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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고 마시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유전자의 운명을 바꾼다

    먹고 마시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유전자의 운명을 바꾼다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네사 캐리 지음/ 이충호 옮김/ 해나무/ 480쪽/ 1만 8000원    2000년 6월 26일 과학자들이 인간게놈(유전체) 지도를 완성했을 때 우리 인류는 드디어 건강과 질병에 관한 모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인류의 청사진을 손에 쥐게 되면서 생명 현상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풀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장밋빛 전망과는 달랐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궁금증을 낳을 뿐이었다. 예컨대 일란성 쌍둥이의 DNA 염기서열은 같은데도 완전히 다른 인생을 맞이한다. 환경과 경험의 차이 때문이라면 어떤 식으로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원제 The Epigenetics Revolution)는 DNA 염기서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을 최신 후성유전학 연구 결과에 기대어 상세하게 풀어나간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란 환경에 따라 유전자가 발현되거나, 혹은 발현되지 않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유전학의 하위학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DNA는 대본에 가깝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지고 만든 조지 큐커 감독의 1936년 작 영화와 배즈 루어먼 감독의 1996년 작 영화가 서로 완전히 다르듯이 세포가 DNA에 들어 있는 유전암호를 읽을 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DNA의 운명은 ‘사용법’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다. 우리가 먹는 음식, 화학물질과 오염 물질, 자외선 등 수많은 환경 자극과 경험은 유전자가 발현하는 방식에 극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이다.  저자는 “최근 생물학에서 일어난 혁명은 놀라운 후성유전 현상이 어떤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지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하게 해주었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본성(유전정보)과 양육(환경) 사이를 잇는 잃어버린 고리를 우리가 마침내 찾아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잃어버린 고리는 바로 환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가리킨다.  책에 따르면 후성유전적 현상은 DNA에 메틸기(基)가 달라붙거나(DNA 메틸화), DNA가 감겨 있는 히스톤 단백질에 변형이 생기거나(히스톤 변형) 하는 현상과 관련이 깊다. 부모로부터 멀쩡한 DNA를 물려받더라도 환경 등의 영향으로 DNA 메틸화나 히스톤 변형이 일어나면 유전자가 발현돼야 하는 상황에서 발현되지 않거나, 발현되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 발현되면서 몸에 문제가 쌓인다. 환경이 바뀌어도 그 패턴은 고정되며 어떤 문제는 세대를 넘어 자식, 손자에게까지 유전되기도 한다.  예컨대 임신 초기 석 달 동안 산모가 영양실조에 시달리면 태아의 세포들은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킨다. 이런 아이들의 세포는 제한된 영양 공급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후성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비만아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극단적인 예로 네덜란드 대기근(1944~1945)의 생존자를 추적해 조사한 결과 임신 초기 석 달 동안 굶주렸던 산모의 아이들에게서 평균 아이들보다 비만율이 높게 나타났고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비율도 더 높았다. 또 이때 태어난 여자아이가 나중에 임신해서 첫아이를 낳으면 그 아기는 대조군보다 체중이 더 많이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20여년 전 어머니 자궁 속에서 발달하던 때의 경험이 자신의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스웨덴 웨베르칼릭스에서 발견된 데이터도 의미심장하다. 할아버지가 9~12세 소년일 때 영양을 과다 섭취했을 경우 그의 손자가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어린 시절 학대를 경험한 어른의 자살률이 높은 것도 후성유전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를 겪은 어른에게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많이 생산되는 코르티솔의 평균 생산량이 더 높다. 어린 시절 학대를 받는 동안에 몸속의 신호는 코르티솔을 과잉 발현하게 하며 이 같은 패턴이 고정되면 정상인보다 정신질환에 더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이처럼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은 후성유전을 통해 행동에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유전자 발현에 변화가 일어나면 세포의 기능과 세포 자체의 본질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과학자들은 후성유전이 인간의 건강에 미칠 막대한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제약회사들은 일부 심각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차세대 후성유전 의약품 개발 경쟁에 수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저자는 “21세기에는 후성유전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우리가 지금까지 도그마로 간주해 온 것을 무너뜨린 뒤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것을 다시 쌓아 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씨줄날줄] 서울의 달/황수정 논설위원

    서울을 처음 대면한 느낌을 아직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대학 입학식을 앞두고 기차역에 혼자 내려 서울역 광장이라는 곳에 처음 섰던 밤. 길 건너 정면에 버티고 있던 옛 대우빌딩은 ‘공룡’이었다. 불빛을 받아 23층의 유리창들이 익룡 비늘처럼 번쩍이던 모습은 여전히 어질하다. 어리바리 이방인을 결정적으로 주눅 들인 것은 빌딩보다 높이 떠 있던 달이다. 둥그런 것이 보름달이었을 텐데, 말 붙이면 뺨 맞을 것처럼 쌀쌀했다. 서울역의 달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서럽고 겁나고. 누가 시비 거는 것도 아닌데 눈 뜨고 코 베일까 봐 불끈불끈 맨주먹을 쥐게 되고. 오래 서울에 살면서 달을 일부러 챙겨본 적이 없다. 기억되는 특별한 감상도 없는 듯하다. 쓸쓸한 이야기다. 마음 창에 비친 달은 그렇게 만인만색(萬人萬色)이다. 상현달이 한가위를 향해 하루하루 만삭의 배를 불려 가는 어제오늘. 이런저런 핑계로 잊었던 보름달을 챙겨 보기 좋은 계절이다. 요즘은 작가들도 작품으로 잘 거두지 않는 달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무한 생명력의 문학 소재로 달만 한 게 없었다 싶을 정도로. 달이란 달은 죄다 탐색 대상이었다. 일찍이 나도향이 예찬한 달은 그믐이다. 1925년 수필 ‘그믐달’에서 칠흑의 달을 “가장 정(情) 있는 사람, 가장 한(恨) 있는 사람, 가장 무정한 사람,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봐 주는 달”이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며 끝을 맺었을까. 새까만 후배뻘인 김동리가 쟁쟁했던 그믐달 예찬론을 보름달로 뒤집었다. “아무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로서 족하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한 것이다….”(수필 ‘보름달’) 더이상의 보름달 찬미는 없다. 보름달의 판정승. 저녁부터 아침까지 온밤 꽉 차게 떠 있는 보름달을 “싱겁고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라는데야. 특별하지 않은 우리들 모습이라는데야. 올 한가위의 보름달은 ‘슈퍼문’이란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까워져 일년 중 가장 크게 보이는 보름달이다. 날씨까지 맑아서 푸짐한 달을 밤새도록 볼 수 있을 거라 한다. 벌써 설렌다. 맞춤하게 추석 보름달은 슈퍼문이라는데, 고향에 가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조사에서는 취업준비생 10명 중 4명이 연휴에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겠다고 답했다. 다만 며칠 객지살이 벗어나는 시간도 아까워 컵밥으로 버티겠다는 실업 청춘들은 더 많아진 모양이다. 집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청춘들에게 보름달은 객창한등(客窓寒燈). 고향 집 마당에서 올려다볼 수 없다면 서울에는 슈퍼문이 뜨지 말아라. 괜히 더 서글프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한화투자증권 새 대표에 여승주씨 내정

    한화투자증권 새 대표에 여승주씨 내정

    한화투자증권의 새 대표이사에 여승주(55)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전략팀장(부사장)이 사실상 내정됐다. 한화투자증권은 21일 이사회를 열어 여 부사장을 새 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공식 선임은 11월 5일 열리는 임시 주주총회에서 이뤄진다. 여 부사장의 이사 등재는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는 주진형 현 대표이사의 교체 절차인 것으로 전해졌다. 여 부사장은 1985년 경인에너지에 입사해 대한생명 전략기획실장 전무 등을 지냈다. 올해 초 삼성 4개 계열사 인수를 성사시킨 공을 인정받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전쟁 없는 세상’ 얼마나 좋을까요

    ‘전쟁 없는 세상’ 얼마나 좋을까요

    올 추석 한국 영화 기대작 중 한 편인 ‘서부전선’이 베일을 벗었다. 추석에는 국내 영화계 4대 메이저 배급사 중 세 곳에서 신작을 내놓고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암살’과 ‘베테랑’으로 나란히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쇼박스와 CJ E&M이 각각 ‘사도’와 ‘탐정’을 내놓은 가운데 ‘서부전선’은 상반기 부진을 만회하려는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야심작이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계의 단골 소재인 남북 분단을 다루고 있다. 여전히 대립과 긴장 완화를 반복하는 남북 관계는 늘 마음이 무거워지는 숙제와도 같다. 때문에 영화적 소재로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제작 보고회 직전 서부전선을 둘러싸고 확성기 설치, 포격 등으로 남북의 긴장 관계는 최고조에 이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부전선’은 냉랭한 남북 관계를 따뜻한 휴먼 코미디로 녹인 영화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남북 간 휴전협정(1953년 7월 27일) 직전의 마지막 3일이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천성일 감독은 이 시점을 택한 이유에 대해 “휴전 협정이 계속 진행되고 심지어 발효가 된 뒤에도 서부전선에서는 사기 진작을 위해서 비밀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한 장의 비밀 문서에서 시작된다. 농사를 짓다 전쟁터에 끌려온 남복(설경구)은 일급 기밀문서를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전달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적의 습격으로 부대가 전멸한다. 이 문서는 교전 도중 탱크와 함께 홀로 남겨진 열여덟 살 어린 북한군 영광(여진구)의 손에 들어간다. 영화는 무사귀환을 꿈꾸는 두 사람이 비밀문서를 서로 손에 쥐기 위해 벌이는 소동이 주를 이룬다.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는 탱크 안은 전쟁터의 축소판이다. 이념의 충돌도 발생한다. “미제의 앞잡이를 벗어나 민족을 해방시켜 주겠다”는 영광의 외침에 남복은 “내가 니들한테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어? 사정을 했어? 애기 얼굴도 못 보고 이게 무슨 XX이여!”라며 쏘아붙인다. 난투극 끝에 누가 총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탱크의 방향은 남과 북으로 엇갈리기를 반복한다. 긴장은 점차 고조되고 서로 총구를 겨누던 두 사람은 서로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비극적 결말? 아니다. 인류로서 존재의 소중함과 민족의 동질성은 이념의 강팍함과 전쟁의 냉엄함을 뛰어넘는다. 인류애적 위대함을 보여주는 장치는 곳곳에 깔려 있다. 남복이 우연히 북한 마을에 들어가 위협을 하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그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준다. 초상집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는 현실을 통해 전쟁통에도 새 생명은 태어나고 인간의 삶은 이어진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한다. 서로 반목하던 두 사람은 남복이 아내와 배속의 아이를 두고 온 사연을 털어놓고 영광이 형들이 모두 전쟁통에 죽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점차 가까워진다. 영화는 문서의 정체도 모르고 쫓기만 하던 남복이 “우리가 뭘 알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라는 대사를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과 비인도적인 문제를 고발한다. 1959년 발표된 선우휘의 소설 ‘단독강화’를 시작으로 영화 ‘웰컴 투 동막골’, ‘고지전’, ‘적과의 동침’ 등 수많은 영화와 문학에서 북한군과 남한군의 이념을 넘어선 우정과 민족애는 여러 차례 다뤄져 왔다. 물론 이 영화도 그런 클리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마치 연극 무대 위 배우를 보는듯 두 주인공에게만 집중해 소소하고 일상적인 코미디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자칫 썰렁해 보일 수 있는 구성을 메운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설경구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푸근한 40대 아저씨로, 여진구는 어리바리하지만 혈기 왕성한 10대 소년병사 역을 맡아 상호보완적인 시너지를 냈다. 이들이 나이와 이념을 넘어 우정을 확인하는 순간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드라마 ‘추노’와 영화 ‘7급 공무원’, ‘해적:바다로 간 산적’의 각본을 썼던 천성일 작가의 감독 데뷔작이다. 아기자기하게 날리는 잽펀치는 많지만 관객을 단번에 휘어잡는 몰입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24일 개봉. 12세 관람가.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사설] 軍 파격 인사 다음은 쇄신이다

