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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희영 교수 5년만에 국내전“작품 제목 없으니 맘대로 느끼세요”

    전형적인 모더니스트 화가인 이화여대 류희영(63) 교수가 5년만에 국내 전시회를 연다.12일부터 23일까지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는 ‘정신의 창으로서의 색면회화’라는 제목이 붙었다. 색면회화(color-field painting)는 1950∼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회화의 한 경향으로,제스처적인 붓질을 피하고 화면 위에 물감을 넓게 펴발라 캔버스 전체를 색채로 뒤덮는 것이 특징이다.이전 유럽 화가들의 전통적인 구성개념과는 달리 색면회화의 분리된 부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그 대신 통일된 ‘전체로서의 색면’을 강조한다. 색면추상화가들은 극단적인 추상성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려 노력한다.그렇다면 류희영의 ‘정신의 창’은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작가는 이렇게 말한다.“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은 지 4,5년이 됐습니다.제목을 쓰다 보니 설명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그냥 보는 대로 느끼면 됩니다.” 작품에서 굳이 정신적인 의미를 캐려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보아달라는 것이다. 류희영의 그림은 예전보다 한층 단순해졌다.“군더더기 다 지워버리고 알몸을 색채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는 말로 그는 자신의 색면 추상작업을 설명했다.그러나 “어차피 데생을 거쳐 반추상으로,서정적 추상에서 다시 미니멀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 아니냐.”는 작가의 말은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결정론적인 회화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색채와 밀도 면에서 유화만한 게 없다.”고 믿는 작가는 유화만을 고집한다.“유화는 수성에서 느끼는 경박함과는 다른 분위기를 주기 때문”이다.그는 한때 단청에 빠져들었지만 지난 93년부터는 산에서 암시를 얻어 빗금을 즐겨 사용한다.이미 상투화되어 버린 ‘한국적’이라는 말에는 거부감을 보인다.재료나 표현기법에서 도대체 어디까지가 한국적이냐는 것이다. 피카소 같은 대가도 자신은 항상 신인이라고 했듯이 작가는 지금도 날마다 새로운 자세로 충북 옥천의 작업실과 학교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이번 전시에는 옥천 작업실에서 그린 200호,300호의 큰 그림들을 대거 선보인다.(02)734-6111. 김종면기자 jmkim@
  • 대형사고로 본 우리사회/ 고도성장 ‘채찍’… 안전장치 ‘파열’

    대구지하철 참사는 방화범이 저지른 것이지만 그 대처과정에서 보여준 미숙함은 과거 숱하게 빚어진 우리 사회의 대형사고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안전무시의 성장위주 사회가 또한번 총체적 안전 불감증을 드러낸 것이다.서울대 사회학과 장경섭 교수가 한국을 ‘복합위험사회’로 규정하고 그 해결책과 함께 안전 확보에 따른 딜레마를 진단해봤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확률적 가능성이 현실화된 사건이다.방화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객차의 의자·바닥·천장을 온통 가연재로 설치한 일,화재가 났을때 승객 대피를 오히려 차단하는 지하철 역사,화재 경보를 무시한 상황통제실,화재 이후 기관사와 상황통제실이 함께 보여준 무대책 등이 겹쳐 일어났다.화재 경고를 무시한 또다른 열차의 진입과 실질적 승객 감금 행위,상황통제실의 계속된 무대책과 기관사 도주 유도 등도 가세했다.이 가운데 한가지만 막았어도 200여명이 극도로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런 비(非)상식적인 일들이한꺼번에 터진 것을 그저 대구 시민들만의 불운으로 돌릴 수는 없다.한국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각종 비상식의 확률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대구지하철 화재뿐 아니라 그동안 끊임없이 발생한 대·소형 안전사고들에 의해 입증되었다.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대구·서울지하철 공사장의 폭발사고 등 초대형 구조물 사고가 잇따랐으며 교통사고율,산업재해율 등 일상적 안전사고 발생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가 있다.일전에 인천 씨랜드 화재참사로 어린 자녀를 잃은 한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메달을 반납하고 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이런 갖가지 위험요소로 시민의 안전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위협받게 되자,서구의 ‘위험사회’(risk society) 논의가 한국 지식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서구에서도 두 세기를 넘는 지속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얻은 물질적 풍요의 이면엔 사고와 재난의 일상화라는 반갑지 않은 현상이 나타났다.서구인들은 원자력 관련 사고에서 유전자조작 식품까지 발전의 결과로 치러야 할 엄청난 비용에 직면해 있다.사고와 재난들이 더이상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일정한 확률로 발생하는 ‘일상성’의 한 부분이라는 지적이 위험사회론이다. 초고속산업화를 통해 단기간에 선진국 대열에 발을 들인 한국은 위험사회 증후군 역시 앞당겨 경험하고 있다.그런 한편 초보적 안전관리의 미비로 후진국형 재해들도 계속된다.장마때면 하천관리가 소홀한 도시들이 수중에 잠기고,난개발로 인한 산사태로 마을들이 흙더미에 묻히는 일이 반복된다.건설만 하고 관리는 하지않는 수많은 죽음의 도로들에서 만취 기사가 과속 운행한 대형버스들이 전복,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는 일이 이어진다. 일상화된 비리와 탈법 속에서 부실시공된 건축·구조물이 붕괴되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날림 사회형’ 재해가 널려있다.무엇이든 단기간에 최대한 건설·생산하고 소비하려다 보니 갖가지가 압축적으로 경험되는 ‘폭증 사회형’ 재해도 잇따른다.이런 재해들은 한국의 독특한 발전경험과 결부된 ‘한국형’ 재해다.한국은 선진국형,후진국형,나아가 한국 특유형의 갖가지 위험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 위험사회’가 돼가고 있다.이 가운데 한국형 재해들이 특히 문제이다. 증사회형 위험은 한국의 근대화가 ‘외연적 경제성장’ 아래 짧은 기간 엄청난 경제·사회적 변화를 거치면서 이뤄진 때문이다.생산과정의 효율성·안전성을 개선하기 보다 노동력과 자연자원을 착취하는데 급급하다보니 재난과 오염이 급증한다.외연적 성장전략이 주효해 생산·건설·소비·교환활동이 세계에서 유례없이 급증했다.경제 활동량에 대한 안전사고의 발생확률이 일정하다면 경제활동이 늘어난 만큼 안전사고도 늘 수 밖에 없다.그런데도 안전문제 대처는 뒤로 미루고 경제성장에 따른 이윤·소득·세수 증가만 누리겠다는 일종의 ‘선(先)성장,후(後)안전’의 태도가 만연해 있다. 제·사회활동의 폭증에 따라 위험이 비례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막으려면 활동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물리적 시설과 장치의 확충뿐 아니라 조직·문화적 관리역량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그러나 이 관리역량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일종의 ‘문화지체’(cultural lag)다.이는 생산라인처럼 가동시간을 늘리거나 속도를 높여서 일시에 보강될 수 있는게 아니다.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상당기간의 학습·훈련·적응이 필요하다.조직·문화적 역량이 갖춰진 상황에서도 활동이 증가하면 안전사고도 따라 늘 수밖에 없는데,역량도 갖춰지지 못한 한국사회에서는 안전사고의 더욱 심각한 폭증이 우려될 수 밖에 없다.위험폭증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급격한 산업구조 및 생활양식의 변화 자체가 위험과 재난의 폭증을 추가로 야기한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속도 효율(speed efficiency)’ 문화의 이면에는 일종의 날림사회형 위험이 급증하게 됐다.일정 수준의 국가경제 성장과 국민소득 향상,특정한 국가시설의 건설을 최단시일내에 이룩하는 것이 집권정부 업적의 증표가 되면서 속도 효율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나타났다.기업 차원에서는 폭발적 경제성장과 산업구조변화에 대응해 가급적 개별 사업들을 최단시일내에 마무리짓고 서둘러 다음 사업기회를 포착해야 한다는 기업 성장전략이 만연했다.무모한 납기 및 공사기간 단축을 최선의 경영성과로 여기는 속도 효율의 문화였다. 정부와 기업의 속도 효율에 대한 집착이 안전문제에 대한 담합적 부실을 야기했다.국가적 수출 실적을 달성하기 위해,생산업체들이 산업안전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풀(full)가동되는 것을 정부는 규제는 커녕 은근히 독려했던 것이 사실이다.심지어 대형교량 등 기간시설을 앞당겨 완공하기 위해 기업들을 재촉하는 것이 정부의 관행이었다.기업들도 이를 싫지 않게 받아들였다.설사 심각한 안전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기업인등 관련자에 대한 사법처리는 언제나 ‘산업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갖췄다. 령 만능주의 풍토 속에서 주로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법령과 규정들은 제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산업 및 생활 현장에서의 안전을 획기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대목도 많다.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시되거나 느슨하게 적용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법령과 규정들이 엄격하게 준수될 때 이또한 여러가지 예기치 못한 문제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업조직과 사회체계의 맹점을파악한 버스 운전사,지하철 노동자,통신회사 노동자 등은 준법투쟁이라는 상징적이면서도 효과적인 투쟁전략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려 했다.그런데 준법투쟁을 통한 노동자들의 목표가 작업 안전성의 제고보다는 임금인상 등 다른 권익의 확보에 더 치중한다는 데 사회적 딜레마가 있다.결국 노사는 탈법 운행에 담합한 셈이다. ◆해결책 없나 한국인들은 선진국형,후진국형,한국특유형 재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복합적인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따라서 안전사고의 예방과 대처가 어느 사회에서보다 중요하다.국가의 안전보장 및 관리업무가 국정의 최우선 사안의 하나이며,시민들과 기업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함과 동시에 자체적인 안전제고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생산노동자,농민,여성,아동,노인 등 자기보호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안전사고의 피해도 집중적으로 입게 되는 이중적 불평등의 문제도 국가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이들은 그동안의 보수적인 정치·경제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상받기는 커녕 최근 발생한 각종 안전사고의 집중적 희생자가 되는 또다른 고난에 직면했다. 안전문제는 사회정의적 차원에서도 국가의 핵심적 공공사업의 영역인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물과 공기를 마시고,안전하게 출퇴근·등하교를 하고 공공시설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국민복지적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한다.보편적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국가관료,기업인,전문가,시민 개개인의 도덕적 각성과 문제의식 확립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발전이념을 재정립하는 것이 요구된다. 각종 사회적 위험 요인은 급속한 외형성장 등 물질적 팽창에 치중한 나머지 안전관리 소홀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안전복지 차원에서 경제발전의 공과를 재평가하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노력을 재조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최근 환경운동에서 제기한 ‘녹색 국민소득’(green GNP),‘녹색 급부’(green payments) 개념처럼 안전국민소득,안전급부 개념의 도입을 정책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경제활동에 수반되는 심리적·육체적 안전의 위협을 감안,국민소득의 변화를 재산정하는 것이 안전국민소득이다.사회의 여러부문과 집단이 수행하는 안전제고 역할을 파악,이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안전급부 도입도 고려할 만하다.
