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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이 영화] 인종차별에 맞선 美흑인들의 역사

    [지금, 이 영화] 인종차별에 맞선 美흑인들의 역사

    선언에도 격이 있다. 이를테면 “무조건 아메리카가 우선”이라는 미국 대통령의 말과 “나는 너의 검둥이가 아니다”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외침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어느 쪽의 선언이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잘 안다. 미국 대통령이 구상하는 아메리카는 배타적이다. 다른 국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자국민들에게도 그렇다. 검은 피부 혹은 노란 피부의 인종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하얀 피부를 가진 인종만 일등 시민이 될 수 있다. 실은 다들 유색인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흰색도 색(色)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선언은 이런 폭력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포스트휴먼 운운하는 요즘 시대에도 이들의 목소리는 절박한데 하물며 옛날에는 오죽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 앰 낫 유어 니그로’는 1960년대 미국을 조명한다.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를 누빔점 삼아서다. 그의 목표는 “살해당한 친구들을 통해 미국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이때 살해당한 친구들은 세 명의 인권 운동가―메드거 에버스(1963년 사망), 맬컴 엑스(1965년 사망), 마틴 루서 킹(1968년 사망)을 가리킨다. 방법과 노선은 달랐으나 제임스 볼드윈을 포함한 네 사람은 인종 차별이 사라진 세상을 꿈꿨다.당시 인종 차별은 실생활에서뿐 아니라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도 행해졌다. 매스미디어는 민첩하고 영리한 백인과 대조되는 게으르고 아둔한 흑인, 문명화된 백인을 괴롭히는 야만적 흑인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이것은 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위계적으로 형상화하던 방식과 같다.) ‘아이 앰 낫 유어 니그로’에서 라울 펙 감독은 이를 폭로한다. 자명하게 여겨지는 재현과 표상을 문제삼아야 한다는 의도다. 현실을 다시 나타내 보이는 상징물은 그 안에 특정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재현과 표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덜컥 믿어서는 안 된다. 거듭 밝히건대 선언에도 격이 있다. 인종 차별은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고 해서 단숨에 철폐되지 않는다. 한국에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고 여권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지 않았듯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권리는 여전히 낮다. 여성과 흑인의 신체는 치열한 정치적 장이다. 그래서 “나는 너의 (계집애 또는) 검둥이가 아니다”로 집약되는 투쟁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 싸움은 사안을 똑바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권력자는 기득권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건의 본질을 자꾸 흩트리려고 하니까. 볼드윈은 이렇게 썼다. “직시한다고 해서 모든 게 바뀌진 않지만 직시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직시하는 데 이 영화가 도움이 될 것이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 칼럼니스트
  • 휴전벽 중간에 놓인 ‘평화의 다리 ’… 北은 ‘북남하나’ 새겨

    휴전벽 중간에 놓인 ‘평화의 다리 ’… 北은 ‘북남하나’ 새겨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약속하는 상징물인 ‘휴전벽’ 중간은 허물어져 있었다. 대신 무너진 벽들이 아치형 다리를 만들어 문처럼 활짝 열렸다. 인류 평화를 위해선 ‘벽’이 아닌 ‘다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평창조직위원회는 5일 평창선수촌에서 휴전벽 제막식을 갖고 처음으로 모습을 공개했다. 휴전벽은 ‘올림픽 기간 동안 모든 인류가 전쟁을 멈추고 대화와 화해를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는 올림픽 평화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하는 조형물이다.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부터 선수촌에 설치돼 이번이 일곱 번째다. 평창 휴전벽은 다소 파격적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회색 벽돌로 이뤄진 데다 벽에 새겨진 문양도 동계올림픽 종목을 나타내는 픽토그램으로 표시하는 등 평범했다. 캐나다 원주민 예술 작품을 소재로 한 2010 밴쿠버대회, 투명한 벽으로 미감을 살린 2014 소치대회 휴전벽과 비교하면 투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높이 3m, 너비 6.5m의 벽 중간이 수평으로 구부러져 다리가 되는 형상을 표현했다. 제작을 담당한 이제석 디자이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벽이 아닌 다리를 만들라”는 메시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디자이너는 인권과 평화,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인이다. 휴전벽엔 ‘평화의 다리 만들기’(Building Bridges)란 이름을 붙였다. 이전 대회에선 영어 그대로 휴전벽(Truce Wall)이라고 불렀지만 평창에선 휴전벽화라는 의미(Truce Mural)로 바꿔 올림픽 상징성을 더했다. ‘월’(Wall)에는 ‘단절’ 등 부정적인 뜻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 북한 선수단도 제막식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휴전벽에 ‘북남하나!’ 등 글귀를 새겼다. 장 위원은 함께 식장을 찾은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 종종 대화를 나눴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이희범 평창조직위원장도 참석해 휴전벽에 “평창은 평화”라고 적었다. 앞서 유엔은 지난해 11월 열린 총회에서 평창대회를 전후해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평창올림픽 휴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도 장관은 축사에서 “휴전벽이 평화롭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소중한 상징이 되길 기대한다”며 “아울러 평창을 통해 남북 군사적 대치가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올림픽을 계기로 지구촌 곳곳에서 갈등과 분쟁으로 점철된 벽을 허물고, 소통·화해·화합·평화의 다리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되자”고 촉구했다. 휴전벽은 대회 기간 내내 임원·선수들의 서명으로 꾸며지고, 대회 뒤엔 평창 올림픽플라자와 강릉 올림픽파크에 전시돼 올림픽 평화 정신을 기리는 유산으로 남는다. 평창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150년 만에 귀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150년 만에 귀환

    19세기 중반 이후 150여년간 행방이 묘연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됐던 조선 왕실의 어책이 프랑스에서 돌아왔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프랑스 개인 소장자로부터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을 구매한 뒤 지난 20일 국내에 들여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했다고 31일 밝혔다.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1819년(순조 19년) 효명세자빈을 책봉할 때 수여한 것으로 조선 왕실의 중요한 의례 상징물이다. 죽책이란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등을 책봉할 때 그에 관한 글을 대나무쪽에 새겨서 수여하는 문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해외 경매에 나온 한국 문화재를 살펴보던 중 지난해 6월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이 프랑스의 한 경매에 출품된 사실을 확인한 뒤 이 죽책을 상속받은 소장자와 협의해 약 2억 5900만원을 주고 사들였다. 구매 대금은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 게임즈의 기부금을 활용했다.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조선왕실의 뛰어난 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자료를 환수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사라졌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고국의 품으로

    사라졌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고국의 품으로

    화마로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이 프랑스에서 국내로 환수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은 “조선왕실의 소중한 문화재인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이 프랑스 경매에 출품된 것을 발견해 매입을 추진한 결과 지난 20일 국내로 안전하게 들여왔다”고 31일 밝혔다. 죽책은 1857년까지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돼 있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돼 왔다. 그러나 지난해 프랑스 경매에 출품된 이 죽책은 과거 파리의 고미술 시장에서 한 보석상에 거래된 뒤 그의 집안에서 상속되어 온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65세인 그의 손녀가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경매에 물품을 내놓으면서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차장은 “국외 경매에 나온 한국문화재를 모니터링하던 중 죽책을 발견했다”며 “고화질 사진을 입수해 죽책문의 내용을 판독하고 이를 조선왕조실록 및 의궤에 기록된 내용과 대조한 결과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입수 경위를 설명했다. 효명세자빈 죽책은 1819년(순조 19년)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가 효명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수여된 것으로 조선왕실의 중요한 의례 상징물이다. 높이 25cm, 각 폭 너비 17.5cm, 전체 너비 102cm에 이른다. 크기, 재질, 죽책문의 서풍과 인각 상태 등 면에서 전형적인 조선 왕실 죽책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왕실 공예품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죽책이란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등을 책봉할 때 그에 관한 글을 대나무쪽에 새겨서 수여하는 문서로, 착한 일은 권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말라는 내용을 주로 담는다. 죽책은 조선왕실의 어책과 어보와 아울러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예술의 시대적 변천을 반영한다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에 지난해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번에 환수된 효명세자빈 죽책은 왕실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 전문박물관인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된다. 박물관은 조사, 연구, 전시 등을 통해 이 죽책을 조선의 높은 문화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사용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靑 “北참가·단일팀 구성… 국민 우려 귀담아듣겠다”

