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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비의 섬, 하와이를 달리다 ②마법의 섬 Maui

    신비의 섬, 하와이를 달리다 ②마법의 섬 Maui

    1900년에 나온 소설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는 어느 날 갑자기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마법의 나라, ‘오즈’에 떨어진다. 그리고 2011년 4월 1일, 트래비 독자여행의 행운을 잡은 한국의 도로시도 마법의 섬, ‘마우이’에 도착했다. Maui 박진경 독자의 빅아일랜드 여행기 도로시와 떠나는 마법의 섬, 마우이 1900년에 나온 소설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는 어느 날 갑자기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마법의 나라, ‘오즈’에 떨어진다. 그리고 2011년 4월 1일, 트래비 독자여행의 행운을 잡은 한국의 도로시도 마법의 섬, ‘마우이’에 도착했다. 마우이는 오즈만큼 마법 같은 섬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그랬듯이 현실의 도로시도 마법의 나라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꿈같은 경험을 했다.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꿈일지라도 마우이라면 행복하다. 에디터·사진 박우철 기자 글 박진경 독자 1 몰로키니 앞바다는 파도가 잔잔해 스노클링을 하기 좋다 2 몰로키니 스노클링 투어를 마치고 마우이오션 센터로 돌아오는 도중에 만난 혹등고래. 아쉽게도 볼록 올라온 혹만 구경할 수 있었다 3 할레아칼라의 일출. 한 커플이 일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바다 위에 뜬 초승달, 몰로키니 Molokini 새벽 6시15분, 몰로키니 스노클링에 참여하기 위해 마우이오션센터(Maui Ocean Center)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퍼시픽웨일파운데이션(Pacific Whale Foundation)에서 체크인을 하고 7시쯤 다른 신청자들과 함께 오션스피리트(Ocean Sprit)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출발한다. 퍼시픽웨일파운데이션은 고래보호 비영리 단체로 몰로키니 스노클링 투어, 혹등고래 탐사 투어 등을 실시하고 있다. 부두를 떠난 배는 1시간을 달려 몰로키니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스노클링을 했다. 스노클링에 필요한 스노클과 오리발, 수경은 무료로 대여해 주며, 수트 상의가 필요한 경우 1장당 10달러의 요금을 지불하고 빌릴 수 있다. 스노클링이 처음인 사람들을 위해 강습도 실시한다. 스노클을 쓰는 방법에서부터 수경과 스노클에 물이 들어왔을 때 조치하는 방법 등을 알려준다. 몰로키니는 초승달 모양의 화산섬이다. 상공에서 보지 않는 이상 초승달 모양임을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지만 섬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몰로키니만을 보면 대략적인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몰로키니의 활처럼 안쪽으로 들어간 지형은 스노클링을 하기에 적당한 환경을 만든다. 섬 자체가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파도가 잔잔하고, 이 때문에 다양한 어종의 물고기가 서식할 수 있고, 탐방객들도 안정적으로 스노클링을 할 수 있다. 몰로키니 스노클링을 마치고 우리가 탄 보트는 바다거북을 볼 수 있는 마우이 서남측 라나이(Lanai)해변으로 이동했다. 가이드는 “바닷물은 좀더 뿌옇지만 더 다양한 물고기를 볼 수 있어 더욱 인상적일 것”이라고 기대감을 부추긴다. 바다거북은 보트가 연안에 도착하자마자 탐방객들을 맞이했다. 부끄러운지 등껍질만 살짝 보여주고는 다시 깊은 바다로 들어갔다. 사실 확인을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어렵지 않게 바다거북을 볼 수 있었다. 큰 바다거북이 몸 바로 아래에서 아주 천천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나 물속에서 바다거북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스노클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혹등고래도 볼 수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마우이 앞 바다에서 고래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특히 2월부터 4월까지 알래스카 혹등고래가 하와이 연안까지 내려와 혹등고래를 만나기는 더욱 쉽다. 마우이에서는 이때에 맞춰 ‘마우이 혹등고래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탐방객들이 탄 보트 앞으로 가족으로 보이는 3마리의 혹등고래 무리가 나타났다. 보트 주위를 배회하다가 이내 우리가 탄 보트 아래로 지나갔다. 가이드는 때맞춰 수중 마이크를 물속에 넣고 고래의 대화를 들려준다. <프리 윌리>에 나오는 윌리가 소년 제시와 대화하는 듯한 고주파의 소리가 보트 스피커로 흘러 나온다. 혹등고래까지 보고 나면 처음 출발했던 마우이 오션센터로 돌아온다. 도착시간은 대략 12시쯤으로 총 투어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중식과 음료, 가이드 설명이 포함된 투어 요금은 성인기준 94.95달러이다. www.pacificwhale.org 별이 쏟아지는 태양신의 집, 할레아칼라 Haleakala 할레아칼라산(3,055m)에서 일출을 보려면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에서 늦어도 새벽 3시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출발하기 전에 할레아칼라의 일출 시간을 알아보는 게 좋은데 일출 시간은 미국 국립공원 홈페이지(www.nps.gov)에서 찾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 태양의 초대를 받기 위해서는 10달러의 국립공원 입장료 이외에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새벽 할레아칼라크레이터로드(Haleakala Crater Road)는 ‘오즈’에 나오는 길처럼 꼬불꼬불하고 불빛 하나 없어, 직선거리가 10km에도 못 미치는 거리지만 자동차로 1시간 넘게 올라가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 할레아칼라 정상에 오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임에도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거센 바람에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톰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이 할레아칼라의 일출을 왜 가장 장엄한 광경이라 했는지 가슴으로 알 수 있다. 태양이 할레아칼라 정상을 덮고 있던 구름을 완전히 벗어날 무렵 거대한 분화구가 다시 한번 탐방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할레아칼라는 3,000m가 넘는 고봉이다. 바람도 거세 체감온도는 영하까지 곤두박질친다. 때문에 황홀한 일출을 감상하려면 긴소매 옷을 여러 겹 입거나 호텔에서 담요를 가지고 와 덮어야 한다. 할레아칼라의 추위는 상상 이상이다. Hotel 도도한 무지개를 가슴에 품다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 & 스파 카나팔리 Westin Maui Resort & Spa Ka?napali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는 마우이에서 고급 리조트가 즐비한 마우이섬 서편의 카나팔리(Ka’anapali) 해변에 있다. 한적한 분위기와 마치 해변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듯한 리조트 건물이 인상적이다.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이채로운 모습에 깜짝 놀란다. 휴양 목적의 리조트 안에 조성된 연못에 플라밍고 대여섯 마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움직이지 않아 조형물로 착각하기 쉽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틀림없이 살아있는 플라밍고다. 카나팔리 비치쪽으로 창이 있는 객실에 들어서면서 마우이에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선 바다 건너 몰로카이섬의 고점인 몰로카이산이 희미하지만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천천히 눈을 낮추면 높은 야자수 사이로 마우이 서쪽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리조트에는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다섯 개의 수영장이 보인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5개의 수영장이 하와이의 5개 섬을 상징한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수영장과 더불어 눈에 띄는 것은 무려 45m에 이르는 워터 슬라이드. 얌전히 선베드에 누워 여유를 즐기려 했던 나를 가만두지 않았던 워터슬라이드는 세계적인 수준의 한국 워터파크의 것에 뒤지지 않았다. 가든뷰 객실은 오션뷰와는 또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레인보우 스테이트로 불리는 하와이에서 가장 도도한 곡선의 무지개가 뜨는 곳이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 뒤쪽의 산이다. 지형적인 영향으로 무지개가 자주 연출되는데 이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가든뷰에 묵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는 하루에 30달러를 지불해야 했던 오아후 호텔과는 다르게 주차비를 따로 받지 않아 비용 부담이 줄어든다. 해질 녘이 되면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서쪽을 향해 지어진 건물 탓에 수영장과 레스토랑, 오션뷰 객실 어느 곳에서든지 황금 같은 일몰을 만끽할 수 있는 탓이다. 발코니에 앉아 서서히 사라지는 태양과 꿈 같았던 하루가 지나감을 아쉬워하며 새로 맞이할 내일의 마우이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Room 리조트 일반실 730개, 스위트룸 28개 Facilities & Activities 36홀 골프 코스, 헤븐리스파(Heavenly Spa), 카타마란 세일링, 스쿠버, 스노클링, 요가, 사이클링, 테니스 등 다양한 액티비티가 준비되어 있다. Location 마우이 서부 카나팔리 리조트 단지에 있으며 마우이 국제공항과는 43km 떨어져 있다. 자동차로는 45분 정도 소요된다. 2365 Ka’anapali Parkway, Lahaina, Maui, Hawaii 96761 Reservation 808-667-2525 www.westinmaui.com 1 마우이 서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오션뷰 객실 2 리조트 바로 앞에 카나팔리 해변이 있다 3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 전경. 하와이 다섯 섬을 상징하는 5개의 수영장이 보인다 마우이에 나타난 도로시, 박진경 독자 트래비 하와이 독자여행의 행운을 잡은 박진경 독자의 영어 이름은 도로시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그 도로시처럼 하와이 길가의 작은 꽃 하나에도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일정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이번 여행에서 가이드를 자처하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통역·번역 전문대학원의 바쁜 학업에도 불구하고 여행 출발 전 마우이, 오아후 주요지역 정보를 섭렵했기 때문이다. ‘낯섦’과 ‘설렘’이 여행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그녀는 하와이로 떠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건넨다. 낯섦, 설렘, 길에서 마주친 작은 풀의 소리를 듣고 싶다면 하와이가 딱이라고. Maui Kahului Airport 카훌루이 국제공항 오하우를 비롯한 하와이 이웃섬과 미국 본토를 오가는 항공편이 카올루이 국제공항에서 뜨고 내린다. 허츠 등 렌터카 업체들이 공항 인근에서 영업 중이고 공항을 바라보고 왼쪽 끝에 렌터카 셔틀버스 승강장이 있다. Lahaina 라하이나 바다와 맞닿아 있는 작은 항구 마을이다. 이곳에 가면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와 치즈버거인파라다이스(Cheeseburger in Paradise), 부바검프(Bubba Gump) 같은 맛집도 많다. Ka’anapali Beach 카나팔리 해변 카나팔리 해변에는 웨스틴 마우이, 쉐라톤, 하얏트 같은 고급 리조트가 많다. 또 웨일러스 빌리지(Whalers Village)라는 이름의 쇼핑센터도 있다. 루이비통에서부터 간단한 먹을거리나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는 ABC스토어까지 다양한 상점이 있다. 밤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펍도 있다. Road to Hana 하나로드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지만 운전하기엔 아찔한 도로 카훌루이공항-하나 2시간 30분 Molokini 몰로키니섬 초승달 모양의 섬이다. 불행히도 배에서 볼 때는 초승달의 움푹 들어간 부분만 보인다. 몰로키니섬은 마우이와 오아후를 연결하는 항공기에서 내려볼 때 가장 초승달처럼 보인다. MAUI WINERY 마우이 와이너리 마우이의 유일한 와이너리이다. 파인애플로 만든 와인을 종류별로 맛볼 수 있다. 직접 테이스팅을 하고 구매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 박우철 기자의 마우이섬 드라이브팁 과속은 절대 금물 마우이는 할레아칼라(Haleakala)와 카하라와이(Kajalawai) 같은 걸출한 산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해안도로와 산악도로가 발달돼 있다. 해안도로는 카훌루이 공항에서 섬 서쪽 고급 리조트가 즐비한 카나팔리 해변을 지나 북서쪽 카팔루아(Kapalua)까지 이어지는 30번 고속도로가 대표적이다. 이 길은 시내구간이 왕복 4~6차로로 넓은 반면 마우이 오션센터부터는 왕복 2차로가 주를 이룬다. 차로는 충분히 넓어 운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구불구불하니 과속은 절대 금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차 계기판이 100마일 가까이 가리킬 정도로 과속하게 된다. 마우이에서는 속도를 즐기기보다는 여유있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게 더 좋다. 지리산 성삼제길을 달리듯 아찔한 드라이빙 마우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도로는 ‘하나로드(Road To Hana)’와 ‘할레아칼라 산악도로(Haleakala Crater Road)’다. 할레아칼라 도로는 ‘하늘을 달리는 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을 만큼 환상적인 드라이빙 코스지만 오르막길인 데다 급커브가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 운전해야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길로 알려진 구례 화엄사에서 노고단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성삼제길의 난이도보다 조금 높다. 이런 길은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까다롭다. 내리막길이 30분 이상 이어지기 때문에 풋브레이크와 엔진브레이크를 적절히 사용해야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다. 웬만큼 운전이 서툰 사람은 운전대를 잡아선 절대 안 된다. 이들을 제외한 마우이 도로는 매끈하게 잘 빠졌고, 차량도, 신호도 많지 않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씨줄날줄] 인지대(印紙代)/이춘규 논설위원

    네덜란드는 16세기 말부터 80년간 스페인을 상대로 기나긴 독립전쟁을 치렀다. 전쟁비용이 엄청났다. 세무공무원 요하네스 환 덴 브룩은 1624년 전비 조달을 위한 인지세(印紙稅)를 고안한다. 전비 문제가 풀리며 마침내 1648년 독립을 이뤄낸다. 수입인지(收入印紙·약칭 인지)는 국가가 세입 징수의 한 방법으로 발행하는, 일정금액을 표시한 증표(證票)다. 스탬프(stamp)를 번역했다. 수납받은 뒤 스탬프를 찍은 데서 유래했다. 인지세가 네덜란드에서 성공하자 다른 나라도 주목한다. 1660년에는 덴마크가 도입했고, 1673년에는 프랑스까지 전파됐다. 1694년에는 영국도 도입했다. 영국은 1765년 식민지인 미국에 대해 종교서적·교과서·상업서류·신문·달력 등에 인지의 첨부를 규정한 인지조례를 부과한다. 영국은 아울러 1855년까지 신문지에 과세했다. 이에 따라 신문사는 납세필을 증명하는 붉은 스탬프가 찍혀 있는 신문지에 기사를 인쇄해 발행했다. 우리나라에서 인지는 조세나 소송비용·과태료 등의 납부에 이용한다. 인지 값으로 치르는 인지대(代)는 소송 등의 규모에 따라 다르다. 2000만원 이하의 소액소송은 청구액 1000분의5의 인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소송, 등기, 하도급계약 등은 금액에 따라 일정 비율(청구액의 1만분의5~3.5 등으로 분류)의 인지대가 필요하다. 인지대만 182억원짜리 소송이 있었다. 45억원의 인지대가 두 번째 규모다. 둘 다 대기업 간 소송이었다. 인지대 비리도 문제가 된다. 전국 법원에 접수되는 소송만 한 해 500만건이 넘고, 등기는 1000만건에 이르기 때문이다. 일부 법원 직원들은 ‘수입인지’와 ‘수입증지’를 재사용하는 방법으로 국가 재산 수천만원을 빼돌렸다가 적발됐다. 규모는 최대 수십억원으로 추정된다. 소송서류에 새 인지를 붙여 제출하면 다른 소송 서류에서 미리 떼어낸 헌 인지와 바꿔치기하는 수법이다. 대법원은 이런 부정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가진 재산이 29만원뿐이라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인지대만 608만여원에 이르는 소송을 제기해 화제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피해자인 이신범·이택돈 전 의원에게 1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에 불복해 지난 8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학봉 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과 공동으로 항소장을 제출했다. 인지대를 누가 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29만원의 꼬리표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세계 인문학 고전 읽기의 새 지평 열다