    그제 단행된 군 수뇌부 인사는 대대적인 군 쇄신을 주문하는 최고 통치자의 의지가 담겼다. 사상 처음으로 합동참모본부 의장에 3사관학교 출신이 내정됐고, 공군참모총장은 기수를 추월하는 ‘파격’이었다. 육군은 4성급 최고 수뇌부 전원이 이번에 물갈이되면서 참모총장과 제1군사령관, 제3군사령관, 제2작전사령관 등 육군 최고 수뇌부를 모두 교체됐다. 군 전체로 보면 8명의 대장 가운데 7명을 물갈이한 대규모 인사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처럼 대폭의 군 인사를 단행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넘긴 현시점에서 근본적인 군 개혁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만큼 군이 방산 비리를 비롯해 총기 사고와 성추행 등의 온갖 적폐로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했고, 군의 사기마저 땅에 떨어진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올해 들어 전방부대 일반전초(GOP)도 모자라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 사건이 터지면서 기강해이를 노출했다. 있을 수 없는 기무사 기밀 유출 사건은 물론 해묵은 방산 비리로 현역 장성이 구속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이다. 지난달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 사건에서 보듯 군 기밀이 여과 없이 노출되는 등 군의 취약점도 드러났다. ‘남북 8·25합의’가 이뤄지고 나서도 ‘작전계획 5015’ 등 주요 기밀이 새어나갈 정도로 기강이 무너진 것이 사실이다. 군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국가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임에도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다고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고질적인 방산 비리는 군 내부의 줄서기·패거리 문화의 적폐를 그대로 보여 줬고, 특정 인맥을 중심으로 자행돼 온 폐쇄적인 인사 관행은 음습한 곳에서 부정부패를 키운 온상으로 작용했다. 이번 군 수뇌부 인사에는 군이 당면한 엄혹한 상황을 인적 쇄신을 통해 군의 난맥상을 해소하겠다는 군 통수권자의 의지가 실려 있다. 지난해 청와대 비선 실세 국정농단 의혹 사건에 휩싸였던 박지만 EG 회장과 절친한 다수의 육사 동기(37기)들이 이번 인사에서 탈락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군이 바로 서지 못하면 국가 안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신임 군 수뇌부들은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다는 자세로 실추된 신망을 회복하고 군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 앞으로 후속 인사에서도 국민의 염원을 가슴에 새기면서 군 특유의 패거리 문화를 일소하고 폐쇄적인 ‘끼리끼리’ 인사의 고리를 끊어주기를 기대한다.
  • “아이 죽었지만…새 생명 살리는 숭고한 일”

    “아이 죽었지만…새 생명 살리는 숭고한 일”

    “누구도 우리보고 장기 기증을 하라고 말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건강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아들을 그냥 보내면 아깝다고 생각해 결심했습니다.” 9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뇌사 장기기증인 초상화 전시회에 참여한 김매순(62)씨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서 장기 기증 전도사가 돼 있었다. 아들 박진성씨는 27살이었던 2007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뇌사 상태에 빠진 후 7명에게 각막과 심장 등의 장기를 기증했다. 대학 교수를 꿈꾸며 학업에 열중했고, 연세대 대학원 총학생회장을 맡아 리더십을 보였던 박씨의 짧은 삶은 새로운 생명을 안기고 끝났다. 김씨는 아들의 장기 이식을 결심하던 순간을 눈시울을 붉히며 회상했다. “그렇게 허망하게 아들을 잃기 싫었어요. 그래도 남편한테 차마 말을 못 꺼냈는데 먼저 기증 얘기를 하더라고요.” 남편 박상규(65)씨는 “망설여지고 두렵기도 했지만 아내와 생각이 같다는 걸 확인하고는 함께 기증센터를 찾아갔다”고 담담히 말했다. “내 아들은 살 수 없지만 다른 누군가는 살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하나를 잃었지만 7명과 그 가족들이 행복을 찾은 거니까 저는 제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김씨는 가끔씩 아들의 각막을 이식받은 사람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아이의 눈을 가지고 있는 거니까… 마주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아들을 조금이라도 느껴 볼 수 있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장기 기증인과 이식인 간의 만남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장기 기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등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다. 장기 기증단체들도 한때 기증인과 이식인 간 편지를 교환하는 등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진했다가 이런 우려가 불거지면서 포기했다.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보고 싶은 건데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내 아들의 심장이 어디에선가 뛰고 있구나, 7명의 새로운 아들딸이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김씨의 바람은 뇌사 장기 기증인을 위한 추모공원 조성이다. 아들에 대한 예우뿐만 아니라 장기 기증에 대한 홍보를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아들의 장기를 이식하고도 주변의 편견에 시달렸다는 박씨 부부는 장기 기증이 보다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쏟아냈다. “부모가 돈 받고 했을 거라는 얘기도, 얼마나 독하면 자식을 그렇게 했겠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증한 겁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처럼 숭고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날 열린 장기 기증인 139명의 초상화 139점을 전시한 ‘별 그리다’ 행사에는 유족과 장기를 이식받은 환자들이 참석해 자신들을 구한 ‘영웅’들을 추모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데스크 시각] ‘번 아웃’… 아무리 그래도/송한수 정책뉴스부 차장

    [데스크 시각] ‘번 아웃’… 아무리 그래도/송한수 정책뉴스부 차장

    엊그제 얘기다. 꽤나 가벼운 걸음이었다. 내겐 아주 중요한 약속이다. 취재원을 만나러 가는 길. 황당한 일을 만났다. 경복궁 쪽 동십자각 옆에서다. 횡단보도 빨간불은 도통 꿈쩍도 않았다. 발목을 단단히 잡히고 말았다. 시간은 자꾸만 가는데. 대체 무슨 사연일까. 행인 셋이 서성댔다. 웬 건장한 구릿빛 얼굴이 도로 군데군데 늘어섰다. 무전기를 손에 쥔 터였다. 한 사람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횡단보도 초입을 겨냥해서. 한마디 말을 덧댔다. 가운데로 좀 모이라고. ‘뾰로통’ 행인 A는 헛웃음을 보냈다. “에이” 쓴소리가 살짝 새나왔다. 두 번째 경고마저 귓등으로 흘렸다. “가운데로 와 달라”는 말엔 김이 빠져 있었다. ‘귀요미’ 행인 B는 흠칫하다 따랐다. 나 또한 선뜻 내키지 않았다. 요즘 말로 짜증 제대로다. ‘아뿔사’ 싶었다. 약속이 일그러질지 모른다. 10시간과 같은 10분을 보냈다. 경찰 호위를 받는 세단들이 지나가서야 파란불로 바뀌었다. 누군가 높은 분이 행차하는데, 길을 터 주려는 동원이었던 셈이다. 행인 3명은 다시 걸음을 뗐다. 길을 지키던 ‘관찰자’는 외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미안합니다”라고. 나 스스로에게 채찍도 때렸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나섰다면. 결과론적인 말일 뿐이다. 버금가는 아픔(?)을 안은 경험이 영화 후속편처럼 겹쳐 떠오른다. 새삼 2008년 6월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걸음이 제법 잽쌌다. 그만큼 바빴다. 곧바로 퇴근하는 터였다. 친구들과 모이는 날이었다. 장소는 청와대 옆 종로구 효자동. 세종대로 지하철 광화문역 옆엔 전경들이 온통 에워쌌다. 북쪽으로 향한 통행을 막았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신문로 쪽을 택했다. 사직공원 쪽으로 더 걸었다. 조금 둘러 가는 길이긴 했다. 그런데 또 발목이 잡혔다. 약속 시간은 10분 뒤로 쫓아온 터다. 여차저차, 이런저런 사정을 하소연했다.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그대로 물러설 순 더더욱 없었다. 자동차로도 20~30분이나 걸릴 길을 가라니. 터널을 지나고 서대문구 전역을 거쳐 ‘디귿’(ㄷ) 자로 돌아가란 소리냐며 따졌다. 기어이 지휘관을 불러서야 장막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C는 어이없이 목숨을 내놓을 뻔했다. 경기 포천시에 산다. 지난달 감전 사고를 당했다. 서울 큰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급기야 사설 구급차 신세를 졌다. 1분 1초를 다투는 처지다. 국도를 내달릴 때였다. 난데없이 승용차가 가로막고 나섰다. “진짜 환자를 태웠는지 증명하라”고 외쳤다. 문을 열어 보여 줘도 막무가내였다. “(겉으론 멀쩡한데) 위급한 게 맞냐”고 다그쳤다. 한 구급대원은 혀를 끌끌 찼다. 속으론 가슴을 쳤을지 모른다. 설령 뒤칸이 빈 구급차였더라도 환자를 태우러 가던 길일 수 있다. 공직사회의 숱한 노력에도 정부를 불신하는 국민은 줄어들지 않는다. ‘번아웃’(Burn-out)이란 게 있다. 한 가지 일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할 일을 내팽개치지 않아야 한다. 차라리 국민들부터, 특히 생명과 맞닿은 일엔 의심을 걷어 내자.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자. 시민들이 먼저 희망을 보여 주자는 뜻이다. 정부 역시 여전한 권위주의를 걷어 내는 것은 물론 구급차량을 둘러싼 의혹 등 불신을 초래하는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지 않아야 한다. 정부도 “국민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먹히지 않는다”고 되뇐다. 마찬가지로 ‘번아웃’이다. 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이라고 한다. 핏줄이 통하면 아프지 않고, 안 통하면 아프기 마련이다. onekor@seoul.co.kr
  • 공항 불나도 문고리 못 따는 ‘하청’소방대

