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상징물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쌍문동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양림동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도림천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법원장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821
  • 외언내언-관광상품‘DMZ철조망’

    휴전선의 녹슨 철조망이 통일염원을 담은 관광상품으로 부활했다.경기도 파 주시가 15일부터 휴전선 철조망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임진각에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팔고있다.‘DMZ(비무장지대)녹슨 철조망251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관광상품은 53년 휴전직후 판문점 일대에 설치된 철조망으로 지난 10월 자유의 다리를 공개하기 위한 준비작업때 45년만에 철거된 것을 상품화했다. 철조망 관광상품은 가로 30㎝ 세로25㎝의 직사각형 액자바탕에 한반도 지도 가 그려지고 휴전선 위치에 동·서 방향으로 3㎝의 녹슨 철조망을 고정시킨 형태로 만들어졌다.한개당 가격은 1만3,000원으로 판매 10일만에 1,200개가 팔릴 정도로 인기상품으로 자리가 잡혔다.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의 녹슨 철조 망은 단순한 관광상품이라기보다 통일을 염원하는 차원에서 많이 구입한다는 것이 파주시 판매담당자의 말이다.휴전선 녹슨 철조망이 관광상품으로 등장 한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독일의 경우 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면서 90년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이 분단의 상징물로 관광상품으로 판매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베를 린장벽이 허물어지면서 게르만 민족의 통일을 가져다준,분단의 상징이던 벽 돌조각이 전세계 유명관광상품이 됐다는 것을 상기할 때 155마일 휴전선 철 조망의 일부가 관광상품으로 제작·판매됐다는 것은 많은 상징적 의미를 갖 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단절과 통한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휴전선의 녹슨 철조망 은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비극의 징표로 남아있다.지금 이 순간에도 휴 전선 철책을 사이에 두고 180만명의 남북한 군대가 대치하고 있다.휴전선 10 m당 남북한 군대 54명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조그만 자극에도 군사적 충 돌을 몰고 올 수 있는 ‘화약고’다. 민족분단의 상흔이 엄존하고 있는 휴전선의 철조망이 관광상품으로 인기가 높다는 사실은 이같은 비극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국민적 관심을 대 변한 것이라고 본다.아울러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고향가는 길을 막 고 있는 원한의 철조망을 없애야 하겠다는 일념도 함께 작용한다고 본다.아 무튼 DMZ철조망이 관광상품으로 등장한 것을 계기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앞당겨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csj@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공항운영 효율성 높여 점진적 민영화 바람직/李建榮(기고)

    ◎국적항공사와 긴밀한 협조체제 갖추고/타 공항과의 중앙집중식 운영 고려해야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이 불과 2년 밖에 남지 않았다. 신공항이 완공되면 동아시아의 허브공항이 되어 우리 국력을 대외에 과시할 수 있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이제는 건설 뿐 아니라 개항 후의 운영을 준비해야 될 때다.지금까지 공항의 운영은 한국공항공단이 맡아왔고 신공항건설공단이 한시적으로 신공항의 건설업무를 맡아왔다. 그러나 정부는 최근 인천국제공항의 운영을 위해 신공항건설공단을 모태로 한 새로운 공사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신공항 운영에 대한 준비는 이미 늦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앞으로 공항운영의 발전방향에 보다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공단조직은 경직적이었고 정부의 규제를 받는 직영체제였다.따라서 운영효율화에 대한 동기부여가 어려웠다. 지금 세계 각국의 공항은 지방화시대를 거쳐 민영화의 길을 가고있는 추세인 만큼 공항운영은 장기적으로 민영화라는 틀 속에서 구상되어야 한다. 민영화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운영을 위탁하는 형태가 있을 수 있고,공항시설의 상당부분을 분리해 민영화하거나 건설에서 운영까지 모두 민영화 할 수도 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았으나 공항건설 투자비를 출자액으로 전환해 공기업형태로 운영하고 점진적으로 출자지분을 매각해 궁극적으로는 운영권도 민간에게 위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운영의 효율화를 극대화 할 수 있는 형태를 택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공항이 단순히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장소만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하나의 상품이고 경쟁의 대상이다.따라서 신공항이 진정한 허브공항이 되기 위해서는 국적항공사들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전제로 한 세일즈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영국의 주요 공항들은 지난 87년 민영화 이후 항공사와 승객들이 요구하는 서비스와 새로운 시설들을 제공하면서 부대수입을 대폭 늘리고 경영수지를 개선할 수 있었다.이는 독점적이고 관료적인 체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항운영은고도의 첨단기술이다.아마도 신공항의 등장과 함께 한단계 더 발전할 것이다.이 분야의 전문가는 상당히 제한돼 있으므로 중앙집중식 운영이 더 효율적이다.공항의 운영이 신공항과 기타 공항으로 양분될 때 상호간의 협조와 운영기술의 교류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과제다. 외국의 2개 이상 공항을 가진 곳들도 대개 일본을 제외하고는 하나의 운영조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지리산 삼도봉 정상에/三道 화합 상징물 제막

    ◎전남·북·경남도지사 등 “지역감정 해소” 다짐 전남·북과 경남 등 3개 도지사가 18일 지리산 삼도봉에서 ‘삼도 화합 상징물 제막식’을 갖고 영·호남 화합분위기를 다졌다. 許京萬 전남지사와 金爀珪 경남지사,柳鍾根 전북지사는 이날 낮 12시30분 3개도 경계인 삼도봉 정상(해발 1,550m)에서 삼각뿔 형태의 화합 상징물 제막식을 갖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이날 행사에는 3개 도지사를 비롯,인근 지역 시장,군수,의회의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전남도가 1,000만원을 들여 제작한 화합 상징물은 높이 71㎝,지름 45㎝의 구리로 된 삼각뿔 각 면에 각 도의 이름을 새기고 남은 공간에 ‘3도를 낳은 봉우리에서 전북·경남·전남 도민이 서로 마주보며 天·地·人 하나됨을 기린다’는 글귀를 넣었다.
  • 韓­埃 수교 3주년기념 ‘유적대탐험전’

    ◎파라오와 함께 고대이집트 여행/미라 마스크·관 등 진품유물 150점 전시/투탄카멘 무덤 등 재현/발굴현장 온듯 생생 한·이집트 수교 3주년 및 서울·카이로 자매결연을 기념하는 ‘이집트 유적대탐험전’이 내년 1월5일까지 서울 여의도 63빌딩 1층 특별전시장에서 열린다. 이 전시회는 기존의 쇼 케이스에 진열된 유물을 감상하는 평면적인 전시에서 탈피,관람객들이 탐사단 일원으로 발굴현장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체험할 수 있도록 테마파크형 전시회로 꾸며져 있다. 이집트 고대유적의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진품유물 150점을 비롯해 카이로박물관측이 공인해 현지에서 제작한 투탄카문왕의 황금마스크 및 대표적인 보물,람세스 2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의 무덤벽화,람세스 2세의 초대형 석상과 미라 등이 공개된다. 진품 유물들로는 죽은 자가 저 세상으로 가는 길에 심부름하라고 같이 묻었던 샤브티,미라의 얼굴에 씌웠던 마스크와 관,살아있는 신상,영생의 상징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신구와 램프 등 일상용품,그리고 콥트시대의 직물 등이포함돼 있다. 피라미드로 이루어진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발굴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 투탄카멘왕의 무덤이 나타난다. 내부는 주제별로 ‘비운의 파라오 투탄카멘왕의 무덤’‘투탄카멘과 함께 잠들었던 보물’‘절대자 파라오의 삶’‘고대 이집트신들과 만남’‘영생의 문을 여는 열쇠,미라의 비밀’‘네페르타리왕비의 무덤여행’등이 이어진다. ‘이집트보석전’‘의상전’등 이벤트도 열리며 피라미드에서 뿜어져나오는 불가사의한 힘의 정체를 실험을 통해 보여주는 ‘피라미드 파워실험장’이 펼쳐진다. 또 다양한 ‘이집트 풍물시장’도 펼쳐진다. 전시회는 평일 오전 11시부터 밤 10시,주말 및 공휴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입장료는 성인 8천원이며 노인과 소인은 5천원이다.(02)789­5554
  • 지자체 상징물·상표 특허출원 러시