    “한국 인문학 연구 수준의 진전을 확인했습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과 한길사가 함께 만든 ‘문명텍스트’ 총서를 출판한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책을 만들려고 해도 연구자가 흔치 않아 출판사 혼자 하기 어려웠던 기획”이라고 소개했다. 먼저 9권이 발간된 ‘문명텍스트’ 총서는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인문한국(HK)문명연구사업단이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고 확산되었나’를 주제로 인문학 고전들을 번역하고 해설한 책이다. 산스크리트어부터 중세 프랑스 도시까지 다양한 전공을 가진 24명의 연구자는 3년이 넘는 기간에 매주 공동 세미나를 열어 동서양의 고전을 해석했다. 문명 연구에 참여한 이혜경 연구교수는 “서양에서는 문명이 이성에 의한 인간의 발전이었다면 동아시아로 와서는 부국강병의 도구로 변질됐다.”고 화두를 설명했다. ‘문명텍스트’ 총서는 각 문명의 고전을 번역한 1단계 작업에 이어 앞으로 6년간 2단계로 문명의 교류와 충돌을 연구한다. 3단계에서는 한국적 문명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문명텍스트’ 총서를 통해 번역된 고전은 10세기 후반 헤이안 시대 일본 여성의 일기문학 작품인 ‘가게로 일기’, 몽골의 영웅 서사시 ‘장가르 1’, 페미니스트 여성 지리학자가 쓴 ‘페미니즘과 지리학’ 등 대부분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여기에 청나라 황종희가 쓴 ‘맹자사설’, 독일의 신학자 헤르더가 1774년 익명으로 발표한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철학’, 17세기 영국 내전 시기에 나온 팸플릿을 엮은 ‘자유의 법 강령’, 15세기 조선 최고의 지성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소혜왕후가 편역한 ‘내훈’ 등도 같이 번역됐다. 동양과 서양은 물론 몽골, 아랍, 아프리카 등 때로 주목받지 못했던 세계 여러 문명의 고전이 소개될 예정이다. 20여년간 ‘그레이트 북스’란 시리즈로 고전을 소개한 김언호 대표는 “인문학의 수준 향상은 풍부해지고 다양해진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읽기가 귀찮을 정도로 많이 달린 주석이 책의 질을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주석은 번역이 아니라 새로운 저술작업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전자책 등을 통해 학술 서적의 대중화 방안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김 대표는 “인문학은 우리 사회에 학습 과제를 던져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게끔 한다.”며 “인문학 연구는 한 사회를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는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1단계는 외국 고전 번역으로 이뤄졌지만 ‘문명텍스트’ 총서는 앞으로 연구서의 비중을 점차 높여 한국의 새로운 인문 정신을 정립하는 것이 목표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미혼모, 이젠 색안경을 벗자] (5·끝) 이젠 ‘두리모’로 불러주세요

    [미혼모, 이젠 색안경을 벗자] (5·끝) 이젠 ‘두리모’로 불러주세요

    서울시한부모가족지원센터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이 후원한 ‘미혼모의 새 이름을 지어 주세요’ 공모전이 뜨거운 관심 속에 마무리됐다. 대상을 차지한 이다원(28·여·대학원생)씨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미혼모는 혼자의 몸으로 아빠와 엄마 둘의 몫을 하고, 아이를 보호하는 둘레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이들이 세상의 편견에 맞설 수 있는 강하고 둥근 마음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같은 이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대상으로 선정된 ‘두리모’ 외에 아름다운 엄마라는 뜻의 ‘아름모’(김인순·충남 아산시)가 우수상으로 뽑혔다. 가작은 엄마와 아기 모두 우리 사회의 소중한 새싹이 돼 주길 바란다는 의미의 ‘새싹모’(유태화·서울 도봉구)가 선정됐다. 혼자(單)지만 아름다운 어머니(母)라는 뜻과 혼자(單)서 아이(兒)를 키우지만 아름다운(端雅) 어머니(母)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단아모’(이준엽·경북 포항시)도 가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대상 1명에게는 50만원, 우수상 1명에게는 30만원, 가작 2명에게는 각각 10만원 상당의 상품권이 제공된다. ●대학생 전체의 25%… 참여 1위 심사를 맡은 김세중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은 “‘○○맘’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접수됐다. 그러나 노년층과 중장년층 등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부르기 쉬운 우리말 단어가 포함된 작품에 큰 점수를 줬다.”고 설명했다. 김 단장은 “미혼모가 주는 어두운 인식을 바꾸자는 취지에 공감해 의견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영호 센터장은 “심사위원들은 앞으로 이 이름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국어사전에 등재될 수 있도록 힘을 쓰자고 의견을 모았다.”면서 “한부모 관련 법령에 새 이름을 올리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손으로 직접 써 보낸 작품도 20여통 이번 공모전에는 유독 대학생의 참여율이 높았다. 박근혜 서울시한부모가족지원센터 팀장은 “대학생 공모가 25%에 이른다.”고 소개했다. 이 밖에 간호사, 목사, 교사, 방송작가, 번역가, 바리스타, 웨딩플래너, 사회복지사, 산부인과 의사 등 다양한 직업군이 참여해 열기를 더했다. 그 가운데 현직 산부인과 의사가 보낸 신청서가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공모작은 ‘생명지킴이’. 그는 “진료실에서 수많은 미혼모들이 죄의식 없이 임신중절 수술을 받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사회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생명을 지키려는 엄마들을 칭찬하고 싶어서 응모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인터넷으로 제출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무려 41명이 우편으로 응모작을 보냈다. 손으로 직접 쓴 정성 가득한 작품도 20여건이나 됐다. 이름 짓기가 전문(?)인 작명소에서 보낸 응모작도 그중 하나다. 도장까지 찍어 보낸 단어는 바로 ‘지모’(知母). 홀로 부모 역할을 하려면 더 배우고 깨달아 자신과 자녀의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필리핀·일본 등 해외서도 응모 최연소 참가자는 인천에 거주하는 길민지(11)양. 초등학생답게 ‘사랑맘’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보냈다. 끝없는 사랑을 가진 엄마라는 뜻이라고 센터 측은 설명했다. 최고령 참여자는 충북에 사는 76세의 이명우씨. 최고령임에도 영문 이름인 ‘M.M.C’(Miss mom club)로 응모했다. 또 다른 70대도 큰 웃음을 줬다. 그는 공모전에 참여하고 싶다며 센터 측에 인터넷 사용법 등을 묻는 전화를 걸어 왔다. 자원봉사자에게 30분이 넘도록 홈페이지를 찾는 방법, 신청서를 내려받는 방법 등을 배운 그는 “학생, 내가 보낸 것 잘 갔어? 내가 만든 이름 어때? 평가 좀 해 봐.”라며 확인 전화까지 거는 열의를 보였다. 서울, 경기, 경남, 강원, 제주는 물론 바다 건너 필리핀과 일본 도쿄에서도 응모작이 날아왔다. 일본 유학생이 보낸 이름은 ‘한사랑모’로,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필리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주부가 보내온 이름은 ‘미모사’(美母思). 모든 엄마들은 아름답고 고마운 존재이므로 미혼모든 기혼모든 존중받아야 할 사람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밖에도 기자와 센터 측에 전화를 걸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뜻을 표한 50대 두리모도 있었다. “힘든 길을 택한 이 땅의 엄마들에게 박수를 보낸다.”는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백민경·김진아기자 white@seoul.co.kr
  • 한·미 FTA 새 비준동의안 각의 의결… 곧 국회 송부

    한·미 FTA 새 비준동의안 각의 의결… 곧 국회 송부

    정부는 3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심의, 의결했다. 지난 2008년 10월 국회에 제출한 기존 한·미 FTA 비준동의안 중 협정안 한글본에서 일부 번역 오류가 발견돼 지난달 철회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이에 따라 이미 상임위를 통과했던 비준안 중 번역 오류가 발견된 200곳 이상을 수정하고 미국 측과의 서한 형태로 교환된 추가협상 내용을 포함한 새 비준동의안을 의결했으며, 조만간 국회로 송부할 예정이다. 김황식 총리는 회의에서 “한·미 FTA는 우리의 경제성장과 제도개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양국 간 동반적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윈-윈 게임’”이라며 “천안함 공격과 연평도 도발 이후 한국의 안보에서 미국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한·미 FTA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도 매우 유효한 장치”라고 강조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글로벌 시대] 일본헌법 제9조의 의미와 개헌/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일본헌법 제9조의 의미와 개헌/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평화헌법’으로 알려진 일본헌법의 제9조가 한국 사회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생각되어 먼저 이것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1948년에 제정, 공포된 이래 9회에 걸쳐 개헌되어 온 점에 비해서, 일본헌법은 1947년에 시행된 이래 현재까지 64년간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일본헌법 제9조의 조문은 아래와 같다. <일본헌법 제9조 전쟁 포기> ①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적으로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육·해·공군 및 기타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몇 줄의 조항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정규군을 가지고 타국민의 피를 한 방울도 흘리게 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64년간 보낼 수 있었다. 이는 1945년 이전의 일본제국주의의 행동과 비교하면 180도 다른 대전환이며, 한국인들이 이 헌법 제9조의 가치를 인정하고 앞으로 일본이 이 헌법을 견지해 갈 수 있도록 이해해주었으면 싶다. 왜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면, 이 헌법 조문 자체가 일본 보수파의 정치가나 매스컴, 그리고 미국의 압력에 의해 개헌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일본헌법, 특히 제9조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여러 논의가 있었다. 일본헌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맥아더 지휘하에 제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보수세력은 일본헌법, 특히 제9조가 미국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라며 반발해 왔다. 그러나 일본헌법은 전체적으로 정부에서 국민으로의 권력 이양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제9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해나 피해를 경험해 온 당시의 일본 국민들의 솔직한 의사표명이 되고 있다. 이렇게 고마운 헌법 제9조를 만들어 준 미국도 냉전이 시작되자 태도를 바꾸었으며,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했다. 미국의 보수세력은 일본을 민주화하고 일본헌법에 제9조를 넣어 버린 점을 후회했을 것이다. 그 후 사실상 헌법 제9조에 저촉되는 입법이 행하여져, 상당히 무리가 있는 수사학적 헌법 해석에 의해 자위대가 창설되었고,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어, ‘유엔PKO협력법’이 성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군사력은 미국 보수세력과 결부된 일본의 보수세력 정치가들 vs 헌법 제9조를 방패 삼아 재무장에 반대하는 일본 국민이라는 구도로 다투어 왔다. 그러나 지금 현재 헌법 제9조에 대해서 조문 자체의 개헌이 시도되고 있다. ‘새헌법제정 의원동맹’이라는 개헌을 목적으로 하는 국회의원 연맹이 있다. 회장은 자민당 국회의원으로서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다. 이 인물은 한국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에 방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비교적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역사교육의 우경화를 진척시키고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참배한 유일한 총리이다. 방위비 1% 테두리 철폐를 단행한 보수계 정치가의 대표다. 또한 나카소네는 1954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원자력 예산을 국회에 제출하여 성립시킴과 동시에 A급 전범이었던 쇼리키 마쓰타로와 함께 정치계에 있어서 원전정책을 추진해 왔다. 역사교육의 우경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방위비 증액을 진행시켜 왔고 헌법 제9조에 대해서 개악을 꿈꾸는 인물인 동시에 일본의 원자력 정책 추진의 주축인물이었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목격한 바와 같이 너무나 위험하고 에너지 효율이 최악이며, 핵폐기물 처리까지 계산하면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어서 비경제적인 원자력 발전을 도대체 왜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나 하는 의문도 이와 같은 역사의 문맥에서 답을 얻을 것이다.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9)‘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9)‘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간디! 흔히 ‘인도 독립의 아버지’, ‘힌두의 성자’라고 불리는 ‘위인’. 그러나 청년 시절의 간디는 조혼이나 카스트 제도를 부끄럽게 여겼고, 육식을 금지하는 힌두교 전통을 낙후된 것이라 생각했던 식민지의 젊은 문명론자였다. 그가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인도의 대개혁을 위해 성심을 다해 일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당연한 일. 이 촌뜨기 식민지 유학생은 식민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신사’의 꿈을 꾸면서 새 옷을 맞추고, 실크 모자와 야외복과 고급 넥타이를 사고, 그것도 모자라 댄스와 프랑스어와 웅변술과 바이올린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빠진다. 물론 이런 부박한 충동은 금세 극복되었다. 그렇다고 ‘문명=개혁’에 대한 간디의 이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간디는 귀국 후 집안에서 자녀에게 체조 교육을 시키고, 음식을 개량하고 의복을 서구화했다. 그에게 영국은 문명과 이성의 대명사였고, 인도는 교화시키고 개혁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식민지 엘리트 청년은 스스로를 위대한 대영제국의 신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샤 계급 출신으로 인도 사회에서는 흔하디 흔한 ‘식료품상’이란 뜻의 ‘간디’란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변호사 자격을 따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개업하기가 어려웠다. 집안의 꿈이었던 정치 관료로 출세하기란 더 난감해 보였다. 간디는 스물넷에 ‘잘나가는 변호사’를 꿈꾸며 남아프리카로 떠난다. 안타깝게도 날선 바지에 영국식 양복을 입은 변호사도 그곳에선 ‘갈색 피부’에 불과했다. 1등석 차표를 지녔지만 “같이 못 타고 가겠다.”는 백인의 말 한마디에 강제로 끌려나와 낯선 기차역에 버려진다. 최초의 충격! 그랬다. 간디는 당시 남아프리카에 5만명가량 존재했던 이주노동자, ‘쿨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쿨리들의 구심점이 되어 버린 간디. 이제 스물여섯 살 청년 간디는 ‘쿨리’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는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결국 남아프리카의 나탈에서 인도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치가, 혁명가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간디는 23년간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귀국 후 조국 인도에서 죽을 때까지 정치 지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대영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전국적인 정치 지도자가 자신이 해 왔던 것은 정치적 실험이 아니라 “정신적 실험”이며 ‘모크샤’(자기 구원)를 향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징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기억이 없다.”거나 도둑질을 했을 때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속죄를 했다는 식의 자기 성찰은 진지하다. 그러나 이런 특징을 모든 위인이나 성인의 특징이라고 말해버리면 간디는 그냥 ‘본투비(Born to be) 성인’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간디의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매번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낯선 상황, 낯선 사건에 놓였고, 매번 그 현장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영국에 협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정치적 문제에서부터 육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까지 간디에게 쉬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에 그는 책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발견했다. 그가 자발적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유학 시절에 읽었던 책들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시절 이후 그가 생산해야 하는 진리의 길은 매번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던 투쟁의 한복판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놀라울 정도의 윤리적 감수성으로 매번 창조적인 ‘진리 실험’을 한다. 소위 ‘비폭력 불복종’이라고 불리는 ‘사티아그라하’ 역시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는 단순한 정치적 불복종, 지문찍기를 강요하는 영국 지배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정신적 고결함을 파괴하며, 인간 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그것은 영국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나부터 한없이 고귀해지겠다는, 나부터 한없이 낮아지겠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 간디의 진리 실험이 더해질수록 그는 유명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삶은 점점 더 간결해졌다.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만큼만 입었으며(윈스턴 처칠은 그가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총독 궁전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하며 “경악스럽고 역겹다.”고 했다), 가장 비천한 불가촉천민이 하는 일, 청소나 똥 푸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간디의 아내는 때때로 절망하고 울부짖었으며,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다. 맏아들은 마치 아버지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말썽을 피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명하고 단호했다. 비록 때때로 좌절하고 비틀거렸지만 그는 단 한번도 ‘사티아그라하’, 모든 폭력과 지배에 대한 그 위대한 불복종을 멈춘 적이 없다. 간디의 물레! 그건 간디의 상징이고, 인도 독립의 상징이고, 나아가 모든 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서 진부하기조차 한 물레! 그러나 간디의 물레, 그것은 단순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아니다. 흔히 자치로 번역되는 ‘스와라지’ 역시, 단순한 정치 체제를 일컫는 말은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 인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 자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정신적 힘을 의미했다. 도대체 인도가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물론 동인도회사의 지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 때문인가. 그 이면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들어온 영국 상인만큼 단숨에 돈을 벌고자 했던 인도인의 욕망과 협력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도인의 마음에 뿌리박힌 영국 문명에 대한 동경, 물질과 화폐에 대한 욕망. 독립과 해방은 영국 통치가 끝나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영국적 삶의 방식 전체, 근대 문명 전체가 종식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물레’는 도구가 아니라 비전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노동하고, 그 노동의 힘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하는 정신들이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상적인 꿈. 그걸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나 대량생산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수공업들이 리바이벌되는 작은 마을들의 연합. 간디가 꿈꾼 인도의 미래였다. 마을 스와라지에 모든 사람이 환호와 갈채를 보냈을까. 아니다. 타고르는 ‘실을 잣고 천을 짜는 것’이 과연 한 민족의 구루가 전하는 메시지로 적절한가에 대해 간디에게 물었고, 간디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고칼레조차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어리석은 짓이라 비웃었다. 간디는 대답했다. “나는 원시적 방법 자체를 위해 원시적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시적 방법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은 이 방법 말고는 할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 마을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한 걸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네.” 절대적 빈곤 속에서 술과 아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존심과 고결함을 돌려주는 일. 상호 의존과 형제애를 일상에서 실감하는 일. 노동과 명상과 섬김이 함께하는 마을에서의 삶! 그건 어떤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인도의 비전, 아니 인류의 비전이었다. 1947년 의회를 통과한 인도독립법령에 따라 8월 15일 영국의 인도 지배가 종식되었다. 어찌 보면 간디의 이상이 실현된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립의 날, 그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독립은 온갖 적대와 폭력 속에서 힌두와 이슬람이 결국 결별을 하는 분단 인도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평생 간디를 추종했고 간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네루는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버렸다. 그는 중공업을 기반으로 한 ‘발전된 인도’를 열망했다. 간디의 머리에는 타고르의 시가 떠나지 않았다. “혼자 걸어가라!” 간디는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얼마 못가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투비 성인’으로 출발하지 않았지만 위대한 영혼’으로 잠들었던 간디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간디의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게 아닐까. 혁명의 길과 구원의 길이 다른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희경 문탁네트워크 연구원
  • 소개팅 첫 만남서 “사진보다 낫네요”… 깜짝

