓는 점원을 떠올려 본다. 인간이 아닌 것들은? 그들은 함께 사라지거나, 새로운 주인이 되겠지. 아마도 이 계획에서 기계들은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들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머물게 하는 능력은 인간 고유의 것일까. 그렇더라도 이제는 그것의 모방만이 넘쳐나겠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도 모를 거야.” “인간은 안 돼.” 그 말은 하나의 구호처럼 들린다. 관리자는 거의 즐기고 있다. 짧고 단단한 문장에 부딪혀 박살 나 버리는 다른 빈약한 문장들. 탈취와 도주의 이미지들이 의식에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사비는 이보다 더 큰 말썽에 휘말릴 자신이 없다. 관리자는 벌써 이 일을 문제 삼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책을 고른다. 그가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은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관리자는 무한히 여유롭다. 그러나 사비는 그렇지 않다. 사비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 사비로서는 관리자와의 불균형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작은 인간의 무게가 그만큼 그를 누른다. 몇 가지 짧은 생각이 든다. 작은 인간이 기계로 변환될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은 얼마 없다는 사실. 그리고 손님의 행방. 관리자가 손짓하며 사비의 주의를 끈다. 그는 사비가 마주 앉기를 바란다. 팔걸이가 있고, 등받이가 짧은 의자를 권한다. 그리고 사비에게 술잔을 건넨다. 사비는 한동안 의자에 꺼질 듯이 파묻혀 있다. 그는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알코올 냄새가 올라온다. 어떤 생각을 재촉하려는 듯이. 그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관리자가 말한다. “그런데 네 동료는 지금 어디 있지?” “자기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난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왜냐하면. 사비는 말을 아낀다. 관리자는 사비에게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비는 부엌의 작은 문을 본다. 아무래도 누군가 더 있는 것 같다. 거기서 감각을 희롱하는 미세한 자극들이 흘러나온다. 관리자는 무릎 위로 책을 펼친다. “이 책을 알아볼 수 있나?” “전혀.” “이건 아주 형편없어. 두서없는 소리로 가득해.” 관리자는 손끝으로 문장을 긋는다. “그런데 여기. 이 대목을 봐.” 처벌에 관한 기록이다. 오래전 일이다. 여기에 선대 관리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그는 기계에 관한 독특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무차별. 그것은 경력을 망가뜨리는 불온한 생각이 될 수 있다. 어느 날 해변을 거닐던 선대 관리자는 도망쳐 나온 도시 기계를 맞닥뜨린다. 기계는 인간과 똑 닮아 있으나, 두려움의 표현이 어설프다. 도시 기계는 이보다 더 멀리 도망갈 수 없다. 헤엄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선대 관리 자는 도시 기계를 데려와 별장에 숨겨준다. 그는 거기서 인간처럼 지낸다. 먹고 읽으며, 잠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피 행각은 발각된다. 선대 관리자는 인간으로부터 원성을 듣는다. 도시 기계의 죄목은? 언급되지 않는다. 고향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대 관리자와 인간을 중재한다. 간단하게 합의된 결과로 선대 관리자와 도시 기계가 같은 처벌을 받게 된다. 선대 관리자는 도시 기계로 이식되고, 성공적으로 결합한 그것은 도시로 보내진다. 그것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후 관리자의 관할이 분명해진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 “이 글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였다는군.” 관리자는 책을 덮는다. “그럼 지금 읽은 건 뭐야?” “그건 말일 뿐이지.” 너의 꿈속에 있는 것처럼 실체 없는 경험들이지. 눈이 감긴다. 사비는 희미하게, 부엌의 작은 문이 열리는 것을 본다. 배를 타고 들어온 손님이다. 그가 그물을 끌고 사비에게로 다가온다. 사비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이것은 가능성인가? 손님은 도심에 다다른다. 한낮의 공터에서, 그가 주목받을 이유는 없다. 그는 쪼그려 앉아 동그란 통을 내려놓는다. 단순하게 생긴 물건이지만, 잠금장치가 달려 있다. 그는 잠금을 풀고 뚜껑을 비스듬히 걸쳐 놓는다. 그것은 흐릿한 기운을 방출한다. 화산재가 분화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해진다. 바다 한가운데에 어색하게 솟은 지면이 있다. 사비는 생각하지 않고도 그것을 알아본다. 플랫폼이다. 간소하고, 누구도 이용한 적 없는 것처럼 깨끗하다. 사비는 배를 타고 있다. 배는 젓지 않아도 나아간다. 플랫폼 위로 모로와 유모차가 보인다. 모로는 배에 탄 사비가 플랫폼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다. 사비는 아래를 본다. 