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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꽃 씨/홍윤숙

    꽃 씨 홍윤숙 새날 새 아침 삼백예순다섯 개의 꽃씨 한 주머니 깨끗한 두 손에 받았습니다 이제도 감히 꿈이란 말 할 수 있을까만 꽃씨 한 알 한 알 환히 눈뜨고 깨어나는 황홀한 시대의 아침을 위해 나는 이 겨울 흙이 되고 거름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참 단단한 호두알들 그것을 깨트리는 일, 바로 우리의 몫으로 남겨 주셨으니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공무원교육원 건물 이름 모두 우리말로 바꿔 표창

    중앙공무원교육원(원장 박명재)이 최근 건물의 이름을 순 우리말로 개명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공무원교육원은 23일 “과천에 위치한 교육원의 건물 이름을 순우리말로 바꿔 한글학회로부터 우수사례로 선정돼 표창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공무원교육원은 최근 신축한 강의동을 ‘늘새롬관’으로 이름붙인 것을 계기로 기존의 강의동과 기숙사 등의 건물 이름도 모두 순우리말로 교체했다. 강의실로 쓰는 건물은 기존의 연찬관(硏鑽館)에서 ‘보람관’으로, 사무실인 본관(本館)을 ‘도움관’으로 바꿔 건물의 기능을 강조하는 동시에 부르기 쉽도록 했다. 또 기숙사는 수신관(修身館)에서 ‘새날관’으로, 식당은 후생관(厚生館)에서 ‘어울관’으로 각각 바꿔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좌익 몰린 부친 의문사 ‘추적 36년’ 책 펴낸 전희구씨

    좌익 몰린 부친 의문사 ‘추적 36년’ 책 펴낸 전희구씨

    “책을 쓰면서 마음에 응어리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풀 수 있었습니다.” 오는 6월 정년퇴직을 앞둔 서울 노원구 생활복지국장 전희구(60)씨는 최근 6·25전쟁 당시 ‘좌익척결’명목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의문사를 추적해온 과정을 그린 ‘피어오를 새날’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다섯살 어린 나이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의 진상을 더듬어 가면서 겪은 눈물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 당시 부산일보 편집부 차장 겸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던 고 전임수(당시 29세)씨. 그는 그해 8월15일쯤 동료기자 6명과 함께 좌익으로 몰려 연행된 직후 가혹행위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규명을 위해 전씨는 1968년 군복무 시절 첫 휴가부터 아버지와 함께 끌려간 동료들과 수사관계자, 부산·경남지역에 거주했던 모든 언론·예술인들을 만나러 전국을 헤맸다.30년이 흐른 1997년에야 전씨는 ‘부산일보 50년사’라는 책과 아버지와 함께 연행된 언론인을 통해 당시 사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씨의 선친과 함께 연행된 전 국제신문 편집국장 이광우씨가 임종을 앞두고 당시 일을 생생하게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서 아버지의 행방불명 이후 어린 두동생의 병사와 어머니의 재가로 가정이 몰락하는 과정까지 숨김없이 드러냈다. 조부모 아래서 중학교만 마친 전씨는 검정고시를 거쳐 1970년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대통령표창, 서울시장상 등을 수상하며 모범적인 공직활동을 했다. 전씨는 “이 책은 아버지와 모든 의문사 사건피해자들을 위한 일종의 ‘씻김굿’”이라며 “모든 의문사 관련자들이 ‘역사의 신’앞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4대그룹 신년광고 희망·용기 담아 새해인사

    올해 최고의 기업은 어디가 될까. 일간지의 원단(元旦) 광고는 삼성, 현대차,LG,SK 등 4대 그룹이 장식한 것으로 나타났다.1월1일자 원단 광고는 해마다 기업들이 기싸움을 벌이는 장(場)으로 활용될 정도다. 어떤 회사가 어떤 내용을 호소했는지 그 면면을 살펴보면 올해 경제를 견인할 기업을 가늠할 수 있다. ●삼성 ‘30대 주부가 꿈꾸는 희망’ 모든 일간지의 1면을 장식한 기업은 삼성이다. 평범한 30대 주부로 보이는 한 여성을 내세워 “희망합니다….”란 주제의 신년 인사를 올렸다.(사진 왼쪽 아래) “출근하는 아빠들 어깨가 더욱 가벼워지기를 희망합니다. 활기찬 경제와 풍요로운 생활이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서로 더 많이 사랑하고 도우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을유년 한해, 저마다의 희망이 모두 이뤄지기를 새해 새날, 새마음으로 희망합니다.”(삼성) ●현대·기아차 ‘희망의 태양 더 높이’ 맨 뒷면 광고인 ‘백면 광고’는 현대자동차가 차지했다.“희망을 띄웁니다. 세계를 밝히겠습니다.”란 제목과 함께 세계 차시장 빅5를 위협하며 무섭게 질주하는 자사의 기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일가족이 한복을 차려입고 연놀이 하는 모습이 배경이다.(사진 오른쪽 위) “대한민국이 다시 힘차게 시동 걸리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수출 1000만대 그 이상을 이루며 세계 최고의 품질을 향해 현대차도 고객과 함께 새해 새 희망을 높이 높이 띄우겠습니다.”(현대자동차) ●LG “당신의 볏을 세워라!” 지면 중간의 전면광고는 LG가 맡았다. 연두색 바탕 화면에 “새롭게 다짐한 그 각오 그대로 당신의 자존심을 한껏 세우십시오. 용기와 도전 정신만 있다면,2005년은 당신의 해입니다.”(LG)라고 적었다. 하단에는 “당신의 볏을 세워라!”며 을유년을 대표하는 닭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SK, 따뜻한 2005년 기원 3일자 1면 광고는 SK가 바통을 이었다. 사회공헌을 기업의 주요 모토의 하나로 삼은 만큼 신년 인사에서도 상부상조하는 2005년을 약속했다. “나눌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올해는 희망의 해가 하나 더 뜰 것입니다. 그리고 12월 31일 서로가 등 두드리며,‘2005년은 참 따뜻했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만들어가는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백면 광고는 기아차가 맡았으며, 그밖에 KTF, 일동후디스, 신한금융지주 등도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올렸다. 업계 관계자는 “일제히 용기를 복돋우는 메시지와 다부진 각오로 불경기 속에 찾아온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면서 “4대 그룹은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라는 타이틀이 무색치 않게 지난 해 경영계획을 초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듯 올해에도 그들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국립민속박물관 닭 상징 유물 전시