    소개팅 첫 만남서 “사진보다 낫네요”… 깜짝

    최근 회사원 김지영(29·여)씨는 소개팅 상대를 만나고 깜짝 놀랐다. 그가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나으시네요.”라며 첫마디를 건넸기 때문. 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던 김씨는 “어떻게 내 사진을 볼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김씨의 사진이며 출신학교, 취미, 좋아하는 음식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의 페이스북에서 김씨의 페이스북 주소를 찾아 들어갔다는 것이다. 김씨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이 다른 사람과 직접 만나지 않고도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유용하다.”면서도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내 정보가 유출됐다는 것에 충격과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소셜 네트워크 스트레스’(SNS)라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의사소통과 교류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약’이 되고 있지만, 개인정보 유출 우려 등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SNS의 부작용들 가운데 내 사생활이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는 문제가 무엇보다 심각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회사원 이하나(25·여)씨는 홍콩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시절의 친구들과 연락하기 위해 페이스북을 이용했다. 현지에서 겪은 고충과 불합리한 사례, 느낌 등을 올리며 불만 해소 도구로 활용했다. 특히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로 글을 썼다. 주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씨는 최근 크게 낭패를 봤다. 회식자리에서 부장이 권하는 폭탄주를 거절하지 못해 폭탄주 8잔을 마시고 쓰러진 다음 날 오전 페이스북에 “部長, 不要再讓我喝酒好不好? 酒鬼!(부장, 술 좀 그만 먹여주실래요? 술고래야!)”라고 남긴 것. 이씨의 부장은 페이스북에서 ‘부장’이란 글자를 알아보고 구글 번역기로 이씨의 글을 해석해 이씨가 자신을 비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씨는 결국 회사에서 공개적으로 부장에게 혼이 났다. 이씨는 “페이스북 같은 개인적 공간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신경 써야 하는 것 같아서 피곤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미국에서는 기업들이 대학생 인턴이나 사원을 뽑을 때 당사자의 트위터, 페이스북, 미니홈피 등을 샅샅이 훑어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2008년에는 한 입사지원자가 페이스북에 지원한 기업을 비난하는 글을 올린 것이 드러나 탈락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SNS가 사용자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 받지 않으면 불안해 못 견디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 신지훈(26)씨는 24시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수시로 트위터에 접속해 자신이 ‘팔로잉’한 누군가가 글을 남기진 않았는지 살핀다. 글을 남겼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리트윗’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갖고 있다. 신씨는 “병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SNS를 통해 새 정보를 바로바로 접하지 않으면 나만 뒤처진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신씨는 얼마전 중간고사를 치르는 도중 트위터에 새로운 내용이 떴는지 확인할 수 없어 시험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초조함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SNS를 통해 알게 되는 다양한 관계 자체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소라·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세 남매 꿈·모험 담은 ‘제2의 해리포터’

    새로운 판타지 소설의 등장이다. 판타지를 한참 헤매고나니 현실의 문제가 더욱 또렷해진다. ‘에메랄드 아틀라스’(존 스티븐스 지음, 정회성 옮김, 비룡소 펴냄)는 ‘시원의 책’(The Books of beginning) 3부작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지도책 ‘아틀라스’로 통칭되는 책을 둘러싼 모험의 기록이다. 소설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넘나들고, 마법사, 난쟁이족 등과 만나 모험을 벌이는 등 전형적인 판타지 소설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해리포터 시리즈’ 등 앞서 판타지 소설이 이뤄낸 성공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 덕분일까. ‘에메랄드’는 지난해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원고가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출판 관계자들을 흥분시켰다.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었고, 실제로 1년 가까운 기다림 끝에 지난 5일 35개국 언어로 동시 번역, 출간됐다. 방송작가로 활동해온 존 스티븐스의 소설 데뷔작품에 불과했지만 초판만 25만부를 찍었고, 출간되자마자 미국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벌써부터 ‘제2의 해리포터’라는 찬사를 받으며 영화화 제안이 쇄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에메랄드’가 더욱 주목받아야할 지점은 따로 있다. 소설은 가족과 엄마에게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림받은 세 남매(케이트, 마이클, 엠마)의 이야기다. 이들이 겪는 환상적인 모험을 주된 서사로 깔고 있지만, 기실 그것은 상실과 상처에 대한 치유 과정이다. 두 동생과 함께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케이트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끝없이 스스로-혹은 독자들에게-질문을 던진다. “당신 삶에 가장 중요한 의문 한가지가 있다고 생각해 봐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까지 당신은 언제나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일 거예요. 내 경우엔 ‘엄마 아빠가 정말 우리를 사랑했을까? 그랬다면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었을까?’ 하는 게 중요한 의문이었어요.”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꿈과 희망, 모험 등 판타지 소설이 줄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 외에도 ‘책에 대한 오마주’를 오롯이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판타지에 시큰둥한 독자라도 책을 사랑하는 이라면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창세기 히브리어 원전 역주서 발간

    구약성경 첫 권, 창세기를 성경 히브리어 원전인 ‘마소라 사본’의 원뜻과 소리를 충실히 살려 번역한 역주서가 나왔다. 방석종 전 감리교신학대(구약학) 교수가 3년간 매달려 세상에 낸 ‘창세기 역주’(전통문화연구회 펴냄)다. 기독교 기관이나 단체가 아닌 개인 차원에서 마소라 사본을 토대로 창세기 역주서를 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땅에서 우리말로 성경이 완역된 지 올해로 100년째. 기독교계는 예배용 공용 성경 개역 개정(1997년)·천주교 성경(2005년)을 비롯해 공동 번역(1978년)·표준 새 번역(1993년) 등 공용 번역을 통해 원문과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옛 번역을 답습한 부분이 많아 여전히 신자들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목회자들도 적지 않은 혼란을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번 ‘창세기 역주’의 가장 큰 특징은 원문의 뜻과 음을 최대한 살렸다는 점이다. 인명·지명 등 고유명사를 원음주의에 따라 표기해 이삭·이사악은 이츠하크로, 벧엘·베텔은 베트엘로 쓰는 식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 부분에 히브리어의 문법적 설명 외에도 각종 자료를 붙여 뜻을 상세하게 밝혔다. 자세한 소제목을 달아 제목만으로도 단락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한 점도 눈에 띈다. 책의 탄생 경위도 예사롭지 않다. 평생 구약학 연구에 매달려 온 방 교수가 지도하던 은평감리교회의 교육과정 ‘모세오경 연구 과정’이 출발점이다. 작은 독회 모임에서 번역을 계획해 이 교회 목사, 장로, 권사를 비롯한 신학·국어·교정 전문가 100여명이 3년에 걸친 독회와 감수, 윤문, 교정 작업을 했다. 역주서의 시작과 끝이 모두 은평감리교회의 작품인 셈이다. 이 모임은 앞으로 모세오경을 모두 간행할 예정이다. 주로 동양 고전 번역 출판에 치중해 왔던 전통문화연구회가 책 출판을 맡은 것도 흥미롭다. 이계황 전통문화연구회 회장은 “이 땅에서 종교 간 갈등의 수위가 점차 고조되고 있다.”며 “서양 고전의 정수인 기독교 경전을 번역하는 일은 동서 고전을 통한 종교 간 이해와 평화 차원에서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출판 배경을 밝혔다.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서버공격 당하는데 개인만 통제…공인인증제 폐지해야”

    “서버공격 당하는데 개인만 통제…공인인증제 폐지해야”