  • 손인영 무용단 ‘아바타처용’ 처용설화와 사이버의 만남

    손인영 NOW 무용단이 2003 시즌 정기공연으로 ‘가상과 현실의 만남-아바타 처용’을 무대에 올린다. 처용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궁중무용인 ‘처용무’와 달리,‘아바타 처용’은 처용무에서 처용 등 귀신의 가상성을 현재 세계로 빌려온 것.설화 속 잡귀들을 디지털 문화의 산물인 아바타와 연결시켰다. 이 작품은 스토리에 치중하기보다는 이미지와 춤 위주의 공연이다.오방(五方)을 상징하는 다섯 명의 주역 무용수가 나와 각각 솔로 춤을 추며,처용과 아바타의 2인무도 펼친다.잡귀들을 코믹하게 표현한 보디 페인팅과 의상 등 시각적인 볼거리도 풍부하다. 춤 사위는 정재(궁중무용) 처용무를 기본으로 하면서 현대적인 몸짓을 가미했다.출연진도 한국무용(민재연 최재헌 장은영)과 현대무용(김혜숙 김정은 예효승 정연수 등)을 섞어 구성했다.26·27일 오후7시30분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 (02)1588-7890(1555). 주현진기자 jhj@
  • ‘황동규 12번째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지난해 말의 일이다.본사 신춘문예 시부문 본심을 맡아 최동호 시인과 함께 심사를 하던 황동규(사진·65) 시인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우연찮게 최 시인의 말에 묻어나온 ‘우연’이라는 말을 집어들더니 대뜸 무릎을 탁,치며 반색했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이거 어떻습니까.” 최 시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숙제 하나를 해결했다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출판사에서 보내온 그의 열 두번째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펴냄)의 활자 사이에 실루엣처럼 어리며 생명으로 부활하고 있었다.그때 그는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시인 황동규.그는 초월의 시인이다.해탈이라는 종교적 의미의 초월보다는 탈속에의 기대와 희망으로 사는 시인이라는 의미다.사실 그만큼 현실 그 이상으로의 초월에 몰입하는 시인이 또 있을까. 이런 그의 초월 지향성은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라고 했던 연작시 ‘풍장’에서 흰 속살을 드러냈지만 지난해 발표한 시 ‘탁족(濯足)’에서도 ‘차마 신선일 수 없어 신선연(神仙然)이라도 해야 하는 시인’의 모습으로 시화되어 나타난다.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몸은 울창한 청계(淸溪)에 두어도 결국은 모기 같은 미물에까지 마음을 할애해야 하는 인간의 세속성,그 세속성에 경악의 세뇌(洗腦)처럼 쏟아붓는 시인의 각성이 얼마나 서늘한가.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이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풍장’ ‘악어를 조심하라고?’ 등을 통해 영혼의 고뇌와 방황을 읽었던 이들은 이후 ‘외계인’과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등 모노레일 같은 외길을 따라 어떤 이물감도 없이 새 시집 ‘우연에…’에 연착륙할 수 있다.그가 시를 통해 줄곧 그려온 하나의 선(線)이 그의 시를 읽은 이들에게 또렷한 궤적,이를테면 그의 시가 갖는 항상성으로 각인된 때문이다. 평론가 오생근은 이런 그의 시세계를 ‘사랑과 반역을 꿈꾸는 시와 시간’이라고 해석한다.그의 시가 “성과 속,일상과 예술,범인과 위인,마음과 풍경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찰로 영원의 감각을 탄주해낸다.”는 시각이다. 올해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는 시인은 새삼 고백해야 할 그 무엇이 있어 새 시집에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는 로맨틱한 회상 같은 제목을 붙였을까.삶을 일컬어 “죽음이 타는 심지”라고 설파했던 그가. 심재억기자
  • 이능문 소설 ‘금붕어의 메시지’ 50대남자·40대여자 ‘특별한’ 사이버 만남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사이버세상’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이런 일상적 의문에 문학적 리얼리티와 적절한 품격으로 응답해 주는 이능문(사진)의 좀 특별한 소설 ‘금붕어의 메시지’(도서출판 무한)가 나와 눈길을 끈다. 소설이면서도 편년체로 기술된 사서(史書)처럼 아귀가 딱 들어맞는 시간과 장소를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의도는,흔히 이런 종류의 소설에 대해 독자들이 갖기 쉬운 부정적 선입견을 단번에 허문다.문단에서는 ‘너무 위험하다.’며 기피하는 이런 실험적 글쓰기가 오히려 문단의 기성복 같은 흐름에 맞서는 신선한 반란처럼 인식되는 탓이다. 50대 직장인 ‘줄리안’과 40대 여성 ‘크리스티’는 서로의 세계에 발을 딛고 서서 멀지만 가깝게,그리고 느슨하지만 집요하게 서로의 의식을 천착한다.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두 남녀가 시·청각이 차단된 온라인을 통해,그것도 자신의 정체성과는 무관한 아이디 하나를 통로삼아 서로의 삶을 고백하고,흉금을 들춰보이는 것. ‘채팅’이라는 방법이 그렇듯 그들은 서로에게 부담없는 편안함으로,그러나 결코 서로에게 소홀하지 않는 진지함으로 일상의 여백을 채워간다.작가는 자칫 농(弄)이 개입하기 쉬운 ‘사이버 커뮤니티’에 적절한 리얼리티의 소재를 삽입해 그들이 나누는 사유와 사고,체험이 가식이나 허위에 가려지지 않은 채 서로가 진실한 실체로 다가서도록 이끈다.‘충동적 돌발’보다는 일종의 ‘점층적 완성’이다. 이렇게 전개되는 ‘금붕어…’지만 우리 현실에서 부정적 사회현상으로 굳어져 버린 ‘사이버 일탈’의 속물성은 드러내지 않았다.작가는 이런 점에서 현대인의 고독을 육욕으로 이해하는 평상성을 거부한 셈이다.오히려 지순한 인간심성의 본질을 작품에 투영시켜 세상을 정화하려는 듯한 교조성이 문학적 상상력의 제약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작가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해운회사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다 다시 무역회사로 자리를 옮겨 해외 현지법인 지점장까지 맡았는가 하면 건설관련 컨설팅 일을 하다 지금은 아시아경제연구원 해외분야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심재억기자
  • 세계 축제경영/아비뇽·니스·베네치아… 세계10개도시 축제 답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따분한 일상을 뒤집고자 꿈꾸었다.그 꿈은 힘있는 자에겐 발칙하게 보였지만,없고 약한 이들에겐 일상을 이어갈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그것이 상징이란 옷을 입으면 예술이었고 생활에 자리잡으면 축제였다.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술마시다 보면 어느새 취하고,급기야는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뒤엉켜 소동을 벌이는 광란의 잔치.비록 찰나에 불과하고 깨어나면 다시 틀에 박힌 일상이 어김없이 찾아오지만,그래도 그 순간만은 좋았다. 눌린 감정을 발산하며 모든 걸 잊고 다시 출발하게 만들어주는 축제도,시간이 흐르면서 제도로 자리잡았고 요즘엔 비즈니스로 떠올랐다. 지방자치가 되면서 우리사회에도 지역축제가 급증했다.2001년 문화개혁시민연대가 발행한 ‘지역축제 실태조사 및 개혁방안 연구’에 따르면 지역축제는 800가지에 육박한다.하지만 그 수적인 풍성함에 비해 알맹이는 대부분 빈약하다.이런 척박한 현실을 메워줄 좋은 안내서가 나왔다.김춘식(천안대)·남치호(안동대) 교수가 함께 지은 ‘세계 축제경영’(김영사 펴냄)이 그것. 저자들은,자신이 기획과 운영에 참가한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을 살지게 하고자 지구촌의 유명한 10개 도시 지역축제 답사에 나섰다.그들이 3년 동안 현장을 누비며 발품을 판 곳은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땅이다.아비뇽,니스,베네치아,에딘버러,잘츠부르크….나라 이름보다는 연극·카니발·음악제 등 축제장르로 더 유명한 곳이다. 지은이들은 흥겨움이 넘실거리는 이 도시들의 예술감독이나 기획위원 등 축제관계자들을 만나 나름의 역사적 배경,성공비결 등을 묻고 배웠다.책 곳곳에 들어 있는 이런 알토란 같은 정보들은 자기가 속한 축제를 보란 듯 키워보고 싶은 국내 축제준비인들의 갈증을 해갈해준다. 10개 도시마다 간단한 지리적 배경이 독자를 맞이한다.이어 뜨거운 축제 현황과 역사,운영 특징 등이 이어진다.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다.이 책이 갖는 미덕은 마지막 코너인 ‘축제에서 배울 점’이다.이는 지은이들이 직접 현장에서 축제분위기를 호흡했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그 결과 아비뇽페스티벌에서는 ‘연극 대중화의 기수’장 빌라르라는 축제전문가의 헌신성을 발견한다.니스 카니발에서는 변장과 가면쓰기 등 다양한 숨김으로 ‘일상성의 단절’을 가능케 한 지혜를 찾아낸다.참여의 흥겨움과 비즈니스적 성공이라는,두마리 토끼를 일군 저력을 발굴하려는 지은이들의 발길은 뮌헨 맥주축제,베네치아 카니발 등으로 쉼없이 이어진다. 아쉬운 점도 있다.축제경영에 관한 설명보다는 일반적 해석에 너무 무게를 둬 전문성이 떨어진다.예컨대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집행하는가 등의 실제적 정보가 모자라 ‘축제경영’이라는 제목을 뒷받침하기에는 허전하다. 그렇다고 ‘축제읽기’의 재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오늘도 여전히 일상은 비루하고 또 탈출을 꿈꾸는 이들이 있기에 간접체험의 길잡이로 충분하다.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노래처럼 축제는 계속될 것이기에.1만 8900원. 이종수기자 vielee@
  • 코피 잦은 아이들 폐를 다스리시오 /한방으로 본 원인·예방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없는데 아이가 코피를 자주 흘리면 부모로서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꼭 큰 병으로 인한 코피가 아니더라도,코피를 자주 흘리면 체력은 물론 집중력이 떨어지기 쉽고,자연스럽게 학습능력도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언제 코피를 많이 흘리는 걸까.코피는 대부분 콧속 점막 주위의 벽 부위에서 난다.이 부위는 코의 중심으로,벽 부위에 혈관이 몰려 있을 뿐만 아니라 코 점막과 가까워서 살짝 부딪히거나 재채기 또는 코를 심하게 풀어도 피가 나온다. 특히 코가 건조한 경우 코를 후비면 쉽게 피가 나오며,감기나 알레르기성 비염이 잦은 경우도 코 점막 염증으로 코피가 나기 쉽다.따라서 기후가 건조한 환절기,겨울철에 많이 발생한다. ●한의학에서 보는 코피 한의학에선 코피를 뉵혈(血)이라고 부른다.코는 폐의 기관에 속하는 장부로 보고,코피는 폐의 이상 증세로 보는 것이다.즉 습관적인 코피는 몸의 열기가 폐로 몰려서 열이 위로 상승하면서 터져나오는 증상이다. 구체적으로 풍열(風熱)이 폐를 손상시켰을 때,열에 의해 독이 내장에 쌓인 경우,위장이나 간에 열이 쌓인 경우,기혈(氣血)이 허약한 경우에 코피가 나오게 된다.풍열이 원인일 때는 코피와 함께 편도가 붓거나 기침을 하는 등 감기 증상을 동반한다. 위장에 열이 있을 때는 잇몸에서 피가 나고,입냄새 및 변비 증세,갈증이 함께 나타난다.이때 적절한 한방 약을 처방하면 위장의 열을 내려서 코피는 물론 입냄새와 변비도 함께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간에 열이 있으면 어지럼증을 호소하고,화를 잘 내며 산만한 행동을 보인다. ●코피 대처는 이렇게 당황하지 말고 아이를 편안히 앉힌 뒤 머리를 앞으로 숙여 피가 흘러내리도록 한다.목이나 가슴 부위를 느슨하게 해주고,입안의 혈액을 삼키지 않도록 한다.이때 고개를 뒤로 젖히면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거나 기도를 막을 수 있고,폐로 들어가 폐렴,위장 장애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코피를 멎게 하려면 코뿌리 부위에 얼음찜질을 하거나 콧망울 양쪽을 엄지와 검지로 지그시 눌러주면 된다.또 합곡,상성,소상혈 등을 눌러줘도 폐의 열을 내려지혈 효과가 있다.합곡은 엄지와 검지가 갈라지는 부위,상성은 이마 윗부분에서 머리 중앙으로 손가락 한 마디 떨어진 곳,소상은 엄지 손톱의 바깥 모서리 부분이다. ●예방 및 민간요법 평소 코를 후비는 아이는 습관을 교정해주어야 한다.겨울철 코점막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실내 습도를 60% 정도로 유지하고 코를 세게 풀지 말아야 한다.코딱지가 많이 생기는 경우 무리하게 떼내지 말고 면봉에 물을 묻혀 살살 닦아내야 한다.면봉으로 바셀린을 점막에 발라주어도 도움이 된다. 민간요법으로 우엉 30g,연근 30g,배 반쪽을 갈아서 즙을내 마시면 코피 예방에 좋다.연근은 성질이 차고 맛이 달아 열을 내리는 작용이 있고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우엉은 탄닌과 철 성분이 지혈에 도움을 준다.(도움말 구은정 꽃마을한방병원 한방소아과장) 임창용기자
  • 대한매일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성혁