    여명의 실낱같은 빛을 감지해 새벽을 깨우는 닭은 분명 ‘희망’의 상징이다. 닭은 또 예전부터 우리 민간신앙에서 서쪽을 지키는 방위신이자 오후 5∼7시를 가리키는 시간신으로서 역할을 했고, 액을 쫓고 복을 부르는 동물로도 인식됐다. 을유년, 닭띠해를 맞아 이처럼 우리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닭’의 상징과 의미를 유물을 통해 살펴보는 전시가 마련된다. 새해 1월1일부터 2월28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새날을 밝히는 닭’ 특별전이 그것.1,2,3부로 나누어 전시한다. 1부 ‘서쪽지킴이’는 특정 시간과 방위에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 닭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 닭조각상, 십이지번 닭, 청동십이지무늬거울 등 시간신, 방향신으로서의 닭 관련 유물을 볼 수 있다. 특히 ‘닭 조각상’은 십이지동물 관련 고분 출토품의 백미로 평가되는 유물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준다. 2부 ‘복을 부르는 동물’에선 변상벽의 ‘계도’, 닭과 맨드라미가 그려진 장승업의 ‘화조십이지병풍-닭’, 닭을 새겨넣은 ‘종이 이층 농’,‘수저집’ 등 액을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길상동물로서의 닭 관련 유물이 대부분이다. 이중 ‘계도’는 고양이와 닭 그림을 특히 잘 그린 조선 후기의 화원(畵員) 변상벽의 작품으로 닭 그림 중 가장 빼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3부에선 울음으로써 광명을 비춰주는 닭의 모습을 살펴보는 자리다. 어둠 속에 떠오는 광명의 빛을 가장 먼저 알고 힘찬 울음으로 맞이하는 닭은 신라 김알지 탄생설화 속에서 상서로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신령한 존재로서 등장한다. 광명을 밝히는 닭 관련 유물로서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묘사한 ‘금궤도’, 종묘제례에 쓰이는 제기(祭器)로 닭이 새겨진 계이(鷄), 닭모양 연적, 닭머리 등잔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전시기간 중 닭띠생은 생년월일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을 지참하면 박물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관람문의 (02)3704-3152.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여의도 IN] “슬픈 기억 흘려보내고 태양처럼 힘찬 한해를” 박근혜대표 ‘신년 인사장’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을유년(乙酉年) 새해를 맞아 당원과 지지자 33만명에게 신년 인사장과 이메일을 보낸다. 24일 발송될 신년 인사장은 희망과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일출 장면을 배경으로 담았다. 박 대표는 이 인사장에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은 저문 강물에 흘려보내고 새날 떠오르는 태양처럼 힘찬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면서 “희망은 길과 같다. 작은 오솔길도 함께 걷다 보면 큰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오늘보다 나은 내일, 지난해보다 나은 새해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겠다.”며 새해를 맞는 포부도 담았다. 시·도당을 통해 배포될 이번 인사장은 제작과 발송에 6000여만원이 들 것으로는 알려졌다. 박 대표는 이와 별도로 개인 후원회와 싸이월드 회원 12만명에게 이메일도 보내기로 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공중에 붕 뜬 길

    4차선이나 되는 길을 빈틈없이 메운 차 속에서 사람들이 몇 시간씩 이런 불안과 고립무원의 소외감에 떨고 있는데 저 지상에선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충청지방의 폭설 피해가 막심한 모양이다.고속도로에 갇힌 사람들,특히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고통은 공포감에 가까웠으리라고 짐작된다.엊그저께 서울에 내린 20㎝ 가까운 큰 눈도 집 밖에서 경험하니까 천지가 개벽하는 게 아닌가 싶게 불안했는데 50㎝나 되는 적설량은 어느 만한 것일까 잘 상상이 안 된다.서울에 큰 눈이 오던 밤에 나는 공중에 붕 뜬 순환도로 위에 있었다.큰댁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오는 길이었다.저녁식사를 겸한 이른 제사였다.그래도 큰댁을 떠날 때는 이미 발이 빠지게 눈이 온 뒤였고,계속해서 목화송이처럼 탐스러운 눈이 난분분하게 하늘 땅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자고 가라고 붙들었지만 부득부득 떠난 건 큰길에 차들이 잘 소통되는 게 보였고,설마 같은 서울시인데 집에 못 가랴 싶어서였다.걱정하며 붙드는 큰댁 식구들한테는 가다가 못 가면 찜질방에서 자고 갈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아주 농담만은 아니었다.한번도 그런데 가볼 기회가 없었던지라 어떻게 생긴 데일까 하는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차가 꼼짝을 안 하게 된 건 하필 공중에 붕 뜬 순환도로상에서였다.도시 외곽에는 무수한 도로들이 공중에 붕 떠서 차들이 신호에 안 걸리고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그 위에서 소통이 잘 돼 차가 쌩쌩 달릴 때는 땅 위에서 엉금엉금 기는 차들이 딱해 보였지만 그 위에서 몇 시간 얼어붙어 보니 어떡하면 저 밑의 땅을 밟아 볼 수 있을까 하며 땅 위를 기는 차나 인간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찜질방도 호텔도 땅 위의 것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일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무서웠다.내가 탄 차뿐 아니라 내 전후좌우로 4차선이나 되는 길을 빈틈없이 메운 차 속에서 사람들이 몇 시간씩 이런 불안과 고립무원의 소외감에 떨고 있는데 저 지상에선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통방송을 틀어 봐도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어떤 도로 어떤 구간에서 작은 접촉사고로 소통이 원활치 못하다는 것까지 일일이 친절하게 알려주던 방송이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수난에 대해선 이렇게 시침을 떼고 딴청만 부리고 있는 것일까.교통방송이 이러하니 다른 방송은 말할 것도 없었다.잡담조의 정치 경제 얘기 아니면 노래나 농지거리는 분통만 더 터지게 만들 뿐 아무런 위안이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공중의 길 위에서 자정이 지나고 새날을 맞았다.단언컨대 그 시간에 그 순환도로상은 차바퀴 밑이 미끄럽다기보다는 질척해서 비올 때를 방불케 했다.생각해 보니 차간 거리고 뭐고 없이 빽빽하게 차가 밀려 있었으니 차 지붕 위에 내려앉은 눈이 더 많지 바닥에 쌓일 새가 없었을 것이다.전방 어딘가에서 대형사고가 있지 않고는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렇다면 그걸 처리하기 위한 백차나 앰뷸런스 견인차 등 무언가 지상의 관심이 느껴져야 할 텐데 감감무소식이었다.만약 순환도로를 빠져나가는 출구쪽 내리막길이 미끄러워 통제를 하거나 통행이 불가능했다면 미리 진입을 막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여전히 불과 몇 미터 아래 지상에서는 쌩쌩까지는 아니라 해도 차들이 원활하게 잘 다니고 있었다. 그날 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40분 거리를 4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것보다는 왜 그런지 영문을 몰랐다는 데 있었다.고립무원의 고독감 때문이었다.교통경찰이 길을 터주지는 못할망정 왜 막히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줄 수는 없었을까.하긴 그걸 알려줄 만한 교통경찰이었다면 진입을 막았을 것이다.우리가 통과한 진입로와 출구 사이는 그 순환도로상에서는 극히 짧은 구간이었는데도 출구와 입구 사이에 전혀 소통이 안 됐던 것이다.마침내 차가 조금씩 서행을 시작하면서 그 공중에 붕 뜬 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빠져나오는 내리막길에서도 아무런 사고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왜 그랬는지 영 모르고 만 것이다.지상은 공중의 길보다 훨씬 더 미끄러워서 내가 탄 차의 운전자가 조심운전을 하니까 뒤차가 빵빵대며 신경질을 부려서 할 수 없이 지상의 흐름을 탔다.마침내 현실감이 돌아오고 간밤의 일은 비현실적인 악몽으로 남았다.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공중에 붕 뜬 길