    지난해 7월부터 인터넷뱅킹에서 공인인증서를 사용할 의무가 사라졌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스마트폰뱅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자거래에서 공인인증서를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 공인인증서를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은행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액티브X를 통해 은행이 요구하는 자체 보안 프로그램을 내려받는 과정이 없어지게 된다. 그동안 액티브X는 마이크로소프트(MS) 전용 브라우저인 인터넷익스플로러(IE)에서만 구동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브라우저 선택권이 제한되며, 보안업계 전반의 발전을 해친다는 지적이 있었다. 오픈웹의 김기창 고대법대 교수와 이민화 전 기업호민관이 논의를 주도했고, MS 운영체제가 아닌 맥 운영체제를 쓰는 아이폰이 보급되면서 결국 공인인증서 사용 의무가 폐지됐다. 김인성 IT칼럼니스트는 25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여기에 더해 공인인증서 체제가 보안 측면에서도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2009년 분산서비스거부(디도스) 공격부터 최근 농협 전산장애 사태까지 국내 보안사고에서 툭하면 서버가 공격을 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김 칼럼니스트는 “외국의 보안이 기관 사이트를 통제해 서버 관리에 만전을 기하는 식이라면, 국내는 기관 사이트의 허점을 방치한 채 개인만 통제하는 식”이라면서 “공인인증서로 사용자들은 불편해지지만, 사이트 보안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상태로는 보안 분야에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보안업체의 배만 불릴 뿐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된다고 했다. →농협 전산장애 사고를 전후해 피싱사이트가 출현했다. 사고 원인은 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피싱사이트의 발빠른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피싱사이트를 통해 고객 정보를 빼내는 것은 중국 쪽 해커집단의 돈벌이 수준이 된 지 오래다. 인터넷뱅킹을 하려고 하면 은행에서 보안 프로그램을 다운받게 한다. 해커들은 유사 사이트를 만들고 보안프로그램으로 위장한 바이러스를 다운받게 한다. 이렇게 해서 좀비가 된 PC가 국내에 100만대 이상으로 추정된다. 좀비PC들은 해커의 명령이 떨어지면 특정 사이트에 한꺼번에 접속을 시도, 마비시킨다. 트래픽이 집중돼 서비스가 불가능해지면 해커는 돈을 요구하고, 속도가 생명인 게임업체들은 대부분의 경우 이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보안은 보안이 아니다. →유독 우리가 국제 해커들의 먹잇감이 되는 이유가 있는가. -국내 인터넷의 보안시스템이 세계 표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해외 사이트가 스스로의 안전성을 증명하는 체계라면, 국내는 개인들이 사이트에 접속할 때 본인이 맞다는 것을 사이트에 증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웹메일인 지메일(gmail) 사이트에 접속하면, 사이트 주소가 http://에서 https://(안전전송규약·SSL)로 바뀐다. 뒤에 붙는 s는 이 사이트가 정확한 사이트이니 믿고 이용하라는 표시로, 공인인증기관이 증명해 주는 신호이다. https://를 보고 사용자들은 추가 소프트웨어를 다운받을 필요 없이 안심하고 거래를 할 수 있다. 한국의 보안 방식은 이와는 달리 사이트는 안전하다고 일단 가정을 하고, 개인 사용자에게 자기들만의 보안 프로그램·키보드 해킹방지 프로그램·바이러스 백신 등을 다운받게 한다. 이것도 모자라 공인인증서를 요구한다. 액티브X를 다운받는 동안 사용자 컴퓨터는 보안에 완전히 취약한 상태가 된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보안이 무너져 있는 것이다. →안전연결은 국내만 채택을 안 한 것인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보안방식으로 복잡한 암호화 기법을 쓰지 못하게 했고, 해독 불가능한 암호화 방식은 수출도 금지했다. 그래서 우리가 독자적으로 만든 게 공인인증서다. 이후 해외에서는 사용자가 웹사이트에 보안접속을 시도하면 웹브라우저가 인증기관에 의뢰해 이상이 없다는 답을 받고 안전전송 규약을 허용하는 체제가 자리잡았다. 국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에게 부담을 더 지우는 쪽으로 보안이 발전했다. 은행과 같은 기관이 서버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곳은 없다. 이게 툭하면 보안사고가 일어나고, 서버 공격이 이뤄지는 이유다. 다른 문제도 있다. 우리 상황에서 보안업체들은 은행이나 공공기관에 납품 경쟁을 벌인다. 이 시장을 확보하면, 개인은 선택권을 갖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사이트 방침에 따라 다운로드를 해야 한다. 해외는 웹브라우저에 기본 보안 프로그램이 장착되고, 개인이 브라우저를 선택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보안 프로그램이 싸고, 그러면서도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성능 경쟁이 계속된다. →아이폰 도입과 함께 한 차례 공인인증서 폐지운동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스마트폰 도입 뒤에도 공인인증서 체제는 살아남았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예컨대 제2금융권은 스마트폰의 새로운 버전에서 구동시킬 공인인증서 보안체제를 개발할 자금이 부족할 것이다. 결국 이들은 보안을 외주에 맡기거나 스마트폰뱅킹 시장에 진출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국제 표준방식을 채택했다면, 2금융권 업체도 투자비용 없이 스마트폰뱅킹 시장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 표준방식은 과거의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미래의 어떤 플랫폼에서도 지원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스마트폰 운영체제 새 버전이 나왔다고 보안업체가 추가 개발 비용을 요구할 근거가 사라진다. →공인인증서 보안 체제 때문에 우리가 잃는 것이 또 있는가. -이 방식은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전자상거래를 죽이고 있다. 물건을 하나 사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공인인증서를 요구하니 어떻게 물건을 팔 수 있겠나. 온라인에서는 오프라인처럼 해외진출을 할 때 막대한 투자를 하기보다 언어만 바꿔서 손쉽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만의 특수한 보안 방식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커다란 세계 시장을 곁에 두고 중소기업들이 굶어 죽고 있다. 수출탑을 수여할 정도로 수출에 목 매는 나라에서 온라인 시장의 개방에 대해서는 왜 이런 모습인지 모르겠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김인성 IT칼럼니스트는 ▲46세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졸업 ▲리눅스 시스템으로 초기 엠파스 사이트 구축 ▲전 리눅스원 개발이사 ▲현 KT 계열 네트워크 장비업체 컨설팅 ▲저서 ‘한국IT산업의 멸망’, ‘리눅스 디바이스 드라이버’(공동번역), 잡지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칼럼 연재
  • [저자와 차 한잔] ‘내마음의 아리아’ 펴낸 안동림 前 청주대 교수

    [저자와 차 한잔] ‘내마음의 아리아’ 펴낸 안동림 前 청주대 교수

    가장 좋아하는 것을 평생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삶이 없을 듯하다. 그런 기준으로 따지자면 안동림 전 청주대 영문학과 교수는 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전공한 영문학자, 장자를 흠모하는 한학자로도 널리 알려진 그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멘토로 특히 유명하다. 중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에게서 배운 노래들을 통해 음악에 빠져든 이후 그는 평생을 클래식 음악과 벗하며 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스스로는 비평가도, 전문가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가 쓴 책 ‘이 한장의 명반 클래식’은 클래식 입문자들이나 애호가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그가 평생 즐겨 들어 온 오페라 아리아 명곡 63곡을 뽑아 ‘내 마음의 아리아’(현암사 펴냄)를 내놓았다. 지난 5일 서울 성북동의 한 북카페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이 팔순을 맞은 날이기도 했다. 특별한 가족 행사가 있는지를 여쭸더니 “그런 것 번잡해서 싫다.”고 한다. 오랜 지기인 평론가 이순열 선생과 단골 국밥집에서 만나 얼큰한 우거지국밥을 맛있게 먹고, 차 한잔 마시며 새 책을 평하고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하단다. “오페라는 줄거리만 보면 통속 소설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배신하고…. 그런 오페라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아름다운 아리아가 있기 때문이죠.” 60여년 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어 온 선생에 따르면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 거치는 단계는 대략 이렇다. 관현악에서 출발해 협주곡, 실내악 등 기악곡을 거쳐 결국은 성악곡에 빠지게 된다. 성악곡의 대부분은 오페라 아리아다. “인간의 목소리를 능가하는 악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음악·미술·문학·연극이 총화된 오페라가 클래식 음악의 보석이라면 아리아는 다이아몬드에 해당합니다.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의 오페라 아리아는 결국 음악 사랑의 종착역인 셈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선생에게 오페라 아리아는 언제나 절실한 향수(鄕愁)로 와 닿는다. 평양 태생인 그는 전쟁 통에 고향을 떠나 살면서 가난하고 외로운 젊을 날을 보내야 했다.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았던 고독한 마음을 달래 주었던 것은 바로 오페라 아리아였다. 마음속에 보석처럼 담아 두었던 아리아들을 이번 책에 담담하게 풀어냈다. 푸치니의 라보엠 중 ‘그대의 찬손’과 ‘제 이름은 미미입니다’처럼 클래식 초보자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대중적인 아리아부터 그가 콧노래로 즐겨 부르는 레하르의 오페레타 명랑한 과부 중 ‘빌리야의 노래’와 가장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중 ‘카탈로그의 노래’까지. 요란한 것을 싫어하는 그답게 화려한 수식과 달콤한 감상을 배제하는 대신 꼭 필요한 정보를 알차게 담았다. 오페라의 핵심 내용과 함께 아리아 원문 가사와 한글 번역, 작곡가와 명연주 및 명가수에 얽힌 에피소드 등을 친절하게 곁들였다. 책 발매에 맞춰 음반사 EMI는 책에 소개된 아리아들을 담은 동명의 음반을 출시했다. 선생은 이번 책을 통해 오페라가 개화기 이후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통용돼 온 엉뚱한 아리아 번역을 원전에 최대한 근접하게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예컨대 ‘청아한 아리아’가 아닌 ‘거룩한 아리아’(베르디의 아이다 중)로,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를 ‘바람에 날리는 깃털같이’(베르디의 리골레토 중)로 바꿨다. 또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외국어 표기를 현재 통용되는 맞춤법에 따르지 않고 원어 발음에 최대한 근접해서 썼다. 독자들이 클래식음악과 아리아의 원래 내용과 참맛에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책은 지난 3월까지 2년여에 걸쳐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캐스트에 연재했던 내용들을 수정 증보한 것이다. “인터넷 세대에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의 세계를 알려주고 싶어 시작했던 일”이라며 “ 주옥같은 오페라 아리아가 지치고 외로운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듯이 독자들도 각자의 마음 속 아리아를 발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3만 5000원. 함혜리 문화에디터 lotus@seoul.co.kr
  • 실천문학·문학과지성사 신임대표 문학계 희망을 말하다

    실천문학·문학과지성사 신임대표 문학계 희망을 말하다

    봄은 왔건만 문학의 봄은 여전히 아득하다. 몇 년 전부터 제기된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담론에서 허우적대다가 그마저도 흐지부지된 채 위기와 침체를 일상으로 여기며 지내는 형국이다.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최근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대표들을 바꿨다. 드러나는 모양새는 조금씩 다르다. 실천문학이 과감한 세대교체로 젊은 얼굴을 골랐다면 문학과지성사는 묵직한 중량감의 인물을 택했다. 새 얼굴을 각각 만나 한국 문학의 미래와 최고경영자(CEO)로서의 포부를 묻고 들었다. 지향점은 같았다. 문학이 우리네 삶의 희망을 복원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글 사진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유쾌한 진보 위해 세대교체 필요” 손택수 실천문학 대표 서울 망원동 사무실에서 만난 손택수(왼쪽·41) 실천문학 신임대표는 그저 평온했다. ‘초짜 사장’으로서 과도한 자신감도, 애써 속내를 감추려는 지나친 겸손함도 없었다. 이미 기획위원, 기획실장, 편집주간으로 6년 동안 실천문학의 복판에서 일해왔기에 달라질 바가 없는 탓이다. 대신 그는 다른 이유로 분주했다. 문학계에서 실종되다시피 한 담론을 복원해내야 하고, 진보의 가치가 결코 진부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함께 떠맡을 젊은 작가들을 찾느라 삼고초려 중이다. “실천문학은 어느 개인의 출판사가 아닙니다. 1980년대 치열했던 사회 인식에서 출발해 공공의 꿈으로 만든 한국 진보문학의 공동체입니다. 문학으로 실천하고, 실천을 문학화할 수 있는 공동체를 다시 복원해야죠.” 실천문학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열망을 이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와 손을 잡아야 한다. 지극히 이율배반적이다. 손 대표가 분명히 선을 긋는 곳은 ‘지루하고 진부한 리얼리즘’이다. 그는 “신나고 유쾌하고 늘 꿈틀거리는 새로운 상상력과 리얼리즘을 만나게 하고 싶다.”고 잘라 말했다. 덧붙였다. “진보의 가치와 진보의 문학을 얘기하면서 진부한 틀과 내용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는 “이를 위해 세대교체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인 윤지관(57) 덕성여대 교수, 이은봉(57)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함께할 나머지 이사 2명을 젊은 작가들로 채울 예정이다. 또한 편집위원과 기획위원의 면면도 확 바뀐다. 공석이 된 편집주간도 필요하다. 목표는 하나다. 확 젊어진 실천문학을 위해서다. 손 대표는 “좌우 경계를 뛰어넘어 젊고 패기만만한 작가와 평론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사뭇 비장하다. ‘유쾌한 리얼리즘’을 얘기하면서도 비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위기의식은 충분하다. 1980년 만들어진 실천문학은 그동안 문학을 통한 사회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폐간 위기에 몰리기도 했고, 필화사건으로 대표가 구속되기도 하는 등 시련도 컸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주요 논의 지점마다 실천문학이 있었다는 자부심은 꼬박 30년의 시간을 한결같이 그 자리에 서 있게 했다. 그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문단 주변부로 비켜나 있는 작가들을 실천문학이 기꺼이 껴안을 것”이라면서 “다양한 진보의 프리즘과 연대하여 문학의 담론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공유하는 한편, 정치사회적 담론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뭘 하더라도 문제는 돈이다. 그동안 실천문학이 버틸 수 있는 힘은 시집 ‘접시꽃 당신’, ‘체 게바라 평전’,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뜸했다. 실천문학은 이달 중 사무실을 옮긴다. 같은 서울 망원동이긴 하지만 조금이나마 긴축할 수 있게 공간을 좁혀 인근으로 이사한다. 대표이사 월급도 대폭 낮췄다. 1억 5000만원 증자 계획도 진행한다. 손 대표는 “본질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실천문학이 새롭게 출발해야 할 지점이 바로 청빈과 내핍이기 때문”이라면서 “도덕적 순결성을 무기 삼아 빚에 허덕이는 실천문학의 경영을 정상화하고 문학 전체의 적극적인 변화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갓 40대에 접어든 젊은 시인을 대표이사로 선임한, 소액주주 111명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 전체의 뜻이기도 하다.
  • 새 다문화가족지원법 어떤 내용 담겼나

    새 다문화가족지원법 어떤 내용 담겼나

    ”‘가나다라’도 몰랐던 제가 이만큼 한국어를 하게 된 것은….” 2008년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서 중국어 강의를 하다 만난 남편과 결혼하면서 국내에 정착한 중국인 윤홍(28·여)씨. 3년이 채 안 됐지만 윤씨에게선 이제 ‘한국 아줌마’ 냄새가 물씬 난다. 시장에서 “깎아주세요.”라고 애교를 떨 정도가 됐다. 일주일에 나흘을 꼬박 한국어 공부에 투자했던 윤씨는 서울 동대문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곳에서 이틀 또 다른 지역 복지관에서 이틀 동안 결혼이주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한국어 수업에 참여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윤씨는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며 “남편과의 관계도 더욱 좋아지고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8일 오후 7시 30분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방영되는 ´TV 쏙 서울신문´은 윤씨와 같은 결혼이민자의 한국어 교육을 돕는 다문화가족지원법 개정안이 지난달 1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의미를 짚어본다. 개정안에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업무에 결혼이민자 등에 대한 한국어 교육 및 다문화가족을 위한 통·번역 지원 내용이 담겼다. 김성수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2월 제출한 개정안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다른 의원들의 개정안과 함께 병합 심사한 끝에 가결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제결혼은 2001년 1만 4523건에서 2007년 3만 6204건으로 크게 늘었다. 결혼이민자도 지난해 18만 1671명으로 전년의 16만 7090명에서 크게 증가했다. 이처럼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한국어 교육에 대한 필요성은 높아졌지만 자녀들에게만 한정돼 결혼이주 여성들은 소외됐다. 2009년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 이들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언어문제(22.5%)가 꼽혔던 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전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비롯, 여러 관련 기관에서 한국어 수업을 제공하고 있지만 대다수 기관은 해마다 여성가족부에 사업 계획을 제출해 보조 지원을 받는 형식이고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은 기관 자체에서 조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결혼이민자의 한국어 교재 등 학습을 지원할 수 있도록 개정안은 규정하고 있어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 밖에 ´TV 쏙 서울신문´은 진경호의 시사 콕-국회의원 뭐하자는 겁니까, 등록금 인상으로 캠퍼스 몸살, 권영걸 서울대 교수와의 공공디자인 인터뷰, 스튜디오 초대-이윤상 성폭력상담소장 등이 방송된다. 글 사진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 ‘신문화운동의 기수’ 최남선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 ‘신문화운동의 기수’ 최남선