수면에 비친 얼굴은 분명 자신의 것이 맞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불안정해서, 곧 다른 얼굴로 바뀌어 버릴 것 같다. 그는 수면을 내려다보지 않기로 하고 발을 디딘다. 플랫폼에 어렵게 올라선다. 그가 타고 온 배는 점점 멀어져 간다. 모로가 말한다. “저걸 타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래.” “재주도 많네.” 사비는 뒤돌아본다. 그것은 배가 아니라 가시 돋은 심해의 생명체다. 어떻게 날카로운 등 위로 올라탈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모로의 얼굴은 테두리가 불분명하다. 잘못 손대는 바람에 윤곽이 번진 것 같은 모양이다. 그러나 모로를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모로란, 언제나 모로와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비가 말한다. “이상한 일을 겪었어.” “말해봐.” “배를 타고 들어온 손님을 봤어.” 그런데 사비는 이야기할 의욕을 잃어버린다. 이야기는 선형적으로 정돈될 수 없다. 어느 부분을 이야기하더라도 머리와 꼬리와 몸통이 뒤섞일 거란 확신이 든다. 사비가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오직 그런 확신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모로는 이야기를 기다린다. 사비는 모로의 기다림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게 끝이야?” “그건 아니지만. 이야기할수록 이상해질 거야.” “말해봐. 천천히, 한 마디씩.”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유모차의 바퀴가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렇게 가다간 바닷속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그는 함정을 팠어.” 플랫폼이 기울면서 경사가 진다. 유모차는 빠르게 굴러간다. “어쩌면 내가 그에게 붙잡혀 있는지도 모르지.” 모로는 지면이 기울어도 휘청거리지 않고 서 있다. 모로는 사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묻는다. “그가 원하는 게 뭔데?” 유모차가 바다에 빠진다. 사비는 모로를 밀치고 뛰어간다. 물 위로 빈 유모차만이 떠다닌다. 사비는 조금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엎드린다. 아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비의 얼굴은 더는 수면에 비치지 않는다. 사비는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수영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숨을 참는 것도 서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사비는 물속에서 자신의 몸이 거추장스럽다고 느낀다. 부품을 해체하듯, 그의 기관들을 하나씩 벗어던져 버리고 싶다. 유영에 매혹된 그는 모든 의지를 멈추게 하고 싶다. 사비는 바람 없는 골목을 걷는다. 길가에는 부랑자들이 누워 있거나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그들은, 사비의 구두를 본다.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본다. 그들은 달그락거리며 바닥을 기어온다. 천천히 손을 뻗어서, 닿지도 않는 사비의 외투 자락을 당긴다. 아버지. 그들 가운데에서 들리는 말. 지금 뭐라고 했소? 사비는 그 말을 잡으려고 성큼 다가간다. 부랑자들의 넝마를 걷어차고 깡통을 뒤집는다. 형제여. 누구요? 사비는 그중 한 명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다. 그늘진 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사비다. 사비는 그 점을 단번에 알아챈다. 사비와 그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재능, 어떤 노력을 발휘해도 알아낼 수 없다. 그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넝마를 주워 든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눕는다.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가린다. 모로가 이곳을 지난다면, 등을 돌리고 눈을 감으리라. 물속으로 거대한 손이 들어와 사비를 건진다. 사비는 플랫폼에 한쪽 어깨를 걸친다. 관리자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제 가야 해.” 물속에서 몸을 완전히 빼내기가 힘들다. 도둑맞은 기분. 사비는 주위를 둘러본다. 플랫폼이 갈라지고, 돌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은은한 광택을 내는 검고 길쭉한 돌이, 누런 연기에 가려 희미해진다. 안개인가? 아니, 매캐한 냄새가 난다. 벌써 시작된 걸까. 관리자는 분주하다. 사비는 말한다. “내 동료가 여기 있었어.” 관리자는 사비를 플랫폼 위로 끌어올린다. “아니. 우리 둘뿐이야.” 관리자는 사비를 잡아끌어 그의 몸을 돌덩어리에 밀착시킨다. 돌덩어리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관리자는 긴 벨트로 사비의 몸통을 돌덩어리에 묶는다. 그가 벨트를 잡아당길 때마다 사비의 몸이 들썩인다. 플랫폼의 조각난 지면이 맥없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관리자는 돌덩어리의 반대편으로 돌아가 같은 벨트로 자신을 묶는다. 그가 돌을 두들기며 소리친다. 사비는 알아듣지 못한다. 