    한국당 “평양올림픽 선언할 것” 바른정당 “마식령 체제 선전” 국민의당 통합찬반 따라 엇갈려 민주당 “반대만 하는 비난 중단” 청와대는 21일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와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 등의 우려와 비판에 대해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바라는 진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고 귀담아듣겠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또 “평창올림픽이 성공할 수 있도록 야당과 언론도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단일팀 논란이 정치권·언론은 물론 현 정부의 주요 지지기반인 2030세대에서도 일부 부정적인 양상으로 표출되자 비판논리를 차단하고 국민에게 직접 북한 참가의 의의를 설득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을 놓고 그동안 땀과 눈물을 쏟으며 훈련에 매진해 왔던 선수 일부라도 출전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에 대해 윤 수석은 “남북한 화해를 넘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구축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며 “적어도 올림픽 기간만큼은 평화롭게 행사를 치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한편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문재인 정권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자진 반납하고 평양올림픽을 선언한 것”이라며 “순수해야 할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가 정치 논리로 얼룩지고 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은 성공적 평화올림픽을 개최한 지도자로 포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종철 바른정당 대변인도 “마식령 스키장은 김정은 체제 선전을 위해 ‘속도전’으로 지은 것”이라며 “인권 탄압 상징물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국민의당은 예술단 사전점검단 파견이 취소됐다가 성사된 것과 관련, 통합 찬반파 사이에 입장 차를 보였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대화의 변화가 있음에도 반대만 하는 한국당은 비난을 중단해야 한다”며 “정치권도 온 국민의 바람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평화 올림픽 반대 “나경원 파면” 청원 봇물

    평화 올림픽 반대 “나경원 파면” 청원 봇물

    “평창올림픽이 평양올림픽으로 둔갑하고 있다”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남북 단일팀 출전 반대 서한을 보낸 나경원 의원을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직에서 파면시켜 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16건 등록됐다.21일 청와대 국민 청원게시판(www1.president.go.kr/petitions)을 보면 평창동계 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대회 조직위원을 맡고 있는 나 의원의 파면, 자격 박탈, 해임 등을 건의하는 청원이 쏟아졌다. 이 가운데 참여 인원 4만명을 넘긴 청원도 확인됐다. 한 청원인은 “늦게나마 북한의 합류로 평창올림픽이 평화올림픽이 되길 기원하며 가슴 조마조마하게 개최를 기다리고 있다”면서 “ 나경원 의원이 위원직을 개인적, 독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수많은 외교 관례와 그동안의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나 의원은 앞서 보도자료를 통해 “남북 단일팀 구성, 한반도기 공동입장, ‘북한 선전요원’ 방문단, 김정은의 체제 선전장이자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탄압의 상징물로 여기는 마식령 스키장에서의 남북 공동 스키훈련 등에 합의한 정부가 과연 대한민국 정부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나 의원은 “평창올림픽이 평양올림픽으로, 북한의 체제선전장으로 둔감되어선 안될 것”이라면서 “이는 IOC 헌장에 명시된 올림픽의 정치 중립성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기에 이런 우려를 담아 IOC와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지도부에 서한을 발송했다”고 덧붙였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나경원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둔갑 안돼”

    나경원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둔갑 안돼”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이행에 사로잡혀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문재인 정부가 평창올림픽을 정치 도구화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나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경원과 대한민국 그건, 이렇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에 분명히 명시된 올림픽의 ‘정치 중립성’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이렇게 지적했다. 나 의원은 IOC 지도부 등에 이런 우려를 담은 서한도 보냈다고 밝혔다. 나 의원은 현재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 의원은 정부의 아이스하키팀 남북 단일팀 구성 등과 관련해 정치 홍보 수단으로 올림픽을 이용한다며 비판했다. 나 의원은 “‘빙판 위 작은 통일’ 홍보 이벤트를 위해 우리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외면한 남북 단일팀 구성, 북한 핵개발 이전 90년대 사고에 갇혀 시대를 역행하는 한반도기 공동입장, 선수는 10여명에 불과한 600명 이상의 소위 ‘북한 선전요원’ 방문단, 김정은의 체제 선전장이자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탄압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마식령 스키장에서의 남북 공동 스키훈련 등을 합의한 정부가 과연 대한민국 정부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북한에 대해 단 한 푼의 지원이라도 이뤄진다면 유엔 대북제재결의나 우리의 5·24조치를 우리 스스로 위반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나 의원은 “무엇보다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이 북한의 대북 제재 회피에 동조하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나 의원은 “더 이상 평창올림픽이 ‘평양’올림픽으로, 북한의 체제선전장으로 둔갑돼선 안 될 것”이라고 재차 강조한 뒤 “이는 IOC 헌장에 분명히 명시된 올림픽의 ‘정치 중립성’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려를 담아 IOC 및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 지도부에 서한을 발송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평창 패럴림픽에도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나 의원은 “문재인 정부는 우리의 평창올림픽을 정치 도구화시켜 북한에 내어주는 남북한의 결과를 이제라도 수정해야 할 것”이라며 “다 내어준들 평화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안산시 초지역 일대에 테마타운 ‘아트시티’ 조성

    안산시 초지역 일대에 테마타운 ‘아트시티’ 조성

    경기 안산시 지하철 4호선 초지역 주변에 주거, 교육, 쇼핑, 문화예술이 집약된 테마타운 아트시티(art city)가 조성된다. 제종길 안산시장은 8일 런던대 피터 비숍(Peter Bishop) 석좌교수팀과 공동으로 진행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결과를 발표하고 ‘아트시티 조성’을 올해 중점 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초지역은 지하철 4호선, 수인선, 소사∼원시선 등이 지나는 초역세권이다. 시는 이 일대 빈터 13만 3700여㎡와 와스타디움 주차장 부지 등 82만 5000㎡에 문화시설, 시민광장, 서울예술대학 캠퍼스, 쇼핑센터, 스포츠시설 등을 갖춘 아트시티를 건설한다. 제 시장은 “도심 속 신도시 개념인 ‘아트 시티’는 기존 상권과 연결될 수 있는 도심 상가의 한 축으로서 안산시의 랜드 마크(landmark, 상징물)가 될 수 있는 고층 타워를 포함해 문화시설, 시민광장, 예술대학 캠퍼스, 쇼핑센터, 스포츠시설, 쉼터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고 설명했다. ‘아트 시티 내부는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보행자 거리로 조성되며, 고잔역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을 직접 연결하는 구조물도 만든다. 일부 거리는 ‘스타 스트리트(star street)’로 조성해 서울예술대학 출신 스타들의 핸드 프린팅 전시공간을 조성한다. 시는 공청회 등을 통해 시민의 의견을 들은 뒤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사업에 착수할 방침이다. 제 시장은 “평면적이고 건축미가 없는 안산을 활기 넘치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주거, 문화, 쇼핑시설 등을 고루 갖춘 테마타운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며 시민의 협조를 당부했다. 한편 이번 프로젝트는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영국에서 ‘런던 디자인정책(Design for London)’ 등을 기획한 런던대 피터 비숍 석좌교수팀이 참여해 완성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퍼블릭IN 블로그] 세입은 줄고 나갈 돈은 많은데… 홍준표 성과 ‘채무제로 경남 ’ 유지해야 하나