    4차선이나 되는 길을 빈틈없이 메운 차 속에서 사람들이 몇 시간씩 이런 불안과 고립무원의 소외감에 떨고 있는데 저 지상에선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충청지방의 폭설 피해가 막심한 모양이다.고속도로에 갇힌 사람들,특히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고통은 공포감에 가까웠으리라고 짐작된다.엊그저께 서울에 내린 20㎝ 가까운 큰 눈도 집 밖에서 경험하니까 천지가 개벽하는 게 아닌가 싶게 불안했는데 50㎝나 되는 적설량은 어느 만한 것일까 잘 상상이 안 된다.서울에 큰 눈이 오던 밤에 나는 공중에 붕 뜬 순환도로 위에 있었다.큰댁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오는 길이었다.저녁식사를 겸한 이른 제사였다.그래도 큰댁을 떠날 때는 이미 발이 빠지게 눈이 온 뒤였고,계속해서 목화송이처럼 탐스러운 눈이 난분분하게 하늘 땅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자고 가라고 붙들었지만 부득부득 떠난 건 큰길에 차들이 잘 소통되는 게 보였고,설마 같은 서울시인데 집에 못 가랴 싶어서였다.걱정하며 붙드는 큰댁 식구들한테는 가다가 못 가면 찜질방에서 자고 갈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아주 농담만은 아니었다.한번도 그런데 가볼 기회가 없었던지라 어떻게 생긴 데일까 하는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차가 꼼짝을 안 하게 된 건 하필 공중에 붕 뜬 순환도로상에서였다.도시 외곽에는 무수한 도로들이 공중에 붕 떠서 차들이 신호에 안 걸리고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그 위에서 소통이 잘 돼 차가 쌩쌩 달릴 때는 땅 위에서 엉금엉금 기는 차들이 딱해 보였지만 그 위에서 몇 시간 얼어붙어 보니 어떡하면 저 밑의 땅을 밟아 볼 수 있을까 하며 땅 위를 기는 차나 인간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찜질방도 호텔도 땅 위의 것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일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무서웠다.내가 탄 차뿐 아니라 내 전후좌우로 4차선이나 되는 길을 빈틈없이 메운 차 속에서 사람들이 몇 시간씩 이런 불안과 고립무원의 소외감에 떨고 있는데 저 지상에선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통방송을 틀어 봐도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어떤 도로 어떤 구간에서 작은 접촉사고로 소통이 원활치 못하다는 것까지 일일이 친절하게 알려주던 방송이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수난에 대해선 이렇게 시침을 떼고 딴청만 부리고 있는 것일까.교통방송이 이러하니 다른 방송은 말할 것도 없었다.잡담조의 정치 경제 얘기 아니면 노래나 농지거리는 분통만 더 터지게 만들 뿐 아무런 위안이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공중의 길 위에서 자정이 지나고 새날을 맞았다.단언컨대 그 시간에 그 순환도로상은 차바퀴 밑이 미끄럽다기보다는 질척해서 비올 때를 방불케 했다.생각해 보니 차간 거리고 뭐고 없이 빽빽하게 차가 밀려 있었으니 차 지붕 위에 내려앉은 눈이 더 많지 바닥에 쌓일 새가 없었을 것이다.전방 어딘가에서 대형사고가 있지 않고는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렇다면 그걸 처리하기 위한 백차나 앰뷸런스 견인차 등 무언가 지상의 관심이 느껴져야 할 텐데 감감무소식이었다.만약 순환도로를 빠져나가는 출구쪽 내리막길이 미끄러워 통제를 하거나 통행이 불가능했다면 미리 진입을 막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여전히 불과 몇 미터 아래 지상에서는 쌩쌩까지는 아니라 해도 차들이 원활하게 잘 다니고 있었다. 그날 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40분 거리를 4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것보다는 왜 그런지 영문을 몰랐다는 데 있었다.고립무원의 고독감 때문이었다.교통경찰이 길을 터주지는 못할망정 왜 막히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줄 수는 없었을까.하긴 그걸 알려줄 만한 교통경찰이었다면 진입을 막았을 것이다.우리가 통과한 진입로와 출구 사이는 그 순환도로상에서는 극히 짧은 구간이었는데도 출구와 입구 사이에 전혀 소통이 안 됐던 것이다.마침내 차가 조금씩 서행을 시작하면서 그 공중에 붕 뜬 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빠져나오는 내리막길에서도 아무런 사고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왜 그랬는지 영 모르고 만 것이다.지상은 공중의 길보다 훨씬 더 미끄러워서 내가 탄 차의 운전자가 조심운전을 하니까 뒤차가 빵빵대며 신경질을 부려서 할 수 없이 지상의 흐름을 탔다.마침내 현실감이 돌아오고 간밤의 일은 비현실적인 악몽으로 남았다.˝
  • 儒林(3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3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새날이 밝아 상오 세 시부터 다섯 시 사이 무렵.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하여 의정부대신들과 사관(史官)들이 왕명을 받고 입실하였다. 이들은 한밤중에 의금부에서 표신을 가져온 병졸들로부터 급히 입실하라는 엄명을 받자 영문도 모르고 황급히 영추문으로 입궐하였던 것이었다. 영추문을 들어선 순간 온 궁궐이 횃불로 대낮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은 크게 놀랐다.특히 푸른 제복을 입은 군졸들이 삼엄하게 궁궐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무슨 일인가.” 우의정 안당이 경연청의 합문 안에 앉아 있는 호조판서 고형산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그러나 고형산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시선을 피할 뿐 대답하지 못하였다. 안당은 정광필과 같은 노 대신으로 사관출신의 강직한 선비였다.일찍이 ‘성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할 만큼 뛰어난 학자였으므로 특히 유교에 밝은 사림파 유신들을 신뢰하고 있었던 사신(史臣)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하고 묻지 않소이까.” 안당이 소리를 높였으나 여러 대신들은 묵묵부답이었다.그러나 정광필은 비현합의 문에 이르렀을 때 벌써 한눈에 모든 상황을 간파해 낼 수 있었다.그것은 여러 대신들 중에 섞여 있는 남곤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바로 지난새벽 남곤은 변복을 하고 남의 눈을 피해 집을 찾아오지 않았던가.찾아와서 주상의 밀지를 전한 후 ‘조광조 무리를 한 사람이라도 남기면 그 해가 무궁할 것입니다.주상께서는 오늘 밤에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할 것이오니 주상의 뜻을 받들어 조광조 무리들을 남김없이 제거하여 나라를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간하지 않았던가. 그뿐인가. 다음과 같은 말로 위협까지 가하지 않았던가. “만약에 그러하지 못하신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오.” 그때 정광필은 ‘재상의 몸으로 어찌 천민의 복장을 하고 모의를 꾸미고 있는가.’하고 꾸짖어 보냈으므로 남곤의 모습을 보자 모든 상황을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봐요,남대감.” 정광필은 매서운 눈으로 남곤을 쏘아보며 물었다. “어찌 공께서는 유자광이 하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오.” 정광필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유자광은 일찍이 자기의 음모 속에 연산군을 끌어들여 꼭두각시처럼 이용하였던 간신이 아니었던가.그러므로 남곤을 유자광에 빗대어 힐문하는 것은 유자광이 연산군을 이용하였듯이 남곤도 중종을 조종하여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음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곤은 정광필의 시선을 피하며 정광필이 꾸짖을 때마다 매번 이장곤을 돌아보면서 그에게 곤란한 답변을 떠넘기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희강이 자네가 답변하시게나.” 할 수 없이 이장곤이 나서서 변명하였다. “영상대감,신들이 이처럼 모인 것은 주상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나이다.주상께서는 이미 도승지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을 다 교체하고 조광조를 의금부에 가둘 것을 어명으로 내리셨습니다.” 이후 남곤은 자신을 쏘아보던 정광필의 눈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영상대감의 눈이란.신은 태어나서 이제껏 영상대감의 눈처럼 무서운 눈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곤은 심정과는 달리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지식인이었던 모양이다. 정광필의 추궁하는 매서운 눈빛에 부끄러움을 느낀 남곤은 이튿날 조광조 일파의 유죄가 논의되는 와중에 몸이 아프다는 구실로 일찍 퇴궐까지 하였다고 한다.
  • 儒林(3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새날이 밝아 상오 세 시부터 다섯 시 사이 무렵.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하여 의정부대신들과 사관(史官)들이 왕명을 받고 입실하였다. 이들은 한밤중에 의금부에서 표신을 가져온 병졸들로부터 급히 입실하라는 엄명을 받자 영문도 모르고 황급히 영추문으로 입궐하였던 것이었다. 영추문을 들어선 순간 온 궁궐이 횃불로 대낮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은 크게 놀랐다.특히 푸른 제복을 입은 군졸들이 삼엄하게 궁궐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무슨 일인가.” 우의정 안당이 경연청의 합문 안에 앉아 있는 호조판서 고형산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그러나 고형산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시선을 피할 뿐 대답하지 못하였다. 안당은 정광필과 같은 노 대신으로 사관출신의 강직한 선비였다.일찍이 ‘성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할 만큼 뛰어난 학자였으므로 특히 유교에 밝은 사림파 유신들을 신뢰하고 있었던 사신(史臣)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하고 묻지 않소이까.” 안당이 소리를 높였으나 여러 대신들은 묵묵부답이었다.그러나 정광필은 비현합의 문에 이르렀을 때 벌써 한눈에 모든 상황을 간파해 낼 수 있었다.그것은 여러 대신들 중에 섞여 있는 남곤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바로 지난새벽 남곤은 변복을 하고 남의 눈을 피해 집을 찾아오지 않았던가.찾아와서 주상의 밀지를 전한 후 ‘조광조 무리를 한 사람이라도 남기면 그 해가 무궁할 것입니다.주상께서는 오늘 밤에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할 것이오니 주상의 뜻을 받들어 조광조 무리들을 남김없이 제거하여 나라를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간하지 않았던가. 그뿐인가. 다음과 같은 말로 위협까지 가하지 않았던가. “만약에 그러하지 못하신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오.” 그때 정광필은 ‘재상의 몸으로 어찌 천민의 복장을 하고 모의를 꾸미고 있는가.’