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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상의 의미/오동춘 시인·외솔회 사무국장(굄돌)

    어느해 저녁 때 한글학회 강당에서 국어연구발표회가 끝난 뒤 몇몇 교수들과 근처 다방에서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내 곁에는 한국말을 잘 하는 독일 베를린대학 교수가 앉았다.그는 북한 김일성대학에서도 강의를 해 봤기에 한국말을 잘 한다면서 한국에 와 북한방송을 들어 보니 그 말이 꼭 따발총을 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남쪽 한국말은 여유가 있어 좋다고 말하던 그에게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레닌의 동상도 소련에서 무너지고 고르바초프에 의해 종주국의 공산주의가 몰락되고 있으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아예 비교할 바가 안되지 않느냐고 물었다.그랬더니 그 교수는 민주주의의 승리를 긍정하면서 자기가 사는 독일 격언에 「동상은 허만 남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천년만년 갈 것같이 죽지도 않은 산 인간의 동상을 우뚝 우뚝 세워 두지만 그 동상은 오래 가지 못하고 터만 남기고 무너진다는 것이 독일 격언의 의미인 것이다.동상의 거짓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권력의 상징처럼 남산 위에 우뚝 섰던 이승만 동상은 그가죽기전에 4·19때 무너졌다.그리고 그 자리에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빈 마음의 큰 애국자 김구 선생의 동상이 나라사랑의 상징으로 너그럽고 인자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다.대한민국 정부로부터 6·25 전범의 낙인을 받은 김일성 역시 그가 살아있을 때 자신의 동상을 하늘을 찌를듯 높이 평양에 세워 놓았다.그리고 이번에 갑자기 김일성이 죽게되자 그 김일성 광장의 동상 앞에 불쌍한 김일성교 교도들이 통곡의 바다를 이뤘다.북한 동포는 아무 자유가 없는 김일성 어버이 수상을 하나님처럼 믿고 살아 온 절망의 동포들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죽은 뒤에 평가되는 것이다.죽기도 전에 세운 동상은 교만의 최대 상징이요 그가 가진 권력에 아첨하는 교언영색의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다.김일성 동상도 터만 남는 심판이 멀지 않을 것이다.
  • 대경총련­북 팩스 교신 적발/경찰/베를린 통해

    ◎“통일축전 투쟁구호 보내달라”/지난21일 작성… 김 주석사망도 애도 【대구=김동진기자】 대경총련(대구 경북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오는 5∼6일 이틀동안 대구 아메리컨센터등에서 이른바 「통일축전」을 열기로 하고 「공동투쟁구호」를 제시해 줄것을 북한측에 요청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또 경북대학교가 함경남도의 새날대학교와 지난해부터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실도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됐다가 1일 경북 경산경찰서에 붙잡힌 대경총련 조통위원장 이건호군(23·경산대 총학생회장)으로부터 압수된 16절지 3장분량의 팩시밀리 인쇄물에서 확인됐다. 지난달 21일 작성돼 베를린의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에 전송된 이 인쇄물은 범청학련 남측본부산하 대구 경북지역대학 총학생회연합이 발신자로,범청학련 북측본부 함경남도 학생위원회가 수신자로 돼있다. 이 인쇄물의 전문에는 「김일성주석님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보냅니다」로 시작,「대경총련­함경남도 학생위원회의 통일축전을 제안합니다」로 적혀있다. 대경총련은 지금을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가야 하는 시기로 규정하고 유일한 통일방안인 연방제의 대중적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을 투쟁의 주된 내용으로 하고 학생들이 주체가 돼 활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다.특히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대경총련­함경남도 학생위 통일축전」사업을 주요 지침으로 설정,공동투쟁을 제안했다. 이와함께 지난해 경북대학교와 편지교류를 했던 새날대학교의 깃발도안과 새날대학교를 상징할 수있는 주요건물 혹은 상징물의 도안을 꼭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 평화 가꾸기와 혼란 만들기/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오늘의 눈)

    우리가 20세기 속에서 만난 수난의 역사 하나가 6·25다.민족이 엄청난 피를 흘린 동족상잔의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큰 비극으로도 기록된다.이제 그 전쟁이 일어난지 어언 마흔세해를 맞고 있다. 올 6·25전야는 1950년 그해 무섭고 지루했던 여름을 퍼뜩 떠올릴 만큼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전쟁이 과연 일어날 것인가.모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상황은 그렇지 못했다.북의 핵보유 여론에 시달려야했다. 실제 회담장에서 「서울 불바다」를 공언하고 나선 북의 위협으로 올 여름은 공포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계의 언론들은 전쟁을 이야기하면 의레히 한반도를 지목했다.전쟁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이다.그때마다 엿가락 처럼 휘어 녹이 쓴 레일과 주저앉다 못해 나동그라진 탄흔투성이 기관차 사진을 실었다.풀섶에 버려진 구멍난 철모와 함께‥.그 을씨년스러운 전장의 풍경은 철마가 원산을 향해 달리던 옛 경원선 철길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 전쟁의 잔해가 흩어진 지역은 민간인 통제선 북방에 해당하는 이른바 민통선 안쪽이다.6·25 이전은 북한땅이었다.전쟁의 참화를 교훈으로 남기기라도 하듯 뼈대만 앙상한 옛 북한노동당 철원군당사 건물도 바로 이웃에 있다.공동화한 유령의 집으로도 보이는 노동당사 건물 역시 전쟁을 고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폐허지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서 23일밤 KBS가 주최한 음악회가 열렸다.그것도 6·25전야에 휴전선 가까운 격전지에다 마련한 「평화의 콘서트」다.이날 5천이 넘는 관객들은 흐느끼듯 감격했다고 전한다.화면에 들어온 콘서트장은 조명을 받아 가까이 다가선 옛 노동당사와 기묘하게 대비되었다.그리고 화음의 선율이 평화를 싣고 장마비를 재촉하는 여름밤 북녘 하늘로 날아갔다. 화음으로 평화를 노래하던 날,휴전선이 먼 남쪽에서는 국가 기간동맥 철도가 마비되었다.「평화의 콘서트」가 막을 내린 무렵에는 지하철파업을 선언했다.그래서 6·25전야 하룻동안 평화를 가꾸는 모습에서 혼란을 만드는 일에 이르는 두가지 현상을 보았다.극명하게 명암이 교차된 하루였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달리고 싶어하는 철마에 올라야한다.민통선 안에서 숨을 멈춘 기관차를 보라.거기에는 정지된 역사가 있을 뿐이다.민주주의에서 역사발전은 시민사회와 묵시적으로 체결한 것과 다름없는 불문율적 개개인의 의무선행설약 이행을 의미한다.이는 평화를 만드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 바그다드·암만/“신의 도시” 바빌론(아랍서 지중해까지:5)