    경남도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경남지사 시절 업적으로 꼽히는 ‘채무제로’ 유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7일 경남도에 따르면 2016년 당시 홍 지사는 도 빚을 모두 갚고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채무제로 선언을 했다. 도는 홍 전 지사가 채무제로 선언을 한 뒤 지금까지 빚 없이 꾸려 가고 있지만 그동안 세입은 줄고 세출은 늘어나 채무제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고 밝혔다. 도 예산담당 관계자는 “경기불황 탓에 재정여건도 갈수록 악화돼 특히 올해는 가용재원이 대폭 줄어드는 바람에 빚을 내지 않고 예산을 짜느라 애를 먹었다”며 “채무 없는 재정이 한계에 이르러 올해 추경 때는 채무제로를 포기해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 “세수불균형” 집행부 채무계획에 도의원들 반대 경남도 올해 당초 예산은 7조 2797억원으로 지난해보다 3219억원이 늘어났다. 도 관계자는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취득세 수입이 크게 감소하는 바람에 올해 세입에서 지방세 수입이 지난해보다 대폭 줄었다”고 설명했다. 세입은 크게 줄어든 반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많이 늘고, 도비 지원 국고보조사업도 증가했다. 도에 따르면 세입과 세출 불균형 탓에 도지사가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올해 가용예산이 1000억원에 그쳐 예년 5000억~6000억원에 비해 턱없이 적다. 도는 올해 당초 예산을 짜면서 채무제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해 지역개발기금 1500억원을 차입하기 위해 도의회에 의견을 물었으나 도의회는 반대했다. 경남도의회는 전체 의원 55명 가운데 한국당 소속이 49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더불어민주당 3명, 국민의당 2명, 정의당 1명이다. 도와 도의회 안팎에서는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이 절박한 한국당 소속 도의원들이 홍 대표의 ‘채무제로’ 치적이 가능한 한 연명되게 할 의도에서 지역개발기금 차입을 반대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 “홍 대표 치적 유지로 한국당 공천 노리나” 도는 지역개발기금 차입 무산에 따라 올해 예산 세출을 최대한 구조조정해 초긴축으로 짰다고 강조했다. 도 예산 관계자는 “마른 수건을 짜고 또 짜듯이 예산을 편성했지만 그래도 지출예산이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세입·세출안 시기를 조정하는 방법으로 올해 당초 예산을 겨우 맞췄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국비 지원 사업에 대한 지방비 부담 예산과 의무경비 예산 등을 9월분까지만 반영하는 등 예산 지출 시기 조정을 통해 빚을 내지 않는 예산안을 편성했다. 도는 올해 세입이 늘어나지 않아 재원 확보를 하지 못하면 추경 때는 지역개발기금을 차입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밝혔다. 도 관계자는 “재정 여건이 내년에도 어려우면 채무가 불가피한 실정”이라고 내다봤다. 지자체 예산담당 공무원들은 “악성채무를 쌓지 않는 범위에서 경제 상황에 따라 재정운용을 탄력성 있게 할 필요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 말라죽은 ‘채무제로 기념나무 ’ 도 골치 홍 전 지사는 경남도 채무 제로를 이룬 기념으로 2016년 6월 1일 경남도청 정문 안 정원 중앙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도청에 들어서면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홍 전 지사는 “내 다음 지사가 빚을 내려면 이 사과나무를 뽑아 내야 할 것”이라면서 틈틈이 사과나무를 둘러보며 애착을 보였다. 홍 전 지사의 특별 관심에도 불구하고 사과나무는 석달 보름여 만에 말라죽고 말았다. 홍 전 지사는 죽은 사과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을 심었으나 주목마저 얼마 뒤 말라죽어 다시 새 주목을 심었다. 홍 전 지사가 대통령 출마를 위해 지사직을 중도에 그만두고 떠난 뒤 시민단체 등은 채무제로 기념나무를 ‘홍 전 지사의 보여주기식 도정 상징물’이라며 ‘뽑아 없애라’고 요구해 애먼(?) 주목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올림픽 오디세이] 방대한 문화ㆍ역사, 한 치 로고에 담다

    [올림픽 오디세이] 방대한 문화ㆍ역사, 한 치 로고에 담다

    2015년 9월 2020도쿄하계올림픽 대회조직위원회는 일본의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 사노 겐지로가 제작한 대회 엠블럼에 대해 사용 중지 결정을 내렸다. 앞서 2개월 전 조직위는 일본 국내외에서 응모한 104점의 후보작 가운데 알파벳 ‘T’를 모티브로 한 사노의 작품을 선정해 도쿄올림픽 공식 엠블럼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났다. 엠블럼 자체가 외국 디자이너의 작품을 도용했다는 주장이었다.주경기장 건설계획 변경으로 한 바탕 곤욕을 치렀던 조직위원회는 부랴부랴 조사에 착수했고, 벨기에의 그래픽 디자이너 올리비에 도비가 두 해 전 디자인한 한 극장의 로고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도비 역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디자인의 구도와 글씨체가 비슷하다”며 “사노가 그대로 베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2년 전 세상에 나온 내 작품을 한번도 보지 않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며 표절 의혹을 드러냈다. “작년 11월 이미 디자인을 내정한 뒤 오랜 시간에 걸쳐 세계 각국의 상표를 확인한 뒤 올림픽 엠블럼 디자인을 발표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며 사노의 표절 의혹을 완강히 부인한 조직위는 그러나 네티즌의 계속된 추궁에 시달리다 결국 엠블렘 채택을 철회했고, 이듬해 4월 에도시대의 문양인 ‘이치마쓰모요’를 테마로 삼아 다양한 모양의 남색 사각형 체크무늬로 꾸며진 새 엠블렘을 발표했다. 흔히 올림픽 로고라고 불리는 엠블럼은 개최국의 특성과 정체성, 문화·역사까지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 해당연도 개최국의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제작하지만 승인 여부는 물론, 향후 저작권과 소유권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갖는다. 올림픽 엠블럼은 선수들의 유니폼 등을 비롯해 올림픽 스폰서에 의한 홍보 자료에 사용되는 IOC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 엠블럼이 사용된 건 1932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대회부터다. 프랑스 샤모니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렸던 1~2회 때는 대회 포스터만 사용됐는데, 레이크플래시드 조직위는 포스터와 같은 디자인의 엠블럼을 만들어 좀 더 집약적으로 대회를 표현했다. 흑백으로 단조롭던 색상도 1952년 오슬로(노르웨이) 대회부터 컬러를 썼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이방인’ 핼러윈 준비하는 서민정 포착 ‘큰 호박을 번쩍’

    ‘이방인’ 핼러윈 준비하는 서민정 포착 ‘큰 호박을 번쩍’

    ‘이방인’ 서민정 가족의 유쾌한 핼러윈 파티 준비 과정이 공개된다. 23일 방송되는 JTBC ‘이방인’에서는 촬영 당시 10월 31일 핼러윈 축제를 앞둔 서민정 가족이 핼러윈의 상징물인 호박등 잭오랜턴을 직접 만들기 위해 호박 농장을 찾는다. 공개된 사진에는 서민정이 자신의 몸집만한 거대한 호박을 들기 위해 고분군투하고 있어 호기심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고 있다. 어디를 봐도 주황빛 대왕호박들이 널려있는 모습은 국내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진풍경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 이에 신난 서민정이 장난끼가 발동한 것. 바위 같은 호박 들기 도전에 나선 모습은 그녀가 미소천사에서 괴력천사로 변할 수 있을지 궁금증과 함께 벌써부터 폭소를 유발하고 있다. 또한 두 쪽으로 갈라진 호박을 본 그의 남편 안상훈이 허당미 넘치는 한 마디를 내뱉어 주위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고 해 그의 허술함이 어디까지 일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날 늘 해피 바이러스를 뿜어냈던 서민정 가족에게 새빨간 사과 사탕을 산 이후 각종 사건사고가 발생, 과연 자신들을 덮은 불행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스펙터클한 핼러윈 준비 에피소드가 그려질 ‘이방인’에 대한 본방사수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한편, JTBC ‘이방인’은 이날 오후 6시에 방송된다. 사진제공=JTBC ‘이방인’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두물머리 작은 산사에서 ‘왕실의 불상’이 쏟아졌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두물머리 작은 산사에서 ‘왕실의 불상’이 쏟아졌다