하고 꾸짖어 보냈으므로 남곤의 모습을 보자 모든 상황을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봐요,남대감.” 정광필은 매서운 눈으로 남곤을 쏘아보며 물었다. “어찌 공께서는 유자광이 하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오.” 정광필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유자광은 일찍이 자기의 음모 속에 연산군을 끌어들여 꼭두각시처럼 이용하였던 간신이 아니었던가.그러므로 남곤을 유자광에 빗대어 힐문하는 것은 유자광이 연산군을 이용하였듯이 남곤도 중종을 조종하여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음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곤은 정광필의 시선을 피하며 정광필이 꾸짖을 때마다 매번 이장곤을 돌아보면서 그에게 곤란한 답변을 떠넘기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희강이 자네가 답변하시게나.” 할 수 없이 이장곤이 나서서 변명하였다. “영상대감,신들이 이처럼 모인 것은 주상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나이다.주상께서는 이미 도승지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을 다 교체하고 조광조를 의금부에 가둘 것을 어명으로 내리셨습니다.” 이후 남곤은 자신을 쏘아보던 정광필의 눈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영상대감의 눈이란.신은 태어나서 이제껏 영상대감의 눈처럼 무서운 눈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곤은 심정과는 달리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지식인이었던 모양이다. 정광필의 추궁하는 매서운 눈빛에 부끄러움을 느낀 남곤은 이튿날 조광조 일파의 유죄가 논의되는 와중에 몸이 아프다는 구실로 일찍 퇴궐까지 하였다고 한다.˝
  • 儒林(35)-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35)-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그 정적은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와 같은 것이었다.중종이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까 판가름이 나는 것을 기다리는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중종이 심정을 비롯한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 순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은 역적 죄인으로 처벌을 받아 숙청될 것이고,윤자임과 공서린의 승지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될 것이다.그러나 만약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준다면 한밤중에 승지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대궐 안으로 들어서 시위를 하고 있는 훈구파 대신들은 대역죄로 참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절체절명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심정은 초조해하는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중종이 이미 왼쪽 어깨를 벗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윤자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남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각별한 총애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마침내 새로이 가승지로 임명된 성운이 합문 밖으로 나와 근정전 위에 올라섰다.성운은 소매 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상감마마께오서 전지를 내리셨소.형조판서는 나와서 상감의 전지를 받으시오.” 이장곤이 나서서 두 손으로 교지를 받아 읽기 시작하였다.내용을 읽던 이장곤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하였다.교지 속에는 어명으로 의금부에 갇힐 죄인의 명단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우참찬 이자(李),형조판서 이정(李淨),도승지 유인숙(柳仁淑),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동부승지 박훈(朴薰),부제학 김구(金絿),대사성 김식(金湜)….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사헌 조광조. 중종은 마침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의금부에 가둘 것을 명함으로써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내용을 확인한 이장곤은 납덩어리와 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신들 앞에서 소리쳐 말하였다. “군사들은 우선 이곳에 있는 승지들을 체포하여 하옥시키도록 하라.” 순간 촛불을 밝히고 경연청에 앉아 있던 훈구파 대신들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흐르고 희색이 만면하였다.동시에 한 가닥 기대를 갖고 기다리던 윤자임 일행은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군사들이 즉시 윤자임을 비롯하여 공서린,이구,기준,심달원(沈達源)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는 한편 교지에 쓰인 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가 총출동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은 선전관(宣傳官)이었던 금오랑(金吾郞)이었다. 금오랑에게 군사를 주어 즉시 체포토록 명을 내리면서 이장곤이 말하였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즉시 출발하여 조광조를 포박하여 의금부에 가두도록 하여라.알겠느냐.”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대답하였다.사안의 중요성을 간파한 이장곤이 다시 다짐하여 말하였다. “절대로 이 밤이 새기 전에 조광조를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날이 새거나 조광조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즉시 체포하지 못하면 반드시 문책하여 그대를 군명으로 엄히 다스릴 터이니 명심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즉시 군사를 끌고 사라졌다. 이 때가 자시(子時)의 한가운데 정확히 자정 무렵이었다.이제 막 새날이 시작되려는 밤 12시에 친위 쿠데타는 이처럼 끝이 나 버린 것이다.
  • 儒林(35)-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그 정적은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와 같은 것이었다.중종이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까 판가름이 나는 것을 기다리는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중종이 심정을 비롯한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 순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은 역적 죄인으로 처벌을 받아 숙청될 것이고,윤자임과 공서린의 승지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될 것이다.그러나 만약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준다면 한밤중에 승지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대궐 안으로 들어서 시위를 하고 있는 훈구파 대신들은 대역죄로 참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절체절명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심정은 초조해하는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중종이 이미 왼쪽 어깨를 벗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윤자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남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각별한 총애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마침내 새로이 가승지로 임명된 성운이 합문 밖으로 나와 근정전 위에 올라섰다.성운은 소매 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상감마마께오서 전지를 내리셨소.형조판서는 나와서 상감의 전지를 받으시오.” 이장곤이 나서서 두 손으로 교지를 받아 읽기 시작하였다.내용을 읽던 이장곤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하였다.교지 속에는 어명으로 의금부에 갇힐 죄인의 명단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우참찬 이자(李),형조판서 이정(李淨),도승지 유인숙(柳仁淑),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동부승지 박훈(朴薰),부제학 김구(金絿),대사성 김식(金湜)….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사헌 조광조. 중종은 마침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의금부에 가둘 것을 명함으로써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내용을 확인한 이장곤은 납덩어리와 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신들 앞에서 소리쳐 말하였다. “군사들은 우선 이곳에 있는 승지들을 체포하여 하옥시키도록 하라.” 순간 촛불을 밝히고 경연청에 앉아 있던 훈구파 대신들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흐르고 희색이 만면하였다.동시에 한 가닥 기대를 갖고 기다리던 윤자임 일행은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군사들이 즉시 윤자임을 비롯하여 공서린,이구,기준,심달원(沈達源)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는 한편 교지에 쓰인 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가 총출동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은 선전관(宣傳官)이었던 금오랑(金吾郞)이었다. 금오랑에게 군사를 주어 즉시 체포토록 명을 내리면서 이장곤이 말하였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즉시 출발하여 조광조를 포박하여 의금부에 가두도록 하여라.알겠느냐.”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대답하였다.사안의 중요성을 간파한 이장곤이 다시 다짐하여 말하였다. “절대로 이 밤이 새기 전에 조광조를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날이 새거나 조광조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즉시 체포하지 못하면 반드시 문책하여 그대를 군명으로 엄히 다스릴 터이니 명심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즉시 군사를 끌고 사라졌다. 이 때가 자시(子時)의 한가운데 정확히 자정 무렵이었다.이제 막 새날이 시작되려는 밤 12시에 친위 쿠데타는 이처럼 끝이 나 버린 것이다.˝
  • [길섶에서] 꿈을 꾸어라