돌덩어리가 한 뼘 정도 떠오른다. 돌의 회전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사비는 처음 이곳을 둘러본 이래로 자신이 추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점점 수가 느는 모조들의 대열을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그 느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돌의 깊은 곳으로부터 빛이 새어 나온다. 납빛이다. 그는 순식간에 삼켜지고, 튕겨 나간다. 지면에 부딪힐 때 그는 몸이 조각나는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사비는 홀로 엎드려 있다. 얼어붙은 해변이다. 돌덩어리는 보이지 않는다. 몸을 일으키자 이명을 느낀다. 그의 감각들이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놀라지 않는다. 사비는 곧장 걸어간다. 해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걸음걸이에 여유를 가져야 할까. 길가에 자라난 풀들을 본다. 저택을 가리는 담벼락, 교차로에는 행상들이 있다. 사비는 그들의 생기 잃은 표정을 보고 고향에 왔음을 실감한다. 그는 단지 직관만으로 걸어갈 방향을 정한다. 이곳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금방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 훼손된 집들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몇몇 구조물을 알아볼 수 있다. 그의 보금자리에는 폐기물이 쌓여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그곳이 한때는 집터였음을 어렵게 알 수 있다. 그는 쓰레기 더미에 기대어 앉는다. 그는 시간의 위력을 실감한다. 잠들길 바라지만. 축축하고, 악취가 올라온다. 빗방울의 점성이 높다. 모로는 없다. 사비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난다. 그 아기다. 그의 발치로 아기가 기어온다. 어렴풋이 전해지는 작은 인간의 의도. 사비는 자세를 낮춘다. 아기는 귓속말로 그에게 꿈에 출석할 것을 통보한다. 흠잡을 데 없는 억양이다. 그러잖아도 사비는 위원회의 통보를 각오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돌아왔지 않은가. 사비는 아기를 앞장세워 꿈으로 향한다. 아기의 목덜미에는 번호가 적혀 있다.
  • NASA ‘쌍둥이 지구’ 탐사 검토 시작…2069년 목표

    NASA ‘쌍둥이 지구’ 탐사 검토 시작…2069년 목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알파 센타우리’에 탐사선을 보내는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영국 과학 잡지 뉴사이언티스트가 보도했다. 그 목적은 지구와 매우 비슷해 ‘쌍둥이 지구’로도 알려진 행성 프록시마 b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이 행성은 삼성계인 알파 센타우리에서 가장 작은 알파 센타우리 C(프록시마)를 공전한다. 다만 그 시기는 지금부터 52년 뒤인 2069년으로, 우리 인류가 아폴로 11호를 사용해 최초로 달에 착륙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현시점에서 인류에게는 아직 4.4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인공 구조물을 보내는 기술이 없다.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하려면 광속의 약 10% 속도로 날아간다고 해도 44년의 세월이 걸린다. 즉, 광속의 10%로 비행할 수 있는 우주선을 2069년에 발사한다고 해도 가속 및 감속 기간을 고려하면 빨라도 2113년쯤이 돼야 프록시마 b에 근접 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탐사 자료를 지구로 보내는 데만 4.4 년이 더 걸린다. 결국 탐사선이 프록시마 b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재 지구에 사는 우리 중 대부분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세대를 넘는 이야기임에도 NASA는 프록시마 b의 탐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항성 간 탐사가 망원경을 사용한 관측으로 제한돼 있지만 매우 오랜 시간을 필요하더라도 탐사선을 보내는 편이 더욱 정밀한 탐사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비록 결과를 얻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해도 인류 전체로 보면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다. 한편, NASA의 계획보다 빨리 알파 센타우리에서 신호를 받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팀은 레이저광의 조사로 광속의 20%까지 가속하는 빛 추진식 초소형 탐사대를 알파 센타우리에 보내는 ‘브레이크스루 스타샷’(Breakthrough Starshot) 프로젝트를 2016년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가 구상대로 실현된다면 발사 시점에서 20여 년 만에 탐사선은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한다. 이 방법이라면 우리가 살아있을 때 결과를 알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데 드는 비용은 20년 동안 50억~100억 달러(약 5조~10조 원)라고도 한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과를 얻지 못하면 NASA의 계획이 백업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계획마저도 실패로 끝나더라도 항성 간 탐사 기술의 축적은 다음 세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NASA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골든 리트리버의 사랑스런 크리스마스 선물