    ◎시간도 멈춰선 「2천5백년전 왕국」/거대한고 장엄한 이슈타르게이트… 네자르왕의 위엄 보는듯 고고학자들은 로맨티스트들이다.바빌론 궁전의 유명한 「행진의 거리」복판에 섰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그들은 역사의 미궁속으로 끊임없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마치 현대의 어린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여행을 꿈꾸듯이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0㎞,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동안 나도 그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신의 도시,고대 인류가 만든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같은 수식어로 바빌론은 역사의 문외한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그 이름이 주는 매력과 신비감 때문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증발의 유혹」에 빠졌는지 모른다.영화 「타임머신」에서 인간은 첨단기계를 이용해서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최근 대전엑스포에서 시승해 본 「미래의 서울로 가는 자동차」는 이보다 한층 단순하고 솔직했다.이것은 고속으로 전개되는 대형 멀티비전 화면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나 바빌론에서 시간여행을 하는데는 그런 구차스런 문명의 이기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뿐 아니라 이 공간에서는 시간도 잠을 자고있다. ○외성은 흔적 없어 먼저 우리앞을 막아선 것은 청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이슈타르 게이트였다.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란 뜻이다.이 문은 본래 바빌론내성의 출입문인데 외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 바빌론 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우리 눈에 거대하게 보이는 이 문도 복제품으로 원형의 절반 규모밖에 안된다고 한다.이슈타르 게이트의 전면에는 이상한 동물의 모양이 무늬처럼 일정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말과 개의 중간쯤이라고 할까.이것은 상상의 동물로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이었다.상상의 동물은 궁안의 여러군데 벽에서도 발견되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오른쪽에 뜻밖에 소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이 건물은 바빌론박물관으로 1899년 이도시가 처음 발굴될때 발견된 여러가지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박물관을 지나약간 오르막진 언덕으로 올라가자 눈앞에 행진의 거리와 왕궁의 웅장한 성벽들이 나타났다.행진의 거리는 철책으로 가장자리를 둘러쌌는데 그 길이가 수백m는 될것 같았다.성벽들은 행진의 거리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거리의 바닥에는 단단한 흙벽돌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행진의 거리는 「적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곳」이란 뜻이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축제가 열렸었다.그러나 네부카드 네자르가 죽고(BC605∼562)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승리의 거리에 페르시아의 정복자들이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행진했다는 사실(BC539)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500년전의 길바닥 위로 뜨거운 햇볕이 작렬하고 있었다.성벽으로 에워싸인 행진의 거리는 정적이 가득했다.문득 이 공간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렇다면 저 성벽들 사이로 걸어들어가서 네부카드 네자르의 병사들과 신하들을 당장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거리 복판에 서서 나는 잠시 이런 공상에 빠져들었다.그러나 이 공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성벽을 쌓은 벽돌들마다 네부카드 네자르 대신 사담 후세인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벽돌엔 후세인 이름 사실 이 거대한 왕궁은 후세인의 지시에 의해 최근 복원된 하나의 무대세트에 불과한 것이다.후세인은 2500년전 이 도시를 수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네부카드 네자르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달러를 들여 바빌론을 복원시켰고 왕궁의 성벽을 쌓은 벽돌에는 네부카드 네자르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후세인은 자기 이름이 다시 2500년 뒤에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으로 회자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9월에 열리는 바빌론축제도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사담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이 축제가 열리는 주무대인 그리스 극장은 바빌론성에서 수백m 떨어진 한적한 들가운데 외롭게 버려져 있었다.일종의 야외극장인 이 무대가 그리스극장이란 이름을 갖게된 것은 BC300년경 바빌론에 수도를 정하고 이곳을 통치했던 그리스의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얼핏 봐서 무척 현대적으로 설계된 이 야외무대를 건립하는데 사용된 벽돌이 모두 바벨탑의 잔해에서 거둬들인 것들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궁전의 성벽을 조금 벗어나 옆뜰로 나서면 넓은 공터의 복판에 커다란 사자상이 버티고 있다.높이 2m,폭2·5m의 이 용맹한 사자상은 그러나 지금은 보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 무척 쓸쓸하게 보였다.이 사자상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도 있고 적들을 제압하는 상징물이란 얘기도 있으나 어느쪽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다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자밑에는 사람이 누워있고 사자는 앞발로 인간을 찍어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침략자를 제압한다는 왕궁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그 유명한 바벨탑의 유적은 바빌론성에서 거의 1㎞쯤 떨어진 외딴 언덕위에 있다.바벨탑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전설이 있을 뿐이다.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랬다.그러나 바벨탑은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이 구약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의심하기 좋아하는 이방인을 잠시나마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밋밋하고 먼 언덕길을 올라갔다. 거대한 분화구가 나타났다.미사일이나 큰 폭탄이 떨어져 거대한 웅덩이를 만든 것 같았다.벽돌조각이나 건축물의 다른 잔해조차 흔적이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역사를 벌였다는 느낌은 쉽게 받았다.웅덩이의 넓이나 깊이로 미뤄볼 때 그 규모가 엄청났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바벨이란 말에는 「하느님의 문」이란 뜻과 「혼돈」이란 뜻이 함께 있다.거대한 웅덩이 잔해를 봤을때 한마디로 혼돈이란 말이 생각났다. 백성들은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열정,하느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열망으로 이 제단을 쌓아올라갔다.그러나 여호와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자기네끼리만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탑의 건축을 중지시켰다.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관해 대강 이런 얘기가 나와있다.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을 왜 배신으로 오해했을까?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뜻을 신에게 올바로 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든 것인가? ○탑문화 크게 발달 이라크 남부에는 구약의 표적물이 유난히 많다.바벨탑을 위시해서 아브라함의 고향이라는 「우르」,쿠르나의 에덴동산 등이 그것이다.「노아의 방주」는 바빌론에 끌려온 유태인들이 수메르인들의 홍수얘기를 전해듣고 훗날 돌아가서 신화로 꾸며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분명한 것은 유프라테스 평원에는 탑이 많다는 사실이다.유프라테스 뿐아니라 나일강 유역도 마찬가지다.평원에는 산악지대와 달리 하늘로 높이 솟은 탑문화가 유독 발달되어 있다.사람들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탑에 의지해 자기의 권력의지와 신에 대한 갈망까지 모두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바벨탑의 잔해는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의 허망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바빌론성 외곽을 멀리 벗어난 곳에 인류최초의 성문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의 석상이 있었다.법전을 새겨놓았다는 높이 2.5m크기의 돌기둥도 있었는데 이것은 모형이었다.원형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빌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도 자연 보잘것이 없었다.귀중한 유산들이 열강의 손으로 넘어가버린 탓이다.박물관 진열대에는 고작해야 문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작은 토기 몇점만 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눈길을 끈것은 1899년 독일인 콜데베이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기 직전의 바빌론성의 전경과 발굴이 진행되는 현장의 사진들이었다.발굴직전의 바빌론 성은 짙은 안개에 싸인 고성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신비로 가득했다.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그런가하면 발굴현장 사진은 시장바닥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아,귀중한 유물을 훔쳐가기 위해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이 신비의 고도는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되었던가,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서울의 고궁 산책/허균 지음(화제의 책)

    ◎궁궐의 연혁·건축장식·문양의미 밝혀 서울의 대표적 궁궐인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의 연혁,그리고 그 궁궐안 곳곳에 있는 건축장식·조각상·문양등의 의미와 상징성을 밝혔다. 예컨대 광화문 앞 해태(해치)상을 비롯한 경복궁의 모든 돌 조각상들이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궁궐을 이상세계로 만들려는 염원이 담겨진 상징물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의 하나인 고궁을 유원지나 공원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삶과 사고를 이해하는 배움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 사진작가 유남해씨가 찍은 사진들을 풍부하게 실어 이해를 도왔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지은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선임편수원으로 있으며 전통문화연구단체인 우리문화연구원 원장이기도 하다. 효림 5천원.
  • 바그다드·암만/하트라의 축제(아랍서 지중해까지:2)