    1.기형도 시의 가상성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 작품속 죽음 의미찾아 이 비평문은, 그러니까 기형도의 텍스트와 텍스트를 이어보고 만져보면서 이 가상적 구성물인 텍스트에 드러나 있는 것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재구성(‘시인'의 세계관이나 무의식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하여 다시 텍스트를 짜내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우선 기형도 시의 ‘가상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이는 기형도 자신도 원하는 것일 게다. 그의 친구인 원재길은, 별로 주목된 바 없는 글이라 생각되는 10여 년 전의 글에서, “창작자와 시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심리주의 비평의 어떤 그릇된 접근 방식은 시인 자신으로부터 이미 거부당하고 있다.”(대화적 울음과 극적 울음)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비평가들이 조야한 심리주의 비평에 빠졌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시와 기형도의 의식의 동형관계에서 벗어나 시를 문학적 텍스트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원재길은 이미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기형도의 여러 시편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 인물과 간단한 사건과 시간에 순연하는 구성이 있는 극적인 구조를 취한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기형도 시가 하나의 독특한 가상적인 구성물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깊게 논의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의 지적이 논자들에게도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다. 대개의 평문들에선 기형도 시의 등장 인물들-낯선 ‘그'로 자주 등장하는-은 대상화된 ‘나'로 취급되어 기형도의 자아를 반영하는 인물이 되어 버리곤 한다. 즉 기형도 시가 ‘극적 구조', 하나의 가상적 구성물임을 주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부분 2)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부분 1)에 등장하는 서기나 ‘김'을 대상화된 기형도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편으론 옳고 한편으론 그르다. 옳다는 점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는 나”라고 발언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허구적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시 같은 서정적 장르에서는 그 분신의 농도가 더 짙으리라. 하지만 그 등장 인물이 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파악은 그르다. 시에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등장 인물은 시 텍스트의 공간 내에서 자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의 ‘나'는 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게 된 텍스트 속의 ‘나'이다.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나'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서정시인일 것이다. 위의 시에서 서기는 시인의 대리일 뿐 아니라 카프카적 의미에서의 서기, 관료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일에 탕진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형식의 상징으로서의 서기이다. 유리창은 그 서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와 서기를 갈라놓는다. 이 유리창 때문에 ‘나'는 울고 있는 서기에게 가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줄 수 없다. 하지만 유리창 덕분으로 ‘혼자 울고' 있는 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유리창은 타자와 소통할 수 없게 하는 칸막이면서도 또한 ‘혼자' 각각 서로를 바라보며 소통할 수 있게 한다. ‘나'와 ‘그'를 동일시하여 각자 홀로 있는 ‘나'와 ‘그'의 어긋나 있는 대위 구조를 보지 않는다면 이 시가 뿜어내고 있는 의미를 붙잡기 힘들다. 원재길의 ‘극적 구조'를 넓게 본다면 이 장면 역시 그 구조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침묵의 극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1)의 서기의 울음을 조명하여 해명해주는 텍스트로 볼 수 있는 2) 역시, 독백의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와 ‘김'은 동일 인물의 분신들이다. 1)에서 시적 화자가 ‘나'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이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 화자가 담론 배후에 있고 시 표면에 등장한 ‘나'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김'의 중얼거림이 나타나 있다. 홀로 있는 ‘김' 옆에서 ‘김'을 ‘바라보는' ‘그'는 사물화된 김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김이라 할 수 있는데, 성으로만 표시되어 개성을 잃어버렸음을 표시하는 ‘김'보다 더 몰개성적인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김'이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와 김, 그리고 흐물흐물한 대명사가 되어 버린 ‘나', 또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극적으로 어울리게 된다. 그런데 1)에서 서기의 울음을 볼 수 있는 순간은 바로 홀로 있음의 순간, 침묵의 순간이었다. 침묵이 깨지면, 이 순간은 깨지고 말 것이다. 세계를 토막내는 언어의 세계가 침묵할 때 순수한 존재 자체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두 시', 삶이 무의미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순간을 깨달을 때의 침묵의 시간, 그 직후터뜨리는 울음의 순간에 배치되는 사물과 인간을 이 시들은 포착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극적 구성은 플롯을 시에 도입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배치된 장면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데, 이 일상을 갑자기 전복시키는 시간이 정지된 순간은 기형도 시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된다. 그는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섬'은 아주 익숙한 것 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고 동시 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 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형식이 기형도의 가상적 구성물-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그 순간은 시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어떤 연속선상을 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텅 빈 그 순간, 침묵의 순간을 말하기 위해선 우회로를 빙빙 돌아 그 순간을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가상적 공간, 더 나아가 환상적 공간을 구성하여 그 순간을 암시할 수밖에 없다.(어느 푸른 저녁)에서는 그 순간을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이라고 말한다. 이 저녁엔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가는 순간이 온다. 이 환상적인 순간은 어떤 예감을 통해 감지하게 된다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것은 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을 숨기고 있는가/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움직임이 홀연히 정지”한 상태, 이 상태는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실제 상황의 묘사로는 이 상태를 그려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볼 수 없는, 예감으로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상태이면서, 예감했다고 알아차린 순간 없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시는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순간은 그러니까 현실 묘사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환상은 의미의 블랙 홀과 같은 상태다. “보이지 않은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의미는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진다. 시인은 또 “이 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역시 순간일 뿐이다. ‘검은 외투'-죽음의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여전히,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딱딱하고 무미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본다”고 시인은 말한다.(여기서도 시적 화자는 보는 사람이며,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블랙 홀과 같은 어떤 순간을 느낀 순간, 나에게 ‘그'가 다가온다. ‘그'는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악마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악마는 말을 걸어온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의 인생의 의미를 모두 무화시킨다.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라고 그 악마는 속삭인다.다시 말해 모든 것이 무의미의 검은 구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을 예감할 때 그 악마는 등장한다. 그리고 세상의 법칙, 아마도 죽음으로 가는 삶의 법칙을 가만히 상기시킨다. 기형도 자신이 말한 ‘가능성'과 ‘불안'은 그 ‘순간'이 이 악마적인 것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악마적인 것이 죽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시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새로운 삶,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주며 ‘위대'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 지경에 다다른 이때 투명하고 푸른 공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감추어진 ‘둥글고 빈 통로'가 열린다. 그래서 악마적인 ‘그'가 말한 숨겨져 있는 ‘법칙'은 다만 죽음의 법칙만이 아니라 환상 속의 다른 통로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형도 시의 환상은 양면적이다. 일상적 삶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는 그의 환상은 우리의 삶을 무화시키는 블랙 홀의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신비롭게감추어진 희망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의 탄생과 그 탄생이 가져오는 양면성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2.기형도 시의 이중성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때 아름다움의 순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아름다움은 일상의 권태로운 세계를 무화시킨다. 인간은 권태의 세월보다 죽음을 무릅쓴 아름다움의 세계에 닿고자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유혹이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름다움은 죽음의 세계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일상적 삶이 도리어 죽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삶을 희망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파우스트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도 늙은 파우스트가 아름다움의 순간을 찾아 나서는 데서부터이다. 물론 그는 끊임없는 생성을 젊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순간이여 ‘멈추어라'라고 만약 자신이 말한다면 자신을 지옥에 데려가도 좋다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이 매립제에건설한 도시(악마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를 바라보며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죽음의 말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즉 파우스트가 산 젊음은 이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외침에 도착함으로써 끝난다. 