    절집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장쾌한 것으로는 남양주 수종사(水鐘寺)를 첫손가락에 꼽아도 좋을 것이다. 운길산 중턱의 수종사 마당에서는 북동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북한강과 남동쪽에서 달려오는 남한강이 합쳐져 마침내 한강을 이루는 양수리(兩水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누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일대를 왜 두물머리라 부르는지 알 수 있다.절의 창건과 관련해 ‘수종사 중수기(重修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한양 동쪽 칠십리에 운길산이 있고, 이 산에 절이 있으니 수종사다. 세조가 천순 3년(1459·천순은 명나라 영종의 연호) 이두수(二頭水)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중 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튿날 세조는 바위굴에서 18나한상을 발견하니 절을 짓게 하고 수종사라 이름 지었다.’그런데 수종사에는 더 이른 시기의 사리탑이 남아 있어 세조의 창건 설화를 무색하게 한다. 정혜옹주(?~1424) 사리탑이다. 정혜옹주는 태종과 의빈 권씨 사이에 태어났다. 생전에 불심이 깊었는데 다비하자 사리가 나와 사리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리탑의 지붕돌에는 ‘류씨와 금성대군이 시주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1426~1457)은 어린 시절 의빈 아래서 컸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얼굴 한번 보지 못했을 정혜옹주의 사리탑을 발원한 이유일 것이다.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 서거정(1420~1488)의 ‘동문선’에는 ‘수종사 윤(允)선사에게 주는 시’(寄水鍾寺允禪老)가 있다. ‘용진강 위에 옛 가람이 있는데/ 돌길을 굽이돌아 삼나무 숲으로 들어가네’로 시작한다. 과거에는 양수리를 용나루(龍津)라 했고, 그 앞 한강은 용강(龍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세조 시대 창건한 젊은 사찰이었다면 서거정이 ‘옛 가람’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다산 정약용(1762~1836)은 ‘수종사는 신라의 옛 절인데, 샘이 있어 돌 틈으로 맑은 물이 흘러나와 떨어질 때 종소리를 내므로 수종사라 부른다”고 했다. 다산이 전하는 말처럼 신라 시대 창건한 사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옛 가람’이라 불리울 만큼 역사가 적지 않은 것은 분명한 듯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다산은 수종사에서 내려다보이는 팔당호수변 마재가 고향이다. 그는 ‘운길산 수종사는 옛적 우리 집 정원/ 마음만 먹으면 날아가 절 문에 이르렀네’라는 시를 남길 만큼 어린 시절부터 이 절을 자주 찾았다. 수종사를 큰 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변 산세(山勢)는 가파르기만 해 지금도 대웅보전만 그런대로 번듯한 터전에 자리잡고 있을 뿐 응진전이며 약사전, 산신각은 바위틈에 매달리다시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세조 창건설(說)이 전하고, 정혜옹주 사리탑이 세워질 만큼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물길의 편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용나루는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운반하는 조창(漕倉)이 있던 충주에서 도성(都城)의 마포를 잇는 남한강 수운(水運)에서 가장 중요한 경유지의 하나였다. 남한강은 충주에서 다시 상류로 단양, 영월, 정선을 거쳐 오대산이 있는 오대천으로 이어진다. 태백산록의 목재는 뗏목으로 엮인 뒤 이 물길을 따라 마포강으로 흘러들었다. 세조가 수종사를 실제로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오대산을 오가는 과정에서도 이 수로(水路)에 크게 의존했을 것이다. 수종사는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동차로도 절 바로 아래까지 갈 수 있다. 다만 길이 좁고 가파른데다 구불구불하기까지 하니 초보 운전자라면 말리고 싶다. 어쨌든 수종사에 올라 일반 탐방객들이 주변 경치에 넋을 잃는 동안 불교나 미술사 학자들은 대웅보전 왼쪽에 나란히 세워진 세 기의 석탑에 먼저 눈길을 보낸다. 왼쪽이 정혜옹주 사리탑, 작은 삼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팔각오층석탑이다. 사리탑은 절 서쪽 산비탈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한다. 사리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뚜껑 달린 청자 항아리와 금제구층탑, 은제 도금 사리기 등 화려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탑과 사리기는 항아리 안에 들어 있었다. 사리기에는 수정으로 만든 공 모양 사리병이 들어 있었는데, 구멍을 뚫고 사리를 모셨다. 일괄해서 보물로 지정된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높이 3.3m의 팔각오층석탑은 더욱 주목해야 한다. 오대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보여주는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이 조선 시대 들어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성은 더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보물로 지정된 탑도 탑이거니와 내부에 모셔진 불상의 규모와 발원한 사람들의 면면은 매우 흥미롭다. 두 차례 팔각오층석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불상은 모두 30구에 이른다. 일부 해체가 이루어진 1957년 기단 몸돌에서 금동불 8구, 1층 몸돌에서 금동불 3구와 목불상 3구, 1층 지붕돌에서 금동불 4구를 발견했다. 전면 해체 수리한 1970년에는 2층 지붕돌에서 금동불 9구, 3층 지붕돌에서 금동불 3구를 찾았다. 그동안 4구가 사라져 지금은 26구가 남아 있다고 한다. 팔각오층석탑의 불상들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불상의 명문(銘文)과 복장(腹藏)의 발원문으로 봉안한 사람과 이유, 그리고 조성 시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장이란 불상의 배 부분에 넣는 불경 등의 상징물을 말한다. 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층 몸돌의 불상 6구는 숙용 홍씨, 숙용 정씨, 숙원 김씨가 1493년(성종 23)에, 다른 금동불 23구는 인목대비가 1628년(인조 6)에 각각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1층 몸돌 출토품 가운데 금동석가모니불좌상은 바닥 은판에 ‘시주 명빈 김씨’(施主 明嬪 金氏)라고 새겨져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명빈 김씨(?~1479)는 조선 초기 중요한 불교 후원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은 성종의 후궁인 숙용 홍씨와 정씨, 숙원 김씨가 ‘주상전하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며 봉안한 것이라고 했다. 명빈이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이 지난 시기다. 명빈 김씨와 성종의 세 후궁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 23구에 이르는 1628년 봉안 불상에는 발원문이 없는 대신 비로자나불상 바닥에 ‘숭정 원년 무진년에 소성정의대왕대비(昭聖貞懿大王大妃)가 발원한 23존을 주조하여 보탑에 봉안하니 후세에 전해 중생을 구제해 주소서. 화원 성인(性仁)’ 이라는 명문이 있다. 소성정의대왕대비는 곧 인목대비(1584~1632)다. 선조의 계비로 영창대군을 낳은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즉위한 뒤 아들을 잃고 폐서인이 됐다가 인조반정으로 복호(復號)되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말년 대왕대비(大王大妃) 신분으로 발원한 불상은 작지만 화려하다. 하지만 봉안처는 신분이 한참 떨어지는 선대 내명부(內命婦)가 이미 발원했던 탑이니 조촐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수종사가 왕실에서 그만큼 영험 있는 사찰로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성리학의 성지 ’ 꿈꾼 송시열 은거처… 선계가 따로 없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성리학의 성지 ’ 꿈꾼 송시열 은거처… 선계가 따로 없네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계곡은 선계(仙界)가 아닌가 싶을 만큼 아름답다. 일대는 국립공원이자 국가 지정 자연문화유산인 명승이다. 더불어 조선 중기 사상계를 이끈 우암 송시열(1637~1689)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 유산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우암이 이끈 조선성리학의 이념을 다양한 방법으로 형상화해 놓은 일종의 거대한 상징물이라고 해도 좋겠다.화양동의 우암 유적이라면 만동묘(萬東廟)와 흥선대원군의 일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만동묘는 우암의 뜻에 따라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낸 명나라의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을 제사 지내고자 제자 권상하가 1704년(숙종 30) 지은 사당이다. 다양하게 각색되어 전해지는 일화 가운데 하나는 대원군이 부축을 받으며 만동묘 계단을 오르다 묘지기 발길에 차여 나동그라졌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권력기반이 확고해지자 만동묘의 제사를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복수했고, 우암을 제향하는 화양서원을 포함해 650개 남짓하던 서원을 대부분 훼철하고 47개 사액 서원만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긍정적 기능을 발휘하던 서원이 지연·학연·당파의 거점으로 떠오르면서 병폐가 커진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조선 후기 권력을 독점한 서인(西人)의 정치적 성지(聖地)였다. 묘지기조차 파락호(破落戶) 시절의 대원군쯤이 눈에 보일 리 있었겠느냐고 만동묘 일화는 되묻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화양동을 찾아 만동묘에 오르다 보면 ‘그렇게 나동그라진 대원군이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만동묘 계단은 비정상적인 만큼 가파르고, 발을 딛는 바닥도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나 엉거주춤한 게걸음으로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풍수지리적 설계라는 주장도 있지만, 참배자에게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고자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 조금 더 그럴듯하다.계단은 가파른 데다 매우 높다. 이런 데서 발길에 차여 굴러떨어진다면 최소한 중상을 입는 것이 불가피하고 고령자나 약골이라면 초상을 치르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니 대원군 일화는 실제 그랬다기보다 위험한 계단에서 국왕의 종친(宗親)에게 묘지기가 발길질을 서슴없이 해댔다는 이야기를 세상이 믿을 만큼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우회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화양분소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내리면 화양천을 따라 화양구곡(華陽九曲)이 시작된다. 우암 유적은 1㎞ 남짓 걸어 올라가면 나타난다.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한데 모여 있다. 1870년 철폐된 만동묘는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 1874년 유림의 상소에 따라 부활했다. 하지만 일제는 1908년 조선통감의 명령으로 만동묘를 철폐한 데 이어 1942년에는 건물을 헐어 괴산경찰서 청천면주재소를 짓는 자재로 썼다.묘정비(廟庭碑)를 비롯한 석물(石物)만 남았던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최근 상당 부분을 복원했다. 그런데 만동묘정비에 다가서면 새겨 놓은 글자들을 모두 정으로 쪼아낸 흔적을 볼 수 있다. 일제가 훼손한 흔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양구곡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1130~1200)의 무이구곡(無夷九曲)을 본받은 것이다. 조선은 주희, 곧 주자의 성리학을 이념 기반으로 창건한 나라다. 주희는 한때 복건성(福建省) 무이곡(武夷曲)에 은거하면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진력했다. 더불어 무이산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붙이고는 흔히 무이구곡가(無夷九曲歌)라고 불리는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다.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주 양동마을에 지은 독락당(獨樂堂)과 사산오대(四山五臺)도 주희를 모범으로 삼았다. 퇴계 이황(1501~1570)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남겼는데, 이 또한 주희가 ‘무이정사잡영 병서’(武夷精舍雜詠 幷序)에 12편의 시를 남긴 것과 관계가 있다. 제자들은 ‘도산십이곡’을 ‘도산구곡’(陶山九曲)으로 정리해 무이구곡에 비견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1536~1584) 역시 황해도 해주 석담에 은거할 때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변 자연을 고산구곡(高山九曲)이라 했다. 화양구곡 역시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다. 우암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차지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끊어진 주자의 학문적 정통성을 조선에서 이어 간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삼전도의 치욕’ 이후 청나라를 친다는 북벌론(北伐論)을 주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꿈이 멀어지자 중원을 회복하지 못하는 남송을 안타까워하며 무이곡에 은거한 주희의 심정으로 화양동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화양동계곡을 두고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금강(金剛) 이남의 제일산수(第一山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우암에 앞서 퇴계도 이곳을 찾았다가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홉 달을 머물렀다. 퇴계는 선유구곡(仙遊九曲)이라 했는데, 우암의 화양구곡과는 명칭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 그래서인지 화양구곡을 확정한 사람은 우암이 아닐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화양동의 연혁을 기록한 ‘화양지’(華陽志)는 화양동이 ‘청주 청천현 동쪽 20리 낙양천(洛陽川) 중에 있다’고 적었다. 우암이 1666년(현종 7)부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1688년(현종 14)까지 23년 동안 한 해에 몇 달 동안은 화양동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화양동이나 낙양천이라는 이름도 우암식 존주대의(尊周大義)의 분위기가 짙다. 화산(華山) 남쪽의 화양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쳐서 무공을 세우고 해산했다는 고사(故事)가 있고, 낙양은 한·위·수·당의 수도였다.화양서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화양천 건너에 작은 집이 눈에 띈다. 우암이 무이정사를 본받아 지은 암서재(巖棲齋)다. 우암은 ‘시냇가 바위 벼랑 열려 있어/ 그 사이에 집을 지었네/ 조용히 앉아 경전을 가르침을 찾아/ 분촌(分寸)이라도 따르려 애쓰네’라는 시를 남겼다. 암서재의 분위기를 잘 묘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화양구곡의 제6곡인 첨성대 주변 바위에는 갖가지 각자(刻字)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이 각각 썼다는 ‘비례부동’(非禮不動)과 ‘옥조빙호’(玉藻氷壺), 선조와 숙종의 어필(御筆)인 ‘만절필동’(萬折必東)과 ‘화양서원’(華陽書院)이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엿보이는 필자(筆者) 선정이다.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비례부동과 ‘옥(玉)처럼 맑고 투명한 마음’을 가리키는 옥조빙호는 성리학의 가르침이다. 만절필동은 ‘강물이 일만 번을 굽이쳐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충신의 절개를 꺾을 수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라고 한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만동묘라는 이름도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강물이 결국은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는 인식부터가 철저히 중화주의적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사설] 세비 2.6% 올린 국회, ‘특권 내려놓기’ 잊었나