    ◎올들어 9월까지 79건… 95년 전체의 3배/지역이미지 높이고 상품 판매에도 큰 도움 어떻게 하면 내 지역 이미지를 높이고 특산물을 잘 팔 수 있을까. 특허청은 27일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 이미지 제고와 특산물 홍보 등을 위해 출원하는 해당지역 상징 도형이나 상표가 쇄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치단체별 전체 출원현황을 보면 95년에는 25건에 불과하던 것이 96년 62건,97년 132건으로 급증했다.올해에는 지금까지 모두 79건이 출원됐다. 서울의 경우 밝은 미래 이미지가 담겨있는 산·해·한강의 도형을 업무표장으로 출원한 데 이어 캐릭터인 ‘왕범이’를 상표로 출원했다. 경기도는 자체 상표출원은 없으나 기초자치단체인 안성시는 ‘안성맞춤’을,광주군은 ‘한우 600 경기광주’ 등을 각각 등록받았다. 강원도의 상표는 ‘푸른 강원’이 됐으며,‘99 강원도 국제관광박람회’가 출원중이다. 충북은 ‘초정’이라는 상표로 대표되며 제천,옥천,음성,단양,괴산,보은 등 여러 기초단체들이 특산물 홍보를 위해 등록받은 상표만도 50여건에 이르고 있다. 충남은 ‘도지사 추천 특산물 충청남도’를,금산군은 ‘금산인삼 페스티벌’,부여군은 ‘백제의 왕도 부여’를 상표 등록했다. 경북은 세계를 손안에 품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도형이 상표가 됐으며,경주시는 ‘문화관광 엑스포’ 관련상표를 출원하고 있다.영주시는 ‘선비정신’과 ‘소백산 영주고추’를,청송군은 ‘청송사과’와 ‘청송 세척고추’가 등록상표이다. 경남은 ‘경상남도 추천상품’을 등록받았고,전북은 ‘최고명품 전라북도’를 출원중이다.순창군은 ‘순창전통 고추장’,무주군은 ‘무주특산’ 등을 등록받았다. 전남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곳,전라남도’의 등록을 끝마쳤으며,구례군은 ‘지리산 명수’,광양시는 ‘빛고을 광양’ 등을 출원하고 있다. 제주도는 ‘깊은 바다’가 등록받은 데 이어 ‘한라산 눈꽃축제’,‘성산일출제’를 출원해 놓고 있다.
  • 백룡동굴 ‘男根石’ 훼손

    ◎평창군 출입금지구역서 경찰서장 일행이 가져가/파문 커지자 뒤늦게 반환 미공개 영구보존 천연기념물인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백룡동굴의 상징물인 길이 40㎝의 남근석(男根石)이 지난해 당시 관할 경찰서장 일행에 의해 훼손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31일 평창군과 문화재관리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23일 당시 崔光植 평창경찰서장(현 영월경찰서장)등 경찰간부 3명과 지역유지 등 일행 14명이 백룡동굴을 다녀간 뒤 남근석이 잘려나간 것을 동굴관리자 전모씨가 뒤늦게 발견,신고했다. 동굴방문 1주일 뒤 동굴관리인으로부터 훼손사실을 전해들은 崔서장은 일행 등에게 종유석의 고의 훼손 여부를 알아본 결과 함께 동행했던 林모씨(45·H레미콘대표)가 남근석을 갖고 있어 곧바로 동굴관리인에게 돌려주도록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崔서장은 “林씨가 동굴바닥에 떨어져 있는 남근석을 주워 집에 보관하고 있다고 해 관리인에게 돌려주도록 조치했다”며 “수몰방지대책 등을 모색하기 위해 동굴을 방문했던 당일에는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해명했다.
  • ‘바른 감사 바른 나라’/감사원 새 院訓·상징 확정

    감사원은 25일 공모를 통해 선정한 새로운 원훈(院訓)과 상징물을 발표했다. 새로운 원훈은 ‘바른 감사,바른 나라’.간단하면서도 감사원이 지향하는 바를 잘 나타내 당선작으로 뽑았다고 심사 관계자는 설명했다.전북 전주시에 사는 공무원 출신 李廷相씨(80)의 응모작이다. 새로운 상징물은 눈과 귀를 조합한 형상으로 대홍기획의 출품작이다.국민의 눈으로 냉철하게 보고,국민의 귀로 바르게 듣겠다는 감사원의 의지를 표현했다고 한다.또 귀는 감사원의 ㄱ,눈은 ㅅ,눈동자는 ㅇ을 나타낸다고 한다.전체적으로는 사정(司正)기관의 성격을 나타내는 ‘司’의 모양도 갖고 있다.
  • 3·1운동 기념탑 세운다/남산 기슭에 민족자주의 혼 ‘우뚝’