    1906년 3월, 17세의 최남선은 일본 와세다대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초행길은 아니었다. 이태 전인 1904년에도 그는 일본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단의 최연소 유학생이자 반장이었다. 당시 열 다섯이었던 소년의 눈에 비친 일본은 이전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듣던 과거의 일본이 아니었다. 그곳은 눈부신 신세계였다. 그 신세계의 거리에서 소년은 서점 유리창 너머로 매달 쏟아지는 수십 종의 잡지들에 매혹당했다. 소년에게 그것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그리고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시도된 그의 유학생활은 모두 짧게 끝이 났다. 도쿄부립 제1중학에서의 첫 번째 유학은 조선유학생들의 무질서와 준비 부족 때문에 석 달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유학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갑작스레 파국을 맞았다. 문제의 발단은 와세다대 법정학부 학생들의 모의국회였다. 망해 버린 조선왕이 일본을 방문한다면 어느 정도의 의전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했던 것.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유학생들에게 심한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최남선은 조선 유학생 대표로 총퇴학을 주도하는 등 강경 대응했지만, 결국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 ●‘소년’ 창간 통해 대륙 중심 패러다임 바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학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지만 문명에 대한 열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최남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스스로를 ‘신보잡지광’(新報雜誌狂)이라 자처했다. 얼마 후, 소년은 신세계로부터 최신 인쇄기를 구입하고 인쇄를 위한 전문 식자공까지 대동하여 그렇게 바다와 함께 귀국했다. 신문명의 메카임을 자부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리고 1908년 11월 1일, 바다 건너편의 것이었던 문명은 지금 이곳에서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少年)이 되었다. ‘소년’은 최남선 1인 잡지였다. 일본을 경유한 새로운 지식들은 편집자 최남선을 거치면서 또 한번 선별되고 분류되어 마침내 전파되었다. 이 시기 최남선은 그 자체로 근대 지식의 매체(미디어)였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 시절 구입한 많은 신간 서적들과 당대 잡지들에 등장하는 담론들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그만큼의 글을 썼다. 문명은 그렇듯 지식을 통해 식민지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창간호에 실린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도래하는 문명의 힘과 미래에 대한 최남선의 태도와 각오가 잘 드러나있다. ‘텰썩 텰썩 텩 쏴’ 하는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바다의 위력 앞에서는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 같은 무엇도, ‘아무리 권세를 가진 누구’도 힘없이 쓸려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시대의 조류이기에 끝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어마무지한 새 기운이 대륙이 아닌 바다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유사 이래 수천년간 대륙만을 바라보고 있던 반도 조선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日제의 만주건국대학 교수직 수락 지조냐 학자냐의 양자 중 그 일을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자열서’(自列書) 중). 신문관 창립 이후 3·1운동까지 10여년간, 최남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문화운동의 기수였다. 하지만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여의 수감생활을 마친 후 그는 지조와 학자의 길 사이에서 학업을 선택한다. 학자로서의 최남선은 민족주의로 나아갔다. ‘조선역사통속강화’(1922)를 시작으로 최남선은 ‘불함문화론’(1925), ‘단군론’(1926), ‘살만교차기’(1927) 등 굵직한 역사 연구 저술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단군에 기원한 조선 역사’라는 그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였다. 동시에 그는 ‘풍악기유’(금강산, 1924), ‘심춘순례’(지리산, 1925), ‘백두산근참기’(1927), ‘금강예찬’(1928) 등 조선의 산천을 둘러보고 이에 대한 기행문을 남겼다. 그에게 있어 기행문은 여행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순례기였다. 민족은 그에게 이념이었고, 그는 이념에 입각한 자신의 이러한 작업을 조선학(朝鮮學)이라고 불렀다. 그가 했던 연구의 중심에는 언제나 조선 민족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가 버린 지조란 무엇이었을까. 대중들이 열망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지켜오던 지조란 바다를 통해 흡수하려던 문명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남선에게 그 문명은 일본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바다를 맞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눈을 돌려 대륙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지조를 바칠 만한 어떤 것도 없는 현실. 그렇기에 최남선은 지조있는 학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조 그 자체를 ‘휘뿌리고’ 학자의 길을 택한다. 그가 가고자 했던 학자의 길은 바다도 대륙도 아닌 새로운 지반에 대한 탐사였다. 모든 지조가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세울 새로운 시공간. 학자란 새로운 시공간의 발굴자들이었다. 최남선은 지조가 불가능한 현재를 버리고 과거 속으로 침잠한다. 문명화되어야 할 미래의 민족을 등지고, 대륙 바라기 조선의 시간을 넘어 순정한 시간, 그 태초의 시간인 단군으로 그는 깊숙하게 달려 들어갔다. 어느 순간 최남선은 그 태초의 시공간 속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순정한 지반이란 건 현실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었다. 문명이란 바다를 통해 조선을 덮치던 제국주의의 시대. 그 바다 앞에 쓰러져간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처럼, 그의 세계는 무력했다. 바다를 동경했던 ‘담 크고 순정한 소년’. 그 담대함으로 바다를 버리고 순정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소년. 하지만 그 소년이 도착한 곳은 결국 바다의 친구였다. 1939년 4월,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 자리를 받아들인다. ●노년엔 민족주의와 결별 최남선은 그가 도착했던 태초의 시간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샤먼(살만교) 및 민족주의와 결별한다. 그리고 1955년 최남선은 가톨릭에 귀의했다. 어쩌면 최남선에게 그곳은 샤먼과 민족 등이 없는 시공간, 아니 모든 시공간이 탈각된 지각 불가능한 무엇은 아니었을까. 최남선은 말한다. “민족이란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며, 당연히 있어도 안 될 것이요, 다만 ‘대립’의 의식으로만 성립된 것”이다. 민족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며 인류의 평등한 평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진실한 마음에 입각하여 이전의 가치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민족혁명이다.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모든 지조를 쓸어버릴 것! 그에게 가톨릭은 “평화가 아닌 칼을 통해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세우는 교문(敎門)”이었다. 최남선이 지조 대신 학자를 선택한 것은 격변의 시대를 피해 달아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는 일생 동안 단 한순간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학자로서 자신의 시대를 덮쳐오던 바다와 맞섰다. 현실을 뚫고 나갈 새로운 시공간을 발굴하는 지식인 최남선. 하지만 언제나 자신이 발굴한 그 시공간 속에 갇히고 방향을 잃을 위험에 놓인 지식인. 최남선은 끊임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숙명을 가리키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넘어서고자 하나 너무도 쉽게 현실에 포획되고 마는! 문성환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500년이 지나도 살아 숨쉬는 ‘루터의 정신’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500년이 지나도 살아 숨쉬는 ‘루터의 정신’

    마르틴 루터(1483~1546)의 흔적을 더듬는 여정 자체는 그다지 버거울 게 없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광부로 생계를 꾸리려는 아버지를 따라 만스펠트로 옮긴다.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아이제나흐, 에르푸르트 등에서 유년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과 토대를 착실히 닦는다. 그리고 장성한 뒤 비텐베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성 등에 굵직한 발자국을 찍었다. 1521년 로마 교황으로부터 마지막 파문장을 받은 보름스를 제외하면 모두 독일 동북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느 도시에서건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이면 넉넉히 닿을 수 있는 만큼만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 넓지 않은 곳에서 그가 이뤄낸 업적과 생애를 따라가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종교사, 나아가 인류 역사에 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인 까닭이다. 몇년 전 독일 정부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인류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론의 여지 없이 압도적인 1위로 루터가 꼽혔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문에 내건 ‘95개조 명제’는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 금권에 대한 부패 등으로 얼룩진 중세 교회 대변혁의 신호탄이었다. 지금껏 개신교에서 종교개혁주일로 삼고 있는 이날이 2017년이면 500주년이 된다. ●신앙·믿음·개혁을 낳은 ‘정신 문화재’ 비텐베르크는 아예 ‘루터의 도시’로 통한다. 비텐베르크 교회가 대다수 루터 관광객이 찾는 첫 방문지다. 루터가 처음으로 설교를 맡아 신도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으면서 95개조 명제를 내걸고 로마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신감을 안겨준 공간이다. 500년 전 루터 생존 당시 벽보의 흔적은 화재로 없어졌다. 대신 1857년 빌헬름 황제가 부분 재건축을 하면서 새로 철문을 만들고 거기에 ‘95개조 명제’를 촘촘하게 새겨 놓았다.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도록 루터의 개혁 정신을 영구히 남겨 놓은 것이다. 교회 안내자로 평생을 바친 베르나르트 그룰(75)은 “비텐베르크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정신적 문화재’”라면서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들은 내면적인 변화와 신앙을 향한 개선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마침 교회를 찾은 독일 신학자들 또한 그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교회당 안에 나란히 자리한 루터와, 종교개혁의 동료였던 멜란히톤의 무덤 등을 둘러보고 있었다. 교회에서 천천히 걸어 5분쯤 가면 시청 광장이 있다. 인구 2만의 도시에 찾아오는 연 20만명의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이곳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또다시 도보로 10여분쯤 떨어진 곳 ‘루터의 거리’ 작은 로터리 한구석에는 이른바 ‘루터의 참나무’가 있다.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의 파문장을 불태우면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선언한다. 그로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감행한 곳이다. ●민중들에게 새 길을 보여준 루터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 결과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던 도중 에르푸르트 근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해 기사 행세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숨어 지내며 1521년 12월~1522년 2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 성경과 성만찬 포도주의 나눔은 신과 민중들의 직접 만남을 가능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종교개혁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음은 물론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뮌처(1490~1525)는 농민전쟁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종교개혁을 뛰어넘어 사회 변혁을 추진하는 세력으로 자리잡는다. 초기에는 이들에게 동정적 입장을 갖던 루터였지만 분위기가 급격히 변해가자 그들과 단호하게 결별하며 제후들의 편에 선다.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는 인간보다 더 유독하고 해롭고 악마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이뤄놓은 결과물의 영향으로 복음서를 자유롭게 읽은 농민들에 대한 폭력 진압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루터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대목이다. 로마 교황청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갓 피워낸 종교개혁의 작은 싹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동정론과, 로마 교황에서 제후들로 종교 권력이 바뀌는 ‘제후들의 종교개혁’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루터와 헤어지느니 죽는 게 낫다” 마르크스에게는 레닌이 있었고, 피델 카스트로에게는 체 게바라가 있었다. 마오쩌둥 곁에는 저우언라이가 든든히 서 있었다. 마틴 루터에게는 멜란히톤(1497~1560)이라는 최고의 조력자가 있어 개혁 반발 세력과 급진개혁 세력 사이에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꼿꼿이 세울 수 있었다. ‘독일의 선생님’이라고 일컬어지는 멜란히톤은 빼어난 라틴어, 히브리어 실력으로 튀빙겐 대학, 비텐베르크 대학 등에서 문학, 신학, 철학, 수사학 등을 강의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왕자와 공작 등 귀족계급들이 오로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어 인기를 실감케 했다. 멜란히톤이 있어 성서의 독일어 번역은 더욱 신속하고 정교해 질 수 있었다. 또한 제후들과의 갈등, 개신교 내부의 숱한 논쟁 등 주요 지점마다 루터가 거칠고 과격하며 전투적인 말과 행동으로 방향을 제시하면, 멜란히톤은 학자적인 부드러운 성격을 앞세워 조정하고 중재하며 종교개혁의 잔가지를 다듬어갔다. 그가 죽음의 공간인 무덤마저 루터와 사이좋게 나누고 있고, 기념비적인 동상 또한 루터 곁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비텐베르크 대학 바로 옆건물인 멜란히톤의 생가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최근 공사에 들어가 직접 둘러볼 수는 없다. ●수녀와 결혼한 애처가 루터 제후와 농민들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렸던 루터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만큼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다. 비텐베르크 루터기념관 2층 전시관에는 글 하나가 눈에 띈다. ‘케테는 프랑스나 베네치아를 줘도 바꾸지 않겠다. 1531년’ ‘케테’(Kthe)는 전직 수녀였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의 애칭이다. 루터는 독신의 지옥으로부터 성직자를 해방시키고,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수녀원의 수녀들을 모두 탈출시켜 결혼까지 시킨다. 그리고 1525년 마지막까지 남은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직접 결혼한다. 루터의 나이 42세, 보라의 나이 26세였다. 루터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장례식”이라면서 장례복을 입고 나타나 루터를 깜짝 놀라게 한 뒤 “하나님이 돌아가셨기에 당신이 지금 절망하고 있지 않으냐.”고 말할 정도로, 어렸지만 당찬 여성이었기에 루터 역시 끔찍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사진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보름스(독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다문화 가정, 한국 생활 힘내세요”

    “다문화 가정, 한국 생활 힘내세요”

    “낯선 땅에서 낯선 문화에 낯설어 하는 새 한국인과 그 가족을 위한 일이라 뿌듯해요. 이방인들이 속내를 털어놓기까지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게 중요해요. 한글 등 학문적인 교육 이전에 한국생활을 하며 겪는 어려움을 들어야죠.” 21일 동대문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 방문지도사 정선희(46)씨가 결혼이주여성을 상담할 때 느낀 생각을 이같이 말했다. 정씨와 같은 방문지도사 23명은 매주 두 차례 다문화가정을 방문해 2시간씩 한국어교육을 비롯해 아동양육, 부모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결혼 10년째 접어들어 갑작스럽게 남편이 사망해 집 문제로 시댁과 마찰을 겪은 필리핀 여성, 시각장애 시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키우며 남모를 고충을 겪는 일본인 여성, 모국어도, 한국어도 제대로 못해 말더듬이가 된 자녀를 둔 베트남 여성…. 말 못할 고민에 속앓이하던 그들은 실무경험과 전문성을 겸비한 방문지도교사를 만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지금은 월 평균 1500명이 센터를 찾을 만큼 호응을 얻고 있다. 올해 지도교사들은 한국어교육 88명, 부모교육 72명, 자녀생활교육 24명을 도울 예정이다. 센터에서는 4명의 이주여성 상담사가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 등을 통·번역해 주는 서비스도 펼친다. 지역거주 이주여성뿐 아니라 타 지자체에 살더라도 연락해 오면 반갑게 상담해 준다. 이 밖에 체류·국적취득 등 다문화 관련 법률, 임신·육아·출산정보 서비스, 공공·의료기관 이용 서비스, 취·창업교육 등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제공한다. 특히 8개국 출신의 생활 코디네이터가 서비스를 안내하는 다문화해피콜센터는 개콘(개그 콘서트)에서 “사장님 나빠요.”라고 외치던 ‘블랑카’도 감동해 마지않을 만한 가족 같은 상담으로 소문나면서 올해 여성가족부로 이관됐을 정도다. 2006년 시내 최초로 들어선 동대문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국·시비로 운영되지만 동대문구는 올해 5000만원을 지원, 다문화축제·어울림마당·역사탐방 등 다양한 이벤트행사를 개최한다. 유덕열 구청장은 “현재 지역 결혼이민자 1200명 가운데 주민등록에 기재된 수는 400명쯤 된다.”며 “앞으로도 한국생활에 자신감이 붙도록 생활편의 서비스를 늘리겠다.”고 말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서울광장] 새해 인생 대청소를 해보자/이춘규 논설위원