    공항 불나도 문고리 못 따는 ‘하청’소방대

    지난달 29일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안전문(스크린도어)을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20대 근로자는 공기업 서울메트로와 위탁계약을 맺은 외주업체 직원이었다. 사고 발생 후 서울메트로는 중·장기적으로 안전 관련 업무를 외주 용역이 아닌 직영 또는 자회사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공항·철도 등 공공 교통 분야의 안전 관련 업무가 서울메트로처럼 외부위탁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대형 사고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통 인프라를 운영하는 공공기관들이 효율성을 이유로 자체 조직을 두기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외부위탁에 눈을 돌린 데 따른 것으로, 국민 안전을 위해 큰 틀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6일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인천공항지역지부 등에 따르면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하는 직원 7490명(지난 6월 기준) 중 84.6%(6336명)가 외주업체에 소속돼 있다. 특히 보안경비(대테러 업무, 폭발물 반입 차단 등), 순찰, 소방 등 안전 관련 업무는 인천공항공사가 위탁계약을 한 민간업체 직원들이 집중적으로 맡고 있다. 문제는 비정규직 외주업체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안전 업무가 제대로 이행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10년 넘게 인천국제공항에서 민간 특수경비원으로 일하는 용역직 A(45)씨는 “면세구역으로 들어가는 공무원, 항공사 직원, 면세점 임직원들이 검문검색을 하지 말라고 하면 이를 따라야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2~3년 단위로 회사와 재계약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갑(甲)들의 불만이나 불이익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A씨는 또 “가스총을 착용한 특수경비원 2명만 면세구역 보안을 담당하고 있다”면서 “보안이 취약해 특수경비원을 늘려 달라고 인천공항공사 측에 요구하고 싶지만 잘릴까 봐 말도 못 꺼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공항 내 소방 활동도 비슷하다. 공항소방대에서 일하는 B(35)씨는 “공항 건물 안에서 화재가 발생해도 나중에 배상 책임 때문에 우리가 먼저 문고리를 강제로 뜯고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약 2년 전 공항 앞 도로에서 5t 트럭과 외제차가 충돌해 외제차 보닛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물 호스를 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차주가 배상을 요구할까 봐 차량 소화기 2개만 썼다”며 “소화기로는 잔불을 끄기 어렵고 만일 보닛 안에 잔불이 남아 엔진이 터졌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전 업무의 외주화에 따른 문제점은 KTX도 비슷하다. 전국철도노조에 따르면 코레일에서 KTX 및 일반열차(새마을·무궁화호) 등을 정비하거나 선로 유지 보수 일을 하는 984명(지난 3월 기준) 중 907명(92.2%)이 용역직이다. KTX 차량 정비 직원은 “정규직보다 처우가 낮아서 이직률이 높기 때문에 정비 경험이 제대로 쌓이지 않아 차량 및 선로 점검이 부실해질 위험이 다분하다”고 말했다. 앞서 감사원은 2012년 ‘KTX 운영 및 안전 관리 실태’ 보고서를 통해 외주업체 직원들의 인건비 수준이 코레일 정규 직원 인건비의 36%에 불과해 이직률이 24%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2011년 승객 149명을 태운 KTX산천 열차가 탈선 사고가 났을 때도 선로전환기를 제어하는 장치의 유지 보수 업무를 외주업체에서 한 것으로 조사됐다. 버스업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영수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은 “현장 관계자 말을 들어 보면 전세버스(관광버스) 업체의 경우 자체 정비·유지 보수 시설을 갖추지 않은 곳이 80%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특히 서울시내 운행 버스회사 정비 인력들의 경우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2009년 993명에서 2013년 890명으로 해마다 줄어 정비 업무 외주화와 더불어 안전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업무만큼은 외주용역 이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세월호 참사 등을 계기로 안전 업무를 철저히 관리, 감독하지 않고 외부에 맡겼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목격하고도 각 공기업들이 경영 효율화(인건비 절약)만을 내세우며 외주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면서 “직접고용을 통해 근로자들의 소속감을 높이고 고용 불안을 해소해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커버스토리] 66만㎡ ‘첨단의 땅’… IT로 무장 年 70조 결실

    [커버스토리] 66만㎡ ‘첨단의 땅’… IT로 무장 年 70조 결실

    “판교테크노밸리는 국내 IT 업계의 ‘메이저리거’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상훈 경기개발연구원 부원장의 말이다. 판교테크노밸리가 주목받는 것은 차세대 먹을거리로 각광받고 있는 게임, 정보통신기술(ICT), 소프트웨어 등 산업의 ‘핵심’이 집결돼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조성 10년을 맞이하는 판교는 IT 산업의 대표주자들이 자리잡고 신생 벤처기업들이 자라나며 ‘핵심 클러스터’로서의 위용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판교에 입주해 있는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나라 첨단산업 전반을 조망할 수 있을 정도다. 안랩, 다음카카오, SK플래닛 등 IT 산업을 이끄는 기업들은 물론 국내 상위 10대 게임업체 중 8개사(엔씨소프트, 넥슨, NHN엔터테인먼트, 스마일게이트 등)가 판교에 위치해 있다. 삼성중공업(조선), SK케미칼(생명공학기술), 마이다스IT(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등 각 산업의 ‘대표선수’들도 모였다. 여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강소기업과 벤처, 스타트업들을 더한 1002개 기업이 지난해 거둬들인 매출은 약 70조원에 달한다. 판교테크노밸리 조성이 논의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IT 산업의 부흥을 이끌 첨단산업단지를 물색하던 경기도는 당시 신도시 조성이 계획되던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일대를 점찍었다. 2004년 말 조성 계획이 승인되고 2006년 착공한 판교테크노밸리는 2009년에 면적 66만 1000㎡의 부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던 IT 기업들에 판교는 매력적인 땅이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까지 차로 20분이면 닿는 거리의 땅을 경기도는 테헤란로 땅값의 절반 수준으로 분양했다. 2009년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짐을 푼 것을 시작으로 강남과 구로, 가산디지털단지 등의 기업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본격적인 입주가 시작된 지 5년 만에 입주율 90%를 돌파했다. 올해 말 조성사업 종료를 앞둔 판교는 빈 사무실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북적인다. 판교테크노밸리가 실리콘밸리 및 중국의 중관춘(中關村)과 가장 다른 점은 ‘자생성’에 있다. 대학을 중심으로 젊은 창업가들이 모여 자생적으로 형성된 두 곳과 달리 판교는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기존의 기업들을 결집시킨 곳이다. 그러나 손동원 인하대 교수는 “자생력이 부족한 땅에 정부가 초기 싹을 틔우는 한국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관(官) 주도라는 태생이 한계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실제 연구소와 교육기관, 투자자본이 함께 모여들고 있는 것은 판교테크노밸리의 미래를 밝게 하는 대목이다. 삼성테크윈, LIG넥스윈, SK ㈜C&C 등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연구·개발(R&D) 센터들이 일찌감치 판교에 터를 잡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전자부품연구원(KETI) 등도 연구소를 세우고 인근 기업들에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인근에 대학이 없어 산학연의 기반이 약하다는 한계도 상당 부분 해결되고 있다. 서울대와 경기도가 함께 설립한 차세대융합기술원의 ‘컨택아카데미’, 카이스트(KAIST) 판교센터 등이 문을 열고 인근 기업에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산학연 R&D센터인 ‘스타트업 아카데미’가 내년 2월 문을 열고, 최근 공모에 나선 ‘그랜드 ICT 연구센터’가 설립되면 산학연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벤처기업의 젖줄인 투자자본도 판교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엔젤투자사들이 속속 입주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판교에 입주한 스타트업과 투자사 사이의 투자 유치 사례도 나왔다. 세계적인 벤처캐피탈 기업인 이스라엘의 요즈마 그룹도 판교 입주를 추진한다. 이승 경기과학기술진흥원 판교테크노밸리지원본부 운영기획팀장은 “생산과 연구, 인력양성, 투자의 선순환이 이뤄지는 생태계가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판교로 옮겨온 뒤 ‘각자도생’에 매진했던 기업들은 최근 교류를 부쩍 늘리며 네트워크 형성에 나서고 있다. 코스닥 상장사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이 모인 ‘1조클럽’과 판교의 ‘히든 챔피언’들이 모인 ‘프리(Pre)1조클럽’은 주기적으로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산업계 흐름을 살핀다. 지난해에는 판교의 대표 기업 70여개사가 모인 ‘판교글로벌리더스포럼’이 출범해 공동의 연구개발 과제를 발굴하고 있다. 스타트업 50여개사도 지난 7월 ‘판교스타트업네트워크협의체’를 결성하고 세미나와 강연 등을 통해 역량을 키우고 있다. 판교의 기업인들은 “결집을 넘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단계만 남았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한 ICT 기업 관계자는 “하나의 산업이 한곳에 결집돼 있고 정부와 업계의 관심도 한곳에 집중되면서 지원시설과 인프라, 행사 등이 늘고 있다”면서 “클러스터가 기업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종찬 전자부품연구원 본부장은 “정부가 주최하는 간담회에 가면 절반 이상이 판교에 있는 기업들”이라면서 “기업들 간의 잦은 만남이 신뢰와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커버스토리] ‘IT 맥박’ 판교서 뛴다