    ◎「저항의 역사」 신전을 무대로 재현/로마군 물리친 베드윈족 그려… 제사땐 양을 제물로 우리가 모술의 호텔 현관으로 들어설 때 아가씨 몇명이 나와서 일행들의 가슴에 빨간 장미 한송이씩을 달아주었다.가이드로 나온 사람,호텔 종사원들이 달려나와 박수까지 쳐줬다.우리를 환영한다는 뜻인데 이 장면은 약간 어색했다.환영하는 그들도,꽃을 받은 우리도 우리가 완전한 동지라는 확신은 아직 갖지 못했던 것이다.몇사람의 아랍계 사람을 제외하면 일행은 대부분 미국과 그 추종세력(?)인 서방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모술시로 두시간 내겐 그 꽃선물이 「동지가 되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기 보다 지루한 기차여행을 견디고 모술까지 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받아들여졌다.바그다드 정거장에서 모술역까지는 꼬박 9시간이 걸렸다.호텔 만수르의 어떤 가이드는 간밤에 모술까지 서너시간이면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서너시간이 9시간으로 늘어난 것이다.이곳 사람들의 시간개념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은 여러곳에서 확인되었다. 바그다드 정거장은 우선 그 구역이 매우 넓고 복잡한 선로와 플랫폼이 질서정연하게 분리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었다.시설은 아주 낡았지만 최초의 설계가 매우 치밀했음을 알 수 있었다.이 정거장이야말로 독일제국이 3B 정책의 상징으로 건설한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점이 아닌가.비잔티움·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이 노선에서 모술도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다.우리는 독일제국이 식민쟁탈의 수단으로 건설해 놓은 이 고색 창연한 철도를 이용해 모술로 가는 것이다. 넓고 긴 플랫품에는 북쪽에서 귀환하는 많은 군인들과 고향으로 가는 많은 민간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특히 군복을 느슨하게 입은 젊은 군인들이 아주 많았다.해가 진뒤 스산한 저녁나절에 군인들과 검은 차드르 혹은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부녀들이 한데 뒤섞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피난길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객차 좌석에 앉아있는 부녀자들은 거의 표정이 없었다.군인들도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그들은 골격이 크고 윤곽이 분명해서 희노애락을 드러내기가 한층 쉬울텐데 마치님루드궁전 입구의 돌조각처럼 시종 무표정이다.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자궁핍과 낙후된 생활환경에 잔뜩 불만을 품고 있을까? 혹은 유구한 역사가 현재와 혼재되어 그 역사의 숨결을 하루하루 생생하게 느끼며 살고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일까? 그야 어떻든 그들이 우리 이방인의 시각에서 보면 놀라울만큼 순수하고 순진하다는 것은 분명했다.그점은 그들의 투명하고 매혹적인 눈빛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바그다드∼모술간 철도주변은 대부분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해당되는 곳이다.밤에는 못봤지만 새벽이 되자 차창 밖으로 크게 자란 옥수수밭과 밀밭,감자밭들이 이어지고 있었다.그러나 농지관리는 산만했고 구획이 정해진 농지보다 버려진 초지가 많은걸 볼 때 경작방법은 아직 원시상태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들에는 천막 가득 모술에는 아시리아제국의 수도였던 니네베성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이 도시 자체가 유적이었다.인구 백만을 헤아리는 북부 최대도시로 알려졌지만 현대도시란 느낌보다 역사의 시간속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고대도시란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우리가 묵은 모술호텔은 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다.호텔에 도착해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모술 유적관람을 뒤로 미루고 축제가 열리는 하트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모술에서 하트라까지 버스로 다시 두시간 반이 소요되었다.가는 길목에서 이따금 언덕위에 설치된 포대와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이 포대는 아마 터키 국경부근에 출몰하는 무장 쿠르드족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양떼나 놀고 있어야 할 한가로운 언덕위에 견고하게 구축된 포대와 병사들,이것은 오늘날 이라크가 처해 있는 복잡한 내외환경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상징물로 보였다. 대상도시 하트라는 AD 1세기쯤 아라비아 반도에서 흘러온 베드윈족들이 건설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유명한 하트라 성도 베드윈의 캐러밴들(대상)이 세운 신전이며 하트라 부근에는 베드윈의 분위기,그 흔적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 검은색 아라비아 의상을 걸치고 쿠트라란 이름의터번을 쓴,말을 탄 용감한 병사들이 많이 등장한다.골격이 뚜렷한 얼굴,멋진 수염,날카로운 눈빛이 이 용맹한 무사들의 공통된 특징이다.하트라에는 이런 복장,용모를 지닌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길가에 천막을 설치해 놓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앉아 있었다.수염을 멋지게 기른 베드윈의 촌장쯤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수십명 천막아래 나란히 앉아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천막안에도 사담 후세인의 초상화는 한가운데 걸려있었다.한쪽에서는 산채로 양의 목을 베어 큰그릇에 그 피를 쏟아붓고 있다.사람들이 양의 피를 마시려고 주위로 몰려들었다. 축제때면 알라신에게 살아있는 양의 피를 바친다는 베드윈의 관습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다.멀리서 온 극동의 손님에게도 친절하게도 한 양푼의 양의 피를 권한다.우리가 질겁하고 뒤로 물러서자,촌장들은 점잖고 인정스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이런 천막들 숫자가 하트라성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늘어났다.들에는 흰 천막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축제의 본무대인 신전은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이다.헬레니즘의영향을 받은 코린트식과 이오니아식의 화려한 원기둥들이 즐비하며 벽면의 조각품에도 그리스나 페르시아의 양식이 도입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얼핏 보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많이 닮은 꼴이었다.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인 메두사의 머리가 전면 벽에 크게 부조된 것도 좋은 증거물이었다.무대로 사용되는 신전의 회랑에는 아무런 장식물도 설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무대가 너무 썰렁하고 보잘것이 없었다.그러나 개막프로인 「사막의 힘」(춤과 노래가 혼합된 무용음악극)이 펼쳐지면서 붉고 푸른색 조명이 비쳐지자,지금까지 그늘진 폐허로만 보였던 그 무대가 갑자기 역사의 현장을 되살린 것 같은 지극히 환상적인 무대로 돌변했다.투구와 갑옷을 입고 방패와 창을 든 고대 로마군의 진격과 거기에 맞서는 베드윈 용사들의 항전­이것은 AD 2∼3세기 로마군이 하트라 성채를 공략했으나 주민의 저항으로 퇴각했던 실제 역사를 재현한것­이같은 극의 전개와 무대배경이 된 하트라 신전의 전면 회랑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음의 합창 장엄 이 무대는 역사물을 다룬 어떤 오페라 무대보다 더 장엄하고 더 환상적이며 더 실제적이었다.유적현장을 장식없이 그대로 무대로 사용한 착상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그러나 주최측이 심혈을 기울인 「사막의 힘」은 구성과 춤동작에서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었다.볼쇼이의 명품 「스팔타카스」처럼 춤동작이 좀 더 다양하게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면 그 환상적인 무대는 좀 더 빛이 났을 것이다.대형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진 아랍인의 합창­이것은 하트라에서 내가 가장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다.정치적 의미를 배제하고 단순히 소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아름답고 장엄한 합창이었다.저녁 어스름에 뒤덮인 하트라의 평원을 찌렁찌렁 울려줬던 아랍 남성들의 저음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어떤 비원을 담고 있는 듯한 그 노래가락은 군중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이 합창을 듣고 나는 하트라의 축제가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있음을 확인했다.왜냐하면 거기 모인 군중들­대부분이 차를 가졌거나 차에 편승이 가능한 중류층 이상이며 이들은 지배이데올로기 편에 서있을 가능성이 많지만­의 표정이 노래가 들리는 순간 하나같이 엄숙해졌기 때문이다.그들은 그 순간에 침략자를 상기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민족이 더욱 뭉쳐야 한다고 다짐한건 아닐까. 하트라 축제의 포스러를 보면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 카드 네자르 2세(BC 605∼562년)와 나란히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 나와있다.네부 카드 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재건자이며 특히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태인을 끌어다가 노예로 부린 장본인이다.이 포스터가 말하는 것은 후세인이 바로 그의 계승자란 사실이다.후세인은 아득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빌려 그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그는 역사의 복원을 외치며 국민에게도 역사와의 동거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다.
  • 중국에 유행어 바람 분다

    ◎인판자/야성 유괴해 장가 못간 남자에 파는 것/육해/마약·포르노·인신매매등 6가지 해악/노삼건/세가지 전자제품… 유복한 생활을 상징/양삽대/해외취업… 부자가 되는 지름길로 인기 격변기를 살아가는 중국 국민들의 유행어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개방 및 개혁 정책이 가져다 준 중국의 급속한 사회 변혁은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었다.새로운 상황을 과거에 없던 말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일본 이코노미스트지에 실린 중국의 최신 유행어를 소개한다. ▲인사=급증하는 밀항자를 빗댄 말이다.밀항 배삯은 미국이 2만8천달러,일본이 2만달러 정도이다. ▲인판자=여성이나 어린이들을 유괴해 농촌의 장가 못간 남자나 일손이 없는 노인에게 팔아치우는 행위.지난 해만도 10만명이 유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육해=중국 사회에 만연된 마약,매춘,포르노,인신매매,미신,도박 등 여섯 가지 해악. ▲공조=노동쟁위를 말함.실업과 해고 등으로 파업이 늘면서 생겼다. ▲대관=큰 부자.개혁 초기엔 연수입이 1만원이었으나 지금은 1백만원 이상을 지칭한다. ▲민공조=내륙의 농민이 돈을 벌기 위해 상해 등 연해 도시로 몰려드는 것을 말한다.추정 유동인구는 2천만∼5천만명으로 맹류라고도 불린다. ▲노삼건=유복한 생활을 상징하는 세가지 전자제품.처음에는 컬러 TV,냉장고,세탁기를 의미했으나 지금은 비디오,에어컨,전자렌지(혹은 오디오)로 바뀌고 있다. ▲하해=학자나 학생,작가 등 지식인들이 경제 관련 직업인으로 전직하는 현상. ▲병가주=병가를 얻어 부업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아예 결근을 하고 부업에 매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이들은 불상반주이라 부른다.이들 때문에 출근율이 70% 이하인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삼각채=기업이 부채가 쌓여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환정지 현상. ▲양삽대=해외 취업.국내에서의 돈벌이에 비해 단시일에 수십배의 수입을 올린다.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삼철=국영 기업의 철밥통같은 제몫 지키기,경직된 임금 구조 등을 말한다. ▲내퇴=정년전 조기 퇴직.남자는 50세,여자는 45세 이전에 퇴직시키는 기업이 늘고 있다. ▲대가대=휴대용 전화기.부자의 상징물로,상담이든 데이트든 이것만 있으면 순조롭다.
  • 사과의 도시 히로사키(일본농업 탐방:20)