그의 젊음과 행위는 결국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움의 순간'이란 착지에서 그의 젊음과 힘은 지옥으로 넘겨진다./기형도 시가 포착하려던 그 “위험하고 동시에 위대하다”는 ‘순간'의 이중성도 아름다움에 대한 《파우스트》적 아이러니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형도의 시가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순간이 가져오는 이 이중성에 대해 팽팽한 긴장을 풀지 않음으로써 이끌려 나온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시작 노트와 을 다시 상기해보자. ‘아주 낯선 것들'이면서 ‘아주 익숙한 것들'이라는, 순간들의 이중성에 대한 긴장을 시인은 계속 놓치지 않는다. 아니 순간들의 이중성의 포착은 이 대상에 대한 긴장에 찬 예민성의 끈을 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주 낯선 것들로의 ‘둥글고 빈 통로'를 마련하는 어떤 순간은 우리가 언제나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어떤 순간이다. 그래서 ‘아주 익숙'하기도 하다. 그 순간이 벌려내는 환상은 우리 삶의 현장인 일상의 삶을 무화시키면서도 어떤 다른 세계로의 통로, 다른 삶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 이 이중적인 통로의 발견을 기록하는 데서 기형도의 시는 드러나기 시작한다. 통로의 이중성은 ‘둥글고 빈'이라는 수식어에서 이미지화되어 있다. ‘둥근 것'은 아날로지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아날로지는 모든 개체가 전체를 비추고 전체가 개체들을 끌어안는 조화의 세계 아닌가./그 세계는 둥글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비어 있다는 진술에서 ‘둥근 것'의 아날로지 세계는 아이러니의 상태로 변화된다./‘둥글고 빈' 통로는 아름다움에로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無에로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 둥글고 텅 빈 통로를 통과하여 다다른 어떤 다른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공기 방울의 세계이다. 저녁 노을이 지면/神들의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신비로운 그 城///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 성 안은 “아름답고/신비”한 세계이다. ‘시작 메모'에서 말한 ‘위대한 순간'이 형상화된 세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 세계에도 해당된다. ‘존재'가 차안의 세계에만 해당된다는 개념이라면 말이다. 이 세계는 신들이 사는 세계이지 않은가. 이 세계는 신들과 농부들과 작은 당나귀는 이 성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어느 하나도 빠지면 성립되지 않는 세계이다. 즉 아날로지의 세계다.시인도 ‘역시' 작은 당나귀들도 평화로운 그 성에 농부들과 살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은 공기와 같은 세계라서 “구름 혹은/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지고 세계가 낯설어지며 감각이 착란될 때의 순간이 열어놓는 어떤 ‘푸른 저녁'같을 때, 사람들이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갈 수 있었다. 이 ‘순간'에만 바로 ‘둥글고 텅 빈' 통로를 따라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성 안의 세계는 바로 그렇게 공기 방울, 구름이 된 사람들이 어우러져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이 공기 방울의 세계는 차안의 공간에 있진 않지만, 차안과 동떨어진 피안의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차안의 공기 안에 있다. 우리가 언제나 대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언뜻 벌려진 공기와 공기 사이의 블랙 홀을 공기가 되어 통과하면 만날 수 있는 세계이다.그러니까 이 성 안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옆-앞에 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들어가려는 골동품 상인-아마 차안의 세계의 속성인, 살해를 자행하는 폭력성을 보여주는 등장 인물이라 할-이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가 보았자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다. 골동품 상인은 차안의 세계 뒤에 있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는 숲만 자르면 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삼차원적 세계 인식에 머물러 있다. 그가 차안에서 아무리 폭력과 파괴를 행한다 해도 이 숲으로 된 성벽 안은 의연히 평화로운 마을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만큼 불안하다. 우리가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도는 앞에서 보았듯이 기화되는 길밖에 없다. 통로가 ‘빈' 통로여서 들어가려는 이는 빈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공기 세계는 어떤 무게 있는 물질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볍게 둥둥 떠다닌다. 공중에 투사된 영상처럼 흩어졌다 모여지는 그런 세계다. 우리가 손으로 만질라치면 그 세계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릴 것이다. 이 아날로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망의 저편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은 품을 수 있으나 어느전도와 착란의 순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차안에선 이루어낼 수 없을 세계이다. 기형도가 희망에 대해 ‘어둡고 텅' 비어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숲으로 된 성벽' 자체가 비어 있고, 그 비어있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도 빈 희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 (植木祭) 중에서 기형도 시에서의 ‘죽음'은 시인의 우울한 세계관이나 유년의 기억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와 선택을 통해 ‘각오'한 것이다./ 이 죽음의 각오는 ‘둥글고 빈 통로'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통로에 들어간다는 일은 다른 삶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 본 바 있었다. 통로 저 편에 있을 숲으로 된 성벽에 갈 수있으리란 희망은 절망으로 전화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둥글고 빈 통로를 걸어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란 빈 희망이기에 그러하기도 하고, 숲으로 된 성벽이 아름답다고 외친 순간 그 아름다움의 덧없음이 부각되면서 죽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즉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은 어두운 희망이라 말할 수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다. 그 성벽은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착란과 환상을 통해 대기에 구멍이 나는 순간을 파악하려는 기형도 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때의 죽음으로 가는 구멍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푸른 유리병' 같은 공기가 점차 탁해지면서 ‘안개'로 오염되기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안개) 중에서 푸른 대기 속의 둥글고 빈 통로는 ‘안개의 빈 구멍'으로 전화한다. 다른 삶으로 가는 ‘순간의 통로'가 안개에 의해 막혀버리고 순간이 가지는 죽음의 성질만이 드러난다. 이 순간은 안개로 뒤덮인 환상적인 마을을 구성함으로써 나타나고, 그 죽음의 성질은 다시 일상이란 것이 얼마나 죽은 상태와 같은가를 간접적으로 포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차안의 세계에 대한 네거티브 필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네거티브 필름 같은 가상적 세계는, 흐리멍덩한 색깔인 안개의 색깔로 대상의 윤곽만 드러내면서, 생명 없고 답답한 무엇으로 현상한다. 이 시를 더 읽어보자. 죽음의 공기인 ‘안개'의 빈 구멍은 사람들을 빨아들여 그 속에 가두어 놓는다. ‘이 읍' 사람들의 삶은 ‘쓸쓸한 가축들'처럼 무리지어 있지만, 안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 무력하고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 읍은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인데, 그것은 “한 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기도 하고, “방죽 위에 醉客 하나가 얼어 죽”지만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같은 시에서)하기도 하는 사건이다. 겁탈당한 여직공과 얼어죽은 취객은,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읍 안 사람들에겐 파괴당한 삶을 흐릿하게 바라보고는 쓸쓸하게 고개를 숙여보게 하는 사건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들 눈앞에서 타인들은 안개 속으로 ‘지워지고' 그들은 제각기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게 된다. 안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 없게 만드는 세계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변화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미지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변화 없는 지속이 기억의 지속을 가져오진 않는다. 그 반대이다. 이 읍에선,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이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나 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지속의 시간성은 텅 빈 시간성이다. 기억이 없이 사는 것은 텅 빈 삶이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와의 상호적인 울림이 없는 시간이고, 그래서 미래조차 가능하지 않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되어야만 미래가 있을 수 있어서, 과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미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개는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 존재이다.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죽은 존재이다. 죽은 존재인 안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죽은 존재이다. 안개는 독과 같다. 그러나 그 읍 사람들은 안개를 마약처럼 마신다. 안개를 편하게 느낀다./ 안개가 끼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내보여야만 해서 “방죽 위의 얼굴들은 모두 낯설”어지고 “서로를 경계하며/바쁘게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읍은 ‘안개의 聖域'이 된다. 안개 속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된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가”게 된다. 이 반어적 표현에는, 안개가 ‘무럭무럭' 키우는 아이들의 삶이란 그들 모두 검은 굴뚝과 폐수와 겁탈의 위험이 있는 공장으로 쓸쓸히 끌려가는 가축과 같은 삶임을 암시한다. 3.작품속 죽음의 포착 (안개)를 읽으면서,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를 선택했을 때 기형도 시가 발 딛고 있던 ‘순간'은 무서운 죽음의 세계-안개로 뒤덮인 읍과 같은-를 입벌려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계-지옥에서의 형벌-는 ‘느릿느릿 새어나'와 계속 ‘미친 듯이 흘러다'((안개)중에서)녀야 한다. 앞에서 본 (식목제)의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이 형벌은 정착이란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기억도 없이, 미래도, 삶도 없이 흘러다녀야 한다. 오직 흘러다님의 지속만 있을 뿐이다. (안개) 속의 읍내 사람들은 명계(冥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삶을 잃어버린 이 유령의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일군의 기형도 시의 한 주제를 이룬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러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 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기형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현실의 이면에 있는 죽음의 안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와 동일하게 안개에 중독된 유령들을 포착하기 위해선 희망을 억눌러야 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들이 머무는 정거장으로 쓰려고 한다. 