    꿈을 꾸어라.새 꿈을 꾸어라.푸르디푸른 하늘처럼 파란,넓디넓은 초원처럼 드넓은 꿈을 꾸어라.좁은 마음으로,거친 입으로,멀게진 눈으로,꽉 막힌 귀로,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걸 꾸어라.꿈이 있다면 깊은 밤 지난 새벽 더 찬란하게 밝아올 것이다. 새 날이 온다.하루 하루 또 하루 새날은 시작한다.더께로 앉은 묵은 먼지 털듯 지난해의 소란과 미움을 모두 버려라.미련은 새 날엔 어울리지 않는다.새 날에는 반짝이는 눈,온화한 마음,정중함을 동무로 삼자.현실이 먼지 뽀얀 자갈길 같아도,꿈이 있다면,험한 길 같이 갈 동무가 있다면 수고로움이 덜어질 것이다.킹 목사의 꿈처럼 웅장하지 않아도 좋다.무지개처럼 뻗지 못해도,강물처럼 흐르지 않아도 좋다.거짓이 아니면 된다. 이 길을 갈 때 입만큼은 꾹 다물고 가자.풍진(風塵)이 들어와서가 아니다.동무들 마음을 상하게 할까 보아서다.꿈은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염시킬 수 있다.푸른 꿈으로 두 천사(2004)의 해를 살아보자. 강석진 논설위원
  • [길섶에서]혁명과 발전