    ◎보도블록·우체통에도 사과홍보물/현­협회­농가 “삼위일체” 한해 매출 1천억엔/신품종 매년 개발… 고부가 가공상품도 수십여종 삿포로에서 기차로 약4시간동안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오모리(청삼)현이 나온다.이 현에 가까웠음을 알리는 건 사과상징물들이다.사과탑에서부터 각종 과일주스 선전을 위한 입간판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온다.사과모양을 한 우체통도 시선을 끌었다. 히로사키(홍전)시에 들어가기도전에 머릿속엔 이미「사과도시」라는 인상이 각인돼 버렸다.역에서 내려 출구로 빠져나가는 동안 플랫폼과 역사 바닥,벽에는 먹음직스럽게 그려놓은 사과그림들로 가득했다.보도블록도 행인들이 사과그림을 반드시 밟고 지나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역에서 나오는 통로는 역사백화점에 이어져 있었고 이 곳을 통과하는 동안 사과아가씨들의 선전물공세를 받아야만 했다.사과의 고장 히로사키 역주변의 풍경이다. ○산지별 품종 전시 처음 찾아간 곳은 아오모리현 사과협회.사과농가 9천여가구가 회비를 내 만든 민간단체이다.생각보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내부만큼은 알찼다.아오모리현중에서도 산지별로 서로 다른 사과품종이 전시돼 있었고 사과로 만든 각종 가공식품도 전시돼 있었다.협회가 만든 「사과협회보」「사과신문」도 눈에 띄었고 강당이라고 생각된 곳에서는 사과재배기술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가공공장 기업화 이 협회 기무라(목촌덕영)회장은 『최근 농산물이 개방되면서 일본농산물 대부분이 타격을 받고 있지만 사과재배농가는 아직 괜찮은 편』이라고 운을 뗐다.그는 인터뷰내내 개방으로 인한 걱정거리만 늘어놓았지만 그 바탕에는 사과재배에 대한 자신감,신념이 가득했다. 기무라회장이 생각하고 있는 올해 중점목표는 대체로 3가지였다.우선 몇몇농가단위로 자체가공공장을 넓혀 기업화·규모화시키겠다는 생각이다.특히 올해는 「생산자의 얼굴을 표시해넣은 주스생산」에 힘쓸 예정이다.자신감을 갖고 제품생산에 임하고 한번 인기를 타면 엄청난 광고효과를 볼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것이다.현재 이곳 사과농가 10%이상이 그룹단위의 가공공장에서 주스등을 생산 판매,과일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들 가정의 가공공장에서 나오는 가공품만도 수십여종에 이르고 있다.물론주스류가 대부분이지만 최근에는 사과를 이용한 스낵류생산에도 힘을 쏟고 있다.이 협회 사토(좌등죽열)전무는 『일본은 전통적으로 쌀로 만든 술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지만 사과로 만든 와인류로 쌀술에 도전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재배농가를 관광농원화하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관광안내소의 안내책자에서는 「주말을 우리사과농가에서」라는 제목으로 「사과체험코스」등을 개발,손님을 끌고 있었다.또 히로사키시에는 사과사료관이 있었고 각 단체들은 「사과꽃축제」「사과등축제」등과 같은 지역특산물과 관련된 축제들을 열고있다. ○「사과축제」 줄이어 지역특산품이 농협출하가 아닌 경매방식을 도입해 판매되고 있는 것도 아오모리현의 특징이다.특산품 대부분이 경매방식을 통해 판매되고 있는 곳은 이곳 히로사키가 유일한 곳이다. 경매회사인 주식회사 홍과물류의 기가와(목천민일)상무는 『즉석에서 현금이 들어오는 경매방식을재배농가가 선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사과출하기인 9부터 11월까지 20㎏들이 20여만상자를 판매하고 있다.상자당 평균단가를 3천5백엔정도로 잡으면 하루 판매액이 7억엔(54억여원)에 이르는 것이다. 사과를 경매시장에 내놓으려면 나무상자로 포장해야 하고 사과의 선별작업을 해야한다.따라서 선별작업을 어떻게 보다 쉽게 할 것인가가 현재 재배농가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이다.바로 이 과제는 사과협회의 올해 중점연구사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협회 총무부의 가가와(가천행남)씨의 안내로 한 재배농가를 찾았다.히로사키시에서 승용차로 약30분거리에 있는 시모유구치(하탕구)란 마을이었다.길 양쪽으로는 「사과도로」란 간판이 보였다.명칭만 붙인 것으로 알았는데 10년전 사과운송을 위해 특별히 만든 도로였다고 그는 설명해주었다.찾아간 사과재배농가의 야마우치(산내풍치·65)씨는 마침 눈밖에 보이지 않는 과수원 한 모퉁이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농번기 행정력 동원 『일손이 많이 들지 않고 맛있는 것,그러면서 가격이 좋은 것을 재배해야 합니다.일시적으로 가격이 좋은 품종에 절대 얽매이지 않습니다』야마우치씨는 사과를 후지 50%,무쓰 30%,기타품종 20%를 심고 있었다. 재배품종의 선택은 생산농가의 경험과 현시험장의 신품종개발에 따른다고 했다. 가가와씨도 『현시험장에서는 매년 새품종이 나온다』면서 『현재 일본전체사과의 50%가 후지지만 정부에서는 이 품종을 35%정도로 낮추고 대신 저장이 쉽고 착색이 잘되는 품종을 개발,보급중에 있다』고 말했다.보다 좋은 과일을 생산하기 위해 현정부­민간단체­농가가 합심하고 있는 것이다. 행정력을 동원해 과일솎아주기운동,봉지씌우기등을 도와주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 농민위해 뛰는 미야기현 농정부(일본농업탐방:17)

    ◎농업공무원 명함에 모두 특산물사진/고유상표 신품종 쌀·과일등 판촉/작년 광고비 1억8천만엔 투입/대규모 농업센터 지어 각종작물 개량실험… 세계최초 「발광백합」 개발 센다이시 아오하(청엽)구 중심부에 위치한 미야기(궁성)현청사는 외관상 우리의 도청청사보다 약간 크다는 것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농정과는 현청사10층에 있었다.총무계의 누마쿠라(소창)씨로부터 세가와(뇌천진)농정과장,사카이(주정화부)농정과기술주간,가토(가등직의)농산과기술부참사를 차례로 소개받았다.이들이 건네준 명함 속그림이 시선을 끌었다. 공무원들인 이들은 모두 명함에 현을 선전하기 위한「상징물」을 새겨두고 있었다.세가와과장 명함엔「맛의 직감 히토메보레」란 말과 함께 히토메보레를 상징하는 컬러그림이 담겨있었다.「한눈에 반해요」란 뜻의 히토메보레는 미야기현이 개발한 쌀품종이름이다. ○연구·기술직이 77% 가토부참사의 명함은 「파파(papa),맛의 본고장 미야기 사사니시키」란 문구와 함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사사니시키 역시 미야기의특산물과도 같은 쌀이름이다.세가와과장은『직원들 모두가 미야기 풍물을 선전하기 위한 명함을 여러종류 갖고있다』면서 『만나는 상대자와의 일의 성격에 맞춰 명함을 골라준다』고 설명했다. 미야기현의 총면적은 7천2백㎦로 충청북도 크기다.그런데 농정부의 조직,인력구성은 우리와 큰 차이가 있었고 탄탄했다.농정부는 모두 10과 1실,1반 49계로 조직돼 있었다.각급 시험장등 소속 지방기관 수만해도 44개기관에 달했다.전체 일손(공무원)의 수는 현전체공무원 수의 16%인 1천2백46명이었다.반면 비슷한 규모의 우리 충북도청 농정부서에는 농어촌개발국,농수산국 소속 공무원을 합해 모두 1백35명.단순비교하면 농정을 담당한 미야기공무원의 수가 10배나 많았다. 1천2백46명중 사무직이 2백83명,기술직 8백43명,연구직 1백24명,고용인 1백20명으로 연구·기술직이 전체의 77.6%를 차지하고 있었다. UR타결에 따라 현이 우선 만든 것은 지사를 직접 위원장으로 한「농업긴급대책회의」였다.상설기관인 이곳은 현과 현사이의 각종 농업정보를 분석하고 시장개방에 따른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있다.오이즈미(대천권오)기획조정반장은『바로 이곳에서 특산품인 히토메보레와 사사니시키의 브랜드화에 박차를 가하는 방안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광고힘써 쌀상표화 미야기쌀의 브랜드화와 관련,현은 지난해 1억8천만엔을 광고비용으로 책정했다.미야기특산물의 선전을 위해 신칸센열차광고,지역TV광고,도시락포장지의 광고,여성잡지광고등 선전효과가 있는 출판·인쇄물이라면 닥치는 대로 광고를 했다. 『이곳도 일본의 다른 현과 마찬가지로 농촌의 고령화등 농촌일손부족현상이 심해 여러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90년 총농가수가 10만1천가구에 달했던 미야기현은 91년 8만4천가구,92년 8만3천가구등으로 농가수가 계속 감소추세에 있고 농가인구 역시 50만8천명(90년),50만7천명(91년),43만5천명(92년)등으로 줄어들고 있다. 농가인구 감소에 대비해 현이 한 일은 농지의 임대·판매를 중계해주는 「복덕방」이었다.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계기로 규모영농을 이루어 보자는 것이다.지사가 직접 위원장으로 있는 현농업위원회에서는 농지면적을 확대하려는 농가에 대해 농지의 임대·판매를 적극 알선했다.뿐만 아니라 농림어업금융공고자금가운데 농지취득자금을 늘려주기도 했다. ○「농토복덕방」도 운영 가토기술부참사는 미야기현내 국제공항이 있다는 점을 십분이용하고 있다고 했다.신선한 농산물의 도시간·국가간 유통경로발달에 맞춰 값이 비싸면서 무게가 덜 나가는 야채·과일을 집중개발하고 있었다.쪽파·표고버섯·시금치·포도·딸기등이 대표적이었다. 미야기현의 대민농정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현청이 있는 센다이시로부터 50㎞쯤 떨어진 나토리시 「미야기농업센터」를 찾았다. 약1백㏊면적의 센터안에는 농업·원예·축산·잠업등 각급 시험장부터 전문대학과정의 농업실천대학교가 있었다.이 센터의 부소장은 농정부의 기획조정담당 기술부참사가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는 현청과의 긴밀한 업무협조를 위해서였다. 6층본관을 비롯,연수숙박시설3개동,체육관,농산물가공연구동,식물바이오관,트랙터1등 운전연습장,휴양용삼림등을 갖춘 하나의농업종합타운이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식물바이오관.이곳에서는 최근 반딧불의 발광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분리하는데 성공,자체빛을 내고 야생가능한 백합을 개발해 곧 상품화할 계획이라고 한다.고세키(소관의부)센터연수과장은『유전자를 이용한 식물개발은 양을 한꺼번에 많이 늘릴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점』이라고 말하고 『난과 같이 비싼 식물을 유전자를 이용해 개발,농가소득에 도움을 주는 것이 식물바이오부의 목적』이라고 소개했다. ○토산물로 요리대회 뿐만아니라 돌에 열을 가해 딸기를 속성재배하는 방법,식물의 한 줄기에 여러종류의 꽃을 피우게 하는 법,일반 가정용 전구를 이용해 백합을 키우는 법,마늘·감자등 야채류를 대량 증식할 수 있는 법등을 이미 개발,일부는 이웃농가에서 실용화시켰다고 고세키과장은 자랑했다. 이밖에도 현에서는 미야기현의 농산물을 이용하는「신식생활콩쿠르대회」를 지난 92년부터 개최하고 있었다.이 대회는 특산물을 이용해 세계의 각종 요리를 개발·보급하는 것이 목적으로 미야기현이 농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행사였다.
  • 서울랜드/자연농원/새봄맞이 튤립 꽃잔치