불안이 죽음을 예감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면, 불안을 머물게 한다는 말은 죽음들의 예감을 머물게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들이 방문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자신에게 흘러들어 죽음이 그 길을 통해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길이 흘러드는 정거장으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려면 자신의 육체 자체가 걸어다녀야 한다. 길이 걸어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길이 흘러 온다는 말은 자신이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길을 흡수한다는 말이다. 걸으면서 길을 흡수하고 흡수한 길을 통해 불안-유령을 만나고 그 유령의 세계를 구성하는 환상으로 시가 구성되게 된다. 이 유령과의 대면을 보여주는 대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白夜)에선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팡팡 빛나는 이 무서운 白夜” 속에서 “무슨 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사내를 보여준다.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문닫힌 商會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그의 등에 “軍用 파커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말이다. 담배 살 돈이 없을 이 사내는 아마 어린 아들과 함께 길에 쓰러져 쓸쓸히 얼어죽을 것이다. (가는 비 온다)에서는, 어느 가는 비 오는 날,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지 않는다는 시적 화자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전개하는 여러 상념들을 보여준다. 그 상념들은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나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면/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와 같은 죽음의 여러 모습이다. 주검을 직접 보여주는 시도 있다. 가령,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죽은 구름))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검은 감정이 절제된 상태로 서늘하게 즉물화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우울하게 가고 있는 거리엔 주검들과 죽음에 대한 상념을 유인하는 ‘낡은 간판'들이 널려 있으며 기후마저도 그러한 상념을 피워 올리게 한다. 그의 눈에 포착되는 사람들은 좀 있으면 죽을 운명이거나 죽어버린 이다. 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유령들이다. 이들은 회한과 외로움에 말라죽어 가는, 행복과 거리가 먼 이들이다. 플랫폼에서 본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이”고((鳥致院)), 어느 카페에서 본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를 파내”면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밋빛 인생))라고 새겨 넣는다. 삶을 박탈당한 유령들의 포착은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처럼 ‘흘러다'니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포착하는 대상의 대부분인 흘러 다니는 사람들은 시적 화자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그 사람들의 삶이 시적 화자의 삶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다시 시적 화자의 내면 독백은 떠도는 자의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 낸 추억들이 밟히고/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 (진눈깨비) 중에서 진눈깨비 뿌리던 날, 시적 화자는 그날도 역시 거리를 걷는다./ 거리에서 그는 ‘취한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거해 있는 ‘빈 트럭'도 본다. 그리고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이 밟히'는 소리를 듣는다.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밟히는 소리도 듣는다. 외로운 빈 트럭과 쓸쓸하게 쓰러지는 취한 사내들에 대한 묘사와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들을 불러오는 회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시적 화자가 주체가 되어 추억들을 불러온다기보다는 저 진눈깨비와 거리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기억들을 불러온다. 그 기억은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오”시기에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엄마걱정) 중에서)의 기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엄마가 없어 빈방에 혼자 훌쩍거린 기억을 감추고 있을 사람들이며, 역시 집에 들어가면(집이 있다면) 빈방에 홀로 앉아 있을 사람들일 게다. 죽어가는 이 유령들은 그런 기억을 깊이 품고 살아갈 것이며, 이는 다시 역으로 시적 화자 자신도 그 기억을 품고 쓸쓸히 죽어 가는 유령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죽음'을 발견하는 ‘흘러 다니기'는 점점 시적 화자 자신 안의 죽음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 되어버리게 된다. 시적 화자는 “곧 무너질 것만 그리워했”((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다고 말한다. 무너지는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증언하는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과 같이 떠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자신의 다리를 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중에서)라고 울부짖는 여행자와 같은, 떠돎을 그만둘 수 없는 유령이다. 환상적 공간의 열린 순간을 통해드러난 죽음의 세계, 그리고 그 안을 떠돌아다니는 유령적 삶의 포착은, 이렇게 자신도 유령이라고 인식하는, 안개의 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도 안개에 중독되어 버렸다는 점을 인식하는 시적 화자의 등장을 통해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의 공간은 더욱 전일화되고 가공할 것으로 드러낸다. 유령의 세계를 증언하는 자신도 유령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그 경악의 순간은, 바로 메두사가 페루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그 놀람과 두려움의 순간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형도의 시는 바로 그 경악의 순간을 포착한 카르파치오의 (메두사)란 ‘그림'과 같은 것일 터, 시 텍스트는 그 경악의 순간 자체, 또는 그 순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경악의 순간을 구성하여 현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예술 텍스트가 구성되기 이전엔 그 경악의 순간을 우리는 ‘맞서게 되지' 못한다. 환상을 사용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시-예술이 그 경악의 얼굴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경악의 순간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입 속의 검은 잎)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가 경악하는 순간을 객관화하는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이 시에서 등장하는 진술과 사건들이 현실의 어떤 대응물을 지시한다고 본다면 곧바로 해석의 난점이 생길 것이다. 운전기사, 장례식, 망자의 혀, 없어진 사람들, 죽은 사람, 검은 잎,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나' 등,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시 텍스트 안에 배치되었을 땐 이 단어들은 그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극적 공간 속으로 이 존재들은 새로 의미를 얻으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공포의 분위기에 맞추어진다. 어떤 가공할 권력에 의해 살육된 자들이라 상상할 수 있는 ‘무더기'의 실종된 자들-망자들-의 말하지 못하는 혀-잘린 혀일까?-는 유령처럼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 유령들은 벌써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린 사람들 몸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 혀들은 이제 ‘거리에 흘러넘'친다. 장례식은 살육당한 자들 중 한 명의 장례식일까? 그 죽은 이의 잘린 혀 역시 거리에 흘러 다닌다. 물론 그 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잘린 혀들이 내는어떤 철버덕거리는 소리, 성대가 잘려나간 채 바람만 빠지는 쇳소리를 내는, 꿈틀대는 소리들을, 원한들을, 슬픔들을, 저주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청 속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혀가 ‘천천히 굳어'감을 자각한다. 그것은 시신을 실은 ‘백색의 차량 가득' 나부끼는 검은 잎 때문이다. 살육이 자행되는 세계에서 살해당한 자들의 유령이 검은 잎일까? 그 유령들-검은 잎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릴 때 혀는 굳어져오며, 이윽고 죽은 자의 혀가 된다. 그리하여 시는 죽은 자의 혀로 쓰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을 무당처럼 대신 말해주는 이가 된다. 정리하자면, 시적 화자가 온통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와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음을, 더 나아가 ‘죽은 사람'인 운전기사가 어딘가로 그를 데려가서 이 유령들이 시적 화자의 혀를 통해 죽음의 이 세계를 증언할 수 있도록 시적 화자에게 내리는 신들림을, 언제 살육될지 몰라 두려워하는(‘그 일이 언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의 음산한 어조로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공포의 순간/을 객관화시키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수수께끼를 동반한 순간적 전율을 느끼게 된다. 기형도의 시가 도달한 한 극점은 바로 여기다. 앞에서 보아온, 환상적 공간이 뚫어 놓은 순간의 구멍을 통해 나타나, 죽음을 퍼뜨리는 세계와 그 속에서 떠도는 유령들이, 이 시에선 하나의 전율케 하는 장면으로 종합되어 갑작스레,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 경악의 세계는 물론 가상의 세계이고 현실 세계로 치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형도 시의 세계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향유 대상으로서의 단순한 가상과는 달리, 시어가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뿜어내는(메두사를 본 메두사), 자기 파열이 가져오는 전율을 우리에게 이 가상 세계는 던져주는데, 그 객관화된 전율과 맞서는 독자는 충격 속에서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며 일상적 시간의 지속이 파열되는 ‘순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상적 순간의 충격 속에서 일상적 시간 안에 감추어진 안개와같은 죽음의 습기를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포의 세계는 기형도 시가 열어 놓은 ‘순간의 통로'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입 속의 검은 잎)의 세계는 그 반대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숲으로 된 성벽)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고 희망할 순 없을까. ‘순간의 통로'는 다시 저 유토피아적인 미의 세계로, 숲으로 된 아날로지의 세계, 공기 방울 같은 환상의 세계로 길을 열어 놓기도 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날로지의 세계가 급전하여 유령들의 세계, 경악의 세계가 현현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아 왔다. 