    새해 업무가 다시 시작됐다.세월은 빠르고,그 세월 속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그리고 어김없이 새날이 찾아온다. ‘프라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란을 깨야 한다.이것이 혁명의 이론이다.그러나 어항의 물을 갈기 위해서 물고기까지 쏟아버려서는 안 된다.이것은 발전의 논리다.’ 지난해는 변화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다.6월의 태양보다 더 뜨거웠던 붉은악마들의 열기,인터넷을 달군 대통령 선거,거리를 메웠던 촛불 행렬….이 모두가 자신감을 심어줬다.그러나 금세 지나온 길이지만 벌써 멀어져 가고 있다.올해는 또 얼마만큼의 변화가 밀려오고 밀려갈까. 우리는 감히 지난해의 변화를 ‘시대와 세대가 바뀌었다.’고 주장했다.그런데 누가 바꾸었는가.‘너 아니면 나’가 아니라 우리 모두다.새해는 혁명과 함께 어떻게 발전할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우리 함께 가자. 김경홍 논설위원
  • [우리고장 NGO] 경북 경산시민모임

    ‘시민의 힘으로 새날을 연다.’ 경북 경산시민모임(대표 金道演)은 애향심과 건전한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시민단체 중 하나로 손꼽힌다.회원은 각계 시민 대표 20여명.회비와 사업 수익금으로 꾸려진다. 1996년 1월 창립됐다.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경산시 평산동 옛 코발트 광산 양민학살 만행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에 주력한다. 경산지역 보도 연맹원과 대구형무소 미결수 등 3500여명의 양민이 처참히 학살된 이 사건은 반세기 가까이 암흑 속에 묻혀 왔다. 그러나 경산시민모임 창립과 함께 처음으로 이들에 대한 위령제가 치러지고 유족회가 구성되는가 하면 유골 일부 발굴작업이나마 이뤄지게 됐다.특히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한 데 이어 미국 뉴욕의 ‘코리아 전범재판’에 이를 제소,승소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및 유골 발굴작업 실시를 수차례에 걸쳐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국내외 언론에 집중 부각되면서 국민적 관심을 유도했을 뿐 아니라 최근 경산시의회가 진상 조사에 착수하는 데도 기여했다는 평가다. 이와 함께 창립 이후 매년 1∼2차례씩 지속적으로 펼쳐온 ‘테마가 있는 경산 문화유적 답사’도 호응을 얻고 있다.이 프로그램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역 문화에 대한 소중함과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계기로 자리잡았다. 지방선거 때마다 공명선거 실천을 위한 시민 자정 결의대회와 출마 후보자초청 정책 토론회도 빠짐없이 열고 있다.유권자에게 후보에 대한 올바른 판단 기회를 제공해 주고,출마자들간에 건전한 정책대결 분위기를 유도하는 데 기폭제가 됐다. 시민연대는 지역 민주단체들과 함께 매년 8·15를 전후해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통일 한마당’ 행사도 활발히 추진한다.시민·민주단체가 주도하고 일반 시민과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축제로 승화시킨 것이다. 최근에는 시의 음식물 쓰레기 민간 위탁과 관련,수의계약 업체들이 물량을 부풀리기 위해 반복·이중 계량(計量)한다는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시민모임은 비리 의혹의 재발 방지와 예산 절감을 위해 ▲위탁처리의 공개입찰방식전환 ▲처리업체 확대 ▲기존 대행 수수료 지급 방식 변경 등의 대안을 제시하며 개선을 이끌어냈다. 이밖에 주민에게 자치역량을 심어주기 위한 평화통일,주민권리 찾기,인권등에 대한 강좌를 꾸준히 마련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 대표는 “우선 국회에 계류중인 양민학살 사건 특별법이 하루빨리 제정되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이라면서 “23만 경산시민의 힘과 지혜를 모아 밝은 사회를 열어 가는 구심점이 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053)816-3868. 경산 김상화기자 shkim@
  • [대~한민국 24시] 광주 무등산