    [커버스토리] ‘IT 맥박’ 판교서 뛴다

    “우리나라의 모바일 관련 산업에서는 단연 판교가 중심입니다.”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한 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일대에 펼쳐진 판교테크노밸리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새 먹을거리로 주목받고 있는 ‘핀테크’(금융+기술) 산업이 국내에서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곳이다. 각각 ‘시럽페이’와 ‘카카오페이’로 시장에 안착한 SK플래닛과 다음카카오, 지난달 핀테크 서비스 ‘페이코’(PAYCO)를 출시하며 도전장을 내민 NHN엔터테인먼트가 판교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모여 있다. 지난 3월 ‘핀테크 지원센터’가 문을 열고 지난 2일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한 ‘핀테크 포럼’이 열리는 등 정부의 관심도 판교에 닿아 있다. 세계 가전업계의 화두인 사물인터넷(IoT)도 판교에서 싹을 틔운다. 정보통신(IT) 중소기업과 개발자들이 모인 판교에 KT가 ‘기가 IoT 얼라이언스’를 출범하고 아이디어 집결에 나섰다. 게임산업의 구심점도 구로와 가산, 강남에서 판교로 옮겨 왔다. 엔씨소프트와 넥슨 등 중견기업과 중소 벤처기업들이 게임 한류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IT 산업의 맥박이 판교에서 뛰고 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표방하며 2005년 첫 삽을 뜬 판교테크노밸리가 국내 최대의 IT 클러스터로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말 조성이 완료되는 판교에는 IT 및 생명공학, 문화산업기술 관련 기업 1000여곳과 연구소, 대학, 벤처기업들이 한데 모여 우리나라의 차세대 성장 동력을 만들어가고 있다. 소규모 벤처기업과 스타트업들도 판교에 모여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 간다. 넥슨과 네오위즈 등은 사옥 안에 사무실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마련해 ‘될성 부른’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있다. 모바일게임 ‘탄탄 사천성’으로 대박을 터뜨린 게임개발사 넵튠, 국내 최대 학습알림장 애플리케이션(앱) ‘아이엠스쿨’로 유명한 아이엠컴퍼니 등이 판교에서 날개를 달았다. 창업의 꿈도 판교에서 자라난다. 경기창조과학혁신센터 안에 문을 연 창업지원기관 ‘콘텐츠코리아 랩’과 ‘창의디바이스 랩’, ‘경기문화창조허브’에는 창업 관련 세미나와 멘토들의 강연, 사업아이템 공모전 등을 찾는 예비 창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60여년에 걸쳐 성장을 이뤄낸 실리콘밸리와 비교하면 판교의 역사는 아직 짧다. 기업들의 본격적인 입주가 진행된 건 5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과 연구소, 대학 등이 빠른 속도로 판교에 모이면서 ‘한국의 실리콘밸리’의 가능성이 성큼 다가왔다. 판교에 연구소를 개설한 전자부품연구원(KETI)의 최종찬 본부장은 “실리콘밸리처럼 판교도 창의성과 역동성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무량사 극락전과 제우스 신전의 ‘공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무량사 극락전과 제우스 신전의 ‘공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한국의 목조 건물은 1308년 창건된 수덕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14세기 이전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수덕사 대웅전은 창건 연대가 확실하며 아름답고 당당해 항상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8년 창건 700주년 기념전시회가 수덕사 근역성보관(槿域聖寶觀)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필자는 기념 강연을 했다. 건축에 처음으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해 대웅전 건축과 그 안의 불상대좌, 불탁(향로와 광명대 등을 놓는 탁자) 등 종합적 강연을 대웅전에 대한 찬가로 바쳤다. 한국 목조건축의 공포와 서양의 석조 공포를 비교한다. 그리스 신전도 처음에는 목조건축이었다. 사찰과 궁궐 건축은 지붕을 바치는 공포부(栱包部)가 있다. 공포라는 것은 목조건축의 넓고 두터운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고자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종과 횡이 만나는 구조를 일컫는다. 공포의 부재 중에서 안팎으로 뻗어 나간 것을 순우리말로 ‘살미’라 부른다. 살미는 아래로부터 끝이 길게 뻗쳐 내려간 것은 쇠서형, 즉 소의 혓바닥 모양이라 하고, 길게 올라간 것을 앙서형(仰舌形)이라 불러 혓바닥으로 인식했다. 새 날개처럼 탄력 있고 뾰족하게 뻗은 것은 익공형(翼工形), 구름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긴 것을 운공형(雲工形)이라 부른다. 소의 혓바닥, 새 날개, 구름 등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살미는 조선시대, 특히 전국이 초토화된 임진왜란 이후 화려하게 꽃피운다. 목조건축의 꽃이라 할 공포의 구조와 상징은 오랫동안 오해와 오류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은 쓸데없이 공력을 들였다고 하며 번잡해서 혐오스럽다고까지 폄하했다. 한국 목조건축의 넓고 두터운 기와지붕은 공포부와 함께 비중이 가장 큰 만큼 급속히 좁아지는 축부(기둥들이 만든 부분)와의 비례가 극적이어서 중국과 일본 건축보다 조형미가 뛰어나다. 중국은 축부에 벽돌을 많이 쓰고 일본은 단순해 한국 건축 같은 장중한 미감을 내지 못한다. 그런 지붕부를 받치기 위해서는 공포부가 넓고 높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기능에 한국의 장인들은 엄청난 형이상학 의미를 부여했다. 사상(思想)이 공포의 형태를 결정한 것이다. 2001년 겨울 어느 날 필자는 전남 영광 불갑사로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 그 현란한 대웅전의 내부 장엄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런데 대웅전에 들어가서 위를 본 순간 무엇인지 몰랐던 내부 공포가 처음으로 시선을 꽉 붙잡았다. 공포라는 조형언어를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해독했을 때의 희열과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생애에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정각(正覺)이었다. 그 경이에 힘입어서 여러 사찰을 답사하며 공포를 집중적으로 분석해 2002년에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초청 강연으로 발표했다. 몇몇 교수들은 전화를 걸어와 한국 건축이 그렇게 위대한지 몰랐다고 했다. 마침내 기존 논문을 한 편도 읽지 않고 2004년에 논문으로 발표했으며, 10년 후 한국 공포를 종합적이며 체계적으로 연구해 다시 발표했다. 그러는 동안 괘불의 조형언어를 해독하며 환희에 춤을 추었고, 계속 범종을 해독해 가는 등 모든 장르에 지속적으로 눈뜨는 감격을 누리고 있으며, 마침내 그동안 무엇인지 몰랐던 세계의 조형예술도 해독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의 첫 단추가 공포의 깨달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점차 정립해 온 ‘영기화생론’에 입각한 주제로 수많은 강연을 국내는 물론 대만, 일본, 미국, 그리스, 독일, 프랑스 등의 학회에서 중요한 주제를 처음으로 밝혀 발표하거나 대학에서 강연했다. 조선시대 중기에 창건된 부여 무량사는 당당하고 위압적인 중층(重層) 건축이다 ①. 무량사의 안살미에서는 제3영기싹 영기문 사이에서 용이 화생하며 손으로 보주를 꽉 쥐고 있다 ② ④. 만일 용의 입에서 보주가 나오는 것을 표현하면 보주가 작아지고 강력히 발산하는 영기 표현도 어렵게 되므로 보주를 크게 만들어 쥐게 했다. 오랜 후에 용의 입에서 무량하게 보주가 발산하는 것을 이런 방법으로도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위의 봉황은 연꽃 모양을 물고 있다. 그러나 연꽃 모양 자체가 무량보주가 돼 보주를 무한히 발산한다는 것을 안 것 역시 요즈음이다. 즉 연이은 제3영기싹 영기문에서 화생한 용과 봉황이 각각 무량한 보주를 발산해 대우주에 가득 차게 한 것이다. 밖살미에는 같은 영기문에서 봉황만이 화생해 역시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고 있다. 이렇게 영조(靈鳥)나 영수(靈獸)가 연꽃 줄기를 입에 문 것이 보주를 발산하는 것임을 안 것은 고구려 벽화와 고려청자에서였다. 건축 안과 밖 살미를 ‘안살미’와 ‘밖살미’라고 부른 것은 필자다. 밖살미에서 밖은 공간이 넓으므로 소우주인 건축으로부터 영기를 한없이 마음껏 뻗어 나가도록 한 것이다③. 형태는 다양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불란하게 전개 원리를 지키며 살미를 만든 나라는 한국뿐이다. 필자가 한국 건축에 매료하는 까닭이다. 기둥 위에 활짝 핀 살미 부분을 포함한 공포는 가히 우주목, 혹은 생명수(生命樹)라 할 만하고 이 우주목에서 만물이 탄생한다. 아시리아의 우주목들은 건축의 기둥이 우주목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조형이다. 그런 조형은 역사적으로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해 온 것이나, 실제 건축에서 기둥을 우주목이라고 하고 나아가 보주목(寶柱木)이라 부른 것도 필자다. 가장 오랜 아시리아의 BC 3000년 우주목은 이후 전개되는 다양한 우주목의 기원이 된다 ⑥. 아시리아의 BC 9세기 우주목은 아예 기둥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반드시 양쪽에 영조와 영수가 있는데 우주목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탄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우주목은 기둥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그 맥은 우리나라 목조건축 기둥으로 이어져 무량사에서처럼 기둥, 즉 우주목에서 용과 봉황이 화생하고 있다. 무량사의 기둥과 공포를 합해 다른 예를 참고하며 우주목으로 필자가 그려 만들었다 ⑤. 서양에서는 살미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건축 부재는 주두(柱頭·Capital)라고 한다. 그런데 그저 주두라고 하면 독립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기둥의 일부가 돼 버리고, 지붕을 받치는 개념이 희박하므로 필자는 지붕부를 받치는 기능을 하는 서양의 주두를 공포라고 부르기로 한다. 서양 건축학자들 가운데는 이 주두, 즉 공포의 상징을 밝힌 사람이 아직 없다. 필자는 지난해 그리스 신전의 공포를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걸쳐 그 본질을 새로이 밝히며 기둥과 공포를 합쳐 우주목이라 해석하고 신전 건축은 ‘우주목의 숲’을 건축화한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반응이 컸다. 그 후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처음으로 답사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신전으로,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BC 6세기 아테네 시대에 건설이 시작됐지만, 고대 세계 최대의 성전 완성은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은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에게 바친 신전이지만 지금은 폐허에 일부 기둥들만 남아 있다 ⑦. 4세기경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기 전에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웅장했다고 한다. 원래 84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지금은 15개만 남아 있다. 너무 높아 줌렌즈로 사진을 찍었더니 뜻밖에 공포의 형태가 다양했다. 이곳 공포와 비슷한 대리석 공포를 파르테논 신전을 걸어서 올라가다가 폐허에 겨우 하나 남은 것을 보았다. 매우 비슷하므로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하고, 무량사 극락전의 공포와 맥을 같이하는 로마시대 공포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아마도 제우스신전에는 이런 형태의 공포도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공포는 제우스신의 영기화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포에는 앞에서 보면 양쪽에 두 영조가 있으므로 무량사 극락전의 공포와 맥을 같이하여 만물이 탄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공포를 채색 분석해 보면 밑 부분에는 처음에 서양건축에서 말하는 이른바 ‘아칸서스’의 잎이 네 개 나오며 끝을 밖으로 탄력 있게 구부렸다 ⑧. 그 사이사이에서 긴 아칸서스가 길게 힘차게 뻗쳐 오르며 역시 끝을 탄력 있게 구부렸다. 옆에서 보면 제1영기싹 모양이다. 그런데 양쪽에 영조를 두었으며 중앙에도 같은 모양의 몸인데 얼굴은 없다. 그러나 중앙의 아칸서스 뒤에 새의 몸이 보이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새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에 꽃받침 같은 것이 있고 그곳에서 소용돌이치며 싹 같은 것이 올라가고 그 끝에서 제우스의 얼굴이 화생한다. 그런데 밑의 새 얼굴 부분으로부터 날개를 활짝 펼치는 갈래 사이에서 직선과 곡선의 화살 모양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번개를 상징한다. 제우스는 번개의 신이다. 가장 강력한 영기를 발산하는 것이 번개인데 제우스는 번개를 지물(持物)로 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공포의 네 군데에는 독수리를 배치했고, 보주꽃 대신 제우스 얼굴을 두었다. 이런 공포는 제우스신전에 헌정됐으리라고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비뇰라(1507~157)는 말하고 있다. 비뇰라가 펴낸 ‘5개의 오더’는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 글의 흑백 도면은 그 책에서 선정했다. 1세기 로마시대의 유명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서양건축의 바이블이라 할 ‘건축에 대한 10장’이라는 저서에서 주두의 식물을 아칸서스라 불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모두 보잘것없는 관목인 아칸서스로 알고 있으니 그리스 신전의 중요한 상징을 밝힐 수 없었다. 비트루비우스의 언급이 서양 미술사학의 발전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그리스 신전의 주두뿐만 아니라 이후 건축의 모든 주두의 식물을 아칸서스라 불렀으며, 조각, 회화, 금속공예, 도자공예의 식물들도 모두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양의 조형예술에는 아칸서스가 무수히 많아서 아칸서스가 틀린 용어이고 그런 식물 모양의 본질을 파악해 아칸서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서양 미술사학은 순간적으로 활로를 찾게 된다. 필자는 한국의 공포를 해석해 냈기 때문에 서양의 신전이나 성당의 주두가 아칸서스가 될 리 없다는 것을 증명할 확신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아칸서스를 다음 회에서 해독할 것이다.
  • 홈플러스 품은 김병주 ‘노조 달래기’ 나설 듯