    ◎장충동 국립극장 입구… 내년 3·1절 준공/金 총리서리·유공자 등 참석 어제 기공식 ‘3·1독립운동 기념탑’이 남산 기슭에 세워진다. ‘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는 14일 상오 9시 서울 중구 장충동2가 국립극장 입구 공원에서 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 기공식을 가졌다. 기념탑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이날 착공됐으며 3·1절 80주년을 맞는 내년 3월1일 준공식을 갖는다. 이날 행사에는 金鍾泌 국무총리 서리,金正吉 행정자치부장관,金義在 보훈처장,李萬燮 국민신당 총재,柳在乾 국민회의 부총재,金龍煥 자민련 부총재,吳榮祐 마사회장,車一錫 서울신문 사장 등 관계자와 독립유공자 및 애국지사,광복회 회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金총리서리는 축사에서 “3·1운동은 민족 독립을 위해 온 겨레가 하나가 됐던 위대한 민족 자주운동”이라면서 “당시 선열들이 대동단결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것처럼 이곳이 지금의 국난을 이겨내고 통일 조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민족의 성지가 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車一錫 상임부위원장은 식사에서 “3·1독립운동 정신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지만 부끄럽게도 이를 기리는 변변한 상징물 하나 없었다”면서 “3·1독립운동 80주기를 한 해 앞두고 운동의 진원지였던 서울 중심부에 기념탑을 건립,선열들의 고귀한 이상을 기릴 수 있게 돼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기념탑은 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을 의미하는 높이 1919㎝의 석조물로 홍익대 金永元 교수(조각과)가 작품 제작을 맡았다.
  • 어느 교육자의 태극기사랑/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서울광장)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국기를 바라보며…조국은 잃었으나,너만은 잃지 않고 광복의 앞날을 위하여 나의 애국지성을 바치겠다고 되새겨 다짐하였다’. 어느 저명한 교육자가 약관일때 국권이 피탈되자 태극기를 땅속에 묻을 생각을 굳히고 이러한 애국적 의지를 표했다.그는 ‘나는 남몰래 널빤지와 못을 얻어 손수 만든 조그마한 나무상자에 고이고이 접어서 넣은 국기를 장롱속에 깊숙이 간직하였다.기회있을 때마다 장롱속을 엿보던 나의 가슴에는 항상 뜨거운 조국애의 그리움이 용솟음쳤다’고 말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30대 초반으로 손수 설립한 동원(동덕)여학교의 교장이었다.사회저명인사가 된 그 분은 일제의 감시를 받아 장롱속에 숨겨둔 국기가 발각될까 염려하여 장독대 밑을 파고 국기상자를 달밤에 은닉하였다.얼마뒤 묻어 둔 국기상자를 파내 보니 나무상자는 퇴색하고 뒤틀려서 국기만 꺼내 다시 정성스레 함 속에 보관하였다. ○국기만 지닌채 피난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함 속의 국기를 꺼냈다.햇빛을 못본 국기는 좀이 먹어구멍이 뚫렸으나 형체는 그대로였다.‘나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국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아래 엎드렸다’고 그는 소감을 피력하였다.그리하여 곧 학교로 달려가 태극기를 게양대에 올리고 독립만세를 서울이 떠나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남북분단 속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서울이 남침 3일만에 붉은 군대에 짓밟히자,그는 다시 국기를 숨겨야 했다.국기를 옷속에 넣어 꿰맨 후 괴나리봇짐 속에 넣어 생명같이 모시고 어루만지며 9·28 수복을 기다렸다.1·4후퇴(1951)때는 가재도구 속에 국기만 넣어 부산으로 피난갔다. 이 태극기는 1908년 춘강 조동식(1887∼1969)이란 교육자가 손수 제작해서 눈물겨운 정성을 쏟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금년 그 국기의 나이는 90인 것이다.약 1세기 가까운 긴 세월 속에 천도 낡고 좀먹은 구멍도 있는 그 국기는 헝겊으로 꿰매져서 지금은 동덕여대 박물관에 액자로 모셔져 있다. 이 국기야말로 고난·역경과 애국의 상징으로,춘강이 서거한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요즘도 위용과 광채를 발하고있다.이 태극기는 가로 174㎝,세로 160㎝ 규모의 견직으로 제작되었는데,국권피탈 이전(1908)에 제작되어 국가 상징물로서,그리고 한 애국인사의 지성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사랑 강인한 집념 마침 소장자쪽에서 그 국기를 국가지정 문화재로 검토해줄 것을 문화재관리국에 요청하여 문화재전문위원인 필자가 그 곳을 방문,조사한 일이 있었다.그 국기를 보고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춘강의 태극기는 태극이 청색이 아니고 검정색이며 건곤감리의 순서도 지금의 표준형과는 다른 양상이다.그렇지만 교육자 춘강의 숨은 애국의지,독립정신,나라사랑의 강한 집념을 읽어볼 수 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춘강의 국기는 국가상징물로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겠다.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의 아름다운 나라사랑의 삽화인 것이다.
  • 감사원 院訓 공모/새달 14일까지 당선작엔 상금

    감사원이 개원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원훈(院訓)과 상징물을 공모한다. 기존의 원훈 ‘공명정대(公明正大)’와 상징물 ‘마패’가 공직자 비위감찰의 이미지만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에 따른 것.새 원훈과 상징물에는 행정운영의 개선,향상 같은 현대 감사의 특징과 친근감,미래지향적인 느낌이 담기기를 기대하고 있다. 공모대상에는 제한이 없다.7월21∼8월14일까지 응모작을 접수한다.원훈과 상징물 당선작에는 각각 200만원씩의 상금이,가작 2편씩에도 각 50만원의 격려금이 전달된다.공보실 (02)721­9401∼3.
  • 상암球場 신축이 최선(사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의 개막식과 개막전 및 준결승전을 치를 주경기장이 서울 마포구 상암지역에 새로 짓는 것으로 최종 결정될 것이라는 보도는 반갑다.문화관광부와 서울시는 지난 2주동안 서울 잠실종합경기장과 인천 문학경기장,서울 상암 신축경기장을 대상으로 타당성 조사를 한 결과,상암경기장의 신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정부 빨리 단안 내려야 잠실경기장의 경우개·보수비용으로 1천20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드는데다 서울올림픽 상징물이 훼손된다는 점이 지적됐고 문학경기장 역시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은것으로 전해진다.현명한 판단이라고 여겨진다.다음주 중 金鍾泌 총리서리 주재의 정부 최종 선정회의에서도 이같은 조사결과가 받아들여져 상암구장 신축계획이 최종 확정되기 바란다. 상암구장 신축안은 지난 2월10일 국제축구연맹(FIFA)에 통보됐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지금까지 최종 결정이 미뤄졌다.그 동안 국제사회에서는 우리나라가 과연 월드컵축구대회를 개최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지를 의심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상암구장 신축은 이처럼 국제사회와의 약속이자 우리의 대외 신인도(信認度)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유·무형 파급효과 막대 그럼에도 정부는 아직까지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공동개최국인 일본이 6백억엔을 들여 결승전 후보경기장인 최첨단 설비의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을 완공,개장 기념경기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데 이어 다른 개최도시의 경기장 건설도 차질없이 추진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상암구장을 신축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치를 경우 얻게 되는 파급효과는 엄청나다.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달 발표한 연구보고서는 총생산 유발효과 8조원,부가가치 유발효과 3조7천억원,고용창출 효과 24만5천명이라는 경제적인 이익 외에 유무형의 파급효과가 대단히 크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位相)을 크게 높여준다는 점을 들었다.월드컵축구대회는 올림픽보다 대회기간이 2배나 길며 전세계에서 연인원 4백10억명이 지켜보는 지구촌 최대의 체육제전이다.우리의 자존심과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호기(好機)가 아닐 수 없다.아울러 88서울올림픽에 이어 다시 우리의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이런 기회를 단선적인 사고(思考)와 상황논리로 그냥 놓칠 수는 없다. ○상암구장 세계와의 약속 우리는 이미 본란을 통해 상암구장 신축이 최선이며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 경기장 하나 번듯하게 지어 후손에 남겨주자고 여러차례 강조했다.세계인과의 약속을 지키고 성공적으로 대회를 치를 때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맞아 추락한 우리의 대외신뢰도도 회복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2002년 월드컵대회는 21세기를 여는 첫 인류의 축제다.그 때쯤이면 우리도 경제회복을 이뤄 한민족(韓民族)의 발전의지와 기상을 세계에 알려야할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도 찬성 상암구장 신축은 대다수 국민들의 뜻이기도 하다.스포츠서울이 지난 달 24일부터 27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는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71.19%(25만3천460명)가 상암구장 신축을 찬성했다.잠실경기장 개·보수 찬성은 23.69%(8만4천318명)이며 인천 문학경기장 증축안은 5.12%(1만8천236명)에 불과했다.특히 경합지역인 인천시민들 조차도 문학경기장(1천192명)보다 상암구장신축(5천32명)을 지지하고 있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2002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지난 3월 일본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있은 다이너스티컵 대회 개막전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놀랐다.진눈깨비가 쉴새없이 쏟아져 경기장 사정이 어떨지 걱정했으나 융단을 깔아놓은듯한 잔디에는 물방울 하나 튀지 않았던 것이다.7만관중을 수용하는 거대한 스타디움 그 자체가 첨단기술의 상징이었다. ○일에 주도권 뺏기지 말아야 그토록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도 부족한 부분을 끊임없이 찾아내 보완공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우리가 이렇게 안이한 자세로 대비하다가는 일본에 2002년 대회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지나 않을지 걱정이다.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주경기장 문제를 빨리 매듭짓고 총력을 기울여 준비해야 할 것이다.
  • 월드컵구장 상암동 확정/월내 총리주재 회의서 최종결정/조사위