    ■15개 거미줄 등산로 새벽부터 ‘야~호' 행렬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의 안식처다.아무 때나 곁에서 바라볼 수 있고 맘만 먹으면 금방 오를 수도 있다.시민 130여만명이 바로 곁에 해발 1187m의 명산을 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운인지도 모른다.무등산은 광주의 북동쪽 가장자리와 맞붙어 있고 도심으로부터는 4~10㎞쯤 떨어져 있다.걸어서 1시간쯤, 차로는 5~10분쯤 걸린다. 도심과 맞닿은 곳에서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즐비하고 보리밥집,촌닭 백숙집 등 음식점과 휴게시설도 많다.부담없이 오를 수 있고 좋은 공기와 천혜의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그래서 무등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남다르다. 무등산은 시대별로 ‘무진악’‘무진’‘서석산’‘무돌’ 등으로 불렸다.주변 지역 개발에 따른 환경변화도 겪었다.그러나 광주와 전남 화순,담양에 걸쳐 두루뭉술하게 솟아오른 전체 모습과 봉우리는 예전 그대로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무등산을 찾는 등산객은 평일에 1만여명,공휴일에는 2만여명에 이른다.많을 때는4만∼5만명에 달한다.무등산에 오르는 길목은 크게 동구 증심사지구와 북구 원효사지구로 나뉜다.증심사지구는 시내 중심가 및 택지지구들과 이웃하고 있고 시내버스 소통이 원활해 많은 시민들이 이용한다. 최근 지리하게 이어진 장마의 뒤끝인 24일 토요일 새벽녘 증심사입구 주차장. 어스름이 채 가시기도 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든다.물통을 든 아낙네,지팡이를 짚은 노인들,주말을 상큼하게 출발하려는 직장인들,부모를 따라 나선 아이들….모두가 활기찬 얼굴들이다.무등산은 이렇게 첫 손님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들은 증심사 입구를 출발,의재미술관∼약사사∼새인봉 삼거리에 이르는왕복 8㎞를 오가는 새벽 등산객들이다.체력과 시간이 허락하면 새인봉삼거리에서 1㎞쯤 위쪽에 있는 중머리재까지도 오른다.내려오는 길에는 약사사 인근 약수터에서 얼음처럼 시원한 샘물을 길어 온다. 이날 새벽에 만난 나병주(58·동구 운림동)씨는 “운동삼아 5개월 전부터 매일 새벽 등산을 하게 됐다.”면서 “짙푸른 나무와 좋은 공기를 대하다 보니 지금은 비오는 날만 빼고는 매일 무등산을 찾는다.”고 말했다. 주부 이명숙(46·동구 학동)씨는 “아침밥을 짓기 위해 약수를 길러 왔다.”면서 “매일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운동을 함께 하니 하루가 상쾌해진다.”며 활짝 웃었다. 시민들이 등산로를 따라 잰걸음으로 움직이는 사이 노인들은 숲 주변 공터에서 맨손체조와 스트레칭을 하는 등 몸 풀기에 여념이 없다. 같은 시각 원효사지구의 동구 산수오거리∼무등산장으로 이어지는 7㎞의 꼬불꼬불한 산길에도 승용차가 숲을 가르며 질주한다.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아줌마,아저씨들은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곧이어 목에 땀수건을 걸친 채 늦재∼바람재∼동화사터 구간을 오른다. 김성규(40·북구 각화동)씨는 “새벽 등산은 중독증세 같은 것”이라면서“하루라도 산을 안 오르면 온몸이 쑤시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먼동이 터 오는 아침 6시쯤이면 머리 부분이 짙은 안개에 묻힌 무등산의 몸통이 드러나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전망대나 중봉에 이르면 잠에서 덜 깬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새로운 아침을 맞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증심사 입구 등지의 주차장은 어느새 차들로 메워지고 산자락 상가들이 영업을 위해 문을 연다.진입로에는 옥수수·고구마·과일 등을 파는 행상들이 판을 깐다.등산객들의 간식용 먹거리 장터가 생긴다.사주나 관상을 봐주는늙수그레한 남자도 보이고 쑥떡이나 찐빵 좌판을 벌이는 할머니도 눈에 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산자락은 울긋불긋 오색 물결로 일렁인다.한껏 멋을낸 중년 아줌마들,계모임인 듯한 같은 또래의 주부들,유니폼을 입은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들,노인들,다정한 연인들이 거대한 숲속으로 하나씩 자취를 감춘다.무등산은 토산(土山)으로 경사가 완만해 5∼6살 아이들도 가볍게 오를수 있다.등산로 중간 중간에 약수터와 쉼터가 조성돼 지루한 줄도 모르고,완주하는 데 드는 시간도 4∼5시간이면 족하다. 정오쯤이면 무등산의 정상 부근인 중머리재,중봉,백운암터,새인봉,장불재,입석대,서석대 등지에는 끼리끼리 점심준비가 한창이다.정성스레 싸온 도시락이나 간식류를 먹고 약수터 물로 목을 축인다.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노래도 부른다.정상에는 연인끼리 속삭이는 대화도 있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마음을 달래준다.어머니의 품같은 산이다.늦은 오후쯤에는 하산이 시작된다.게으른 사람은 이때 등산에 나서기도 한다.산자락에 즐비한 보리밥집도 붐빈다. 평소보다 많은 운동량으로 식욕이 왕성해진 등산객들은 10가지 이상의 푸성귀 나물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얼버무려 보리밥을 비벼댄다.‘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허기를 채운 사람들은 막걸리 한 사발에 해 넘어가는 줄 모른다. 노인들은 자식자랑과 건강문제,주부들은 자녀 교육문제,중년 남자들은 사업문제 등 얘기꽃을 피운다.식당 한쪽에서는 고스톱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레방아 보리밥집 주인 이모(45·여)씨는 “외딴 산 속이지만 날마다 사람이 붐벼 시내에서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면서 “모든 이의 휴식처인 무등산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시민된 의무이자 도리”라고 말했다. 무등산은 이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시민을 품안에 안고 숨쉬며 살아간다. 무등산은 계절에 따라 ‘등산의 맛’이 크게 달라진다. 봄소식은 진달래가 가장 먼저 알린다.3월부터 산자락인 용추계곡,원효사계곡,증심사계곡에서 시작한 진달래는 능선따라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인다.5월이면 자생 철쭉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여름철의 짙은 녹음을 거쳐 가을로 이어진다.10월쯤이면 장불재와 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억새풀 집단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면 억새풀은 하얗게 꽃을 피워 장관을 이룬다.겨울에는 설화(雪花)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온대지방인 광주에서는 보기드문 정경이 펼쳐지는 곳이다.해발 800m이상이면 어김없이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핀다. 무등산은 공간적 의미의 ‘등산 장소’만이 아니다.광주의 역사와 세월을 간직한 마음의 안식처인지도 모른다.무등산 해맞이에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80년 5월의 ‘아픔’ 이후 어느 때부턴가 새해 새날을 맞아 10만여명의 인파가 중머리재와 입석·서석대에 모여든다.소리도지르고 한을 달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자리다. 광주시가 최근 들어 “자연 훼손이 우려된다.”며 새해 해맞이 자제를 당부하고 나올 정도로 무등산에 대한 시민의 애착은 강하다. 지역 문단의 시인들도 무등산을 노래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무등산이 광주시민들에게 주는 이미지와 상징은 단순한 산이 아닌 생활이자 역사인지도 모른다.장구한 세월 동안 한자리에 앉아 ‘우리’와 함께한다는 동질성 그 자체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kdaily.com ■12개 약수터·유적지도 많아 토끼등~증심교 내년까지 휴식 광주시와 전남 담양·화순군에 걸쳐 있는 무등산은 1972년 전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전체 면적은 30.23㎢.자연보호지구,자연환경지구,취락지구,집단시설지구 등으로 분류돼 있다. 지정 등산로는 증심사∼약사사∼새인봉,공원관리사무소∼꼬막재∼규봉암∼장불재 구간 등 모두 15개 노선 42.5㎞이다.등산로 인근에 12개 약수터와 환벽당,도요지,충장사 등 각종 문화 유적지가 산재한다. 광주시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는 자연환경 훼손을 막기위해 96년부터 지정등산로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입산 통제지역으로 고시했다.토끼등∼증심교에 이르는 1.4㎞구간은 오는 2003년까지 휴식년제를 실시하고 있다. 최근 이전한 정상 부근의 군 주둔지에 대한 생태복원을 추진중이다.전문교수 등이 참여한 가운데 군 주둔지와 토끼등 일대 등 심하게 훼손된 구간에 자생 수목을 옮겨 심고 생태모니터링을 정례화했다. 이밖에 먹는 물 공동시설과 공중화장실,가로등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 관리와 환경 정비를 추진하고 공원내 자연 훼손 행위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양정두(梁正斗) 공원관리사무소장은 “환경 훼손 등으로 갈수록 무등산 내동식물의 종류와 수가 줄고 있다.”면서 “간이 등산로 출입 등 불법행위는 시민 스스로가 자제해 아름다운 산 가꾸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 한국축구 16강의 날이 밝았다, 14일 포르투갈과 ‘최후의 한판’

    ‘한국축구의 새날을 연다.’ 본선 진출 48년만에 사상 첫 승리를 따낸 한국이 14일 오후 8시30분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포르투갈과 2002 한·일월드컵 16강 티켓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지난 4일 부산에서 거둔 첫 승의 감격과 10일 미국전에서 남은 아쉬움이 4700만의 염원과 어우러져 한국의 관문 인천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한국은 2경기를 치르며 승점 4(1승1무)를 기록,승점 3(1승1패)인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한다.만약 지게 되면 같은 시간 열리는 대전경기에서 폴란드가 미국을 꺾어주길 기대해야 한다. 첫 경기에서 미국에 덜미를 잡힌 포르투갈은 폴란드를 4-0으로 대파하며 우승후보로서의 면모를 되찾았다.비기기만 해도 16강 진출이 가능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12일 스페인에 2-3으로 져 탈락의 쓴잔을 들고 만 데서 보듯 강팀을 상대로 비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거스 히딩크 한국 대표팀 감독은 “수비를 강화해 역습을 노리기보다 활발한 공격축구로 주도권을 쥐고나가겠다.우리는 강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정면 승부를 선언했다. 미드필드 싸움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날 것으로 보고 중앙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한다는 전략이다.7∼8명이 한꺼번에 공격에 참여했다 썰물처럼 수비진으로 물러나는 히딩크 감독의 ‘토털사커’가 16년만에 본선에 진출한 포르투갈 수비진을 괴롭힐 전망이다. 미드필드진의 선봉은 히딩크 감독이 “에너지를 다 태우고도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서는 선수”라고 극찬한 김남일이 맡아 포르투갈 플레이메이커 주앙 핀투나 후이코스타의 발끝을 봉쇄한다.다친 왼쪽 발목이 거의 나은 박지성이 오른쪽,유상철이 왼쪽 허리를 책임질 것으로 보인다. 파울레타를 앞세워 오른쪽의 루이스 피구와 왼쪽의 세르지우 콘세이상이 치고 들어올 포르투갈의 공격은 이영표,홍명보,최진철,송종국으로 구성된 포백라인이 막게 된다. 설기현-황선홍-이천수 스리톱이 경험은 많지만 노쇠한 포르투갈 수비진의 빈틈을 파고든다.예상보다 빨리 교체투입될 가능성이 높은 안정환은 태극마크가 새겨진 축구화를 신고 2경기 연속골을 노린다. 이들은 13일 훈련에서 좌우 센터링을 깨끗한 골로 연결하며 미국전에서 보여준 답답한 골 결정력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지난 98년 6월20일 프랑스 마르세유 벨로드롬 스타디움에서 5만5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에 0-5로 참패해 16강의 꿈을 접은 지 꼭 4년.한국축구는 이제 당당히 16강으로 날아오르겠다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인천 류길상기자 ukelvin@
  • [김삼웅 칼럼] 새벽 산사(山寺)의 헹굼질