    홈플러스 품은 김병주 ‘노조 달래기’ 나설 듯

    토종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의 새 주인이 된 가운데 7조~8조원의 통 큰 투자를 결정한 김병주 MBK 회장의 다음 행보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김 회장은 홈플러스 기존 대주주인 영국 테스코그룹과의 협상을 마무리하고 매각 과정에 불만이 큰 노동조합을 껴안아야 한다. 성장이 둔화된 국내 대형마트 시장에서 좋은 실적을 내고 적당한 인수자를 찾아 비싼 값에 되파는 것도 숙제다. 3일 금융투자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MBK파트너스는 홈플러스의 기존 대주주인 영국 테스코그룹과 막판 가격 협상을 진행 중이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MBK가 써낸 입찰 가격이 66억 1000만 달러(약 7조 8000억원)라고 보도했다. 최종 가격은 60억~70억 달러(약 7조~8조원) 수준이 될 전망이다. 주식매매계약(SPA)은 이르면 4일 체결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김 회장은 인수가 마무리되는 즉시 홈플러스 임직원 달래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MBK는 지난달 말 홈플러스 노동조합에 공문을 보내 “임직원의 고용 안정을 도모하고 협력적인 노사관계 구축은 물론 상생협력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과거 사례를 보면 MBK는 인수기업 노조와의 마찰을 최소화하고 금전적으로 후한 대우를 해줬다. 직원 사기 진작이 실적과 기업가치 향상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안다는 얘기다. 피인수 대상으로 매각 과정에서 정보를 공유받지 못해 고용 불안을 느낀 홈플러스 직원들에게 위로금이 지급될 가능성이 크다. MBK는 2013년 1월 코웨이를 인수하면서 임직원에게 약 250억원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MBK는 코웨이 인수 뒤 대기업 평균 임금인상률(5.1%)을 웃도는 연평균 6%가량 임금을 올려 줬다. 2013년 말 인수한 ING생명보험 노조가 지난해 7월 희망퇴직 조치에 반발하자 노조의 의견을 즉각 수용해 더이상의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단체협상에도 전향적으로 나서 직원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임금 인상에 합의했다는 후문이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창조경제혁신센터 현장을 가다] 휴업 상태 ‘태양광 1세대 기업’ 재기 발판 마련

    [창조경제혁신센터 현장을 가다] 휴업 상태 ‘태양광 1세대 기업’ 재기 발판 마련

    충남창조경제혁신센터는 입주 업체의 든든한 징검다리로, 폐업 직전의 기업이 새 생명을 되찾기도 했다. 솔레이텍은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를 생산하는 회사다. 창업한 1999년만 해도 전망이 무척 밝았다. 태양광 1세대 기업이다. 하지만 납품하던 모 전자회사가 태양광 충전기 아이템을 접으면서 휴업에 들어갔다. 2년간 휴업하던 이 업체의 손을 잡아 준 것은 한화다. 이만근(61) 사장은 “한화가 자금을 지원하고 브랜드를 활용하게 해 큰 도움이 됐다”면서 “시제품 제작도 맡아 숨통이 트였다”고 말했다. 혁신센터가 지난 5월 문을 열자 입주했고 엔지니어 등 직원 4명을 채용했다. 성층권에 무인비행기를 띄우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등에 5억원 정도의 태양광 전지를 공급하기로 계약했다. 이 업체는 2017년 연매출 100억원 목표를 꿈꾼다. 지난달 입주한 한국농림시스템도 경북 지역 자치단체와 5000만원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태양광 두더지퇴치기를 판매한다. 혁신센터의 시제품제작소 앞에 전시된 태양광 해충 포집기와 태양광 새 쫓기 기계도 개발했다. 경북 안동에 있었지만 충남혁신센터가 태양광 제품 개발의 성지가 되자 회사를 옮겼다. 에이알모드 커뮤니케이션은 해외 진출 도움을 받기 위해 센터에 입주했다. 충남에서 유일한 애니메이션 업체다. 입주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유아용 애니메이션 ‘외계돼지 피피’가 중국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유튜브 등을 통해 중국에 공급하고 수익금의 30%를 받기로 했다. 한화 상하이센터 도움을 받아 중국 기업과 극장용을 공동 제작하는 협상을 하고 있다. 강인철(40) 사장은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혁신센터와 한화도 투자에 적극적이어서 후속작 제작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강영구 충남혁신센터 차장은 “9월 말까지 열리는 공모전에서 뽑힌 아이디어가 창업으로 이어지면 입주 태양광 업체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천안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새 영화] 가와세 나오미 감독 ‘앙-단팥 인생이야기’

    [새 영화] 가와세 나오미 감독 ‘앙-단팥 인생이야기’

    가와세 나오미(46) 감독의 영화는 꾸미지 않은 날것의 소리, 날것의 색깔을 담는다. 예컨대 선선히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비면서 내는 소리를 그저 부드러운 것쯤으로 가공하지 않는다. 소나기 퍼붓듯 ‘쏴~’ 하며 제법 긴 시간 몰아친다. 머릿속 잡념을 확 씻어내린다. 또 삶 속에서 부닥치는 색도 원래의 색의 향연을 펼쳐내기에 평범한 듯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초록과 흰색 등 원색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다가 그 사이로 색을 부수며 내리쬐는 햇빛조차 여과 없이 그대로 담아낸다. 가와세 감독이 색채 미학과 사운드 미학에 집착하는 스타일리스트로 꼽히는 이유다. ‘너를 보내는 숲’,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등에서 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가 새로 내놓은 작품 ‘앙-단팥 인생이야기’(이하 ‘앙’) 역시 마찬가지다. 도쿠에 할머니(기키 기린)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는 벚꽃잎이 연분홍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다가 바람에 난분분히 흩어지는 장면이나 그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와 와카나(우치다 가라)가 교외 양로원을 찾아가는 길의 노랑과 갈색의 향연은 가와세 감독의 미학적 지향이 단지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곳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27살에 처음 만든 장편영화 ‘수자쿠’로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데 이어 ‘사라소주’, ‘너를 보내는 숲’, ‘하네즈’,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신작 ‘앙’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칸 영화제에 초청됐다. 심사위원대상과 공로상 등을 받았고, 심사위원까지 지냈다. 이렇듯 ‘칸이 사랑하는 감독’은 단순한 촬영 기교, 편집 기술 등 형식적 차별화로 선택받았을 리는 없다. ‘앙’은 단팥소가 들어간 일본 전통빵 ‘도라야키’를 파는 조그만 가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픈 사연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장 센타로와 타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격리돼 살아온 할머니 아르바이트생 도쿠에, 그리고 가난과 외로움을 묵묵히 껴안고 사는 여중생 와카나가 꼭꼭 숨겨뒀던 각자의 심연 속 삶의 얘기를 하나씩 풀어간다. 격하지 않게, 꼼꼼히 풀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이미 자신 안에 들어 있던 또 다른 희망의 원천을 스스로 찾아낸다. 생명 곁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님을 덤덤히 풀어낸다.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죽음과 생명의 순환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다. 여느 평범한 삶이, 그 삶마다 품고 있는 인생의 비의(秘義)를 길어올리는 것이다. 가와세 감독이 단·장편, 다큐멘터리, 극영화 등을 가리지 않고 만드는 작품마다 감각적인 영상 속에 일관되게 담아내 온 철학적 주제다. 도쿠에 할머니는 와카나에게 “사람은 세상을 보기 위해, 듣기 위해 태어났어. 무언가 특별하지 않더라도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라고 말한다. 전작들에 비해 비교적 직접적으로 가와세 감독이 건네는 메시지다. 9월 10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우주를 보다] 초신성 폭발이 태양계 만들어…탄생 과정 규명