    벼룩도 낯이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세비를 1억 4000만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민생 현안은 밀쳐놓기 일쑤면서 자신들 봉급은 일사천리로 올린 것이다. 어떻게 이럴 때는 여야가 열일 제쳐 놓고 한마음 한뜻이 되는지 실소가 터진다. 국회 운영위원회 예산결산심사 소위원회는 국회의원 세비 중 일반수당을 내년의 공무원 보수 인상률(2.6%)만큼 올리기로 했다. 현재 국회의원의 월평균 세비 1149만원 중 일반수당은 646만원이다. 이 수당이 매월 663만원으로 오르면 해마다 혈세 6억여 원이 더 들어간다. 국회의원 한 사람 기준으로 보자면 그리 대단한 액수는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안하무인식의 괘씸한 행태다. 국회는 지난달 국회의원 사무실마다 8급 별정직 공무원 비서 1명을 늘리는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인턴 비서 1명을 8급 정규직 비서로 전환하는 데는 해마다 약 149억원의 예산이 소요된다. 그 돈이 국회의원들 각자의 지갑에서 나온다면야 상관할 바 아니다. 십원 한 장까지 전부 피 같은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는데도 한마디 여론 수렴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 봉급까지 어물쩍 인상했다가 또 뒤늦게 들통난 것이다. 예결소위원장인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여야가 담합하거나 의도를 갖고 통과시킨 게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국회 사무처가 공무원 급여 인상률을 자동 반영한 줄 몰랐다는 얘기다. 차라리 “또 염치없는 버릇이 나왔다”고 솔직히 사과하는 쪽이 덜 옹색해 보인다. 국회의 업무 효율을 보자면 세비는 내려도 모자랄 판이다. 많은 국민들의 솔직한 심정이 그렇다. 여야의 버티기 실랑이에 당장 내년도 예산안 처리 시한이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우리 국회의원의 봉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3위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금배지들의 거짓말이 “특권을 내려놓겠다”는 소리다. 지난해 20대 국회 개원 때 국회의원들은 특권 내려놓기 작업을 구체적으로 진행해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반값 세비, 특수활동비 폐지 등 온갖 특혜들을 자기네들 입으로 내려놓겠다고 약속했다. 반값은커녕 2020년까지 세비는 한 푼도 인상하지 않겠다던 약속조차 빈말이 됐다. 밀실 세비 인상이 주특기였으니 이대로라면 세비 인상안은 만장일치로 본회의를 통과할 게 뻔하다. 정부와 사회 곳곳의 적폐가 개혁의 수술대에 올라 있다. 이런 마당에 국회의원들의 뼛속 깊은 특권의식은 왜 적폐 수술을 받지 않는지 국민들 분통이 터진다. “비판 여론은 며칠 지나면 없어진다”, “국민 눈치 보지 말자”고 말한 간 큰 국회의원들이 있다. 번쩍거리는 금배지가 왜 몰염치와 무능의 상징물로 전락했는지 국회의원 299명은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부끄럽게 돌아보라. 국민이 무섭거든 세비 인상안을 이제라도 없던 일로 돌려놓으라.
  • 땅끝… 치유의 길 걷다