    ◎새달부터 한국방문의 해 3번째 공식행사로 열려/자연농원/150만송이로 꾸민 꽃광장 장관/서울랜드/튤립 소풍축제… 왕자·공주 선발도 겨우내 조용히 침묵했던 놀이터의 야외분수가 힘차게 물을 뿜어 올리기 시작했고 나무줄기에서는 한결 윤기가 느껴진다. 봄이 어디쯤 오고 있을까.봄을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자고나면 주말쯤엔 겨우내 갇혀 지냈던 가족들과 함께 봄마중 삼아 나들이를 떠날 계획을 하는 이들이 많다. 봄맞이를 위해 서울랜드·용인자연농원등 서울 근교의 놀이공원들은 한국방문의 해 세번째 공식행사이기도 한 튤립꽃 축제등 봄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4월초 개통되는 인덕원∼사당구간의 지하철 과천선이 대공원과 서울랜드를 지남에 따라 이제 지하철을 타고 놀러갈수 있게된 서울랜드나 서울대공원등에서는 「제2의 개장」을 선언하고 급증할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이벤트와 공연등 특별행사를 선보일 계획이다. ■서울랜드=다음달 1일부터 5월8일까지 봄꽃축제인 「튤립파티」가 화려하게 펼쳐진다.세계의 광장에는 튤립 10만그루와각종 봄꽃들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수놓아져 화사하고 생동감 넘치는 봄내음을 물씬 풍기게 된다. 「튤립파티」에는 지하철개통을 기념,한국 최초의 기차형 퍼레이드카인 「코끼리열차」를 특수제작,한국방문의 해 마스코트인 아롱이·다롱이·고적대·무용단·동물캐릭터들이 어우러져 율동과 음악을 선사하는 퍼레이드가 계속된다. 매일 초·중·고교 단체소풍객들의 장기자랑및 디스코경연대회·1분발언대등 학생과 선생님이 꾸미는 「튤립 소풍축제」가 열리며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국교 2∼4학년생을 대상으로 「튤립왕자·공주선발대회」도 갖는다. 또 루마니아의 「집시킹」그룹이 전통 집시들의 열정적인 춤과 경쾌한 리듬의 음악을 선보이며 뮤지컬 「벌거벗은 임금님」과 맥주·치즈·커피·핫도그축제도 벌어진다. 한편 다음달부터는 토·일·공휴일,5월부터는 매일 현재보다 3시간늘려 하오9시까지 야간 개장된다. ■용인자연농원=「튤립축제」가 4월1일부터 5월8일까지 이어진다. 한국방문의 해 공식행사임을 알리는 조형물과 화려한 꽃탑,상징물을설치,축제분위기를 북돋운다. 6천여평의 자연농원 튤립원에는 1백20여종의 각양각색 튤립 1백50만그루가 화려하게 꽃광장을 꾸며 튤립의 나라인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풍물인 대형풍차등과 어울려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게 된다. 이 기간중 축하퍼레이드와 판타지 뮤지컬쇼·화란 민속춤·사진콘테스트·꽃조각경연대회등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특히 외국관광객을 위해 민속놀이 한마당,외국인 농악경연대회,댄스및 맥주페스티벌등의 흥겨운 놀이마당이 벌어진다. 또한 「세계 특산·토산품전」이 열려 40여개국 1백여종의 세공유리·액세서리·향수·수직용품등이 출품, 판매되며 「윈드밀」식당에서는 「화란음식 페스티벌」을 열어 독특한 음식을 맛볼 수있다. ■롯데월드=겨울동안 호수결빙으로 운행되지 않았던 「호수유람선」과 「백조보트」가 18일부터 운행에 들어가며 석촌호수의 명물인 음악분수도 이달말부터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음악에 맞춰 다양한 모양의 물줄기를 뿜어 약동하는 봄을 연출한다. 봄소풍철을 맞아 오는 21일부터 「새싹들의 큰 잔치」가 유치원등 단체로 입장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펼쳐지며 26일부터 밴드·연기자·캐릭터등 1백명이 출연,「봄소풍 퍼레이드」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 다리:하/79년완공 성수대교부터 조형미 고려(서울6백년만상:12)

    ◎교각사이 넓히고 상판치장… 미감 살려/첫 현상공모 올림픽대교 한강명물로 큰비가 올때마다 물에 잠기는 잠수교는 월남 패망직후인 지난 75년 4월30일 개통됐다. 잠수교는 당시의 냉전 정세를 감안한듯 하천의 기본원리가 무시된채 폭파당해도 빨리 복구할수 있도록 낮고 짧게 놓는데 중점이 두어졌다.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이 24시간 작업을 독려하는 바람에 불과 10개월만에 완성됐다.구 전시장은 개통 이듬해인 76년 여름 대홍수가 나자 너무 낮게 건설한 잠수교가 혹시나 떠내려가지 않을까하는 걱정때문에 전간부들을 이끌고 다리를 지켜보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잠수교위에는 82년 반포대교가 놓여져 우리나라 최초의 2층다리가 됐다. 중동건설붐과 해외견문기회가 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골든 게이트 브리지)나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같은 시의 상징물이 될 다리도 놓아야한다는 소리가 설득력을 지니게 되면서 다리의 미학에도 무게가 실렸다.교각사이의 거리인 경간이 1백20m인 「롱다리」성수대교가 푸른색으로 치장한 것이 단적인 예다.기껏해야 30∼40m에 불과했던 경간이 성산대교 1백20m,원효대교 1백m,동작대교 80m등으로 「롱다리」시대가 온 것이다.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려는 서울시 토목기술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구 전시장은 안보목적만 강조,잠수교에 이어 성수대교마저 2층다리로 만들 속셈이었음이 10·26이후 박정희 전대통령 재가서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밝혀졌다.구 전시장의 악수는 성산대교에까지 이어져 구조공학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는 허리굽은 새우모양의 철판을 멋내기로 상판에 갖다 붙였다.성산대교는 다리에 관심이 컸던 최규하 전총리가 허름한 점퍼차림으로 일요일에 건설현장에 들렀다 경비원에게 쫓겨난 웃지못할 일화도 간직하고 있다. 강남개발이 이뤄지자 민자로 다리를 놓겠다는 기업도 생겨나 동아건설이 원효대교를 건설했다.2백원의 통행료로는 건설비 이자는 물론,가로등전기료와 톨게이트 경비원 인건비도 되지않자 완공직후 시에 기부했다.대우가 민자로 건설하려다 설계와 하부공사만 마치고 손을 뗐던 동작대교는 북쪽의 연결통로가 임시로 마련된미완성작품이며 후암동고개를 거쳐 남대문으로 곧바로 달려야할 숙명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미8군측은 이 다리가 영내를 통과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서울시에 공문으로 항의해오자 당시의 담당과장이 미군장성 5∼6명을 삼청각에 초대,향응을 베풀면서 『당장의 계획이 아니고 먼 후날의 일』이라며 설득했다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모양새로 보아 서울의 상징다리라 할수 있는 올림픽대교는 처음으로 현상공모에 의해 한강 첫 사장교로 건설됐다.탑의 기둥을 네개로 해 우주만물의 근원인 연월일시와 동서남북,춘하추동을 나타내도록 했고 양쪽에 12개씩 24개의 케이블로 24회올림픽을 상징하도록 했다.88올림픽을 기념,주탑의 높이를 88m로 하는등 올림픽에 모든 초점을 맞췄으나 60%의 덤핑입찰로 올림픽이 끝난뒤에 완공됐다. 서울의 다리는 고질적인 병목으로 꼽히고 있다.본체의 설계잘못이라기보다 성수대교 남단처럼 땅값이 비싸 강쪽으로 접속로를 내는등 연결통로가 잘못돼 있는것도 그 원인중의 하나다. 앞으로 한강에 들어설 다리 가운데 서강대교는 미래형 다리의 표본이 되고 있다.최근 공사를 재개한 서강대교는 밤섬의 철새를 보호하는데 온 힘을 쏟아 건설이 파괴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투명유리로 철새조망대를 만들고 새의 부화에 악영향을 줄까봐 교량 하부등도 없앤다.지나는 차량은 경적을 울리지 못하고 방음벽 또한 완벽하게 설치된다. 가양동에서 난지도간을 이을 공암대교(가양대교)는 경간이 허용 최대치인 2백m에 이르러 단순·경쾌한 것을 기준으로 삼는 현대 다리의 미적감각을 한껏 살리게 된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79년 성수대교 완공 10일뒤 박 전대통령이 서거했다.80년 성산대교는 최 전대통령이 개통테이프를 끊었고 원효대교는 전두환 전대통령때 준공됐다.다리마다 개통식 주빈이 바뀔만큼 한강의 다리는 격동의 현대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서울의 역사를 새겨 나갈것이다.
  • 내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민간주도 범국민 행사로