    골든 리트리버의 사랑스런 크리스마스 선물

    올해로 12살 된 ‘캐시’라는 이름의 한 사랑스러운 골든 리트리버가 주인으로부터 오랜 기간 외로움을 치유받을 수 있는 놀랄만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지난 26일 미시간주 오톤빌 한 가정집에서 촬영된 영상 속엔,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오는 주인을 보자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며 흥분하는 골든 리트리버의 모습이 소개됐다. 박스 하나를 든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인을 본 골든 리트리버. 녀석은 보자마자 본능적인 후각으로 박스 안의 물건이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눈치챈다. 주인이 거실 바닥에 박스를 살며시 내려놓자 박스 뚜껑이 열리며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골든 리트리버는 새 식구가 반가운 듯 강아지에게 코를 킁킁 거리며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어 강아지가 박스 안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운 후 그 주위를 계속 맴돈다. ‘친구’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좋아하는 골든 리트리버의 모습에 보는 이들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이 선물은 영상 속 주인공 캐시의 주인인 마리 아호넨이 기르던 또 다른 개 ‘로지’가 3년 전에 갑자기 죽으면서 몇 년동안 외로움을 겪어온 캐시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로 그동안 사랑스럽고 착한 행동을 보여온 착한 노견 캐시에게 평생 ‘동반자’를 크리스마스 선물한 것이다. 견주 마리는 “캐시는 최고의 개인데, 우리가 로지를 잃은 이후로 많이 외로워 했다”며 “이제 캐시의 눈에 기쁨과 생기가 넘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며 기쁨을 함께 했다. 사진·영상=Caters Clips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수요 에세이] 인문학적 행정과 공감/정재근 유엔거버넌스센터 원장, 전 행정자치부 차관, 시인

    [수요 에세이] 인문학적 행정과 공감/정재근 유엔거버넌스센터 원장, 전 행정자치부 차관, 시인

    아버지는 언제나 힘이 세고 씩씩했다. 닮고 싶었다. 가끔 새벽 라디오 방송에서 닭과 돼지의 전염병 예방 대책을 안내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눈 비비고 일어나 들었다. 뜻은 알 수 없었지만 방송 맨 마지막에 “지금까지 충남 가축보건소 정모님께서 농민 여러분께 말씀드렸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나올 때 우리 식구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런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병원에 자주 가셨다.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면 슬펐다. 30년 후의 내가 거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슬픈 것은 아버지와 내가 한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공감 때문이었다. 사실 같은 병실에 비슷한 이유로 입원한 다른 환자에게는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했다.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이 돼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다. 통상 역지사지, 감정이입으로 일컬어지는 이 공감 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들은 시인이다. 시인은 나무와도, 하늘과도, 구름과도 얘기하며 그들의 말을 사람에게 전한다. 필자는 늘 시인의 마음으로 주민과 공감하는 따뜻한 행정을 ‘운문 행정’, ‘공감 행정’, ‘인문학적 행정’이라고 얘기하면서 그렇게 행정을 해 보려고 노력했다. 지난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개최된 유엔의 아프리카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주제는 ‘지속 가능 발전과 거버넌스’였다. 