    [우주를 보다] 초신성 폭발이 태양계 만들어…탄생 과정 규명

    초신성(항성진화의 마지막 단계) 폭발이 빚어낸 엄청난 충격파가 태양계 탄생을 촉발했다는 연구논문이 카네기 연구소 과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46억 년 전 가스와 분자들로 이루어진 몇 광년 크기의 원시 구름들이 떠돌던 한 우주공간 부근에서 초신성 폭발이 일어났고, 그 충격파로 원시구름의 중력 균형이 무너져 한 점으로 붕괴하기 시작함으로써 태양계 형성의 첫발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이 초신성이 우주 공간으로 내뿜은 잔해들은 지금도 소행성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은 태양계 탄생을 촉발한 초신성 폭발이 태양계에 회전력을 부여했으며, 이로써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카네기 연구소의 과학자인 앨런 보스와 샌드라 카이저는 초신성 폭발이 어떻게 태양을 만들어냈는가 하는 주제를 오래 연구해왔다. 그들의 모델은 초신성 폭발로 인한 충격파가 밀도 높은 원시 구름의 중력을 무너뜨려 한 점으로 붕괴시킴으로써 원시 별들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별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가스와 먼지구름들은 별의 둘레를 돌다가 이윽고 행성이 되는데, 이번 새 연구는 초신성 폭발이 어떻게 이런 과정을 최초로 '촉발'하는가를 규명한 것이다. 그들의 연구 방향은 초신성 폭발 때 발생하는 짧은 반감기의 방사성 동위원소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동위원소란 양성자 수는 같지만 중성자 수가 다른 원소를 일컫는다. 초신성 폭발로 인해 태양계가 생성될 때 특정 동위원소들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이 붕괴되기 이전에 행성들이 형성되는 지역으로 흩뿌려졌고, 오늘날에도 그 일부가 소행성 등에 남아 있는 것이다. 보스와 카이저의 이전 연구는 초신성 폭발의 충격파가 가스 구름에 보조개와 같은 구멍을 내어 짧은 반감기의 방사성 동위원소들을 주입시키는 과정을 규명한 것이었다. 우리 태양과 행성들은 이 가스 구름으로부터 결국 탄생했다. 이번 새 연구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주입이 태양계에 회전력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신성 폭발이 촉발한 각 운동량은 이윽고 가스 구름을 원반 형태로 만들었고, 원시 태양을 둘러싼 이 가스 원반에서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원시 태양을 공전하는 가스 원반이 초신성의 충격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탄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 보스는 자신의 소감을 피력했다. '이 스핀이 없었다면 분자 구름은 결국 태양으로 모두 흡수되고 말았을 겁니다.' 이들의 모델에 따르면, 초신성 충격파로 인한 방사성 동위원소들의 구름 속 침투가 없었다면 태양을 둘러싼 모든 물질들이 붕괴되어 태양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결국 우리 지구 같은 행성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새로운 연구는 결국 우리 지구를 포함해 태양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물질들은 수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신성 폭발에서 나온 것이며, 이들이 생명 탄생의 최종 무대를 만들어냈음이 밝힌 셈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사설] 국방·SOC 예산 증액, 국가재정 압박해선 안 된다

    국방부가 내년 국방 예산으로 올해 37조 4560억원보다 7.2% 증가한 40조 1395억원을 요청했다. 대잠수함 전력 강화, 비무장지대(DMZ) 북한군 감시 사각지대를 해소할 열영상 무인감시(CC)TV, 열상감시장비(TOD) 구입 등에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요구에 따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제 당정 회의에서 국방비를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최 부총리는 또 “복지 지출 낭비를 줄이고 사회간접자본(SOC) 규모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재정건전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을 확장적으로 운영하겠다고도 했다.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와 경제 회복의 모멘텀 유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녹록지 않은 현실과 풀어야 할 돈주머니를 계산해 보면 걱정이 앞선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방 예산을 증액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목함지뢰 도발과 포격 도발 등으로 초래된 남북 간의 극한 대치 국면을 고려하면 군사력 강화 차원에서 불가피하고 시급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문제는 예산만 증액한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데 있다. 군은 그동안 방위사업 비리와 첨단 무기 관련 개발 비리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 왔다. 따라서 예산 증액 타령에 앞서 군의 고질적인 비리 구조의 환부를 도려내고 불요불급한 예산이나 줄줄 새는 예산 등을 철저히 점검하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대북 전력을 강화한답시고 남북 간 대치 국면을 전후해 국방 예산을 무려 7% 증액하겠다는 걸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국방 예산 증액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남북 비대칭 전력을 최소한으로 보강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본다. SOC 확충도 좀 더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정치권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관리를 위해 SOC 확충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복지 예산의 일부를 SOC로 돌려 달라고 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무리다. 정부가 밝히고 있듯이 SOC 예산은 올해 이미 많이 반영됐고 꼭 필요하다면 민자 사업으로 진행해야 재정 압박을 줄일 수 있다. 국방과 SOC 예산 때문에 복지 분야가 특히 압박을 받을 것이다. 정부는 효율성을 높여 극복하겠다고 하지만 서비스의 속성상 속도와 강도를 잘 조절해야 하는 민감한 분야가 복지다. 그것보다 경기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취약 계층의 가계소득 증가를 위한 충분한 예산 확보가 더 긴요하다. 내년 경제는 올해와 마찬가지로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발 쇼크에 이은 세계경제 침체와 미국 금리 인상 후폭풍 가능성 등 대외 변수의 불확실성이 더 커질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경기 불황으로 세입 기반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확장 재정을 펴겠다는 최 부총리의 판단은 존중돼야 하지만 재정 여건이 나빠지는 상황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내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40% 안팎으로 유지하기 위해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4%(15조원)가량 늘어난 390조원 이내로 수립하겠다는 건 다행이다. 그러려면 국방·SOC 예산 증액부터 재점검해야 한다.
  • 과학기술의 미래 걱정하지 말아요

    과학기술의 미래 걱정하지 말아요

    휴먼 3.0/피터 노왁 지음/김유미 옮김/새로운현재/332쪽/1만 5000원 과학기술의 진보를 둘러싼 명암의 논의는 극명하게 교차된다. 긍정 쪽은 부와 편리, 여가시간, 건강, 행복의 증대를 얘기한다. 반면 일자리의 박탈과 인간관계의 삭막함, 공동체 붕괴 같은 부작용 또한 익숙하게 들먹거려지는 부수적 해악이다. 이 가운데 최근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주목하는 전문가들은 긍정보다 부정으로 기우는 경우가 많다. 기술발달의 끝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듯이 그렇게 우려할 만한 것일까. 요즘 과학계에서는 천체물리학 개념인 ‘싱귤래리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일반인에겐 생소한 이 용어는 물리학 법칙이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 시공간의 한 점을 가리킨다. 1450년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면서 소수의 특권층만 누렸던 독서며 정보습득이 일반 대중에게 확산된 대변혁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그 과학기술의 진보와 관련한 싱귤래리티를 들춘 이들은 숱하다. 미국 싱귤래리티 대학의 레이 커즈와일 교수는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을 시점을 2045년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스티븐 호킹 박사는 “100년 안에 로봇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며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혹자는 트랜스포머처럼 기계화된 인류가 등장할 것이며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당장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기도 한다. ‘휴먼 3.0’은 그 해악의 주장과는 다르게 과학기술의 끝을 낙관하는 미래예측서로 눈길을 끈다. 과학기술 발전을 주도한 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빚은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를 살핀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로 국내에도 친숙한 저자가 테크놀로지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을 찾아 전 세계를 누빈 끝에 내놓은 분석서이다. 세계적인 인공지능 연구자이며 구글 최고기술책임자,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 등의 인터뷰와 통계를 종합했다. 인류번영을 위협하는 고비는 숱했다. 인류는 탄생 시점부터 생물학적 발달과 환경 변화에 적응해 왔으며 생존과 번영을 결정지었던 큰 변혁은 진화의 순간이었다. 저자는 이전의 인류가 새 환경에 지배당했다면 앞으로의 인류는 환경을 지배하는 인류가 될 것이라며 새 인류를 ‘휴먼 3.0’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인류가 경쟁과 협력 관계를 반복해 온 역사처럼 인류의 진화도 경쟁과 협력의 변증법적 통합으로 미래를 바꿀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책에서도 과학기술 진보의 해악은 곳곳에서 거론된다. 이를테면 산업혁명 때처럼 일자리를 빼앗기고 피상적인 타인과의 교류를 겪게 될 것이며 생명공학 바이러스나 나노 기술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한다는 우려들이다. 여기에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거듭한 기술이 인간지능을 뛰어넘게 되면 단순한 신호등이나 휴대전화 같은 기계가 인류보다 똑똑하게 되고 인간이 기계에 종속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도 들어 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이미 겪고 있는 진화 과정이 긍정의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류가 더 향상되지 못한다면, 기술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기술 발전이나 인류 진화가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휴대전화의 경우를 보자. 휴대전화 중독으로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정보를 얻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자유를 선물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휴대전화는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경우를 덧붙여 설명한다. 1948년 이스라엘 건설 당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1800년대 미국의 수준이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이테크 분야를 강력하게 육성한 결과 불과 50년 만에 60배의 경제성장을 이뤘고 현재 이스라엘은 유엔의 인간개발지수에서 가장 발전한 경제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의 지론은, 과학기술 발전은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에 따라 부가 확대되면서 인류가 행복해진다는 도식으로 굳어진 듯하다. 하지만 책 뒷부분에 진정한 행복의 요인을 콕 짚었다. 세계화를 통한 조화와 개인주의가 변증법적인 통합으로 향할 것이란 낙관론의 바탕에, 남을 먼저 생각하고 이롭게 하는 ‘이타주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듣기 좋은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테크놀로지는 조용히 삶의 배경 속에 성공적으로 녹아들어 사회를 향상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그러면서도 경제 성장의 주요한 원동력이 되어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한 혜택을 누리게 했다. 한국이 보여 준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융합은 모든 나라가 지향할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초신성 폭발 충격파로 지구 탄생했다 ​