그러나 반대로, 경악의 세계가 급전하여 다시 저 아날로지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두 극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경악의 세계는 다시 희미하게 ‘숲으로 된 성벽'으로 가는 길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적 세계는 부정성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빛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면 기형도의 시는 일상적 삶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를 통해세계와의 화해의 열망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용기도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를 보여주기 위해 두 세계의 연결 지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고, 이 작업은 상당한 분석과 해석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도 비평적 재구성은 완성되지 않았다. 아니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기형도 시 텍스트는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몸을 벌리고 있다. (끝) ◆당선소감 영광이다.기쁘다.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진다.과연 좋은 글을 내가 계속 써나갈 수 있을지,두렵기조차 하다. 당선 통보를 받고 비평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좋은 비평을 하기 위해선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큰일이다. 지금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문학이 다시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정치성에 대해서,그리고 더욱 정치성이 짙은 비평에 대해서. 선거 행위만이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윤리의 문제로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윤리가 단순한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면 삶에서의 권력과 활력 문제로서 윤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권력 망을 드러내고,비판하며 그것에서 삶이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고,삶의 활력을 북돋을 수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문학의 윤리-정치성은 더욱 증폭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 그리고 비평이 정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인간 관계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나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그리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도,빈 말이 아닌 ‘고맙습니다.’란 말을 전하고 싶다. 이성혁 ●약력 67년 서울생, 한국외국어대 일어과 동 대학원(국문학), 외대강사, 99년 ‘문학과 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심사평 김용하의 ‘미적인 것의 정치성과 정치적인 것의 윤리성’,오홍진의 ‘관념으로 빚은 소설의 성채’,이성혁의 ‘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은식의 ‘사물과 하나가 되기까지의 여정’,장사흠의 ‘풍경의 미학과 권력의 탐색’이 주목을 받았다. ‘미적인 것…’은 미학적 범주들과 시적 언어 사이의 조응 양상을꼼꼼히 살핀 글이지만,미적 개념들을 상호 연관시켜 긴밀한 인테리어를 꾸미는 데는 실패하였다.‘관념으로…’는 짐승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 사이에서 요동하는 정찬 소설의 권력의 역학을 집요하게 추적하였으나 스스로 논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말았다.‘사물과…’는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갈아타며 정현종의 시적 여정을 차분히 밟아간 글이었으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풍경의 미학…’과 ‘경악의 얼굴…’이 마지막까지 남았는데,‘풍경의…’는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개진된 권력의 내면화와 그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과정을,핵심 의미체들을 길어내며 흥미진진하게 추적한 글이고,‘경악의…’는 시인의 심리학에 치중한 종래의 평문들을 단김에 뛰어넘어 극적 구성의 관점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한 글이다. 그러나‘풍경의…’는 기계적인 구성과 엉뚱한 결말이 글쓴이의 설익은 문학관을 엿보게 하였으며,‘경악의…’는 미학에서 사회학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리멸렬해지더니 급기야 막다른 길로 뛰어들고 말아,심사자들을 경악케 하였다.하지만 패기만만한 도전과 그 패기가 창안해 낸 새로운 해석 세계는 썩 강렬한 인상을 남겨 마지막 선택의 근거가 되었다.이성혁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끈기 있게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정과리 김인환
  • 예술의전당 21일부터 ‘팝아트’ 전-여배우 얼굴 사진 햄버거 광고

    마르셀 뒤샹은 1917년 남성용 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출품해 ‘미술작품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뒤샹의 주장은,비록 기성품이라도 화가가 선택한 순간 그것은 작품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40년 뒤 그의 철학을 뒤따르기라도 하듯 ‘팝아트’가 탄생했다.195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이 미술운동은 60년대 미국으로 옮겨가,유명 배우의 사진을 복제하거나 코카콜라·햄버거등 광고 이미지를 확대·축소해서옮기고,신문을 이용한 이미지 작업,만화 확대 등을 일삼았다. 60년대 팝아트의 대표주자인 앤디 워홀은 작업장을 ‘공장’이라고 부르고,제 작품을 ‘생산’되어 판매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의 경계가 무너졌고,‘공장’에서 실크 스크린으로 수백장의 판화를대량 생산했다.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기본 구조로 하는 번영의 미국,상업문화가 확산되던 60년대를 그대로 반영한 셈이다. 예술의전당은 21일부터 내년 2월9일까지 ‘팝아트’전을 연다.1960년 초에서 75년까지의 작품들로,앤디 워홀·로이 리히텐스타인·멜 라모스·제임스로젠퀴스트·에드워드 류세이·로버트 라우젠버그·짐 다인 등 주요 작가 12명의 작품 52점을 전시한다.추상표현주의에서 영향을 받고,그후 극사실주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조성문 전시사업담당은 “팝아트의 진수만을 모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팝아트의 다양한 측면을 총체적으로 맛보는 최초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입체파·야수파 등 20세기의 다른 미술운동과 달리 팝아트가 특정한 스타일로 규정되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양한 접근방식을보여주는 일이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국내에서 팝아트는 90년대 초·중반 두 차례의 ‘앤디 워홀’전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 전시품은 사우스플로리다 대학과 마이애미 대학의 미술관 소장품이 주가 된다.사우스플로리다 대학은 70년부터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입주작가 프로젝트를 운영했는데,워홀·라우젠버그·로젠퀴스트·다인·라모스·리히텐스타인·류세이 등이 입주해 작업했다.휴양지 마이애미에 작업실을 두고독자적으로 작업한 작가들의 작품은 자연스레 마이애미 대학에서 소장했다고. 팝아트의 본산인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작품을 대여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주요 작가의 작품들이 이번에 대거 전시된다.1964년 아르투로 쉬와르즈의 ‘국제 현대판화 선집’에 든 작품 가운데 워홀의 ‘꽃’‘마릴린’‘리즈’‘모택동’,모라스의 ‘라마’,리히텐스타인의 ‘쉽보드 걸’‘핑커 포인트,초상화에서’등을 감상할 수 있다. 조성문씨는 “현대는 IT(정보통신)를 중심으로 60년대와 비슷한 역동적인사회적 변동이 이루어져 ‘브로드 밴 에이지’로 불린다.이런 시기에 미술은 어떤 조형예술을 보여줘야 하는가를 생각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팝아트는 1960∼70년대에 국한된 ‘박제’인가.그렇지는 않은 것같다.1980년대부터 사우스플로리다 대학의 그래픽스튜디오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고 한다.82년 라우젠버그·다인이,87∼89년 리히텐스타인이,90년에는 구소련의 작가들이 입주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팝아트의 ‘세례’를 받은 극사실주의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 작가들이 ‘일상성’에 주목한 팝아트의정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02)580-1510. 문소영기자 symun@
  • 巨富 - 역대 거상24인의 ‘경영 노하우’ 따라잡기

    중국은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 경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거상(巨商)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떨친 이들이 많이 생겨났다.초나라 출신인 도주공(陶朱公) 범려,무왕을 도와 왕조를 창업한 강상.제나라 환공을 오패의 맹주로 만든 관중,진나라 군대를 속여 정나라를 구한 현고,자초를 왕으로 옹립하고 천하를 한손에 넣은 여불위 등이 대표적인 예다. 중국 고전에서나 들어보았을 법한 이런 인물들에게서 ‘돈 버는 방법’을배운다는 것,그것은 일견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일처럼 보인다.더구나 중국은 중농억상(重農抑商)사상이 수천년을 지배해온 나라다.이런 나라에서 거만(巨萬)의 부를 모은 사람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에는 현재 5000만명이나 되는 억만장자들이 있다.그들은 어떤 경로를통해 부를 쌓았고 또 관리할까.‘巨富’(전2권,상성 지음,한은정 등 옮김,이지북 펴냄)는 중국의 역대 거상 24인의 인생역정과 지혜,경영이념을 통해 그 부의 비결을 밝힌다.스무살이 되면 장사의 모든 것을 배운다는 중국인.그들에게는 몸으로 배우고 가슴으로 실천하는 그들만의 경영전략이 있다.이 책에 소개된 거부들의 경영전략을 살펴보면 그것은 모두 중국의 고전에서 배운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떨친 거상들 가운데 성상(聖商)으로 불리는 인물이 한명 있다.오늘날까지 ‘부호의 대명사’로 통하는 춘추시대의 자유거상 범려다.범려의 상술의 핵심은 “귀함이 정점에 이르면 오히려 천하게 되고,천함이바닥에 닿으면 오히려 귀하게 된다.”는 이른바 귀천반복론이다.하늘 아래모든 것은 천할 때가 있으면 반드시 귀할 때가 있다.그러니 물건 값이 오를때 주저없이 내다 팔고 또 쌀 때 사들이는 가운데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물건의 품질은 엄격하게 따져야 하고,돈은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해야한다는 ‘무완물(務完物) 무식폐(無息幣)’의 원칙 또한 그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장사의 기본이다. 용은 가린 구름 사이로 가끔씩 비늘 덮인 뺨이나 발가락만 보여야지,그렇지 않으면 비상하는 기세를 느낄 수 없다.인간의 지혜도 마찬가지다.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에게자신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특히 지금처럼 기업간 경쟁이 치열하고 정보기술이 발달한 상황에서는 자신을 감추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그런 만큼 기업경영자에게는 자신을 적당히 감출 줄 아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전국시대 말 여불위는 이같은경영의 지혜로 천하를 거래하고,정치에서 성공한 몇 안되는 상인 중 한명이다. 이 책에는 중국 고대의 거상들뿐만 아니라 근대사를 장식한 경영 구루(guru)들도 꽤 많이 등장한다.상무인서관의 경영혁명을 이룬 출판 거목 장원제가그 두드러진 예다.상무인서관은 1897년 설립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출판사.번역·인쇄·출판·발행·판매를 하나로 아우른 초대형 출판사로 중국 제일의 문화기관으로 꼽힌다.장원제는 기업발전의 최대 원동력으로 ‘사람’을든다.그는 인재를 모으는 일이야말로 기업발전의 근원이며 변혁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인재를 제대로 구해 쓰는 것이 경영의 기본임은 역사가 증명한다.