    [서울광장] 새해 인생 대청소를 해보자/이춘규 논설위원

    일본에서는 지난해 ‘단샤리’(斷捨離), ‘단샤리 권유’ 등의 책이 짧은 기간 10만권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단샤리는 물건이나 생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온상태를 찾으려는 요가철학에서 따온 말이다. 10여년 전 제안될 때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불황이 장기화되고, 정치도 혼돈을 거듭하자 단샤리가 주목받게 되었다. 쓰지 않는 물건은 필요한 곳에 돌려주자는 새 환경운동과도 맞물렸다 단샤리. 물질의 홍수 속에서 필요없는 것을 차단하고(斷行), 쓰지도 않으면서 쌓아둔 물건들을 버려 정리하고(捨行),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나 집착에서 한 걸음 떨어져야(離行) 여유 있는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대중소비시대 물질의 홍수 속에서 살아 온 일본인들이 복잡한 것을 정리해야 한다고 공감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단샤리 사고, 기업은 단샤리 경영에 주목한다. 인터넷 포털에는 책들과 관련된 수많은 블로그가 개설됐다. 많은 토론마당도 생겼다. 동호회도 우후죽순의 기세다. 주변을 정리하면서 생활한다는 ‘단샤리하다.’라는 말도 탄생했다. 일본열도에 가히 단샤리 열풍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단샤리 경영 기법에 따라 다케다약품은 적자가 아닌데도 성장 전망이 없는 사업을 접었다. 많은 일류기업이 정체된 사업을 단샤리했다. 단샤리 관련 책의 저자들은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시대다. 20대가 한 회사에서 평생 근무할 확률은 극히 낮다. 회사가 인수·합병돼 다른 일을 하거나 파견될 확률도 높다. 어떤 업무에서도 적응할 수 있게 강점은 강화하고, 약점은 보완하라.”고 주문한다. 불황으로 고민하는 기업들에는 경쟁력이 낮은 사업은 정리하고 강한 분야에 경영을 집중하라고 권고해 혼다 등이 채택했다. 아울러 지난달 중순 공영 NHK 방송이 단샤리 특집을 통해 ‘인생 대청소를 하는 사람들’을 소개해 반향이 컸다. 누리꾼들은 찬반논쟁이 매우 뜨겁다. 대체로 ‘자신의 강점을 살릴 분야에 힘을 집중하고 그 밖의 것은 버리자. 주체적으로 생각해서 선택하자. 대인관계 등 주변을 개선하는 작업, 즉 인생 대청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40~50대를 중심으로 인생 대청소에 공감대가 컸다. 반론도 있었다. 일본인은 물건을 잘 보존한다. 기록하는 민족이다. 가끔 방문했던 일본인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을 쌓아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꼼꼼히 기록하고 옛 물건을 소중히 보관해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적 성과 창출의 토대로 활용했다.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원동력이 됐다. 따라서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인간관계를 굳이 정리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박한다. 그래도 연말 대청소는 일본인의 문화다. 집안 구석구석을 대청소한다. 인간관계도, 마음속 번민도 대청소한다. 연하장을 보내 답신이 없으면 즉각 관계를 정리해 버린다. 목표를 재설정한다. 집착은 버리려 한다. 오해를 청산하고, 마음속 때를 씻어낸다. 단순하게 정리정돈하는 것. 어느새 인생 대청소는 이 시대 일본인의 화두가 됐다. 시대와 나라가 달라도 사람들은 연말연시 주변정리를 한다. 일본과 유사한 사회문제들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도 지금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일본 책 번역본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내용은 잡념·집착을 버리라는 것이 핵심이다. 인생 대청소와 유사하다. 우리 조상들도 연말 대청소를 통해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할 건 정리했다.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오해는 털어냈다. 신변 대청소 형식이다. 풍요의 시대 많은 사람들은 버려도 괜찮은 물건들을 껴안고 산다. 사물도, 인간관계도 과잉의 시대다. 꼬인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열망은 강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사와 동료, 지인 관계도 뒤틀린 경우가 많지만 발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어렵다. 새해 한번쯤 인생 대청소를 해 보자. 해 보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경쾌해질 것이다. taein@seoul.co.kr 상사와 동료, 지인 관계도 뒤틀린 경우가 많지만 발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어렵다. 새해 한번쯤 인생 대청소를 해보자. 해 보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경쾌해질 것이다.
  •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 아이는 5개월짜리. 5개월 전에 아저씨의 정액이 아내의 질을 파고들어 거센 산성반응에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수정란을 착상시켰다. 5개월 전이라면 아저씨와 내가 종로 3가 나이스 모텔 205호에서 새벽 내내 서로의 배꼽 속에 손을 넣었던 때다. 나와 만나기 전날이거나 혹은 다음날에 아저씨는 아내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고 기계적인 성교를 했을 것이다. 아저씨의 아내는 궁색한 가짜 신음소리 내기에 바쁜 여자니까. 아저씨는 여자의 신음소리에 민감하다. 신음소리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에 편집증 환자처럼 집착한다. 그런 아저씨가 나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 하나. 나는 가짜 신음소리 따윈 내지 않는다. 오로지 진심. 나는 진짜에게만 연다. 그것이 성대든 밑구멍이든 간에. 오늘 만나. 삐리릭. 교실 한구석에서 체육복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곧장 가방을 싼다.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메고 나는 교실 밖으로 향한다. 교문을 빠져나오는 도중에 아저씨에게 한 번 더 문자가 온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적힌, 매우 절약적인 문자. 럭셔리 라운지 모텔 507호. 아홉 시. 아홉 시까지, 아홉 시간이나 남았다. 그날도 여지없이 바람이 불었다. 아저씨와 만나는 날은 어쩐지 모르게 세찬 바람이 분다. 한반도가 원래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나? 아저씨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그러게요. 치마 밑단이 바람에 너풀거렸다. 얘, 허벅지 다 보인다. 아저씨가 말했다. 알아요.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넌 참 미쳤구나. 그래서 이름이 미치인가 보구나. 아저씨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장례를 다 마친 식구들이 둘러앉아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하나 둘씩 꺼내고 있었다. 넌 그새 또 어디 갔다 왔니. 그냥 잠깐. 나는 대충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갈 셈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가 안 보였다. 엄마, 할머니는? 하고 물어보려던 찰나, 내 방 문 틈새로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였다. 굽은 등은 서서히 몸을 웅크리며 일정한 리듬에 맞춰 떨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도 아저씨를 만났다. 삼성동 명아장 모텔 313호. 시간은 오후 아홉 시. 나는 근처 화장실에서 교복 와이셔츠를 벗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바람이 찼다. 나는 여덟시 오십 오 분에 모텔에 도착했다. 내가 313호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아저씨가 다 벗은 몸으로 누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 아저씨가 인사했다. 방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쾌적한 향내가 풍겼다. 오히려 첫 번째 갔던 곳이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마음이 편했다. 옷을 못 벗겠어요. 내가 말했다. 아저씨는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벗겨냈다. 그리고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듯이 만져댔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냥 참았다. 나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몸을 열고 젖히고 오므리고 뒹굴었다. 두툼한 손가락처럼 두툼한 아저씨의 뱃살이 출렁거리며 내 피부에 닿았다. 남의 살을 맞대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아저씨의 거죽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았다. 물론 아저씨가 그렇게 뚱뚱하지는 않지만 그냥 남의 살결, 살 틈으로 새어나오는 냄새 같은 것이 어쩐지 두려웠다. 한 차례 사정이 끝나고 난 뒤에 아저씨는 모로 누워 담배를 피웠다. 그때까지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얘,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저씨가 슬쩍 내게 말을 건넸다. 미치. 미치예요. 아아, 그래. 그래서 내가 너에게 미쳤다고 말을 했었지. 네에. 근데 전 미치진 않았어요. 그냥 미치일 뿐이에요. 음, 그래. 하지만 좀 특별한 이름이구나. 네에. 미카엘 같은 거랑 연관된 건 아니에요. 음, 그렇구나. 그렇다면 미치는 무슨 뜻이니? 미치는 그냥 미치인데요. 별 뜻은 없어요. 음, 그렇구나. 아저씨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대화를 끝내겠단 듯 자세를 고쳤다. 등 돌린 아저씨의 넓은 등짝이 우스워 보였다. 나는 아저씨의 담배를 빌려 등짝에 무어라 쓰고 싶었다. 등신이라고. 그때 아저씨 이름을 물어보면 좋았을 걸. 아직도 나는 아저씨 이름을 모른다. 장씨, 김씨, 윤씨, 최씨. 개중에 하나겠지. 여하튼 내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성씨일 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저씨의 두툼한 손가락과, 출렁이는 뱃살, 수염자국이 난 얼굴피부뿐이다. 정수리 근처가 조금 휑한 거나 금이빨로 된 어금니가 하나 있다는 것, 배꼽부터 무성한 털이 하반신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과 생각보다 발이 아담한 것, 그리고 오른쪽 팔뚝에 개에 물린 자국 같은 게 있다는 것까지. 아저씨의 흉터는 곧 아저씨의 이름이었다. 아저씨와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만났다. 만나는 장소는 서울 전역. 아저씨는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고심하여 장소를 물색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같은 동네, 같은 모텔을 반복해서 간 적이 없었다. 생각보다 서울은 넓었다. 구석구석 늘어선 골목과 로터리가 답답할 정도로 복잡했다. 위로 세우고 벙커를 만들고, 한정된 공간의 쪽수를 넓히거나 한 칸짜리 공간을 좁히거나 하는 식으로 자꾸만 넓어져 가는 서울. 뚝딱뚝딱 완공이 끝나면 어디에선가 증축이 시작되고, 어딘가가 매끈해지면 다시 어딘가가 더럽혀졌다. 더럽혀진 부분을 메우는 동안 또 어딘가가 파괴되고 무너져 갔다. 할아버지는 폭설이 내리던 날,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병원으로 후송된 지 십 칠 분 만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가족들은 오래 살다 가셨으니 여한 없으시리라 판단, 호상이라 여기며 잔칫집처럼 장례를 치렀다. 여기저기서 웃고 떠들고 화투 패를 돌리고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불러대고. 삼일 중 이따금씩 곡소리가 들렸으나 그것도 매우 형식적이었다. 하하호호 웃다가 누군가 곡소릴 내면 얼마간 따라 울어주고, 딸꾹질 멈추듯 뚝 그치면 다시 하하호호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내가 밖으로 빠져나와 교복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순간, 아버지가 홀연히 담배를 물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는 별은 참 폼이 안 나. 아빠는 소주가 담긴 종이컵을 조심스레 한 모금씩 마셨다. 아빠의 왼손에 달린 담배가 빨간 불씨를 태우며 양복바지를 위협했다. 그거 탈 거 같은데. 내가 말했지만 아빠는 듣지 못했다. 염병할 양반. 보도블록에서 고꾸라지기는. 아빠는 색색의 벽돌이 지그재그로 놓인 보도블록을 얼마간 쳐다보다가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퉤. 아직 녹지 않은 눈에 가닿은 가래침은 희부연 노란빛을 풍겼다. 아빠는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와 함께 종이컵을 집어 던졌다. 소주가 바닥을 치고 튀었다. 아빠는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다시 식장 안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저씨에게 문자를 넣었다. 아저씨 뭐해요. 그러나 답장은 오질 않았다. 실은 한 번도 먼저 연락해 본적이 없었다. 뭐하냐고. 역시 묵묵부답. 차라리 보내지 말 걸, 두 번씩이나 씹혔다. 쪽팔리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도착했다. 미친이구나. 오늘 만날까? 미친이라니, 내가 분명 미치지 않았다고 했을 텐데. 미친 아저씨. 나는 눈에 젖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곧장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성이는 동안 아빠는 병원 건물 귀퉁이 어딘가에서 토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대충 토하는 것을 마치고는 보도블록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얼굴 표면이 토사물 범벅이었다. 아빠의 긴 속눈썹에 연주황색으로 변한 실파가 붙어 있었다. 더럽게시리. 나는 다시 대로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나는 얼마간 더 병원 앞에 서 있어야 했다. 한쪽 손을 기계처럼 흔들면서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빠 말대로 별 몇 개가 우스운 크기로 떠 있었다. 저게 무슨 별이야. 그러는 사이에 택시가 잡혔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어오는 택시 아저씨에게 별 보러요, 라고 말할 뻔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삼일 내내 나는 아저씨를 만났다. 만나서 하는 일이라곤 섹스가 전부였고, 섹스가 끝나고 치르는 비릿하고 울적한 냄새들을 소멸시키는 일에 신경 쓰느라 내 가방 속에 구겨져 있을 교복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손가락으로 시트자락을 빙글빙글 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어떻게 대꾸를 해야 될까 하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저씨에게서 아내 얘기를 그만 들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다. 왜 애를 가졌어요? 내가 아저씨 배꼽에 손을 집어넣고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아저씨는 간지러웠는지 실실 웃으며 좌우로 몸을 배배 꼬았다. 내가 가진 건 아니고 아내가 가진 거지. 아저씨는 말했다. 그렇지만 아저씨 꺼가 필요하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만 뭐 그거랑 그거랑 같은 일로 봐서는 좀 그렇지. 그거랑 그거랑 원래 같은 거 아니에요? 그걸 해야지 그걸 할 수 있잖아요. 에이, 하지만 언제나 그걸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니잖아. 아아, 하긴. 우리도 그거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닌 것처럼요? 으응, 그래 맞아. 골치가 아픈 일이지, 그거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그거를 사용했고, 나중에 가서는 굳이 그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까지 그거 타령을 했다. 그러다가 대화의 종반부에서는 그거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디에서부터 그거를 그거로 불렀는지, 그거가 그거가 아닌 다른 그거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대화를 마치고 다시 등을 돌려 누웠을 때, 아저씨의 등과 내 등이 맞닿았다. 나는 차갑고 아저씨는 뜨겁다. 섹스를 하고 나면 아저씨가 차가워지고 내가 뜨거워진다. 척추를 나란히 두고 우리는 열과 냉을 반복적으로 옮겼다. 열탕과 냉탕을 번갈아 가는 기분이었다. 아저씨도 참 후졌다. 내가 말했다. 아저씨의 등줄기가 움찔했다. 글쎄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아내가 만든 거라니까. 아저씨가 발로 내 종아리를 간질였다. 굳은살이며 티눈이 박인 피부 표면이 까끌까끌했다. 어떻게 하면 애를 낳을 생각을 해요? 너무 구려. 너무 너무 구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어떤 시대기는, 잘 먹고 잘사는 시대지. 너무 구려. 태어나는 일 자체가 구린 시대예요, 지금 이 시대는. 미치. 너는 너무 어린데, 너무 많은 걸 봤어. 그러니까 지금 이러고 있잖아요. 씨발. 나는 울먹였다. 아저씨가 발로 장난치는 것을 멈추었다. 다시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 애 낳으면 나 꼭 보게 해줘요. 음, 그래. 그럴 수 있다면 뭐, 그렇게 해보지. 아저씨는 말을 이으며 침대를 빠져나갔다. 어디가요? 똥 누러. 아저씬 왜 만날 그렇게 똥을 싸요? 모르겠어. 난 너만 보면 똥이 마려워. 아내 앞에서는요? 집이건 회사건 똥 싸는 일이 고역인데, 난 너만 보면 똥구멍이 빠져버릴 거 같아. 나는 킥킥대며 웃었다. 똥을 싸고 싶어 재빠르게 화장실로 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만 보면 똥이 마렵다는 아저씨. 나는 또 한번 아저씨에 관한 흉터를 진하게 새겼다. 똥냄새를 풍기며 침대로 돌아온 아저씨와 뒹굴다가 말고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여든 여덟의 할아버지와 함께 육십 년을 살아온 할머니. 할머니는 일흔 일곱. 열한 살 연상의 남편을 마주 대하며 겪었을 무수한 고통을 유순한 고집과 무지한 강직함으로 이겨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삼 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다. 평생 동안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며 지냈던 고향을 저버린 것은 할머니의 류머티즘 관절염이 심해진 탓이었다. 밭을 안 일구면 되지 않냐, 그냥 일 안 하고 시골에 계속 계시면 안 되냐, 하고 심술을 툴툴 부린 내게 엄마는 꿀밤을 먹였다. 네가 시골에 가서 한 번도 살아보질 못해 이러는구나. 시골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일이다.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이야. 등불이 없는 동굴 같은 곳이라고. 그렇지만 친하지도 않은 어른들과 함께 부대껴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 마. 따로 모실 거니까. 따로 사는 데엔 나보다 엄마 몫이 더 컸다. 아빠는 미적지근하게 그러지 뭐, 하며 우리 집 근처에 값이 싼 아파트를 골라 전세계약을 했다. 십육 평형 아파트는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군데군데 갈라진 틈새며 월마다 꼬박꼬박 작동 점검을 하는 엘리베이터가 기괴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 때문에라도 할머니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가끔 식용유나 세제 같은 걸 사들고 가는 아빠에게 거기 귀신 나올 것처럼 음산해, 라고 말하면 아빠는 내 콧잔등을 쿡 치면서 노인네들 잠자리 뒤숭숭하게 함부로 말 놀리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깟 귀신, 어차피 동년배들 아니겠어?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 집 전세계약이 얼마 안 있어 끝날 참이었다. 재계약 여부에 대해 곰곰이 따지고 있던 엄마는 되레 계약기간 전에 죽어버린 할아버지를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는 짐들이 가득 들어찬 다용도실을 대충 비워내고 할머니가 덮을 이불을 마련했다. 할머니는 풀지 않은 짐짝처럼 더욱 몸을 웅크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때때로 자정에 가까운 시간, 내가 비릿한 정액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들어오면 건넌방에 있던 할머니가 빠끔히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봤다. 내가 왜요? 라는 기색으로 노려보면 이내 주춤거리는가 싶게 눈을 피하다가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다시금 내 쪽을 살폈다. 내가 한 번 더 뭘 봐요? 라는 표정으로 찌릿, 눈빛을 쏴주면 그제야 다 알겠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방문을 닫았다. 기분 나빠. 내가 닫힌 방문 틈새로 들릴 만큼 크게 말했다. 그럼 방문 너머로 할머니가 쪼그라든 풍선처럼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별 몇 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옹졸하게 쪼그라든 것이 언젠가는 점점 작게, 그보다 더 작게, 그래서 결코 보이지 않을 것처럼 아득해질 것만 같았던 별들. 