    2002년 월드컵 주경기장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신축경기장으로 결정될 것이 확실시된다.이에 따라 한때 주경기장으로 거론되던 인천 문학경기장 증축공사는 백지화될 전망이다. 30일 기획예산위원회 등에 따르면 문화관광부와 서울시는 지난 2주동안 잠실종합경기장,인천 문학경기장,상암 신축경기장 등을 대상으로 타당성 조사를 한 결과,상암경기장의 신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는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주경기장 안정성·경제성 조사위원회’의 이같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달중 金鍾泌 총리서리 주재의 ‘주경기장 선정회의’를 열어 상암경기장을 월드컵 주경기장으로 확정할 예정이다. 조사위원회는 인천 문학경기장의 경우 2백40억원으로 경기장을 증축하는 것이 안전성이나 경제성 측면에서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잠실경기장을 활용할 경우 1천10억원의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이 쓰여지지만 서울 올림픽상징물이 훼손된다는 점을 들어 상암경기장으로 결정했다. 상암경기장의 총 공사비는 4천5백20억원이나 이 가운데 2천5백20억원은 주변도로 공사 등 서울시가 수색택지개발을 위해 이미 책정했기 때문에 실제필요한 비용은 2천억원이다. 재원은 ▲정부와 서울시가 각 30%씩 1천2백억원 ▲체육진흥기금이 15%인 3백억원 ▲축구협회와 월드컵조직위원회가 각 12.5%씩인 5백억원을 부담하기로 했다.
  • 한국의 나무꼭두/김옥랑 엮음(화제의 책)

    ◎꼭두의 종류·쓰림새 등 상세히 기록 사람의 모형(模型)을 우리는 보통 인형이라고 부른다.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우리의 옛말은 ‘각시’ 또는 ‘꼭두’였다.한자어로는 괴뢰(傀儡),우인(偶人),목인(木人),목우(木偶) 등으로 씌어 왔다.인형이란 말이 현대에 와서 일반화된 것은 일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일본 문헌에서 인형이라는 말은 무로마치 시대인 16세기 말부터 나타나며,에도시대(1603∼1867)이래 닌교(人形)란 말이 일반화됐다.이 책은 나무꼭두의 쓰임새에서부터 세계 꼭두극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룬다. 우리의 나무꼭두들은 현세에서의 즐거움과 갈등,죽음에 대한 비탄,저승에서의 소망 등을 오롯이 담아낸 전통 상징물이다.신상(神像)으로서의 의미도 지니는 그것은 완구로서의 기능과 함께 죽음과 관련된 명기(明器)로도 사용된다.하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나무꼭두들은 상여에 부착된 것들이 대부분이다.이 나무꼭두들은 꼭두각시놀음 등을 통해 실제공연에서도 사용된다.연극 ‘오구­죽음의 형식’이 그 한 예다. 이 책에서는 100여점이 넘는 나무꼭두들을 그 모양과 구체적인 기능등을 고려해 여인꼭두,동자와 동녀꼭두,남자꼭두,광대,재인꼭두,기마(騎馬)꼭두,기호(騎虎)·기룡(騎龍)꼭두 등으로 정리했다.이를 통해 나무꼭두가 지닌 익살스런 얼굴표정과 소박하고 자유로운 색감,조선시대 복식 등을 실감있게 재현한다. 한편 이 책은 서양 꼭두극의 기원과 관련,독일의 인도학 교수였던 리하르트 피셸의 인도 기원설에 대해 상세히 다룬다.피셸은 세계 꼭두극의 발생지를 인도로 본다.인도에서는 일찍이 10세기 경부터 꼭두를 놀리는 사람과 연극의 무대감독을 똑같이 ‘스트라다아라’라고 불렀다.이것은 사람이 연기하는 연극보다 꼭두극이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열화당 4만원.
  • 北아일랜드 평화 불안한 출발

    ◎신·구교 강경파 “분리장벽 추가 설치” 【벨파스트 AFP 연합】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신구교 양쪽의 강경파들은 벨파스트의 신교지구와 구교지구를 분리시키는 새로운 장벽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 있어 양측의 화해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했지만 구교도들에 대한 증오에 차 있는 신교도 주민들은 구교도 거주지역과의 사이에 높은 장벽을 세우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현재 구교도 거주지역과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나무 울타리는 며칠 내로 높이 3m,길이 400m의 견고한 장벽으로 대체될 예정인데,이 장벽은 두 적대적인 사회간의 평화를 지켜줄 “평화선”이라는 것이 장벽을 짓는 명분이다. 런던측이 평화협정에 고무돼 북아일랜드에 분파주의를 종식시킬 것을 호소하고 있는 시점에서 새로운 장벽을 세운다는 계획은 양측간 증오의 정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미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에는 이같은 장벽들이 15개나 존재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지난 30년간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 됐다.
  • 스리랑카 반군 자살 폭탄테러/민간인 등 11명 사망

    【콜롬보 AFP 연합】 스리랑카 캔디시에서 25일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반군들이 트럭을 몰고 불교 사원 앞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11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고 아누루드하 라트와테 스리랑카 국방차관이 밝혔다. 라트와테 차관은 수도 콜롬보에서 동쪽으로 112㎞ 떨어진 캔디시에서 발생한 이날 테러가 내달 4일 찰스 영국 왕세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스리랑카 독립 50주년 기념행사를 방해하려는 책동이라고 밝히고 행사는 예정대로 치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폭발로 스리랑카 문화의 중요 상징물로 여겨져온 16세기에 건조된 사원의 입구와 지붕이 파괴됐으나 사원 내부에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이 사원은 부처의 이(치아)를 보관하고 있어 달라다 마리가와(이의 사원)로 불린다.
  • 국호·상징물 제정(대한민국 50년:2)