    ◎총리실,분야별로… 곧 추진위 구성 정부는 광복 50주년인 내년 한햇동안 학술·문화·예술·체육등 각 분야별로 민간이 주도하는 각종 기념사업들을 범국민적으로 펴나가기로 했다. 국무총리실은 이를 위해 이달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언론등 각계인사 25명으로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사업계획의 기본방향을 세울 계획이다. 또 위원회 밑에 ▲본행사 ▲학술사업 ▲문화예술·체육사업등 3개 분과로 구성되는 실무위를 설치하고 각 시·도에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총리실은 14일 국무회의에 올린 광복50주년 기념사업계획보고를 통해 내년 8월을 「광복50주년 기념의 달」로 지정,본행사와 함께 한민족 민속행사를 거행하고 해외동포거주지역별로 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기념식이 열린 장소를 「광복기념광장」으로 지정,기념탑등 각종 상징물을 건립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해외의 광복인사 유해 송환사업과 독립유공자 관련사업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학술분야에 있어서는 광복이후 50년동안의 현대사를 재정리하는 한편 앞으로 50년 뒤의 미래사회를 조망,국가발전 장기목표를 제시할 계획이다. 문화예술행사로는 서울국제음악제와 8·15기념음악회,전통예술제,한국영화전,연극제,무용제등 각종 공연행사를 펼친다.
  • 창무회/봄맞이 정기공연/내일·모레 서울 문예회관서

    ◎무용가 2인 창작극 선보여/무용예술상 시상식도 함계 창무회가 정기공연겸 제1회 무용예술상 시상식을 오는 15·16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개최한다. 이번 정기공연에선 지난 86년부터 창무회에서 기량을 닦아온 중견단원 2명의 작품을 선보이고 올해 처음 제정 실시되는 무용예술상 시상식에선 작품·안무·무용가상등 3개 부문에 걸쳐 시상이 있을 예정이다. 15일부터 이틀간(15일 하오7시,16일 하오4시·7시) 정기공연무대에 오를 작품은 김은희의 「설」과 이미영의 「족두리」. 「하얀애인」(90년 창무큰춤판)「정령의 오후」(91년 제1회 신인안무가발표회)「달팽이」(92년 바탕 여름기획공연)「길」(92년 젊은안무가시리즈)등의 안무경력이 있는 김은희의 「설」은 차갑고 따스함,가볍고 무거움,형체의 유무등 다양한 대비적인 이미지를 가진 눈(설)을 소재로 택해 눈처럼 깨끗한 삶의 모습을 3개의 장으로 나눠 표현한 작품이다. 눈내리는 날의 풍경과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을 통해 눈의 정화된 모습과 그같은 삶을 추구하는 고귀한 노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함께 선보이는 이미영(90년 창무큰춤판 「안개나라」,91년 제1회 신인안무가발표회 「회색으로 온 봄」,93년 창무레퍼토리페스티벌 「안개나라」등 안무)의 「족두리」는 전통혼례에 쓰이는 족두리를 여자의 삶에대한 상징물로 간주,혼례의식을 치르는 각시가 미리 짚어보는 통과의례로 여성의 삶을 표현한 작품.「혼례마당」「터고름」「살고지고」등으로 나눠 혼인 출산 기다림 죽음등 여성의 운명을 전통적인 놀이와 제의성을 담아 풀어내는 흐름이다. 한편 창무회가 지난 92년 개관한 창무예술원이 발행하는 춤전문지 「무용예술」의 발행 출판사인 무용예술사가 제정,15일 하오7시 처음으로 시상하는 무용예술상에는 ▲올해의 작품상에 「군자무」(서울예고 무용과장 최현안무) ▲올해의 안무가상에 정귀인(부산예술대 부교수) ▲올해의 무용가상에 김희진씨(덕원예고 강사)가 각각 수상자(작)로 선정돼 상을 받게 됐다.
  • 가야시대 말갑옷 복원 성공

    ◎창원문화재연,함안 덧널무덤 출토품 통해 「상상도」 완성/머리·몸통·엉덩이가리개 등 6개부분 재생/“고대국가,전투마에 방호장비 완비” 입증/사극영상물 제작 등 생활풍습사 재현에 큰도움 우리 고대국가들은 전투에 나가는 말에 상당한 방호장비를 갖추어준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문화재관리국 창원문화재연구소가 고분 출토품과 벽화고분 자료를 빌려 처음 말갑옷(마갑)을 그림으로 복원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 작업에는 홍성빈연구소장과 이주헌연구원등 4명의 연구진이 참여했다. 말 갑옷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 유적은 지난 92년6월에 발굴된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덧널무덤.아라가야시대의 수장급묘로 추정되는 이 유적에서 상태가 아주 좋은 말갑옷 한벌이 출토되었다.쇠로 만든 갑옷조각(갑편)이 정연한 상태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가야시대 말갑옷을 복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연구팀의 설명.말투구(마주)까지 포함시켜 복원해냈다. 이번에 복원한 말갑옷을 보면 말투구에 해당하는 얼굴가리개(면령),목가리개(계경),가슴가리개(당흉),몸통가리개(신갑),엉덩이가리개(탑후),뒷부분장식(기생)등 6개부분으로 되어 있다. 얼굴가리개와 뒷부분장식을 제외하면 모두가 장방형의 철판조각을 끈으로 이은 상태.연구진은 함안 말갑옷은 아시아의 재래종인 몽고말을 기준으로 할 때 머리길이 49.3㎝,몸길이 1백33.9㎝,목길이 50.7㎝짜리 말에게 입혔던 것으로 추정했다. 말갑옷은 중국의 한대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당시에는 주로 가죽으로 만든 가슴가리개가 유행했다는 것이다.이 가슴가리개는 말의 몸에 늘어뜨려서 말을 보호하는 장비인 피갑.문헌기록에 따르면 후한말에 비교적 완비된 말갑옷이 출현한다.그러나 당시에는 말갑옷을 구비한 기병수는 적었다.남북조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보편적 장비로 등장,1천 또는 1만을 헤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래서 이 시대의 무덤에서는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있는 인물토용이 자주 출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말갑옷이 본격적으로 실용화된 것은 삼국이 정복전쟁을 수행하던 4∼5세기경.현재까지 말투구나 말갑옷이 출토된 고분은 모두 13개에 이른다. 부산·김해지역 3개유적에서 6벌,협천지역 1개유적에서 7벌,함안지역1개유적에서 1벌,경주지역 1개유적에서 2벌이 출토되었다.모두 6개유적에서 출토된 16벌의 말투구와 말갑옷 가운데 88%인 14벌이 가야의 옛땅에 위치한 5개유적에서 발굴되었다. 말투구와 말갑옷이 나오는 유적은 4세기부터 5세기 전반에 걸친 고분.가야지역에서는 4세기부터 쇠갑옷이 주요한 권력의 상징물로 취급되어 주로 대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을 위해 껴묻거리(부장품)로 이용되었다.그러나 5세기 후반부터는 금공예품이 껴묻거리로 등장하는 대신 쇠갑옷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 그림으로 복원된 말갑옷은 고대의 방어용 무구연구는 물론 생활풍습사 재현의 고증자료로 떠올랐다.특히 사극영상물 제작에도 도움을 주는등 크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일제향수(외언내언)

    일제 식민지지배의 총본산이던 옛 조선총독부청사는 우리에겐 치욕의 현장이며 수난의 상징물이다.해방후에는 중앙청으로,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운명은 이미 결정이 나있는 상태.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말까지 완전철거하기로 돼 있다. 1916년6월에 착공,10년만인 26년10월 준공된 총독부건물은 『동양최대의 석조전을 짓겠다』는 일제의 주장대로 4만7천평의 대지위에 동서로 2백42칸,남북으로 1백42칸의 웅장한 규모에 내벽을 대리석으로 치장하는,당시에는 호사를 극한 건물이었다.영국의 인도총독부건물보다 규모가 더 크다고 했을 정도. 영구적인 조선의 지배를 노려 세워진 총독부청사는 태어날 때부터 악의와 음해로 가득차 있었다.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의 맥을 끊기 위해 터잡은 자리가 근정전앞뜰.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도 헐어냈다.경복궁안의 수많은 전각과 회랑이 철거되었고 일부 자재는 일본 세도가들의 정원장식용으로 빼돌려지기도 했다.또 석조전의 위용으로 경복궁을 가려 조선왕조의 잔영마저 조선인의 시야에서멀어지게 한 것이다. 지난해 8월 구총독부청사의 철거가 확정된 이후 국립박물관을 찾는 일인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사라지기 전에 건물을 구경하고 기념촬영을 하려는 단체관광객들이라고 한다.일제의 옛 영광을 확인하려는 우월감의 발로가 아니길 바란다.최근 일본내에서도 일부지식인들이 『20세기초 기념적 건축물』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심스러운 보존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같다. 얼마전 서울시장의 기자회견자리에서도 일본특파원들에 의해 같은 주장이 제기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런 발상에는 지배자로서 군림하던 시대의 향수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게 아닐는지.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결정된 철거에 이러한 주장은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의 논리」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동양최고의 공예품(백제를 다시본다:2)