    백팔번뇌 무량겁의 법고(法鼓)소리에 새봄 신새벽이 열린다.어슴새벽,먼 동쪽 하늘은 때깔 선연한 여명이지만 지상은 여전히 미명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엄자산에 있는 고목나무 밑으로 졌던해가 다음날 동방의 신목인 부상(扶桑)나무밑에서 다시 돋는다고 믿었다는데 동쪽하늘 어드메에 해돋는 부상나무는있는 것일까. 산사(山寺) 주변의 새벽은 범종소리 말고는 너무 조용하다.심연 같은 고요가 깔린 적막의 미명에 까닭 모르는 싸한비애가 가슴을 메이고 원인 모를 설움 같은 것이 곱곱이 서린다.흔곤하게 자고 명정하게 깨이고자 하는 바람이 잘못이었나보다.아침 안개와 새벽 이내가 피어 오르는 곳에서 마음대로 노닐고 마음대로 머흐고자 한 것이 사치였나보다. 석간수 한 바가지 받아서 입안 가득 헹굼질하고픈 충동을느낀다.살아온 세월의 마디마디에 괸 갈증 때문일까,영혼가득한 목마름 같기도 하다. 깨어있는 각자(覺者)라면 이 시각 삼세(三世)를 관동하고시방(十方)을 꿰뚫는 탈속의 마음을 가질 법도 하건만 속진에 찌들어 각자의 그림자도 밟지못한 중생에게야 언감생심가능이나 할까. 문득 떠오른 선시(禪詩) 한 구절 “대나무 그림자 돌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달이 연못 바닥까지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구나. 竹影拂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그렇다.성긴 대 그림자로 돌계단의 먼지를 쓴다고,부연 달빛 연못 바닥을 꿰뚫는다고 먼지가 쓸리고 연못에 흔적이남을까. 외가닥 범종소리에 찌든 속세의 먼지를 털고 “산심 수심객수심(山深 愁心 客愁深)”의 심경이고자 함은 아직 이욕(利欲)의 때를 벗기지 못한 망념 탓이리라. 등불을 켜면 어둠 사라지듯이 신심을 돋우면 번뇌 사라지는가.신심을 가졌는데도 번뇌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깨우침의 등불,그 빛이 모자라기 때문일 터이다. U 샤퍼는 이런 시를 썼다. “사람은 누구나 찾고 또 기다린다 그러나 지니고 있는 그 무엇으로도 욕망을 채우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정신적으로 인간은 모두 가난한 것. 무엇으로도채울 수 없는 욕망,모자라고 빌(虛) 수밖에 없는 중생,예수의 사랑으로도 부처의 자비로도 재벌의 재물로도채우기 어려운 욕망의 빈 그릇,“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는 태허(太虛)라는 그릇의 본체(本體)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욕의 물결 이는 세파에 떼밀려 살다보면 세포의 가닥가닥 올올이에 허망과 탐욕이 배이고,가슴 깊이에는 지울 수없는 회한의 각인(刻印)이 자리잡게 된다. 다시 범종의 은은한 깨우침의 소리는 먼 산심(山心)의 메아리로 여울지고 솔바람 이우는 새벽 산사는 고요하기만 하다. 멍울진 영혼은 미명 그대로인데 새봄의 이른 새벽녘 엷은이내가 차츰 투명하게 밀려온다.1초 동안에 29.67㎞의 빠른속도로 나선형을 그리면서 태양을 도는 지구의 자전이 멈추지 않는 한 윤회는 영겁으로 이어지리라. 연년세세 새날과헌날도 교차하리라. 상(商)나라 임금 성탕(成湯)은 날마다 사용하는 세수대야에다 ‘순일신(荀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참으로 날로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함으로써 또한날로 새로워질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스스로 하루하루마음을 청신하게 하고 사악한 심성을 물리치는 마음을 닦았다고 하던가. 나누면서 사는 삶,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생활,탐욕을 멀리하는 자리에 헌신과 진실을 채우면 모두 여유를 누릴 것이란 새벽 산사의 원음(原音)이 무척 투명하다.日日是好日-그날 그날이 좋은날 되소서. [김삼웅 주필 kimsu@
  • 임오년 각 종교계 신년사

    임오년을 앞두고 불교계 여러 종단 및 원불교계가 신년사를 발표했다.종단 대표들의 새해 다짐과 기원을 미리 들어본다. ■불교 천태종 도용 종정.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앉아서 온갖 차별을 옛길위에 끊으니/만고의 푸른 하늘 허공의 달을 돌말이 오히려 껄껄 웃는 다네/예기지 못한 검은 말이 선두를 달리듯이,어려움 속에 한 조각 광명이 비치는구나. 화합이 있는 곳에 불 보살님의 가피가 드리워질지니,이는 가정마다 계시는 관세음보살을 보는 이의 것이니라. 언제나 지난 것보다 지금 스치는 것을 놓치지 말며,나를돌려 너를 향할 때 진정 새해는 다가오리라. ■진각종 혜일 총인. 대일여래(大日如來) 법신광(法身光)이 온 누리에서 발하니/뜰 앞에 나뭇잎 햇살이 따사롭도다/뭇 중생 자성불(自性佛)이 저마다 드러나니/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임오년 새해를 맞이하여 모든 중생들은 각자의 맡은 바에서 심인(心印)을 밝혀 자주성(自主性)을 확립해 나가야 하겠습니다.새해 새날에 모든 중생은 참회로써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심인 본래의 자리로돌아갑시다. 각자는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지역,국가,종교가 진정으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성찰하고,자신이 속해 있는 주의주장에 매여서 타인이 속해 있는 단체,지역,국가,종교를 도외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자신과 타인이 심인 본래의자리에서 결코 둘이 아님을 깨쳐야 할 것입니다. ■원불교 좌산 종법사. 새해를 맞이하여 전 교도와,국민,인류의 앞길에 큰 서광이 깃들기를 간절히 심축합니다.천하의 모든 강자들은 강을남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요,강의 입장만 생각하여 부지중에라도 약자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강을 독점하려는 처신도 있어서는결코 안될 일입니다.강약 모두가 참다운 진화의 길로 나섬으로써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되고 내외 문명이 크게 개벽되는 한해가 되도록 다함께 노력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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