    땅끝… 치유의 길 걷다

    이 땅의 끝인 전남 해남. 그 끝자락에 산 하나가 불끈 솟았습니다. 달마산입니다. 산꼭대기에는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수많은 암릉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습니다. 이 모습 덕에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립니다. 산의 높이라야 489m 정도에 불과하지만, 크기에 견줘 장엄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달마산 아래 달마고도가 최근 새로 조성됐습니다. 산자락 7~8부 능선을 따라가는 트레일입니다. 달마고도는 대체로 유순합니다. 일부 구간을 빼면 푹신한 흙을 밟으며 걷습니다. 그러니 산꼭대기의 암릉을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정복의 길’이라면 달마고도는 ‘치유의 길’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남도 금강산’ 달마산, 수많은 암릉들이 촘촘히 박혀 왜 달마산일까. 전해오는 옛이야기를 되짚어가면 불교의 남방도래설에 맥이 닿는다. 오래전 인도 우전국 왕자 금인(人)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땅끝을 찾았다. 사자포구에 내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달마산이었다. 그는 이를 “1만명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형상”이라며 상찬했다. 현재의 이름은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의 법명에서 따왔다. 미황사 주지인 금강 스님은 “동국여지승람, 미황사 상량문 등에 달마산이 ‘달마대사의 법신이 상주하는 산’이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중국 송나라 때 사자포를 찾은 상인들이 배에 싣고 온 달마대사의 법신을 달마산에 묻었다는 게 이야기의 요지다. 여기서 법신은 육신만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달마대사가 입었던 가사, 썼던 발우, 몸에서 나온 사리 등을 뜻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무엇이 달마산에 깃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트레킹에 앞서 달마고도의 제원부터 살핀다. 전체 길이는 약 18㎞다. 완주하려면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린다. 미황사를 기준으로 절반은 동남쪽, 절반은 서북쪽 산사면을 따라 조성됐다. 미황사 왼쪽으로 도는 구간이 대부분 새 길이고 오른쪽은 천년숲길 등 기존의 길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코스는 모두 4개다.달마고도는 건설 장비의 도움 없이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조성됐다. 곡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지게를 져 돌 등의 자재를 날랐다. 매일 40여명의 인부가 동원돼 꼬박 250일 동안 작업을 벌였다. 금강 스님은 이 같은 조성 과정에 대해 “사람이 산에 깃들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복의 욕망으로 달마산을 찾지 말고, 치유를 위해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티베트 사람들이 수미산 꼬라(탑돌이)를 돌 듯 달마산을 한 바퀴 돌면 그 자체가 수행”일 터다. 달마고도는 좌우로 긴 타원형이다. 적당히 걷다 다른 경로로 돌아올 수 없는 구조다. 한 바퀴를 완주하거나 걸었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방법밖에 없다. 시간에 쫓기는 외지인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리한 여건이다. 달마산 양쪽의 산사면을 잇는 지선 공사가 끝나면 상황이 다소 나아질 듯하다. 달마고도 4개 코스, 미황사~관음암~노지랑골~도솔암달마고도의 들머리는 미황사다. 창건 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오르는 고찰이다. 달마산의 암릉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섰다. 대웅보전의 단청 빠진 공포와 배흘림의 늙은 기둥이 절집의 만만찮은 내력을 웅변하고 있다. 기둥을 떠받친 주춧돌엔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다. 경상(불경과 불상)을 싣고 해남 사자포구(땅끝)에 닿은 인도 돌배 설화의 상징물이다.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돌배가 오던 날, 의조 스님은 꿈을 꾼다. 스스로를 인도의 왕자라 밝힌 금인이 나타나 “소에 경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돌배에서 나온 검은 소는 달마산 어귀에 이르자 한바탕 울음을 운 뒤 쓰러졌다. 그 자리에 들어선 절집이 미황사다. 달마고도 1코스는 미황사 일주문 옆에서 시작된다. 숲길과 임도를 따라 1㎞쯤 가면 거대한 너덜지대가 나온다. 달마산의 기암들이 허물어져 내린 흔적이다. 너덜지대 주변엔 나무가 없다. 사방이 트였다. 자연이 안배한 풍경전망대다. 달마고도를 통틀어 이런 너덜지대가 20여곳이나 된다. 칼날 같은 암봉 사이에 뿌리를 내린 몇 그루 단풍들의 자태도 곱다. 회색 바위를 배경 삼은 덕에 빛깔이 한층 더 도드라진다. 2코스 중간의 관음암터에 이르면 작은 못이 나온다. 온통 바위투성이인 산에서 만나는 연못이 퍽 이채롭다. 달마고도를 설계한 권경익씨는 “달마고도 주변에 절터와 연못이 각각 십여곳에 이른다”며 “이는 달마산의 생명력에 대한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달마산 동남쪽 사면, 그러니까 타원형 코스의 왼쪽 끝자락까지는 완도 쪽 풍경이 펼쳐진다. 반면 달마산 서북쪽 사면으로 돌아서면 진도 일대의 풍경이 눈에 담긴다. 3코스는 노지랑골 사거리부터 편백나무숲을 지나 몰고리재까지 연결된다. 4코스는 몰고리재에서 다시 미황사로 이어진다. 내년 1월부터는 주말마다 트레킹 가이드가 배치된다고 한다. 이들의 해설을 들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이정표는 코스 곳곳에 잘 세워진 편이다. 다만 1코스 중간의 삼거리엔 이정표가 없다. 삼거리에서 왼쪽은 송촌마을, 위쪽은 달마산 등산로다.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달마고도는 가운데 길로 가야 한다. 아울러 이정표의 붉은 화살표는 등산로, 파란 화살표는 진행 방향, 검은 화살표는 하산 방향을 각각 표시한다. 안내도에 적혀 있지 않으니 꼭 기억해 둬야 한다.땅끝마을, 힘차고 아름다운 해돋이 4코스에 도솔암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달마산 암릉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암자다. 달마고도 노선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풍경의 보고인 만큼 빼놓지 말고 돌아보길 권한다. 차로도 도솔암 근처까지 갈 수 있다. 달마고도를 내처 걸은 뒤에 느긋하게 찾아도 좋겠다. 도솔암에 올라서면 땅끝과 다도해가 주르륵 펼쳐진다. 달마산의 장대한 암릉들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땅끝마을은 당연히 찾아야 할 해남의 아이콘이다. 땅의 끝에서 맞는 해넘이 풍경도 곱지만, 그보다 해돋이 장면이 더 힘차고 아름답다. 땅끝마을 뒤는 사자봉이다. 정상에 세워진 전망대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오를 수 있다. 전망대 주변에 땅끝탑과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다. 송지면 엄남리 해안에서 땅끝마을을 거쳐 사구리 해안까지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다. 드라이브 코스 주변에 송호해변, 땅끝관광지, 사구미해변, 땅끝조각공원 등 명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한 곳만 더 덧붙이자. 최근 두륜산 대흥사를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현직 대통령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공간이 있어서다. 하지만 해당 선원은 현재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다. 스님들의 동안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내년 1월 중순쯤 동안거가 해제되면 다시 열린다. 글 사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도솔암 주차장은 송지면 마봉리에서 도솔암 이정표를 따라 3㎞ 정도 오르면 나온다. 주차장에서 도솔암까지는 800m 정도. 잰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린다. 미황사(533-3521) 대웅전이 전면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 시작 시점은 조만간 정해질 예정이다. 해남까지 내려가서 고풍스러운 미황사 대웅전을 못 본다는 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달마고도를 걸어 볼 계획이라면 서두르는 게 좋겠다. →맛집:해남 읍내 천일식당(536-4001)은 80년을 이어온 떡갈비로 소문난 집이다. 땅끝회관(536-3366) 진일관(532-9932) 등은 한정식으로 이름났다. 이학식당(532-0203)은 삼치회로 입소문 난 집이다. 송촌마을 입구의 매화식당(536-9595)은 소박한 백반집이다. →잘 곳:유선장여관(534-2959)은 고풍스러운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대흥사 들머리에 있다. 땅끝비치(534-1002)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굿스테이 업소다. 땅끝마을 언덕에 있다.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공원으로 전락한 성지 장충단비가 애처롭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공원으로 전락한 성지 장충단비가 애처롭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4차 ‘남산과 장충동-근대역사기억장소’ 편이 지난 18일 서울 중구 장충동 남산 일대에서 진행됐다. 평소 자주 가는 곳이지만 언제,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의미와 감흥이 다른 법이다.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 바로 다음날 대한제국의 현충원 장충단을 찾은 게 공교롭다. 이곳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 측 주역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이 세워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남산 단풍이 최후의 절정을 이루던 날, 베테랑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해설을 맡았다.우리의 삶이 장소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려 주는 학문을 인문지리학이라고 한다. 이 중 문화지리학은 장소의 정체성 확보에 중점을 둔다. ‘문화·장소·흔적, 문화지리로 세상 읽기’라는 책에서 영국의 존 앤더슨은 흔적이란 인간의 문화적 삶이 장소에 남은 것이며, 장소야말로 문화지리학의 초점이라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장충단이라는 장소는 어떤 흔적과 문화적 삶을 우리에게 남겼을까. 장충단이 주는 첫인상은 제단(祭壇)보다는 공원이다. 시민들이 남산공원 일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장소의 곡절과 인위적인 훼절이 초래한 결과이다. 본래 남산은 공원이 아니었다. 서울 풍수는 궁궐을 위시한 모든 가옥이 백악을 등지고 남산을 향해 남향으로 짓는 게 핵심이다. 남산은 도성민이 고개만 들면 보이는 앞산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진을 친 왜장대를 중심으로 1885년부터 남산 기슭에 집결한 일본인들이 남산을 등지고 백악을 향해 북향하면서 남산은 공원 신세가 됐다. 1897년 왜성대공원에 이어 1910년 한양공원이 들어섰다. 재경성일본거류민단 위락용으로 장충단공원과 남산공원을 조성했다. 1940년 경성시가지 계획에 따라 모두 140개의 공원을 고시하면서 덕수궁, 창경궁과 함께 장충단 역시 공원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극악한 민족정기 말살 정책이다. 이때 41만 8000㎡였던 장충단공원은 1955년 70만㎡로 확장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큰 근린공원이었다. 30년 만인 1984년 30만㎡로 절반 이상 쪼그라들면서 남산자연공원에 귀속됐다. 장충체육관, 영빈관(신라호텔 영빈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타워호텔, 국립극장, 재향군인회관(동국대 예술대), 중앙공무원교육원(동국대 농대)등 온갖 시설들이 갖은 명분으로 공원 부지를 해제하고 들어선 탓이다. 장충단공원은 만신창이가 됐다. 사실상 이름도 잃어버렸다.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지막지한 파괴의 현장이다.대한제국 국립현충원 장충단의 존재감은 파묻혔다. 주위를 둘러싼 엄청난 높이와 규모의 각종 동상과 기념비, 공공건물과 호텔에 파묻혀 왜소한 비석 하나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항일의 성지라는 장소의 역사성을 바꾸기 위해 가해진 극단의 변형 때문이다. 1932년 박문사 조성이 결정타였다. 신라호텔과 영빈관은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최고 공로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춘무산 박문사가 있던 장소이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고, 이토를 신격화하는 신사이다. 정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가져왔고, 난간엔 광화문에서 가져온 석재를 쌓았다. 왕의 어진을 모신 경복궁 선원전은 승려 주거용 고리(庫裡)로 사용했다. 환구단 돌북을 안치했던 석고전을 가져다가 종루로 둔갑시켰다. 대한제국의 상징물을 동원해 이토를 장식한 것이다. 1913년 1월 23일자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늦겨울의 장충단’이라는 기사와 장충단 사진이 실려 있다. 3층 기단에 14칸짜리 품위 있는 건물이다. 봄·가을에 제향과 군악 연주, 조총 발사 등 장엄한 예식이 1910년 폐사되기 전까지 거행됐다. 을미사변을 비롯,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숨진 군인들을 위로하는 현충의식이었다. ‘나라를 위한 일에서 죽은 자에 대해 반드시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는 게….’ 고종실록에 실린 장충단 건립 목적이다. 또 1901년에 발간한 ‘장충단영건하기책’에는 장충단 축조기록과 의례절차가 전해진다. 장충단 단사는 공원 내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자리에 있었다. 황제가 이름을 짓고, 황태자(순종)가 글을 쓰고, 충정공 민영환이 비문을 지었다. 비운의 장충단비는 신라호텔 뒤에 버려져 나뒹굴다가 1969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장충동이라는 지명이 남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강점기 장충동 일대 신흥 주택단지는 이토의 이름을 따 박문대라고 불렸다. 1970년 시인 김지하는 저항시 ‘오적’에서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동빙고동, 성북동, 수유동, 장충동, 약수동…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고 당대의 도적들을 야유했다. 강남시대가 열리기 전 한때의 만담이다. 잊혔던 장충단제는 1988년 부활했다. 서울 중구는 을미사변일인 1895년 8월 20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매년 10월 8일 장충단비 앞에서 제향을 지낸다. 또 최근에는 장충단비~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이준 열사 동상~이한응 열사 기념비~최현배 선생 기념비~유관순 열사 동상~3·1 독립운동 기념탑 등을 돌아보는 답사프로그램 ‘호국의 길’도 만들었다. 하루바삐 장충단사를 복원해야 한다. 마음을 모으면 장소의 역사성은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멋과 맛 ■일시: 11월 25일 오전 10시 종각역 4번 출구(보신각 앞) ■신청(무료) : 서울시 서울미래유산 (futureheritage.seoul.go)
  • 독일 공사장 지하에서 발견된 4m 나치 문양