    ◎용봉향로는 백제문화의 「집약체」/용무늬는 왕실의 상징… 탄생설화 묘사/도교적요소는 정치적 이상향 나타내/700년 시공 뛰어넘어 한대작품 능가하는 미 창조 충남 부여 능산리고분(사적14호)과 나성(사적58호) 사이의 건물터에서 지난해 연말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축약한 문화사 바로 그것이다. 이 향로는 전체높이 64㎝로 크게는 뚜껑과 몸체 두부분으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뚜껑 꼭대기의 봉황장식,뚜껑,몸체,용모양의 다리부분 등 네부분으로 구성되었다.특히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윗단에는 5인의 주악상을 앉혔다.이들 주악상의 인물은 모두 머리 오른쪽의 머리카락을 묶어 내려뜨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혹은 날아가고 있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이 향로의 제작연대는 연화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의 수법으로 보아 부여시대(사비시대·서기 538∼660년)의 마지막 6∼7세기 경으로 추정된다.특히 발굴당시 이 향로가 매장된 장소의 정황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숨가쁜 순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뚜껑엔 삼산형문향 이제까지 향로가 실물로서 출현한 예로는 중국의 화북성 만성현 능산의 중산왕류승의 묘(전한·기원전 154년 재위·기원전 113년 사망),평양 서암리9의 219호낙랑고분,신안 해저출토 청동제 박산향로(원대 14세기)등을 들 수있다. 박산로는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 말기에 출현하여 한나라때 전성기를 맞는다.그 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과 원나라에까지 사용된 것같다.그러나 박산이라는 이름이 지칭하는 뚜렷한 지명은 없고,당시 황실이나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신선사상이 중심이 된 도교사상에서 유래하는 상상의 지명으로 보인다.그런가 하면 이런 향로에는 불교적 색채도 보인다.향로가 향을 피우는 불구이며 박산이란 이름이 수미산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하다.또 이번에 발견된 것처럼 향로의 몸체 주위에 돌아가며 앙련복변판련화문이 새겨진 것도 바로 이러한 불교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이 향로의문양만 보더라도 백제사회에 도교와 불교사상이 깊이 침투해 있음을 알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15대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진나라에서 온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불사는 그 이듬해 한산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도승이 10여명 거주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최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국보163호)의 말미에 쓰여진 불종율령이란 단어가 도교의 주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옳다면 이는 백제왕실 깊숙히 도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심취했던 도교의 신선사상의 주제는 고구려고분의 벽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그리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백제의 공주 송산리6호와 부여 능산리 2호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발견된 용봉문전과 산경문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앙련복판화문은 백제 전래품으로 추정되는 일본 나라 법륭사소장의 귤부인념대 아미삼존불 몸체 대좌에서도 보인다. ○5인주악사을 앉혀 사실 삼국가운데 중국의 앞선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 시키고,더 나아가서 일본에까지 전파시킨 당시 발빠른 백제의 문화감각으로 볼때 도교는 이미 상류층의 사상과 정치구현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표현된 이 향로는 일찍이 서왕모가 중국임금인 황제에게 바친 신물이었다는 전설과 함께 태자를 책봉할 때 봉정했던 왕통의 상징일 가능성도 이야기되고 있다.여기에 표현된 용봉의 문양이 왕을 상징한다.또 몸체의 연화문가운데 상투를 하고 태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이 주목된다.이소년이 왕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이러한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백제인의 얼굴이나 모습은 별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양서 직공지에 실려있는 백제국사,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과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국보 83호)등에서 보이는 얼굴이 고작이다.그러나 이 백제 왕태자로 추정되는 얼굴 옷과 상투는 앞으로 백제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향로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전문가들의 구체적인 견해가 나오겠지만 몸체 아랫부분에 표현된 용의 존재가 그 하나라 할 수 있다.이 용은 바로 왕가의 「탄생설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해모수와 하백녀 사이에서 나온 주몽은 난생개국신화를 가지고 탄생한다.그리고 동부여에서 부인 예씨로부터 얻은 아들 류이에게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을 통해 건국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은 왕태자 추정 그러나 백제 건국자 온조는 주몽 서소노 우대라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그러면서 고구려 제2대왕 유리(기원전 19∼기원후 18년)를 피해 남천,하북∼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는 것이다.이러한 사연들 때문에 왕통에 대한 정통성 부여가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태자책봉으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에 꽤나 신경을 썼으리라는 짐작이 간다.그래서 신화보다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계의 탄생설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향로는 바로 이 탄생설화를 구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표현된 탄생설화도 그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다만 왕통을 잇는 백제왕실의 상징물이나 신물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탄생설화를 담은 향로를 만들게 한 요인으로 풀이할 수 있다.그렇다면 몸체위의 뚜껑에 표현된 도교적인 요소는 백제왕실의 사상이나 정치적 이상향의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능산리에서 새로이 발견된 향로는 기본적인 형태를 서기전 113년 중산왕의 한묘에서 출토된 금으로 상감된 청동제박산로를 법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백제인들은 이것이 제작된지 약 7백년후에 봉·용을 뚜껑과 몸체에 덧붙여 백제화된 향로로 만들어 낸다.이는 예술작품으로도 전례가 없는 걸작품에 속할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하지 않은 백제사와 문화의 여백을 상당부분 메워 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가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이 향로가 주는 값진 의미이다. ◎향로의 유래/서방의 훈향풍습따라 제조/남북조시대 불교적 색채… 활짝 핀 연꽃 장식 향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과 한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이 가운데 중앙에 다리 하나를 세우고 몸통의 뚜껑이 산모양을 이룬 것을 박산향로라고 부른다. 이 향로의 산 부위 곳곳에 구멍을 뚫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의 모습이 봉우리 주변으로부터 솟아 올라 마치 생동하는 산의 기운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당시의 향로는 서방의 훈향풍습이 전해지면서 처음 만들어졌다.그래서 향로는 일반적으로 훈로를 말하고 있다. 박산이 신선사상,즉 도교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고려도경」에 나온다.이 도경은 한대의 문헌기록을 빌려 접시는 대해를,뚜껑은 봉래산에 비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그러면서 대해속의 거북등에 봉황이 딛고 서서 봉래산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고 덧붙인다.여기에 향을 피우면 뚜껑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향연은 신선이 내뿜는 안개와 같다는 향로 예찬론을 펴고있다. 향로에 불교적 색채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조시대.이 시기의 대표적 박산향로는 용문석굴 21호굴의 상자모양 윗덮개와 정광3년(서기 522년) 새김글자가 있는 화상석에서 볼 수 있다.이때 비로소 몸통 아래 부위에 활짝핀 연꽃을 둘러향로를 떠받치게 된다.그리고 인동당초문등 여러 문양을 첨가함으로써 장식적 요소가 늘어난다.화려한 장식문양과 함께 향로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숫자도 많아진다.자재도 금속 뿐 아니라 도자기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왕통의 계승을 의미하기도 했던 향로는 당·송·원대까지 계승되었다.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건진 14세기 원대 청동제 향로에서 보듯 일체의 문양이 사라지는 향로 변천과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
  • 정호승시인의 첫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이작가 이작품)

    ◎슬픈 에밀레종 전설을 「밝은 동화」로/“아동문학은 별개 장르아닌 문인 모두의 몫”/종제작때 어린딸 아닌 베게 넣어/슬픈얘기를 기쁨의 상태로 전환 시인 정호승씨(44)가 지난해 1월 첫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낸지 1년만에 첫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을 발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에밀레종…」은 정씨가 어릴적 경주에서의 체험과 에밀레종에 얽힌 이야기를 토대로 엮은 장편 창작동화. 일간지 신춘문예공모에서 동시·시·단편소설에 당선,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치중하는 장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뜻 『저는 시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정씨는 동화집 「에밀레종…」을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흔히 아동문학을 별개의 한 장르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게 사실입니다.그러나 시인 작가들이 일생을 두고 볼때 꼭 자기몫의 동화를 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아동문학은 아동문학 작가들만의 몫이 아니며 결코 별개의 장르가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동시로 문학세계에첫 발을 디뎠으나 바쁜 활동으로 아동문학을 떠나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동시 동화에 대한 향수가 컸다는 정씨다. 동화가 순수와 인간을 보는 따뜻함의 영역이라고 할때 어찌보면 그의 지금까지의 문학활동은 동화속에서 그의 몫을 찾기위한 부분이었을수도 있다. 동화 「에밀레종…」은 정씨가 어릴적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경주에서 본 에밀레종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인상과 그곳에서 만난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씨가 어릴적 경주 구박물관 종각에 있던 에밀레종속에서 목격한 수많은 낙서가 에밀레종의 유구한 역사라고 할때 『일본인이 에밀레종을 일본으로 밀반출하려고 동해안으로 옮겨놓았었다』는 한 노인의 말은 그대로 에밀레종의 험난한 운명으로 풀이된다. 일제하 영희라는 한 소녀의 가족을 중심으로 자국에 밀반출하려는 일본인에 의해 동해안에 버려진 에밀레종이 마을사람들과 영희가족들의 노력으로 다시 경주로 되돌려지게 된다는 단순한 줄거리지만 에밀레종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을 「기쁨의 상태」로 전환시키고 있는점이 이 동화의 특징이다. 『조직적인 삶의 측면에서 볼때 일본은 우리보다 나은게 사실입니다.그러나 그런 면과 달리 한국은 일본에 의한 역사적 희생자임이 엄연할때 그들을 용서는 하되 잊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반일이나 극일감정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과거사에 대한 망각은 위험하다」는 교육적 측면이 「에밀레종…」의 한 부분이다.그리고 종제작을 온전하게 마무리짓기 위해 어린 딸을 끓는 물 속에 집어넣었다는 비극적인 전설을 어린 딸대신 딸의 베개를 던져넣었다는 이야기로 전환해 동화다운 밝음의 철학을 담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비극적인 삶의 연속인데 동화마저도 비극으로 그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난 연말 제야부터 종의 보호차원에서 본래의 에밀레종 소리를 들을 수 없게된 현실을 몹시 안타까워하는 정씨는 『그래도 동화속의 에밀레종만큼이나 에밀레종은 기억해야 할 부분이 많은 「상징물」』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 남산/민족의 기상 충정의 표상(서울 6백년 만가:1)