마치 할머니의 쪼그라든 유방처럼. 너네 엄마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안방에서 언성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구질구질한 부부싸움이 또 시작됐다. 카악, 퉤. 아빠의 가래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어디서 뱉어 진짜? 엄마가 이전보다 한 톤 높게 소릴 질렀다. 카악, 퉤. 카악, 퉤. 의식적으로 가래를 뱉다가 사래 걸린 아빠가 연신 밭은기침을 토했다. 조금 과장이다 싶게. 나는 방밖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침대에 누웠다. 모텔과는 다른 차원의 이불을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말고 할머니가 궁금해졌다. 엄마 아빠는 아무래도 버려진 짐짝처럼 놓인 할머니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미친 엄마 아빠. 나는 방문을 열고 건넌방에 있는 할머니를 살핀다. 방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다. 아마도 할머니가 직접 살짝 문을 열어 놓았을 터. 문과 문턱이 아귀가 딱 맞게 붙어 있지 않고 약간 틈을 벌리고 있다. 그 미세한 틈처럼 할머니는 숨을 쉬고 있는지 몰랐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끝없이 유입되는 물세례에 허덕이듯이. 할머니 서럽겠다. 짝이 없으니 얼마나 비참하겠어. 네 아저씨는요? 아저씨의 귓불을 빨면서 내가 물었다. 그건 여자에게만 국한된 일이야. 남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아예 머릿속에 그런 게 없어. 이 사람 없으면 죽겠다 싶은 그런 게. 결혼 왜 했어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뜸을 들였다. 글쎄, 돈을 모아야 하니까. 그리고 어쨌든 옆에 사람이 있어야 좋지 않겠어? 남자란 게 그래. 챙겨주고 입혀줄 사람이 꼭 필요하지. 좆나 후졌네, 남자들이란.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가 깔깔 웃었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분이 나빴다. 미친 아저씨. 뭐 이런 게 다 있지? 덜 말린 해초처럼 무성한 아저씨의 풀숲을 헤치다 말고 나는 입을 뗐다. 입술에 빳빳한 음모가 달라붙었다. 에이, 좀더 해주지 그래. 아저씨가 눈을 감은 채 말했지만 나는 그냥 일어났다. 반투명한 유리 칸막이로 된 화장실로 들어가 온몸을 빡빡 문질러대며 샤워를 했다. 아저씨가 따라 들어왔다. 에이, 미치. 섭섭하게 왜 그래. 아저씨가 내 팔뚝에 묻은 거품을 닦으면서 품에 안으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샤워기를 아저씨 방향으로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아저씨 살갗에 닿았다. 앗 뜨거워. 아저씨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안 할래요, 피곤해요. 저리 가요. 이제 만지지 마요. 아저씨는 몸에 묻은 물기를 털고 아쉬운 표정으로 나갔다. 내가 샤워를 마치자 아저씨는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미치. 앞으로 삼주 정도 못 봐. 나는 왜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말았다. 아내랑 여행을 갈지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애 낳기 전에 좀 돌아다녀야 될 것 같아서. 애가 나오면 피곤해지잖아. 나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매만지며 물기를 닦았다. 외국을 다녀올까 해. 연차랑 휴가 당겨쓰니까 삼주 정도 여유가 생기더군. 나는 대충 로션을 찍어 바르고 옷을 챙겨 입었다. 가방 속에 든 교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아내가 더블린에 가고 싶다네. 난 애초에 더블린이 어디 박혀 있는 덴지도 몰랐다니까. 그냥 동남아 일대나 둘러보고 올 것이지, 무슨. 대충 스타킹까지 신었다. 주머니를 쑤셔 담배를 찾았다. 아저씨가 담배를 건넸지만 무시했다. 삼주 뒤엔 웃으며 보자.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명랑해서야. …… …… 삼주 동안 똥 못 싸서 어떡해요? 그러게. 그걸 생각 못 했네. 아저씨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픽 웃었더니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들어 침대 중앙으로 눕혔다. 아직 화 안 풀렸거든요? 내가 말해도 묵묵부답. 아저씨가 좋아하는 보라색 원피스가 내 몸에서 멀어졌다, 부득이하게. 아저씨는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내 몸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그때 처음으로, 진짜 신음소리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엉덩이에 푸른 멍이 흉터처럼 들어 있었다. 언제고 지워질 것이 빤한 흉터가. * 아저씨는 정말 삼주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학교엘 갔다. 책상에 엎드려 잘까 하다가 그냥 수업을 들었다. 의자에 등을 펴고 앉아 있었지만 역시 좀이 쑤셨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종이 쳤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애들이 자리로 가 책상을 정돈했다. 아직 선생이 오질 않았다. 틈을 타 가방을 몰래 들고 빠져 나왔다. 이제 어디든 갈 곳을 찾아야 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걸었다. 쎄미였다. 나도 데려가. 미친년. 귀찮게시리. 우리는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어디 갈 건데? 몰라. 뭐야, 시시하게. 그럼 나 따라와. 그러든지. 우리는 번화가 로터리에서 내렸다. 쎄미는 지하철역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역사 안 물품보관함에서 옷을 꺼냈다. 초록색 미니 원피스였다. 넌 갈아입을 거 없어? 나는 가방 안에 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꺼내 보였다. 우리는 쌍방울자매처럼 원피스를 맞춰 입었다. 쎄미가 아이라이너와 립스틱을 주었다. 나는 어설프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립스틱을 발랐다. 우리는 피시방으로 갔다. 모니터 한 대를 앞에 두고 나는 쎄미가 게임하는 걸 지켜보다가 졸았다. 얼마 안 있어 쎄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나가자. 시계를 보니 일곱 시였다. 번화가 로터리는 반짝이고 있었다. 온갖 조명 세례에 비둘기들은 나뭇가지 위로 종적을 감췄다. 보도블록은 연이어 뱉은 껌들과 담배꽁초로 넘쳐났다. 쎄미는 로터리 변방에 있는 건물로 나를 인도했다. 색이 누런 간판에 조명도 시원찮은 것이 딱 학생들이 숨어 술 마시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짜리몽땅한 할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쎄미가 샐쭉이 웃어 보이며 익숙하게 소주 두 병과 부대찌개를 시켰다. 할머니는 그제야 태연히 일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 안에 있던 담배를 올려놓고 주변을 살폈다. 태반이 고등학생들처럼 보였다. 잘 하지도 못 하는 술을 마시며 저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다. 쎄미는 재떨이를 제 앞에 가져다 놓고 그새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나도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이려는데 어디선가 쎄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쎄미, 오랜만이다. 쎄미가 남자애 둘에게 알은 체를 하며 나를 쳐다봤다. 옳다구나, 같이 놀자는 소리로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가 큰 자식이 쎄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뒤이어 눈썹이 숯덩이처럼 진한 남자애가 내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새 할머니가 전골냄비가 올라간 부르스타를 들고 와서는 퉁명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쎄미와 그 옆에 앉은 꺽다리가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취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수저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숯덩이 눈썹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자박한 국물에 퐁당퐁당 빠져 있는 햄 조각과 두부, 콩나물과 양파. 찌개는 어쩐지 팔팔 끓여도 맛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앞에 두 사람이 기어이 취한 척을 하며 서로 부둥켜안을 때쯤 나는 수저를 들어 국물을 맛보았다. 그랬더니 옆의 숯덩이도 냄비에 제 수저를 꽂았다. 나는 맥주에 콜라와 소주를 조금씩 섞어 숯덩이에게 주었다. 숯덩이가 고마워하며 답례로 자신도 타주겠다고 했다. 각자 서로가 타준 폭탄주를 마셨다. 어쩐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쎄미와 꺽다리는 팔짱은 물론 어깨동무며 심지어는 서로에게 입술까지 드밀며 야단이었다. 소주를 일곱 병쯤 마셨던가. 그 와중에도 쎄미가 자리를 뜰까봐 손을 꼭 부여잡으면서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꺽다리가 숯덩이에게 눈질을 보냈다. 무언의 암시 같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거행된 약속이 있었던 듯싶다. 쎄미는 비에 젖은 이불처럼 꺽다리의 팔뚝에 안긴 채 실려 나갔다. 이윽고 숯덩이와 나만 남았다. 숯덩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거렸다. 우리도 일어나지 뭐. 벌써 가게? 그럼 더 있으려고? 시간 별로 없어. 밤은 못 새. 숯덩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유치한 반응. 어디로 갈 건지는 정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숯덩이. 아, 이래서 어린애들은 귀찮다. 다 정한 거 알고 있거든. 모텔로 갈 거 아니야? 일 치르곤 만나 해장할 거 아니었어? …… 그리곤 쎄미랑 나랑 누구 가슴이 더 컸는지 낄낄거리겠지, 뭐. 안 봐도 빤해. …… 빨리 계산하고 나와. 너구리굴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을 헤집고 나와 건물 앞에서 숯덩이를 기다렸다. 숯덩이는 쭈뼛거리며 나왔지만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았다. 앞장 서. 내가 말했다. 그래도 돼? 어, 원래 이러려고 했잖아. 내가 인상을 쓰자 숯덩이가 이내 내 손을 잡았다. 손은 잡지 마. 숯덩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말자. 숯덩이가 말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영화관에 들어갔다. 심야시간대에 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가 잠시 졸았다. 조는 내내 숯덩이가 내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박력 없기는.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숯덩이가 팝콘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쯤에 나는 숯덩이의 팔목을 거세게 붙잡고는 그를 이끌었다. 어디 가려고? 심심한데 그냥 DVD방이나 가든지. 우리는 영화관에서 가장 가까운 DVD방으로 들어섰다. 프런트에서 계산을 하는 숯덩이 몰래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숯덩이와 몸을 섞고 난 뒤에도 아저씨에게선 답문이 없었다. 정말이지 짜증나. 나는 검은 소파에 누워 말했다. 숯덩이가 휴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곤 내 쪽을 쳐다보며 눈을 흘긋거렸다. 화면에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게 비쳤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러닝타임이 긴 시리즈물을 선택한 것이 후회가 됐다. 숯덩이가 슬금슬금 내 옆에 드러누웠다. 너 이만 가봐. 싫은데. 그럼 걍 닥치고 가만히 있든지. 어차피 나도 뺑이 치는 거야. 오전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되거든. 학교는 안 다니니? 너야말로 학교 다니는 년이 이러고 다니냐? 등신. 너만큼 구린 애 아니거든, 나. 웃기고 있네. 됐다. 그만 말해, 입만 아파. 딱 봐도 사이즈 나와. 나는 뭐 누나들이랑 안 놀아본 줄 아냐. 뭐라고? 나는 울컥 화가 났다. 나는 대충 윗옷을 걸쳐 입고 DVD방을 나왔다. 숯덩이는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새벽 다섯 시였다. 거리는 아직 깜깜했다. 추위 탓인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드문드문 건물 앞 계단에 누워 토사물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거리는 한적했다. 나는 터벅터벅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은 아직 운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려진 셔터에 기대고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어쩐지 발가벗은 느낌이 들었다. 숯덩이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주던 아저씨의 손길을 느낀 것일까. 내 몸에 남겨진 아저씨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쪽팔리게, 정말 후지게 자꾸만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아저씨를 만난 건 레코드 가게에서였다. 아담했지만 역사가 오래된 레코드 가게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다. 섹션별로 잘 나눠진 음반들은 가게 주인의 손을 거쳐 가지런히 정리되었고 새로운 주인에게로 입양됐다. 주인은 내가 오면 리패키지 앨범이나 베스트 앨범, 내가 모르는 희귀 앨범을 꺼내 들려주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존 레넌의 사망주기 30년을 맞아 아저씨는 비틀스의 앨범을 사러 왔다고 했다. 주인은 LP로 된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을 꺼내주었다. 아저씨는 보물 다루듯 LP를 매만졌다. 그거 복사본 같은데. 내가 다가가 이 말을 전하기 전까지는. 아저씨는 내 쪽을 살피며 무슨 상관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제가 아는데요. 20년 전에 들어온 건 정식판 거의 없어요. 다 해적판이지. 그리고 진퉁이라 쳐도 몇 억 넘을 걸요? 그냥 작년에 나온 리마스터 앨범 사세요. 저 같으면 그거 안 사요.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는 피식 웃으며 LP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친 아저씨는 앨범을 구경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봐, 진퉁. 같이 나가지? 그리고 우리는 곧장 모텔로 향했다. 미치.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니? 비틀스 노래 제목이잖아요. 후추상사의 밴드. 물론 한국에 그 제목을 딴 인디밴드가 있단 건 알아요. 아니.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가 낸 책이 있어. 그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비틀스의 노래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 속에 든 여자주인공 이름도 역시 비틀스의 노래에서 따온 거야. 루시나 리타 같이.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이 밴드가 남아프리카 출신들이란 거야. 그래서 번역본을 구하긴 힘들어. 그 튼실한 내용의 책은 읽은 사람들마다 모두 엄지를 치켜든다고 해. 더 신기한 건 뭔 줄 아니? 소속된 밴드 팀원이 단 한 명이란 거야. 뭐야. 나머지는 다 세션이에요? 그 밴드는 공연 안 해요? 응. 그 밴드는 단 한 번도 공연을 한 적이 없어. 그 밴드의 업적이라곤 책 낸 게 끝이야. 그게 뭐가 밴드예요. 그냥 작가지. 그러게. 하지만 그 사람이 우기면 밴드겠지. 마치 네 이름이 미치가 아닌데도, 네가 줄곧 미치라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야. * 아침 7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몰래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어쩐지 고요했다. 방문을 열고 둘러보니 집엔 아무도 없었다. 꺼놨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미친년. 집에 들어오기만 해.], [네 방에 있는 CD 다 갖다 버리기로 결단 내렸다.], [평생 네 멋대로 하다가 죽어. 여한 없이 그렇게 살아라. 부럽다.], [엄마아빠 오늘 등산 가니까 네가 할머니 밥 좀 챙겨드려. 것까지 안 하면 넌 정말 죽는다.] 나는 할머니 방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미역처럼 장롱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기척도 못 느끼셨는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큰 소리로 두어 차례 할머니를 부르자 그제야 어깨를 움찔하는 할머니. 저 왔어요. 밥 드셔야죠. 할머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차. 원피스를 교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걸 깜빡했다. 생각해 보니 허접한 실력으로 그린 아이라인도 엄청 번져 있을 것이었다. 밥 챙겨드릴게요. 좀만 기다리세요, 하고 방문을 닫으려는데 할머니가 허공에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오라는 눈치인가 싶어 나는 대충 눈 밑에 번진 아이라인을 손으로 닦고 할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할머니의 주름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내 어깨보다 한 뼘은 더 작아 보이는 할머니의 어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사람의 피부라기엔 어색할 정도로 꺼끌꺼끌했다. 뭐 해드릴까요? 정적을 깨고자 몇 차례 여쭈어도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몇 달 전 백내장 수술을 한 할머니의 눈동자는 부옇게 흐려 보였다. 나는 질문하는 걸 포기했다. 할머니는 다시 장롱에 머리를 기대었다. 할머니는 조만간 부서질 박제나비 같았다. 할머니의 눈가와 손, 입술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각보다 더 깊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도 이렇게 주름이 많으셨나. 이곳에 와 있는 것이 가뭄처럼 답답하고 숨 가쁠 할머니. 할머니는 아침마다 이렇게 장롱에 머릴 기대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살아 있긴 한 걸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지고 있는 것일까. 희정아.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잘 지내야 된다. 단디 몸 챙기고. 매사 조심하고. 매사 감사하고. 알제. 어쩐 일인지 눈꺼풀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으로 돌아오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대체 왜 우는 걸까? 이해가 안 됐으나 눈물은 더 솟구쳤다. 접을 수 있다면 잠깐 시간을 접어놓고 싶다. 정말 구리고 후지다. 나는 집전화기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가 받아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끝을 내야 한다. 아저씨의 아내가 받는다면 나는 다 폭로할 것이다. 아저씨와 나는 비틀스를 공유한 사이라고요.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세요? 남아프리카에 있는 원맨밴드를 아시냐고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임신은 왜 해요? 그렇게 안정적인 게 좋으면 차라리 소파랑 결혼을 하셨어야지. 아저씨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요. 신호가 계속 가는 동안 나는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받는다면 이제 아저씨와는 정말 끝이라고 말해야지. 아저씨의 똥배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라고. 아저씨도 똑같아. 부인 앞에선 똥도 못 눈다면서 여행은 왜 같이 가요? 왜 나한텐 아저씨 이름도 안 알려줘요? 치사하게 산다. 치사 빤쓰다, 정말…… 그리고 달칵.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네, 한창길입니다. 아저씨 목소리다. 한창길이라는 이름은 어색하지만 이건 분명 아저씨의 목소리다. 내가 수없이 핥았던 목에서 나는 그 소리 맞다. 허나 나는 한창길이란 이름을 모른다. 그런 이름일랑 들어본 적도 없다. 말씀하세요, 누구시죠? 그러니까. 저는. 저는요, 아저씨. 저예요, 미치……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마 얼마 안 있어 아저씨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내게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뿔싸. 이렇게 깔끔할 수가. 잠을 자는 동안 모든 걸 지워야지. 아저씨의 배꼽이 따뜻했다는 것 정도만 남겨두고. 다른 건 다 열여덟이라는 전투의 군사기밀이라 생각하고 블랙박스에 가두어 사장시켜야지. 나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집전화가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짜증나게. <끝〉
  • “재미 강조” “일하고 싶었어”…‘냉동인간’ 수다방