    ◎48년 7월1일 제헌국회서 ‘대한민국’ 확정/제헌국회 헌법기조위원회/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논의/이승만 의장 ‘대한민국’ 상요 대세로 1948년 7월1일 제21차 회의가 열린 제헌국회 본회의장.의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놓고 2차 독회에 들어갔다.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신익희 부의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항목부터 축조심의에 들어갔다.이승만 의장(독촉)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국호개정이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국호는 차차 국정이 정돈되어 가지고 거게에 민간의 의사를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국호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문제 일으키시지를 말기를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국회 속기록) 이에 대해 최운교 의원(무소속)이 헌법기초위에서 심의한 국호가 몇가지며 그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이어 1조를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동의를 재청·삼청까지 얻어냈다.이때 조봉암 의원(무소속)이 제동을 걸었다.조의원은 “우리민족이 다 그렇게 만족치 않을 것이니 다음에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그는 1차 독회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말은 역사적 합리성으로 보거나 체제로 보거나 형식적 법통으로 보거나 천만부당하다”며 반대했었다. ○찬성 163·반대 2로 통과 이승만 의장이 다시 발언에 나서 고칠 필요가 있으면 다음에 하고,일단 원안대로 통과시키자고 무마했다.의회는 거수표결에 들어가 제1조를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반대 2명으로 통과시켰다.한민족의 새 역사를 열어 나갈 신생국의 이름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됐다.1948년 8월15일 정부가 출범하기에 앞서 한달 보름전 일이다. 새나라 출발에는 국호 제정이 선결과제지만 이승만의 모두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나라이름을 짓는 데는 많은 진통이 따랐다.국호가 갖는 상징성이 지대한데다,당시 좌우가 갈리고 정당·사회단체가 난립한 상태에서 각기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정 때 장차 수립할 우리 민족의 국가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좌우대결이 치열해지면서는 남한지역과 우파는 대한민국을,북한지역과 좌파는 조선을 지지하는 ‘남대한·북조선,우대한·좌조선’으로 굳어져 갔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 때 처음 쓰였다.1897년 고종이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국임을 강조하느라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1919년 상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따라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당연한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세력들이 해방후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예컨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 각 정치세력에게서 임시정부 수립대강에 관한 답신서를 받았다.이에 따르면 한민당이 결성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신익희 주축의 입법의원은 ‘대한민국’을,좌우합작위원회가 주도한 시국대책협의회는 ‘고려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준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집착했고,건준을 부정하는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규정했다.각 정치집단은 국호제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다툼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헌법기초 위에서 논의한 국호로는 ‘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등이 있었다.이때도 일부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호를 제정하자고 주장했다.그런데 5월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사용함에 따라 이 이름은 제헌의원들간에 대세로 자리잡았다. 국호에 관한 찬반 논의는,이승만 행정부가 1950년 1월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을 법률로 제정하자 자연 소멸됐다.“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또는 한국)으로 하고,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위해 조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45년 12월 첫 태극기 게양 국호외에 국가의 상징인 국기·국가도 제정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다.태극기는 대한제국이 정식 인정해 상해임정이 이어받은 국기였다.태극기는 1945년 12월24일 처음으로 미군정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와 함께 게양됐다.당시 조선성냥회사 사장인 신창균이 하지 장군의 보좌관에게 부탁해 성사시킨 것이다.미군정은 이듬해 1월14일 군정청 광장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가짐으로써 국기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무렵 만담가 신불출은 공연에서 태극기가 국기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비아냥거렸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이처럼 좌파세력을 포함한 일부에서 거부하긴 했지만 민심은 태극기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다만 그 도안이 다양한 데 문제가 있었다.독립문에 새긴 것,구왕실 소장품,미군정 문교부에서 공포한 도안,우리국기보양회가 제안한 모양 등 여러가지 태극기가 뒤섞여 사용됐던 것이다.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15일 문교부고시 제2호로 공포됐다. 그리고 애국가 가사는 1910년쯤 거의 완성됐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현재 애국가는 1946년 5월 ‘임시 중등음악 교본’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그러나 제헌국회에서는 “국가는 적당한 시기에 남과 북 전체 민족의 의사로서 제정하자”며 논의를 유보했다.따라서 애국가는 사회관행상 국가로서 불릴뿐 아직도 법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한 상태이다. ◎“성조기와 함께 미군정청에 태극기 게양하자”/45년 하지 장군보좌관에 요구 성사 시킨 신창균옹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지 석달여만인 1945년 12월24일 미군정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과연 독립을 이룰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그때 이는 국민에게 크나큰 위안을 준 ‘사건’이었다. 그같은 선물을 국민에게 전한 신창균옹(90)은 1940년부터 마카오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45년 4월 귀국한 그는 미군이 진주하자 9월 중순 하지 장군의 보좌관인 윌리엄스 중령을 찾아갔다.중령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입국해 공주 영명고교 교장을 지냈고,그 때문에 중령은 한국땅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다.신옹은 윌리엄스 교장에게 세례를 받은 인연으로 동갑내기인 중령과 친하게 지냈다. 중령을 만난 신옹은 “미군정청에 성조기가 휘날리는데 이곳은 조선땅 아닌가.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도 함께 게양하자”고 요구했다.중령은 그의 말에 찬성하면서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12월 중순 신옹이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중령은 이미 귀국했고 후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태극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으니 태극기를 빨리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사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당당하게 국기로서 대우받게 됐다. 신옹은 이후 조선성냥공장의 사장으로 새나라 경제부흥에 힘쓰는 한편 임정 요인들이 귀국해 만든 한국독립당에서 연락부장 등을 맡으며 활약했다.1948년 김구가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이후 일관되게 진보정치운동을 벌였으며 현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의장을 맡고 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문화부 차장) 최병렬(문화부 차장급) 김종면(문화부 기자) 박정현(정치부 기자) 서정아(정치부 기자) 강선임(DB부 기자)
  • 역경 이긴 반세기…한국혼 다시 일깨운다/정부수립50주년 기념사업