    독일 공사장 지하에서 발견된 4m 나치 문양

    독일의 한 공사 현장에서 나치 문양 ‘하켄크로이츠’가 발굴됐다. 갈고리 십자가라는 뜻의 이 문양은 불교나 절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는 ‘만(卍)’자 모양을 뒤집어 기울여 놓은 모양인데, 독일 나치즘(Nazism)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21일 미국 AP통신은 독일 함부르크 하인 크린크 경기장에서 보수 공사 작업을 하던 중 건설 노동자들이 철골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하켄크로이츠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자들은 해당 장소에 지역 운동선수를 위한 탈의실을 세울 계획이었다.  폭이 약 4m에 달하는 하켄크로이츠는 70년 전에 만들어진 나치 기념비적인 구조물로 추정되며, 전쟁의 기세가 바뀌고 나치 제3국이 멸망하자 유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일 현장을 방문한 지역 보수 정치인 데이비드 에르칼프는 “소름 끼치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상징물”이라며 “가능한 한 빨리 없애야 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지방 정부 당국은 즉각적인 연락을 받고 신속하게 나치주의의 상징 무늬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나치 무늬가 너무 깊게 뿌리박혀있어 불도저로도 옮길 수 없었다. 시 공무원은 “지면 아래 묻힌 하켄크로이츠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원한다. 지역 박물관에 보관할지 완전히 파기할지 불확실하지만, 운송하기엔 너무 무거워서 착암기로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문재인 대통령, 사랑의 열매 1호 기부금 쾌척

    문재인 대통령, 사랑의 열매 1호 기부금 쾌척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주관하는 사랑의 열매 전달식에 참석한다.문 대통령은 이날 사랑의 열매 1호 기부금을 쾌척할 예정이다. 행사에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허동수 회장과 박찬봉 사무총장, 홍보대사인 연예인 채시라·박수홍씨가 참석하며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김수현 사회수석 등도 자리를 함께한다. 채시라씨가 사랑의 열매 배지를 문 대통령의 옷깃에 달아주며, 사랑의 열매 대형 상징물도 전달된다. 사랑의 열매 모금 활동은 이날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73일간 진행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깨달음도 덧없어라… 죽은 영혼 달래 주던 야외 법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깨달음도 덧없어라… 죽은 영혼 달래 주던 야외 법당