일찍이 강상은 이름없는 어부에 불과했지만 주 무왕이 그를 등용해 적을 멸망케 했고,이윤도 처음에는 보잘것 없는 관리 혹은 노비였다고 하지만 상 탕왕이 그를기용해 천하의 패권을 잡는 데 활용했다. 중국의 거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화교.중국은 어떤 면에서는 화교로 대표되는 나라다.화교의 자본규모는 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약 2조 달러로 추정된다.이것은 중국 전체 GDP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이중 약 70%는 아시아 화교 자본이다.이 책에서는 화교 거상 진가경의 성공신화를소개한다.고무공장을 경영해 거부가 된 그의 기업가치관에서 핵심은 성실과신용이다.‘진가경 스타일’로 알려진 그 경영이념은 동양식 관리제도의 모범으로 통한다. 이밖에 양무파의 선구자 이홍장,상업이론가 백규,중화족 최대의 실업가 장예,화학공업계의 대두 범욱동,백화점 경영의 일인자 곽림상,금융업의 개척자 뇌이태,돈모(豚毛)왕국의 황제 고경우,선박왕 노작부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지혜와 용기,윤리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경영이념은 당장 무릎을칠 만큼 기발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구미에 비해 200년 이상 뒤쳐진 중국 자본주의를 불과 몇십년만에 선진 궤도에 올려놓은 그들의 경영사상의 일단을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각권 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난소암에 온열항암요법 효과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 산부인과 이준모 교수팀은 난소암 환자에게 온열항암요법을 시도해 생존율을 2배 정도 높였다고 최근 밝혔다. 이 교수팀은 지난 94년 1월부터 2000년 1월까지 6년간 난소암으로 진단받은 환자 117명을 대상으로 온열항암요법의 임상적 효과를 관찰,분석했다. 117명 전원에게 1차 수술 및 항암 화학요법을 실시했으며,117명중 57명의 환자에게는 2차 수술 및 항암요법에 더하여 온열항암요법을,60명의 비교군환자에겐 수술과 항암요법만 각각 시행했다. 그 결과 117명의 5년 생존율은 58.6%였으며,온열항암요법을 시행한 경우는 63.4%로 이 치료법을 받지 않은 환자의 52.8%보다 뚜렷하게 높았다. 특히 이들중 난소암 3기로 진단받은 환자 74명의 경우 온열항암요법을 시행한 35명은 5년간 생존율이 65.6%에 달한 반면,이 치료법을 쓰지 않은 39명은 33.3%로 확연히 낮았다. 온열항암요법은 수술을 끝낸 뒤 복막을 봉합하기 전에 특수 장비를 이용해 복강내로 항암화학용액을 집어넣은 뒤 고압펌프를 이용해 용액을 가열해 암세포를 죽이는치료법이다. 이준모 교수는 “온열항암요법 치료를 받은 환자의 5년 생존율 수치는 외국의 연구보고상의 23∼41% 및 우리나라의 임상성적 30%보다 현저히 높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 국제정보올림피아드 金·銅 “내신 낮다”서울대 탈락

    전 세계의 정보과학기술분야 영재들이 겨루는 국제정보올림피아드(IOI)에서 입상한 학생들이 서울대 수시모집에 탈락했다. 한성과학고는 10일 “지난 8월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딴 2학년 김모(17)군과 동메달을 딴 다른 두 학생이 내신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지난 8일 발표한 서울대 2학기 수시모집 1차전형에서 모두 탈락했다.”고 밝혔다. 과학고측은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대회에서 입상한 학생들이 떨어진 것은 이례적이다.”며 아쉬워했다.서울대는 1차전형에서 경시대회 입상성적과 자기소개서 등을 반영하고 있지만 내신성적이 총점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황장석기자 surono@
  • 홍검사 사법처리 검토

    ‘피의자 사망 사건’을 조사 중인 대검 감찰부(부장 朴泰淙)는 3일 살인사건 피의자 조천훈(30)씨가 사실상 구타로 숨졌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에 따라 주임검사인 서울지검 강력부 홍경영(洪景嶺) 검사가 수사관들의 폭행사실을 알고도 묵인 또는 방조한 혐의가 확인될 경우 사법처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에 앞서 국과수는 2일 “조씨는 광범위한 좌상(타박상)에 의한 속발성 쇼크(2차적 쇼크) 및 외상성 지주막하출혈(뇌출혈)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감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속발성 쇼크란 먼저 좌상이 있고,이로 인해 피하출혈이 생기면서 혈액순환을 감소시켜 2차적 쇼크를 불러오는 것을 말한다. 조씨 사체에는 양쪽 허벅지와 왼쪽 무릎,장딴지 등 하반신과 두 팔꿈치에 좌상이나 찰과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고,뒤통수와 이마 등 머리에도 상처와 멍자국이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2일 오전 홍 검사를 소환,조사한 결과 지난달 26일 새벽 1∼2시 사이에 홍 검사가 직접 조씨를 조사했으며,이날 낮 12시쯤 조씨가 119구급대에 의해 후송되기 직전에도 홍 검사가 조사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검찰은 홍 검사를 4일 오후 재소환,보강조사를 벌인 뒤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물고문’ 의혹과 관련,검찰 관계자는 “조씨의 사망원인과는 무관하다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가 나왔지만 조씨의 공범인 박모(구속)씨가 물고문 의혹을 주장하고 있는 만큼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김진환(金振煥) 서울지검장은 2일 ‘국민 앞에 사죄하며’라는 글을 통해 “사안의 실체가 어느 정도 밝혀진 시점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어떤 문책이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장택동기자 taecks@
  • 北核 APEC정상성명 전문

    우리는 북한이 더욱 적극적으로 아·태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혜택에 주목한다.그러한 가능성은 핵무기 없는 한반도를 전제로 한다.우리는 비확산 체제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재확인한다. 우리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하며,역내 모든 국가의 이익에도 부합함을 지지한다.우리는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한 약속을 명시적으로 준수하기를 촉구하며,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우리의 결의를 재확인한다.
  • “北 핵포기땐 경제혜택”APEC정상 공동성명

    [로스카보스(멕시코) 오풍연특파원] 제10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28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폐막과 함께 ‘북한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정상성명’을 채택,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고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폐기를 강력히 촉구했다. APEC 정상들은 “우리는 북한이 더욱 적극적으로 아·태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혜택에 주목한다.”면서 “그러나 이는 핵무기 없는 한반도를 전제로 한다.”고 강조했다. 성명은 “우리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한반도 및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하며,역내 모든 국가의 이익에도 부합함을 지지한다.”면서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한 약속을 명시적으로 준수하기를 촉구하며,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우리의 결의를 재확인한다.”고 덧붙였다. APEC 정상회의는 이와 함께 경제성장과 개발협력의 혜택 확대를 골자로 한 5개 분야 44개 항의 정상선언을 채택했으며 ‘테러리즘과의 투쟁 및 성장 촉진에 관한 성명’을 별도로 채택,▲테러조직 근절 ▲테러자금 차단 ▲항만·공항 보안조치 강화 ▲승객·화물 안전보호 강화 등을 약속했다. 한편 김 대통령은 오전 숙소인 로열 솔라리스 호텔에서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이 조속히 핵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주변 관계국들이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박선숙(朴仙淑)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장 주석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는 중국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지난 25일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poongynn@
  • APEC 정상회의 결산/ 北核 평화적 해결 ‘국제합의’ 도출

    [로스카보스(멕시코) 오풍연특파원] 28일 폐막된 제10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당초 예정에 없던 북한 핵 관련 성명을 채택했다.전날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원칙을 공고히 한 데 이어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 2차 전체회의 기조발언에서 ‘북한의 핵포기시 경제지원’ 방안을 제시한 데 대해 APEC 정상들이 ‘북한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APEC 정상성명’을 채택한 것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등 주요국 정상들이 기조발언을 통해 북한 핵문제를 언급하며 관심을 유도한 점도 성명 채택에 일조한 것 같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남은 과제는 큰 틀의 국제적 공감대를 어떻게 구체화하느냐는 것이다.미국과의 세부적 조율이 더 필요하고,북한을 설득하는 1차적 책임도 한국에 주어졌다. 김 대통령은 또국제금융시장 및 유가불안,대(對) 이라크전 가능성,선진국 경제회복 지연 등에 대해 APEC 차원의 공동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재무장관들의 조속한 회동을 제의했다.특히 역내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증권화 및 신용보증시장 발전 방안’ 등 역내 자본시장을 육성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 대통령은 역내 국가들이 정보화 경험을 공유,정보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전자정부 경험전수 ▲APEC 중소기업 및 극소기업 정보화교육 서비스 ▲정보화교육 훈련센터 활성화 ▲APEC 교육재단 활성화 등 4대사업을 제안했다.이같은 김 대통령의 제안은 우리의 정보기술(IT) 관련 역량을 APEC 역내국가로 확산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정상 선언문에 사이버 교육 확대,APEC 교육재단 활성화에 대한 평가 등을명시하고,동남아 국가 정부 관계자들이 우리 나라에 IT 관련 훈련생을 보내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오는 등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poongynn@
  • [건강칼럼] 부분 대머리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자주 들르는 한 병원 신경외과에서 특별히 진료를 의뢰한 어린 환자가 있었다.몹시도 무서움을 타는 이 아이는 유아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쇠꼬챙이에 상처를 입어 3주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완치가 안된 경우였다. 상처가 생길 때는 모르고 있다가 며칠이나 지난 후 아프다고 하여 집 근처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호전되지 않았고,그때에서야 걱정이 되어 종합병원에서 작은 수술까지 받았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오히려 상처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병원을 옮기던 중 우리 병원에 입원한 환자였다. 아이는 만성 염증으로 두피에 지름 4∼5cm 정도의 괴사부위가 있었으나 X스레이 검사 결과 염증이 깊이 침투하지는 않았다.오랫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극심한 통증을 경험한 후 겁을 많이 먹게 되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전신 마취 하에서 어려움 없이 간단한 수술로 염증을 치료할 수 있었고,아이는 수술 후 약 2주만에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어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상처가 있던 부위에 머리털이 나지 않아 외상성 대머리(일명 ‘땜통’)가 된 것이다.보호자는 아이가 크면서 혹 정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런 경우는 크게 걱정할 게 못된다.수술로써 교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먼저 부위가 넓은 경우는 조직 확장기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순차적인 수술로 부위를 좁혀주는 방법이 있다.부위가 비교적 적으면 단순하게 절제함으로써 잘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을 쓴다.부위가 작으면서도 눈에 띄는 경우는 모발이식술을 시행한다.요즘은 모발 이식술이 발달돼 전혀 문제가 없다. 조직 확장기를 사용할 정도로 부위가 큰 경우가 아니면 수술은 국소마취 하에서 가능하며 입원도 필요 없다.다만 이런 수술을 견디려면 최소한 중학생이상 돼야 하기 때문에 아직 이르다고 알려 주었다. 설명을 들은 보호자들은 안심하면서 훗날을 약속하고 돌아갔다.하지만 유아원에서 다친 상처를 별 생각 없이 하찮은 것으로 취급해 시기를 놓친 실수로 앞으로 십 년 정도의 세월을 걱정하면서 지내게 됐으니 부모의 마음이 편할 리 없을 것이다.이런 마음 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어떤 상처든 전문적인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더구나 두피는 상처가 아물어도 머리털이 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더욱 신경써서 치료받아야 한다. 하지만 발달한 현대의학 덕분에 이러한 작은 걱정거리까지 말끔히 해결해 줄 수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장충현 강북삼성병원 성형외과 교수