비행기로 쉬지 않고 15시간을 날아 도착한 그곳에서 필자는 비행기가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는 21세기 지구촌 어딘가에 살고 있는 어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아니라 필자의 기억에 여전히 생생한 50여년 전의 우리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에서 최빈국으로 분류하는 이 나라에서 1970년대 우리가 살던 그때 그 대한민국의 삶을 보았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작은 승합차, 집, 가게, 도로, 음식 등의 생활수준과 방식은 어릴 때 우리 고향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몇 년 전 라오스의 한 시골에서 구부정한 허리로 팔을 힘차게 저으며 앞을 향해 걸어가던 어느 이장 부부의 뒷모습과 자꾸 겹쳐지던 필자의 고모부와 고모의 모습이 그곳에도 있었다. 지금은 비록 어려워도 내일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앞을 향해 휘적휘적 나아가던 그 모습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석사 공부를 했다는 감비아 대통령실의 과장과 영남대에서 새마을을 배웠다는 토고 기획개발부의 과장이 달려와 필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특히 토고 공무원은 새마을지도자의 리더십 모델이 정부, 지방정부, 지역공동체와 주민 간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라면서 그 나라의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데 도입하려 한다고 했다. 혹시 필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하니 무척 좋아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지구촌 어딘가에 제법 살고 있는 그저 그런 나라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필자가 그곳에서 우리의 과거를 본 것처럼 아프리카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보면서 그들의 미래를, 희망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이제 많은 개발도상국들에 한국은 그저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어떤 나라가 아니었다. 한국과 이 나라들은 과거와 미래를 함께 나누며 공감하는 한 생명체로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볼 때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떠올리는 그런 존재의 끈으로 연결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대한민국의 발전은 그들의 꿈이자 지향하는 대상처럼 다가왔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실패는 단순히 성공 사례 하나가 사라지는 것 이상의 의미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며 함께 아파했던 필자와 같은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번 아프리카 출장은 행정에 있어 공감의 의미가 국제사회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에티오피아 ‘모이’(Moyee) 커피를 사면서 힘든 인삼·담배 농사로 우리를 가르쳤던 부모들을 생각해 보았다. 새해를 맞아 지구촌 저쪽 누군가에게는 고난의 극복과 삶의 희망으로 느껴지는 우리의 소중한 존재 이유를 깨닫고 더욱 씩씩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본다.
  • [2017 결산] 그 별에 생명체가?…새로 발견된 외계행성

    [2017 결산] 그 별에 생명체가?…새로 발견된 외계행성

    올 한 해에도 미지의 우주를 향한 인류의 도전은 계속됐다. 이중 각종 천체망원경을 통한 태양계 밖 외계행성의 발견은 인류에게는 언제나 흥미로운 소식이다. 지구와 같은 환경의 행성이 발견될 경우 외계생명체의 존재 여부, 더 나아가 먼 미래에 인류가 거주할 제2의 지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해에 발견된 여러 외계행성 중 압권은 매우 작고 어두운 적색왜성인 트라피스트-1(TRAPPIST-1)를 도는 지구와 유사한 7개의 행성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는 이 발견을 올해의 10대 과학사건으로 선정했다. 또한 천문 관측 사상 가장 뜨거운 외계행성도 발견돼 학계를 달궜으며 우리나라의 한국천문연구원도 미 항공우주국(NASA)과 공동으로 지구의 질량과 유사한 외계행성 ‘OGLE-2016-BLG-1195Lb’를 발견해 '제2의 지구' 찾기에 한몫했다. 올 한해 발견된 신비로운 외계행성의 일부를 소개한다. - 지구형 행성 트라피스트-1 계 발견 지난 2월 새해부터 천문학계를 들썩이게 만든 발견이다. 지구에서 39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트라피스트-1'(TRAPPIST-1)은 매우 작고 어두운 적색왜성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은 왜성이 무려 7개나 되는 지구형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 NASA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이 행성 7개의 반지름이 지구의 0.7∼1.1배, 질량은 지구의 0.4∼1.4배 범위로, 크기와 질량이 지구와 비슷하다고 결론지었다. 특히나 발견된 행성 중 3개는 액체 형태의 바다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어 조심스럽게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에 대한 후속연구는 비관적이다. 