    충남 서산 개심사(開心寺)는 아름다운 것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절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집이 일으키는 상승작용이 이런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심사는 이른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型) 사찰이다. 산 중턱 경사지에 큰법당을 비롯한 4개의 절집이 정사각형 마당을 감싸고 있다. 조선 후기를 특징짓는 가람 배치라 할 수 있다.개심사 사적기(事蹟記)에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개원사(開元寺)라 했다’고 적혀 있다. 진덕여왕 5년은 651년이고, 의자왕 14년은 654년이다. 게다가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혜감국사(1249~1319)는 고려시대 고승(高僧)이다. 사적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창건 시기는 미궁에 빠져든다. 사적기는 양면 괘지에 만년필로 썼으니 근년에 옮겨 적고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고려 국가기관이 보수할 만큼 가치 있던 사찰 그런데 2004년 개심사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腹藏)에서 ‘1280년(고려 충렬왕 6년) 승재색(僧齋色)이 보수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발견됐다. 승재색은 불경 간행과 같은 불사(佛事)를 위해 특별히 설립된 국가기관이었다. 복장이란 불상의 내부에 모신 불경 같은 상징물을 이른다. 보수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면 불상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국가기관이 보수에 나섰다는 것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개심사지만 그저 한적한 시골 사찰이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사적기는 이어 1350년(충정왕 2년) 처능대사가 대웅전과 기타 전당(殿堂) 그리고 요사(寮舍) 일체를 중건하고 개심사로 개칭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 내용은 그런대로 믿을 만하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큰법당인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오층짜리 석탑은 백제시대 석탑의 전형이지만, 개심사 것에서 백제 특유의 미감(美感)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처능대사가 이 석탑도 세운 것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처능대사의 중창이란 몽골의 침입이나 왜구의 발호로 훼손되거나 폐허화했던 절의 면모를 일신한 불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1231년(고종 18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몽골 침입기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는 등 많은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고려 처능대사 개원사→개심사 개칭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세력을 키운 왜구가 한반도 전체를 위협했는데, 충청도 서해안 지역은 그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같은 서산의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 역시 이 시기 왜구가 약탈해 일본에 가져간 것으로 부석사 측은 보고 있다. 일본 쓰시마의 한 절에서 도둑이 훔쳐 다시 들여온 부석사 관세음좌상은 지금 그 소유권을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개심사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1475년(조선 성종 6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김서형이 훈련을 한다며 군졸을 징발해 사냥을 하다 산불을 내는 바람에 금산(禁山)의 소나무는 물론 개심사까지 태운 것이다. 지금의 대웅전과 심검당은 이 때문에 다시 지은 것이다. 요사채인 심검당은 1962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1477년 세 번째로 중창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구부러진 나무를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한 심검당의 부엌은 후대에 이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스님의 생활공간에 이어 예배공간인 대웅전은 1484년 지었다. 지금 개심사는 중생의 극락왕생 소원을 들어주는 정토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각이 안양루(安養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것도 그렇다. 안양이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절의 큰법당은 보통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이라고 이름 짓는다. 그런데 개심사 큰법당은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곡절이 있을 듯싶다. 개심사 들머리의 돌계단을 기분 좋게 오르다 조금 숨이 찰 때쯤 오른쪽으로 안양루가 나타난다. 그 바깥에는 큰 글씨의 전서체로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라고 한다. 큼직큼직하면서 모나지 않은 해강의 글씨는 개심사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충청남도 서쪽에 남북으로 자리잡은 산줄기가 가야산이다. 이 산 서쪽에는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불과 보원사 터, 산 동쪽에는 가야사 터가 있다. 둘 다 역사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큰 절이었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해당한다. 개심사가 이고 있는 산봉우리는 별도로 상왕산이라고도 한다. 코끼리는 부처를 상징한다. 부처는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에서 멀지 않은 시사가야에서 1000명의 비구에게 설법을 했다. 시사가야가 가야산이다. 가야산은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부른다. 상두산은 상왕산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 가야산이 곧 상왕산이다. 이런 상징성을 부여한 산에 지은 절이니 초창 시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양란 거치면서 정토사찰로 성격 변화한 듯 그런데 서산 지역에 외적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중생의 신앙 형태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깨달음보다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극락왕생과 남겨진 가족을 위로하는 기능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것이 개심사가 정토사찰로 성격을 바꾼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 큰법당의 이름은 대웅전을 유지해 상왕산의 상징성도 이어 갈 수 있었다. 개심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정토사찰의 성격을 더욱 강화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사적기에는 1613년(광해군 5년) 대웅전 이후 각 전각과 요사를 중수하고 시왕전(十王殿)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왕전은 명부전의 다른 이름이다. 1941년 대웅전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1644년(인조 22년) 중창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1889년 작성된 개심사 중창 수리기에는 명부전을 1646년(인조 24년) 신축했다고 적혀 있다. 연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양란(兩亂)이 중수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안양루와 무량수각을 새로 지어 중정형 구조를 완성한 것도 이때일 것이다. 중정형 사찰에서 마당이 갖는 의미는 크다. 많은 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법회를 열 수 있는 야외 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야외 법회에 내걸 대형 불화(佛畵)도 필요해졌다. 괘불(掛佛)이다. 괘불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학계는 이 걸개그림의 발생을 임진왜란·병자호란과 직접 연결 짓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 좁은 법당에서는 고혼(孤魂)을 위로하는 법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넓은 마당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걸맞은 크기의 탱화도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개심사에 있는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은 1772년(영조 48년)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산회괘불탱 이전에도 이 절에는 당연히 다른 괘불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대웅보전 앞에는 깨져서 쓰지 못하는 옛 괘불대가 남아 있다. 동남쪽에 외따로 지어진 명부전 역시 양난의 비극이 낳은 법당일 것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의 권능을 빌어 죽은 이의 넋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가진 전각이다. 개심사가 가진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이런 사연도 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11일 잉글랜드-독일 친선경기 양귀비 완장 차는 이유는?

    11일 잉글랜드-독일 친선경기 양귀비 완장 차는 이유는?

    10일(이하 현지시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친선경기를 벌이는 잉글랜드와 독일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유니폼 어깨에 검정 완장을 두르게 된다. 완장 안에는 붉은색 양귀비 그림이 들어간다.  잉글랜드 축구협회(FA)와 독일축구협회(DFB)는 1918년 11월 11일 영연방 국가들이 1차 세계대전 종전 선언을 한 날로 기리고 있는 현충일(Remembrance Day)을 하루 앞둔 이날 전몰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양귀비 완장을 차기로 합의했다고 BBC가 8일 전했다. 마틴 글렌 FA 최고경영자(CEO)는 “연대와 단합을 보여주려는 몸짓”이라고 규정했다.  사실 불과 1년 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대표팀은 양귀비 패치를 붙이고 나와 모두 벌금을 물어낸 일이 있다. 정치적 행동을 금지한 FIFA 규칙을 위배한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달 FIFA 규칙이 개정됐다. 홈 팀과 원정 팀, 경기를 주최한 쪽이 모두 합의하면 양귀비 패치를 붙여도 되는 것으로 완화했다. 앞의 네 축구협회 모두 규칙 개정 이후 이번 A매치 기간에 양귀비 패치를 유니폼에 부착하는 것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다. 레인하르트 그린델 DFB 회장은 양귀비 패치는 정치적 선전이 결코 아니라며 “두 차례 세계대전을 끝내게 하고 이제 축구에서 향유하고 있는 가치들, 존중과 관용, 그리고 인간애를 기억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왜 양귀비 꽃이 전몰 장병을 추모하는 상징이 됐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1915년 캐나다의 참전 의사인 존 맥크래가 쓴 시 ‘플랜더스 전쟁터’에서 유래했다. 벨기에의 플랜더스에서 젊은 병사들의 희생을 생각하며 쓴 시가 널리 퍼지면서 이 시에 등장한 양귀비가 추모의 상징물이 됐다. 그 뒤 영연방을 넘어 프랑스, 미국 등도 이날을 기리고 있다.  이날 웸블리 스타디움에는 바비 무어 동상 옆에 1914년 성탄절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이 휴전하고 축구를 즐겼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휴전 기념탑 모형이 세워진다. 경기를 앞두고 영국 육해공군 장병들이 사열을 진행하며 국가가 연주된 뒤 전몰 장병에 대한 묵념이 2분 동안 진행된다. 스타디움 아치는 붉은 색으로 타오르며 전광판에는 ‘축구는 기억하고 있다’는 문구가 새겨진다. 스타디움 안에서는 깃발 행진이 진행되고 동쪽과 서쪽 스탠드에서는 양귀비와 티셔츠 등으로 카드섹션이 펼쳐진다.  웨일스 대표팀도 9일 프랑스와 원정 친선경기를 치르면서 양귀비 완장을 두르게 된다. 10일 북아일랜드는 스위스와 2018 러시아월드컵 유럽 플레이오프 1차전을, 스코틀랜드는 9일 네덜란드를 홈으로 불러 들여 친선경기를 치르는데 두 대표팀도 양귀비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설지 눈길이 간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첨예하게 대립한 북아일랜드, 양귀비가 재료가 되는 아편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은 중국, 오랜 식민 통치에 시달린 인도 등에서는 양귀비꽃 추모에 대해 불편한 시각을 갖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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