    ◎‘경제50년사’ 등 백서 발간… 고난 극복의 역사 재조명/창작극 ‘대한국 창조’ 순회공연… 국민축제 행사 다양/21세기 걸맞는 정책 수립… 학술대회 통해 비전 제시/‘겨레의 노래’ 재정·보급 등 나라사랑운동 지속 전개 98년은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반세기동안의 발전과 우여곡절을 되돌아보는 한 해이면서 동시에 21세기를 준비하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이기도 하다. 정부는 ‘정부의 회갑’을 맞아 알뜰하고 다양한 기념사업 계획을 범정부적으로 추진중이다.특히 광복 50주년 행사를 이미 3년전 치른 만큼 내실있는 행사 위주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부는 연중 기념사업을 펼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오는 8월15일에 행사가 절정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미 지난해 말 국무총리 자문기구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강영훈 전 총리)를 구성,사업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또 기념사업위원회 산하에는 정부 14개 부처 관계자들과 국회·법원 등 범정부적으로기념사업실무위원회(위원장 우근민 총무처 차관)가 구성돼 기념사업 계획의 수립·추진 및 조정작업을 맡고 있다.이와 함께 기획추진반(반장 최석충 총무처의정국장)이 구성돼 부처별 추진계획을 종합지원하고 추진상황을 점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각 분야별 기념사업 계획안은 다음과 같다. ▷정부수립의 의의 부각◁ ▲세미나 개최=서울 뿐 아니라 미국·캐나다·프랑스·독일 등의 지역을 순회하는 5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정부수립의 의의를 재조명한다.통계숫자로 사회변화를 알아보는 통계세미나를 개최한다. ▲독립운동 사료집 발간=해외에서 전개된 각종 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문헌을 발굴,보급한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개관=애국지사들의 영혼이 서려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역사관으로 꾸며 선열들의 옥중 수감생활과 모습을 재현해 청소년들과 후세들을 위한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역사·기록의 재정리◁ ▲정부 백서 발간=‘교육 50년사’로 교육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등 각 부처별로 백서를 발간해 반세기를 정리한다. ▲‘정부조직 변천사’ 발간=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면서 50년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온 정부 조직 변천의 모습과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또 ‘한국지방행정 50년사’를 발간해 지방행정의 변화상을 알아본다. ▲기념 영상물 제작=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룩한 과정을 영상물로 제작하고 사진과 그림 등을 통한 화보집을 발간한다. ▲기념전시회=기록으로 우리나라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국가기록물을 전시한다.또 정부수립 이후 발간된 문헌과 자료 가운데 현존하면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한다. ▷정부수립 유공자 발굴◁ ▲유공자 발굴=아직도 가려있는 정부수립 유공자를 찾아내 훈·포장을 하고 생존 애국지사와 제헌의원 및 초대 각료들을 위문해 격려행사를 갖는다. ▲유엔 참전용사 초청=생존해 있는 유엔참전용사들의 방한을 초청해 격려하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를 갖는다. ▷국민과 함께하는 행사◁ ▲8·15 경축식=국민 각계 각층이 참석하고 정부수립 유공 외국인 및 재외교민을 초청해 국가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도록 한다.동대문 운동장에서 광화문 사이에서 길놀이 행사를 갖고 국민적인 축제행사로 승화시킨다. ▲문화행사=종합가무극을 열고 표어 및 포스터를 공모해 국민의 참여의식을 높인다.또 지난 반세기동안의 생활용품을 전시한다.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한국의 발전과 역동적인 모습을 세계에 소개하는 영상자료를 제작한다. 서울미술제를 개최해 공예대전,서예대전,사진대전,미술대전,도시와 영상전 등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갖는다. 특히 충청북도는 정부수립 이후 현재까지의 변화과정을 연극으로 만는 창작극 ‘대한국 창조’를 전국 순회공연할 계획이다.이와함께 봉화올리기 행사를 재현해 시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한다. ▲국가상징물의 선양=태극기 거리를 조성하고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하는 등 태극기 사랑운동을 전개한다.나라꽃인무궁화 사랑하기 운동을 펼쳐 무궁화 분재·사진전시회·글짓기대회를 개최한다. 또 무궁화를 널리 선양한 남궁억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한다.이와함께 나라사랑하는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겨레의 노래­응원가’를 제정해 보급한다. ▲건군행사=건군 50주년을 맞아 국민과 군의 안보 공감대 형성을 위한 건군 행사를 갖는다.군부대를 공개하고 안보현장에 대한 견학 기회를 넓혀 국민과 함께하는 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국회개원 행사=국회내에 헌정기념관을 세워 헌정에 관련되는 영상물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대한민국 국회 50년사를 발간한다. ▷새시대를 미래상 정립◁ ▲21세기 정부의 비전 제시=지난 50년을 새롭게 조명하는 과거지향적인 행사와 함께 미래지향적인 정부의 미래상을 정립한다.이를 위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정부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하고 부처별 중·장기 계획을 수립한다. ▲학술대회 개최=21세기에 걸맞는 정부 미래상의 의견수렴을 위해 종합학술대회인 ‘21세기 정부의과제와 전망’을 개최한다.학술대회는 정치·행정·경제·사회 등의 분야별로 개최한다.통일에 대비한 해양정책토론회와 태평양 해양과학기술회의를 개최해 해양국가로의 잠재력을 높인다. ▷연중 추진계획◁ ▲1월 기념사업 공식 휘장 선정·보급 ▲2월 기념사업 표어 및 홍보 ▲3월 대한민국 정부50주년 기념사업 세부추진계획 확정 ▲4월 부처 및 단체별 세부추진계획 시행 착수 ▲5월 국회개원 50주년기념 관련행사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의 달 선포 ▲8월15일 정부수립 50주년 중앙경축식 ▲10월 건군 50주년 행사 ▲12월 기념사업 평가 및 정리,결과 보고서 채택 ◎정부조직 개편사/‘11부4처’로 출발… 40차례 변화/50년대 부흥부 전후부흥·경제정책 기획 조정/5·16뒤 경제기획원 신설… 수출드라이브 주도 대한민국 정부 50주년 역사는 정부조직 개편에서 찾을 수 있다.정부조직은 시대 변화와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48년 8월15일 11부4처로 출발한 ‘미니 정부’는그동안 40여차례에 걸쳐 변화를 거듭했다. 광복과 6·25를 겪은 50년대에는 체제형성 및 유지에 초점이 맞춰졌다.총리제의 폐지로 대통령중심의 체제정비와 3차례의 조직개편을 통해 전쟁 이후 부흥과 경제정책을 종합적으로 기획·조정하는 기구로 부흥부가 신설됐다. 60년 제2공화국 출범으로 행정권이 국무원에 소속되면서 정부조직은 또다시 개편을 맞았다.3·15 부정선거를 겪은 직후여서 경찰의 중립 확보를 위해 공안위원회가 구성됐고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감찰위원회가 부활됐다. 5·16 이후에는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조직의 근간이 바뀌었다.부흥부(건설부로 바뀜)가 건설부로 바뀌면서 산업정책기능과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를 통합한 경제기획원이 탄생했다.공보처와 중앙경제위원회 등이 신설됐다. 60·70년대에는 늘어나는 민원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청 단위의 행정단위가 급격히 늘어난 점이 특징이다.노동·철도·검찰청(63년),국세·수산·산림청(66년),관세·병무청(70년),항만청(75년),특허청(76년) 등으로 행정조직은 확대됐다.또 77년에는 동력자원부가 신설됐고 환경문제가 증가됨에 따라 79년에는 환경청이 새로 생겼다. 70년대 말에 들어서자 경제규모의 급격한 확대와 산업구조의 다변화로 거대한 정부조직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이에따라 81년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사회 건설을 기치로 내건 출범한 5공화국은 행정개혁을 통해 과감한 중앙행정부처의 부서 통합과 인원감축을 단행했다.공무원 숫자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한 것이다.신설된 부처는 올림픽 개최 결정으로 인한 체육부 정도에 불과했다. 88년 출범한 6공화국 역시 ‘작은 정부’ 정책을 유지했다.환경청이 환경처로,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89년) 바뀌었다.문민정부 들어서도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해 군살빼기가 계속됐다.집권초기인 93년3월 문화부와 청소년체육부가 문화체육부로,상공부와 동력자원부가 상공자원부로 각각 통합됐다. 대대적인 정부조직 개편은 행정쇄신위원회가 1년10개월 작업한 끝에 이뤄졌다.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거대화됐으며 이 과정에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건설부과 교통부가 건설교통부로 합쳐졌으며 상공자원부가 통상산업부로,보건사회부가 보건복지부로,환경처가 환경부로 바뀌었다. 새정부의 출범과 함께 비대해진 경제기획원이 최근의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또다시 정부조직에 또다시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정부조직이 어떤 형태로 짜여질지 주목된다.
  • 한나라,불심 달래기 동분서주