트라피스트-1 주변의 강력한 항성풍과 방사선 때문에 지구 같은 대기를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주변 행성들이 대기를 잃어버려 화성처럼 춥고 생명체가 살기 힘든 건조한 행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 - 얼음행성 OGLE-2016-BLG-1195Lb    지난 4월 한국천문연구원과 NASA가 공동으로 한국 마이크로렌징 망원경 네트워크(KMTNet)를 이용, 1만 3000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외계행성 'OGLE-2016-BLG-1195Lb'를 발견했다. 질량이 지구의 1.43배로 비슷한 OGLE-2016-BLG-1195Lb는 매우 어두운 항성인 'OGLE-2016-BLG-1195L'의 주위를 공전한다. OGLE-2016-BLG-1195L의 질량은 태양의 7.8% 수준의 매우 작고 차가운 별로, OGLE-2016-BLG-1195Lb는 이로부터 1.16AU(1AU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평균 거리) 떨어진 거리에서 공전하고 있다. 때문에 OGLE-2016-BLG-1195Lb의 표면온도는 명왕성보다도 낮을 것으로 추정되는 얼음 행성이다. - '핫' 뜨거운 행성 발견 지구에서 약 620광년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행성도 발견됐다. 역대 발견된 것 중 가장 뜨거운 외계행성의 이름은 'KELT-9b'로 표면온도가 4600K에 달하는 가스행성이다. 태양 표면온도가 6000K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뜨거운 지 알 수 있는 대목. KELT-9b의 질량은 목성의 2.88배·반지름은 1.89배로, 태양보다 2배 가까이 뜨거운 모항성 'KELT-9'를 공전한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와 덴마크 코펜하겐대 등이 공동으로 발견했으며 지난 6월 네이처에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 NASA '행성사냥꾼'의 무더기 행성 사냥    NASA의 '행성사냥꾼' 케플러 우주 망원경이 또다시 외계행성을 무더기로 찾아냈다. 지난 6월 NASA는 새 외계행성 후보를 219개나 발견했으며 이중 10개는 크기와 온도가 지구와 비슷해 잠재적으로 액체 상태 물과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행성으로 추측했다. 총 6억 달러가 투입된 케플러 미션은 지난 2009년 케플러 망원경이 우주로 발사되면서 시작됐다. 이 망원경에 '행성 사냥꾼'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제2의 지구를 찾는 것이 주임무이기 때문으로 지금까지의 임무 수행은 완벽했다. 현재까지 케플러 우주망원경은 총 4000개가 넘는 외계행성 후보를 발견했으며 연구팀은 아직도 그 데이터를 분석 중에 있다. 이중 크기와 온도가 지구가 비슷한 행성은 50여 개 정도다. - 작은 별도는 희한한 거대 행성 기존의 행성 형성 이론에 ‘도전장’을 던진 희한한 거대 행성도 발견됐다. 지난 11월 영국 워릭대학 연구팀은 목성만한 크기의 거대한 외계행성을 발견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지구에서 약 600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행성의 이름은 'NGTS-1b'. 이 행성은 목성같은 가스행성이지만 흥미롭게도 태양 크기의 절반만한 작은 별 'NGTS-1'의 주위를 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두 천체사이의 거리다.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와 비교하면 3%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바짝 붙어있다. NGTS-1의 공전주기는 지구시간 기준으로 불과 2.5일. NGTS-1b의 존재는 기존의 행성 형성 이론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는 태초에 우주의 가스물질로 이루어진 성운이 자체 중력에 의해 수축하면서 그 중심에 태양이 형성되고 남은 물질이 뭉쳐져 행성이 됐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는 여러 이론 중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이지만 물론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곧 NGTS-1b 같은 거대 행성이 이렇게 작은 별 주위에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됐는지가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다. - 이제는 인공지능이 행성발견도 ‘두뼘 우주’인 바둑을 정복한 인공지능(AI)이 이제는 진짜 우주도 접수할 기세다. 지난 12월 NASA는 케플러 우주망원경과 구글의 AI 기술을 활용해 ‘케플러-90계’에서 새 행성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케플러-90계는 지구에서 2545광년 떨어져 있으며, 이중 7개의 행성은 과거에 관측됐으며 이번에 새롭게 '케플러-90i'가 발견됐다. 케플러-90i는 지구처럼 암석으로 이루어져있으나 표면 온도는 섭씨 426도에 달해 생명체가 살기엔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다. 이번 발견이 의미가 있는 구글의 AI 기술이 활용된 점이다. 과거에는 케플러 우주 망원경이 수집한 데이터를 사람이 일일히 검증했으나 구글의 AI가 학습을 통해 해낸 것이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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