    초신성 폭발 충격파로 지구 탄생했다 ​

    초신성(항성진화의 마지막 단계) 폭발이 빚어낸 엄청난 충격파가 태양계 탄생을 촉발했다는 연구논문이 카네기 연구소 과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46억 년 전 가스와 분자들로 이루어진 몇 광년 크기의 원시 구름들이 떠돌던 한 우주공간 부근에서 초신성 폭발이 일어났고, 그 충격파로 원시구름의 중력 균형이 무너져 한 점으로 붕괴하기 시작함으로써 태양계 형성의 첫발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이 초신성이 우주 공간으로 내뿜은 잔해들은 지금도 소행성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은 태양계 탄생을 촉발한 초신성 폭발이 태양계에 회전력을 부여했으며, 이로써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카네기 연구소의 과학자인 앨런 보스와 샌드라 카이저는 초신성 폭발이 어떻게 태양을 만들어냈는가 하는 주제를 오래 연구해왔다. 그들의 모델은 초신성 폭발로 인한 충격파가 밀도 높은 원시 구름의 중력을 무너뜨려 한 점으로 붕괴시킴으로써 원시 별들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별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가스와 먼지구름들은 별의 둘레를 돌다가 이윽고 행성이 되는데, 이번 새 연구는 초신성 폭발이 어떻게 이런 과정을 최초로 '촉발'하는가를 규명한 것이다. 그들의 연구 방향은 초신성 폭발 때 발생하는 짧은 반감기의 방사성 동위원소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동위원소란 양성자 수는 같지만 중성자 수가 다른 원소를 일컫는다. 초신성 폭발로 인해 태양계가 생성될 때 특정 동위원소들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이 붕괴되기 이전에 행성들이 형성되는 지역으로 흩뿌려졌고, 오늘날에도 그 일부가 소행성 등에 남아 있는 것이다. 보스와 카이저의 이전 연구는 초신성 폭발의 충격파가 가스 구름에 보조개와 같은 구멍을 내어 짧은 반감기의 방사성 동위원소들을 주입시키는 과정을 규명한 것이었다. 우리 태양과 행성들은 이 가스 구름으로부터 결국 탄생했다. 이번 새 연구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주입이 태양계에 회전력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신성 폭발이 촉발한 각 운동량은 이윽고 가스 구름을 원반 형태로 만들었고, 원시 태양을 둘러싼 이 가스 원반에서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원시 태양을 공전하는 가스 원반이 초신성의 충격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탄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 보스는 자신의 소감을 피력했다. '이 스핀이 없었다면 분자 구름은 결국 태양으로 모두 흡수되고 말았을 겁니다.' 이들의 모델에 따르면, 초신성 충격파로 인한 방사성 동위원소들의 구름 속 침투가 없었다면 태양을 둘러싼 모든 물질들이 붕괴되어 태양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결국 우리 지구 같은 행성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새로운 연구는 결국 우리 지구를 포함해 태양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물질들은 수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신성 폭발에서 나온 것이며, 이들이 생명 탄생의 최종 무대를 만들어냈음이 밝힌 셈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허백윤 기자의 독박육아] 나홀로 육아, 그 처절한 외로움에 대하여

    [허백윤 기자의 독박육아] 나홀로 육아, 그 처절한 외로움에 대하여

    ´독박육아´라는 말은 친정이나 시댁 등 보조 양육자 없이 대부분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엄마들 사이의 은어로 육아의 책임을 혼자 도맡았다는 뜻이다. 해외에 사는 친정 가족, 종일 바쁜 남편 등의 상황으로 인해 나홀로 육아를 제대로 경험했다. 혼자 아기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됐다. 그래서 초보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더 넓게 읽게 됐다는 뜻에서 ‘독박(讀博) 육아일기’(읽을 독+넓을 박-육아를 통해 세상을 넓게 읽게 됐다는 뜻)를 쓰기 시작했다.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육아맘´들의 세계를 함께 나누고 싶다. 2014년 1월 1일. 나이 서른이 되는 날 엄마가 되었다. 하필 남편이 출근하는 바람에 혼자 택시를 잡아 타고 분만실에 갔던 게 조짐이었을까. 이날부터 시작된 ‘나홀로 육아’는 외로움과 서러움의 연속이었다. 사랑스러운 아기는 축복과 행복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지독한 고독, 우울함과 싸워야 했다. 친정 가족들이 해외에 살고 있다는 점이 한 초보 엄마를 이토록 힘들게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육아의 고통, 궁극적으로는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생명을 길러내는 부담과 책임감에 갇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당연히 엄마들만의 몫으로 여겨지는 상황이 엄마들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요즘은 ‘아빠 육아’ 붐으로 아빠들도 육아에 많이 참여하고 도와주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참여와 도움일 뿐이다. ●하루 평균 양육시간 엄마 11시간·아빠 1~3시간 엄마와 아빠의 물리적인 육아 시간부터 큰 차이가 난다. 육아정책연구소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 양육에 할애하는 평균 시간이 엄마의 경우 주중 662분(약 11시간 2분), 주말 672.5분(약 11시간 12분)인 반면 아빠의 경우 주중 95.1분(1시간 35분), 주말 216.6분(3시간 36분)으로 조사됐다. 당시 조사에 응했던 995명의 아빠들은 “시간이 되는 범위 내에서 자발적으로”(46.9%), “도움을 청할 경우”(35.5%) 육아에 참여한다고 했다. 개인적 약속이나 활동을 포기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4.7%에 불과했다. 그러나 엄마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처음 두 달은 세수도 사치… 오후 5시에 ‘첫 끼니’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기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전적으로 엄마의 것이 된다. 아기의 사소한 모든 것들이 다 내 탓인 것만 같아 전전긍긍할 때 남편은 쿨했고, 아빠는 아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아기에게 어떤 옷을 입힐지, 물을 먹여야 할지 말지도 나에게 물었다. 내복 바지가 어디가 앞면인지까지 매번 물어대니 꼭 아이를 둘 키우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아기와 단둘이 있다 보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고 싶을 때 잠을 자고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기본적인 욕구조차 제때, 제대로 해소할 수 없었다. 처음 두 달은 세수도 사치였고 오후 5시가 돼서야 겨우 첫 끼니를 때웠다.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들이켜는 수준이었다. 70일쯤 ‘바운서’(아기를 눕힐 수 있는 요람 형태의 의자)를 사고 처음으로 앉아서 밑반찬과 함께 밥을 먹었다. ●‘육아휴직해 일 안 해서 좋겠다’ 말에 부글부글 남편이 없는 평일 낮에 샤워를 한 것이 나의 ‘100일의 기적’이었다. 아기가 6~7개월쯤 되어 낯가림이 생기면서 초강력 ‘껌딱지’가 됐을 때는 용변도 아기를 안고 봤다. 아마 많은 엄마들이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문 앞의 아기에게 갖은 애교를 부리며 볼일을 보거나 춤을 추면서 샤워를 해 본 경험이 있으리라. 돌을 넘겨서까지 밤중 수유를 했던 탓에 1년 동안 연속 5시간 이상 통잠을 자 본 일이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매일 이런 생활이 반복됐는데 주변에서 육아휴직의 ‘휴’(休)자에 초점을 맞춰 “일 안 해서 좋겠다”며 속 편한 소리를 하면 속이 뒤집혔다. 그리고 진심으로 외로웠다. 아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과 기쁨만큼 근심과 걱정도 쌓여 갔다. 나의 감정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의 말과 행동, 표정까지 아기의 정서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버거웠다. 그런데 아무도 나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출산 후 호르몬 변화”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복잡하고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기와 나, 우리 둘만 외딴 섬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늘 일에 치이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복잡함 속에 살았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뚝 끊겼다. 휴대전화 벨이 울리는 날이 기적에 가까웠다. 내 이름 석 자를 제대로 불러 주는 사람은 아기용품을 배달해 주는 택배기사뿐이었다. 남편을 제외하고 누군가와 ‘말’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날들이 한참 이어졌다. ●대화가 부족해… 책 판매원마저 반가워진 삶 50일쯤엔 유아도서 판매사원이 집에 방문하겠다고 전화가 왔다. 분명 책을 팔기 위한 속셈이었는데 엉겁결에 당장 오라고 반겼다.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러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약속을 취소했지만. 이런 이유에선지 일부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아기 엄마들에게 접근해 친해지면서 전도의 대상으로 집중 공략한다는 것이 엄마들 사이의 정설이다. 점점 나의 세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으로 좁혀졌다. 회사 동료, 취재원들이 연결돼 있는 페이스북에는 더이상 공감할 내용이 없었고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들의 공간인 육아 관련 커뮤니티에 파고들었다. 회원 수가 230만여명인 한 포털사이트 카페에는 하루에 무려 1만 건 이상의 새 글이 올라온다. 어떤 날은 이 카페에 올라오는 모든 글들의 제목을 다 훑기도 했다. 아기가 좀 자라자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한지 심하게 보채고 안기려고만 했다. 숨 쉴 틈조차 안 주는 아기를 데리고 차라리 밖으로 나갔다. 일주일에 3일 이상 동네 백화점에 갔다. 평일 점심시간 이후, 특히 오후 3~4시쯤 백화점은 유모차와 아기띠 군단으로 붐빈다. 유아휴게실이 잘 갖춰져 있는 백화점과 마트, 쇼핑몰 외에는 사실 엄마들이 마땅히 갈 곳도 없다. 아무 때나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친정이 없는 나에게는 특히 백화점이 최고의 친구였다. 신기하게도 껌딱지 아기는 밖에 나가면 방긋방긋 잘 웃고 보채지 않았다. 별 의미 없는 일상 같지만 그저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다. 육아 카페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도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데서 위로를 받아서였다. 꽤 오래 시달렸던 극심한 우울감을 8개월 이후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털어냈다. 동네 엄마들을 사귀고 군대 동기만큼 끈끈하다는 산후조리원 동기모임에도 나갔다. 아기 엄마라면 나이 불문하고 친구가 됐다. 아직 미혼인 친구들보다 육아 경험이 있는 엄마들과의 만남이 더 편해졌다. 아기를 놔두고 또는 데리고 여가생활을 즐길 수는 없기에 그저 이렇게 스트레스를 풀었다. 육아의 무게, 혼자서만 짊어지기엔 너무 무겁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라 해도 누군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함께해 준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육아의 고통과 외로움에 대한 이해와 공감만으로도 한층 수월해질 것 같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엄마들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baikyoon@seoul.co.kr
  • 고달픈 육백리 끝에… 마중 나온 가을