    서울이 나라의 으뜸도읍으로 정해진지 6백년.태조 이성계가 당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서울은 무수한 변화속에서도 수도의 위치를 의연히 지켜왔고 이제 세계속의 큰 도시로 새로 태어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6백년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시리즈로 소개,수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해 본다. ◎옛이름 목멱산… 태조읍후 개명/고종때 공원지정… 일반인 휴식처로/“제모습 되찾기” 올해부터 본격착수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를 틀고 우리민족의 영욕을 묵묵히 지켜보아온 남산. 세월에 따라 그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남산만큼 우리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도 없을 것이다.왕권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충직하고 현명한 백성들에게 믿음직한 충정의 표상이었으며 민족수난기에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할 국가 이상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이 품어안고있는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르름은 우리기상의 본보기 이기도 했다. 서울사람치고 남산을 보지않고 하루를 지나는 사람은 없으며 서울을 찾는 사람중에 남산을먼저 보지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해발 2백65m의 남산은 야트막하고 봉우리도 둥그스름한데다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해 온국민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왔다. 정상에서 동서로 2.7㎞,남북으로 2.1㎞ 뻗어 오늘의 행정구역으로는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성동구 왕십리쪽으로 꼬리를 내리고 있다.면적은 1백2만9천3백여㎡. 조선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갓 작고 평범한 구릉에 지나지 않았던 남산이 처음 역사의 무대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부터다.이때까지만 해도 인경산으로 불리다 서울 남쪽 끄트머리에 있다하여 남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산의 본래명은 목멱산으로 목멱이란 옛말「마뫼」의 한자음 표기이다.「마뫼」는 남쪽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1910년 고종황제는 남산을 백성들의 공원으로 정해 일반에 공개,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친필로 한양공원이란 석비를 써 하사했다. 이 석비는 지금도 구통일원 자리에 남아있다. 그러나 남산은 한강 이남의 개발과함께 서울이 남쪽으로 넓어지면서 남쪽 끄트머리에서 어느틈엔가 한복판으로 옮겨 앉았다. 일찍이 한양의 남쪽 방패로 시인묵객의 풍류와 일반인의 휴식처로 사랑받아오던 남산은 근세에 들면서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인이 지금의 예장터일대에 거류하면서 부터다.일제는 현 안기부자리에 통감부를,수방사 자리에는 헌병사령부를 설치했는가 하면 1926년에는 정상에 모셔졌던 우리민족의 표상이던 국사당을 폐쇄하고 수천그루의 벚꽃을 심는등 민족정신의 혼을 말살하는 상징물로 남산을 이용했다. 안타깝게도 남산훼손은 광복후 우리손에 의해서도 계속됐다.지난 57년부터 3공때인 75년까지 36차례의 공원용지해제로 중앙방송국·남산방송소·외국인 임대주택단지·타워호텔등 갖가지 대형 건축물들이 산허리를 깍아내고 들어앉았다. 다행히 시는 올해 정도 6백년을 맞아 남산복원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키로해 웅장하지는 않으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옛모습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외인아파트는 내년에 헐리며 산의 경관을 헤쳐온 정상의 서울타워와 숭의학원등도 늦어도 2000천년까지는 모두 철거된다.철거작업이 이미 끝난 수방사자리엔 남산골이 조성돼 옛정기를 확인할 수 있는 한옥등이 들어서게 된다. 외세의 침탈속에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상처받았던 남산이 제모습을 되찾으면 서울의 고풍스런 운치는 한결 돋보일 것이다.
  • 중국대륙에 소비열풍 “강타”/관세인하·자본주의 장려정책 여파

    ◎세계적 의류회사 등 잇달아 상륙/올상반기에만 5백72조원 매출 중국대륙에 소비열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값비싼 수입품들이 쇼윈도우에 진열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가 외국회사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또 백화점의 외제화장품이나 수입품 코너앞에 빨간 립스틱을 짙게 칠하고 금목걸이와 팔찌를 늘어뜨린 젊은 여성들이 몰려들어 있는 모습은 광주를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에서는 더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같은 소비열풍을 타고 세계적인 의류회사인 프랑스 피에르카르댕에 이어 미국의 나이키·플레이보이사와 일본의 소매상인 이세탄사·세이부백화점등이 이미 중국에 진출했으며 지난달에는 미국의 유명디자이너인 도나 카렌이 심천에 DKNY 스포츠의류점을 여는 등 외국기업들이 속속 중국에 상륙하고 있다. 월트디즈닐사의 존 페니 소비자제품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사장은 이에 대해 『이런 상품들은 우리에게는 시대에 뒤진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에서는 과히 혁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이같은 소비재에 대한 수요폭증은 중국정부가최근 펴온 수입관세인하정책과 자본주의 장려정책 때문이지만 특히 이에따른 광고시장과 각종 매체의 급신장 덕분으로 분석되고 있다. 79년이후 중국에서의 소매매출액은 연간 7­8%씩 증가해오다 지난해에는 15.7%인 10조원(공정환율로 미화 1천7백30억달러)이상의 비율로 늘어났다.더욱이 올해들어서는 상반기동안에만 매출이 24% 증가한 5백72조원으로 치솟았다 상품별로는 보석류가 전년도 대비,2배의 매출신장을 이뤘고,혼다사의 오토바이는 지난해보다 11% 늘어난 68만대,도요타사의「크라운」자동차는 올해 1만8천여대가 판매될 전망이다.특히 맥도날드 햄버거의 경우 90년 중국대륙 상륙이래 불과 3년만에 1천만명이 애용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내년에는 1천5백만명에 까지 이를것으로 전망돼 금세기중 중국인들의 입맛에 대대적인 혁명을 불어올 것으로까지 예측되고 있다. 또 가구별 가전제품 소유현황을 보면 상해의 경우 ▲카메라는 지난 89년 조사가구의 45%에서 올해에는 60%로 늘어날 전망이며 ▲VCR는 10%에 불과하던 것이 45%의 급성장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증가로 요즈음 중국인들에게 고급외제승용차와 카메라,VCR등은 하나의 신분상징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이같은 소비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질구매력을 갖춘 소비자는 전인구의 10%미만인 6천만∼1억여명에 불과하다.따라서 앞으로 경제성장에 따른 중국의 소비열풍은 더욱 거세질것임을 쉽게 예측할수 있다.
  • 성탄카드/냉소적·비판적 그림 유행

    ◎신세대 선호… 음성담긴 첨단카드도 선보여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시즌이 돌아왔다. 1843년 영국화가 존 켈커트 호슬리에 의해 상업용 카드가 등장한 이래 크리스마스 카드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 올해로 1백50년째. 최근에는 카드에 목소리를 담거나 빛을 받으면 색깔이 변하는 카드가 등장하는가 하면 컴퓨터로 카드를 전송하는 첨단카드까지 나오는등 다양한 크리스마스카드가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올해들어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재치가 번득이면서도 때로는 일상적인 사건이나 대중문화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소재로한 카드가 많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카드는 베이비붐 시대 이후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점차 인기를 더해가고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례적인 백악관의 성탄트리 점화식이 열리는 동안 클린턴의 가족들이 기르는 고양이가 미국을 상징하는 나무위를 덮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또다른 것은 산타클로스가 폴란드 북부지방에 살고 있으므로 성탄 전야에 산타를 위해 쿠키와 우유 대신 폴란드 요리를 마련하라고 충고하는 모습을 담은 카드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에서도 많이 눈에 띄고있다. 이밖에도 크리스마스 카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경제공황 시기에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살기좋은 때가 곧 오리라는 희망적인 내용을 주로 담고 있었다. 2차대전중에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전형적인 미국인을 상징하는 「엉클 샘」이 많이 등장하는 등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이 주를 이뤘으며 이 시기에 산타클로스도 같은 목적으로 크게 유행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뒤 찾아온 냉전시대에는 전후의 황폐함을 달래듯 유머러스한 카드가 유행한 반면 60년대에 와서는 평화를 열망하는 세계인들의 바람을 나타내듯 꽃을 든 소년이나 평화의 상징물들이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장식했다. 70년대 이후에는 가족의 가치가 새삼 강조되면서 크리스마스 카드가 떠나온 고향이나 흩어져 살고있는 가족들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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