    “재미 강조” “일하고 싶었어”…‘냉동인간’ 수다방

    “사실 여성작가 분들은 소소한 신변잡기적 얘기들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그러니 닫혀 있다 할까, 금세 소진된다 할까 그런 부분이 있는데 이 작가님은 그러지 않아요. 신춘문예 당선소감을 봤는데, 사회적 관점 같은 게 있어서 창작력이 열려 있는 분으로 봤죠. 그래서 이번에 먼저 슬쩍 전화를 했어요. 같이 해보자고. 그땐 시놉시스조차 제대로 안 본 상태였어요. 대본 나오고 독회하면서 제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하게 됐죠.”(류주연) “2년 전엔가 (류 연출의) ‘경남 창녕군 길곡면’을 봤어요. 정말 같이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올해 ‘기묘여행’도 하셨잖아요. 제 작품에 출연한 배우 분이 그 작품에도 나왔는데, 연습 때마다 제 작품 얘기는 안 하고 ‘기묘여행’이 좋다는 얘기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둠의 경로’로 대본을 구해다 봤는데, 역시 좋더군요. 그래도 이번에 쓴 게 공상과학(SF)물이라 선택하지 않겠거니 했는데 먼저 전화주셔서 너무 좋았어요.”(이시원)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류주연(39) 연출과 이시원(37) 작가. 먼발치에서 서로 탐만 내던 이들이 ‘봄 작가, 겨울 무대’를 통해 ‘냉동인간’이란 작품으로 만났다. 인터뷰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작가 7명과 연출 7명이 서로 원하는 사람을 찍는, ‘사랑의 작대기’ 과정에서 상대를 1순위로 찍은 팀답다. 그렇지만 심사가 살짝 뒤틀린다. 어째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라는 대학입학시험 수석 합격자들 얘기 같다. 그래서 계속 요구했다. 칭찬만 하면 재미없으니 불만을 얘기해 보자고. 낯 붉힐 것 같으면 번갈아 화장실에라도 가라고 했다. 이시원 연출께서 소통을 무척 강조했어요. 어떤 장면에서 작가, 연출, 배우 간 의견이 다르면 계속 얘기해서 풀기를 원했어요. 제 의도를 살려준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 힘들었어요. 배우들이 이게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어 내가 잘못 썼나?’ 하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하고…. 어떤 때는 1주일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얘기만 한 적도 있어요(웃음). 류주연 그래서 우리팀 연습 진도가 제일 느려요. 공연날짜는 맞출 수 있으려나. 하하하. 번역극은 원작의 무게감 때문에 좀 이상해도 그냥 넘어가는데, 창작극은 왜 그러냐고 되묻게 됩니다. 그래서 ‘봄 작가, 겨울 무대’ 같은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이 프로그램이 대단한 명작을 낳아서가 아니라 작가, 연출, 배우가 서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거든요. 대판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 전 좀 달라요. ‘봄 작가’는 신춘문예로 짠~ 하고 나타난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거잖아요. 소통도 좋지만 준비과정이 페스티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제가 쓴 ‘냉동인간’은 SF물 같아서 정말 안 하실 줄 알았어요. 류 그렇지 않던데 뭘. 요즘 시대상황이 다 녹아 있던데. 이 처음엔 완전히 SF처럼 할 생각이었거든요. “(소통 과정에서) 대본이 바뀌면서 재미있는 부분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고 끼어들었다. 일종의 이간질이다. 류 제가 재미를 좀 강조하는 편입니다. 어떤 메시지라도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래서 배우들이 스트레스 받습니다. 이 상황에서 왜 웃겨야 하느냐며. 이 아니에요. 대본 독회하면서 제 스스로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많이 역동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바뀌지 않길 바라는 부분도 있어요. ‘냉동인간’은 ‘내가 죽은 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잘 돌아갈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 겁니다. 그런 세상에서 남편의 이름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그려내고 싶었어요. 류 맞아요. 그런 느낌이 잘 배어나와요. 예전에도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는데 그땐 사실 대본을 제 마음대로 고쳤어요. 절반 이상 고친 것도 있습니다. 얘기하다 보니 결국 저만 잘하면 되는 거네요(웃음). 이 어, 한때 그렇게 많이 고쳤다는 얘긴 처음 들어요. 전 욕심이 많아서 고치는 건 꼭 제가 해야 하는 성격인데, 연출께서 이미 제 스타일을 간파하신 것 같네요. 하하하. 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의 복귀, 이간질 전략의 실패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예민한 얘기, 제작비를 꺼냈다. 더욱이 ‘냉동인간’은 돈 많이 드는 대극장용 아니던가. 이 연극에 시위대가 등장하니까 배우가 한 20명쯤은 돼야 하는데…. 류 배우가 10명 남짓인데…. 작품 규모에 비해 버거운 주문입니다. 제작비가 얼마인줄 아세요? 겨우 1100만원이에요. 대극장에 올리라면서. 이 얘기 좀 꼭 (기사에) 써주세요. 이 처음엔 중극장 정도 생각하고 쓴 거예요. 쓰다 보니 자꾸 커진 겁니다. 대극장에서 한다니까. 내가 또 언제 대극장에서 작품 해보겠나 싶어서…. 하하하. 류 저도 대극장은 처음이에요. 좀 치밀하게 준비해서 하고 싶었는데, 얼떨결에 하게 되어버렸네요. 어째 불안하다. 극장은 큰데 배우와 제작비는 적고, 더구나 SF물이란다. 장면 구성이 가능할까. 류 장면 하나하나는 정말 좋아요. 문제는 그 장면을 어떻게 연결하느냐는, 브리지 부분이에요. 연출적 표현의 문제인데 이게 참 쉽지 않아요. 이 그게 작가와 연출의 차이인 거 같아요. 전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연출한테 불평하는 거죠. ‘아니, 이게 왜 안 돼요?’ 그러면 연출은 된다고 합니다. 그랬다가 배우들이 ‘그게 될까?’하면 또 안 된다고 했다가…. 오락가락하세요. 류 그게 연출의 몫이죠. 균형 잡아야 하는. 아니 눈치봐야 하는(모두가 크게 웃었다). 이 이제 연습실에 안 가려고요. 작가가 지켜보는 걸 슬슬 불편해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류 기자가 자꾸 불만을 얘기하라는데 공연 끝나고 다시 한번 보시죠. 그때는 진짜 불만이 터져나올지도 몰라요. 하하.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봄 작가 겨울 무대’는… 신춘문예 당선·연출자 연결, 희곡작가 발굴 프로젝트 일환 정부 지원을 받는 재단법인 한국공연예술센터(www.hanpac.or.kr)가 2008년 시작한 프로젝트다. 연출과 배우에 비해 부족한 ‘희곡 작가’ 육성을 위해 그해 신춘문예 당선자들에게 새 작품을 쓰게 해서 연말에 무대에 올린다. 원래는 통일된 주제 아래 30분 안팎의 단막극을 만들도록 했으나, 올해부터는 장편을 쓰고 거기에 맞춰 젊은 연출을 연결시켜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시원-류주연을 비롯해 이난영-김한내, 김나정-오경택, 김란이-이영석, 이철-박해성, 임나진-김태형, 이서-이종성 등 이름만 들어도 기대되는 신예작가와 연출가 7쌍이 뭉쳤다. 다음달 6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과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일곱 작품이 차례로 오른다. 반응이 가장 좋은 한두 작품은 내년에 앙코르 공연한다. (02)3668-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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