    고달픈 육백리 끝에… 마중 나온 가을

    가을이 왔나 싶었습니다. 어서 오시라며 버선발로 뛰어 나가 맞고 싶었습니다. 한데 아직 일러 가을은 오지 않았고 대신 초가을 풍경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외씨버선길’이라고 부릅니다. 경북의 오지 ‘BYC’(봉화·영양·청송)와 강원 영월을 잇는 트레일을 일컫는 말입니다. 초가을 정취 내려앉은 그 길을 걸었습니다. 정확히는 경북 영양과 봉화를 잇는 ‘치유의 길’ 구간이었습니다. 고달팠던 여름을 털고 치유의 가을을 맞기에 이만한 곳도 없지 싶습니다. ●선비들이 숨어 살기 좋은 곳… 승무 같은 산길·숲길·들길 영양은 나라 안에서 대표적인 오지 중 하나로 꼽힌다. 구주령과 황장재, 창수령 등 사방을 둘러친 높은 산마루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영양의 옛 지명이 ‘선비들이 숨어 살기 좋은 곳’이란 뜻의 고은(古隱)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외씨버선길 ‘치유의 길’ 구간은 이처럼 험한 영양 땅을 두루 거친 뒤 봉화로 넘어간다. 외씨버선길은 봉화·영양·청송의 영문 이름 첫 글자를 딴 ‘BYC’와 영월의 두메마을들을 연결하는 트레일이다. 13개 테마코스와 2개 연결코스를 합해 전체 길이가 240㎞나 된다. 청송 주왕산 입구에서 시작해 영월 관풍헌에서 끝난다. 이번에 걸은 외씨버선길은 일곱번 째 길이다. 영양 쪽 월악산자생화공원이 들머리, 봉화 우련전(雨蓮田)이 날머리다. 길이는 8.3㎞. 체력이 달린다면 봉화에서 시작해 영양에서 마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양 쪽 구간과 달리 봉화 쪽에선 2㎞ 남짓 오르막이 이어지다 줄곧 내리막이다. 외씨버선길 이름은 조지훈의 시 ‘승무’ 중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구절에서 따왔다.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조붓한 산길, 보일 듯 말 듯 휘어지고 돌아가는 숲길과 들길, 움직이는 듯 마는 듯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승무의 춤사위 같은 길이 바로 ‘외씨버선길’이다. 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해 맵시가 있는 버선이 바로 외씨버선 아니던가. 길의 형태도 외씨버선을 닮았다. 이름의 모티브가 된 ‘조지훈 문학길’은 외씨버선길 여섯번째 구간으로 조성됐다. ●전국 최대 일월자생화공원… 일제강점기 선광장 유적에 세워 들머리는 일월자생화공원이다. ‘전국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야생화 공원’이란 자찬보다, 공원 뒤편 산자락에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길을 확 잡아 끈다. 1939년 일제강점기 때 일월산에서 채굴한 금·은·동·아연 등 광물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용화광산 선광장’이다. 나라 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일제강점기 선광장 유적으로, 2006년 근대문화유산(제255호)으로 등록됐다. 1976년 폐광된 이후 독성 강한 물질들을 내뿜다가 2001년에야 밀봉됐고, 2004년부터 자생화를 심어 공원으로 꾸몄다. 광산 주변으로 목재 데크를 조성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광산 위편에 남아 있는 탄차까지 조목조목 살필 수 있다. 용화2리는 아랫대티와 윗대티로 나뉜다. ‘대티’란 영양에서 봉화로 넘어가던 일월산 ‘큰 고개’를 뜻한다. 윗대티에서 칡밭목까지 4㎞ 가까운 그윽한 산길이 이어진다. 2009년 사단법인 생명의 숲이 주최한 ‘아름다운 숲길’ 공모에서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길이다. 오래전 이 길은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을 잇는 번듯한 31번 국도였다. 안내판은 “일제강점기에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 장군광업소로 옮기기 위한 수탈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적고 있다. 해방 이후 한동안 쓸모없이 버려졌던 도로는 1960년대 들어 일월산과 영양 지역 국유림에 대한 대대적인 산판(벌목)이 활기를 띠면서 다시 분주해졌다. 한국전쟁 판에서 흘러나온 이른바 ‘제무시’(GMC사 트럭)가 곧고 미끈한 육송을 가득 싣고 이 도로를 쉴새 없이 넘나들었다. 당시 삶의 애환과 땀방울이 조붓한 산길에 고스란히 서려 있는 듯하다. ●접신의 땅 일월산… 음기가 모여 있는 용화선녀탕 석굴 길은 일월산 기슭을 따라간다. 일원산은 무속인들이 ‘접신(接神)의 땅’이라 부르는 영험한 산이다. 계곡 곳곳에 돌탑, 기도처 등 치성의 흔적을 쌓아뒀다. 대티골은 그 가운데 무속인의 본거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일반적으로는 용화선녀탕이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옥황상제를 맞기 위해 선녀들이 머물던 곳이라는데, 작은 폭포가 오랜 세월 흘러내리며 만든 욕조 모양의 소(沼)가 인상적이다. 현지 무속인들이 정말 기가 세다고 믿는 곳은 따로 있다. 선녀탕 위쪽의 석굴이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석굴 앞에 서면 뒷목이 서늘해지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하다. 숲길 주변에선 가을철 송이버섯이 많이 난다. 길목마다 송이 도둑을 잡기 위해 주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킨다. 실수로 송이버섯 하나라도 채취했다간 크게 욕볼 수 있다. 간혹 입산이 제한되는 경우도 있다.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소천면’ 경계를 알리는 옛 국도 표지판을 지나면 시멘트 포장길이다. 종착지인 우련전까지 이어진다. 시멘트길은 다소 볼썽사납지만 주변 낙엽송숲은 깊고 아늑하다. 영양엔 은근히 볼거리가 많다. 영양의 명소 두들마을에서 5㎞쯤 떨어진 곳에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 지사의 생가가 있다. 남 지사는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의 실제 모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1895년 남편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유복자를 키우며 의병활동을 지원하던 남 지사는 1933년 일제의 무토 노부요시 만주국 전권대사를 암살하려다 중국 하얼빈에서 체포돼 그해 8월 순국했다. 입암면 산해리 강가엔 봉감모전오층석탑이 홀로 서 있다. 국보 제187호. 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이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연한 축조방식 덕에 균형 잡힌 자태와 장중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청송에 ‘꽃돌’이 있다면 영양엔 ‘폭포석’이 있다. 검은 현무암 사이에 석영 등 흰빛의 광물질이 섞인 돌로, 실제 폭포를 보는 듯하다. 오래전 화산 폭발 때 용암과 섞여 올라온 석영 등이 식으며 형성됐다고 한다. 입암면 선바위관광지 안의 분재수석야생화전시관에 다양한 형태의 폭포석이 전시돼 있다.영양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이 두 곳이다. 감천 측백수림(천연기념물 제114호)은 측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 측백나무가 중국에서 도입됐다는 학설을 부인하는 중요한 학술적 증거라는데, 현재 오토캠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석보면 주남리엔 시무나무, 비술나무숲(천연기념물 제476호)이 있다. 시무나무 최고수령은 350년 정도다. 글 사진 영양·봉화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중앙고속도로 서안동나들목으로 나와 34번 국도를 따라가다 안동시내, 임하호를 거쳐 청송군 진보에서 31번 국도로 갈아타고 곧장 가는 게 일반적이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영주 나들목으로 나와도 비슷하다. 5번 국도를 따라 영주 거쳐 36번 국도를 타고 직진, 춘양 들머리 지나 31번 국도 만나 우회전해 일월·영양 쪽으로 간다. 봉화터널과 영양터널을 거푸 지나면 용화2리 자생화공원이 나온다. 경북북부연구원 외씨버선길 탐사팀 683-0031. ▲ 맛집 영양에선 흑염소 전문집들을 종종 본다. 흑염소 한 마리를 통으로 잡아 1박 2일 여행기간 동안 먹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맛보다는 보신에 가까워 보인다. 영양보양탕(682-9924)은 1인분 단위로 흑염소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집이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기도 하다. 흑염소 수육도 좋지만 맑게 끓여낸 탕이 일품이다. 읍내 끝자락에 있다. 한울가든(682-7300)은 가자미찜, 다슬기국 등 시골밥상을 내는 집이다. 영양군청 앞에 있다. ▲잘 곳 두들마을 석계종택(682-1480), 영감댁·병암고택(682-8050) 등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다. 모텔 등 일반 숙박업소는 읍내에 몰려 있다. 가족 단위라면 한화리조트 백암온천을 권한다. 영양에서 구주령 넘어가면 나온다. 온천과 숙박을 겸할 수 있다. 787-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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