    ◎홍보물에 파계승탈 게재… 불교계서 발끈/이회창 후보,송월주 원장 찾아 직접 사과 한나라당이 불교계의 ‘원성’을 잠재우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사건의 발단은 이회창 후보의 법정 홍보물에 ‘거짓말,속임수,경선불복… 믿지 못할 사람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기겠습니까’라는 문구와 함께 나쁜상징물로 ‘파계승 탈’을 그려 넣은데서 비롯됐다.불교계는 당장 이후보의 공개사과와 홍보책임자의 출당조치를 요구하면서,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국적인 규탄대회에 돌입하겠다는 강경방침을 천명했다.국민회의와 국민신당측도 한나라당과 불교계의 갈등국면을 적극 활용할 태세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지도부는 연일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특히 불교신자인 조순 총재와 국회 불자의원모임인 정각회 회장출신인 권익현 선대위원장,김태호 사무총장 등이 동분서주하고 있다.지난 6일 김총장 명의로 사과 서한을 각 종단의 총무원장에게 보낸데 이어 7일에는 조총재와 김총장이 직접 조계종을 방문,송월주 총무원장에게 깊이 사죄했고 홍보물 제작책임자도 전격적으로 인사조치했다. 조총재는 부산까지 내려가 공을 들였다.8일 아침 부산 롯데호텔에서 부산지역 불교계 지도자와 조찬모임을 갖고 “최근 당 홍보물에 대한 불교계의 분노와 섭섭함을 잘 알고 있다”면서 “이는 당지도부의 입장이 아니라 실무자간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거듭 사과했다.낮에는 권익현 위원장과 함께 ‘내원정사 도량불사 회향법회 및 만등불사 회향법회’에 참석했다.또 권위원장은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열린 송월주 총무원장 출판기념회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그러나 불교계는 아직도 섭섭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한나라당의 불교계 ‘어우르기’는 선거막판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상(미국의 대통령 문화:3)

    ◎휠체어 앉아 ‘미국’을 일으킨 영웅/맥빠진 국민에 “무엇이든 해보자”/노변정담 설득… 공황극복 견인/국민신뢰 대단… ‘대통령학’ 모델/정계입문 초기 잇따라 선거 패배/소아마비로 “정치생명 끝장” 중평/목발 짚고 민주 전대 웅변 감동적 “나는 여러분에게 맹세합니다.또 나 스스로에게 맹세합니다.미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을 펼 것을 말입니다” 1932년 7월2일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장.대통령후보지명 수락연설에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뉴욕주지사가 처음으로 ‘뉴딜’을 외쳤을때 아무도 그 한 단어가 미국을 절망에서 구출하고 세계최고의 번영으로 인도할‘키워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후 ‘뉴딜’은 ‘대공황’의 반대어로 자리매김했으며 미국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나타내고 승리를 대표하는 어휘가 됐다. 루즈벨트는 선거운동과정에서도 대공황 여파로 자신감을 상실한 채 무기력해져 있는 미국민들을 향해 외쳤다.“어떤 방법이든 택하여 그것을 해봅시다.만일 실패한다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것을 해봅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해보자는 것입니다” 워싱턴 중심의 몰공원 남쪽 포토맥강가에 지난 여름 개장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기념공원은 어린 학생부터 노인들까지 하루종일 수많은 관람객들로 붐빈다.미 역사상 훌륭한 대통령 빅3에 들면서도 수도 워싱턴에 이렇다할 기념관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아 워싱토니안(워싱턴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로부터도 많은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던 참이어서인지 더욱 찾는 사람이 많다. 이 공원에는 그의 재임 4기를 시기별로 네개의 공간에 나누어 각종 상징적 조형물을 세우고 또한 대표적 어록을 벽에 새겨놓아 당시의 시대상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업적 등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미시간주에서 관광온 테드 모간씨(74)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국민 설득을 위해 자주 사용했던 라디오연설을 들은 기억이 있다”면서 한 실업자가라디오 앞에서 대통령의 방송을 듣고 있는 상징물 앞을 떠날 줄 몰랐다.‘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시도됐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연설은 당시 절망감에 사로잡힌 국민들에게 최고의 인기있는 복음이었다고 모간씨는 회상했다. 1차대전 이후 호황기의 절정에 다달았던 29년 말부터 갑자기 몰아닥친 대공황은 3년동안 5천개의 은행을 문닫게 했으며 그에 따른 기업과 공장들의 연쇄도산이 뒤를 이었다.근로자들이 땀흘려 저축한 돈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전체 노동력의 40∼50%에 달하는 3천4백만의 실업자가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거리를 배회했다. 이같은 암흑기를 지나면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눈덩이처럼 커진 미국민들에게 루즈벨트는 공황의 종식을 위한 ‘뉴딜’을 외치며 균형예산과 실업자 구조,금주법의 폐지 등을 공약으로 제시,무기력한 후버 행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루즈벨트가 실의에 빠진 유권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선거공약의 내용및 실현성 여부를 떠나 ‘의욕’이라는 심리적인 자극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그는 희망이 사라진 곳에 희망을 불러 일으켰으며 확신이 상실된 곳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선거결과는 루즈벨트가 유효표의 57%를 득표,선거인단 472명을 확보함으로써 40% 득표에 선거인단 59명을 확보한 후버 현직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승리했다.이렇게 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4선 대통령 루즈벨트시대가 개막된 것이다.초대 워싱턴 대통령 이래 불문율로 지켜져온 중임 전통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로부터 네차례나 대통령직을 부여받을 정도로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경제위기와 전쟁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미현대사에 있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의 모델로 기록되고 있다. 1882년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허드슨강변 동쪽 언덕에 위치한 하이드 파크에서 출생한 루즈벨트는 부유한 가정형편 덕분에 개인교습을 받고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어려서부터 유럽여행을 다니는 등 풍족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그의 성장기에 대통령으로 명성을 날리던 테오도어 루즈벨트(26대)는 먼 친척 형(12촌)뻘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그의 부인이 된 일리노어 루즈벨트는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카로 부친을 일찍 여의였기때문에 1905년 그들의 결혼식에는 현직 대통령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바드 대학과 콜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정계입문한 루즈벨트는 각종 선거에서 여러차례 낙선을 경험하는 등 초기에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우드로 윌슨 대통령(28대)에 의해 해군성 차관보로 임명돼 1차대전 당시 중요한 해군전략 수립에 관여했으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이같은 1차대전때의 그의 경험은 대통령으로 2차대전을 맞았을때 십분 활용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1920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제임스 콕스 대통령후보의 런닝메이트로 출마해 고배를 마시는등 중앙정치무대와는 인연이 없는듯 했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잠시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정치를 떠나 있을때 그는 엄청난 개인적 불행을 당하게 된다. 이듬해 8월 캐나다 해안에서의 휴가중 찬물에 빠져 감기에 걸린 것이 척수성 소아마비로 발전,양다리를 못쓰게 됨은 물론 팔과 손에까지 부분 마비가오게 되었다.당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조지아주의 웜스프링스로 가서 3년동안 기적적인 투병으로 그는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다. 1924년 그가 휠체어를 타고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타났을때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그가 목발에 의지해 단상에 기대서서 연설할 때는 그의 인간승리 모습에 감동적인 환호를 보냈다.결국 그는 1928년 뉴욕주지사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루즈벨트 도서관 사서 레이몬드 타이크만/“항상 국민과 함께한 지도자”/4연임,전쟁 마무리 위한 국민의 선택 FDR(프랭클린 D.루즈벨트의 약자 애칭)학의 권위자인 뉴욕주 하이드파크 프랭클린 루즈벨트 도서관의 선임 사서레이몬드 타이크만 박사는 그가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 대통령이었다고 소개했다. -FDR이 미국민들로부터 빅3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공황으로 잃은 정부의 신뢰회복을 위하여 그는 국민들과의 직접대화를 택했다.라디오 연설시간인 ‘노변정담’을 통해 그는 정부정책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이해를 구했다.국민들은 그가 국민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뉴딜정책이 국민들에게 어필한 이유는. ▲후버 대통령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제퍼슨적인 자유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면 FDR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해밀튼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대공황으로 의욕을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정부와 대통령의 적극적인 유도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불문율로 돼있던 중임 전통을 깨고 3연임에 도전하게된 이유는. ▲FDR도 처음에는 주저했다.그러나 대공황의 그늘이 아직 걷히지 않은 가운데 2차대전이 발발했고 불과 수개월만에 프랑스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그의연임은 국민적 합의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연임 역시 전쟁의 성공적 마무리에 대한 국민의 기대 때문이었다. -FDR에게 4연임까지도 허용했던 미국민들이 1951년대통령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22차 헌법수정안을 서둘러 마련한 이유는. ▲국민들이 경제위기및 전쟁위기 상황하에 있을때는 강력한 정부,강력한 지도력을 원했지만 일단 모든 것이 정상상태로 회복된 후에는 큰 정부의 필요성도,집중된 권력의 필요성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의 기본원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중국 티벳 라싸 포탈라궁(세계 문화유산 순례:52)