  • 이대 국제학술회의서 주제발표한 佛석학 장 보드리야르

    지난 25일 내한한 프랑스의 석학 장 보드리야르(73)는 28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미디어­시티 서울 2002’국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미지의 폭력’이란 발제문을 통해 현대의 문화현상을 진단했다.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와 문화에 대한 독창적이고 극단적인 분석을 시도해 온 사상가.이미지의 폭력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그의 논지는 여러 갈래로 뒤얽혀 난삽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다음은 주제발표 내용 요지다. 오늘날 모든 것은 이미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현실은 과다한 이미지 아래 실종됐다.그런데 우리는 이미지 자체도 현실의 영향으로 사라진다는 점을 잊고 있다.이미지는 대부분 그 독창성,이미지로서의 고유한 존재를 빼앗긴 채 수치스럽게도 현실과 결탁한다. 비잔티움의 우상파괴론자들은 그 의미를 지우기 위해 이미지를 파괴하려 했다.오늘날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우리가 우상파괴론자가 됐다.의미를 퍼부으면서 이미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의미로 이미지를 죽인다.보르헤스의 우화 ‘거울의 군중’에서는 각각의 닮음과 재현 이면에 정복된 적,쓰러진 기발함,죽은 대상이 있음을 읽을 수 있다.우상파괴론자들은 우상이 신을 실종시킨다는 것을 예감했다.오늘날에는 신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지 뒤로 사라진다.누가 우리 이미지를 훔칠 위험,비밀을 강요할 위험은 더 이상 없다.여기에 바로 우리의 궁극적인 도덕성이자 외설성의 사인(死因)이 있다. 요즘 대부분의 미디어나 사진 이미지는 인간조건,즉 인간이 놓인 상황의 재난이나 폭력만을 반영한다.이 재난이나 폭력은 그 이미지에 의미가 부가되면 될수록 감동이 줄어든다.이미지는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이미지 고유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재난과 폭력은 이미지를 통해 상업적으로 되풀이되는 주제다.패션과 사교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의 스펙터클’이다. 이미지에 가해지는 폭력 즉 이미지 왜곡은 바로 합성 이미지의 폭력과,영상이 드러내는 모든 최신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폭력으로 귀결된다.이미지의 상상력은 여기서 끝났다.이미지가 갖는 근본적인 ‘환상’이 끝난 것이다.합성과정에서 지시대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보와 가상성의 폭력인 이미지의 폭력은 실재를 사라지게 만든다.모든 것은 가시적이어야 한다.이미지는 특히 이 가시성의 장(場)이어야 한다.그러나 대부분 실재가 사라지는 대가를 치른다.뭔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미지의 매력이지만,이것은 또한 이미지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심지어 상상하기도 끔찍한 폭력적인 현실을 드러내면서 실재적인 본질은 사라지게 만든다.그것은 마치 오르페가 유리디케를 보려고 돌아섰을 때,그녀는 사라져 지옥으로 다시 떨어지는 ‘유리디케의 신화’와도 같다.그렇게 이미지가 오고감으로써 현실 세계에는 거대한 무관심이 형성된다. 이미지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된다.사람들은 그 자신이 가혹하게 이미지로 변신한다.순간마다 읽히는 존재가 된다.정보의 조명에 과다하게 노출된 탓이다.미셸 푸코가 말한 대로 궁극적인 자아의 표현인 고백을 강요받는다.이미지를 만드는 것 그것은 자신의 일상생활,불행과 욕망,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말하고 또 말하는 것,지치지않고 알리는 것이야말로 이미지의 가장 강한 폭력이다. 김종면기자 jmkim@
  • 책/ 시간의 발견 - 인간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시간’이라는 말은 지극히 일상적인 용어이지만 동시에 깊이 파고들면 한없이 추상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이다.일상성과 추상성을 아울러 지닌 만큼 그것은 흥미로우면서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시간’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의 한 단위를 뜻하지만 예컨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에서는 인간의 내면적인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간의 발견’은 역사적·과학적·심리적·철학적 시간 등으로 나눠 시간의 본질에 접근한다.인류가 시간 측정의 단위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분류하고 비교하고 생각할 줄 알게 된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또한 인류가 시간을 지배함으로써,다시 말해 동시적인 삶을 실현함으로써 거꾸로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아이러니도 보여준다. 인간의 몸은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데서 생기는 빛과 어둠의 주기에 리듬을 맞추는 복잡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이 ‘하루시계(circadian clock)’는 초기의 인류,즉 선사시대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해 시간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선사시대 사람의 시간관념은 어땠을까.선사시대 문화에는 당시 사람들의 시간관을 말해줄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대 이집트에서처럼 해가 뜨는 것을 하루의 시작으로 삼았을까,아니면 오늘날 유대력이나 이슬람력처럼 일몰을 하루의 시작으로 잡았을까. 자연세계의 주기는 날과 달과 해라고 하는 시간단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그러나 그밖에 다른 시간단위는 전적으로 인간의 발명물이다.예를 들어 밤을 12시간으로 나누고 같은 방식으로 낮도 그렇게 구분한 이집트의 관습은 문화적 환경에 따른 것으로,매일 밤 뜨는 별들을 순서대로 12개나 36개의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한시간을 60분으로 나눈 것은 전혀 다른 제도,즉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한 60진법의 유산이다. 한편 14세기 기계식 시계가 출현하면서 하루를 측정하는 방식은 24시간으로 고정됐다.이처럼 시간을 균등화한 것은 기계식 시계가 해시계보다 정밀하기 때문이 아니다.그 진정한 원인은 상업 발달에 있었다.1330년대부터 산업계는 노동자들을 시간(60분)단위로 고용하기 시작했고 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루도 세웠다.휴대용 시계가 보급됐고 일상생활은 점점 더 동시성의 세계로 접어들었다.한 예로 영국 우편마차의 호위병들은 1780년대 각각 시계를 지급받아 마차를 일정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순환적 혹은 주기적 시간개념이 선형(線形)시간 개념에 밀려난 것은 역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적 시간개념은 선형이다.천지창조에서 시작해 그리스도를 거쳐 재림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화살’로 볼 수 있다.17세기 이론가들과 뉴턴도 이같은 선형 구도를 따랐다.천체와 사물의 운동을 설명한 뉴턴의 운동법칙은 돌이킬 수 없는 일방향성(一方向性)시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니치 평균시(GMT)는 어떻게 탄생했을까.미국과 캐나다의 철도회사들은 대륙을 횡단하면서 곧 시간대를 식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이를 계기로 전세계 산업국가들은 1884년 워싱턴에서 본초자오선 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그 결과 GMT는 세계 표준시로 확정됐고 지구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여러 시간대로 나뉘었다. 이 책은 오랜 시간의 궤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로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꼽는다.실제로 그랜드캐니언 만큼 시간의 심연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협곡의 가장자리에 서서 1500m 아래 콜로라도강을 내려다 보면 마치 시간의 통행로에서 스냅사진을 찍는 듯한 기분에 빠진다.바닥에 있는 선캄브리아기의 바위들은 20억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뎌왔다.그랜드캐니언이야말로 먼시간(deep time),즉 지질학적 시간의 보물창고다.1만8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2003년 예산안/ 국민 부담 얼마나 느나 - 균형예산 기댈곳 세금뿐

    정부가 내년도 예산을 ‘초절약형’으로 짜면서 국민부담이 크게 늘게 됐다.1인당 연간 세부담액이 처음으로 300만원을 넘어섰다. 국민복지·사회간접자본 확충 등에 소요되는 정부지출은 고작 2% 정도 늘린 반면 세입예산은 10%나 늘려 잡은 때문이다. ◇세수 증가율 지출의 5배-정부지출은 올해보다 1.9%밖에 늘지 않지만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돈은 9.9%가 증가한다.특히 세입증가율은 정부가 내년도 예산책정의 전제지표로 삼은 경상성장률 8.5%에 비해서도 상당히 높은 것이다.균형재정 달성 등을 위한 고육책이라고는 하지만 지출에 비해 수입을 너무 높여잡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이에 대해 최경수(崔庚洙) 재정경제부 세제실장은 “개인이 아닌 법인부담 세금이 많은 데다 근로소득자의 45%가 세금을 안 내고 있어 1인당 부담은 그렇게 높지 않다.”면서 “특히 내년도 우리나라 조세부담률 22.6%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25번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세금 외에는 돈 나올 곳 별로 없어-세입 증가율이 커진 것은 내년에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세금 외에는 달리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대형 공기업들의 해외매각이 올해 대부분 마무리되면서 매각대금 수입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데다 적자보전국채도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세외수입은 올해 15조 8000억원(추경예산 포함)보다 46.2% 줄어든 8조 500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단순비교로도 올해에 비해 7조 3000억원의 추가세수가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반면 증가세에 있는 사회간접자본(SOC)과 교육·복지 등 수요 외에 내년부터 2조원의 공적자금 상환재원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 등 세출상의 압박은 크게 높아졌다. 정부가 공언해온 균형재정 달성도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한 주된 요인이다. ◇세수 10조여원 증가-내년도 국세수입은 올해 103조 5197억원에서 113조 7974억원으로 10조 3000억여원(9.9%) 늘어난다.▲일반회계(내국세 교통세 관세 등) 10% ▲특별회계(주세 교통세 교육세 농어촌특별세 등) 9.3% 각각 증가한다. 정부는 견조한 소비증가와 수입증대로 부가가치세가 3조 4000억원,기업실적 호조로 법인세 2조 7000억원,유류출고량 증가 및 에너지세제 개편으로 교통세가 7000억원 각각 늘어날 것으로 봤다. 김태균기자 wind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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