    ◎히말라야운산의 웅대한 ‘티벳성전’/7세기 통일티벳왕,아내 당 공주 맞아 대역사/높이 117m 폭 110m 길이 360m 13층 왕궁 중국 서장 자치구 티벳의 첫도시 랏사를 ‘태양의 도시’라 했다.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산맥의 산자락에 둘러싸인 해발 3천700m의 고지라 태양이 가가워서 그랬을까.사천분지와 티벳고원을 지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나무 한 그루,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산맥과 히말라야의 설산이 펼쳐졌다.랏사는 그런 산자락에 둘러싸인 작은 평지위에 있다.평지 가운데 작은 산 위에서는 포탈라의 황금빛 지붕이 번쩍였다. 티벳 공까공항서 랏사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40여분이 걸렸다.산 허리를 깍아 어렵게 닦아놓은 구절양장(구절양장)의 길가 바위에는 불상들을 새겼다.그리고 5색의 타르초 깃발 너머로 티벳불교의 상징물인 코르텐(종탑)들이 시야로 들어왔다.포탈라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설산에 안겨 있다.그러나 랏사로 들어오면 포탈라는 모든 것을 압도했다.과연 세계 10대 건축물다운 포탈라는 마포르산(홍산)언덕 위에 솟아 있다.13층에 높이 117m,폭은 110m,동·서의 길이가 360m나 된다. ○해발 3,700m 고지 위치 포탈라궁 건물 정상은 황금을 입힌 전통양식의 구리기와 지붕 5개로 이루어졌다.그리고 건물 앞에 평평한 공간을 배치했다.순금으로 도금한 번쩍이는 지붕 금정을 늘상 이고 있는 포탈리궁에서는 랏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지난 1천여년동안 티벳인들의 정신과 육체,삶과 영혼을 지배하던 권위와 신비가 담긴 영력의 장소이기도 했다.전체 넓이가 36만㎡에 이르는 궁은 남쪽 출입구를 제외하고 성벽과 담으로 둘러싸여 바깥세상과 차단됐다.남쪽문을 나서면 곧바로 연결되는 계단이나 서쪽의 가파른 비탈길로 오를수 있다. 궁궐이 있는 마포르산 밑으로는 티벳군 총사령부의 벙커다.그리고 한변이 10여m를 넘는 대형 걸개그림 탱화를 보관해두는 거대한 창고도 마포르산 밑에 마련했다.뒷 정원격인 용왕담에는 물결이 잔잔하다. 포탈라궁은 우리 신라시대인 7세기에 건설됐다.티벳의 역사와 티벳인들의 기원을 담은 성전이자 궁궐이다.인도불교가 티벳에 들어온 것은 5세기 무렵이다.그 인도불교는 티벳 토속의 원시무속 종교인 본교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그리고 나서 티벳 특유의 종교로 자리매김한 라마불교의 역사도 이 궁에 서려 있다.그런 곡절속에 포탈라의 주인은 세속 권력의 챔피언인 황제에서 라마불교의 일인자인 달라이 라마로 바뀌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자 라마불교의 사원이 됐다.포탈라란 이름은 본래 ‘관음의 성지’란 뜻이다.이 궁은 티벳 각 부족과 지역을 통일,강력한 티벳왕국(토번)을 세운 송첸캄보가 631년에 지었다.처음 1천간 규모로 지었는데,당시 당나라 황실의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기 위해 이 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그러니까 포탈라궁은 세속의 티벳왕궁이었던 것이다. ○세계 10대건축물 명성 그러나 각 부족과 지방 분열로 왕권의 공백이 생기면서 세속권력까지 장악한 라마불교의 지도자가 궁을 접수했다.그뒤 왕궁이란 기능말고도 사원 기능을 추가하고 랏사 중심지에서 떨어진 산속 드레풍사원(철봉사)에 살던 달라이 라마가 들어왔다.달라이라마 5세때인 1645년 일이다.오랜 분열과 내전,벼락등으로 폐허화한 포탈라를 접수한 달라이 라마 5세는 궁의 성벽과 성루등을 재건했다. 달라이 라마 5세가 궁을 재개한 것은 정교합일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신권뿐 아니라 세속권력마저도 장악한 달라이 라마는 1690년 오늘날 사원으로 쓰는 홍궁을 따로 착공,1693년 완성했다.그리고 오늘날 라마교의 상징인 5개의 금정을 추가로 세웠다.궁의 외벽은 흰색과 붉은색을 칠해 백궁과홍궁을 구분했다.그래서 백궁은 달라이 라마가 사람을 만나고 정무를 돌보고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게 됐다.또 홍궁은 지금까지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궁에는 대불만도 1천구가 봉안됐다.작은 불상까지 합하면 수만점이 넘을 것이란 추산이다.여느 부처상과 달리 포탈라궁의 부처상은 화려했다.흥미로운 현상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소상이 더 눈에 띄거니와 달라이 라마의 소상을 모신 각이 불상을 모신 불전에 비해 훨씬 많다는 점이다.이는 라마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부처가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것이라고 믿는 환생설을 바탕으로 달라이라마를 생불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 거처·사원 홍궁사원의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 소상들은 한결같이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다.중카바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뿌리로 달라이 라마 2세가 그의 직계 제자다.지금 미국에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 14세를 비롯한 모든 달라이 라마들이 그의 법통을 이은 후계자인것이다.중카바는 14세기에 라마교를 개혁하고 이른바 격로파를 창시한 인물이다.그러니까 아마교를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한 이가 그다. 중카바가 이끈 격로파의 승려들은 노란색 고깔모자를 썼다고 한다.그래서 황모파 또는 황교파라고 하는 이들은 라마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이들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지위가 부처에 버금갈정도로 신격화한 것도 결로파 세력이다.포탈라 홍궁에서 만난 중카바와 달라이 라마 소상들은 라마교가 어떤 유형의 종교인가를 한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